춘분이 지나면서 해는 조금씩 길어지고 있습니다. 아침 운동을 마치고 산을 다 내려올 때까지도 캄캄한 어둠이 채 사라지지 않았던 지난달 초의 시간이 꽤나 멀게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새벽 기온은 여전히 차고 냉랭합니다. 지난주 토요일, 주말 외출을 나오는 아들을 차에 태워 집으로 향하던 길 갑작스레 내리는 눈발에 잠시 아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펑펑 내리는 눈과 휘몰아치는 바람에 시야가 어두워졌던 것도 잠시, 터널을 지나자 사납던 눈발은 간 데 없고 운동회 뒤끝에 날리던 색종이 꽃가루처럼 힘없는 눈이 이따금 흩날릴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곤두박질쳤던 기온은 금세 회복되어 한낮에는 봄기운이 완연합니다.


이맘때의 산은 한 폭의 점묘화와 같습니다. 채 형체를 갖추지 못한 어린 새순이 마치 가는 붓으로 찍은 연녹색 점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형태가 선명한 가지 주위로 어른어른 녹색의 점들이 모여 묘한 풍경을 자아냅니다. 무수히 흩뿌려진 연녹색의 점들 사이로 청설모의 분주한 몸놀림이 새벽을 열고, 음색이 고운 새들의 노랫소리가 흥을 돋웁니다. 등산로 입구에 만개한 개나리에 이어 계곡의 진달래도 새초롬히 피어나고 있습니다. 계절은 그렇게 조금씩 제 모습을 찾아가는 듯합니다.


2025년 4월 4일 11시. 내란수괴 윤석열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탄핵 선고 기일이 잡혔습니다. 지난한 날들이었습니다. 이 험난한 과정에서 우리가 배운 것은 우리의 일상 저변에는 민주주의 제도가 단단하게 뿌리내리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우리 스스로도 미처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말입니다. 1987년 이전의 권위적인 군부독재 체제로 회귀한다는 건, 그와 같은 체제하에서 살아간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시나브로 우리는 그동안 우리가 꿈꾸고 그려왔던 이상적인 제도를 향해 나아갈 뿐 오던 길을 되돌려 전체주의 망령이 우글대는 그 시절로 되돌아갈 생각은 꿈에도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12.3 내란을 통해 명징하게 깨달았던 것입니다.


갑작스러운 눈 소식에도 봄은 오듯이 민주주의에 익숙한 우리의 일상은 어느 미친 자의 계엄령에도 결코 파괴되지 않을 것입니다. 서로의 생각이 달라도 일상에 깃든 민주주의는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자신이 지켜왔던 일상을 소중히 유지하고자 할 뿐입니다. 새봄에 점점이 찍힌 연녹색 물결처럼 우리의 작은 소망들이 대한민국의 산하를 빼곡히 채우고 있습니다. 어제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오늘을 맞고 싶을 뿐이고, 오늘과 크게 다르지 않은 내일을 살아가고자 할 뿐입니다. 그 작은 소망을 파괴할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는 것입니다. 끊이지 않는 시간의 연속선상에 나의 일상을 가벼이 얹고 싶을 뿐입니다. 우리의 삶은 그런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저 가벼이 흐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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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뜩이나 혼란한 시국에 미세먼지까지 덮쳐서 대한민국은 온통 잿빛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야를 가리는 것은 비단 미세먼지의 탓만은 아닙니다. 내란 수괴에 대한 헌법제판소의 선고가 늦어지면서 극우 유튜버가 생산하는 온갖 억측과 음모로 인해 대한민국의 미래는 그야말로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암흑 천지로 변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때일수록 무너지는 공권력을 확실히 되살려야만 자칫 허물어질 수 있는 민주주의 체제를 공고히 할 수 있는데, 검찰과 법원은 물론 일선에 있는 경찰마저 극우 난동자의 편에 서서 방관하고 방치하는 탓에 대한민국의 미래는 암울하다 못해 처참한 지경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점심을 먹기 위해 직장 동료들과 함께 사무실 근처의 식당에 들렀을 때도 작은 충돌이 있었습니다. 주문한 식사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며 잠시 한담을 나누고 있는데, 누군가의 입에서 최근 전국 곳곳에서 발생한 산불 때문에 걱정이라는 말이 흘러나왔고, 다들 이 말에 수긍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대뜸 이를 듣고 있던 한 직원이 이 모든 게 중국 유학생의 소행이라는 둥 윤석열을 지지하는 곳에서만 이렇듯 큰 불이 발생한 데에는 어떤 음모가 있을 것이라는 둥 하면서 말도 되지 않는 억측을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야당에서 고용한 누군가에 의해 윤석열 지지세가 높은 지역에 산불을 일으킴으로써 그들이 천벌을 받았다는 소문을 퍼뜨리려고 계획했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야당에 의한 자작극이란 셈이지요. 하도 어이가 없고 기가 차서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법원 폭동을 일으킨 것도, 심지어 12.3 내란을 일으킨 것도 모두 야당의 음모라고 주장하면 되겠네? 야당을 지지하는 법원 직원들이 극우 유튜버인 체 가장하여 법원에 난입했고, 윤석열을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하기 위해 윤석열과 비슷하게 생긴 인물을 텔레비전 화면에 등장시켜 계엄령을 선포하게 했다고 하면 되지 않겠어? 왜 그런 음모론은 주장하지 않는 거야?" 했더니 그제야 입을 다물었습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행태는 사실 극우 유튜버와 국힘 의원들에 의해 비롯되었지만, 그 시발점이 되었던 야당 국회의원들을 향해 던진 극우 난동 세력의 날계란 투척 행위나 야당 여성 의원을 향한 폭력 행위 모두 자작극이라고 했던 것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망언이었습니다.


극단적인 분열을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지금보다 헌재 선고 이후를 더 걱정하고 있습니다. 만일 탄핵이 기각된다면 자신의 무죄와 영구 집권을 꾀하는 윤석열 세력과 이를 저지하려는 대다수 국민들 간의 내전은 피할 수 없을 것이며, 인용이 되더라도 이에 불복하려는 극우 세력의 난동은 한동안 이어질 것입니다. 이래저래 대한민국의 미래는 암울하기만 합니다. 이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헌재의 만장일치 탄핵 인용과 일선에 있는 경찰의 엄정한 법집행 밖에 없습니다. 이 사실은 누구나 다 알고 있을 듯합니다. 단지 감정적으로 수용하지 못할 뿐입니다.


오늘도 414명의 작가들이 헌법재판소를 향해 윤석열의 파면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한강 작가는 "훼손되지 말아야 할 생명, 자유, 평화의 가치를 믿는다. 파면은 보편적 가치를 지키는 일"이라고 했으며, 아들이 좋아하는 김초엽 작가는 "제발 빠른 파면을 촉구합니다. 진심 스트레스받아서 이 한 줄도 못 쓰겠어요. 빨리 파면 좀!"라고 했으며, 장류진 작가는 "윤석열 대통령의 파면을 촉구합니다."라고 담담히 말했습니다. "내란 수괴 처단하고 평등사회 건설하자"고 했던 정보라 작가, "친구들 중에서 당신을 견뎌낼 수 있는 자들 앞에서나 날뛰세요(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중 한 구절)"라고 했던 신형철 문학평론가. 성명을 발표했던 작가들도, 그리고 어쩌면 우리도 억측이나 망언이 아닌 상식의 편에 서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상식이 무너진 사회에서는 나도 당신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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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 이야기에는 언제나 곁다리처럼 소문이 따라붙게 마련이다. 흔하다는 건 대중의 관심으로부터 서서히 멀어지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단순한 사실의 나열에 그쳤던 이야기가 산골 무지렁이조차 다 아는 흔해빠진 이야기로 변하는 순간, 어디선가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한 새로운 모의와 작당이 시작된다. 조미료처럼 약간의 거짓이 가미되고 밋밋하던 이야기는 기승전결의 형식을 갖춘 새로운 이야기로 재탄생한다. 그리고 대중의 관심이 사그라들 때마다 이와 같은 과정은 끝없이 반복된다. 산처럼 부풀려진 이야기는 이제 99%의 거짓과 그 출발조차 파악할 수 없는 1%의 사실로 구성된다. 가난하던 흥부가 제비의 도움을 받아 벼락부자가 되었다는 건 이제 대중이 확신하는 어이없는 사실이 되고 만다. 어떤 이야기가 수 차례, 혹은 수십 차례 부풀려지는 동안 과거의 이야기꾼도 현재의 이야기꾼(극우 유튜버)도 돈과 명예를 얻게 된다. 그리고 거짓에 거짓을 보태던 그들 역시 자신이 했던 과거의 거짓을 마치 사실인 양 믿게 된다. 시나브로 자신이 허언증 환자가 되었음을 인지하지 못하는 이야기꾼과 자신들이 듣고 잇는 이야기가 어느 허언증 환자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알지 못하는 다수의 대중. 광화문 태극기 집회에 모인 사람들을 자주 지나치면서 어느 좀비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렸던 건 이러한 연유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비난하고픈 사람들에게 '부정선거'라는 테마는 조선시대의 가난한 민중들을 유혹했던 '벼락부자'의 꿈만큼이나 솔깃한 주제였는지도 모른다.


돈만 준다면 인당수의 제물이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설화 속 어느 여인과 돈만 준다면 어떠한 거짓과 선동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현대의 극우 유튜버는 무척이나 닮아 있다. 그 이야기를 퍼 나르는 구독자들의 행태도 조선 후기 대중을 사로잡았던 설화나 민담이 퍼져가는 과정과 흡사하다. 어쩌면 흥부 이야기를 들었던 조선시대의 가난한 민초들 역시 그것이 사실인 양 오인하여 처마 밑의 제비집에서 애꿎은 제비를 땅으로 내동댕이친 후 부러진 제비다리를 살뜰히 고쳐주었을지도 모른다. 근거도 없는 어느 유튜버의 확신에 찬 부정선거 의혹을 들었던 한 인간이 까닭도 없이 계엄령을 선포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와 같은 좀비화 과정은 지능의 높고 낮음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횟수의 반복이 진행되었느냐에 따라 그 성패가 갈린다. 광화문 광장에 모인 그 많은 사람들의 지능이 하나같이 다 수준 이하에 머문다고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만 돈과 명예를 추종하는 어느 유튜버의 이야기를 마치 설화나 민담을 듣는 것처럼 수없이 반복하여 들었을 뿐이다.


나는 지금 레프 톨스토이의 단편선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소담출판사)>를 읽고 있다. 이 책을 반복하여 읽고 나면 나도 어쩌면 사람은 본디 탐욕과 이기심이 아닌 사랑과 선의에 따라 살게 된다는 사실을 믿고 확신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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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현실에서 누리고 체감할 수 있는 배타적 권리는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 생각하게 했던 하루였다. 오후에 약속이 있었던 나는 차를 운전하여 약속 장소로 향하고 있었는데, 아랫배가 살살 아프고 뭔가 신호가 오는 느낌이 들어 가까운 관공서(그게 하필 도서관이었다)로 방향을 틀었다. 어렵지 않게 화장실을 찾아 들어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아뿔싸! 이게 웬일? 한 칸짜리 화장실 앞엔 이미 줄을 서서 대기하는 사람이 있는 게 아닌가. 지하 1층 지상 3층의 건물이었기에 나는 서둘러 다른 층으로 가 보았지만 모든 게 허사였다. 다른 층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괜히 계단만 오르락내리락하는 바람에 대기 순번만 밀렸고 나의 인내력은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바닥에 신문지를 펴고서라도 볼 일을 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화장실 안에 있는 사람은 그것이 누구에게도 침해받지 않는 자신의 배타적 권리라는 걸 기다리는 사람에게 공표라도 하려는 듯 몇 차례 노크를 해도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인내력의 한계를 느낀 나는 결국 비어 있는 장애인 화장실로 뛰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렇게 밝아진 표정으로 도서관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배타적 권리는 과거 휴대폰이 없던 시절에 공중전화 부스에서도 심심치 않게 목격되곤 했었다. 뒤에서 애타게 자기 순번을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공중전화박스를 선점한 사람이 한 손에는 동전을 잔뜩 거머쥔 채 느긋하게 통화를 할라치면 저것이 바로 배타적 권리구나, 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모습을 보고 화를 참지 못하는 사람도 더러 있어서, "아, 통화 좀 짧게 합시다." 하면서 전화를 빨리 끊을 것을 종용하거나 험악한 분위기를 풍겨 빨리 나오라고 은근히 협박하는 경우도 드물게 있었지만 말이다.


이런 것과는 다르게 아파트와 같은 공동주택의 화장실이나 베란다에서 공공연히 담배를 피우는 것이 마치 자신의 배타적 권리인 양 생각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 밖에 나가려면 외투를 걸쳐야 하는 겨울철이나 너무 더워서 잠시도 밖에 나가 있을 수 없는 여름철에 그런 현상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담배를 끊은 지 만 11년이 되는 나로서도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담배연기는 참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런 까닭에 나도 몇 번이나 관리사무실에 민원을 넣었었다. 생각해 보면 그것은 배타적 권리가 아니라 타인에 대한 예의나 배려의 문제이다.


자유나 평등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의 권리가 아닌 현실에서 체감하고 누릴 수 있는 배타적 권리는 사실 많지 않다. 그것마저도 완전한 배타적 권리가 아닌 타인에 대한 배려가 동반되어야 하는 소극적 권리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말이다. 공동체의 구성원이 반드시 지켜야 할 법적 테두리를 벗어나 '국민 저항권'이라는 해괴한 주장을 들고 나와 제 멋대로 행동하고 난동을 피우는 사람이 늘어나는 바람에 '자유'라는 말의 가치는 이제 그 어디에서도 찾기 어렵게 되었다. 난동이나 부리고 깽판을 치는 이들이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있는 단어가 결코 아닌데 말이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는 제 할 일은 뒷전이고 밤낮 술이나 처먹는 이가 시도 때도 없이 '자유'를 외치는 바람에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자유'의 가치는 멧돼지의 똥보다 못한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비극의 시작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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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아침을 먹고 느지막이 산에 올랐다. 휴일마다 이렇게 한껏 게으름을 피우는 데는 이유가 있다. 휴일에나 있을 수 있는 여유로움을 한껏 누리고 싶은 것도 한 이유가 되겠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가 따로 있다. 내가 평일에 아침 산행에 나서는 시각은 오전 5시 30분, 해가 길어졌다고는 해도 그 시각에는 여전히 캄캄한 어둠이 내려앉아 있다. 산을 오를 때마다 등산로에 버려진 쓰레기를 줍고는 있지만 어둠 속에서 쓰레기를 줍는 데는 한계가 있다. 작은 비닐이나 등산로 주변의 풀숲에 버려진 쓰레기는 발견하기 어렵다. 하여 가능하다면 휴일에는 느긋하게 산을 오른다. 더구나 겨울은 쓰레기를 줍는 데 최적의 계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산에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들도 일말의 양심이 있는 까닭에 자신이 버린 쓰레기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나무둥치 뒤편이나 움푹 파인 곳에 버리기 일쑤여서 나뭇잎이 무성한 여름에는 이를 찾아내기가 무척이나 어렵다. 반면 나뭇잎이 없는 겨울에는 여름에 비해 등산객도 줄고, 상대적으로 버려지는 쓰레기의 양도 줄어들지만 지난여름에 버려진 쓰레기를 쉽게 찾아내는 까닭에 여름이나 겨울이나 쓰레기를 줍는 양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간밤에 내린 눈이 희끗희끗 잔설이 되어 낙엽을 덮고, 등산로에는 눈석임물이 고여 군데군데 작은 물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회색 패딩을 입고 몇 발자국 앞서서 걷던 어느 할머니의 손에 들린 휴대폰에선 어느 목사의 탄핵 반대 연설이 꾸준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늘은 여전히 잔뜩 흐려 갤 기미가 보이지 않고, 봄을 시샘하는 쌀쌀한 바람이 등산객의 어깨를 더욱 움츠러들게 했다. 등산로 중간쯤에 놓인 어느 벤치엔 부부인 듯 보이는 젊은 연인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동공에 초점을 풀고 멍하니 앉아 있는 모습은 마치 물멍, 불멍도 아닌 낙엽몽을 하고 있는 듯 보였다. 어쩌면 다른 등산객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채 바람 소리나 새소리를 듣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정상에 올라 잠시 쉬고 있는데 60대 후반이나 70대 초반으로 보이는 부부가 내 앞을 스쳐갔다. 퉁퉁한 체형의(그렇다. '뚱뚱한'은 아니고 '퉁퉁한') 부인이 엉덩이를 과도하게 씰룩거리면서 앞서 걷고, 바로 뒤에서 남편이 뒤따르고 있었다. 검은색 누비 외투와 바지를 입고 암적색 비니를 쓴 부인은 이따금 남편을 뒤돌아보며 꽤나 즐거운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지나쳐 빠른 걸음으로 산을 내려왔다.


나는 오늘 아침에도 여전히 어둠을 뚫고 산을 올랐다. 사락사락 싸락눈이 내렸고, 우둠지를 흔드는 바람이 무척이나 스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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