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키, 스틸 영
박병진 지음 / 사계절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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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도 못 마시는 내가 위스키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아마도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때문이지 싶다. 10년도 더 지난 시점에 내가 읽었던 한 권의 책. 그것은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위스키 성지여행>이었다. 술이 좋아서라기보다 작가에 대한 편애 때문이었다. 하루키의 책이라면 주제를 가리지 않고 일단 읽고 보는 습성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위스키 성지여행>이라고 해서 예외가 되지는 않았다. 하루키 저작이라는 이유로 무작정 읽게 되었던 책. 그러나 기대하지도 않았던 책은 예상보다 재미있었고, 위스키 특유의 달큰하고 나른한 향취가 책을 읽는 내내 입안에서 감도는 듯했다. 물론 하루키 특유의 감각적인 문체가 독자들로 하여금 위스키에 대한 강렬한 끌림을 유도했는지도 모른다.


박병진의 <위스키, 스틸 영>을 읽게 된 건 순전히 10여 년 전 과거의 기억에서 출발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위스키의 본고장 스코틀랜드에 대한 하루키의 안내서가 박병진에게까지 이르도록 유도하였던 것은 하나의 우연이 또 다른 우연을 부르는, 이른바 줄리언 반스의 예언처럼 '우연은 비켜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제대로 입증한 셈이다. 박병진이라는 작가에 대해서도, 나와는 거리가 먼 위스키라는 술에 대해서도 나는 우연처럼 거리를 좁히고 있다.


"이 책은 시중에 많이 나와 있는 위스키 전문 정보나 위스키 로드를 안내하는 책이 아니다. 이 책 어디에도 위스키의 제조 방법이나 시음하는 방법, 그리고 위스키의 연도별 특징 같은 내용은 없다. 다만 위스키를 중심으로 한 역사와 정치, 인문과 지리, 최소한의 문화적 배경에 관한 내용을 담았을 뿐이다. 다만 위스키를 중심으로 한 역사와 정치, 인문과 지리, 최소한의 문화적 배경에 관한 내용을 담았을 뿐이다. 독자들이 부담 없이 위스키에 접근하게끔 되도록 재미있는 이야기를 곁들여 꾸몄다. 위스키 마니아가 아니라도, 술을 마시지 않더라도, 21세기를 살아가는 코즈모폴리턴으로서 왜 세계인이 위스키에 열광하는지, 위스키가 역사의 면면에 어떤 자취를 남겼는지, 그 숱한 이야기에 한번쯤 귀 기울여보기를 바란다."  (p.5~p.6 '프롤로그' 중에서)


책의 내용이나 구성도 넓고 다채롭다. 1부 '아일라 위스키', 2부 '스페이사이드 위스키', 3부 '블렌디드 위스키', 4부 '일본 위스키', 5부 '미국 위스키'로 구성된 이 책은 술을 좋아하지 않는 나와 같은 독자라 할지라도 단순히 술 자체로서 목적이 아닌, 위스키를 둘러싼 문화적 배경에 관심을 갖는다면 얼마든지 접근 가능한 기호 서적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술자리에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멀뚱히 앉아 있을 게 아니라 위스키를 중심으로 한 역사, 정치, 인문, 지리에 대한 문화적 배경을 동석한 사람들에게 안주 삼아 맛깔나게 풀어낼 수만 있다면 술자리에서 비록 무알콜 음료를 앞에 놓을지라도 언제든 참석을 권유받는 귀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지 않겠는가.


"술병에 적힌 음주 경고 문구는 우리나라와 미국과 영국이 서로 다르다. 여기서도 우리와 그들, 영국과 미국 간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우리나라는 몇 가지 버전이 있지만, '지나친 음주는 간경화나 간암을 일으키며 운전이나 작업 중 사고 발생률을 높입니다'처럼 의료 처방전 같은 느낌이다. 영국은 조금 우아하게 'Drink Responsibly(책임질 수 있을 만큼 마셔라)'인데 비해 미국은 직설적으로 'Know Your Limits(네 주량껏 마셔라)'이다. 우리의 문어체적 음주 경고보다는 좀 더 직접적으로 다가온다."  (p.262~p.263)


<무라카미 하루키의 위스키 성지여행>은 2020년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고 한다면>이라는 제목을 달고 재출간되었다.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면, 이처럼 고생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잠자코 술잔을 내밀고 당신은 그걸 받아서 조용히 목 안으로 흘려 넣기만 하면 된다. 너무도 심플하고, 너무도 친밀하고 너무도 정확하다.'고 썼던 에세이 속 한 문장이 제목으로 변한 것이다. 내가 굳이 하루키의 책을 들먹이는 이유는 세계 각 지역의 위스키가 문화적 배경도 다르고, 그 맛도 제각각인 것처럼 무라카미 하루키와 박병진이 쓴 위스키 탐방기 역시 그 색깔과 맛이 확연히 구별된다는 것이다.


"독특한 광고를 통해 우리 세대에 친숙한 양주 캡틴큐는 럼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럼 원액은 20퍼센트 미만이 들어갔을 뿐이다. 그나마 최근에 나온 제품은 아예 럼 원액이 한 방울도 들어 있지 않다. 캡틴큐는 그 독특한 광고에서 럼의 중요한 소비자가 해적이었음을 잘 보여주었다."  (p.125)


한때 양주의 대명사였던 시바스 리갈은 권력자들의 전유물인 양 소비되던 시대가 있었다. 박정희로 대변되던 군사정권 시절, 자신의 부하들에게 충성을 강요하고 노고를 치하하는 의미로 이따금 벌인 술판에는 단골 메뉴처럼 등장했던 게 시바스 리갈과 여성 접대부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일반인들이 향유하지 못하는 술을 권력자로부터 하사 받는 기분, 술과 더불어 성적 욕망을 충족하는 동물적인 배설 행위 등은 독재 권력을 유지하는 주요한 수단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여 위스키는 이제 대중적인 술로 변화하고 있다. 군사 독재 시대가 민주화 시대로 바뀐 것처럼 말이다. 진정한 민주화는 경제 민주화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내가 혹은 당신이 거리낌 없이 위스키를 마실 수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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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뺌을 하는 방법은 다양하겠지만, 그 기저에는 언제나 두려움이라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자신의 잘못이나 타인에 의한 누명이 초래할 결과와 처벌에 대한 두려움은 감히 시비곡절을 따질 엄두가 나지 않게 하고 일단 발뺌부터 앞세우는 그릇된 행동을 선택하도록 한다. 더구나 간이 콩알만 한 사람들은 큰일도 아니면서 일단 발뺌부터 하는 습관이 어린 시절부터 자리 잡게 된다. 그러므로 남에게 책임을 미루면서 발뺌하는 데에만 급급하는 버릇은 당사자뿐만 아니라 가정교육을 담당했던 부모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이다. 자식을 엄하게 키운다는 명목으로 자칫 체벌이 잦은 경우 아이를 발뺌만 하는 용렬스럽고 비겁한 사람으로 성장하게 하는 누를 범할 수 있는 것이다.


계엄령 선포와 대통령 탄핵 사태를 겪으면서 대한민국 국민 모두는 거짓말과 발뺌으로 일관하는 자들의 전형을 대통령으로부터 보고 있다. '저런 자를 우리가 대통령으로 뽑았단 말이야?' 하는 자괴감이 치욕을 넘어 부끄러움으로 치닫게 하는 상황이 시도 때도 없이 벌어지고 있다. 입만 열면 거짓말이고 자신이 했던 말은 지켜지는 게 하나도 없다. 시쳇말로 '구라'이거나 허언일 뿐이다.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는 쉽게 길러지는 게 아니다. 가정교육을 담당하는 부모의 사랑과 헌신적인 노력이 없다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오직 참과 선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대개 일단 발뺌부터 하고 처벌에서 제외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게 된다. 거짓을 고하여서라도 처벌을 피하고자 하는 욕망은 우리를 항상 시험에 들게 한다.


자신의 비겁함을 잘 알고 있었던 대통령은 남들도 다 그렇겠거니 여겨 노상원으로 하여금 케이블 타이와 망치, 야구 방망이 등과 더불어 절단기까지 구입하도록 지시하였던 게 아닐까.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인사들을 체포하여 고문과 협박을 하면 자신이 원하는 어떤 조작이나 거짓 진술도 다 받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는 법, 세상에는 대통령처럼 비겁하고 용렬한 자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모르는 듯하다. 역사가 느리지만 한 발짝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이유는 고문과 협박에도 전혀 굴하지 않는 용기 있는 자들이 존재해 왔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그는 그의 부모로부터 배우지 못한 듯하다.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던 안중근 의사의 용기는,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그 피로 태극기에 '대한독립'이라는 글자를 썼던 단지동맹 동지들의 의지는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와 같은 이의 숭고한 사랑 덕분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체포되었을 때,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망치 아니하노니... 내세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다시 세상에 나오라."는 말로 아들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전했던 조 마리아 여사. 대통령은 내세에 다시 태어난다고 할지라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자신의 잘못을 감추고 어떻게든 자신이 쥔 권력을 조금이라도 더 연장하기 위해 지지자들을 향해 도움을 요청하는 모습은 비열하다 못해 가엾기까지 하다. 그러나 부끄러움은 오직 국민의 몫으로 남을 뿐이다. 그런 찌질한 자를 대통령으로 모시고 있으니... 지금 이 시각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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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닐 손수건과 속살 노란 멜론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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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작가가 쓴 소설인 줄 알았다. 혹시 번역가가 바뀌었나 해서 신경도 쓰지 않았던 번역가의 이름을 다시 한번 확인하기도 했다. 그러나 달라진 건 없었다. 작가의 이름은 에쿠니 가오리, 번역가는 김난주.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번역을 맡았던 사람은 주로 김난주 또는 신유희 번역가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달라졌다고 느낀 나의 감상은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것일까. 내가 알던 에쿠니 가오리는 간결한 문체와 절제된 감성, 그리고 인간의 욕망에 대한 거침없으면서도 적나라한 묘사, 각이 잡힌 구성 등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런데 작가의 최신작 <셔닐 손수건과 속살 노란 멜론>은 문체에서부터 구성에 이르기까지 내가 알던 에쿠니 가오리가 아니었다. 문체는 부드럽고 조곤조곤 길어졌으며, 독자들을 감싸는 듯한 다정함이 깃들어 있었다.


"세이케 리에는 다미코의 대학 시절 친구다. 외국 금융회사에서 일하느라 영국에서 오래 생활했다. 한 달 전, 일을 그만두고 귀국할 텐데 살 곳이 정해질 때까지 당분간 너희 집에서 지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연락이 와서, 다미코는 괜찮다고 대답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친구들 집에는 남편과 아이가 있지만, 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다미코는 그 어느 쪽도 없다."  (p.8)


소설은 친하게 지냈던 대학 동창 중 한 명인 리에가 오랜 해외생활을 마치고 귀국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서로 다른 인생을 살아온 세 사람의 대학 동창인 다미코와 리에, 그리고 사키는 현재 그들이 처한 상황도 크게 다르다. 한때 결혼을 했었으나 이혼을 하고 다시 혼자가 된 리에, 평범한 가정을 꿈꾸었으나 50대 후반이 된 지금도 작가로서 어머니 가오루와 함께 살고 있는 다미코, 아들 둘을 낳은 주부로서 무심한 남편과의 기계적인 일상을 반복하면서 치매를 앓는 시어머니를 문병하기 위해 요양원을 드나드는 사키는 이른 나이에 결혼하겠다는 큰아들과의 갈등 상황에 고민하고 있다.


"아마도 가온이 제안했을 것이다. 얼마 전에 만나고서 알았는데, 가이는 벌써 가온에게 꽉 잡혀 있었다. 아들이 완전히 독립하는 셈이니까 어머니가 무척 허전할 거다, 그러니 그 빈자리를 메울 것이 필요하다는 둥 하고. 어이가 없다. 이 집에는 손이 많이 가는 남자가 둘이나 있고, 보살펴야 하고 보살핀 만큼 풍요롭게 답해 주는 마당도 있다. 그런데다 시설에 있기는 하지만, 늙은 시어머니도 보살펴야 한다. 그런데 뭐가 부족하다는 것인지. 요는 둘이서 사키의 마음을 다른 데로 돌리려는 속셈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화가 났다. 분개하는 생각을 넘어 피가 거꾸로 치솟을 것 같은데, 그건 사키의 방식이 아니다."  (p.217~p.218)


대학 시절 '쓰리 걸스'로 불리며 친하게 지냈던 리에와 다미코, 그리고 사키는 리에의 귀국과 함께 완전체가 되었지만, 그들 앞에 놓인 현실과 각각 떨어져서 살았던 독립된 삶의 관성이 시간을 거슬러 과거 그들의 대학 시절로 향하는 추억 여행에 장애물로 작용한다. 소설은 그렇게 과거 절친했던 세 사람의 삶을 조망하면서 얽히고설킨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풀어나간다. 우리의 삶은 이렇듯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성격의 사람들이 우연이라는 선물을 통해 관계를 맺고, 약속이나 한 듯 흩어지기도 하면서 어울렁더울렁 살아가게 마련이다. 작가는 그런 모습들을 가감 없이 포착하여 우리들 앞에 자연스레 펼쳐 보인다.


"리에가 이사한 지 일주일이 되었다. 다미코는 솔직히 침실을 되찾아 좋았고, 그보다 복도에 쌓인 대량의 짐이 없어지면 개운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정작 리에가 없어지고 나니, 예상보다 훨씬 허전했다. 실제로 그 비 내리는 오후, 짐은 많았지만 이사는 순식간에 끝났다. 업자 두 명의 힘이 얼마나 세던지, 작업은 또 얼마나 효율적이고 신속하던지 가오루와 다미코는 그저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트럭을 선도하듯 차를 몰고 후다닥 사라진 리에의 모습이 떠오를 때마다 다미코는 상실감을 느낀다."  (p.348~p.349)


남자들은 나이가 들수록 도시를 떠나 자연에 파묻히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자기만의 동굴에 들어가고 싶은 까닭이다. 말하자면 텔레비전 속 자연인의 삶이 낭만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에 익숙하지 않은 도시내기들에게 자연에서의 생활은 단 한 달도 버티기 힘든 게 사실이다. 시끌벅적한 도시의 삶은 복잡한 관계로 인해 때론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지만, 그 관계를 모두 지우고 나면 차오르는 상실감과 고독을 우리는 감당하기 힘들다. 어쩌면 작가는 어쩔 수 없이 맺게 되는 복잡다단한 관계에 대해 말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인생은 그렇게 의미도 없이 흘러가는 것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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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새해가 밝았다. 2024년은 그야말로 다사다난한 한 해였다. 그러나 해결하지 못한 삶의 과제가 언제나 그렇듯 앞으로 나아가려는 우리의 발목을 잡는다. 새해가 되었건만 여전히 2024년의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듯한 느낌. 그런 느낌은 비단 나에게 국한된 것만은 아니었던지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가 마냥 어색하거나 쑥스러워서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웅얼웅얼 속으로만 삼키고 만다. 새해라면 늘 덕담처럼 주고받던 말이었는데...


계엄령과 탄핵 국면에 이어 항공기 사고에 이르기까지... 그럼에도 어느 것 하나 해결될 기미는 보이지 않고 점점 수렁 속으로 빠져드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하는 것은, 그 시발점을 거슬러 올라가면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윤석열을 선택한 것일 테지만 당사자인 그는 지금껏 인간 이하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게 아닌가. 뜬금없는 비상계엄 선포를 통해 전 국민을 공포에 떨게 하더니 이제는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대통령 관저에 숨어 나오지도 않는, 이른바 '뻗치기'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사법 시스템과 헌법을 무시한 채 마치 고려 중기의 무신정권 시기처럼 경호처 직원들과 군인을 자신의 사병인 양 부리며 알량한 권세를 누리고 있으니 분통이 터질 노릇이다.


평소에도 젊은 사람들과의 대화를 즐기는 나는 인턴사원의 면접이 있을라치면 이따금 자청하여 들어가기도 하는데 어제도 그랬었다. 20대의 푸릇푸릇한 청춘들. 그들과 나란히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편하게(?) 나눌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어 나로서는 더없이 즐겁고 설레는데 그들은 자리가 자리인 만큼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이런 자리에서는 정치적 사안에 대한 질문은 가급적 하지 않는 게 원칙이었지만 뉴스에서는 속보를 통해 내란 수괴 혐의자 윤석열에 대한 공수처의 체포영장 집행 상황을 실시간으로 내보내고 있었으므로 이 상황에 대한 그들의 생각이 너무나 궁금해서 슬쩍 물었었다. 전 세계의 젊은이들이 하루가 다르게 우경화되고 있다는 걸 나 역시 모르는 바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의 대답 역시 그와 비슷한 대답이 나올 것으로 예상했는데 현실은 많이 달랐다. 그중 한 친구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저는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을 지지했고, 그가 말한 '공정과 상식'을 임기 동안 잘 지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예상은 대통령의 임기 내내 단 한 번도 지켜진 적 없었고, 생각지도 못한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모습까지 목격하면서 제 판단이 무척이나 잘못된 것이었음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더구나 대통령의 잘못을 연일 감싸고도는 여당의 모습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누리는 평범한 일상이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공부하고 참여하는 주권자의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우리의 일상은 언제든 파괴될 수 있다는 걸 주변 친구들에게도 말하고 싶어요."


당당하고 떳떳하게 조사받겠다던 윤석열 본인의 말은 허언이 되고 말았다. 물론 그가 했던 거짓말이 어디 이 번뿐일까마는 대통령 관저에 꽁꽁 숨어서 나타나지 않는 것은 비겁하고 찌질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그런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았던 젊은 친구들의 자조 섞인 후회가 하루를 잠식했던 그런 날이었다. 희망은 멀고 일상은 답답한 그런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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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 인간심리 속 문장의 기억 Shakespeare, Memory of Sentences (양장) - 한 권으로 보는 셰익스피어 심리학 Memory of Sentences Series 3
윌리엄 셰익스피어 원작, 박예진 편역 / 센텐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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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추울수록 몸속 세포 하나하나의 감각이 되살아난다. 말하자면 추위는 세포 감각을 일깨우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글의 느낌을 되살리는 건 무엇일까?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그것은 바로 슬픔이다. 슬픔은, 전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문장 하나하나의, 낱글자 하나하나의 의미를 생생하게 되살린다. 그럴 때의 슬픔은 비가 내려서 혹은 낙엽이 져서 일시적으로 느끼는 낭만적인 슬픔이 아니라 깊은 고통 속에서 맛보는 처연한 슬픔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삶에서 깊은 슬픔을 체험한 작가의 글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넓은 공감력을 갖게 된다.


고전문학 번역가이자 작가이며 북 큐레이터로도 활동하고 있는 박예진 작가의 신작 <셰익스피어, 인간심리 속 문장의 기억>을 읽는 내내 나는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에 대해 생각했다. 16세기말에서 17세기초를 살았던 그에 대해 기록으로 남겨진 단편적인 사실 외에 작가의 삶에 대한 전모를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의 글 속에는 언제나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깊은 슬픔으로부터 건져 올린 보편적 깨달음의 경구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다만 슬픔이 슬픔으로만 존재하지 않고 깨달음을 통한 작은 기쁨으로 재탄생하는 감정의 탈피를 경험하도록 한다.


"sentence 114

I have done penance for contemning Love, whose high imperious thoughts punish'd me with bitter fasts, with penitential groans, with nightly tears, and daily heart-sore sighs; for in revenge of my contempt for love, love hath chased sleep from my enthralled eyes and made them watchers of my own heart's sorrow.

나는 사랑을 경시한 것을 속죄하네. 사랑의 높은 오만한 생각들이 나를 비통한 금식, 참회하는 신음, 밤마다 흐르는 눈물, 매일의 마음 아픈 한숨으로 벌하였네. 사랑은 내 흘린 눈에서 혼돈의 잠을 빼앗아가고, 내 마음의 슬픔을 지켜보게 만들었네."  (p.92~p.93)


우리는 간혹 위대한 고전문학의 힘을 간과하거나 그 필요성을 잊곤 한다. 그러나 깊은 슬픔에서 비롯된 글과 문학은 시대를 불문하고 살아남게 마련이다. 인간의 보편적인 감성은 시대에 상관없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먼 나라 영국에서 수백 년 전에 쓰인 셰익스피어의 문장이 시대와 장소를 건너뛰어 21세기 대한민국의 독자를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엮은 박예진 작가는 오늘날까지도 사랑받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엄선하여 간략한 스토리와 함께 작품 속 명문장에 대한 해석을 덧붙이고 있다.


"sentence 218

I am very proud, revengeful, ambitious, with more offences at my beck than I have thoughts to put the in, imagination to give them shape, or time to act them in. What should such fellows as I do crawling between earth and heaven? We are arrant knaves, all. Believe none of us.

나는 매우 교만하고, 복수심에 차 있고, 야망이 가득하며,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죄를 마음에 품고 있소. 그 죄를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상상력도, 그것을 실행할 시간도 없소. 나 같은 자들이 땅과 하늘 사이에서 기어다니며 무엇을 해야겠소? 우리는 모두 철저한 악당이오. 누구도 믿지 마시오."  (p.10~p.161)


오전에 인근 공원을 가볍게 산책했다. 아침 특유의 날카롭고 쨍한 냉기가 온몸의 세포를 살아나게 하는 듯했다. 반려견과 함께 산책을 나온 사람들, 여러 운동 기구에 매달려 가볍게 몸을 푸는 사람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빠르게 걷는 사람 등 제각각 목적하는 바와 행동은 달랐지만 이 추운 겨울 아침에 공원에 나와 온몸의 세포 감각을 일깨웠던 기억은 오래도록 비슷한 장면으로 남지 않을까. 그리고 박예진 작가의 책 <셰익스피어, 인간심리 속 문장의 기억>을 읽는 독자들 역시 그 추구하는 바도 다르고 읽는 장소도 다를 테지만 셰익스피어가 느꼈던 인간 존재의 슬픔과 삶의 여정에서 겪는 온갖 감정에 대한 물음표를 각자의 가슴 속에 오래도록 간직하지 않을까. 2024년의 마지막 주말 아침, 그 냉랭한 한기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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