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적대던 여름 햇살이 조금씩 한산해지고 있습니다. 어슬렁거리며 거리를 배회하는 여름 햇살의 뒷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면서 나는 삶의 신산스러운 고비마다 비슷한 넋두리를 되풀이하던 어머니를 떠올렸습니다. "견디기 힘든 여름이었어요."라고 지금 내가 말한다면 어머니는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요. 생전의 모습처럼 담담하게 "사는 게 어디 단 한 번이라도 만만할 때가 있겠니."라고 하셨을까요. 나는 이따금 한때 나의 어머니셨던 그분이 참으로 멀게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2024년의 길었던 여름이 제 갈 길을 터벅터벅 걸어 우리로부터 조금씩 멀어지고 있습니다.


엊그제 대통령의 기자회견이 있었습니다. 취임 후 두 번째로 가진 기자회견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총평하자면 국민들의 분노를 키운 기자회견이었습니다. 의정 갈등의 대치 국면으로 인해 의료 시스템이 붕괴되고 있는 이 시점에 대통령의 상황 판단은 그야말로 최악이었고, 친일 반민족 인사들의 대거 등용으로 인한 반감 또한 다시 불을 지피는 형국이었습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대통령이 아무런 현실 인식도 없이 "비상진료체제가 잘 가동되고 있다."며 별것 아니라는 식으로 답변한 것에 대해 사람들은 다들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입니다. 제 주변에도 야간 응급실 뺑뺑이를 돌다가 결국 집에서 숨을 거둔 유가족분이 있습니다.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병원에서 야간 응급실 환자를 돌볼 의사가 부족하거나 없는 게 사실입니다. 이런 마당에 '비상진료체제가 잘 가동되고 있다.'고 말하는 대통령이라니... 이제는 국민 모두가 자신의 건강은 제 스스로 돌봐야 할 듯합니다. 야간에는 사고가 나서도, 절대 큰 병에 걸려서도 안 됩니다. 응급실에 간다고 해도 응급실 문턱을 넘을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집 현관문을 나서기 전에 지금 자신이 앓고 있는 병이 중증인지 경증인지 정도는 미리 파악할 수 있을 정도의 의학 지식을 갖는 것은 필수적인 요구사항이 되었습니다. 그와 같은 전문적인 의학 지식을 쌓으셨다면 아플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을 갖춘 셈입니다. 그렇지만 야간에는 여전히 위험하다는 걸 인지하고 조심 또 조심하셔야 하겠습니다.


제10호 태풍 '산산'이 느리게 일본 열도를 강타하면서 많은 피해를 입힌 듯합니다. 다른 때 같으면 유난히 정이 많은 우리나라 국민의 관심과 안타까움이 답지했을 텐데 올해는 그렇지도 않은 모양입니다. 대한민국 정부의 고위 공직자 중에는 이웃 나라 일본의 재난 상황에 대해 인류애적 차원이 아니라 동포애적 차원의 슬픔과 안타까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곳곳에 설치된 독도의 조형물을 없애고,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역사에서 지우려 함께 노력하고 있는 대한민국 정부의 노고를 치하하지는 못할망정 일본은 독도 주변에 군함을 보내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수시로 순시선을 보내며, 한국 정부에게는 독도 방어훈련을 일절 하지 말라는 요구까지 한다고 합니다. 국가의 영토를 보전할 의무가 있는 대통령이 이렇게까지 하는 데는 다른 깊은 뜻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길고 길었던 8월이었습니다. 낮에는 여전히 더위를 느끼고, 말매미의 울음소리도 여전하지만 계절은 한 발 앞서 가을로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데 대한민국 정부는 과거로, 오직 과거로만 퇴행하고 있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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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코난 도일, 선상 미스터리 단편 컬렉션 - 모든 파도는 비밀을 품고 있다 Short Story Collection 1
남궁진 엮음, 아서 코난 도일 원작 / 센텐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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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만인지 모르겠다. 아서 코난 도일의 작품을 다시 읽은 게. 줄잡아 수십 년은 흐르지 않았을까 싶다. 인터넷도 없고 텔레비전 수상기도 지금처럼 흔하지 않았던 시절, 학교가 파한 오후에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놀이는 삼삼오오 모여 딱지치기, 비석치기, 구슬치기, 자치기 등에서 누군가 선택한 그날의 놀이가 전부였고, 그마저도 시큰둥한 날이면 친구네 집 사랑방에 모여 셜록 홈즈 시리즈를 읽거나 괴도 뤼팽을 읽었다. 책이 귀한 시절이었다. 아이들의 손때가 묻은 책은 군데군데 찢겨나갔고, 낡은 옷을 깁듯 흰 종이로 정성스레 이어붙인 페이지도 여러 장이었다. 무료한 시간을 달래려는 듯 아이들은 읽었던 책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누구든 기꺼이 셜로키언(Sherlockian)이나 홈지언(Holmesian)이 되고자 했던 시절. 아이들은 자신의 취향에 따라 셜록 홈즈가 되기도 하고 괴도 뤼팽이 되기도 했다.


"책의 초반부, 선상에서 일어나는 6가지의 미스터리한 이야기들은 홈즈를 떠올리게 하는 듯합니다. 선상에서 벌어지는 기묘한 일들은 계속해서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 아서 코난 도일은 이에 대한 단서를 조금씩 던져 주며 독자들로 하여금 결과를 추리하게 합니다. 셜록 홈즈가 육지에서의 미스터리였다면 이 책은 해상에서의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각각의 단편마다 새로운 등장인물들이 등장하여 특색 있고 흥미로운 주인공을 만나 볼 수 있습니다."  (p.5 '작품 소개' 중에서)


1922년 영국에서 <해적과 푸른 물 이야기>로 출간되었다가 1925년 <샤키 선장의 거래 & 해적 신화>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되었다는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번역되었다고 한다. '조셉 하바쿡 제프슨의 성명서'를 비롯하여 '작은 정사각형 상자', '육지의 해적-혼잡한 시간', '폴스타호의 선장', '협력의 끝', '줄무늬 상자', '샤키 선장:셰인트키츠의 총독이 집으로 돌아온 방법', '샤키 선장과 스티븐 크래독의 거래', '샤키 선장의 몰락', 코플리 뱅크스와 샤키 선장의 종말' 등 10편의 단편 추리소설이 담겨 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전반부에는 해상에서 벌어지는 6가지의 미스터리한 이야기들이, 후반부에는 전설의 악명 높은 샤키 선장 모험기가 펼쳐진다.


"나는 일지를 계속 쓰지 않을 것이다. 이제 집으로 향하는 길은 명확하고 분명하며, 거대한 얼음 구덩이는 곧 과거의 기억이 될 것이다. 최근 사건으로 인해 겪은 충격을 극복하는 데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항해 일지를 시작할 때는 이렇게 끝낼 줄 몰랐다. 나는 이 외로운 선실에서 이 마지막 말들을 쓰고 있다. 나는 죽은 사람의 빠르고 신경질적인 발소리가 내 위에 있는 갑판에서 들리는 듯한 상상을 하고 있다."  (p.134 '폴스타호의 선장' 중에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위트레흐트 조약에 의해 마무리되자 대부분의 해적들은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해피 딜리버리'호의 샤키 선장은 달랐다. 총으로 무장한 그는 잔인한 범죄와 무자비한 살인 행각으로 유명했고, 그의 해적 활동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모닝 스타'호의 존 스카로우 선장은 자신의 배에 보물을 싣고 출항 준비를 한다. 그리고 샤키 선장을 피하기 위해 먼 항로를 선택한다. 그는 자신의 배에 생각지도 못한 불청객을 태우게 되는데 그는 다름 아닌 세인트키츠 총독이었다. 그렇게 항해는 시작되었고, 배가 영국 해안에 이르렀을 때 세인트키츠 총독이 바로 변장한 샤키 선장이었음을 알게 되는데...


"내가 그를 마지막으로 봤을 때, 그는 침대에 목이 베인 채로 누워 있었지. 마침 내가 탈옥했을 때, 그가 처음 보는 선장과 함께 유럽을 건너갈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어. (샤키 선장을 사랑하는 사람은 어느 항구에나 있으니까!) 나는 베란다를 통해 그의 방으로 들어가 그에게 진 약간의 빚을 갚았지. 그리고 필요한 물건들을 잔뜩 챙겼어. 물론 너희들의 눈을 속이기 위한 안경과 신발 한 켤레도 말이지. 그리고 배에 타서 총독인 척 행세를 한 거지. 자 네드, 이제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p.189 '샤키 선장:세인트키츠의 총독이 집으로 돌아온 방법' 중에서)


처서를 지나면서 햇살이 겨냥하는 더위의 칼날이 조금 무뎌진 느낌이다. 물론 늦더위의 예봉이 완전히 꺾인 건 아니지만 말이다. 그리고 나는 2024년의 무더위 속에서 셜록 홈즈를 읽던 그때처럼 한 문장 한 문장에 집중하며 읽을 수는 없었지만 다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읽어 내려갔던 건 사실이다. 코난 도일의 문장이 쉽고 평이한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겠으나 추리소설의 특성상 문장과 문장 사이의 호응이 깊고 끈끈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추리소설에 특화된 코난 도일의 감각이 때로는 21세기의 독자인 나에게도 허를 찌르는 구석이 없지 않아서 독서의 재미를 한껏 느끼게 했다. 아서 코난 도일의 작품을 다시 읽은 게 도대체 얼마 만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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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긴 여름을 보내고 있다. '지구 온난화'니 '기후 위기'니 하는 말들은 이제 하도 많이 들어서 오히려 그 느낌이 퇴색한 듯하다. 그런 말들이 마치 구석기 시대 이전부터 전해져 내려온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이다. 인간 스스로가 자초한 위기이니 그 고통을 오롯이 견뎌야 하는 것 또한 인간이 되는 게 당연하지만 지구상에 사는 수많은 동식물들이 그 고통을 함께 견디고 있음을 상기할 때, 때로는 다른 누군가에게 큰 죄를 지은 듯한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에어컨 냉매를 거쳐 나오는 인공의 바람을 한 달 이상 쏘이고 나니 들판 너머로 불어오는 자연의 바람이 문득 그리워진다. 이제는 그 느낌마저 생경하다. 저 숲을 거쳐온 바람이 자연스레 내 몸을 더듬고, 나를 통과한 그 바람이 저 멀리 외로운 누군가의 이마를 짚고 어깨를 토닥인다는 사실이 그저 새삼스럽고 놀랍게 느껴지는 것이다. 날씨와 관련하여 '이열치열(以熱治熱)'이나 '이한치한(以寒治寒)'이라는 말을 달고 살았던 한 달, 그러나 한반도를 달구었던 것은 비단 날씨뿐만이 아니었으니 뉴스가 뉴스를 덮고 이슈가 이슈를 덮는 일이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고 있다.


어쩌면 현 정부의 국정기조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언행불일치(言行不一致)' 또는 '지행불일치(知行不一致)'가 될지도 모르겠다. 말하자면 말 따로 실천 따로인 셈이다. 그럴 수도 있나 싶겠지만 현 정부가 초창기부터 일관되게 유지하는 기조임은 분명하다. 끝없이 '자유'를 주장하면서 압수수색과 고소.고발, 휴대폰 검열을 일상화하고, 끝없이 '공정과 상식'을 주장하면서 임명직 고위 공직자는 모두 혈연, 지연, 학연 등 권력자와 인연의 끈을 유지하는 이들로 채우는 것은 물론 최고 권력자와 인연이 닿은 자는 아무리 큰 범죄를 저질러도 죄를 묻지 않고, '애국'이나 '헌신'을 주장하면서도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는 모두 테러리스트나 공산주의자로 모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같은 행동을 끝없이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제일 중요한 것이 이념'이라고 한 자가 같은 입으로 '왜 불필요한 이념 논쟁이 벌어지는지, 어떤 국민에게 도움이 되는지 납득하기 어렵다.'라고 말하고 있으니 이를 듣고 있는 국민은 얼마나 황당할 것인가.


친일 반민족 행위자들을 고위 공직에 임명하는 것으로도 모자랐는지 곳곳에 설치되었던 독도 조형물들을 약속이나 한 듯 일거에 제거하고 있다.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여야 할 대통령이 자국의 영토에 대한 수호 의지가 없다면 이를 어찌할 것인가. 소녀상에 대한 테러를 감행하는 자들이 좀비처럼 등장하더니 이제는 국민들의 의식 속에서 독도에 대한 이미지마저 지우려 하고 있다. 일본 천황의 신민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일제강점기로의 회귀를 바라는 미친 자들이 21세기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다. 긴 여름의 끝에는 또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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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 하이웨이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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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설정하는 주인공의 인물 됨됨이에 대하여 깊이 생각할 때가 있다. 주인공의 나이며, 성격이며. 외모며 가족 관계, 심지어 주인공이 살고 있는 지역의 기후나 환경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머릿속을 거치지 않고 스스로 창조되었거나 유도된 것은 하나도 없는 까닭에 작가의 의도는 소설 속 각각의 인물에 영향을 미치는 제반 설정에 고스란히 감추어져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소설을 읽는 독자는 소설 속 인물의 작은 변화를 파악하기 위해 혹은 구성원 상호 간의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작가가 구성한 주변 환경에 있어서의 미세한 변화마저 소홀히 다루어서는 안 된다. 물론 평론을 업으로 하지 않는 일반 독자가 이 모든 것을 세밀히 다룬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만 말이다.


모리미 도미히코의 SF 판타지 소설 <펭귄 하이웨이>는 책의 볼륨에 비해 스토리 전개가 빠르고 구성 자체가 복잡하지 않아 비교적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그러나 인물의 성격이나 배경, 주인공이 관찰하고자 하는 연구 대상(이 책에서는 '바다', '펭귄', '재버워크' 등) 및 주인공과 갈등 관계에 있는 인물들의 변화를 감지하고 기억하면서 책을 읽지 않으면 SF 판타지 소설로서의 이 책에 대한 가치나 재미는 조금쯤 경감되거나 잃게 될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이야기 자체의 재미에 빠져 술술 읽다 보면 각각의 인물이 왜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하였는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순간이 종종 발생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대부분의 독자가 나보다 이해력이 뛰어난 까닭에 그럴 염려는 나만의 기우가 될 수도 있겠지만.


"다른 사람에게 지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만 어제의 나 자신에게 지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하루하루 세계에 대해 배워나가면 나는 어제보다 조금씩 훌륭해진다. 내가 어른이 될 때까지는 아직 긴 시간이 남아 있다. 오늘 계산해보니 내가 스무 살이 될 때까지 3000하고도 888일이 남아 있다. 그러면 나는 3000하고도 888일을 나날이 훌륭해지는 거다. 그날이 왔을 때 내가 얼마나 훌륭해져 있을지는 짐작도 못 하겠다. 너무 훌륭해져서 큰일이 나는 건 아닐까. 모두들 깜짝 놀랄 거다."  (p.10)


인공 이름은 아오야마, 초등학교 4학년의 10살 소년이다. 위에서 인용한 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아오야마는 애라기보다 애늙은이에 가깝다. 그렇다고 모든 면에서 다 완벽한 것은 아니다. 자신이 낮에 머리를 너무 많이 쓴 탓이라고 항변하지만 9시만 되면 졸음을 참지 못한다. 그리고 치료차 들르는 치과병원의 간호사 누나를 남 몰래 짝사랑하기도 한다. 아오야마의 학구열과 애늙은이 같은 태도를 치과 누나는 귀엽게 봐준다. 아오야마는 모든 것을 관찰하고 휴대하는 노트에 기록한다. 이렇게 기록된 매 순간의 결과는 집에서 다른 노트에다 주제별로 정리한다. 많은 학자들이 그러하듯이. 연구 주제는 '좋아하는 치과 누나'에서부터 '상대성 이론'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그리고 마을에 갑자기 나타난 '펭귄'과 하늘에 돔과 같이 생긴 '바다' 그리고 숲에서 보이는 '재버워크' 등 최근에 아오야마의 관심을 끄는 대상이 갑자기 늘었다. 그리고 어느 날 치과 누나가 콜라 캔을 펭귄으로 변하게 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렇지만 누나가 사람들의 연구 대상이 되는 걸 염려한 아오야마는 이것을 철저히 숨긴다. 학교에서 그와 함게 연구를 하는 단짝 친구 우치다와 체스 소녀 하마모토에게도. 그러나 숲에 돔 모양으로 하늘에 떠 있는 '바다'가 수축과 팽창을 함에 따라 치과 누나의 건강이 달라지는 것을 알게 되는 아오야마. '바다'는 결국 주민들을 위협할 정도로 팽창하게 되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제멋대로이고 어리광쟁이였던 시절, 나도 여동생과 똑같이 소중한 사람들이 모두 언젠가는 죽어 만날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정말 깜짝 놀랐던 적이 있다. 물론 나는 모든 생물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 사실이 나와 관계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밤, 내가 아무리 운이 좋아도, 내가 아무리 싫어도, 절대로 죽음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p.300)


단순한 재미를 떠나 이 소설은 얼핏 한 소년의 성장기를 담은 성장 소설이 아닐까 생각하게도 한다. 그러나 아오야마를 해변의 카페에서 수시로 만나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치과 누나를 비롯하여 좋은 친구처럼 대하는 아오야마의 아빠에 이르기까지 책은 아이들이 바르고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기성세대가 어떤 태도로 어떤 환경을 조성해 주어야만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한다. 아오야마의 아빠는 엄마라면 금지했을 커피를 아들과 마시고 어른들이나 좋아할 민트가 들어간 초콜릿을 권하는가 하면 연구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조언을 잊지 않는다. '문제를 작은 문제들로 쪼개고, 다른 각도에서 문제들을 바라보고, 닮은 문제를 찾'으라고 권한다. 아오야마는 대상을 '누나'와 '펭귄'으로 나누어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고 말고. 세계의 끝은 밖에만 있는 게 아니라고 아버지는 생각한단다. 웜홀도 그렇지 않을까? 너랑 아빠 사이에 있는 이 테이블 위에 실은 웜홀이 이미 출연했을지도 몰라. 그건 정말로 한순간의 일이라서 우리한테 안 보이는 것뿐일 수도 있어."  (P.252~P.253)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어른다움이란 무엇일까?' 생각했다. 진정한 어른다움은 아마도 앞에 있는 대화 상대와 같은 눈높이에서 대화하고, 공감하며, 진심을 담아 경청하는 자세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어른이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 주변에 많으면 많을수록 아이는 건강하고 바르게 자랄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 나와는 친구처럼 지내는 아버지뻘의 지인이 나를 만나기 위해 먼 곳에서 찾아왔었다. 그분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삶을 낭비하지 말고 원하는 것을 하면서 살아. 이제는 자네도 그럴 나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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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매로 보이는 꼬마 둘이 손을 꼭 잡은 채 걷고 있다. 그들 앞에는 엄마인 듯한 여인이 한발 앞서 느린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여름 햇살이 무섭게 쏟아지는 거리. 까무잡잡 살이 탄 두 명의 꼬마는 무표정했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못하지만 온몸으로 불만을 말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잰걸음으로 뒤를 쫓는 아이들을 앞서 걷는 한 여인이 무심한 듯 이따금 뒤를 쳐다본다. 그들이 향하고 있는 곳은 주택가 근처의 도서관. 황금 같은 휴일 오전에 엄마의 설득이나 강요가 없었더라면 초등학생도 되지 않은 아이들이 도서관에 간다는 엄마와 결코 동행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집에서 느긋하게 텔레비전을 보거나, 컴퓨터 게임을 하거나, 여동생을 실컷 놀려먹으면서 휴일 오전의 여유를 만끽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더위는 엄마로 하여금 가장 경제적인 피서 장소를 물색하게 했을 테고, 도서관이야말로 교육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최적의 장소라는 결론에 이르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현실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갈등은 지극히 사소한 일에서 비롯된다는 걸 잘 알면서도 우리는 도처에 널린 지뢰를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밟아대곤 한다. 사소하다는 것은 언제나 무해하거나 큰 위험이 없는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사소함이 보내는 옅은 미소에 우리는 너무도 쉽게 현혹되거나 그 위험성이나 독성을 너무나 쉽게 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소하다는 것은 단 한 번의 실수로 치명적인 위험에 도달하지 않는다는 것일 뿐 시나브로 누적되는 위험으로 인해 더욱 치명적일 수 있다는 사실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 <비폭력 대화>를 쓴 마셜 로젠버그 박사의 다른 책 <상처 주지 않는 대화>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지적 호기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배움을 위해 학교를 찾고, 학교는 규칙과 합의를 통해 배움의 범위에서 전할 수 있는 일정한 틀을 만들어야 합니다. 규칙과 합의 사항을 정할 때는 벌을 주기 위한 권력이 아니라 보호하기 위한 권력을 사용한다는 사상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규칙은 모든 당사자들의 이해관계와 욕구 충족을 지원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의 욕구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행동을 할 때가 있기 마련인데,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의 욕구를 반영할 수 있을지 함께 논의하고 결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상처 주지 않는 대화' 중에서)


펄펄 끓는 가마솥더위가 연일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민을 더욱 짜증 나게 하는 것은 오늘과 같은 더위가 아니다. 여당과 야당, 현 정부와 대한민국 국민 간의 극한 대치야말로 작금의 불볕더위에 참을 수 없는 열기를 더하고 있다. '규칙은 모든 당사자들의 이해관계와 욕구 충족을 지원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데 현 정부와 여당은 자신들을 지지하는 일부 국민의 욕구 충족을 지원하기 위한 규칙만 내세울 뿐 다수 국민의 욕구는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 '역대 최장 열대야'를 겪고 있는 우리는 '역대 최장 정부 혐오증'을 함께 앓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모든 더위는 후자에서 비롯되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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