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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
이미리내 지음, 정해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7월
평점 :
역사는 그 시대에 속했던 인간 군상을 초라하게 하거나 무시한다. 그러나 역사에 묻힌 한 인물을 조망하는 예술은 인간을 위대하게 만든다. 영화가 그렇고, 소설이 그렇다. 그러므로 영화를 보거나 소설을 읽는다는 건 인간의 위대함을 탐구하고자 함이지 역사가 놓친 인간의 비열함이나 속수무책의 허약함을 재확인하려는 게 아니다. 그러나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겪었던 어느 주인공의 이야기를 읽고 있노라면 시대를 불문하고 존재하는 인간성 제로의 인간에 눈길이 가곤 한다. 그리고 분노하게 된다. '어떻게 사람이...'
요즘 들어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다룬 소설을 자주 읽게 된다. 자주라고 해봐야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지만 다독가도 아닌 내가 하나의 주제로 묶을 수 있는 소설을 한 달에 서너 권씩이나 읽는다는 건 꽤나 이례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의 남북 분단 및 한국전쟁, 군부 독재와 민주화 과정으로 이어지는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는 그야말로 수난과 질곡의 세월이었지만 그 과정을 견뎌 온 사람들의 이야기는 언제 읽어도 가슴이 아프다. 같은 인간으로서 연민과 동정을 안 느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녀가 나를 보고 윙크했다. 윙크라기보다 눈꺼풀 근육이 씰룩인 것에 더 가까워 보였다. "그럼 어르신의 여덟 단어는 뭘까요?" 내가 물었고, 그녀의 얼굴에 한쪽 입꼬리만 올라간 장난스러운 미소가 다시금 떠오른 것을 알아차렸다. "노예, 탈출 전문가, 살인자, 테러리스트, 스파이, 연인, 그리고 어머니." 나는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녀의 눈이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반짝였다. 그녀는 나를 당황하게 만든 것에 신이 나고 내가 무슨 말을 할지 듣고 싶어 죽을 지경인 얼굴이었다." (p.31)
이미리내의 소설<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은 요양원에서 일하는 '나'의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노인들을 대상으로 '부고 쓰기 프로그램'을 기획한 '나'는 부고를 쓰기 위한 전 단계로 노인들로부터 그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자 한다. 그러던 중 생각지도 못한 독특한 캐릭터의 묵 할머니를 만나게 된다. '일본 사람으로 태어나서 북한 사람으로 살았고 이제 남한 사람으로 죽어가고 있'다는 묵 할머니. 소설은 시간의 순서를 따르지 않고 마치 여러 사람의 삶을 단편적으로 옮겨놓은 듯 뒤죽박죽이지만 그래서 더 독자들의 시선을 붙잡는지도 모른다. 한 사람의 장구한 세월을 시간의 순서에 따라 읽어 내려간다는 건 얼마나 지루하고 견디기 힘든 시간인가. 그러나 시간적 순서에 상관없이 누군가가 들려주는 짧은 에피소드를 여러 편 읽는다는 건 오히려 관심이 동하지 않던가. 마치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초래해야 했던 물리적인 죽음 자체는 혐오스러웠지만, 배경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은 내게 쉬운 일이었다. 나중에 살면서 나는 혹시 나의 그런 뻔뻔함이 아버지의 죽음 이후 엄마를 그렇게 멍하게 만든 건 아닌지, 자신의 사랑스러운 어린 딸이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그런 교묘한 속임수를 쓸 수 있었다는 충격 때문에 엄마가 그렇게 된 건 아닌지 생각하게 되었다." (p.133)
소설은 주인공인 묵 할머니의 출생에서부터 그와 같은 삶이 비롯된 기원에 대한 적확한 논리를 제공한다. 서울에서 유명한 한의사였던 외할아버지가 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받았던 것을 계기로 자신의 딸마저 잃을까 염려한 나머지 북쪽 지방에 사는 시골 농부에게 시집을 보낸 것이 묵 할머니가 탄생하게 된 시발점이었다. 말하자면 부잣집에서 자란 엘리트 여성과 시골 촌부의 부조리한 결합으로 태어난 게 묵 할머니였다는 이야기이다. 묵 할머니는 어머니의 배려로 캐나다 선교사 밑에서 영어 회화를 배우는 등 적극적인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가정 폭력을 견디지 못한 묵 할머니는 결국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고 시신을 자작나무 숲에 묻는다. 그리고 가정 폭력에 의해 시력을 잃은 엄마를 치료할 수 있다는 감언이설에 속아 묵 할머니는 어린 나이에 종군 위안부로 끌려가게 된다. 인도네시아 스마랑으로 끌려갔던 비슷한 또래의 위안부 여성들이 겪었던 그곳에서의 삶과 죽음은 책을 덮고 싶을 정도로 참혹하지만 그들 사이의 끈끈한 우정과 이따금 나누었던 고향 이야기 등은 못내 가슴 아프다.
미군의 개입으로 위안소를 가까스로 탈출한 묵 할머니는 한국전쟁이라는 비극을 다시 겪게 된다. 부산으로 피난을 갔던 묵 할머니는 영어를 할 수 있다는 이유로 미군 부대 근처의 '낙검자' 수용소(성병 관리소)인 멍키하우스에서 일하게 되지만 결국 하우스를 불태우고 만다.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간 주인공은 아내이자 어머니가 되어 잠시 평화로운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10년 동안 실종되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돌아와 일본어는 물론 영어까지 유창하게 하는 묵 할머니의 모습을 본 누군가가 국가에 신고하고 만다. 묵 할머니의 국가였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묵 할머니를 남한 공작원으로 파견한다. 그리고...
"그녀가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나는 우리가 앉아 있는 손기정 공원의 벤치 주변을 둘러본다. 키 큰 플라타너스나무들이 어디에나 그늘을 드리워서 땅에는 살며시 흔들리는 빛의 조각들이 여기저기 조금씩 보일 뿐이다. 나는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본다. 오렌지색 황혼이 하늘 전체에 번지고 있다. 한때 여름 매미의 시끄러운 울음소리로 가득했던 대기가 이제 귀뚜라미의 쓸쓸한 찌르륵찌르륵 소리에 점령당했다. 가을이 왔다." (p.337)
끝내 오지 않을 것만 같던 가을이 왔다. 그리고 우리는 대한민국의 역사를 부정하는 현 정권의 고위 공직자들의 망언을 마치 우리 선조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소리인 양 반복적으로 듣고 있다. '한일관계'가 언제나 '일한관계'라고 말하는 주일대사, 광복절은 미국에 감사하는 날이라고 하는 뉴욕 총영사, 일제 점령기의 우리나라 국민의 국적이 일본이라고 주장하는 어느 장관, 위안부는 근거 없는 주장이라며 역사적 사실을 정면으로 부인했던 UN 일본 대표의 말에 단 한마디도 반박하지 못했던 우리나라의 관료 등을 보면서 우리는 대한민국 역사가 갈가리 흩어지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끝내 오지 않을 것만 같던 가을이 도래하는 것처럼 마음대로 역사를 왜곡하고 짓밟으며 기고만장했던 그들도 권력의 상실과 함께 스러지지 않겠나.
갑작스러운 기온 저하로 가을 햇살이 마냥 그리워지게 하더니 오늘은 한낮 기온이 제법 올라 따사롭기만 하다. 자연은 이렇듯 한없이 순환하는 계절을 따라 천변만화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시간의 산물인 역사도 순환하는 계절의 아름다움처럼 그렇게 다음 세대에게 아름다운 것만 남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역사는 비록 그 시대에 속했던 인간 군상을 초라하게 하지만 소설 속에 드러난 한 여인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역사보다 더 위대한 한 인간의 분투를 엿보게 된다. 휘몰아치는 역사의 흐름도 어찌하지 못했던 불굴의 인간정신을. 우리가 소설을 읽는 단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바로 그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