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한 이야기에는 언제나 곁다리처럼 소문이 따라붙게 마련이다. 흔하다는 건 대중의 관심으로부터 서서히 멀어지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단순한 사실의 나열에 그쳤던 이야기가 산골 무지렁이조차 다 아는 흔해빠진 이야기로 변하는 순간, 어디선가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한 새로운 모의와 작당이 시작된다. 조미료처럼 약간의 거짓이 가미되고 밋밋하던 이야기는 기승전결의 형식을 갖춘 새로운 이야기로 재탄생한다. 그리고 대중의 관심이 사그라들 때마다 이와 같은 과정은 끝없이 반복된다. 산처럼 부풀려진 이야기는 이제 99%의 거짓과 그 출발조차 파악할 수 없는 1%의 사실로 구성된다. 가난하던 흥부가 제비의 도움을 받아 벼락부자가 되었다는 건 이제 대중이 확신하는 어이없는 사실이 되고 만다. 어떤 이야기가 수 차례, 혹은 수십 차례 부풀려지는 동안 과거의 이야기꾼도 현재의 이야기꾼(극우 유튜버)도 돈과 명예를 얻게 된다. 그리고 거짓에 거짓을 보태던 그들 역시 자신이 했던 과거의 거짓을 마치 사실인 양 믿게 된다. 시나브로 자신이 허언증 환자가 되었음을 인지하지 못하는 이야기꾼과 자신들이 듣고 잇는 이야기가 어느 허언증 환자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알지 못하는 다수의 대중. 광화문 태극기 집회에 모인 사람들을 자주 지나치면서 어느 좀비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렸던 건 이러한 연유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비난하고픈 사람들에게 '부정선거'라는 테마는 조선시대의 가난한 민중들을 유혹했던 '벼락부자'의 꿈만큼이나 솔깃한 주제였는지도 모른다.


돈만 준다면 인당수의 제물이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설화 속 어느 여인과 돈만 준다면 어떠한 거짓과 선동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현대의 극우 유튜버는 무척이나 닮아 있다. 그 이야기를 퍼 나르는 구독자들의 행태도 조선 후기 대중을 사로잡았던 설화나 민담이 퍼져가는 과정과 흡사하다. 어쩌면 흥부 이야기를 들었던 조선시대의 가난한 민초들 역시 그것이 사실인 양 오인하여 처마 밑의 제비집에서 애꿎은 제비를 땅으로 내동댕이친 후 부러진 제비다리를 살뜰히 고쳐주었을지도 모른다. 근거도 없는 어느 유튜버의 확신에 찬 부정선거 의혹을 들었던 한 인간이 까닭도 없이 계엄령을 선포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와 같은 좀비화 과정은 지능의 높고 낮음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횟수의 반복이 진행되었느냐에 따라 그 성패가 갈린다. 광화문 광장에 모인 그 많은 사람들의 지능이 하나같이 다 수준 이하에 머문다고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만 돈과 명예를 추종하는 어느 유튜버의 이야기를 마치 설화나 민담을 듣는 것처럼 수없이 반복하여 들었을 뿐이다.


나는 지금 레프 톨스토이의 단편선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소담출판사)>를 읽고 있다. 이 책을 반복하여 읽고 나면 나도 어쩌면 사람은 본디 탐욕과 이기심이 아닌 사랑과 선의에 따라 살게 된다는 사실을 믿고 확신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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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 - 개정판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 (개정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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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며칠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에 떠도는 어떤 동영상도 보지 않은 채 오롯이 책에 묻혀 지냈다. 그러나 눈으로 읽었던 글자는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이해도 되지 않는 책을 읽는다는 건 어둠 속에 놓인 낯선 물체를 매만지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산다는 건 이따금 해결할 수 없는 삶의 부조리를 맥없이 목도하는 일이지만 그래도 무작정 살고자 했던 의지는 그와 같은 부조리와 조우할 때마다 한풀 꺾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란 수괴 혐의를 받고 어렵게 구속되었던 대통령이 까닭도 없이 석방되고, '나는 계몽되었습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17~18세기의 계몽주의 시대로의 회귀를 갈망하는 몇몇 정신이상자의 망언을 듣고 있는다는 건 고문과 진배없었다.



전에도 몇 번 밝힌 바 있지만 마땅히 읽을 책이 없거나 싱숭생숭 책이 손에 잡히지 않을 때에는 나는 언제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펼쳐 들곤 한다. 그럴 때 하루키의 소설보다는 그의 에세이가 더 적합할지도 모른다. 작가의 감정은 독자의 감정이라는 기치 아래 '감정 동일시의 원칙'을 추구하는 우리나라 에세이와는 다르게 작가가 지나쳐 온 특정 시기의 문화, 예술, 사회 등을 마치 스케치하듯 덤덤하게 글로 옮기는 일본 작가의 에세이는 요 며칠 집중력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나와 같은 독자에게는 더없이 좋은 먹잇감이 아닐 수 없었다. 책을 읽는 나 역시 '아하, 그 시절엔 그런 일이 있었던 게로군.' 하고 덤덤하게 넘길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기운도 없는 내가 굳이 감정 소모를 할 필요도 없이.


"죽은 자를 칭송하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젊은 나이에 죽은 자라면 더욱 그렇다. 죽은 자는 배신하지 않고, 반격도 하지 않는다. 나이도 먹지 않고, 머리도 벗어지지 않으며, 배도 나오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조용하고도 완전하게 죽어 있을 뿐이다. 가령 그대가 그들의 죽음에 싫증이 나 잊어버린다 한들 별문제 될 것은 없다. 그냥 잊어버리면 그만이다. 그것으로 끝이다. 잊혔다고 해서 그들이 그대의 집을 찾아와 문을 두드리는 일은 없다. 그들은 그저 암흑 속에서 침묵을 지킬 뿐이다. 그렇다, 죽은 자를 칭송하는 것은 너무도 손쉬운 일이다."  (p.55)


우리나라에서는 2012년 7월에 초판이 발행된 하루키의 얇은 에세이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은 이처럼 시니컬하고 별 시답지 않은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말하자면 요즘처럼 날씨 변덕이 심한 환절기의 오후에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인근의 작은 공원에 옹기종기 모인 노인 몇몇의  열띤 시국 토론을 책에다 담아 놓은 것과 비슷하다.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로서의 명성이나 지명도가 없었더라면 책으로서의 생명력은 진즉에 사라졌을 법한 책이지만, 그 어떤 일에도 집중할 수 없고, 어떤 일에도 의욕이 생기지 않았던 요 며칠의 나에게는 '그래도 뭔가 하고 있구나' 하는 위로를 던져주기에는 충분했던 책이었다.


"나는 파티라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초대받아도 가지 않는 게 보통인데, 만약 쌍둥이 자매를 에스코트할 수 있다면 생활 패턴을 적극적으로 바꿀 의향이 있다. 딱히 미인이 아니라도 좋다. 미인이 아니라도 별 상관없다. 아주 평범한 여자 쌍둥이로 족합니다. 꼬드기고 싶다거나, 같이 자고 싶다거나, 그런 건 아닙니다. 나는 그저 쌍둥이 자매와 파티에 가고 싶을 뿐이다. 왠지 아주 특별한 경험이지 않을까 하는 기분이 들 뿐이다."  (p.62)


작가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조하거나 작가가 느낀 감정에 나의 감정을 완전히 일치시켜야만 온전히 책을 읽은 듯한 느낌이 드는 사람이라면 "시간이 남아도는 것도 아닌데 굳이 이런 책을 왜 읽는 거야?" 하는 질문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등을 꼿꼿이 세우고 앉아 이따금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한 표정으로 책장을 넘기는 것이 독서인의 유일한 자세는 아닐 터, 우리는 이따금 풀어지듯 침대에 누워 때로는 낄낄대기도 하고, 꾸벅꾸벅 졸기도 하면서 시간의 추이를 이따금 가늠하는 것도 독서의 한 형태가 아닐까.


"이 역시 자랑이 아니지만, 나는 한때 상당히 가난했었다. 막 결혼했을 무렵이다. 우리는 가구 하나 없는 방에서 소리 죽여 살았다. 스토브조차 없어서, 겨울밤에는 고양이를 껴안고 추위를 견뎌냈다. 고양이도 추우니까 사람에게 꼭 달라붙어 있었다. 거의 공생에 가까운 상황이다. 길을 걷다가 목이 말라도 찻집에 들어갈 수 없었다. 여행도 가지 않고 옷도 사지 않았다. 오직 일만 했다. 그렇다고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p.192)


대한민국은 지금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문득 꿈에서 깨고 나면 그제야 비로소 '아, 그때는 정말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암흑의 시간이었지.' 하고 서로의 어깨를 가볍게 치며 저마다의 기억을 털어놓겠지만, 국가의 모든 시스템이 무너진 지금 이 시간을 견디는 건 그 누구에게도 녹록지 않은 일. 멧돼지를 닮은 한 인간이 저지른 2년 반의 분탕질이 대한민국의 미래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말았다. 지금도 우리는 끝나지 않은 '내란의 밤'을 하얗게 지새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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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현실에서 누리고 체감할 수 있는 배타적 권리는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 생각하게 했던 하루였다. 오후에 약속이 있었던 나는 차를 운전하여 약속 장소로 향하고 있었는데, 아랫배가 살살 아프고 뭔가 신호가 오는 느낌이 들어 가까운 관공서(그게 하필 도서관이었다)로 방향을 틀었다. 어렵지 않게 화장실을 찾아 들어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아뿔싸! 이게 웬일? 한 칸짜리 화장실 앞엔 이미 줄을 서서 대기하는 사람이 있는 게 아닌가. 지하 1층 지상 3층의 건물이었기에 나는 서둘러 다른 층으로 가 보았지만 모든 게 허사였다. 다른 층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괜히 계단만 오르락내리락하는 바람에 대기 순번만 밀렸고 나의 인내력은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바닥에 신문지를 펴고서라도 볼 일을 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화장실 안에 있는 사람은 그것이 누구에게도 침해받지 않는 자신의 배타적 권리라는 걸 기다리는 사람에게 공표라도 하려는 듯 몇 차례 노크를 해도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인내력의 한계를 느낀 나는 결국 비어 있는 장애인 화장실로 뛰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렇게 밝아진 표정으로 도서관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배타적 권리는 과거 휴대폰이 없던 시절에 공중전화 부스에서도 심심치 않게 목격되곤 했었다. 뒤에서 애타게 자기 순번을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공중전화박스를 선점한 사람이 한 손에는 동전을 잔뜩 거머쥔 채 느긋하게 통화를 할라치면 저것이 바로 배타적 권리구나, 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모습을 보고 화를 참지 못하는 사람도 더러 있어서, "아, 통화 좀 짧게 합시다." 하면서 전화를 빨리 끊을 것을 종용하거나 험악한 분위기를 풍겨 빨리 나오라고 은근히 협박하는 경우도 드물게 있었지만 말이다.


이런 것과는 다르게 아파트와 같은 공동주택의 화장실이나 베란다에서 공공연히 담배를 피우는 것이 마치 자신의 배타적 권리인 양 생각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 밖에 나가려면 외투를 걸쳐야 하는 겨울철이나 너무 더워서 잠시도 밖에 나가 있을 수 없는 여름철에 그런 현상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담배를 끊은 지 만 11년이 되는 나로서도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담배연기는 참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런 까닭에 나도 몇 번이나 관리사무실에 민원을 넣었었다. 생각해 보면 그것은 배타적 권리가 아니라 타인에 대한 예의나 배려의 문제이다.


자유나 평등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의 권리가 아닌 현실에서 체감하고 누릴 수 있는 배타적 권리는 사실 많지 않다. 그것마저도 완전한 배타적 권리가 아닌 타인에 대한 배려가 동반되어야 하는 소극적 권리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말이다. 공동체의 구성원이 반드시 지켜야 할 법적 테두리를 벗어나 '국민 저항권'이라는 해괴한 주장을 들고 나와 제 멋대로 행동하고 난동을 피우는 사람이 늘어나는 바람에 '자유'라는 말의 가치는 이제 그 어디에서도 찾기 어렵게 되었다. 난동이나 부리고 깽판을 치는 이들이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있는 단어가 결코 아닌데 말이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는 제 할 일은 뒷전이고 밤낮 술이나 처먹는 이가 시도 때도 없이 '자유'를 외치는 바람에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자유'의 가치는 멧돼지의 똥보다 못한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비극의 시작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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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바키 문구점
오가와 이토 지음, 권남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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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도 다 인연과 때가 있어서 남들이 아무리 좋다고 떠들어도 내 손에 들어와 읽히는 데는 시간이 걸리게 마련이고, 어떤 책은 그마저도 인연이 닿지 않아 기억 속에서 영영 사라지고 말기도 한다.  일본 작가 오가와 이토의 소설 <츠바키 문구점>도 그런 종류의 책 중 한 권이다. 나는 사실 이런저런 통로를 통하여 일독을 권유하는 말을 수차례 전해 들었을 뿐만 아니라 책을 읽어 본 사람들이 쏟아내는 긍정적인 메시지를 수도 없이 들어왔었다. 그럼에도 책을 읽을 기회는 좀체 찾아오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책의 제목만 익숙해질 뿐이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나의 게으른 천성에 더해 남들이 좋다고 하면 일부러 뻗대고 보는 반골 기질이 크게 작용한 게 아닌가 싶다.


2025년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저런 이유로 책도 손에 잡히지 않고, 블로그에 짧은 글 한 편을 올리는 일조차 힘에 겨워할 테지만 나라고 예외는 아니어서 책을 읽는 것도 어렵고 어쩌다 읽은 책도 그에 대한 감상을 기록하는 게 어찌나 힘이 들던지... 사실 <츠바키 문구점>을 다 읽은 후 처음 들었던 생각은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이 모여 저마다의 삶을 이루고 그와 같은 이들의 특별하지 않은 삶을 후대의 누군가는 또 그리워하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마치 대한민국의 평범한 이를 대표하는 영희와 철수의 생각처럼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생각만 떠오를 뿐 별다른 게 없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관점을 달리 하면 <츠바키 문구점>을 읽은 독자 대부분이 그렇게 느긋하고 편안한 일상이 주는 기쁨을 첫 번째 감상으로 꼽았다면 작가의 의도가 100% 달성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문득 드는 것이다.


"그날 오후, 초인종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어느새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지면에 똑똑 떨어지는 빗소리는 최고의 자장가이다. 최근 며칠 내내 점심때가 지나면 꼭 비가 온다. 나는 9시 반에 츠바키 문구점을 연 뒤, 손님이 드는 상태를 보면서 안쪽 부엌에서 점심을 먹는 것이 일과다. 아침은 따뜻한 차나 약간의 과일 정도로 때워서 점심때는 비교적 든든하게 먹는다. 오늘은 손님이 별로 없어서 안쪽 소파에 누워 있다가 깜박 잠이 들었다. 잠시 눈만 붙일 생각이었는데 그대로 깊이 잠든 것 같다. 반년이 지나 이곳 생활에도 익숙해지고, 긴장감이 풀린 탓인지 요즘 들어 이상하게 잠이 쏟아진다."  (p.15)


소설의 주인공은 '포포'. 아직 미혼의 젊은 여성이다. 어린 시절, 편지를 대필해주는 선대(할머니)로부터 서도를 익히던 포포는 엄하고 무섭던 선대의 교육에 반발하여 집을 나가기도 했지만, 선대가 세상을 뜬 후 오래된 동백나무 옆의 낯익은 문구점으로 돌아와 편지를 대필하는 일로 생계를 이어간다. 선대가 그랬던 것처럼. 포포는 편지를 써달라고 찾아오는 다양한 사람들의 사연을 듣고, 그 사람의 입장에서 영혼이 담긴 편지를 쓰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사연에 맞게 편지지를 고르고, 필기도구를 선택하고, 봉투를 정하고, 우표를 붙이는 것 하나까지 꼼꼼하게 따진다. 한 통의 편지를 쓰기 위해 잠시나마 의뢰인이 되어 그의 삶을 되짚어 보는 것이다.


"공 굴리기 인생이란 쇼타로 씨 아버지가 예전에 잘 사용했던 말이다. 지구를 공에 견주어 자신은 그 위를 자유롭게 걷는 인생이라는 의미로 사용했을 것이다. 온 세계를 날아다니는 바쁜 자신의 인생을 유머로 감싸서 작은 웃음으로 바꾸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주문을 적는 종이였던 멋없는 이면지는 수제 대지에 붙였다. 글씨 주위는 압화로 장식하고, 겉에도 전부 압화로 채웠다. 그 위에 얇은 종이를 포개서 양초로 코팅했다."  (p.203)


가마쿠라를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은 대필로 생계를 이어가는 젊은 여인 포포의 단순한 일상과 겹쳐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시종일관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을 제공한다. 이웃집에 혼자 사는 바바라 여사를 비롯하여 의뢰인이었던 남작이나 빵티 등 가까운 사람들과 야유회를 하기도 하고, 서로의 고민을 털어놓기도 하면서 지금은 없는 선대를 그리워한다. 그리고 이탈리아에 있는 한 친구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마음을 터놓았던 선대의 인간적인 고민과 손녀 포포에 대한 사랑과 걱정을 그 빛바랜 편지를 통해 알게 된다.


"언젠가 먼 미래에서 오늘이라는 날을 돌이켜보면, 분명 엄청나게 특별한 하루일 거란 예감이 들었다. 지금은 아직 '그 안'에 있어서 그걸 잘 모르지만."  (p.270)


손 편지를 쓰거나 받는 일이 희귀해졌다. 우편함에는 각종 고지서와 홍보 전단지들로 가득 찼다. 고지서나 청구서 등도 전자메일로 받기 때문에 우편함은 갈수록 본연의 기능을 잃고 적적해졌다. 생일 축하도 카톡 문자나 인터넷 선물로 대체된 지 오래다. 우리는 갈수록 서로의 체온을 잃고 가슴은 허전해져만 간다. 게다가 계엄과 탄핵 정국이 지속되면서 독서도, 글쓰기도 귀찮은 일이 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상태를 언제까지고 지속할 수는 없다는 생각은 단지 생각으로만 그칠 뿐 의지가 되어 나를 일으켜 세우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평범한 일상이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츠바키 문구점>을 읽고 있노라면 오히려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불끈 솟는 것이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고 썼던 폴 발레리의 시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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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아침을 먹고 느지막이 산에 올랐다. 휴일마다 이렇게 한껏 게으름을 피우는 데는 이유가 있다. 휴일에나 있을 수 있는 여유로움을 한껏 누리고 싶은 것도 한 이유가 되겠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가 따로 있다. 내가 평일에 아침 산행에 나서는 시각은 오전 5시 30분, 해가 길어졌다고는 해도 그 시각에는 여전히 캄캄한 어둠이 내려앉아 있다. 산을 오를 때마다 등산로에 버려진 쓰레기를 줍고는 있지만 어둠 속에서 쓰레기를 줍는 데는 한계가 있다. 작은 비닐이나 등산로 주변의 풀숲에 버려진 쓰레기는 발견하기 어렵다. 하여 가능하다면 휴일에는 느긋하게 산을 오른다. 더구나 겨울은 쓰레기를 줍는 데 최적의 계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산에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들도 일말의 양심이 있는 까닭에 자신이 버린 쓰레기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나무둥치 뒤편이나 움푹 파인 곳에 버리기 일쑤여서 나뭇잎이 무성한 여름에는 이를 찾아내기가 무척이나 어렵다. 반면 나뭇잎이 없는 겨울에는 여름에 비해 등산객도 줄고, 상대적으로 버려지는 쓰레기의 양도 줄어들지만 지난여름에 버려진 쓰레기를 쉽게 찾아내는 까닭에 여름이나 겨울이나 쓰레기를 줍는 양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간밤에 내린 눈이 희끗희끗 잔설이 되어 낙엽을 덮고, 등산로에는 눈석임물이 고여 군데군데 작은 물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회색 패딩을 입고 몇 발자국 앞서서 걷던 어느 할머니의 손에 들린 휴대폰에선 어느 목사의 탄핵 반대 연설이 꾸준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늘은 여전히 잔뜩 흐려 갤 기미가 보이지 않고, 봄을 시샘하는 쌀쌀한 바람이 등산객의 어깨를 더욱 움츠러들게 했다. 등산로 중간쯤에 놓인 어느 벤치엔 부부인 듯 보이는 젊은 연인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동공에 초점을 풀고 멍하니 앉아 있는 모습은 마치 물멍, 불멍도 아닌 낙엽몽을 하고 있는 듯 보였다. 어쩌면 다른 등산객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채 바람 소리나 새소리를 듣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정상에 올라 잠시 쉬고 있는데 60대 후반이나 70대 초반으로 보이는 부부가 내 앞을 스쳐갔다. 퉁퉁한 체형의(그렇다. '뚱뚱한'은 아니고 '퉁퉁한') 부인이 엉덩이를 과도하게 씰룩거리면서 앞서 걷고, 바로 뒤에서 남편이 뒤따르고 있었다. 검은색 누비 외투와 바지를 입고 암적색 비니를 쓴 부인은 이따금 남편을 뒤돌아보며 꽤나 즐거운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지나쳐 빠른 걸음으로 산을 내려왔다.


나는 오늘 아침에도 여전히 어둠을 뚫고 산을 올랐다. 사락사락 싸락눈이 내렸고, 우둠지를 흔드는 바람이 무척이나 스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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