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는 '자기 소개서'를 쓸 일이 정말 많아졌다.

주최측의 입장에서 보면(그것이 기업이든, 학교든, 공공기관이든, 아니면 여타의 다른 곳이든) 어떻게 하면 지원자를 만나는 데 들이는 시간과 노력을 덜 할까 하는 심산에서 비롯된 것이겠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지원자의 고민은 점점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  딱히 내보일 만한 특기나 장점도 없는데 말이다.  어느 대중가요의 가사처럼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내가 나를 알겠느냐'하는 불만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요즘 내가 예전에 약간의 도움을 주었던 학생들로부터 '자기 소개서'를 쓰는 데 도와주십사 하는 청을 자주 받곤 한다.  입시철이 가까워 온 까닭이다.  그런데 그 양식을 보고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학교나 사설학원에 근무하는 선생님들이야 익히 아는 사실이겠지만 올해부터는 그 지원 양식이 통일되어서 까다롭기 그지없다.  우선 1000자 이내의 성장과정과, 나눔, 배려,리더십,협력,갈등관리를 주제로 1000자 이내, 지원 동기, 진로 노력을 주제로 1500자 이내, 대학 입학 후 학업 계획과 향후 진로 계획에 대하여 1000자 이내로 쓰도록 규정하고 있다.  도합 4500자의 글을 써야 하는 셈이다.(학교에 따라 더 늘어날 수도 있다)  가히 논문 수준 아니가!  가뜩이나 글쓰기에 취약한 학생들에게는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보이지 않을까?  

 

대개의 지원자들은 성장과정에서 롤 모델이나 감명깊었던 책을 언급하게 마련이다.  어떤 분야에서 확고한 위치를 점했던 어느 누구(가령 간디나 슈바이처, 고흐, 베토벤,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등)를 언급하는가 하면 자신의 부모님 중 한 분(다른 모든 위인들은 자신의 부모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는 듯도 하고, 그만큼 부모님을 사랑한다는 표시처럼 보이기도 하지만)을 언급하기도 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다 같은 인간이 아닌가.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완벽한 지성체는 있을 수 없다.  다만 우리가 그들의 약점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부분은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사실 누군가의 단점을 보고 배우는 경우가 많다.  커다랗게 부각되는 장점은 너무 높아 보여서 넘을 수 없는 산쯤으로 여기게 된다.

 

지원동기에서도 그렇다.  엄밀히 따지자면 대부분의 학생들은(또는 지원자들은) 자신의 성적에 맞춰서, 어쩔 수 없이 지원했을 것이다.(물론 그렇지 않은 일부분의 학생이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사실 그대로, 단 한 줄의 말로 지원동기를 썼다가는 세균이 득실거리는 쓰레기통 속으로 자신이 제출한 서류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가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무서운 일이다.  그럴 수는 없는 일이기에 도리질을 치며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고 앉아 없는 얘기를 지어내려고 머리를 싸맬 것이다.

 

나는 누군가의 글을 대필할 정도로 글솜씨가 뛰어난 것도 아니요, 많은 학생들의 경험을 두루 겪어본 것도 아니기에 대부분의 요청을 거절하곤 한다.  그것만큼 곤혹스러운 일도 드물다.  내가 마치 찔러서 피 한 방울 나지 않는 무정한 사람처럼 비춰지지 않을까 걱정도 된다.  세상 사는 일이 참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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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에서 일주일을 - 히드로 다이어리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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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란 결국 우리들의 일상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어떤 대상을 새롭게 하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알랭 드 보통은 뛰어난 문학가이다.  일상에서 깨닫게 되는 삶의 의미와, 자칫 시시껄렁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었던 대상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봄으로써 독자들의 감성을 일깨우는 그의 능력은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작가가 그려내는 세상은 나처럼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의 글은 언제나 새롭다.

 

불과 이십여 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에게 공항은 그닥 친숙한 공간이 아니었다.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간혹 기억마저 아득한, 오래 전의 지인이 가족과 함께 모국을 방문한다는 통보만 하더라도 온 동네에 소문을 퍼뜨리는 것은 물론 도착 시간에 맞춰 대규모 환영인파(주로 가족과 친인척으로 꾸려진)를 이끌고 공항에 마중을 나가곤 했었다.  그것은 일종의 아무나 할 수 없는 색다른 경험으로 취급되었다.  그만큼 공항은 누구나 출입할 수는 있어도 아무나 가지는 않았던 동떨어진 공간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약간의 과장을 더하면 공항을 찾는 일이 마치 국내의 어느 곳을 가기 위해 버스 터미널을 방문하는 것처럼 흔하디 흔한 일상이 되어버렸다.  시골에 사는 노인분들이 추수가 끝난 어느 가을날 관광버스를 타고 서울 나들이를 할 때도 그들의 관광코스에 공항을 끼워넣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으니 공항은 이제 일부러 시간을 내어 둘러보는 장소에서는 멀어진 셈이다.

 

『여행의 기술』 로 잘 알려진 알랭 드 보통은 2009년 여름 공항 소유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런던 히드로 공항의 소유주이며 BAA사의 최고경영자인 콜린 매튜스는 작가에게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은 채 공항에서 좀더 시간을 보내면 어떻겠느냐는 매혹적인 제안을 했고, 작가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전화를 건 사람은 자신의 회사가 최근에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런던에서 가장 큰 공항의 두 활주로 사이에 자리잡은 최신 탑승객 허브인 터미널 5에 작가 한 명을 일주일 동안 초대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이름도 멋지게 히드로의 첫 상주작가로 불릴 이 작가는 공항 시설의 전체적 느낌을 살핀 뒤, 출발 대합실의 D 구역과 E 구역 사이에 특별히 배치한 책상에서 탑승객과 직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책을 쓰기 위한 자료를 모으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p.11) 

 

작가는 공항과 공항 인근의 호텔에 머물면서 오고가는 여러 사람들과 공항에 근무하는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주변의 풍경들, 드넓은 공항의 구조물들을 스케치하듯 기록한다.  출발 라운지에서 이별의 키스를 하는 연인들의 모습과 공항 교회의 책임 목사, 비행기 조종사와 수하물 담당자 및 보안요원들.  스쳐지나가듯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에 대하여 작가는 자신만의 상상력과 위트를 더하여 그들을 묘사하고 있다.  작가가 만났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어쩌면 다시는 만나지 못할 일회성의 인연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여행도, 우리의 삶도 순간적이면서 동시에 단발성의 그 무엇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대합실의 분위기는 쓸쓸하다.  그러나 묘하게도 그 느낌은 자비롭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렇기 때문에 혼자만 외로울 경우에 겪을 수도 있는 불편이 없고, 그래서 역설적으로, 혼잡한 도시의 술집이 분명히 더 쾌활하기는 하겠지만, 그런 환경에서는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 방식으로 새로운 만남을 시도하는 것이 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밤이면 공항은 유목민의 정신을 이어받은 사람들의 본거지가 된다.  어떤 한 나라에 헌신할 수 없는 사람, 전통을 보면 뒷걸음질치고 안정된 공동체를 수상쩍게 여기는 사람, 따라서 다른 어느 곳보다 현대 세계의 중간지대에서, 등유 저장 탱크, 비즈니스 파크, 공항 호텔로 인해 풍경이 상처를 입은 곳에서 오히려 더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다."    (p.157) 

 

우리는 비록 '지구'라는 커다란 행성에 살고 있지만 매번 우리는 그 사실을 잊곤 한다.  때로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를 생각할 때, 작은 성냥갑 정도의 크기로 착각하여 답답함을 호소할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눈길이 닿지 않았던 곳, 우리가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 스치듯 지나쳤지만 주목하지 않았던 어떤 부분을 누군가 지적해준다면 지금 내가 머무는 시공간이 얼마나 넓은지, 앞으로 내가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문득 깨닫게 된다.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은 항상 멀리 있다는 착각, 내 주변의 것들은 모두 익숙한 것 투성이라는 불만은 알랭 드 보통의 이 책 <공항에서 일주일을>을 읽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것이다.  우리의 시선은 항상 먼 곳만 바라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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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신 -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김영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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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만약 우리나라 작가에 의해 씌어졌더라면 특정 종교단체에 의한 고발을 피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구속이나 적어도 벌금형을 면키 어려웠을 테고 말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 어떤 대상에 대하여 비상식적인 집착이 강하다고 보아야 한다.  어떤 상식의 틀에서 서로의 주장을 논하는 것이 아닌, 나(또는 내가 속한 조직) 아니면 적으로 간주되는 이런 비상식적이고 비민주적인(특히 종교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호전적이기도 한) 사회에서 우리는 살고 있는 셈이다.  적어도 내가 보는 견지에서는 그렇다는 얘기다.  그런 면에서 리처드 도킨스가 영국인으로 태어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나는 한때 주일 아침 미사가 끝난 어느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고, 그것이 곧 영성체를 할 때 신부님으로부터 건네받는 밀떡과 포도주를 눈치 보지 않고 먹을 수 있는 일종의 신분증과 같은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와 같은 커다란(?) 의미를 담은 행사는 이미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그 장면은 과거의 어느 한때(자신이 세례를 받았던)를 떠올리게 하겠지만 이제 막 교리 교육을 받기 시작한 예비신자에게는 부러움과 선망의 자리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어물쩡 다수의 편(전 세계 인구 71억 3천만 명 중 23억 5천사백만 명)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예비신자 과정을 철저히 받지 못한 탓인지 신의 존재를 확실히 믿느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여전히 회의적이다.  더불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나의 처지에 있어서는 프랑스의 위대한 수학자  블레즈 파스칼의 말을 인용할 수밖에 없다.  "당신이 신을 믿지 않았을 때, 당신이 틀리다면 영원한 천벌을 받을 것이고 옳다면 아무런 변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죽어서 신 앞에 섰을 때 신이 왜 자신을 믿지 않았느냐고 물으면 뭐라고 답할 것이냐는 질문에 대한 버트런드 러셀의 답변 또한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신이여, 증거가 불충분했습니다.  증거가요."  하느님은 과연 믿는 척하는 파스칼과 적어도 자신에게는 솔직했던 러셀 중 누구의 손을 들어줄 것인가? 

 

이 책의 저자인 리처드 도킨스는 초자연적 지성으로서의 신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우주를 창조했다는 신 가설에 대하여 역사적 사례와 과학적 논증을 통하여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다.  사실이지 나는 이 책의 처음 몇 장을 넘겨 보았을 때 이 책이 어떻게 출간될 수 있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종교로 인한 폐해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신권정치화 된 초강대국 미국의 현실을 감안할 때, 또는 전 세계 자본을 좌지우지하는 유대자본의 위력을 생각할 때 감히 이 양대 권력에 정면으로 맞설 수 있는 용기를 지닌 학자가 나타나리라고는 믿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것은 과학에 의해 밝혀질 먼 훗날의 이야기이거나 공상 과학소설에서만 등장할 이야기쯤으로 생각했었다.

 

종교란 필연적으로 세속적 이해관계와 결부될 수밖에 없고 산업자본주의 체제에서 종교는 더더구나 세속화 될 수밖에 없음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자본이 없는 종교는 한낱 미신에 불과할 뿐이고 언젠가는 소리도 없이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비근한 예로 우리나라 수도 서울의 시장을 지냈던 한 정치인은 서울을 하느님께 봉헌한다는 어처구니 없는 발언을 하지 않았던가.  그 발언을 한 정치인의 믿음과는 별개로 종교란 본디 세력을 넓힌다는 측면에서 다분히 정치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치권력화 된 종교는 브레이크가 없는 기관차처럼 위험하기 짝이 없다.  인간의 나약함을 강조하고, 인간성을 불신하고, 죽음에 대해 과도한 공포를 심어줌으로써 종교는 끝없이 성장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메카니즘을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다수의 편에 서서 자신의 안위를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은 결코 종교를 배신할 수 없다.  그것이 집단적 광기의 일종이라고 판명된다 할지라도.

 

"분명히 예외가 있긴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종교에 집착하는 주된 이유는 종교가 주는 위로 때문이 아니라 교육에 따른 무의식적인 수용, 그리고 대안(믿지 않음)에 대한 인식 부재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스스로를 창조론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틀림없이 그렇다.  그들은 그저 다윈의 놀라운 대안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을 뿐이다.  아마 인간이 종교를 '필요로 한다'는 같잖은 신화에도 같은 말이 적용될 것이다."    (p.588 '문고판 서문'중에서)

 

동물행동학뿐만 아니라 분자생물학, 집단유전학, 발생학 등 과학 전분야를 두루 섭렵한 진화생물학자인 저자는 옥스퍼드 대학교의 석좌교수를 지냈다고 한다.  세계적인 석학으로 추앙받고 있는 저자의 명성에 걸맞게 이 책은 다분히 도발적이면서도 인류가 형성한 광대한 지식의 총체를 담고 있는 듯하다.  나는 비록 이 책을 모두 읽었고, 많은 부분에서 동감하고 있지만 내 지식이 저자의 수준에서 한참 떨어지기 때문에 반대도, 찬성도 할 수 없는 입장이다.  제대로 된 비판은 정보나 지식의 비대칭성이 존재하지 않을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곰곰이 되짚어 보아야 할 것은 지능이나 교육 수준이 높을수록, 종교적이거나 어떤 '신앙'을 지닐 가능성이 적다는 사실이다.

 

자연현상의 하나인 '죽음'에 공포의 그림자를 덧씌움으로써 종교의 세력을 확장하려는 교묘한 술수나, 증명할 수도 없는 어떤 심판론으로 무신론자를 겁박하는 행위는 종교인의 시각에서도 불편하다.  나는 정말 신의 존재가 과학적으로 입증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것이 곧 믿는 척했던 나의 신앙이 올바른 선택을 통한 진정한 신앙인이 되는 출발점으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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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지금 '딴짓'을 하고 있나요 아니면 '딴일'을 하고 있나요?

 

언제부턴가 저는 '딴짓'과 '띤일'을 구분하여 사용합니다.

같은 의미라구요?  그럴 리가요.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아이들이 '딴짓'을 하면 천재가 되지만,

'딴일'을 많이 하면 바보가 된다는 것입니다.

 

가령 이런 것이죠.

어쩔 수 없이 떨어져 있는 연인이 멀리서도 서로를 그리워 하고 있다면

그들은 여전히 사랑하는 연인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러나 몸이 멀어진 것과 함께 마음도 멀어졌다면

그들은 이미 사랑과도 멀어진 것이겠지요.

 

눈치채셨나요?

네, 그렇습니다.

'딴짓'은 우리가 어려운 문제에 봉착했을 때

생각은 그 문제에 그대로 둔 채 몸만 움직이는 것이죠.

그러나 '딴일'은 경우가 아주 다르죠.

이미 우리의 관심은 그 문제에 있지 않고 새로운 일에

몰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천재들의 경우 '딴짓'은 일상적인 행위였습니다.

문제가 안 풀릴 땐 언제나 '딴짓'을 했었죠.

그러나 대부분의 요즘 아이들은 언제나 '딴일'을 합니다.

 

삶은 수많은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시로 '딴짓'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를 다 해결할 때까지 '딴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지금 '딴짓'을 하고 있나요 아니면 '딴일'을 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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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3-08-13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잘 배우고 갑니다.

전 딴짓을 하고 있네요.ㅋㅋㅋ

꼼쥐 2013-08-14 20:33   좋아요 0 | URL
딴짓을 하고 있는 하늘별님은 인생을 잘 살고 있는 것이겠죠. ^^
 

알라딘 서재 1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마치 제 생일처럼 기쁘군요. 알라딘 서재에는 워낙 쟁쟁한 분들이 많아서 참으로 많은 것을 배우곤 합니다. 이렇게 알찬 자리를 마련해 주신 알라딘 관계자들께 감사드리며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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