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 신경숙 짧은 소설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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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좋아하는 배우나 가수, 또는 작가가 일껏 모르고 지내다가도 한순간, 정말로 찰나와 같은 어느 한순간 '아, 저 사람도 늙는구나'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공인이란 본디 우리네가 나이를 먹는 것과는 사뭇 다르기에 하는 말이다.  그저 막연하게 '몇 살쯤 되었을 걸?'하면서도 주름기 하나 없는 탱탱한 피부를 보면 '내가 잘못 알았었나?'하고 의심하게 되는 것이 연예인의 나이이고, 작가의 나이가 아니던가.  그렇게 무심히 지내던 어느 날, TV 화면에 얼핏 스쳐 지나가던 그녀의, 또는 그 남자의 축 쳐진 목주름에 눈길이 닿았을 때, 그제야 비로소 나도, 내가 좋아하는(또는 좋아했던) 그 사람도 나이가 들었음을 실감하게 된다.

 

나는 신경숙 작가의 팬이다.  팬이라고는 하지만 요즘 아이들처럼 팬카페에 가입하거나, 얼굴도 모르는 카페 회원들과 벙개 모임을 하거나, 팬 사인회에 참석하기 위해 뙤약볕에 몇 시간씩 줄을 서는 것도 해본 적 없고, 근거리에서 얼굴이나 한 번 보려고 며칠씩이나 노숙을 불사한 적도 물론 없었다.  아무튼 나는 요즘 아이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렇게 조용히 신경숙 작가의 팬이라고 자처하면서 살았다  그런 까닭에 그녀가 쓴 글이라면 일부분만 읽어도 단박에 알아챌 수 있다고 장담했었다.  그러나 이 책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읽고는 그 자신감이 일정 부분 사라졌다.  아니, 어쩌면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이 없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동안 익숙하게 받아들였던 그녀만의 특징이 이 책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생경하고 낯설다고 느꼈다.  그러나 싫지 않은 변화다.  작가도 이제는 나이가 들었음이다.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라고 느꼈던 것은 글의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부드러워졌다는 점이다.  소재의 선택에서도 그랬지만 그동안 작가의 글에서 보여지던 인과관계의 논리성, 또는 날카로움은 찾기 어렵다.  사실 그간에 써왔던 작가의 글은 긴 호흡을 필요로 하는 장편소설이 대부분이었고, 그렇게 긴 글을 쓰려면 묘사의 적확성, 회화적인 글쓰기, 친근한 구어체 표현 등 작가의 타고난 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했었겠지만 작가는 그동안 자신의 능력을 무기처럼 사용한 면도 없지 않았다.  예컨대 주인공이 화가 났다면 그 원인이 무엇인지, 화가 났으니 그 주변 분위기는 어땠는지 등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묘사함으로써 독자들도 덩달아 화가 나도록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곤 했다.  그것은 흡입력과는 조금 다르다고 느꼈다.  작은 것도 쉽게 지나치지 못 하는 작가의 결벽쯤으로 여겨졌다.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단편소설집이라고도 말하기 어려운 아주 짧은 글들로 이루어졌다.  마치 그날 그날의 일기를 모은, 또는 손글씨로 꾹꾹 눌러 쓴 편지들을 모은 수필집처럼 보인다.  구성의 기승전결도, 문체의 긴박함도, 묘사의 치밀함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는 독자도 소설 속의 허구로서의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내 주변의 이야기, 오래 전의 내 생각인 양 가볍게 읽힌다.  작가도 이제는 편안해 보인다.  아니, 그렇게 느껴진다.

 

"패러독스나 농담이 던져주는 명랑함의 소중한 영향력은 나에게도 날이 갈수록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명랑함 없이 무엇에 의지해 끊어질 듯 팽팽하게 긴장된 삶의 순간순간들을 밀어내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글쓰기의 방향을 전면적으로 그쪽으로 옮겨갈 수는 없다.  첫째는 나의 능력 부족이고, 둘째는 나는 삶의 변화나 재발견 속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은 끝이 어찌 되리란 것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그 허망함을 등에 진 채로 기어코 저 너머까지 가볼 수밖에 없는 우리의 유한한 행보에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p.208 '작가의 말'중에서) 

 

작가는 한 서평지 편집장과의 인터뷰에서 '손바닥만한 글을 자유롭게 써서 연재를 하자'는 그의 제안과 그가 표현한 '손바닥만한' '자유롭게'라는 말에 끌려서 여기에 실린 스물여섯 편의 이야기가 탄생했다고 말한다.  쉽지 않았을 것이다.  타고난 나의 성향과는 정 반대의 길이 비록 쉽고 편한 길이라고 누군가가 말해준다고 할지라도 결국 나는 작가의 말처럼 끝이 어찌 되리란 것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저 너머까지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이 운명이고 숙명이다.  하고픈 말은 많은데 그것을 차마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속으로 삼키는 일은 또 얼마나 가슴 답답한 일이겠는가.

 

작가가 쓴 짧은 이야기들은 쉽게 읽힌다.  하나하나 따지지도 않는다.  그저 두루뭉술 넘어갈 뿐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어떤 편견이나 주관적 잣대에 의지하지 않은 채 피력한다는 것은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내가 사는 삶의 터전에서 보여지는 모든 것들이 소중하다고 느껴지지 않으면, 그 하나하나의 것들이 사랑스럽다고 느껴지지 않으면 나의 주관과 편견은 내가 보는 모든 것들에 스미게 마련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길가의 풀 한 포기에, 그 옆을 소리도 없이 오가는 개미 한 마리도 사랑스럽고 때론 가엾게 여겨질 때면 보여지는 것들에 더 이상 이유를 묻지 않는다.

 

"그런 날이 있다.  모든 것이 비 탓이라고 느껴지는 날, 혹은 눈 탓이라고.  다시 말하면 그저 무슨 탓을 하고 싶은 날.  그런 날은 웬만하면 사람을 만나지 말아야 한다.  평소에 잘 지내던 사람인데도 그가 하는 말이 이상하게 다 거슬려서 괜히 시비 걸고 싶어지니까"    (p.163  '봄비 오시는 날'중에서)

 

오늘 아침 산행길에서 이소(離巢)를 하는 어린 새의 날갯짓을 보았다.  생명이 자라는 모습은 언제나 대견하다.  그 끝이 어찌 되리라는 섯부른 예측은 생명을 대하는 예의가 아니다.  그저 가만히 지켜보는 것, 그 곁에서 조용히 있어주는 것, 그것만이 우리가 할 일이다.  삶이란 결국 경험하는 것이지 깨닫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 작가도 이제 나이를 먹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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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소금사막에 비가 내리면 - 테오에세이
테오 글.사진 / 삼성출판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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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스트 테오의 책은 처음이다.  사람 사이에서도 '첫만남'이 중요한 것처럼 한 작가가 쓴 여러 권의 책 중에서 어떤 책을 처음 읽게 되었느냐 하는 문제는 향후의 책읽기에 이런저런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나는 잘 알지 못하는 작가의 책은 신중하게 고르는 편이다.  처음에 받았던 인상은 쉽게 지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군가의 추천이나 우연히 읽었던 한 부분만으로 선택했던 책들 중에는 극과 극으로 나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아주 좋았거나 크게 실망했거나.

 

<당신의 소금사막에 비가 내리면>은 작가가 볼리비아를 여행하고 쓴 여행 에세이이다.  책은 제본에서부터 일반의 보통 책과는 사뭇 달랐다.  옆으로 넘기는 대부분의 책이 일반적이라면 이 책은 상하로 넘기도록 제본되어 있다.  마치 청첩장이나 연하장처럼 말이다.  세로보다는 가로 비율이 더 큰 사진을 선호하는 듯 보이는 작가의 취향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처음부터 끝까지 경어체로 씌어진 그의 글은 사춘기 소녀의 감성처럼 때로는 오글거리는 느낌이 없지 않았다.

 

"꼬로이꼬로 향하는 길만 위험한 것은 아닙니다.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어딘가로 이어진 길, 누군가에게로 향하는 길은 예외 없이 인생을 걸어야 한다는 사실.  삶 전체를 걸고 길에 올라야 한다는 사실.  그 정도 가치를 걸지 않고는 원하는 곳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사실."    (p.17 '죽음의 도로'중에서) 

 

'글쓰기'라는 것이 '말하기'와는 전혀 상반된 것이어서 때로는 한 글자도 쓰지 못한 채 시간만 죽이는 경우가 있다.  말이란 본디 하면 할수록 할 얘기가 더 많아지는 게 아니던가.  한동안 전화 통화를 하지 않았던 사람에게는 다시 전화를 걸기가 더더욱 어려워지는 것처럼 말하는 습관은 관성의 법칙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으려는 습성이 있다.  그러나 글쓰기는 쏟아지는 장맛비처럼 한동안 쉼 없이 터져나오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쨍쨍한 날만 지속되기도 한다.  내 의지만으로 그 시기를 조절할 수 없는 것이다.     

 

작가의 글은 계속된다.  그저 계속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멈추고 다시 시작했을 그 시간의 여백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가 향한 남미의 나라.  작가는 자신의 여행이 '사람을 여행하는 여행이자 사람이 궁금한 여행'이라고 했다.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여행에게로 향하는 것'이라고 했다.  여행지에서 부닥뜨리는 과도한 감상은 어쩔 수 없는 필연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독자의 감정에 불을 지피지 못한다면 그것은 오직 내 삶을 기록하기 위한 한낱 일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서울처럼 분주한 정글을 걷기 위해서는 더 많은 카카오가 필요한데도 나는 여전히 카카오를 찾지 못합니다.  구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에게 선물하지도 못합니다.  대도시를 걷는 사람들이 쉽게 피곤해지는 건 순전히 카카오를 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선한 카카오를 맛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똑같이 피곤하지만 대도시 사람들은 대정글 사람들보다 카카오만큼 더 고단합니다."    (p.142 '정글 과일 카카오'중에서)

 

나는 사실 볼리비아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  티티카카 호수가 있는 마을 코파까바나와 어디선가 주워들었던 소금 사막, 언제 적 일인지도 모르는 볼리비아 혁명 정도가 다일 것이다.  지구의 오랜 역사에서 비롯된 자연의 신비쯤으로 여겼던 우유니 소금 사막에 대해 작가는 자신의 느낌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지면에 적고 있다.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남미의 고원지대를 나는 전혀 상상할 수도, 공감할 수도 없었지만 사진에서 보여지는 황홀경에는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금 사막에 비가 내립니다.

떠날 수 있는 자유를 빼앗긴 것들은 죽음 이후에도 눈물을 흘립니다.  그렇게 쌓인 눈물이 모여 구름이 되면 소금 사막에 비가 내립니다.  소금 사막이 놓아주지 않아서, 진득하게 썩지 못해서, 떠날 수 없던 것들이 눈물을 흘려, 비로소 몸을 놓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비가 내리는 것입니다.

그제야 사막을 떠날 수 있는 것입니다.  소금 사막에 비가 내리면 기적이 시작됩니다.  사막이 호수가 되고, 오랜 슬픔이 호수를 떠나는 기적."    (p.258  '소금 사막에 비가 내리면'중에서)  

 

옛날 잉카문명이 번성했던 곳, 볼리비아.  우리보다는 조금 더 가난하고, 조금 더 순수하고, 조금 더 자연을 존중하는 듯 보이는 볼리비아의 사람들.  작가는 그 사람들 속에서 자신이 떠나온 서울의, 대한민국의 바쁜 일상과 아등바등 사는 사람들을 생각하는 듯하다.  그리고 여행자의 비현실적인 일상 속으로 독자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그 여유와 행복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행복은 일종의 서열과 같은 것이어서 내가 가진 행복의 서열이 어떤 사람들보다 우월하다 느끼면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자랑스럽게 행복했습니다.  도시 사람들은 조언합니다.  자기보다 높은 행복은 쳐다보지 말라고.  그러면 불행해진다고.  낮은 행복을 갖고 있으면서 높은 행복을 쳐다보는 건 삼가야 하는 거라고.  자기보다 낮은 수준의 행복을 보며 만족하며 살아가라고.  그것이 행복이라고.  그러나 나는 지금 다른 방식으로 행복합니다.  우월이 아니라 다름, 보다 우월해서가 아니라 남다르기 때문에 행복합니다.  다르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느낍니다."    (p.280  '소금 호텔에 밤이 내리면'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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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머 씨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장 자끄 상뻬 그림 / 열린책들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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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르르르!' 말매미 소리가 귓전을 울린다.  지난 주 월요일 아침 등산로에서 처음 들었던 매미 소리보다 조금은 우렁차게 변한 듯도 하고, 이따금 시끄러운 것도 같고, 월요일 이후로 매미 소리를 다시 들었었나 되짚어 보기도 한다.  그 매미 울음 소리 때문이었는지 머릿속으로는 낱글자들이 오그르르 몰려든다.  장마가 한창인 요즘, 맑은 햇살은 참 오랜만이다.  '매미들도 반가웠던 게지.' 생각했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두서없이 얽히는 이 오전의 헐떡임 속으로 한 권의 책이 틈새를 비집고 들어왔다.  <좀머 씨 이야기>.  한동안 잊고 지냈던 책이다.  책을 읽고 많은 생각들이 오갔지만 결국에는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었던 책들이 있다.  <좀머씨 이야기>도 그런 책이다.  넉넉 잡아 서너 시간이면 다 읽을 만큼 부담이 없었던 책.  그래서 더 생각이 많아졌는지도 모른다.  세어보지는 않았어도 줄잡아 서너 번은 읽지 않았겠어?  그런데도 리뷰는 한 줄도 쓰지 못했다고?  그랬다.  <좀머 씨 이야기>는 논리적인 언어의 흐름으로 정리되거나 저장되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의 이미지로만 기억될 뿐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 <좀머 씨 이야기>의 리뷰를 쓰고자 한다.  비논리적인 이미지를 글로 옮긴다는 것이 모험과 다름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1.  관계 맺기와 "나를 좀 제발 그냥 놔 두시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그 대부분이 언어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러나 자신의 말에는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빈말이 섞이게 마련이다.  예컨대 '언제 술이나 한 잔 하자'라든가 '오늘따라 옷이 멋져 보이는군요' 하는 식의 상투적인 말들은 그 말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좀머 씨 이야기>에서 작가는 이 빈말에 대한 폐해를 독자들에게 여러 번 주지시킨다.

 

""...그런 말들은 인간의 삶에서 만들어진 말들이 아니라, 질 나쁜 소설이나 터무니없는 미국 영화에서 생겨난 말들이니까 그런 말들을 똑똑히 기억해 두거라!"

그래서 <그러다가 죽겠어요>라는 따위의 말들을 아버지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박이 떨어진 도로에 이슬비가 내리던 날, 좀머 아저씨 옆으로 차를 몰면서 그런 틀에 박힌 빈말을 아버지가 열린 창문을 통해 큰소리로 외쳤던 것이다."    (p.34)

 

또 있다.  소설 속의 주인공인 내가 남 몰래 짝사랑하던 카롤리나의 빈말이 그것이다.  카롤리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아이들이 호수 윗마을에 살았고 나만 홀로 아랫마을에 살았기 때문에 하굣길에 카롤리나와 오붓한 시간을 갖는 것은 오직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카롤리나가 했던 <월요일에 너랑 같이 갈게!>라는 말에 나는 한껏 들뜨게 되지만 정작 월요일에 있었던 카롤리나의 말은 "나 오늘 너랑 같이 안가."였다.

 

"한참 동안 변명이 이어졌지만 갑자기 이상하게 귀가 멍멍하고 다리에 힘이 빠져서 그것을 머리에 기억해 두기는커녕 제대로 듣지도 못하였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는 그 애가 말을 끝낸 다음 갑자기 돌아서더니 윗마을 쪽을 향해 샛노란 옷을 휘날리며 다른 여자 아이들을 따라잡을 수 있을 만큼 잽싸게 달렸다는 것뿐이다."    (p.55)

 

마지막으로 풍켈 선생님의 말은 이 소설에서 극단적으로 작용한다.  결국 나는 풍켈 선생님의 말로 인해 삶에서의 모든 관계를 끊고자 자살을 결심한다.  물론 미수로 끝나지만 말이다.

 

"말도 안 되는 억지로 내게 누명을 뒤집어씌우고, 올림 바 건반 위에 구역질나는 코딱지를 붙여 놓은 미스 풍켈 선생님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내가 딱 한 번 필요로 하였을 때 도와줄 것을 간청하였건만 비겁하게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어긋난 운명의 수레바퀴가 돌아가는 모양만 지켜보았을 뿐 다른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세상사람들이 자비롭다고 하는 하느님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잘못되기를 바라는 그런 모든 것들에게 의리를 지킬 필요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토록 비열한 세상에서 노력하며 살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나말고 다른 사람들이나 그런 못된 악에 질식해 버리도록 두는 편이 더 낫지 않겠는가?  그런 사람들이나잘 먹고 잘해 보라지!  나를 포함시키지는 말고 말이다!  나는 앞으로는 결코 그 사람들이랑 같이 어울리지 않으리라!  이 세상에 작별을 고하리라!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리고 말겠다!  그것도 지금 당장!"    (p.83)

 

2. 인간 소외와 편견

   

<좀머 씨 이야기>는 화자인 '나'의 성장 과정을 담고 있다. 그는 아주 어린 꼬마에서부터 고등학교에 다니는 청소년으로 자라난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제목은 <좀머씨 이야기>인데 말이다.  이 책에서 좀머씨는 차창에 스쳐가는 풍경처럼 그려질 뿐이다.

 

"마을에서 좀머 아저씨의 이름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이름이 페터 좀머인지 혹은 파울 좀머인지 아니면 하인리히 좀머인지 혹은 프란츠 크사버 좀머인지 알지 못했으며, 좀머 박사인지 혹은 좀머 교수인지 아니면 좀머 박사 교수인지도 모르는 채, 사람들은 그를 유일하게 <좀머 씨>라는 이름만으로 알고 있었다.  좀머 아저씨의 직업이 무엇인지 아니면 무슨 직업을 가지고 있었는지 혹은 과거에 직업을 가지고 있기는 했었는지조차 아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p.15)

 

좀머 아저씨는 긴 호두나무 지팡이를 짚고 텅 빈 배낭을 멘 채 밤이고 낮이고 걷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가 어디를 다니는지, 목적지가 어디인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잰 걸음으로 다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좀머 씨는 한마디로 마을 사람들로부터 소외된 인간이었다.  으레 그렇듯 소외된 인간을 향한 무수한 억측과 소문이 따라붙는 것은 좀머 씨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리타 슈팅엘마이어가 말해주었는데요.  좀머 씨는 항상 경련을 한대요.  온몸이 다 떨린대요.  리타가 그러는데 꼭 안달뱅이처럼 근육이 다 움직인대요.  의자에 앉으려고만 해도 몸이 먼저 떨린대요.  그래서 자기가 떠는 것을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으려고 항상 걷는 거래요."    (p.38)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편견은 그것이 자발적이든 또는 그렇지 않든 간에 언제나 부정적이다.  소외된 사람들의 삶은 항상 불행할 것이라는 삶 전체에 대한 평가에서부터 혹시 범죄를 저지르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에 이르기까지 사실이 아닌 주관적 판단으로 가득 차 있다.  어떤 경우에는 확신에 차서 말하는 경우도 있다.  과연 그럴까?  사람들과 관계를 맺지 않고 사는 사람들은 모두 불행한가?  그렇지 않다.  다만 그렇게 믿을 뿐이다.  인간이 겪는 대부분의 스트레스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오지 않던가.

 

좀머 씨는 결국 호수에 빠져 자살한다.  소설 속의 '나'는 먼 거리에서 좀머 아저씨의 마지막 모습을 그저 지켜만 보았을 뿐 '좀머 아저씨!  정지!  뒤로!'라고 소리치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청하러 마을로 달려가지도 않았으며, 아저씨를 구할 수 있는 배나 뗏목을 찾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한 순간에 아저씨의 모습은 사라졌다.  밀짚모자만이 동그마니 물 위에 떠 있었다.  그리고 무지하게 길게 느껴졌던 30초 혹은 1분이 지난 다음 몇 개의 물방울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을 뿐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밀짚모자만이 아주 천천히 남서쪽을 향해 떠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어둑어둑한 원경으로 사라지기 전까지 오랫동안 그것을 쳐다보았다."    (p.111)

 

어떤 목적이나 희망도 없이 무작정 걷기만 하는 좀머 씨는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떠올리게 한다.  반복되는 그 행위가 바로 우리의 삶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누군가를 깊이 이해한다는 것은 언어를 통하여 단순히 관계 맺는 것으로 가능한 일은 결코 아니다.  소외된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누군가의 삶을 깊이 이해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비록 그의 이름을 정확히 알고, 그와의 만남이 잦았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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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 끝에 네가 서 있다면 좋을 텐데 - 최갑수 골목 산책
최갑수 글.사진 / 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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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골목을 걷고 있노라면 시간의 회벽을 따라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추억의 한 장면을 만나곤 한다.  골목을 따라가면 언제나처럼 작은 공터가 나오고 왁자한 아이들이 그곳에서 숨바꼭질을 하거나, 비석치기를 하거나, 양갈래머리를 한 한 무리의 여자아이들이 고무줄 놀이를 하고 있다.  때로는 무리에 속하지 못한 어린 아이들이 놀이에 끼이고 싶어 이리저리 기웃대며 놀이를 방해하지만 저녁 어스름이 질 때까지의 골목은 온통 아이들 차지였다.  어둑어둑 해가 지면 아이들은 아쉬움만 한아름 내려 놓고 공터를 떠난다.  호박꽃이 환한 저녁이면 공터 한켠에 놓인 평상으로 더위에 지친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고 밤새 모깃불이 타올랐었다.  이따금 어른들의 이야기가 호박 넝쿨처럼 길게 이어지는 날이면 졸음에 겨운 아이들은 제 어미의 무릎을 베고 곤한 잠에 빠져들고 풀벌레 소리만 별처럼 가득했었다.

 

골목에서는 그때 맡았던 제 어미의 땀내음처럼 아릿한 향수가 밀려오곤 한다.  낮은 담장 넘어 손바닥만한 마당 한켠에선 걸레를 빠는 누이의 모습.  일렁이는 검은 머릿결에 함초롬한 가을 햇살이 소복소복 쌓일 것 같은 오후.  영훈, 종애, 영숙, 정태 같은 낯익은 이름들이 어디선가 들려올 것만 같다.  '아무개야!  밥 먹어라!' 하는 메아리가 앞산 머리에 쩌렁쩌렁 울릴 것만 같다.  손을 뻗으면 그 정겨운 풍경이 하마면 잡힐 듯한데...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골목의 옛 모습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까치발을 뜨면 안마당까지 훤히 보이던 정겨운 풍경도, 깡통을 차며 놀던 작은 공터도, 세월의 더께가 일던 담배가게도 이제는 모두 아슴아슴 멀어지고 있다.  여행작가 최갑수의 <이 길 끝에 네가 서 있다면 좋을 텐데>는 그때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최갑수 골목산책'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나즈막한 슬레이트 지붕이 골목으로 나란히 펼쳐지는, 골목을 따라 코스모스 여린 데궁이 일렁일 것만 같은 그때의 풍경 속으로 안내한다.

 

"골목을 다니다보면 순수한 사랑으로만 가득 찬 곳에 들어서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것은 바람으로 흔들리는 미루나무의 움직임처럼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다.  나는 할머니들과 아이들이 만들어내는 풍경을 지켜보며 보일러로 따뜻해진 방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있을 때의 느낌을 받았다.  온통 평화와 사랑으로 충만하다는."    (p.240)

 

서울의 부암동이나 북촌 한옥마을에서부터 통영의 동피랑, 청주의 수암골, 부산의 태극도마을, 대전의 복지관길 등 저자의 발길은 전국을 누비고 있다.  건물의 높이가 1m씩 높아질 때마다 남보다 두세 걸음쯤 앞서 걸어야만 했던 우리는 골목의 여유란 그저 게으름의 상징, 청산해야 할 구태의 하나쯤으로 여기며 살았는지도 모른다.  어미의 시큼한 땀내음이 물씬 풍겨오던 삶의 터전이 사라진 자리에는 생명의 기운이라고는 도통 찾을 길 없는 콘크리트 건물이 위압적인 자세로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다.  이렇듯 풍경의 변화는 사람들의 일상을 생경하게, 또는 살풍경하게 만들어 놓았다.  추억은 오직 마음 속의 그리움으로만 존재하는 추상적 개념이 되고 말았다.

 

"나는 지금 수암골 골목에 서 있다.  주홍빛 불이 들어오고 있는 가로등 아래로 단발머리 여자 아이가 뛰어간다.  먼 지붕 위로 별이 돋고 어디선가 졸리운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이 모든 것은 익숙하지만 새롭게 다가온다.  익숙한 풍경을 새롭게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한 곳.  그곳이 바로 골목이다."    (p.359)

 

언젠가 댐 건설로 인해 자신이 살던 고향을 잃고 실향민 아닌 실향민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만난적이 있다.  그는 호수 어딘가를 가리키며 자신이 살던 곳이라고 말했었다.  그때 나는 느꼈었다.  '아, 개발이라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아픔이 되는구나!'하고 말이다.  개발이라는 것이 누군가의 삶의 흔적을 송두리째 앗아갈 수 있음을 그때 알았다.  내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의 체취는 이제는 더 이상 찾기어렵다.  새로이 태어나는 자식들에게 제 부모의 흔적을 지우도록 강요하는 사회를 선진국이라 할 수 있을까.  골목을 보존해야 하는 첫째 이유는 거기에 있지 않은가.

 

뽀얀 가을 햇살 속에 온종일 펄럭였던 이불 홑청처럼 순수한 마음이 흘러가던 곳.  그곳이 바로 골목이었음을 이 책을 읽고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모퉁이를 돌면 백구가 컹컹 짖던 내 어릴 적 친구의 집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이제는 몇 남지도 않은 골목이 부디 무사하기를...  그곳에 흐르던 순수의 마음들이 계단을 오르고, 공터를 돌아 고샅고샅 흩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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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글을 쓰고, 그 글을 '공개'로 설정해 놓았다면

대부분의 블로거들은 자신의 글을 읽은 다른 블로거,

또는 알 수 없는 누군가의 반응에 대해 한번쯤은 의식할 듯합니다.

저만 그런가요?(그렇다면 이 글은 순전히 제 주관적인 견해가 되겠지만)

 

아무튼,

저도 가끔은(자주는 아닙니다) 제가 쓴 글에 대해 다른 사람의 반응을

살필 때가 있습니다.  저는 누가 뭐래도 번잡한 것을 싫어하고,

명예욕이 넘치거나 시기심이 많은 것도 아닌, 조금은 내성적인 성격인데도 말입니다.

<팡세>를 쓴 파스칼도 자신이 쓴 글에 대해 독자의 반응을 의식한 듯합니다.

대문호 파스칼과 저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우습다구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저 시간이 날 때 재미삼아 끄적거리는 아마추어의 입장이니까요.

 

그런데 말입니다.

아직도 제가 궁금해 마지않는 점은 제 글을 읽는 독자의 반응을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요일에 따라 블로그 방문객의 수에 약간의 편차가 있다고 할지라도,

글을 쓰는 제 입장에서 보면 그날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또는 시간적 여유의 유무에 따라(조금 한가한 날은 제가 쓴 글을 훑어 보고 고치기도 함),

좋은 글(제가 보기에 그래도 괜찮다 싶은)과 나쁜 글(형편없어 보이는)로 나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저의 판단은 번번이 빗나가곤 합니다.

 

전혀 공을 들이지 않았던 글('전혀'는 아니겠네요. 조금의)은 오히려

폭발적인 반응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많이 읽히는 듯 보이는 반면

꽤나 공을 들이고 스스로도 만족해 하던(자뻑인가요?) 글은

그닥 인기가 없더군요.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죠.

오히려 일관되게 그랬었다면 저도 이렇게까지 궁금해 하지는 않았을 테죠.

참 알 수 없는 일이죠?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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