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의 힘 - 반복되는 행동이 만드는 극적인 변화
찰스 두히그 지음, 강주헌 옮김 / 갤리온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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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품절


아주 어렸을 때를 생각하면 모든 것이 분명해지곤 한다.

그 나이 또래에는 세상에 대한 편견이 지금의 내 나이에 비해 턱없이 적었다는 애기일 수도 있다.  게다가 몸에 착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모르는 습관이나 가치관은 아직 형성도 되지 않던 시기였으니 사람에 대한 편견도 있을 리 없었다.  세상은 오직 기분 좋은 것과 그렇지 못한 것, 맘에 드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또는 예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등 몇 가지 범주 안에 다 쑤셔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고, 세상 경험이 늘어나면서 어렸을 때의 기준으로는 도저히 가려낼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아졌다.  그때에 비하면 세상도 조금쯤 달라졌겠지만 그보다는 내 자신의 변화가 주요 원인이지 싶다.

 

세상을 바라보는 잣대는 저마다 다를 것이다.  아마도 열이면 열 똑 같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지 않을까?  세상에 대한 평가 기준이 되는 가치관이나 세계관이 오직 개인의 지식 수준이나 성장 배경 등에서 비롯된 지적 영역으로 한정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어쩌면 편협하고 단편적인 추론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우리의 몸에 자신도 모르게 체득된 습관이야말로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개인의 호불호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습관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습관에 대해 쓴 책은 셀 수 없이 많지만 그 중에서 유난히 나의 눈길을 끌었던 책은 이소무라 다케시의<이중세뇌>와 최근에 발간된 찰스 두히그의 <습관의 힘>이다.  다분히 주관적인 견해이지만 이 두 권의 책은 상호 보완적인 면도 있고, 습관을 주제로 한 다른 어떤 책보다도 설득력이 있다.  오래 전에 읽었던 <이중세뇌>는 간단하게 리뷰를 올렸었다.( http://blog.aladin.co.kr/760404134/4875257)  <이중세뇌>가 습관의 변화를 꾀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어떤 강박이나 집착에 의해 자신의 의지가 금세 꺾이고 마는 마음의 함정, 즉 의존증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반면 <습관의 힘>은 습관의 형성 과정에 있어 그것이 어떻게 저장되고 발현되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두 책이 서로 상호 보완적이라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습관의 힘>이 주로 신체적(주로 뇌)인 면을 다루고 있다면 <이중세뇌>는 주로 의지와 관련된 정신적 측면을 다루기 때문이다.

 

이 책 <습관의 힘>을 쓴 찰스 두히그는 하버드 MBA 출신의 뉴욕타임스 심층보도 전문기자라고 한다.  저자의 의도는 분명해 보인다.  습관이 형성되고 발현되는 원리를 이해하면 좀처럼 변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습관도 쉽게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우리의 습관은 '신호'와 '반복행동', 그리고 '보상'으로 이루어지며, 이렇게 체득된 행동 덩어리들은 뇌의 기저핵(basal ganglia)에 저장된다고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저장된 행동 덩어리들을 뇌는 단순히 그때 그때의 상황에 맞게 선택하여 주고 실행만 명령할 뿐 행동 과정에서는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습관이 형성되는 이유는 우리 뇌가 활동을 절약할 방법을 끊임없이 찾기 때문이다.  어떤 자극도 주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두면 뇌는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거의 모든 일을 무차별적으로 습관으로 전환시키려고 할 것이다.  습관이 뇌에게 휴식할 시간을 주기 때문이다.  뇌가 활동을 절약하려는 본능은 우리에게 상당히 유리하게 작용한다.  뇌가 효율적이면 그만큼 뇌에 필요한 공간이 줄어들고, 따라서 머리 크기도 작아질 수 있다."    (p.39)

 

저자는 일련의 습관 고리에서 특히 '반복행동'에 주목하고 있다.  어떤 신호에 의해 주어진 '반복행동'은 물질적인 보상이나 칭찬, 자기만족 등과 같은 감정적인 대가에 의해 습관으로 고착화하는데 우리가 신호를 의식함으로써 지금까지 길들여진 '반복행동'을 쉽게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외로울 때마다 술을 마신 사람이 있다면 '외롭다'는 신호를 인식했을 때 술을 마시던 '반복행동'을 비슷하거나 동일한 보상이 주어지는 다른 '반복행동'을 함으로써 습관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저자는 또한 습관 고리에 관여하는 정신적 요소로서 '열망'(craving)을 꼽고 있다.  누구나 알고 있듯 집착이나 열망은 생각보다 강력하다.  아무튼 이러한 습관 고리의 순환을 통하여 형성된 패턴화 되고 정형화 된 습관을 '반복행동'만 바꿔줌으로써 습관의 변화를 꾀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이미 저장된 행동 덩어리(습관)들이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언제든지 다시 발현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그러므로 저자는 변화에 대한 확신과 습관의 변화가 자신의 삶에 긍정적으로 작용하리라는 강한 믿음이 있어야만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책에서는 또한 개인의 습관을 확장하여 기업과 사회에 있어 작은 습관의 변화가 얼마나 큰 결과를 가져다 주는지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습관을 바꾸기 위해서는 습관을 바꾸겠다는 결심이 먼저 있어야 한다.  습관의 반복행동을 유도하는 신호와 보상을 알아내고, 대안을 찾으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 통제수단이 있다는 걸 깨닫고, 그 통제수단을 의식적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책에서 나는 습관의 통제가 가능한 이유를 설명하는 데 주력했다."    (p.372)

 

그렇다.  자신이 갖고 있는 나쁜 습관을 인식하고 좋은 습관으로 바꾸려는 노력은 그 결심이 없다면 애초부터 가능하지 않다.  저자는 이러한 노력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힘들거나 어렵지 않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개인이든 기업이든 성공과 실패의 이면에는 핵심 습관이 있게 마련이다.  자기도 모르게 체득된 나쁜 습관을 버리고 운동이나 독서 등 좋은 습관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뇌는 일단 저장된 습관을 어떤 가치 판단에 준하여 실행을 금하거나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가꾸겠다는 원대한 꿈이 없다면 좋은 습관과 나쁜 습관의 구별조차 어렵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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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 속을 걷다 - 이동진의 영화풍경
이동진 지음 / 예담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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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항상 현재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밀려난다.  마치 견우와 직녀가 오작교를 사이에 두고 그리워하듯이.  어쩌면 우리 의식의 작은 틈일 수도 있는 이 간격을 메울 방법은 이 세상에 없다.  우리는 딱 그만큼의 거리에서 미래를 바라볼 뿐 아무리 손을 길게 뻗어 잡으려해도 도저히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태어날 때도 그랬고, 죽음에 가까울 때도 그럴 것이다.  결국 미래는 우리 의식 속에서 자라는 신기루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에 빠진 남녀는 환상 속의 미래를 좇는다.  금방이라도 장밋빛 미래를 움켜잡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들에게 현재는 너무도 짧은 찰나의 시간이므로.

 

결혼 전에 아내와 함께 본 영화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우리는 각자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고, 일이라는 핑계로 서로에게 대한 잠깐의 무관심이 그럭저럭 용서되었고, 사는 지역이 달랐으니 만들어낼 핑계도 무궁무진한 것처럼 보였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너무나 오래 이어진 연인이었다.  마치 쾌쾌한 곰팡내가 날 정도의 긴 시간을 같이 보내다 보면 습관처럼 익숙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조바심내며 급히 서둘러야 할 이유는 하나 둘 사라지게 마련이었다.  언젠가 아내의 권유로 <비포 선 라이즈>를 함께 보았고, 속편인 <비포 선셋>이 만들어지기 전에 우리는 결혼했다.

 

이동진의 영화 에세이 <필름 속을 걷다>는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게 한다.  지금도 멜로 영화 베스트의 순위 안에 들 만한 영화들이 이 책에서는 여러 편 등장한다.  이 책의 1부인 "흔적을 찾다"에서 소개하는 영화는 <러브레터>, <비포 선셋>,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이터널 선샤인>, <러브 액츄얼리>이다.  제목만 들어도 어쩐지 달콤하고 로맨틱한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는가.  그러나 2부 "리얼리티를 찾다"에서는 1부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영화들이 소개된다.  <화양연화>, <행잉록의 소풍>,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나니아 연대기>가 그것인데 작가는 영화 촬영지 곳곳을 누비며 몽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곳의 현실과 대면한다.

 

"고통스러운 나날이 아름다운 시절로 부활하는 것은 언제나 '먼 훗날'이다.  현재 시제에서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인간은 결국 과거 시제에서 추억을 발명함으로써 스스로에게도 아름다웠던 시절이 있었다고 자위한다.  삶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이 언제나 과거라는 사실 속에 인간의 근원적인 절망이 있다.  영화 <화양 연화>는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로 간 차우가 오래된 석조건물의 구멍에 대고 뭔가 속삭인 뒤 진흙으로 메우는 상징적인 장면으로 끝난다.  그들의 사랑이 안타깝게 끝난 먼 훗날의 일이었다."    (p.121)

 

3부의 "시간을 찾다"는 <글루미 선데이>로 시작된다.  뒤이어 <쉰들러 리스트>, <티벳에서의 7년>, <장국영을 기억하다>, <베니스에서 죽다>가 차례로 소개된다.  작가는 '현실과 영화는 서로 어깨를 겯고 낭만을 희구한다.'고 썼다.  그러나 현실은 알 수 없는 시간대를 만났을 때 소리도 없이 파편처럼 부서진다.  너무도 허무하게.  쇠보다 더 단단하고, 노끈보다 더 질기게만 보였던 현실이 한순간에 흔적도 없이 스러지는 모습은 아득하다.  그제서야 우리는 자신이 딛고 있던 현실을 되짚어보곤 한다.  그것은 마치 앞으로만 내달리던 여름 햇살이 건물 기둥의 방해물을 만났을 때 투정을 부리듯 밝게 부서지는 모습과 흡사하다.  기둥 뒷면의 그림자는 부서지는 햇살로 인해 비로소 그 형체를 드러낸다.

 

"휑한 축제의 장소들은 그저 축제의 꿈만을 꾸며 시간을 견디는 듯 느껴진다.  어쩌면 아센바흐도 그랬는지 모른다.  여행은 삶에서 축제같은 시기일 테니까.  사람들이 하나씩 떠나가는 여행지 베니스에서 아센바흐는 다시금 마음의 축제가 시작될 순간만을 고집스럽게 기다리며 두고 온 일상을 까무룩 잊는다.  그러나 아무리 감미로운 여행도 생활 자체일 수는 없고, 아무리 신나는 축제도 삶 전체일 수는 없다.  그게 아센바흐의 비극이었다."    (p.293)  

 

영화관을 나설 때마다 느꼈던 몽환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는 휴일 저녁의 느낌과 무척이나 닮아 있다.  알 수 없는 무력감에 몸은 이미 천 근 만 근이다.  그 경계를 지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변하지 않은 일상에 금세 뒤섞이겠지만 말이다.  자신이 본 영화의 촬영지를 찾아 떠나는 여행은 과거라는 돌이킬 수 없는 시간 속으로의 회귀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작가의 시선은 언제나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사랑도 내내 그런 것이리라.  사랑 한가운데에 있는 연인은 언제나 미래를 꿈꾸고 사랑을 잃은 연인은 언제나 과거로 회귀한다.  사랑이라는 단어에는 현재라는 시제가 언제나 빈 자리로 남아 있다.  그리고 '먼 훗날' 과거와 미래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순백의 현재와 조우하는 날이 오면 하루는 마냥 길게 늘어진다.  하루를 마감하는 석양의 긴 그림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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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으면 - 낮의 이별과 밤의 사랑 혹은 그림이 숨겨둔 33개의 이야기
황경신 지음 / 아트북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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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에 발길을 끊은 지 오래 되었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마치 그림에 조예가 깊거나 그림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오해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그림에 대해 별반 아는 게 없고, 그림도 잘 그리지 못한다.  다만, 한때 친했던 친구가 그림을 그리고 있었을 뿐이다.  그 친구는 나와는 사뭇 달랐고, 조금 특별했고, 그림에 대한 열정이 넘쳐났으며, 세상의 편견과 오해에 대해 신경쓰지 않는 듯 보였다.

 

대학 시절, 그 친구가 다녔던 대학의 캠퍼스 안에는 작은 연못이 하나 있었다.  무더웠던 어느 여름날 그 친구는 옷을 모두 벗은 채 그 연못에서 수영을 했다.  단지 더위를 식히기 위해.  친구는 그 일로 학교에서 퇴학을 당했고, 친구도 그 대학에는 더 이상 미련이 없는 듯했다.  갑작스레 결혼을 했고, 한동안 정신과 치료를 받았고, 예정에도 없던 아이가 태어났다.  삶의 무게 때문이었는지 아주 가끔씩 보았던 친구의 모습은 볼 때마다 여위어갔다.

 

제 멋대로 자란 장발에 덥수룩한 수염으로도 그의 야윈 얼굴과 나이에 걸맞지 않게 깊이 패인 주름을 가리지는 못했다.  그가 살던 도시의 번화가 한 귀퉁이에 작은 화실을 내고 아이들을 가르쳤었다.  그림을 배우러 오는 아이들은 많지 않았다.  친구들과의 술자리에 띄엄띄엄 얼굴을 비치던 친구는 그때마다 정신을 놓을 정도로 심하게 취하곤 했다.  형편이 어려웠던 친구는 그가 살던 아파트를 처분하여 단독주택 반지하로 거처를 옮겼다.  집들이를 한다기에 겨우겨우 찾아갔던 그의 집.  그때 나는 빛도 잘 들지 않는 그의 집에 집들이 선물이라며 창문에 롤스크린을 달아주었다.  친구라고는 달랑 나 혼자였던 그날의 집들이에서 그의 아내는 구운 고등어와 김치 몇 가지를 올린 밥상을 내오며 그냥 가겠다는 나를 한사코 붙잡았었다.

 

IMF 금융 위기는 그의 삶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세상과 한걸음 떨어져 살던 그 친구에게 'IMF'는 멀리 비껴가는 한 줄기 바람이려니 생각했었다.  그렇게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도 결혼을 했고, 한동안 바쁘게 지냈고, 가까운 곳에 살던 친구들 몇몇만을 줄기차게 만났을 뿐이고, 그렇게 잊고 지냈다.  누구에게나 그렇지만 내게도 많은 일들이 있었고, 사는 것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을 즈음, 우연히 방문했던 또 다른 친구의 사무실에서 들었던 그 친구에 대한 소식은 한동안 나를 얼어붙게 했다.

 

살아서는 끝내 벗어나지 못했던 반지하의 단칸 셋방에서 그 친구는 끝내 목을 맨 채로 세상릉 떠났고, 그렇게 그는 빛도 잘 들지 않던 그 방을 스스로 벗어났다고 했다.  아이 둘과 아내를 남겨둔 채.  그 방에서 마지막으로 그렸다는 자화상을 나는 끝내 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친구로 인해 가끔씩 찾던 갤러리도 발길을 끊었다.

 

황경신 작가의 <눈을 감으면>을 읽으면서 나는 내내 그 친구를 생각했었다.  화가에게 그림은  숨겨진 삶의 이야기이며, 어쩌면 그것은 지나온 세월의 종지부이자 새로운 삶의 출발점일 터였다.  황경신은 그 아픈 상처를 자신의 상상력으로 끄집어내어 독자들에게 들려주려 한다.  영국 화가 조지 프레데릭 와츠가 그린 <희망>으로 이야기는 시작되었다.('프롤로그를 대신하여')  이어 펠릭스 발로통의 <옷장을 뒤지는 여자>와 그녀가 선택한 다른 7점의 작품에서 보았던 이별 이야기, 앙리 팡탱라투르의 <밤>을 비롯한 8점의 작품에서는 슬픔을, 장-밥티스트 그뢰즈의 <깨진 거울>과 다른 11점의 작푼에서는 성장을, 그리고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음악 수업>과 다른 7점의 작품에서는 사랑을 그리고 있다.  마지막으로 작가는 이인의 <자화상>과 <화색, 비움>을 배치하여 에필로그를 대신하고 있다.

 

나는 책의 첫장부터 마음을 잡지 못하고 서성였다.  밤이면 내 숙소에서 들리는 개구리 울음 소리가 마치 레퀴엠처럼 여겨지게 했던 이 얇은 한 권의 책이, '이별'부터 시작하던 감정의 이입이,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세월의 비가역성이 나를 슬프게 했다.

 

"'희망'이라는 단어가 즉각적으로 '슬픔'을 떠올리게 했던 건, 그 시절의 운명이 나에게 혹독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었다.  시간이 흐른 후에 내린 결론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건 진실이 아니었다.  희망의 뿌리는 슬픔이며 슬픔에서 벗어난 희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희망은 슬픔 그 자체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유를 따져보자 막막해졌다.  논리적으로도 감성적으로도 설명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p.5)

 

그리고 에필로그에서 이목구비가 없이 실루엣의 형체만 그린 이인의 <자화상>은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눈 앞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내가 친구를 만나지 못했던, 어둠에 묻힌 몇 해가 이인의 어두운 자화상 속에서 아픈 색깔로 채색되고 있었다.  한 사람의 삶은 그 <자화상> 속에 빗줄기처럼 녹아들고 있었다.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을 때, 당신을 본 적이 있다.  새벽이었다.  난폭한 꿈에서 밀려나온 나는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고 싶어서 창문을 열었다.  지하 세계로부터 스멀스멀 피어올라온 것 같은 회색빛 안개가 낯선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습기를 잔뜩 품은 바람이 불어와 내 뺨과 머리카락이 금세 축축해졌다.  당신은 골목 모퉁이 아직 불이 꺼지지 않은 가로등 아래에 서 있었다.  사람이라기보다는 그림자의 형체였다."    (p.227)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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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에 한번은 프라하를 만나라 - 천 년의 세월을 간직한 예술의 도시 일생에 한번은 시리즈
김규진 지음 / 21세기북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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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을 써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자신이 읽었던 책에 따라, 또는 그날 그날의 감정에 따라 자신의 글은 천차만별로 다르게 씌어진다는 것을.  간혹 본인 스스로도 놀랄 때가 있다.  어떻게 이 작은 체구에 그렇게 많은 감정들이 숨어 있었을까? 하고 말이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는 게 사실이다.  이렇게 많은 감정들이 있으니 그때 그때마다 적당한 감정을 찾아내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는 생각에.  그럴라치면 누군가 내 감정의 지도를 그려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바라게 된다.  배낭여행자들이라면 누구나 <론리 플래닛>을 참고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일생에 한번은 프라하를 만나라>를 읽었다.

 

여행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책에 빼곡히 적힌 낯선 지명과 인명이 다소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이라는 것은 어차피 필요에 따라 읽히는 법이지만 동유럽의 낯선 지명은 입에 착착 달라붙는 것도 아니어서 우리에게 조금은 익숙한 영어권의 지명에 비해 조금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이 책의 저자인 김규진 한국외대 교수는 1990년 여름에 프라하를 방문한 이래 금년까지 25번 이상을 다녀왔다고 하니 그에게는 모래알처럼 따로 노는 그 이름들이 낯설지는 않을 터이지만 말이다.

 

"오늘날 프라하 국립미술관은 체코와 중부유럽의 고대와 중세의 미술을 전시하는 성 아그네스 수녀원, 바로크와 고전주의 미술을 전시하는 슈테른베르크 궁전, 바로크 미술을 전시하는 슈바르첸베르크 궁전, 19세기 보헤미아 미술을 중점적으로 전시하는 성 게오르크 수도원, 근현대 미술 중에서도 체코 큐비즘을 전시하는 검은 성모마리아의 집인 입체주의 미술관, 20세기와 21세기 미술을 전시하는 킨스키 궁전 등 일곱 곳의 전시관으로 이루어진다."    (p.69)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음악과 문학의 숨결이 살아 있는 프라하', 2부 '역사와 문화의 중심지, 보헤미아', 3부 '도시마다 색다른 매력을 감춘 모라바와 슬레스코'가 그것이다.  체코에 대해 내가 아는 상식은 극히 미약하다.  지금은 체코 시민권이 박탈된 밀란 쿤데라의 출생지라는 것, 일생 동안 프라하에 살면서 많은 작품을 썼던 카프카, 교향곡 <신세계>를 작곡한 드보르자크의 출생지라는 것, 그리고 영화 <프라하의 봄> 등 내가 아는 것들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단편적인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보여주는 프라하의 속살은 더없이 달콤하고 매혹적인 것이었다.  유럽 심장부의 보석, 모든 도시들의 어머니, 황금의 도시, 에로틱의 도시, 매혹의 도시 등 프라하를 이르는 수많은 수식어는 단지 먼 이국땅으로서의 한 나라로만 여겨지던 체코의 이미지를 단숨에 바꿔놓았다.  마치 살아 숨쉬는 아름다운 여인과 같은 체코는 방문객 누구나 그 매력에 빠질 수밖에 없는 듯 보였다.  일단 한번 체코의 아름다운 자연과 잘 보존된 문화유산에 흠뻑 취해본 방문객이라면 그 마성의 매력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듯하다.

 

"브레츨라프를 벗어나 레드니체 발티체로 가는 길에 붉은 벽돌로 된 네오고딕 양식의 아담한 교회가 눈길을 끈다.  성모마리아 방문 교회로, 리히텐슈타인 가문이 세운 것이다.  다양한 채색 유리창이 화려한데, 원래 고딕 양식의 교회가 있던 자리에 200여 가지의 다양한 벽돌로 19세기 말에 만든 것이다."    (p.264)

 

체코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무한한 사랑을 품은 작가는 독자들에게 소개할 것들이 넘쳐나는 듯 보인다.  모르긴 몰라도 이 책이 발간되기 전에 작가가 썼던 초고는 이 책의 분량에 두 배 이상은 족히 되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작가는 부족하다고 여겼을지 모른다.  체코의 역사와 문화, 그 속에 감추어진 전설과 다양한 먹거리, 관광객이라면 그냥 지나쳤을 법한 갖가지 풍습과 내력 등 작가가 들려주고 싶은 얘기는 끝이 없어 보인다.  이 책을 읽은 독자는 체코 현지인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갖게 되지 않을까?  머리는 조금 어지러워도.

 

그나저나 요즘 그곳에는 비가 너무 많이 내려 걱정이라는데 블타바 강이 넘쳐 프라하는 지금 황토빛 흙탕물에 잠기지나 않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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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집을 나서기 전에 잊지 않고 하는 일이 있다.

뭐 딱히 형식을 정해놓고 하는 일은 아니다.  그저 마음 속으로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게 하소서'하는 기도를 빙자한 바람이다.  그 전날 내가 만났던 사람들에게 혹시 내가 저질렀을지도 모르는 잘못과 오늘 만날 사람들에게 저지를 수 있는 실수에 대한 속죄와 용서의 표현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그것은 내게 마음으로만 하는 일종의 적선이자 보시인 셈이다.  그 일에는 돈이 들지 않는 일이니 나는 베풀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기원하며 한껏 선심을 쓰곤 한다.

 

이따금 너무 바쁘게 서두르는 날은 이것마저 까먹을 때가 있다.

그런 날이면 하루 종일 마음이 찜찜하고 영 개운치가 않다.  하루 중 아주 잠깐의 짬을 내어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것, 그리고 그들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고 그닥 어려운 일도 아니건만 천지개벽할 큰 일이 벌어진 것도 아닌데 바쁘다는 핑계로, 혹은 귀찮아서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있는 걸 보면 나도 참 한심한 놈이 아닐 수 없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언제부턴가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삶에 눈길이 가곤 한다.  지금까지 살면서 그들이 견디며 겪어왔을 크고 작은 일들과 마음고생을 생각하면 가슴 저 밑바닥으로부터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나도 모르게 울컥하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같은 세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의 동병상련의 감정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젊은 시절에는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감정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나의 행동이 과연 옳은 일일까? 하는 의문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삶 전체가 하나의 학습과정이라고 생각한다면 내가 누군가의 행복을 비는 행위는 학습을 통한 깨달음의 기회를 빼앗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작은 깨달음에도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을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행복했던 순간에서 얻는 것은 그닥 많지 않다.  어떨 때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무심히 흘려보내기도 한다.

 

사람마다 각자 다르겠지만 어느 나이에 이르게 되면 행복이라는 게, 행복했던 순간들이 마치 인생의 무임승차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괜히 미안하고 허망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언제일지도 모르는 먼 미래에 누군가로부터 그 대가를 요구받을 것만 같아 불안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나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행복을 비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불행을 빌어야 옳을지...  

 

나의 이런 생각이 바보같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만으로도 고통을 바라보는 시각은 한결 가볍고 편안해진다.  고통을 피하려고 아등바등하거나 잔꾀를 부릴 생각은 추호도 없다.  오히려 힘든 고통의 순간도 그저 지나갈 뿐이고 그 뒤에는 반드시 어떤 깨달음이 올 것이라는 기대감마저 들곤 한다.  삶이라는 학습장에는 무임승차가 있을 수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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