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의사, 죽음의 땅에 희망을 심다
로스 도널드슨 지음, 신혜연 옮김 / 에이지21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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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였던가.

지금은 기억도 가물가물한 8월의 어느 날 나는 뉴질랜드 남단 퀸스타운 근교의 카와라우 다리 (Kawarau Bridge) 한 복판의 점프대에 서 있었다.  같은 교실에서 낯선 언어를 배우는, 국적도 다르고 나이도 제각각인 그들과 함께.  방학이었고 가족과 멀리 떨어진 나와 그들은 적당히 길들여진 호주의 하늘을 갑갑해했다.  우연은 항상 자극적인 무엇인가에 끌리곤 한다.  트레킹이 목적이었던 우리가 '번지점프'로 발길을 돌렸던 것도, 구경만 하자던 우리 모두의 생각이 '그래도 한 명은...'의 느닷없는 결정으로 돌변한 것도.

 

나는 그렇게 점프대에 섰고, 지상에서의 마지막 호흡처럼 숨을 깊게 들이쉬었고, 두려움에 파랗게 질린 강물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곁에선 매캐한 먼짓내를 풍기던 안내 요원이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던 나를 옴짝달싹 못하도록 그의 억센 팔로 붙잡았고, 그 순간 멀리 남반구의 하늘이 잿빛으로 어두워졌었다.  안내 요원의 카운트 소리가 꿈결처럼 아득했었다.  나는 차마 밑을 보지 못한 채 먼 하늘을 향해 몸을 던졌다.  어쩌면 누군가의 힘에 떠밀렸는지도 모른다.  결국, 먼지처럼 가벼워진 두려움은 강물을 스치는 바람 속으로 흩어졌다.

 

우리는 가끔 도저한 운명의 손아귀에 우연처럼 떨어질 때가 있다.  <청년의사, 죽음의 땅에 희망을 심다>를 쓴 로스 로널드슨도 그랬는지 모른다.  1969년 아프리카 시에라리온 라사에서 발생한 치사율 90%의 괴질병인 '라사열'이 얼마나 무섭고 잔인한 질병인지 미리 알았더라면 서아프리카의 작은 나라로 향하던 그의 발길은 한번쯤 주춤 멈추었을지도 모른다.

 

라사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은 처음에는 감기나 독감 증상으로 시작하지만 이후 몸 전체에서 체액이 흘러나와 호흡기 장애나 뇌출혈을 일으켜 사망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저자는 설치류의 일종인 다유방쥐의 분비물을 통해 인간에게 감염되는 것으로 알려진 라사 바이러스의 연구를 위해 위험천만의 땅, 시에라리온을 향해 떠난다.   친구들과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시에라리온 케네마에 위치한 라사병동에서 평생을 의료구호와 라사 바이러스의 치료 및 연구에 몰두했던 애니루 콘테 박사를 만난다.

 

라사 병동에서 콘테 박사와 라사열 사례의 기초 치료를 익혀가던 로스는 어느 날 타지역으로 세미나를 떠나는 콘테 박사를 대신해 라사 병동을 맡게 된다. 그 엄청난 책임감에 짓눌려 자신의 결정에 목숨을 건 환자들에게 해를 주지는 않을지, 누군가 자신의 어설픈 진료 행위를 탓하지는 않을지 혼란스러워 하면서도 지은이는 환자들과 의료진에게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열악한 진료 시설과 전문적인 교육도 받지 못한 간호사들과 함께 하면서도 그는 생명을 지키는 의사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잊지 않는다.  비록 그 당시에는 의학도의 입장이었지만.  저자는 자신이 라사 병동을 맡게 되었던 순간을 이렇게 썼다. 

"나는 멍한 상태로 숙소를 향해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어스레한 길 위에서, 나는 공포감에 사로잡혀 누가 지나가도 알아채지 못했다.  시아, 빈타, 니니, 그리고 내 책임하에 있는 모든 환자들이 러시안 룰렛 게임처럼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죽음의 운명이 과연 누구의 얼굴에서 멈출지 불안했다."    (p.189)

 

저자는 자신이 맡게 된 라사 병동의 환자들, 라사열 치료에도 불구하고 포도상구균의 감염으로 생사를 넘나들던 두 살배기 시아와 라사 바이러스에 감염된 어린 임산부 등을 치료하는가 하면 원인도 모른 채 죽어 나가는 많은 환자들을 가슴 아파 하기도 한다.  잦은 내전과 고질적인 가난의 굴레 속에서 생명은 너무나도 여리고 하찮은 것이었다.  미숙아로 태어난 어린 임산부의 아이를 간호사는 당현하다는 듯 엄마에게서 떼어 놓는다.  저자는 그런 모습에 분노하고 그 어린 생명을 살리고자 노력한다.  결국 아이는 살아나고 병원이 떠나가라 울기도 한다.    

 

"비극은 인간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필연적인 부분이다.  그렇다고 절망할 필요는 없다.  비극적인 사건들은 종종 인간이 지닌 최악의 본성에서 비롯되지만, 그와 동시에 인류의 최선을 볼 수 있는 창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비극을 통해서, 우리는 살고자 하는 희망에 집요하게 매달리는 희생자와, 이기적인 보상을 바라지 않고 자신의 고귀한 삶을 바치는 의료 종사자들을 만나는 특권을 누린다."    (p.382)

 

콘테 박사가 복귀하고 저자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다.  짧다면 짧았을 여정을 무사히 마무리했다고 생각했던 저자는 심근염으로 병원에 입원한다.  이 책은 그가 환자로 지내던 그 기간에 옮겨 적은 것이다.  책의 내용은 저자가 시에라리온에 도착했던 순간부터 미국으로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정치력의 부재와 그로 인한 가난, 질병의 만연은 한 생명을 너무도 쉽게 앗아가곤 한다.  그 속으로 과감히 뛰어들었던 저자는 내가 뉴질랜드에서 처음으로 번지점프를 했던 그 순간을 떠오르게 했다.  삶이 던져준 우연은 두려움 없이 도전하라는 신의 계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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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의 책 읽기 - 그 시절 만난 책 한 권이 내 인생의 시계를 바꿔놓았다
김경민 지음 / 쌤앤파커스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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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우리의 잘못이라고만 치부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이를 테면 불가항력적인 어떤 것들 말이다.  삶을 거슬러 올라가면 탄생부터가 불가항력적인 것이었다고 항변하겠지만 신의 뜻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그런 것들은 예외로 치자.  다만 우리의 의지나 노력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것, 가령 사랑이나 연애처럼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흐르는 대상과 자주 부딪히다 보면 세상에는 정말 운명이라는 게 존재하는구나 하는 자조섞인 한탄을 아니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새로움에 대해,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어색함에 대해 조금은 더 무뎌질 수 있는 것이다.  더불어 이러한 무감각을 반복적으로 경험함으로써 우리는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서야 얻을 수 있는 '뻔뻔스러움'이라는 무기를 하나 더 획득하게 되는 셈이다.

 

나는 요즘 '뻔뻔스러움'이라는 무기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능력까지는 아니더라도 나에게 있는 다른 수단으로는 어찌할 수 없다고 판단되는 상황에 이르면 적당한 때에 최후의 방편이려니 하며 이 무기를 빼어들곤 한다.  젊었을 때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지만 가끔씩 되풀이하다 보면 그런 대로 스릴도 있고 꽤 유용한 면도 있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책을 읽고 서평을 쓰는 일도 사람이 하는 일인지라 이런 낯 간지러운 상황을 피할 수 없을 때가 종종 있다.  독자의 취향이나 편견을 예측하지 못하면서도(사실 예측이 불가능한 일이지만) 한 번 읽어볼 만한 책이라는 둥, 감동적인 내용이었다는 둥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해야 하는 경우 말이다.  그렇다고 모든 서평이 그렇다거나,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서평도 그러려니 하는 지레짐작은 하지 말기를.

 

독자가 쓰는 서평을 평론과 혼동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나는 과거에 김현 작가의 평론을 즐겨 읽었지만 작가가 죽은 후 평론은 읽지 않게 되었다.  그렇지만 블로그에 가끔씩 서평을 올리는지라 다른 사람의 서평은 자주 읽는다.  대개의 서평은 일반 독자에 의해 씌어지는 경우가 다반사이고, 그렇게 씌어진 아마추어의 글에 딱히 장르를 부여할 수는 없겠지만 서평은 분명 평론과는 구별되는 면이 있다.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 작품을 평가하는 것도 그렇고, 취향이 서로 다르니 호불호가 제각각인 점도 그렇다.  그러므로 어떤 서평에 대해 객관성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잘못 생각해도 한참을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리라.

 

<젊은 날의 책 읽기>는 서평집이다.  서평집에 대해 서평을 쓸 때마다 매번 당황하게 된다.  마치 내 글에 대한 셀프 서평을 쓰는 것 같아서 말이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이 책의 저자인 김경민 작가를 전혀 알지 못한다.  그래서 먼저 출판사를 보았다.  <쌤 앤 파커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출판사일 것이다.  사실 나는 책과 출판사를 모두 기억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내 기억력이라는 게 영 형편없어서 책의 제목과 지은이를 매치시키는 것도 어렵지만 그런 기억력으로 출판사까지 기억한다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출판사를 기억하는 까닭은 최근의 베스트 셀러 목록에서 이 출판사의 이름을 자주 보게 된 것도 하나의 이유였고, 출간되는 책을 신중히 고른다는 느낌을 받았기 대문이기도 했다.

 

아무튼 '쌤 앤 파커스'에서 출간한 책이기에 무작정 읽었다.  책의 내용은 의외로 좋았다.  단순히 주관적인 평가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어줍잖게 프로 흉내를 내는 작가의 글은 혐오할 정도로 싫어하는 편인지라 오히려 이런 책에 정이 간다.  서평의 대상이 된 책은 총 36권이다.  그 중 내가 읽었던 책은 8할을 조금 밑돌 것이다.  그래도 절반은 넘었으니 작가와 공감하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호밀밭의 파수꾼"이나 "제인 에어".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등 워낙 유명한 책들도 눈에 띄었지만 내 눈을 반짝이게 했던 책은 "죽음의 수용소에서"와 "잠들면 안 돼, 거기 뱀이 있어"였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내가 힘들어 할 때 아내가 권했던 책이고, "잠들면 안 돼, 거기 뱀이 있어"는 도서관 서가를 기웃대다가 책의 제목에 이끌려 읽게 된 책이다.  두 권 모두 책의 내용에 비해 이해하기는 그리 쉽지 않은 책이다.  두 권의 책에 대한 저자의 평을 잠깐 들여다 보자.

 

"실제로 수용소의 포로처럼 모든 자유를 빼앗긴 인간에게 무엇이 남을 수 있었을까.  때로는 하루하루 생존에 몸부림치는 한 인간으로, 때로는 다른 이들을 조용히 관찰하고 그들에게 조언을 해주는 정신과 의사로 수용소의 삶을 견딘 저자는 단 하나의 자유는 분명 남아있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어떤 마음과 태도를 가질 것인지를 선택하는 자유였다.  오직 이 자유에서만 적절할 정도로 희미하고 가느다란 희망인 삶의 의미가 나왔던 것이다.  조각난 삶을 이어 붙이는 유일한 접착제인 그것이."    ("죽음의 수용소에서" 서평 中에서 p.72-p.73)

 

"카톨릭 신자인 나로서는 에버렛의 무신론자 전향에 100퍼센트 공감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에게 뜨거운 존경과 지지를 보내고 싶다.  그는 그 전까지 자신에게 덕지덕지 붙어 있을 수밖에 없었던 모든 편견, 신념, 가치관, 사고 체계, 보편 이론 등등을 완전히 버린 채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자신의 내면을 치열하고 정직하게 바라봤으니까.  자신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다름을 이렇게 바라보기란 정말이지 어려운 일이기에."    ("잠들면 안 돼, 거기 뱀이 있어" 서평 中에서 p.279)

 

누군가의 말을 100퍼센트 이해하고, 100퍼센트 공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서평을 쓰는 까닭은 나의 생각을 누군가에게 알리고 공감을 구하려는 목적도 있겠지만 내 생각에 그것은 부차적인 이유로만 보여진다.  서평을 쓰는 사람의 자세는 본인이 먼저 다른 누군가의 생각을 이해하겠다는 선언이며 자신의 의지를 담은 자발적인 각서라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나는 지금껏 블로그에 서평을 쓰면서도 내 생각이 일방적으로 옳다고 주장하지 않으려 애써왔다.  그에 앞서 내가 생각하여야 할 것은 '받아들임'의 자세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인 김경민의 글은 아주 화려하거나 흠잡을 데 없이 매끄럽지도 않다.  그렇다고 못 썼다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그래서 오히려 좋았다는 말이다.  아직 풋풋함이 남아있다고나 할까.  저자도 언젠가는 프로 작가의 글처럼 화려한 수사로 책의 전全면을 메울지도 모르지만 아직은 그저 맑음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쌤 앤 파커스' 출판사의 선택도 탁월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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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와 다를 바 없이 아침 운동을 나서다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밤새 뭔 일이 벌어졌단 말인가.  주차해 놓은 차량의 유리에는 온통 알 수 없는 무늬들이 얼룩져 있었다.  잠들기 전, 그러니까 자정이 넘은 시각에 잠시 외출을 했던 나는 그 시각까지 하늘에선 그 어떤 것도 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내가 잠들었던 새벽녘의 짧은 시간 동안 비인지, 눈인지, 그 중간쯤의 어떤 것이었는지가 소리도 없이 내렸다는  얘기다.

 

산을 오르는 입구에는 침목을 박아 놓은 계단이 있다.  그 계단 위도 하얗게 얼어 붙은 알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산의 중턱에 있는 묏등에도, 낙엽이 쌓인 숲 언저리에도 비인지, 눈인지, 중간쯤의 그 무엇인지가 하얗게 쌓여 있었다.  4월이라는 날짜 관념이 무색해졌다.  분홍빛 진달래의 눈인사도 오늘따라 차갑기 그지없다.  산에는 이제 제법 나뭇잎 티가 나는 새순들이 저마다의 빛깔로 치장하고 있다.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좁쌀만한 새순이 겨우 움을 틔웠었는데...  끝내 닭이 되지 않을 듯하던 병아리들이 어느새 중닭이 되어 나타나 어미닭 흉내를 내는 것처럼 뾰족한 새순은 어느새 그럴 듯한 나뭇잎이 되었다.

 

산의 능선에 있는 운동 기구와 나무 의자도 온통 얼어 있다.  윗몸일으키키대도, 철봉도, 평행봉도...  결국 나는 조금 더 걷기로 한다.  이렇게 오래도록 걷는 날에는 한동안 잊고 지내던 것들이 떠오르곤 한다.  언젠가 친구가 했던 말 중에는 이런 것들이 있다.

 

"삶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슬픔 뿐이야.  기쁜 일, 기쁘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은 시답잖은 일들은 그저 삶의 양념에 불과해.  그런 것들은 쉬이 잊혀질 뿐더러 오래 기억할 가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해.  우리가 삶의 경험에서 삼키는 것은 오직 슬픔 뿐인 셈이지.  그래서 우리는 태어날 때도, 죽을 때도 눈물을 흘리는 거야.  처음과 끝을 슬픔으로 채우는 것은 중간 과정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단적으로 증명한다고 볼 수 있지."

 

산을 내려올 때는 이미 해가 저만치 떠 있었다.  우듬지에서 녹은 물이 '후두둑 후두둑' 비처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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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박범준.장길연 지음, 서원 사진 / 정신세계원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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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이 한창이다.

무엇보다도 나같은 도시내기들에겐 문명에 의지하지 않은 채 온몸으로 계절을 체감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계절이다.  그러나 계절이 머무는 시간이 너무나 짧은지라 '아, 봄이 왔구나'하면 어느새 더위가 저만치서 손짓을 하곤 한다.  음미하기엔 턱없이 짧은 계절은 그래서 아쉽다.  나는 매년 까닭없이 봄을 앓는다.  멍하니 서서 창밖을 응시하는가 하면, 아직은 시린 벤치에 앉아 할 일을 잊기도 하고, 춘곤증과는 다른 의욕 상실의 무기력증을 며칠씩 안고 살 때도 있다.

 

시골에서 태어났다고는 해도 딱히 농사를 지어 본 경험도 없는데 매년 봄이면 아련한 향수처럼 시골 생활을 그리워 하는 걸 보면 내 몸의 어느 한 편에 밀알처럼 작은 유전자가 자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매년 봄이면 습관적으로 찾아 읽는 책이 있다.  모든 일을 작파하고 당장 시골로 갈 수도 없는 처지인지라 약간의 대리 만족이라도 얻을 요량으로 누군가의 '시골 생활기'를 읽곤 하는 것이다.  이렇게 읽은 책만도 줄잡아 열 손가락으로 셀 수 있는 권수를 넘어선 걸 보면 나의 도시 생활도 꽤나 힘들고 고단했나 보다.

 

이런 나의 봄앓이를 부채질한 것은 며칠 전에 걸려온 큰형의 전화였다.  막 선잠이 들었던 나는 취기어린 형의 목소리에 가슴이 철렁했고, 횡설수설하며 길게 이어지는 통화에 '나쁜 소식은 아니구나'하며 안도했었다.  그날 형은 자신이 퇴직하면 홍천에 가서 살겠노라고 했다.  그것이 현실 가능한 계획인지, 아니면 큰형 혼자만의 바람인지 나는 묻지 않았다.  어쩌면 형에게도 나와 다르지 않은 시골 유전자가 갑자기 되살아났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형의 통화는 배터리가 다 소모되어 '뚜뚜' 소리를 내다 강제 종료될 때까지 이어졌었다.

 

내가 읽은 시골 생활기 중에 단연 으뜸은 야마오 산세이의 <여기에 사는 즐거움>이다.  그 외에도 여러 권의 책을 읽었지만 마음에 와 닿는 책을 만나지 못하였다.  그래도 생각나는 책이 있다면 오병욱의 <빨간 양철지붕 아래서> 정도가 될 터였다.  그럼에도 나는 올해 또 다른 책을 골라 읽었다.  책의 제목은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KBS 1TV <인간극장>에 출연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고 하는데 나는 기억에 없다.  남편과 아내는 서울대와 카이스트 출신의 엘리트로서 더 잘 알려져 있는 듯했다.

 

책은 총 4부로 이루어져 있다. "Part 1 우리는 행복을 선택했다"에서는 시골 생활을 선택하게 된 경위와 무주 '나무네 집'에 정착하기까지의 과정이 씌어져 있고,  "Part 2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에서는 무주에서의 삶이, "Part3 결혼은 또 다른 연애의 시작"에서는 부부가 24시간 붙어서 사는 시골 생활에서 서로를 배려하며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잘 살아갈 수 있는 그들만의 노하우가, "Part4 공감공락共感共樂 "에서는 부부의 가치관이 실려 있다.

 

“오늘 행복하지 않으면 내일도 행복하지 않을 거야.  그래서 우리는 지금 행복을 선택한다.” 는 말은 그들이 시골로 가게 된 이유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게 다였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쉽게 용기를 내지 못하는 나로서는 그들의 용기와 결단력이 마냥 부럽기만 하고 부부의 선택에 박수와 응원을 아낄 마음은 없지만, 최고 학벌을 지닌 부부였기에 가능한 결정이 아니었을까? 하는 천박한 의심도 아니 할 수가 없다.  어쩌면 그들은 설령 시골 생활에 실패했다고 할지라도 언제든 도시로 다시 돌아와 남들만큼 잘 살아갈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있었을 것이다.

 

부부의 근황이 궁금해서 인터넷을 뒤져보니 지금은 제주도에 정착하여 작은 펜션을 운영하며 '바람 도서관'이라는 작은 도서관도 개관한 모양이다.  귀농을 결심한 사람이라면 한 번 읽어볼 만한 책이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그들만의 팁과 노하우가 자세하게 씌어져 있다.

 

내 어린 시절의 추억 중에 비교적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는 한 장면은 어느 해 가을의 모습이다.  드문드문 흰 구름이 무심히 떠가는 더없이 맑은 날이었다.  나는 누렇게 마른 갈대밭에 누워 서걱이며 지나는 바람과 따스하게 내리쬐던 햇살과 바람에 흔들리던 갈대 머리와 배경처럼 흐르던 흰구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은 조용히 흐르고 있었는지, 아니면 길게 멈추어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나는 그 장면 속에 평생의 '평화'를 담았다.  나의 피 속에 시골 DNA가 심어진 것도 그 무렵이었지 싶다.  나는 올해도 심하게 봄앓이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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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문장들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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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아주 오래 전에 읽었었다.  그리고 서평을 쓰기 위해 오늘 다시 읽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사실이다.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니요, 단순히 블로그에 서평을 올리자고 책을 두 번씩이나...  남들이 들으면 내가 이 책을 낸 출판사로부터 두둑한 보수라도 받는 줄 알겠다.  그러나 나는 그럴 만한 글재주를 지닌 주제도 못 되거니와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마음에 내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며칠 전 막 잠이 들려는 순간에 문득 이 책의 제목이 갑자기 떠올라 선잠을 깨우더니 비몽사몽 간에 머릿속을 뱅뱅 맴을 돌다가 종국에는 또릿또릿한 정신으로 나를 되돌려 놓고야 말았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심정으로 체념하듯 일어나 이 책을 책장에서 꺼냈다.  그렇게 다시 읽기 시작했건만 책의 내용은 한동안 마음을 비집고 들어오지 못한 채 겉으로만 돌았다.  처음부터 다시, 처음부터 다시 이런 짓거리를 몇 번을 거듭하다가 내가 하는 꼴이 하도 한심해서 결국 잠이 들고 말았는데, 결국 나는 오늘 서평이라도 쓰자는 심산으로 다 읽고야 말았다.  아마도 이 서평을 다 쓸 즈음에는 작가처럼 '왜 쓰는가?'의 문제만 고스란히 남아 내 머리를 다시 어지럽히겠지만.

 

"그렇다면 왜 쓰는가?  사회를 개선시키기 위해?  문학을 쇄신하기 위해?  인류를 사랑하기 위해?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질문과 부정은 계속됐지만, 그 해답은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1999년쯤이었다.  그 즈음 나는 내게 돈도 명예도 가져다 주지 않을 것이며, 그렇다고 해서 사회나 문학을 쇄신하는 사상이 담기지도 않을 게 분명한 장편소설을 쓰고 있었다.  퇴근한 뒤, 11시부터 새벽 2시까지 매일 써내려갔다.  그렇게 한 달 정도 썼을 때쯤이었다.  컴퓨터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더니 밤하늘이 보였다.  문득, 고독해졌다.  '나는 지금 소설을 쓰고 있다.'  오직 그 문장에만 해당하는 일을 나는 하고 있었다.  그 소설이 어떤 평가를 받을지, 그 소설로 인해 내 삶에는 어떤 변화가 있을지, 그런 생각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그저 '나는 지금 소설을 쓰고 있다' 그 문장뿐이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살아오면서 받았던 모든 상처는 치유됐다."    (p.66)

 

글을 쓴다는 것, 자신만의 감정과 자신만의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는 것은 종국에는 누군가에게 읽히고야 말것이라는 막연한 미래를 생각하지 않게 한다.  최소한 글을 쓰는 그 시간만큼은 우주 밖의 또 다른 우주에서 머물며 잠깐 동안의 요양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현실과 한참이나 떨어진 고독의 밤길에선 청년기의 열정과 아픔, 많은 의문과 분노, 그리고 언뜻언뜻 유년기의 희미한 기억들이 내가 스치며 걷는 담벼락에 아이맥스 영화관의 스크린처럼 생생하게 되살려내는 것이다.

 

"다음날, 이삿짐 트럭을 타고 언덕길을 내려가면서 나는 그 언덕에서의 삶이 내겐 봄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꽃시절이 모두 지나고 나면 봄빛이 사라졌음을 알게 된다. 천만 조각 흩날리고 낙화도 바닥나면 우리가 살았던 곳이 과연 어디였는지 깨닫게 된다.  청춘은 그렇게 한두 조각 꽃잎을 떨구면서 가버렸다.  이미 져버린 꽃을 다시 살릴 수만 있다면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p.132)

 

작가 김연수에게 청춘이란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애매한 계절'이고 '가장 위대한 물음표'였나 보다.  매미가 허물을 벗고 하늘을 날 준비를 하듯 청춘은 고통과 불안이 병존하는 시기인 것을.  다 지나고 나면 그 시절이 그립고, 가끔 눈물을 찔끔거리게 되지만 그런 청춘의 시기가 있었기에 아무렇지도 않은 양 거리로 나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 여자애와 헤어지면서 그 어마어마햇던 나만의 세계가 완전히 무너져내린 것이다.  나는 내 세계 안쪽 창에 맺힌 슬픔만으로는 부족했다.  비로소 나는 그 바깥의 슬픔에까지도 눈을 돌리게 됐다.  내게는 슬픔이 더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신문을 보다가도, 연속극을 보다가도, 영화를 보다가도, 책을 읽다가도 눈물을 흘렸다.  중생들의 고통에 눈물을 흘리던 관음보살의 눈물이 어디서 비롯되는지 알 수 있었다.  그건 윤리 시간에 배웠듯이 측은해서가 아니라 관음보살 자신의 몸이 너무나 아프기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었다.  마음에서 비롯한 게 아니라 몸에서 비롯한 눈물이었다."    (p.139)   

 

책의 내용은 작가 김연수가 지금의 나처럼 자신이 사는 폼세가 무척이나 한심하다고 생각했을 때, 책을 읽고 한시를 읽으며, 때로는 하이쿠를 읽으며 그때 그때마다 떠오르는 생각을 옮겨 적은 것들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어렵고 한심한 때일수록 과거의 기억은 햇잎처럼 더욱 푸르러지게 마련이다.  작가의 글은 떠오르는 상념들과 낡은 기억들로 이루어진 일기에 가깝다.  가끔은 두서없이 쓴 글이 읽는 이의 가슴을 적실 때가 있다.  벽이 없기 때문이다.  더이상 감추거나 꾸미려하지 않는 사람은 자연스레 감동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비록 그의 글이 난삽하여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행간에 드러나는 진실의 향기는 독자의 숨구멍으로 쉽게 빨려든다.  

 

시간이 솔방울처럼 구를 때,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나의 시간 속으로 누군가 풀벌레의 작은 날갯짓이라도 좋으니 작은 파동을 일으켜주길 간절히 바랬던 사람들은 안다.  슬픔은 시간의 강을 무심히 건너지 말라는 빨간 신호등이라는 것을.  요즘 남과 북의 극한 대치에도 불구하고 남북한 사람들은 오히려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다는 소식에 마음이 아릿해지곤 한다.  외신에서는 곧 전면전이 일어날 것처럼 연일 급박한 소식을 전해 오는데 정작 당사국의 국민들은 오히려 평온하다니...  나는 그들이 전쟁의 가능성이 전혀 없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한다고는 믿지 않는다.  오히려 하루하루 먹고 사는 문제가 얼마나 중하면 삶과 죽음의 문제가 두 번째로 밀려나는 것일까? 하는 안타까움이 먼저 든다.  남북한의 사람들에게는 전쟁의 문제도 체념하듯 아스라히 비껴가고 있는 것이다.

 

만약 눈물에도 꽃말이 있다면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해!'쯤 되지 않을까?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는 그때의 슬픈 기억이 먼저 떠오르는 것처럼 눈물은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하라는 무언의 메시지가 아닐까?  이 책 <청춘의 문장들>을 읽으며 나는 아픈 기억들을 하나둘 떠올리며 새끼손가락을 깨물어야 했다.  왜 나는 그때 눈물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무심히 걸어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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