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릅나무 아래 숨긴 천국
이응준 지음 / 시공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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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처럼 흐리고 간간이 비가 내리는 날엔 무력한 갈증이 비둘기처럼 내려앉는다.  알 수 없는 일이다.  때론 터질듯 부풀어오른 기억의 풍선들이 약한 빗방울에도 '펑펑' 소리를 내며 의식의 빈 그릇에 소나기처럼 쏟아지기도 한다.  그리곤 금세 걸쭉한 수프처럼 엉긴 기억의 잔해들은 의식이 스쳐갈 때마다 펄펄 끓는다.  뒤죽박죽의 기억들이 몽글몽글 끓어 넘칠 때면 기포와 함께 원추형으로 봉긋 솟았다가 '폭'소리와 함께 터져서는 이내 공기중으로 형체도 없이 사라진다. 

 

꽃샘 바람과 함께 흩뿌리던 봄비 속에서 의식의 밑바닥에 눌어 붙은 기억의 알갱이들을 한움큼 건져 올렸다.  그리고 이응준의 소설 <느릅나무 아래 숨긴 천국>을 읽었다.  매번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날의 날씨와 분위기에 딱 어울리는 작가가 있다.  나는 쌀쌀하게 굳은 하늘을 보며 아침부터 이응준을 생각했었다.  얼마 전에도 그의 작품<내 여자친구의 장례식>을 읽었으면서도 말이다.  그의 뿌리 깊은 우수와 텍스트를 관통하는 죽음에 대한 집착은 오늘 같은 날씨에는 더할 수 없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이야기의 출발은 그닥 만족스럽지 않았다.  과장된 슬픔이 언뜻언뜻 스칠 때마다 거식증 환자의 토사물처럼 움찔움찔 뒤로 물러나게 했다.  이틀 후면 처음 갖게 된 '내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된 나는 이삿짐을 싸고 있다.  책장을 들어내자 실먼지에 휘감긴 채 발견된 묵직한 노트 한 권.  나는 먼지를 쓰다듬듯 털어내고 한 장 한 장 천천히 넘기며 읽기 시작한다.

 

"거기에는 그들과 내가 있었고, 그들과 내가 나눈 이야기들이 있었고, 그들과 나를 슬프게 만든 청춘과 운명이 있었고, 우리의 배경에서 끝없이 내리던 함박눈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색 바랜 일기는 자신이 기록하고 있지 않은 더 먼 기억까지 기어코 불러와 기묘한 악몽의 만다라를 완성하고 있었다."    (p.14-15)

 

그해 겨울, 모든 것을 잃고,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지원했던 해군에도 신체검사에서 입대면제 판정을 받았던 내가 직행버스를 타고 무작정 떠나 다다른 곳은 서울 근교의 대학가인 가합동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카페 '하늘밥도둑'의 주인 '산타 페'를 만난다.  유명 미술대학 조소과 출신인 그는 교통사고로 다리를 저는 인물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상처를 가진 그와 보이지 않는 상처를 지닌 나는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가까워진다.  미친 이모의 벗은 알몸을 보고 황혼의 극단적인 아름다움을 목격했다는 '싼타 페'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 같은 과 친구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무튼, 나는 녀석을 잘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아.  어쩌면 하나도 아는 게 없었을 수도 있지.  체질적으로 녀석은 쓸데없는 관념들에 정의 내리기를 좋아했어.  아까 말했듯이 사랑이란 뭐다, 죽음이란 어쩌고 저쩌고다, 라는 식으로.  나는 그런 녀석을 볼 때마다 내심 감탄하곤 했지만, 마음 한편에선 뜻 모를 불안감이 소리 없이 고이곤 했어.  놈이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그 불안감이 무엇이었는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됐지만 말이야.  나는 결심했어.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들에 정의를 내리며 살진 않겠노라고.  너구린 너구리고 곰은 곰인 거지.  쥐는 쥐고, 비버는 비버인거야.  그러면 인생은 간단해지거든.  자살 같은 건 어리석은 일이지.  미친 짓이야.  없는 단어들에 관해 두툼한 사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불쌍한 법이야."    (p.108-109)

 

나는 '싼타 페'와 어울리며 '나그네들만 주인인' 그곳 가합동에 서서히 적응해간다.  대학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대학의 명물인 '물귀신'을 만나고, 정신이 온전치 못한 '미저리'도 만난다.  그리고 도서관에서 우연히 만난 수인.  그녀는 야구를 좋아했던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추억을 잊지 못한다.  어느 날 그녀는 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야구용품을 모두 불사르고 환상만 좇던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털어낸다.  그리고 얼치기 대학생활을 청산하고 장사라도 해보겠다며 대학을 떠난다.

 

수인이 떠나고 나는 며칠을 앓아 눕는다.  내가 앓고 있던 사이 '미저리'도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배경처럼 그칠 줄 모르고 내리던 눈이 거짓말처럼 개인 어느 날 아침 '싼타 페'는 자신이 발견했다는 '아름다운 길'과 그 길에 있는 '이름 모를 나무'를 보여주겠다며 나를 잡아 끈다.  그곳에서 나는 그 '이름 모를 나무' 밑에 내 상처를 묻고 돌아선다.

 

첩의 자식이었던 나는 유난히 젊어 보였던 어머니 손에 이끌려 열 살의 나이에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갔다.  네 살 터울의 배 다른 형제 인하를 만났고, 밀교의 사제처럼 형을 존경했던 나는 형이 지녔던 아픔과 그로 인해 벌어진 모든 일들이 운명이었다고 수긍한다.  탐욕에 이끌려 모든 것을 잃고 허무하게 죽었던 아버지와 병으로 죽은 형의 여자 친구, 그리고 형과 자신의 어머니의 정사 장면을 목격한 이후 형의 자살.  이 모든 일들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운명처럼 흘러갔음을 인정한다.

 

"지난 일은 그냥 지난 일이다.  상처가 남았다고 하지 말자.  상처는 '우리'라는 거대한 대륙에 놓인 작은 늪이나 웅덩이 같은 것일 뿐이므로.  거기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는 상처지만, 높고 푸른 하늘 위에서 자유로운 새처럼 내려다보면, 경이롭고 아름다운 세상의 한 풍경일 수도 있으려니.  나는 아프게 흘러갔던 지난날들이 내 마음의 하구에 얼마나 고운 모래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삼각주를 만들어놓았는지를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잃고 나서야 겨우 깨달았다.  그것이 내 불행의 전모였다."    (p.270)

 

이 작품은 작가의 나이 스물여섯에 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소설의 앞부분에선 슬픔에 대한 작가의 감정이 과도하게 표출되는 듯 싶더니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투의 관조적인 자세로 서둘러 끝을 맺는다.  그럼에도 소설 곳곳에서 읽을 수 있는 시적 표현과 무리없이 이어지는 이야기 구조에서는 작가의 능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름다운 건 다 슬프기 마련이라는 작가의 주장처럼 그도 한 편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쓰고 싶었나 보다.  나는 그렇게 믿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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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다드 동물원 구하기 - 그가 구한 것은 동물원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The Earth)’였다!
로렌스 앤서니 지음, 고상숙 옮김 / 뜨인돌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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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딱 십 년 전 오늘이었어.  TV 화면에선 밤하늘을 가르는 녹색 섬광이 마치 불꽃놀이를 하듯 번쩍였고, 스포츠 중계를 하듯 과한 아드레날린으로 새된 목소리의 기자는 밤하늘의 별이라도 떨어뜨릴 듯이 날카롭게 외치고 있었지.  화면 밖으로 기자의 더운 입김이 뿜어져 나올 듯한 밤에 나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먼 나라의 소식을 아무런 감흥도 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모든 전쟁은 허무맹랑한 이유와 함께 시작된다.  그것은 빼앗으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의 의사와는 무관한, 안락 의자에 앉아 시원한 맥주를 들이키는 명령권자의 몫이었다.

 

작전명 '이라크의 자유(Fredom of Iraq)'!  그것이 비록 2001년 9.11 테러에 대한 미국의 복수에서 비롯된 것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 무자비한 폭력은 전쟁광 부시의 존재를 전 세계에 알리는 데 충분했다.  그는 이제 권좌에서 물러났지만 그 전쟁에서 사망한 13만 4000명의 민간인에 대한 사과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10년이라는 세월은 그때의 기억을 회색빛의 어슴푸레한 실루엣으로만 남게 했다.  먼 나라의 얘기였고, 먼 과거의 기억일 뿐이라는 듯 이라크의 사막에도 지금쯤 작열하는 태양이 그때의 기억들을 거둬가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때의 희미한 기억을 되새기며 <바그다드 동물원 구하기>를 읽었다.  님이프리카공화국의 환경보호운동가 로렌스 앤서니도 나처럼 CNN의 뉴스를 보고 있었나 보다.  수류탄 파편에 맞아 두 눈을 거의 실명한 사자 마르잔을 보았다고 했다.  나라면 그저 무심히 지나쳤을 그 한 순간의 장면이 그에게는 자신의 목숨을 걸 이유가 되었나 보다.  사람의 목숨도 언제 어떻게 사라질지 모르는 전쟁터를 향해, 그는 오직 동물들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사지를 향해 달려갔다.  인간들에 의해 저질러진 끔찍한 현장에서 버려진 물건처럼 나뒹굴던 동물들을 그는 차마 외면할 수 없었나 보다.

 

"나는 이라크에 온 이유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았다.  단지 동물들을 구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우리 지구에 더는 이래서는 안 된다는 도덕적인 기준, 윤리적인 기준을 세워야 한다는 이유도 빼놓을 수 없었다.  이러한 깨달음과 더불어 나는 우리가 모범사례를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류가 지구상의 다른 생명체를 존중하지 않는 것에 대해 '이렇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고 누군가 책임감 있는,나아가 영향력 있는 표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을 실천할 수 있는 시발점이 될 수 있는 곳이 바그다드라고 여겼다."    (p.156)

 

모두가 이라크를 빠져나가느라 정신이 없는 와중에 쿠웨이트에서 빌린 렌터카를 타고 이라크로 들어가려는 백인 남자.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동물원의 모습은 처참했다.  벽의 일부는 폭격으로 무너져 있었고 남은 벽에는 수많은 총격의 흔적들이 있었다.  전기도, 식수도, 식량도 끊긴 아비규환의 전쟁터에서, 파리 떼와 썩어가는 사체들로 시궁창이 된 바그다드의 동물원은 그야말로 지옥의 모습이었다. 우리에 갇힌 동물들은 오직 누군가의 도움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저자는 당시 광경을 보고 차라리 총을 하나 사서 동물들을 하늘나라로 고이 보내주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앤서니는 자비를 털어 동물들에게 식수를 공급하고, 오물과 사체를 치우고, 약탈자들을 막아내며 사막에서의 끔찍한 날들을 겪는다.  그의 진심이 통했는지 바그다드의 동물원 식구들이 목숨을 걸고 그를 도왔고, 안타까운 현실을 차마 지나칠 수 없었던 많은 군인들과 기자들의 도움으로 동물원은 점차 안정을 찾았다.  전 세계에 그의 소식이 전해지면서 구호품과 구호자금이 속속 도착했고, 그는 사담 후세인의 아들 우다이가 기르던 사자들을 구출했고, 위험천만한 지역 아부그라이브에서 사담 후세인이 기르던 아라비아 종마들을 무사히 동물원으로 데려오는 등 6개월간의 각고의 노력 끝에 동물원은 정상을 되찾았다.  그리고 2007년 7월 17일, 바그다드 동물원은 다시 문을 열었다.

 

바그다드에서의 노력과 공로를 인정받아 남아공인으로는 처음으로 유엔으로부터 '지구의 날 메달'을 수상하기도 한 그는 그때의 경험 이후 '지구 기구'라는 환경.동물보호단체를 운영하게 되었다.

 

"내가 바그다드에서 배운 가장 큰 교훈은 바로 이것이다.  '문명화된' 인간이 야생동물을 그렇게까지 끔찍하게 학대하는 것을 정당화한다면, 대체 얼마나 많은 보이지 않는 악행이 지구에 가해지고 있을까?  우리는 이미 전 세계적으로 다양한 종이 멸종해가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들의 멸종은 곧 먹이사슬의 중요한 고리가 사라져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중략)...자연이 지구, 그리고 그에 의존해 살고 있는 수많은 생명체와 이렇게 역동적인 관계를 맺게 되기까지는 수십억 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런데 단 100년 만에 그 균형이 깨질 위험에 봉착한 것이다.  지구의 생태계를 무자비하게 파괴하는 범인을 지목하는 손가락은 모두 한곳, 즉 인간을 가리키고 있다."    (p.334 - 335) 

 

바그다드의 작은 동물원을 구한 것처럼 지구라는 거대 동물원을 구하고자 하는 그의 노력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을 것이다.  그의 진심을 이해하는 많은 사람들의 연대만이 위기에 처한 지구 동물원을 구할 수 있다.  그 선택은 오직 인간의 몫이다.  전쟁과 탐욕으로부터 지구 동물원을 구할 것인가 아니면 종말을 행해 나아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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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
정호승 지음, 황문성 사진 / 비채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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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정호승 시인의 또 다른 작품인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를 읽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읽다 말았다.  나는 이런 종류의 책 - 전해 내려오는 명언이나 명구에 자신의 경험을 덧붙여 한 권의 책으로 엮은-에 약간의 거부반응이 있다.  어찌 보면 가장 편하고도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인데 말이다.

 

여기에는 책에 대한 나의 편견이 한몫 하고 있다.  책이란 모름지기 기억에 오래 남아야 하고, 실생활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책의 효용성 내지는 실용성 중심의 사고방식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대체로 이런 종류의 책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는 하지만 책을 다 읽은 후에 머릿속에 남는 것이라고는 기껏해야 몇몇 문장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책을 읽을 때는 술술 읽히지만 읽고 난 후에 남는 것이 없거나 빈약하다면 도대체 뭐하러 책을 읽을 것이며, 흘려 보낸그 시간이 마냥 아깝다고 느껴지지 않겠는가.

 

독서의 효용을 지극히 중시했던 이러한 태도는 내 삶의 전반을 지배한 듯하다.  어떤 책을 읽었다는 사실을 부각시키려 하거나 그 사실만을 도드라지게 보이려 했던 나의 태도는 지금에 와 생각하면 참으로 부끄럽기 그지없다.  '읽음'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나 강박은 그 시작이 지적 허세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결국에는 책의 내용이 내 몸에 체화되지 못한 채 겉돌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나는 최근에야 깨달았다.

 

"공부를 해도 공부한 바 없는 듯이, 우물 속에 내린 눈이 스스로 녹아 없어지듯이 겸손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부는 밖으로 드러내기 위해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존재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그럼으로써 인간이라는 나 자신을 더욱 아름답게 하기 위하여 한다는 것입니다."    (p.85 - 86)

 

정호승 시인은 공부를 '담설전정(擔雪塡井)' 하듯이 하라고 하였다.  '무엇을 하더라도 눈을 짊어지고 우물을 메우는 것처럼 하라'는 뜻이다.  공부가 자신의 본질을 훼손시키는, 인간으로서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리는 공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내가 퍼다 날른 눈이 우물물에 스르르 녹듯이 드러내거나 많이 아는 듯이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그동안 나 스스로를 경쟁이라는 거대한 줄에 줄을 세운 격이었다.

 

며칠 전에도 대구의 한 고등학생이 투신 자살을 했다.  이제는 하도 만성이 되어 특별한 소식으로도 여겨지지 않는다.  인터넷의 자살 사이트에서 만난 몇몇의 젊은이들이 동반 자살을 했다는 소식도 잊을 만하면 들려오곤 한다.  때로는 경제적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달려오는 지하철에 몸을 던지는 중년의 가장이나 삶을 비관하여 아이들과 함께 투신하는 어머니도 있다.  불행하게도 우리 사회 곳곳에는 자살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기쁨과 위안을 안겨주는지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할 수 있었다면 그들은 자신의 삶을 그처럼 쉽게 포기할 수 있었을까?   

 

“꽃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황하지 않는다. 봄날에 피는 꽃을 한번 보십시오. 꽃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황하지 않습니다. 꽃을 피우려고 애쓰지 않으면서도 꽃을 피우고, 피어난 꽃은 그대로 방황하지 않고 열심히 삽니다. 누가 보든 말든 자기 삶의 의미와 가치를 소중히 여기며 하늘을 향해 피어 있다가 때가 되면 시들어 열매를 맺습니다. 베트남의 틱낫한 스님은 한 송이 꽃은 남에게 봉사하기 위해 무언가를 할 필요가 없다. 오직 꽃이기만 하면 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한 사람의 존재 또한 그가 만일 진정한 인간이라면 온 세상을 기쁘게 하기에 충분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P183)

 

누구의 삶인들 고비가 없었을까?  그것이 작든 크든 우리는 그 고비를 만날 때마다 인생의 쓴 맛을 경험하며 지나간다.  그리고 먼 훗날 그때의 추억을 거리낌 없이 말하곤 한다.  고비를 넘지 못하고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시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쩌면 죽음을 결심한 사람들에게 작은 희망조차 되지 못하는 문학의 무용론, 그 가운데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자책이 아니었을까?

 

"이런 뉴스를 접할 때마다 가슴이 꽉 막힌 듯 먹먹해집니다.  남의 일 같지 않고 마치 '오늘도 내가 자살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그들의 자살을 통해 내 생명의 무게나 가치조차 가볍고 무가치하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결코 그럴 리 없겠지만 어떤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해지면 나도 그들처럼 자살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p.461)

 

시인은 이 세상을 사는 모든 아픈 이들을 향해, 벼랑 끝에 선 모든 위태로운 사람들을 향해 가슴을 열고 자신의 체온을 나눠주려는 듯하다.  책을 읽는 내내 그 따뜻한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아 가슴에는 촉촉히 비가 내리고 꽃샘 바람도 부드럽게 흐르는 듯 느꼈다.  '길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다'고 외치는 시인의 목소리가 허망하게 들릴지라도 삶의 고통을 꿋꿋이 참으며 살아가는 생존의 현장을 보면 우리는 한번 더 용기를 낼 수 있지 않을까?  그 곁에서 등이라도 토닥이며 '다 괜찮아'라고 위로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삶의 계절은 언제나 봄날일 것이다.  생명이 가득한.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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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는 인간
KBS 공부하는 인간 제작팀 지음 / 예담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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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학생들이 내 얘기를 들으면 웃겠지만 내가 농구공을 처음 만져본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그 전까지는 농구를 해보기는커녕 농구공조차 만져본 적이 없었다.  시골에서 태어나 중학교 2학년까지 그곳에서 학교를 다녔던 나는 형을 따라 도시로 전학을 했다.  형과 함께 자취를 했었는데 주인집에는 나와 동갑인 사내 아이가 한 명 있었다.  어느 날 그 아이는 손에 농구공을 들고 나타나 함께 농구를 하자고 했고, 농구가 처음이었던 나는 잔뜩 주눅이 든 채 학교 운동장의 농구 코트로 향했다.

 

농구공은 의외로 무거웠다.  남들에 비해 체격이 왜소했던 탓에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른다.  농구가 처음인 나는 슛을 쏘는 자세도 엉망이었을 뿐만 아니라 공을 던질 때마다 공은 내가 의도했던 방향을 한참이나 벗어나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기 일쑤였다.  공을 주우러 이리저리 뚜어다녀야 했던 그 아이는 그마저도 힘들었는지 나와 골넣기 시합을 제안했다.  농구 골대를 중심으로 운동장에 여러 개의 동그라미를 그려놓고는 가장 끝쪽으로부터 자리를 옮겨가며 공을 던져 누가 더 많이 넣느냐 해보자는 것이었다.  자신은 없었지만 그 아이의 제안을 무시할 수도 없어서 억지춘향으로 시합을 하게 되었다.

 

당연하게도 결과는 참혹했다.  그 아이가 서너 골을 성공시킨데 반해 나는 단 한 골도 넣지 못했다.  그날 나는 분하고 억울한 마음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다음 날 나는 같은 동네에 사는 반친구에게 한 달간만 농구공을 빌려달라고 부탁했다.  농구를 그닥 즐기지 않았던 친구는 자신의 농구공을 선선히 내주었다.  그렇게 빌린 농구공으로 나는 꼬박 한 달간 슛을 쏘는 연습만 했다.  손에서 겉돌기만 했던 공은 서서히 손에 익어갔고, 그에 비례하여 내가 던진 공이 링을 통과하는 횟수도 점차 늘었다.  주인집 아이는 내가 절치부심하며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나 조깅을 하였던 나는 그 시간에 조깅대신 농구를 하였고 아침잠이 많았던 그 아이는 내가 농구 연습에 매진하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한 달 후 어느 토요일 오후에 나는 표정을 깊이 감춘 채 심심하면 농구나 하러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그 아이는 웬일이냐는 듯 내 얼굴을 잠시 쳐다보고는 농구공을 들고 나왔다.  잠시 몸을 푼 후, 그전처럼 골대 주변에 동그라미를 여러 개 그리고는 이내 시함에 들어갔다.  결과는 예상한 대로 내가 이겼다.  그 아이는 분을 못 참는 듯 보였다.  다시 하자며 몇 번을 맞붙었지만 그 아이는 한 번도 나를 이기지 못했다.  우리는 그 후에도 여러 번 농구를 같이 했지만 슛 대결에서는 번번이 내가 이겼고 나보다 키가 한 뼘이나 더 컸던 그 아이는 그때마다 일대일 반코트 경기를 제안하여 그 분을 삭이곤 했다.

 

<공부하는 인간>을 읽으며 많은 생각을 했다.  학창시절 유난히 승부욕이 강했던 나는 책에서 언급하는 내용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가족들을 생각하면 공부를 게을리할 수 없었고,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는 공부밖에 없다고 강하게 믿었었다.  언젠가 나는 다른 글에서도 썼었지만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3시간만 자며 버텼었다.  그 혹독한 과정을 가능케 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이 책에서는 그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다른 사람의 기준에 맞추고 기대에 부응하려는 동양의 체면문화는 동양인들이 공부를 열심히, 잘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공부를 게을리해서 성적이 좋지 않으면 가족을 비롯해 다른 사람의 기대를 저버리게 되고, 그것은 곧 자신의 체면을 손상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 제작진은 릴리, 스캇, 브라이언, 제니와 여러 아시아 국가를 돌아다니면서 동양의 체면문화가 동양인의 학습의욕, 교육열을 고취시키는 기능을 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p.143)

각 문화권의 공부에 대해 심도 있게 파고들어 누구나 납득할 수 있도록 눈에 보이는 형태로 만들고 싶어 제작되었다는 KBS 1TV 글로벌 대기획 <공부하는 인간, 호모 아카데미쿠스>다큐멘터리를 책으로 옮긴 것이 바로 이 책이다.  다큐멘터리 제작진과 하버드 대학에 재학중인 4명의 진행자는 공부라면 내로라 하는 나라들, 예컨대 이스라엘, 인도, 중국, 일본, 미국, 프랑스, 영구, 한국, 우간다 등을 돌며 각 문화권의 사람들이 느끼는 공부의 정의, 목적, 방식 등을 질문하고 직접 목격함으로써 공부는 과연 문화적.역사적 산물인가? 하는 문제와 그렇다면 동양의 공부와 서양의 공부 중 어떤 방식이 옳은 것인지, 더 나아가서 진정한 공부는 무엇인지를 심도있게 파헤치고 있다.

 

"'집단, 관계성'을 중시하는 동양과 '개인, 독립성'을 중시하는 서양은 스스로를 인지하는 방식이 다르고, 이 차이는 두 사회의 지식에 대한 관점의 차이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지식에 대한 상반된 시각은 공부방식의 차이를 가져왔으니, 결과적으로 동.서양의 공부방식은 '집단'중심의 동양 문화와 '나'중심의 서양 문화가 만들어낸 결정체라고 볼 수 있다."    (p.299)

 

전 세계 인구의 0.2%에 불과한 유대인들이 역대 노벨상 중 23%를 휩쓴 기적적인 성취 이면에는 그 민족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이 자리하고 있음을 무시할 수 없다.  노력을 중시하는 동양과 개인의 특성을 중시하는 서양은 부모의 교육관도 다를 수밖에 없음은 너무도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지식의 습득에 있어서는 탁월한 능력을 보이는 한국의 학생들이 노벨상을 한 번도 받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우리 교육의 문제점을 한 번쯤 되짚어 보아야 한다고 느낀다.

 

가족 중심의 공동체적 문화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유대인과 우리는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러나 그들은 토론과 논쟁을 통하여 진리에 도전하고자 하는 교육 문화를 형성함으로써 오늘날의 성취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우리의 주입식 교육과는 상당한 거리감이 있다.  더구나 우리와 비슷한 병역제도를 갖고 있음에도 그들은 이를 창의적으로 발전시켰던 반면 우리는 군대에서의 시간이 '죽은 시간'처럼 느껴지도록 만든 까닭은 무엇일까?  안타까운 현실이 한둘이 아니지만 경쟁을 통한 '줄 세우기식' 교육에서 우리는 단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답답해진다.

 

"공부는 인류 보편의 테마이자 인류 문명의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며, 그 자체가 인류 문명을 이해하는 하나의 문화 코드다.  따라서 공부를 보면 과거의 우리가 보이고 현재의 우리, 미래의 우리가 보인다.  그러므로 아무리 험난하고 힘들어도 공부는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 미래에도 인간이 가야 할 길이다."    (p.359)

 

공부를 잘한다는 것이 가깝게는 개인의 행복에 보탬이 된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기 힘들 것이다.  그런 까닭에 대한민국의 모든 부모들이 자식의 교육에 목을 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초등 4학년이 된 아들 녀석을 보면 내 어릴 적 모습을 대물림하고 있는 것 같아 웃음이 날 때가 있다.  책을 좋아하는 것도 그렇고 숙제를 다 못했을 때 선생님으로부터 지적당하는 것이 죽기보다 싫어서 새벽에 일어나 숙제를 기어코 마저하는 것도 그렇고...   과연 공부란 무엇인가? 하고 되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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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 조용히! - 풋내기 사서의 좌충우돌 도서관 일기
스콧 더글러스 지음, 박수연 옮김 / 부키 / 2009년 6월
평점 :
절판


그제 저녁에 담배를 사러 집 근처의 슈퍼에 들렀었다.  카운터에는 나이 지긋한 할머니 한 분이 앉아 있었고, 가게 안은 손님이 없고 한산한 편이었다.  그때 마침 반팔 티셔츠를 입은 체격 건장한 청년이 양손에 짜파게티와 라면을 한보따리 들고는 물건값을 계산하기 위해 카운터로 다가오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본 할머니 왈, "아이고, 반소매에 춥지 않아요?" 하자 청년은 "아니, 괜찮은데요?" 했다.  할머니는 그래도 못 믿겠다는 듯, "추울텐데..."하면서 혀를 끌끌 찼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청년이 추운 게 아니라 할머니가 추웠던 것이다.  내가 보기에도 청년은 추위라곤 전혀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날씨도 워낙 포근했지만 말이다.  우리는 가끔(자주라고 할 수도 있지만) 자신의 생각과 다른 사람의 생각이 같을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산다.  이 책 <쉿, 조용히!>를 읽으면 누구라도 확실히 깨달을 수 있다.  도서관 사무 보조원으로 들어가 학비가 공짜라는 이유로 대학원에 진학하여 석사학위를 받고 정식으로 도서관 사서 생활을 시작한 스콧 더글러스의 평범하지만 전혀 평범하지 않게 기록된 도서관 생활기이다.  위트가 넘치는 그의 필체로 인해 독자들은 개그 콘서트의 '본방 사수'를 까먹을 정도다.

 

"이디스는 입안 가득 음식을 우물거리며 물었다.  "그 핑콩인지 뭔지가 신인작가야?"  나는 태연한 척하려고 애썼다.  그녀는 필경 나를 놀리고 있는 것이리라.  나를 놀려야만 했을 테니까.  그녀는 핀천이 누구인지 당연히 알 것이다.  나는 그녀의 놀림에 속아 넘어가 주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핀천은 제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책을 썼어요."  그녀는 내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내가 몇 살이나 되었을까 가늠해 보는 듯했다.  그러더니 도도하게 선언했다.  "난 책은 잘 안 읽는 편이야.  읽을 시간도 없고."  "사서인데도요?"  무례하게 들릴 수 있는 질문이었지만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다."    (p.16)  

 

내가 자주 가는 도서관에도 이런 해괴한 일은 수도 없이 일어난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을 위해 도서관을 소개하자면 이렇다. 1층에는 아동.모자 열람실과 강당, 문화사랑방과 방제실 및 매점이 있다.  문화 사랑방이 뭐하는 데냐고?  그곳에서는 주로 유치원생들이 그린 비대칭의 그림이 전시되거나 동네 아줌마들의 짧은 연애편지(아줌마들은 그걸 시라고 박박 우기지만)가 벽에 걸리고 아주 가끔은 집에 들어가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아저씨들이 자신들이 찍은 사진 몇 장을 벽에 걸어놓고는 하루 종일 음담패설을 하기도 하는 다용도실이다.  나는 처음에 방제실을 방조실로 잘못 읽었었다.(왜냐하면 그곳에는 청원경찰이 두 명이나 있는데 아이들이 심한 장난을 쳐도 그냥 방조하기 때문이다)  아동.모자 열람실은 아무리 찾아도 아비부(父)자를 찾을 수 없어서 단 한번도 들어가 보지 못했으므로 설명이 곤란하다. 

 

2층에는 종합자료 열람실과 장애인 열람실 및 정기 간행물실, 보관서고가 있다.  종합자료 열람실은 내가 가장 자주 이용하는 공간이다.  잠이 부족한 사람들은 가끔 서가 뒤에 놓인 소파에 누워 잠을 청하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은 그나마 양심이 있는 사람들이고 학생들은 책상에 엎드려 보란 듯이 잠을 자기도 한다.  3층에는 관장실과 정보자료실, 문화교실(주로 아줌마들 몇몇이 모여 독서토론이나 취미생활이라는 명목으로 공공연히 남편의 험담을 늘어놓는 공간), 휴게실(자판기 4대가 대부분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고 사람들은 그 부속품쯤으로 보인다) 및 관리과가 있다.  정보 자료실에는 컴퓨터가 50여대 있고 입구의 안내 데스크에는 30분 간격으로 음식물 반입과 가방 소지를 제재하는 표독스러운 아줌마가 한 명 있다.  요즘은 머리를 노랗게 염색까지 한 탓에 더욱 눈에 띈다.(그럼에도 전혀 패셔니스타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도서관 사서라는 직업에 무작정 뛰어들었던 저자는 그동안 자신이 갖고 있던 도서관에 대한, 그리고 그곳에서 근무하는 사서에 대한 편견이 무척이나 잘못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사서는 책에 대한 많은 지식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사서로서의 경험으로 일하게 된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대부분의 직업이 그렇듯 한 사람이 직업인으로서 유능하냐 그렇지 못하냐의 기준은 얼마나 많은 사전지식이 있었느냐가 아니라 그 직업에 대한 자긍심과 경험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저자는 서서히 깨닫게 된다.  이것은 마치 우리의 삶이 성숙해가는 과정과도 비슷하다.

 

이 책에는 도서관에서 저자가 겪은 여러 에피소드가 담겨 있다.  '설마 그런 일까지?'라고 생각했다면 제대로 맞춘 것이다.  설마가 사람 잡을 테니까.  물론 이 책이 씌어졌을 때와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도서관은 많은 차이가 있겠지만 말이다.  도서관 사서라는 직업에 대해 원론적인 입장이었던 저자는 때때로 자신의 직업에 회의적인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도서관이 지역사회에 정보를 전달하고자 하는 목적만으로 설립되고 운영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면 답은 명확해진다.  그런 추상적이고 원론적인 목적은 현실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어느 날 그들은 십대 열람실에서 '어떤 놈을 머리통을 박살내서 죽이자'는 내용의 랩 음악을 듣고 있었다.  나는 음악을 끄라고 말했다.  그들은 나에게 "네 털투성이 거시기나 핥아." 라고 말했다.  나는 그들에게 나가라고 했다.  그들은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거기나 빠는 병신 같은 호모 새끼이고 못생긴 여자친구가" 있다고 했다."    (p.301) 

 

내가 보기에도 도서관은 아이들이 엄마의 잔소리를 피해 숨어들 수 있는 몇 안 되는 공간이며, 막 이성에 눈 뜬 아이들이 어른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교제할 수 있는 공간이며, 그보다 더 어린 아이들에게는 장난감총을 들고 마음껏 뛰어다닐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이 되기도 한다.  또한 집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아프리카 TV의 게임 중계를 마음껏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사서가 감독을 하지만 사서의 눈을 피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나 마찬가지다)   어떤 날은 도서관 주변의 으슥한 곳에 놓인 벤치에서는 19금의 낯 뜨거운 장면을 목격할 때도 있다.  아마도 용돈이 부족한 대학생이 머리를 짜내어 생각한 데이트 장소였을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못 본 척 넘어가곤 한다. 

 

비록 우리는 도서관을 집을 오가는 길에 보이는 특별하지 않은 콘크리트 덩어리쯤으로 생각하곤 하지만 그 속에서의 현실을 단 하루만이라도 꼼꼼이 관찰한다면 우리가 애초에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단박에 알게 될 것이다.  때로는 재수를 하는 아이들이 휴게실에서 홀로 앉아 찬밥 덩어리를 먹는 서글픈 현실과 마주하기도 하고, 취업 준비생의 누렇게 뜬 얼굴과도 대면할 때가 있다.  도서관 사서는 그런 다양한 삶을 이해하고 배려하지 못한다면 결코 참아내기 어려운 직업이다.  그저 책이나 빌려주고 서가에 책을 정리하면서 남는 시간에는 시시껄렁한 잡담을 하거나 안내 데스크에 편하게 앉아 자신이 보고 싶었던 책을 마음껏 읽으면서 월급만 꼬박꼬박 챙기는 사람들이 아님을 저자는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우리의 고정관념이 때로는 상대방을 아프게 할 때가 있다.  책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트리는 중요한 도구이다.  그 다양한 도구가 도서관에 있다.  새봄에는 도서관 출입이 잦을 듯하다.(어쩌면 부족한 잠을 보충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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