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도 서른 살이 온다면
양 제니 지음 / 쌤앤파커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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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네 삶은 한 편의 '줄놀음'과 같구나, 하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작수목 위에 단단히 비끄러매진 시간의 동아줄 위에 서서 많은 구경꾼들의 박수를 받으며 한판 신명나게 놀다 가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 아닐까 하고 말이죠.  줄은 두발반쯤의 적당한 높이였으면 좋겠습니다.  팽팽히 당겨진 그 줄 위에 서서 어릿광대와 우스개 소리도 주고 받으며 때로는 쪽빛 하늘을 향해 뛰어 올라 내가 가진 재주를 맘껏 펼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삼현육각의 연주에 맞춰 내가 선뵈는 잔노릇에 구경꾼들도 한나절 즐겁겠지요.

 

그런데 말이죠.  때로는 허방을 짚고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아직도 내가 건너야 할 줄은 한참이나 남았습니다.  구경꾼들의 응원을 받고 나는 용기를 내어 다시 줄에 오릅니다.  창옷을 고쳐 입고 머리에 쓴 초립에는 공작꼬리털로 한껏 멋을 부리고 손에 든 부채를 활짝 펴겠습니다.  후들거리던 다리도 이제 팽팽한 긴장감 속에 안정되었고 조금의 반동만으로도 하늘 높이 날아 오를 듯합니다.

 

우리 모두는 한 무리의 구경꾼 앞에 선 외로운 줄광대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의 동아줄은 그 길이가 제각각일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에게는 30m의 긴 줄이 주어지는가 하면 누구에게는 채 한 발도 되지 않는 짧은 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 짧은 줄 위에 선 줄광대는 줄의 탄력을 이용하여 남보다 더 높이 뛰어오르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숫제 줄을 받지 못한 사람은 어찌할까요?  힘들게 작수목 위로 올라섰건만 보이는 것은 오직 허공뿐인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겁니다.  이를 지켜보는 구경꾼들이나 곁에서 재담을 준비하던 어릿광대 모두 발만 동동 구를 뿐 달리 방안이 없으니 안타깝기 짝이 없을 듯합니다.

 

여기 그런 아가씨가 있습니다.  이름은 양제니.  그녀의 나이는 이제 겨우 스물셋입니다.  줄놀음으로 치면 이제 막 작수목을 올라 줄 위에 설 준비를 하는 단계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녀에게는 작수목을 오르는 일도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남들은 가뿐히 오를 작수목을 여덟 번이나 미끄러져 굴러 떨어질 뻔하다가 간신히 올라 선 것이랍니다.  지켜보는 어릿광대와 구경꾼들도 모두 안타까운 마음에 가슴을 졸였겠지요.

 

"내게 찾아온 손님을 사람들은 '암'이라 부릅니다.  이제 나는 여덟 번째 손님을 맞았고, 다시 그 모든 손님을 이겨내고 일어서려 합니다.  그 과정은 세상 누구도 쉽게 겪어보지 못한 아픔의 과정이었지만 나는 고등학교를 2등으로 졸업하고 대학을 4년 만에 우수하게 졸업해, 의사가 되는 길을 향해 걸어가고 있습니다.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 나의 모습은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 희망이 되고 용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P.18)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몇 번이나 눈물을 훔쳐야만 했습니다.  생후 6개월부터 찾아든 암과의 사투.  그녀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형벌이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그녀가 그토록 좋아하던 배구는 뼈암 수술과 함께 그림의 떡이 되고 말았고, 대학 3학년에 찾아온 뇌암과 뼈암의 재발.  그녀는 대학교 3학년 1학기에 있었던 뇌암 수술 후에 자신이 죽더라도 엄마는 꼭 살아달라고 간절히 부탁합니다.

 

"죽는다는 것, 내가 세상에서 사라지고 없다는 것.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닌데, 마치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엄마에게 무너지는 아픔을 가져다주면 안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게 일어난 일, 그래서 다시 다가올 참지 못할 고통을 견디는 일 때문에 두려워하기에 앞서 난 엄마의 마음이 얼마나 절망적일지 먼저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엄마의 약속을 받아내야만 했다."   (P.136~137)

 

그녀에게 주어진 시간의 동아줄이 얼마나 되는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그 줄 위에서 펼칠 잔재비를 기다리는 수많은 구경꾼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나는 그것이 언제가 될지, 또는 짧은 도막줄이 될지, 줄타기 놀음의 모든 요소(익살스런 재담과 줄 소리, 춤, 아니리, 기예)가 어우러진 판줄이 될지 알지 못합니다.  나는 그저 그녀의 화려한 몸짓을 기대하는 한 명의 구경꾼으로서 그녀의 비상을 간절히 바라고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 삶이란 폭풍이 지나가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비와 함께 춤을 추는 것이 아닐까요."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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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섬에 내가 있었네 (반양장)
김영갑 지음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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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찍은 사진에서는 하늘을 닮은 자유가 넘친다.  끝도 없이 펼쳐진 바다 위로는 삶처럼 덧없는 한줄기 바람이 흐르고, 순간의 황홀이 사진 속에서 잠시 머문다.  제주의 부드러운 곡선과 그것을 뚫고 자라는 나무와 이불처럼 포근한 구름, 그리고 사랑을 닮은 석양.  그러나 그는 자유를 닮은 하늘을 향해 떠나고 빈 바람이 몰아치는 초원에 이제 그는 없다.  그가 찾던 지상의 아름다움은 더이상 찍을 게 없기에 그는 서둘러 떠난 것일까?

 

"살다보면 불현듯 찾아오는 슬픔, 분노,두려움, 절망, 그리고 힘든 상황을 극복해야 할 때마다 나는 자연에서 해답을 구했다.  그 속에 숨겨진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통해 해답을 구했다.  아름다움을 통해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지금 나는 모든 치료를 거부하고 아름다운 것만 보고, 아름다운 것만 느끼고, 아름다운 것만 생각하며 자연 안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하루를 보낸다.  난치병이라는 사실마저 잊고 평상심을 유지하려 애쓴다."   (P.243)

 

내가 이 책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인디고 서원을 운영하는 허아람의 저서 <사랑하다, 책을 펼쳐놓고 읽다>를 읽었을 때였다.  그분은 <그 섬에 내가 있었네>를 이렇게 소개했다.

"우리가 복잡한 세속의 도시 속에서 참으로 허망한 것들을 좇아서 살고 있구나.  자연은 영원한데 그 영원한 생명성 앞에서 오직 그 아름다움만을 좇아서 평생을 산 이런 예술가를 보니 정말 단순한 혁명의 삶을 이분처럼 살고 싶다는 마음이 제 마음속에 오래 남았습니다.  연말 또는 새해를 맞이하면서 뭔가 본연적인 삶의 아름다움과 계획을 꿈꾸는 분이라면 『그 섬에 내가 있었네』라는 사진집을 꼭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김영갑 작가는 20년이 넘는 시간을 제주도 들판에서 사셨죠.  더 겸손하고 겸허하게 이 아름다운 삶을 우리가 행복하고 열심히 살아야 될 이유, 이 책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다, 책을 펼쳐놓고 읽다'중에서>

 

가끔 그런 생각이 문득문득 들 때가 있다.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하는 의미없는 논쟁처럼 삶을 아름답고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짧다는 것을 미리 감지했기에 그렇게 했던 것인지 아니면 그렇게 몸을 혹사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그의 삶이 그토록 짧았던 것인지 하는 의문이 불현듯 마음속을 헤집고 들어오곤 한다.  그러나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요절한 많은 천재들의 삶을 들여다 보면 그들의 영역 밖에서 서성이던 많은 범인(凡人)들의 삶에 비해 그들의 삶은 얼마나 압축적이고 치열했던가 하고 느끼게 된다.

 

1957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난 김영갑은 제주도가 좋아서 무작정 정착했던 1985년 이래로 루게릭 병으로 짧은 생을 마감해야 했던 2005년에 이르기까지 그는 오직 제주의 풍경을 띡는 데만 몰입했다.  그가 남긴 사진은 지금도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에서 전시되고 있지만 그 사진을 보며 작가의 치열했던 삶을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남겨진 모든 유작들은 오롯이 산 자의 차지로 남았다.  그렇게 쉽사리 잊혀질 인생이었더라면 조금 더 욕심을 부려도 괜찮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  중산간의 초원을 찍은 그의 사진에서는 바람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밤이 되면 갤러리는 적막하다.  적막함을 즐기며 홀로 정원을 걷는다.  몸이 피곤해지면 편안한 상태로 침대에 눕는다.  건강이 나빠지지 않았다면 밤늦도록 사진 작업에 매달렸을 테지만 이젠 한가로운 일상에 익숙해졌다.  루게릭 병이 내게 준 선물이다."    (P.211)

 

몇 년을 수도하면 이런 경가에 이르는 것일까?  죽음마저 편안히 맞이할 수 있는 절대 긍정의 세계.  그는 그 평화의 땅에서 자유로웠을까?

겨울 바람이 차다.  23.5도만큼 기울어진 채 쉼 없이 도는 이 지구가 쓰러지지 않는 까닭은 결국 김영갑 작가처럼 자신의 삶을 마지막 순간까지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들의 열정 때문이라고 믿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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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우리나라 18대 대통령을 뽑는 투표일이었다.

나도 물론 투표에 참여했었다.  그것도 이른 새벽에.  아마 6시가 조금 지난 시각이었을텐데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았었다.  투표를 마치고 평상시처럼 산에 올라 가벼운 운동을 하였다.  추운 날의 공기는 폐 안쪽으로 깊이 들어가는 느낌이 드는데 어제도 그랬다.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을 대낮부터 불러 책도 읽히고 이야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투표권이 없는 아이들도 누가 대통령이 될지 몹시 궁금한 눈치였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자신들이 선택한 대통령은 아닐지라도 이땅에서 자라 이땅에서 자리를 잡고 살아야 하는 아이들 입장에서 자신들의 미래는 고스란히 어른들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누구를 찍었느냐고 끈질기게 물어왔지만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돌아가고 방송사의 개표현황을 지켜보다 늦은 시각에 잠이 들었다.

누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든 서민들의 삶은 크게 달라질 것도 없지만 어제만큼은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들이 개표결과에 누구는 환호성을 지르고 또 어느 누군가는 분을 삭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나도 물론 그 중에 한 사람이었다.  좀체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다가 정치는 나와 아주 멀리 떨어진 딴 세상이라는 생각을 하며 의식적으로 내 머리속에서 지우려 애쓴 후에야 가까스로 잠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정치라는 흉측한 애벌레가 내 몸 위로 꿈틀거리며 기어다닐 것만 같았다.

 

그러나 어제의 개표결과에서 '우리나라가 확실히 디지털 시대에 진입했구나'하는 자각을 하게 되었다.

왠고 하니 디지털 시대에 있어 정보의 이미지화는 무엇보다 중요하고, 내면의 컨텐츠는 이미지에 묻혀버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의 대선결과에 그대로 투영되었다.  정책이나 비전과 같은 컨텐츠는 사람들에게 하등 중요하지 않았다.  공중파 방송에 의해 형성된 후보자 개개인의 가상의 이미지는 선거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컨텐츠의 부재쯤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었다.  조금 과장하자면 요즘 개콘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브라우니가 대선 후보로 나온다 해도 이미지화에 성공만 하면 거뜬히 당선되고도 남을 것이라는 추즉도 가능하다.

 

어쩌면 야당의 후보에게 기표했던 사람들은 깊은 수렁에 빠진 듯한 패배감과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역사의 격랑 속으로 빠져든 느낌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결국 그 역사의 흐름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인식해야 할 뿐이다.

 

디지털 시대에 있어 허상과 같은 이미지만으로 대통령이 된다는 사실이 몹시 두렵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리고 앞으로는 이러한 현상이 더욱 심화되겠지만 어쩌겠는가?  시대를 역행하여 컨텐츠를 중시하던 아날로그 시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이 명백한 사실 앞에서  컨텐츠는 없고 오직 이미지만 남은 작금의 상황이 몹시 우려된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앞으로 있을 선거에서도 공중파 방송을 장악하지 못한 세력은 정권을 잡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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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집에서 나올 때 어찌나 미끄럽던지...

그동안 내렸던 눈이 채 녹지도 않았는데 그 위로 비가 내려 얼어 붙자 인도의 보도블럭은 한순간에 온통 빙판으로 변해버렸다.  사람들은 다들 엉금엉금 조심스레 걷는데도 미끄러지는 사람들이 여기 저기서 보였다.

 

김소연의 <마음사전>을 읽다가 맘에 드는 구절이 있어 옮겨 적는다.

 

감격이란, 세상 모든 것들은 저만치에 있고, 오직 자기 자신과 대상과의 관계에만 몰입할 때에 더 강하게 찾아오는 감정이다.  스포츠는 신기록과 우승이라는 대상이 눈앞에 있으며, 종교는 신이라는 궁극적인 존재가 머리맡에 있다.  그토록 가깝지만 손에 쉽게 닿지 않는다는 것에 우리는 이토록 감격스러워한다.  이처럼 대상과 나 이외의 것들은 안중에 없는 상태가 바로 청춘이다.  언제나 젊고 패기만만하며 자신이 젊다는 것에 한하여는 믿음이 굳건하고, 젊은 혈기와 젊음의 순수함은 매순간을 신기록을 세우듯 살아간다.  또한 매순간을 신의 뜨거운 입김 아래에서 살아간다.  그러니 감격스러울 일도 많고 눈물을 흘릴 일도 많다.  늘 무언가를 궁리하고 노력하여 그 결실을 거두고 싶은 사람이라면, 나이가 어찌 됐든 청춘으로 살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관전하는 일로도 감동을 만끽할 수 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우리의 깜냥에 대한 마지노선을 정해놓고 그 안에서만 바둥댄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마지노선을 더 낮게 정해놓고 물이 아래로 흐르듯 한없이 아래를 돌보며 헌신하며 살아가고, 진취적인 사람은 자신의 마지노선을 더 높게 설정해놓고 그것을 뛰어넘어 더 높은 곳의 열매를 딴다.  마지노선을 한없이 낮추거나 한없이 높이는 사람을 관전하는 일은, 내가 어느 쪽으로도 나의 마지노선을 옮기지 못하는 째째함과 근근함에 환기를 준다.  그 환기가 크면 클수록 감동적이며 눈물겹다.  한데 우리는 일상의 자잘한 감동을 알아채고 손에 꼭 쥘 줄 안다.  그럴 때의 따뜻함도 눈물겹다.  그때만큼은 우리도 대상에 몰입했고 생 앞에서 겸허했다.     <김소연의  『마음사전』중에서> 

 

밖에는 여전히 겨울비가 내리고 마음마저 비에 젖는다.

http://youtu.be/ttfH_5R9Tl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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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장군의 기세가 연일 매섭다.

혼자 사는 집에서 난방 온도 올리기도 미안하여 가급적 자제하고는 있지만 요즘처럼 쌀쌀한 날씨에 동동거리며 돌아다니다 보면  뜨끈한 바닥에 누워 어깨가 노곤노곤해질 때까지 늘어지게 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온도조절기 최하단의 '외출'을 고수하고 있다.  마음 같아서는 이마저도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혹여라도 보일러가 얼어 터질까 염려되어 차마 보일러를 완전히 끄지는 못하고 있다.

 

그래도 아침에 운동을 하고 돌아올 때면 등으로 촉촉히 배는 땀이 위안이라면 위안이다.  기상청의 한파 경보를 코웃음으로 날려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며칠 전부터는 찬물에 샤워를 하는 느낌이 조금 으스스하다.  예전부터 어지간한 추위가 아니고서는 샤워할 때 언제나 찬물을 고집했으니 습관될 만도 한데 나도 나이를 먹는지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요즘은 여기 저기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곧 있을 대통령 선거 얘기가 빠지지 않는다.  다른 지역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가 사는 곳에서는 그 판세가 정확히 반 반으로 갈리는 듯하여 양쪽 얘기를 듣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재밌다.  서로 핏대를 세우며 떠드는 폼세가 마치 자신이 대통령 후보라도 되는 양 진지하기 그지없다.  때로는 도가 지나쳐 금세라도 멱살잡이를 할 것처럼 기세등등해지는 경우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마저도 나와 같은 구경꾼의 입장에서는 재밌는 볼거리가 되곤 한다.  예로부터 불구경과 쌈구경이 제일 재미있다고 하지 않던가.

 

나는 주로 말없이 듣는 입장이지만 가끔 누가 옳으냐고 물을라치면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다.  황희 정승처럼 둘 다 옳다고 할 수도 없고.  아무튼 우리나라 국민들의 정치 관심도는 다른 어느 나라보다 높다는 것이 입증되는 셈이다.  그런데 하나 이상한 것이 있다.  그것은 여당 지지자들의 구성이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왠고 하니 지극히 부자이거나 고위 공직에 있는 분들이야 보수 여당을 지지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겠으나 사흘에 피죽 한 그릇도 못 먹을 듯 보이는 극빈층의 사람들이 여당을 지지하는 것은 의외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  내 주변 사람들만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여당을 열렬히 지지하는 극빈층의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보게 된다.  천양지차의 경제적 격차를 보이는 사람들이 한통속으로 여당을 지지하는 모습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울리지 않는 모양새다.  그리고 그들이 상대방을 설득하는 모습은 이것은 숫제 설득이 아니라 공격적이고 과격하다.  생각해 보라.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내 편으로 끌어들이려면 논리적이면서도 부드러운 말로 설득해도 어려운 일인데 그렇게 과격해서야 어디...

 

더 재미있는 것은 그들이 사용하는 용어이다.  야당을 지지하는 진보측 지지자들이 조선 시대의 수구파를 빗대어 '수구 꼴통'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그럴 듯한데 여당 지지자들은 하나 같이 상대방을 '빨갱이'라고 부른다.  이게 가당키나 한가?  

 

예전에 내가 알고 지내던 한 사람이 있었다.  특별한 직업 없이 주식투자만 하며 소일하던 분이었는데 어느날 내게 자신의 속옷을 까뒤집어 보여 주며 자신은 늘 빨간 속옷만 입는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분이 내게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는데 그분의 설명인 즉, 자신은 주식 시황판의 빨간색을 염두에 두고 그렇게 하는 것이라 했다.  주가가 오르면 빨간색으로 표시되는 것이야 다들 알고 있지 않은가.  그분은 주가가 오르기만을 염원하며 속옷까지 빨간색을 고집하는 것이었다.  그후 우리는 그분을 '빨갱이'리고 부르곤 했다.

 

보수 여당을 지지하는 분들은 진보 야당을 지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식투자를 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렇다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내가 아는 주변의 야당 지지자들 중 빨간 속옷을 입고 다니며 주가가 오르기를 기원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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