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6시에 일어나 평소처럼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잔뜩 흐린 날씨였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다.  '비가 오면 조금 맞지,뭐.'하고 가볍게 생각했던 게 문제였다.  우산도 없이 산을 올랐다.  등산로는 어제 내린 비로 여전히 미끄러웠다.

 

산의 정상 근처에 이르렀을 때부터  바람이 심상찮았다.

키 큰 교목의 우듬지를 스치는 바람소리가 '솨,솨'하고 거세지는가 싶더니 그야말로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오죽하면 목덜미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얼마나 크던지 아픈 느낌마저 드는 것이었다.  그 잠깐 사이에 옷은 속옷까지 흠뻑 젖었고 등산화도 이내 축축해졌다.  어찌나 거센 빗줄기던지 물보라가 하얗게 일고 앞도 잘 보이지 않았다.

 

빗방울이 잦아지면 내려갈 요량으로 운동기구 밑에서 잠시 동안 비를 피하였다.

하늘을 보니 쉽게 가라앉을 기미가 아니었다.  어차피 젖은 몸.  다시 빗길로 들어서 하산을 서둘렀다.  잠깐 휘몰아친 비에 등산로는 금세 누런 흙탕물로 변했다.  비에 젖은 옷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자연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는지 서늘한 한기를 느꼈다.  간신히 산을 다 내려왔을 때에야 빗방울이 가늘어졌다.

 

오전 내내 재채기를 하다 점심을 먹고나서야 좋아졌다.

지금도 여전히 비가 내린다.  인간은 자연 앞에 아주 작은 존재임을 까맣게 잊고 살았나 보다.  인간의 오만함은 이 엄정한 자연의 섭리를 순간순간 잊게 한다.  일각이 여삼추 같다가도, 지나고 보면 몇 시간이고 몇 날이고 건너뛴 것처럼 까맣게 잊혀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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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황당하고 어처구니 없는 일이 있었다.

내가 가르치는 한 학생이 자신이 쓴 글을

보고 수정 좀 부탁한다기에 독후감이나

방학숙제려니 생각하고 '그러마'고 선선히 대답했다.

 

그런데 그 학생이 들고 온 것은

자신이 쓴 '교사 추천서'였다.

대입 수시 지원에 필요한 서류라고 했다.

자기 소개서와 함께 교사 추천서가 필수라면서

자신이 직접 썼기 때문에 선생님이 쓴 것처럼 만들려면 

어른들 어투로 바꿔야 하는데 자신으로서는 난감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기껏해야 그 학생을 야자가 끝난 늦은 시각에

1시간 남짓 만나 공부를 도와주는 게 고작인데

더구나 많이 만나야 일주일에 두세 번인데

그 학생의 장단점을 세세히 알 리도 만무이고,

올 초에 처음 만났으니 고등학교 1,2학년 시기는

더더욱 알 길이 없다.

 

나는 그 학생의 교사 추천서를 고쳐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나 결국 학생의 장래가 걸린 문제니 어쩔 수 없이

학생의 부탁을 들어줄밖에.

 

동네 아이들의 공부를 도와주고는 있지만

교사 추천서를 부탁받기는 처음인지라

인터넷에 혹시 예시문 같은 게 있을까 싶어 찾아 보았다.

그제서야 나는 이런 불법적(혹은 탈법적) 행위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올해부터 수시 지원이 6회로 제한되었다고는 하나

지원할 때마다 교사 추천서를 써줘야 하는 선생님들의 고충을

이해 못 하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제도가 불합리하고

처리 불가능이면 상급기관(교육부가 되겠지만)에

따질 일이지 순진한 학생들에게 자신들의 소임을 떠넘기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선생님이란 자리가 어떤 것인가?

아이들을 바르게 자라도록 지도하는 위치가 아닌가?

선생님 스스로 아이들에게 불법을 가르치고 있으니

통탄할 일이다.

학생이 쓴 교사 추천서를 읽으며 우리나라 교육 현실이

그저 한심스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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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 두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무라카미 라디오 2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 / 비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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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히야마 하쿠의 수필집 <인생이라는 이름의 여행>이 있다.  특별히 잘난 체를 하려고 들먹이는 것은 아니고 이 책,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집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를 읽다가 나도 모르게 그 책이 떠올랐을 뿐이다.  책의 내용은 서로 다르다.  달라도 아주 많이.  그러나 두 작가가 모두 소설을 쓰는 사람이라는 것과 고히야마 하쿠가 <인생이라는 이름의 여행>을 썼을 때의 나이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현재 나이와 비슷했다(무라카미 하루키의 현재 나이는 63세이다.)는 점은 두 권의 책을 하나의 오브제로 착각하게 한다.  그래서인지 두 작가의 생각이나 문체, 글을 다루는 솜씨가 마치 한 작가가 두 권의 책을 쓴 것처럼 서로 닮아 있다.  나도 모르게 고히야마 하쿠를 떠올렸던 것은 그런 연유가 아닐까 싶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본작가들이 수필을 대하는 태도는 독특하다.  그것을 연륜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국민성이라고 해야 할지... 아무튼 한 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건조하다.  마치 어릴 적 비 온 날 산에 올라 불쏘시개를 구하기 위해 젖은 낙엽을 들추고 그 밑에 감추어진 마른 낙엽을 긁어 모을 때 맡았던 달콤한 숲의 향기와도 비슷하다.  가령 이런 식이다.  "묽은 커피를 마시며 누군가가 내게 무슨 얘긴가 하러 오기를 기다린다. 가끔은 이런 일도 괜찮다."에서처럼 그저 툭 던지고 잡다하게 설명하거나 어때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는다.  작가는 그저 글을 쓸 뿐, 판단이나 상황은 오직 독자의 사색과 상상에 맡긴다는 투다.  독자는 침묵과 같은 여백에 일순 당황한다.  그러나 짧은 침묵 이후에 찾아오는 나른한 자유의 품은 얼마나 달콤한가.

 

우리나라 작가의 글은 사뭇 다르다.  젊은 작가는 대체로 현란한 수사로 정확한 의미를 가리기 일쑤이고 웬만큼 나이가 든 작가는 깊은 사색의 결과물을 표현할 때 그 날카로움이 독자의 눈을 찌른다.  그것을 열정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작가는 한 순간도 독자와의 끈을 놓지 않는다.  그러므로 작가는 벼랑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채 죽을 힘을 다해 설명하거나 설득하려 한다.  그만큼 치열하다.  때로는 끈적끈적한 감정의 스프가 책을 읽는 나의 손바닥에 묻어날 것만 같다.  여유란 없다.  최소한 내가 책을 손에서 내려 놓기 전까지는.  일상의 가벼운 이야기도 숨가쁘게 읽는다.

 

이런 비교는 나의 독서량이 많지 않으니 단순히 주관적이고 편협된 것이지만 일본작가의 소설과는 달리 수필에서는 대체로 그런 느낌을 받곤 한다.  결국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두 나라 작가의 글쓰는 태도나 성향에 관한 것이지 작가의 역량을 비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을 조금 실망스럽게 읽었던 나는 이 책도 그러면 어쩌나?하고 걱정했었다.  그러나 이 책은 다행히도 위에서 밝힌 일본 수필의 느낌을 고스란히 전달받았다.

 

"나의 본업은 소설가요, 내가 쓰는 에세이는 기본적으로 '맥주 회사가 만드는 우롱차'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세상에는 "나는 맥주를 못 마셔서 우롱차밖에 안 마셔"하는 사람도 많으니 물론 적당히 쓸 수는 없죠.  일단 우롱차를 만들려면 일본에서 제일 맛있는 우롱차를 목표로 만들겠다는 것은 글쓰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마음가짐입니다.  그러나 뭐,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나는 어깨 힘 빼고 비교적 편안하게 이 일련의 글을 썼습니다.  어깨 힘 빼고 편안하게 읽어주신다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첫머리에>  

 

나는 전업으로 글을 쓰는 사람도 아니고, 경망스럽고 변덕스러운 독자 중의 한 명일 뿐이니 언제 아런 생각이 바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렇지만 나와 비슷한 성향의 사람이라면 한번쯤 읽어 볼 만한 책이다.  작가가 서문에서 밝혔듯 어깨에 힘 빼고 편안하게.  어쩌면 작가의 이러한 태도 - 욕심을 버리고 진솔하게 쓰려는 자세 - 가 수필을 읽는 독자의 마음을 흔드는지도 모른다.  작가에게 주눅들지 않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가뜩이나 쫄 일 많은데.

 

"그래서 귀찮은 것은 차치하고 어쨌든 내가 쓰고 싶은 것을 쓰고 싶은 대로 쓰기, 그것만 명심하고 있다.  너무 제멋대로인 것 같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  미안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내 입장에서 보면 독자를 설정하는 것을 처음부터 포기한 만큼 솔직하고 자연스럽게 글을 쓸 수 있는 것 같다.  '이런 걸 써야 해'하는 테두리가 없으니, 자유롭게 손발을 뻗을 수 있다."   (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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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추가 지나자 하루가 다르게 더위가 물러가고 있다.

그래도 한낮에는 햇볕이 여전히 뜨겁지만

부는 바람이 지난 주와는 확연히 달랐다.

나의 주관적인 느낌이었는지 모르지만.

오늘 낮에는 연령대가 비슷한 사람들로 구성된 한 모임에 참석했었다.

그 자리에서 이런저런 한담이 오가다가

어렸을 때 부르던 동요 얘기로 옮아갔다.

 

언제부턴가

아름다운 노랫말의 동요를 부르는  아이들을

우리 주변에서 더이상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내가 어렸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

등하굣길에 아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학교에서 배운 동요를 흥얼거리곤 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동요는 '송아지'인데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은 공감할 것이다.

"송아지 송아지 얼룩 송아지/엄마 소도 얼룩소 엄마 닮았네"로

시작되는 노래인데 '엄마 닮았네'하는 소절에서

'엄마~~'하고 끌어줘야 하는데

아이들은 다들 '엄마가 닮았네'로 불렀다.

 

그랬나 보다.

엄마 소가 송아지를 닮았던 그 시절에는

엄마가 아이들을 닮아 순진했던 그 시절에는

지금처럼 각박하고 메마르지 않았나 보다.

 

1984년 MBC창작동요제에서 대상을 수상했던

<노을>이라는 동요는 가을 향기 물씬한

아름답고 서정적인 가사로 지금도 대한민국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애창동요 1위라고 한다.

 

   노을

 

바람이 머물다간 들판에

모락모락 피어나는 저녁연기

색동옷 갈아입은 가을 언덕에

빨갛게 노을이 타고 있어요

 

허수아비 팔 벌려 웃음짓고

초가지붕 둥근 박 꿈꿀 때

고개 숙인 논밭에 열매

노랗게 익어만 가는

 

가을바람 머물다간 들판에

모락모락 피어나는 저녁연기

색동옷 갈아 입은 가을 언덕에

붉게 물들어 가는 타는 저녁놀

 

엄마가 아이들을 닮았던 그 시절

컴퓨터도 없고 텔레비전도 귀했던 그 시절이

오늘따라 많이 그립다.

 

"선생님 모시고 가고 싶지마는/하는 수 있나요 우리만 가야지/

하는 수 있나요 우리만 가야지/라라라라라라라라 간다나/"는

어떤 동요의 2절 가사인데 노래의 제목이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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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2-08-09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갈까요
고기를 잡으러 강으로 갈까요
이병에 가득히 넣어가지고서
라라라라라라라라 온다나 ^^
제목이 '고기잡이'였던가요?

꼼쥐 2012-08-16 14:57   좋아요 0 | URL
딩동댕~~♬ ♪
반갑습니다 ^^
요즘은 아이들이 우리 때보다 동요를 안 부르는 듯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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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 않는다는 말
김연수 지음 / 마음의숲 / 201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소설가는 숙명적으로 피상적인 현실과 삶의 뒤켠에 존재하는 진리의 중간쯤에서 노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가는 현실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하고 진리탐구에 깊숙이 개입해서도 안 된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여기에는 내 나름의 이유가 있다.  예컨대 소설가가 일반 회사원처럼 정시에 출근하고 정시에 퇴근하는 일정한 룰을 따른다면 대다수의 일반인과 하등 다를 게 없게 되고 그런 사람들 속에 파묻혀 살다 보면 보편적 인간의 삶을 객관적으로 묘사해야 하는 소설가의 입장에서 더 이상 그의(또는 그녀의) 글은 객관적이지도, 보편적이지도 않은 그저 그런 글이 되고 만다.  어쨌든 숲 속에서는 숲을 볼 수 없으므로.  나는 가급적 전업작가가 아닌, 소설가를 마치 부업처럼 생각하는 작가의 글을 읽지 않으려 한다.  가급적이 아니라 거의 읽지 않는다고 해도 무방하다.

 

진리탐구의 측면에서도 그렇다.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진리탐구는 목숨을 걸 만큼 매력적인 일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두려움이나 공포의 대상은 될 지언정 진리는 보편적 인간에게 쾌락이나 친숙함과는 거리가 멀다.  만일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주변에 존재한다면 그는 일반인들이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진리에 대한 극단적 두려움 또는 공포를 과감히 극복한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가가 굳이 보편적 인간의 공포를 소설의 소재로 삼을 이유는 없는 것이다.  돈에 초연하거나 득도한 소설가가 아니고서는.

 

가끔 '자전적 소설'이라는 말을 듣게 되는데 나는 이것 또한 적당한 표현이 아니라고 본다.  소설을 흉내낸 자전적 에세이 또는 보편성이 결여된 미숙한 소설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구도자가 아니고서는 '나'란 존재는 결코 관찰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소설가는 '너희들'의 일상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모습을 관찰하여 자신만의 이야기 틀에 담아내는 사람이므로 관찰자의 입장에 서지 못하는 이야기는 소설의 대상이 될 수 없을 뿐더러 좋은 소설이 될 리도 없다.

 

위에서 언급한 소설가의 속성을 이해한다면 소설가에 의해 씌어진 수필이나 산문집은 그닥 좋은 작품이 될 수 없음은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렇게 이해하면 설령 내용이 기대에 못 미치더라도 끝까지 읽을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큰 기대를 품고 어느 소설가의 산문집이나 수필을 읽는다면 열이면 열 만족보다는 실망할 확률이 높은 것이 사실이다.  오히려 그렇고 그런 신변잡기를 한 권의 책으로 엮었겠거니 하는 가벼운 생각으로 책을 읽는다면 '그래도 생각보다는 좋았다.'는 평을 할 수 있겠다.  이것은 가수가 연기를 하는 것처럼 어색한 일이니 소설가를 탓할 일은 절대 아니다.  역으로, 깊이 있는 철학적 사색이나 무릎을 칠만한 이야기를 소설이 아닌 산문집으로 엮어낸 소설가라면 그는 이미 소설가가 아닌 수필가로 보아야 할 것이다.

 

소설가 김연수의 산문집 <지지 않는다는 말>을 나는 아무런 기대도 없이 읽었다.  책의 내용은 나의 생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달리기광'으로 정평이 난 사람이니 달리기에 관한 내용이 책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이다.    달리기 이외에 작가의 유년시절, 빵집 아들로서의 명절 대목, 부모님의 숨말하기, 서울 삼청동에 살았던 시절의 에피소드 등 여러 이야기들이 등장하지만 이야기 도중에 불쑥불쑥 달리기와 관련된 말이 튀어나오곤 한다.  이제는 어엿한 인기 작가의 반열에 오른 소설가 김연수의 작품치고는 격이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고 실망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그런 사람들을 위하여 이 리뷰를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상기하자면 김연수는 소설가이지 수필가가 아니다.

 

"살아 본 바에 따르면 삶에는 인과관계가 분명히 존재한다.  아직까지 많은 경험을 해 보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아직도 젊어서 그런지 불교에서 말하는 인과응보까지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인과관계란, 노력의 결과를 그 자리에서 확인하는 즉석복권과 같은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한다.  그러면 그 보답이 즉각적으로 내게 찾아온다."   (P.295)

 

나는 어느 정도 작가의 의도와 뜻하는 바를 공감하며 읽었지만 다 그랬던 것도 아니다.  달리기를 좋아하는 작가를 비난할 생각은 없지만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등산이 마치 막걸리나 마시기 위한 핑곗거리 또는 등산을 가장한 여자 후리기로 묘사한 대목에서는 매일 아침 산을 오르는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나는 술도 마시지 못하고 여자를 꼬시는 능력도  없지만 산은 누구보다 좋아한다.  반면에 작가와 내가 생각이 일치했던 것은 "사람이 너무 좋은 게 콤플렉스"라는 대목이었다.  살다 보면 사람 좋다는 말이 칭찬만은 아님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순간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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