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 장정일의 독서일기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1
장정일 지음 / 마티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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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의 독서일기>를 읽기 시작한 것은 꽤나 오래 전의 일이다.
내 돈 주고 사서 읽었던 것은 아니고 지인에게 빌려 읽었는데 그 이유인즉슨 이런 종류의 책-독서가 목적이 아닌 독서 목록을 수집하고자 하는 수단으로서의 책-을 구입하는 데 내 돈을 주고 산다는 것이 은근히 아깝다는 얄팍한 생각이 들었던 탓이다.  한 권으로 끝나겠거니 했던 책이 점차 권수를 더하는 바람에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에 처하고 말았다.  지인은 더 이상 책을 사지 않았고 누군가의 독서일기를 몰래 엿보던 묘한 즐거움(또는 관음증)은 끊기 힘든 유혹이 되었다.  그렇게 사 모은 책이 이 책을 더하여 도합 여덟 권에 이른다.  책 수집가도 아닌데 말이다.

나는 이런 종류의 책을 단 한번에 끝까지 읽지 못한다.
생각날 때마다 그저 야금야금 읽는다.  형제가 많은 집에서 자란 사람들은 다 이해하겠지만 누군가로부터 받은 사탕 몇 알을 자신만 아는 장소에 숨겨두고는 달콤한 것이 간절할 때만 몰래 가서 몇 모금 핥던 생각이 난다.  그러나 내가 책을 아껴 읽는 것은 이것과 사뭇 다르다.  독서일기 한 권에는 줄잡아 수십 권의 책이 소개되는 까닭에 책 욕심이 많은 나는 그 중 적어도 이삼십 권의 책을 사들일테고 그것은 고스란히 내 손길도 닿지 않은 채 묵은 책이 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돈도 돈이려니와 책 한 권을 읽음으로써 예상치도 못한 전집 한 질 분량의 책이 늘어나면 나는 한동안 독서에 대한 부담감으로 책을 읽지 못하는 처지에 처하곤 하는 것이 더욱 큰 문제다.  웬만한 사람이면 그런 경험을 서너 번 겪고 나면 그런 못된 버릇이 고쳐질만도 하련만 나의 경우에는 너무도 쉽게 잊혀지니 고칠 기회를 찾지 못한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야금야금 읽기'다.
책의 구매를 일정한 기간으로 나누어 소비의 분산을 꾀하자는 나의 얄팍한 속셈은 그럭저럭 성공한 듯 보인다.  충동구매로 인한 책의 대량반입은 사라졌다.  그러나 고쳐지지 않은 나의 습관이 언제든 고개를 들고 나를 노려보게 되리라는 막연한 불안감은 지울 수 없다.

 이 책은 지금까지 써왔던 장정일의 스타일과 많이 다른 책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예전에 발간 된 그의 책들을 살펴보면 자신의 일상 이야기와 전형적인 일기형식이었다. 독특하고 재미있는 방법으로 풀어내어 무척 재미있게 보았다. 하지만, 이 책은 조금 달랐다. 자신의 이야기는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책읽기의 방법과 주제를 주로 소개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래왔듯 장정일의 독서를 통한 세상읽기는 배배 꼬인 그의 심사를 번번이 드러낸다.  

 책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2부 우리는 과거로부터 얼마나 멀어졌을까"를 제외하면 부의 구별이 무의미해 보인다.  단지 작가의 자의적 분류였거나, 출판사의 편의적 구분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뿐이다.  하기야 어떤 순서로 놓여지든 한 작가가 쓴 서평이 달라질 리도 없을 것이다.  장정일의 독서일기를 읽으며 매번 드는 생각은 그의 독서 탐닉은 참 대단하다는 것이다.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사람이니 그 정도는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당위성에 빗댄 질문을 한다면 뭐라 변명할 말도 없지만, 그런 당위성마저 지키지 않는 얼치기 작가가 세상에는 쌔고 쌨다. 

 300쪽이 조금 넘는 책 한 권을 장장 두 달에 걸쳐 다 읽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들으면 '책도 어지간히 싫어하는 사람이군' 하는 말이 절로 나올 법하다.
오늘은 빼곡히 적은 독서목록을 들고 아들녀석과 도서관에 가기로 약속을 했다.  비는 개었지만 하늘은 여전히 어둡다.  점심을 먹고 나도 이제 슬슬 나갈 채비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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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는 방법 - 히라노 게이치로의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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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할 일도 숱하게 많고, 보지 못한 것도 너무나 많은데 우리는 왜 책을 읽는가? 하는 질문을 받는다면 뭐라 답할까?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작가처럼 멋진 말로 그 이유를 조목조목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나도 그렇다.  딱히 생각해 본 적도 없지만 그저 재밌으니까 읽을 뿐, 특별한 목적이 있는 공부가 아니고서야 일상의 독서에 어떤 이유를 대고 하는 경우가 몇 번이나 되랴.  '읽는다는 것은 개인적 행위일뿐 아니라, 인간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소속감을 유지하는 작은 연대감의 체험이 된다'고 한 앤 패쳇의 독서론에 선뜻 수긍하기 어려운 이유도 나의 무작정의 독서, 무계획의 독서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러 문학 장르 중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소설로 그 범위를 축소시켜 보아도 대답은 여전히 마땅찮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문학평론가 김현은 "소설은 모든 예술 중에 내가 사는 세계가 살 만한 세계인가 아닌가를 가장 재미있게 반성케 하는 예술이다.  일상 속에 매몰된 의식에 그 반성이 채찍질을 가한다.  이 세계는 과연 살 만한 세계인가, 우리는 그런 질문을 던지기 위해 소설을 읽는다."고 했다.  멋진 말이다.  그런가 하면 체호프를 몹시 흠모했던 쇼스타코비치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체호프를 게걸스럽게 읽는다. 그의 글을 읽으면 삶의 시작과 종말에 대해 무언가 중요한 생각을 곧 만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삶의 시작과 종말에 대한 무언가 중요한 생각'이라는 문구는 한참을 생각하게 만든다.    

시와 소설 두 부문에서 모두 퓰리처상을 받은 유일한 저자이기도 한 로버트 펜 워런은 <우리는 왜 소설을 읽는가?>라는 글에서  “소설은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만을 주지는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소설이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지조차 몰랐던 것들을 줄 수도 있을 거라는 사실이다.” 라고 썼다.  그렇다면 내게 있어 소설읽기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재미'라는 자성체가 이끄는 궁극의 세계로의 여정>과 같은 것이었다.  즉, 맹인과 같은 나를 '재미'라는 매개체가 알 수 없는 궁극의 세계로 이끌고 있다는 막연한 믿음으로 소설을 읽는다.  내 삶의 시간 내에 도달할 수 있는 궁극의 세계는 반쪽짜리 깨달음이 될지, 허무의 빈 공간이 될지 나는 알지 못한다. 

소설에 대한 정의로 시작하는 이 책은 무엇보다 `천천히 읽기`를 제시하며 소설 독법을 이야기한다.  법학을 전공한 저자의 시각에서 소설의 깊이는 분석과 해석의 대상이었는지도 모른다.  재미라는 더듬이로 책을 선택하고, 책 속에서 살내음에 취하고, 감동이라는 최상의 재미를 만끽하는 나와는 사뭇 다르다.  작가는 후기에서 이 책을 쓴 소회를 이렇게 밝혔다. 

"이 책에서는 기본적으로 '소설 읽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보고,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은 뒤에 블로그에 자신의 느낌을 올리고 서로 의견을 교환할 때 도움이 될 '원초적인' 시점을 소개하고자 했다.  따라서 이 책의 목적은 비평이 아니다.  다양한 유형의 소설을 예로 들어 세세하게 살펴보는 작업은 내게도 무척 즐거운 일이었다.  해설을 시도하는 동안 머리도 상당히 정리되어 좋은 공부의 기회가 되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귀중한 텍스트를 해부하는 듯한 야만적인 짓까지 하게 되어 저자 여러분께 죄송한 마음이다."  (P.232)

그가 소설 감상법에 집중하게 된 이유는 `소설을 더 사랑하는 방법`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그가 제시한 소설 읽기 방법은 네 단계다. 작가 편에서 구조를 파악하는 `메커니즘`, 작가 인생에서 작품 발표 시기와 테마의 발전을 추적하는 `발달`, 작품이 독자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는 `기능`, 사회·역사·문학사적 맥락에서 소설의 위치에 접근하는 `진화`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나의 취향과 동떨어진, 다가가기 싫은 방식이었다.  나는 '감성의 끌림에 의지하여 내 맘 대로 읽기'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저자와 나는 서로 다른 쪽을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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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내가 가르치던 아이들 중 올해 수능을 치르는 세 명의 아이들과 숙소 근처의 식당에서 조촐한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여학생 두 명과 한 명의 남학생.  내가 아는 그 아이들은 식성도 좋고, 성격도 밝은 아이들이었는데 긴장한 탓인지 밥을 앞에 놓고 깨작거리기만 할 뿐 예전처럼 복스럽게 먹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이 세상을 산다는 것이 즐겁고 행복하기만 하여도 그 지난한 세월을 견디기 어려울텐데 아이들에게 세상은 언제나 불안과 두려움의 대상인 모양이다.  시간이 얼마나 흐르면 이 아이들로부터 '그때가 좋았다' 는 말을 들을 수 있을까?

금세 어두워진 하늘을 보며 서둘러 아이들을 돌려 보냈다.  바람이 거셌다.
나는 아이들에게 "요 모퉁이만 돌면..."이라는 희망 섞인 말은 하지 못했다.  아이들은 어쩌면 '이번에는... , 이번에는...'하면서 많이도 속아왔는지도 모른다.  오늘은 푹 자고 내일 수능시험 잘 치르라고 이르며 등을 토닥여주었다.

나는 지난 1년 동안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제발 부자는 되지 말아라'하는 말을 여러번 했었다.
힘들게 어린 시절을 보냈으니 어른이 되면 부자로 살라는 말을 하는 것이 당연할텐데 그렇게 하지 않은 까닭은 그들에게서 어떤 가능성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도 아니요, 악담을 하려는 것도 물론 아니었다.  어줍잖게도 나는 그 근거를 물리학에서 찾았다.  우주 탄생의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빅뱅 이론에서 보면 밀도와 에너지가 높았던 빅뱅 초기의 고에너지 원시입자는 서로 결합하여 물질을 이루지 못하는 '쿼크-글루온-플라즈마'상태를 유지했었다.  수소 원자와 헬륨 원자가 만들어지기까지는 그보다 낮은 온도와 에너지에서나 가능했었다.

이런 생뚱맞은 소리를 하는 까닭은 인간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돈이 있으면 '든든하다'고 한다.  즉 돈은 현대인에게 가장 원초적인 에너지원이요, 삶의 기반이 된 지 오래다.  그러나 자연계의 입자들도 에너지가 너무 높으면 서로 결합하지 못하듯이, 사람에게도 돈이 너무 많으면 이웃과 어울리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할지 모른다.  사람도 자연계의 일부이니 이러한 자연법칙이 작용하지 않는다고 그 누가 주장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입자는 서로 결합하기 이전에는 물질이라 말하기 어렵다.  하물며 이웃과 어울리지 못하는 인간을 인간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는 어쩌면 실존하는 인간으로서의 아이덴터티를 상실한 채 평생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부자가 아니라서 일종의 열등의식으로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으로서의 참살이는 이웃과 어울려 그 속에서 삶의 소중한 의미를 깨닫는 것이라고 규정할 때, 부자는 그 기회를 상실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니르바나'나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은 이러한 깨달음의 상태가 아닐까?
그래서 성경에도 "나는 분명히 말한다.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거듭 말하지만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라고 씌어졌나 보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작은 깨달음이라도 얻지 못한다면 어찌 '극락'이나 '천국'을 욕심낼 수 있으랴.  그래도 부자가 되고 싶다면 <티벳 사자의 서>를 읽어볼 일이다.

"얘들아, 너희들은 커서 제발 부자는 되지 말아라."

수능이 끝난 지 며칠이 지났건만 나는 그 아이들에게 전화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시험은 잘 보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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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방일기
지허 스님 지음 / 여시아문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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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무런 목적 없이 일삼아 먹는 행위를 '허식(虛食)'이라고 부르곤 한다.  물론 사전에는 없는 말이다.  현대인은 영양분이 부족하여 먹는 '필요식(必要食)' 외에 입이 심심하여 습관처럼 먹는 병적인 증세가 누구에게나 있다.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이럴 때 우리 몸에 미치는 영향은 득보다는 실이 많다.  유행처럼 번지는 이런 행위가 비단 음식에만 국한되는 것일까?  요즘 출간되는 서적을 보면 그런 현상이 글에서도 두드러지는 듯하다.  지나친 묘사(특히 심리묘사), 과장된 비유, 불필요한 설명, 비슷한 내용의 반복 등 흠을 잡자면 끝도 없다.  글의 낭비요, 지식의 과한 주입이라 아니할 수 없다.  허식을 하면 속이 더부룩하고 몸이 나른해지듯 이러한 글을 읽고 나면 머리가 무거워지고 개운치 않은 감정의 찌꺼기만 남는다.  달착지근한 맛에 길들여진 현대인은 음식 뿐 아니라 글에서도 말초적인 감성을 자극하는 얕은 글에 익숙해져가는 듯하다.

그렇다면 현대인은 왜 몸에도 좋지 않고 정신에도 좋지 않은 얕은 맛, 얕은 글에 탐닉하는 것일까?
나의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그것은 아마도 뿌리가 허한 탓이 아닐까 하고 추측한다.  몸의 뿌리가 튼실하면 자신의 몸이 필요로 하는 음식과 영양분을 충분히 섭취하는 것으로 족하고, 정신의 뿌리가 튼실하면 맑고 간결하지만 깊은 사색이 필요한 글을 즐겨 읽게 된다.  '그래!. 맞아.'라고 외칠 수 있는 깊은 글이 독자들로부터 외면을 당하는 것도 다 이런 까닭이다. 

지허스님의 <선방일기>는 그런 책이다.
탁 트인 마음골에 맑고 푸른 솔바람이라도 불 듯한, 청아한 풍경소리에 화들짝 놀라 자리를 뜨는 묏새처럼 도무지 군더더기를 찾을 수 없는 단아한 글이다.  충무공의 <난중일기>처럼 글은 처음부터 뼈대만으로 전체를 이끌고 있다.  이 책은 1973년 신동아에 연재되었던 글로 1993년과 2000년에 출간된 적이 있으며 전국 각지에서 ‘상원사(上院寺)’로 모여든 스님들의 선방생활 기록이다.  저자인 지허스님은 구전에 의하면 서울대를 졸업하고 탄허 스님 문하로 출가했다고 한다. 1962년~1963년 사이 1년간 강원도 정선 정암사에서 20여리 떨어진 토굴에서 수행했고 이때의 기록이 《대한불교》에 연재된 적이 있고 1975년 입적했다는 진술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고 한다.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참으로 우연이었지만, 나는 알 수 없는 인연에 오싹한 전율을 느꼈다.  나는 지허스님이 토굴에서 수행하셨다는 정암사의 심적암을 방문했었고(심적암은 일반인의 방문이 허용되지 않는다) 지금도 그곳에서 수행하시는 스님과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있다.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창건한 정암사의 수마노탑을 뒤로 하고 가파른 산길을 한동안 올라가다 보면 바람소리와 새소리만 가득한, 너무나 조용하고 마음조차 고요해지는 심적암이 나타난다.  그 별천지와 같은 수행터를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이 책은 오대산에 있는 고찰 상원사에서 동안거를 나기 위해 방문했던 지허스님이 결제일을 보름 앞둔 시월 일일부터 이듬해 그 곳을 나서기까지의 석달 보름간의 선방생활을 솔직담백하게 적은 일기 형식의 글로서 모두 23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었다. 상원사행,산사의 김장 울력과 겨울채비, 결제, 소임, 선방의 생태, 선객의 운명, 포살, 선방의 풍속, 유물과 유심의 논쟁, 본능과 선객, '올깨끼'와 '늦깨끼',식욕의 배리, 화두, 병든 스님, 용맹정진, 마음의 병이 깊이 든 스님, 별식의 막간, 세모, 선객의 고독, 스님의 위선,열반에 이르는 길, 해제 그리고 회자정리 등의 소제목은 구도자로서의 솔직한 고민과 일상을 엿보게 한다.

"선객은 숙명의 소산이 아니라 운명의 소조이다.  숙명은 자기 이전에 던져진 의지이자 주어진 질서여서, 생래적으로 어쩔 수 없는 선천적인 것이지만, 운명은 자기자신의 의지로 자유로이 선택한 후천적인 현실이다.  그래서 숙명은 필연이지만 운명은 당위요, 숙명이 불변이라면 운명은 가변이요, 숙명이 한계성이라면 운명은 가능성을 의미한다."  (P.38)

이 얇은 한 권의 책이 가슴 깊이 쌓아둔 노여움과 욕망을 내려놓게 한다. 차갑지만 맑고 신선한 겨울 아침을 만나는 기분이라고 할까. 싸한 냉기가 죽비처럼 등짝을 내려치는 듯하다.  해서, 어지러운 마음이 한결차분해지고 정갈해진 기분이다.  안거는 여름과 겨울 각각 3개월씩 진행되는데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죽비를 신호로 간단히 3배의 예를 올린 뒤 화두를 들고 선(禪)에 들어가는 불가수행의 한 방식이지만 이런 스님들의 일상을 치열하게 묘사한 <선방일기>는 사부대중인 나의 마음에 비수로 꽂힌다.

지허스님이 풀어낸 수행 이면의 살가운 이야기들은 짠한 느낌과 함께 뭉클한 감동을 자아낸다.  뭔가 결심이 필요하거나 확신이 필요할 때마다 들춰볼만한 책이다.  '허식'(虛食)과 '허독'(虛讀)에 찌든 현대인에게 이 책은 '치유의 서(書)'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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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세월이 참 빠르기도 하다. 

새해가 밝았다는 들뜬 목소리를 엊그제 들은 것만 같은데 벌써 11월! 

이제 달력은 단 두 장을 남기고 있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 하는 다짐을 하며... 

 

나는 블로그를 시작하면서부터 아직은 어린 내 아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들을 블로그에 남기고 있는 것이다.  새삼 느끼는 것은 한 아이의 아빠가 된다는 것, 그리고 좋은 부모가 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 책이 어쩌면 나의 부족한 면을 가려줄 수 있지 않을까? 

 

 

 

 

누구에게나 역경은 소리없이 찾아든다.  그러나 그 험난한 과정을 겪어내는 일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인생의 가장 밑바닥을 경험할 때 자신의 곁에 남는 것이야말로 가장 알짜배기가 아닐까?  우리가 역경을 경험하는 것은 그런 알짜배기를 선별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파울로 코엘료의 작품은 독자로부터 언제나 극과극의 평을 듣게 된다.  같은 작가의 작푼인데 매번 그런 결과가 나오는 것도 신기한 일이지만 곰곰 생각해 보면 그럴만도 하다.  동양인, 특히 우리나라의 사람들에게는 그 책이 담고 있는 주제의 설정이 무엇보다 중요한 까닭이다.  이번 작품은 어떤 평을 듣게 될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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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신간평가단 2011-11-09 1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크완료했습니다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