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
시몬 비젠탈 지음, 박중서 옮김 / 뜨인돌 / 200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누군가를 용서하고 누군가로부터 용서받는다는 것은 쉬운 듯하면서도 어렵기 짝이 없는 일이다.
어려서부터 나는 이 문제에 집착했었고 진정한 용서가 가능할까? 하는 의문에 휩싸였었다.  성경을 종교가 아닌 독서 혹은 상식의 차원으로 읽었던 내게 그들이 말하는 참회나 회개는 더더욱 이해하기 힘든 문제였다.  나의 상식으로는 어떠한 죄를 짓더라도 진심으로 뉘우치면 용서가 된다는 것이 궤변으로 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신으로부터의 용서를 기대할 수 있는 죄의 범위는 분명 존재한다고 믿었다.  가령 거짓말과 같은 작은 죄는 용서가 되지만 살인과 같은 돌이킬 수 없는 범죄는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주에 속한다고 믿었다.

성경에 대한 이런 주관적 해석은 칸트가 말했던 정언명령에 더하여 감성적 일깨움으로 굳어지게 마련인데 나 또한 다르지 않았다.  순결 혹은 성적인 면에서도 자신이 책임질 수 없거나 사랑하지 않는 이성과의 육체적 결합은 신의 용서를 기대할 수 없는 범죄라고 굳게 믿었다.  그런 탓에 아내와 만나 결혼을 약속하기 전까지 나는 일체의 스킨쉽도 하지 않았다.  아내의 말을 빌자면 그때의 나는 숨이 콱콱 막힐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나의 태도는 어쩌면 열등의식을 숨기기 위한 방어기제, 또는 타인과 나를 구별하는 선민의식과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인식의 바탕에서 "용서"는 일종의 나약한 인간의 방어기제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진정한 용서는 대다수 일반인에게 불가능한 일임에도 자신만은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세상의 모든 이에게 보여주려는 유치한 발상에서 기인한 행동으로 보았던 것이다.  시쳇말로 쿨해 보이기 위한 치기어린 행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믿었다.  겉으로는 용서하는 체하면서도 마음 속에 존재하는 감정의 찌꺼기는 어찌할 수 없이 자신의 인내에 의존해야 한다고 믿었다.  즉 상대방에 대한 증오나 분노는 분명 이성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위선적 용서보다는 오히려, 지금은 나의 감정을 존중하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분노의 감정이 희석되기를 바라는 편이 옳다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결론짓고 한동안 덮어 두었던 "용서"의 문제는 이 책으로 인해 불거졌다.
저자인 시몬 비젠탈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포로 수용소에 갇혀 강제노역을 하였다.  하루하루의 삶이 늘 죽음과 함께 했으며 전쟁이 끝난 후 저자는 나치의 학살자들에 의해 무려 89명의 일가친척을 잃고 아내와 단 둘이서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수용소의 강제노역 도중에 만난 한 SS대원의 참회와 그에 대한 자신의 행동이 과연 정당했는지 묻고 있다. 

저자는 어느 날 임시병동으로 쓰이던 기술전문학교 건물의 쓰레기 하치 작업에 동원되었다.  그 학교는 자신의 모교였고, 작업 도중 한 간호사에 의해 임종을 앞둔 젊은 SS대원의 병상으로 인도된다.  온몸에 붕대를 두른 채 누워있는 병사는 자신이 저지른 유대인 학살을 고백한다.  그리고 불이 붙은 채 건물 밖으로 떨어지던 유대인 부부와 아이의 얼굴을 잊지 못하겠다며 용서를 빈다.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병사의 참회를 듣게된 저자, 자신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태에 놓여있던 저자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 자리를 떠난다.  다음 날 병사는 죽었고 간호사는 그 병사가 자신에게 남긴 유품을 전하지만 거절한다.  전쟁이 끝나고 저자는 그 병사의 어머니를 만난다.  남편도 잃고 아들마저 잃은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착한 아이였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저자는 그 아들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꺼내지 않은 채 그곳을 떠난다.
저자는 글의 말미에 독자에게 묻는다.  "과연 나라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

이 책의 2부에는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28명의 주장이 실려 있다.
비젠탈의 행동은 옳았다고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다는 사람들.  홍세화, 달라이 라마 등 각계의 유명인사들의 견해는 서로 달랐다.  성직자의 견해와 일반인의 견해는 분명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용서의 행위를 시간적 연속성(또는 관계의 지속성)을 전제로 한 행동이라고 간주할 때 이 책에서 제기한 용서의 문제는 조금 다르다.  그 병사는 임종을 앞두고 있었고,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선 그 병사는 무엇보다 영혼의 안식이 필요했을 것이다.  관계의 지속성과는 거리가 먼 상황이라는 말이다.  또한 저자의 입장에서 임종을 앞둔 한 인간의 모습은 일말의 동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어찌 보면 자신의 영혼을 구제하고 싶었던 지극히 이기적인 병사의 참회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용서의 주체가 될 수 없었던(병사의 행위는 자신에게 행해진 것이 아니기에) 저자의 갈등은 인간이기에 어찌할 수 없는 감정의 문제일 뿐이라고 본다.  그 상황을 재연할 수 없는 독자의 입장에서 비젠탈의 질문은 참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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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19 14: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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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23 15: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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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퍼스 풍경은 봄보다 가을이 좋다.
생명이 움트는 시기에 타오를 듯한 생명력을 지닌 젊은이들이 넘실대는 교정은 감정이 격해지는 장소요,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지는 곳이다.  부산스럽다.  때론, '오!'하는 탄성을 남발하며 자신의 감정을 과하게 소비하기도 한다.  뜨거운 입김이 확확 뿜어져 나올 듯한 젊은 날의 열정에 계절이 기름을 부은 격이라고나 할까.  자신의 감정을 가누지 못해 처음 보는 남자의 한 마디 사랑 고백에도 자신의 입술을 내어주고 마는 장소가 바로 봄의 교정이 아니던가.

그런가 하면 가을은 오히려 젊음의 열기를 어느 정도 잠재우는 시기이다.
가을을 응시하는 젊은이의 눈에서 쇠락하는 계절의 탓인지 젊음의 철없음은 찾기 어렵다.  치기가 사라진 얼굴은 아름답다.  길지 않은 그들의 삶을 고요히 돌이킬 수 있는 이 귀중한 시간을 젊은날엔 알지 못한다.

얼마 전 한 대학병원으로 친구의 병문안을 갔었다.
대학 교정의 나무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잘게 부서지는 가을 햇살을 바라보았다.  링거줄을 매단 그의 깡마른 손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설멍한 다리 위에 걸쳐진 헐렁한 병원복이 바람에 힘없이 날리는 것도...
괜시리 찔끔거리는 내게 친구는 오히려 위로의 말을 건넨다.  먼 산 너머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선연한 피빛 광채의 화살이 물기 어린 내 시선을 뚫고 가슴에 박힌다.  경계를 구분할 수 없는 붉은빛의 그라디에이션.  친구의 가슴도 저 노을처럼 타들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다 어느 순간 막막한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리지나 않을지...

싫다는 나를 잡아 끌고 친구는 가까운 대학건물로 향했다.
주인 없는 빈 건물에는 안으로 굳게 잠긴 강의실이 끝도 없이 이어지고 어두운 복도에는 괴괴한 적막감이 흘렀다.  친구는 순간 비틀거렸다.  그만 가자며 그의 한쪽 팔을 부축했을 때, 알 수 없는 설움이 밀려왔다.  친구는 왜 빈 강의실에 들어가려 했을까?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추억 속에서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건재하다는 것을 그 과거의 시간 속에서 확인 받고 싶었던 것일까?  잠겨진 문을 확인하는 순간 과거와 현재의 분명한 구획이 그를 절망하게 했던 것일까?
           
마지막 햇살이 붉은색 듬뿍 찍어 푸른 하늘 멀리 길게 사선을 긋고 있었다.
비틀거리며 힘겹게 걷는 친구의 모습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누군가 옆에서 걷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 든든한 느낌을 받았던 적이 있던가.  걸어가는 모습만으로도 아무런 사심없이 그저 고맙고 감사했던 적이 있던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도 이제 그럴 나이가 되었다.  누군가 살아 숨쉰다는 것이 그 무엇보다 고마운 나이.  이제 그 고개를 향해 묵묵히 걸어야 할 나이가 되었구나.

친구를 병실로 데려다 주고 또 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무거운 발길을 돌렸다. 
친구야, 암이라는 무거운 병이 네 발목을 잡더라도 그때처럼 걷는 일은 결코 멈추지 말아야 한다.  지금은 고인이 된 박완서님의 "노을이 아름다운 이유"를 읽으면 너는 또 다시 기운을 얻어 보란 듯이 힘찬 발걸음을 내딛게 되지 않을까?
   
 "그냥 은은한 잔광만 남기고 꼴딱 질 적도 있지만 산정에 구름이라도 몇 점 머물러 있으면 기가 막힌 노을을 보여줄 적도 있다. 구름은 부드러운 솜털구름보다는 터치가 힘찬 약간 성난 구름이면 더욱 장관을 보여준다. 노을이 너무도 핏빛으로 선열하여 영웅호걸의 낭자한 출혈처럼 비장할 적이 있는가 하면, 가인의 추파처럼 요요할 적도 있다. 어느 쪽이든 우리를 숨막히게 한다. 온몸을 나사처럼 죄어오다가 순식간에 풀어 준다. 그러고 나면 속은 것처럼, 내동댕이쳐진 것처럼, 서럽고 막막해진다. 아침에도 노을이 지지만 그건 곧 눈부신 햇살을 거느리기 때문에 사라지는 게 아니라 잊혀진다. 그러나 저녁노을은 언제 그랬더냐 싶게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 끝이 어둠이기에 순간의 영광이 더욱 강렬한 여운을 남긴다."  <박완서님의 "노을이 아름다운 이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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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17 17: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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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19 14: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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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수필 - 새로 가려 뽑은 현대 한국의 명산문
방민호 엮음 / 향연 / 2003년 7월
평점 :
절판


아침부터 바람이 불었다.
뜨겁게 내리 쬐는 햇살, 그러나 가을 바람은 무더위에 지친 사람들을 감질나게 하던 한여름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초가을의 향수가 마음 가득 안겨오는 주말의 아침.  여름이 다 가기도 전에 나는 벌써 한 해가 다 간 듯한 쓸쓸함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버석거리며 밟힐 듯한 낙엽과 과거로 향하는  가을 한낮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학창시절 국어 교과서에 자주 등장하여 꽤나 낯이 익은 문인들의 수필을 읽었다.    문학 평론가로 활동하는 방민호 교수가 가려 뽑은 것인데, 일제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우리 문인들의 산문 중 지금 읽어도 그 생생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을 선별하였다고 한다.  가을은 할 말이 많은 계절이다.  가끔 떠오르는 옛친구의 얼굴에서, 지금은 잊혀진 아련한 첫사랑의 미소에서, 끊이지 않는 이야기가 샘솟을 듯한 계절.  그 계절의 초입에서 나는 숱한 이야기의 향연에 초대를 받았다.

 "이 산문 선집을 펴내며 글을 고른 기준을 들라면 바로 이 영원한 현재성을 꼽고자 한다.  오늘의 우리가 읽을 때 그 글이 우리 선배들의 글이라는 점 말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막막한 심정을 위로해 주고 스스로 자기의 삶을 구성해 가는 여유와 지혜를 주는 글이야말로 훌륭한 글이 아니겠는지?  나는 이러한 글을 찾아내기 위해 고심하였다."  (P.286)

1920년대부터 해방직후의 근대문학 공간에 발표된 명산문 91편(51명)을 가려 뽑은 「모던수필」은 발표 당시의 판본을 토대로 당대의 명문장가를 비롯 카프계열, 친일계열, 소수파 여성계열 등을 망라했다. 총 4장으로 구성됐는데 첫장에서는 계절과 자연물, 음식 등을 둘째장에서는 문사들이 느끼는 생활자로서의 번민을, 셋째장에서는 문화의 변화를 바라보는 문학인의 시각을, 넷째장에서는 요절한 문인을 추모한 조사와 예술관을 소재로 담았다. 작가연보와 주석이 실려 있다.

나는 이따금 아이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  "아무리 재미있고 유익한 글도 일단 국어 교과서에 실리면 가장 재미없는 글로 전락하는 신세를 면치 못할거야.  왜 그런고 하니 그 글은 시험에 출제되는 지문으로서의 자격 말고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지.  심지어 너희들이 즐겨 보는 만화도 교과서에 실리면 재미없다고 느낄걸."하고 말이다.

이 책에 실린 문인들의 글을 읽으면 생각나는 대로, 붓 가는 대로 쓴 글이라는 수필의 취지에 걸맞게 정형화된 글쓰기 방식으로는 쉽게 담을 수 없는 크고 작은 생각들을 자유롭고 솔직한 태도로 표명하고 있지만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완벽한 글을 탄생시키는 놀라운 재주에 그저 감탄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 내용에 있어서도 암울한 시대에 씌어진 글들이니 그 분위기 또한 그렇겠거니 짐작한다면 큰 오산이다.  일상에서 벌어졌던 재미있는 일화를 소개하는 등 글은 비교적 경쾌하고 밝다.  특히 노자영의 <오천 원의 꿈>과 엄흥섭의 <탈모주의자>는 시종 웃음을 머금게 했다.

내가 재미있게 읽었던 대목은 예컨대 이런 것이다.
"만일 기아가 닥쳐든다 하더라도 쥐의 기사(饑死)는 멀리 인간 기사 후에 속한다.  그런 까닭으로인지 식(食)에 복(福)하고 한쪽에서 굶어도 먹을 것이 풍요한 사람은 대개는 쥐 상(狀)으로 보인다."  (김광섭의 <꽃을 먹는 쥐>중에서)  나는 이 대목에서 현실 정치인 중 한 사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작금의 세태와 그렇게도 잘 들어맞는지.

그런가 하면 문학과 현실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엿볼 수 있는 대목도 있다.
"어쨌든 오늘의 세대에서 살아가기가 어려운 이상으로 창작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역시 작가에게 있어서 최대의 교훈자요 최후까지의 동반자는 현실이 있을 뿐이다.  이 현실을 응시하고 이것과 결리고 여기서 배우고 그 밑에서 얻어내는 바가 없이는 진정한 창작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한설야의 <고난의 교훈>중에서)

"이광수의 산문은 종교적 깊이가 있고 김기림 은 예지적이며 정지용은 단소(短小)한 가운데 독한 기운이 있고 이태준은 부드럽고 엷은 거죽 속에 강잉(强仍)한 신조가 담겨 있다. 채만식은 포즈로 가장한 속에 진실 을 숨겨두고 딴청을 부리는 묘미가 있다"고 저자는 평한다.  그러나 나의 소회로는 그 시대에 씌어진 글들을 읽을 때마다 범접할 수 없는 엄숙함을 느끼곤 한다는 것이다.  풀 먹인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듯, 글의 풍모는 고고한 난초를 보는 듯하다.  어쩌면 그것은 지금의 작가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깊은 사색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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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바지 무더위가 며칠째 기승을 부린다.
높아진 하늘에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다.  지평선을 경계로 가을과 여름이 함께 머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이다.   오늘도 한낮에는 양산을 받쳐 들고 허위허위 힘겹게 걷는 한 할머니의 뒤를 무더위에 지친 나른한 권태가 졸졸 뒤쫓는 듯했다.  이따금 건듯건듯 불어오는 바람에 그나마 가을이 멀지 않음을 느낄 뿐이다.

금년 여름에는 산행을 거의 하지 못했다.
까닭인즉 모기 때문인데, 날씨가 본격적으로 더워지기 전에는 긴소매, 긴바지를 입고 모기떼에 대항했으나 모기보다 무서운 것은 더위였다.  산행을 하고 땀을 한 바가지쯤 흘리고 나면 제풀에 제가 쓰러지는 격으로 아침부터 피곤이 몰려오곤 했다.  그래서 산 대신에 다른 운동 장소로 선택한 곳이 근처의 체육공원이었다.  가운데 축구장만한 잔디밭이 있고, 바깥에는 650m의 트랙과 여러 운동기구가 설치되어 있어 딴에는 흡족하였다.  더군다나 반바지,반소매 차림에도 모기에 물리지 않으니 그보다 좋은 것이 없었다.

내가 그 공원으로 아침운동을 나가면서부터 내가 가르치는 아이 중 한 학생이 자신의 아버지를 대동하고 아침운동을 나왔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나와 동갑으로 평소에 친구처럼 허물없이 지내던 사이라 그 또한 좋았다.  방학 기간에는 새벽 6시에 나가 1시간 남짓 운동을 하고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한 후 조촐한 아침 식사를 하여도 그리 서두르지 않고 출근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개학을 하자 학교에 늦는다며 30분 앞당기는 바람에 덩달아 나의 기상 시간도 빨라졌다.

내가 운동 장소를 바꾼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직장 동료 중 한 명이 혹시 아침마다 밀회를 즐기는 게 아니냐며 농을 걸었다.  직장 때문에 주말부부로 사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동료들이기에 가끔 소개팅을 주선하겠다는 둥, 남 모르게 몰래 데이트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둥 잊을만 하면 내가 혼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농을 걸어 일깨우던 그들이었다.  내가 숙소 주변의 중고생들을 모아 영어, 수학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도 그런 농지거리의 대상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었다. 

내가 운동을 하는 시각에는 남자들이 대부분이고, 여자라고는 나이 지긋한 할머니들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인가 40대쯤으로 보이는 여자 한 분이 홀연히 등장하여 뭇 남성들의 시선을 붙잡았다.  호리낭창한 체격에 등을 꼿꼿이 세우고 걷는 본새가 운동을 여간 오래 하지 않았겠구나 하고 느끼게 하였다.  게다가 그 여인의 옷 매무시도 돋보였다.  매일 바뀌는 골프웨어에 장갑까지 끼고는 보란듯이 걷는데 웬만한 남자들의 잰걸음으로도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나도 여러 번 시도해 봤지만 허사였다.  그나마 나는 가볍게 조깅을 하는 탓에 뒤쳐지지 않지만 무작정 걷는 학생의 아버지는 은근히 부아가 치미는지 운동을 마치면 늘 그 여인에 대해 말하곤 했다.  그 여자도 남자들의 그런 시선을 왜 느끼지 못하겠는가.  아실랑아실랑 걸으며 가끔 표나지 않게 하는 곁눈질을 나도 여러 번 목격했다.  아무튼 그 여인으로 인해 이야깃거리가 늘어난 것만은 분명하다.  아침마다 운동을 하러 나서는 길이 은근히 기다려지니 말이다.

다음주 월요일엔 나도 기운을 내어 그 여인의 걸음을 앞질러 보아야겠다.  잘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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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03 13: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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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17 14: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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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이란 참으로 질긴 것이어서 아내로부터의 잦은 잔소리에도 불구하고 고쳐지지 않는 것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오래된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것인데 따지고 보면 못된 습관도 아닌 듯하다.  아내에게는 밝히지 않았지만 내가 지닌 물건을 버리기 아까워서 그런 태도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구매시기를 차일피일 미루다 보면 적당한 때를 번번이 놓치는 까닭에 그리 된 것일뿐, 나의 성품이 지극히 인색하다거나 돈이라면 벌벌 떠는 쫌생이 기질을 타고 났다고는 볼 수 없다.  어쩌면 쇼핑을 즐기지 않는 데 그 이유가 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말하자면 내가 꺼리는 일에는 유독 게으름을 피우는 유아기적 태도가 아직도 내 몸에 남아있다고 고백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지난 달에 나는 17년 동안 타던 승용차를 폐차하고 장인어른으로부터 11년 된 차를 그 대신으로 물려받았다.  그도 따지고 보면 내 자발적 의사는 아니었고, 손윗 동서가 안식년을 맞아 영국으로 떠나는 바람에 타던 차를 장인어른께, 그리고 장인어른의 차는 얼결에 내 차지가 되고 만 것인데, 워낙 꼼꼼하신 성격의 장인어른은 거금 100여만 원을 투자하여 잔 부속품 하나까지 교체한 후 내게 주셨다.  기실 그 차는 햇수는 오래되었지만 주행거리는 고작 6만km에 불과하니 내 차에 비하면 새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연유로 나는 군데군데 녹이 슬고 엔진도 골골 노인네  소리를 내던 내 차를 버렸다.

걷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그닥 차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차를 가져가라는 장인어른의 권유에도 마뜩찮은 태도를 취하는 나를 보며 아내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아내의 강압에 못 이겨 그동안 정들었던 차를 떠나 보내던 날 괜스레 울적하여진 나는 냉장고에서 몇 년째 뚜껑도 열지 않은 빼갈을 한 잔 마시고 나서야 잠이 들었다.

어제는 퇴근 후 평소처럼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화장을 한 여학생이 눈에 띄어 계획에도 없는 일장 연설을 늘어 놓았다.  요즘은 중학생만 되어도 다들 화장한다는 아이들의 항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내 할 말을 하는데 생각해 보니 조금 멋적은 생각도 들어 '오늘은 숙제를 주지 않겠다'며 서둘러 돌려 보냈었다.

체면이나 외모에는 별 관심이 없는 나는 아무래도 장소를 잘못 골라 태어난 듯하다.
뒷축이 헤어진 구두는 벌써 5년이 넘었고, 결혼 전에 산 옷가지들도 이제는 군데군데 구멍이 보이곤 한다.  그러니 산책 삼아 마트를 다녀오곤 하는 아내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나마 군소리 없이 살아주는 아내를 내가 고맙게 생각하는 까닭에 아내의 잔소리는 언제나 도를 넘지 않는다.  이것도 천성이라면 천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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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01 14: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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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03 08: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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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9-01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꼼쥐님! 글이 참 재밌네요 ㅎㅎ
제가 버리지 못하는 습관은 뭔지 곰곰 생각해보게 되는데 음... 생각하다가 관뒀어요. 나쁜 습관만 죄다 생각이 나는 바람에... ( '')~ 이 참에 좋은 습관 하나 만들어야겠어요.

꼼쥐 2011-09-03 08:59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
생각해 보면 저도 나쁜 습관만 있는 듯해서 조금 찔리지만 즐겁게 살려고 노력한답니다. 어차피 똑 같은 사람은 없잖아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