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의 독서의 기술
헤르만 헤세 지음, 김지선 옮김 / 뜨인돌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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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우리가 잘 알만한 문학의 거장치고 독서에 있어 달인의 경지에 오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만은 헤르만 헤세의 폭넓은 독서와 그로부터 얻은 다양한 지식은 독자로 하여금 경외마저 들게 한다.  이사를 앞두고, 수천 권의 책이 들어찬 서재를 정리하는 데만 무려 8일이 걸렸을 정도라는 헤세의 책 사랑은 유별나다.  그것은 어쩌면 이 책의 도입부에서 "인간이 자연에게서 거저 얻지 않고 스스로의 정신으로 만들어낸 수많은 세계 중 가장 위대한 것은 바로 책의 세계다" 라는 말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서, ’책사랑’이 단순한 애정을 넘어, ’경외심’에 가까운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헤세의 수많은 에세이 가운데 책과 독서에 관한 것만을 골라 편집한 책이다. 원서에는 모두 63편의 에세이가 수록되어 있었다고 하나, 그 중 24편만이 이 책에 실렸다.  동서양의 책을 두루 읽어 사고의 깊이를 더했던 그임에도 번역되지 않은 책에 대한 허기와 갈증을 피력하는 모습은 나와 같은 게으른 독자를 부끄럽게 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을 번역한 김지선님이 고맙고 감사하다.  독일어 원본을 보지는 못하였지만 번역본으로도 글의 흐름에 끊김이 없을 뿐 아니라 어휘 선택에도 공을 들인 모습이 곳곳에 보인다.

"책이란 무책임한 인간을 더 무책임하게 만들려고 있는 것이 아니며, 삶에 무능한 사람에게 대리만족으로서의 허위의 삶을 헐값에 제공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와 정반대로 책은 오직 삶으로 이끌어주고 삶에 이바지하고 소용이 될 때에만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독자들에게 불꽃같은 에너지와 젊음을 맛보게 해주지 못하고 신선한 활력의 입김을 불어넣어 주지 못한다면, 독서에 바친 시간은 전부 허탕이다."  (P.10)

책을 읽을 때는 온 힘을 기울여 주의를 집중하고 책에서 느끼는 감정들에 적극적으로 몸을 맡기고 함께 겪고자 하는 뜻이 없다면, 불량독자라고 헤세는 말한다.  즉 다독보다는 정독을 권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는 독서와 글쓰기, 문학 비평과 시, 작가와 문학 사조, 독서와 장서, 예술가와 정신분석 등 저자가 문학 전반에 대해 느끼고 생각했던 바를 해박한 지식으로 논하고 있다.  구구절절이 가슴에 와 닿는다.  그리고 정신이 번쩍 들게 한다.

  그의 독서체험에 바탕을 둔 세계문학 도서목록은 동서양 고전을 망라한다. 첫 단추는 ’가장 오래된 작품이 가장 오래 간다’는 정신사의 원칙에 따라 성서, 우파니샤드를 간추린 < 베단타 > , 불경, < 길가메시 > 서사시, < 논어 > , < 도덕경 > 등에다 장자의 우화 같은 ’인류가 보유한 문헌의 기본화음’들이 꿴다. 헤세는 목록작성에 엄밀한 잣대를 들이대 마음에 든다는 이유만으로 수준이 떨어지는 작품을 슬금슬금 끼워 넣는 일은 삼간다. 또한 ’세계문고’의 목록구성이 얼추 마무리되자 바로 검증과정을 거친다. 

 또한 헤세는 독자의 유형을 이렇게 분류한다.
먼저 말과 마부의 관계처럼 책은 이끌고 독자는 따라가는 순진한 독자.  이들은 작가의 파동을 함께 타고 그의 세계관에 온전히 동화되며, 작가가 자기 인물들에 부여한 해석 일체를 가감 없이 수용한다고 헤세는 말한다.
다음으로 책의 예술성, 언어, 작가의 소양과 정신성 등에 치중하고 이런 것들을 객관시하여 문학작품 최고 최종의 가치로 받아들이는 교양계층 독자.  이들은 사냥꾼이 짐승의 자취를 더듬듯 작가를 추적하며, 미학적 가치 따위는 별 의미가 없고, 작가의 동요와 불안정성에 크게 매료된다고 지적한다.
마지막으로 책을 읽는 이유가 교양을 쌓기 위함도, 재미를 얻기 위함도 아닌, 책을 읽는 목적이 작가의 눈을 빌려 세상을 해석하기 위해서도, 또는 철학자의 이론을 수용하거나 비판하기 위해서 읽는 것도 아닌 유희적 독자.  이러한 독자는 어떤 책에 나온 멋진 구절이나 지혜와 진실이 담긴 말을 보면, 시험 삼아 한 번쯤 뒤집어보거나, 읽은 것을 타고 떠오르는 충동과 영감의 물결 속을 헤엄쳐 다니게 된다고 한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어린 시절 읽었던 <데미안>과  <수레바퀴 아래서>, 그리고 대학 시절에 읽었던 <싯다르타>는 내 독서의 이력에 작은 흔적으로 남았지만, 헤르만 헤세라는 그 이름은 내 머리 속에 크게 각인 되었었다.  자기 실현을 위한 노력을 한시도 쉬지 않았던 거장의 발자취.  그 지워지지 않는 책의 세계에 흠뻑 취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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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를 따라 노란 개나리가 수줍은 듯 고개를 내밀었다.
완연한 봄이다.
매년 맞는 봄이건만 어찌 이리도 새로운지....
새로 맞는 봄을 오롯이 새롭다 느끼는 것은 지나간 봄을 완전히 잊었기 때문이다.
이럴 때 망각, 또는 잊혀짐에 대한 고마움을 새삼 느끼게 된다.

나도 제법 나이가 들고 보니 내가 죽어 사라지면 내 아들녀석이 나에 대한 기억은 모두 잊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되었다.  한때는 누군가의 머리 속에 시시때때로 찾아드는 회상의 편린으로나마 구차하게 남아 영원히 살아있기를 간절히 원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과거의 기억을 지우지 못하면 새로운 사람, 새로운 모든 것을 온전히 새롭다고 느낄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새롭다는 느낌은 내가 세상에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징표와 같은 것이다.  지난 과거에 집착하여 새로운 것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삶은 죽은 삶이다.  

세상의 모든 가치는 새로운 것을 새롭게 바라보는 데서 나온다.
과거의 기억에 덧씌워진 상태로는 변화하는 모든 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뿐 아니라, 왜곡된 시각으로 세상를 바라보도록 한다.   똑같은 책을 다시 읽더라도 어제의 느낌을 지우고 다시 읽는다면 얼마나 새롭고 신선한가!  그리고 그 한 권의 책으로도 우리는 세상에 대해 얼마나 많은 것을 깨닫게 되는가!  설령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더라도 우리는 그 기억마저 새롭게 맞을 준비가 되어 있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새롭고 충만할 것인가!

잊혀짐은 사멸이 아닌 새로움으로 다시 태어나는 '살아 있음'의 표상임을 이 봄에 새로 피는 노란 개나리에게서 배운다.  태동하는 봄은 잊혀져간 수많은 것들, 하나의 새로움을 위한 그 각고의 역사를 다시 깨달으라 말한다.
어제의 기억은 오늘의 잊혀짐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잊혀짐은 오직 잊혀질 때만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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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장하준 지음, 김희정.안세민 옮김 / 부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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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이후 베스트 셀러에 오르는 책을 보면 특이한 현상이 있다.
인기 작가나 외국 번안서가 순위를 차지하는 것은 출판사의 의도된 판매 전략이라고 보아야 하겠지만, 일반 독자에게는 가독력이 떨어지는 어렵고 난해한 책이 상위에 랭크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는 것이다.
다들 알다시피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베스트 셀러 1위에 오른 것도 모자라, 수개월 동안 그 자리를 지킨 것만 봐도 그렇다.  철학 입문서라고 보기에는 결코 가볍게 읽혀질만한 책이 아님에도 독자들의 인기는 여전히 식지 않았고, 최근에 장하준 교수의 이 책이 인기몰이를 이어가고 있는 것만 보아도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이 책은 물론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하여 씌여진 자유 시장 경제 정책에 대한 비판서이자 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에서 비롯된 세계적 금융 위기의 결과와 그 촉발 원인에서 보여지는 자유 시장주의자들, 혹은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허술한 추측과 왜곡된 시각을 꼬집고 있는 책이다. 나아가 자본주의를 더 나은 시스템으로 만들기 위해 '경제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되찾는 과정에서 꼭 필요한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 대한 일반 대중의 이해를 돕고자 쓰여진 책이라고 저자는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어쩌면 저자는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이 자신의 권리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경제 시민으로서 자신의 권익을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과연 그럴까?  나는 저자의 의도 또는 희망사항에 대한 의문으로 이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사실 개인의 정치 사회화 과정에서 확립되는 정치적 성향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게 통설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힘이나 권력으로 시스템을 바꿀 수 있는 정치 지도자들, 혹은 권력자들은 이 책을 읽기나 했을까?  만일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읽었다고 가정할 때, 그들의 사고는 책을 읽기 전과 얼마만큼 달라졌을까?  비록 그들이 유권자의 인기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서 살고 있기는 하지만 결국 최종 판단의 순간이 오면 이 책에서도 여러번 다뤄지고 있는, 어쩌면 자본주의의 근간이 될 수도 있는 개인의 이기심에 따르지 않겠는가.

정치인이 아닌 일반 대중의 입장에 있는 독자는 또 어떤 생각으로 이 책을 읽었을까? 
자신이 어떤 이슈나 제도에 불만이 있다고 하더라도 일정한 때가 아니면 실질적 권리행사를 할 수 없는 제한적 권력자(일반 시민)인 대다수 국민은 이 책을 읽고 과연 무엇을 얻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자신의 불만이 저자와 같은 지식인의 그것과 일치한다는 만족감으로?  또는 최소한 이 정도의 지식은 있어야 한다는 지적 만족을 위해?  또는 읽기 어려운 책이었지만 읽어냈다는 성취감을 맛보기 위해?  또는 읽는 내내 '에이, 더러운 세상!'이라며 속으로만 맘껏 외칠 수 있었던 불만 해소용으로?  이도 저도 아니면 아무 책이나 읽어두면 언젠가 쓸모가 있겠지 하는 식의 지적 보험이라도 필요해서?  아니면 이제라도 사회의(또는 제도의) 어두운 이면을 보았으니 정치일선에 나서야겠다는 결심을 굳히려고?

나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얼치기 경제학도로서 이 책을 읽었지만 그 내용은 결코 쉽지 않았다.
어차피 책은 시대의 트렌드를 반영한다고 하니 어떤 책을 많이 읽는지 살펴보면 그 시대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은 알겠다.  그런 면에서 지금 우리의 자본주의 체제는 분명 잘못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고, 정의가 희박한 사회임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이 이 어려운 책을 어떤 목적으로 읽었을지 지금도 몹시 궁금하다.  도대체 왜 읽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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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 블루 - 언젠가, 어디선가, 한 번쯤은...
김랑 글.사진 / 나무수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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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에 맞춰 3박 4일의 크루즈 여행을 계획했었다.
가족 모두가 떠나는 여행인만큼 기대도 컸었다.  한동안 쓸 일이 없었던 여권도 다시 갱신하고, 7층의 발코니실로 예약을 마쳤다는 아내의 전화에 내일이라도 즉시 떠날 것처럼 설레었었다.
초등학교 2학년인 아들은 인터넷에서 우리가 탈 배와 여행 경로를 확인하는 재미에 푹 빠져 지냈다.  일본을 경유하여 중국을 돌아오는 해상 여행은 나로서도 처음이었으니 기대와 설렘은 아들에 못지 않았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일본의 대지진 한방에 아들과 나의 들뜬 기대는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철옹성 같던 원전이 쓰나미에 휩쓸려 처참히 무너지듯, 한동안 우리 부자를 들뜨게 했던 여행 계획은 그렇게 무산되었다.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자신이 찾은 크루즈 여행 정보를 자랑스럽게 전해주던 아들의 목소리는 시든 화초처럼 생기를 잃었고, 내년에 다시 갈 수 있을 거라는 나의 위로도 별무효과였다.

크루즈 여행을 계획한 것은 장인어른이었다.
혹시라도 내가 그 여행에 동행하지 못할까봐 꼭 가야 한다며 몇 번이고 다짐을 두는 것을 잊지 않으셨고, 내실보다는 조금 비싸더라도 발코니실이 좋겠다고 하신 것도 장인어른이었다.
그렇게 공들인 계획이 아무 성과도 없이 취소되자 당신은 어린 손자에게 미안하다고 하셨다.

어차피 여행은 취소되었고 내게는 휑한 기분을 달래줄 무언가가 절실히 필요했다.
그래서 읽게 된 책이 <크로아티아 블루>였다.  많고 많은 여행기 중에 이 책이 유독 눈에 띈 까닭은 아마도 크루즈 여행 내내 기대했던 짙푸른 바다에 대한 아련한 동경이 아니었을까? 

"하늘과 바다가 한 치의 기울어짐도 없이 팽팽하게 맞선 그 시간 내내 나는 몸과 마음이 묶여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끝날 것 같지 않던 긴장의 끈이 해가 기울자 느슨해졌고, 먼 바다의 반들반들한 빛이 점점 더 넓게 번지기 시작할 즈음, 나는 서둘러 자리를 털고 마른 몸을 일으켰다.  바다에 나갔던 요트들이 곧 금빛 융단을 끌고 오리라."  (P.190)

작가는 발칸반도에서 바라본 아드리아해의 푸른 바다와 오염되지 않은 크로아티아의 아름다운 자연을 헤어진 옛여인에 대한 그리움처럼 더듬고 있다.
이름도 생소한 지명을 따라 철썩이는 파도 소리를 듣노라면 어느새  아드리아해의 낙조를 등지고 파도 소리에 맞춰 일곱겹 드레스를 한겹한겹 벗는 이국의 여인이 떠오른다.

"붉은 사연을 안은 바람이 언덕을 미끄러져 하늘과 바다를 휘저으며 노닙니다.  눈앞에 펼쳐지는 선명한 색의 향연, '맙소사'나 '눈이 시리다'는 표현은 이런 바다, 이런 하늘을 두고 써야 할 것 같습니다.  언덕을 내려가는 동안 내 가슴은 쉴 새 없이 펄떡이고, 바람과 햇살에 아릿한 풍경도 위아래로 떨립니다.  고성 앞 투명한 해변에는 한 소녀가 햇살을 등에 업고 느릿느릿 책장을 넘깁니다."  (P.286)

이처럼 나른한 봄날 오후에 펄떡이는 바다를 그리워하는 것은 이율배반이다.
마음은 벌써 먼 나라의 낯선 항구로 향하고, 오수의 유혹에 무거워진 눈꺼풀은 하루 종일 중력과 드잡이질을 한다.  슬픈 하품에  눈물이 흐르는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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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값이 하루가 다르게 오르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출근시간에 자가용 사용을 포기했다.
아직도 아침, 저녁으로는 쌀쌀한 느낌이 없지는 않으나 춥다는 느낌은 갖지 않을 정도이니 조금만 부지런을 떨면  회사까지  걸어서 가도 되겠다는 자신감이 붙은 것도 그 이유 중에 하나였지만 중요한 이유는 다른 데에 있었다.

언제부턴가 퇴근 후에 내가 아이들을 무료로 가르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공부를 하기 위해 나의 숙소를 찾는 아이들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고, 그 아이들의 입을 통해 이 근방의 학생들에게 나의 신상 정보가 노출(?)되기에 이르렀다.  가끔은 내가 가르치는 아이의 친구를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나 소개를 받고, 쑥스럽게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그때마다 아이들은 내가 자신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물론 학생의 부모들과 상담을 하면서 근처에 사는 어른들도 많이 알게 되었다.

소문은 소문을 낳고 빠르게 퍼지는 법이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하지 않던가.
으레 그렇듯 그런 소문은 조금씩 과장과 허풍이 섞이게 마련이다.
나에 대한 소문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아주 잘 가르친다는 말과 내 성격이 친절하고 자상하며 아는 것이 많다는 말도 내가 들었던 소문의 내용 중에 허풍의 한 예이다.
내게서 배우지 않는 아이들도 나에 대한 궁금증이 컸었나보다.
때로는 수업 중간에 아무개 친구라며 전할 말이 있어 왔다는 핑계를 대고는 내 얼굴만 힐끗 쳐다보고는 달아나곤 했다.

그렇게 나는 이 근방의 아이들에게 원치도 않던 유명인이 되었다.
거리에서 낯모르는 학생이 인사를 하는 경우도 다반사이고, 동네의 작은 가게에서도 잘 모르는 어른들이 반색을 하며 아무개 선생님 아니냐며 인사를 건넨다.  때로는 담배를 사러 들렀다가도 그렇게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을 만나기라도 하면 담배 대신 계획에도 없던 과자나 음료수를 사서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전적으로 이미지 관리 차원에서 한 행동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동네에서는 행동에 몹시 조심스러워진다. 
피우던 담배를 아무 데나 함부로 버릴 수도 없고, 횡단보도가 아닌 곳에서 무단횡단을 할 수도 없다.  나도 모르는 곳에서 누군가의 눈길이 항상 나를 감시하고 있는 느낌이다.
이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아이들과 같이 나눠 먹으라면서 떡이며, 과자며, 음료수 등을 한아름 안겨주는 경우도 많다.  가뜩이나 빠듯한 내 용돈을 생각할 때, 나는 이런 선의를 거절하지 못한다.(가끔 양심의 가책은 느낀다.  나는 생각처럼 공짜만 밝히는 그런 사람은 절대 아니다.)

나는 오늘도 걸어서 출근을 했다.
때마침 등교하는 아이들의 인사를 받으면 나는 괜스레 우쭐해진다.
차를 타고 출근을 할 때는 전혀 들어오지 않던 풍경들도 새롭다.
자정이 되어서야 끝나는 수업의 피곤함이 비로소 사라지는 순간이다.

그렇게 나는 반경 2km  이내의 유명인으로 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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