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앵카레가 묻고 페렐만이 답하다 - 푸앵카레상을 향한 100년의 도전과 기이한 천재 수학자 이야기
조지 G. 슈피로 지음, 전대호 옮김, 김인강 감수 / 도솔 / 2009년 11월
평점 :
품절


수학에 대한 일반인의 선호는 극과 극이다.
수학의 매력에 빠져 평생을 수학만 공부하면 좋겠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기호와 숫자만 보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드는 사람들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후자에 해당되겠지만 한번이라도 진지하게 수학의 내면을 들여다본 사람이라면 수학만이 갖고 있는 순수한 매력에 나도 모르게 빠져들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게 된다.  그러나 장황하게 설명하는 일반 언어와는 달리 지극히 간결한 수학적 언어는 일반인의 접근을 쉽게 용인하지 않는다.  시쳇말로 ’차도녀’(또는 차도남)이라고나 할까!  그야말로 순수하지만 도도한 학문임에는 틀림없다.

"생각할수록 페렐만과 푸앵카레를 비롯한 수학자는 시인인 것 같다.  수학은 축적된 지식이기 이전에 세상과 삶을 대하는 태도인 것 같다.  묻고, 대답하고, 따지고, 자기의 오류를 인정하면서 배우고, 다시 묻는 태도.  그래서 옮긴이는 수학을 비롯한 과학을 천재들이 모아놓은 유용한 지식 정도로 여기는 분위기가 적잖이 안타깝다.  시인처럼 세상을 대할 수 없다면, 시를 아무리 많이 외워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역자 서문 중에서) 

이 책은 난해한 수학 공식이나 증명으로 일관하는 순수 수학과는 거리가 먼 책이다.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한 저자 슈피로는 스탠퍼드대학에서 MBA를 취득했고,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에서 수리경제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한다.  수학, 물리학, 경제학, 재정학에 관한 30여 편의 논문을 쓴 이력이 있는 저자는 전문 저널리스트로서 대수적 위상수학이라는 다소 낯선 학문을 소개함에 있어 상당히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인다. 
오일러에 의해 시작된 위상수학이 현재와 같이 수학의 한 분야로 자리매김 하게 된 역사적 배경을 고찰함으로써 독자들의 사전 지식을 증가시킨 후 푸앵카레의 추측에 대한 문제로 넘어간다.  독자를 배려하는 저자의 의도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1904년 프랑스의 수학자 앙리 푸앵카레는 자신의 논문 「위상기학으로의 제 5보족」의 마지막에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마지막으로 반드시 검토해야 할 문제가 하나 남는다. 기본군(fundamental group)이 영인 3차원 다양체(3 dimentional simply connected manifold)가 3차원 구와 위상동형이 될 가능성이 있을까?" 이후 100여 년 동안 이 문제는 ‘푸앵카레 추측’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수많은 수학자들을 사로잡아 왔다.  자신의 직감을 정리가 아니라 질문으로 제시한 것은 그의 천재다운 솜씨였지만, 그 대답없는 질문이 여러 세대의 수학자들을 괴롭히리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리하여 무려 100년 동안 전 세계의 수학자들이 그의 추측에 대한 반례를 찾아 헤매었고, 그러한 노력들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자 그의 추측이 옳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필요한 증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물론 성과가 아주 없엇던 것도 아니다.  비록 3차원에서의 증명은 이루지 못했지만 5차원 이상에서 푸앵카레 추측의 증명들이 속속 밝혀졌고, 1982년 프리드먼은 4차원에서도 푸앵카레의 추측이 옳았음을 증명하기에 이르렀다.  많은 수학자들에게 좌절을 안겨준 이 문제는 수학과 과학에서 많은 성과를 가져다 주기도 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사는 유대인 부모의 두 자녀 중 맏이로 태어난 페렐만은 어려서부터 위대한 과학자가 될 조짐을 보였었다.  상이나 명예, 재산에 관심이 없었던 페렐만은 푸앵카레 추측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 지 8년 만에 문제를 풀었다는 확신에 도달했다.   그는 이카이브에 세 편의 논문을 올린다.  그 세 편의 논문에서는 오류가 발견되지 않았고, 미국 대학의 초청 강연에서도 그는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지 않았으며 사람들의 질문에 일일이 답했다고 한다.  이 특이하고 천재적인 과학자 페렐만의 이야기와 수많은 수학자들의 학문에 대한 열정과 도전의 이야기는 저널리스트 슈피로의 자상한 설명과 함께 일반인인 나에게도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러나 수학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한 문제에 대한 성공적인 해결은 수많은 새로운 질문들을 향한 문을 열어놓을 뿐이다.  수학 앞에 서면 쉽게 겸손한 마음을 갖게 된다.  너무나 많은 문제들이 아직 미해결로 남아 있다.  위대한 모험은 계속될 것이다." (P.327)

신은 우주를 창조하였고 인간은 수학을 통하여 우주를 이해한다.  결국 우리는 수학 언어로 신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천상의 소리를 듣기 위한 자연과학자들의 지고한 열정과 노력은 아름다운 이론으로 쓰여진다.  단 하나의 반례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한 참의 세계.  우리는 그 장엄한 서사시를 읽고 있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녀가 말했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그녀가 말했다 : 우리를 닮은 그녀의 이야기
김성원 지음, 김효정 사진 / 인디고(글담)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지금은 사라진 완행열차에 몸을 싣고 그때처럼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어렵게 난 자리에 떠다밀다시피 하여 그녀를 앉히고 내내 서있는 나에게 미안해진 그녀가 의자의 팔걸이에라도 앉으라며 어깨를 움츠리던 모습을 다시 보고 싶어질 때가 있다.
엉덩이만 살짝 걸친 채,  팔걸이에 불안한 자세로 앉아 있던 그때의 나처럼 기차의 아늑한 흔들림에 몸을 맡기고 싶을 때가 있다.   
살짝살짝 스치던 그녀의 옅은 블라우스 그 까칠한 느낌에 화들짝 놀라고 싶을 때가 있다.
은은히 풍기던 그녀의 비누 향기에 취해, 슬픔이 담기지 않은 그녀의 환한 미소를 다시 한번 음미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 닿을 수 없는 인연에 다시 한번 다가가고 싶을 때가 있다.  할 수만 있다면...

누구에게나 사랑은 어렵다.
기름종이에 쓰여진 모종의 암호문처럼 나의 사랑법과 너의 사랑법은 해독 불가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누군가의 사랑 이야기를 읽고 자신처럼 헤어진 실연의 아픔을 읽는다.
마치 사랑에 사랑을 덧칠하면 언젠가 한마리의 닭이 한마리의 공작으로 변신하여 행복한 미래를 향한 레드 카펫을 밟을 것처럼...

"불행하다고 생각했던 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인지 모른다.
좋았던 시절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모습을 드러낸다.
지나간 사랑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순간은
쓰라린 기억이 다 사라질만큼의 시간이 흐른 후인것처럼."
<언젠가, 그리워질 이 순간>중에서 

KBS 2FM <유희열의 라디오 천국>의 담당 작가로 일하고 있다는 작가.
우리 인간은 같은 기차를 타고 우주를 여행하는 방랑자라는 믿음에서, 내가 좋은 생각을 품으면 그것이 우주에 퍼질 것이라는 믿음에서 글을 쓴다는 작가.
우리의 운명도 비 오는 날 우산으로 가릴 수 있다면,  마른 땅을 골라 디딜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오늘이 슬펐던 이에게 내일의 문이 열리면 그리운 이가 기다렸다는 듯 꽃무늬 우산을 펼쳐들지는 않을까?  그녀의 일상은 사선으로 긋는 감정의 미끄럼틀에서 빗줄기처럼 흘러내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진짜로 잊는 걸까.
수영을 배운 사람은 물에 빠지면 본능적으로 헤엄을 친다.
몸이 수영 동작을 기억하는 것처럼, 머리는 잊어버리는 일도.
우리 안의 어떤 부분은 계속 기억하고 있는 게
아닐까.
기억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숨는 것이다." <스펀지에 물담기> 중에서   

이런 글을 읽노라면 저녁 나절 손이 데이는 줄도 모른 채 하염없이 무쇠솥 뚜껑만 문지르던 누이의 슬픈 얼굴이 떠오른다.
사랑의 아픔은 그때의 화상 자국처럼 영영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는 것인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생의 마지막 저녁 식사 - 살아가는 동안 놓쳐서는 안 되는 것들
루프레히트 슈미트.되르테 쉬퍼 지음, 유영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11월
평점 :
절판


요즘 들어 어릴적에 먹던 음식들이 시도때도 없이 생각나는 것을 보면 나이가 들면 식성도 생각도 무게의 추도 다 달라질 것 이라는 어른들의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않는다.  그중 어머님이 손수 끓여 주시던 구수한 된장찌개 맛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예전엔 잘 몰랐는데 차차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 시절에 먹던 음식들과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르곤 한다.  그리고 까다롭게 음식 투정을 하던 어린 시절엔, 나이 들면 밥 먹는 힘으로 살아간다고 하던 말이 무슨 말인가 했었는데, 이제 나도 벌써 그 말을 이해할 나이가 된 것 같다. 한 끼라도 지나치면 금방 배가 졸아붙고 허리가 구부러진다. 축 늘어진 자루처럼 힘이 없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현기증이 난다.

지금은 세월이 좋아져서 마음만 먹으면 내가 원하는 음식을 얼마든지 사먹을 수 있다지만 도무지 그시절의 맛을 느낄 수 없으니 아마도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음식에 우려진 추억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 아무리 이름난 맛집에 들어선들 그때 그맛을 쉽게 찾을 수 없었던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아쩌면 우리는 음식의 맛과 더불어 추억을 먹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래 전 아내가 임신했을 때 그토록 먹고싶다던 냉면을 사주지 않았던 나는 지금도 두고두고 타박을 듣고 있으니 한그릇 냉면보다도 소중한 추억을 앗아간 내가 얼마나 미웠겠는가.

독일의 저널리스트이자 독일 ARD방송국에서 TV방송다큐멘터리를 취재, 제작하고 있는 되르테 쉬퍼는 함부르크에 있는 호스피스 ‘로이히트포이어’에서 11년간 근무하며 인생의 마지막 요리를 준비해주었던 요리사 루프레히트 슈미트씨를 다큐멘터리로 제작한다.  최고급 레스토랑의 인정받는 수석요리사였으나 채워지지 않는 삶의 허기 때문에 호스피스 요리사가 되었다는 그는 삶의 마지막 여정을 걷고 있는 그들을 위해 추억의 요리를 준비한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레시피는 번번이 무시되지만 그는 기꺼이 받아들인다.  삶의 마지막 시간을 특별하게 만들어주고자 하는 그의 열정은 감동으로 다가온다.

"'죽을 준비가 된 것'과 진짜로 '죽을 수 있는 것' 사이에는 종종 고통스러운 시간이 놓여 있다.  마지막 스테이크를 먹었던 남자와 마지막 담배를 피웠던 여자는 요리사가 보기에 죽을 준비가 되었음을 공표하고, 정말로 금방 세상을 떠난 몇 안 되는 손님들 축에 낀다.  마치 죽음을 스스로 조종할 수 있기라도 했던 듯이 말이다.  반대로 그는 죽고싶다는 소망을 공표했지만, 몇 주 혹은 몇 달간 죽을 수가 없었던 이를 수없이 보았다.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그들은 다 내려놓고 떠날 수 있었다."  (P.143)

'등대의 불빛'이라는 뜻을 가진 로이히트포이어의 현관에는 이런 말이 걸려있다고 한다.
"우리는 인생의 날을 늘려줄 수는 없지만, 남은 날들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는 있습니다."
가끔 우리는 죽음을 눈앞에 둔 이들을 폐물 취급을 하는 경우가 있다.  산 사람들에게 그들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폐기처분의 대상일지도 모르나 삶을 마치기 전까지 그들은 분명 한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최소한의 존엄을 유지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그들이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지난 시절의 추억을 다시 떠올려주기 위해 한끼의 식사를 정성스레 준비하는 요리사는 얼마나 위대한가.  요리사는 자신이 호스피스의 입주민이라면 무슨 음식을 원할까 하는 물음에 이렇게 말한다.

"어릴 적 먹던 음식을 먹고 싶을 것 같아요.  토마토소스를 넉넉히 치고 치즈를 약간 넣은 햄 누들 수플레.  할머니가 어린 시절 해주셨던 것처럼요.  이상해요.  나 스스로는 이걸 한 번도 만들어보지 않았고, 몇 개월 동안 생각조차 하지 않았는데, 마치 명령이라도 받은 듯이 곧장 떠오르니 말이에요." (P.262)

새벽의 운동길에서 늘 만나던 사람을 더 이상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아무래도 건강을 생각하여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나이 지긋한 분들이 많을 수밖에 없고, 거르지 않고 나오는 사람들도 대개는 그런 사람들이다.  정해진 시간에 일정한 장소에서 늘 만나던 사람들.  그들이 보이지 않을 때 나는 주변분들에게 그까닭을 묻지 못한다.  소심한 성격 탓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듣게 될 대답이 두렵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걷는 한걸음의 보폭과 한끼의 식사에 담겨진 소중한 추억을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있으랴!
우리는 가끔 가장 소중한 것을 가장 '사소한 것'이라 부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늘 낮 사무실 근처의 한 음식점에 점심을 먹으러 들렀다가 아주머니 두 분의 대화를 우연히 엿듣게 되었다.
오십대 초반의 순박해 보이는 두 분의 대화는 유난히 조용한 식당 안에서 아주 크게 들렸으니 웬만한 청력을 지니신 분들은 모두 들었지 싶다.
나는 그 두 분의 대화가 거의 끝날 무렵에 식당을 들어섰으니 앞의 내용을 짐작할 수 없지만 그 대화가 요즘 세태를 반영하는 듯해서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성님은 시방 집사이지라?"
"암만, 그라제.  지난 달에 집사 안 됐능가?  동상은 시방 뭐시당가?"
"권사여라."
"권사?  권사 된 지 얼마나 됐당가?"
"이제 한 일 년 되어가는 갑소."
"꽤 되얐구만.  권사만 돼도 괘아네."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분이 갑자기 시계를 보며,
"아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당가?  그만 일어나세, 동상."

그렇게 두 사람은 대화를 끊고 자리를 떠났다.
나는 권사라는 직책이 무엇이 괜찮은지 곰곰 생각해 보았다.
천국을 가는 데 괜찮은 것인지, 아니면 이승에서 사는 데 불편함이 없다는 것인지, 그도 저도 아니면 내가 모르는 또 다른 뜻이 있는 것인지...
우리나라에 장로 대통령이 취임한 이래 순진한 서민들의 인식도 많이 바뀌었구나 싶었다.

얼마 전 우리나라는 최근 이슬람채권법(Sukuk)을 두고 정부와 일부 종교계가 마찰을 빚었었다. 일부 종교단체 대표들이 대통령 하야 운동까지 언급하며 이슬람채권을 도입하는 것에 대해 반대했던 것이다. 이슬람채권에 지급하는 돈이 알카에다 등 이슬람 테러단체로 흘러들어 갈 수도 있다는 것이 그 이유인데, 앞으로는 우리나라 금융기업이 돈을 빌리는 것도 종교를 보고 빌려와야 하는 것이다.  엉뚱한 상상일지 모르겠지만 이런 추세라면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물품에 원산지 표시와 더불어 생산자 종교 표시제가 법률로 정해지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점심을 다 먹고 계산을 하는데 지갑 속의 돈은 과연 어떤 종교를 믿는 사람이 찍어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메뉴판의 원산지 표시에 다시 한번 눈길이 갔다.
내가 먹고, 쓰고, 사용하는 모든 물품을 만든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보다는 그것을 만든 사람이 믿는 종교가 우선시 되는 사회.
이러한 풍조와 세태 속에서도 아직 세계평화와 화합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그저 놀랍고 신기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아이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숙소는 그야말로 적막강산이다.
이럴 때면 납덩이처럼 무거운 피로가 방안 곳곳에 제멋대로 자리를 잡는다.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피곤한 내색을 할 수 없다.  가뜩이나 공부로 지친 아이들에게 나의 피로까지 얹어줄 수 없는 일이기에 나는 언제나 기운이 넘쳐야 하는 것이 나의 의무다.  어쩌면 선생이란 위치는 가르치는 일보다 자신을 바로 세우는 일이 더 힘들지도 모른다.

오늘 드디어 터질 것이 터져버렸다.
최근에 새로 들어온 아이.  틱 장애가 있어 자신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내며 머리를 흔들게 되는 그 아이는 오늘도 다르지 않았고, 학교에서와는 달리 아무도 놀리지 않는 분위기여서 긴장이 풀린 탓인지 처음보다 더 심했는지도 모른다.(나는 느끼지 못했지만 ) 
중학생들의 수업을 마칠 즈음 다른 아이들의 불만이 봇물이 터지듯 터져나왔다.
시끄러워서 공부를 할 수 없다는 불만과 함께 그 아이가 계속 나온다면 자신은 이제 더 이상 이곳에 오지 않겠다는 아이도 있었다.

나는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아이들은 이곳에서의 원칙을 잘 알고 있다.  물론 내가 일방적으로 정한 것이지만, 어느 누구라도 본인 스스로 개선할 수 없는 신체적 약점을 갖고 다른 친구를 놀려서는 안된다는 것.
만일 이것이 지켜지지 않았을 때 그 아이는 더 이상 이곳에 오지 못하게 하겠다는 것이 내 방침이었다.  그런데 오늘 그 원칙이 보기 좋게 깨진 것이다.
아이들은 그런 내 원칙을 감히(?) 깰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일주일을 버텨왔었나 보다.
어쩌면 그것이 무료로 배우는 것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이들의 쌓인 불만을 모두 듣고는 한가지 해결책을 제시했다.
수업을 할 때는 어쩔 수 없이 같이 하겠지만 자습을 할 때는 그 아이만 따로 내 방에서 공부를 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그제서야 격앙된 목소리로 불만을 토로하던 아이들의 표정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그리고 다시는 이 문제로 틱 장애를 가진 그 친구를 따돌려서는 안된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채 다른 아이들의 불만을 조용히 듣기만 하던 그 아이를 따로 불러 내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꺼냈다.  장애를 딛고 큰사람이 되었던 사람들의 이야기와 더불어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분야에서 최고가 되는 것이며 그렇게 되는 순간 그 약점은 더 이상 약점이 될 수 없는 법이라고 일러주었다.  어쩌면 자신의 신체적 약점으로 인해 그 성과가 더욱 빛날 수도 있음을 알았으면 좋겠다고.

중학생 수업이 끝나고 야자를 끝낸 고등학생들이 몰려왔을 때, 나는 물 먹은 솜처럼 늘어져 몸을 추스르기 어려웠다.  아이들은 성인이 아닌 아이들이다.  배울 것도 많고, 참고 인내할 것도 많은 나이.
나는 그 아이들에게 여전히 부족한 사람임을 절감한다.
아무일도 없다는 듯 표정을 바꾸고 고등학생 수업을 하는 것이 왜 그렇게 힘들던지...
주말을 쉬고 다음주가 되면 오늘의 일은 이 밤처럼 까맣게 잊혀지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