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해지지 마 약해지지 마
시바타 도요 지음, 채숙향 옮김 / 지식여행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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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가끔 ’우리는 왜 글을 쓰는 것일까?  어떤 목적이나 지향하는 목표도 없이, 책을 읽고 또 자신의 생각을 가끔씩 끄적거리게 되는 것일까?’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나의 행동이 항상 어떤 목표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반복되는 행동에는 필연적으로 어떤 이유가 따라붙게 되지 않던가.  그래야 납득할 수 있으니까.

아내와 결혼하기 전 연애시절에 아내가 전화를 하여 만나자고 하면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가곤 했었다.  만남이 그저 좋았고, 특별히 재밌는 일로 소일하는 것도 아닌데 시간은 빠르게 흘렀었다.  그럼에도 헤어져 집으로 돌아갈 때에는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하는 의문과 ’이래도 되나?’하는 반성이 발길을 무겁게 하곤 했었다.  본능과 같은 남녀의 만남도 이럴진대, 그리고 연애의 기간도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그리 긴 것도 아닌데 말이다.  여기에 비하면 읽고 쓰는 행위는 얼마나 길고 밋밋한 일인가!  그럼에도 사람들은 왜 멈추지 않는 것일까?

시집을 읽은 것은 아주 오랫만의 일이다.
그것도 내 나라 시인의 작품이 아닌 타국 시인의 글을...
내가 이 책을 읽어야겠다 마음먹은 것은 저자의 이력 때문이었다.
나이 아흔을 넘겨 시를 쓰기 시작했고, 곧 백 살을 맞는 나이에 시집을 출간했다는 특별한 이력.  이 책을 다 읽으면 왜 글을 쓰는가? 하는 의문의 답을 찾을 것만 같았다.
허리가 아파서 취미였던 일본무용을 할 수 없게 되어 낙담한 저자를 위로하기 위해, 아들이 글쓰기를 권했고 산케이 신문의 <아침의 시>에 입선했을 때의 감동을 잊지 못한다는 작가.



90세를 넘긴 뒤
시를 쓰게 되면서 
하루 하루가
보람있습니다
몸은 야위어
홀쭉해졌지만
눈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볼 수 있고
귀는 바람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고
입은 말이죠
"달변이십니다"
"야무지시네요"
모두가 
칭찬해 줍니다
그 말이 기뻐서
다시 힘낼 수 있어요, 나

글을 쓴다는 것.
그 결과가 비록 잘된 것이든 아니든 글쓰기의 어떤 특별한 효과를 나는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운명이라는 굴레에 씌어 원했든 그렇지 않든 살면서 어쩔 수 없이 범한 죄를 비로소 인식하고, 자신이 아무 쓸모없는 인간이라 자책하며 한없이 추락할 때, 우리를 붙잡아 다시 살아갈 희망과 용기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글쓰기의 경이로움이다.  그것은 단지 행위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여는 것이다.  신은 원죄의 모순 뒤에 고통을 딛고 일어설 글쓰기의 치유책을 마련하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가 아닌, 그렇기 때문에 더 열심히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1세기를 살아온 한 여인의 생생한 고백에 잔잔한 감동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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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내나요, 내 인생
최갑수 글.사진 / 나무수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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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내나요, 내 인생
단지 책의 표지와 제목만 보았을 뿐인데 몇 모금의 외로움과 한 줌의 슬픔, 그리고 아련한 추억의 편린이 내 마음과 몸의 살갗에 작은 떨림으로 다가온다.
적당히 외로울 것, 적당히 슬플 것, 그리고 적당히 부족할 것.

사진과 글이 번갈아 나오는 책의 배열에 나는 잠시 길을 잃고 흔들린다.
그리고, 오래 전에 길들여진 익숙함을 선택한다.  
나는 언제나 익숙함과 안전함을 동의어로 착각한다.  그것은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글을 먼저 읽고 사진은 나중에 보면 되겠다며 안심한다.
시인이며 여행작가인 저자의 글은 바람처럼 허허롭다.
부석사에서, 내소사에서, 또는 소쇄원에서, 때로는 바람 몰아치는 우도에서...

"모든 여행은 아름답다.
아름다워야 한다.
현실의 반대말은 비현실이 아니라 여행이다.
여행작가는 그렇게 믿어야 하며,
여행작가의 가장 소중한 책무는
여행에 대한 로망을
최선을 다해 보여주는 것이다.
전쟁터 같은 현실에서 독자를
피신시키는 것이다."


동화는 언제나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는다는 우리의 믿음처럼 여행은 최소한 그 기간만큼은 행복을 보장할 것이라는 픽션이 내 팍팍한 현실을 한 발 물러서게 한다. 
책에는 페이지가 적혀 있지 않았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여행처럼, 또는 자신의 잔존일수를 알 수 없듯이 우리는 지나온 삶을 세며 우수에 젖을 시간이 없다.  또는 무의미함.
사람은 누구나 홀로 외롭고, 까닭없이 눈물을 흘릴 때도 있지만 홧김에라도 닿을 수 없는 하늘을 향해 돌은 던지지 말 것, 들을 수 없는 바람을 향해 거친 욕설로 소리치지 말 것, 그리고 우아한 말로 스스로를 위로할 것.

"남은 세월, 어떻게 먹고 사나 하는 걱정에
숨이 턱, 막힐 때가 있다.
진짜다.
오직 먹고 사는 문제로'만', 가슴이 답답하고
밤새 잠이 오지 않을 때도 있단 말이다.
살기 위해 음악을 들어야 하는 날들도 있단 말이다.
내가 제라늄 화분을 정성스럽게 키우는 이유가
못 견디게 힘겹고 외롭고 슬퍼서라는 사실을
당신이 눈치채지 못하면 좋겠다."

여행자의 시선이 멋진 풍광으로 흐를지라도, 흐드러진 꽃잎에 머물지라도, 그래서 더욱 슬퍼지는 밤이면 아무도 보이지 않는 다락방에서 소리 내어 펑펑 울고 싶을 때가 있다.
그렇게 한나절 울고 나면 '이제 살아야 겠다'는 가슴 속 역설이 메아리처럼 들릴 때가 있다.
억지로라도 울음이 필요한 날엔 먼 시선으로 이 책을 하염없이 응시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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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을 읽고 리뷰를 작성해 주세요
그냥 - Just Stories
박칼린 지음 / 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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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겠지만 내가 ’박칼린’이라는 이름을 처음 듣게 된 것은 ’남자의 지격’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서였다. 
평소에 텔레비전을 거의 보지 않는 내가 몇 주를 연속으로 시청했던 유일한 프로그램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주말의 황금 시간대에 ’맹목적이고 수동적인 시간 소비(TV 시청)’에 나의 몸과 마음을 묶어 둔 것은 출연진이나 어떤 무대장치가 결코 아니었다.  서구적인 외모의 한 여인.  그녀의 큰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그녀만의 자력장으로 나를 이끌었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녀와 출연진들이 만든 감동의 무대는 내게 작은 울림으로 다가왔었다.

서로 일면식도 없는 사람의 내밀한 삶이 궁금했던 것은 참으로 오랫만의 일이다.
나는 그렇게 무심하다.  사람에게도, 주변의 사건이나 풍경에도...
작가 자신의 자서전적 성격이 짙은 이 책은 작가의 경험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엮은, 특이하거나 문장이나 수사가 화려한 수필집도 아닌, 오히려 아마추어 냄새가 풀풀 나는 그런 책이다.
그럼에도 내가 끝까지 읽어낼 수 있게 만든 것도 알 수 없는 그녀의 매력 때문이리라. 

작가는 이 책에서 자신의 일과 가족, 그동안 자신이 만났던 사람들과의 인연, 그리고 자신이 다녔던 여행지에서의 추억 등을 빼곡히 적고 있다.
우문이지만 나 스스로 ’책은 왜 읽는가?’하고 자문할 때가 있다.
그럴 때 드는 생각은 책만큼 미련이 남지 않는 일도 드물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사람이나 물건 또는 어떤 풍경 등 실재하는 어떤 것과의 만남은 항상 미련이나 아쉬움을 동반한다.  그러나 책과의 만남은 내가 그 책을 다 읽어냄으로써 그것으로 끝이다. 
어떤 책이든 마음에 탁한 앙금을 남기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물론 이 책도 그랬다.  

저자의 에피소드에는 유난히 만남과 여행이 수시로 반복되고 있다.
저자가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소중히 여기고, 도전 정신이 강한 저자가 여행을 좋아할 수 밖에 없겠다는 것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지만, 나는 책을 읽는 내내 만남과 여행의 상관관계를 생각했었다.
책을 다 읽은 후에도 여전히 그 궁금증이 지속되었고, 종국에 나 나름의 결론에 이르렀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여행이 내 몸의 감각기관이 낯선 환경이나 자연과 만나는 것이라면 만남은 내 영혼이 낯선 영혼의 세계로 떠나는 또 다른 여행이라고.
여행은 만남을 통해 완성되고, 만남은 여행 없이도 스스로 빛난다는 소박한 문구로 이 책의 리뷰를 대신하고자 한다.  저자도, 나도 남은 삶의 여정이 여행을 떠나는 여행자의 흥분처럼 한껏 설레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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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분야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스물 여덟. 

그 아까운 청춘에 생을 마감한  이석주 사진작가. 

인생에 나중은 없다고 말하던 그가 마지막으로 찾은 홋카이도는 그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그는 죽어서 눈처럼 가벼워지기를 소망했던 것일까?  아니면 산 자의 가슴에 눈처럼 흰 카드라도 한 장 보내고 싶었던 것일까?  그는 떠났고 남겨진 사진 위에 쌓이는 그리움을 적는 강성은 시인의 독백이 애닯다. 

 

"3일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당신, 무얼 하고 싶은가요?" 

각기 다른 성향의 열 명의 저자들이 들려주는 옴니버스 에세이.  인생에 '만일'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조금 더 진지해 질 수 있을까?  정답 없는 질문에 열 명의 각기 다른 작가들이 자신만의 인생을 펼쳐 보인다.  단 3일뿐의 삶!  그 3일처럼 전 인생을 살 수 있다면... 

 

 

 

방송작가로 활동 중인 저자가 느끼는 일상은 어떤 것일까? 

음악 프로그램을 맡고 있으니 듣고 싶은 음악은 맘껏 들을 수 있어서 좋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일순, 그래서 더 아쉬운 것은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  이십대의 후반과 서른 사이에 놓인 작은 시내를 건너는 그녀의 감성, 그리고 살아있음.  그녀의 글은 입체의 공간에서 톡톡 튀는 물방울처럼 싱그럽다. 

 

 

 

판화가 이철수의 <나뭇잎 편지>는 그 짧은 글 속에 많은 것을 담고 있다.  짧아서 더 쉽게 잊혀질 수 있다지만 삶의 여백처럼 그 빈 공간에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은 글과 말로 채워진 어지러움이지 빈 여백은 결코 잊혀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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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
환승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버스를 타기 위해 대합실로 향했다.
칼바람이 부는 바깥 추위를 피해 대합실 내부는 그야말로 인산인해!
차표를 끊고 출발 시간을 보니 약간의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승차홈 앞의 대기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아 마저 읽지 못한 책을 읽고 있었다.
그때였다.
낡은 승복을 입고 홀쭉한 걸망을 짊어 진 스님 한 분이 내 곁을 맴돌고 있었다.
마른 체구에 주름이 깊게 패인 얼굴, 사십대 후반이나 오십대 초반쯤 되었을까?
내게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데 주위를 서성이면서도 말을 붙일 엄두가 나지 않았는지 기웃거리고 망설이기만 했다.  그렇게 한참을 쭈볏쭈볏 하시더니 어렵게 말을 꺼냈다.
"저... 혹시 절에 다니세요?"
나는 대학생 시절 지하철역에서 자주 보았던 '도를 아십니까?'하는 멘트의 그런 사람들을 떠올렸다.  스님의 말이 끝나는 것과 그 생각이 들었던 것은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잘 훈련된 개의 즉각적인 반응처럼.
"안 다니는데요." 하고 야멸차게 대답했다.
스님은 그렇게 어렵사리 대화를 튼 나에게 기회를 놓칠새라 얼른 말을 이었다.
"제가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지 못해서 그러는데 혹시 삼천 원 정도 여유가 있으시면..."하고 말끝을 흐렸다.  유난히 선해 보이는 눈망울에 거짓이라곤 조금도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나는 마음과 달리 엉뚱한 말이 튀어 나왔다.
"글쎄요.  저도..."
그것은 분명 거절의 말이었고, 당황한 스님은 황급히 자리를 떴다.

'왜 그랬을까?  지인들과 어울려 식사를 할 때에도 몇 만 원쯤이야 아까워 하지 않고 잘도 내면서...  따라가서 주고 올까?'

한참을 그렇게 망설이기만 하던 나는 끝내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버스를 탔다.

나는 어려서부터 어떤 곳을 가더라도 타인으로부터 길을 묻거나, 어떤 부탁의 말을 유난히 많이 들어 왔다.  다소 왜소한 체구의 내가 만만히 보인 탓이었는지, 아니면 내 인상에서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믿음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런 부탁에 수도 없이 넘어갔고, 우연한 기회에 그 이야기를 주변 사람들에게 들려줄라치면 다들 내가 세상 물정 모르는 바보라도 되는 듯 혀를 끌끌 찼다.  요즘도 가끔은 야멸차게 거절하지 못할 때가 있지만 그 횟수는 많이 줄어들었다.

사람을 믿지 못하도록 그렇게 길들여진 탓일까?
그토록 선해 보이던, 정말 어렵사리 꺼낸 그 삼천 원의 부탁을 나는 끝내 거절했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도 나는 그분의 뒷모습이 지워지지 않았다.
종교와 상관없이, 어쩌면 우리가 섬기는 신이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 우리를 시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가장 정중하게 대우해야 할 그분을 나는 가장 초라한 모습으로 돌려보냈다는 죄의식이 내 어리석음과 함께 머리를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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