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밤입니다.
대부분의 회사가 징검다리 휴일로 9일을 쉬나 봅니다.
휴일의 첫날.
긴 연휴를 맞은 사람들의 느긋한 마음처럼
차분하고 조용한 하루가 저물고 있습니다.
책을 읽다가 이 밤에 어울릴만한 글을 찾아 분위기를 내려고
했는데, 끝내 찾지 못하여 대학 때 썼던 유치한 글로 대신합니다.
 
어느 가을, 느리게 흐르는 밤

밤은
온통 어둠입니다
흔들림 없는 어둠입니다
고요 한점 내려앉아
당신이 그립습니다

어두운 하늘엔
구름처럼 두둥실
그리운 마음만이
떠다닙니다
가식이 없는
시간입니다

뽀오얀 속살처럼
가만가만
달이 뜨네요
창을 열면
은빛 비늘이
묻어날 듯합니다
나는 또
당신이 그립습니다

나릇한
졸음이 밀려옵니다
사랑한다 말하면
화들짝 놀란
이 어둠이 사라질 듯합니다

싸르르 싸르르
내 배를 쓸어주던
할머니 손길처럼
귀뚜라미가 웁니다

눈을 감으면
꿈결처럼 훨훨
날아올라
저 하늘에 닿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추석이 코밑으로 다가왔다.
언제나 그렇듯 연휴는 사람들의 마음을 한껏 들뜨게 한다.
계절은 속일 수 없어서 며칠 전만 해도 그렇게 뜨겁던 열기는 온데간데 없고, 한낮의 햇살은 따갑지만 산들산들 부는 바람과 청명한 하늘을 보고 있노라면 '아, 가을이구나!'하는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 나온다.
주변의 사람들은 일손을 놓고 저마다의  휴가 계획을 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차가 밀려 온 나라가 교통체증으로 몸살을 앓을텐데 여행은 자제하는 게 좋지 않나?"하고 한마디 거들자 다들,
"그래도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추억을 만들겠어요?"한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추억도 시간을 내어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좋은 추억을 만들겠다는 그들의 바람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 슬쩍 의심부터 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의 기억이란 매우 가냘픈 것이어서 시간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던 것은 오히려 희미해지고, 기억되지 않을 듯한 소소한 일들이 오래도록 또렷이 남는 경우가 그 얼마나 많은가.
어릴 적 풀밭에 누워 흘러가는 구름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기억, 억새밭을 스치며 지나는 바람의 서걱거림, 반딧불이의 가녀린 불빛을 좇아 밤길을 헤매던 기억 등은 내게는 어제의 일처럼 지금도 생생하다.  나는 그저 일상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추억을 만들어야겠다는 조바심도 없이 이루어진 일인데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도 또렷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추억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어느 날 보석처럼 줍는 것이다.
성과주의에 찌든 현대인들은 추억도 시간을 내어 만드는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산다.
그렇게 만들어진 추억이 지금의 바람처럼 끝까지 남아주기를 간절히 원한다. 
불가능한 꿈을 사람들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수긍하며 또 하루를 산다.
언젠가 우리는 지식도 아무런 노력 없이 시간을 내면 만들어지는 것이라 굳게 믿게 되지나 않을까?  그리고 추억은 돈만 지불하면 종류별로 살 수 있는 것이라 믿게 되지는 않을까?
불가능한 것도 만들어야 하는 현대인의 조급함과 강박증이 느린 발걸음을 재촉한다.
나는 그들의 틈에서 또 바삐 걷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필사의 탐독 - 정성일의 한국영화 비평활극
정성일 지음 / 바다출판사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는 아주 단순했다.
차안에서 우연히 듣게 된 책속의 한 구절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단순히 그랬다.  우연이 필연으로 만나는 그 한순간이 책과의 인연을 결정했다는 것, 전체 내용이 아닌 짧은 구절이 맘에 들어 책을 펼친다는 것은 지극히 낭만적이라고 받아들여질 충분한 근거가 되겠지만, 나는 그 대척점에 서서 무모했던 자신을 비난하며 책을 읽어 나갔다.
지금은 고인이 된 정은임 아나운서에게 쓴 애도의 글.
<정은임의 영화 음악>을 진행하던 아나운서와 게스트의 관계였던 작가가 고인에게 보내는 편지는 애잔함을 넘어 짙푸른 울음과도 닮아있다.
"첫 문장은 백번을 고쳐서 다시 써도 도무지 어떻게 시작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쓸 생각이다.  그것만이 내가 당신을 잠시라도 불러 세우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런 글을 멋지게 쓰려는 것은 역겨운 일이다.  슬프다기보다는 그냥 아프다."(P.39)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보고 난 후 두 달 동안 낙타만 그렸다는 작가는 자라서 그토록 좋아하는 영화의 평론가가 되었다.
겉도는 관계로 스쳐 지나쳤을 법한 진행자와 게스트의 자리.  한 진행자의 죽음이 작가를 그토록 저리고 아프게 했던 까닭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분야에서 그들은 서로 만났고, 서로의 이야기를 마음으로 경청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나는 그 프로의 애청자로서 아직도 고인에 대한 아련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나의 서평은 여기까지가 다이다.

사실 나는 평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태생적으로 라고 하면 어폐가 있지만 자라면서 평론에 대한  거부반응을 꾸준히 느껴왔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통합된 작품을 갈가리 찢어 작은 조각마다 메스를 들이대는 해체적 분석은 끔찍하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거만하며 다소 무례하기까지 한 글(평론)을 좋아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겠지만, 그래야 한다는 당위성은 어느 정도 인정하고 싶다.  그럼에도 나는 평론을 읽을 때마다 알 수 없는 고까움을 느끼곤 한다.  그 중심에는 인내하며 끝까지 읽어야 할 필요성의 부재가 언제나 자리잡고 있었다.
특히 영화를 평하는 글은 그야말로 평론을 위한 평론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영화란 본시 현실 너머의 현실, 현실을 가장한 작위적 실체와 관객의 집단적 환상이 만나는 것인 만큼 평론은 무의미하다.  스크린 속의 스토리는 언제나 환타지일 수 밖에 없고, 관객은 그 시각적 환영에 몰입되어 현실을 잊는다.  영화를 본다는것은 일종의 감독이 만든 마술에 걸려든 관객의 최면 상태, 현실을 사는 관객이 일상의 따분함과 지루함 등 마주하기 싫은 모든 요소를 배제한 기형적 실체를 보는 집단적 광기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적 잣대로 낱낱의 영화적 도구(또는 쇼트)를 분석한다는 것은 그 글을 읽는 독자(또는 관객)와는 거리가 먼 관심 밖의 이야기가 되고 만다. 
500 페이지를 훌쩍 넘긴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작가가 갖고 있는 영화적 소양과 그의 글에서 풍기는 알 수 없는 흡입력이라 하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최근에 얻은 좋은 습관이 있어서 소개하고자 한다.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니지만 내 딴에는 꽤 유용하다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무엇인고 하니 순간순간마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또는 '어떤 목표로 이것을 하고 있는지' 나의 뇌에 끝없이 각인시키는 것이다.
우리의 신체에서 '뇌'라는 기관이 가장 능동적이고 부지런한 기관인듯 보이지만, 실상은 이와 달라서 조금만 방심하면 가수면 상태에 있는 것처럼 또는 기면증에 빠진 사람처럼 몽롱한 휴식을 즐기는 것이 '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한다.
그야말로 가장 수동적이고, 가장 게으른 기관이 '뇌'인데, 일단 목표가 정해진 일이 생기면 각 기관에 명령을 전달하고는 그저 시간이 흐르는 것을 허락할 뿐,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수정할 부분은 없는지 수시로 점검해야 하는 책임도 방기한 채 마냥 달콤한 휴식에 빠져버린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런 현상을 더 이상 두고 볼 수만은 없어 게으른 뇌에 매 순간 자극을 주기로 결심한 것인데 그럭저럭 효과가 있었는지 시간의 흐름에 자신을 맡기는 모습은 볼 수 없게 되었다.
즉, 순간순간 자신이 하는 일을 인식하고, '살아있음'을 인식하지 않으면 결과는 처음에 의도했던 것과 다르게 나타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만일 '살아있음'을 '인식'과 같은 단어로 동일시한다면, '살아있지 않음'은 '인식하지 못함'과 같은 뜻이 되고만다.  내 자신이 나를 인식할 수 없는 상태, 즉 살아있되 인식하지 못하는 상황은 내가 사라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매 순간 '살아있음'을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연속성을 회복하는 길이요,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도출하는 첩경이 될 수 있음이다.
진정으로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방법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순간순간 인식하는 것이다.  게으른 뇌를 자극하여 매 순간 깨어있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잠시의 '죽음' 또는 '수면 상태'에서 귀중한 시간을 흘려보내게 되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 - 다치바나 식 독서론, 독서술, 서재론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이언숙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참 독특한 책이다.
아니, 독특한 사람이라고 해야 옳겠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들 그렇지만, 자신만의 독서법이 있고, 책에 대한 취향이 있고, 자신만의 독서관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은 자신의 선에서 끝날뿐이고, 타인이 수긍할만한 독서론으로 인정받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날이 책의 매출이 떨어진다고는 하나 여전히 독서 인구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고,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자신만의 독서법과 독서론을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지知의 거장’으로 불리우는 작가의 광적인 지적 욕구와 다독과 속독으로 대변되는 그의 독서법은 부러움과 비판을 동시에 받고 있는 듯하다.
요즘 내가 선택한 독서법과 견주어 볼 때, 나조차도 선뜻 동감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그럼에도 내가 이 책을 소개하는 것은 그럴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나는 요즘 지난 날에 읽었던 책 중에 다시 읽고 싶은 책을 골라 읽고 있으며, 그 내용을 아주 천천히 음미하고 있다.  작가의 말을 빌자면 ’음악적 책읽기’인데 작가는 이 방법을 별로 선호하지 않는 듯하다.  오히려 책의 내용을 개략적으로 살피고 끝까지 읽어야 할 책인지 아닌지를 판단하여, 도움이 되지 않을 책은 과감히 그만두고, 읽어야 할 책은 빠른 속도로 읽는 ’회화적 책읽기’를 권하고 있다.  나는 그의 독서법을 비판할 의향은 전혀 없다.  내가 하지 못하는 것을 하고 있는 작가의 열정이 그저 부러울뿐이다.
  "아마도 끊임없는 삶의 연속선상에서 보는 것, 생각하는 것, 행하는 것, 이 세 가지를 반복하고 피드백 과정을 거치다 보면 어느 날 정신적인 비상을 이루는 때가 찾아와 모든 것을 직관으로 파악할 수 있는 그런 날이 올 것이라는 확신이야말로 나의 생활을 지탱해 준 기대이자 신념이었다."(P.185)
수만 권의 책을 소장하고, 인간의 한계를 실험하듯 다양한 전문 분야를 넘나들며 글을 쓸 수 있는 작가의 능력은 순수한 지적 호기심에 더하여진 피나는 노력의 산물이었음을 느끼게 한다. 
학창시절 이후 문학이나 교양 서적을 거의 읽지 않고 있다는,  읽을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는 작가의 거침없는 발언이 결코 지적 오만이나 거드름으로 비춰지지 않는 까닭은 그는 이미 평범함을 넘어선 ’비범함’의 단계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리라.
"세상에는 시간이 많은 사람과 너무 바빠서 정신없는 사람 중 어느 쪽이 더 많을까.  시간이 많은 사람 쪽이다.  그리고 출판계의 상당한 부분이 시간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들의 시간 보내기용 소비(시간도 돈도)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을 위한 책이 서평에서도 지속적으로 소개되고 있는 추세이다."(P.215)
........................(중략)......................................
"그러나 나는 그런 사람들이 좋아하는 책과 그들이 쓰는 ’맛깔 나는’ 문장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그런 사람들이 쓰는 서평은 기본적으로 읽지 않는다.  읽더라도 대충 훑어보며 책 제목은 재빨리 체크하고 필요한 부분을 발췌하여 읽는 정도이다.  나의 서평은 그렇게 취미로 쓰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이 세상에는 서평을 취미로 쓰는 사람들이 일생 동안 한 번도 펼쳐 볼 일이 없는 책 가운데, 그들이 좋아하는 책보다 몇 배나 귀중한 책이 산더미처럼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P.216)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얼마나 시간이 많은 사람인가' 하는 자괴감으로 마음이 내내 불편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나만의 독서론을 갖게 되기까지 '나는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책을 읽어야 할까' 하는 반성도 같이 하게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