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에게 평화를 묻다 -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연구
서보혁 외 지음 / 모시는사람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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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도 그렇지만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사회에서는 특히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격언이 수시로 입증되곤 한다. 냉혹한 현실이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비근한 예로 오랜 기간 알카에다 시리아 지부를 이끌었던 알샤라만 하더라도 한때 미국 정부에 의해 140억 원의 현상금까지 걸렸던 요주의 대상이었지만, 아사드 정권을 무너뜨린 후 알샤라에 대한 현상금이 철회된 것은 물론 그가 이끄는 과도정부로 인해 시리아에 대한 경제제재를 철회하고 경제협력을 강화하기 위한 정상회담이 열리기도 했다. 그와 같은 사례는 비단 시리아에서 그치지는 않는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식을 원하는 트럼프가 자신의 의견에 따르지 않는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대통령을 기자단이 보는 앞에서 심하게 면박을 주는 장면을 우리는 똑똑히 지켜본 바 있다.


비정한 국제사회의 현실에 비해 대한민국 국민의 정서는 사뭇 낭만적인 측면이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초강대국 미국이 대한민국의 국내 정치에 개입하여 자신이 믿는 정당에 유리하게 힘을 써줄 것이라는 믿음, 우리나라와는 관련도 없는 이스라엘이 미국과 함께 자신들의 편에 서줄 것이라는 믿음은 한 손엔 성조기를 또 다른 한 손에는 이스라엘 국기를 들고 광화문 광장에 나서도록 했으니 말이다. 이처럼 순진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 탓에 나는 이따금 서울에 거주하는 외국 친구들로부터 이와 관련한 질문을 종종 받곤 한다. 시위에 나서는 사람들이 왜 성조기나 이스라엘 국기를 들고 나오느냐는 질문. 나는 그들에게 장황한 설명을 할 자신이 없다. 그렇다고 우리 국민이 무식해서 그렇다고 대답하자니 자존심이 상하고. 나는 그저 나도 잘 모르겠다는 대답으로 얼버무리곤 한다.


"이 책은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의 배경, 의미, 상황, 종전을 위한 대안 등을 정치, 사회, 종교, 역사, 법률, 생태, 젠더 등 대부분의 영역을 망라해 다룬, 적어도 한국에서는 선구적인 책이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이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 대한 균형 잡힌 지침서가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모든 필자가 평화 지향적 연구자들이라는 점에서 상대적 약자이자 이 전쟁에서 더 큰 피해를 입고 있는 팔레스타인 주민의 아픔에 대한 공감이 더 크게 나타나고 있는 것은 어쩌면 이 책의 한계일지도 모른다."  (p.288)


서보혁 통일영구원 선임연구위원, 허지영 강원대학교 통일강원연구원 연구교수, 이찬수 카톨릭대학교 강사 등이 공동 집필한 <전쟁에게 평화를 묻다>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을 입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책이지만, 집필진의 논조나 주장이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사실 이 전쟁은 2023년 10월 7일 하마스의 이스라엘에 대한 대규모 로켓 공격에서 시작되었지만, 네타냐후를 비롯한 이스라엘 시온주의자들이 팔레스타인 주민에 대해 펼치는 인종청소는 도를 넘고 있다. 그런 까닭에 영국은 이스라엘과의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중단하였고, 튀르키예는 이스라엘과의 교역을 전면 중단하였으며, 콜롬비아를 비롯한 남미 3개국은 이스라엘과의 단교를 선언했다. 유럽연합(EU) 역시 자유무역협정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대중의 생존에 필수적인 물과 전기를 이스라엘 측이 공급을 차단하고, 식량.의약품.연료의 반입을 금지했습니다. 이로 인해 주민들은 굶주림과 질병, 기아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피폐한 삶은 이번 전쟁에 의해서만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지난 16년간 지속된 봉쇄로 가자 지구는 사실상 사람이 살 수 없는 환경이 되었으며, 주민들은 떠날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그 결과 가자는 굶주림, 고통, 죽음이 매 순간 일어나는 생존 불가능 지역으로 전락하였습니다."  (p.26~p.27)


내가 이 책을 읽고 싶었던 단 하나의 이유는 대한민국의 정치인이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현실에서 적어도 학자는, 또는 여론을 주도해야 하는 언론인은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강한 목소리를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개가 그렇듯 '혹시나' 했던 기대는 '역시나'로 끝나고 말았다. 2025년 5월 13일 가자 지구의 하마스 정부 지도자였던 무함마드 신와르가 이스라엘의 폭격에 의해 사망했음을 공식적으로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군의 민간인 학살이 멈추지 않고 있는 현실을 뻔히 보고 있음에도 말이다. 물론 이 책이 쓰일 당시에는 신와르가 사망하기 전이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서 희생된 사람의 대다수가 여성이나 어린이, 노인과 같은 약자에 집중되었다는 것을 상기할 때 학자적 양심이라면, 언론인의 양심이 존재한다면 이스라엘에 대해 강한 어조로 비난하는 게 옳다고 본다.


"가자 제노사이드의 경우, 이와 같은 변화된 국제 정세에 더해, 오랜 시간 미국과 유럽의 지원과 협력으로 이루어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봉쇄와 학살의 연장선에 있었기에 더더욱 기존의 국제 질서가 학살을 막는 데 온전히 작동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여러 국제기구들은 나름의 결정과 판단으로 가자 제노사이드를 비판했고,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확인해 신속하게 공표했다. 그 중심에 국제재판소가 있었다."  (p.162)


오늘(2025년 6월 13일)은 이란 핵시설 등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습이 있었다. 이란과 미국의 핵협상도 결렬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물론 이스라엘의 이와 같은 불법적 도발은 다방면에서 위기에 처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도를 끌어올리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수도 있지만 인간의 생명을 파리 목숨쯤으로 생각하는 시온주의자들의 잔인성에 기초한다고 보인다. 그들이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한 이스라엘은 전 세계인의 공적이 될 수밖에 없으며,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그에 상응하는 죄의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쟁에게 평화를 묻다>는 중동 지역의 평화를 기원하는 책인 동시에 정의와 인도주의에 대한 세계인의 각성을 요구하는 책이다. 나는 그렇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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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고 식당 근처의 공원을 친구와 천천히 걸었다. 소화도 시킬 겸 겸사겸사 나선 산책이었지만 부쩍 높아진 기온 탓에 걸음은 마냥 느려졌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점은 구름이 많은 하늘이 여름 햇살을 조금쯤 가려주었다는 것. 그 시간에도 산책을 나온 사람들이 아주 없지는 않아서 버찌가 까맣게 떨어진 산책로를 많은 이들이 밟고 지나갔다. 심술궂은 바람이 이따금 잊을 만하면 불곤 했다.


새 정부가 들어선 지 일주일여가 지나고 있다. 그럼에도 주변 분위기는 많이 바뀐 듯하다. 뭐랄까, 전에 비해 생기가 돈다고 할까. 확실히 식당이나 카페 등 가게를 찾는 손님들이 많아졌음은 물론 손님들의 표정도 밝아진 듯하다.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나 새 정부에 거는 기대가 크다는 건 확실히 느낄 수 있다. 이렇다 보니 이전 정부는 도대체 뭘 했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한 지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경제가 살아날 조짐을 보이는데 지난 정부는 3년 동안 도대체 뭘 했으며, 대통령은 어떤 역할을 했던 것일까. 밤낮 부어라 마셔라 술이나 처먹고, 국정운영은 나 몰라라 하면서 세금만 축냈던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아니 들 수 없다. 안규철의 저서 <사물의 뒷모습>을 시간이 날 때마다 아껴가며 읽고 있다.


"말에도 유효기간이라는 게 있다. 날짜가 지난 신문기사는 뉴스로서의 의미를 잃고, 때를 놓친 뒤늦은 사과는 진정성을 의심받는다. 낡은 구호는 비웃음을 살 뿐이고, 상투적인 은유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 물론 한 사람에게 일생 동안 변함없이 유효한 말도 있고, 개인과 세대를 넘어 인류의 삶에 빛이 되는 말들도 있지만, 세상에는 그렇지 않은 말들, 더 이상 유효하지 않으며, 할수록 해가 되는 말들이 더 많다. 오염되어 더 이상 쓸 수 없는 말이 있고, 닳고 닳아서 원래 의미를 잃어버린 말이 있고, 오랫동안 쓰이지 않아서 아무도 기억 못 하는 말이 있다. 진실을 감추고 왜곡하는 데 쓰이는 말이 있고, 사람을 현혹하거나 무너뜨리는 데 쓰이는 말이 있다. 그렇다고 이런 말들을 죄다 쓸어 모아서 쓰레기장에 버리거나 땅에 묻을 수는 없다. 그렇게 하더라도 그것들은 다른 어딘가에서 버젓이 쓰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감쪽같이 포장을 바꿔 다시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유효기간이 지난 죽은 말들이 돌아다니는 세상에서 말은 믿을 수 없는 것이 된다."  (p.137~p.138)


지난 정부에서 여러 차례 거부권이 행사되었던 3개의 특검법이 오늘 의결되었다. 지난 정부의 대통령은 자신과 부인의 잘못에 대해 사과를 한 적도 거의 없지만, 어쩌다 하는 사과 역시 '진실을 감추고 왜곡하는 데 쓰이는 말'이 대부분이었다. 그와 같은 말들을 '죄다 쓸어 모아서 쓰레기장에 버리거나 땅에 묻을 수는 없'지만 특검을 통해 낱낱이 드러내고, 그에 상응하는 죄의 대가를 받도록 했으면 좋겠다. 오늘은 제38주년 6.10 민주항쟁 기념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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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
손턴 와일더 지음, 정해영 옮김, 신형철 해제 / 클레이하우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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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산에는 비릿하고 은근한 밤꽃이 피어나고 있다. 자연의 섭리는 때론 놀라운 데가 있어서 초봄에 피는 꽃들은 향기가 거의 없거나 있어도 숲 속의 다른 생물을 자극하지 않는다.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많은 동식물의 수면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산수유꽃, 벚꽃 등 봄을 알리는 꽃들이 금세 피었다 지는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봄이 여러 봄꽃들이 경쟁하듯 피어날 즈음이 되면 그 향기도 덩달아 짙어지게 마련이다. 조팝꽃이며, 아카시아꽃이며 심지어 찔레꽃에 이르기까지 이 시기의 꽃들은 꽃의 화려함보다는 자신의 향기로 스스로를 드러낸다. 그러나 향기는 멀리 가지 못하고 그저 주변의 동식물을 각성시키고, 방금 겨울잠에서 깬 어리둥절 정신을 차리지 못한 숲의 생물들의 머리를 맑게 할 뿐이다. 흐드러진 봄이 여름으로 넘어갈 무렵, 서둘러 밤꽃이 핀다. 밤꽃은 그저 가벼운 향기로 주변 동식물을 희롱하지 않는다. 밤꽃의 향기는 숲 전체에 스며든다. 그렇다. 밤꽃 향기는 스치듯 풍기지 않고 내재한 생명력을 숲 전체에 전한다. 그렇게 천천히 스며들어 장마가 오고 이따금 태풍이 불더라도 늦지 않고 생명력을 퍼뜨리라고 주문한다.


"때로는 온종일 그런 기도와 탄원에 미친 듯 매달리다가 돌연 환멸에 휩싸이곤 했다. 자연은 귀머거리다. 신은 무심하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절대 섭리를 바꿀 수 없다. 그러다가 절망감이 현기증을 불러오면, 아무 길모퉁이에서 발을 멈추고 벽에 몸을 기댄 채 계획 따윈 없는 이 세상을 어서 하직하기를 갈망했다."  (p.61)


숲에서는 신의 의도와 자연의 섭리를 이해하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다. 자연스럽다는 말은 사랑스럽다는 말의 의미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이치를 담은 소설이 손턴 와일더가 쓴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이다. '1747년 7월 20일 금요일 정오, 페루에서 가장 멋진 다리가 무너지며 다섯 명의 여행자가 그 아래의 골짜기로 추락했다.'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이 사고를 목격한 이탈리아 북부 출신의 한 수사에 의해 탐구됨으로써 희생된 다섯 명의 삶이 새롭게 조망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희생자들의 삶의 궤적을 연구함으로써 감춰진 '신의 의도'를 밝히고자 했던 주니퍼 수사. 그러나 주니퍼 수사는 죽음 이전에 있었던 희생자들의 삶이 그들이 저질렀던 크고 작은 과오와 이에 대한 반성 그리고 앞으로의 삶에 대한 새로운 결심으로 이루어져 있었음을 밝혀냄으로써 '신의 의도'와는 크게 상관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기에 이른다.


"여기서 주니퍼 수사가 이끌어 낸 귀납적 결론들을 굳이 자세히 소개하지는 않겠다. 그것은 늘 우리 곁에 있는 것들이다. 그는 그 사고에서 악한 사람에게 파멸이 닥친 것과 선한 사람이 일찍 천국의 부름을 받은 것을 모두 보았다고 생각했다. 세상을 향한 객관적인 교훈으로, 오만함과 부유함이 저주받는 것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리마의 교화를 위해, 겸손함이 최고로 인정받고 보상받는 것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니퍼 수사는 자신의 추론에 만족할 수 없었다. 몬테마요르 후작 부인이 탐욕의 괴물이 아니고, 피오 아저씨가 방종의 괴물이 아닐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p.193)


누군가로부터의 사랑을 갈구하다 끝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듯한 다섯 명의 희생자들. 그렇다면 그들의 삶은 그저 무의미한 것이었을까. 게다가 이 사고의 희생자들을 통해 '신의 의도'를 밝히고자 했던 주니퍼 수사 역시 이단으로 몰려 화형을 선고받게 되는데, 삶에서 경험하는 그 모든 것들이 결국 예기치 못한 죽음과 함께 무의미의 늪으로 영원히 가라앉는 것일까. 당연하게도 작가는 이를 부정한다. 산 자와 죽은 자를 잇는 다리가 '사랑'이라는 것을 독자들에게 상기시킨다. 죽은 자를 기억하는 단 몇 사람의 사랑과 기억만으로도 우리는 이 세상을 살다 갈 의미와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모든 사랑의 충동은 그것을 만들어 낸 사랑으로 돌아간다. 사랑을 위해서는 기억조차 필요하지 않다. 산 자들의 땅과 죽은 자들의 땅이 있고, 그 둘을 잇는 다리가 바로 사랑이다. 오직 사랑만이 남는다. 오직 사랑만이 의미를 지닌다."  (p.207)


지금 이 순간을 딛고 있는 '시간의 다리'는 과연 안전한가. 확실히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그 누구도 이 질문에 '예스'라고 말할 수 없으리라. 우리 모두는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산루이스 레이의 다리' 위에 서 있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내일을 향해 두려움 없이 나아갈 수 있는 까닭은 나를 사랑하고 믿어줄 몇몇 사람들이 나의 뒤를 받쳐 주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 이후에도 그 사랑의 끈이 끊어지지 않고 한동안 이어질 수 있음을 확신하는 사람은 지금의 이 삶에 감사할 수 있을 것이다.


산에는 요즘 밤꽃의 생명력이 퍼져가고 있다. 내일 당장 태풍이 몰아친다 한들 숲에 번지는 그 생명력은 멈추지 않고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우리는 다시 기운을 내고 지친 당신의 어깨를 다독일 수 있다. 한낮을 달구는 유월의 무더위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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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대통령에 대한 우려와 기대가 만나는 사람들의 대화 주제로 떠올라 온종일 그 열기가 식지 않았던 하루. '경제는 심리'라는 사실을 반영하듯 주가는 크게 올랐고, 사람들의 얼굴에도 옅은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정체된 대기 탓에 어제까지만 해도 크게 높았던 미세먼지 농도도 시원하게 부는 바람과 함께 크게 낮아졌다. 모든 게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한 느낌. 평온한 일상을 반년 만에 되찾은 사람들의 여유로운 몸짓이 마냥 아름답게만 보였다. 이와 같은 평온한 일상이 꾸준히 반복될 수 있음이 하나의 축복이고 행복이라는 걸 깨달아야 하는데,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의 얕은 조바심이 언제 다시 대상도 특정할 수 없는 누군가를 향해 비난과 조롱과 폭력의 언어를 쏟아내게 될지... 나는 주변 사람들의 성마른 성격과 도래하지 않은 미래에 대해 잠시 걱정했었다. 안규철의 저서 <사물의 뒷모습>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경구를 발견한다.


"무슨 일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일이 어떻게 끝날지를, 그 일의 반대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멈추는 법을, 말하기 위해서는 침묵하는 법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잊는 법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외로움을 견디는 법을 알아야 한다. 문제는 우리가 앞으로 가는 방법만을 배웠지 멈추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뭔가를 이루고 소유하는 방법만을 배웠지 그것과 헤어지는 방법은 배우지 못했다.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방법만을 배웠지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방법은 배우지 못했다. 그러므로 지금은 다시 멈춰야 하는 시간, 우리가 배우지 않았던 것들을 위해 지평선 너머를 응시해야 하는 시간이다."  (p.224~p.225)


이재명 대통령의 첫날 행보에 유난히 관심이 쏠렸던 하루였다. 누구를 비난하고자 함이 아니라 인간의 됨됨이는 그가 취하는 하나하나의 행위, 몸짓과 표정, 그 숨결에 이르기까지 세세한 모든 것에 대한 비교를 통해 드러나게 된다. 20대 대통령이었던 윤석열 씨의 취임 첫날은 어떠했던가. 국민들을 향한 그의 태도는 어떠했던가. 그가 국민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무엇이었던가. 불과 3년 전의 일이었지만 아득한 과거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 이런저런 생각에 이재명 대통령의 행보가 유난히 돋보였던 건 그에게 거는 국민들의 기대가 다른 어느 때보다 크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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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5-06-04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224~p.225)의 글이 너무 좋아서 여러 번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꼼쥐 2025-06-08 15:52   좋아요 0 | URL
저도 우연히 읽게 된 책이지만 <사물의 뒷모습>에는 이런 좋은 문장들이 가득합니다. 누구나 읽어볼 만한 책이죠. 댓글 감사합니다.^^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
조승리 지음 / 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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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에 대한 편견은 이성이 아니라 다분히 감정에 의해 초래될 때가 많다. 이성적으로는 그들에 대한 편견을 갖는 것이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고 수백 번 생각할 수 있지만 감정적으로는 그냥 싫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감정은 어디에서 비롯될까? 나는 그 시발점이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분리라고 본다. 어렸을 때부터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섞임이 자연스러웠더라면 어른이 된 후에도 그런 습성이 지속될 확률은 상당히 높다.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의 노출이 극도로 제한되면 될수록 그들에 대한 차별이나 분리는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 되고 말 것이다. 낯선 사람에 대한 회피나 소외는 인간의 기본적인 본능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성에 의해 해결될 문제는 결코 아니라고 본다.


"스물세 살, 나는 결국 꿈을 이루었는데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다. 엄마는 갑자기 쓰러져 열흘간 중환자실에 혼수상태로 누워 있다 돌아가셨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이별이었다. 열흘간 중환자실 앞을 지키며 깨어 있는 모든 시간을 신께 기도했다. 부디 엄마를 살려달라고. 의사가 엄마의 머리맡에서 사망선고를 내릴 때 나는 더이상 내 인생에서 신을 믿는 일은 없을 거라 결심했다. 내 남은 시력은 겨우 엄마의 형상만을 감지했다. 나는 손을 뻗어 엄마를 만졌다. 손끝으로 영혼이 사라진 차가운 살결을 더듬어보았다. 단 하루라도 이 사람과 끌어안고 잠들고 싶었다."  (p.102~p.103)


조승리의 에세이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를 읽고 있노라면 왠지 모를 화가 저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시도 때도 없이 치솟는다. 그것은 다수의 비장애인 속에서 살아가는 장애인의 비애인 동시에 공평하지 못한 신의 손길 때문이기도 하다. 15세에 시력을 잃고 시각장애인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밖에 없었던 작가가 그곳에서 만났던 사람들과 직업인 마사지사를 하면서 알게 된 사람들 그리고 어머니가 있는 고향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와 함께 시각장애인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써내려 간 이 책은 때로는 읽는 이들의 심금을 울리기도 하고, 때로는 화를 돋우기도 한다.


"출산 당시 생활고에 시달렸던 엄마는 나를 보육원에 맡기려고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엄마는 하루만 더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싶었다. 다음날 또 하루만 더. 차일피일 미루다보니 보육원에 보낼 생각이 점차 사그라졌다. 그렇게 60일이 지났다. 나는 엄마의 눈물을 먹고 자랐다. 내 어머니도 가슴이 내려앉을 것처럼 사랑에 빠져버린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를 지켜냈다. 그리고 장애를 판정받은 날, 엄마는 너를 낳지 말았어야 했다고 가슴을 쥐어짜며 통곡했다."  (p.227)


나는 사실 작가의 이름만 들었을 때는 작가가 남자인 줄 알았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한 번 읽어볼 만한 괜찮은 책이라는 평을 종종 들었지만, 남성 시각장애인이 마사지사로 일하면서 경험하고 깨달았던 것들을 그저 그렇게 엮은 책이겠지, 하는 지레짐작으로 선뜻 손이 가지 않았었다. 계속되는 권유에 어쩔 수 없이 책을 읽게 되었는데 나는 사실 다른 무엇보다도 작가가 여성이라는 데서 꽤나 큰 충격을 받았다. 책의 내용만 좋으면 됐지 작가의 성별이 뭐 그리 중요할까 싶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나의 선입견이겠지만 대한민국 사회에서 시각장애가 있는 여성이 마사지사라는 자신의 직업을 당당히 드러내면서 자신의 애환을 글로 쓴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거라고 믿어지기 때문이었다.


"나는 환히 웃으며 시술이 끝난 노인을 배웅했다. 뉴스에서는 늘어난 핼러윈 희생자들을 보도했다. 나는 어제의 그녀에게 사과하고 싶었다. '내 기준으로 당신을 판단하고 한심하게 여겼습니다. 미안합니다. 진실로 반성합니다.' 나는 내가 겪은 고통을, 희생을, 인내를, 모두가 겪길 바라는 졸렬한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간절히 바란다. 밤새워 놀다 지친 그녀가 늦잠을 실컷 자고 일어나는 일요일이 되었기를."  (p.193)


모든 게 평안할 듯 보이는 우리네 삶은 지랄맞아 보이는 순간들과 이따금 그렇지 않은 순간들이 겹치고 겹쳐 잘 꾸며진 한 편의 드라마가 되어 추억이라는 책장 속으로 사라진다. 그 지랄맞았던 순간들이 쌓여 누군가의 책장 속에서는 축제가 되고, 또 누군가의 책장 속에서는 아득한 절망이 되기도 한다. '10대 때는 최고의 유작을 한 편 남기고 서른 살 전에 요절하는 게 꿈'이었으나 지금은 '무병장수하면서 누가 봐도 호상이라고 할 때까지 글을 계속 쓰는 게 꿈이자 목표'라는 작가의 희망은 짭조름한 눈물로 간을 맞춘 듯 독자들의 입맛에 착착 감긴다. 2024년 12월 3일, 뜬금없는 계엄으로 전국민을 공포에 떨게 하고, 근 6개월여의 시간 동안 불면의 밤을 보내도록 했던 그 지랄맞은 시간이 저물어가고 있다.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기를 나는 누구보다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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