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온라인이나 오프라인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이슈는 단연 인사 청문회가 아닐까 한다.
다소 비판적인 온라인 기사에는 예외 없이 많은 댓글이 달리고 그 중심축을 형성하는 것이 정부의 친서민 정책에 대한 비판의 글이다.
나는 정부를 대변하려는 사람은 아니지만 용어상의 오류를 시정하고자 이 글을 쓴다.
애당초 정부기 ’친서민 정책’을 발표했을 때, 국민들이 아는 것과 같은 "親庶民 政策"이 아니라  "親鼠民 政策"을 표방한 것이었는데, 대다수의 국민들은 전자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와 국민간애 용어상의 오해가 있었던 듯하다. 
즉, 정부에서는 서민(鼠民 )(쥐의 무리)과 친해지겠다는 뜻이었는데 국민들은 서민(庶民)(벼슬을 하지 않은 대다수의 일반 백성)으로 오해한 듯하다.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인사 청문회를 지켜보면서 나의 짧은 지식을 탄식하게 되었다.   하마터면 나도 정부를 심하게 비판할 뻔했던 사실을 시인해야겠다.
원래 쥐란 동물은 방금 전에 했던 일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미로찾기 실험에서 보듯 방금 전에 지나친 길을 찾는 것에도 번번이 실패하지 않던가?
하물며 수년 전에 있었던 일을 어찌 기억하겠는가.
지난 청문회의 내정자들은 대부분 자신이 했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렇다.  그들은 모두 쥐의 아이큐를 가진 서민(鼠民)이었고, 그들과 가까워지려는 정부의 親鼠民 政策은 거짓이 아니었다.  우리의 지도자들이 鼠民이라는 사실이 다소 씁쓸하고 내키지는 않겠지만 앞으로 정부의 親鼠民 政策이 거짓이라는 비판은 삼가해 줬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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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에 썼던 공책을 들춰보면 가끔 닭살 돋는 글들이 눈에 띈다.
전공과는 무관하게 낙서처럼 흘려 쓴 그런 글을 읽을 때면 감수성이 풍부(?)했던 시기니만큼 그러려니 하고 이해할 수도 있겠으나, 세월이 흐른 지금 빛바랜 추억을 되새기는 것이 어쩐지 부끄럽고 어색하다.  그럼에도 굳이 이 글을 올리는 것은 내 나이 또래의 어느 분이 혹여 이 글을 읽는다면 ’아, 그땐 그랬었지’하고 옛 추억을 되살릴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해서이다.  내가 잠시 사귀었던 사람에게 헤어지며 썼던 글인 듯한데 지금은 그 얼굴마저 희미하다.
읽기 전에 미리 말씀 드리지만 닭살이 돋는 것은 각오하시라.  그리고 어색한 리듬과 다소 매끄럽지 못한 문맥이 곳곳에 보이지만 지금 와 수정하면 그때의 풋풋한 감정이 사라질 듯하여 원문을 그대로 옮겨본다.


사랑을 보내며

받았던 사랑을
돌려드립니다
당신께 있었던 사랑이
내게 와서
잠시나마 행복했습니다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는
아쉬움은 없습니다
외려 짧아서 짜릿했고
그만큼 강렬했습니다

당신의 사랑을
곱게 포장하는 이 순간
주인을 찾아가는
당신의 마음이
패랭이꽃처럼 가녀리고
슬퍼 보입니다

있을 때는
미처 몰랐습니다
보내려는 이제사
참으로 고운 모습인줄
알았습니다

미안합니다
그 고운 사랑이
내게 와서 잠시
천덕꾸러기로 지냈습니다
뜰앞의 화분처럼
잘 가꾸지 못했음을
고백합니다

무심한 사람이라
타박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
제가 그런 사람인줄
진즉에 알았더라면
제게 당신의 사랑을
보내지 않았을까요?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
당신의 사랑을 탐내어
철없이 꾀어낸
제 탓입니다

오늘
주인을 찾아 떠나는
당신의 사랑을
잘 받았노라
기별을 주시렵니까?

제 안타까운 미련이

발목을 잡습니다
그러지 마세요
잘 지내라는 인사도
하지마세요

당신은 예쁜 사람
당신의 사랑이
당신의 빈 가슴에 찾아들면
깨끗이 잊었노라
처음부터 제게 
보내지 않았었노라
생각하세요

해거름에 둥지를 찾는
새떼처럼
당신의 사랑이
당신을 찾아 떠납니다

영영 이별인줄 알지만은
차마 그 뒷모습을
보지 못합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당신의 마음 한곁에
저와 보낸 세월을
같이 보내지 못한 것입니다

그 시간은 제 가슴에 화인(火印)처럼 남아
두고두고
철없던 청춘을 질책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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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듣는 말 중에 "법대로 해!" 또는 "법대로 하자."는 말이 있다.
다른 나라에서는 거의 들어보지 못한 말이다.
갈등이 있는 상대방에게 일종의 엄포성으로 하는 이 발언을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자주 듣게 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법을 집행하는 경찰이나 검찰에 신고하거나 법원에 호소하면 될 일을 우리는 왜 이 말을 내뱉어서 갈등의 상대방에게 겁을 주는 수준에서 끝내려 하는 것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내 생각에는 법과 현실의 괴리와 법정까지는 끌고 가고 싶지 않은 우리네 정서가 한몫하고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럼에도 법은 자신을 지켜줄 마지막 보루라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러한 정서를 전혀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  
해방 이후 과거 군사정권 시대에 이르기까지 법의 준업한 잣대는 오직 서민의 몫이었지 위정자나 재력가에게는 그저 유명무실한 문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법을 잘 지키는 사람에게는 ’너 참 세상 살기 힘들겠구나 .’하는 비아냥이 쏟아진다.
오늘자 서울신문에는 이런 글이 실렸다.
과거 국민의 정부나 참여정부 때에는 위장전입 문제로 장관이나 총리 내정자가 줄줄이 낙마를 했는데, 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 ’무거운 죄’(?)의 불법성 여부가 모호해졌다는 내용의 글이다.  위장전입은 주민등록법상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고 한다.  주민등록법 위반으로 처벌받는 국민만도 한 해 5000여명에 이른다고 하는데, 현 정부의 고위직에 임명되었거나 현재의 내정자에게는 오히려 위장전입을 하지 않은 사람이 이상하게 보인다.  물론 그 누구 하나 처벌받은 사람은 없었다.  그들에게는 위장전입이 하나의 훈장을 단 것과 같은 영예로운 일이기에...
영국의 유명한 추리 작가 코넌 도일의 일화 중에 이와 비슷한 것이 있다.
하루는 그가 고위직에 올랐던 그의 친구들이 얼마나 양심에 따라 살고 있는지 알아보고 싶어 한장의 쪽지를 그들 각자에게 보냈었단다.  쪽지에는 ’탄로났으니 도망가시오’라고 적혀 있었는데, 그 쪽지를 받았던 그의 친구들은 다음날 단 한명도 남아있지 않았다고 한다. 
작금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코넌 도일의 친구들은 범법자라기 보다는 오히려 양심이 살아있는 선량한 사람이었다는 착각마저 들게 한다.
지켜지지 않는, 또는 사람에 따라 가려서 적용되는 법률을 그대로 존치하는 이유가 궁금해질 수 밖에 없는 대목이다.  최소한 사법(死法)으로라도 남아 있어야 그들의 권위가 서는 것일까?
다른 이야기지만 세계 각국의 음주운전에 대한 처벌은 아주 다양하다.
엘살바도르에서는 음주운전자가 적발되는 즉시 총살형.  엔진이 꺼져 있는 주차 상태에서 운전석에 앉아만 있어도 총살형이고 불가리아에서는 초범은 순방, 재범자는 교수형에 처해진다고 한다.  음주운전으로 인한 폐해가 큰 탓에 극형이라는 초강수를 둔 것이겠지만 법정서상 과하다 싶은 느낌이 든다.  그럼에도 이런 법률이 남아있는 까닭은 명확해 보인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지금 적용되는 위장전입의 건은 나조차도 존치의 이유를 발견하기 어렵다.
법이 지켜지지 않고 사회가 혼란한 국가일수록 준법을 강조하게 마련인데 우리나라가 그 꼴이다.  대통령은 연일 준법과 공정한 사회를 입버릇처럼 말한다.
그 말이 내게는 왜 공허한 메아리로 들리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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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선 피곤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아파트 콘크리트 외벽을 뚫고
하루에 지친 사람들이 모인다

소젖을 먹기 시작했던
그 순간부터
소처럼 일만 했노라
생떼를 쓰는 사람들

골목길 가로등이 밝다.

어둠을 잊은 사람들은
죽음을 믿지 않으리니
미래도 함께 죽자

직선으로 수로을 내고
직선으로  길을 내고
자신의 미래도 
직선의 그 길로 향하리라
철석같이 믿었건만

곡선에 익숙했던 사람들은
보이지 않던 끝을 보며 절망한다

어둠은 생명을 낳고
굽이 도는 그 길에서
하루를 마감하던
그 시절은 밝음과 함께 죽었다

하늘엔 별이 보이지 않는다
잠들지 못하는 시대
꿈꾸지 못하는 젊음이
어둠의 몰락과 함께
하루에 묻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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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테레사의 하느님께 아름다운 일
맬컴 머거리지 지음, 이정아 옮김 / 시그마북스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나는 가끔 초등학교 저학년이나 유치원생의 글을 읽을 때 어떤 성인도 흉내낼 수 없는 논리가 숨어있다는 사실에 놀라곤 한다.  문맥이나 글자의 배열만 놓고 보자면 너무나 허술하고 오류 투성이로 보이지만 마음의 눈으로 읽으면 가장 완벽한 논리로 쓰여진 글임을 부인하기 어려워진다.  이것은 글 뿐만 아니라 그림에서도 그렇다.  원근법이나 명암 등 그림의 기초가 되는 구성이나 비례 또는 채색 어느 것 하나 지키지 않은,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기괴하다거나 우스꽝스럽다 느낄만한 그런 작품이 어느 곳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작품이라고 느껴질 때, 이것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해지기 마련이다.
일상에서도 그런 경우를 종종 목격하게 된다.  불치병의 환자가 완쾌되었다거나  지진의 현장이나 탄광의 갱도에 갇혀있다 기적적으로 구출된 사람들.  과학적 잣대나 의학적 설명이 불가능한 그 현실을우리는 ’기적’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인간의 의지나 노력만으로 불가능해 보였던 일이 우리 앞에 펼쳐질 때, 과연 그 힘은 어디서 오는가? 하는 물음은 우리 인간에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이 책은 영국인 저널리스트 맬컴 머거리지에 의해 쓰여진 신앙 고백서라고 하는 편이 옳겠다.
마더 테레사가 이렇게까지 국제적으로 크게 주목받게 된 계기는 1968년 작가와의 만남 덕분이며, 그 특별한 만남을 통하여 노년기의 작가가 로마카톨릭에 귀의하게 된 것은 우연이라 말하기 어렵다.  성공한 방송인이자 논객으로 이미 국제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던, 어찌 보면 낯설고 기괴하기까지 한 작가가 알바니아 출신의 작고 가녀린 한 수녀를 만남으로써 자신의 인생관과 종교관이 바뀌게 된, 어쩌면 그의 전 인생이 바뀐 데에는 마더 테레사의 인간에 대한 숭고한 사랑이 아니면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그녀는 구걸을 마치고 돌아온 나병환자들을 보기라도 하면 벌이가 어땠는지 그들에게 직접 물어볼 태세였다.  마침 그녀와 내가 함께 있던 그 날은 벌이가 신통치 못한 것 같았다.  그녀는 벌이가 변변치 못한 나병환자들에게는 위로의 말까지 전했다.  열성을 다하다 못해 그들에게 그토록 절실한 문제를 논의하면서 그렇게까지 적극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실로 아름다울 따름이었다.(P.28)
로레타 수녀원을 나와 동전 몇 푼만 지닌 채 캘커타에서 가장 가난하고 비참한 구역을 자신의 거처로 삼았던 마더 테레사의 용기와 깊은 신앙심에 어느 누군들 감동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들이 겪는 가장 큰 고통은 가난보다도 세상에서 버림받은 존재가 되었다는 공허함임을 마더 테레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 책에서 작가는 마더 테레사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받았던 그의 솔직한 느낌과 마더 테레사의 신앙과 인터뷰 내용 및 마더 테레사가 설립한 사랑의 선교회에 대하여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마더 테레사의 생전의 모습과 캘커타의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이 사진으로 실려 있어 그 감동을 더한다.  깊게 패인 주름과 깡마른 얼굴로 따뜻한 미소만큼은 결코 잃지 않았던 마더 테레사의 모습은 이기심으로 병들어 가는 현대인들에게 커다란 경종을 울리고 있다.
진심을 다해 서로  사랑하라고.

이 책을 종교에 대한 색안경을 끼고 읽는다면 마더 테레사를 미화했다거나 종교적 색채가 진하다고 비판할 여지는 있으나 그것까지는 논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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