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지음, 안정효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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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아도 그것은 다만 보는 이의 시각이나 관점의 차이일 뿐 제자리이거나 오히려 뒷걸음질 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 건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그 정도로 생각할 수 있게 된 나 자신에 대해 꽤나 기특한 마음이 들었고, 삶의 진실을 향해 조금쯤 거리를 좁힌 듯하여 뿌듯해했던 것이다. 다른 이의 칭찬이 없다 해도 말이다. 직장에서 승진을 하거나 작년에 비해 돈을 조금 더 모았다거나 하는 일들은 일견 내 삶에 있어 진전이나 발전인 듯 보이지만, 그 작은 성취를 이루기 위해 내가 포기해야 했던 많은 것들을 생각할 때 내 자신이 문득 측은해지는 것이다. 개인의 영역을 넘어 사회 전체로 확대했을 때도 그와 같은 현상은 크게 다르지 않다. 나날이 발전하는 과학 문명으로 인류의 삶이 풍족하고 여유 있게 변하는 듯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직장을 잃고 사회로부터 소외된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우리의 미래가 암울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는 나처럼 생각하는 소수의 사회 구성원들에게 위안과 긍정의 메시지를 전한다. 과학이 고도로 발달하여 인간의 출생과 자유까지 마음대로 통제하는 미래의 문명 세계를 그린 이 작품은 가족이라는 유대가 사라진 세계, 죽음까지도 익숙해지도록 길들여진 사회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에 대해 심각한 질문을 던지는 한편 기술의 진보와 과학의 발전이 우리 인간을 과연 어떤 곳으로 인도할 것인지 깊게 살펴야 한다고 조언한다.


“세계는 이제 안정이 되었어요. 사람들은 행복하고, 원하는 바를 얻으며, 얻지 못할 대상은 절대로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잘살고, 안전하고, 전혀 병을 앓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늙는다는 것과 욕정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즐겁습니다. 어머니나 아버지 때문에 시달리지도 않고, 아내나 아이들이나 연인 따위의 강한 감정을 느낄 대상도 없고, 마땅히 따르도록 길이 든 방법 이외에는 사실상 다른 행동은 하나도 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어요. 그리고 혹시 무엇이 잘못되는 경우에는 소마가 기다립니다. 그것을 자유라는 이름으로 당신이 창밖에 던져버렸어요, 야만인 씨. 자유 말입니다!” 그가 웃었다. “델타들이 자유를 이해하리라고 기대하다니! 그리고 이제는 그들이 「오셀로」를 이해하리라고 기대하고요! 참 순진한 청년이군요!”  (p.333~p.334)


생물학자로 유명했던 할아버지 토머스 헨리 헉슬리와 생물학자로 유네스코 초대 회장을 지냈던 그의 형 줄리언 헉슬리 등 명문가에서 성장한 올더스 헉슬리는 종교와 철학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말년에는 동양철학과 불교에도 관심을 보였던 헉슬리 자신의 사상은 이 책에 등장하는 원시 지역(Reservation)의 ‘야만인’ 존을 통하여 표출된다.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엡실론의 다섯 계급으로 나뉘어 ‘맞춤형’ 대량 생산으로 탄생하는 인류, 그들은 하나의 난자에서 수십 명의 일란성 쌍둥이들이 태어나고, 반복되는 수면 학습과 세뇌를 통해 어떠한 의문도 갖지 않고 정해진 운명에 순응한다. 노화도, 외로움도 겪지 않는 인류는 원할 때면 언제든 문란한 성관계를 맺는 등 쾌락과 만족감 속에서 삶을 향유한다. 노동 시간 이외에는 단순한 오락들로 짜여진 일과를 보내고, 혹여라도 기분이 나쁘거나 고통스러운 일을 겪으면 소마(soma)를 통해 즉각적인 쾌감을 경험한다. 소마는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할 뿐만 아니라 사고 능력까지 빼앗는다. 이 세계의 구성원은 모두가 행복하다.


“하지만 난 안락함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신을 원하고, 시를 원하고, 참된 위험을 원하고, 자유를 원하고, 그리고 선을 원합니다. 나는 죄악을 원합니다.”
“사실상 당신은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는 셈이군요.” 무스타파 몬드가 말했다.
야만인이 도전적으로 말했다. “나는 불행해질 권리를 주장하겠어요.”
“늙고 추악해지고 성 불능이 되는 권리와 매독과 암에 시달리는 권리와 먹을 것이 너무 없어서 고생하는 권리와 이虱투성이가 되는 권리와 내일은 어떻게 될지 끊임없이 걱정하면서 살아갈 권리와 장티푸스를 앓을 권리와 온갖 종류의 형언할 수 없는 고통으로 괴로워할 권리는 물론이겠고요.”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나는 그런 것들을 모두 요구합니다.” 마침내 야만인이 말했다.
  (p.362~p.363)


100여 년 전에 발표되었던 이 소설이 독자들에게 주는 충격은 당시에 비해 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지금 올더스 헉슬리가 상상했던 미래의 모습에 아주 가까이 다가와 있기 때문이다. 조직화된 꿀벌의 세계처럼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에게 부여된 직분에 충실하고, 아무 생각도 없이 기계적으로 활동하며, 노후의 삶이나 죽음에 대한 공포도 없이 사라지는 게 과연 행복일까. 야만인 청년 존을 통해 유토피아와 원시 세계를 비교하고 있는 이 소설은 우리에게도 야만인 '존'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것을 권한다. 문명사회를 떠나 원시 사회로 돌아갈 것인지 아니면 이곳에 잔류할 것인지...


겨울답지 않은 포근한 날씨가 대기층에 미세먼지의 농도를 더하고 있다. 하나가 좋으면 반드시 하나가 나쁠 수밖에 없는 게 우리가 사는 세상의 규칙인가 보다. 어쩌면 우리가 간절히 기도했던 새해 소망이나 바람도 그 대가로 우리가 잃게 되는 것을 생각하면 다 부질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는 지금, 내가 있는 이곳에서 이 순간을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주말 휴일을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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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직장인에게 일과 시간의 절반은 아주 느리게 흘러간다. 점심을 먹고 난 오후의 시간은 식사량만큼의 무거워진 체중 탓인지, 누군가 시곗바늘에 껌딱지라도 붙여 놓은 것인지, 그도 저도 아니면 식곤증으로 인한 인지 부조화 탓인지 오전에 비해 시간은 현저하게 느린 속도로 흘러가는 것이다. 1시간쯤 흘렀겠지 하는 기대감으로 확인해 보면 30분을 겨우 지나고 있고, 적어도 30분은 지났을 거야 하면서 쳐다보면 간신히 10분을 넘겼을 뿐이다. 이렇게 시계만 쳐다보는 날이면 퇴근 후에 기다리는 약속이 있느냐는 둥 괜한 트집을 잡히기 일쑤이다. 나는 단지 천천히 흐르는 시간에 뿔이 나 있을 뿐인데...


오늘도 미세먼지가 하늘을 뒤덮고 있다. 뿌연 하늘이 며칠째 이어지다 보니 우리나라도 이제는 유럽의 겨울 날씨와 크게 다르지 않은 듯싶은 느낌이 든다. 뿌옇게 흐린 하늘을 보면서 마음마저 괜스레 우울하고 답답해지는... 며칠 전 유럽 출장을 다녀온 친구와 잠시 시간을 내어 수다를 떨었다. 물가가 어찌나 비싸던지 웬만한 식당에선 다른 음식을 추가로 시키는 게 부담스러울 지경이라고 했다. 숙박비 역시 다르지 않아서 우리나라의 모텔보다도 못한 호텔에서 며칠을 보내고 나니 삭신이 쑤시고 결린다며 엄살을 떨었다. 유럽의 물가가 오른 탓도 있겠지만 우리나라 원화의 국제 가격이 상대적으로 크게 떨어진 탓일 게다. 말하자면 우리나라의 경제 상황이 악화된 탓에 환율이 오르고 다른 나라에서 원화가 맥을 못 추는 것이리라. 이제 우리는 우리보다 성장률이 떨어지는 나라를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기 힘든 현실에 처한 것이다. 지난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눈 떠 보니 선진국'이라는 말이 크게 부담스럽지 않았는데 이제는 눈 떠 보니 후진국'이라는 말을 실감하고 있는 셈이다. 지도자를 잘못 뽑은 대가 치고는 너무나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게 아닌가.


고명재 시인의 산문집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부사는 부연하는 말에 불과하다고 말하곤 하죠. 하지만 그렇게 부차적인 말이나 부수적인 표현이 누군가에겐 목숨만큼 얻기 어려운 것이기도 해요. (그래서 저는 문장을 쓸 때 부사를 빼라는 문장가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지 않아요. 인생은 '너무'와 '정말' 사이에서 춤추는 일이니까요. 우리는 부차적인 것들 때문에 울고 웃으니까요.)"  (p.53)


'너무'와 '정말' 사이에서 춤추는 모든 이에게 이 나른한 오후에 '비타500'의 활력을 드리고 싶다. 마음으로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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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 쇼펜하우어 아포리즘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지음, 김욱 옮김 / 포레스트북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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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에 도둑눈이 조금 내렸다. 기척도 없이. 그렇게 내린 눈은 어느 중년 가장의 머리칼처럼 멀리 보이는 뒷산 풍경을 희끗희끗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바람이 불었다. 어느 중년 가장의 한숨처럼.


요즘 서점가에는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인기가 드높다. 도대체 왜?라고 묻는다면 나로서도 딱히 할 말이 없다. 왜 지금 시점에?라고 질문을 바꾸어 묻는다 해도 마찬가지이다. 차라리 쇼팽이나 쇼스타코비치라면 모르겠다. 클래식을 좋아하는 일정 부류의 사람들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라니. 여러 궁금증이 들지 않을 수 없었던 건 나에게만 국한되는 문제는 아니었던 듯하다. 몇 번 만나 이름만 겨우 아는 지인이 한민족이 원래 이렇게 철학적인 민족이었어?라고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을 해댈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것도 평일의 늦은 밤에. 앞뒤 맥락도 없이.


"세상에 진실한 것이 있을까. 진지하게 마주하고도 상처받지 않을 희망이 존재할 수 있을까. 세상은 그저 먼지 쌓인 침대와 같아서 인생은 눕기를 바라고, 잠들기를 바라고, 영원히 깨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 외에는 이렇다 할 소원도 없다. 사람을 자살로 이끄는 절망도 따지고 보면 찰나에 주어진 통증 같은 것이다."  (p.42)


시류에 편승하기 위한 방편으로 나는 쇼펜하우어 아포리즘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를 읽었다. 읽게 되었다거나 읽음에 처해졌다거나 읽어버렸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찌 보면 원하지도 않았던 책을 비자발적인 동기로 읽게 되었지만 책의 내용은 생각보다 좋았다. 철학자의 저서라고 해서 현학적인 말들로 가득 채워진 것도 아니요, 염세주의 철학자인 쇼펜하우어 본인의 사상에 비추어 볼 때 그의 글이 지극히 절망적이거나 딱딱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따금 보이는 위트와 유머는 왠지 모를 미소가 번지게 했다.


"젊은이들이여, 돈과 명예에 한 번뿐인 삶을 팔지 말라. 돈과 명예는 부도덕한 자들과 동행하지 않는 한 그대들을 반기지 않는다. 물질과 직위는 사람의 성품을 얕은 여울로 인도하는 사막의 물길임을 기억해야 한다."  (p.160)


글을 마무리 짓기 전에 앞에서 제기한 문제에 대한 나 나름의 답변을 해야 할 시점이 된 듯하다. 그렇다고 책을 통하여 완벽한 답변을 준비했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쇼펜하우어에 대해서 쥐뿔도 몰랐던 내가 이 책을 읽음으로써 조금이나마 그의 생각을 이해하게 되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굳이 나의 대답을 제시하는 까닭은 우리들 마음속으로만 간직했던 속내를 쇼펜하우어가 속 시원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친한 친구에게도 차마 말할 수 없었던 마음속 생각을 쇼펜하우어는 족집게처럼 쏙쏙 뽑아내어 거리낌 없이 쓰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체면 때문에 혹은 그렇지 않았으면 하는 희망으로 짐짓 안 그런 척 허세를 부렸던 우리로서는 쇼펜하우어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저 아프면서도 반가운 것이다.


"많은 재물을 소유한 자들, 사람 위에 군림하는 권력자들, 천국이 저희 것인 양 함부로 면죄부와 구원을 판매하는 목사들마저도 나이가 들면 그들이 누리는 권위와 명성보다 나이를 먹고 몸에서 빠져나간 혈기와 기운을 그리워한다. 천국이 가까워졌음에도 밤마다 욕정에 시달려 침상을 뒹굴던 수십 년 전의 보잘것없었던 자신을 그리워한다."  (p.55~p.56)


새해가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다. 많은 이들이 계획을 세웠을 테고, 어떤 이는 그 계획에 따라 지금까지 착실히 실천에 옮겼을 수도 있고, 어떤 이는 벌써 작심삼일을 실감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새해가 되면 많은 이들의 희망고문이자 계획인 부자 되기 프로젝트를 세운 이들은 어쩌면 쇼펜하우어로 인해 그 계획을 모두 지워버렸을지도 모르겠다. 허무맹랑하고 무모한 계획을 실천하느라 자신의 인생을 낭비하느니 오히려 실현 가능하고 즐거운 일에 매진하는 게 백 번 옳은 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터, 그것이 어쩌면 지하에 계신 '쇼' 선생을 기쁘게 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고 썼던 폴 발레리의 시구를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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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먼지로 감싸였던 도시의 표피를 한 겹 도려낸 듯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도시 상공에 걸렸습니다. 소한 추위는 꿔서라도 한다는데 그것도 옛말인 듯 겨울 햇살을 받은 대기는 온통 따사롭기만 합니다. 나는 안희연 시인의 시집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을 손에 들고 산책을 나섰습니다. 휴대폰도 자가용도 없던 먼 옛날의 기억이 다가옵니다. 외출을 할라치면 언제나 한두 권의 책이 필수품처럼 여겨지곤 했던 그닥 멀지 않았던 과거. 그 시절 학교 앞 서점에서 인기를 끌었던 책은 손에 쏙 들어가는 포켓북과 두께가 얇은 시집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어쩌면 책의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했던 까닭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가며 구입하던 한두 권의 책값도 지갑이 얇은 학생들에게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큰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천상병 시인의 시집을 생일 선물로 받았던 기억이 아슴아슴 떠오릅니다.


캐치볼

                    안희연

예고도 없이 날아들었다

불타는 공이었다


되돌려 보내려면 마음의 출처를 알아야 하는데

어디에도 투수는 보이지 않고


언제부터 내 손엔 글러브가 끼워져 있었을까

벗을 수 없어 몸이 되어버린 것들을 생각한다


알 수 없겠지 이 모든 순서와 이유들

망치를 들고 있으면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이는 법이니까


나에게 다정해지려는 노력을 멈춘 적 없었음에도

언제나 폐허가 되어야만 거기 집이 있었음을 알았다


그래서 왔을 것이다

불행을 막기 위해 더 큰 불행을 불러내는 주술사처럼

뭐든 미리 불태우려고

미리 아프려고


내 마음 던진 공을

내가 받으며 노는 시간


그래도 가끔은

지평선의 고독을 이해할 수 있다


불타는 공이 날아왔다는 것은

불에 탈 무언가가 남아 있다는 뜻이다

나는 글러브를 단단히 조인다


잔디밭 벤치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의 밝은 표정을 감상합니다. 저마다의 표정은 한 편의 시처럼 아름답습니다. 꼬닥꼬닥 마른 나뭇잎이 비행을 하듯 날아와 내 발치에 떨어집니다. 쏟아지는 졸음에 가져갔던 시집은 채 펼쳐보지도 못한 채 가방에 넣고 말았습니다. 동글동글한 아이들 웃음소리가 비탈을 굴러 저 멀리 달아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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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정지아 지음 / 마이디어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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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술을 못 마신다. 불행하게도 내 몸에는 알코올을 분해할  때 생성되는 아세트 알데하이드를 제거하는 효소가 전혀 없거나 있더라도 타인에 비해 대단히 적다는 것이다. 내가 술을 해독하는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인지했던 건 대학에 입학한 후였다. 술을 조금만 마셔도 온몸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속이 거북해서 토하기 일쑤였다. 그런 나를 보고 선배들은 자꾸 마시다 보면 술도 늘고 그런 증상도 사라질 거라며 위로와 함께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그러나 선배들의 진심 어린 조언에도 불구하고 나의 체질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술은 입에도 대지 못하면서 어쩌다 참석한 술자리에선 언제나 술에 취한 이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고단한 일과를 보내곤 한다. 대학시절부터 지금까지 '차라리 내가 마시고 취하는 게 낫겠다.'는 푸념을 넋두리처럼 내뱉으면서 말이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로 일약 스타 작가가 된 정지아의 에세이집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는 나와 같은 특이 체질의 사람들에겐 그저 대리만족의 경험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술에 얽힌 작가의 잡다한 경험을 풀어놓은 이 책이 그닥 부담스럽지 않았던 건 왜일까. 그것은 아마도 작가의 너스레와 솔직함에 있지 않을까 싶다. 틀에 박힌 유교적 사고방식의 굴레에서 성장했을 성싶은 그녀가 '여자'라는 불리한 조건하에서도 그처럼 다양한 사람들과의 음주 문화를 즐길 수 있었다는 사실이 잘 믿기지 않지만 그럴 수 있었던 건 아마도 남녀평등을 신념으로 삼았던 빨치산 아버지를 둔 덕분이 아니었을까.


"내가 이런 이야기를 엄마가 아니라 아빠에게 한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 엄마는 남녀평등을 원해서 사회주의자가 되었지만, 당신 딸을 대하는 마음은 여느 엄마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남자애들과 밤을 새워 논다는 걸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반면 아빠는 진정한 평등주의자였다!"  (p.22)


소문난 애주가이자 자칭 시티걸이었음을 강조하는 작가는 해가 짧은 구례의 산간 마을에서 고양이 네 마리와 두 마리의 개, 그리고 100세에 가까운 어머니와 함께 산다고 했다. 한적하고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고 있을 듯한 풍경이지만 그녀의 집에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지리산의 눈에 담을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이 술을 부르고, 혼자 취할 수 없는 기나긴 밤이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술 한 잔에 녹아든 옛 시절의 추억과 사람들. 고향에서, 수배길에서, 강단에서, 먼 이국에서...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소주를 숟가락으로 떠 계란에 붇던, 큰아버지의 그 조심스런 손길이 그립다. 어쩌면 인생이란 그렇게 속절없는 게 아닐까. 무슨 일로 심사 복잡한 날이면 고립된 우주 같던 큰아버지의 방이 떠오르고, 큰아버지에게 술 한잔 대접하지 못한 게 마음에 얹히고, 위스키가 아닌 소주가 그리워진다. 위스키로는 달래지지 않는, 소주로밖에는 달랠 수 없는 어떤 슬픔이, 우리 민족에게는 있는 모양이다."  (p.106)


별것도 아닌 이야기들을 읽으면서도 책에서 손을 떼지 못했던 것은 아마도 술보다는 그녀의 인생 이야기에 끌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깨트릴 수 없는 벽에 잔금을 내고 종국에는 이성으로 통제할 수 없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서로가 확인할 수 있는, 마법과 같은 음료가 술 아니겠는가.


"나에게도 찬란한 젊음의 시절이 있기야 했겠지. 그때의 나는 몸 따위 돌아보지 않았다. 몸 따위, 하찮았다. 정신은 고결한 것, 육체는 하찮은 것. 그래서 육체의 욕망에 굴복하는 모든 행위를 혐오했다. 혐오라니. 몸이 있어 존재하는 것인데. 젊은 나는 참으로 하찮았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하찮게 천대해왔던 불쌍한 나의 몸에게 블루를, 귀하디귀한 블루를 아낌없이 제공했다. 아름다운 육체가, 찬란한 젊음이 펼쳐보이는 어느 여름날의 천국에서."  (p.262~p.263)


누군가에게 술은 고단한 삶을 견디게 하는 위로와 희망의 손길이 되기도 하고, 또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도록 하는 마법의 양탄자가 되기도 한다. 녹록지 않은 현실,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 견딜 수 없는 삶의 고통으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나 다리를 뻗고 편안히 쉴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술이 우리에게 주는 크나큰 혜택일지도 모른다. 사회주의자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늦둥이 딸로 태어나 독재정권으로부터 늘 감시의 대상이 되었던 작가가 술을 매개로 좋은 사람들과의 연대를 꿈꿀 수밖에 없었던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귀결이었을 터, 그에 얽힌 질펀한 이야기들이 이보다 훨씬 더 많지 않았을까 싶다.


갑진년 새해 첫 주가 포근한 날씨 속에서의 진득한 미세먼지처럼 몽롱하게 흩어지고 있다. 술도 마시지 못하는 내게 한잔 하라고 권하는 듯 말이다. 나를 위로하는 누군가에게 건배를 청하고 싶은 밤. 그렇게 2024년의 첫 주가 미끄러지듯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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