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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언덕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289
에밀리 브론테 지음, 전승희 옮김 / 열린책들 / 2024년 4월
평점 :

1818년 영국에서 태어난 에밀리 브론테는 제인 에어로 유명한 살럿 브론테의 친동생입니다. 그녀가 채 두 살이 되기도 전에 가족이 한 시골에 이사하여 정착하게 되는데 이 시골 마을이 폭풍의 언덕에 영감을 주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문학에 조예가 깊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에밀리를 비롯한 자녀들도 문학에 재능을 보입니다. 자매들이 함께 시집을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훌륭한 문학적 재능이 아깝게도 서른살의 젊은 나이게 폐결핵으로 세상을 일찍 떠났습니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그녀가 남긴 작품은 많지 않습니다. 폭풍의 언덕은 1947년에 출간된 유일한 소설입니다. 역시 같은 해에 출간 된 언니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가 출간과 동시에 호평을 받은 것과는 달리 폭풍의 언덕은 그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한 안타까운 작가입니다. 얼마 전 오랜만에 영화를 다시 보았는데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번잡한 도시에 살던 록우드는 전원생활에 대한 그리움으로 히스클리프라는 사람의 소유인 워터링 하이츠 집에 방문한 록우드는 그가 상당히 예민하고 불친절한 성격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가 청상과부가 된 캐시, 헤어턴 언쇼라는 청년과 사는데 이들 사이의 관계는 원수나 다름없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록우드는 자신이 세들어 가게 된 티티새 지나는 농원의 하녀장인 엘렌에게서 그들의 옛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현재 이스클리프가 살고 있는 폭풍의 언덕이라는 이름의 저택은 과거에 언쇼 가문의 소유였고 언쇼 집안에는 힌들리와 캐서린이라는 남매가 있었고 린턴 집안에는 에드가와 이사벨라라는 남매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언쇼 씨는 여행을 다녀오는 길에 고아 소년을 데리고 오는데 바로 그가 히스클리프였습니다. 그는 가족들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히스클리프를 양육합니다. 힌들리는 특히 그를 싫어 했지만 캐서린은 그와 친구가 됩니다. 언쇼 집안과 교류하던 린턴 집안의 에드가와 이사벨라는 힌들러처럼 히스클리프를 무시하면서 냉대합니다. 이소클리프의 경우 어려서 버림받은 기억 때문이었는지 자기를 잘 대해주는 캐서린 외 모든 사람들을 싫어하죠. 시간이 흘러 힌들러는 대학에 진학해 결혼을 하고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은 점점 더 가까워집니다. 그러다 언쇼씨가 죽으면서 상황은 크게 달라집니다.

이 작품에서 구제불능의 악역을 담당한 히스클리흐는 집착과 복수심이 만들어낸 괴물이었습니다. 그는 캐서린에게 지나치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그애 (캐서린)가 정말로 나를 잊는다면 내 앞날은 죽음과 지옥이라는 두 마디로 끝나.”
라는 그의 말은 그 집착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친부모에게 버려지고 힌들리와 린천 남매의 경멸로 인해 그의 마음속 깊게 남겨진 상처는 자신에게 유일하게 호감을 보인 캐서린에게 집착하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는 자신에게 모욕감을 준 언쇼 집안과 린턴 집안에 대한 뿌리깊은 복수심이 있었죠. 결국 히스클리프에게는 캐서린에 대한 집착과 두 집안에 대한 복수심 외엔 아무것도 남지 않은 괴물이 되었습니다. 복수에 성공한 히스클리프는 과연 행복했을까요. 복수라는 부정적 감정에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소모한 히스클리프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었을 겁니다. 정신질환을 앓고 극심한 허무감에 빠진 그의 모습이 이를 증명해 줍니다. 부정적인 감정에 자신을 소모하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작품은 잘 보여줍니다.
우리는 스스로 객관적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자기가 보고 싶은대로 다른 사람을 주관적으로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작품 속에서 히스클리프를 바라보는 캐시딘과 이사벨라의 관점을 통해 이를 알 수 있습니다. 캐서린의 경우 그에게 호감을 가지고는 있지만 있는 그대로의 그를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캐서린에게 자기 뜻을 따라주고 기분을 맞워주는 사람이 필요했고 그녀가 보기에 히스클리프가 그런 존재였습니다. 그녀는 자신만의 히스클리프를 상상하여 만들어 갑니다.
“그래 됐어! 저 애는 나의 히스클리프가 아니야. 난 나의 히스클리프만 사랑할거야.” 라는 그녀의 말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한편 이사벨라에게 있어서 히스클리프는 자신에게무한히 헌신해 줄 기사였죠. “나를 로맨스의 남자 주인공이라고 상상하고 내가 기사도를 발휘해 무한히 헌신해주길 기대했던거야.” 라는 히스클리프의 말이 이를 보여줍니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원하는 모습을 일방적으로 투영하면 결국 관계는 망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비애가 아닌가 싶습니다.
히스클리프와 결혼하고 나서 후회한 이사벨라는 엘렌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런 질문을 하죠. “엘렌은 이 곳에 살면서 어떻게 인간의 보편적인 감성을 간직할 수 있었어?” 그녀가 보이게 힌들리와 히스클리프가 살고 있는 폭풍의 언덕이라는 가정환경에서는 정상적인 성장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가하면 히스클리프는 힌들 리가 죽은 푸에 그 아들인 헤어턴을 맡으면서 이렇게 중엉거립니다. “바람이 휘몰아치는데 굽은 나무가 있고 안 굽은 나무가 있는지 두고 보자!” 한마디로 히스클리프는 자기가 그랬듯이 불우한 가정환경이라는 바람 앞에서는 그 누구도 곧게 자랄 수 없을 것이라 단정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헤어턴 언쇼가 보여줍니다.
처음에 그는 히스클리프가 예상한대로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거칠게 자라 나지만 청년이 되고 나서는 배움에 대한 의욕과 갱생의 의지를 보여줍니다. 히스클리프의 방해와 캐시의 비웃음도 그에게는 장애가 되지 못하죠. 결국 그는 불우한 가정환경이라는 바람 앞에서도 곧게 자라납니다. 불우한 환경앞에서 굽어버린 히스클리프를 보면서 성장환경 앞에서 무기력한 인간의 모습을 보게 되지만 비슷한 환경에서 그것을 이겨내는 헤어턴을 보면서 희망을 가지게 되죠. 이것이 헤어턴이 이 작품 속에서 가지는 가치인 것 같습니다. 영문학 3대 비극으로 알려진 요크셔의 황야를 무대로 펼쳐지는 거칠고 악마적인 격정과 증오 고아 히스클리프와 그 집 딸 캐서린 언쇼의 운명적이고 불운한 사랑이 영화화 되기도 한 작품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