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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복의 길 - 제2차 세계대전 종식을 향한 카운트다운
에번 토머스 지음, 조행복 옮김 / 까치 / 2024년 8월
평점 :
1951년 미국 뉴욕 주의 서퍽 카운티의 헌팅턴에서 태어난, 에번 토머스는 유년 시절 대부분을 헌팅턴 인근의 콜드 스프링 하버에서 보내게 됩니다. 이후 그는 미국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 인근의 앤도버에 위치한 사립 남녀 대학 진학 예비 학교인 필립스 아카데미를 거쳐, 하버드 대학, 그리고 최종적으로 버지니아 대학의 로스쿨을 졸업합니다. 그는 변호사 자격을 갖고 있었음에도 1991년부터 24년 동안 뉴스 위크에서 기자, 작가, 편집자로 경력을 쌓게 됩니다. 그의 기자 경력은 뉴저지 북동부에 있는 더 버겐 레코드 The Bergen Record 에서 시작했습니다. 여기에 그의 경력과 관련해, 특별했던 경험은, 1992년 당시 국방부 장관이었던 로버트 게이츠가 에반 토마스에게 CIA의 기밀 파일을 볼 수 있는 역사적 접근 권한을 부여했던 일입니다. 특별한 작가 경력을 더한, 그는 2003년부터 2014년까지 하버드와 프린스턴에서 글쓰기와 저널리즘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특히 작가로서의 이력으로 두 권의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를 포함한, 도합 11권의 단행본을 출판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Road to Surrender : Three Men and the Countdown to the End of World War 2"로 2023년에 출간 되었고, 국내에는 2024년 8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이미 원제에도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듯이 에번 토머스에 이 글은, 지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최종적으로 일본 제국이 연합국에 항복하는 1945년 8월까지의 서사를 담고 있습니다. 특히, 당시 미국 전쟁 장관이었던 헨리 L. 스팀슨과 미국 육군 항공대 태평양 전략폭격 사령부 사령관인 칼 앤드루 스파츠, 그리고 일본 제국 외무대신인 도고 시게노리, 이 3인의 행적을 통해, 일본이 종전에 이르는 길을 마찬가지로 짚어나가고 있습니다. 또한, 여기에는 이미 인류 역사에서 참혹한 무기로 드러난 '맨해탄 프로젝트'의 코드명, S-1인 '원자 폭탄'과 이 인류 절멸의 폭탄이 어떻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되었는지, 그 정치적 과정에 대해 상세히 서술되고 있었습니다. 이에 저자인 토마스는 앞선 스팀슨과 스파츠의 일기와 비망록을 비롯, 개인 기록을 검토했고, 일본 쪽 자료 역시 세밀하게 분석해, 작금의 이 책을 출판하기에 이릅니다.
인류 최악의 대공황과 이후 두번째 세계 대전의 한복판에 서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매우 정력적인 인물로 그의 지지 기반인 뉴딜주의자들과 다수 시민들에게 존경을 받던 대통령이었지만, 종전을 바로 앞두고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런 초당적 지지를 받았던 민주당 출신의 연방 대통령과는 달리 정치적으로 보수적이고 개인적으로도 귀족적 풍모와 자부심을 풍기고 있던 헨리 L. 스팀슨은 오늘날 공화당 정치인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도덕적 기준을 갖고 있던 인물입니다. 물론 개인적 능력이야 말할 것도 없이 그는 뛰어난 엘리트이기도 했는데요. 저자인 에반 토마스가 분석한 스팀슨의 개인 기록이기도 했지만 당시 전쟁 장관이었던 그는 전쟁 상황에서 아이들과 여자들이 포함된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반대를 표명했던 관료였습니다. 특히 스팀슨은 무고한 민간인 2만명 이상이 희생된 드레스덴 폭격의 효과에 크게 확신하지 못했던 것처럼, 앞으로 전쟁을 마무리 짓게 될 신임 대통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신뢰하지 못했는데요. 개인적으로는 저자에 의해 밝혀진,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에 대한 그간 알려지지 않은 모습(정치적, 개인적 면모를 포함한)은 쉬이 믿겨지지가 않았습니다. 트루먼은 민주당의 대중 영합주의자이자 열렬한 뉴딜주의자였던 동시에, 스팀슨에 따르면, "골칫거리이자 신뢰하기 꽤 어려운 사람"이라고 평가를 받는데요. 또한, 이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각자가 어느 정도 서로를 존중하지만 그 이면에 서로를 향해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고 기록됩니다. 이는 스팀슨이 함께 일했던 전임 대통령인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짙은 그림자가 여전히 직간접적으로 그에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일 수도 있겠습니다.
신임 대통령인 트루먼은 제임스 F. 번즈 전 국무장관과는 막역한 사이로 그와 포커를 치며, 사적인 문제 혹은 정치적 의견까지 나누며, 특히 번즈의 조언은 그가 꽤 귀담아 들었던 것으로 나옵니다. 그러다 포츠담 회담 중에 번즈가 트루먼과 스팀슨 사이를 사실상 방해했다는 풍문은 이들 간의 개인적 호불호 관계를 넘어서 꽤 심각한 문제였던 것으로 보이는데요. 더욱이 트루먼 개인은 청렴했고 돈에 있어 상당히 거리를 두었지만, 캔자스 정치에 오랫동안 몸담은 그가 돈과 이권이 거래되는 상황에 적당히 모른 척 넘어가기도 했던 처세술의 달인이었습니다. 이는 과거 프랑스 혁명 당시, '절대 부패할 수 없는 자'로 알려졌던 막시밀리앙 로비에스피에르가 타인의 이익 추구와 권력 욕구에 대해 무지했던 것과는 달리, 이 신임 대통령은 그런 면에서 닳고 닳은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예나 지금이나 기존 정치 무대는 교육을 받았거나 그렇지 않든 간에, 사람을 그런 식으로 통달하게 만드는 구조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다만, 트루먼 입장에서 스팀슨이 뉴딜주의자를 그닥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점을 애초에 느끼고 있었고, 공화당 출신의 귀족적인 변호사이자 도덕 원칙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던 스팀슨이라는 겸허한 인사에 대해 조심스러웠던 모양입니다. 특히 전쟁 종식과 관련해 부득이한 민간인 살상에 있어 두 사람의 근본적인 도덕적 접근 방식 차이에 대해서도 말입니다. 이에 스팀슨은 핵폭탄을 투하하게 될 그 전후 시점의 미국, 그리고 그런 미국의 "도덕적 위치"에 무척이나 고민하게 됩니다.
트루먼 대통령에게 누군가 원자 폭탄이 초래할 수많은 인명 피해의 정확한 수치를 제시했는지는 불명확하지만 한동안 이 신임 대통령에까지 프로젝트는 기밀 사항이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물론 나중에는 트루먼 대통령도 "그 계획"에 대해 인지하게 되지만 말입니다. 당시 미군은 이오지마와 오키나와에 있었던 일본군이 강제로 투입시킨 민간인들과 함께 벌인 처참한 자살 작전에 따른, 극심한 인명 피해로 그 여파가 정치권을 포함한 군부 모두에게 향하게 됩니다. 이러한 자살 작전은 유럽에서는 결코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앞으로 발생할 수 있는 "20여 개의 이오지마와 오키나와 전투들"이라는 본문에서 인용된 스팀슨의 우려스런 시나리오와 맞물려 있었는데요. 마찬가지로 당시 일본 군부가 일왕을 위해, 1억명의 일본 국민들이 미군에 맞서 옥쇄한다는 그 '일억옥쇄 一億玉碎' 저항론이 일본 군부의 허장성세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일왕을 위해 한 목숨을 다 바치겠다"는 자살 특공대를 고려해 본다면 상상 만으로 끔찍한 사항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연유로 일본을 빨리 종전 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해, 앞선 S-1의 일본 내 투하가 고려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스팀슨 역시, 시급한 종전과 더이상 불필요한 미군의 인명 피해를 줄이기 위해, 어느 정도 민간이 희생이 초래될 수 없는 핵폭탄 사용에 대한 잠정적 동의를 하게 됩니다. 그가 매번 미국의 도덕적 위치를 고민하고 그 내적 갈등에 힘들어 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과거 부계의 뿌리가 조선에 있었던 일본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는 임진왜란 당시, 강제로 끌려간 조선의 도공들의 후예이기도 합니다. 저자인 에번 토머스는 그런 그의 가계까지 조사해 기록하고 있었는데요. 이런 집안의 내력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토머스는 도고를 향해, "일본인들과 다른 성향을 지닌 인물"로 그를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도고는 대학에서 독일 철학을 공부했고, 괴테와 쉴러, 유럽의 고급문화에 관한 토론을 즐기기도 했는데요. 특히 그는 공공연히 히틀러의 나치를 악당이라 말하고 다니기까지 했습니다. 자신의 의견을 직접적으로 피력하는 것을 상당히 꺼려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그는 유별난 인물이었습니다. 당시 일본 제국은 일왕을 필두로 한, 신도神道 체제와 이를 떠받치는 군부가 우선되는 소위, 이런 국체國體의 보존이 지상 목표로 여겨지고 있던 국가였습니다. 즉, 일왕은 일본인들에게 그 자체로 신적인 존귀한 존재로 과거 야마토 문명의 적손이자 그리고 승계된 전통적 체제는 메이지 유신의 더할나위 없는 정치적 유산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 국체를 나름대로 분석하는 미국 언론인의 시각이 꽤 인상 깊었는데요. 사실상 일왕이 군부의 꼭두각시였다는 점과 일왕 히로히토에게 더할 나위 없는 충성을 보이고 있던 일본 군부 전체가 실상은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신적인 관념의 일왕제와 히로히토, 이 양자가 필수불가결한 공생관계였다는 저자의 본질을 꿰뚫은 관점이었습니다.
이런 일본 내부의 정치는 정치와 군부, 주요 인사 6인으로 구성된, 총체적 권력의 '6인 회의' 였는데요. 이들의 정치적 기반은 매번 발생했던 고질적인 우익의 물리적 폭력과 군 내부에서 수차례 시도된 쿠데타 음모로, 정치적 구조에서의 정상적인 권력 체제가 아니라, 최소한의 군부 통제도 이뤄지지 않는 모순을 안고 있었습니다. 앞선 '6인'이 일왕의 성스러운 결단을 바탕으로 그 권력을 대행하는 정당한 권력이었는지는 정치 역학적인 면에서 다소 불명확하지만 이러한 불안정한 권력 체제의 기원은 메이지 유신 과정에서 역력히 드러난, 그 특유 일본인들의 왜곡된 심상과 과거 쇼군 체제에서 비롯된 비상식적인 '숭무'는 결국 사회 전체를 왜곡하는데 일조합니다. 이런 정치 체제의 모순은 일왕을 신격화하고 그런 맹신의 신도 체제가 군부의 야욕을 제어하지 못하고, 특히나 민간의 군부 통제를 가능하지 않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1945년 8월 8일, 히로히토의 내각이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당시 소련과의 중립 조약 유지에 모든 외교적 수단을 기울였다가, 스탈린이 만주로의 진격 결정을 그저 눈뜨고 보고만 있었던 이들의 무능은 이처럼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저는 이 책에서 아주 숱하게 등장하는 '일본인의 정신'이 패전을 앞둔 현실을 깡그리 무시하고, 1억 명의 일본인들을 분사시키더라도, 자신들의 국체를 수호하는 일에만 국한하는 일방적인 정신의 수립,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느껴졌습니다.
외무대신이었던 도고 시게노리가 자신이 모시던 일왕 히로히토의 인간적 본성을 간파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개 개인으로서' 히로히토는 군부의 과격분자들이 점차 소름끼치게 되었고, 도쿄에 미 공군의 소이탄이 쏟아질 때마다 자신이 이대로 죽는 것이 아닌가 걱정하는 평범한 인간이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자신을 옥죄는 그 극명한 정체성, 즉 이대로 계속 군부의 손아귀에 놓일 수밖에 없다는 자괴감과 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자신은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는 참담한 심정은 에번 토머스의 입으로 재차 설명되기도 했습니다. 전쟁이 그렇게 마무리되고 여전히 일왕의 위에 있던 히로히토는 1975년 10월, 미국을 방문했고, 태평양 전쟁 당시 해군으로 복무한 제럴드 포드 대통령의 극진한 대우를 받게 됩니다. 이 때 히로히토는 자신의 입으로, 미국과의 "영원한 우애"를 밝히기도 했는데요. 이러한 그의 제스처와 몹시 상반되게도 1978년에 A급 전범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전시 정부 지도자 14명의 이름이 도쿄의 야스쿠니 신사에 명예로운 전사자로 추가되었음을 히로히토는 알게 되지만 이 전대 일왕은 결코 다시는 야스쿠니 신사를 찾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그동안 신문지상으로 익히 접하고 있었던, "일왕은 평화를 사랑하는 자답게, 전범들의 위패가 놓여 있는 야스쿠니에 참배를 할 수 없었다"가 진면목이 아니라, 그저 치욕스런 패전의 기억과 결국엔 십 수 년간 자신을 손아귀에 넣고 흔든, 그 시절 지독한 군부 통치의 기억과 그런 체제에 자신이 일조했다는 '묻힌 기억'을 다시는 떠올리기 싶지 않았을 겁니다. 이런 평화를 사랑한 일왕의 본질이라는 측면은, 마찬가지로 대전을 면밀히 고찰한 미국인의 시각으로 봤을 때, 사실상 역겨운 일왕의 맨얼굴을 직접 대면하게 되었을 겁니다.
군부와 내각을 설득하여 최종적으로 일본을 종전으로 나아가게 만들겠다는 도고 시게노리의 의지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최종적으로 S-1의 사용을 전쟁 수뇌부가 결정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투하 지점의 후보지로 일본의 옛 고토였던 '교토'가 고려되기도 했지만 스팀슨의 강력한 반대로 철회되는데요. 그는 교토가 일본에게 갖는 상징적인 의미와 옛스런 건물들과 문화가 있던 도시를 파괴하는 것에 양심상 탐탁치 않아 했던 것 같습니다. 더욱이 일왕의 궁이 있던 도쿄는 이미 막대한 소이탄 투하로 온전한 건물이 몇 채, 남아 있지 않은 폐허지가 되었기에, 군수 공장이나 군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다른 도시들을 미 군부에서는 고려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는 현지의 기상 조건도 함께 포함된 내용이기도 한데요. 하지만 칼 스파츠는 방사능 폭탄의 투하를 민가나 민간인이 집중되어 있지 않은 도시 외곽의 한 지점으로 삼고 일종의 경고성 투하를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미국 군부는 국내 여론에 있어 강한 종전 요구를 압박 받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전문가들로부터 민간인 희생이 대략 3만 내외로 추정된다는 보고서로 끝내 군부는 신무기인 '핵폭탄 투하'를 사실상 불가피한 일로 만듭니다. 또한, 두 기의 핵폭탄 투하 이후에도 일본이 항복의 제스처를 즉각적으로 보이지 않아 세번째 폭탄의 조립도 이미 승인이 되었던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앞으로 있지도 모를 규슈를 비롯한 일본 본토에 군이 상륙하게 되어 초래될 수많은 병사들의 희생 가능성을 인식한 미국 정부는 사실상 전쟁을 끝내기 위해, 모든 수단을 고려할 수밖에 없던 상화이었음은 분명합니다. 앞서 언급하기도 했지만 이오지마와 오키나와의 결전에서 초래된 막대한 미군의 인명피해가 여전히 이들 군 수뇌부의 머리 한 쪽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앞선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의 행적을 통해, 빠른 종전의 방해자로 해석되는 육군대신 이나미 고레치카는 과거 일본의 군사 교육을 받은 초창기 우리 군 장성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끼친 인물이기도 합니다. 일왕에 대한 사적인 깊은 충성심은 차치하더라도 육군 내부의 신망이 두터웠음에도 불구하고 '하라게이'라는 과거 유산의 신봉자이자, 실제적으로 중대한 위기 앞에 우유부단했던 인물입니다. 히로시마에 이어 나가사키에 최소 10만이 넘는 인명 피해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본심이 어떻든 간에, 군부에 총력전을 부르짖습니다. 저자인 에번 토머스는 과거 젊은 장교들에 의한 군사 쿠데타에 대한 두려움을 이나미가 갖고 있었는지는 명확히 설명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어찌됐든 여기에 그려지는 일본 군부의 내부 분위기를 짐작해 봤을 때, 실질적으로 군부내 다수 강경파들을 통제하기는 어려웠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럼에도 이 책의 말미에 저자는 사실상 이나미가 '자신의 총아'라고 불리는 하타나가 겐지의 쿠데타 기도를 조장한 것이 아닌가 예측하고 있었는데요. 그는 일왕의 충심에 배반했다는 이유로 할복으로 생을 마감하지만 자신들이 강조하는 군부의 대의는 일왕을 정점으로, 종교 및 정치적으로 구축한 체제에 대한 종말을 용인하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국체의 핵심인 일왕이 미군이 주축이 된 연합군 사령관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항복을 한다는 게, 자신들의 영광스런 일본 제국에게 있어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문제였을 겁니다. 현실을 아득히 넘어서는 왜곡된 관념이란 바로 이것을 뜻하는 것이겠죠.
우리는 정규 교육 과정을 통해, 일본이 두 발의 원자 폭탄 투하를 맞고 USS 미주리 호에서 항복 문저에 서명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친미 국가인 우리 나라에게 이 '미국의 결단'과 그것이 초래한 국제정치적 영향에 대해, 진실을 위한 본질적 접근을 해보는 것이 그동안 어려웠던 점은 분명합니다. 두 기의 핵폭탄 투하가 초래한 정치적 파급의 문제도 종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겠지만, 1945년 8월 초까지 일본 외교력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소련의 참전을 막고자 했던 시도가 무산되어, 만주가 고스란히 소련군의 진공에 놓인 점도 역시, 일본 지도부의 종전 결정에 영향을 끼쳤던 것을 아마 부정할 수는 없을 겁니다. 특히 스탈린이 실질적으로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간에 (이미 그리스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일본의 분할 점령 시도는 미국이 쉽게 용인할 수 없는 문제였을 겁니다. 이미 새롭게 권력을 이어받은 해리 트루먼에게 스탈린은 점차 대화를 나눌 수 없는 상대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정치적 신화처럼 트루먼이 스스로의 정치적 각성을 통해, 1945년 이후의 국제 질서를 가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동맹국이었던 불확실한 소련의 정치 권력이 남은 임기 내내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이 농후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퇴임을 앞둔 스팀슨이 비망록을 통해 밝힌, 트루먼 대통령에게 핵폭탄의 기술을 소련과 공유하자는 발상 자체는 공화당 보수주의자에게는 흔히 볼 수 없는 면모이기도 했습니다.
끝으로 저는 이 책을 통해 무엇보다, 일본 극우의 뿌리가 어디에서 시작되어,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 나가고 있는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는데요. 그만큼 메이지 유신의 그 맹목적 아이디어는 단순히 교묘히 숨겨 놓은 개혁의 이미지가 아니라, 예전처럼 다수 국민들을 다스려야 할 대상으로 두고 전국 시대에 특수 계층으로 군림했던 사무라이 지배 체제의 그 단순하고 폭력적 기반에 저들이 매료된 근본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작금의 일본 정치의 전통적 근원이 바로 이러한 정치적 매커니즘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보게 되는데요. 바로 그렇기에 일본 극우와 현실 정치권이 매우 지근거리에서 서로에게 야합하게 되는, '고래로 이어진 동질감'은 민주주의 체제 안의 지지층과 정치권이라는 단순한 양자 관계로 치부할 수는 없겠습니다. 이런 진술 가운데 상당히 놀라웠던 부분은 그 당시에도 미국 정치권이 이런 일본 내부를 여실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는 점인데요. '국체의 보존'이라는 미끼로 일본의 항복을 요구하는 그 과정 자체가 미국에서 이러한 문제를 잘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여기에 과거 일본 제국이 추동한 대동아 공영을 이유로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 각지의 인명 피해가 2천만이나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투하된 핵폭탄 두 기로 말미암아 자신들을 심지어 '피해자'로 인식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더욱이 그 참혹한 전쟁의 수괴라고 볼 수 있는 히로히토가 아무런 법적 처벌을 받지 않고 천수를 누린 그 '종전의 결과'가 단순히 미국의 지정학적 이익에 기반한 문제로 쉽게 치환될 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지금의 일본인들에게는 1945년 8월 15일 이전의 역사가 그만큼 자신들 입에 담을 수 없는 문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겉으로 드러난 것과는 달리, 일본인들의 민도民度는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기까지 합니다. 역사를 배반하는 식의 아주 비극적으로 말이죠.
-저자인 에번 토머스는 자신의 이 논저를 통해, 과거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핵폭탄의 실사용에 대해 불길해 하고 심지어 반대 의사를 표시했으면서도 그가 임기 내에 사실상 초안한, MAD Mutual Assured Destructrion, 즉 핵무기에 의한 상호 확증 파괴를 확립한 인물로 분석되고 있었는데요. 이처럼 정치인의 도덕적 근원과 그것을 이해하는 방식 자체는 버틀란드 러셀의 언급대로. 어쩌면 "인간의 역사와 투쟁해야 하는 문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에서 처음 접하게 된 내용이지만, 일본도 전쟁 중에 핵폭탄을 제조하려고 어느 정도 시도했던 것으로 밝혀집니다.

실제로 트루먼 대통령은 8월 14일 늦은 오후 (일본 날짜로는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기 불과 몇 시간 전에, 도쿄에 세 번째 핵폭탄을 투하할 수밖에 없다고 동맹국인 영국에 전했다.
75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뒤에도 히로히토 천황은 그를 신으로 숭배하는 궁정 신하들에 의해서 장막에 가려진 채로 여전히 불가사의한 인물로 남아 있다.
존 매클로이는 나중에 상관(스팀슨)이 핵폭탄을 어떻게 생각했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매클로이는 이렇게 답한다. "무릎을 꿇고 있었다."
"예의 그 잔학행위는 독일 정부가 살인과 질식 등 사람을 죽이는 방법으로 수많은 러시아인과 폴라드인, 유대인, 기타 그들이 보기에는 살 가치가 없는 집단을 몰살하려는 의도적이고 체계적인 시도를 보여주었다."
스팀슨은 그로브스에게 교토의 세월을 뛰어넘는 찬란함을 다소 상세히 설명한다.
어쨌거나 소련은 나치의 지배에서 막 해방된 폴란드에 민주주의를 허용하겠다는 얄타 회담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버리고 꼭두각시 국가를 만들고 있다.
그로부터 25년도 더 지난 1945년 7월, 대통령직을 수행한 지 3개월째에 덥어들 때 트루먼은 오키나와 섬의 치열한 전투로 인한 미군의 사상자 숫자에 소름이 끼친다.
중간급 장교들이 혈맹단 따위의 이름으로, 주로 대령이 중심이 된 비밀 결사를 만들고는 일본에 봉건 시대의 영향을 되찾아주려는 자신들의 고귀한 노력에 걸림돌이 되는 자라면 누구든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그(아나미)는 정신적인 순수함에 관한 격언을 들먹이며, 손에 잡히지 않는 지정학을 논하느니 차라리 죽도를 들고 싸우는 편이 낫다고 말한다.
차를 타고 뼈대만 남은 베를린을 둘러보고 얼빠진 생존자들을 목격한 스팀슨은 핵폭탄이 일본의 도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의구심이 든다.
실제로 트루먼과 마셜은 소련이 너무 많은 영토, 즉 만주와 한국, 어쩌면 일본 북단의 홋카이도까지 집어삼키기 전에 일본에 항복을 강요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웰러스틴의 주장에 따르면, 전쟁부 장관이 너무도 강경하게 교토가 민간인 거주지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그곳과는 달리 히로시마는 "순수하게 군사적인"표적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트루먼이 가지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미국이 핵폭탄을 사용하는 최초의 국가가 되는 것을 내키지 않아하던 아이젠하워의 태도는 스팀슨의 심기를 건드렸을 것이다.
크렘린의 스탈린은 몰로토프가 사토 대사를 만나 고노에 공작의 강화 임무를 논의하기로 한 시간인 8월 8일에 일본이 점령한 만주를 침공하라고 명령한다.
영국은 주간에 군사 시설과 산업 시설의 표적에 마구잡이로 폭격하는 방식을 그만두고 자신들처럼 야간에 "구역폭격", 즉 "주택 파괴"에 나서서 독일군의 사기를 꺾자고 미국에 집요하게 권했다.
스파츠는 아널드에게 자신은 민간인의 대량 살상을 초래하는 도시 폭격에 반대한다고, 늘 반대해왔다고 말했다.
가와베 장군은 일본이 핵폭탄을 제조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을 했으나 너무도 어렵고 오랜 시간이 걸려서 포기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도고는 현실주의자이기 때문에 포츠담 선언의 수용에 조건을 내거는 것이 애초에 가망 없는 짓이며 미국이 즉각 이를 거부하리라는 점을 알고 있다.
트루먼의 기본적인 준거는 친절한 신사의 시골 농장이 아니라, 유력한 정치인들과 상원 휴게실이다. 뒤통수를 맞을까 경계하는 대통령은 히로히토를 못된 전범으로, 일본 국민을 교활한 자들로 본다.
매클로이의 일기를 보면, 스팀슨은 일본의 강경파가 여전히 저항하고 있어서 추가 핵폭탄 투하까지 포함하는 더욱 강력한 조치가 요구된다는 현실에 대면한다.
1978년 히로히토는 A급 전범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전시 정부 지도자 14명의 이름이 도쿄의 야스쿠니 신사에 명예로운 전사자로 추가되었음을 알게 된다. 그는 다시는 야스쿠니 신사를 찾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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