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국가는 살아남을 수 있는가 (양장)
앤드루 갬블 지음, 박형신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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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루 갬블은 영국의 정치학자로 케임브리지에서 학사 과정을 마치고, 영국의 공립 연구 대학인 더럼 대학에서 정치 이론과 관련해 석사를, 이후 모교인 케임브리지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갬블은 2007년부터 2014년까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정치학 교수이자 퀸즈 칼리지에서 연구 교수로 일했는데요. 그는 2003년에 자신의 논저인 "유럽과 미국 사이"가 그해 정치학 분야 최고의 책으로, W. J. M 매킨지 상을 수상하고, 2년 뒤인, 2005년에는 PSA로부터 평생 정치 연구에 기여한 공로로 이사야 벌린 상을 받습니다. 이런 갬블의 최근 주요 연구 주제는 자산 기반의 복지 제도와 국제 관계로서의 영미 관계입니다. 특히 그는 근래 경기 침체와 그에 따른 자본주의적 정치의 위기에도 큰 관심을 두고 연구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Can the Welfare State Survive?"로 지난 2016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12월 번역되었습니다.

미국과 더불어 철저한 신자유주의 국가로 읽히는 영국에서 저자와 같은 강단 지식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꽤 흥미로운 부분인데요. 물론 저자인 갬블이 본래 정치학자이기 때문에 오늘날 전혀 퇴로가 보이지 않는 '자본주의의 일상적 폐해'에 양심 상 입을 닫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런 자본주의에 있어 오래된 해결책으로 이해되는 복지 혹은 복지 시스템은 20세기 유럽으로부터 시작된 그야말로 사회적 유산에 가깝습니다. 바로 이 책의 서론은 복지의 그와 같은 연원을 다루고 있는데요. 그렇다면 조금 이른 결론이지만 갬블의 이 글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기도 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왜 시민들에게 복지를 제공해야만 하는가"에 대해 우리 스스로 그 다시 한 번 그 의미를 명확히 고찰해 봐야 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1929년에 전세계에 큰 충격을 안겨 준 뉴욕 증시 발 대폭락은 바로 대공황의 시발점이었습니다. 당시 루즈벨트 대통령을 비롯, 소위 '뉴딜 엘리트'들은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해법을 국민들에게 제공하는 동시에, 다수 시민들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중첩된 복지 프로그램'을 자본가들의 동의와 폭넓은 공감대를 우선 요구하기에 이릅니다. 물론 그 시대의 자본가들이 매번 이러한 요구에 동의했던 것은 아니지만 자신들의 손익에 있어 무엇보다 체제 안정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점을 어느 정도 인식했던 점인데요. 특히나 서구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 과정에서 과거로부터 심각하게 분열된 계급 사회를 이미 경험한 일반 시민들 그리고 자본가들이자 보수주의자들은 "모든 시민을 위한 관대한 복지 국가가 있어야만 한다"는 일종의 당위을 인정하게 됩니다. 이것을 전통적인 사회적 합의로 봐야 할지는 의문이 듭니다만 설사 그것이 루즈벨트 대통령의 치밀한 계획이라 할지라도 이들도 보편적 공익에 동의했던 것이 아닐까 순진한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물론 보편적인 사회주의자들 역시 이 '양보'에 마땅히 동의했습니다만 1930년대 이후, 조직된 노동 계급의 스스로 삶을 통제하기 위한 자기 방어 기제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직된 힘'이 서서히 무력화 되었던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요. 제가 갬블의 이 글을 통해 그저 과거를 엿본 것이지만 동시에 자본가들과 이에 결탁한 보수주의자들이 정치를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하겠다는 '최종 결론'에 이르렀던 점도 거의 진실로도 읽혔습니다.


저자는 일반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광범위한 복지 제도와 관련해, 특유의 정치학자 답게 민주주의 하에서 시장의 매커니즘으로 이익을 창출하는 자본주의는 원칙적으로 시민을 위한 사회 부조를 거부할 수 없다는 입장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이는 시민권과 관련된 리처드 벨러미의 논증과도 매우 유사한 점인데요. 즉, 복지 국가에서 시민은 자신이 이룩해 온 성과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시민권에 근거해 부여되는 불가침의 사회적 권리를 갖는다는 당위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나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적지 않은 수의 신자유주의자들 역시, 시장의 지속적인 이익을 위해 무엇보다 사회 체제가 안정되어야만 한다고 강조하기까지 했습니다. 물론 이 부분은 일전에 데이빗 코츠의 언급대로 신자유주의자들의 순진한 생각이라고 볼 수도 있겠는데요. 이 신자유주의자들을 무턱대고 저열한 음모론자들로 취급할 수는 없지만 이들이 다소 일관되지 않은 화법으로 시민들에게 혼란을 끼친 부분은 사실로 밝혀졌는데요. 결과론적이지만 이러한 문제는 저자의 분석대로 신자유주의가 단일한 교의가 아니었다는 점에도 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저자는 복지와 대립되는 신자유주의적 기법을 분석하는 논증 가운데, 이를 명확하게 "시장 자유지상주의"로 다루고 있었는데요. 이것은 하이에크와 더불어 강고한 신자유주의자로 알려진 그들 세계의 석학, 밀턴 프리드먼을 시장 자유지상주의자로 해석하는 것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와는 약간 별개로 사회학에서 자유지상주의는 어느 정도 철지난 멸칭으로 취급되고 있지만, 앞선 프리드먼에 대한 저자의 이 같은 의도는 과연 무엇일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이렇게 대다수 신자유주의들이 주장하는 시장 자유주의적 발상과 노골적인 사적 이익 추구, 이를 통한 강고한 개인주의화는 단순히 복지 담론을 넘어, 사회에 당면한 문제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그저 도식적으로 공리에 대해 언급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러한 사적 이익화를 필두로 시민을 파편에 이르게 했던 개인주의에 대한 맹신은 특히 신자유주의자들을 포함한 이 시장 자유지상주의자들의 흔들리지 않는 교리이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저자의 논증을 통해 다시금 밝혀지고 있지만 이 양자가 공통되게 수용하는 부분은 바로 시장 자유 하에 '사회 정의'는 필요 없다는 인식입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시민들은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가 안전하고 무엇보다 누구에게나 정의롭기를 바랍니다. 사유 재산에 관련된 부분, 사적 이익화에 대한 부분을 여기에서 다 다룰 수는 없지만 이미 인간성이 결여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그동안 사회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었는지는 거의 명백합니다. 그래서 복지는 바로 그런 정의를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이는 미국과 같은 완벽한 신자유주의 국가가 자신들의 국민을 위한 사회 부조를 완벽히 철회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것의 수사가 어떤 식으로든 본질적 의미를 왜곡하더라도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발견된 자본주의적 폐해를 단순히 일원적으로 분석할 수 없듯이, 오늘날 진행된 신자유주의적 맥락은 저자의 말마따나 정치경제학적으로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시장의 이익을 위해 국가와 시장을 비롯, 전지구적 생물권이 이에 동원되고 있고, 이러한 일관된 전개 과정은 보편 타당한 복지 시스템 없이 평범한 시민이 과연 자신의 삶을 지켜낼 수 있을지 의문을 들게 하는데요. 다시 한번 언급하지만 복지 전반은 큰 틀에서 우리 민주주의를 위해 요청되는 것이고 작게는 시민 각자의 삶이 폭력적인 자본주의적 불평등에서 일상을 보전하기 위한 최소한의 보장책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리버럴의 항복과 더불어, 정치 엘리트들과 경제 엘리들이 신자유주의적 교의에 표면적으로는 함께하게 되면서 반대의 큰 국가론에 맞섰고 이와 동시에 복지 비용까지 큰 폭으로 삭감하며 이런 사활적 문제를 그저 개인의 책임으로만 국한시키는 사회적 작업에 온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이는 지난날 아이젠하워 행정부 이후, 노동 조합이 신자본가들이 추동한 사회경제적 압박에 의해 급격히 힘을 잃어 갔고, 결과론적인 측면에서 시민의 도태와 분리 그리고 계급화가 더 맹목적으로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단순히 금융 규제를 철폐하고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개입을 제한하여, 기업과 경제 주체의 이익을 극대화 하는 그런 단편적인 작업이 아니라 신자유주의를 위한 소위 사회 개조가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데요. 앞선 리버럴 정치인들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적극적 편입과 더불어 유럽을 비롯한 진보 좌파의 몰락은 바로 이러한 일방적 이행을 부추겨 왔습니다. 

단순히 자본가 계급에 의한 비용 문제로 백안시 되는 복지 문제가 '어른이 된 시민'에게는 그저 불필요하다는 주장과 신자유주의가 맹신하는 능력주의 체제에서 밀려난 자들은 당연히 도태되어야 한다는 소위 과거 허버트 스펜서류의 사회 진화론자들과 같은 주장들에 대다수 시민들이 이에 동의하고 있다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경제적 침체 시기에 시민들을 위한 복지 비용을 충원하기 위해, 다방면의 정치적 토론은 우리가 살고 있는 민주주의 하에서는 분명 필요한 부분입니다. 또한 19세기 자유주의 시대를 거쳐 끈질기게 우리가 옹호해 온 이 복지 제도와 그것을 보장한 복지 국가 자체는 어떻게 보면 홉스가 부정해 온 현실에 맞서, 우리 인류가 지켜온 유산이기도 한 데요. 더욱이 일전에 피터 플레밍과 같은 학자들이 분석했던 바대로, 부유층들이 자신의 부와 권력을 일관되게 무리 없이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대다수 시민 계급의 경제적 안정이 무엇보다 - 그것의 맥락이 일견 모욕적이긴 하지만 - 시급한 것입니다. 다만, 지금의 금융 자본주의적 헤게모니에서 자본주의와 더욱더 멀어진 인간성을 어떻게 하면 회복할 수 있겠는가를 정치철학적으로 고민하는 것보다 시민 사회가 기존의 기회의 균등, 평등, 시민의 자유, 사상의 자율성을 답보하기 위해서라도 국가의 의무 자체가 바로 우리의 세금으로 가용된다는 점을 우선 잊지 말아야 됩니다. 이런 인식은 무엇보다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의에 대해 소극적인 권력 관계가 아님을 시민들에게 주지시키는 것인데요. 결국 복지 프로그램은 누구에게 얼마간의 돈을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자유주의가 그동안 옹호해 온 자유와 평등 그리고 공동선에 기반한 가치를 최소한으로 유지하기 위한 원천적 수단이 아닌가 싶습니다.    

끝으로 곳곳에 보이는 저자의 신랄한 논증을 통해, 시장 자유지상주의자들이 엄연히 이 사회에 실존하고 있으며, 이들이 사회 각 분야에 뿌리 내리고 있다는 점을 새삼 인식하게 되었는데요. 이것은 그동안 보수 우파들이 신자유주의는 실체가 없는 허상에 불과하다는 주장들과 간혹 맞물려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더불어, 현재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보수주의자들이 우리가 알고 있던 전통적인 보수주의자들이 아님을 저자를 통해서, 다시금 여실히 깨닫게 되었는데요. 모두가 함부로 입 밖으로 꺼내기 불편한 지난날의 '신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의 결탁', 이러한 결합 형태가 저자가 밝히는 복지에 대한 이들의 근본적인 거부감 뿐만 아니라, 이들이 다른 모든 형태의 타협 불가능한 주장들에 비해서, 사실상 민주주의를 자본주의의 시녀쯤으로 여기고 있다는 점을 밝혀두고 싶습니다. 추정하건대, 과거 루퍼트 머독과 같은 언론계의 보수주의자가 마거릿 대처와 같은 정치인들과 자신들의 국가와 사회를 위해 논의했던 바는 거의 분명해 보이기까지 하는데요. 결국 국가는 시민들의 보모가 아니라는 것이었겠죠. 이러한 연장선 상 가운데, 개인주의와 능력주의 그리고 심각한 불평등이 이렇게 신자유주의적 이행 초반에 필연적으로 잉태되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 글의 4장에 복지를 설명한 저자의 문장 하나가 유독 눈에 들어왔는데요. 글 말미에 이 문구를 따로 남기고자 합니다. 


"복지국가는 다양한 수준의 불평등과 양립할 수 있으며, 불평등을 완전히 없애는 것은 결코 복지국가의 목적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다. 그러나 복지 국가를 구축하는 이유 중 하나는 삶의 기회를 보다 평등하게 만들고, 사회적 최소한도를 제공하고, 모든 사람이 시민적 권리, 정치적 권리, 사회적 권리를 누리는 공동의 시민권을 창출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간 복지 체제의 핵심 교의 중 하나였다." 


그러나 2008년 금융 붕괴와 그것이 초래한 심각한 여파로 인해 복지국가는 축소와 긴축의 새로운 시대에 직면해야만 했다.

많은 시장 자유지상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당신은 복지국가가 살아남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도, 복지국가를 해체하는 데에는 정치적 장애물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복지 국가가 살아남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고 우울하게 결론 내릴 수도 있다.

금융 붕괴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 사상은 여전히 세계를 지배하고 있고 신자유주의에 대한 제대로 된 대안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전략에는 대의민주주의 제도를 통해 의회의 과반수를 확보하고 국가 관료제의 기존 기구를 장악함으로써 정치권력을 획득하여 자신들의 강령을 실행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브레턴우즈 고정환율 체제 Bretton Woods fixesd exchange rate regime가 해체된 이후 훨씬 더 개방적이 된 세계 경제에서 자국 경제는 국제금융시장으로부터 덜 보호받았고, 자본통제 종식, 규제 완화, 민영화, 소득과 부에 대한 세금 인하, 그리고 고용권 및 노동조합의 약화를 통한 유연한 노동시장 창출 등 일련의 신자유주의적 개혁이 많은 나라에 도입되었다.

복지국가가 그간 표명해 온 약속은 모든 시민은 자신이 시장에서 이룬 성과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시민권에 근거하여 부여되는 불가침의 사회적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다.

국가를 이용하는 것의 실질적인 이점이 명백해지자, 사회주의자들은 민주주의가 국가를 변화시켜 왔고 자신들이 국가를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무엇인가로 만들었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이것이 바로 신자유주의 시대에 일부 보수주의자들이 시장 자유지상주의자 및 다른 신자유주의자들과 제휴하여 고도 집산주의 시대 - 복지국가가 미래의 물결일 것처럼 보였던 시대 - 의 혜택을 일부러 줄이고자 했던 이유이다.

시장 자유지상주의자들에 따르면, 개인은 자녀의 교육에 대한 비용을 스스로 지불해야 하며, 건강상의 위험이나 실업 또는 장애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스스로 지켜야 한다.

20세기 대부분 동안의 도덕적 논쟁에서는 국가의 복지 제공을 확대하고 개인이 삶에서 직면하는 위험과 불확실성을 줄이는 것에 찬성하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승리했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재정 긴축에서 앵글로-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질서-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모두가 채무불이행에 대해 취한 입장은 세금이 아닌 지출을 줄이는 것이었고, 그리스와 몇몇 다른 질서-자유주의적 국가에서 이것은 핵심 프로그램에 대한 지출의 삭감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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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4-02-23 19: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민주주의를 자본주의의 시녀쯤으로 여긴다‘는 부분에
씁쓸하게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복지국가라는 북유럽 나라들에
의외로 노숙자가 많다는데 유일하게 핀란드는 그 수를
줄이고 있다고 하더군요.
방관할 경우 사회적 비용이 더
크다는 것을 깨닫고 아예 살곳을
마련해주었대요. 물론 그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겪었지만요. 길에서 폭력,마약,도둑질..등 문제를 일으킬때보다 훨씬 적은 비용이 들었고 다시 사회로 복귀할 기회도 높였다네요.

우리나라도 극도로 보수적이다보니 복지가 퍼주기라는 인식이 만연한데
세세하게 따져보고 복지에
대한 인식을 바꿨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알아야할게 너무 많은것 같고요. 덕분에 이부분에 대한 생각을 한번
정리해볼 기회가 되었네요.
베터님 잘읽었습니다^^

베터라이프 2024-02-24 06:46   좋아요 2 | URL
복지국가 시스템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해당 시민들이 사회 민주주의적 개념을 이해하고 있어야 하고
복지 자체가 예전 자유주의적 소산임을 인식한다면
오늘날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과거 자유주의와 상이한 차이가 있는지
변질된 보수주의 정치와 연계해서 개념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민주주의 정치 기반에서는 말이죠

소위 ‘퍼주기 복지‘와 관련해서도 과거 레이건 행정부 때
당시 신자유주의자들이 저런 식으로 포커스를 맞춰
사회 부조에 대한 혐오감을 시민들에게 안겨줬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사실 구조적으로 정치공학이 관여해 왜곡된 기본 인식들이
제가 알기로는 전통적인 보수정치의 연원은 아님은 분명합니다
우리도 그렇지만 신자유주의 국가에 보수를 자처하는 대다수의
정치 세력들은 기득권 세력이라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영국도 그런 부분에서 많이 변질 되었죠

항상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미미님 ^^
 
밀입자
엘리에트 아베카시스 지음, 길해옥 옮김 / 여백(여백미디어)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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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엘리에뜨 아베카시스는 1969년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의 모로코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양친 가운데 그녀의 부친은 유명한 유대인 사상가였는데요. 덕분에 그녀의 어린 시절은 스트라스부르 유대인 공동체의 일상적 삶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소위 말해 세파르딕 유대인들의 공동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유년 시절을 보낸 아베카시스는 프랑스의 4개 고등 사범학교 가운데 한 곳인,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 (ENS)에 수학하고, 프랑스 공교육 시스템에서 소위 교사 자격을 부여하는 아그레가시옹 (Agrégation)을 무난히 통과합니다. 이후 그녀는 프랑스 캉에 위치한 캉 노르망디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게 되는데요. 1992년에는 도미하여, 하버드 대학에서 1년 간 수학하고 그즈음에 발견된 사해 두루마리로 인해, 스스로에게 명성을 안겨 준, '쿰란'의 모티브가 됩니다. 그녀는 이외에도 단편 영화를 연출했고, 프랑스 록그룹인 DSLZ를 위해 곡을 만드는 등 다방면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제, "Clandestin"으로 지난 2003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05년 2월 번역되었습니다. 현재 이 작품은 국내에서 절판된 상황입니다.

이 작품의 원제는 아마도 밀항자, 불법 이민자들을 뜻하는 은유적인 표현일 수도 있겠는데요. 작가인 아베카시스는 이 제목의 의미를 작품속에서 꽤나 복합적인 의미로 전개했습니다. 이를테면 여주인공인 '그녀'가 자신의 삶에 있어 주체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고 흡사 수동적인 태도로 거의 위선에 이르지 못한, '이방인'으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바로 '그녀'가 프랑스에서 소위 엘리트 교육을 받았으면서도 행정 계통의 일을 통해 자신의 야망을 채우기는 커녕, 때론 위선적이고 때론 가면을 쓰면서 이런 조직 문화에 적응해 가는 여타 인물들과는 달리, 어렸을 적의 가정 불화와 자신의 소극적인 태도로 말미암아 사회와 본질적인 삶에 있어, 거의 이방인의 태도를 보이고 있는 측면으로, 이 작품의 제목은 이처럼 여러 시사점을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조금 창백하고 어두운 계통의 피부색을 갖고 있는 남주인공인 "그"는 설정상 '짙은 푸른 눈'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소설의 문맥상 "그"가 프랑스의 남쪽 해안을 통해, 이 나라에 밀입국을 한 것으로 보아, 알제리를 비롯, 옛 프랑스의 식민지 출신으로 보이지만 작가 자신이 모로코 출신의 유대인 정체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앞선 푸른 눈과 "그"에게 종교적 색채가 완전히 배제된 점은 마찬가지로 의도된 의미를 갖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이것은 현재 프랑스 내부의 이민자 문제를 다루면서도, "어떠한 한 인간을 민족과 종교의 배경 만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그녀 스스로의 철학적 관점을 드러내는 것으로도 읽히는데요. 다만, 주인공인 "그"가 자신의 모국에서 숱한 여자를 관능의 측면에서 만나왔고, 남녀 관계에 있어 남자로서 어느 정도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던 것으로 보아, 프랑스와 그의 정체불명의 모국은 남녀의 사회적 지위가 확연히 차이가 나는 것으로도 해석됩니다.

작가의 서사를 통해, "그"는 자신의 형과 프랑스에 밀입국을 했지만, 자신의 모국과 완전히 상관없는 프랑스 내에서의 보장되지 않는 법적인 지위와 그로 말미암아 국적과 신분이 전혀 인정되지 않는 '국외자'로서 매번 사회의 감시로부터 쫓기고 있는 상황입니다. 소설의 중후반부에서 암시되는 그의 형에 대한 불행과 이들 형제가 모국에서 상당한 교육을 받은 지식인 계층임에도 불구하고, 타국에서는 그 신분이 전혀 보장 받지 못하는 상황은 법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과연 어떠한 현실에 놓여 있는지 이 글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새삼 깨닫게 만듭니다. 작가에 의해서 거듭 강조되는 '자유의 나라 프랑스'는 이처럼 사람에 따라 여실히 이중적인 관념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또한 '스스로가 자유의 혜택을 누릴 수 없는 상실된 인간이 과연 바뀐 현실에서 사랑을 갈구할 자격이 있겠는가'라는 본질적인 측면을 작가는 여러 관점에서 살펴보고 있는데요. 여주인공인 "그녀"가 "그"에게 있어 그동안 만나왔던 관능적인 여성이 아닌, 정숙한 여성이라는 설정도 그렇거니와, 이들 두 사람 사이에 놓여있는, 어느 역의 플랫폼과 서로 간의 진정한 이해를 방해하는 현실의 장막은 그만큼 복잡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거의 처음 대면하게 되는 사람의 지나온 삶에 관심을 둔다는 것은 어쩌면 그 사람에 대한 애정의 한 방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더욱이 자신이 묵묵히 걸어온 삶이 결국은 누군가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축복일 수도 있다는 냉엄한 현실과 그것이 직면한 관념이 서로 교차되고 복잡한 심성으로 자신을 혼란으로 이끄는 와중에도 서로를 보는 시선이 묘하게 일관된 듯한, 서사 전반은 꽤나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미 저를 포함한 많은 분들도 한두 번쯤은 처음 보는 사람에게 순수한 호의를 갖게 되었던 신기한 경험을 해보셨을 텐데요. 물론 이 작품에서 그와 그녀는 서로에게 시선을 보낼 수밖에 없는 어느 정도 긴밀히 연결된 맥락이 존재하지만 다른 이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이 에로티시즘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에 대한 터무니 없는 그녀의 호감은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스스로의 삶에 수동적이고 의미를 찾지 못하는 그녀에게 있어, 이 작품의 제목이 의미하는 바는 그만큼 복합적입니다. 누구에게나 치열한 삶 속에서 극적으로 부정되는 사회 속의 이방인과 다른 한편으로 법과 사회의 범주 밖에 있는 밀입자 혹은 (불법) 이민자의 정체성은 이처럼 이질적이게도 서로 맞닿아 있는데요. 결국 "그"와 "그녀"는 서로에게 매우 필요한 존재들이지만 이들의 상이한 가치적 삶과 각자의 공간을 분리시키는 엄혹한 현실의 문제는 사실상 외형적 관계마저도 거의 파편에 이르게 만듭니다. 따라서 이런 모든 문제를 오로지 개인의 책임으로 국한시키는 점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작가는 이를 간접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끝으로 어느 정도 독자들의 상상에 맡기는 것처럼 보이는 비극적 결말 또한 우리 스스로가 주체적 삶을 견지하고 지향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낸다 볼 수 있겠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주인공이 힘겹게 서로에게 향하게 되는 발걸음은 그 의미하는 바가 가볍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진정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자신들에게 놓여진 현실의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한 용기로 이어졌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이 점은 사랑의 다른 형태라고도 볼 수 있겠는데요. 그런 연유로 도입부의 "그"가 "그녀"를 보며, 문득 사랑이라는 감정을 읊조리는 장면은 후반부의 전개 과정을 예견한 중요한 복선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래서 작가는 관능과 대치되는 정숙과 신중함 등으로 "그녀"를 규정해 나갔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거의 명백하게도 "그"에게 있어,"그녀"가 바로 자신이 바라던 새로운 세계 그 자체였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는 늘 변화가 따르는 법, 모든 시름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마음을 달래고 있어야 할 이 감미로운 순간마저 삶은 여지없이 예기치 않은 상황으로 바꾸어버리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삶과 죽음이란 그저 인간이 만들어낸 늘 가식적이며, 늘 관념적인 허울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는 단지 이 세상에 잠시 머물다 가버리고 마는 객(客)이며, 따라서 그와 같은 시들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녀는 이 직업에 종사한 이래 여러 부류의 이방인들을 보아 왔다. 그들은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자유를 찾으며 애썼으며, 자유를 위해서라면 전기에 감전되어 죽든 자동차에 깔려 죽든 독가스에 질식되어 죽는 상관없이 무장돼 있었다.

그녀는 단지 그를 돕기 위해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고 그에게로 돌아왔던 것이며 그녀는 오직 그만을 위해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협박과 구금, 거주지 이주 권유와 국경 추방 명령, 경찰관들의 폭력행위, 그렇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이상의 것들도.

사람들은 삶과 삶에 대한 의문과 그에 따른 제반 문제들을 회피하려고 하며, 특히 산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라는 근본 문제를 회피하는 데 시간을 허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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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의 시간 - 제2차 세계대전 패망 후 10년, 망각의 독일인과 부도덕의 나날들
하랄트 얘너 지음, 박종대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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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랄트 얘너는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문학, 역사, 미술사를 공부하고, 자유 베를린 대학에서 같은 분야의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그는 1994년부터 1997년까지 프랑크부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에서 문학 평론으로 글을 기고했고, 이후 베를리너 차이퉁에서 편집자로 경력을 쌓습니다. 그리고 그는 2011년부터 베를린 예술 대학의 문화 저널리즘 명예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특히 얘너는 1945년의, 나치 독일의 패전 이후, 근 10여년의 독일 시민들의 삶을 보다 면밀히 분석한 이 작품으로 2019년 라이프치하 도서전의 논픽션 상을 수상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Wolfszeit : Deutschland und die Deutchen 1945-1955"로 지난 2019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4년 1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중의적인 표현이라 볼 수 있는 글의 제목은, 6장 초반부에서 잘 설명되고 있습니다. 즉, '자연 상태의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늑대인' 시간이 독일인들에게 찾아왔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을텐데요. 이것은 원칙적으로 토머스 홉스를 떠올리게 하지만, 실제 상의 의미는 나치가 600만의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낸 사실에 대해, 별반 생각이 없던 당시 사회 풍조와 그런 독일 시민 대부분의 일상적인 관념을, 어쩌면 비틀어서 드러내는 장치로도 읽혔습니다. 지금에야 독일 시민들이 자신들이 저지른 비참하고 참혹한 과거 역사에 대해 충분히 이를 인정하고 반성하고 있지만, 수도 베를린이 연합군에 의해 점령되고 그 역사의 분기점을 맞이했던 평범한 시민들이 나치가 저지른 끔찍한 일들에 대해, 초기에는 생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자신들의 삶이 고난의 연속이었다는 얘너의 치밀한 서사는 읽는 이로 하여금 참으로 많은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제가 접한 이 글의 서사들 가운데, 충격적이었던 점은, 자신들이 저지른 '죄의 댓가'를 어느 정도 자각한 옛 동독 지역의 시민들에게, 참을 수 없는 분노를 갖고 달려드는 옛 소련 병사들이 현지에 있던 200만 독일 여성들을 향해 벌인 파렴치한 강간에 대해, 일부는 반쯤 체념하며 받아들였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제 스스로도 굳이 언급하고 싶진 않지만 '죄의 굴레'가 이런 식으로 돌아왔다는 식의 역사는 참으로 잔인하지 않은가 싶었습니다.

과거 나치는 한창 전쟁 중이던 상황에서 동부 전선에서 거의 700만이나 되는 민간인들을 노동력 보충이라는 미명하에 강제로 독일로 끌고 옵니다. 아마도 대부분은 슬라브계 주민들로 추정되는데요. 종전 이후, 앞선 이들을 원래 살던 곳으로 돌려보내야만 했고, 소련 지역의 수용소에 분산 되어 있던 독일 병사들을 반대로 그들의 모국으로 돌려보내야 하는 복잡한 흐름 속에 놓여 있었는데요. 이에 본격적으로 연합국이 독일에 진주하면서, 연합국이 '자유주의적으로' 어떻게 독일 사회와 정치를 재조정해 나갔는지도 그 이행의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기도 합니다. 연합군의 점령 초기에 2장과 3장에서, 독일의 남성 인구가 전쟁으로 말미암아 유출된 상황에서 거의 힘이 없던 독일 여성들이 어떻게 스스로 자립해 나가는 지를 저자는 입증되는 사료들를 통해, 글을 써내려 가고 있습니다. 이 때의 많은 여성들은 터무니 없이 부족한 배급 상황에서 자신들의 가정을 지키기 위해 거의 고군분투하고 있었는데요. 연합군의 군 간부에게 자신의 성을 매개로 먹을 것을 구하려고 했던 여성들을 포함해, 단순히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는 입장에서 사력을 다해 이 힘든 시기를 이겨나갈 수밖에 없었던 평범한 여성들의 삶을 객관적으로 조망하고 있는 부분은 '원죄'의 여부를 떠나 실로 안타까운 측면이 있었습니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 독일의 지도층이라고 볼 수 있는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이 서로 분열되어 있었다는 사실과 전후 처리 과정에서, 단순히 나치에 부역했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모든 독일인들을 법의 입회 하에, 모두를 처벌할 수 없었던 부분도 어느 정도는 공감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소개된 나치 독일의 악랄한 죄과들 가운데 충격적인 부분은, 자신들이 패망하기 며칠 전까지 독일로 끌고 온 수십만명의 강제 노역자와 전쟁 포로를 무자비하게 살해한 전쟁 범죄였습니다. 여기에 관여한 군 요직자들이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은 것은 물론, 조사 부족과 현지 상황의 한계로 말미암아 이들에게 제대로 된 단죄가 내려지지 않은 점은 참으로 역사의 음울한 측면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이 사건은 아마도 나치에 단순가담해, 그 죄를 일일이 따질 수 없었다고 판단한 했던 당시 시대상의 한계라고 봐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인간 본연의 양심적 기반이 무엇보다 참혹한 전쟁을 경험한 이 세대에게는 거의 작동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이기까지 하는데요. 이 점을 다른 말로 표현해 보자면, 연합군의 독일 진주 이후, 부역자들에 대한 구분과 분석이 다소 관료적인 측면에서 편의주의적으로 계산되어, 누구보다 무고한 희생자들이 인류가 인지하지 못하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실상 은폐 되었다고 보는 편이 일견 타당하다고 여겨집니다. 아직도 폴란드와 라트비아 등에 수많은 전쟁 고혼들이 묻혀져 있는 것도 이러한 한계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렇게 면밀한 과거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상황에서 이 글의 중후반부에 드러나는 독일 사회의 분열은 그것대로 더 심화되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앞서 언급한 연합군 군정의 식료품 배급과 이를 집행하는 중간 관리자들의 야료로 말미암아 '암시장'이 발생 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적 측면과 이런 상태에 놓인 적지 않은 독일인들이 직접적인 약탈 행위에 놓인 사회적 배경에 대한 상세한 서술은,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먹는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는 상황에서 대부분의 시민은 '난폭한 군중'이 될 수밖에 없다는 분석과 이러한 상황에서 누군가는 막대한 이득을 취하고 혹은 추구한다는 이런 냉엄한 현실은, 인간 본성이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설명할 수 있는지에 대해 깊은 회의를 느끼게 만듭니다. 그래서 다음 5장은 이러한 분석을 매개로 소위 '궁핍한 자들'의 실상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기도 합니다. 결국 이런 늑대들의 세상에서 여성들이 겪은 수많은 고초와 함께, 바로 이들이 지금의 독일을 만든 하나의 디딤돌이라는 측면에서 5장 후반부에 드러나는 진술은 바로 다음과 같습니다. "냉정하게 보면, 독일이 살아남는 데 실제로 지대한 역할을 한 것은 미군 부대에서 일한 수많은 여성들이었다"는 실체적 결과물입니다. 심각한 PTSD에 시달리며 문제를 일으킨 귀환병들이 아닌 이 시대의 가정을 건사한 것은 일반 여성들이고 이것에 기반한 독일 사회가 비로소 온전히 설 수 있었다는 진술은 그만큼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에 반해, 독일 지식인 사회와 정치 일각은 어느 정도 분열된 상황이라고 볼 수 있었습니다. 나치의 박해를 피해 외국으로 망명한 지식인 그룹과 이와는 반대로 눈으로 나치의 패망을 목격한 지식인들 간의 반목은 가볍다고 볼 수는 없었는데요. 우리에게 잘 알려진 토마스 만의 사례는 이를 여실히 입증하고 있습니다. 망명 지식인으로서 다른 지식인들에게 '비겁한' 인물로 낙인 찍힌 만은 분열된 역사의 피해자이기도 합니다. 물론 당시 독일 사회가 나치에 부역한 인물들을 아주 철저하게 내쫓은 것은 아니지만 다소 마음에 들지 않은 인사들을 이런 낙인으로 공격했던 것은 거의 분명해 보이는데요. 나치가 권력을 독점하고 있던 소위 제3제국에서, 이 체제에 대항했던 소규모 지식인들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고, 이들이 연합군 정보국에 협조했던 것도 사실로 여겨집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 분열이 미국과 영국이 주도하는 독일 내부의 자유주의적 개혁에 상대한 장애물로 작용한 것도 분명한 사실인데요. 이에 독일에 진입한 대다수 미군들이 독일의 고전주의적 문화에 대해 일정 부분 선을 그은 정치적 맥락이 실로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인간 관계에 있어, 어떤 체면과 모양새에 집중한 당시 독일인들의 성향이 관계 전반에 솔직함을 미덕으로 여기고 있던 미국인들에게는 실로 이질적인 부분이었을 겁니다. 더욱이 독일 내부가 정치적으로 좀 더 통합되고 좀 더 시급하게 개혁에 나설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어야 했지만 상대적으로 무분별한 축제 문화와 마치 현실을 도외시하는 일부 인사들의 존재는 독일인들이 얼마나 현실 회피와 허무주의에 빠져있었는지 짐작하게 할만합니다.

끝으로 연합국이 주도한 독일 사회의 구조조정 작업은 많은 독일인들이 연합국에 가졌던 양가 감정과 더불어 그들에게 있어 상당히 복잡한 감상이었을 겁니다. 독일에 진주한 연합군이 과연 해방군 일지 아니면 점령군 일지를 명확히 다룰 수 없던 현실과 동쪽으로 진군하여 거의 야만적인 행태를 보인 소련군은 약간 상이하지만 만주에 구축한 일본 군의 사회 경제적 기반을 모조리 자국으로 적출했던 시기와 묘하게 연계되기도 합니다. 저는 이 책을 완독했으면서도 과연 독일이 나치의 잔재를 모조리 뿌리 뽑았는지, 여전히 의구심을 버릴 수가 없었는데요. 그것은 현재 독일 내부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네오 나치의 존재와도 결부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굳이 카를 슈미트를 언급하고 싶지는 않지만 과거 그의 존재 자체는 독일 사회의 이러한 의구심을 지울 수 없는 근본적 이유가 되기도 했습니다. 더군다나 여기에 레오 스트라우스를 더한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좀 더 의견을 더하자면 당시 나치 독일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제 목소리를 낸 지식인들 가운데, 고작 '카를 야스퍼스'밖에 없었다는 중요한 사실은, 작금의 독일 연방 공화국이 전세계에 있어 일본과는 사뭇 다른 정치적 평가와 다소 상반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저자는 독일의 전후 세대들은 이후 독일이 이룩한 경제적 번영과 민주주의적 정치 발전에 대해, 매우 자랑스러워한다는 입장을 줄곧 견지하고 있었는데요. 이 글 8장에서 말하는 '연합국의 독일 정신 개조'에 대한 작업이 그런 측면에서 성공적으로 수행된 결과인지는 모르겠지만 전후 '늑대의 시대'를 몸소 경험한 독일인들의 후예들이 과연 어떠한 반성과 성찰을 하고 있는지 다시금 되묻고 싶은 심정이 들었습니다.



수십만 명의 군인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된 이후 베를린에서 남성 부족은 다른 지역보다 훨씬 심각했다. 왜냐하면 베를린은 전쟁 전부터도 미혼 여성들의 수도였기 때문이다.

항복 후 일시적으로 가둬야 할 독일 포로들이 너무나 많아서, 연합군은 그중 약 100만 명을 이른바 ‘라인강 초지 수용소‘라는 곳에 가시철조망을 쳐놓고 지분도 없이 몇 주 동안 짐승처럼 풀어놓았다.

독일로 향한 유대계 폴란드 주민들의 탈출은 망명과 추방이 특징이던 이 시기의 가장 충격적인 이주에 속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하필 나치의 나라에서피난처를 찾아야 하는 상황은 많은 유대인에게 극도의 심적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역설적인 것은 많은 실향민이 그처럼 과거 지향적인 성향을 가졌음에도 전후 사회 현대화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신생 공화국이 나중에 그토록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문화적, 사회적 혼합은 그들로 인해 촉진되었다.

독일 여성을 이런 양공주, 혹은 당시 흔히 부르던 ‘양키 애인‘으로 냄몬 가장 큰 동기가 물질적 궁핍이었다는 사실은 최근까지도 확실해 보인다.

당시의 목격담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금언이다. 사람들은 ‘전쟁 이후에야 인간을 정말 제대로 알게 되었다‘고 말했고, 늑대의 시간, 즉 ‘자연 상태의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늑대인‘시간이 찾아왔다고 말했다. 법의식과 도덕 감정의 완전한 붕괴가 임박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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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우엘벡 지음, 김윤진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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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우엘벡은 1956년 인도양 마스카렌 제도의 일부인 레위니옹 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생후 5개월부터 1961년까지 외할머니와 알제리에서 보내게 되는데요. 그의 부친은 의사였고, 모친은 공산주의자로 남친과 브라질로 떠났기에 일찍이 외할머니와 함께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엘벡은 할머니의 결혼 전 이름이었고, 이를 필명으로 사용했습니다. 이후 우엘벡은 파리 북동쪽의 모에 있는 고등학교인 리세 앙리 무아장에 입학하고, 프랑스의 엘리트 전문 교육기관이기도 한 그랑제꼴 NAPG에 합격합니다. 1994년에는 비로소 그의 첫 처녀작이 출간되는데, 그 작품의 이름은 '투쟁 영역의 확장'이었습니다. 1998년에는 그에게 세계적 명성을 안겨다 준, '소립자들'이 출간되는데요. 이 소설은 즉각적으로 허무주의적 고전이라는 평가를 받게 됩니다. 다만 작품 활동과는 논외로, 그는 이슬람 혐오 작가라는 비난을 한 몸에 받고 있는데요. 2015년, 그 유명한 샤를리 에브도 총격 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같은 해에 '복종'이라는 작품을 발표하고, 이슬람에 대한 거의 신랄한 정도의 공격을 퍼붓기에 이릅니다. 지금 서평을 쓸 이 작품은 그의 두 번째 장편으로 원제, "Plateforme"으로 지난 2001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02년 11월에 초역이 이뤄집니다. 현재는 2015년에 개정판이 나와 있는 상황입니다.

우선 우엘벡의 이 작품을 일독하기에는 몇 가지 넘어야 할 장애물이 있습니다. 이 소설에 묘사되어 있는 성애(姓愛) 장면이 상당하면서도 남녀의 성기를 직접적으로 포함하는 서술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지금도 용납하기 어려운 '섹스 관광'이라는 소재와 비백인 인종 여성을 종속적인 성적 대상으로 삼으며 심지어 자본주의적 상품과 같이, 거의 거래 대상으로 취급하고 있는데요. 특히 이 부분은 상당한 거부감을 느끼게 합니다. 또한, 소위 '쓰리썸'을 비롯 근친과 같은 상당히 터부시 되는 성적 묘사는 물론, 앞선 섹스 관광에 대한 서구인들의 비상식적이고 비도덕적인 가치관이 여러 문장을 통해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데요. 이 부분도 충분히 불쾌할 만한 묘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이 작품에서도 우엘벡 특유의 직접적인 반이슬람주의도 엿보이고, 여기에 돈이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소위, 신자유주의적 물신주의도 드러나는데, 이는 어느 정도 냉소와 비꼼의 소재로 쓰이고 있는데요. 다만 모든 인간들이 평등하다는 법적인 인식을 거의 무색해 하는 극명한 인종주의까지도 상당히 표면화 되어 있어, 소설을 읽는 각자가 이 부분을 고려하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시 문화부의 공무원으로 재직중인 미셸은 삶 자체가 권태롭고 자신의 하루하루가 냉소에 가득 찬 인물입니다. 그는 소위 배설과 같이 성욕을 돈으로 충족하고, 이러한 생활에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못 느끼는 인물이기도 한 데요. 인간의 성조차 돈으로 사고 팔 수 있다는 현대 자본주의의 일상을 작가가 비판하고 싶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삶의 목적성이 설사 그것이 어떤 개인에게는 전혀 고려할 만한 사항이 아니더라도 여자의 성을 도구화하고, 이성 간의 관계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계몽주의적 기반이 결여되어, 어느 정도 이성의 간여가 불가능하다면 아마도 이 점은 동물의 그것과 거의 다를 바가 없을 지도 모릅니다. 다만, 미셸이라는 인물 자체가 개인의 삶에 대한 논조 뿐만 아니라, 사회 인식 전반에 전반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비틀려 있고, 단순히 개인주의에 매몰되었다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삶을 둘러싼 관계에 대해, 거의 대부분 타산적인 관념으로 사고하고 철저하게 거리를 두고 있는 점은 어쩌면 이어지는 작가의 통찰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즉, 여성의 성을 사고 팔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됨으로써, 그러한 비인간적인 관념 하에, 철저히 인간적인 측면 대부분을 상실하게 되고, 이것에 대한 어떠한 숙고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주변에서 솔찮게 볼 수 있는 '비틀린 인간'의 바로 그 전형일 겁니다. 자신은 스스로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극적인 비틀림 말입니다.

이런 그에게 한줄기 서광 과도 같은 여자가 우연히 나타나게 됩니다. 미셸은 태국에 소위 '섹스 관광'을 나갔다가 발레리라는 스물 여덟의 여성을 만나게 됩니다. 극중에 드러나는 그녀는 일견 조신해 보이지만, 비키니를 입은 그녀의 몸매가 너무나도 눈부시게 매력적일 정도로 육체적 매력이 다분하고 무엇보다 사람을 자기의 이익과 같은 타산으로 판단하지 않는 이 시대에선 꽤나 보기 드문 인물입니다. 이는 미셸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고, 그에게 무엇이 결핍되어 있고 본질적으로 어떤 남자인지 미리 인식한 것인데요. 미셸 스스로가 자신이 사람 보는 눈이 있다고 그것에 대해 자부심을 갖는 것과 같이, 작가의 교묘한 배치처럼, 발레리는 이에 완벽히 대응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에 기반한 발레리의 인물 조성은 평범한 남자들을 비롯 다수의 여성들이 보기에도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캐릭터인데요. 그녀는 자신의 꽤 이기적이고 피곤한 잣대로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그 사람의 모습을 바라 볼 줄 알기에, 미쉘은 그녀를 통해, 드디어 자신이 행복을 찾았다고 확신하기에 이릅니다.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이들 커플들이 벌이는 '난교'와 같은 행위들이 농염한 에로티시즘과 같은 해석으로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두 커플의 '섹스'는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너무나 친밀한 교감의 한 형태이기도 했고, 또 다른 어떤 장면에서는 '이들이 너무나 서로를 사랑하고 있구나'라는 느낌을 개인적으로 받을 수 있었는데요. 물론 이러한 서술들을 제가 단순히 동의한다기보다 그러한 성교 장면에 있어, 어느 정도 납득될 만한 서로 간에 짙은 감정적 전이와 충만감이 엿보였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후반부에 다소 충격적으로 벌어지는 사건과 자신의 사랑을 산산히 부숴버리는 파국이 미셸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지는 슬픔과 공허함이 새어 나오는 문장들의 서사를 따라가게 되면, 한 인간의 붕괴를 우리가 직면할 수 있게 됩니다. 바로 이 점을 통해, 작가는 진정한 사랑에 대한 의미를 충분히 부여할 수 있었는데요. 설사 스스로 불완전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사랑은 그 사람에게 기적이 된다는 흡사 진정한 사랑의 진면목을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작가인 우엘벡이 작품 전반에 녹아 있는 인간의 성을 사고 팔게 끔 하는 자본주의적 실상과 그것이 만연된 작금의 세계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취하고 싶었는지는 다소 불명확한 부분이 있습니다. 분명 끔찍한 결말을 고려해 본다면, 이러한 세계가 그에게도 인정하고 받아들일 만한 무언가가 되지 않는다는 추측이 들기도 하는데요. 다만, 새뮤얼 헌팅턴 식의 비서구인에 대한 차별적인 인종주의와 끝내 서구인들과 달리 하등의 인종이라는 해석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후반부의 어느 과학자들의 인용은 작품성을 떠나, 쉽사리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물론 많은 평론가들은 이러한 설정이 비틀린 한 인간의 내면을 더욱 드러내게 한다는 식의 긍정적 반응을 보일 수도 있겠는데요. 결국 이슬람인들에 대한 혐오를 더욱 드러냈다고 볼 수밖에 없는 참혹한 결말과 마찬가지로 극을 이끌었던 미셸이라는 캐릭터의 소멸은 '분노가 의미하는 확정성'을 강화시킨다고 여겨집니다. '이성이 결여된 집단의 인간이 증오를 먹고 살 수밖에 없는 괴물'이라는 문답의 고리들을 다시금 여기에 언급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면 우엘벡은 한 인간이 비로소 이해한 '진정한 사랑'이 이 시대에는 가히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을 꺼내고 싶었던 것인지 참으로 의문이 듭니다.





- 큰 의미는 없겠지만 글 10페이지에 띄어쓰기 오류, 20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미셸이 시간을 보내기 위해 종종 읽게 되었던, 존 그리샴의 '그래서 그들은 바다로 갔다'와 '태국'은 미셸 개인의 삶이 극적으로 변하게 되는 장치 그 자체로 드러나게 됩니다. 휴가지에서 스릴러 작품을 읽는 미셸에게 다른 글을 권유한 발레리의 존재는 이러한 구도가 가히 극적으로 되지 않았나 싶은데요. 개인적으로 이 부분도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전에 이미 마가렛 대처에 대한 경의와 구 소련을 악의 제국에 빗대는 엽기적인 암시로 가득한 이 머저리의 작품을 하나 읽은 적이 있었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후 그가 어떻게 그곳을 빠져나왔는지가 궁금했다.

‘여기 한 무리의 바보천치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죽어 있는 게로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누가 프랑스를 상스런 농담과 방탕의 나라라고 소문을 냈단 말인가? 프랑스는 음산한 나라, 음산한데다 행정에 찌든 나라다.

"인종차별주의의 특징은 우선 타 종족 남성들간에 적개심이 커지고 경쟁심이 더욱 거세지는 것으로 얘기할 수 있을 것이오. 하지만 이 경우 자기와 다른 종족의 여성에 대해 성적 요구가 높아지는 것은 필연적 귀결이오."

그녀들이 원하는 것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단순합니다. 끊임없이 그녀들은, 꾸준한 직업을 가지고 사랑스럽고 이해심 많은 ‘남편‘이며 ‘아버지‘이고자 하는 남성과 ‘영원히‘정착해서 살 수 있다면 행복할 거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내 삶에서 어느 정도 변함없이 만나온 단 두 명의 여자인 발레리와 마리 잔느도 켄조 블라우스와 프라다 가방에 대해 완전히 무관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내게 등을 돌린 적이 없었고, 결코 성을 내지 않았으며, 종종 여자들과의 관계를 그토록 숨막히고, 그토록 비장하게 만들어버리는 예측 불가능한 신경질을 낸 적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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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검색을 통해 발견한 헌책방이었습니다. 알고 보니까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서울책보고'에도 참여하고 있는 책방이었습니다.





대중 교통 이용시, 지하철 7호선 공릉역에서 찾아가시면 됩니다.





책방 입구입니다. 지하로 내려가시면 됩니다.




바로 입구에서 찍은 모습니다. 이 책방은 주로 만화 도서와 판타지 및 무협 소설을 대량으로 소장하고 있었습니다. 




헌책방 치고는 책 분류가 잘 되어 있었습니다.




보자마자 반가웠던 이디스 워튼입니다. 구매할까 잠시 고민해 봤네요.




이렇게 도합 5권을 구입했습니다. 총 16500원이었습니다. 잠깐 다녀온 소감을 말씀드리자면 이 책방은 주로 만화와 책대여점에서 주로 보이던 무협과 판타지 소설을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일반 도서들의 장서 보유는 상대적으로 적었습니다. 다만 책들은 대부분 상태가 괜찮아 보였습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단편집입니다. 1998년 초판입니다. 저렇게 띠지까지 온전해서 신기했습니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입니다. 여백에서 나온 2007년판입니다. 이미 민음사에서 개정판이 나와 인기를 끌고 있지요.




소위 문제적 작가로 불리는 미셸 우엘벡입니다. 플랫폼이라는 장편이고 2002년 초판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작품도 동 출판사에서 개정판이 출간되었습니다. 조금 훑어 보았는데 묘하게 흡인력이 있더군요.



의외로 좋은 평가를 받았던 페터 슈미트의 장편입니다. 2005년 6쇄였습니다.




선물용으로 구입한 이해인 시집입니다. 2009년 20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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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4-01-25 10: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책 많은데>표지판을 보면 그냥 지나치기 힘들겠어요 귀여운 표현ㅎㅎㅎ 무협말씀하시니 상태좋은 묵향이 있나 궁금하군요ㅎㅎ 저는 중고책방에서 찾을 목록들을 늘려가는 중입니다. ^^

베터라이프 2024-01-25 10:58   좋아요 1 | URL
워낙 무협과 판타지를 많이 보유하고 있던 책방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찾으시는
묵향이 분명 있을 것 같습니다 ^^ 왜냐하면 여기 소개되어 있는 유튜브에 만화 희귀판 구하는 분들이 여기서 애타게 구하던 책을 발견하는 모양입니다. 한번 나중에 내방해보세요~ 책방 이름도 정겹고 좋은데 사장님들도 매우 친절하셨어요 ^^

추풍오장원 2024-01-29 20: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중고책방에서 하루종일 시간 보내며 살고 싶습니다 ㅎㅎ

베터라이프 2024-01-30 07:07   좋아요 0 | URL
이런 책방의 묘미는 곳곳에 숨어있는 좋은 책이죠 ^^ 주말에 시간 계산 안하고 박혀 있기 딱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