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중심리 - 사회심리학의 고전!1895년 초판본 완역! 탑픽 고전 3
귀스타브 르 봉 지음, 김수영 옮김 / 탑픽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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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북부 로장르로트루에서 태어난 귀스타브 르 봉은 동시대 인물들 가운데, 가히 선도적인 지식인이었습니다. 그의 가족은 브르타뉴 인의 혈통을 갖고 있었고 그의 아버지는 프랑스 정부의 지방 공무원이기도 했습니다. 르 봉은 후에 인류학, 심리학, 사회학, 의학, 생물학, 물리학 등 다방면의 지식을 쌓았던 인물인데요. 그는 1866년 파리 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지만 정식으로 의사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오로지 글쓰기에 전념합니다. 졸업 후에 르 봉은 파리에 남아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각 언어로 읽었고 그런 연유로 영어와 독어를 독학합니다. 1870년 보불 전쟁이 발발하자 군의관으로 입대하기 전에 생리학 연구에 관한 여러 논문과 유성생식에 대한 서적을 저술하게 되는데요. 전쟁이 끝난 후, 1871년에 파리 코뮌을 생생히 목격한 르 봉은 사회주의에 대한 부정적 사고관과 더불어, 그의 세계관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그가 평생을 견지한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은 바로 위의 사건이 주요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1870년부터 당시 프랑스 학계에서 새롭게 떠오르던 인류학에 르 봉은 열정을 보이게 되는데요. 심지어 1884년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아시아를 여행하고 그곳의 문명에 대해 보고하라는 임무를 받게 됩니다. 이후 1890년에는 인류학에 다소 거리를 두고, X선 연구와 같은 물리학 현상에 관심을 돌리게 되는데요. 한참 뒤인, 1922년에 르 봉은 알버트 아인슈타인과 질량-에너지 등가성에 관한 서신을 주고 받게 됩니다. 이런 자신의 물리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아인슈타인에게 자신의 심경을 솔직하게 토로하기에 이르는데요. 그는 1908년부터 심리학에 관심을 두고, 1920년경까지 파리 대학의 심리학 교수로 일하기에 이릅니다. 이렇게 다방면의 분야에서 학문적 업적을 쌓은 르 봉은 1931년 프랑스 서부 지역의 교외인 마른라코케트에서 90세의 일기로 여생을 마치게 됩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Psychologie des Foules"로 1895년에 출간되었고, 이 국내번역본은 2023년 11월에 출판되었습니다.

저는 군중심리에 대한 사회학 논문을 쓸 것도 아니면서도 또 이렇게 서평을 작성하고 있는데요. 제 기억이 맞다면 르 봉의 이 논저에 대한 서평은 벌써 3번째가 되겠습니다. 다시 르 봉의 이 군중심리를 일독하고 나서 들었던 생각은 마치 르 봉과 허버트 스펜서가 너무나 닮아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글의 1장에서 스펜서는 따로 인용되기도 하는데요. 또한 프랑스 철학자인 이폴리트 텐 역시 저자인 르 봉에 의해 몇 번이나 언급되고 있습니다. 큰 틀에서 르 봉은 자신의 이 글을 통해, 그의 시대에 대두하고 있는 군중들이 끝내 문명을 붕괴시킬 수 있다는 가정하에 자신이 먼저 펜을 들 수밖에 없었다는 식의 인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글의 2장에서 "여성과 원시인, 어린이 등"을 열등한 진화 형태로 규정하는 부분에서는 역시나 눈이 커질 수밖에 없었는데요. 1장의 도입을 지나 본젹적인 '군중의 주요 성격'을 논증하는 2장 초반의 저런 논의는 지금의 가치관으로서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에드먼드 버크와 마찬가지로 르 봉 역시 과거 프랑스 혁명에 관해 상당한 충격을 받았던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보게 되는데요. 본문에서 로비에스피에르가 언급되는 부분도 그렇거니와 1871년 파리 코뮌 시기 파리의 혼란도 그에게 있어 '군중'은 개념적 분석이 먼저 필요한 사회학적 파급의 대상이었을 겁니다. 특히나 군중을 논증하는 중후반부까지의 내용 대부분은 제가 보기에 최근 극우 포퓰리즘의 먹잇감이 되었던 '분노에 가득 찬 그 군중들"과 거의 유사한 형태로 인식되었습니다. 특히 르 봉 특유의 편협하고 굴절된 의식은 2부 1장, '군중과 교육'에 대한 부분에서 더욱 도드라집니다. 이 부분을 대충 요약해 보자면 군중에게 교육은 '전문 인력'을 키우기 위한 목적이면 되는 것이고, 교육 자체가 군중에게 어떤 '도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부분에 대해선 지극히 회의적인 입장을 표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렇게 비틀린 논리적 전개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존 듀이와는 완전히 상반된 입장이기도 한 데요. 르 봉은 스스로 보기에 꽤 성공적으로 보이는 영국과 미국의 소위 직업적인 교육을 프랑스의 상황과 비교해 봤을 때, 상대적으로 내세울 것 없는 프랑스를 여실히 비판하고 있었는데요. 이에 "기계의 일개 톱니 바퀴가 아니라 기계의 모터가 되는 것"이라는 아주 직접적인 진술은 저런 직업 교육으로 젊은이들에게 인간 본연에 본성에 부합하는 교육에 이를 수 있을지 회의적인 판단이 듭니다. 또한 경제적 측면에서의 전문적 직업 교육만이 군중에게 유용하다는 르 봉의 핵심적 분석은 유대인과 라틴 인종들에 대해 갖는 그의 다소 차별적인 인식과 마찬가지로 불안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또한 그를 탐독한 후대의 히틀러와 같은 파시스트에게 어떠한 영감을 주었을 지는 대충 추측이 되었습니다.


특히나 군중들은 피암시성과 맹신을 바탕으로 광범위한 폭력에 이른다는 결론에서, 르 봉이 보기에 그들이 앞서 말한 '문명의 적'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이폴리트 텐과 더불어 수차례 등장하는 보나파르트 나폴레옹도 군중을 특유의 카리스마로 휘어 잡고 끝내 프랑스를 손에 넣은 인물이기도 합니다. 황제는 더욱이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몰락했다가 엘바섬에서 기적적으로 탈출해 파리로 돌아왔고, 다 쓰러져가던 프랑스 군을 단신으로 결집하기에 이릅니다. 르 봉의 언급대로, 당시 나폴레옹은 좌중을 압도하는 위엄과 아우라로 사람들을 휘어 잡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누구보다 죽음을 넘나드는 수많은 전투를 겪은 인물에게 그 정도의 위엄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나폴레옹이 독단과 편협함에 빠진 수많은 군중들을 끝내 제어하고, 더 나아가 스스로 공화국을 무너뜨린 과정은 르 봉의 서사대로 본다면 거의 운명이라 봐도 무방해 보이는데요. 글의 전반부에서 이성이 결여된 군중이 주축이 된 민족이 정치적 무대에 들어서면서 유독 독재적 성향에 있는 지도자들이 이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고 진술 되는데요. 프랑스 혁명 당시 이성을 잃은 군중들을 끊임없는 암시로 폭력에 이르게 한 소위 '위엄 있는 지도자'의 존재는 앞선 일반적인 군중과 가히 독재적 상황과 맞물려, 그 부정적 파급을 실로 짐작케 합니다. 여기에서 르 봉은 마찬가지로 일관되게 군중은 이성을 상실한 무리들로 오로지 감정적 감염을 통해 확산되고, 그러한 비정상적인 감정 고양 상태가 군중을 묘사하는 중요한 설정이기도 합니다. 더욱이 이성을 상실한 이 군중들이 자기들만의 왜곡된 신념을 갖게 된다면 그만큼 사회에 끼치는 위험도 높아질 수밖에 없다고 분석되는데요. 이에 "민족은 언제나 일반적 신념을 얻어야 유리하다"는 그의 평가를 인정한다면 이성의 범주 밖에 있는 신념이 초래하는 파국이란 어느 정도인지 대략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이 글을 통해 어느 정도 무신론자로 이해되기도 하는 르 봉은 기독교가 지난 천 년 간, 무지한 하층민들에 의해 유지되어 왔다고 언급하고, 이러한 '종교의 시대'에서도 군중의 그와 같은 굴절된 확신은 시대를 초월해 여전했다고 평가합니다. "종교적 확신은 반드시 편협함과 맹신이 따른다"는 앞선 1부 4장의 분석은 지금의 시대에도 어느 정도 이해될 만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아마도 이 종교적 확신이 군중의 타협할 수 없는 신념과도 쉽게 연결될 수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다만 르 봉은 무엇보다 인간에게 있어 이성의 존재와 지식의 긍정적인 영향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개인의 신념이 인간의 이성을 벗어나는 형태로 존재할 때, 그것의 위험성은 거의 부정할 수조차 없을 겁니다. 더욱이 신념 자체는 "그 신념이 철학적 부조리를 안고 있다 하더라도 신념이 승리하는 데 걸림돌이 된 적이 없다"고 르 봉은 냉정히 평가하고 있었는데요. 또한 뒤이어 나오는 진술인 프랑스 내의 정치 제도가 군중의 완곡한 다른 이름이라 볼 수 있는 민족의 정신 구조에서 기인한다는 그의 분석을 마찬가지로 동의하고 있다면 군중과 그것을 둘러싼 지도자들의 그 영향력까지 포함한, 군중이 사회에 끼치는 파급이 그만큼 가벼워 보이지 않은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르 봉이 "제도가 사회의 결함을 개선할 수 있고, 헌법과 정부가 완전해지면 민족도 진보하며, 법령으로 사회를 바꿔갈 수 있다는 발상이 여전히 널리 퍼져 있다"고 먼저 비판적으로 서술하고, 이것에 대한 불합리성을 그동안 철학자와 역사학자들이 애썼지만 헛수고였는데, 왜냐하면 이런 굳건한 믿음이 나중에는 제도의 개변도 이뤄내지만 사실상 이런 장시간의 과정이 민족(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겠느냐는 회의로 마무리 됩니다. 결국 앞서 상세히 열거한 개인과 다른 군중의 비이성적인 속성이 민족을 도출하고 사회와 제도를 변혁시키기에 이르지만 (물론 때에 따라 그것이 가능하지 않을 수도 있는) 그만큼 논증으로 도출된 '민족성'이라는 개념은 르 봉의 말마따나 꽤나 중요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끝으로 앞으로 사회를 좌지우지하게 될 사실상 군중의 대두는 르 봉에 있어 복잡한 문제였을 겁니다. 이 글을 통해 그가 민주주의에 대해 확신하고 있다고 볼 수 없는 진술도 몇 가지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동안 국가와 사회가 함께 만들어 온 전통의 관점에서 군중의 예측할 수 없는 행동과 그것의 기반이 된 충동과 터무니 없는 확신 그리고 막무가내의 자기 암시 등은 그야말로 위험한 문제일 겁니다. 결국 2부 3장에서 르 봉이 피력하는 대로 "결국 세상을 이끄는 것이 인간의 지성"이라면 군중의 불확실성을 조금이나마 회피할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해 보는 것이 필요하지 않나 싶은데요. 이미 그가 인정하는 바대로 "붕괴의 시간을 일각이라도 늦출 수 있는 건 출렁이는 여론과 일반적 신념에 군중이 보이는 무관심일 것이다"라는 귀결 역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도 자신은 결코 군중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자본주의가 조장한 엘리트 지배 체제에서 자신이 누구보다 그 계층에 속하는 사람이라 확신하고 즉시 군중과 자신을 분리하려는 사람도 존재할 겁니다. 그 무엇보다 스스로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자가 얼마나 스스로를 냉정하게 판단하고 있을지는 철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거의 회의적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그런 면에서 르 봉의 공격적 발언들은 어느 정도 우리가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그렇다고 군중에 이르는 과정을 터무니 없는 허언으로 취급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동시에 선동하는 정치인이 정치적 변별력을 갖추지 못한 다수의 시민들을 분노와 폭력으로 내모는 현실과 별 반 크게 다르지 않겠는데요. 이미 시민을 한낱 군중으로 취급하는 냉혹한 자본주의적 굴절과 시민을 그저 '노동에 처하게 만드는 현실'은 신자유주의 식으로 그것을 온전히 개인의 문제로 치부할 수는 없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런 연유로 우리는 르 봉의 반쯤 불쾌한 이 논저를 더욱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본문 96페이지에 인용된 부분의 따옴표가 편집상의 오류 때문인지 오직 하나만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이 기념비적인 1895년 초판 번역에 출판사의 이러한 편집 문제가 있었다는 점은 실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믿을 수 없게도 르 봉은 민주주의와 공화제(공화주의)를 서로 대립적으로 해석하고 있었습니다.
              



개인의 지적 능력, 그러니까 그들의 개성은 집단정신 안에서 사라진다. 이질성은 동질성에 자리를 내어주고 무의식과 얽힌 특성이 주도권을 잡는다.

뛰어난 사람들도 모두가 지닌 열등한 자질만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군중 안에 축적되는 것은 지성이 아닌 우둔함이다.

동요하는 군중 속에 한동안 빠져 있던 개인은 군중이 내뿜는 악취처럼 알 수 없는 원인에 의해 현혹 상태에 놓인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일상생활의 급선무가 눈에 보이지 않는 조절장치 역할을 하지 못하면 민주주의는 결코 지속하지 못할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암시는 언제나 한 개인이 다소 모호하고 어렴풋한 기억으로 착각을 만들어내고 이 착각이 증언을 통해 전염되면서 시작된다.

나폴레옹이 모든 자유를 억압하고 춸권통치를 시작했을 때 가장 열렬히 환호한 사람들은 바로 자코뱅파 가운데서도 가장 오만하고 다루기 힘든 자들이었다.

프랑스 대혁명의 잔인하고 무질서하며 가혹한 측면에 경악한 텐은 이 위대한 시기의 영웅들이 그저 본능에 빠져 미쳐 날뛰는 광폭한 야만인 무리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제도가 사회의 결함을 개선할 수 있고, 헌법과 정부가 완전해지면 민족도 진보하며, 법령으로 사회를 바꿔갈 수 있다는 발상은 지금도 여전히 널리 퍼져있다. 이런 생각은 프랑스 대혁명의 출발점이었고 여러 사회이론의 근거가 되었다.

허버트 스펜서를 포함해 저명한 철학자들은 교육을 받는다고 인간이 행복해지거나 도덕 수준이 높아지지 않으며, 교육이 인간의 본성과 대대로 물려받은 열망을 바꾸지 못할뿐더러 잘못된 방향으로 게획되면 유용하기보다 도리러 독이 된다는 점을 어렵지 않게 증명해 보였다.

또한 무관심하고 중립적인 사람들 무리가 어떻게 해서 이상주의자와 수사학자들의 암시에 언제라도 복종할 수 있는 불평분자 세력으로 서서히 변모해가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따라서 정치적 격변이 일어나거나 신념이 바뀌어서 군중이 어떤 단어를 듣고 떠오르는 이미지에 극심한 반감을 느낄 때, 진정한 정치인이라면 가장 먼저 그 단어부터 다른 단어로 바꿔야 한다.

무엇보다도 군중의 의견이나 신념은 이성적 추론이 아닌 전염을 통해 확산한다. 노동자들이 지금 가지고 있는 생각도 선술집에서 확언과 반복, 전영을 통해 굳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군중의 힘이 세졌기 때문에, 하나의 의견이 권위를 인정받을 만한 위엄을 획득한다고 해도 곧 전제적 폭군이 되어 모두를 무릎 꿇게 하는 통에 자유로운 토론의 시대는 오랫동안 중단되고 만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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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 역사, 형식, 이론 북캠퍼스 지식 포디움 시리즈 1
한스 포어랜더 지음, 나종석 옮김 / 북캠퍼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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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포어랜더는 독일의 저명한 정치학자로 본 대학과 제네바 대학을 거쳐, 본 대학에서 칼 디트리히 브라허의 지도하에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그는 1984~85년, 1986~87년에 미국 하버드 대학의 독일 출신 학자들을 위한 '존 F. 케네디 펠로우쉽'에 참여했습니다. 그렇게 유럽에 소재한 여러 대학에서 강사와 연구 교수로 일한 포어랜더는 2007년부터 자신이 설립한 "헌법 및 민주주의 연구센터 (ZVD)"의 이사직을 맡고 있고, 2005년까지 독일 정치 학회 (DGfP) 의 회장을 역임했습니다. 이후에는 드레스덴 공과 대학의 정치학 교수를 역임하고, 2018년부터 독일 통합 및 이주 재단 전문가 위원회의 회원이자 2023년부터는 이 단체의 의장직을 맡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연구 분야와 관련 있는 '민주주의와 헌법'에 대한 여러 논저들을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이 책은 원제, "Demokratic-Geschichte, Formen, Theorien"으로 지난 2020년에 출간되었고, 국내 번역은 2023년 8월에 이뤄졌습니다.

'민주주의의 역사, 형식, 이론'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글은 짐작대로 고대 그리스 시기의 직접 민주주의를 개론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저자인 포어랜더는 이 아테네 시절의 민주주의를 '아테나이 민주주의'로 언급하고 있었는데요. 그동안 '아테네'에 익숙한 분들은 이 아테나이라는 단어가 조금 어색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습니다. 저자의 입을 빌어, 이 아테나이 민주주의를 간략하게 설명해 보자면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민주주의"라고 이해 되는데요. 지금도 간간히 학자들의 입을 통해 나오는 '추첨 민주주의'도 이 시기의 아이디어였고, 더불어 "모두에 의한 지배"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인류에게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한 역사였습니다. 개인적으로 한계가 명확한 아테나이 민주주의이지만 이 때의 유산이 있었기에 14세기 이후, 계몽과 자유주의의 대두와 함께 우리가 비로소 민주주의를 대면하게 된 연유일 겁니다.

포어랜더는 2장에서, 민주주의가 복합적으로 '다수에 의한 통치'라는 점을 아테나이 시대를 빌어 인정하고 뒤이어 민회를 통해 실천했던 당시의 정치체를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민주주의의 제약과 한계를 인정한 조지프 슘페터를 인용하자면 다수에 의한 지배가 실질적으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이 소위 엘리트들을 선택해, 그들에게 통치의 위임을 하는 식으로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변형되어 왔다고 보는 것이 일견 타당해 보입니다. 물론 저자 역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어느 정도 개념적으로 분리하고 있었는데요. 저는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없이 자유주의 만으로 '시민의 자유'가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과거 유럽에서 계몽의 시대를 거쳐, 탄생한 자유주의가 이처럼 민주주의와는 별개의 사상임은 분명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앞서 슘페터가 비판적으로 분석한 엘리트 지배 체제가 표면적으로는 민주주의를 지속가능하게 하는 것은 그만큼 '과두제'를 온전히 예방할 수 없는 것으로도 읽힙니다. 이 엘리트 지배체제의 근간인 '정당 민주주의'가 미국 독립 혁명 이후 발전해, 그들이 강조하는 다양한 정치 발전에 도움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민주주의와는 더욱 거리가 멀어진 것은 거의 부정할 수 없을 텐데요. 바로 그런 측면에서 "민주정과 과두정의 결정적 차이는 민주정은 빈민의 지배를, 과두정은 부자의 지배를 반영했다"는 저자의 진술은 묘하게도 현 시대와도 잘 맞는 것 같습니다.

뒤이어 3장에서 중요하게 논의되는 민주주의의 공화주의적 전통은 다음 4장에서 "공화국과 민주주의가 한 몸"이 되었다고 진술하는 것처럼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미 키케로가 공화주의는 단순한 지배 질서가 아니라 '참여의 정치'로 언급한 것처럼, 14세기 이후의 공화주의와 공화국은 "덕성을 지닌 존경할 만한 시민에 의해 통치되는 것"으로 특별한 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이후, 그 시대의 공화정이 추구했던 '시민의 자유'가 '그들 스스로의 자치'를 뜻했다는 점도 역시 의미심장합니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자유가 프랑스 혁명 이후, 미국 독립 혁명을 거쳐, 개인의 재산권과 밀접하게 결부된 소위 개인화 된 관념으로 축소되었는데요. 이를테면 '모두의 자유'가 아니라 '자신의 자유','개인의 자유' 등으로 의미의 양태가 한정 지어진 것이죠. 물론 개인의 자유는 소홀하게 취급할 가치는 분명 아닙니다. 더욱이 광범위한 재산권 개념이 전통적인 공화주의적 가치 체계인 '공익'과 '덕성'을 역사의 뒤안길로 내몰았다 하더라도, 시민에게 마땅히 보장되어야 하는 권리인 이 자유를 결코 홀대할 수는 없습니다. 흔히 어떤 사람은 '첫번째는 자유이고, 두번째도 자유이며, 세번째도 마땅히 자유"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6장에서 언급되는 시장과 관련된 '자유 방임'은 명확히 구분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자유 지상주의와 자유 방임은 때론 한 묶음으로 취급될 경우도 비일비재 하기 때문에 저자는 이 자유 방임과 관련된 논증을 좀 더 시장 뿐만 아니라 정치의 측면에서 비판적으로 논증할 필요가 있었는데도 그냥 지나친 것은 상당히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사실상 4장 이후, 논증되는 근대 이후의 민주주의는 현재의 민주주의와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 시기의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는 쉽게 공화국이라 지칭되기도 했는데요. 초기에 등장한 정당이라는 집단을 '정치 결사'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인구가 비약적으로 커지고 베스트팔렌 체제 이후, 국민 국가라는 개념의 도출은 아마도 민주주의가 새로운 기법의 정치 체계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았나 싶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정당 민주주의'는 비 서구권 국가들에게 완벽히 '서구의 것'으로 이해되기도 하는데요. 이에 저자는 이질적인 종교와 문화를 갖고 있는 중동 국가들이 민주주의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6장에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민주주의가 각각의 종교와 그리고 철학적 전통이 결합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필요하다고 보는 점은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약간의 첨언이지만 자신의 민주주의를 전세계에 홍보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던 미국이 과거 불법적으로 CIA를 동원해, 선거로 수립된 칠레와 과테말라 정부를 무너뜨린 사례를 단순히 저자의 말마따나 '미국의 국익'이라는 논법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너무나 뻔한 전개라 실망을 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독일인으로서의 정체를 갖고 있는 저자가 과거 베르사유 조약 이후, 독일에 수입된 바이마르 공화국이 보였던 정치적 한계를 역사적 사례를 통해 분석하고 있는 내용은 거의 명료합니다. 이를 요약하자면 "민주주의자가 없는 민주주의는 위험하다"는 취지의 인식인데요. 이것을 저의 방식대로 해석해 본다면, 수많은 시민이 그저 방관자일 경우, 그들의 민주주의는 위험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묘하게도 루소가 이미 "민주주의는 폭정으로 바뀔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한 것과 대비되어 오버랩 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확연히 대중민주주의라기 보다는 정당 민주주의 시대라고 봐야 할 텐데요. 시민들이 자신들의 투표권을 통해 정부를 선출하는 일이 민주주의의 전부라고 여겨지는 시점에서 과거의 공화주의적 전통이 그에 비례하여 퇴색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처럼 명확한 현실임에도 일부 지식인들은 '과잉된 민주주의 시대'라고 열변을 토하는 것은 상당히 설득력이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에서 최근의 신자유주의를 통한 민주주의의 위축은 마찬가지로 자명한 부분인데요. 불행하게도 많은 정치학자들은 그저 이를 세계화와 밀접하게 관련된 신자유주의의 부분적인 파급에만 집중을 해왔습니다. 이를테면 도식적으로 세계화가 너무나 진행되어 세계의 민주주의가 그 한계를 맞이하고 있다는 류의 분석입니다. 하지만 인류가 급격한 발전을 이룩한 근대가 마땅히 극명한 명암을 갖고 있고 마찬가지로 이 시기의 자본주의가 소수의 자본 축적을 위한 수단으로써 민주주의를 '시녀'로 거느린 것은 거의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미 레이건의 개혁이 그러한 의미를 갖고 있었고 심지어 리버럴이라고 지칭되는 민주당의 정치인들까지 이에 동의한 것은 그만큼 민주주의가 점차 제구실을 못해왔다는 증거일 겁니다.

끝으로 "경찰 및 군사 권력에 대한 효과적 민간 통제는 민주주의 생성과 유지를 위한 또 다른 본질적이고 명백한 조건"이라고 단언하는 것은 무엇보다 동의하는 편입니다. 또한 시민들의 자유로운 의견 개진과 토론을 위한 정상적인 공론장의 기능이 네트워크 시대의 출범으로 무색해진 것은 우려할 만한 사항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어떤 커뮤니티의 검증되지 않은 근거가 바탕이 된 정치적 주장들이 비정상적으로 힘을 얻고 있다는 맥락의 분석도 충분히 공감이 되었습니다. 일전에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다수가 소수를 정치적으로 핍박할 것을 우려해, 헌법과 사법 제도를 견고하게 고안했던 것은 꽤 유명한 일화이기도 한 데요. 이들이 말한 소수의 정치적 의미가 지금과는 많이 차이가 나는 것처럼 어느 국가에서는 자원과 권력을 가진 소수가 다수를 압도하는 상황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우려들은 어떻게 보면 건전한 시민 사회가 존재하지 않을 때 흔하게 발생할 수 있는 문제라고 여겨지는데요. 민주주의 하에서 선출된 권력이 주권을 위임한 시민들의 권리를 모두 포함한 것보다 더 큰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것이 엘리트 지배 체제에 기반한 민주주의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저자인 포어랜더가 간접적으로 전망한 민주주의의 미래는 현실에서 더 암울하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민주주의가 시민을 위해 봉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저자의 분석대로 "권력과 권력 자원의 분산"이 필요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저는 앞으로 우리의 민주주의가 정치 권력과 경제 권력 그리고 지식인들의 야합으로 가까운 미래에 붕괴되어, 무늬만 민주주의인 실질적 '과두제'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자가 글 말미에서 진단하고 있는 작금의 유럽에서 들불처럼 일어나고 있는 '극우 포퓰리즘'도 이러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민주주의를 해롭게 만드는 이런 정치병리적 현상은 매우 복합적인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여기에 관련된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은 오늘날 시민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인간 답게 살 권리'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는 자유'가 더이상 보장 받을 수 없게 되었다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말년의 지그문트 바우만이 우리가 서로의 손을 붙잡고 무덤으로 들어가지 않기만을 그렇게 간절히 바랬던 것인데요. 마치 끊임없이, 끊임없이, 시민들이여 노력하라는 그의 고언이 가까이에서 들리는 것 같습니다.



-저자는 글 말미에서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간에 "민주주의가 자유롭고 탈규제화된 시장의 지배로 대체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언급하고 있었는데요. 후술되는 증거들도 그렇고 우리의 민주주의가 맞고 있는 위기의 본질이 무엇인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플라톤에 따르면 대장장이, 구두장이, 상인, 선원 등 빈부나 귀천에 상관없이 민회해서 연설했다.

자유주의적인 근대의 자유 개념은 개별 인간의 인격적 독립과 개인적 권리 보장을 전면에 내세운다. 이에 반해 고대의 자유 개념은 정치적 결정에 대한 적극적 참여를 목표로 했ㄷ사는 게 콩스탕의 논리다.

따라서 민주정과 과두정의 결정적 차이는 민주정은 빈민의 지배를, 과두정은 부자의 지배를 반영했다는 데 있다.

이를 행정적 개입으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는 초기 형태의 개인 보호, 즉 국가에 대한 방어권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루소는 자유와 공동 이익을 조화시키는 원칙으로서의 자기 입법을 중요시했다.

따라서 연방주의자들은 일반의지와 이익을 위해 특수 의지와 반대 의견을 무시하거나 억압해야 한다는 루소의 견해를 단호하게 거부함으로써 루소와 대립각을 세웠다.

한편으로는 새로운 질서가 인민주권과 다수의 지배에 기초한 민주주의여야 한다는 데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과 집단의 자유를 보호하고 다수결에 의한 폭정을 막아내는 것이 중요했다.

연방주의자들은 인민 지배의 독재를 두려워했고 순수 민주주의의 다수결 원칙을 불신했으므로 대의제 계획에 수직적, 수평적 권력 분립과 독립적 사봅부와 같은 추가적 예방 조치들을 내놓았다.

이제 자유는 국가에 앞서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로 이해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미국 역시 민주주의를 저해하거나 심지어 파괴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에서 민주주의를 촉진하는 등 양방향으로 작용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상대적으로 낮은 만족도는 권위주의 질서에서 민주적 자유주의 질서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문제이다.

이로부터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선거가 존재하지만 민주적 자유는 결여되어 있는 전제적 또는 반민주의적 국가가 완전 민주주의로 변모할 가능성은 번창하는 시장경제가 오래 지속될 수록 더 높아진다는 것이다.

시민사회 구조에 기반한 정치적 공론이 민주주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위한 본질적인 제도적 조건이라고 보는 견해는 한나 아렌트 이후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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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3-10-29 19: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미 무늬만 민주주의라고 생각해요. 전세계적으로 소득불평등이 심화되고 있고 상위 1%가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정치,언론 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느껴요. 그래서 교육도 제대로 해야 하고 선거 제도도 바로 잡아야 하는데 늘 말 뿐이니 큰일입니다. 우리나라만의 특수한, 고질적인 문제들도 풀리지 않는 숙제고요. 베터님처럼 방관하지 않고 깨어있기 위해 공부하는 분들이 계셔서 그나마 희망적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베터라이프 2023-10-29 20:40   좋아요 1 | URL
현재 유럽에서 들불처럼 일어나고 있는 극우 포퓰리즘이 시민의 분노를 조장하여 쉽게 표를 얻는 현실은 남일이 아닌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엘리트 기득권의 지배 체제가 이미 강고하고 특히나 평범한 시민들조차도 그것을 인정하고 있으니까요. 저는 이 글에서 포어랜더가 말하는 자유의 진정한 의미, 즉 ˝시민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자유˝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기득권 보수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유와 일반 시민들에게 필요한 자유에 있어 그 갭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아.. 마지막에 미미님이 과찬을 해주셨는데요. 제가 본질적으로 멋대로 사는 자유로운 영혼이라 ‘깨어있다는‘ 표현은 저하고 절대 맞을 수가 없습니다 ^^;; 좋은 말씀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미미님 ^^
 
혐오 - 우리는 왜 검열이 아닌 표현의 자유로 맞서야 하는가? Philos 시리즈 23
네이딘 스트로슨 지음, 홍성수.유민석 옮김 / arte(아르테)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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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딘 스트로슨은 미국 뉴저지주 저지시티에서 이민자의 자녀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부모는 독일 태생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유대인인이었는데요. 특히, 그녀의 모친은 히틀러의 인종법에 따라 반 유대인 (Halbjude - 지독한 인종혐오적 단어지만 당시 나치의 실상을 밝히는 측면에서 굳이 삽입하게 되었습니다.) 으로 지명되기까지 했습니다. 그녀는 1972년 하버드 대학에서 예술학사와 1975년에는 동 대학 로스쿨에서 우등의 성적으로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졸업 후 스트로슨은 9년 동안 미니애폴리스와 뉴욕에서 변호사로 일한 뒤, 1988년 사립 로스쿨인 뉴욕 로스쿨의 법학 교수로 2019년까지 재직하게 됩니다. 또한 그녀는 1991년부터 2008년까지 미국 시민 운동의 풀뿌리 단체인 '미국 시민 자유 연합 (ACLU)'의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는데요. 이는 ACLU를 이끈 최초의 여성이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이 책은 원제, "Hate"로 지난 2018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3년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번역 작업은 두 명의 학자가 공저자로 참여했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저는 일전에 읽은 제임스 Q. 위트먼의 '히틀러의 모델, 미국"을 기반으로 '인종 혐오, 이민자 혐오 등'을 비롯한 법적인 차원에서의 '혐오금지'에 대해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출간된 스트로슨의 이 논저를 일독하고 나서, 앞선 제 생각을 상당히 철회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은 르포르타주가 가미된 현실적인 논고이기도 한 데요. 더욱이 저자는 분명한 법조인이기 때문에 자신의 주장을 독자들과 사회에 설득시키기 위해, 캐나다, 독일, 프랑스, 스페인 등의 혐오금지 사례를 수차례 인용하면서, 국가와 사법 당국이 시민들의 혐오표현을 법적으로 규제하고 있는 현실을 일관된 논법으로 비판하고 있었습니다. 즉 이런 저자의 주장에 대한 논리적 결론은 9장 후반부에 "혐오금지법은 그러한 해악들을 실제로 줄인다는 것을 차치하고서도 혐오표현금지법을 거부해야 하는 몇 가지 독립적인 이유가 있다"고 평가하고 있는데요. 여기서 중요한 맥락은 극우 단체나 인종혐오적 편견에 빠져있는 일부 인사들의 소위 '입을 막는 행위'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반대로 자유와 평등을 억압하는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을 경고하기에 이릅니다.

1977년 미국 일리노이 주, 스코키(Skokie)에는 총 7만 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이 거주민들 중 3만 명이 유대인이기도 했는데요. 바로 이 곳에 네오 나치들이 집회를 열고자 했는데 스코키가 이를 사실상 불허하자, 네오 나치들이 스코키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게 됩니다. 놀랍게도 이 네오 나치들을 대리한 집단이 바로 ACLU 였습니다. 미국은 건국 이후, 신성시하는 자신들의 헌법을 통해, '시민의 자유'에 대한 확고한 철칙을 갖고 있는 국가입니다. 이를테면 집회, 결사의 자유는 물론 이를 아우르는 표현의 자유와 더 나아가 '총기 소유의 자유'까지 미국 시민들의 '자유에 대한 의지'는 그야말로 남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저자인 스트로슨은 자신의 논저에 이 '스코키 사례'를 몇 번이나 인용하면서 이들 인종차별주의자들이자, 극단주의자들인 네오 나치들의 입을 법으로 막으려 든다면, 역으로 권력이 없는 사람들이나 시민들이 정치나 정치인들을 마땅히 비판하고, 이를 통해 민주주의가 중요하게 여기는 평등의 가치가 가시적으로 무력화 될 수도 있다고 우려하고 있었는데요. 특히 4장에서는 외형상 발전되고 견고한 현대 민주주의 국가들에서조차 무분별한 '혐오금지법'이 대다수 시민의 자유를 위축시킬 수 있는 우려스런 사례들을 상당수 인용하기에 이릅니다. 이에 5장 후반부에서 저자는 "미국연방대법원이 표현의 자유는 사람들을 화나게 할 때 그 높은 목적에 가장 잘 부합할 수 있다고 명시적으로 선언했다 밝히고 있었는데요. 어쩌면 이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미 연방대법원의 평범하지 않은 수사라고도 볼 수 있겠는데요. 저도 이 문장을 몇 번이나 속으로 음미해 볼 정도로 깊은 인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물론 견고한 법조인이자 법학자인 저자가 일부 계층의 '인종 혐오','이슬람 혐오' 표현 등을 그저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방치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종의 '대항 표현'의 필요성이라는 측면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고, 8장에서 이것의 사례로서,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 등에서 보였던 유머 전략을 소개하고 있는데요. "백인 권력 (white power)라는 피켓을 들고 행진하는 소위 인종적 극우주의자들에 맞서, 반대 시위대들이 "아내 권력 (wife power)", "흰 밀가루 (white flour)" 등으로 유머러스하게 대응했던 사례였습니다. 바로 이런 '유머 시위'가 앞선 극우 집단의 인종적 특권 시위의 효과를 둔화시킬 수 있었다고 평가하고 있었는데요. 또한 이와 같은 편견에 대한 집단 간 대화가 지금보다 더 많이 행해져야하며, 교육의 결핍이나 상식의 전무로 무비판적으로 '인종 혐오'에 나서는 시민들을 스스로 '개심'할 수 있도록 사회와 대학이 나서야 한다고 저자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저자의 논점은 7장에서 혐오 표현이 사회에 기여하는 것으로 이어지는데요. "혐오표현은 우리 사회를 괴롭히는 차별과 혐오를 해결하기 위해 시민들이 사회정의 운동에 참여하도록 활력을 불어넣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사실상 긍정적으로 평가되기에 이릅니다.

이러한 혐오 표현 금지라는 문제에 대해, 스트로슨은 현재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회상을 인용하며, 이 혐오표현금지법이 과연 유럽에서 극우의 등장과 인종적 편견을 감소시키는 데 어떠한 실효적 역할을 하고 있느냐 반문하면서, 이 부분에 대해 저자는 회의적인 시선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혐오표현금지법이 차별 및 폭력의 감소와 무관하다는 것은 놀라운 아니다."라고 인정하는 것과 동일한 것인데요. 나치에 대한 찬양을 엄격히 법으로 금지하고 있는 프랑스조차 폭력적 극우 세력의 등장을 이 혐오표현금지법이 제지하지 못했으며, 독일의 경우는 네오 나치들이 유대인과 이슬람 이민자들에 대한 아주 직접적인 폭력을 유발하고 있지만, 앞선 혐오표현금지가 이러한 무자비한 폭력에 거의 무능했다고 보는 편이 아마도 합리적일 텐데요. 또한 캐나다에서 벌어진 혐오 표현을 한 자와 그것의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피해자들의 소송이 법적으로 지지부진했고, 그것에 대한 피해자들의 만족할 만한 보상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저자는 그 과정을 평가하고 있었는데요. 이 부분도 혐오 금지에 대한 사회적 맥락을 고찰하는 데 있어,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다만, 기존의 혐오 표현을 반대하는 시민 단체들의 근본적인 문제 제기 중 하나인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자, 자신의 행동을 절제하지 못하는 자, 자신이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있다고 믿는 자와 같은 부류들이 인종 혐오와 여성 혐오 혹은 이민자들에 대한 집단적 반발심 등"이 폭력으로 나아가기 전에 이를 방지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그 해결 방안이 미지수인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요. 아마도 저자의 생각은 그와 같은 폭력에 대해선 국가가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고 정석적인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만 앞으로 다음 세기까지 극도의 편견으로 인한 차별과 혐오를 각 사회가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다면 아마도 정치 분열 수준의 정도가 아니라 정치 전반이 아예 붕괴할 수도 있을 겁니다. 더욱이 자본주의가 더욱 심화시키고 있는 극명한 불평등 문제를 최근 프랑스에서 보였던, 굴절되고 비틀린 행동으로 그것의 화살을 전적으로 이민자들에게 돌리는 행위는 사회를 파국으로 이끌 가능성이 높은데요. 이런 양 측이 적대하는 시위에서 일방적으로 이민자들이 집단 린치를 당하고 더 나아가 인명 피해가 발생한다면 그야말로 유럽에서 폭력적 민족주의가 다시금 나타나거나, 경제 권력을 손에 쥔 파시즘이 또 그곳을 휩쓸지도 모를 일이겠지요.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과거 나치 자체가 문제였던 것이 아니라 이들이 너무나 쉽게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들을 방해 없이 해왔던 점이 유럽에 큰 파국을 초래했던 것입니다.

끝으로 저자는 일찍이 조지 오웰이 경고했던 것처럼 혐오 문제를 들어 정부와 기득권이 다수 시민들의 입을 막고, 민주주의 헌법 하의 '정치적 신념과 사상의 자유 및 표현의 자유'가 사실상 유명무실해질 수 있다는 점을 마찬가지로 언급하고 있는데요. 특히나 시민들이 자기 검열에 빠져 하고 싶은 발언을 할 수 없는 처지로 이르는 것을 사실상 민주주의의 후퇴로 보는 듯했습니다. 더욱이 법적 조력을 충분히 받을 수 있는 권력층과 정치인들 및 부유층의 권리는 자신들의 자원을 통해 충분히 해결할 수 있지만, 다수의 평범한 시민들은 기본적인 양심을 법과 사회로부터 충분히 보호 받지 못할 때,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은 어쩌면 끔찍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에 아무 가치도 없는 '혐오 표현' 자체를 법이 규제하기에 이를 때, 시민들의 비판을 달가워 하지 않는 일부 정치인들이 숨겨진 의도로 소송을 통해 이를 막을 수도 있다고 보는 논리적 전개는 충분히 그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됩니다. 저는 이러한 아이디어에서 사법부의 판사들을 입법 자체의 과정에서 철저히 배제해야 한다는 의미를 깨닫게 되었는데요. 이처럼 민주주의는 철저하게 권력을 분리하고 견제하는 것 자체가 다수 시민들의 권리를 제대로 보호하기 위한 전제라고 다시 한 번 유념하게 되었습니다.



-본문 28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봐도 책 값이 저렴하다고 볼 수는 없는데 편집이 제대로 되지 않은 점은 큰 실망이었습니다. 

- 책의 후반부에는 저자와 역자의 대담이 실려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현안 문제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질문을 역자가 스트로슨 교수에게 건네고 그에 대한 상세한 답변을 일독할 수가 있었는데요. 확실히 미국의 법학자는 근본적으로 법에 대한 인식이 시민의 권리와 비교해 봤을 때, 차이가 난다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귀한 읽을 거리였습니다.   

-저자가 글 초반에서 밝히는 '사상의 시장'이라는 언급은 충분히 신선했는데요. 저자는 법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어떻게 보면 사회학적인 측면에서도 이 형모 문제를 다루고 있었습니다. 논지의 설득력 측면에서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러한 포용성은 인기 없는 생각을 말하는 사람들에게까지 확대되어야 하며,특히 생각을 가장 자유롭게 방송하고, 토론하고, 논쟁해야 하는 대학에서 확대되어야 한다.

미국연방대법원은 2011년 사건에서 앞의 수정헌법 제1조 원칙을 강하게 재확인하였는데, 여기서 미국연방대법원은 개인에게 극도로 상처를 주거나 모욕적인 표현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지지했다.

정부는 표현이 구체적이고 즉각적이며 심각한 해악을 직접적으로 끼칠 때에만 억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극우" 및 유사 단체의 시위에 직면하여 고무적으로 분명해졌다. 우리는 혐오 이데올로기의 폭력을 규탄하고 평등, 포용성, 집단 간 화합에 대한 국가의 새로운 헌신을 축하하는 놀랍고 초딩적인 표현과 평화 집회가 쏟아지는 것을 목격했다.

혐오표현금지법들은 지나치게 모호하고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기 때문에, 고소인과 집행 당국의 주관적 기준에 따른 집행이 필연적이다.

탐탁지 않거나, 불온하거나, 두려움을 주는 생각을 잠재우고자 정부가 힘을 행사하면 자유와 민주주의를 훼손할 뿐만 아니라, 혐오표현금지법에 생명을 불어넣는 평등이라는 목표를 전복시킨다.

그러나 혐오표현금지법은 종종 다른 민주주의 국가에서 시급한 공공정책 이슈에 대한 생각을 표현하는 것, 심지어 정치 후보자들과 관료들의 표현을 조사하고, 기소하고, 처벌하는 데 사용되어 왔다.

피할 수 없는 사실은, 탐탁지 않고, 불온하고, 두려움을 준다는 혐오표현금지법의 대상 자체가 정확하게 정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검열에 반대하는 페미니스트들은 그러한 법ㅂ적 개념이 예상대로 여성의 평등이나 안전을 증진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성소수자를 포함하여 권한이 없는 집단을 대리하는 표현을 억압하는 데 사용될 것이라고 오랫동안 경고해 왔다.

그것은 국가가 자신의 집에 혼자 앉아 있는 사람이 어떤 책을 읽어야 하거나 어떤 영화를 하는지 명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별에 대해 생각해 본다면, 여성이 미국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또한 많은 대학의 학생 인구의 다수를 구성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남성이 우리 사회의 많은 중요한 영역에서 "지배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소설미디어는 혐오표현에 의해 폄하된 사람들이 건설적인 목적을 위해서 혐오 메시지를 공유하는 것조차도 금지했다.

부활하는 나치즘에 대한 독일 대응의 주요한 문제점은 나치가 너무 많은 표현의 자유를 향유했다는 것이 아니라, 나치가 그야말로 자기 멋대로 하고 싶은 을을 했다는 것이었다.

정부 및 민간 부문 기관은 모든 사회집단 간의 찿별 철폐, 다양성 및 상호작용을 촉진하기 위해 전통적으로 과소 대표되어 온 집단에 손을 내밀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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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락의 집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01
이디스 워튼 지음, 전승희 옮김 / 민음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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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의 브라운스톤에서 태어난 이디스 워튼은 부유한 가정에서 거의 부족할 것 없이 자라납니다. 여기서 워튼이라는 성은 결혼한 남편의 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결혼 전, 그녀의 성은 존스였습니다. 그녀의 부친은 조지 프레데릭 존스로 뉴욕에서 이미 존스 가문은 부동산으로 큰 돈을 벌게 되었는데, 그러한 일련의 과정은 세인들의 큰 관심을 끌기도 했습니다. 1866년부터 1872년까지 존스 가족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 등으로 여행을 하게 되는데요. 그때 젊은 이디스는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에 능통하게 됩니다. 1872년 가족이 미국으로 돌아온 후에 뉴욕과 뉴포트를 오가며 지내게 되었고, 이 시점에 가정 교사로부터 면밀한 교육을 받게 됩니다. 그녀는 11세가 되던 해에 처음으로 글쓰기를 시작했는데, 어머니의 소설에 대한 부정적 의견으로 인해, 결국 시를 쓰는 것으로 타협하게 되는데요. 1882년 아버지의 건강을 위해, 그녀의 가족이 유럽으로 떠나지만, 결국 그녀의 아버지는 1882년 칸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합니다. 뒤이어 1885년 4월에 당시 23세였던 이디스는 12살 연상의 에드워드 로빈스 워튼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이 시기부터 그녀는 습작이나 다름없는 여러 단편을 쓰기 시작했고, 동시에 유럽을 오가며 인생의 여러 체험들을 하게 됩니다. 특히 이디스는 당대의 문호인 헨리 제임스와 친밀한 우정을 유지하기도 했는데요. 그렇게 여러 자선 활동에도 끊임없이 힘을 보탰던 그녀는 1920년에는 순수의 시대로 소설 부문 퓰리처상을 수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녀는 수년 동안 이어졌던 프랑스에서의 경험을 통해, 스스로를 '프랑스 제국주의의 헌신자'로 칭하기도 했는데요. 그녀가 상류 계급 여성에게 주입하는 편견을 거부했던 점을 고려해 본다면, 프랑스의 철지난 제국주의를 나서서 옹호했던 점은 뭔가 잘 매치가 되지는 않습니다. 1930년 이후, 그녀의 말년에는 여러 지식인들과 교류하고 특히 F. 스콧 피츠제럴드와의 만남은 큰 유명세를 타기도 했는데요. 1937년 6월, 프랑스에서 체류하고 있던 이디스는 갑자기 찾아온 심장마비로 쓰러져, 같은 해 8월, 자신의 부친과 마찬가지로 뇌졸중으로 굼을 거두게 됩니다. 이후 그녀의 유해는 프랑스 베르사유 인근에 있는 묘지인, 시메티에르 드 고나르스의 미국 개신교 구역에 묻혔습니다. 그녀의 이 작품은 원제, "The House Mirth"로 1905년에 미국 뉴욕에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2년 4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워튼의 이 소설은 19세기 말 뉴욕 상류사회에 속한 다소 복합적인 인물인 릴리 바트를 주요 시점으로 두고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막 서평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저는 미국의 어느 리뷰어가 남긴, "오 가련한 릴리! 그렇게 삶에서 발버둥을 쳤으면서도 돌아온 건 그렇게 원하던 행복이 아니었구나."라는 문장이 유독 생각 나는데요. 이제 1권을 소화했지만, 워튼이 구축한 릴리 바튼의 인물 조성에 절로 감탄이 나왔습니다. 더불어 버지니아 울프와는 달리 주요 인물에 대한 배경과 극을 이끄는 인물들의 서사가 이어지는 사건들을 통해 서서히 드러나는 점도 마음에 들었는데요. 극의 초반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6장은 비로소 주인공인 릴리의 진면목을 독자들이 대면함과 동시에, 이 소설의 중요한 축이기도 한, 로런스 셀든의 존재감을 마찬가지로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릴리는 여기에 등장하는 다른 여성들과는 달리 뛰어난 미모와 아름다운 몸매 그리고 확실한 언변까지 갖춘 매력적인 캐릭터입니다. 또한 지난날의 힘든 유럽 생활에서 체득한 신중함이든지, 주변의 인물들로부터 자신의 평판을 관리하고자 하는 노력까지, 그저 수동적인 여성 캐릭터라고 볼 수 없는 측면이 있습니다. 뉴욕의 소위 상류 계층에서 자라난 그녀는 비극으로 이어진 아버지의 파산과 그로 인해 미망인이 된 모친과 함께 어린 시절, 유럽을 돈 없이 전전하게 되면서, 상류층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그녀에게 무엇보다 자신을 드러내고 운신의 폭을 갖게 해주는 '돈'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그것이 자신의 행복과 미래의 결혼 생활과 결부될 수밖에 없다고 확신하게 되는데요. 여기까지 드러난 그녀의 이런 내력은 과연 전체적인 스토리 라인에서 어떻게 작용하게 될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그럼에도 릴리라는 인물이 전형적인 캐릭터성에 치우치지 않은 것은 전적으로 이디스 워튼의 특별한 작업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릴리 자신은 유럽에서 돌아와, 어떻게 보면 조금은 까다로울 수 있는 고모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했고,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거래도 할 줄 아는' 영악함도 갖고 있습니다. 더욱이 버사 도싯, 그레이스 스테프니를 비롯, 극에 등장하는 뉴욕 사교계의 여성들로부터 어느 정도 견제와 드러나지 않은 질시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도 '인간의 명예에 대한 최소한의 금도'를 인정하고. 후에 등장하는 버사 도싯의 함정을 알면서도, 스스로가 판단해 입을 다물기도 합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행복을 위해, 남자를 잘 선택해야 한다는 압박을 어느 정도 분산해 보려고도 하는데요. 다만, 퍼시 그라이스와의 애매한 관계는 결국 뜬금없는 그녀의 노름빚으로 흐지부지 되는데요. 이 노름빚과 함께 거스 트레너의 호의는 후반부에 그녀에게 어쩔 수 없는 파국으로 이어집니다. 그럼에도 줄곧 그녀에게 견실한 우정을 보이는 주디 트레너의 존재와 사교계에서 자신의 평판을 지키고 스스로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점은 아마도 그 시대 젊은 여성들의 욕망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렇지만 앞서 말한 6장 이후, 그녀가 안고 있는 인간 관계의 본질을 파악한 로런스 셀든의 진지한 충고는 아마도 13장의 파국을 예견한 것으로도 읽혔습니다. 더욱이 릴리가 무분별하게 노름빚을 지게 되는 설정 자체는 그녀가 가진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매번 그녀가 적절한 판단의 시점을 놓치게 되는 일도 발생합니다. 이런 릴리 주변의 억눌리고 비틀린 남성 캐릭터들과 달리, 사색을 즐기고, 교양을 갖춘 남성으로 여겨지는 셀든은 후반부 그 문제의 활인화 무대 이후, 릴리와의 짧은 욕망 직면했음에도 처한 현실을 고려해. 누구보다 이성적인 결정을 내린 인물입니다. 이렇게 후반부에서 나타난 릴리와 로런스의 극명한 엇갈림은 어느 정도 2권의 파국을 담은 장면들을 예상케 하는데요. 워튼은 릴리가 거스 트레너와 그 '위험한 거래'를 자기본위적으로 생각하는 여주인공의 캐릭터성 자체와 마찬가지로 2권에서 그녀의 불행이 어느 정도 예상되기도 했습니다. 

누구보다 뛰어난 미모를 갖고 있는 여성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교계에서 자신을 어필할 수밖에 없는 것은 어쩌면 운명과 비슷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여주인공인 릴리는 누구보다 이 판에서 성공해야 한다는 절박한 욕망을 갖고 있는데요. 거기에다 그녀는 어린 시절 혹독한 경험으로 인해 스스로를 감추면서 시의적절한 언변을 구사하는 캐릭터이기도 합니다. 물론 워튼은 그녀를 전형적으로 영악하고 계산에 능한 단순한 캐릭터로 치부하지는 않았는데요. 그렇지만 부유한 남성을 선택해, 그것을 기반으로 자신의 행복과 연계하려 하는 전형적인 메커니즘이 지금 시대에서는 크게 설득력이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우리의 현실에서도 사회가 관습적으로 결혼 전반에서 결혼할 남성의 소득이 중요한 문제라고 은연 중에 이를 인정하고 있기에 행복에 돈이 연결되는 구조는 시대를 넘어서는 화두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미 로런스 셀든이 자신의 경험을 통해, "돈 없이 사는 방법도 다양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러한 속물적 사고에 거리를 두고 있는 부분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결국 이 두 남녀 주인공은 (후반부 릴리의 진정한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엇갈린 길로 나아갑니다. 워튼이 간접적으로 설명하는 대로, 셀든은 아마도 돌아가는 상황에서 그 답게 이성적인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럼에도 워튼이 만들어내는 교훈과 그녀 특유의 나레이션과 함께한 인간 본질의 탐구는 작품 속의 인간 사회의 군상들과 맞물려, 여주인공인 릴리의 행적을 제 나름대로 예상해 보게 됩니다. 끝으로 인간 내면의 본질을 절로 의심하게 만들었던 후반부 거스 트레너의 술수로 겪은 위기로 릴리는 이제야 세상을 떠난 부친의 현실적 고난을 여실히 이해하게 되는데요. 이러한 여주인공의 성찰이 과연 2권에서 어떠한 변화를 맞게 될지 몹시 궁금합니다.    

-극중에서 셀든이 자신의 사촌을 통해 간접적으로 피력하는, '착한 여자'에 갖는 의미는 작가의 서술로 어느 정도 드러납니다. 육체적 매력이 전무하고 그저 선한 본성의 여자가 아름다운 미모와 현란한 언변을 구사하는 아이콘에게 대적할 수 없음은 우리도 대충은 인정하고 있는데요. 다만, 그런 미모를 무기로 가진 여성이 스스로가 만나는 남자들의 성의가 마땅히 있어야만 한다는 식으로 단언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극에서 릴리가 친구의 남편을 통해 얻게 되는 '이 사소한 금전적 이익'은 마치 앞선 맥락의 소위 현실적 풍자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후반부에 릴리에게 가해지는 끔찍한 사건은 그것을 인과응보로 치부하는 것은 문제겠지만 극 전반의 신중한 여주인공의 긴밀한 서사가 무력해지는 인상을 심히 받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그는 그녀의 부드러운 흰 눈꺼풀 끝에 달린 검은 속눈썹이 쭉 고르게 난 모습, 그리고 그 바로 아래 보라빛이 순수한 백색의 뺨으로 녹아드는 모습을 순수하게 객관적으로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거짓말을 해 놓고 스스로 놀라서 자신의 불편한 심정을 목격한 사람을 냉대한 것은 거짓말을 한 것보다 두배나 더 멍청한 것이었다.

바트 양은 겉으로는 대화의 표면을 매끄럽게 항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동안에도 물밑에서 별도의 사고를 진행시킬 수 있는 재능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릴리는 어떤 여자는 남자를 데리고 놀다가 마음껏 자신의 계획에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는 존재로 내쳐버릴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그녀가 부러웠다.

그녀는 자신의 미모를 선한 목적을 위해 쓸 수 있는 힘으로, 세련됨과 훌륭한 취향을 막연하게나마 전파하는 일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지위를 획득할 기회를 주는 자원으로 생각하고 싶어 했다.

그들은 자신들 주변의 다른 꼭두각시들의 모든 행위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따라 하며 삶을 영위하는 수많은 자동인형 같은 인간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성격상 불편한 진실들은 그때그때 대면하는 편이라 자신의 우행의 대가로 받아들일 만한 사정에 대해 공정한 진술을 듣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건 모든 기혼녀는 해도 괜찮고 처녀는 하면 안 되는 것 사이의 구별이라는 지긋지긋한 사실로 귀착되었다.

미모의 여성이 유부남과 연애 놀음을 한다면 다만 그녀에게 다른 기회가 거의 사라져 버렸을 정도로 그녀가 궁지에 몰린 것으로 간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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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기자들의 위키피디아 - 우리 사회를 망치는 뉴스의 언어들
강병철 지음 / 들녘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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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쓴 강병철 기자는 서울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합니다. 2008년 서울신문에 입사한 뒤, 문화부, 사회부 법조팀, 사회2부 서울시청팀, 정치부 국회부 등 경력을 쌓고 현재는 정치부 외교안보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과거 이명박정부의 '국무총리실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 보도'로 한국기자협회 기자상을 수상했는데요. 또한 이달의 기자상을 3회 수상할 정도로 언론계에서 유명한 민완기자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2019년 12월에 출간되었고, 제가 구입한 판은 초판 2쇄였습니다.

서두에서 현직 기자이기도 한 저자가 직접 '기레기'라는 단어를 직접 언급할 정도로 현재 언론계의 문제점들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전에 어떤 정치 평론가가 우리나라 기자들의 기사 송고 형태를 "어느 정도 사실에 기반해 쓰되 그 사실 전체를 결코 드러내지 않는다"는 우리 언론계의 행태를 꼬집은 평가 한 줄이 떠오르는데요. 더욱이 언론계에 몸담고 있는 많은 기자들과 관계자들이 우리 국민들에게 비판적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저 역시 이미 90년대부터 우리 언론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소리를 주변에서 들어왔으니, 소위 '언론 무용론'의 기원은 이처럼 오래되었다고 봐도 무방해 보입니다. 또한 이 글 2장에서 인용되고 있는 과거 혼란한 해방 정국에서 모스크바 3상 회의와 관련된 모 언론사의 오보기사는 외부의 소식을 제대로 알기 힘든 많은 국민들을 오판하게 만들기도 했는데요. 이것을 선동이라고 불러야 할지 아니면 의도된 조직적 프로파간다라고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보는 것과는 달리 언론이라는 권력 자체가 얼마나 세심한 관리가 필요한지 앞선 역사적 사건은 이를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 실린 언론계와 기자들의 잘못된 기사 송고 행태는 크게 4개의 주제 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장의 포퓰리즘에서는 정치적으로 맞서고 있는 상대 당에 대한 어느 정책과 주장들을 '포퓰리즘'으로 몰고 가면서 그것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를 아예 삭제하게 만드는 행태를 다루고 있는데요. 포퓰리즘이 어느 정도는 민주주의에 기반하고 있는 점은 부정할 수 없지만 이 포퓰리즘을 바탕으로 정치 권력을 얻은 자들은 전혀 대안이나 개선을 위해 노력할 의지가 없는 것은 자명합니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의 사례를 보면 그가 저임금의 불만에 가득 찬 하위 계층의 백인 남성들을 선동해, 표를 얻고 연방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거의 극명하다고 여겨지는데요. 하지만 이 포퓰리즘의 인식적 걸개가 의도적으로 왜곡되어, 현재 우리나라에서 비판의 입을 닫기 위해 쓰이고 있는 점은 상당히 이해할 수 없는 행태이기도 합니다. 저자가 우리의 정치와 이를 다루는 언론계의 기자들이 양산하고 있는 '포퓰리즘' 자체를 여실히 잘 분석해내고 있습니다만 저는 그 이면의 민주주의가 많은 시민들의 복지를 보장하는 소위 '국가의 의무'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로널드 레이건이 소위 복지 여왕이라는 단어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이후로, 신자유주의자들과 보수 우파들에게 이 사회 부조 및 복지는 포퓰리즘과 동일한 의미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이와 관련해, 글의 2장인 '시장질서'에서 "만약 시장에서 무능하다는 이유로 도태되어야 한다면 영세 자영업자들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라는 반문은 역시나 제 마음을 먹먹하게 만들었는데요. 마찬가지로 최소한의 사회적 복지를 축소한다면 국가의 지원이 나날이 시급한 계층의 사람들은 과연 이 사회에서 어떻게 버텨 나가야 하는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고 생각합니다. 소위 기득권층이 선민 의식과 사회 진화론을 바탕으로 능력주의에 기반한 사회를 사회 전체에 철저히 강요한다면 그것 자체는 모두의 이익에 반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은 틀림없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의 민주주의가 공익을 위한 버팀목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3장의 공동체에 대한 부분에서 언론은 국민들의 법감정을 기반으로 사법부의 판사가 행하는 일부 판결에 대해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말로 이를 비판하기도 하는데요. 물론 강력 범죄에 대한 국민들의 감정은 좋지 않은 것은 분명합니다. 특히 저자가 분석하는대로 법감정 자체를 합리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수단은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만약 감정에 고양된 법감정으로 입법 행위가 이뤄진다면 그것 자체로 공익과 법치에 도움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실 언론이 좀 더 집중해서 비판해야 하는 부분은 유전무죄 무전유죄와 같은 돈과 권력을 가진자들의 사법부가 내린 비상식적인 판결일 텐 데요. 공화주의에 기반한 사법부가 국민의 눈치를 보는 것이 마땅한 측면이 있다면 '법 앞의 평등'이 철저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판사 한 명이 하나의 사법부로, 그 판사의 양심이 권력에 물들지 않도록 언론과 의회가 이를 감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여겨집니다. 아직도 많은 국민들은 돈과 권력이 많은 자들에게 다른 일반 시민들에 비해 법의 판단이 관대하다고 믿고 있는데요. 저는 판사들이 법과 양심에 기반한 판결을 할 수 있도록 사법 카르텔을 먼저 견제하는 것이 필요하고, 심지어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 또한 언론의 중요한 역할이자 기능이고, 어떻게 보면 민주주의가 권력의 견고한 균형과 분립을 통해, 권력 스스로가 오판하지 않도록 치밀히 고안되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과거 유럽의 절대시기에서 프랑스의 삼부회가 일부이긴 했지만 권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해 온 점을 인식해 본다면, 인류의 역사에서 권력의 왜곡을 방지하기 위해 우리의 이전 세대들이 큰 노력을 기울여 왔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끝으로 4장 정치에서 보이는 '내로남불'과 '종북과 적폐'는 확실히 근래 우리의 정치를 묘사하는 주제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대한민국 정치는 발전하고 있는가"라는 저자의 질문은 실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데요. 이러한 선거를 통해 순환되는 정치 권력 자체가 다양한 국민들이 존재하는 현대 사회에서 필연적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투표가 끝난 이후에는 전혀 권력이 견제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한계도 명확해 보입니다. 특히 주민소환제에 대한 선출 권력의 노이로제는 이를 반증한다고 생각하는데요. 건전한 행정과 이에 기반한 정치의 협력은 아마도 가면 갈 수록 시민들의 기대와 멀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더욱이 대치하고 있는 양당 정치에서 건전한 토론이 아닌 구시대적인 이념 대립과 양비론에 기반한 건설적인 비판의 함몰은 거의 주류적인 해법이 되었습니다. 저 역시 좋아하지 않는 단어인 '내로남불'은 어떤 정치인의 과오를 비판하기 위해 그가 벌인 잘못된 정치적 행태를 마땅히 성찰해야 하지만 우리 편이 하면 괜찮고 상대가 그러한 일을 벌이면 가혹하게 비난하는 행태를 뜻합니다. 그런데 어느 정치인의 비위나 비리 행위가 이 내로남불로 그 본질을 흐리게 되어 더 이상 정치의 개선을 어렵게 만드는데요. 과연 이런 행태에 언론이 가세하는 것이 옳은 것이냐는 질문은 거의 자명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러한 과정에서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정치 혐오'는 더욱 심해지고 우리의 정치는 거의 희망이 없다고 믿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근래 시민들 사이에 많이 회자되고 있는 '정치의 효능감'은 그것의 미래가 밝지 않다고 보는 것이 일견 타당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따라서 이 4장의 여러 주제 별 분석은 우리 정치의 직접적인 문제와 더불어 앞으로 언론이 어떻게 더 나은 정치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지를 제언한다고 여겨집니다.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의 언론은 민주주의의 보루로써 시민의 공익에 이바지해야 하며, 기득권 권력을 비롯한 여타 권력과 거리를 두고, 사법부의 판사와 같은 독립성이 보장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또한 특정 언론이 특정 정치 집단의 이익에 기여하는 쪽으로 기사를 송고하는 행태도 지양해야 할 텐 데요. 사실 무분별하게 카르텔이라는 단어로 우리 사회를 분석하고 싶지는 않지만 검찰과 가까운 기자들, 대기업에 순응한 기자들, 특정 정당의 헤게모니에 자신의 이익을 건 기자들 등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본문에서 잠깐 언급되지만 '완전한 자유 시장 체제'란 극단적 자유지상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이 어떤 자들임을 우리가 인식하고 있다면 완전 자유 시장은 거의 허구임을 쉽게 도출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실은 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다름 아니라 뉴스를 소비하는 층의 성격이 변했다는 점이다. 언론의 저열한 습성을 걸러내는 사람들의 눈은 예전에 비해 훨씬 더 매서워졌다.

복지 정책은 수혜 계층이 특정되고 투입되는 예산이 투자라기보다는 지원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기에 유독 포퓰리즘이란 비판에 쉽게 직면한다.

그런데도 모든 지자체의 무상 복지 정책을 한 데 묶어 포퓰리즘이라 몰아붙이는 건 복지 정책 자체에 대한 보수 언론의 화학적 거부 반응일 뿐이다.

즉 이른바 ‘좌파 정부‘라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성격을 비판적으로 규정하기 위해 야당이 찾아낸 개념이 바로 포퓰리즘인 셈이다.

민주주의는 다수의 지지를 바탕으로 다수가 원하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정치 시스템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소수의 지지만으로 권력을 얻는 게 불가능하다.

그런 공약은 정치인의 지향점과 양심에 상관없이 표를 얻기 위해 잠시 표정을 바꾼 것일 가능성이 높다.

아무렴 블루칼라와 운동권 학생, 무직자, 시민단체 활동가들만 모였다고 해서 이를 간단히 불순한 회합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실망감이 민주주의에 대한 환멸이나 독재체제에 대한 옹호로 나아갈 이유는 전혀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시민들의 입을 틀어막고 만든 법과 제도에는 늘 정치권력 가까이에 붙어 있는 자본 권력과 지식 권력, 이익단체, 지역 유지, 언론 권력 등의 의견만이 한껏 반영됐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고전 경제학의 시장경제 체제를 현실 속에서 그대로 실현하고 있는 국가는 없다.

대한민국을 비롯한 현대사회의 모든 국가들은 시장경제와 계획경제의 그 사이 어디쯤에서 적절한 정부의 역할을 고민하고 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협력을 강화하려는 정부 정책은 일종의 시장 개입이다. 그런데 재벌 대기업들이 말하는 자유주의 시장질서는 자유방임주의 시장경제 체제다.

관리해야 할 히키코모리의 기준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정책이 실제로 시행된다면 직업이 없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며 고시원에서 가족 없이 혼자 게임과 인터넷 서핑을 주로 하며 지내는 사람들에 대한 이웃의 편견은 극심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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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3-10-07 22: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복지를 위한 노력과 지원이 죄다 ‘포퓰리즘‘이란 단어로 평가 절하되어버리는 점이 황당하면서 절망스럽습니다. 그런 근본 없는 왜곡이 일부 극우 지지층들에게 효과를 발휘하는 건 제대로 자기 생각을 갖지 않음의 결과겠지요? 저도 이 책 읽어보고 싶네요.

베터라이프 2023-10-07 23:43   좋아요 1 | URL
넵 맞습니다. 복지 지출에 대한 담론 자체를 포퓰리즘으로 몰고 가는 게 꽤나 많이 보이는 수법이었죠. 기사를 쓰는 기자들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이 글에 등장하는 사례들도 이를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음.. 극우에 경도되어 있는 사람들은 특히나 자극적인 주장들에 너무 노출되어 있죠. 그렇다고 이분들을 전부 정치적 분별력이 전무한 사람들로 몰 수는 없지만 극우가 보통 인종주의와 진보 좌파 격멸을 기본으로 깔고 있으니 정상적인 민주주의가 아니라 과두제보다 문제가 많은 전체주의와 엮일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특히나 극우 포퓰리즘은 지금 유럽에서 악명이 높지요. 그리고 우리나라처럼 대학 진학률이 높은 국가에서 극우를 그저 맹종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은 실로 이론적으로는 쉽게 설명이 되지 않네요. 일단 이 책은 기자들이 기사를 쓸 때 사회와 시민들을 오도하는 듯 보이는 여러 주제들을 묶어서 규명해 내고 있습니다. 글 전반은 꽤 평이하고요. 기자들의 안 좋은 습성들까지 담고 있어서 교훈으로 삼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한번 일독해 보시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