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운데이션 파운데이션 시리즈 Foundation Series 1
아이작 아시모프 지음, 김옥수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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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작 아시모프는 일종의 장르 소설이라 볼 수 있는, SF 소설계에 있어, 로버트 A. 하인라인과 아서 C. 클라크와 더불어 빅3로 불리는 거장입니다. 그는 미국 뉴욕 출신으로 뉴욕시 공립학교에서 수학했고, 잠시 뉴욕 시립 대학에 다니기도 했는데요. 그는 당시 미국 대학계의 복잡한 사정으로 인해, 컬럼비아 대학의 의학 과정에 지원했지만 두 차례나 거절 당한 끝에 동 대학 화학 대학원에 받아 들여집니다. 이후 종신 부교수에 이를 정도로 그는 해당 학과에 큰 기여를 했는데요. SF 소설의 초기 경력이라고 볼 수 있는 그의 작품 활동은 1939년과 1950년의 창작으로 시작됩니다. 그 중에 아시모프에게 가장 큰 명성을 가져다 준 작품은 파운데이션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기존 소설에 대한 속편과 전편에 몇 편을 더 출판해 모두가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통일된 시리즈로 자리매김한 파운데이션은 집필 시기상의 차이로 인해, 몇몇 매니아들에 의해서 각각의 편이 독립된 장편으로 인정을 받기도 합니다. 이런 SF 소설 작업 외에, 아시모프는 일반 대중들에게 열린 강연으로도 명성을 떨친 지식인기도 한데요. 특히 대학에서 일할 때, 간간히 강연한 일화들이 아직도 회자되기도 합니다. 이외에 아시모프는 과거 뉴딜 정책 기간의 민주당 정부에 대한 확고한 지지자였고, 이후에도 정치적 자유주의자로 남게 됩니다. 그는 말년에 위험한 심장마비를 겪게 되는데요. 1983년 12월, 뉴욕대 메디컬 센터에서 삼중 우회 수술을 받다가 수혈로 인한 HIV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개인사에 있어 상당히 불행한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1992년 4월 6일 맨해튼에서 사망했을 시, 사인은 신부전이었습니다. 그의 이 장편 시리즈는 1951년과 1979년에 기획되어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여러 판본의 번역 작업 끝에, 2013년10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파운데이션을 지난 2009년 경에 읽기 시작하다가 끝내 완독은 하지 못했는데요. 이 황금가지 판 이전에 나온 현대정보문화사판(2003)을 갖고 있음에도 새로운 번역으로 읽고 싶어 이 판을 구입해 읽게 되었습니다. 조금 이른 평가일수도 있겠지만 이 작품에서 위대한 예언자이자 선구자로 등장하는 해리 셀던을 고찰해보니, 작가인 아시모프가 귀스타브 르 봉에 큰 영향을 받지 않았나 추측해 보게 되었는데요. 아시모프에게 영향을 받은 폴 크루그먼이 이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의문이기도 합니다만 이 작품으로 관통하는 역사심리학이라는 주제는 귀스타브 르 봉의 사회심리학과 닮아있고, 또한 그가 군중에 대한 냉철한 분석을 해왔던 점을 감안해 본다면, 파운데이션에 보이는 군중심리학의 일부 흔적도 마찬가지로 이런 분석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도 읽힙니다. 물론 이 작품이 종래에 알려진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에 영향을 받은 것도 사실인데요. 제국의 멸망이 예정되어 있다는 논법은 뭔가 '역사적 종말론'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이것의 본질은 아마도 역사가 증명하는 완벽하고 영구적인 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분석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이 1편은 '파운데이션'의 기초 작업으로, 앞서 언급한 해리 셀던이 준비하고 활약하게 되는 부분은 좀 더 뒤에서 나오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 도입부에서는 국가를 유지하는 것은 무엇보다 '과학이 가져다 주는 광범위한 이득'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광대한 영역의 제국조차도 쉽게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이 바로 과학이라는 점을 어느 정도 드러내고 있습니다. 또한 종교와 과학 또한 그저 맹신에 이르게 되면 인류가 어떠한 결과를 받아들이게 될지 예측해 볼 수 있는 장면들이 여럿 나오는데요. 이것을 기반으로 전통적인 국가의 영향력은 생산 수단과 동시에 무력을 가능하게 하는 '특별한 자원'에 달려있고 그것이 설사 중앙과 지방에 따르는 다소 느슨한 중앙 체제라고 할지라도, 큰 형태로서 엘리트 지배 체제 전반을 포함한 귀족주의적 신분 체제 역시도 앞의 진술과 밀접하게 관련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아시모프가 이 장편 시리즈의 큰 줄기로서, 정치 체제의 기본 맥락을 시민 혁명이나 공화주의에 주안점을 둔 것이 아닌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물론 초기 터미너스 정착 과정에서 파운데이션 조직과 소위 시민 정부 사이의 원초적인 정치 갈등이나, 무섭게 등장한 샐버 하딘의 그 놀라울 만한 정치적 수완은 어떻게 보면 보편적 시민주의 와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눈을 크게 뜨게 만드는 개인의 위기 상황에서의 능력은 어떻게 보면 셀던이 극적으로 예견한 위기의 긴장감을 더욱 증폭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바로 이 '셀던 위기'가 어떤식으로 규명되고 분석될지는 좀 더 읽어봐야 알겠지만 인류 역사의 영속성이라는 대의를 위해, 자신을 바치는 인물들의 서사는 마치 역사의 주(主)가 인간이 아닌 것만 같은 느낌까지 들게 합니다. 보편적 인간보다 체제 자체가 숭고하다고 항변했던 수많은 파시스트들이 떠오를 정도로, 지금까지 아시모프가 보인 도입은 뭔가 불명확한 부분이 있습니다.

끝으로 그것이 정치적 술수나 연막인지는 모르겠지만 과학의 교조화와 국가를 지탱하는 주요 권력인 전력에 대한 파운데이션 측의 개입은 실로 소름끼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과학을 일부 소수의 전유물로 만들어 파운데이션이 이것을 정치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모습은 다소 충격적이고, 이번 편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인간 자체에 대한 극심한 호불호와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서사는 혹여 작가 본인이 갖고 있었던 인간에 대한 부정적 평가인지는 아직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인간에 대한 아시모프의 분석을 좀 더 살펴보기 위해 저는 다음 편을 연이어 읽어보려고 합니다. 뭐 통렬한 서스펜스 정도의 감상을 이 작품에서 기대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하지만 작품 자체에 있어 뭔가 어두운 분위기가 흐르는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요. 그래서 한편으론 더 읽기가 두려워지기까지 합니다.


시회조직이 붕괴하면서 과학은 수백만 조각으로 산산이 부서질 것입니다. 개개인은 마땅히 알아야 하는 극히 작은 지식만 알게 될 것입니다.

"석유와 석탄으로 돌아갔단 말인가?" 하딘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다음에 있다르는 생각은 마음속에 묻어두었다.

"그런데 그것이 어느 태양계였는지에 관해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네. 유구한 역사의 안개에 파묻혀 버렸다고나 할까. 하지만 학설은 여러 가지가 있지. 시리우스였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알파센타우리, 솔, 또는 시그니61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네. 그런데 한 가지 공통되는 점은 모두 시리우스 성역에 속한다는 사실일세.

"사실 지금 정부는 원자력의 무분별한 사용에 대한 규제 방안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다네."

"인슐린은 칼 없이도 당뇨병을 치료합니다만 맹장염은 수술이 필요합니다.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지요."

"결코 그렇지 않네. 해리 셀던은 시간 유품관에서 이렇게 말했네. 위기가 닥치는 순간마다 우리가 누리는 행동의 자유는 단 한 가지 행동만 취할 수 있도록 범위를 제한시켜야 한다고."

"또 원자력은 그 이상의 위력을 가진 원자력에 의해서만 정복되지."

"우리는 해리 셀던이 미래의 역사적 개연성을 계산해 놓은 걸 알고 있습니다. 또한 언젠가 우리가 제국을 재건하게 된다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고요."

"내가 파운데이션의 보스가 되면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여. 100퍼센트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라고. 바로 그게 이번 위기를 극복하는 비결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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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토크하다 - 팩트 뉴스를 넘어 토크 뉴스의 시대 북저널리즘 (Book Journalism) 85
엄기영 지음 / 스리체어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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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문화방송에 재직 중인 엄기영 기자는 앵커와 MBC 사장을 지낸 엄기영씨와는 동명이인이기도 합니다. 그런 연유로 엄기영 기자의 간단한 약력도 찾기가 힘들었는데요. 그의 약력과 관련해, 그저 한양대 커뮤니케이션 저널리즘 박사과정을 수료했다는 짤막한 한 줄이 전부였습니다. 저자는 국민일보의 기자 생활로 출발해 언론계에서 근 20여년을 버틴 인물이기도 합니다. 대표적으로 MBC 백분토론에 관여했고, MBC의 2022년 대통령 선거 방송에도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현재는 미국 네바다주립대 UNR의 저널리즘스쿨 방문연구원으로도 이름을 올리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그의 이 글은 네바다주립대에서 방문 연구를 할 때, 탈고를 마친 것으로 보여지는데요. 국내 출간은 2022년 1월에 이뤄졌습니다.

유튜브의 등장은 기존 뉴스 미디어의 사실상, 재편을 초래했다고 봐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지난 2007년 이후, 대형 포탈과 공존을 모색하던 각 언론들이 유튜브의 충격적인 미디어 진보로 말미암아 이제는 각 방송사의 뉴스 포맷들이 유튜브에 실시간으로 영상을 송출할 정도로 큰 변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이런 뉴스 미디어의 변화를 현직에 있는 사람답게 꽤 객관적으로 다루고 있었는데요. 여기에 등장하는 '뉴스 토크'라는 용어의 의미는 투표권을 가진 많은 시민들이 정치 전반을 비롯, 그것을 편집해 알리는 미디어 전체에 대한 변혁을 요구했다고 봐도 크게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에 저자는 1장에서, 단순히 뉴스를 전달하는 것보다, 소위 뉴스 토크의 뉴스와 관련된 이슈를 다루는 방법에 대해, "이면에 담긴 맥락을 아는 것이 좀 더 핵심 정보"이기에 이러한 부분을 강하게 원하는 시청자들로 인해, 포맷 자체가 변화되기에 이르는데요. 아마도 이러한 변화 자체는 어떻게 보면 진정한 뉴스에 대한 시민과 시청자들의 욕구가 큰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기본적으로 뉴스를 취급하는 기성 미디어의 변화된 시도는 앵커 스스로가 기자들이 작성한 기사 몇 줄을 읽어내는 데 그치지 않고, 두 양자가 '토크 형태'로 자신이 취재한 기사에 대해 좀 더 세밀한 맥락과 숨겨진 의미 등을 화면을 보고 있는 시청자에게 전달하게 됩니다. 이는 뉴스를 보는 시청자들의 좀 더 깊은 이해를 돕기도 하고, 해당 사건이나 이슈에 대해 방송 이후,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의견을 피력하고 심지어 댓글을 통한 토론이나 확대된 의견 개진까지 이뤄지게 되는데요. 다만, 이러한 변화는 과거 전통적인 언론을 통해 우리가 수용하고 인정했던 진실에 대한 겸허함과 동시에 사실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태도에 대한 즉각적이고 부정적인 개변으로 진행되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이런 부정적 변화는 지난 도널드 트럼프 정권의 백악관 선임고문인 캘리언 콘웨이가 적극적으로 오도한 진실에 대한 거부인, '대안적 사실 alternative facts'의 발명으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단순히 자신이 지지하는 진영에 대한 합리화 수준을 넘어, 그것을 둘러싼 사건과 저변에 깔린 맥락을 사실의 존중으로 이어져, 견실한 토론의 무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정치꾼들이 난립하는 최악의 야바위 공연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에는 저자가 언급하고 있듯, 유튜브를 통해 영향력과 수익을 얻기 위하여 전혀 사실과 관계없는 내용들을 전방위적으로 확대 재생산하는 것에 이르게 되는데요. 바로 이 부분에서 일찍이 존 듀이가 강조한 시민들의 정치적 변별력이 무엇보다 필요해지는 시점이 도래했다고 여겨집니다.

저자는 2장에서 홍준표 대구 시장과 유시민 작가의 지난 토론 방송과 이들의 뒷얘기들을 언급하면서 양쪽 진영에 있는 유력 인사들이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며, 입장과 해석에 대한 열린 토론을 할 수 있는 부분을 상당히 높게 평가하고 있었는데요. 물론 홍준표 대구 시장의 토론 방식이 전부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유시민 작가가 전에 언급한 것처럼 상대 진영에 어느 정도 토론이 가능한 사람이 많지 않다는 점은 우리 정치가 어느 지경에 이르렀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지난날 계몽주의의 유산이기도 한, '진실에 대한 겸허한 태도'는 우리의 정치가 정치꾼들의 이익을 위한 무대가 되었을 때부터 거의 악랄한 방식으로 매몰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사실을 끊임없이 비트는 데 큰 재주를 보였던 인사들이 그저 당과 지지자들에게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그저 존경을 받는 현실은 정치 전반이 시민들의 변별력에 의해 전혀 걸러지지 않고 있다는 반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끝으로, 유튜브와 같은 혁신적인 통합 미디어의 등장은 기존 언론계의 큰 변화를 초래했습니다. 물론 이 유튜브의 등장이 앞으로 정치적 진정성을 얼마나 대변할 수 있을지는 상당히 불확실해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더욱이 미국을 비롯한 서구 유럽의 극단주의자들의 발호는 마누엘 카스텔이 예견한 미래는 분명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미래 세대의 건전한 정치를 위해 얼마나 실효성 있는 진보를 거둘 수 있을지는 마찬가지로 불명확합니다만 진보와 보수 양자가 서로를 위한 건실하고 상식적인 '다양한 미디어 언론'을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만 하는 점은 분명합니다. 극단적인 언사와 그것의 저열한 나르시시즘을 선동해, 짭짤한 수익 만을 거두려는 가짜 미디어들이 범람하는 시점에 우리는 더욱 우리 자신을 교육해야만 하는 이 사활적 의무를 잊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필자가 생각하는 토크 뉴스란, 진행자와 출연자가 자유로운 대화를 통해 대중이 관심 있어 하는 이슈를 전달하고, 의견과 관점을 담아 분석하는 뉴스 형식이다.

다루는 이슈에 대해 진행자가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하고, 패널이 충분한 배경 지식과 자신의 관점을 바탕으로 시원시원하게 답변할 때 듣고 보는 즐거움이 생긴다.

전문성을 가진 진행자들은 대선 주자들의 답변이 부족하면, 어물쩍 넘어가는 게 아니라 묻고 또 묻는 방식으로 파고들었다. 이런 질문 방식은 격렬한 토론이 아니어도, 시청자들에게 속 시원한 대리 만족감을 충분히 줬다.

실제로 많은 연구들은 유뷰브 진행자나 출연자들이 구독자의 정치 성향에 맞는 이야기를 하면, 구독자들은 검증되지 않은 발언이라도 사실로 믿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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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3-08-22 20: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난번 알렉스 캘리니콜스의 책도 그렇고 베터님 읽으시는 책들이 제가 관심 가는 주제가 많네요.
막상 읽기는 미루게 되는 어려운 주제라서 대리만족 할때가 많습니다만 ^^; 2장에 나온 홍준표,유시민 토론은 어떤 장면인지 알 것 같아요.ㅎㅎ 각자도생에 팩트 체크는 물론 크로스 체크까지 해야하는 어려운 현실에 놓여 있네요.

베터라이프 2023-08-22 20:54   좋아요 1 | URL
제가 원래는 민주주의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렇게 찾다보니 정치와 경제 쪽 글을 읽게 되었고, 결국 민주주의의 약화와 심각한 불평등의 주된 원인이 신자유주의임을 알게 되었죠.
사실 말씀하시는 대로, 이쪽 책들을 이해하기 위해선 여간 노력이 필요한 게 아니더군요. 결정적으로 아주 재미가 없죠..... ㅠㅠ
그리고 홍준표 시장이 그래도 보수 우파 쪽에서는 토론이 잘 되는 인물임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가 유시민 작가에게 하는 그런 낯 뜨거운 수사라고 해야 할까요. 그 얕은 평가에 저는 동의하지 않는 편입니다.
요즘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년에 고민했던 즉, 경제 엘리트들이 정치를 소수의 사적 이익의 무대로 삼아, 자본이 막대한 이득을 취하게 하는 고질적인 사회체제적 문제를 공익에 맞게 개선하는 데 있어 과연 정치와 법이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겠는가에 대해 고심하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전혀 철회되지 않은 시점에서 언론을 손아귀에 넣으려는 시도는 엘리트들이 안보를 위해 시민을 감시하는 체제를 구축하려는 시도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에 해악이 될 텐 데요.
과거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으로 인해 세계 민주 정치의 매커니즘이 완전히 변질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윤 대통령의 당선도 바로 이런 맥락 가운데에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요. 증오를 부추겨 그것을 정치적 이익으로 삼는 굴절된 정치가 이미 시작되었으니, 과연 이것의 결말이 대체 어디서 어떻게 끝날지 걱정입니다....
저 같은 사람은 달리 주변 머리도 없고 할 줄 아는 거라곤 책이나 읽을 수 있는 것 밖에 없으니 앞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해 보려고 합니다.
미미님.. 이렇게 매번 구차한 저의 서재에 글을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글과 함께하시는 삶이 더욱 윤택하시길 바랍니다~
아.. 마지막은 뭔가 쓸데없는 주례사 느낌이라고 보실 수 있는데, 그냥 기분 탓일 겁니다 ^^;;;



 
자유주의와 그 불만 Philos 시리즈 15
프랜시스 후쿠야마 지음, 이상원 옮김 / arte(아르테)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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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역사의 종언'으로 익히 알려져 있는 프랜시스 요시히로 후쿠야마는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의 하이드 파크 인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일본계 미국인 2세로 목사 훈련을 받았고, 시카고 대학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통해, 종교학을 가르쳤습니다. 어머니는 카화타 토시코 후쿠야마로 일본 교토에서 태어나 교토대학 경제학과 설립자이자 오사카 시립대학 초대 총장인 가와타시로의 딸이기도 합니다. 후쿠야마는 이런 지적인 부모 밑에 태어나 일찍이 학업에 눈을 뜨게 되는데요. 코넬 대에서 앨런 블룸의 지도하에 정치철학을 공부하면서 고전학 전공을 했고, 처음에는 예일대에서 비교 문화를 공부하다, 롤랑 바르트와 자크 데리다에게서 공부하기 위해 6개월 동안 파리로 갔지만 그는 이내 환멸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연유로 하버드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 과정으로 과감히 진로를 틀게 되는데요. 이곳에서 그는 새뮤얼 헌팅턴, 하비 맨스필드와 함께 공부했고, 학위를 받은 이후인 1979년에 글로벌 정책 싱크탱크인 랜드 연구소에 합류하게 됩니다. 후쿠야마는 첨예한 냉전의 시기에서 서구를 대표하는 보수주의 정치 이론가로 명성을 쌓게 되었고, 특히 과거 레이건 행정부를 있게 한 핵심 기여자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이와 관련해, 네오콘으로 알려져 있는 어빙 크리스톨이 신보수주의를 이론화 하기 전부터, 후쿠야마가 이들 사상에 기여한 부분 역시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요. 공교롭게도 이런 그가 2006년에 '네오콘의 종말'을 부르짖은 점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Liberalism and Its Discontents"로 2022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이듬해인 2023년 3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습대로 전통적 보수주의가 공동체를 위한 혹은 모든 시민들의 공통된 도덕적 가치에 힘을 쏟는 것을 견지하는 사상이라면, 이 글에서 드러난 후쿠야마의 일관된 주장은 충분히 그를 보수주의자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오늘날 평범하지 않는 외양으로 읽히는 '경제적 보수주의'는 신자유주의와 어느 정도는 결탁한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약간의 불편한 고백이라면, 후쿠야마를 신자유주의자와 다름 없는 인물이라 취급했던 저의 고질적인 편견을 어느 정도 불식하는 데 이 책이 도움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가 자신의 논저를 통해, 미국에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자신들의 민주적 정부가 예전의 '고전적 자유주의'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당위입니다. 물론 이 점을 중요한 논점을 삼고 논거를 제시하는 과정에 우파의 극단주의자들과 진보적 좌파 자유주의자들을 동일선상으로 놓고 이를 비판하는 과정은 정치사상적 맥락에서 크게 설득력이 부족했다고 판단됩니다. 과거 미국 정치에서 고찰해 봐도 근 2세기 동안, '미국의 좌파'는 거의 유명무실한 존재였으며, 1990년대 빌 클린턴을 비롯한 소수 리버럴들이 벌인 신자유주의로의 영합을 무슨 '자본주의와 타협한 좌파'로 몰고 가기에는 그 논리적 한계가 명확하다고 여겨집니다. 더불어, 후쿠야마는 고전적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는 명목상 별개의 사상으로 규정하면서도 1980년대 이후 진행된 신자유주의화가 이를 기반으로 한 신자유주의자들의 사실상의 사회파괴적 오판을 다소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요. 이 부분 역시 쉽게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후쿠야마는 4장에서, "신자유주의가 극단적 불평등과 금융 불안을 초래하여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했다"고 강조합니다. 다만 앞의 3장 후반부에서,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문제가 잘못된 전제들에서 출발해서가 아니라, 그 전제들은 옳았으나, 단지 미완성의 것이기에 아주 역사적 불확실성에 처했다"고 약간의 변명을 첨부하고 있는데요. 물론 그는 신자유주의가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다소 멸칭으로 쓰이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우리가 신자유주의에 대해 명확히 이론적 구분을 해야 하는 것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과 밀턴 프리드먼이 주창한 '경제적 신자유주의'와 그 여타 다른 분류, 즉 사회학적 맥락의 신자유주의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앞선 사회적 의미로서의 멸칭과 부정적 의미들을 함께 포함하고 있는 (정치사회학적) 신자유주의를 오로지 경제적 신자유주의만으로 구분해 이해하는 것이 사뭇 필요하다는 주장은 저에게는 조금 복잡한 감정을 갖게 했습니다. 이미 많은 신자유주의자들이 자유주의 자체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는 부분을 고려해 본다면, 비슷한 맥락으로 오늘날 극단적 우파 포퓰리즘이 자유주의적 가치와 그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자유'를 팔아먹고 있는 상황이라 묘사할 수 있습니다. 결국 자신들을 자유주의와 동급으로 취급하는 신자유주의자들의 눈에 보이는 의도는 결국 극단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유주의에 대한 봉사로 귀결되지 않습니다. 또한 이들은 침해할 수 없는 재산권과 자본가들의 손아귀에 놓여있는 소비자 후생을 운운하면서 "모든 차원의 국가적 행위와 사회적 연대를 폄하"한 배경에는 자신들의 치밀한 사익에 맞춰, 정의까지 쓸모없는 것으로 취급한 몇몇 발언들을 숙고해 본다면 이 즈음에서 후쿠야마와 같은 보수주의자들의 선연한 양심이 필요해 보입니다.  

저 역시 동아시아에서 태어난 일개 시민에 불과하지만, 지난날 서구 유럽이 쌓아 올린 자유주의 전통은 충분히 존중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후쿠야마는 기본적으로 서구 자유주의가 '개인의 자아 실현'에 기반해, 개인의 권리와 개인주의 등 인간의 권리 증진에 이바지 했다고 첨언하고 있는데요. 물론 역사적 과정에서 일부 민족주의와 자유주의가 대립한 시기도 있었지만 글 후반부에서 어느 정도는 민족주의와 자유주의가 공존할 수도 있는 여지도 짧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시 본래의 자유주의로 돌아와, 지나친 재산권에 대한 숭배가 자유주의를 어느 정도 병들게 만들었다면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부나 소득을 재분배한다는 아이디어가 많은 자유주의자들에게 저주가 되어 왔다"는 10장의 분석은 실로 의미심장합니다. 미국 독립 선언과 같은 맥락인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자유주의적 발상은 지금까지 사회를 건전하게 구축해 온 기본 개념이며, 무엇보다 모든 인간들을 평등하게 규정한 자유주의 시대의 긍정적인 유산이기도 합니다. 이는 지난날 자유주의 시대에 계몽주의가 명백히 기여한 부분이기도 한 데요. 이에 신자유주의의 모함이라고 볼 수 있는 "레이건주의가 국가와 집합적 행위의 아이디어를 가차 없이 공격한 지난날의 정치적 술수"는 자유주의가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변질되었는지 그 과정을 짐작케 합니다. 여기서 중요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자유주의가 개인주의와 개인의 선택 뿐만 아니라, 공동체에 있어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공익에 대한 가치에 대해서도 중요하게 인식했고, 이것은 공동체 사회를 위한 국가의 의무와 통치 행위에 대한 자유주의의 근본적인 인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자신을 자유주의자라고 항변하는 자들은 본질이 신자유주의자에 가까우면서도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로 꾸며, 개인과 국가를 명백히 구분하여 이를 별개의 조건으로 취급했지만 고전적 자유주의는 실상 개인과 공동체에 대한 긍정적인 가치를 줄곧 견지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4장에서 후쿠야마는 칸트를 인용하며, "인간존재는 목적 그 자체이고 결코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점을 에둘러 표현하고 있는데요. 칸트의 사유가 자유주의적 보편주의와 평등성의 기초를 두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이에 자유주의 이론 역시 어느 정도는 전자의 가치에 수렴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6장에서도 강조하고 있는 자유주의 이론의 근간인 "인간 보편성에 대한 탐구"는 자유주의를 바탕으로 이룩한 사회적 진보에 있어서도 중요한 가치적 맥락이었고, 자연 과학과 기술 과학의 중요한 도덕적 함의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7장에서 다시금 밝혀지고 있지만 자유주의가 강조해 온 "의사 표현의 자유"역시 민주주의와 강렬하게 연결되어, 우리의 열린 사회를 지탱한 기준이기도 했는데요. 민주주의와 자유주의가 어느 정도는 서로 뗄 수 없는 긴밀한 관계임을 고려해 본다면, 후쿠야마가 일관되게 비판하고 있는 '극우 포퓰리즘의 대두'는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양자에 있어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다만, 후쿠야마는 8장 이후, 이들 극단주의자들의 인종 혐오와 문화 갈등, 성차별주의에 대해 막연한 진술 만으로 다루고 있어, 저에게는 그의 분명한 한계로 여겨졌습니다. 그는 여타 다른 정치이론가들과 마찬가지로 다원성과 다원주의적 원칙에 대해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었지만 이를 깡그리 무시하는 극단주의자들의 서구 세력에 반하는 이슬람교에 대한 혐오와 인간을 가르는 인종주의적 발상을 너무 현상적으로 취급하고 있는 듯 합니다. 지난 역사적 과정에서 많은 보수주의자들이 신자유주의에 협력한 것을 차치한다 하더라도 사회를 극단으로 치닫게 하는 이들 선동적 극단주의자들에 대한 애매한 태도와 맞물려, 대표적 우파 포퓰리스트인 도널드 트럼프에 대한 보수주의의 지지를 단순한 현상으로 취급하는 것에 저로서는 큰 실망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록 트럼프를 지지하지만 이것은 보수주의와는 하등 상관이 없다는 식의 편의주의는 스스로의 보수주의적 관념에 반하는 행위라고 분명 판단할 수 있는데요. 이것은 실로 학자적 양심의 문제로서 뿐만 아니라 친히 자신이 견지한 보수주의적 양심에 위반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끝으로, 저자는 정부가 고전적 자유주의를 회복하는 것이 앞으로 중요하다고 언급하고, 국가를 경제성장과 개인적 자유에 불가피한 적으로 악마화했던 신자유주의 시대와 결별해야 함을 무엇보다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자유 민주주의 정부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 정부에 대한 높은 수준의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더불어 판단하고 있었는데요. 이 부분은 곱씹어 봐도 충분히 공감할 수밖에 없는 논증이었습니다. 그의 말대로 경제적 자유주의가 신자유주의로 변질된 상황에 대한 해석이 진실이라면, 앞선 3장과 4장에서 보여지는 논증들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애매한 비판으로 대체되어선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평범한 시민들의 삶을 무참히 짓밟는 경제적 불평등을 그저 경제적 신자유주의의 미래를 인식하지 않은 안일함 정도로 치부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신자유주의의 핵심이 금융 자본주의적 이행임을 감안해 본다면, 전체적인 맥락에서 자본주의의 변질과 그 폐해를 논하는 과정이 다소 미흡했던 점도 이 글의 한계라고 여겨집니다. 어찌됐든 후쿠야마는 인간의 마땅한 권리가 평등에 기반해, 크게 진보했던 우리의 자유주의적 기반을 빨리 회복할 수 있기를 일관되게 바라면서, 그런 과정이 고전적 자유주의로의 회귀라고 믿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진정한 자유주의로의 회귀는 보수주의와 진보주의의 역할론과 일반적인 도덕적 기본 가치로서 인간이 나아가야 할 바를 함께 규명해 볼 수 있는 서로 간의 토론과 대화가 무엇보다 전제 되어야만 할 텐데요. 또한, 글 말미에서 우리가 분명히 거둔 성과에 대한 '한계를 받아들일 수 있는 태도'를 그의 말대로 긍정하는 것도 중요해 보이는데요. 여기에 민주주의를 위한 시민들의 보편적인 노력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둘 수 있을지가 다음 세대의 정치를 가늠하는 중요한 기준이 될 것 같습니다. 



- 전반적으로 후쿠야마가 글을 통해, 신자유주의를 비판하고 있는 부분은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었습니다. 건전한 보수주의자가 자유주의를 신봉하고, 그 자유주의의 이단인 신자유주의를 배척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는 그의 양심이라고 봐도 무방해 보입니다.  


-자유주의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 중 하나인 '선택의 자유'는 각 시민들이 가용할 수 있는 자원과 권력 여부에 따라 오늘날 차등의 기준이 되어 왔다고 생각합니다. 보수주의자로서 이 선택의 자유를 일관되게 긍정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인정할 만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다만, 앞서 언급한대로 이 선택의 자유에 마땅히 포함될 수밖에 없는 신자유주의적 맥락을 과연 시민 사회가 얼마나 불식시킬 수 있을지가 앞으로 민주주의의 건전성을 보장하는 필수적인 요건이라 생각됩니다.    

자유민주주의 위기는 엄밀하게 말해서 민주주의의 문제라기보다는 우선적으로 자유주의 제도를 둘러싸고 전개되고 있다. 더욱이 경제성장과 근대 세계의 번영에 훨씬 더 연관된 것은 민주주의라기보다 자유주의이다.

대다수 현대 정치인들은 어떠한 인간적 특질들이 사람들에게 평등한 존엄성을 부여하는지 정확하게 설명하는 데 곤란을 겪는다.

자유주의는 그 핵심 원칙들이 우파와 좌파 지지자들 모두에 의해 극단으로 치우치는 모습을 보여 왔고, 이때 자유주의의 원칙 자체가 손상되는 일까지 발생했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경제 영역에 대한 국가의 규제를 적대시했으며, 정부는 역동적인 사업가들과 혁신가들을 방해할 뿐이라는 믿음에서 시카고학파 경제학자들과 뜻을 같이했다.

‘개인적 책임‘이란 아이디어는 참된 통찰에 기초한 자유주의적 개념이지만,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해 극단적인 방향으로 실행되어 왔다. 이들이 말하는 도덕적 해이는 현실이다.

사람들에게 일하는 동안 연금을 저축하도록 강제하는 것은 그들의 자유에 대한 침해가 아니라, 장기적 차원에서 그들의 자유를 이롭게 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등장은 진자의 추를 반대 방향으로 극단적으로 이동시켰다. 미국의 노동자들은 해외의 값싼 노동력에 밀려 일자리를 잃어 갔음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는 그들이 중국에서 수입되는 값싼 상품들을 살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문제는 잘못된 전제들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 아니다. 그 전제들은 종종 옳았으나, 단지 미완성의 것이기에 자주 역사적 불확실성에 처했다. 신자유주의의 신조의 결점은 이러한 자유주의적 전제들을 극단으로 밀고 나가, 재산권과 소비자 후생을 숭배하면서 모든 차원의 국가 행위와 사회적 연대를 폄하하는 데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 극단주의 집단들은 자유주의 질서를 보존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인종 집단들과의 제로섬 투쟁에서 그들의 힘을 보존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이다.

자유주의 국가들은 서로 다른 수준의 권리를 시민과 비시민에 나누어 부과하는 것에 온전한 정당성을 갖는데, 이들은 보편적으로 권리를 보호할 수 있는 자원 혹은 법적 명령권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반민주적 방법에 의지하는 것은 건강한 정치를 위한 처방이 아니며 미국의 자유민주주의에 실존적인 위협을 초래한다.

우선,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은 정부의 필요성을 인정할 필요가 있고, 국가를 경제성장과 개인적 자유에 불가피한 적으로 악마화했던 신자유주의 시대와 결별해야 한다.

부나 소득을 재분배한다는 아이디어는 많은 자유주의자들에게 저주가 되어 왔지만, 모든 근대국가들이 작든 크든 자원을 분배해 온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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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캘리니코스 시사논평 - 양극화, 극우, 좌파
알렉스 캘리니코스 지음, 이정구 엮음 / 책갈피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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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디지아 남부 솔즈베리에서 태어난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영국의 정치 이론가이자 동시에 좌파 사상가입니다. 그는 옥스포드의 발리올 컬리지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그곳에서 그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크리스토퍼 히친스를 만나게 됩니다. 이후 요크 대학의 정치학 교수를 거쳐, 2009년 9월, 킹스 컬리지 런던의 유럽학 교수로 임명되는데요. 캘리니코스는 경우에 따라 미국을 오가곤 했지만 주로 영국에서 활동한 지식인으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특히 영국 정치권이 미국의 요구를 거의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행태에 있어 이를 강하게 비판해 왔으며, 유럽의 신자유주의와 이것을 통해 광범위한 이익을 얻는 '극단적 중도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비판을 가한 바가 있습니다. 여기에 최근 벌어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서도 "자본주의 경쟁에 의해 앞으로 나아가는 제국주의 라이벌 국가들 사이의 진행 중인 전투"라고 묘사하기도 했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개인적으로 이 캘리니코스를 로베르트 웅거와 자주 비교 분석해 보기도 합니다. 참고로 그의 이 책은, 일종의 시사 논평집으로 영국의 좌파 신문 '소셜리스트 워커'에 그가 쓴 시사 논평들 가운데 일부를 편역해 출간한 것이기도 한 데요. 따라서, 국내에는 지난 2021년 1월 번역 출간 되었습니다.

캘리니코스의 이 책은, 미국 정치와 유럽 정치의 양극화와 최근의 브렉시트와 전세계적 코로나 19 사태 등을 다루고 있는데요. 대략 2002년부터 2019년 사이에 쓴 다양한 논평 들을 주제 별로 편집하여 엮은 것입니다. 그가 전세계적으로 드문 좌파 사상가라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미국 오바마 정권부터 도널드 트럼의 집권, 그리고 최근 코로나 19 사태에 있어 어떠한 비평을 보였을지 어느 정도 짐작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더군다나 그가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의 맹렬한 비판자임을 감안해 본다면,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기득권 정치와 이를 지지하는 정치 세력과는 완연히 다른 정치적 스탠스를 취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특히 신자유주의의 전반적인 실패와 시장 자유라는 맹목적인 신뢰에 대한 그의 날선 비판은 유독 이 글에서도 도드라져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의 이 논평에서 제가 주목한 부분은 '신자유주의를 지지하는 극단적 중도파'라는 대목이었습니다. 이는 유럽의 현체제를 빗대어 여실히 분석한 것이기도 한 데요. 이를 약간 돌려 생각해 본다면, 최근 미국의 정치에도 마찬가지로 대입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비슷한 시기의 도널드 트럼프의 집권 상황에서 이 정권을 지지했던 유권자들을 분석해 보면 어느 정도 극단적 중도에 대한 개념이 도출되는데요. 캘리니코스는 이미 1장에서 인정하고 있듯, 도널드 트럼프는 여성 차별주의자이자, 인종 차별주의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트럼프를 강고하게 지지하는 세력이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집중 공격한 이유가 바로 이 지점에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일전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미국 정치 무대에 등장한 정치인이 대놓고 인종 혐오와 여성의 성적 취급과 같은 최악의 것들을 거리낌 없이 대놓고 드러내는 행위에 비판을 가한 바가 있습니다. 그의 말대로라면 머릿속에만 들어 있는 그와 같은 것들을 감히 입 밖으로 드러내는 시도 자체가 (정치적으로) 매우 잘못된 행위라는 것입니다. 하여튼 이러한 트럼프의 집권이 기성 정치의 실패와 체제 전반의 과오를 '분노 정치'로 돌려,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추구하는 그야말로 양심이 구축된 정치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것은 한마디로 극우 포퓰리즘의 명확한 실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문제적 실체에 대해 캘리니코스 역시 동의하고 있었는데요. 트럼프를 '비이성적 인종차별주의자'로 언급하는 대목에서 선동하는 정치와 기득권 정치의 실패를 분노로 돌리는 교묘하고 무책임한 행태임을 독자들은 다시 한 번 목격할 수 있을 겁니다.

사실 본질적으로 미국 정치의 실패도 거의 맹목적으로 사회에 신자유주의를 이식한 결과라고 여겨집니다. 이를 달리 말하자면, 2009년의 전세계적 금융 붕괴에 있어 신자유주의가 그토록 경멸하는 '국가의 지원, 즉 국민들의 세금'으로 자신들의 이익적 기반인 '금융 시장'이 구원을 받았지만 여기까지 이르는 동안 그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음으로써 미국의 주택 시장의 몰락과 더불어 평범한 시민들의 극심한 고통을 무시하였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보면 '정치의 무책임한 방기'리고 볼 수도 있겠지만 핵심적인 사항은 '시장 자유 담론'에 우리 모두가 여지없이 인질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 부분에서도 역시 캘리니코스는 엄중한 비판을 가하고 있습니다. 이후 벌어진 충격적인 '코로나 19 사태'에 있어서도 다시 한번 그는 다시금 신자유주의가 실패했다고 단언하고, 이 시기 제한적인 통제에서 벌어진 거리 두기에서 "시민들이 자신의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너무 아끼는 것이 문제"라는 유럽과 미국의 대기업과 우파 정치인들의 망언은 대체로 경제적 이익이 얼마나 그들에게 중요한 문제인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캘리니코스는 이에 대해, "죽음에 맞선 삶이란 (극명하게) 이윤에 맞선 삶"이라고 일갈하기도 하는데요. 신자유주의 체제가 과연 이 코로나 19 사태에서 위태로운 전염병에 노출된 시민들을 위해 무엇이라도 제대로 하기 위한 일말의 노력이라도 기울였는지 돌이켜 볼 때라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빈국이 선진국보다 가난해서 가용 자원이 부족하고, 상대적으로 취약한 의료 서비스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시기에 혹독한 긴축을 겪어", 이 시기에 선진국과 빈국의 실질적 사태 해결은 그만큼 '돈'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또한 우리가 과거 경험한 2009년의 대붕괴에서 G20과는 달리. 최근의 미국과 유럽, 그리고 중국이 이 사태에서 제대로 협력하지 못했다는 그의 분석은 실로 뼈아프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 하는 이 3개의 권역이 자신들의 이기심 때문에 결국 협력할 시기를 놓쳤다는 것이 보다 타당한 분석이라 여겨집니다.

마찬가지로 최근 브렉시트와 관련해서도, 영국 정치 내에 극심한 사회 분열은 캘리니코스가 분석한대로 유럽의 '첨예화 된 양극화 정치'와 매우 연계되어 있습니다. 이는 신자유주의를 통한 금융 자본들의 막대한 이익 유지라는 관점에서 브렉시트는 어느 정도 결부되어 있는데요. 시티 오브 런던이 뉴욕의 월스트리트에 버금가는 전세계적 금융 중심지라는 것을 감안해 본다면, 영국의 기존 정치권이 브렉시트와 관련된, '국론 분열'에 있어 일반 시민들에게 왜 무능해 보일 수밖에 없는지 대략 이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유럽을 거치지 않는 금융 거래에 집중한 영국 금융 엘리트들이 현재의 정치권과 결탁해, 브렉시트를 (잠정적으로) 원했다는 것은 단순한 음모론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더욱이 시티 오브 런던에 대한 이들 엘리트들의 무한한 자부심과 캘리니코스가 비판하는 '사모펀드 경영자들'과 맞물려, 체제를 지탱했던 소위 극단적 중도파들의 행태는 끝내 사회를 어떻게 분열로 이끌었는지, 그 논리적 맥락 또한 짐작케 합니다. 아무리 브렉시트가 캘리니코스가 언급하는 대로 유럽 연합과 영국 정계의 온갖 행위자들이 내린 정치적 선택의 결과라고 할지라도 최근에 더 심각해지고 있는 유럽에서의 양극화 정치가 얼마나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앞서 언급했듯, 극우주의 혹은 극우 포퓰리즘의 대두는 우리 모두가 심각하게 바라봐야만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물론 근본적으로 자본주의 체제가 시민의 파편화와 극단적 개인화를 조장하면서 사실상 시민 사회가 유명무실해졌다는 캘리니코스의 분석은 거의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그만큼 이는 현 시대의 부정적인 자화상이라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즉, 이는 자본주의에 의한 사회와 시민권의 총체적인 부실로 이어진 것이라 추측되는데요. 아무리 자본주의가 개인의 욕망을 충족시켜준다 하더라도 상업화 된 개인주의적 맥락은 그것의 양면성 내지는 부정적 측면이 단순한 서사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글 말미에서 제가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신자유주의 실패로 인한 극우 포퓰리즘의 대두는 절대 현실 정치의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극우 포퓰리즘을 배경 삼아 기성 정치에 들어간 인물들 모두가 자신들의 사익을 위해, 시민들을 선동하고 있으며, 이보다 더 심각한 자들은 유대인 혐오나 이슬람 증오와 같은 인종주의 정치를 강화해 나가고 있습니다. 일전에 어느 정치 유튜버가 평가한 대로, 현 시대를 개선하기 위한 '똑똑한 시민' 내지는 '깨어있는 시민'이라는 제한적인 담론은 이미 상당한 정치적 변별력을 잃은 다수의 시민들을 고려했을 때, 상당히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고 생각됩니다. 더욱이 자본주의의 대안을 찾는 일 조차 평범한 시민들이 감당할 수 없는 기득권의 저항에 노출될 수밖에 없고, 이에 캘리니코스가 제안하는 '민주적 계획 경제' 혹은 이를 좀 더 탈이념적으로 분석한 '시장에서의 민주적 통제'가 앞선 세기에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저는 만연된 분노 정치에 있어 시장에 대한 민주적 통제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왜냐하면 금융이 주도하는 자본주의가 무조건적인 붕괴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는 기존에 누리엘 루비니가 거듭 경고한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장미및 미래 만을 갖고 그저 단기적인 이익 추구에 매몰된 금융 자본주의 자체를 지금과 마찬가지로 전적으로 시장에 맡긴다면 우리의 정치가 지금보다 더 위태로운 지경에 빠질 수밖에 없다 생각됩니다.


빌 클린턴은 미국 민주당이 이른바 ‘레이건 혁명‘을 수용하도록 해서 미국 공식 정치의 지형을 우경화시키는 데 핵심적 구실을 했다.

지금 벌어진 일(트럼프의 당선과 브렉시트 결정)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질서가 빚은 결과에 반발해 유권자들이 일으킨 커다란 반란이다.

트럼프는 신자유주의 시기의 금융 투기로 성공한 인물로 그 질서와 결별하지 않을 것이다.

트럼프의 당선을 보면, 신자유주의와 경제 위기의 결과들에 맞선 반란에 우파 포퓰리스트가 올라탈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미국 공화당과 영국 보수당의 주장과 달리, 코로나 19 방역과 경제 지탱 사이의 ‘균형‘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부가 생명을 지키기 위해 단호하게 대응한 나라들은 경기 수축의 폭이 더 적었다.

자율주의는 사회운동이 정치에서 독립적이어야 하며, 정당과 거리를 둬야 한다는 사상이다. (그러나) 운동의 요구들을 표현할 수 있는 정치적 대안이 어떤 것으로 나타날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영국 노동당과 프랑스 사회당은 신자유주의를 수용한 탓에 지금은 "사회자유주의자들"로 불리고 있다.

유대인 혐오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 자체가 아니라 인종적 음모에 의한 왜곡이 문제라는 자본주의에 대한 피상적 비판에 문을 열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강한 대처가, 신자유주의가 위기에 빠지면서 자신이 임명한 내각과 소속 정당의 지지를 잃고 한없이 몰락했다.

각국의 자본주의는 국민국가의 경계선을 따라 불균등,결합 발전을 해왔으며, 각국의 정치 지형과 계급투쟁의 양상도 상이하다.

이는 부분적으로 빈국이 선진국보다 가난해서 가용 자원이 부족하고, 상대적으로 취약한 의료 서비스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시기에 혹독한 긴축을 겪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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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섹스는 평등한가요? - 동등한 관계, 동등한 즐거움을 위한 기혼 여성들의 섹스 말하기
부너미 외 지음 / 와온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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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종의 페미니즘 글쓰기 공동체라고 볼 수 있는 부너미는 2017년 말 기혼여성들의 독서모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서 부너미는 한옥에서 아궁이에 불을 땔 때, 온기가 역류하지 않게 막아주는 '부넘이'에서 유래했습니다. 전작인 '페미니스트도 결혼하나요?'는 주변에서 의외의 논쟁을 불러일으켰지만, '한국 사회에서 기혼 여성들도 진정한 페미니즘 운동에 동참할 수 있겠는가'라는 의미에서 해당 분야의 독서 저변을 비롯해, 일반인들에게도 어느 정도 생각할 거리를 남겨준 논저라고 여겨집니다. 지금 서평을 쓸 이 '당신의 섹스는 평등한가요?'는 기혼 여성들의 솔직한 섹스 담론과 결혼 생활의 본질을 떠올리게 하는 일종의 르포르타주로 추측하건대, 일반 미혼 남성들이 이 글을 읽게 된다면 기존의 기혼 남성과는 다른 방식으로 여러 주제에 대한 토론이 필요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쯤에서 각설해, 이 글은 지난 2020년 4월, 국내에 출간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인간은 누구나 성적 자기 결정권을 갖고 있으며, 섹스에 있어서도 이러한 권리가 무엇보다 우선해야 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다만, 부부 사이의 섹스 그 반대의 섹스리스 등 부부 관계에 대한 문제는 아무래도 내밀한 영역이고, 동시에 그만큼 한국 사회에서 복합적으로 터부시되어 왔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즉, 가부장제에 기반한 전통적인 가족 제도 하에서 '남성의 성'은 거의 배타적으로(결혼한 아내의 성에 비하면) 사회가 이를 용인해 왔으며, 이 책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듯, 이러한 기조는 개인에 국한된 것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현실에서 여전히 강고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섹스리스 부부'에 대한 일종의 편견이나 섹스리스 부부에 대한 과도한 주변의 관심은 '부부 사이의 섹스'라는 전형적인 담론에 매몰되어 어느 정도는 폭력적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여기에 소개된 여러 글들 가운데, 기본적으로 아내에 대해 섹스를 요구하는 아주 일반적인 남편의 사례와 반대로, 어떤 남편과 아내는 둘 사이에 굳이 섹스가 없더라도 잘 지낼 수 있다는 앞선 예의 바깥에 있는 경우도 드물지만 존재합니다. 그러니까 이 글의 도입부는 '섹스리스 상태'에 대한 판에 박힌 관심을 회피하고자 어느 정도 절충해서 변명거리를 마련한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정서적 교감과 대화만을 통해 서로를 충분히 잘 이해하고 있으며 그런 측면에서 관계 전반에 서로 만족하고 있는 일부 부부들도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위의 부부와 같은 사례는 어느 정도 소수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여기에 소개되어 있는 여러 부부들의 현실적 모습을 살펴보니, 보통 남편들은 거의 자신의 사정(射精)만을 위해 아내에게 성적인 요구를 하고 있다는 점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를 좀 더 풀어보자면 대부분의 남성들은 연애 시절을 포함해 파트너인 여성과의 좀 더 서로 간의 성적인 교감을 위해 충분한 대화를 나누는 것을 꺼려하고 있고, 이런 상황에서 오랫동안 접한 야동이나 포르노를 통해 잘못된 성지식을 켜켜이 쌓아왔다는 점 일텐데요. 특히, 여성의 클리토리스에 대한 남성들의 일반적인 무지는 매우 심각하다고 여겨집니다. 남성의 대표적 성적 기관인 페니스에 위치한 귀두와 거의 동일한 기능을 갖고 있는 클리토리스에 남성들의 의도된 무지는 주목할 만합니다. 특히 클리토리스에 대한 자극은 여성들에게 있어 오르가즘에 도달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도 여겨지기까지 하는데요. 하지만 많은 남편들이 아내에 대한 기본적인 애정이 담긴 애무조차 무관심하고, 그저 자신의 만족을 위한 '삽입 섹스'에 중점을 두고 있기에 이런 남편들의 '일방적인 섹스'가 섹스리스 문제에 어느 정도 큰 원인이 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보통의 부부들은 결혼 생활 과정에서 임신과 출산을 경험하게 됩니다. 특히 출산은 여성의 몸에 있어 중대한 여러 변화를 초래하게 되는데요. 출산 도중 아이의 머리가 임산부의 방광을 눌러 전에 없던 요의의 불편함을 겪는다거나 출산을 위해 의사의 조언대로 회음부 절개를 하다 보면 그것대로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모든 것은 아이의 건강한 출산에 맞춰져 있다 보니 미혼 남성을 비롯한 적지 않은 수의 남성들은 출산 문제는 당연히 여성의 몫으로만 취급했던 것이 현실입니다. 아이를 출산하고 모유 수유 하느라 몸이 처녀 때와 달리 체형이 급격히 변한 여성은 스스로 대한 사랑을 잃게 되었고, 오히려 상대적으로 아무런 변화도 없는 남편의 몸을 보면서 자신만 왜 이러한 신체적 변화를 겪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탄식하기도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자신의 몸에 대한 혐오'는 결국 남편과의 섹스를 기피하는데 이릅니다. 이는 더 이상 자신의 몸이 아름답지 않다는 부정적 인식이 바탕이 되어, 남편의 요구를 거부하게 되는 것인데요. 물론 하루 종일 집에서 아이와 씨름 해, 밤만 되면 거의 녹초에 이르는 아내에게 있어 변변한 대화도 없이 그저 손끝으로 몸을 툭툭 건드리며 관계를 요구하는 남편에게 "잠 좀 자게 내버려 둬"와 같은 분통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물론 임신 시기에 남편의 욕구를 풀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아내들도 분명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은 대부분 시스템적으로 아내에게 전가 되고, 이것에 대한 배려가 전무한 남편들이 아직도 상당하다는 점은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오로지 '자신의 욕구가 우선인 남편'이라는 존재 자체가 현실의 사례에서 볼 수 없는 그저 공상 속의 산물로 치부해 버릴 수 있겠지만 그만큼 여기에 실려 있는 글들은 일부 독자들에게 쉽게 접할 수 없는 귀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특히 결혼 생활을 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있어 더욱 그렇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끝으로 여기에 소개되어 있는 결혼 생활의 여러 사례들 가운데 무엇보다 뜨악했던 부분은 어느 남편의 불법적인 성매매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직장 생활에 있어 상사가 원하는 분위기를 맞춰 주고, 접대와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 간혹 경험하게 되는 성매매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입장이었는데요. 다만 이 부분과 관련해, 일선 경찰들이 실정법에 규정된 불법 성매매를 제대로 단속하지 못하는 이유는 만약 그렇게 된다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들어가야 하며, 만약 무리를 하게 된다면 오히려 그만큼 강력 사건에 투입될 인원이 부족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즉, 일선에서 음성적으로 벌어지는 성매매가 어쩔 수 없는 필요악이라는 논법으로 취급될 것이 아니라, 쉽게 단속에 나설 수 없는 국가 조직의 현실적인 제약이 있는 것이 본질이겠죠. 그래서 이러한 상황이 결코 성매매에 대한 법적 면죄부로 이어져서는 안된다고 판단됩니다. 더불어 여기에 소개된 글들을 읽으면서 분명하게 느낀 부분은 아직도 한국 사회가 여성의 성에 있어 폐쇄적이며, 그러한 측면에서 남성들 역시 거의 변하지 않았다는 부분입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많은 남성들이 섹스에 있어 서로의 만족을 위한 대화와 교감을 거부하고 있는 실정과 여전히 자신들의 사정만을 위한 섹스를 거의 노골적으로 원하고 있는 점은 일반적인 결혼 생활에 있어 어느 정도는 서로 간의 치명적인 간극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판단됩니다. 그런 연유로 건전한 부부 관계를 위한 '부부 간의 성'이라는 주제는 좀 더 논의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도 마찬가지로 더 이상 이를 금기시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깨달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책에 수록된 어떤 분의 사례에서 과거 자신의 연애에 대해 지금 남편 분이 더럽다고 일컫는 내용을 접했는데요. 이런 분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충격이었습니다. 제가 나중에 '여성에게만 가해지는 순결주의'에 대해 글을 쓸 기회가 있을 것 같은데요. 한국 사회 곳곳을 이루고 있는 이러한 폭력들이 개화된 종교에서조차 여전하다는 점에서 이것을 그저 철지난 사회적 관습으로 치부하고 그냥 그러려니 해야 되는지 가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이러한 맥락의 '철지난 관습들'은 어떻게 보면 사회 통합을 방해하고, 서로 간에 편견을 극대화하며, 종내에는 의견조차 피력하지 못하게 하는 악습으로 발현되기에 이릅니다.      

-결혼에 이르기 전, 여느 연인 관계처럼 뜨거웠던 커플이 서로의 극명한 차이만 인식하게 되는 작금의 현실에서 가장 필요한 건 천천히 서로를 바라보는 것으로 시작해야 될 겁니다. 

"우리에게 섹스는 대화였고 배려였고 존중이었다"

   



섹스리스가 되고 싶다는 사람은 없지만, ‘왜‘ 섹스리스가 되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은 많다.

내가 궁금한 것은, 남편의 섹스 요구를 자신을 향한 관심이나 애정으로 굳게 믿고 ‘남편이 조르기를 은근히 바라는‘ 뭇 여성들의 심리다. 못 이기는 척 응하든, 에둘러 거절하든 일단은 요구해 주길 바라는 마음.‘아직도 나를 원한다‘는 사실에서 자존감을 찾고 뿌듯해하는, 그래서 남편의 성욕을 자랑스레 떠벌리게 되는 마음.

임신 중인데도 자신의 몸보다 남편의 성욕을 더 걱정하던 후배. 그녀가 정말로 걱정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남성의 성욕은 본능이고 그에 비해 여성은 대화와 관계에 대한 욕구가 크다고 강조한다. 이런 생각들은, 남편의 성욕은 반드시 해소되어야 하므로 아내가 받아 주지 않으면 다른 여자를 만날 수밖에 없다는 식의 서사로 완성된다.

여자의 몸은 소중하며 아무에게나 보여 줘서는 안 된다는 정도가 그들이 내게 해준 성교육의 전부였다.

여성의 성기에서는 어떠한 냄새도 나지 않아야 한다거나, 출산 전 성기의 모양을 되찾아야만 성적인 존재로서 가치있다는 믿음은 어디서 주입된 걸까?

내가 더럽다니? 무슨 말인지 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귀를 의심했다. 그는 친절하게 설명하며 그 말을 되풀이했다. 그러니까 나는 연애를 좋아했고, 지금껏 여러 남자를 만나고 섹스를 했으니 더러운 여자라는 뜻이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애를 돌보는 동안 식욕, 수면욕, 배변욕과 같은 기본적인 욕구조차 채우지 못해 절규하며 살았다.

사회에서 늘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유능한 남성들이 피임에 있어서는 심각하게 무능하다. 고통을 나눌 의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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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3-08-03 22: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베터라이프님 리뷰를 읽고 생각난건데요 한국에서 부부 사이의 강간이 인정된 것이 얼마 안된걸 보면
해결해야할 과제가 아직도 참 많다고 느낍니다. 이미 아실것 같긴한데 정희진님 책들도 좋아요! ^^

베터라이프 2023-08-03 23:25   좋아요 1 | URL
조금 유추해서 생각해보면 부부 사이의 강간은 특히 폭력이 동반된다는 점에서 문제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근본적으로 한국 사회에서 남녀 간 섹스와 성에 대한 관념을 너무나 차별적으로 취급해 온 게 부부 간의 ‘섹스 비극‘에도 원인이 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아마 미미님도 동의하시겠지만 일반적인 연애 관계에 있어 젊은 커플들이 좀 더 성에 대해 터놓고 의견을 나누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판단됩니다. 이제는 피임 도구를 확실히 챙겨라, 이런 수준의 말들을 얼마간 넘어서야겠죠. 그리고 정희진 씨에 대해서도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분의 글도 나중에 읽어보려고 고민하고 있네요 ^^ 엉망인 제 서평을 그나마 읽을만하게 수정하느라 미미님께 글을 남기는 게 늦었습니다. 모쪼록 넓은 마음으로 용서해 주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