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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와 그 불만 ㅣ Philos 시리즈 15
프랜시스 후쿠야마 지음, 이상원 옮김 / arte(아르테) / 2023년 3월
평점 :
우리에게 '역사의 종언'으로 익히 알려져 있는 프랜시스 요시히로 후쿠야마는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의 하이드 파크 인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일본계 미국인 2세로 목사 훈련을 받았고, 시카고 대학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통해, 종교학을 가르쳤습니다. 어머니는 카화타 토시코 후쿠야마로 일본 교토에서 태어나 교토대학 경제학과 설립자이자 오사카 시립대학 초대 총장인 가와타시로의 딸이기도 합니다. 후쿠야마는 이런 지적인 부모 밑에 태어나 일찍이 학업에 눈을 뜨게 되는데요. 코넬 대에서 앨런 블룸의 지도하에 정치철학을 공부하면서 고전학 전공을 했고, 처음에는 예일대에서 비교 문화를 공부하다, 롤랑 바르트와 자크 데리다에게서 공부하기 위해 6개월 동안 파리로 갔지만 그는 이내 환멸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연유로 하버드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 과정으로 과감히 진로를 틀게 되는데요. 이곳에서 그는 새뮤얼 헌팅턴, 하비 맨스필드와 함께 공부했고, 학위를 받은 이후인 1979년에 글로벌 정책 싱크탱크인 랜드 연구소에 합류하게 됩니다. 후쿠야마는 첨예한 냉전의 시기에서 서구를 대표하는 보수주의 정치 이론가로 명성을 쌓게 되었고, 특히 과거 레이건 행정부를 있게 한 핵심 기여자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이와 관련해, 네오콘으로 알려져 있는 어빙 크리스톨이 신보수주의를 이론화 하기 전부터, 후쿠야마가 이들 사상에 기여한 부분 역시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요. 공교롭게도 이런 그가 2006년에 '네오콘의 종말'을 부르짖은 점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Liberalism and Its Discontents"로 2022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이듬해인 2023년 3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습대로 전통적 보수주의가 공동체를 위한 혹은 모든 시민들의 공통된 도덕적 가치에 힘을 쏟는 것을 견지하는 사상이라면, 이 글에서 드러난 후쿠야마의 일관된 주장은 충분히 그를 보수주의자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오늘날 평범하지 않는 외양으로 읽히는 '경제적 보수주의'는 신자유주의와 어느 정도는 결탁한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약간의 불편한 고백이라면, 후쿠야마를 신자유주의자와 다름 없는 인물이라 취급했던 저의 고질적인 편견을 어느 정도 불식하는 데 이 책이 도움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가 자신의 논저를 통해, 미국에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자신들의 민주적 정부가 예전의 '고전적 자유주의'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당위입니다. 물론 이 점을 중요한 논점을 삼고 논거를 제시하는 과정에 우파의 극단주의자들과 진보적 좌파 자유주의자들을 동일선상으로 놓고 이를 비판하는 과정은 정치사상적 맥락에서 크게 설득력이 부족했다고 판단됩니다. 과거 미국 정치에서 고찰해 봐도 근 2세기 동안, '미국의 좌파'는 거의 유명무실한 존재였으며, 1990년대 빌 클린턴을 비롯한 소수 리버럴들이 벌인 신자유주의로의 영합을 무슨 '자본주의와 타협한 좌파'로 몰고 가기에는 그 논리적 한계가 명확하다고 여겨집니다. 더불어, 후쿠야마는 고전적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는 명목상 별개의 사상으로 규정하면서도 1980년대 이후 진행된 신자유주의화가 이를 기반으로 한 신자유주의자들의 사실상의 사회파괴적 오판을 다소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요. 이 부분 역시 쉽게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후쿠야마는 4장에서, "신자유주의가 극단적 불평등과 금융 불안을 초래하여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했다"고 강조합니다. 다만 앞의 3장 후반부에서,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문제가 잘못된 전제들에서 출발해서가 아니라, 그 전제들은 옳았으나, 단지 미완성의 것이기에 아주 역사적 불확실성에 처했다"고 약간의 변명을 첨부하고 있는데요. 물론 그는 신자유주의가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다소 멸칭으로 쓰이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우리가 신자유주의에 대해 명확히 이론적 구분을 해야 하는 것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과 밀턴 프리드먼이 주창한 '경제적 신자유주의'와 그 여타 다른 분류, 즉 사회학적 맥락의 신자유주의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앞선 사회적 의미로서의 멸칭과 부정적 의미들을 함께 포함하고 있는 (정치사회학적) 신자유주의를 오로지 경제적 신자유주의만으로 구분해 이해하는 것이 사뭇 필요하다는 주장은 저에게는 조금 복잡한 감정을 갖게 했습니다. 이미 많은 신자유주의자들이 자유주의 자체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는 부분을 고려해 본다면, 비슷한 맥락으로 오늘날 극단적 우파 포퓰리즘이 자유주의적 가치와 그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자유'를 팔아먹고 있는 상황이라 묘사할 수 있습니다. 결국 자신들을 자유주의와 동급으로 취급하는 신자유주의자들의 눈에 보이는 의도는 결국 극단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유주의에 대한 봉사로 귀결되지 않습니다. 또한 이들은 침해할 수 없는 재산권과 자본가들의 손아귀에 놓여있는 소비자 후생을 운운하면서 "모든 차원의 국가적 행위와 사회적 연대를 폄하"한 배경에는 자신들의 치밀한 사익에 맞춰, 정의까지 쓸모없는 것으로 취급한 몇몇 발언들을 숙고해 본다면 이 즈음에서 후쿠야마와 같은 보수주의자들의 선연한 양심이 필요해 보입니다.
저 역시 동아시아에서 태어난 일개 시민에 불과하지만, 지난날 서구 유럽이 쌓아 올린 자유주의 전통은 충분히 존중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후쿠야마는 기본적으로 서구 자유주의가 '개인의 자아 실현'에 기반해, 개인의 권리와 개인주의 등 인간의 권리 증진에 이바지 했다고 첨언하고 있는데요. 물론 역사적 과정에서 일부 민족주의와 자유주의가 대립한 시기도 있었지만 글 후반부에서 어느 정도는 민족주의와 자유주의가 공존할 수도 있는 여지도 짧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시 본래의 자유주의로 돌아와, 지나친 재산권에 대한 숭배가 자유주의를 어느 정도 병들게 만들었다면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부나 소득을 재분배한다는 아이디어가 많은 자유주의자들에게 저주가 되어 왔다"는 10장의 분석은 실로 의미심장합니다. 미국 독립 선언과 같은 맥락인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자유주의적 발상은 지금까지 사회를 건전하게 구축해 온 기본 개념이며, 무엇보다 모든 인간들을 평등하게 규정한 자유주의 시대의 긍정적인 유산이기도 합니다. 이는 지난날 자유주의 시대에 계몽주의가 명백히 기여한 부분이기도 한 데요. 이에 신자유주의의 모함이라고 볼 수 있는 "레이건주의가 국가와 집합적 행위의 아이디어를 가차 없이 공격한 지난날의 정치적 술수"는 자유주의가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변질되었는지 그 과정을 짐작케 합니다. 여기서 중요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자유주의가 개인주의와 개인의 선택 뿐만 아니라, 공동체에 있어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공익에 대한 가치에 대해서도 중요하게 인식했고, 이것은 공동체 사회를 위한 국가의 의무와 통치 행위에 대한 자유주의의 근본적인 인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자신을 자유주의자라고 항변하는 자들은 본질이 신자유주의자에 가까우면서도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로 꾸며, 개인과 국가를 명백히 구분하여 이를 별개의 조건으로 취급했지만 고전적 자유주의는 실상 개인과 공동체에 대한 긍정적인 가치를 줄곧 견지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4장에서 후쿠야마는 칸트를 인용하며, "인간존재는 목적 그 자체이고 결코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점을 에둘러 표현하고 있는데요. 칸트의 사유가 자유주의적 보편주의와 평등성의 기초를 두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이에 자유주의 이론 역시 어느 정도는 전자의 가치에 수렴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6장에서도 강조하고 있는 자유주의 이론의 근간인 "인간 보편성에 대한 탐구"는 자유주의를 바탕으로 이룩한 사회적 진보에 있어서도 중요한 가치적 맥락이었고, 자연 과학과 기술 과학의 중요한 도덕적 함의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7장에서 다시금 밝혀지고 있지만 자유주의가 강조해 온 "의사 표현의 자유"역시 민주주의와 강렬하게 연결되어, 우리의 열린 사회를 지탱한 기준이기도 했는데요. 민주주의와 자유주의가 어느 정도는 서로 뗄 수 없는 긴밀한 관계임을 고려해 본다면, 후쿠야마가 일관되게 비판하고 있는 '극우 포퓰리즘의 대두'는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양자에 있어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다만, 후쿠야마는 8장 이후, 이들 극단주의자들의 인종 혐오와 문화 갈등, 성차별주의에 대해 막연한 진술 만으로 다루고 있어, 저에게는 그의 분명한 한계로 여겨졌습니다. 그는 여타 다른 정치이론가들과 마찬가지로 다원성과 다원주의적 원칙에 대해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었지만 이를 깡그리 무시하는 극단주의자들의 서구 세력에 반하는 이슬람교에 대한 혐오와 인간을 가르는 인종주의적 발상을 너무 현상적으로 취급하고 있는 듯 합니다. 지난 역사적 과정에서 많은 보수주의자들이 신자유주의에 협력한 것을 차치한다 하더라도 사회를 극단으로 치닫게 하는 이들 선동적 극단주의자들에 대한 애매한 태도와 맞물려, 대표적 우파 포퓰리스트인 도널드 트럼프에 대한 보수주의의 지지를 단순한 현상으로 취급하는 것에 저로서는 큰 실망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록 트럼프를 지지하지만 이것은 보수주의와는 하등 상관이 없다는 식의 편의주의는 스스로의 보수주의적 관념에 반하는 행위라고 분명 판단할 수 있는데요. 이것은 실로 학자적 양심의 문제로서 뿐만 아니라 친히 자신이 견지한 보수주의적 양심에 위반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끝으로, 저자는 정부가 고전적 자유주의를 회복하는 것이 앞으로 중요하다고 언급하고, 국가를 경제성장과 개인적 자유에 불가피한 적으로 악마화했던 신자유주의 시대와 결별해야 함을 무엇보다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자유 민주주의 정부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 정부에 대한 높은 수준의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더불어 판단하고 있었는데요. 이 부분은 곱씹어 봐도 충분히 공감할 수밖에 없는 논증이었습니다. 그의 말대로 경제적 자유주의가 신자유주의로 변질된 상황에 대한 해석이 진실이라면, 앞선 3장과 4장에서 보여지는 논증들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애매한 비판으로 대체되어선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평범한 시민들의 삶을 무참히 짓밟는 경제적 불평등을 그저 경제적 신자유주의의 미래를 인식하지 않은 안일함 정도로 치부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신자유주의의 핵심이 금융 자본주의적 이행임을 감안해 본다면, 전체적인 맥락에서 자본주의의 변질과 그 폐해를 논하는 과정이 다소 미흡했던 점도 이 글의 한계라고 여겨집니다. 어찌됐든 후쿠야마는 인간의 마땅한 권리가 평등에 기반해, 크게 진보했던 우리의 자유주의적 기반을 빨리 회복할 수 있기를 일관되게 바라면서, 그런 과정이 고전적 자유주의로의 회귀라고 믿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진정한 자유주의로의 회귀는 보수주의와 진보주의의 역할론과 일반적인 도덕적 기본 가치로서 인간이 나아가야 할 바를 함께 규명해 볼 수 있는 서로 간의 토론과 대화가 무엇보다 전제 되어야만 할 텐데요. 또한, 글 말미에서 우리가 분명히 거둔 성과에 대한 '한계를 받아들일 수 있는 태도'를 그의 말대로 긍정하는 것도 중요해 보이는데요. 여기에 민주주의를 위한 시민들의 보편적인 노력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둘 수 있을지가 다음 세대의 정치를 가늠하는 중요한 기준이 될 것 같습니다.
- 전반적으로 후쿠야마가 글을 통해, 신자유주의를 비판하고 있는 부분은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었습니다. 건전한 보수주의자가 자유주의를 신봉하고, 그 자유주의의 이단인 신자유주의를 배척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는 그의 양심이라고 봐도 무방해 보입니다.
-자유주의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 중 하나인 '선택의 자유'는 각 시민들이 가용할 수 있는 자원과 권력 여부에 따라 오늘날 차등의 기준이 되어 왔다고 생각합니다. 보수주의자로서 이 선택의 자유를 일관되게 긍정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인정할 만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다만, 앞서 언급한대로 이 선택의 자유에 마땅히 포함될 수밖에 없는 신자유주의적 맥락을 과연 시민 사회가 얼마나 불식시킬 수 있을지가 앞으로 민주주의의 건전성을 보장하는 필수적인 요건이라 생각됩니다.
자유민주주의 위기는 엄밀하게 말해서 민주주의의 문제라기보다는 우선적으로 자유주의 제도를 둘러싸고 전개되고 있다. 더욱이 경제성장과 근대 세계의 번영에 훨씬 더 연관된 것은 민주주의라기보다 자유주의이다.
대다수 현대 정치인들은 어떠한 인간적 특질들이 사람들에게 평등한 존엄성을 부여하는지 정확하게 설명하는 데 곤란을 겪는다.
자유주의는 그 핵심 원칙들이 우파와 좌파 지지자들 모두에 의해 극단으로 치우치는 모습을 보여 왔고, 이때 자유주의의 원칙 자체가 손상되는 일까지 발생했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경제 영역에 대한 국가의 규제를 적대시했으며, 정부는 역동적인 사업가들과 혁신가들을 방해할 뿐이라는 믿음에서 시카고학파 경제학자들과 뜻을 같이했다.
‘개인적 책임‘이란 아이디어는 참된 통찰에 기초한 자유주의적 개념이지만,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해 극단적인 방향으로 실행되어 왔다. 이들이 말하는 도덕적 해이는 현실이다.
사람들에게 일하는 동안 연금을 저축하도록 강제하는 것은 그들의 자유에 대한 침해가 아니라, 장기적 차원에서 그들의 자유를 이롭게 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등장은 진자의 추를 반대 방향으로 극단적으로 이동시켰다. 미국의 노동자들은 해외의 값싼 노동력에 밀려 일자리를 잃어 갔음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는 그들이 중국에서 수입되는 값싼 상품들을 살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문제는 잘못된 전제들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 아니다. 그 전제들은 종종 옳았으나, 단지 미완성의 것이기에 자주 역사적 불확실성에 처했다. 신자유주의의 신조의 결점은 이러한 자유주의적 전제들을 극단으로 밀고 나가, 재산권과 소비자 후생을 숭배하면서 모든 차원의 국가 행위와 사회적 연대를 폄하하는 데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 극단주의 집단들은 자유주의 질서를 보존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인종 집단들과의 제로섬 투쟁에서 그들의 힘을 보존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이다.
자유주의 국가들은 서로 다른 수준의 권리를 시민과 비시민에 나누어 부과하는 것에 온전한 정당성을 갖는데, 이들은 보편적으로 권리를 보호할 수 있는 자원 혹은 법적 명령권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반민주적 방법에 의지하는 것은 건강한 정치를 위한 처방이 아니며 미국의 자유민주주의에 실존적인 위협을 초래한다.
우선,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은 정부의 필요성을 인정할 필요가 있고, 국가를 경제성장과 개인적 자유에 불가피한 적으로 악마화했던 신자유주의 시대와 결별해야 한다.
부나 소득을 재분배한다는 아이디어는 많은 자유주의자들에게 저주가 되어 왔지만, 모든 근대국가들이 작든 크든 자원을 분배해 온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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