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미소 프랑수아즈 사강 리커버 개정판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최정수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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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롯주의 카자르크에서 태어난 프랑스아즈 사강은 부르주아 부모의 막내로 부족함 없이 자랐습니다. 그녀의 가족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시기에는 도피네에서 전쟁을 피하게 됩니다. 특이하게도 사강의 부계 쪽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의 러시아 혈통입니다. 그리고 필명인 사강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등장인물인 princess de Sagan 에서 따온 것입니다. 그녀는 18세가 되던 해에 출간한 '슬픔이여 안녕'으로 당시 프랑스 문단으로부터 몇 세기 만에 등장한 천재 작가라는 평가를 받았는데요. 이후 수많은 작품을 내놓으며 전세계 평론가들과 독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다만 그녀의 사생활적인 측면에서는 몇 가지 논란을 남기기도 했는데요. 1990년대에 코카인 소지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기도 했고, 스포츠카를 고속으로 운전하다 사고에 연루되어 한동안 혼수 상태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스스로를 누구보다 자유로운 영혼이라 여겼던 사강은 2000년대 들어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지게 되었고, 2004년 옹플뢰르에서 69세의 나이로 폐색전증으로 생을 마치게 됩니다. 이런 그녀의 죽음과 관련해, 당시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사강의 죽음과 관련해. "그녀의 죽음으로 프랑스의 문학계의 가장 훌륭하고 열정적인 작가 중 한 명을 잃게 되었다"고 소회를 밝힌 바가 있습니다. 따라서 그녀에게 거대한 명성을 안겨다 준 '슬픔이여 안녕' 이후, 두 번째 작품이 된 '어떤 미소'는 원제, 'UN Certain Sourire'로 지난 1955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07년 12월에 초도 번역이 이뤄졌습니다. 제가 구입한 판본은 2022년에 재간행 된 개정판입니다.

사강의 두 번째 작품이기도 한 '어떤 미소'는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첫 작품보다는 어느 정도 무난한 장편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현 시대조차 일부 국가들에서는 결혼한 사람과의 만남과 사랑은 일견 법적 혹은 문화적으로 금기시된다는 부분에서 꽤 호불호가 갈릴 것 같습니다. 비슷한 입장에서 이 소설이 출간된 당시, 프랑스 사회가 이 작품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보였을지는 대략 짐작이 되기도 하는데요. 그럼에도 사강의 이 장편은 사랑을 겪는 평범한 젊은 여성의 심리와 감정선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고 있고, 특히나 여성들이 '진정한 사랑'에 대한 의미와 그것을 대하는 태도 등을 남자들이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가 살아가면서 진정으로 인정해야만 하는 '건전한 관계'에 대해 보통의 인간으로서 이를 고심해 볼 수 있는 점도 개인적으로 유익한 시간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프랑스에서 내로라하는 대학에 다니고 있는 주인공 도미니크는 20대 초반의 여성으로서 누군가와 평범한 사랑을 경험하고 있는 중입니다. 작가인 사강이 여성의 첫 육체적 관계를 가볍게 지나치지 않듯, 첫 관계와 사랑의 현실적 변곡점을 도미니크를 통해 여실히 드러내고 있기도 한 데요. 더욱이 이 글에서 공격적이 아닌 꽤 완곡하게 묘사된 유부남 자체에 대한 설정은 주인공인 젊은 여성에게 보다 매력적인 장치로 꽤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남자친구의 훤칠한 외모와 육체적인 매력과는 달리, 현실적인 부분에 부합되는 경제적 능력은 있어 보이지만 그저 '슬픈 지식인'으로 규정되는 뤽과의 첫 만남과 그 전개 과정은 어설픈 편이고, 도입에서 관계를 나누는 세 사람의 결말이 대략 예상이 되는 점은 서사의 긴장감을 약화 시키기도 하는데요. 다만, 뤽의 아내인 프랑스아즈의 인물 조성은 꽤나 예상 밖이었습니다. 예측하건대, 자신을 포함해 두 주인공을 파멸에 이르게 할 것 같았으나 그녀의 예상 못한 성품과 인간됨은 작가 자신의 이름을 부여한 이 인물 자체의 애정으로도 읽힙니다. 2부 중간 부분에 뤽이 자신의 아내에 대한 감정, 그녀를 판단하는 여러 수식어들은 '상처를 안겨주고 싶지 않고 자신의 보살핌이 필요한' 여성으로 그려지는 점은 마찬가지로 이 작품의 결말을 독자들이 어느 정도 암시하게 되는 설정이 되지 않았나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


본질적으로 사강의 이 작품은 여성이 겪게 되는 '진정한 첫사랑'의 체험을 독자들도 이미 스스로도 겪어 본 지난 날의 일들을 얼마간 곱씹어 보게 만듭니다. 물론 남자의 진정한 사랑과 여자의 처음 사랑은 그 결이 상이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도미니크 자신의 여러 대화와 독백 등을 통해 드러나는 내면의 고백은 스스로가 간절히 원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그것이 사랑의 감정으로 도달된 점은 그 자체로 인간의 개인사에 있어 '중요한 시발점'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마도 사강은 역설적이게도 유부남으로부터 느끼게 되는 진정한 사랑에 있어 윤리적 문제를 다소 차치하고, 사랑으로 인한 여 주인공의 심리 변화를 일관되게 묘사하는 부분은 그것 자체로 문학적인 매력이 가미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강의 모든 작품을 통틀어 특별한 여주인공이기도 한 도미니크의 존재는 작품 전반을 육체적인 성애화로 추락시키지 않고, 20대에 접어든 보통 여대생의 사랑에 대해, 우리 역시 이 작품으로 인해, 각자가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보게 하여, "그때 우리의 사랑은 어떠했는가"를 스스로 반추해 보게 만들어 줍니다. 우리 모두가 젊은 시절 느끼고 체험했던 각자의 '순결한 사랑'에 대해서 말입니다.

젊은 시절의 서툰 열정 그 자체를 떠올리게 하는 베르트랑과 세월을 겪고 여자에 대해 많은 경험을 한 뤽은 도미니크에게 있어, 각자 별개의 관계로 종속됩니다. 단순히 양자의 관계가 현실적인 문제로 이뤄질 수 없는 한계로 읽히기 보다는 도미니크의 입장에서 사랑의 존재 여부가 두 사람 사이를 가르는 조건이 되기도 하는데요. 이를테면 여자에게 있어 '사랑의 의미'는 그저 육체적인 관계를 위한 자신 스스로에 대한 납득이 아니라, 누군가를 향한 순수한 열망이자, 순간 순간을 함께하고 싶고, 나만의 남자가 되었으면 하는 그야말로 원초적인 감정을 포함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어느 정도 초반에 불순한 의도를 갖고 접근한 뤽에 대한 '감정적인 면죄부'가 이 사랑을 통해, 확정되는 것이기도 하죠. 단지 사회적 시선으로만 봤을 때, 유부남과 여대생의 육체적 관계를 포함한 일련의 과정들이 역겨울 수 있다고 볼 수 있지만 그것의 한 가운데에 있는 도미니크에게 있어서, 뤽의 아내 프랑스아즈의 선의와 자신을 향한 따뜻한 관심까지 거스르게 만든, 그녀의 남편과의 관계 그 자체가 때론 스스로를 경멸하게 만드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복잡한 시점에서 사강이 여러 작품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안락함'에 있어 뤽이 제공할 수 있는 그러한 경제적 가치도 쉽게 치부할 수 없는 조건이 되었습니다. 평범한 젊은 여자가 보다 어른인 남자가 제공하는 '경제적 안락함'을 가볍게 생각할 수 없다는 인식 자체는 이미 현실에서도 관계에 있충분히 중요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결국 자신의 안락함을 관계를 맺는 남자에게 기대하는 여성 주인공에 대한 사강의 고백은 이러한 맥락의 배경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끝으로 이 작품은 2부 중후반부터 3부까지, 각 등장 인물들의 틀에 박히지 않은 대사와 감정선이 매력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더불어 도미니크의 뤽과의 예정된 결말에 대해 겪는 감정적인 변화와 스스로를 성찰하는 모습은 우리가 이미 겪었던 지난날의 서툰 편린들을 사뭇 떠올리게 합니다. 유부남의 마력에 빠진 도미니크의 모습 자체는 자신을 나락까지 끌고 가는 모진 사랑을 경험해 보지 못한 한 인간의 순결함이라고도 볼 수 있겠는데요. 작품에서 사강이 도미니크를 통해 거듭 언급하는대로 사랑이 때론 독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현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패악을 겪어본 우리에게 있어 이러한 사랑이 매번 아름다울 수 없다는 현실의 대면은 그만큼 의미심장하다고 여겨집니다. 설사 이런 모든 것을 쉽게 인정하지 않는 심리적으로 완고한 사람에게조차 말입니다.



하지만 내 속에는 이 젊은 남자의 말끔히 면도된 목덜미를 따라가게 만드는 어떤 것, 나로 하여금 저항하지 않고, 생선처럼 차갑고 미끌거리는 사소한 생각들을 지닌 채 늘 그를 따라가게 만드는 어떤 것이 있었다.

베르트랑은 내 첫 애인이었다, 내가 내 몸의 고유한 냄새를 알게 된 것은 그의 몸 위에서였다.

그녀는 사람들을 극도로 주의 깊게 대했고, 대단한 선의를 지녔으며, 그 선의 속에는 침착한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 게임은 베르트랑에 대한 충분히 견고한 감정을 파괴시키는 것은 물론, 나 자신에 대해 당혹스럽고 신랄한 감정을 갖게 할 터였다.

나는 그들의 잡담이, 남자애, 여자애 사이의 이야기들이, 소위 사랑에 빠진 어린애의 장난들이, 그들의 드라마들이 역겨웠다.

나는 새벽이 올 때까지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와 키스만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베르트랑은 키스할 때 매우 빨리 지쳐버렸다.

왠지 모르지만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난생처음으로 내 어린 시절과, 가족의 안전함과 결별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벌써부터 아비뇽이 싫어졌다.

"내가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데? 베르트랑이 나를 죽이지는 않을 거고, 프랑스아즈는 나를 떠나지 않을 거야.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을 거고"

그와 같은 음색의 목소리, 한순간 아마도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는, 하지만 그가 나에게 그것을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가슴속에서 심장이 마구 뛰었다.

그는 조금 지친 기색이었고, 나는 우리가 이 조그만 모험을 잘 치러냈다고, 우리는 정말로 문명화되고 합리적인 성인들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갑자기 나 자신에 대해 일종의 분노와 함께 끔찍이도 굴욕적인 기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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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어떻게 실패하는가 - 미중 패권 대결 최악의 시간이 온다
마이클 베클리.할 브랜즈 지음, 김종수 옮김 / 부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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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미국 메사추세츠 터프츠 대학에서 정치학과 부교수로 일하고 있는 마이클 베클리는 미국내 강대국 경쟁과 관련한 연구에 있어 권위를 갖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는 애틀랜타에 소재한 에머리 대학에서 국제학 학사를 마치고, 미국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그는 미국 국방부와 정보국에 특별한 자문을 제공하고 있기도 한데요, 특히 그의 여러 논저들은 파이낸셜 타임즈, 포린 어페어즈, 뉴욕 타임즈, 워싱턴 포스트 등에 소개되었고, 미국 정치학회 (American Political Science Asssciation)에서 수여하는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 책의 다른 공저자인 할 브랜즈는 미국 외교 정책에 있어 국제 관계 분야의 전문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스탠포드 대학을 거쳐 예일대에서 역사학 석,박사를 취득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미국 내에서 존경 받는 역사가이기도 합니다. 현재 그는 존스 홉킨스 대학의 헨리 키신저 국제 문제 특훈 교수로 일하고 있으며, 동시에 미국 기업 연구소 (American Enterprise Institute)의 상주 학자이기도 합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이 책은 요즘 국제 정치와 외교에 관련된 귀중한 지식들을 시민들에게 소개하고 있는 국제정치학자 김지윤씨의 개인 유튜브의 소개 영상을 보고 급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영상에서 소개된 이 글은 대체로 평가가 나쁘지 않았는데요. 개인적으로는 요 근래 미중 대결과 관련된 여러 글 가운데 현실적 측면에서 이를 고려한 글로 여겨졌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2023년의 중국의 대단한 굴기를 예측했던 옌쉐퉁의 기대와는 달리 현재 중국에 놓여 있는 국제정치학적 배경이 결코 낙관적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겁니다. 이에 이곳의 공저자들은 현재 중국을 '거의 정점에 오른 국가'로 단언하고 있었는데요. 이러한 주장의 맥락은 아마도 지오바니 아리기가 중국에 대해 예측한 '불안정한 강대국' 혹은 '한계를 갖는 강대국'과 연결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인식적 상황에도 중국은 기존의 덩샤오핑의 유훈이기도 했던 '도광양회'를 철회하고, 본격적으로 자국의 이익을 위한 공격적인 외교에 나서게 됩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이해하고 있듯, 현재 중국을 지배하고 있는 중국 공산당이 제일의 과업으로 삼은 건, 과거 서구 열강의 침탈과 관련된 치욕적인 역사를 만회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땅한 세계관으로는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맹목적인 관점을 포함한 매우 자국 중심적인 사상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하지만 이와는 다르게 과거 우리 선조들의 국가였던 백제는 대륙의 중국을 그저 '서국 西國'으로 지칭했던 역사가 있었습니다. 한반도의 중국 대륙이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니 이를 규정한 조상들의 지혜는 정말 대단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렇게 아픈 역사를 어떻게든 만회하고자 하는 욕망은 당과 중국인들의 뜨거운 열망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중국의 정치적 변화는 공저자들에 의해, "소위 과거의 대국이었던 중국이 엄청난 경제적 발전을 통한 굴기에 나서면서 1970년대 이전의 다면적인 인내를 더 이상 감내하기 어려워졌다"고 보는 분석은 일견 타당한 측면이 있어 보입니다. 즉, 과거의 강대국이라는 인식을 강하게 보유한 국가가 현재 자신들의 국력에 걸맞는 지위를 국제사회로부터 당당히 요구하게 될 것이라는 예측이 저변에 깔려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미국과 유럽 국가들에 의해 현실 타파 세력으로 인식된 중국은 현재 자유주의 체제 성립에 있어 자신들이 참여한 바가 전무하기에 이런 국제 체제가 다소간 불합리하다고 여기는 중입니다. 아마도 '대국 중국'에 걸맞는 국제 체제의 새로운 요건을 미국과 서구 유럽이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믿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날 중국 외교가 벌이고 있는 '전랑 외교 wolf-warrior diplomacy'가 어느 정도 복잡한 양상이 자리하지만 거의 반쯤은 이러한 의도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해 보게 됩니다. 이러한 가운데 중국은 남중국해에 구죽한 강제적인 자국 영해 추진과 군사 기지 구축은 필리핀이 제소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결에 대해, '꼭두각시 재판소의 판결은 구애 받지 않을 것이라고 거의 일갈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몇 년 간 중국이 벌인 남중국해 지역에 대한 불법적인 내해화에 대해 국제 사회가 아무런 관여를 하지 못한 것은 아쉬운 부분으로 남아 있는데요. 캄보디아를 동원해 아세안을 적극적으로 분열시킨 중국의 노골적인 개입이 있기도 했지만 해당 지역의 국가들에게 여전히 중국과의 교역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할 수밖에 없는 현실은 전체적으로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녹록하지 않은 상황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런 대 중국과의 교역 문제라는 아킬레스 건에 있어 우리도 역시 사드 배치 문제로 중국의 혹독한 경제 제재를 겪은 바가 있는데요. 제가 일일이 당시 워싱턴의 태도를 물고 늘어질 생각은 없지만 그때 미국이 보인 태도는 실로 믿겨지지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2015년 9월 중국 전승절에 참석한 대통령과 우리 정부를 소위 '손봐줘야겠다'는 생각으로 그런 사태에 모호한 태도를 취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드 보복'에 대한 미국의 인식이 어떤지 이 글을 통해 새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굳이 이 사건을 언급하는 이유는 여기 이 논저의 명백한 한계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논증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즉 민주주의 국가들의 소위 '대 중국 연합'과 관련해, 일본을 제외한 대다수 해당 국가들의 중요한 경제적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중국 교역의 현실적 딜레마를 여기 전문가들은 거의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세계 공급망에서 중국을 퇴출시키고 건전한 민주주의 국가들이 주도하는 '공급망 통제'에 대한 필요성은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중국과의 교역과 관련해 전혀 개의치 않는 태도를 보이는 일본을 제외한다면 각국에게 경제적 다변화를 위한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물론 미국은 지난 1985년 플라자 합의에서 독일과 일본에게 강요했던 것처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동맹국의 경제 전반을 후순위로 취급할 의지도 배제할 수 없는데요. 과거 냉전의 엄혹한 시대를 거치는 동안 미국의 민주주의 세력의 보호와 유지를 위해 기여한 노력들은 충분히 인정을 받을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패권이 강요하거나 배타적이지 않고 자유 민주주의라는 틀 안에 다수의 국가들과 공존하려고 했던 저자들의 분석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역내 민주주의 국가들이 중국과 경제적 관계를 완벽하게 철회하기란 매우 어려우며,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금융 자본주의하에서 이뤄지는 수많은 금융 거래와 산업 전반이 중국에 소재한 공장에서 이익이 발생한다는 점에서 이것을 어떻게 성공적으로 대체할 수 있겠는가에 미국이 원하는 대 중국 봉쇄의 실효적인 효과가 여기에 결부되어 있다 볼 수 있겠습니다.

모두가 인정하는 국제 레짐의 차원에서 미국이 주도하는 민주주의 국가들과 중국의 직간접적인 대결에 있어, 앞으로 비정상적으로 초래될지 모르는 중국의 대만 침공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관건이 될 텐데요. 지금 세계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위치를 자임하고 있는 미국은 대만의 방어가 무엇보다 중요해진 시점입니다. 이 뿐만 아니라 남중국해 문제와 관련해 최근 약한 축으로 인식되고 있는 필리핀에 대한 중국 인민 해방군의 선제 공격 가능성도 동시에 중요한 문제이기도 한 데요. 여기의 공저자들은 앞선 진술에 대해, 5장에서 "만일 중국이 필리핀 군을 공격한다면 미국으로서는 매우 힘든 선택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다소 냉정히 판단하고 있었는데요. 만약 필리핀을 소위 버리는 패로 취급한다면 전세계에 있어 미국의 리더십은 엄청난 타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아마 중국과 러시아는 이런 미국의 리더십이 타격 받는 상황을 무엇보다 바라고 있을 텐데요. 이처럼 유사시 대만 해협에서의 사태는 그저 지역적 해협의 위기로 끝나지 않고 그 주변으로 여파가 미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센카쿠/댜오위다오를 실효 지배하고 있는 일본에게 있어서도 현재의 조짐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중요한 시점입니다.

끝으로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있을지도 모르는 중국의 불법적인 대만 침공과 관련하여 '한국의 군사적 기여'라든지, '한국의 역할'에 대해선 거의 언급하지 않은 부분은 무엇보다 적잖이 마음이 놓였습니다. 물론 이 점은 그저 저만의 개인적 감상일 따름일 텐데요. 이 뿐만 아니라 7장에서 언급되는 푸틴이 미국이 주도하는 NATO에 흠집을 내고자 하는 점이나, 독재 정치의 정당성을 드높이는 것으로 중국이 깨뜨리고자 하는 국제 질서의 위태로운 상황은 확실히 심상치 않은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 두 독재자들을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는 재단할 수 없는 점은 거의 분명해 보이고, 이들이 지배하고 있는 전제 정치 혹은 독재 권력이 어떤 식으로 우리 민주주의 진영에 위협이 될지는 자명하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다만, 경제적인 부분에서 지금까지 신자유주의 이행으로 상당한 이익을 톡톡히 누린 중국과 서구 자유 진영 역시 마찬가지로 한때는 공동 운명체였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어야 될 겁니다. 더불어 막대한 경제적 성과를 이룩한 베이징이 자유 민주주의로 변화되지 않은 것은 당시 서구권의 안일한 판단이라는 점도 분명히 해야할 텐데요. 이와는 별개로 현재 진행 상황에서 있어 미국에게 일본이 얼마나 중요한 동맹국인지 이 글을 통해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 점은 우리가 미국에게 있어 그저 부차적인 동맹이 되지 않도록 외교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만반의 준비가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현재 유럽 각국이 과거 냉전의 상흔 때문에 대 중국 봉쇄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는 부분도 우리가 참고할 만하다고 생각되는데요. 이런 복잡한 양상 때문에 최근의 수가 뻔히 다 보이는 아마추어적인 외교로는 미일 양국이 주도하는 국제 정세에 있어 그저 그들에게 필요한 장기 말이 될 수밖에 없다고 판단됩니다. 그래서 우리 정부가 대 중국 봉쇄에 대한 민주주의 진영의 체제 구축에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행동에 나서고 있는 미국조차도 글의 8장에서 공저자들이 잠정적으로 제언하고 있듯, 중국에 대해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준비해야 한다고 언급하는 부분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국제외교적 상황의 본질이 무엇인지 확연하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저 동맹 외교에 기대는 순진한 생각은 마땅히 접어두는 편이 국익을 위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대체로 이 글의 논지는 무리할 만한 근거가 거의 없었는데요. 반복되는 몇몇 진술을 제외한다면 글 전반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경희대 안병진 교수의 해제의 결론 부분을 보니 이 분의 어투가 자연스레 생각났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안교수의 글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중국의 관점에서 보면 중국이 차상위권 강대국에 머물 수밖에 없는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는 역사적으로 정상이 아닐뿐더러 몹시 분통 터지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1950년대 대만해협에 위기가 발생했을 때 미국은 중화인민공화국에 핵공격을 가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권위주의 정권은 자유주의적 개혁을 실행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중국의 인접국에는 15개의 세계적인 인구 대국이 포함되어 있고, 이 가운데 4개국은 핵무기로 무장하고 있으며, 5개국은 과거 80년 이내에 중국과 전쟁을 벌인 적이 있고, 10개국은 여전히 중국의 영토 일부를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중국공산당의 터무니없는 인권 유린을 언급할 때조차 중국이 경제적으로 더 개방되면 결국에는 정치적으로도 더 개방적으로 바뀔 것이라고 주장했다.

중국은 국제정치에 죽기 살기식으로 접근하는 자신들의 무자비한 외교 방식을 감추기 위해 ‘상생 외교‘라는 환상을 이용하는 데 뛰어난 기량을 발휘했다.

트럼프는 미국과 가장 가까운 민주주의 협력국을 상대로 무역 전쟁을 시작하는 한편, 수십 년을 이어온 동맹 관계를 깨뜨리는 것에서 파괴적인 쾌감을 얻었다.

따라서 중국공산당은 경쟁자들의 공세를 저지하고 중국몽의 실현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세심하게 계산된 강압 정책과 팽창 정책을 추진할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이미 함정에 빠졌다. 자신들의 정치 체제를 지탱하는 정실 자본주의를 위태롭게 하지 않고서는, 결코 경제 제국주의를 폐기하거나 진정으로 경제를 개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민해방군 역시 사이버 공격과 함께 지상 발사 미사일을 사용해 미군 상호 간 교신 및 워싱턴과 통신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인공위성을 파괴하려 들 것이다.

만일 미국이 조약에 따르는 긴밀한 동맹국인 호주, 캐나다, 프랑스, 독일, 일본, 한국, 영국 등 단 7개국만 결집시킬 수 있어도 강력한 경제 동맹체를 결성하게 될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미국과 동맹국의 기업이 첨단 음성 인식 기술, 안면인식 기술, 컴퓨터 시각인식 기술, 자연어 처리 기술 등 특정 기술을 권위주의 정권에 이전하지 못하도록 막는 일이다.

미국의 몇몇 분석가는 미국이 더 나가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엄밀히 따지면 조약을 맺는 동맹국이 아닌 대만에게 조약에 준하는 안전 보장을 해 줘야 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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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자 2023-06-29 23: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국제정치학자 김지윤씨 유튜브 영상을 보셨군요! 저도 그 영상 통해서 이 책 궁금해져서 장바구니에 넣어놨었는데! 후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베터라이프 2023-06-30 04:47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달자님 ^^ 유튜브에 국제정치를 제대로 소개하는 영상이 드물어서 가끔 김지윤 박사 영상을 보게 되네요. 이 책을 소개한 영상에서는 근래 미중 대결 가능성을 염두해 놓고 최근 이슈에 맞게 해석하고 있었는데요. 실제 책은 주요 논점들에 대한 사례와 근거들 가운데 흥미로운 부분들이 많았습니다. 예를들어 2차대전 당시 일본과 독일의 패착을 현재 중국의 오판 가능성을 염두해 두고 비교 분석하고 있는 부분도 흥미로웠죠. 기회가 되면 꼭 읽어보시길 바랄게요. ^^ 다시 한번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
 
권력
버트런드 러셀 지음, 안정효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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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몬머스셔의 레이븐스크로프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버틀란드 러셀은 영국의 저명한 수학자이자, 철학자, 논리학자 및 존경 받는 대표적인 공공 지식인이었습니다. 특히 그는 수학철학, 언어철학, 인식론, 형이상학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사상가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학문적인 접근에서의 러셀과 스스로의 양심에 따라 믿는 바를 실천했던 사회적 지식인으로서의 그는 상당히 다른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합니다. 영국 역시 양차대전을 겪으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위기를 겪기도 했고 전쟁 수행에서 비정상적인 권력의 집중을 경험하기도 했는데요. 당시 평화에 대한 확신과 그에 따른 지식인의 의무를 알고 있던 러셀은 공공선이라는 측면에서 전쟁을 반대했고 마찬가지로 파시즘과 공산주의 역시 그에겐 비판의 대상이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적극적인 의견 개진은 사회와 대중으로부터 많은 지지와 반대로 상당한 논란을 야기했지만, 실천적 지식인으로서의 의무에 대한 자각은 무엇보다 존경을 받을 만하다고 여겨지는데요. 그는 대전이 끝나고 냉전이 첨예화 되어 가던 시기에 BBC를 비롯한 많은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대중을 향한 강의와 견고한 시민 사회를 위한 지성적인 기여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영국의 정치권조차도 러셀의 이런 노력을 인정했고, 그의 왕성한 대외 활동에서 이를 지켜보는 언론인들조차 그를 지지했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자신의 논저를 통해 이미 수차례 러셀을 존경한다고 밝힌 노엄 촘스키는 러셀의 이런 치열한 삶을 정중히 인정했을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생애 말년까지 정치적 활동을 지속하며 정력적인 삶을 이어간 러셀은 1970년 2월 2일, 웨일스의 한적한 지방인 펜린듀드레스에서 생의 마지막을 맞이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Power'로 1938년에 초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번역가 안정효 선생에 의해 1988년 1월 처음 번역됩니다. 제가 구입해 읽은 판은 2003년 8월에 펴낸 신판입니다. 자리를 빌어 이 책과 관련된 짤막한 개인적 소회를 남기고 싶은데요. 러셀의 이 책은 제가 지난 2008년 5월에 신촌에 있는 모 헌책방에서 구입한 후, 오랫동안 기억에서 잊고 있었던 물건이었습니다. 그러다 최근에 이사를 하게 되면서 이 책을 비로소 찾게 되었는데요. 때문에 이제야 완독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이 책은 절판된 상황입니다.

이성을 갖고 태어난 인간이라면 누구나 권력의 존재에 대해 인지하게 마련일 겁니다. 더욱이 이 권력이라는 존재는 직간접적으로 나를 포함한 모두의 삶에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는 중대한 원인이기도 합니다. '권력자의 명암'이라는 수식어처럼 러셀 역시 '고래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권력의 속성'에 대해, 그의 특유의 현란한 수사를 통해, 거의 통사적으로 분석해 내고 있는데요. 글의 후반부인 16장에서 러셀이 지나가듯 밝히고 있지만 그가 말하는 권력의 양상과 그것이 미치는 영향은 대체로 부정적인 것이 많습니다. 제러미 벤담의 언급대로 인간의 무리는 적절한 통제가 필요한 편이다라는 점을 우리가 인식한다면 권력의 존재 유무는 바로 '통제를 통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물론 러셀에 의해 여기에 제시되고 있는 많은 역사적 사례들은 유럽의 사료가 대부분입니다. 특히나 14세기 이전, 유럽의 전제 정치 하에 국가 사회적으로 양대 권력이었던 왕권과 가톨릭에 의한 소위 신권은 유럽 사회 전반을 끌고 온 중요한 원동력이기도 했는데요. 아마도 많은 분들이 짐작하고 있듯, 특히 가톨릭에 대한 전반적인 서술 대부분은 비판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이 시기의 교황과 황제가 체제의 질서를 위해 서로가 협력하지 않고 몇세기에 걸쳐 대립한 역사는 이를 증명하는 것이기도 한데요. 특히나 14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이후, 교황권에 대한 본질에 있어, 종교에 대한 길드 상업주의의 개입은 꽤나 중요한 전환점으로 읽히기도 했습니다.

러셀의 강조대로 교황권의 몰락이 촉발되었던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몰락 이후 교회의 통치는 유럽의 지배력 나날이 잃게 됩니다. 여기에 교황의 스스로 자초한 권력의 이탈은 교황에게도 불행했을 뿐만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매우 불행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뒤이어 역사 무대에 등장하는 루터 이후에, 전 유럽이 종교 전쟁으로 피바람을 몸소 겪을 수밖에 없던 점을 감안하면 종교가 비정상적인 수단으로 끝내 권력을 유지하려 했던 시도 자체는 비극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에도 훌륭한 성인들이 교회에서 나타나 이들이 "무절제한 탐욕과, 방탕과, 사리사욕이 판치는 세상에서 교회의 뛰어난 인물들의 탄생과 헌신"은 이러한 교회 권력의 전반적인 몰락을 막지는 못했는데요. 저는 이 부분에서 후에 등장하는 '실천적인 도덕'과 관련한 중요한 역사적 맥락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러셀의 주장대로 일반적인 도뎍률과 그에 따른 도덕의 함의는 권력을 보다 강하게 유지시켜주는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그저 윤리 교과서에서나 등장하는 말장난 같은 도덕이 아니라, 앞선 '실천적인 도덕'을 중요하게 여기는 저자는 이 실천적인 도덕의 부재는 과거 교회 권력의 빠른 종언을 부채질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부모를 공경하고, 간음을 하지 않는 등의 교회의 가르침과 거의 다를 바 없는 기본적인 도덕 관념의 이행은 아주 예전의 청렴하고 신실한 사제들에 의해 더할 나위 없이 깨끗했던 교회의 모습과도 일치합니다. 그런 연유로 '종속은 항상 도덕성에 의해 강화된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물론 이러한 진술은 꽤나 엄숙한 종교적인 측면을 갖고 있어, 도덕 스스로가 과거 말고 현대에 있어 어떠한 모습을 갖춰야 하는지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게 만드는 이유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혁명 세력이 등장하기 이전의 초기 자본주의 혹은 상업주의적 시대의 태동은 사회에 적지 않은 부유층을 만들게 됩니다. 이들에 대한 콩도르세의 언급대로, "부유층 대부분이 과두제를 좋아한다"고 볼 수 있는데요. 이는 6장에서 "경제적으로 커다란 불만이 없는 곳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심하게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느끼지 않는다"는 분석과 비슷한 맥락을 갖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지금과 같은 자유 시장 이데올로기의 부유층이 아닌 비로소 잉태하기 시작한 그 시기의 부유한 자들의 대두는 역사적으로 사뭇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일차적으로 자본주의가 공고한 권력을 갖는 이 시기에서 '혁명'이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자본가들의 기저에 깔린 근심은 완벽히 제거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파시즘이 유럽을 강타할 시기에 미국의 포드와 같은 자가 히틀러의 전체주의가 효과적으로 공산주의에 맞설 수 있다고 확신했고, 마찬가지로 이 글 11장에서 언급되는 바와 같이, "이탈리아와 독일에서는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를 구실로 삼아 국가가 다른 모든 것들과 대기업의 위로 올라섰다"는 전체주의가 어떻게 대두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를 여실히 잘 증명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히틀러에 의해 종말을 고한 바이마르의 비극이나, 무솔리니의 철권 통치는 권력을 심각히 오도한 역사적 사례로 볼 수 있을 겁니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 르네상스 시기 이후의 부유층의 대두와 그들이 가졌던 과두제에 대한 동경과 함의는 2차 대전시기의 자본가들의 그것과는 상당히 차이가 나는 인식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철저히 민주적인 정부라고 해도 권력의 재분배는 필요하다는 측면에서 혁명을 배제하기 위해 더 큰 악을 사회에 용인시키는 소위 다른 형태의 권력을 보유한 자들의 비정상적인 행태는 우리가 충분히 곱씹어 볼 만한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러셀은 이 글의 후반부에서 한 가지 비극적인 일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로서는 중요하게 생각하는 민주주의의 보존이 엄청난 숫자의 아이들을 독가스로 죽이고 다른 여러가지 끔찍한 짓을 저지름으로써만 확보될 수 있다고 여러 사람들이 나에게 얘기한 바 있다"고 고백하는데요. 어떤 목적을 위해 가혹한 수단이라도 필요하다는 식의 권력의 오만은 그것의 정당성을 답보할 수 없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공공선과 공공의 이익을 거듭 강조했던 과거 공리자주의자들이 스스로 도덕적으로 고결하고 존경을 받을 만한 인물들이었던 반면에 지금의 많은 정치권력자들은 자신들의 월급과 이익을 향상시키는데 노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공공의 선 같은 것을 '겉치레 과시'처럼 강조하는 연유의 바탕에는 '현대 정치의 복잡한 양상'이라는 왜곡된 지식인들의 선전 효과의 지속적인 영향을 받은 요인도 있습니다. 결국에는 많은 정치인들이 사익을 추구하기 마련이라는 권력의 후퇴에 있어 많은 시민들이 그저 거수기에 지나지 않게 되는 작금의 정치는 참으로 불행하다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수의 유권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는 정부나 정치 권력'이 시민에 대한 정부의 검열과 박해로 이어진다면 이에 따른 민주주의의 위기는 심각한 수준으로 추락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러셀이 심히 경고하는 듯한 어조의 다음의 진술인, "광범위하게 얘기하자면 독일과 이탈리아의 민주주의가 몰락한 이유는 다수가 민주주의에 싫증을 느꼈기 때문이 아니라 군대의 우세한 힘이 수적으로 다수인 쪽에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는 그 시사하는 바가 명백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지금의 시기에서 군대가 어떠한 정치적 결정을 할 수 있겠느냐와 같은 물음은 다소 논점을 벗어난 주제이기도 합니다. 이는 다수가 원하고 바라는 지향에 있어 상당한 권력을 가진 집단이 대다수의 의견에 반할 수 있다는 경고를 담고 있는 것인데요. 무엇보다 민주주의가 국민의 복지를 위해 존재한다는 러셀의 주장을 우리가 이해한다면 우리의 민주주의를 위태롭게 하는 '권력'에 대한 본질을 어쩌면 예상보다 빨리 깨닫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끝으로 과거 권력이 초래했던 여러 불행한 사건들과 다수의 이익에 반하는 권력의 오판을 방지하기 위해 정치적인 측면에서 러셀은, "법을 존중하는 태도와 더불어 자신의 견해가 아닌 다른 견해라도 꼭 나쁘지 만은 않다고 믿는 습성이 필요하다"고 12장의 논증 가운데 강조합니다. 그의 말대로 과거에 민주주의에 영향을 끼친 것이 부와 전쟁이라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전쟁 자체가 민족주의와 경제적 이익의 인질이 되지 않도록 대다수의 민주 국가들이 이를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민주주의 자체는 그것의 이식과 더불어 체제 안정에 있어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만큼 정치인들의 인내심과 그에 준하는 시민들의 안정된 삶 또한 강하게 요구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전반적인 논증 하에 글의 후반부에서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권력을 길들일 수 있겠는가'에 우리의 민주주의의 안위가 달려 있다고 봐도 무방해 보이는데요. 또한 우리의 민주주의가 지속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러셀이 제시하는 바와 같이, "사람들이 어느 정도는 자신의 판단을 옹호할 어떤 확신을 갖고 있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그들의 뜻과 어긋날지라도 다수의 결정에 기꺼이 응해야만 한다"는 제언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온순한 시민'이 아니라 현실의 문제와 정치의 본질에 끊임없이 질문을 할 수 있는 시민들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소위 '강한 기질'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저자인 러셀이 "국가가 스스로 과학이나, 형이상학이나, 도덕의 수호자로 자처해서는 안된다"는 결론에 이른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리고 10장에서 논의되었던 바와 같이 시민과 시민, 국가와 국가 사이의 서로 간에 공감을 찾기 위한 노력 또한 필요하며, 러셀의 논증에서 드러난 민주주의가 갈등과 대립에 다소간 취약하다는 점을 이해하고 이러한 갈등 들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무엇보다 현명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저자는 그 어떤 사상가 보다 국가 간의 전쟁과 그러한 전쟁의 원인에 대해 정치사회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과거의 숱한 역사에서 면밀한 분석을 시도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시대를 거쳐간 많은 엘리트 계층이 은폐했던 전쟁의 본질에 대해 그처럼 파고든 지식인은 아마 많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러셀의 조언들은 현재에도 충분히 설득력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 본문 140 페이지에 역자는 모슬렘과 무슬림이라는 단어를 동시에 기입하고 있었는데요. 단순히 동어 반복을 피하기 위해 저렇게 두 단어를 사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아쉬운 부분입니다.


-크게 의미는 없겠지만 200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


 

인간의 동기 가운데 가장 강력한 한가지인 권력에 대한 사랑은 아주 불균형하게 분포되었으며, 안락함에 대한 욕망이나 쾌락에 대한 욕망 그리고 때로는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 따위의 갖가지 다른 동기들에 의해서 제한을 받는다.

그리고 새로운 신들의 벼락불에 의해 파괴되는 도시들이 런던과 파리가 아니라 베를린과 로마라고 하더라도, 그런 행동이 이루어진 다음에 그 파괴자들의 마음속에 조금이라도 인간다움이 남을 수 있겠는가?

상당히 묘한 일이지만 이른바 지식이라고 일컬어지는 세력은 가장 야만적인 집단 사회에서 가장 강하고,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점점 더 약해진다.

안정된 사회에서는 불의에 대한 끓어오르는 의식을 지닌 상당한 규모의 계층이 없어야만 하고, 따라서 경제적으로 커다란 불만이 없는 곳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심하게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느끼지 않는다.

<권리>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납득할 수 없는 벤담 공리주의자는 실질적인 목적에 있어서 똑같은 개념을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할 수도 있으리라. <어떤 외적인 권위의 간섭이 없이 개인이 자유롭고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상황으로 만일 어느 생활 영역을 규정지을 수 있다면 그때는 만인의 행복이 증가한다.>

기독교의 윤리에 의하면 어떤 국가의 필요성도 어느 사람에게 죄악 행위를 범하도록 강요하는 권한을 정당화활 수는 없다.

개별 학문으로서의 경제학은 비현실적이고 실질적인 길잡이로서 받아들인다는 것도 잘못이다. 그것은 보다 광범위하게 권력을 연구하기 위해서 필요한 아주 중요한 요소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쨌든 한 가지 요소일 따름이다.

정부의 구성원들은 아무리 민주적으로 선출되었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권력을 소유하고,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에 의해서 임명된 관리들도 마찬가지이다.

영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손에 넣지 못한 까닭은 러시아가 그곳에서는 영국만큼이나 강력했기 때문이고, 나폴레옹이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판 것은 그가 그곳을 방허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지구가 평평하다거나,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켜야 한다고 믿는다면, 그는 자신의 사고방식으로 사람들을 전향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도록 자유가 부여되어야만 한다.

소크라테스는 법에 의해서 수립된 권리자들이 바라는 대로가 아니라 그의 영혼이 내리는 명령에 따라 행동하고, 내면의 목소리에 진실하지 못하기보다는 차라리 순교를 당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나로서는 중요하게 생각하는 민주주의의 보존이 엄청난 숫자의 아이들을 독가스로 죽이고 다른 여러 가지 끔찍한 짓을 저지름으로써만 확보될 수 있다고 여러 사람들이 나에게 얘기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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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06-22 23: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권력 참 인간을 행복하게도, 비참하게도 만드는듯요. 인류역사의 불행의 이유인듯요.

베터라이프 2023-06-23 00:08   좋아요 1 | URL
러셀이 이 글에서 인간이 지배를 하는 쪽과 지배를 당하는 쪽으로 분류할 수 있고, 상당수가 은연중에 지배를 당하는 것을 원한다고 인간을 그리 평가했어요. 권력에 대한 측면도 이와 비슷한데 모순적인 부분과 동시에 자유주의에 반하는 속성을 권력이 역사에서 여럿 드러냈다는 점은 독재 권력과 그렇지 않은 자유주의 정치의 상반된 속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인간은 모순된 존재라고 읽히는 걸까요. 쓸데없이 주저리 쓰게 되었네요 ^^ 참.. 그레이스님이 쓰신 에르노 관련 글들은 에르노가 생각날때마다 읽고 싶네요 ^^
 
인간 정신의 진보에 관한 역사적 개요 고전의세계 리커버
마르퀴 드 콩도르세 지음, 장세룡 옮김 / 책세상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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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도르세는 인류의 역사 가운데 18세기에 큰 족적을 남긴 사상가입니다. 그는 일생을 계몽주의에 헌신했고 자유, 인간의 이성, 평등한 교육 등과 관련된 진보의 이념에 큰 영향력을 남긴 인물이기도 합니다. 특히 프랑스의 철학자인 오귀스트 콩트가 그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은 점은 오늘날 유명한 일화로 알려져 있습니다. 데이비드 흄과 애덤 스미스가 연상될 정도로 튀르고와의 놀라운 우정과 프랑스 혁명 이후, 혁명의 기운이 더할 나위 없이, 팽창한 시기에 보다 합리주의적인 사회 재건을 위해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1792년 12월, 루이 16세의 재판에서 그는 재판 자체는 지지했지만 왕의 사형에 반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이 점 때문에 혁명 수뇌부에 눈밖에 나 도피를 강요받게 됩니다. 그는 총 8개월 기간의 도피 끝에 체포되어, 곧 부르라렌느에 수감되고 얼마 안 가, 아편을 사용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이후 그의 사상적 업적을 기려 1989년 상징적으로 팡테옹에 안장되기에 이르는데요. 그의 시신은 19세기에 이미 분실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콩도르세의 저작 가운데 두 편을 발췌해 번역한 것으로, 참고로 이 글의 1장은 '공교육 5론'의 1장을 번역했고, 2장은 인간 정신의 진보에 관한 역사적 개요의 '열 번째 시대'를 옮긴 것입니다. 국내에는 2002년 1월 초판 번역이 이뤄졌고, 제가 구입해 읽은 판은 2019년 12월에 펴낸 개정 1판이 되겠습니다.

앞서 설명해 드린 바와 같이, 이 글의 1장은 인종과 성별에 따라 차별 받지 않는 시민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과 이를 위한 권력의 역할을 다루고 있습니다.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공교육의 필요성과 함께 이것이 어떻게 국민들에게 이득이 될 수 있겠는가에 대한 콩도르세의 제언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여러 평론에서 콩도르세에 대해 공통적으로 평가하는 부분도 그렇지만 그는 누구보다 계몽을 굳게 신봉했던 인물이며, 인간 이성이 기반이 된 우리의 발전 가능성을 믿고 있었던 사람으로도 읽힙니다. 이는 어떻게 보면 이성을 수단으로 삼았던 칸트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다소 이른 결론이지만 이러한 공교육이 많은 국민들에게 제공될 때, 그가 말하는 대로 한 가지 확실한 부분은 정치가 더 이상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이는 인간 진보와 나아가 사회적 진보와도 결부될 수 있고 이렇듯 진정한 계몽주의자라면 큰 맥락에서 그의 주장에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이처럼 교육은 어린 시기부터 훈련이 이뤄진다면, "이성을 강화하고 이미 습득한 지식을 새로운 지식으로 살찌우고, 오류를 바로잡는 등"의 순기능을 보장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대부분의 시민들이 "협잡과 궤변의 홍수 속에서" 속된 말로 평생을 전전긍긍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물론 콩도르세 역시, 약간의 논외로 능력의 차이라든지, 주어진 환경에 따라 격차가 날 수밖에 없는 능력주의적 기반(?)에 대해 어느 정도는 수긍하고 있습니다. 다만, 광범위하고 소위 독선적인 중상주의적 잣대가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런 상업주의적 현란함에 우리가 어느 정도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인데요. 왜냐하면 능력주의는 무엇보다 이런 상업주의와 잘 어울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맥락의 이해를 저자는 1장 후반부에서 잘 드러내고 있는데요. 이것은 콩도르세가 애덤 스미스의 "기계적인 직업이 분화될수록 인민은 소수의 같은 종류의 관념에 제한된 사람들 특유의 우둔함에 물들 위험이 있다"는 점을 인용하며 경계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여겨집니다. 더욱이 사회에 만연된 대부분의 악덕을 국가가 나서서 조장하지는 않겠지만 여기서 분명한 점은 (철저한) 교육이 이러한 악덕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는 당위입니다. 이를 좀 더 확대해 보면 '특수한 지식'이라는 소위 특정 계층의 전문 지식화와 이를 통한 헌법 바깥의 소위 특별한 지위의 부여와 같은 주장 등이 많은 지식에 융합되어 전문성을 잃게 되는 것을 우려하는 소위 전문 계층의 독재가 일반 시민들을 오도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어느 정도는 민주주의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이것은 단적으로 말해 모든 사회가 특수 계층과 기득권층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일컫는 것이기도 합니다.  더욱이 정치 관념적으로 체계가 잡히지 않은 대다수의 시민들을 대상으로 평등을 그저 아주 일관된 '사회적 균질화'로 폄훼하여 이것을 언론과 여론을 통해 그 일고의 가치도 없는 분란을 조장하는 것과 같은 현란한 정치 논설도 마찬가지로 '교육'이 이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과정 자체는 진정한 계몽주의적 진보의 흐름이라 읽히기도 합니다.


또한 일전에 로버트 달이 우려했던 바와 같은 통찰을 콩도르세의 다른 논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는데요. "시민들의 자녀 대부분이 고된 직업에 종사하도록 예정되어 있다"는 문장은 실로 엄청난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역으로 해석해 보면, 높은 교육과 이를 통해 재산을 축적한 부모 밑의 자녀들이 그만큼 고된 일자리와 멀어질 수밖에 없다고 추정하는 것과 앞선 문장의 이후 진술에서, "교육에 적은 시간밖에 할애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성립된다면 그 사회는 계몽의 진보에 기대할 수 있는 모든 이익을 희생해야만 한다"는 결론을 피력합니다. 이처럼 교육은 사회 계층적 측면에서 부와 지식의 습득이라는 측면에서 소외되어 있는 많은 시민들을 자신들의 권리를 위한 민주주의의 이념에 부합될 수 있도록 훈련시킬 수 있고, 어떻게 보면 부모의 가난까지 짊어진 자녀의 세대가 진정한 삶의 돌파구로서 교육이 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인식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논증의 결말에서 교육이 어리석은 정치에 우리 권리가 희생 당하지 않도록 방지하는 데 무엇보다 탁월한 해결책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교육을 위해, 공권력이 지녀야 할 최소한의 도리와 이 교육을 둘러싼 환경에서 권력이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지 말아야 하는 지를 콩도르세는 후반부에서 이를 논증하고 있습니다. 특히 저의 눈길을 사로 잡은 부분은, "공권력은 진실의 모든 힘으로 악덕에 대항해야 하지만 그 진실을 결정하는 것은 공권력이 아니다"라는 특별한 문장이었습니다. 이는 전반적인 논증에서 참으로 중요한 맥락으로 여겨졌는데요. 앞선 종교와 도덕의 원리에서도 그렇고 공권력이 시민들에게 그러한 무대를 제공할 수 있을지언정 그것들의 주체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저자의 주장은 이처럼 민주주의의 '분립'과 하등 어긋나지 않고 맞닿아 있습니다. 시민들은 무엇보다 "자유에 대한 사랑과 독립과 평등에 대한 고귀한 열정"을 몸과 마음에 지녀야 하며, 그들 스스로가 노예의 삶이 되지 않게 끊임없이 갈고 닦아야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중요한 의미라고 생각됩니다. 그것이 계몽주의의 뼈대가 붙든, 진보 이념 혹은 인간 이성의 곁 가지라 할지라도 우리가 보기에 아주 명확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더구나 후반부에서 종교적 광신에 빠진 종파들이 사회와 시민을 어지럽힐 수 있다는 주장이나 진실과 진리를 결정하는 것 자체에 대한 혼란스러움과 같은 '이성의 불안'이 조장된다면 이는 계몽주의의 몰락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콩도르세를 콩도르세 다운 외침으로 여겨지는 남녀 평등에 준하는 교육의 필요성은 사실상 1세기 이상 차이나는 선구자적 발언이기도 합니다. 여성의 교육을 통해 발견될 수 있는 사회적 이익에 대해서도 그는 강조하고 있고 특히 여성만이 갖는 이점에 대해서도 역시 논하고 있습니다. "치밀할 정도의 정확성, 정주적이고 규칙적인 삶을 요구하는 그런 관찰" 등은 여성이 갖는 고유성으로 이는 저자의 말마따나 계몽의 이바지 할 수 있는 능력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는 남성과 동등한 교육을 통해 더욱 더 발현될 수 있을 겁니다. 단순히 여자들을 단순한 가사 노동에 몰아서 가부장적 체제에 이바지하는 것보다 이들을 교육시키고 훈련시키는 것이 사회에 더 이익이라는 측면을 사실상 강조한 것인데요. 이는 계몽이 남녀를 떠나 서로 동등한 이성의 존재라는 관념에서 명확히 부합하는 인식의 결과물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생각과 제안들을 한 콩도르세는 어쩌면 시대를 벗어난 진보주의자였던 것 같습니다. 인간이 마땅히 스스로를 교육하여 자신의 삶을 위해 분연히 결정할 수 있다는 믿음은 입으로만 이성을 위치는 다른 사상가들과는 엄연히 구분되는 그의 특성일 겁니다.

결국 완전한 인간상을 구현할 수 있는 교육과 이런 체제의 사회는 결국 진보의 이념적 결과물로서 태어날 수 있을 텐데요. 체제를 그저 생물로 빗대는 것이 아니라, 교육의 이성에 부합되는 수많은 시민들이 건설한 사회야 말로, 많은 계몽주의자들이 꿈꿔 왔던 사회의 일부일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진보적 건설이 당시에 상당히 어려웠던 이유는 아마도 추정한 건대, 상업주의의 발전과 함께 개인의 이익이라는 관념의 출현일 겁니다. 저자인 콩도르세도  "자신의 이익에 대해 계몽될 수 없다"는 문장으로 이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특히나 '어긋난 이해 관계'라는 구절 자체도 앞으로 사회가 어떤 식의 갈등에 놓일지 그는 미리 예견"한 듯 보이는데요. 그런 측면에서 이 이익과 도덕은 서로 상충될 수밖에 없는 운명인 듯 보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숱하게 들었던 시장의 이성이라는 궤변도 어떻게 하면 개인이 추구하는 이익을 무엇보다 인간의 우선 순위에 둘 수 있겠는가에 기인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이런 과정 이전에 과학의 진보가 달성한 인간 사회의 개념적인 진보의 기여에 대해서 저자가 어느 정도 인정하고 상찬하는 것은 다른 말로 인간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게 했고, 이것의 진보는 점진적인 사회 체제의 변혁으로 이어졌습니다. 즉, 과학의 진보가 초래한 광범위한 기여에 대해 우리가 망각을 해서는 안 되는 부분일 텐데요. 그럼에도 콩도르세가 철학자의 역할, 철학의 의무 등을 언급하며 양자 간의 균형을 기대한 것은 그저 그가 계몽주의자였기 때문에 이러한 논법을 주장한 것은 아닐 걸니다. 다만 인간은 쉽게 편견에 사로잡히고 궤변에 농락당 할 수 있는 존재이니 만큼 과학이 사회와 격리되는 것은 미연에 방지해야 하며, 마치 과학의 진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인간의 이성을 제대로 붙잡을 수 있도록 여러 노력과 사회의 배려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일전에 존 듀이가 설파했던 것처럼 이러한 논법들은 그저 뜬구름 같은 이론으로 치부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금도 인문학의 거듭된 쇠퇴로 매일 그 자리를 잃어가고 있고, 일전에 우리가 철학자에게 보였던 존경과 애정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가 '경제적 이성'의 노예가 될 가능성은 높아지고 있으니 그 가운데 민주주의가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지거나 아니면 부득 전쟁의 비참한 참화가 다가올지도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볍률이 파괴할 수 없는 어떤 현실적 구분이, 계몽된 사람들과 계몽되지 못한 사람들 사이를 분명하게 구분지어, 모든 사람을 위한 행복의 수단이 아니라 분명 어떤 사람들을 위한 권력의 도구가 될 어떤 현실적 구분이 존재할 것이다.

무지의 결과인 이러한 굴종적 종속 상태는 거의 모든 인민, 최대 다수에게 효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공권력의 수많은 의무 가운데 하나는 지식 획득 수단을 보장하고 용이하게 하고 증가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교육의 평등은 예술의 완성에 기여할 것이다. 그리고 재산의 불평등이 예술에 몸바치고 싶어하는 사람들 사이에 만들어놓은 불평등을 파괴할 뿐 아니라, 복지의 평등이라는 더 일반적인 또 다른 평등을 확립시킬 것이다.

같은 지점의 주위를 더욱 확장해, 같은 원리에서 나오는 결과들과 같은 방법론으로 발견된 진실들을 더 많이 끌어모으는 것 역시 과학의 진보에 포함된다.

그러므로 교육이 인간을 양성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교육은 양성한 사람들을 보존하고, 다시 무지에 떨어지지 않게 해야 한다.

더 자유로운 국가는 더 많은 공적 기능이 공통 교육만 받은 사람들에 의해서도 행사될 수 있는 나라이다.

애덤 스미스는 기계적인 직업이 분화될수록 인민은 소수의 같은 종류의 관념에 제한된 사람들 특유의 우둔함에 물들 위험이 있음을 지적했다.

그러지 않으면 권력은 그것을 얻은 개인들의 배타적 유산으로 만들면서, 어떤 직업에 헌신하면서, 매우 현실적인 어떤 불평등을 끌어들이게 될 것이다.

여러 나라의 인민이 결국 정치와 도덕의 원리 안에서 접근하게 될 떄, 한나라의 인민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외국의 인민들에게 자연이나 자신들의 산업에서 나오는 재화의 더욱 균등한 분배를 호소하게 될 때, 국민적 증오를 낳고 악화시키고 영속시킨은 그 모든 원인들은 점차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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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세미나 - 체제 이행기의 사유와 성찰
김규항 지음 / 김영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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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김규항 씨는 1962년생으로1980년대 초 한신대 재학 시절, 나름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이후 1998년부터 영화 주간지 '씨네 21'에 유토피아 디스토피아라는 칼럼을 쓰면서 본격적인 집필 활동에 나서게 되는데요. 2000년에는 홍세화, 진중권 등과 함께 사회문화 비평지 '아웃사이더'를 만들고 편집주간을 맡습니다. 그는 한국의 진보주의 운동에서 드물게도 실천적인 사회 정치 이론가로 적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지지와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그의 글쓰기는 군더더기 없는 명료한 논증을 통해 규명된 비판적 주장들로 큰 설득력을 얻고 있고, 예전에 인터뷰에서 접한 그의 솔직한 태도도 인상 깊어 지금도 간혹 그의 이미지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더욱이 저에게는 1999년 경에 시작된 의약 분업 사태와 관련된 그의 글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의 이 책은 한신대 김성구 명예교수가 마르크스 자본주의와 관련해 감수를 맡았고, 2023년 5월 글의 초판 발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작고한 지그문트 바우만은 자본주의를 추종하는 현재의 경제학과 관련해, 인류가 자본주의를 받아들인 것이 채 몇 세기가 되지 않는데 지금까지 인류는 자본주의를 거의 불멸의 체제로 인식하고 있다고 비판한 바가 있습니다. 과거 봉건시대에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농노들도 영주에 반해 들고 일어날 권리가 있었던 역사에서 우리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는 미명하에 이상하게도 인간이 체제에 순응하고 종속된 상황이 이어지고 있는데요. 이러한 상황에서 나온 저자의 이 책은 우리가 숭배(?)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태생적 본질을 독자들과 시민들에게 면밀히 알리고자 하는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반적으로 여기에서 논증되는 주제들은 대부분 현실적이고 이론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6장에서 거듭 강조하는 대로, "우리가 자본주의적 병리 현상에 저항하고 비판해야 하는 것은 어쩌면 인간으로서 당연한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자본주의를 숭배하는 경제학자라는 수식은 어쩌면 많은 경제학자들이 비판적 이성 없이 그저 경제학에 순화된 상태로 그려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자의 비판대로 지금 경제학의 본질은 그저 일어난 일에 대한 통계적 분석과 결과물에 대한 일차적인 입장 정도 뿐입니다. "무슨 이유로 그러한 일이 발생되었는가"는 경제학자들의 관심 범위가 아니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더욱이 많은 경제학자들이 경제학 자체를 진리로 받아들이며 학문의 비판적 영역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심각한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이러한 점은 이미 질베르 리스트가 강하게 비판한 바가 있습니다..그런 연유로 학계의 분위기는 일차적으로 기존의 자본주의와 이를 뒷받침하는 경제학을 실질적으로 비판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만들었고 이렇듯 체제 전반이 어떠한 비판도 용납하지 않는 유일신 종교와도 같은 상황을 유지해 왔는데요. 이를 달리 말하자면 핵 발전소와 관련한 현재의 원자 공학과 산업의 카르텔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하에 가격으로 매겨진 가치와 그에 따른 상품의 생산과 판매를 통해 '부의 축적'이라는 메커니즘이 지금까지 자본주의의 중요한 토대일 겁니다. 특히나 저자의 언급대로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쉴 새 없이 상품의 교환을 경험하게 될 텐데요. 하물며 여성의 성 상품화를 통해 그것이 문화적인 행태일지라도 인간의 상품화까지 이뤄지고 있는 시점에서 거의 단적으로 말해, 인간 대부분이 이 체제에 종속된 상황임은 확실해 보입니다. 여기에 더해 이런 수많은 상품들을 판매하여 부를 축적한 자본가들 역시, 자신들조차 체제를 굴러가게 하는 하나의 톱니바퀴임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을 겁니다. 물론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예전 포드주의 시대와 같이, 자본가와 노동자 계층의 분리가 명확하지 않은 다소 복잡한 형태로 계급 분화가 되었고, 상품이 거의 물신으로 숭배되는 이 시대에서 자본주의가 인간을 계급적으로 자유롭게 만들 수 있다는 기존의 믿음이 회의적으로 현실에 안착된 상황이라 판단됩니다. 이처럼 모두가 어떤 상품의 생산 과정에 깊이 관여하면서도 판매와 이익 회수에 있어 어떠한 권리도 요구할 수 없는 상황이 이 체제의 진정한 본질이 아닌가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런 상품과 관련해, 떼려야 뗄 수 없는 '노동력 제공 시장'에 대해, 이 글 7장인 '평등을 삼킨 공정'에서 저자는 자본주의가 초래한 그런 사회적 여파에 대해 아주 상세히 서술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도 언급했지만 평등은 자유와 함께, 민주주의에 있어 중요한 가치입니다. 불행하게도 과거 냉전 시기에 있어 첨예한 대립의 역사 때문에 평등 자체를 색깔론으로 취급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은 것이 현실일 텐데요. 이 장에서 저자가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현 정부의 공정과 상식이라는 대체적인 주장의 본질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상품 교환의 원칙과 룰을 벗어난 모든 것" 즉, 최소한의 인간 다운 삶을 보장하는 사회 부조와 사회적 제도에 대한 불신과 공격, 그리고 이러한 활동을 통해 스스로의 이익은 스스로가 찾으라는 소위 제한된 공정의 개념은 사실상 평등을 집어 삼켰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개인의 이익 추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능력과 능력주의에 있어 이 공정이라는 개념은 무엇보다 중요한 단어이며, 법을 내세우며 공정을 강조하는 사회일수록 평등과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결론은 이처럼 설득력이 높다고 생각힙니다. "공정은 그렇게 평등을 삼킨다. 사람들은 불공정한 상황에 분노하고 항의하지만, 그럴수록 평등은 더 멀어진다."

한국 사회 만큼 능력주의가 철저하게 이식된 사회는 전세계에 드물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이 능력주의는 전반적으로 신자유주의와 아주 깊이 연관되어 있고 달리 말해, 능력주의와 신자유주의는 거의 한 몸으로 보면 되겠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꽤 중립적으로 여겨졌던 경제학자 홍기빈 씨조차도 일전의 인터뷰에서 신자유주의가 무조건 나쁜 것 만은 아니라고 그런 취지로 발언한 장면을 본 기억이 납니다. 저자는 앞선 그와는 다르게 신자유주의에 대해 아주 명확한 비판을 가하고 있는데요. 우리 나라의 수많은 자본가 계급은 엄밀히 따지자면, 신자유주의 하에서 자신들의 능력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1950년대 전후 적지 않은 유산을 바탕으로 지금의 자리에 오른 계급으로 일전에 장 피에르 뒤피가 언급한 바와 같이, 자본가 계급이 윤리적으로 혹은 도덕적으로 인정받을 만한 그런 부류의 사람들도 아니거니와 그저 자신의 이익에 충실하고 좀 더 많은 부를 쌓기 위해 노력한 것으로 우리가 이것을 좀 더 분리해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사회적 이행에 필수불가결한 사회 체제와 어떤 동일한 인식으로 봐서는 안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클로드 르포르가 바로 이 점에서 시민들의 분별력을 원했던 것이고, 이는 한편으로 우리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 건설적이고 비판적인 의견을 낼 수 없는 본질적인 이유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많은 신자유주의자들이 신자유주의가 전세계에 규제 없이 이행하게 된다면 시장이 좀 더 인간을 이롭게 할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가 지난 2008년의 대붕괴로 만천하에 거짓임이 드러났습니다. 이에 데이빗 코츠는 앞선 신자유주의자들의 반복적인 구호가 사실상 이를 통해 붕괴된 것으로 봤는데요. 명목으로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자유로운 경쟁 혹은 시장의 관대함 등을 역설하지만, 일찍이 슘페터가 언급한 독점 자본주의로의 이행이 그저 허튼 소리가 아님을 이 글을 통해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선진국들의 기업들이 사실상 독점적 지위를 바탕으로 시장에서 우세를 거두고 있다는 점과 이들의 이익을 위해 제3세계 국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저임금 노동력에 따른 이익 창출의 체계가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의 폐해를 여실히 드러내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런 의미에서 신자유주의자들이 그토록 긍정한 '개인의 탐욕, 사적 이익의 추구'라는 관념들이 명백한 법의 지배 하에서도 시장이 논외로 여겨질만큼 마치 무소불휘의 권력을 갖게 된 것은 정치와 경제가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기존의 입장들은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는 시민들의 이익을 위해 기여하지 않는 정치와 마찬가지로 자유 시장이 사람들을 위해 모든 것을 가져다 줄 것처럼 말하는 허황된 미사여구처럼 여겨지기 때문인데요. 인간의 욕망이 어느 정도 제한을 받아야만 하는 인식의 범주가 분명 존재하고, 오로지 경제학을 이런 인식의 논외로 취급하는 것은 그만큼 이성의 측면에서 위험하다 볼 수 있습니다.   

끝으로 일전에 대니 로드릭은 자본주의(아마 신자유주의에 대한 것이겠지만)에 대한 민주적 통제에 대한 의견을 제시한 바가 있습니다. 로드릭은 소위 주류 경제학에서 사실상 소외된 학자라 그 '주류'들이 전혀 원하지 않는 의견을 피력한 것인데요. 우리는 스스로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존엄을 갖는 인간이지만, 그러한 인간의 삶을 위해 필요한 자원과 지원에 있어 저자가 강조한 바와 같이, 현실에서는 이러한 생각들이 철저하게 거부 당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일반 노동자들이 언제까지 기업의 이익 창출에 맞지 않는 희생을 감내하면서 스스로의 노동력을 팔아가며 삶을 영위해야 할지는 거의 불확실합니다. 아예 적나라하게 자본주의가 과연 민주주의의가 요구하는 가치들을 위해 노력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지금도 극도의 회의를 느끼는 것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의 본질을 이미 여실히 알고 있으면서도 눈앞의 이익을 위해 눈을 감고 사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매번 저는 이러한 글을 읽을 때마다 과연 "인간 다운 삶은 무엇인가. 존엄한 인간의 삶은 그저 이상으로 끝나게 될 것인가"에 대해 매번 고민하게 되는데요. 제가 즐겨 인용하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고백대로 우리가 서로 손을 붙잡고 무덤으로 들어가지 않기 만을 오직 바랄 뿐입니다.


- 개인적으로 이 글 6장의 결론이라 볼 수 있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자의 분석에 감탄을 금치 못했는데요. 우리가 흔히 신자유주의를 자본주의의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 혹은 나쁜 상태로 이해하는데, 실상은 신자유주의야 말로 자본주의 본연의 상태, 즉 억지 요소들을 말끔하게 정리하고 상품 물신성이 만개한 순정 자본주의, 자체라고 말한 부분이었습니다.  


-저자가 따로 언급한 소위 '제 세상을 맞은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을 이 자리에 따로 기록해 두고 싶습니다.

자본주의는 자유시장에 의해 자연스럽게 규율된다.
국가 개입을 배제하고 규제를 완화하라.
국공유기업을 사유화(민영화)하라.
노동조합은 자유경쟁을 막는 독점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건 끝없이 이어지는 상품 교환 행위이기도 합니다.

자본주의 이전 사회에선 노동 배분의 공동체 질서가 있었고, 개별 노동은 직접적으로 사회적 노동이었습니다.

주류 경제학은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역사 속의 여러 경제체제 중 하나로 보는 게 아니라, 인류 최후의 경제체제로 전제합니다.

이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자가 되고 싶어하는 데는 타인에 대한 지배 욕구가 들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상품 가치가 인간의 사회적 관계임을 보지 못하고 상품체의 속성이라 보는 일은 자본주의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 착시도 아닌, 오히려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일입니다.

비인간화, 소외, 배금주의, 물질만능주의 따위 이른바 자본주의적 병리 현상이라 일컫는 것들은 대체로 상품 물신성 현상을 이르죠.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의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 사악하고 나쁜 상태로 이해되곤 합니다. 그래서 신자유주의에 반대한다는 건 정상적 자본주의의 회복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죠. 그러나 신자유주의야말로 자본주의 본연의 상태, 억지 요소들을 말끔하게 정리하고 상품 물신성이 만개한 순정 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능력주의의 기만은 자본주의적 정의, 즉 공정의 어떤 막장을 보여줍니다. 자본주의의 사상적 틀로서 자유주의는 시장 경쟁이야말로 자본주의가 평등한 사회라는 근거라 말합니다.

선진국 자본주의는 자유경쟁 시대를 끝내고 독점자본주의 상태에 접어듭니다. 독점화한 산업자본과 독점화한 은행자본이 융합하여 거대 금융자본을 형성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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