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환이 온다
더글라스 러시코프 지음, 이지연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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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라스 러시코프는 근래에 미국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 미디어 이론가입니다. 그는 1980년 이후에 태어난 소위 인터넷 세대인 '디지털 네이티브'에 주목하면서 앞으로 디지털 미디어가 만들어 나갈 미래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현재 그는 뉴욕 시립 대학교 퀸즈 칼리지의 미디어 이론 및 디지털 경제학 교수로 일하고 있는데요. 과거 그는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해, 캘리포니아 예술 학교와 네덜란드의 위트레흐트 대학에서 학업을 마치기도 했습니다. 가장 최근에 러시코프는 미디어 업계나 이를 대변하는 지식인 계층에서 '미디어 생태학자'로 이름을 알리고 있는데요. 이런 그의 집필 활동은 꽤나 독보적인 부분이었고 전체적으로 그의 논저들은 미래의 미디어 현실에 대해 더욱 인간적인 측면을 상실하여 사람들의 삶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일관되게 경고하고 있는데요. 이는 현재의 기술 만능주의와 거대 인터넷 기업들이 수많은 개인 정보를 자신들의 상업 이익에 활용하고 있는 점에서 가까운 미래의 소위 미디어 세대가 자신들의 고유한 삶을 제대로 영위할 수 있을지에 대한 기성 세대를 포함한 소수 지식인 그룹의 우려를 대변한다 볼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Team Human"으로 지난 2019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3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이 책의 원제는 '팀 휴먼'으로 저자인 러시코프가 우려하는 미디어의 탐욕스런 자본주의적 d이행에 대해 많은 시민들이 연대를 통해 자신들의 삶을 지켜내야 한다는 대의를 담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공공성의 원칙을 제시하면서 앞으로 있을 미디어 통제에 대해 우려의 시선을 보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공감하고 연대하는 목적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국역된 책의 제목은 저자가 논지를 펴고 있는 주제의 맥락과는 다소 관련성이 없어 보입니다. 이처럼 이 책을 번역한 출판사가 확언하는 "대전환'과 저자인 러시코프가 독자들에게 경고하는 "현시대의 이행"은 꽤나 의미 차이가 존재하기에, 어느 정도는 부적절한 제목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러시코프는 팀 휴먼이라는 가치 언어를 통해, 앞으로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넷 미디어가 개인의 인간으로서의 삶을 지켜나가는 데 있어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전제하고, 이러한 자신의 주장에 대한 서사적 근거와 더불어, 그에 따른 다양하고 풍부한 자료들을 독자들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20세기를 지나 자본주의는 보다 넓은 세계와 범접할 수 없는 유일 체제가 되었습니다. 과거 냉전의 시기에서 최종적인 승리자가 된 것도 한 몫을 했을 겁니다. 이미 자본주의가 인간을 도구화하고 있다는 점은 거의 부정할 수 없는 내용일 겁니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가 깊게 관여한 고도화 된 디지털 미디어가 결국 인간을 도구로 격하시킬 가능성에 대해 저자인 러시코프의 우려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은 글의 4장에서 잘 서술되고 있는데요. 이런 변화된 디지털 환경이 핸드폰을 제조하는 중국 노동자들의 삶을 완전히 뒤바꾼 것과 노동 현장에서의 노동자들에게 무엇보다 교육이 필요하다는 원칙이 스스로 변질되어 현장에서 노동자들에 대한 교육의 원칙은 이 시스템에 근거해, 더 수월하고 손쉬운 상품 제조에 기여해야 힌다는 사실상의 부정적 개변에 직면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러시코프는 교육과 민주주의의 뗄레야 뗄 수 없는 상관 관계를 먼저 언급하면서, 교육조차도 그저 기술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우회로 경고하고 있는데요. 이렇게 발전된 디지털 기술이 우리의 삶을 바꾼 것은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그 변화 자체는 사실이며, 마찬가지로 민주적 인간으로서의 개인들 역시 변화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초기에 어느 정도는 진보적 관념을 내포하고 있던 시장 경제는 더할 나위 없는 자본의 속성과 만나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시장 경제가 주장하는 개인의 이익이라는 관점 역시, 모든 인간이 이에 봉사하도록 강요 되기에 이르는데요. 사실 이 부분도 구글과 같은 거대 인터넷 기업이 '개인의 많은 선호들'을 수집하여 자신들의 상업적 이익에 거침없이 사용하고 있고 이것은 앞서 언급한 '개인의 이익'이라는 관념과 상당히 맞닿아 있습니다. 러시코프는 글의 이후 진술 과정을 통해 이런 개인의 이익을 강조하는 사회 관념 내지는 경제적 기조가 사실상 모든 사회의 공공성을 해쳤고, 그저 자본주의가 알량하게 숨만 쉬게 만들었던 윤리의 존재 역시, 예상대로 사회에서 무력화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인간이 마땅히 인간일 수 있는 가치, 즉 도덕과 양심 그리고 공공성과 같은 계몽주의적 맥락이 유명무실해졌기에 그만큼 러시코프가 우려하는 AI 산업에 있어, 이 흉물스런 AI가 인간을 그저 불합리하고 다각도의 개선이 필요한 생물체로 여기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처럼 고도화 컴퓨터 산업으로 탄생한 AI가 아무리 관련 데이터를 축적한다 하더라도 인간이 사고하는 것처럼, 혹은 '인간의 영혼'과 같은 단계에 결코 이르지 못할 것이며, 이러한 양자의 서로 간의 몰이해는 결국 비극을 낳게 되지 않을까 하는 약간의 디스토피아적 감성를 곁들이게 됩니다.

여러 전문가들과 마찬가지로 나날이 (상업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인터넷 세계는 여기에 참여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사고를 무력화 시키고 있습니다. 아주 예전에 책과 글이 많은 평민들에게 금기시되었던 것처럼 넷 상에서 돌아다니는 '조악한 정보들'이 개인의 면밀한 선택을 방해하고 더 나아가 현실 정치를 오염시키기에 이르렀습니다. 반대편에 있는 많은 넷 미디어 전문가들은 '넷 월드'의 발전은 이제부터가 초기 단계 과정이고 가짜 뉴스의 범람과 자본주의를 더 강고한 소비 지상주의로 내모는 넷 환경은 그저 기우에 불과하다고 강조합니다. 첨단 기술이 과거의 전통을 우습게 보는 것처럼 이제는 주와 객이 전도되어 인간이 첨단 자본주의와 시장 지배에 중요한 역할을 해야한다고 철썩 같이 믿는 인간들이 많아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더욱이 지금의 '디지털 질서'에 개인들이 실효적으로 저항할 수 없다고 판단하는 러시코프의 분석은 이처럼 설득력이 높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더군다나 넷상에서 범람하고 있는 특정 인종과 종교에 대한 혐오와 증오는 마찬가지로 우려할 만한 상황이며, 우리의 민주주의가 오도된 엘리트들의 손아귀에 강제로 포획될 가능성이 있으니,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정치마저도 먼 미래에는 쉽게 긍정할 수 없는 상황이라 판단됩니다.

끝으로 러시코프는 대략 중요한 두 가지 관점의 대안을 글의 끝부분에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줄곧 서로를 향해 관심을 갖고 있던 상호 관련성과 옛 것의 단순한 회귀가 아니라 모든 개인의 도약을 위해 타인과 더욱 교감하고 깊은 관계를 맺는 등의 유대를 강화하고, 이를 통해 공동체와 그에 따른 집단주의를 복원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러시코프는 글 중간에서 "자신과 비슷한 관심과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을 주변에서 찾는 노력"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었는데요. 이는 저 개인에게 있어 이 북플이라는 공간을 매개로 사회와 정치에 대한 비슷한 생각과 그것을 바탕으로 서로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를 찾는 것이라고 여겨졌는데요. 또한 많은 사람들과의 끊임없는 토론과 자신의 생각이 차별적으로 고착화되지 않고 시야가 좁아지지 않게 하기 위해 주변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갖는 것도 중요해 보입니다. 이는 전체적으로 사람과 사람을 직접 대면하면서 인간 사이의 건전한 불편함을 무릅쓰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공동의 관심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좀 더 인간 답게 만들 수 있는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는 환경이 확대될 수 있도록 모두가 자신의 책임처럼 가진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것이 다소 허황된 생각일지라도 말입니다.



디지털 기술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구축한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가 있을 자리에 다른 무언가를 가져다 놓았다.

미국의 공중 보건에서는 인간이 사회에서 고립되는 것이 비만보다 더 큰 문젯거리다.

그러나 군주들은 인쇄기를 엄격히 통제했다. 그들은 사람들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잘 알고 있었다.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는 밈이 득실거리고 소셜 미디어에 의해 고립된 환경에서 인간은 더욱 더 자기 위치만을 지키려고 하고 자신의 생존에 대한 두려움에 휘둘린다.

새로운 미디어 혁명은 언제나 소수 엘리트가 쥐고 있는 미디어 장악력을 뺏어서 사람들에게 주고, 그동안 훼손된 사회 유대를 재정립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고 우리를 어떻게 조종해야 할지 측정하는 방법은 알고리즘이 수집하고 편집하고 비교하는, 아무 의미 없는 메타데이터 metadata와 더 관련이 있다.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사람이 이용하는 인터넷 플랫폼은 단순한 제품이 아니라 수백만의 사람과 기업과 봇이 거주하는 환경 그 자체다.

텔레비전은 지구를 하나의 큰 유기체처럼 생각할 수 있게 도와주었지만, 소비지상주의와 신자유주의를 촉진하기도 했다.

기술로 모든 걸 해결하려는 사람들은 일부 디지털 기술이 그 자체로 반인간적인 행동을 유도하는 성향을 처음부터 내재하고 있을 가능성을 꿈에도 생각지 않는다.

일부 국민을 굶주리게 하고, 그들의 땅을 파괴하고, 일부 나라의 젊은 흑인 남성들을 감옥에 보내는 것은 폭력이 아니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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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플로야 을유세계문학전집 91
샬럿 대커 지음, 박재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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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럿 데커는 1771년 혹은 1772년에 유대인 출신의 출신의 부친인 존 킹의 세 자녀 중 한 명으로 태어났다고 추정됩니다. 그녀에게는 소피아와 찰스라는 형제가 있었습니다. 샬럿 데커는 영국 고딕 소설의 작가였고 보통 로사 마틸다라는 가명으로 활동했으며, 나중에는 비평가들을 혼동시키기 위해 두 번째 가명을 채택하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1815년 니콜라스 번과 결혼하면서 살럿 번이 되었습니다. 데커는 네 편에 이르는 주요 소설을 활동하던 시기에 발표했는데요. 그중 1806년에 출간한 '조플로야'는 꽤 높은 판매고를 올렸고, 동시에 독일어와 프랑스어로 번역되기까지 했습니다. 앞선 조플로야를 국내 초역한 을유문화사는 이 소설을 '고딕 로맨스 소설'로 홍보했습니다만 엄밀히 말하면 이 작품은 섬뜩한 소재의 교훈 소설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2세기 동안 그가 무명의 작가로 남아있던 것은 이런 복잡한 상황이 기인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제, "Zofloya"로 앞서 언급한대로 1806년에 초도 출간이 되었고, 국내에는 후에 다시 번역된 1997년 판을 번역 원본으로 이외에 모호한 부분은 1806년 원본을 참고했다고 출판사는 밝히고 있습니다. 국내 번역본은 지난 2017년 9월에 출판 되었습니다.

약간의 비통한 마음이 들기까지 한 이 소설의 완독은 저에게 실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는데요. 일단 여성의 정욕이라는 관념이 남성에 비해 현저하게 그 시대에 있어 금기시되었다는 걸 충분히 알게 되었는데요. 정숙하지 않은 여성에 대한 사회적 반감은 당시의 주된 모습이었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도시 국가 베네치아를 소설의 배경으로 삼은 점은 꽤 신선했습니다. 추측하건대 당시 유럽은 거의 모든 여인들에게 가톨릭적 정숙함을 요구하는 문화적 보수성을 띠고 있었습니다. 바로 대척점에 있는 장소로 베네치아는 여기서 묘사되는 귀족 간 사교 문화가 같은 시대를 다룬 다른 작품의 그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작품의 여주인공이라 봐도 무방한 빅토리아의 비틀리고 충격적인 욕망은 그녀의 모친이었던 후작 부인이 잉태한 비극의 산물이었습니다. 물론 음험한 분위기를 있는 대로 드러내는 고딕 소설의 고유성을 감안해 본다면, 데커의 이 작품도 그런 범주 안에 들어갈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 소설을 그저 단순한 로맨스 소설로 규정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 개인적으로는 쉽게 수긍할 수가 없었는데요. 소설 초반에 작가가 우리에게 직접 말하는 것과 같은, '어느 한 사람의 불행한 환경은 교육과 스스로의 겸허한 마음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은 이 소설을 통해 쉽게 반박 되는데요. 이를테면 로레다니 부인과 빅토리아 그리고 또 다른 조연 급 인물인 메갈리나의 허영, 독심, 교만, 증오의 감정들을 독자들이 간접적으로 느끼게 될 때, 과연 인간의 품성이 그저 후천적인 교육으로 개선될 수 있겠는가란 이 오래된 주제를 불신 하는 자신을 보게 될 겁니다. 그럼에도 앞선 메갈리나는 빅토리아와는 같으면서도 좀 더 다른 성형을 갖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녀 역시 비틀린 욕망을 갖고 있지만 빅토리아와는 달리 다른 사람에게 기대지 않고 적극적으로 주변 인물들을 이용하는 행동을 보입니다. 이 작품의 대부분 여성 인물들이 대체로 극단적이고 왜곡된 인물로 그려지고 있기에 어느 정도는 인물상 자체에 간혹 작위적인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극 전개가 독자들이 가늠하지 못할 정도로 도덕적 선과 악에 대한 통념이 부숴져 나가기 때문에 인물들을 단편적인 감상이 아닌 좀 더 심층적으로 살펴 볼 노력이 필요해 보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작가가 큰 틀에서 규정하는 '도의를 잃어버린 군상들"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도의란, "사람이라면 마땅히 지키고 행하여야 할 도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부부가 서로에 대해 지켜야 할 의무라든지, 마찬가지로 부모 자식 간에도 인정되는 도의라는 것이 있을 겁니다. 물론 데커의 이 소설이 단순한 도덕적 교훈을 알리고자 하는 작품은 아니라고 볼 수 있는데, 왜냐하면 중후반부에 비로소 전개되는 여주인공인 빅토리아의 급격한 감정적 전개는 실로 소름끼치는 수준이 아니라, 굴절된 인간에 대한 비통함을 절로 느끼게 할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쉽게 악에 기우는 나약한 인간의 본성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도의와 양심을 벗어나는 맹목적인 이성에 대한 애정이 아무리 스스로의 불행한 가족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더라도 매번 용인 받는 것은 아닙니다. 작가는 빅토리아의 이런 비참한 인간성의 표본인 도덕적 탈선의 원인을 극적인 서술과 더불어 화자들 간의 대화를 통해, 독자들에게 간접적으로 이를 밝히고 있습니다. 로레다니 부인과 그녀를 파멸에 이르게 한 아돌프 백작의 비도덕적이면서 주변의 신뢰를 잃게 한 두 사람의 행동에 그 화살을 돌리고 있었는데요. 특히나 이 작품에서 이 나약한 인물들이 스스로를 절망의 길로 내몰지 않을 충분한 선택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이들 모두는 비극적 운명의 안배를 여실히 '인간적'이라는 명목 하에 무참히 스스로를 배신하게 됩니다. 이를테면 로레다니 부인이 남편의 죽음을 앞두고 그와 죽어가는 넘편을 향한 그 고결한 신의와 맹세를 끝까지 지켜냈다면 그리고 그녀의 딸 빅토리아가 몇 년 간에 이르는 스스로의 삶이 성숙해 질 수 있는 기회를 오판으로 뿌리치지 않았다면, 작가의 평가대로 '신의 보답은 아마도 공평하고 관대했을 겁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쉽게 악마가 판 함정에 쉽게 빠지게 되는 것은 그야말로 "인간적인 행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인간들의 이런 방만한 행위가 결국 주변 사람들과 지인들을 파멸에 이르게 하고 스스로도 마땅히 절망의 지옥으로 이끈다는 점에서, 중세 소설의 원칙과는 다름없는 전형적인 서사이자, 인과응보와 유사한 비틀린 인간들의 허망한 말로라는 비참한 최후를 통해, 과연 우리가 무엇을 교훈으로 얻을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요구합니다. 

당시 완고한 가톨릭 사회가 철학에 대한 원론적인 적대를 차치하더라도 스스로 자신만만했던 베렌차 백작의 비극적인 결말은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간에 단순히 음모로 보기에는 상당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초반에는 꽤 양식적이고 신중한 인물로 그려지는 베렌차 백작은 후에 '신분 계급의 남성들'이 갖는 개인적인 욕망을 대변하는 사람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에게 결혼이 어떤 의미였는지 그리고 사실상 유희거리로 취급한 메갈리나의 적개심과 증오를 불러일으키게 된 일련의 서사들이 흔히 '현명하고 사려 깊은 철학적 인간'의 틀에 결국은 맞지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신 스스로는 빅토리아의 그런 전인미답의 증오를 깨닫지 못하고 후에 그녀가 "정말 비열한 계산적인 철학자"라는 혐오를 뒤로 하고 삶을 마감하게 됩니다. 비극적인 결혼, 충격적인 결말이라 볼 수 있는 베렌차의 몰락은 전반의 자신만만하고 신중함으로 무장한 꽤 인상적인 모습과 대비되어 나타나고야 말았습니다. 물론 전적으로 그의 책임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겁니다. 그저 그에게 주어진 것은 악의 씨앗을 잉태한 필연적인 장치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면에서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거의 정상적인 인물이 없습니다. 다만 뒤에 언급하는 두 사람을 제외한다면 말이죠. 베렌차 백작의 동생인 엔리케와 그의 연인 릴라는 서로에게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충분히 경애를 받을 만큼 훌륭한데, 특히 엔리케는 거의 유일하게 '도의'를 갖춘 인물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스포가 될 것 같아서 이 작품의 제목과 동시에 여러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무어인 "조플로야"는 그의 범상치 않은 정체를 드러내는 사건 하나 등장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꽤 뜬금없는 소설적 장치라고 생각되었는데요. 비로소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이 사건의 복잡한 의미를 확연히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이 무어인 조플로야를 현대에 맞게 대입해 본다면 이와 같은 인물들이 사회에 적잖이 많이 존재한다는 점을, 데커의 작품을 통해 새삼 경청하게 됩니다. 인간의 도덕적 본성을 극도의 회의감으로 다루면서, 모든 인간들이 자신과 같은 비틀리고 삐뚤어진 인간이라고 취급하는 태도, 타락은 누구에게나 아무런 죄 의식 없이 쉽게 다가올 수 있고, 그것을 초래하는 것은 어리석은 인간성의 한 단편이며, 그것을 통해 도의가 무너지는 것은 오로지 인간들의 책임이라는 것을 대변하는 '조플로야'는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앞으로 삶을 영위하며 쭉 경계의 마음을 유지하게 될 원동력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부 독자들은 어쩌면 어느 정도 작위적인 고딕 소설의 전개를 달가워하지 않을 수도 있겠는데요. 저는 빅토리아라는 한 여인의 파멸을 통해, 우리의 현대적 삶이 표면적인 풍요 상황에서 내면으로는 전혀 녹록하지 않음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증오와 혐오를 그저 쉽게 취급한다면 무고한 다른 사람을 파멸에 이르게 할 수 있음을 진정 깨달아야 할 것 같습니다.


-데커의 이 소설에서 제가 감탄을 금할 수 없었던 부분은 조플로야의 충격적인 인물 조형이었습니다. 인간의 악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일찍이 여자를 속여 마음과 절조를 유린한 남자에게, 그럴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면 승전 상태를 유지하는 일이 뭐 그리 어렵겠는가?

따라서 그녀를 법적인 아내로 들이지 않겠다는 그의 굳은 의지를 알았다면, 연인을 향한 모든 욕망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분명 분연히 퇴짜를 놓았을 것이다.

또 빅토리아가 헌신적인 모친에게 고통을 준 것에 대해 사과했다는 사실에 그는 일종의 쾌감을 느꼈다.

가장 천박한 외모를 지닌 오만과 위선의 인간이 고결한 척하는 꼴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수치스러웠다.

아돌프는 마음이 이렇게 오염되어 있었기 때문에 누군가를 비참하게 만들거나 파멸시키는 짜릿한 묘미가 아니면 쾌락을 얻지 못했다.

아돌프는 그녀의 망가진 영혼을 이렇게 농락할 수 있는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 그녀는 세상에 오직 그만 존재한다고 착각할 때도 있었다.

"육체뿐 아니라 마음에도 기품이 넘쳐야 하고, 멋 없이 몸매만 가지고 덤비는 건, 난 그런 여자는 별로야. 그런 건 완전 촌놈도 즐길 수 있는 거니까."

타락의 깊이야 별 차이 없지만, 그럼에도 메갈리나는 가슴에서 요동치는 욕망들을 어떻게 거짓 세심과 절제로 포장해야 하는지 더 잘 알고 있었다.

메갈리나는 자기가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분명 그랬다. 젊은이의 높은 기상에 잔인한 상처를 주고, 그녀를 향한 사랑을 산산조각 내며 완전히 부숴 버린 것은 아닌지 염려되었다.

레오나르도는 가문의 자부심이나 긍지에 관한 것이라면 신중히 여기고 전율이 흐르도록 민감하게 반응했지만, 사랑의 정절을 버리는 건 그리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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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즈음의 한중, 어떻게 설 것인가
한중비전포럼 엮음 / 한반도평화만들기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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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7년에 출범한 학술 재단인 한반도평화만들기 산하 한중비전포럼의 기획으로 출간된 이 글은 한중 관계에 대한 긍정적 모색을 담은 논문 모음집입니다. 여기에는 앞으로 다가올 미중 대결시기에 우리가 찾아볼 수 있는 외교적 해법 등이 담겨 있습니다. 그 중에 누구보다 저명한 중국 전문가인 이희옥 성균중국연구소장의 글을 필두로, 여러 전문가들이 새로운 정부가 출범한 지 햇수로 1년이 넘은 시점에서 우리 나라의 외교가 염두해 두어야 할 부분들을 명확히 제시하고 있습니다. 근 몇 년 안에 중국이 곧 '하나의 중국'을 무력으로 쟁취하기 위한 시도를 배제할 수 없는 가운데, 그만큼 우리 국익에 있어 앞으로 몇 년은 매우 중요한 시기라고 볼 수 있을 텐데요. 그런 의미 가운데서 우리와 중국 정치는 서로 이질적인 형태를 갖고 있기 때문에 서 각자가 이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졌다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이 책은 지난 2022년 8월 국내에 출간되었습니다.

중국 당국에 있어 자신들에게 가장 중요한 근린으로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 나라입니다. 특히 전세계 공급망 재편과 관련해, 중국을 더욱 압박하고 있는 최근 미국의 외교적 행보를 고려했을 때, 우리가 얼마만큼 양자 사이에서 중간자적 입장을 유지할 수 있을지가 중국의 초미의 관심사일 겁니다. 이런 면밀한 과정 자체는 우리의 국익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데요. 미국의 요구대로 공급망의 재편 자체는 우리에게는 중국과의 교역을 점차 줄여나가야 한다는 압박이 되고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최근의 윤석렬 정부는 전 정부인 문재인 정부와는 달리 아주 큰 틀에서 한미일 공조 체제로 점차 수렴해 나가고 있는데요. 정말로 현재의 정부가 앞으로 외교에서 한미일 공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여기고 있다면 그만큼 국익을 위해 미국과 일본에게 모든 수를 다 보이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더군다나 미국 바이든 행정부가 말로는 중국에 대한 투자를 줄이고 산업 기지의 탈중국화를 부르짖는다 하더라도 여기의 논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바와 같이, 단숨에 중국 제품을 시장에서 퇴출시키기란 매우 어려운 법입니다. 그 이유는 중국 제품이 갖는 저렴하고 쓸만한 상품성을 대체할 수 있는 다른 대체제를 찾기가 현실적으로 어렵기에 기업의 논리 즉, 이익에 대한 추구에 있어 현재의 정치가 매번 합당한 보조를 맞춰줄 수 있을지는 그렇기에 더 불확실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미국에 있어 현 자유주의 국제 체제의 변수로 여겨지는 대국 중국은 공산당 일당 독재의 대표적인 권위주의 국가들 중 하나 입니다. 지난 1972년에 미국과 중국은 각자의 필요에 의해 관계 정상화에 나섰지만 1990년대를 거쳐 본격적으로 중국 경제에 신자유주의적 이행이 실현되고 나서 중국의 경제가 이를테면 세계 공장의 역할을 떠맡게 되는데요. 이후 중국의 번영과 함께 미중 간의 관계는 진정으로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래서 일전에 홍호펑과 데이빗 코츠의 언급대로 지금의 중국을 만든 것은 무엇보다 서구의 신자유주의였습니다. 이런 이행 가운데, 많은 민주주의자들은 중국이 경제적 번영을 통해 정치가 민주화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 확실히 기대했지만 급속도로 발전을 거듭한 중국의 경제가 온전히 국방력으로 투입되면서 몇 년 전의 '도광양회'까지 사실상 철회되기에 이릅니다. 이에 전재수 교수는 "중국이 미국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핵무기와 운반수단을 확보하게 되면 미국과 군사 충돌을 회피하면서 현상 유지를 추구해왔던 현재까지의 전략이 공세적으로 전환될 수 있다"고 강조했는데요. 특히나 중국은 과거에 영국과 서구 열강 등에 당했던 제국주의적 침탈에 대해 민족 내면에 이르는 깊은 좌절감과 굴욕감을 맛보았기 때문에 무엇보다 과거를 극복하여 자신들의 국가가 대국에 걸맞는 대접을 전세계로부터 받기를 무엇보다 원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현재의 중국 공산당은 국내에 젊은 세대의 민족주의적 열망을 경우에 따라 조장하고 확대하는데 이미 당 아래에 있는 관변 언론들이 당의 요구를 충실히 뒷받침하고 있는 실정이기도 합니다.

과거 박근혜 정부 당시, 사드 사태에 관련한 '한한령'은 이런 중국의 민족주의적 열망에 근거한 상당히 비틀리고 독선적인 해법으로 여기의 이욱연 교수가 분석한 우리와 중국 상호 간의 혐오 정서에 대한 어쩌면 중요한 원인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우리의 경우, 내부에서 중국인을 밑으로 보는 배외주의가 원인인 것이 아니라, 과거 역사 왜곡 문제를 비롯 이웃 국가를 진정한 호혜로 보지 않는 중국 공산당과 이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중국인들에 대한 반감이 표출된 것이기도 합니다. 저는 원칙적으로 중국과 불협화음 없이 잘 지낼 수 있어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또한 북핵 문제와 관련해서 여타 전문가들이 기대하는 중국의 역할론을 과신하는 것은 아니지만 중국과의 정치적 소통이 북한과의 관계에서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더욱이 김준형 전 국립외교원장의 언급대로 미국과 일본 사이에서 중국 카드를 갖고 우리의 이익을 극대화 할 수 있다는 점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부분입니다. 브레진스키가 언급한대로 외교가 회색지대에 다름 아닌 것을 인정한다면 쉽사리 내가 가진 패를 모두 다 보여주고 시작하는 외교는 그만큼 어리석은 것이 없다는 점도 모두가 쉽게 수긍하실 수 있을 겁니다. 물론 민주주의 국가들 사이에서는 전쟁이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외교적 금언에 따르면 중국의 권위주의 국가와의 외교는 그만큼 리스크가 존재한다고 봐야 할 텐데요. 다만 앞선 분석과는 별개로 여기에서 언급되고 있는 중국과의 교역이 아직은 우리 기업들에게 중요한 기반이기 때문에 섣불리 이를 악화 시킬 수 있는 정치적 행보를 가급적 피하는 것에 노력하고, 이런 인식 가운데 정부 당국자들의 신중한 태도가 현 시점에서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 진실로 현명한 외교적 접근이란 우리가 미국과의 군사 동맹이기는 하지만 이 동맹이 우리의 외교적 운신의 폭을 좁히는 원인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입니다.  

끝으로 여기에 소개되어 있는 논문들은 저와 같은 일반 독자들이 보기에도 합리적인 한중 관계가 무엇인지에 대해 당면한 각 분야의 분석과 함께 이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학자들은 1992년에 첫발을 내딛은 한중 관계의 초심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고 거듭 주장하고 이에 양국이 서로를 면밀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만 현재 급격하게 벌어지고 있는 소위 미국에 의한 '중국 봉쇄'와 더불어 중국이 군사적으로 전용할 수 있는 참단 산업에 대한 자유 진영의 조치는 외교, 군사 뿐만 아니라 경제 전반과 전세계에 큰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미국이 자국 이익의 셈법대로 사실상 동맹 관계를 이용해 우리를 사실상 불안하게 만들고 있는 상황은 마찬가지로 우리의 국익을 위해, 중국과 심지어 미국조차도 수단으로 삼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난 사드 사태 때 벌어진 중국의 비합리적 제재에 있어 미국 정부가 그저 수수방관했던 것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뭐 일부 사람들이 마치 신념처럼 미국과의 외교에 무엇보다 '신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미 잘 알고 있는데요. 한미 동맹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는 아주 생생하게 알고 있지만 현 시점에이르러서는 외교가에 무엇보다 용미(用美)가 더욱 필요하다고 보여집니다. 이를 테면 북핵 문제를 위해 중국을 적극 이용하는 관점이나, 현 시점의 경제적 리스크를 피하기 위해 베트남과 같은 수출 다변화를 꾀하는 등의 민활한 기법이 마찬가지로 외교에도 필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 외교 당국자들에게 좀 더 현명한 사고와 신중한 실행을 거듭 강조하고 싶습니다. 또한 무엇보다 2025년 이후 격랑의 외교가 동아시아에 닥칠 가능성을 미리 염두해 두고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한국 외교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중국은 탈냉전기 미국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이러한 사실을 강조해왔다. 2008년 경제위기 이후 미국식 자본주의가 도덕적 해이를 가져왔고 세계경제에 위기를 가져온 장본인이라고 비판했다.

중국, 러시아는 물론 많은 권위주의 국가들은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주축이 되는 리더십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권위주의 연대가 성립하여 미래 세계질서의 대안을 내놓기는 더욱 쉽지 않다.

미중 경쟁이 경제와 가치 영역을 넘어 군사 부문으로 확장되고 있고 이는 미중 전쟁 가능성과 직결된 문제인 만큼, 아시아 국가들에게는 생사의 문제로 다가올 것이다.

한국은 미중 경쟁이 힘, 특히 군사력을 겨루는 관계가 되지 않도록 하는 동시에 미중 간 군사충돌을 배제할 수 있도록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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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할 권리
아미아 스리니바산 지음, 김수민 옮김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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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아 스리니바산은 1982년 바레인에서 인도인 부모에서 태어나 이후 대만, 싱가포르, 미국 뉴욕, 영국 런던 등에 살았습니다. 그녀는 예일대학에서 철학 전공으로 학사, 2007에 동대학에서 예술 학사를 취득합니다. 그 뒤에 영국 옥스포드 대학에서 철학 학사 그리고 옥스포드 코퍼스 크리스티 칼리지에서 영예로운 로즈 장학생으로 철학 박사 학위를 수여 받습니다. 미국과 영국을 포함한 학계에서 보기 드문 인도계 여성 철학자로 그녀는 근래 많은 지식인들로부터 관심을 받고 있는 신진 학자이기도 합니다. 또한 2018년 10월에 옥스포드의 세인트 존스 칼리지의 철학 연구원으로 일했고, 이듬해인 2019년 9월에는 유색 인종 최초로 올 소울즈 칼리지의 치첼 사회 및 정치 이론 교수로 임명되었습니다. 이 섹스할 권리는 논저는 그녀의 첫 저서로 원제, "The Right to Sex"로 지난 2021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2년 9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이 책의 제목에는 사실상 중의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지난 2014년 당시 스물두살의 엘리엇 로저 Elliot Rodger는 소위 인셀 Incel 이라는 부정적 의미를 전세계에 알리게 됩니다. 그는 여성들이 자신과 섹스를 해주지 않는다는 굴절된 인식으로 여성과 사회를 바라보며 그에 대한 분노를 쌓고 있다 여성 세 명을 비롯한 무고한 사람들을 총으로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인물입니다. 바로 이 글의 제목은 저자인 스리니바산이 엘리엇 로저가 죽기 전에 쓴 비틀린 선언서에 등장하는 '섹스할 권리'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이 인셀과 관련해, 엔젤라 네이글, 도나 저커버그, 케이트 만 등의 학자가 오늘날 인터넷 커뮤니티의 발전과 더불어 삐뚤어진 성 관념으로 사회성을 결여하여, 자신이 평범한 여성들과 데이트를 하지 못하는 이유를 여성들에게 찾는 비정상적인 남성들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한 바가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반페미니즘적인 현상이 아니라, 성과 섹스와 관련한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는 남성들이 사회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반증했고. 총기 휴대가 개인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권리로 인식되고 있는 미국에서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굴절된 사고를 갖고 있는 인간이 사회에 어떠한 파급을 끼칠 수 있는지 아주 여실히 드러낸 사건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저는 스리니바산의 이 책을 좀 더 수월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여전히 섹스에 있어 여성들이 남성에 종속되어 있다는 점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기본적 권리와 관련해, 성적인 자기 결정권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두가 잘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특히 저자의 이 책을 통해, 여성들이 평소에도 얼마나 자신들의 성적 결정권을 위해 얼마나 고심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단순히 이 책을 여성 철학자의 '페미니즘을 옹호'하는 글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즉, 가부장적인 성적 착취라는 근사한 용어를 잠시 잊고 글에서 숱하게 등장하는 여성들에 대한 '성적 괴롭힘'이 학교와 직장을 비롯, 자신의 삶을 살면서 흔히 맞닥뜨리게 되는 일상적인 일임을 인식하고 나서 이 글의 내용에 접근을 하게 되면 단순히 페미니즘에 대한 논쟁 자체가 아니라,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을 비롯, 현재에도 많은 국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아닌가 깨닫게 됩니다. 특히, 인도나 아프가니스탄에서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일반 여성들에 대한 강간과 성폭력은 도저히 상상하기조차 힘든 일이기도 한데요. 미국도 이 부분과 별반 차이가 없게도 미국 사회 내의 흑인 여성들에 대한 성적인 편견과 백인 여성들과는 상당한 차이가 느껴지는 법의 보호라는 측면에서 일정 부분 동의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글의 1장 도입에서 미국 사회 내의 부유하고 권력을 가진 백인 남성 계층의 본질적인 의미는 자신들이 마땅히 '법의 보호와 스스로의 권리를 누군가로부터 침해당했을때 법이 당연하게 보호해 줄 수 있을 것'라는 믿음이라는 부분이 저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이는 법의 조력이 미국 사회에서 조차 헌법상의 규정된 권리가 누구에게나 평등하지 않다는 현실적인 의미를 보여줌과 동시에, 백인 여성과 흑인 여성간의 법의 조력 조차도 명백히 차이가 있다는 점입니다. 대다수까지는 아니겠지만 미국 사회 내에 많은 백인 남성들이 흑인 여성이 성적으로 문란하고 마땅히 자신들에게 그런 성적 봉사가 있어야 한다는 아주 삐뚤어진 인식과 더불어, 마찬가지로 동아시아 여성들에게 갖는 성적인 기대도 '이것이 미국 사회의 적지 않은 백인 남성들의 타인종 여성에 대한 성적인 편견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페미니즘 논쟁을 넘어 매우 중요한 사회 문제라고 여겨졌는데요. 물론 법의 보호가 성별과 인종적으로 구별되어 차등적으로 규정되지는 않겠지만, 사회가 이런 식으로 계층과 성별 간에 차별적이고 왜곡된 인식을 보이고 있다면 단순히 법이 평등하다는 구호를 완벽하게 내세울 수 없는 부분이라 여겨집니다. 이것은 심각하게 사회적 병리 현상과 다름없다고 생각되는데요. 쉽게 다룰 수 있고 언제나 손만 뻗으면 자신들이 얻을 수 있는 섹스라고 흑인과 유색 인종 여성의 성을 그런 식으로 취급하는 점은 참으로 개탄스러운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이 책의 주제 의식과 맞닿아 있는 3장의 내용 들은 인셀과 그것을 둘러싼 일부 남성들의 '오염된 사고'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고, 특히 이들 젊은 남성들이 일전에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하며 이것이 어떻게 정치적으로 드러났는지 아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성소수자에 대한 '정체성 정치'에 대한 일부 우파의 공격을 넘어, 미국 정치가 본질적으로 얼마나 건강하지 않은 상태인지 마찬가지로 잘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어차피 논쟁적인 측면에서 쉽게 이러한 문제들을 '페미니즘 논쟁'이나 정체성 정치에 대한 반감으로 돌리고 이것을 같은 진영의 결집으로 꾸며댄다면 참으로 비참한 정치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이 글에서 논의된 솔직한 진술들을 보며, 민주주의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다원주의가 얼마나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고, 성소수자와 더 나아가 여성들에 대한 건전하고 포용적인 사회 인식이야 말로 정치에 있어 매우 중요한 선결적 과제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 역시, 일반적인 남성들을 공격 대상으로 삼지 않고 남성들이 좀 더 근사하고 멋진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진정으로 바라고 있었는데요. 일반 남성과 페미니즘이라는 대결 구도로서 단순화 시키지 않고, 사회 내에서 여성과 진지한 관계를 고찰하여, 여성의 성에 대한 남성들의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 이 책의 주요한 논점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사고 판다는 자본주의적 논리는 상품의 거래 뿐만 아니라 '성의 거래'에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삶이 자본주의에 종속된 현시점에서 자본주의 자체가 새로운 가부장 제도가 된 것은 어쩌면 과장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는 앞선 2장의 포르노그라피와 이후 진술된 독일과 네덜란드에서의 합법적은 성매애와도 일정 부분 인식의 궤를 같이 합니다. 특히 상업적으로 만연된 포르노그라피는 십대 남자 아이들의 그릇된 성 관념을 확대시키고, 아주 전형적인 여성성 만을 강화시키는 결과로 나타나고 있는데요. 이 지점에서 본질적으로 여성의 성이 남성의 종속적인 틀 안에 놓여져 있다는 종래의 페미니즘적인 발언에 동의를 할 것인가에 대해 잠시 차치하고, 일반적인 남녀 간의 연인 관계에서 조차 여성들이 연인이 요구하게 될 섹스에 있어서, 어느 수동적이면서 남자의 요구에 동조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 조차 단순히 '균형적인 성교육'의 문제로서 접근하는 것도 어느 정도 모범이 될 수도 있겠지만, 많은 사회에서 섹스가 공개적으로 논의되기 어려운 문제임을 감안한다면 솔직히 실효적인 피임과 더불어, '임신 거부'에 대한 여성들의 권리를 다시금 떠올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여성들의 자발적인 임신 거부에 대한 권리는 과거 영국에서 벌어진 '여성 참정권 운동'과 버금가는 1980년대를 뒤흔든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앞서 제가 언급한대로, 많은 여성들이 섹스에 대한 고민을 평소에도 안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사회가 좀 더 전향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따고 생각하는데요. 하지만 섹스 자체가 일부 사회에서는 남성의 트로피이거나 전유물로 취급되고 있기도 한데요. 특히 인도와 같은 국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성의 종속'은 인도가 전세계인들로부터 듣는 '거대한 민주주의 국가'라는 수식에 걸맞지 않는 전형적인 관습적 체제의 국가로 보여지기도 합니다.

끝으로, 스리니바산은 우리에게 귀중한 몇 가지 역사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습니다. 과거 흑인 여성의 몸을 전시했던 노예 제도의 맥락에서 백인 남성들이 흑인 여성들을 인식하고 있다는 점과 근래에 까지 이어지는 페미니즘 운동 자체가 부유하고 권력을 가진 소수 여성들의 좀 더 유능한 권리를 강조하면서도 그 권력 바깥에 있는 여성들은 소홀히 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의 한계를 명확히 드러내고 있는데요. 더욱이 더 충격적인 사실은 과거 미국 레이건 행정부로부터 초안이 만들어진 '투옥 국가'와 관련해, 당시 페미니즘 운동가들이 강간범들의 강력한 법척 처벌과 장시간의 투옥을 사실상 지지하면서 다른 사회적 대안을 만들지 못한 그들의 한계를 비판하고 있는데요. 이는 미국이 모범적인 민주주의 국가라는 자화자찬에도 불구하고, 법의 심판에 따른 교정 조직 자체를 민영화 함으로써, 많은 미국 시민들 특히나 흑인 남성들을 비롯한 유색인 남성들을 과도하게 투옥시키고, 이에 따른 막대한 국가 보조금을 낭비하는 행태로 발전했습니다. 이는 많은 미국 기업인들에 의해 '신사업'으로 추앙받기까지 했는데요. 이 부분에 있어서도 진지한 교정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고 더욱 법의 사각지대를 노출하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따라서 이런 부분을 포함한 저자의 논증들이 단순히 그녀의 말마따나 '에세이'로 그치지 않고 학계와 논단에서 이 글이 주목을 받은 이유가 될 텐데요. 그래서 이 글을 단순한 남녀 간의 대결 구도로 급진화 시키는 전형적인 페미니즘적 글로 취급하지 말고, 인내심을 갖고 봐야 하는 이유가 되지 않나 싶습니다. 더군다나 이 글을 통해 미국 사회가 얼마나 고질적인 사회적 병폐에 놓여 있는지 독자들에게 알리고 있는 점은 충분히 높은 평가를 받을만하다고 여겨졌습니다.



-트럼프주의자 식의 논법인 '우리의 귀중한 백인 여성, 우리의 아이를 낳고 기를 백인 여성의 권리는 많은 유색 인종들로부터 보호하고, 반대로 흑인 여성의 문란한 성은 보호할 필요가 없다'는 왜곡되고 처참한 발언들이 일부 계층이 보이는 '파시즘의 향수'와 맞물려, 미국 사회에서 더욱 강화되고 있는데요. 실로 이 지점에서 미국의 민주주의는 매우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강간의 경우, 유복한 백인 남성은 여성을 믿어야 한다는 요구가 커짐에 따라 법의 편견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자신의 권리가 축소될까봐 우려한다.

뉴욕주 북부에 위치한 명문 인문대학 콜게이트대학교에서 2013~14학년도 전체 학생 가운데 4.2퍼센트만이 흑인 학생이었다. 그런데도 같은 기간 성폭력 고소를 당한 학생의 50퍼센트가 흑인이었다.

미국이나 다른 백인 지배사회에서 흑인 여성의 처지와 아주 흡사하게 인도에서 달리트와 ‘하류계급‘ 여성은 성적으로 문란하고, 그래서 강간하고 싶지 않은 사람으로 여겨진다.

반포르노 페미니즘의 핵심적인 생각은 포르노란 어쩌다 여성의 종속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여성을 종속시키는 행위라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는 자유주의 사회가 가치를 부여하는 (또는 요구하는) 많은 것과 관련이 있다. 개개인의 자율성, 정부의 민주적 책임, 개인의 고결한 양심, 다름과 의견 불일치에 대한 관용, 진실 추구 등등.

현편으로 이는 독실한 보수주의자와 신자유주의 경제 지지자를 결정적이고 지속적으로 결속시켰던 우파 조직의 백래시로 이어졌다.

이런 분위기에서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의 비판은 국가의 제재가 필요한 ‘나쁜‘여성(성노동자와 ‘복지 여왕‘)과 보호받을 필요가 있는 ‘좋은‘여성을 구분하고, 남성이란 본래 탐욕스러워서 일부일처제와 핵가족 제도로 길들여야 한다는 시각을 가진 보수 이데올로기에 딱 들어맞았다.

‘인셀‘지지 그룹은 외롭고 성적으로 고립된 사람들에게 지지를 보내주는 집단으로 시작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용자들이 여성을 향해, 또 여성과 잠자리를 같이 하는 ‘비인셀‘noncel 및 ‘일반인‘을 향해 분노를 표출하고, 강간을 지지하기까지 하는 공간으로 변질되었다.

다시 말해 섹스를 긍정하는 시선은 여성혐오만이 아니라 인종차별과 장애인 차별, 트랜스젠더 혐오, 그리고 언뜻 무해해 보이는 ‘개인의 선호‘메커니즘을 통해 침실로 침투하는 여타 모든 억압적 시스템을 덮어줄 위험이 있는 것이다.

섹스에 관한 한, 그러니까 진짜 욕망 내지는 이상적인 욕망을 부르짖으며 여성 및 게이 남성에 대한 강간을 오랫동안 은폐해온 역사가 있는 섹스에 관한 한 이는 대부분 진실이다.

이 부르주아적 도덕성의 이데올로기적 기능 탓에 우리가 참여하는 더 광범위하고 부정의한 시스템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게 된다는 것 역시 분명 옳은 말이다.

이 점에서 인셀은 병리적인 두 측면의 충돌을 보여준다. 한편에는 이른바 신자유주의라고 하는 것의 병리적인 측면이 있어서, 점점 더 많은 삶의 영역을 시장의 논리에 동화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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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5 19: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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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5 23: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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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장소미 옮김 / 녹색광선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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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즈 델핀 쿠아레라는 본명의 사강은 1935년 프랑스 옥시타니아주의 카자르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필명이자 문학가로서의 명성을 뜻하기도 하는 '사강'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특히 프루스트는 그녀의 작품 여러 곳에서 직간접적으로 인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대체로 부르주아라고 볼 수 있는 부모의 밑에서 자라나 어린 시절을 프랑스 남동부 지역인 도피네에서 보낸 뒤, 자크 시라크 전 프랑스 대통령과 장 폴 사르트르를 배출한 꾸르 하테머에서 수학해, 중등 교육 과정 졸업 시험인 바칼로레아를 통과합니다. 결국 그녀는 프랑스의 명문 대학인 소르본에 입학하지만, 대학에 대체로 무관심했던 관계로 졸업은 하지 못합니다. 이후 자신의 문학 경력의 시작이라 볼 수 있는 "슬픔이여 안녕"이 그녀가 18세였던 1954년에 출간되고, 이를 계기로 왕성한 작품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녀의 사생활과 관련된 부분에서, 결혼은 두 번을 하게 되고, 자식으로는 아들 한 명을 보게 됩니다. 여기에 그녀와 관련된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 그것은 1990년대에 코카인 소지 혐의로 기소되어 프랑스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습니다. 2000년대 이후엔 그녀의 건강이 상당히 나빠지게 되는데요. 결국 2004년 9월에 이르러 폐색전증의 고통으로 삶을 마감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녀의 6번째 작품이기도 한 이 소설은 1965년에 원제, "La chamade"로 출간되었고, 이 번역본은 국내에 2022년 1월에 출판되었습니다.

사강의 이 작품을 일독하고 나서 스친 소감은 아니 에르노와 조지 기싱의 몇몇 소설에서 느꼈던 불편한 감정과 유사한 것이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지 않는 것에 대한 무리한 자기 변명과 사실상 자신의 행복 만을 우선시하는 일관된 태도 같은 것들인데요. 또한 "자신의 행복과 관련해, 은연중 타인에 대해 깊은 상처를 입히게 되는 이기심이 어떤 식으로 관계를 붕괴 시키는가"는 숱한 문학 작품의 단골 주제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저는 사강의 이 작품을 통해 과연 누구에게나 중요한 가치인 '안락한 삶'이 대체 무엇인가에 대해 거듭 고심하게 되었습니다. 누군가가 성인이 되어서도 감정을 인질로 상대방에게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보살핌을 받으면서도 그저 소일과 사교 활동을 병행하며 남들이 보기에 아무런 걱정 없이 이어지는 안정된 삶이 목적인 사람이 이 작품의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사강 특유의 섬세한 감정선과 일상 대화의 농밀함이 주제를 구축하면서 주인공의 삶과 관계에 대한 진정성이 무엇인지 이를 동시에 독자들에게 간접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이 작품이 장점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행복 만을 위해 이기적으로 움직이는 행동 방식에 대해 면밀히 관찰해보고 이를 간접적으로도 체험해 볼 수 있는 설정과 더불어 독백과 대화를 통한 내면의 감정 묘사는 이 작품의 장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작품의 여주인공인 루실 생레제는 작가인 사강이 그녀의 성을 작품 후반부에 가서야 의도적으로 그녀의 성을 독자들에게 노출한 것처럼, 그녀 자신의 삶에 대한 본질적인 성찰이 결여된 여성입니다. 어쩌면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어느 여성에게나 '진정한 사랑'만큼 중요한 것은 없고 그것을 겪어 보지 못한 여성은 '진정한 인간'일 수 없다는 사랑의 아리아에 수긍하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 물론 보통 여자가 보이는 어떤 사람과의 육체적인 관계가 열정적인 사랑의 지표가 될 수 있다는 점은 저 역시 어느 정도 긍정하는 편이기도 합니다만 단순한 연인 관계에서도 이 육체적 쾌락은 그것 자체로 서로의 눈을 멀게 하고, 현실을 도외시 하게 하는 진정한 의미의 '열정'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 작품의 루실은 자신보다 스무살 이상이나 많은 부유한 남자의 경제적 풍요로움에 기대어 나날이 안온하고 삶의 범위가 좁은 그런 윤택하고 걱정 없는 생활을 하고 있는 여성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보호하고 배려해주는 샤를에 대한 개인의 도덕적인 측면에서 약간의 죄의식을 느끼는 표현들을 작가는 사려 깊이 독자들에게 알리고는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그녀는 자신의 안온함과 그것이 바탕이 된 행복을 그저 평범함이라는 장식을 통해 어느 정도 당연하게 여기는 여성인데요. 경제 활동을 거의 하지 않고 그렇다고 실질적인 교양을 쌓은 여자도 아닌 그녀가 일생에 처음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게 됩니다. 즉 각자가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다 나이 있는 '후견인'이자 연인이자, 섹스 대상을 갖고 있는 경우인데, 그럼에도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딱 한번 '섹스 파트너'라는 단어를 대입한 것을 보면, 루실과 앙투안의 사랑이 어떠한 본질을 내포하고 있는지 추정해 볼 수 있게 됩니다.

흔히들 여성에게 상대방을 향한 '사랑한다'는 의미는 어느 정도는 복잡하면서도 중요합니다. 물론 남자에게도 '사랑한다'는 발언은 그만큼 중요하겠지만 이 작품에 간접적으로 등장하는 작가의 말마따나 남자들이 평범한 여자가 느끼는 이런저런 감정의 편린들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점을 감안해 봤을 때, 아마도 상당한 여성 독자들은 여주인공 루실에 대해 갖는 복잡한 감정과 더불어 앙투안에 대한 그 낯설고 빠져드는 듯한 몰입의 실체에 다소간 감정이입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보는데요. 다만 여기서 단순하게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문제를 저 어디쯤에 치워두자는 것은 아니지만 루실이 관계 전반에서 보이는 태도, 특히 앞서 제가 언급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행동을 책임지지 않으려는 모순적 행동'과 또 다른 소설적 장치였던 앙투안이 자신의 후견인 혹은 (원치 않는 일상적인 인간 관계에서 사실상 그를 보호해주는) 그늘이라고 할 수 있던 디안에게 보였던 무책임한 행동들이 서로 겹쳐져 이 젊은 연인들의 이어지는 열정적인 관계에 대한 회의적인 시선을 강화합니다. "사랑하지 않는 여자라도 최소한 존중할 필요가 있다"는 디안의 가슴 아픈 독백은 정말 마음 아프게 다가오기도 했는데요. 저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 중에 극적인 감정의 토로를 보이게 되는 샤를보다 디안에 대한 인물 설정과 특유의 절묘한 어투가 제법 마음에 들었습니다. 주변인들에 의해 자신의 경력과 관련해, 잔혹한 커리어 우먼이라고 평가 받는 이 디안이 소위 자신이 중심이 된 '사교 공동체'에서 내면적으로도 또한 인성에 있어서도 범인 이상의 성숙한 인물이 아니었나 생각해 보는데요. 물론 거듭 디안을 통해서도 나타나지만 자신에게 '진정한 사랑'이라는 문법 혹은 후퇴할 수 없는 대전제는 그것의 행태가 역설적으로 주변인들에게 환영 받을 수 없게 되는 필연적인 결과로 잉태되고, 나는 그다지 사랑하지는 않지만 자신을 여러모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통까지 더하는 상황에서 (거의 이기적으로) 자신의 사랑만을 추구하는 행위가 과연 인간 행위의 본질들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인지는 철학적인 차원을 떠나서 절로 의구심을 갖게 합니다. 약간의 논외로 이 작품의 아쉬운 결말 자체는 독자들에게 있어 다소 불성실하게 다가올 수도 있겠습니다.  

이 글의 결말은 J. M. 쿳시의 작품인 추락의 그것과는 완연히 다른 양태이면서 동시에 충격적이기도 한 데요. 물론 쿳시의 추락과 이 작품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가벼운 문제가 아니지만 양 작품에서 억지로 뽑아낸 도덕적 인간상을 동일하게 강요할 수는 없을 겁니다. 루실이 일관되게 보이는 자신의 삶에 대한 내면적인 안온함을 고려해 봤을 때 무조건 그 도가 지나쳤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부양할 수 없는 종류의 사람이라면 상대방의 호의와 자신이 제공할 수 있는 섹스를 통해 원하는 바를 충족할 수도 있겠습니다. 작금의 세계에서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니까요. 그럼에도 그녀의 진정한 사랑이라고 볼 수 있는 앙투안과의 재회에서 서로가 다시금 극복할 수 있는 두 번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자신은 결국 적극적인 회피를 선택합니다. 아무런 부족함이 없이 많은 걸 누리던 사람이 진정한 사랑과 맞바꾼 텁텁한 삶의 현실은 어쩌면 어려운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진정한 사랑이라는 감정이 무색할 정도로 두 사람은 각자의 실체를 나름의 방식으로 겪고 나서 급격하게 관계가 무너지게 되는데요. 하지만 누군가와의 관계에 있어 각자가 최소한의 책임과 결정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작가는 이 결정이라는 단어를 여주인공이 루실이 프랑스어에서 가장 싫어하는 단어라고 언급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은 어느 정도는 주변까지 챙길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와는 별개로 루실과 샤를, 앙투안과 디안, 이 네 사람이 얽힌 심리 묘사와 이어지는 감정선에 대한 깊은 서사는 충분히 격정적이었고 아름답다고 느껴졌습니다. 어느 정도는 작가가 이 작품을 독자들에게 그저 난잡한 섹스 파트너들의 무책임한 연가 정도로 이해되지 않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또한 무조건 이유 없이 주는 사랑을 해본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고, 반대로 관계에 있어 누군가에게 큰 상처를 입혀본 경험도 있을 수 있기에 사강의 이 작품이 사랑 자체에 대한 어쩌면 냉소적인 의미를 내포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문학적인 측면에서 충분히 가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


- 작가인 사강의 묘사를 통해 앙투안의 낡은 그 방에 대한 디안의 추억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그리고 그것을 범한 루실에 대해 갖는 그녀의 고통스러운 감정은 정말 이 작품의 백미가 아닌가 생각하는데요. 저 역시 이 부분에 대한 묘사에 감정이입이 되어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






루실이 웃음을 그쳤다. 그녀는 생계를 위해 하는 일이 전혀 없었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얼마나 하잘것없는 삶인가.

앙투안은 더러 아리송한 표정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건 오로지 책뿐이며 언젠가 출판계에서 성공할 거라고 말하곤 했다.

동시에 그녀는 자신이 문제를, 사건을 키우려 하고 있다는 걸, 조용히 치미는 자기 안의 혐오감을 물리치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하려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들은 이미 상대의 어떤 동작도 결코 불쾌할 수 없으리라는 걸 알았고, 육체적으로 사랑에 관해 서툴고 유치한 날것의 언어들을 재발견하며 소곤거렸다.

그가 섹스하는 방식 외에는 정말 아무것도. 어째서 우리가 이토록 열정적인 관계에 놓이게 된 거지?

그들은 서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으나, 그들의 육체는 한없는 열광과 경애로 서로를 알아보았다.

행복은 그녀의 유일한 도덕이었고 불행은, 그것이 스스로 부과한 것인 이상(게다가 그녀는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이 그러는 것을 평생 이해하지 못하고 나아가 끊임없이 나무라곤 했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그는 문득 자신이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고, 그녀를 알기 위해 어떤 노력도 기울여본 적이 없다는 생각을 하며 오싹해했다.

그에게 남겨진 유일한 기억이란 루실의 쾌락과 그 자신의 쾌락이었으나, 그 마저도 그를 안도하게 하기보다는 번민하게 했다.

서로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에게 그들이 쾌락으로 맺어지고, 웃음으로 맺어진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사실을, 그들은 고통으로도 맺어져야 했다.

루실의 게으름과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고 아무것에도 대비하지 않을 수 있는 엄청난 능력, 행복할 수 있는 재능 - 그토록 텅 비고, 무위하고, 그날이 그날인 날들을 살아갈 수 있는 능력 - 이 그에게는 때로 괴이하다 못해 거의 끔찍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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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05-05 22: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댓글 달다 멈추고, 다시 쓰고, 지웠습니다.
욕망이 타인과 충돌할 때와 관련한 생각을 쓰다가...^^

베터라이프 2023-05-05 23:00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그레이스님 ^^
요즘 간간히 소설 서평을 쓰고 있음에도 사강의 이 작품은
여운이 많이 남습니다 ㅜㅜ
사랑이라는 감정의 진정한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
몇 번이나 고찰하게 됩니다. 이 작품을 통해서요 ㅡ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