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자본주의의 폭력 - 부채위기를 넘어 공통으로 아우또노미아총서 41
크리스티안 마라찌 지음, 심성보 옮김 / 갈무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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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안 마라찌는 스위스 루가노 출신으로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학계에선 진보적 경제학자이자 열정적인 사회 활동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이탈리아의 파도바 대학을 졸업하고 런던 정경대를 거쳐, 런던시티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특히 마라찌는 노동자들의 권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고 그에 따른 여러 운동에도 직접 참여한 바가 있습니다. 또한 오늘날 세계 자본주의가 나가야 할 길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요. 그래서 그가 상아탑에 국한된 경제 이론가에 그치지 않고 유럽의 경제 환경과 시스템 자체에 대한 비판을 해오고 있는 점은 학자로서 해야만 하는 일이라 여기는 듯 싶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마라찌에 대해 크게 긍정한 부분은 작금의 전세계적 금융 자본주의가 현실에서 많은 시민들에게 거의 이익이 되지 않았다는 점과 1985년 신자유주의적 이행에 따른 복지 축소와 사회 보장에 대한 쥐어짜기식 정책이 마찬가지로 유럽을 결국 위기에 몰아넣었다는 인식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제, "The Violence of Financial Capitalism"으로 지난 2009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3년 4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저자인 마라찌의 이 글은 지난 수십 년 간의 신자유주의적 금융 자본주의 이행에 따른 파급이 어떻게 2008년의 세계 금융 위기로 이어졌는지를 고찰해보고, 앞으로 자본주의의 건전성과 금융 자본주의의 병리를 어떻게 치료할 수 있겠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본문에서도 명확히 드러나지만 채권을 손쉽게 팔아 치울 수 있었던 증권화 securitization는 대표적인 금융 자본주의 체제에서 소위 '유독성 자산'을 만들어 낸 원인이기도 한데요. 물론 2008년의 대위기를 분석한 글들은 충분히 소개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2008년의 위기 때 경제 엘리트들의 심각한 도덕적 해이는 물론 시스템의 붕괴까지 여러모로 자유 시장이라는 대마불사에 큰 타격이 되었죠. 여기에 저자가 거듭 인용하고 있는 마틴 울프를 포함, 파리드 자카리아, 맷 타이비, 심지어 히로세 다카시마저 뉴욕 발 세계 금융 위기를 직접 폭로하기도 했습니다. 더욱이 이 금융 엘리트들이 주도한 근본 금융 자본주의 자체를 흡사 '카지노'로 비유했던 한스 베르너 진의 분석 또한 매우 유명한데요. 사실상 현재의 금융 자본주의를 긍정하는 고전 경제학자들을 제외한다면 현재의 금융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있는 학자들이 제법 많다고 여겨집니다. 그런 연유로 경제학이 과연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지, 이 지점에서 깊은 성찰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날 세계 경제는 더할 나위 없이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미국의 경제 동향이 매우 중요합니다. 미국의 시장이 세계 경제의 소위 '베드' 역할을 하고 있는 소위 선진 적자국이라고 불리는 영국과 미국의 대규모 적자는 이처럼 세계 경제 체제를 지탱하는 중요한 맥락이기도 합니다. 다시 돌아와, 2008년의 위기는 소위 채무를 사고 팔 수 있는 상품으로 고안된 증권화에 근본적인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저자의 분석대로 증권화를 통한 자본의 축적은 그 파급이 충격적이었다는 점에서 금융 시스템 전반이 과연 건전성을 답보할 수 있는가가 이 글의 주요한 논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저자의 현재 금융 자본주의에 대한 몇 가지 문제점과 이런 체제가 다시금 초래할 수 있는 위기 가능성에 대해 진지하게 논하고 있는 부분만으로도 우리가 이 글을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1980년 이전의 시장에 대한 케인스주의적 접근의 불만족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시장 전반을 새롭게 재해석한 신자유주의의 실패는 앞서 언급했던 대로 고전 경제학자들에게 상당한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는데요. 이미 누리엘 루비니가 2004년부터 이 금융 시장의 위기를 경고했지만 금융 엘리트들을 비롯해, 심지어 당국마저도 이러한 의견을 사실상 무시해 왔습니다. 그 이전에 하이먼 민스키를 알고 있다면 이러한 우려는 상당히 있어 왔습니다. 어떻게 시장 전체가 거대한 증권화에 담보물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상 시장의 자정 능력은 그 의미를 상실한 지 오래되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저는 이 시점에 신자유주의자들의 뼈아픈 반성이 나왔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2008년의 청산 작업에서 보여준 금융 엘리트들의 추태는 이런 저의 당위에 상반되는 모습을 만천하에 여실히 보여줬습니다. 저들이 오로지 자신의 사익에만 몰두하는 인간들이라는 점을 말입니다. 더욱이 조지 W. 부시에 이어 등장한 오바마 행정부가 이들에 대한 기소를 포기하고 면죄부를 이들 손에 안겨준 것은 이 사태의 결론이 익히 짐작될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저자인 마라찌가 오바마 정부의 '신 뉴딜'이 가급정 성공해야만 한다고 기대하는 장면에서는 절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시기에 미국의 소비시장을 비롯해,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브레이크 없이 신용 생활을 지속합니다. 이 점은 달리 말하면 시스템적 도더적 해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이것의 원인들 가운제 한가지는 미국을 상대로 막대한 흑자를 거두고 있던 중국의 국내 저축 자금이 이런 여파를 불러온 것인데요. 이에 새뮤얼 헌팅턴과 같은 이들은 미국의 위기를 전부 중국의 책임으로 몰아가는 근원이 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저자의 평가대로 중국 당국이 미국의 국채 매입이나 미국 시장의 재투자 말고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는 점은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의 현실적 한계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는 다른 한편으로, 미국이 반쯤 자임해 온 세계 자본주의에서의 소비 시장 역할을 중국에 맡기기에는 현실적으로 문제가 있으며 이를 지금까지 지탱해 온 체제의 근본과 관련해서도 역시 다른 대안이 없다는 점에서 극히 난감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유럽이 설정해 온 '유로화'에 대한 시장에서의 안정화와 영국을 비롯한 유럽 시장 전반이 개발도상국에게 좀 더 수출 시장으로서 기능하는 것이 필요한데, 현재 독일이 일본과 마찬가지로 지속적인 흑자국임을 고려해 봤을 때, 이 같은 기대 역시도 상당히 어려운 실정입니다. 일전의 조지프 스티글리츠의 언급대로 오로지 미국만의 적자를 기반으로 해, 전세계 국가들을 향한 소비 시장 제공이 과연 언제까지 가능할 지는 분명히 우려스러운 부분인데요. 더욱이 이 시점에서 과거보다 경제적으로 영향력을 갖게 된 중국이 세계 결제 통화를 교체하고 싶어하는 내심과 그러한 세계 경제 체제의 주도권을 쥐고 싶어하는 이들의 근본적인 목표도 마찬가지로 세계 경제에 있어서 어두운 그림자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결국 미국과 유럽을 포함한 IMF 체제가 과거처럼 얼마나 영향력을 견지할 수 있을지도 신자유주의와 세계 경제의 헤게모니에 대한 분명한 과제로 여겨집니다. 

결국 세계가 직면한 이 문제 대한 마라찌의 해법은 사실상 진보적인 것으로, 기존의 대니 로드릭이 회의적으로 파악했던, 정치적 결단 혹은 정치적 해법에 있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현재 세계 경제 블럭이 선진 그룹과 개발도상국 간의 이원화로 고착화 되어 가는 점을 인식하고, 중국이 자신들의 요구대로 세계 경제 체제의 재구축에 유럽을 비롯한 미국의 경제 당국이 이를 어디까지 수용할 수 있느냐가 현재의 큰 과제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물론 저 역시도 이 과제에 대해 상당히 회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이는 미국이 자신들이 쥐고 있는 경제적 헤게모니를 떠오르는 경쟁국에게 양보하리란 어려운 부분이라 볼 수 있습니다. 2차 대전 이후, 브레튼우즈 체제의 양상이 그러했으니까요. 저는 이런 체제의 주도권을 쥐고자 하는 권력 문제에서 조금 벗어나서, 금융 자본주의에 있어 저자가 제안한, 중국을 비롯한 개발도상국들이 1997년의 외환위기를 교훈 삼아 외화 보유고를 늘리고자 하는 딜레마를 워싱턴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이 앞선 국가들의 위기시 외환 보유고의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우리가 당신들을 고립시키거나 그것을 기화로 당신들의 시장을 붕괴시키지 않겠다는 제스처를 일관되게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언급합니다. 이는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IMF 체제를 고려해 본다면 상당히 충격적인 제안이기도 한 데요. 즉, 개발도상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들의 과도한 외환 축적이 세계 경제에 미치는 파급을 생각해 본다면 이런 제안은 충분히 긍정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더욱이 이런 제안과 더불어, 4장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구조적인 선진 적자국들과 반대의 흑자국들 간의 차이 또한 어떻게 좁혀 나갈 수 있느냐도 중요한 과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시장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작금의 고정된 경제학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고, 여기에는 서로 간의 대화와 협의라는 (민주주의 방식의) 정치적 해법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끝으로, 3장의 결말에서 저자는 우리가 몸소 목도하고 있는 금융화는 고도로 고안된 기법으로 채워, 자본주의가 본질적으로 변화되는 시점에서 '도착적인 축적 양식'자체라고 진단합니다. 이는 실물 경제가 금융 기법의 하위 요소로 추락하고, 이를 통해 돈이 더욱 배타적으로 축적되는 결과를 초래했는데요. 결국 더 많은 자본을 소유한 자들을 위한 신자유주의적 기법과 그런 이행 전반이 자본주의를 더욱 비인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에티엔 발리바르를 포함한 많은 사회학자들이 경제와 시장이 민주주의를 비롯한 시민이 기본이 되는 정치를 떠받쳐야 했지만, 이는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해 무력화 된 바가 있습니다. 이는 인간이 비합리적이라는 측면을 강조하는 것은 물론, 경제 상황에서 자본의 축적을 좀 더 효율적이고 손쉽게 만든다면 그만큼 사회가 진보하고, 이러한 이행에 따른 이익이 모든 시민들에게 고르게 주어질 수 있다고 항변한 신자유주의자들의 극명한 모순에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금융 시장에 대한 불안전성 자체를 그저 자연스런 문제라고 치부하고, 이익은 마땅히 자신들의 손에, 손해는 오로지 정부의 몫으로 남긴 2008년의 파국적인 결과는 시장을 여전히 '보이지 않는 손'에 맡겨야 하는지에 대한 시민들의 거듭된 의문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마라찌의 이 글은 2008년의 위기로부터 우리가 과연 배운 것이 있는지, 그리고 이러한 체제의 모순이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진술에서 의문이 드는 점은, 우리의 민주주의가 신자유주의적 기법에 의해 시장에 대한 제한적인 접근만이 가능한 분위기에서 과연 체계적으로 이에 대응할 수 있겠느냐 입니다. 따라서 금융 시장에 대한 각 국의 정치적인 접근이 이렇게 큰 모순을 안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폴 크루거먼에 따르면, (2010년 1월 11일 상하 양원에서 7천 895억 달러로 감축되긴 했지만) 오바마 정부가 제안한 8천 250억 달러에 달하는 경제 부양책은, 위기시기에 나타난 잠재 성장(률)의 "산출 격차"를 메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애널리스트들에 따르면, 시장은 가격 왜곡을 암시하는 경제적 버블의 신호를 보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국 정부가 차입을 시도함에 따라 실질 금리가 상승하는 교란이 일어나고 있다."

먼저 자극 단계에서 사람들은 집단적으로 주식시장에 도취되어 과잉거래를 일삼는다. 다음으로 공포와 혼란의 단계가 나타나고, 곧이어 합병의 단계로 진입한 다음 마지막에 재조직의 단계로 끝맺는다.

1960~70년대에 발생한 (대략 50퍼센트에 이르는) 이윤 감소가 꼽히고 있다. 이윤 감소는 포드주의의 기술적, 경제적 토대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배의 측면에서 볼 때, (부의 극단적인 양극화를 특징으로 하는) 자본 재생산이 이루어지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금리생활자의 소비 증가 때문이고, 또 부분적으로는 부채를 통한 임금 생활자의 소비 때문이다.

전지구적 금융위기가 발생하자, 의심할 바 없이 서브 프라임 모기지 대출을 기초로 창출된 파생증권은 희생양이 되었고 "유독성" 자산이라는 명칭을 얻었다.

오늘날 금융 산업의 입맛에 맞추어 학문적 역량과 품위를 냉팽개쳤던 아카데미 경제학자들이 양심상 평안하길 바랄 뿐이다(이처럼 현재의 금융위기는 아카데미 경제학의 위기를 드러내고 있다).

무역 흑자국, 가령 독일과 일본 뿐만 아니라 발전도상국들이 수출을 늘릴 수 있는 근본적 원인은 미국이나 영국과 같은 [무역 적자]국들이 재화와 서비스에 대한 높은 수요 증가율을 담보하기 때문이다.

신경제에서 자본주의적 가치창출 과정을 혁신하는 최전선은 ‘임금노동을 주변화하고 자유노동을 통해 가치를 증식하는 것‘이다.

금융화는 금융 지대와 소비자 부채를 창출하였고 이 덕분에 전지구적 자본을 성장시킬 수 있었다.

1985년부터 지금까지, 그러니까 시장의 탈규제화를 통해 경제를 신자유주의로 전환한 이후, 평균 2년 반마다 금융 위기와/나 통화위기가 반복해서 일어났다.

알폰소 뚜어가 언급했듯이, "중국의 선의는 공짜가 아닐뿐더러, 특히 미국에게, 값비싼 대가를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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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에 읽는 보수의 역사
로저 스크러턴 지음, 이재학 옮김 / 돌밭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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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 버톤 스크러튼은 영국 링컨셔의 작은 도시인 버슬링소프에서 태어나, 위컴에서 두 자매와 함께 자라났습니다. 그는 1954년부터 1962년까지 로열 그래머스쿨에서 수학했고, 이 시기에 응용 수학, 물리학 및 화학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됩니다. 그런 결과로 케임브리지에 합격하게 됩니다. 그는 케임브리지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자연 과학을 공부하려 했으나, 도덕 철학을 비롯한 서양 근대 철학에 관심을 갖게 되는데요. 이후 그의 이력은 철학과 사회사상, 정치철학 등으로 채우게 됩니다. 특히 1982년부터 대처리즘에 반대하는 전통적 보수주의를 옹호하는 전문 저널인 솔즈베리 리뷰의 창립 멤버로 참여하게 되는데요. 그의 보수주의적 사상은 이곳 솔즈베리 리뷰를 통해, 핵 군축 캠페인, 평등주의, 페미니즘, 대외 원조, 다문화주의, 모더니즘 등에 매우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게 됩니다. 그의 이 책은 원제, "Conservatism : An Invitation to the Great Tradition"으로 지난 2017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작년인, 2022년 12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먼저 이 책에 대한 간단한 평가를 내리고 싶은데요. 일단은 전통적인 보수주의에 논하는 글들 중 수위를 다툴만한 평이한 글이라 생각됩니다. 더욱이 이렇게 접하기 쉬운 글들은 보수주의나 자유주의에 대해 개념적으로 명확하지 않은 분들께는 분명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실 있을 것 같은데요. 다만, 정치에 관심을 갖고 있는 많은 분들이 무엇보다 '건전한 보수'를 원한고 있다는 측면에서, 예전의 '전통주의적인 보수가 과연 오늘날과 같은 현대 사회에 유용할 수 있겠느냐'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는 회의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외에도 이 글에 대해 안타까운 점은, 보수주의가 프랑스 혁명의 여파 때문인지 아직도 '평등'에 대해 단순히 부정적 입장 만을 피력한 채, 현재 승자 독식의 자본주의가 초래한 경제적 불평등 상황에 사실상 눈을 감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사람들 틈 속에서 평등을 외치는 것은 소위 이념적 일관성에 위배되는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배타적 민족주의에 대해 별반 의견을 내지 않는 자칭 보수주의자가 태반인 걸 감안한다면 극단주의와 보수주의에 대한 구분이 요원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물론 저자기 이 글 5장, '사회주의에서 맞서다'에서 이를 항변하고 있긴 한데요. 이는 거의 자유주의 세력권에 의한 사실상의 사회주의 봉쇄라는 역사적 사실인데, 여기에 굳이 보수주의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있는지는 의문이 듭니다. 같은 맥락으로 현재의 보수주의와 자유주의가 어느 정도는 구분이 힘들다는 점에서 스크러튼의 이 글이 그 만큼의 통찰이 될지도 꽤 의문이 들기도 하네요. 특히 스크러튼의 논증을 통해 평등과 관련된 보수주의의 입장을 예측해 본다면 이들 보수주의가 일정 부분 민주주의를 탐탁치 않게 바라보는 전제라고도 볼 수 있겠는데요. 더욱이 개인적 자유주의의 시대가 도래된 시점에서 이 자유주의 맥락의 개인주의를 경계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보수주의의 책임이라고 저자는 평가하면서도 후반부에 갑자기 자유주의와의 연대를 강조하는 부분은, 계획된 책의 분량으로 인한 근거의 미비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역시도 아쉬운 논증 가운데 한 부분입니다.


3장에서 이미 스크러튼이 인용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진정한 자유라는 함의는 인간의 자율성이라는 의식이 필요합니다. 어쩌면 이러한 자율성이라는 의식은 어느 정도는 계몽주의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를 다른 말로 풀어보자면 인간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이 계몽주의 시기에 크게 변화를 맞이하게 되고, 마찬가지로 인간의 합리성이라는 주제도 이 시기에 잉태되었다 볼 수 있겠는데요. 저는 이 부분에서 인간이 과연 합리적일 수 있겠느냐에 대해 큰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연유로 장 자크 루소가 견지한 공화주의적 계약론에 대해 일정 부분 인정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사상가 마다 루소를 비판할 수도 있지만 루소를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사실상 여타 사회계약론과 공화주의에 대한 인식적 거부로 이어질 수 있으니 주의가 필요해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저자 역시 일관되게 극단적인 자유 지상주의에 대해서는 반대의 입장을 펼치고 있긴 합니다. 마찬가지로 과거 전체주의에 대해서도 강하게 거부하는 논증을 하고 있었는데요. 이 정도의 당연한 발언들이 건전한 보수주의의 기준이라면 기준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데이빗 코츠에 의견대로 신자유주의와 한 몸이 된 보수주의가 과연 '시장 근본주의에 준하는 이런 상황`를 공동체를 위해, 실제적으로 거부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상당한 의구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의 말대로라면 전체주의가 극렬한 민족주의와 인종주의로 불타올라, 전세계에 엄청난 파국을 초래했다면, "보수주의는 이 민족주의를 과연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명확한 답변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보수주의는 이 민족이라는 관념을 '자유' 이상으로 심도 있게 다뤄야만 한다고 판단됩니다. 민족과 공동체, 전통적인 가족제도, 종교적 경건주의 같은 것이 보수주의가 주장하는 것이라면 이 민족에 대한 관념에 대해서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는 것이죠. 더욱이 이 글에서 숱하게 언급되는 자유에 대해서는 '개인의 자유'를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자유주의와 스크러튼이 말하는 전통적 보수주의가 서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존재한다는 친절한 설명과는 앞선 민족에 대한 태도가 영 부실한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스크러튼은 서두에서 아마도 보수주의에 대한 세간의 오해를 고려해서인지, 아주 명확하게 보수는 반동과는 다르다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그의 이런 강조는 글 말미에서 어느 한 인물(카를 슈미트)을 애매하게 평가하면서부터 그의 진정성은 훼손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을 그저 위선적 논법이라고 단순히 폄하하지는 않겠습니다. 이미 에드먼드 버크가 오래전부터 사회에 내려오는 전통과 관습이 '사회적 지식의 형태들'로서, 이것들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된다는 입장과 보수주의의 생각은 비슷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카를 슈미트가 일전에 독일 사회에 보인 일관된 관점을 고려해 본다면 말이죠. 이것과는 별개로 전반적인 논증이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공리주의가 계몽주의 시대를 거쳐, 보수주의의 중요한 사상적인 틀이 되었던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런 연유로 보수주의는 공동체를 위한 이익이나 전통적인 토대, 구성원들이 인정하는 사회 규범 등을 지키고 보호해야 할 의무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한낱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의무라는 단어가 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앞선 맥락을 이해한다면 스크러튼이 왜 1980년대에 맹위를 떨친 '대처리즘'에 반대했는지 어느 정도 수긍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극대화된 자유주의적 개인주의가 공동체의 이익을 침해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보수주의적 입장에서 이를 비판하는 것이 어쩌면 사회 건전성을 위해 매우 중요하지 않은가 생각해 봅니다.

스크러튼 자신이 평생에 걸쳐 쌓아 올린 사상인 이 보수주의를 여러 논증을 통해, 지금은 퇴색된 전통적 보수주의에 대해 독자들에게 쉽게 알리고자 하는 것이 그의 중요한 목적일 겁니다. 제가 일부 논증에 대해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부분은 애덤 스미스에 대한 인용이었습니다. 애덤 스미스의 다른 중요한 저작인 도덕감정론을 감안한다면 보수주의와 더 나아가 자본주의에 대한 기계적 설득을 위해 너무 남용 되어선 안된다고 생각하는데요. 여기에 등장하는 '보이지 않는 손'도 그렇고 보수주의가 사실상 용인하고 인식하는 사회적 연대의 그 사상적 기반이 '사유 재산'에 있다는 부분도 그 근거가 너무 빈약한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스크러튼이 생각하는 보이지 않는 손은. '공동체 내부에서 발생할 수 있는 집단 문제에 대한 쉬운 해결책'이라고 여겼던 모양인데요. 이 부분에 대한 확장된 근거가 보이지 않는 손 내지는 사유 재산을 통한 인간의 합리적 사고의 긍정적 기대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고인이 된 스크러튼에게 묻고 싶은 것은, 2008년에 전세계를 휩쓴 경제 위기에서, 이 보이지 않는 손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발생한 문제인 것인지, 아니면 금융 자본주의를 자기들 손에 넣고 쥐락펴락한 경제 엘리트들의 부패에서 비롯된 것인지 의견을 듣고 싶은데요. 과연 인간의 탐욕에 대한 문제를 개인의 합리주의로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해 (소수의) 전통적 보수주의자들에게 반문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끝으로, 저자는 글 말미에 레오 스트라우스와 카를 슈미트를 언급하며, 마치 현재의 보수주의적 맥락에 사상적 기여를 한 인물들로 그리고 있습니다. 앞서 제가 언급했지만 특히 카를 슈미트를 여기에 우겨 놓은 것은 몹시 실망스러운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개인의 자유에 대한 가치와 보수주의가 이를 긍정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저 역시 충분히 공감하지만, 억지로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연대를 논하면서 오늘날 전 세계의 승자 독식 자본주의를 나날이 강화시킨 신자유주의에 대한 애매한 태도는 보수주의 자체가 자신들이 주장하는 정치적 입장에서 객관적일 수 없는 것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요. 오늘날 신자유주의는 시민 공동체의 파편화와 고립을 만들어 내고, 평범한 시민의 삶을 더욱 어려운 지경으로 내몬 것으로도 모자라, "이것은 모두 국가와 사회의 책임이 아니라 온전히 너희의 몫이다"라고 편의적으로 사회에 강요해 왔습니다. 본문에서 논증 되는 것처럼, 어느 정도 법과 제도는 유한성을 갖고 있는 반면, 보수주의가 추동하는 중요한 가치들은 본질적으로 전세계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보는 면에서, 의문이 들었습니다. 신자유주의와 보수주의가 사실상 결탁했다는 그레이스 블레이클리와 같은 학자들의 주장에 보수주의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더욱더 (전통적) 보수주의가 신자유주의와 분리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이러한 측면에서 신자유주의 식대로 민주주의를 분석해 보는 행위 자체도 꽤나 편협하고 낡은 생각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정말 비웃음이 들 정도였습니다. 글의 마무리에서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것이지만 저 역시 건전한 보수는 사회에 분명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사실상 보수주의는 애초에 기본으로 돌아갈 수 있어야만 그들이 기대하는 보수주의의 미래를 조금이라도 엿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자는 특유의 보수주의자답게 토머스 페인이 과대평가 되었으며, 다소간 재평가를 받아야한다고 논증을 펼치고 있는데요. 물론 저는 이에 동의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 글 6장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부분도 인간의 사상의 자유, 생각할 자유, 발언할 자유가 극도의 혐오에 이르고, 끊없이 누군가를 도태시키고 증오하고 혐오하는 권리가 과연 '양도할 수 없는 권리'와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 지금도 의문이 듭니다. 그래서 최근 서평을 쓴 에즈라 클라인의 글이 다시 생각날 정도였는데요. 최근 대안 우파와 트럼프주의자들이 앵무새처럼 말하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비난과는 조금 다른 건설적인 의견 개진이 가능할 줄 알았지만 이 부분도 상당히 아쉬운 부분입니다. 




앞으로 설명하겠지만 보수주의는 계몽운동의 시기에 지나친 자유주의적 새인주의를 견제할 필요성 때문에 등장했다.

우선 전통적 보수주의자들과 자유 시장을 옹호하는 자유지상론자들이 서로 대립했다.

보수주의자들도 인간의 이성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을 공유한다. 정치적 삶의 한 가지 목적은 이성의 행사를 가다듬고, 그 이성의 집단적 행사에 필요한 미덕을 시민들에게 심어주는데 있다는 것 그들도 인정한다.

우리가 의무를 계약에 따른 책임이라고 해석한다면, 모든 합리적 존재는 반드시 계약을 수용해야 한다는 견지에서 그 의무를 정당화하게 된다.

칸트는 비록 언제나 권리나 해방보다는 의무와 법을 강조했지만 대체로 당시 부상하던 자유주의적 정론들과 일치하는 일종의 급진적인 정치적 결론을 이끌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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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서로를 미워하는가 - 편 가르기 시대 휘둘리지 않는 유권자를 위한 정당정치 안내서
에즈라 클라인 지음, 황성연 옮김 / 윌북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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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즈라 클라인은 미국의 언론인이자 정치 분석가로 미국 뉴스 및 오피니언 사이트인 Vox의 공동 창립자이기도 합니다. 그는 캘리포니아 어바인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유니버시티 고등학교를 거쳐, 서부의 명문인 UCLA에서 학사 학위를 받습니다. 이후 워싱턴 포스트와 더 아메리칸 프로스펙트를 거쳐 현재 뉴욕 타임즈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앞선 Vox의 편집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자신의 이름을 건 팟캐스트까지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는 미국의 여러 정책과 관련해, 논평한 개인 블로그도 가히 심도 있는 분석으로 많은 네티즌들에게 유명세를 타기도 했는데요. 더욱이 그는 진보적인 언론인으로서 레이첼 매도를 비롯한 다방면의 이론가들과 관계를 맺고 있기도 합니다. 그의 이 책은 원제, "Why We're Polarized"로 지난 2020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2년 6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클라인의 이 글을 추천한 여러 유명 인사 중, 프랜시스 후쿠야마와 파리드 자카리아의 이름이 있는 것을 보니 개인적으로 꽤 흥미로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에게 우파 정치 사상가로 알려진 후쿠야마가 작금의 극단주의 정치를 과연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지 그 점이 매우 궁금했는데요. 현재 미국 정치에 있어 우파 포퓰리즘과 양극화 정치 자체가 미국이 힘겹게 쌓아 올린 공화주의에 사실상 악영향이 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저자는 글의 결말 부분인 10장에서 에둘러 이런 양극화 정치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 있었습니다만 논증의 전개 과정 대부분은 이런 양극화와 극단주의 정치에 우려섞인 내용들을 근거로 두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진정한 과제는 미국 정치가 얼마나 건전성을 답보할 수 있겠느냐에 달려 있을 것 같은데요. 저자인 클라인 역시, 현재의 미국 정치 시스템이 상당히 잘못된 길로 가고 있으며, 정체성 정치와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세간의 부정적 인식도 바로 이러한 맥락 가운데 있다는 점을 주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거의 많은 정치 이론가들이 인정하듯, 현재 미국 정치에서 만연된 양극화 정치를 가장 실질적으로 이용한 인물은 도널드 트럼프입니다. 스스로 자신의 성기가 큰 것을 자랑하고, 편협한 인종주의에 여성을 그저 성적 대상화한 인물이 공화당의 대선 후보가 된 점은 '우파 포퓰리즘'의 시대를 열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과거 2008년에 조지 W. 부시가 재선 가운데, 백인 기독교인들 가운데 74%의 지지를 받았는데, 이에 "자신의 부를 과시하는 비도덕적이고 타락한 간통자였던 트럼프가 마찬가지로 백인 기독교인들의 80%의 지지를 받았다는 점은 거의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음 2012년에 실시된 조사에서도 "자신을 민주당원이라고 하는 사람의 43%가 백인이 아니었지만, 자신을 공화당원이라고 하는 사람의 9%만이 백인이 아닌 것으로 나타났다"는 결과 역시, 현재의 인종적 정체성 정치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여실히 목도하게 됩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역사적인 측면에서 저자인 애즈라 클라인의 단연 통찰이라고 볼 수 있는 점은, 미국 정당 정치에서의 민주당과 공화당간의 구분은 사실상 '민권법'과 관련한 부의 재분배와 계층 상승이 흑인에게까지 확대되자 많는 사람들이 민주당에 등을 돌렸다"는 분석입니다. 더불어 전통적인 '백인 정체성'과 이어지는 이 흑인에 대한 인종주의는 이것을 지지하는 백인들이 아직도 지대하다는 점을 사실상 반증하는 것이기도 한데요. 현재까지 미국 정치 무대에서의 이런 '인종주의적 맥락'이 얼마나 강력한지 앞선 진술들을 통해 파악할 수 있습니다.

2장에서 상세히 분석되고 있지만 이 정체성 정치 자체는 상대적으로 권력에 소외된 사람들의 사회적인 측면에서 필요한 논리였습니다. 예를 들어 성소수자나 사회적으로 여전히 억압 받는 저소득층의 여성들과 같이, 기존의 기득권 정치에 자신들의 입장을 어필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한데요. 여기서 문제는 맞지 않게도 다수의 백인들이 미국 사회에서 다른 인종들에 비해 차별 받고 있다고 믿는 부분입니다. 더욱이 오버마 대통령의 당선으로 현재 미국에는 흑인들에 대한 인종차별이 없다고 믿는 백인들이 너무나도 많은 실정인데요. 이런 연유로 도널드 트럼프의 반(反)이민 정책이나, "멕시코가 미국 국경에 좋은 사람들만 보내는 것이 아니다"라는 거의 인종적 혐오 발언과 다름 없는 언설들이 미국 내부에서 영향력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 같습니다. 이것은 다음 3장에서 '증오를 통해 행복을 찾는다'는 주제와 맞닿아 있기도 한데요. 시민들이 누군가를 증오할 권리가 있다고 전제한다면, 끊임없이 증오의 대상이 되는 어떤 누군가는 그것 자체로 현실 정치의 왜곡이라고 항변할 수 있을 텐데요. 다른 사람을 끊임없이 증오할 권리가 누구에게나 주어진 것인지는 지금도 강하게 의문이 듭니다. 물론 저자는 이러한 '양극화'에 대해 단순히 '분류'라는 정치적 용어를 들이대며, 현재의 미국 정치에서의 양극화가 과연 심각한 상황인가에 대해 다소 의문을 표하기도 한데요. 자신이 속한 그룹의 상당한 내적 편향과 이것에 속하지 않는 다른 그룹에 대한 증오가 이미 상당한 수준임에도 단순히 이를 미국 정치의 개방성이나 시민들의 마땅한 사상의 자유로 받아들여야 하는지는 마찬가지로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결국 극심한 사회 분열을 분석하고 있는 5장에서, 저자는 "포퓰리즘 우파의 부상은 미국만의 현상은 아니며, 2016년에 시작된 것도 아니다. 서방세계의 여러 나라에서도 같은 현상이 나타났다"고 사실상 일관된 논증 가운데서 선을 긋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도널드 트럼프 뿐만 아니라 공화당 전체가 거부한 '오바마 케어'와 의료보럼 의무 가입은 이러한 정체성 정치의 극명한 사례라고 여겨지는데요. 이 책에서는 언급되고 있지 않지만, 과거 로널드 레이건이 사회 복지 제도에 대한 완벽한 거부는 아직도 지원이 필요한 흑인 계층에 대다수에 대한 혐오를 거의 가감없이 드러냈다고 볼 수 있는데요. 이는 국가의 사회 보장에 대한 반감과 인종주의는 꽤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이같은 맥락은 일전에 마틴 길렌스도 언급한 바가 있는데요. 유독 많은 백인들이 사회 보장에 대해 큰 반감을 보이는 것은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볼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더욱이 미국의 현실적인 '인종주의적 벽'을 감안하지도 않고 많은 흑인들이 스스로의 삶에서 성공하는 데 사회적으로 큰 무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진보주의자들의 판단은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사회 전반에 대한 비판적 분석이 부실하다고 느껴지는데요. 이것은 서로를 혐오하는 양당의 지지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그렇게 매번 강조하면서도 상대방에 대한 이해는 거의 전무하며, 오로지 정치적 셈법을 위해 서로를 대결의 상대로만 보는 사실상의 양극화 정치 자체는 저자의 말마따나 일종의 시스템의 우려스러운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서두에서 이미 저자는 엘리트 기반의 정치가들이 서로를 향해 극단주의적 논법을 강화시켜 나갈 때 비록 시간 차이는 있겠지만 일반 시민들도 이러한 흐름에 휩쓸리 수밖에 없다고 진단합니다. 여기에는 6장의 좌파와 우파를 뛰어넘은 미디어의 분열에도 관련이 있어 보이는데요. 폭스 그룹에 의한 보수적 언론의 영향력을 보더라도 언론 대부분이 자신들의 정체성에 따라 '가치 중립'을 위배되는 기사 보도가 매우 빈번한 것이 현실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비슷한 분위기일 텐데요. 다만 미국의 언론 지형이 우파쪽으로 상당히 기울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트럼프가 매번 미국 언론계가 '좌파적'이라고 매번 비난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반지성주의와 그에 따른 '대안적 사실'이라는 말장난을 고려해, 이미 시민들 대다수가 정치적 분별력이 전무한 것과 일맥상통해 보이는데요. 이와 같이 정치적 진술 자체가 사실에 근접하지 않더라도 '내집단 편향'에 근거하여, 많은 시민들은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의 프로파간다에 대해 최소한의 사실 확인도 하지 않고 그저 이를 수용하고 있는 실정인데요. 이러한 분위기는 언론 비즈니스 측면에서 돈과 권력을 가진 언론들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이는 반대로 거짓 뉴스에 대한 시민들 대다수의 정확한 '거부'와 '도태'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 자체가 위험에 놓인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끝으로, 권력에 상당히 소외된 계층의 정체성 정치가 아닌 오도된 정체성 정치와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반지성주의의 공격은 이런 현실 자체에 있어 민주주의적 다원성의 후퇴라고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저자의 미국 정치에 대한 분석은 다름 아닌 우리가 알고 있던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실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크리스 베일의 우려대로 SNS를 비롯한 인터넷 정치를 포함한 극단주의에 따른 중도와 온건주의의 퇴출은 앞으로 미국 정치가 건전성을 답보할 수 없는 주된 이유일 겁니다. 다만, 서두에서 저자가 밝히는 이 양극화에 따라 소위 중도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그저 온건한 중도가 아니라 이들 다수는 아직도 정확히 정치적으로 분류되지 않은 상황도 존재한다고 인용을 통해 분석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부분도 꽤 설득력이 있어 보였는데요. 본인을 중도 온건이라고 여기는 시민들도 미디어나 주변에서 극단주의적 주장들에 노출된다면 그 자체로 정치적 불신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극단주의에 경도될 수 있다는 부분은 마찬가지로 우려스러운 측면입니다. 이 지점에서 확실한 것은 금권 정치에 따른 미국의 시스템적 왜곡과 더불어, 이러한 양극화 정치가 사실상 엘리트 정치인들에게 이익이 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미래에 있어 충분히 두려운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글 서두에 '부정적인 당파성'에 대해 짧게 언급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는 지지하는 당에 대한 긍정적 감정이 아니라 반대하는 당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에서 기인하는 당파적 행동을 뜻하는데요. 우리도 지난 대선에 이를 뼈저리게 경험했고, 지금도 자신들의 정책이나 건전한 주장들을 피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몸담고 있는 정당에 반하는 상대에 대한 근거 없는 증오와 냉소주의에 기반해 사실상 기존 정치를 추락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실로 정치 전반에 있어 매우 불행한 일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글을 통해, 현재 미국 정치가 인종과 종교에 따라 극명하게 분열되어 있다는 논점은 지극히 수긍할 만한 부분이었습니다.

결정적으로, 대학 교육을 받지 못한 백인 유권자들은 트럼프 쪽으로 급격히 기울었고, 주요 주州들에서 그들이 과잉 대표되며 트럼프를 당선시켰다.

만약 당신이 흑인이고 경찰의 잔혹성을 걱정한다면, 그것은 정체성 정치다. 만약 당신이 여성이고 남성과 여성의 임금격차에 대해 걱정한다면, 그것도 정체성 정치다.

기관과 정치인들이 점점 양극화 함에 따라, 대중은 더욱 양극화하는 방식으로 순환이 이루어진다.

민주당과 공화당은 선거 때마다 건강보험에 대한 의견 차이를 강조하는 광고에 수십억 달러를 지출하는데, 이 논쟁이 지지자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대중이 상대방에게 등을 돌리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반면 오바마케어는 매사추세츠주에서 밋 롬니가 실시했던 개혁을 본떠서 만들어진 것이었고, 공화주의적 아이디어들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 또한 완벽하게 말이 된다. 만약 당신이 정부가 사회 프로그램에 너무 많은 돈을 쓰고, 불법 이민자들에게 너무 관대하고, 급진적인 환경론자들에게 너무 휘둘린다고 믿는 공화당원이라면, 실제로 민주당은 당신에게 더 무서운 존재가 되었다.

1946년 재선을 위해 선거운동을 하던 민주당 상원의원 시어도어 빌보는 소름돋을 정도로 직설적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나 나나 깜둥이가 투표하지 못하도록 하는 제일 좋은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선거 전날 밤에 투표를 하는 거죠. 그 이상은 말씀드릴 필요가 없겠습니다. 혈기 왕성한 사람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겁니다."

여기서 질문할 것은 미국의 나머지 지역이, 다시 말해 불완전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자유민주주의 체제하에서 운영되는 나라의 나머지 지역이 왜 남부가 미국의 정치적 가치를 그런 식으로 조롱하도록 내버려두었는가 하는 것이다.

2008년 오바마가 당선되었을 때, 미국은 더 이상 인종에 얽매이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백인의 57%가 "백인에 대한 차별은 오늘날 흑인과 다른 소수자에 대한 차별만큼 큰 문제"라는 점에 동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르디나는 백인 인구의 약 30~40%가 강한 인종적 연대감을 느끼지만, 대부분은 인종적 적대감 없이 연대감을 느낀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러한 당 엘리트들의 지지 속에서 트럼프가 공화당 성향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어낸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트럼프를 지지하는 공화당원이든, 크루즈를 지지하는 공화당원이든, 라이언을 지지하는 공화당원이든,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하는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든, 선택은 분명했다. 트럼프에게 투표하는 것이다.

정치적 갈등은 정책에 관한 것만이 아니며, 권력에 관한 것만도 아니다. 그것은 집단 지위에 관한 것이다.

전적으로 보수적인 뉴스 출처들을 중심으로 구축된, 공화당의 신뢰를 받는 정보 생태계는 이와 유사한 다양성이 없으며, 심지어 이들 중 다수는 선전,홍보 역할을 수행한다.

현재 미국의 양극화는 시민권 시대에 그 뿌리를 두고 있고, 인종 간 평등을 수용한 민주당, 백인들의 반발을 수습하고자 한 공화당에 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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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3-03-01 22: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치적 양극화가 전세계적인 현상이어서 더 걱정이 됩니다. 복합적인 원인이 있겠지만
미국에서는 특히 자본주의와 인종주의가 혼합되어 상황을 악화시킨다고 느낍니다. 끊임없는 총기관련 사건들과 총기규제를 제대로 할 수 없는 현실적인 모순은 거기 기름을 붓고 있는 것 같아요.

베터라이프 2023-03-01 22:53   좋아요 1 | URL
신자유주의가 강화되면서 사실 정치가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한게 사실입니다. 그런 연유로 정치 불신이 심화되었는데, 여기에 경제적 불황에 따라 양극화는 또 심각한 수준이 되었죠. 그리고 미국 헌법에 보장된 권리가 전반적인 민주주의 체제보다 더 우선시 되는 게 아닌가 생각해 보기도 하는데요. 이게 약간 궤변일수도 있지만 총기 소유에 대한 권리가 시민 자유라는 맥락에서 사회적 안전에 대한 요구를 더 무력화 시키고 있는 게 아닌가 추측해 봅니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우리 뿐만 전세계 민주주의의 바로미터라 정말 우려스러운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미국의 인종주의가 이 정도로 심각할 줄은 몰랐습니다.
 
소셜 미디어 프리즘
크리스 베일 지음, 서미나 옮김 / 상상스퀘어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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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저자인 크리스토퍼 앤드류 베일은 하버드대 사회학과 출신으로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의 사회학과 조교수를 거쳐 현재 노스캐롤라이나주 더럼에 소재한 듀크대 사회학 및 공공 정책 데이터 과학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현재 떠오르고 있는 컴퓨팅 사회 과학 분야의 선구자로 미디어 데이터와 봇과 같은 최신 기술을 사용하여 사회 심리학 및 극단주의와 정치적 양극화에 대한 근본적인 연구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 책은 원제, "Breaking The Social Media Prism"으로 지난 2021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3년 2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베일의 이 논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간단히 요약해보면,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하는 반향실 효과와 그에 따른 오늘날 극단주의 정치"에 대한 비판적 분석인데요. 사실 개인적인 의문이기도 합니다만 저자의 희망대로 많은 개인들의 삶에 깊게 파고든 페이스 북과 같은 SNS들이 작금의 극단주의의 베드라는 오명을 불식시키고, 보다 현실 정치에 기여를 할 수 있을지 매우 궁금합니다. 글의 도입부인 1장과 2장의 반향실 효과에 대한 이 연구자의 실험은 오늘날 SNS가 어떻게 극단주의자들의 요람이 되었는지 아주 명확히 보여주는 일례라고 생각하는데요. 모든 개인은 자신의 이성에 따라 각자가 정치를 포함한 모든 사회적 현상에 대한 판단을 자유롭게 할 권리가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을 근본적인 양심의 존재 의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각각의 양심이 위르겐 하버마스로부터 기인한 귀족 사회의 '살롱 대화'가 공론장의 단초가 되었듯, 마찬가지로 현대 민주주의에서도 시민들 간의 활발한 정치적 토론은 체제의 건전성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 되었습니다.

이 주제와 관련해, 저 개인적으로는 과거 히틀러에게 상당한 영감을 안겨 준, 사실상 민주주의를 어리석은 정치로 깎아 내린 '우둔한 대중'에 대한 대중심리학적 이론 전반을 앵무새처럼 밝히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현재의 많은 시민들이 이렇게 인터넷 기반의 기술이 과거보다 월등히 발전한 시대에서 각각의 올바른 정치적 사고를 근본적으로 방해하는 요소들에 더 많이 노출되어 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점은 '반향실 효과'를 통한 저자의 연구에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미 2장에서, "오래전부터 사회과학자들은 사람들이 보통 자신의 태도나 행동을 설명할 때 전후 인과의 오류를 범하고 부정확하게 합리하화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진술 자체는 아마도 인간은 누구나 비이성적인 측면을 갖고 있다는 전제와도 맞닿아 있는 듯 여겨집니다. 더욱이 리처드 J. 번스타인은 철학적인 접근에서 인간이 종래에 견지하고 있던 주의나 학설들이 나중에 그것이 오류로 밝혀진다면 각각의 개인은 이를 복기하여 바로잡을 수 있어야 한다고 언급했습니다. 어쩌면 번스타인의 주장처럼 그것이 가능한 일반 시민은 아마도 일부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4장에서 저자가 풀어내는 '비이성적인 대중'에 대한 주된 분석이 현재 우리의 한계를 명백하게 드러내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뿐만 아니라 현재의 이 시대는 시민들이 오랜 시간을 기울여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을 하기도 어려운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일관되게 주지되고 있는 이 극단주의를 설명하기 위해, 미국 민주당과 공화당을 지지하는 시민들의 사례들을 다수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민주당과 공화당 양 당의 정치를 단순히 극단으로 놓고 받아들여야 하는지는 개인적으로 약간 의문이 들기도 하는데요. 또한 미국에 '극단주의적 좌파'가 과연 존재하는지도 매우 의구심이 듭니다. 다만,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의 등장으로 기본적으로 우리가 인지하고 있던 최소한의 정치적 진정성이 고작 한 사람으로 인해 건전성을 답보하기가 어려워졌고, 이런 일종의 반동 정치를 오로지 권력만을 위해 극우화 된 공화당이 무분별하게 받아들인 결과를 낳았습니다. 물론 민주당과 공화당 양당을 지지하는 각각의 시민들이 정당의 기본적인 정책이나 정치적 의견 등과 관련해 자유롭게 토론을 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권리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5장에서 이미 이론과 다른 현실에서의 왜곡을 비판적으로 설명한 '극단주의라는 광신적 종교 집단'은 양 당의 극단주의자들이 정치적 적수를 공격하는 계획을 짜면서 유대감을 강화하는 한편, 현재의 극단주의가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 반증하는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소셜미디어를 통한 이들 극단주의자들의 왜곡된 프리즘은 "자기 정당의 극단주의는 정상으로 여기고 상대 정당의 극단주의는 과장하는 식"으로 작동하기에 이릅니다. 이러한 SNS상에서의 옹졸하고 비이성적인 언행과 행위들은 결국 무대에서 중도와 온건주의자들을 전부 퇴출시키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카를 슈미트는 자유주의가 소위 만연된 사회에 대해 일종의 허무감을 섞어 경멸한 인물입니다. 특히나 이를 위해 그가 어떻게 유대인 교수들을 강단에서 쫓아 냈는지 역사는 기록하고 있는데요. 트럼프의 참모라고 불렸던 스티브 배넌이 트럼프의 지지자들에게 대화가 아닌 총을 들라고 목소리를 높였던 것처럼 미국 내의 극우 포퓰리즘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슈미트 흉내를 내기도 했습니다. 결국 트럼프의 등장은 미국 정치를 혼돈으로 이끌고 이러한 과정에서 많은 정치적으로 온건한 시민들을 사실상 구축하게 되었는데요. 미국 역시 오래전부터 정치 불신이 심각했지만 정치적 분별력을 잃은 많은 시민들이 극단주의에 경도 되어 지금까지도 그 영향을 받고 있는 중이기도 합니다. 더욱이 시민들 사이에서 극우주의자들이 자연스레 도태가 되지 않고, SNS를 기반으로 나날이 저변을 확대하고 있으니 이것을 곧이곧대로 '어리석은 정치'로 시민 사회가 함께 산화 되어 버리는 '붕괴 현상'으로 더 이상 나아가지 않기 위해서는 반쯤 농담처럼 마크 저커버그가 하루 빨리 정신을 차려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끝으로 저자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명확하게 보기 위해서는 자신을 프리즘에 비춰 볼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는 아무리 온라인 상이라고 할지라도 내 언행과 행동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과 다름 없는데요. 문제는 8장에서 이미 저자가 꼬집고 있듯이, "현재의 소셜 미디어 플랫폼에는 민주당과 공화당 지지자들이 정체성에 관한 문제들을 건설적인 방법으로 논의할 만한 환경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우리가 지난 2차 대전에서 극단주의가 몰고 온 참혹한 전체주의의 교훈을 벌써 망각했다는 것과 같습니다. 키케로가 이미 비슷하게 언급한 '이성적이고 명민한 시민들'이 정치적 토론에 대한 무엇보다 개방적인 태도를 지녀야 하지만 현실은 다수의 온건한 시민들을 더욱 현실 정치에서 쫓아내고 있는 실정입니다. 극단주의자들이 더 이상 활개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이념으로 대립하고 있는 사람들이 서로 상대방을 최소한 대화 상대로 여기는 것으로 시작해야 하지만 극단적인 '대결주의'가 주류 정치의 핵심 사항이 되고 말았습니다. 더욱이 극우와 다름없는 인종주의와 종교적 다양성을 잃어버린 기독교 근본주의가 점차 미국 정치 무대에 우세한 세를 과시하면서 무엇보다 미국 민주주의에 위기가 도래했다고 볼 수 있을 텐데요. 노엄 촘스키는 이에 대해 그나마 미국 사회가 상당히 열려 있는 사회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희망을 엿볼 수 있다고 언급했지만 저자의 제언대로 미국 사회에 영향력을 갖고 있는 거대 인터넷 기업들이 현재의 정치를 위해 전혀 시스템을 개선시키고자 하는 최소한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어리석은 대중들의 거대한 중우 정치'를 목도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처럼 극단주의자들을 손 끝으로 부리는 선동가들만 남지 않은 정치란 우리에게 과연 무엇이 될지 두려울 따름입니다.



-7장에서 저자가 재런 러니어를 직접 대면한 장면이 등장하는데요. 러니어도 역시 작금의 소셜미디어가 양극화를 더 강화한다고 비판했습니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택할 수 있기 때문에 근시안적 사고방식을 일으키는 반향실에 갇힌다고들 말한다. 우리 편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노출될수록, 우리는 우리의 신념이 공정하고 합리적이고 신뢰할 만하다고 굳게 믿게 된다.

페이스북, 구글을 비롯한 거대 기업은 유저의 구미에 마즌ㄴ 정보를 더욱 많이 노출함으로써, 기존 가치관과 일치하는 정보를 찾는 유저의 본성을 부추긴다.

소셜 미디어 프리즘은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강한 극단주의자들을 부추기는 동시에 정치 논쟁을 해 봤자 득이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중도주의자의 입을 다물린다.

오래전부터 사회과학자들은 사람들이 보통 자신의 태도나 행동을 설명할 때 전후 인과의 오류를 범하고 부정확하게 합리화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성적 사고가 나은 사회를 낯는다는 믿음은 유구하다. 개인이 다양한 사실을 바탕으로 자신의 의견을 정립할 때 사회가 순조롭게 돌아간다는 이 생각은 민주주의의 기반이 되었다.

페이스 북의 CEO 마크 저커버그는 페이스북 유저들이 실제로 가짜 뉴스를 분별한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가짜 뉴스라는 용어 자체가 정치 논쟁의 불씨인데도 말이다.

유능하지 못하고 부정직하고 비도덕적인 타인과 우리 편의 경계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과정에서 자아 존중감은 자주 얻어진다.

우리가 페이스북의 플랫폼을 조금 수정함으로써 공화당과 민주당 지지자의 무례한 논쟁을 7.5 퍼센트 줄이는 대신 광고를 클릭하는 횟수를 5퍼센트 줄이는 방법을 안다고 가정하자. 과연 기업가들과 이사회가 이 방법에 찬성할까?

소셜 미디어에서 정치적 논쟁을 벌이는 사람은 극단적인 관점을 지닌 경우가 많으므로 그들에게 노출될수록 우리는 그들이 온건한 다수라고 착각하기 쉬워진다.

5장에서 설명한 극단주의자들은 광신교 집단 같은 공동체에서 상대방을 도발함으로써 지위를 얻었기 때문에 대화가 역효과를 낳을지도 모른다.

플랫폼에서 얻는 지위가 고결한 목적과 연결된 소셜 미디어를 상상해 보자. 정치적 적수를 교묘하게 쓰러뜨려서 지위를 얻는 공간이 아니라, 양당 지지자 모두에게 호소력 있는 콘텐치를 만들어서 지위를 얻는 플랫폼을 상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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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러나다 - 촘스키, 다극세계의 길목에서 미국의 실패한 전쟁을 돌아보다
놈 촘스키.비자이 프라샤드 지음, 유강은 옮김 / 시대의창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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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미국의 양심이라고 불리는 노엄 촘스키는 언어학자, 사회철학자, 언어학자이면서 전 세계에서 몇 안 되는 공공 지식인이기도 합니다. 또한 그는 언어학을 비롯 전쟁과 정치와 같은 주제로 대략 150권 이상의 책을 저술했는데요. 그의 논저 대부분이 과거 베트남 전쟁 부터 미국 정부가 벌인 불법적인 전쟁을 포함하여, 주권 국가들에 대한 정치 개입까지 불사했던 역사, 기업 자본주의의 실체, 미국의 이중적인 자유주의에 관한 폭로 등을 담고 있습니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전환점이 되었던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전 운동은 스스로의 양심에 위배되는 일은 절대 지나칠 수 없다는 확신을 갖게 한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가 평생에 걸쳐 일관되게 해왔던 일들인 네오콘을 비롯한 신자유주의자들, 기득권 세력들에게 그를 눈엣 가시처럼 여기게 만든 원인이 되었습니다. 사실 저 개인적으로도 지식인의 책무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요즘 자주 고민해 보게 되는데요. 여기서 한 가지 확실한 부분은 제가 촘스키를 통해, 미국이 니카라과와 파나마, 그레나다에 벌인 추악한 짓거리를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저의 사소한 경험은 정부가 옳지 못한 일을 벌이거나 국민을 상대로 거짓을 유포할 때, 누구보다 지식인들이 진실을 알리기 위해 발 벗고 나서야 한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인데요. 사실 많은 지식인 계층에서 자신들의 이익적 관점이 진실과 양심보다도 우선시 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러한 자유주의적 지식인들이 범한 사회에 대한 배신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모쪼록 노엄 촘스키가 전세계 시민들을 위해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를 열심히 하면서 보다 오래 우리 곁에 있어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 책은 원제, "Iraq, Libya, Afghanista, and the Fragility of U.S. Power"로 2022년에 출간되었고, 국내 번역은 2023년 2월에 이뤄졌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한가지만 언급하고 싶은데요. 많은 분들도 아시겠지만 저는 구입하는 모든 책을 알라딘을 통해 구매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1만 5천원 이하 도서의 무료배송이 사라지면서 진짜 오랜만에 이 책은 다른 온라인 서점에서 구매를 하게 되었습니다. 배송료와 관련해 과거와 달리 유료 배송으로 진행할 수밖에 없는 알라딘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다만, 제가 한 달에 구입하는 도서가 그저 1~2권이 아닌 관계로 앞으로 구매시 배송비 부담이 있을 것 같아, '구매자 서평'에 얼마간 제 이름이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글에서 촘스키와 함께 대담을 진행한 비제이 프라샤드는 인도 콜카타 출신의 역사학자이자 평론가입니다. 특히 그도 역시 미국의 전세계 헤게모니에 대한 열망에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책의 번역이 잘 된 부분도 있겠지만 프라샤드의 매끄러운 진행은 미국 정부의 전쟁 개입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 제기에 있어 촘스키에게서 자연스런 대답이 나올 수 있도록 노력한 부분은 충분히 인상적었습니다. 이 책은 그동안 나왔던 촘스키의 일관된 비판적 논증 가운데 하나로 특히, 미국이 벌인 정의롭지 못한 전쟁 개입에 대해 그것의 진실을 알리고자 노력한 논저라고 볼 수 있었습니다. 이미 '지식인의 책무'라는 촘스키의 글에서 나온 내용이지만, "지식인은 정부의 거짓말을 폭로하고, 정부가 내세우는 대의와 동기, 그리고 종종 감추는 의도에 따른 정부의 행동을 분석하는 위치에 있다"는 지식인의 의무에 대해 먼저 언급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하겠습니다.

한창 미국이 베트남에 개입해 전쟁중이었던 당시에 "린든 존슨 대통령은 미국이 철군을 고려해야 한다는 전쟁 내각의 권고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언급됩니다. 1964년 8월 통킹만 사건으로 촉발된 미국의 베트남 전쟁은 모두가 아시다시피 미군의 굴욕적인 철군으로 자신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베트남화'에 이르게 됩니다. 제가 여기서 충격적으로 느낀 부분은 미국이 이미 "북베트남 폭격을 지휘하기 위해 라오스 북부에 전진 기지를 두고 있었다"는 진술이었습니다. 미국이 2차대전 당시 유럽에 쏟아부은 폭탄보다 3배 많은 폭탄을 베트남에 떨어뜨렸다는 사실은 이 전쟁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뒤이어 나올 이라크 전쟁에서 이런 '폭탄 투하'에 의한 민간인 피해가 전혀 집계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좀 더 노골적으로 언급하자면 민간인 학살을 초래한 소위 '부수적 피해'에 대해 여기에 책임 있는 자들에 대한 '미군판 뉘른베르크 군사재판'이 필요하다는 부분에서 일정 부분 공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현재 미국의 국제적인 영향력에 비추어 봤을 때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기란 어려울 것입니다.

뒤이어 조지 H. W. 부시 행정부에 의해 진행된 제1차 이라크 전쟁과 관련해, 초기 전쟁 상황에서 마찬가지로 폭격에 의해 이라크 민간인들이 거의 수십만이나 희생을 당했다고 글에서 언급됩니다. 저는 다른 어떤 것보다 이 이라크 전쟁이 '군사적 케인스주의'의 절대적인 전형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알카에다와 마찬가지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워싱턴의 비호를 가장 많이 받은 중동 정치인으로, 이란을 직접적으로 손보기 어려웠던 미국이 당시 후세인의 이라크를 통해 이란에 대한 전쟁을 획책했던 것인데요. CIA가 미국 본토에서 벌어진 9.11 테러에 대해 일종의 '역류'라고 이해했던 것처럼 후에 브레진스키의 함정이라 불리는 소련을 고사시키기 위한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무자헤딘이 당시 펜타곤과 CIA에 의해 군사 집단으로 양성된 점은 이들이 나중에 '알카에다'의 전신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역시 앞선 맥락으로 미국이 키운 인물로, 워싱턴의 신호를 오판해 쿠웨이트를 침공한 사담이 몇 차례의 외교적 회신를 중심으로 끝내 '무조건 철수'를 워싱턴에 제의했지만 딕 체니와 도널드 럼스펠드가 "이라크를 손 봐주어야겠다"고 결심했을 때부터 후세인에게는 전혀 퇴로가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물론 후세인이 과거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이란의 민간인들에게 독가스를 살포한 중대한 전쟁 범죄를 일삼은 전력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촘스키는 이 독가스의 출처가 서구 국가들이라고 못 박고 있었는데요. 사실상 2번에 걸친 이라크 전쟁의 실체는 중동 지역에서의 미국의 석유 패권 유지와 함께, 미국의 월등한 군사력을 아주 확실하고 단호하게 전세계에 보여줄 수 있는 무대였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워싱턴을 막후에서 쥐고 흔드는 네오콘이 내심 전세계에 주장하고 싶은 내용과 다름없는 럼스펠드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미국의 예외주의가 무엇인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항복을 교섭하지 않는다. 그냥 우리의 힘을 보여주고, 모든 이들을 겁먹게 만들고, 더 많은 목표를 이루고자 한다"는 발언도 다소 충격적이지만, 9.11 이후 미국 정부가 지목하여 대대적으로 이뤄진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미군 사령관에게 저쪽 마을에 탈레반을 지지하는 놈이 있다고 귀띔만 하면 미국이 보낸 특수부대가 한밤중에 주민들의 집에 쳐들어가서 모욕을 주고는 남자들을 데려와서 고문실로 보내고, 멀리 쿠바 관타나모까지 보낼 것"이라는 폭로도 왜 미군에게 '뉘른베르크 재판'이 필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미군의 개입은 무엇보다 해당 지역의 '민주주의적 재건'을 위해서라고 그것의 명분을 미국의 관료들이 밝히기도 했는데요. 하지만 촘스키는 "다른 나라의 자유란 그 나라의 정치 지도부가 미국의 전반적인 의제를 충실히 따를 때에만 제대로 작동하는 것 같다"고 일침합니다. 이는 영국과 프랑스가 예를 들어 이라크 전쟁과 관련한 미국의 전쟁을 반대하면서도 미국이 주도하는 제재에 있어서 만큼은 충실히 따르고 있다는 점과 다소 일맥상통합니다. 일전에 브루스 커밍스는 아시아 지역 내에 국제 회의에 미국 국무부 장관이 양쪽에 한국과 일본의 외무 장관을 대동하고 나타나 한국과 일본이 어느 정도까지 미국에게 종속되어 있는지 잘 드러낸다고 밝히기도 했는데요. 이와는 약간 상이한 내용이겠지만 "미국이 뒤를 봐주는 세력이 이웃 나라를 침공하는 것이 별로 대단치 않는 일이라고 세계를 설득하는 것"의 남모를 섬뜩함이 느껴졌습니다. 저는 저 대목에서 아마 거의 그럴 일은 없겠지만, 미국의 영향력에서 우리가 벗어나려고 한다면 아마도 미국은 일본을 통해 우리를 손 보려고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이처럼 촘스키는 대대적인 전쟁 수행을 통한 미국의 패권 추구가 일종의 '대부'식의 폭력적인 정책이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소위 마피아 식의 미국이 각 국가들에게 명령을 하는 식으로 이뤄지는 과거 베스트팔렌 체제 이후에 사실상 전세계에 정착된 '주권 존중'에 대한 관념을 완전히 무시하는 체계입니다. 니카라과의 콘트라 반군을 지원해, 민주주의 정권을 붕괴시킨 사건은 이러한 체제의 변용이라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콜롬비아에는 막대한 경제적 지원을 감행하고, 남아메리카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노골적으로 반대한 베네수엘라의 좌파 정권에는 철퇴를 내리는 그런 마피아 식의 외교는 단순한 희화화라고 할지언정 그것의 설득력은 충분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 미소 간의 냉전이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방지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면 마찬가지로 미국의 영향력 역시 소련에 의해 제한을 받은 것인데요. 이런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주의적 체제에 반대하는 중국과 이란의 존재는 앞으로 촘스키의 예언대로 다극 체제의 시발점이 될 지는 좀 더 두고 볼 일입니다. 물론 저 개인적으로는 중국이 주도하는 세계 체제에 대해서는 실제로 반대하는 편인데요. 무엇보다 민주주의와 권위주의가 서로 상극인 것을 감안한다면 중국 주도의 국제 체제는 우리에게 지옥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후반부에 촘스키가 현재 중국의 입장에 대해 다소 온건한 입장으로 글을 쓰고 있는 점도 어느 정도는 동의하기 힘들었습니다. 화웨이를 비롯한 사실상 중국 정부에 의한 스파이 활동에 대해 이것을 제대로 언급하지 않은 부분은 조금 의아하기도 했는데요. 미국과 중국 모두 전세계를 절멸에 이르게 할 수 있는 핵보유 국가들로 이들의 직접적인 군사적 대결은 아마도 과거 미소 간의 냉전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일 겁니다. 더욱이 과거 냉전하에서는 거의 성공적으로 소련과 중국을 갈라 놓았다면 글에서 촘스키가 비관적으로 예상하는 것처럼 어쩌면 미국은 러시아와 중국을 동시에 상대해야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금도 워싱턴에서 암약하고 있는 네오콘들이 러시아와 중국 모두와 싸우기를 원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럼에도 핵무기에 의한 군사적 우위를 이들 핵보유국들이 전혀 철회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 우리의 미래가 아주 좋지 만은 않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촘스키는 만약 이란이 자국에 잠재적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암살하기 위해 국제적인 테러 작전을 실행한다고 했을 때, 미국 정부는 아무런 화답도 없이, 그냥 이란을 핵무기로 쓸어버릴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이점이 바로 과거와 현재에 이르기까지 미국이 주도한 불법적인 개입의 진면목이라고 여겨집니다.


-또한 촘스키는 조지 W. 부시를 가리켜 '미치광이'라고 언급하고 있었습니다. 일전에 여러 평론에서 조지 W. 부시가 당시 네오콘들에 의해 거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는 평가가 있었는데 진실이 무엇인지는 당최 알 수가 없습니다. 



탈레반은 이미 1998년에 호스트 Khost의 표적을 겨냥한 미국의 소규모 공격을 경험했기 때문에 미군의 어마어마한 힘을 익히 알았다.

미국은 거대한 힘의 원천 - 금융,군사,외교,문화 - 을 보유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오랫동안 이런 힘을 휘두를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상대적 약화 때문에 중국이 중요한 세계적 강대국으로 등장할 여지가 생겼다.

"지식인은 정부의 거짓말을 폭로하고, 정부가 내세우는 대의와 동기, 그리고 종종 감추는 의도에 따른 정부의 행동을 분석하는 위치에 있다."

선생님은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이런저런 불의를 바로잡기 위한다며 해외 군사 개입을 옹호하지 않는다"고 썼는데, 사실 많은 자유주의자들이 불의를 바로잡는다는 근거로 전쟁을 지지하고 나섰습니다.

이란이 자국에 잠재적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암살하기 위해 국제적인 테러 작전을 실행한다고 상상해 봅시다. 미국 정부와 이스라엘 정부의 모든 주요 인사와 우연히 그 주변에 서 있던 모든 사람이 이 작전의 부수적 피해자로 간주될 겁니다. 이란이 그렇게 했다면, 미국이 뭐라고 할까요? 우선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냥 핵무기로 쓸어버릴 테니까요.

영국은 미국의 조치에 반대했지만, 쿠바에 대한 미국의 제재를 준수한 것처럼 이번에도 그대로 따랐지요. 유럽 나라들은 유엔에서 과감하게 미국에 반대표를 던질 수 있지만 미국의 제재를 준수합니다.

이런 목적에 펜타곤 시스템이 안성맞춤으로 여겨졌지요. 이 시스템은 국민에게 많은 비용 부담 (연구개발R&D)를 안기면서 과잉 생산에 보장된 시장을 제공해서 경영진의 결정을 유용하게 받쳐줍니다.

미국의 이데올로기에는 미국 예외주의라고 하는 개념이 있습니다. 미국은 자애롭다는 점에서 독보적이라는 개념이지요. 이 개념에는 두 가지 오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폭력과 야만으로 점철된 실제 역사적 기록이지요. 또 하나는 예외주의가 미국의 독특한 산물이라는 생각입니다.

역사상 강대국들은 대개 자국이 이례적으로 훌륭하다고 생각했고, 미국도 그런 점에서 예외는 아닙니다.

기본 구상은 미국이 완벽하게 장악하고 미국의 세계 설계에 방해가 되는 어떠한 주권 표명도 용인하지 않는 이른바 대권역 Grand Area이 있어야 한다는 거였습니다. 물론 미국은 어떤 경쟁자도 허용하지 않았지요.

우리는 설령 이라크가 아스파라거스를 생산하고 원유 생산 중심지가 남태평양에 있다 하더라도 미국은 어쨌든 민주주의를 안겨주기 위해 이라크를 침공했을 것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그게 언론과 학계를 가로질러 거의 한목소리로 말하는 공식적인 입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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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3-02-24 15: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베터님 잘 아시겠지만 지금처럼 일본이 정부차원에서 한혐을 부추기고 역사를 왜곡하는데에 미국의 영향이 크다고 생각해요. 얼마전 한 방송에서 731부대 주동자들이 대부분 처벌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전후 한 자리씩 차지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역시나 싶었습니다. 미국은 부시 부자의 악행도 그렇고 권력을 악용하는 경우가 너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 책도 일단 찜해두어야겠어요!!

책값도 계속 오르고 무료 배송 기준이 올라 가성비 좋던 독서도 자본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실감합니다.

베터라이프 2023-02-24 15:23   좋아요 1 | URL
이 지역 내에 중국의 대두가 아무래도 문제가 될 수밖에 없으니 꽤 오래전부터 워싱턴은 일본의 재무장을 거의 종용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여기에 일본의 평화 헌법이 걸림돌이었으나 이 문제는 다른 방법으로 해결된 셈이지요. 사실 731부대와 관련해서는 한가지 음모론을 알고 있는데요. 2차대전에서의 일본 패망 당시, 소련군이 만주에 있던 일본이 세운 기간 시설들을 전부 다 일일이 해체해서 소련으로 이송하고 있었는데, (이 점은 거의 팩트입니다) 731부대 고위 관련자들이 수많은 인체 실험 자료를 소련에 넘기지 않고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미국에 제공했다는 썰(?)이 있습니다. 물론 진위 여부는 확인하기 힘들지요 ^^;;

이번 우리 정부가 이 시점에서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물타기를 아주 잘해야 하는데 정말 걱정입니다. 일본이 이미 미국이 주도하는 쿼드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우리가 미국에게 일본 정도의 배려를 받을 수 있을지 이 점도 어려운 부분인데요. 중국 봉쇄를 위해 일본이 주도하는 소위 동맹 체제에 우리가 하위 그룹으로 참여하는 것은 앞으로 정말 큰 문제가 될 수 있겠습니다.

진짜 1만원 이상 무료 배송이 사라져서 정말 큰일이네요. 저는 가급적 구입 도서는 알라딘을 통해서 구매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1만5천 이상 무료배송으로 바뀌니 이게 정말 난감해졌습니다. 사비 들여 독서하는 독서인들에게는 이런 문제는 제법 예민해지거든요 ㅜㅜ 저는 또 밑줄과 메모 대마왕이라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볼 수도 없습니다. ㅠㅠ 하여튼 미미님도 좋은 하루 되시고 다가오는 주말 행복하게 맞이하세요 ^^



청아 2023-02-24 15:51   좋아요 1 | URL
아 제가 본 방송에서도 731부대 자료들이 미국으로 상당부분 넘어갔다고 나왔습니다.
그 때문에 부대 주요 직책들이 한 자리씩 차지할 수 있었겠죠. 메모 대마왕이시라니 베터님 풍부한 지식과 이해를 돕는 설명의 비결이 그거 였군요! ㅎㅎㅎ 불금과 주말 즐겁게 보내세요 ^^

베터라이프 2023-02-24 16:01   좋아요 1 | URL
약간 주객전도 같은데 좀 더 정확한 서평을 쓰고자 책에 메모와 중요 문장에 밑줄을 긋게 되었죠. 예전에는 책이 혹여 구겨질까봐 애지중지 신주단지 모시듯 읽었는데 이렇게 밑줄을 팍팍 그으면서 읽으니까 과거에 그런 행동이 정말 부질없게 느껴지네요 ^^;; 너무 과분한 칭찬을 해주셔서 부끄럽습니다. 아직도 서평을 엉망으로 쓰고 있어서 수많은 독서인들의 눈을 어지럽히는 것이 아닌가 매번 잠들 때 마다 걱정합니다 ㅠㅠ 미미님께도 해당되는 내용이지만 책 좋아하는 분들과 나누는 대화는 항상 즐겁습니다. 미미님도 즐건 하루 되시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