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의 탄생 - 일본, 그리고 조선이라는 경계 아이아 총서 106
권혁태.차승기 엮음 / 그린비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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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 그리고 조선이라는 경계'라는 의미심장한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일종의 논문 모음집으로 권혁태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와 차승기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HK교수의 편저로 이뤄진 논저입니다. 이 글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여러 논문들 가운데에서도 우리가 주목해봐야 할 관점은 일본의 전후가 일본인들에게 있어, 자신들의 패전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게 되는 원인들이 있었고, 특히 1945년 맥아더가 주도했던 GHQ의 소위 일본 통치 계획 가운데 일왕제(일본인들이야 자신들의 국왕에 대한 호칭이 대내외적으로도 천황이 맞다고 주장하겠지만 앞 글자인 '천天'자의 의미를 그저 종교적인 측면에서의 의미로 국한한다 하더라도 천황이 주도가 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은 한국에게 있어서는 마땅히 '일왕'이라 칭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를 온존시키는 소위 '국체國體'의 문제와 그에 따른 당시 일본 지식인들의 식민지 조선에 대한 제한적인 인식은 아마도 제국주의 침략이라고 볼 수 있는 태평양 전쟁과 미국에 의해 패전에 이른 1945년 8월 15일을 완벽하게 분리시키는 결과 초래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따라서 이 논저는 왜 일본인들의 역사에서 식민지 조선이 삭제되었고, 오히려 자신들이 사실상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게 되었는지를 사상사적인 측면과 역사 및 철학적인 부분에서 이를 명백히 고찰해보고자 하는 기획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책의 서지 정보는 2013년 4월, 그린비 출판사에 의해 국내에 출간되었습니다.

일전에 시라이 사토시는 현재 학계를 비롯 일본 국민 대다수가 과거 자신들이 일으킨 전쟁의 종결을 패전이라 지칭하지 않고 그 의미가 의심스러운 '종전終戰'이라는 단어로 전쟁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고 분석한 바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전후' 사건을 바라보는 많은 일본 지식인들에게 결여된 것이 있는데 ;일왕의 전쟁 책임'에 대한 인식입니다. 이 책에 이름을 올린 일본 도쿄외국어대학 종합국제학연구원 교수인 나카노 도시오는 맥아더가 일왕제를 존치시킨 것은 미군에 의한 일본 통치에 있어 전반적인 협력과 순조로운 권력 이양을 원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는데요. 1945년 8월 이후에 소련의 위협이 얼마나 가시화 되었는지는 불확실합니다만 미국 입장에서 일본의 빠른 정치적 안정화와 그에 따른 일본의 정상 국가화가 무엇보다 중요했던 일임은 거의 분명해 보입니다. 이후에 도쿄 전범 재판도 그렇고 일본의 전후 처리 과정이 그처럼 졸속으로 처리된 이유는 이처럼 명확한데요. 그래서 2차 대전의 전범국임에도 불구하고 정상 국가로 향하는 데 여러모로 큰 도움이 되었던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의 발발은 뭔가 역사의 아이러니처럼 느껴지기 까지 합니다.

근래 일본 내애서 사상적으로 재조명을 받고 있는 마루야마 마사오는 국민의 개별적 사상과 직업 등을 균질화 시키는 나치즘을 제국주의와 구별하여 비판하면서도 이상하게도 일본 제국주의에 있어 식민지 조선에 대한 문제를 아예 기억에서 소거 시킨 그의 역사적 태도는 어떻게 보면 현재 일본 내의 소위 '리버럴 지식인들'의 전후 인식과도 상당히 유사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 과거 일본 제국주의로 인한 여타 아시아 국가들의 막대한 피해와 이를 말도 안되는 이유로 합리화 시킨 야욕을 선선히 인정하는 인사들이 일본에서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은 매우 특이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좀 더 명확히 말하자면 지금 일본 내부의 극우적인 움직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유주의적 구분법인 소위 리버럴한 계층 역시 전후 역사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애매한 태도를 보이는 인사들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더욱이 빠르게 역사수정주의적 입장에 매몰되고 있는 일본 내부 인식이 대내외적인 정치 상황과 맞물려 더욱 심화되고 있는 것도 우려할 만한 일인데요. 이는 과거 일본 제국주의 시절에 경성제국대학 교수를 지낸 아베 요시시게의 조선 식민지 인식에 대한 태생적인 한계가 지금의 일본인들에게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보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황국신민화 혹은 내선일체를 통해 일본인들과 일왕의 통치하에 있는 조선인들이 서로 평등한 조건이라고 당시 제국 일본인들은 그렇게 여겼으나 실상은 조선인들 자체가 일본 제국주의에서 그저 이등 국민에 불과했던 것이 명백한 사실인데요. 여기서 수차례 인용되고 있는 그 '자유 의지'에 따라 적극적으로 일본 제국주의에 부역한 조선인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식민지 조선인들은 그저 착취와 지배의 대상이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더욱이 당시 조선에 있었던 대략 60만 이상의 '재조 일본인들'은 하나같이 조선인들에게 어느 정도 가혹했던 존재들이었으며, "실제로는 역사에 등장하는 조선 식민자의 삶의 방식은 놀랄 정도로 섬뜩하고 변호의 여지없이 사악하다. 서민에 이르기까지, 때로는 서민이 관헌 이상으로 강력한 국가주의자였다. 그들은 조선인에 대해 국가의 논리로 완전무장한 냉혹한 에고이스트였고, 거리낌 없는 편견을 가진 차별과 가해의 실행자였다."라고 이 책의 1장과 2장에서 재조 일본인들의 이중적인 행태를 이처럼 증언하고 있는데요. 그런 측면에서 마루야마 마사오가 죽을 때까지 일본 제국주의를 분석하는 걸 거부했다는 일화는 참으로 우리에게는 의미심장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메이지 유신 이전에는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상당히 '폐쇄 국가'였던 일본은 미국에 의한 강제 개항 이후, 아시아 국가로는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근대화에 성공하게 됩니다. 지금도 일본인들은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는 차이가 나는 이 특별한 역사적 성취에 대해 지금도 큰 자긍심을 갖고 있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당시 근대 일본 지식인들이 떠오르는 국수적 내셔널리즘과 팽창주의를 불가피한 것으로 취급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우면서 역사의 후퇴라고 여겨집니다. 동아시아의 유교 문화권에서 중국과 조선의 영향을 받았던 일개 왕조내지는 봉건 국가가 30년도 채 안되는 시기에 자신들을 서양인의 그것으로 동일시한 점은 관념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그래서 일본의 내셔널리즘 자체를 아무리 특수한 국가주의라고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그것이 주변의 전근대적인 왕조들을 정복할 명분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볼 수 있는데요. 저들이 서양의 제국주의를 경멸하면서도 스스로 탈아적인 제국주의 국가 된 것은 그것대로 아이러니한 사건이라고 생각됩니다. 즉, 이것은 조선과 청나라에 행했던 자신들의 명백한 침략을 지금으로선 '소각'과 '단절'로 치부해버리는 국민성을 과연 어떻게 분석해야 될지 의구심이 들 정도입니다. 이는 앞서 언급한 대로 일본 내의 대표적 자유주의적 사상가로 알려져 있는 마루야마 마사오의 한계와도 일치하며, 일본이라는 국가의 정체가 자신들이 일으킨 침략의 역사에 진정으로 맞닥뜨려 보고자 하는 용기조차 가질 수 없을 정도로 사회 전반과 그 인식이 반쪽 자리 국가와 국민들로로 규정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이러한 비정상적 관념들은 많은 일본인들이 '민주주의'에 갖는 뿌리 깊은 인식의 한계와도 연계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추측해 봅니다.여기에 일본인들이 구축한 민주주의 자체가 애초에 미국에서 도입된 것으로 해석되고, 더 나아가 요시다 독트린과 같은 이중적인 정치적 타협이 공개적으로 도출된 것은 어떻게 보면 과거 민족주주의에 대한 그들 스스로의 이중적인 인식과 다름이 없는 것이 아닌가 판단해 봅니다.


끝으로 조선인들에 대한 강제 징용과 그것에 대한 한국, 일본 양국의 인식 차이는 물론이거니와, 소위 조선 역사를 오랫동안 연구한 일본 연구자들 중에도 어떻게 보면 인종차별적인 인식론에 근거해, 과거 조선을 해석하는 일도 거리낌 없이 나타나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한중일 간에 역사학자들이 모여 동아시아 역사를 객관적으로 분석해 보려는 노력이나 더욱이 일본 제국주의 시기의 일본의 침탈과 침략에 대해 지금까지 아무런 소기의 성과가 없는 것은 일본인들의 제대로 된 역사 인식이 부재하기 때문일 텐데요. 역사 문제를 국가의 정체와 끊임없이 연결시키는 저들의 행태를 비판하는 것조차 '반일 민족주의'로 몰아가는 인사들이 한국 내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는 점도 분명히 문제 해결을 위한 큰 걸림돌이기도 합니다. 일전에 아베 총리가 고노 담화를 무력화시키려고 했을 때, 당시 오바마 행정부가 일본에 압력을 넣은 것은 익히 잘 알려져 있기도 한데요. 어떻게 보면 우리의 위안부 문제나 강제 징용 문제에 있어 일본 정부 자체거 '식민지 조선'이라는 역사적 지점을 아예 삭제하고 방기하고 있는데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 국가체제가 표방하는 ‘민주주의‘는 헌법 제1조가 가리키는 것처럼 ‘천황제‘라는 군주제를 여전히 떠받들고 있다. 그런데 이 나라는 과거에 천황의 이름으로 제국주의를 발동해 침략전쟁을 행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말한 사실로 비추어 볼 때, 패전 직후의 상황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구체제를 유지하려는 힘, 변혁을 자신에 유리하게 왜곡해 돌리려는 힘, 혹은 변혁을 회피하고 이를 이용하려는 힘이 여기저기 현실에 강하게 작동되고 있었다.

전쟁이라는 악의 근원이 "거칠고 흉포한 군인"에 있고 힘없는 자들은 그 폭력에 대항할 수 없었다는 것이 되면, 많은 일본인들은 피해자의 얼굴을 하면서 전후에 등장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모두가 피해자였다면 폭력에 굴복해 전쟁에 협력한 과거가 있어도 특별히 부끄러운 일이 아니게 된다.

식민지 제국으로서의 일본의 식민주의가 일본인들을 오히려 그 저변에서 포섭해 침략전쟁과 식민지 경영에 동원해 나간 방법은 그대로 식민주의에 대한 비판을 봉인하는 장치와 연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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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일부 혹자들은 신자유주의가 실체가 없는 그저 상상 속의 산물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저명한 경제학자인 데이빗 코츠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이라는 용어를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1980년대 이후 지속된 자본주의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기법은 거의 허구라 볼 수는 없습니다.


신자유주의에 대해 아주 간단히 말씀 드리자면 1920년대 세계 대공황 이후,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개입과 그로 인한 자본가들과 기업 집단의 이익이 사회 부조와 시민들의 사회경제적 보호라는 선점된 가치에 밀려 그들의 표현대로 라면 나날이 힘들어져 가고 있는 상황에서 일종의 사회경제적 돌파구로 시작됩니다. 물론 정부 역시 나날이 늘어가는 사회 복지 지출에 문제 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글쎄요. 당시 정부들이 시민들의 사회적 안전 장치 요구를 처음부터 다시 검토해 볼 생각을 명백하게 갖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대처와 당시 영국 기업 경영자들간의 대화와 소통을 고려해 봤을 때, 정부가 어느 정도는 기업의 요구에 영합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시장과 사회를 통틀어 이 신자유주의적 기법의 초기 진행에 대한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분명 존재하기 때문에 학자들마다 신자유주의에 대해 다소 상이한 관점을 보이는 것도 어느 정도 사실이라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서평을 남긴 강준만 교수의 책에서 강교수는 "미국과 한국은 전세계를 통틀어서 강고하게 뿌리 내린 신자유주의 국가"라고 언급한 바가 있는데요. 많은 민주주의자들에게 있어 우리가 알고 있는 시장은 마땅히 헌법과 제도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당위를 인정합니다. 저는 바로 이 지점에서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가 대척할 수밖에 없는 이유라고 생각하는데요. 이는 콜린 크라우치 뿐만 아니라 로버트 커트너, 대니 로드릭도 인정한 바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말 어처구니가 없게도 신자유주의 자체는 최소한 민주화 되고 민주주의가 뿌리 내린 국가에서 더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강력하게 주장할 수 있습니다. 즉, 고도화 된 금융 기법이라든지 시장의 지배가 사회와 정치에 미치는 영향력 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신자유주의라면 어느 정도 정치적으로도 안정화 된 국가에서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민주주의를 시녀로 부릴 수 있다는 것인데요. 설사 그 축에 속하지 못하는 국가들은 그저 '추악한 약탈'밖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과거 이르헨티나와 칠레를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물론 우리나라도 역시 그런 시기가 있었죠.


제가 명백히 예언가는 아닙니다만 지금의 신자유주의가 시장의 초월적 우월성을 바탕으로 모든 사회 통념을 그 밑으로 두려고 하는 인식 자체는 궁극적으로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우리의 정치를 과두제에 이르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로서는 우리의 민주주의가 실질적으로 모두에게 평등하고 자유로운 온기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자원과 경제적 부의 차이에 따라 상당한 차별이 존재하는 것이 실정입니다. 단순히 불평등의 문제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직업과 부에 따른 각자의 사회적 지위로 인해 헌법상의 보장과는 별개로 사실상의 계급화를 초래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현실 자체는 비판의 성역화가 된 신자유주의에 의해 더욱 심화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장에 대한 정상적인 비판을 백안시하는 분위기 자체가 바로 신자유주의의 이행의 부정적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개인적으로는 신자유주의가 보수주의 정치와 매우 긴밀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개인의 이익 추구와 경제적 자유 보장이라는 관념은 보수주의가 좋아하는 것들이고, 시장이 완전 무결하다는 생각 또한 지금의 보수주의에게는 매우 익숙한 개념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강력하게 옹호하기까지 하죠. 그런 연유로 현재의 보수주의에게 예전의 전통적인 보수주의에서 볼 수 있었던 가치를 찾아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만약 정치적 주의와 경제적 관념을 서로 대등한 것이 아니라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우위라고 받아들인다면 신자유주의 이행으로 발생한 여러 사회 문제를 오로지 정치적 무능으로 몰고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여러분이 생각하고 있는 시장에 대한 대부분의 관념들이 전통적인 자본주의가 아니라 신자유주의로부터 대부분 비롯된 것이라 생각됩니다, 만약 우리가 헌법을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면 각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부유층들의 광범위한 탈세 행위 자체를 과연 우리가 어떻게 인식해야 될지는 거의 자명하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시장에 대한 신자유주의의 강고한 이념을 고려해 봤을 때, 지금 우리가 몸소 체험하고 있는 대부분의 시장 자유적 토대가 기본적으로 신자유주의로부터 왔고, 그것이 우리 나라를 넘어 세계 경제를 지탱하는 기본 토양으로, 2008년의 거대한 몰락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자유주의가 지배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전통적인 경제학이 이러한 인식에 강하게 수긍하고 있는 것도 전세계 주류 경제가 어떠한 생각을 갖고 있는지 충분히 짐작할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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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성주의 - 우리의 자화상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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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부터 발간중인 월간 <인물과 사상>의 주필로도 잘 알려져 있는 강준만 교수는 날카롭고 간혹 통찰력 있는 글쓰기로 유명한 비판적 지식인입니다. 그는 성균관대를 졸업하고 도미하여 위스콘신대에서 신문방송학 박사 학위를 받는데요. 이후 전북대 사회과학대학 언론심리학부(신문방송학)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의 글쓰기와 관련하여 두 가지 정도의 흥미로운 점이 존재합니다. 1995년에 출간한 그의 논저 "김대중 죽이기"로 비판의 성역이라고 볼 수 있는 민주화 운동의 대부격인 김대중 전 대통령을 다각도로 분석했고, 이후 인물과 사상을 통해 대상의 실명을 거론하며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등의 방법은 큰 학계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는데요. 더욱이 강교수는 자신의 이러한 글쓰기를 위해 엄청난 양의 독서를 하는 것으로도 유명한데요. 단순의 어떤 주장의 근거를 위해서 일 뿐만 아니라, 이렇게 광범위한 독서를 통해 그 스스로가 자신의 글쓰기에 얼마나 진정성 있는 태도로 임하고 있는지 대략 짐작할 만하다 생각합니다. 따라서 최근 윤 대통령의 발언으로도 유명한 '반지성주의'를 다룬 그의 이 책은 2022년 11월에 출간되었습니다.

우선 반지성주의를 기본적으로 논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역사학자 리처드 호프스태터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기존의 지식 엘리트들이나 전문가들의 정치에 반대하고 더 나아가 이러한 시스템을 배격하는데 이르는 일반 대중들의 소위 탈지식주의적 이행을 다소 온건하게 해석한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에 저자가 따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저는 무엇보다도 이 반지성주의가 극우 포퓰리즘과 깊은 연관성이 맺고 있다 생각합니다. 그래서 1장에서 잠깐 언급되기는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의 사례가 이 양자 간의 인식적 맥락을 잘 드러내는 사례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앞선 호프스태터가 분석한 미국 사회 내에서의 반지성주의와 최근 윤대통령이 언급했던 반지성주의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이 한국적 반지성주의는 아무래도 기본적인 인식과 그것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연유로 저자는 가용성 편향, 확증 편향, 부정성 편향, 이야기 편향 등을 분석하고 그에 대한 여러 사례들을 제시하며 '한국적 상황'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하고 있는데요. 그래서 이런 인지적 편향에 쉽게 사로잡힐 수 있는 인간의 기본 맥락이 소위 말하는 합리성과 합리주의와는 어울리지 않는 분석에도 어느 정도 수긍이 될 정도였습니다. 더욱이 진영 논리는 자신이 인정하고 긍정하는 정치적 세력의 입장에서 현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편향에서 단순히 소위 '우리 편에' 대한 건전한 비판이 가능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지금의 환경 상 저 역시 회의적으로 보고 있으며, 특히 양 진영 뿐만 아니라 다수 시민들과의 소통이라는 근본 가치에 있어서도 부정적인 현실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을 텐데요. 이러한 가운데 정치를 얼마 해보지도 않은 대통령의 입에서 반지성주의가 나올 정도면 우리의 상황이 실로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만합니다.

개인적으로 반지성주의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식의 추락', 그 자체에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요즘의 MZ세대가 다수의 책을 통해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불명확하고 편향적이면서 사실로 입증되지 않은 악의적인 프로파간다와 다름 없는 것들에 시간을 소비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물론 지식인들이 자본주의에 결탁한 것도 그렇고 소위 적지 않은 전문직이라는 자들이 비공개 익명 게시판 등을 통해 자신의 이익과 그것을 바라보는 일반 시민들을 경멸하는 것을 봤을 때, 이러한 한국 사회의 반지성주의의 흐름이 원인과 결과가 눈에 그려지는 일반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고 볼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런 측면에서 저자인 강교수가 분석하고 있는 이런 반지성주의적 경향에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무분별한 물신주의화가 크게 기여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저자가 꼭 집어 신자유주의를 언급한 것은 저에게는 큰 설득력을 갖고 있었는데요. 민주주의 자체에서 건전한 지식에 대한 반지성주의를 통한 배격은 무엇보다 자본주의의 극단적 이행, 그러니까 미국과 마찬가지로 너무나 과도하게 물질주의에 경도 된 사회의 왜곡된 현실에 그 책임이 있다고 보여집니다.

또한 1장 후반부에서 논의되고 있는 일반적인 '팩트' 현실에 대한 저자의 분석도 생각할 거리를 남겨주었습니다. 단순 명료한 팩트로 사회의 복잡한 현실과 갈등 상황을 온전히 해석하기 어렵기에 역사와 그 구조를 입체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점은 충분히 공감 되었습니다. 다만 팩트와 그에 따르는 최소한의 진실성을 거부한다면 지금보다 더 가짜 뉴스가 넘치는 탈진실의 시대를 목도할 수밖에 없을 텐데요. 탈진실은 오늘날 더 심각해지고 있는 극단주의와 맞물려, 끝내 민주주의를 종말로 이끌게 되는 병적인 징후이기도 합니다. 리 매킨타이어의 '포스트 트루스'에서도 드러나듯 자극적이고 규명되지 않은 거짓과 다름없는 이야기들이 무분별한 상업성과 만나서 언론을 비롯한 넷미디어 상에서의 돈을 위해 확산될 수밖에 없는 이런 풍조가 더욱 강화되고 있는데요. 그런 측면에서 호프스태터가 교육의 변화를 추구한 존 듀이를 비판한 것은 너무나 짧은 생각이라고 여겨지는데요. 포퓰리즘이 어느 정도 민주주의에 대한 정치인들의 보다 큰 관심을 추동한다 하더라도 포퓰리즘 정치 자체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없듯이, 마찬가지로 반지성주의로 인한 얼마간의 긍정적인 기대 혹은 시민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하더라도 조악한 이익 만을 위해 이들 양자를 사회적으로 용인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2장부터 4장은 최근 우리의 현실 정치를 비판한 내용으로 문재인 정부 시절의 탁현민 전 의전 비서관이 수행한 '홍보 정치','검경 수사권 분리'와 관련된 민형배 의원의 탈당 문제 그리고 현재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지금 대통령의 영부인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습니다. 탁현민 전 의전 비서관과 관련하여, 과거 문재인 정부 시절의 일련의 홍보 작업들이 다소 적절치 못한, 더 나아가 위선에 가까운 것들을 저자가 논하고 있었는데요. 사실 문재인 정부의 여러 문제들은 저 역시도 심히 공감하고 있고 더욱이 촛불로 탄생한 정부가 확실히 정치적 원동력은 다른 정부들에 비해 대단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정치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점은 상당히 아쉽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검수완박과 관련된 민형배 의원의 위장 탈당과 관련해서도 절차적 민주주의에 대한 일종의 배신이라고 볼 수 있을 텐데요. 다만 검경 수사권 분리는 확실히 필요한 부분으로 과거 5공 시절 이후 탈권력화에 이른 국가 정보원을 고려한다면 마찬가지로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검찰의 개혁은 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 여러가지 제도적 개선과 법적 적용이 필요해 보이긴 합니다만 실질적으로 많은 토론이 전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다시 말하지만 개혁은 분명 시급해 보입니다. 마지막 윤 대통령과 근래 영부인에 대한 여러 논란에 대해 저자는 윤 대통령에게 안타까움을 표하고 있었는데요. 최근 대통령 부처에 대해 저자가 보이는 허탈함은 분명 이해가 되었습니다.        

끝으로 소위 잡지식을 표방한다는 <인물과 사상>의 전체적인 논조를 고려해 본다면 강교수의 이 책은 그야말로 일관성 없는 글 모음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장의 반지성주의에 대한 꽤 상세한 분석을 인정하더라도 이후 2장부터 이어지는 엄선된 주제들은 아무래도 1장과는 사뭇 거리가 있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크게 만족스럽지 않았는데요. 그리고 저자가 보이는 문재인 대통령과 소위 문빠들에 대한 비판과 586 운동권에 대한 상당한 실망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만 그렇다고 진모 교수와 같은 사람을 인용함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는 것은 사뭇 동의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앞으로 윤 대통령과 지금의 정권에 대한 글들이 쏟아져 나올 테지만 현재 보여지는 우리 정부의 모습이 과연 모두의 동의를 받을 정도로 국정의 난맥을 잘 조절하여 진정한 정치를 위해 나아가고 있는지는 굳이 대통령을 반대하는 59%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심히 우려스러운 건 사실입니다. 물론 저자의 의도와 더불어 스스로의 정당한 의견을 무조건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물론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컸기 때문에 여러 정책적 패착에 대한 일부 시민들의 분노가 윤 정권을 낳게 한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저는 윤 정부 초기에 보였던 전 정권에 대한 '대결주의'를 우려스럽게 봤던 사람으로써 아직도 이 정부가 나아가고자 하는 길이 정확히 무엇인지 아직도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것이 지금 정부의 가장 큰 문제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호프스태터가 "반지성주의는 미국의 민주적 제도나 평등주의적 정서에 바탕을 둔다"고 했듯이, 미국은 반지성주의에 매우 우호적인 건국 발전 과정을 거친 나라다.

나는 그런 두 가지 전제와 더불어 반지성주의를 "이성적 합리적 소통을 수용하지 않는 정신 상태나 태도"로 정의하면서 그 3대 요소로 신앙적 확신, 성찰 불능, 적대적 표현을 제시하고자 한다.

물론 평등주의, 물질주의, 지성의 자기소외는 반지성주의와 사회적 배경 중 일부일 뿐이다.

반지성주의는 사회 전반의 소통의 질을 보여주는 리트머스 시험지로서 그 의미를 갖는다. 반지성주의는 사회 전반에 대한 불신과 무관하지 않으며, 특히 지성을 대변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지식인과 전문가 집단에 대한 불신을 온상으로 삼아 번성한다.

우리에겐 사회 구성원으로서 원할한 소통을 해야 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반지성주의에 대한 논의가 그런 당위를 환기시키고 실천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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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커뮤니케이션 이해총서
이정기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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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동명대 광고PR학과의 학과장으로 있는 이정기 교수는 2007년 같은 학교를 졸업하고 석사와 박사를 한양대에서 마치고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강의교수와 교수학습지원센터 책임연구원(연구교수)을 거치기도 했습니다. 저자와 관련하여 구글에서 잠시 검색해보니 120편의 논문과 21권의 학술 저서를 발표한 학자이기도 했는데요. 그래서 광고홍보학 학계에서는 이 교수의 그간 업적에 대해 꽤 인정하고 있는 분위기였는데요. 특히 그의 '표현의 자유 3부작'은 여러 언론을 통해 소개되고 있었습니다. 근래 많은 연구 실적을 쌓은 학자로서의 그의 이력은 충분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교수의 소위 '팟캐스트 개론서'라고 불리는 이 책은 2019년 1월에 출간되었습니다.

이미 이 글 1장에서 소개되고 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팟캐스트 podcast는 애플 apple의 mp3 플레이어인 아이팟 ipod과 방송 broadcast가 결합한 단어입니다. 팟캐스트가 서비스된 초기만 해도 이렇게 일반명사화 된 사회 현상이 되리라고는 거의 생각지 못했는데요. 이미 유튜브의 수많은 정치 및 사회 관련 유튜브가 큰 인기와 주목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소위 '대안 언론'에 대한 시민들의 욕구는 이전부터 대단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 팟캐스트 역시 이러한 기존 언론의 대체 가능성을 염두해 두고 확장되었습니다. 팟캐스트를 듣는 이들의 폭넓은 장르 저변화도 물론이고 정치사회 팟캐스트 역시 '편향적'이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어떤 채널은 수익까지 낼 수 있을 정도로 크게 이슈 몰이를 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팟캐스트의 사회적 진행은 앞선 유튜브의 확장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데요. 저자는 팟캐스트가 라디오와 비슷한 형태로서 소위 '음성 서비스'만을 기준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팟빵의 '정영진 최욱의 매불쇼'와 같은 경우는 현재 여기에 출연하는 사람들의 실제적인 영상까지 시청할 수 있는 유튜브 서비스도 함께 진행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기존의 주류 언론의 일방향적인 컨텐츠 제공은 넷미디어 시대에 이르러 시스템 자체가 완전히 바뀌었다고 볼 수 있을 텐데요. 6장에서 이미 언급되고 있듯이, 현재까지도 많은 시민들이 기존의 정치권과 엘리트 정치에 자체에 대한 지극한 소외감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정에서 팟캐스트의 저변 확대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즉, 지금도 주류 언론들 가운데 소위 '빅3'의 과도한 영향력이 기득권 정치와 이를 지지하는 세력들의 정치적 베드가 되면서 진보적인 가치 자체에 대해 인정하고 또한 진보와 보수라는 양자 간의 실질적인 대화 논의가 여러 면에서 막혀있던 것도 사실입니다. 물론 상대편에 대한 일정 부분의 '희화화'와 '풍자'는 이것을 대하는 사람에 따라 여러 의견이 나왔던 것도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소위 '표현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우리가 일반 정치 자체를 평가하고 의견을 개진하는 것은 정치 발전에 도움이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지는 않지만 '정영진 최욱의 매불쇼' 가운데 한 코너인 '수요난장판'은 회차에 따라 100만뷰를 넘기도 하는 인기 프로그램인데요. 매불쇼 자체는 팟빵의 간판 프로인 동시에 유튜브에도 자신들의 영상을 올리고 있기도 합니다. 이처럼 이는 정치 관련 팟캐스트의 사회적 영향력이 그만큼 지대해졌다고 봐도 무방해 보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많은 시민들과 학자들이 이들 팟캐스트에 대한 소위 언론 지위 부여에 대해 아직도 많은 이견이 있는 부분은 TBS에서 운영하는 '김어준의 뉴스공장'과 동일 진행자가 운영하고 있는 '다스 뵈이다'의 실질적인 규제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봤을 때, 팟캐스트를 기존 언론과 똑같이 규제하고 싶어하는 정치인들이 많다고 여겨지는데요. 일상적인 시민의 정치적 자유 발언이 어떠한 이유에서든 간에 규제를 받는 건 다소 문제가 있듯 팟캐스트의 여러 정치 프로들을 언론 규제와 마찬가지로 조율과 통제하는 것은 아무래도 현실에서 가능하지는 않을 듯 싶습니다. 더군다나 기존 언론에 대한 국민들의 어느 정도 불신을 고려한다면 대안으로서 여러 형식의 컨텐츠들이 발전해, 민주 사회에서 시민들의 발언이 좀 더 확대될 수 있게 하는 것이 헌법에도 부합하는 일이라 여겨집니다.

이미 저자는 글 초입에서 이들 팟캐스트들의 역기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순기능 또한 상당하다고 강조하고 있는데요. 이와 관련하여 저는 요즘과 같이 시민들이 책을 읽지 않는 시대에서 '책을 같이 읽어주는' 팟캐스트 프로그램들이 시민의 지식 함양에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7장에서 논의되고 있는 바와 같이 팟캐스트의 교육 효과 역시 상당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민주주의에서 시민들의 기본적인 교양 증대는 정치 전반에 큰 이점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선기능을 팟캐스트가 현재 폭넓게 확대하고 있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더욱이 사회적 인간으로서 자신이 느끼는 고립감을 이겨내는 데 있어 같은 공감대를 가진 사람들과의 이 같은 '랜선 연대'는 개인의 삶 자체에 있어서도 충분히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기대됩니다.


따라서 특정 미디어의 이용 동기를 파악하는 것은 미디어 이용 이후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효과(의도적 효과, 비의도적 효과)를 이해하는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적 관점 동기는 ‘나는 내가 다운로드한 팟캐스트에 대해 다른 팬들과 대화한다‘,‘나는 내가 다운로드한 팟캐스트에 대해 친구들과 대화한다‘와 같이 팟캐스트를 둘러싼 사회적 대화 욕구가 반영된 동기다.

보수적 개인은 정치 팟캐스트를 정보를 얻기 위한 목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감시용으로 활용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보수적 개인은 팟캐스트에서 얻은 정보와 또 다른 형태의 정보를 얻기 위해 신문 같은 기성 미디어를 이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울러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의 이용 동기 일곱 가지 중 문화 정치적 소통 동기와 정치적 소외감 극복 동기가 높을수록 오프라인 정치 참여 정도가 높아진다는 연구결과가 존재한다.

이상의 사례들은 팟캐스트가 대학 학습자들의 관심을 재고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으며 실제로 다양한 영역의 전공과 전공 교과목에 활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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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2-12-20 2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번 정부가 언론을 대하는 방식이 우려스럽습니다. 거기에 주류 언론들이 제 기능을 못하고 광고주들 눈치보느라 견재기능을 상실하고 있으니...그런 와중에 매체 다양화는 교육적,정치 참여 측면에서도 긍정적으로 보이네요^^

베터라이프 2022-12-20 22:41   좋아요 1 | URL
사실 저번 비속어 사태에서 각 언론들이 몸을 사린 것은 분명합니다. 주류 언론들이 기필코 유지하려는 것이 자신들의 영향력과 금전적인 부분에서의 이해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헌법과 시민 그리고 언론 제도 간에 인식적 괴리가 상당했던 것이죠. 또한 언론이 교과서에서나 나오는 아름답고 고명한 것이 아니기에 이런 측면에서 지독한 현실 상황과는 매우 상이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정치적 소외감도 어느 정도 감쇄해주고 여러 의견들의 제안이라는 점에서 팟캐스트와 유튜브가 분명 순기능이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 미미님의 의견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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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11월
평점 :
절판


미국 문단에서 흔들리지 않는 문학적 지위를 갖고 있는 스티븐 킹은 마찬가지로 많은 독자들에게 초자연 소설, 서스펜스, 범죄, SF, 판타지 등에서의 대가로 읽히고 있습니다. 특히 그의 책은 총 3억 5천만 부가 판매되었는데 많은 작품이 TV 드라마와 영화 등으로 판권 매매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믿을 수 없는 성과는 2015년에 미국 국립예술기금으로부터 예술 훈장을 받는데 큰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지금의 스티븐 킹을 있게 한 여러 작품들 가운데 1973년에 나온 그의 소설 '캐리'는 독보적인 작품으로 1976년 영화감독 브라이언 드 팔마에 의해 영화화 되기도 했는데요. 이런 이력과는 달리 그는 정치적 식견과 행동주의와 관련해서는 민주당 후보를 강력하게 지지한다거나 미국의 부유층들이 더 많은 세금을 내야만 한다는 주장을 거의 공개적으로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몇몇 공화당 인사들에 대한 비판적 의견 개진과 현 정치 상황에 대해 자신의 비평을 가감 없이 밝히는 점은 소설가로서의 큰 인기를 감안한다면 공화당을 지지하는 계층에게 있어 어느 정도 거부감을 초래하지 않았나 싶은데요. 사회학자나 철학자가 아닌 대중 소설가가 이러한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표출하는 점이 다른 지식인 계층과 비교해 봐도 특히 독자들에게는 상당히 다른 감정을 불러 일으키기도 합니다. 다만 문학적 구조와 고정된 주제에 몰입하여 그 입장의 한계를 인정하는 여느 작가가 아니라,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사회에서 해야만 하는 말들을 거리낌 없이 드러낼 수 있는 점은 어쩌면 미국의 민주주의가 우리와 확연히 차이나는 부분일 수도 있겠습니다. 따라서 지금 소개해 이 책은, 원제 "Cell"로 지난 2006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도 동일한 해인 2006년 11월에 번역 출판 되기에 이릅니다. 다만, 현재 이 책은 국내에서 절판된 상황입니다.

개인적으로 킹의 이 소설을 읽게 된 중요한 이유는 지난 2016년에 영화화 되어 나온 존 쿠삭과 새뮤얼 L. 잭슨이 주연한 "셀 : 인류 최후의 날" 때문이었습니다. 영화가 썩 뇌리에 남을 만큼 인상 깊지는 않았지만 원작이 스티븐 킹의 작품인 걸 알게 되어 연말 기념으로 문득 읽어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는데요. 2006년에 나온 번역본은 현재 절판된 상황이었지만 아주 빠르게 '헌책방'에서 구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주문을 넣고 며칠 뒤에 배송까지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쯤에서 아주 강한 스포일러 일수도 있겠지만 킹의 이 작품은 소위 '폰 사이코'로 불리 우는 '전파 좀비'가 주된 소재라고 볼 수 있는데요. 그 외 세 사람의 인상 깊은 모험극이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주인공들 가운데 한 사람인 클레이와 톰이 초반에 서로를 인식하게 되고 이후 엘리스가 존재감을 드러내며 이들의 무리에 합류하게 됨으로써 기본적인 모험 서사의 틀이 잡히게 됩니다. 

우선 킹의 이 소설은 그동안 좀비와 관련된 여러 작품들을 숱하게 인용하면서 그가 창조해 낸 좀비와 그 외의 다른 좀비들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전반적인 서사에서 이를 드러내고 있는데요. 물론 앞선 설정은 어떻게 보면 하루 아침에 미국 보스턴을 쑥대밭으로 만든 흐름의 한 구성으로서, 특히 좀비와 관련된 작가의 고유한 해석을 답고 있습니다. 저는 이 작품의 해석을 통해, 좀비 자체로서의 어떤 문학적 구조보다도 일전에 일독했던 가브리엘 타르드의 '군중'과 칼 구스타프 융의 '무의식에 지배된 군중'에 인식적으로 유사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1권 후반부의 게이튼 아카데미에서의 다소 익숙해 보이는 좀비들의 꽤 심각한 반전은 전파의 전달과 더 나아가 그들끼리의 '텔레파시'라는 불명확한 시도 자체가 앞선 군중들을 불확실한 실체로 이끄는 '무의식의 전염성'과 매우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교장과 앨리스 또래의 조든이 발견한 '인간의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이성의 사고가 완전히 축출된 상황에서 좀비들의 '질서정연함'은 정말 많은 것을 시사한다고 여겨지는데요. 어떻게 보면 인간의 개성이라는 것이 아주 쉽게 말살될 수 있다는 점과 더불어 그것을 초래하는 요건 역시 아주 단순하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한다면 - 이를테면 인간 사회의 폭력의 지배나 반지성주의의 팽배 같은 - 이 소설이 시사하는 바는 아주 명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과도한 스포일러가 될 듯 싶어 내용을 전부 밝힐 수 없는 후반부의 복선도 이러한 해석을 좀 더 강화시킨다고 봐야 할 것 같은데요. 어떻게 보면 '실제에서 생물학적으로 죽지 않은 좀비'가 이처럼 붕괴된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괴로운 맥락을 갖고 있다는 점은 킹의 이 작품을 단순히 좀비 소설로 국한할 수 없는 근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주제 의식에도 불구하고 소설이나 영화를 비롯한 여러 '좀비극'에서 보이던 케케묵은 설정들이 나타나기도 했는데요. 극중 미스터 리카르디가 보인 스스로의 안타까운 행동과 세상의 종말과 다름 없는 상황에서 '신이 내린 저주'를 읊으면서 극단적 회의주의에 몸을 맡기는 일부 종교인들의 모습은 이미 우리가 봐왔던 설정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원전 자체에서 작가가 상당한 비속어를 문장에 넣었으리라는 추측과 함께 '어느 기독교인에 대한 지독한 경멸'은 과거 품위를 갖춘 버틀란드 러셀의 고백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역설적인 감정을 독자들에게 강요하게 하는데요. 아마도 종교의 타락을 우리가 실질적으로 가늠케 하는 것은 이러한 위기와 종말의 시대에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파국을 초래하는지, 이성으로 대략 추론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몇 년 간 큰 인기를 끌었던 워킹 데드의 주인공인 릭과 이 작품에서 좀 더 이성적이고 인간적인 클레이는 앞서 언급한 복선으로 말미암아 다음 권에서 후반부 극의 변화를 독자로서 원치 않는 결말로 귀결될 것 같아 그 점이 우려스러운데요. 또한 과학 만능주의에 대한 극의 주제 의식이 어떤 식으로 문제를 만들어 낼지, 다음 권에서 여실히 살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스티븐 킹의 유독 자주 보이는 스토리의 '용두사미'가 이 작품에는 들어맞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 유독 이 소설의 원전을 살펴보고 싶은 욕구가 들게 만든 문장이 있었는데요.
  "기운을 내라. 앨리스, 오늘 공사가 다망한 날이었잖니."
  "공사가 다 망해요?"
  바로 클레이와 앨리스의 짦은 대화였습니다. 


"예, 맞습니다. 우린 가능한 빨리 그들의 고통을 덜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법정이나 사문위원회에서 내가 그러게 말했다고 증언하셔도 전 그 사실을 부인할 겁니다."

전에 그런 여자들과 강의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터득한 사실 하나가 그 나이까지 살아온 아줌마들은 거의 난공불락이라는 것이었다.

아들을 생각하려 할 때마다 클레이는 머릿속에 미친 쥐새끼를 풀어 둔 기분이었다. 그 쥐새끼는 당장이라도 허술한 우리를 부수고 나와 입에 닿는 건 닥치는 대로 갉아먹을 판이었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신호 말이야. 과학 소설 같기는 하지만, 불과 15년이나 20년 전만 해도 대다수 사람들에게 휴대폰도 과학 소설 같았을 테니까."

"그래요. 우린 모두 누군가를 잃었어요. 대시련의 시기니까요. 모두 여기 [요한계시록]에 예언되어 있죠."

그들은 자기들만의 무리 속에서 자기들끼리만 속닥거리며 기계적으로 움직였고, 기껏해야 손전등을 휘두르거나 다른 손으로 여행 가방을 바꿔 드는 게 의미 있는 행동의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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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12-18 05: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사가 다 망하다. 다망하다. 정말 원전 찾아보고 싶어지게 하네요^^

베터라이프 2022-12-18 08:30   좋아요 1 | URL
어떻게 보면 우리식의 전형적인 말장난인데 역자가 왜 이런식으로 번역을 했는지 원서의 문장이 궁금할 정도였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