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그문트 바우만의 사회이론 한울사회이론 4
숀 베스트 지음, 박형신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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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영국 학계에서 지그문트 바우만에 대한 논의를 이어가고 있는 숀 베스트는 출판사의 소개로는 윈체스터 대학의 교육학 교수로 이력이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력을 찾아보려고 구글링을 해 본 결과, 최근 윈체스터 대학에서의 강의를 그만 둔 것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동 대학에서 강사나 방문 교수 직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는데요. 이런 그의 전공 분야는 사회 이론, 교육 사회학, 신자유주의하의 교육 문제와 더불어, 지그문트 바우만에 대한 학문적 연구 등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그외 그의 출생지나 유년 시절 부터의 교육 이력은 웹에서 쉽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The Emerald Guide To Zygmunt Bauman"으로 지난 2020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4년 8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저에게 지그문트 바우만은 무엇보다 '세계의 진실'을 알려준 지식인었습니다. 신자유주의가 강화한 자본주의적 체제, 그것을 기반으로 전세계가 자유 시장 이데올로기로 구축되어왔던 과정과 엄혹한 결과를 낱낱이 폭로한 사람이 지그문트 바우만이었다는 점은 누구나 인정하는 부분인데요. 여기서 낱낱이라는 표현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도덕적으로 혐오스러운 자본주의"에 대해 언제나 비판적 입장을 취한 세계인이기도 했습니다. 조금 이른 내용일 수 있지만 저자인 숀 베스트가 바라본 바우만의 고통스런 좌절과 가까운 인식을 먼저 언급하고 싶은데요. 액체 근대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1980년대에 대처와 레이건이 처음 제시한 '대안은 없다'라는 신자유주의적 슬로건을 받아들였다는 것, 그리하여 고통과 배제, 불평등이 지속되고 있다는 점은 분명 바우만을 슬프게 했다는 글의 대미가 있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조금 달리 해석해 보려고 하는데요. 인간이 계몽에 의해 눈을 뜨고, 억압된 권력 관계, 계급 문제, 개인의 인권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을 자유, 즉 종래의 자유주의로 해결해 왔다면, 더 이상 규제가 필요 없는 시장자유적 근본주의에 왜 우리가 굴복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선, '인간의 탐욕'을 근본적으로 제어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답하고 싶습니다. 어찌됐든 자본주의 체제 하에, 그 자본을 축적하고 권력화한 것은 무엇보다 우리 인간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규제 없는 시장'이 공공의 선을 위해 어느 정도 규제가 필요하다는 사회 관념을 불필요한 것으로 몰아갔습니다. 이 부분 역시, 바우만이 비판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주요 주장이기도 하지만 지금 현재를 우리가 보기에도 체제의 틀을 구축한 과거 근대 및 근대주의는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나쁘게 변질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특히 4장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는 바우만의 소위 '근대적 가치'에 대한 날선 비판은 그의 '근대성과 홀로코스트'에서 일견 보이는 것처럼, "근대성에 동기를 부여한 바로 질서의 추구"였습니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권력 지향의 속성과 그것을 바탕으로 사회적 체제의 질서 구축에 몇 세대를 거쳐 노력했던 점은 바로 앞선 맥락에 기반해 있기도 합니다. 그에 따라 우리는 우선적으로 자본주의를 최소한 도덕적 기반의 맥락에서 재구축을 하려는 노력을 하거나, 아니면 이 자본주의가 인간을 필요한 자와 쓸모없는 자로 분류하기 전에 우리가 힘들게 마련한 민주주의적 체제가 그 '자본의 논리'에 노예가 되는 것을 허용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최소한 이기심에 기반한 개인의이익추구, 즉, 교묘한 신자유주의의 논리에 대한 현실적 대응 논리가 우리 사회를 위해 필요했습니다. 이미 바우만은 책임감이 없는 인간에 대한 비판을 탈근대 상황에서 무엇보다 강하게 목소리를 유지하기도 했는데요. 물론 이 책임감의 문제는 그저 단순한 관념이 아니어서 동질한 사회에서 같은 삶을 영위하는 수많은 타자들에 대한 서로간의 연민과 책임이 결여된 그야말로 완벽히 개인주의화된 인간들이 만든 사회를 추종했습니다. 일전에 자유주의의 시조이기도 한 존 스튜어트 밀의 공익에 근접한 자유의 목적를 말하기란 매우 생경한 시대가 되었다고 판단됩니다. 그러고 보니 지그문트 바우만 역시, 과거 애덤 스미스와 마찬가지로 사회가 직면한 경제적 문제와 별로 상관없어 보이는 인간의 도덕적 본질을 동일하게 연구한 학자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저자인 숀 베스트가 평하는 대로, 지그문트 바우만은 그 누구보다 상당한 지식을 쌓은 인물이었습니다. 또한 전세계 여느 학자들보다 바우만이 순수한 '교양인'에 가깝다는 점도 이 자리에서 밝히고 싶은데요. 이는 이디스 워튼이 묘사하는 것처럼 19세기 시대에도 '교양인'에 대한 평가는 꽤나 호의적이었습니다. 심지어 이를 숭배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세간의 사람들도 인정하는 바대로 어느 위대한 철학자가 스스로 깊은 사색을 통해 어느샌가 중요한 통찰에 이르기도 하지만 일관된 주장에 본질적인 살을 붙이는 과정인 '근거와 논리적 맥락'을 쌓는 일은 두루두루 많은 지식을 체화해야만 비로소 가능한 일일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우만은 평생 독서를 누구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던 지식인이기도 했는데요. 레비나스를 비롯, 칸트. 홉스, 그리고 그람시는 바우만에게 있어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상가들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홀로코스트에 대한 사회적 분석과 근대에 있어 탈근대 논법을 언급한 것은 저자인 숀 베스트가 평한대로, 바우만이 처음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당시 학계 뿐만 아니라, 독자들에게도 그 논리적 설득력을 그가 인정받게 된 것은 사상적 기반이 얼마나 고유하고 독창적이었는지 이 책을 통해, 저 역시도 새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액체 근대'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근대'에 대한 바우만의 비판은 일관된 논증이 기반되어 있는데요. 근대성 자체가 스스로 예상하지 못한 부작용으로 말미암아, 질서와 양가성을 동시에 생산한다는 언급과 특히, 사회에서 '우리의 일원'으로 분류되지 않은 타자 또는 이방인을 근대는 위와 같은 사람들을 모조리 '인간 쓰레기'로 규정했다는 점에서, 근대세계 내부의 결연한 질서를 구축하고자 하는 사회적 구조가 이를 더욱 강화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얼마나 이 근대를 '나약하게' 바라보고 있었는지 새삼 깨달을 수 있겠는데요. 즉, 이 점은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자세히 연결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600만의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낸 전체주의적 시스템하의 관료들이 사회 질서를 위해, 자신의 사회에서 바깥 또는 외곽에 위치한, 그 법적 지위가 모호한 유대인들을 절멸 수용소로 내몬 것은 이런 근대적 맥락에 기반해 있다고 바우만은 다시금 강조합니다. 물론 이러한 인식은 저자인 숀 베스트의 첨언대로 바우만이 한나 아렌트에게서 일정 부분 영향을 받은 점은 거의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또한, 앞선 언급과 같이, 근대세계에서의 개인의 자유라는 가치가 무엇보다 안전을 위해 제한 받을 수 있다는 폭로적 인식이 그저 소설 속의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는 점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을 텐데요. 근대세계에서 과거 권력을 성장시키고 있던 노동 계급의 쇠락 및 분절과 이러한 과정에서 정치 투쟁 자체가 경제적 불평등과 그것을 둘러싼 논쟁이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상당히 의미심장하다고 여겨집니다. 바로 이러한 문제는 자본주의의 강고한 권력화와 맞물려, 현재까지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상황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일전에 가이 스탠딩이 비판했던 현실인 노동자들의 '프레카리아트화'가 바로 이러한 사회적 분절을 설명하는 꽤 실질적인 용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근대세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배제된 사람들'로 분류된 많은 이들이 영구적으로 그 경계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불확실성, 빈곤, 취약성이라는 상태에 마찬가지로 영구에 가까운 그런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들은 이민자들이거나. 빈자 혹은 권력의 그늘에서 아주 멀어진 사람들로 근대의 질서 구축이라는 미명하에, 앞서 설명한 바대로 복합적인 의미에서 배제된 상황입니다. 여기에 바우만은 이러한 '배제된 자'라는 참혹한 분류에 그 누구도 여기에 속하게 되지 않을 보장이 없으며,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를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돈과 권력의 유무에 따라 누구나 그렇게 처해질 수 있다는 현실을 폭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는 마치 심각한 병에 걸린 사람이 병을 의도적으로 멀리하는 것만으로는 완벽히 치료될 수 없다는 것과 동일한데요. 그래서 이 액체 근대세계라는 구조가 더욱 사람들을 개인화의 단계로 내몰고 어느 한 사람의 개인적 서사와 삶이 환경의 영향이라는 점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데, 이 개인화는 평범한 사람이 느끼는 삶의 고통과 가난으로 인한 문제를 오로지 '개인의 책임'으로 치부하게 만듭니다. 거의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말입니다. 이것의 명백한 서사는 신자유주의가 강조하는 '개인들의 서사'와도 밀접하게 맞물려 있으며, 마찬가지로 바우만도 신자유주의의 이런 의도를 명백히 비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물론 신자유주의 자체는 사회적인 측면에서 매우 복합적인 - 이미 부정적으로도- 양상을 갖고 있었으므로 이것은 본디 고도화된 자본주의적 이행과 따로 분리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금융 자본주의의 논리에 따른 급격한 사회 구조상의 변화 자체는 바로 신자유주의적 발상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저는 이런 근대 세계의 탈인간적인 괴물화가 결국엔 신자유주의적 이행 가운데서, '복지 국가 담론'을 무엇보다 시민들의 정치적 관념 밖으로 내몰았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바우만은 '사회적 국가'라는 고유 용어로 기존의 복지 국가에 대한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히 "신자유주의가 정부 기구에 통합되면서 부와 소득의 공유와 분배는 일반적으로 중지된다."는 주장은 이러한 비판적 맥락에 기반하고 있는 부분인데요. 자본이 인간의 몇세대를 거치면서 노동력 착취에서 소비자 착취로 이동한 점은 자본 축적의 메커니즘 하에, 사회 구조가 이를 더욱 보장하는 상황으로 고도화 되기도 했습니다. 언제부턴가 인간이 자본의 한 요소로 기능하게 된 것은 조지 오웰 식의 비극적인 아이러니만은 아닐 겁니다. 이에 저자가 말한 것처럼 바우만이 액체 근대에 대한 면밀한 분석 이외에도 왜 인간의 도덕적 본질이 추락했고 그것이 어떻게 윤리학과 차원이 다른 문제인지 그것에 천착하는데 평생을 기울인 이유일 겁니다. 그래서 바우만은 이제부터라도 타자에 대한 공감, 더 나아가 포함과 배제라는 도덕적 측면의 '분류'에 시민들이 더 귀를 기울여야만 한다고 조언합니다. 이렇듯 바우만의 사회적 포함 개념은 "타자와 함께 그리고 타자를 위해 존재하는" 레비나스의 인식과 맞물려, "타자에 대한 책임"과 같은 바우만 고유의 철학이기도 한 데요. 우리 인간이 자신의 행복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듯, 우리는 다른 사람의 행복에 대해 귀를 기울여야 하고, 내 스스로의 행복에 대한 일종의 책임감을 견지하고 있다면,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의 행복에 대해서도 그들이 갖는 책임감을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대화와 공감, 연대와 포함이라는 우리의 사회적 선언과 그 궤를 같이 하면서 함께 나아가는 것이 근대세계를 진정으로 '탈근대'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는 과거 공동체 시대에서 인간의 도덕적 본질을 회복해야 하는 그 당위로써 명확히 언급할 수 있지만 현실은 바우만이 설파한 것처럼 민주주의에서 신자유주의적 요소를 직접적으로 분리해야만 하는 근본적 이유이기도 한데요. 이것은 우리가 보기에도 분화된 몇 단계의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끝으로, 저자인 숀 베스트는 9장의 '바우만 효과에 대한 현실 평가'등을 주요 골자로 현재 전세계에서 바우만이 갖는 소위 학문적 영향력을 논하고 있습니다. 2000년대 후반 이후로 슬라보예 지젝과 함께 지그문트 바우만은 독자들 뿐만 아니라 학계에서도 상당한 관심을 받은 바가 있습니다. 아니 관심 정도가 아니라 과장하면 어떤 '학문적 사조' 정도로 숭배 되기까지 했습니다. 다만, 저자의 언급대로 바우만이 어떤 조작된 출판 그룹이나 선도하는 사상적 흐름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기보다는 바우만 만큼 현 시대를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설명해 내는 사회학자가 아마도 전무했기 때문일 겁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에티엔 발리바르나 샹탈 무페가 머릿속에 떠오르긴 합니다만 전세계의 극단주의자들이 바우만을 그저 좌파 지식인으로 평가 절하 한 것은 그저 단순한 치부 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저로서는 바우만이 액체 근대와 그것의 본질적 이해와 맞물려, "왜 이 세계의 사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고통에 무관심하게 만들고, 공정한 사회나 공익 개념에 적대적이게 만들었는가"에 대해, 지극히 개인주의화 된 시민들이 자본이 요구하는 자아실현이라든지, 계급 상승과 같은 허울에 인식적 분별력을 상실한 것이 아닌가 고민해보기도 하는데요. 이는 최근에 간행된 로버트 퍼트넘의 논저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부분과 바우만의 원천적 고민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다시금 갖게 됩니다. 그런 측면에서 바우만이 자신의 유작 '레트로토피아'에서 했던 사활적 고민들이 바로 우리에게 향하고 있음을 여전히 기억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번역과 관련해, 일부 문장들에게서 어색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동일한 단어를 한 문장에서 반복한다든지, 문장이 마무리 되는 어미에서 마찬가지로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인간의 이기심에 대한 본성을 고찰한 바우만의 인식은 충분히 공감할 만합니다. 다만, 인간의 본성을 규정하는 여러 목록들 가운데, '분별력 없는 이기심' 자체를 고유의 덕목으로 삼고 이를 원천적으로 보장한 신자유주의적 기법 내지는 그런 양태는 가히 심각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것의 사회적 진행이 이미 완료가 되었다 하더라도 이기심을 기술적으로 구현해 내지 못한 배제된 사람들의 삶의 불안정성을 오로지 그들의 전적인 책임으로 강요한 점은 신자유주의자들이 실상 교활한 의도를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바우만이 말하고자 하는 인간의 도덕적 책임은 오로지 개인에게만 그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하는 것"이라는 일종의 대의와 비슷한 의미라 여겨졌는데요. 이에 저자인 숀 베스트의 바우만의 텍스트에 대한 한줄 평가를 덧붙이자면, 바우만의 텍스트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지만 그보다 독자들이 그의 텍스트를 자신의 분석으로 확장하는 그 '확장성'에 의미가 있었다고 밝힙니다. 


   




        





바우만은 또한 국가의 중앙 계획에 의해 근대세계에 창출된 사회질서가 사람들이 살기에 가장 좋은 세상으로 설계되었다는 생각을 혐오했다.

하지만 코와프스키는 또한 불평등애 대한 제한과 함께 (비록 비자본주의적인 조건에 의해 유발된 것이기든 하지만)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역시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바우만은 2000년 이후의 자신의 액체 근대 저술들에서 마거릿 대처가 자신의 정부의 경제 정책을 옹호하기 위해 "대안이 없다"는 표현을 도그마적으로 사용한 것애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권력구조는 하나의 실제적 실체이고, 그러한 권력구조가 존재하는 까닭은 역사적 실천을 수행하는 사회적 관계가 권력구조를 현실화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권력구조는 역사적 실천을 통해 작동한다.

바우만은 노동운동은 자본주의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을 자본주의 사회에 성공적으로 동화시키는 데 관심이 있는 적응적이고 적극적인 자기 조절 체계라고 주장했다.

바우만은 사고 범주의 역할과 목적을 세계의 자연적 질서를 이해하고 세계에 인위적 질서를 부여하려는 인간의 보편적 노력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사람들은 개인적 이기심을 가진 ‘인식론적 실체 epistemological entity, 즉 사고하는 존재로, 자신에게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다주는 사회적 행위를 성공적으로 반복할 때 그들은 습관을 형성한다.

자기 인식은 세계 속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관계의 외양과 그 사회적 관계의 본질 간의 구분을 없애고 그 본질을 폭로하는 것이다.

요약하면, 도덕적 책임이 전적으로 개인에게 있다는 주장을 거부하는 바우만이 보기에는, 유대인평의회 평의원들 사이에서 도덕성이 박약하다는 것보다는 아디아포라라는 달도덕화 과정이 미치는 영향이 더 중요하다.

바우만은 계몽주의가 사회적 삶을 법제화하고 규제하고 조직화하려는 충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현재 배제된 사람들은 바우만이 영구적으로 경계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즉 불확실성, 빈곤, 취약성이라는 상태에 영구적으로 놓인 것으로 분류된 삶을 살고 있다.

액체 근대인은 소비 행위를 통해 행복을 얻기를 기대하며, 불행을 경험하는 것은 죄 형태의 일탈 또는 범죄 같은 것으로 여겨져서 불행한 소비자는 사회의 온전하고 정당한 성원이 될 자격을 박탈당한다.

바우만은 ‘사회국가‘라는 용어를 선호하는데, 왜냐하면 이 용어가 단지 배제된 사람들에 대해 재정적 지원을 하는 것을 넘어 모든 사람을 하나의 국가 내에 포함시키고자 하는 공동체 내부의 동기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액화를 보여주는 첫 징후가 바로 권력과 정치의 분리였고, 고체 국민국가의 권력 대부분은 그러한 국가의 통제력 또는 심지어 영향력을 넘어서는 글로벌 흐름 속으로 ‘증발‘했다.

‘윤리적‘이라는 것은 비이기적으로 행동하고 신이 우리에게 부여한 타인 배려 충동을 받아들여 함께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홀로코스트를 가능하게 했던 도덕적 중화가 일어난 것은 문명으로서의 문화가 상상력으로서의 문화를 성공적으로 제한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이자 저널리스트인 로만 프리스터에 따르면, 2011년 9월에 폴란드 주간지 <폴리티카 Polityka>와의 인터뷰에서 바우만은 이스라엘 웨스트뱅크 West Bank 장벽을 바르셔바 게토의 장벽과 비교하면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과의 평화에는 관심이 없으며 이스라엘 국가가 홀로코스트를 불합리한 행위를 정당화하는데 이용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모든 요소는 바우만이 특별한 재능이나 자질을 지니고 있음을, 그리고 그가 액체 근대세계의 공적 영역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사회적, 윤리적, 정치적 문제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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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와 사진으로 보는 제1차 세계대전 - 유럽의 종말과 새로운 세계의 탄생 지도와 사진으로 보는 세계대전 1
A. J. P. 테일러 지음, 유영수 옮김 / 페이퍼로드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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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J.P. 테일러는 1906년 영국 사우스포트의 버크데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대대로 부유한 가문의 일원이었고, 특히 양친 모두 당시 영국에서 좌파에 가까운 식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그들은 곧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해 강력한 반대 의사를 피력하기도 했습니다. 1920년대에 그의 모친인 콘스턴스는 코민테른의 일원이었고, 그의 삼촌 가운데 한 사람은 영국 공산당의 창립 멤버였습니다. 특히 모친인 콘스턴스는 여성 참정권 운동가이자 페미니스트이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더해 그의 조모는 오랜 퀘이커 교도였습니다. 1927년 테일러는 옥스포드 대학을 일등으로 졸업하고, 잠시 법률 회사의 서기를 거쳐, 1848년 혁명에 대한 현실 분석을 위해 오스트리아 비엔나로 향하게 됩니다. 또한, 2년에 걸쳐 이탈리아 통일 문제를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당시 유럽 외교에서 이탈리아 문제는 여러 지식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관심사이기도 했는데요.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합스부르크 가(家)와 이탈리아와의 관계를 연구하기도 했고 이와 관련해, "1848~1918년, 유럽의 지배권 투쟁'이라는 중요한 논저를 출판하기에 이릅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서도 많은 논란을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의 기원 (The Origin of the Second World War)를 출판했고, 이 논저와 관련해 세인들은 그를 '역사수정주의자"로 평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은 테일러에게 통상 종이로 대변되는 '신문 저널리즘'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라디오로, 나중에는 텔레비전의 진출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는데요. 그는 1942년 3월, BBC에 출연한 이후로, 영국에서 가장 중요한 '텔레비전 역사가'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릅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소위, '대중 지식인'의 한 형태로 그는 당시 영국 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에 큰 영향을 끼친 대중 역사가 중 한 명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The First World War : An Illlustrated History"로 지난 1963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0년 10월 번역되었으며, 제가 구입한 판본은 제 10쇄본입니다.

테일러의 이 특별한 논저는 제1차 세계대전을 다룬 여타 글들과는 달리, 전쟁 시기 해당 국가들의 사회 및 군사적인 중요 사진들을 첨부하고 있습니다. 저자의 언급에 의하면, 한 주제와 관련된 대략 10장의 사진들 가운데 그가 고심하여 오로지 1장을 고르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었는데요. 이는 1차 대전과 같은 중요 사건을 체험해 보지 못한 다른 세대에 있어, 수집된 흑백 사진들은 무엇보다 상당한 사료적 의미를 갖고 있다 여겨집니다. 전쟁 기간 동안 사진으로 나타나는 사회적 혼란과 전선에 동원된 수많은 병사들의 비참한 현실은 우리가 왜 지난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명백한 답변으로 생각됩니다.

사실 저에게는 제1차 세계대전은 무엇보다 히틀러의 출현과 그에 따른 독일인들의 인간성 상실의 참혹한 몰락이 예견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물론 저마다 역사의 해석이라는 논쟁에서 '역사가'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 있어서도 주관적인 평가를 배제할 수 없는 것은 일견 타당해 보이는데요. 이에 저자인 테일러는 "역사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은 왜 기회를 살리지 못했는지에 대해 넌지시 의견을 제시하는 것 뿐이다."는 다소 대답을 회피하는 듯한 언급이 보였지만 글을 전부 일독해 보니 저의 짐작은 기우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테일러는 당시 연합국 군부들과 그 반대의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전쟁 참모부, 그리고 이들과 관계된 민간 권력의 민낯을 주저 없이 드러내는데 상당한 지면을 투입합니다. 그가 직접 설명하는 전쟁 수행의 핵심인 민간 권력과 장성들의 직간접적인 주도권 투쟁과 대립, 그리고 그에 대한 감당하기 힘든 결과는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교훈을 제공하는 것을 넘어, 동시에 역사가 본인의 흔들리지 않는 양심을 엿볼 수 있게 합니다. 

1914년의 복잡한 정치적 위기가 고조되어 유럽 전체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내몬 대전은 소위 민주주의 진영과 전제 정권의 대결 구도로 읽히기도 합니다. 이에 저자 역시, 유사한 해석을 글에서 언급하기도 합니다. 여기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자신들에게 있어 다소 복잡한 의미이기도 했던 독일 제국과의 연대를 영토 야욕이라는 제국주의적 발상에서 적극적으로 이용하고자 합니다. 더욱이 평범한 게르만인들이 인접한 슬라브 민족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으로 인한, 노골적인 전쟁 시도가 심각한 연쇄 반응을 일으켰다고 보는 해석이 이 논저의 주된 핵심입니다. 다시 말해, 이 테일러의 이 글은 패권을 지향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발칸 반도, 즉 세르비아에 대한 야욕과 세르비아인들의 후방에 있는 강대한 동토 제국인 러시아라는 존재, 바로 이들과 동맹 관계인 프랑스, 그리고 유럽의 관리자로서 정체성을 견지하고 있던 세력 균형의 감시자인 영국이 각자 서로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그저 정치적이고 외교적인 잘못된 판단이 결국 전화(戰火)를 전유럽으로 향하게 만들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첫 번째 세계 대전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어떤 숭고한 이상이나 인간 해방, 혹은 자유에 대한 투쟁 같은 것이 아니라, 유구한 제국주의 국가가 그저 좀 더 많은 땅을 위해 손쉬운 군사력을 투영한 그 결과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제1차 세계 대전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바로 이런 역사의 함정이라는 측면에서 각 행위자들의 침략 행위는 결국 전 유럽에 막대한 인명 피해를 남겼다고 생각합니다. 사진 곳곳에서 보이는 수많은 병사들의 주검은 실로 가슴 아픈 장면이기도 했습니다.


일전에 일독한 이렌 네미롭스키는 수차례 1870년의 보불 전쟁을 언급하며, 그 결과 베르사유에서 탄생한 '독일 제국'이 어떻게 프랑스인들에게 위협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이를 민족적인 측면에서 설명하기도 했는데요. 이에 테일러도 이 글 6장에서, 전후 프랑스인들은 연합군에 패한 독일이 보불 전쟁 이전과 같이, 그저 자신들의 변방으로 국한되기를 바랐다는 분석은 실로 미묘한 감정을 느끼게 만듭니다. 유럽에서 강대한 육군을 지닌 프랑스와 효율성과 단순함으로 무장한 독일식의 군사주의는 이처럼 군사적 충돌을 예비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한 데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프랑스는 갑작스런 대전을 맞이했으며, 과거 보불 전쟁의 영향으로 말미암아(그런 신중함이 배경이 되어) 자신들의 배후에 있던 영국에게 지원을 요청하기에 이릅니다. 이런 영국은 자신들의 국익과 아주 밀접한 저지대 국가들에 독일이 진격하고, 그에 따른 첨예한 전선이 프랑스 북서부에 완성되어 파리 점령이라는 양국이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결과가 가시화 되자, 군대를 파병하기 시작합니다. 물론 당시 영국의 중요한 관료였던 로이드 조지는 마지막까지 참전을 반대했습니다. 또 당시에는 군사적으로 민감한 인접국의 '국가 총동원령' 자체를 사실상 선전포고로 받아들이기도 했는데요. 발칸 반도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숨길 수 없는 야욕을 확인하자 마자 러시아가 '국가 총동원령'을 발동했을 때, 독일이 이를 철회하라고 강력하게 요구한 점은 단순한 내정 개입 이상의 문제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전쟁이 발발한 1914년이 차츰 저물어 가자, 당시 정치권을 비롯한 시민들은 이 '대전'이 결코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을 어느 정도 예측하기에 이르는데요. 제1차 세계 대전은 어떤 면에서 다음 세계 대전보다 군수품을 훨씬 더 소모하는 전쟁이었다고 저자는 분석합니다. 바로 이 막대한 군수품의 국가적 생산과 예비병의 전선 투입이 매번 가능하지 않았던 독일은 국내에서 혁명의 기운이 일어났고, 이를 민감하게 반응한 군부에 의해, 빌헬름 2세는 퇴위하기에 이릅니다. 독일의 항복과 황제의 퇴위는 그 시기가 전혀 일치하지 않았는데요. 대서양을 건너 유럽 배후에 있던 미국이 막대한 군수품을 지원하고 자국의 해상이 대전 내내 봉쇄되지 않은 영국은 막대한 인명 피해에도 불구하고 연합국이 승리하는 데 있어 중요한 단초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독일과 마찬가지로 막대한 병력 피해를 입은 프랑스가 장성들의 고압적이고 전술적인 무능에도 불구하고 전선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이런 영국과 미국의 막대한 물자 공급에 있었던 것인데요. 물론 학자들에 따라 1차 대전 당시, 영국이 독일을 해상 봉쇄한 것이 맞느냐, 아니냐의 치열한 논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1917년 이후,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은 모든 전선을 효과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보는 편이 타당합니다. 테일러는 원래 독일이 대전 중에도 식량을 수입하지 않는 국가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만 과거 프로이센의 효율적인 군사 제도의 이력을 고려해 보더라도 초전부터 독일의 한계는 명확했다고 보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이어지는 1915년에는 서부 전선의 지지부진한 국지전으로 인해, 상파뉴 지역에서만 5만 명의 프랑스인이 희생되고, 생 미엘에서는 6만 명이, 마찬가지로 아라스 근처에서는 12만 명이 희생되기에 이르는데요. 이처럼 1차 대전 당시, 연합국에만 한정해 봐도 막대한 인명 피해를 매번 초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저자인 테일러는 당시 군을 이끄는 장성들이 어떤 전략적인 측면이나 이를 수행하는 전술적인 이해도 없이 그저 '승리 만을 위해' 틀에 박힌 연설로 병사들을 전쟁으로 내몰았으며, 이런 무분별한 전투 행위가 곳곳에서 수많은 피해를 양산했던 것은 그 증거를 봐도 분명해 보입니다. 더욱이 여기에는 전쟁을 지원하고 자원을 분출하는 소위 선출 권력인 정치인들 역시, 알량한 군사적 업적을 위해 장성들과 심지어 권력 다툼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테일러는 독일 제국의 황제 빌헬름 2세는 그저 참모부에 기웃거리는 것으로 끝났지만, 영국의 총리와 프랑스의 수상은 경우에 따라서 사사건건 장성들과 마찰을 빚었다고 일관되지 않은 지휘부를 비판하고 있었는데요. 저도 이런 테일러의 평가에 일견 동의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당시 군 장성들이 과거 나폴레옹 전쟁을 수행한 장군들에 비해 평균적으로 무능했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며, 이러한 군인들의 존재와 이들이 어설픈 군사적 식견으로 이들에게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자격이 있었는지 저로서는 회의가 들기도 합니다. 특히, 솜(또는 솜므)강 전투나 베르됭 전역에서의 양쪽 모두 치명적인 전술적 오판과 이로 인해 발생된 만 단위의 사상자들은 수뇌부에 일원화된 지휘 체계 이상의 그 무엇을 요구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그 참혹한 희생으로 말입니다.   

해가 바뀌어 1916년이 되자, 많은 민간인들은 정말로 전쟁이 자신들과 가까워졌다고 느낍니다. 같은 해, 5월에 들어서자마자 마침내 영국에서 무차별적인 병력 자원 징집이 이뤄지게 되는데요. 이는 예비 병력이 지속적으로 줄어드는 것에 당시 유구한 자유주의 전통을 갖고 있던 영국 정치권 조차 이를 피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더욱이 국내 물가와 환율이 요동치게 되자, 급격한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발생한 매점매석과 부족한 생필품 상황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은 그야말로 인간의 사악함이라는 표현이 절로 떠오를 정도였습니다. 자원을 독점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양산되는 가운데, 이자들은 그 책임을 노동조합의 탐욕으로 화살을 돌리게 하는데요. 실로 인간의 추악함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 대목에서 여실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와 비견되는 측면에서 당시 영국 정부는 서서히 독립의 기운이 무르익고 있던 아일랜드를 무력 진압하게 됩니다. 소위 고귀한 이들이 숭앙하는 자유주의적 가치를 그야말로 배신하는 행태를 보인 '대영 제국의 민낯'은 '식민지를 거느린 의회 민주주의 국가'라는 그 본질로써, 저로 하여금 다시금 고심하게 만들었는데요. 이러한 비극적 과정에 대해서도 저자인 테일러는 영국 정부에 대해 비판을 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수천명의 아일랜드인들이 재판도 없이 영국에 있는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고 일침하기에 이르는데요. 이 때의 아일랜드인들은 독립이라는 가치 뿐만 아니라, '공화국 아일랜드'에 대한 진심까지 드러내며 스스로 운명을 걸었지만 끝내 이들에게 주어진 것은 참혹한 군사적 진압 뿐이었습니다.

1916년 이후, 클레망소와 로이드 조지의 투톱으로 행정과 정치적 안정을 찾은 연합군과는 반대로 독일의 루덴도르프와 힌덴부르크의 노골적인 정치 군인화와 이들이 속한 참모부의 연이은 무능과 실책으로 전선에서 쉬이 돌파구를 찾지 못하게 됩니다. 당시 독일 병사들은 자신들의 조국이 더 이상 승리와 가깝지 않게 되었다고 이를 인정하게 됩니다. 다만, 두 개의 전선 가운데, 한 곳인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 동부 전선에서 다소 숨이 트일 수 있게 되었는데요. 당시 독일 정치권은 레닌을 일부러 러시아로 탈출시켜, 정치적 혼란을 획책합니다. 결국 이러한 시도는 일부 성공해 전쟁을 불신 하는 '혁명 세력의 러시아'는 전쟁에서 점차 발을 빼게 됩니다. 이러한 사태를 연합군 지휘부가 어떻게 판단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위기는 미국의 참전으로 고통스럽게 상쇄되기에 이릅니다. 이에 저자는 '막강한 힘을 가진 이상주의자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과연 유럽은 이를 호재로만 여길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셰익스피어식의 논법으로 대응하기도 했는데요. 나중에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의 식민지를 분할하고 여기에 겁 없이 참전한 오스만 투르크를 자신들의 입맛대로 분할하여, 석유가 나오는 중동을 자신들의 영향력 하에 두려는 영국의 의도는 겨우 절반 정도 성공하기에 이릅니다.  

1918년이 되자, 전쟁을 지휘하던 독일의 루덴도르프는 이대로 가다간 자신이 파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속에서 떨치지 못하게 됩니다. 이미 국내에 다소 간 정치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루덴도르프는 어떤 식으로든 종전을 대비해야만 한다고 고심하게 됩니다. 전황은 이런 그와 상관없이, 미국의 참전의 영향으로 독일제국의 배후였던 오스만 투르크가 연합군이 상륙하게 됨으로써, 사실상 굴복하기에 이릅니다. 이처럼 전황은 급격하게 독일에 불리하게 진행되는데요. 앞서 언급했듯, 독일의 군사 엘리트들은 두 개의 첨예한 전선을 자신들이 장시간 유지할 수 있으리라 판단하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러시아가 전쟁에서 발을 빼게 됨으로써, 독일은 서부 전선에서 큰 기회가 올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지만 루덴도르프의 군사적 무능으로 인해 그것은 악몽이 되고 말았습니다. 더욱이 당시 트로츠키의 예견대로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심각한 파업이 일어났고 곧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자신들의 굴욕적인 운명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적대적인 주변국들이 목줄을 쥐어 오자, 이들은 독일이 모르게 연합국에 강화를 요청하기에 이르는데요. 물론 연합군은 이런 강화에 초반부터 응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심각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인 측면에서, 1918년 당시 독일 제국은 어느 때 보다 더 전진해 많은 영토를 획득하는데요. 하지만 내부에서 휘청이는 독일 제국은 곧 결정적 타격을 입게 됩니다. 같은 해 3월, 루덴도르프는 스스로 흥분해 공세를 서부인 아라스로 집중하지만 예비 병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독일은 그 귀중한 병력을 연합국의 입으로 들이미는 최악의 결과를 맞게 됩니다. 루덴도르프는 전술적 고려 없이, 그저 직감으로 이를 결정한 것인데요. 더욱이 독일 병사들이 영국의 풍부한 보급품을 보고 저절로 사기가 떨어지고 말았다는 분석은 독일인들이 스스로의 전쟁 수행 능력을 불신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뒤이어 연합군 진영인 조프르와 헤이그, 니벨은 독일에 대한 공세를 지속하지만 마찬가지로 루덴도르프 역시 이에 산발적으로 대응한 결과로, 자국의 군사적 수단이 최종적으로 봉쇄되기에 이릅니다. 이 과정에서 체코인들이 전쟁에 개입하여 시운을 만나 자신들의 민족이 중부 유럽에서 독립의 깃발을 꽂게 됩니다. 전후 체코슬로바키아의 출현은 바로 이런 배경에 있었습니다.

결국 1918년 8월 이후, 전선에서의 연합군의 공세는 지속적으로 강화되어 나타나고 이들은 결국 베르됭 남쪽 생 미엘 돌출부를 격파합니다. 테일러에 의하면 이 장면은 서부 전선의 중요한 전환점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후에 루덴도르프는 8월 8일을 "독일군의 비극적인 날"로 회상하고 이 심리적인 결과로 말미암아 다수의 독일 병사들은 자신들이 전쟁에서 승리하기란 매우 요원하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다 9월 29일, 루덴도르프는 즉각적으로 휴전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는데요. 빌헬름 2세의 네덜란드 망명 이후, 독일의 정세는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합니다. 대내외적으로 자유주의자로 알려진 바덴의 막스 공이 재상에 임명되자 독일 정치권은 연합국과의 본격적인 강화에 나서게 됩니다. 10월이 되자 독일은 노선을 바꿔, 직접적으로 미국과 접촉하게 되는데요. 이들은 그 당시 윌슨이 강력하게 내세우고 있던 그 유명한 '14개 조항'에 동의하게 됩니다. 그것이 독일과 자신들의 몰락을 회피하기 위해 이뤄진 것이라 할지라도 이 부분에 대한 결과는 명백했는데요. 그것은 소위 '윌슨의 승리' 내지는 영국과 프랑스의 제국주의적 야욕이 사실상 꺾인 결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인들은 내심 라인란트를 원했고, 영국인들은 독일의 기존 식민지를 얻기를 원했지만 이는 최종적으로 윌슨에 의해 무산된 것인데요. 이것은 마치 처칠이 전후, 영국의 제국주의적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숨겨진 의도를 스탈린과 함께, 이를 획책했음에도 불구하고 루스벨트에 의해 사실상 분쇄된 것과 유사한 장면으로 느껴졌습니다. 

끝으로, 저자인 테일러를 통해, 전후 과정에서 새롭게 알게 된 점은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미국이 영국의 방해 없이 사심없는 방향으로 독일과 협상에 나섰고, 이 협상 과정이 그간 알려진 바대로 독일에 심각하게 가혹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그의 분석은 과연 독일인들에 굴욕적인 협상 조건과 타협 없는 배상금으로 말미암아 후에 독일인들이 '그 문제의 인물'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기존의 전형적인 분석과도 배치되는 부분입니다. 물론 민족적 자긍심이라는 개념을 어느 정도 오늘날 수준에 맞춰 이해한다면 당시 독일인들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겠는데요. 다만, 이 부분을 역사수정주의로 판단해야 될지는 아마도 독자들의 몫이 되겠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전자는 더할 나위 없이 케인즈의 우려와 맞닿아 있는 부분입니다. 여기서 조금 더 분명한 사실은 독일의 민주주의가 역설적으로 당시 독일 군부에 의해 시작되었고, 이어지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종말 역시, 나치즘이라는 전체주의적 군국주의에 의해 이뤄졌다는 점입니다. 이는 이전 시대의 복합적인 결과의 산물로 이상주의자 윌슨이 의회에 동의조차 받지 못한 채, "불구가 된 평화안'으로 밀어부쳤지만 결국 민족주의라는 불씨를 유럽에 살포하게 됩니다. 그것도 유럽인들만의 민족주의로 말입니다. 이러한 파국을 준비한 세계의 일각에서 우리는 히틀러의 출현을 목도 했고, 평화를 입으로만 외친 강대한 이상주의자가 스스로 실효적인 행동에 이르지 못한 채, 민족주의의 양면성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결과는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참혹한 두번째 세계 대전이었습니다.    


-본문 216 페이지에 오탈자 한 곳이 있었고, 341페이지에는 띄어쓰기 오류 한 곳이 있었습니다.


-전후 과정에서, 옛 동프로이센 지역의 단치히를 끝내 자유시로 만든 것은 독일인들의 민족적 자존심을 심각하게 훼손시킨 것으로도 읽히는데요. 이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저자인 테일러는 6장 후반부에서 쉽게 시선을 거둘 수 없는 어떤 서사를 새겨놓고 있었습니다. 이 부분을 따로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합스부르크제국이 사라지자, 쪼그라든 오스트리아의 독일계 주민들이 독일에 참여하기를 원했다. 민족이 통일하겠다는 데 이보다 더 분명한 이유는 없었다. (중략) 그러나 독일인들은 누구의 동의도 없이 적어도 한 명의 오스트리아인을 얻었다. 바로 아돌프 히틀러 Adolf Hitler 였다.

     

         

 

    




7월 25일 세르비아인들이 간신히 체면만 차릴 정도의 유보를 붙여서 통첩을 받아들였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즉시 세르비아와 관계를 단절했고, 다음 날 전쟁을 선포했다.

그들은 영국 대함대가 안전하게 지켜주기에 침략당할 위험이 없었고, 명분을 위해 전쟁에 참전했다. 그 명분이란 "약소국 벨기에"의 중립과 독립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어떤 면에서 제2차 세계대전보다 군수품을 훨씬 더 소모하는 전쟁이었는데, 이는 기계, 전차, 항공기에서 그런 것은 아니고 총포와 포탄에 있어서 그랬다.

키치너는 이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의심은 했지만 영국이 기여하는 바가 적어 난처했기 때문에 프랑스인들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는 극도의 충실함으로 이를 극복해보려 했다.

어느 나라에서든 민간인 각료들은 감히 장군들을 비판하거나 그들에게 도전하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각료들이 독립적인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영국인들은 5만 명이 넘는 병력을 잃었다. 독일인들은 2만 명이었다. 프랑스인들은 19만 명을 잃었다. 독일인들은 12만 명이었다. 그럼에도 조르프는 여전히 기가 살아 있었다.

10월 5일 영국 사단 하나와 프랑스 사단 하나가 중립국 그리스의 테살로니카에 상륙했다. 독일의 벨기에 침공과 마찬가지로 실행된 방식이 파렴치한 행동이었다.

베르됭 방어로 페탱은 명성을 얻게 되었다.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대령이었는데 베르됭 전투 후에 프랑스의 원수가 되었고, 마침내 프랑스의 국가수반이 된 것도 오로지 베르됭 덕이었다.

연합국은 전쟁 전의 국경을 시작점으로 여겼고, 독일인들은 현재의 참호선을 시작점으로 생각했다.

로이드 조지가 최고 권력을 쥐게 됨으로써 런던에서 타협을 통한 강화에 대한 이러쿵저러쿵 시끄러운 이야기가 은연중에 멎었다.

연합국에 따르면 오로지 도덕 원칙들을 확립함으로써만 앞날이 안전해질 수 있었는데, 독일의 시각에서 이 원칙들은 독일이 다른 유럽 국가들에 종속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한 사람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취리히에 망명해 있는 볼셰비키 지도자 레닌이었다. 그는 독일인들을 패배시키거나 세계를 안전하게 만들어 민주주의를 지키는 데 관심이 없었다. 그는 현존하는 모든 정부를 전복하고 국제 사회주의를 세우기를 원했다.

이때부터 전쟁이 "윗사람들의 전쟁","경쟁하는 제국주의 간의 전쟁"이라는 믿음이 생겨났다. 국민들은 아무것도 얻는 것 없이 그들의 이익을 위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전쟁이었다.

독일인들과 오스트리아인들은 러시아 점령지에서 밀을 들여왔고, 볼셰비키들과 강화 협정을 조인한 후에는 훨씬 더 많이 가져왔다.

독일은 정복한 곳들, 특히 벨기에 점령지를 보유하겠다는 의도를 공식적으로 새롭게 밝혔다.

독일 국민은 놀랍게도 독일이 최고 사령부의 명령에 의해 민주적인 국가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로이드 조지와 클레망소는 또한 독일이 연합국 민간인들과 그들의 재산에 끼친 손실을 보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에는 이 요구로 시작된 배상 문제를 놓고 지루한 다툼이 벌어지리라 아무도 예견하지 못했다.

라인란트에 주둔한 영국군이 지휘관으로부터 하위 계급까지 봉쇄에 항의했고, 굶주린 어린이들과 여성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었다. 강화 조약이 조인되기 전에 봉쇄가 종료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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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세계대전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6
마이클 하워드 지음, 최파일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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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하워드는 영국 런던 브롬턴 출신으로 그의 부친은 제조회사의 소유주였습니다. 그리고 모친은 독일에서 온 유대인 이민자의 딸로 나중에 기독교로 개종을 하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부족할 것이 없는 가정 환경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후 그는 버크셔 크로손에 있는 웰링턴 칼리지와 옥스포드 대학의 크라이스트처치에서 교육을 받습니다. 이에 그는 1946년에 학사 학위를, 2년 뒤인 1948년에 석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그런 와중에 하워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에 입대하여 1942년 12월, 콜드스트림 근위대의 소위로 임관합니다. 그는 이탈리아 전역에서 싸웠고 1944년 1월 27일, 몬테카시노 전투 동안, 그 공로를 인정받아 군사십자훈장 (MC)을 수여 받습니다. 옥스포드를 졸업한 후, 그는 영국 런던에 소재한 공립 연구 대학인 킹스 칼리지 런던에서 교수직을 시작했으며, 이곳에서 전쟁학과가 개설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학문적 수행 과정에서, 전쟁사에 대한 부분, 특히 1870년 보불전쟁에 대해 천착했고 무엇보다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을 해석하는데 누구보다 노력을 기울이게 됩니다. 이런 군사 연구의 공로로 지난 2002년 명예 동료 훈장 (CH)을 받았고, 2005년에는 공로 훈장 (OM)을 받았습니다. 더욱이 그 이전인 1988년에는 스웨덴 왕립 전쟁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1992년에는 미국의 군사 학회인 군사 역사 협회에서 수여하는 평생 공로상인 새뮤얼 엘리엇 모리슨 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이렇게 왕성한 군사 연구를 지속해 오던 그는 2019년 11월 30일, 영국 윌트셔 주의 스윈던에 소재한 병원에서 영면에 들게 됩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The First World War : A Very Short Introduction"으로 지난 2002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5년 10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이에 제가 구입한 판본은 제6쇄본입니다.

개인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문구는 E.H. 카의 핵심적인 분석인데요. 그것은 20세기 초 유럽 문명의 진보로 인해 전쟁에 대한 낭만주의적인 분위기가 사회에 팽배해 있었다는 평가였습니다. 아마도 그런 연유로 이 대전에, "모든 것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와는 별개로 저는 마이클 하워드의 이 책을 통해,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한 새로운 몇 가지 해석을 접하기도 했습니다. 이 부분은 글을 쓰면서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914년 당시, 소위 열강이라고 불리는 유럽 각국의 정치체제는 크게 민주주의와 제정, 즉 제국주의 체제로 구별될 수 있겠는데요. 여기에 해외 식민지를 운영하는 경제 체제가 혼합된 정치제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프랑스와 더불어 당시 민주주의 체제의 일각으로 여겨졌던 영국은 소위 '입헌 군주제'의 형태이지만 인도를 비롯, 해외에 여러 식민지를 거느리고 있는 본질적으로 제국주의 국가였습니다. 이러한 이해를 기반으로 마이클 하워드 역시, 유럽 열강들의 이 제국주의 체제에서 숨길 수 없는 '팽창주의적 욕망'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미 여러 논저에서 1차대전 개전의 시발점으로 묘사되는 '사라예보의 총성'이 이 대전을 이해하는 근본적인 접근이 아니라, 이런 군주제에 속한 열강이 스스로 영토에 대한 야욕을 제어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그 원인을 찾아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선 E. H. 카의 전쟁에 대한 낭만주의적 접근이 사회에 팽배해 있었다는 분석은 다른 한편으로 보다 개방된 자유주의적 국가들에게서 평화와 평화주의에 대한 인식이 소위 독일과 같은 지역에서는 '도덕적 타락 징후'로 여겨졌다는 하워드의 해석 만큼이나 의미심장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저는 일전에 카를 슈미트가 바이마르 공화국의 계몽주의적 자유주의, 그런 정치사회적 풍조에 더할 나위 없는 공격을 넘어 거의 경멸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슈미트의 의도는 아주 명백합니다만 그만큼 프랑스와 영국으로 대변되는 자유주의 정치가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있어, 표면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어느 정도 이질적이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즉, 자신의 제국민들을 통치 대상으로 보는 전제 정치의 수뇌부들에게 있어 이런 생각은 보편적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대전 중에 러시아에서 발생한 '소비에트 혁명'에 대해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신경질적이고 예민한 반응은 그것대로 타협할 수 없는 부분이었을 겁니다. 더욱이 독일이 대전에서 패망하게 된 근본 이유들 가운데 하나가, 각지에서의 소요와 노동자들의 파업이 한몫했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팽창주의적인 군주제에 있어 이 '체제 유지'라는 것이 그만큼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과제였다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1914년 7월,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최후 통첩을 하면서 이 소국을 확실히 손을 보려고 합니다. 자신들의 이런 영토 야욕이 포함된 정치적 행위에 동맹국인 독일이 효과적으로 러시아를 저지해주길 바랍니다. 그들은 손쉽게 세르비아를 제압해 제국의 위상과 그에 따른 이익을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아마 확신했을 겁니다. 독일 역시 이런 오스트리아의 군사적 행태를 냉정하게 자제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 쯤에서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판단하게 됩니다. 독일의 카이저인 빌헬름 2세, 특유의 완고함도 작용했을겁니다. 이에 마이클 하워드는 빌헬름 2세로 대표되는 독일 제국의 문제점을 1장에서 드러내기도 합니다. 독일 제국 이전의 프로이센이 보여줬던 구식의 군국주의와 솟구치는 야망, 신경증적 불안감이라고 그는 증언하고 있는데요. 내치를 사회주의와 보수주의 중간에서 절묘히 타협하며, 비교적 이를 잘 수행해 왔던 카이저의 평가와는 달리, 전쟁 즈음의 외치와 그 무력한 결단은 그가 후세에 왜 나폴레옹 3세와 사뭇 다른 평가를 받는지 우리는 이해할 수 있는데요. 물론 독일 제국이 제국 총리와 참모부로 이어지는 권력 분립의 형태가 외형상 유지되고 있었지만, 제국을 이끄는 정점인 '황제의 오판'을 이러한 분립 체제가 결국 제어할 수 없었다는 점은 역시나 자명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후 독일의 벨기에에 대한 진공과 서부 전선의 지리멸렬한 대처, 1916년 이후의 극심한 인명 피해가 발생한 '대량의 소모전'은 이 1차 대전을 수식하는 문구입니다. 더욱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참호전과 양측을 가릴 것 없이 비인간적인 '독가스 살포'는 그야말로 인간성의 말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그것이 손쉬운 군사적 이익에 기반해 있다 변명한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같은 해에 있었던 베르됭 공세와 아미앵 인근의 솜 강 전투는 이를 명백히 드러내는 결과로 자리매김 했는데요. 여기에 더 오스트리아의 회첸도르프가 수행한 이탈리아 전선에서의 대실패는 이듬해인 1917년의 미국 참전과는 별개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프랑스에게 굴욕적인 '강화 간청'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즉, 독일의 루덴도르프와 힌덴부르크로 대표되는 유능한 군사 지도자들의 면면과는 반대로 대다수 장성들의 고질적인 무능으로 전선을 궤멸시키기도 했으며, 더 나아가 자신의 완고한 고집으로 부하들의 막대한 희생을 초래했다는 점에서, 당시 효과적인 군사 기술 발전과는 별개로 이를 다루는 인간들의 무능이 얼마나 위험한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세계 1차 대전의 본질적인 측면은 과거 나폴레옹과 같은 일부 장성들의 우월한 군사적 능력이 전쟁 전반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각 산업 사회의 지구력 싸움과 얼만큼 보급과 물자를 전선에 효과적으로 지원할 수 있겠는가로 판명되었습니다. 특히 영국과 비해 일천한 해군 전력을 가졌던 독일이 전략적인 '무제한 잠수함전'을 통해, 연합국에 피해를 안겨, 발트해 봉쇄에 대한 약점을 극복하려고 했지만 이러한 작전은 사실상 실패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이에 마이클 하워드가 평가한 바대로 대전의 3번째 겨울을 이미 경험한 독일인들이 다시 4번째 겨울을 겪게 되었을 때, 이를 모두가 격렬히 부정했다는 점에서 단순한 카이저의 정치적 추락 정도가 아니라 독일의 전쟁 수행 의지가 내부에서 처절하게 꺾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다만, 이토록 전쟁을 직접 끝내기 위해 나섰던 다수 독일인들이 어떻게 후에 전체주의적 괴물의 본류 그 자체가 되었는지는 지금도 쉬이 이해가 되지는 않습니다. 저자인 하워드는 보수 우파에 대한 독일인들의 뜻모를 지지가 후에 나치즘의 시초가 되었다는 식으로 간접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만 히틀러의 인종적 균질주의와 순혈 게르만주의라는 괴물이 어떻게 독일 사회에 지속적으로 웅크리고 있었는지를 설명하기란 지금에도 매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끝으로 미국의 참전으로 패권적 야심과 잔혹한 전쟁 수행 방식을 추구하는 독일 국가에 대한 민주주의 국가들의 동맹이라는 저자의 야심찬 분석은 익히 이해가 되기는 합니다. 대전 이후, 그 강화 과정에서 케인스가 우려했던 독일에 대한 강고하고 야멸한 정치적 압박은 독일인들의 민족적 분노를 자아내게 한 것은 주목할 만합니다. 더욱이 우드로 윌슨의 소위 자유주의적 국제 질서의 제안이 자신의 의회에서 거부당한 것과 본질적으로 한계를 갖는 '민족 자결주의'가 발칸반도를 비롯 동유럽에 전쟁의 씨앗을 남겨 놓은 것은 분명합니다. 특히 어떤 연유인지 모르겠지만 국제 연맹에 대한 자신의 아이디어를 위해, 의회의 공화당을 제대로 설득하지 못한 윌슨의 정치적 무능은 두고두고 '평화'에 대한 해법이 되지 못했습니다. 물론 그가 당시에 심각한 지병을 앓고 있어 그것이 이런 한계의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 새삼스레 조명을 받고 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또한, 후에 루스벨트에 의해 사실상 분쇄되기는 했지만 2차 대전 당시 처칠의 영국 제국주의에 대한 일종의 '회귀주의'는 이 제국주의에 대한 향수 내지는 그것에 따른 국가적 이익을 일부 정치권이 여전히 공유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만큼 서구 정치 역사 전반에 있어 계몽주의적 자유주의의 이행이 그만큼 겉모습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을 반증하는 사례라고 여겨집니다. 그들의 자유주의에 대한 소위 헌신과 숭배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카이저의 개인적 성격은 압도적으로 중요했고, 이 시점에서 호엔촐레른 왕가가 빌헬름 2세라는, 당시 독일 지배 엘리트의 특징을 규정했다 할 수 있는 세 가지 특성을 체현한 인물을 배출했다는 것은 독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불운이었다. 세 가지 특성이란 구식 군국주의, 솟구치는 야망, 신경증적 불안감이었다.

영국의 정치가들은 미국의 막대한 자원을 감안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미국과의 대결은 피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영국의 경우, 발칸 반도와 관련된 이해관계는 미미한 반면 국내 문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유럽 전쟁이 일어난다면 영국이 팔짱을 끼고 프랑스가 독일에 패하는 꼴을 방관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오스트리아는 필요하다면 군사력을 동원해서라도 세르비아를 확실히 제압해야겠다고 결심했고 그동안 동맹국 독일이 러시아를 저지해주길 바랐다.

슐리펜 본인은 앞서 본대로 러시아의 위협을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지만 1914년에 이르자 위협이 워낙 크게 느껴져, 독일 군사 계획가들은 자신들이 파리에 닿기 전에 러시아 군대가 먼저 베를린에 입성할지도 모르는 상황을 우려했다.

자유주의적 평화주의는 서구 민주주의에서 여전히 영향력이 있었지만 특히 독일을 비롯하여 도처에서 도덕적 타락의 징후로 여겨졌다.

회첸도르프의 처참한 겨울 공세 이후 1915년 봄까지 오스트리아 군은 앞서본 대로 10역 가지 언어를 사용하는 군대를 하나로 묶는 직업 장교 대두분을 비롯해 200만명이 넘는 병력을 잃었다.

특히 동부전선에서의 승전들로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의 명성이 한없이 높아져, 1916년 8월에 총사령관 팔켄하인을 교체했을 때 두 사람은 군부뿐만 아니;라 사실상 나라까지 장악했다.

미국의 참전은 패권적 야심과 함께 잔혹한 전쟁 수행 방식을 추구하는 독일 국가에 대한 민주주의 국가들의 동맹을 완성시켰다.

독일과 주고받은 통고문에서 윌슨은 자신이 더이상 자비로운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아니라, 완강한 전승국 동맹의 지도자임을 분명히 했다.

미국 의회가 대통령이 요구한 조건 대로 국제연맹에 가입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자신의 작품이 파괴되는 상황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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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스팬스 : 깨어난 괴물 1 익스팬스 시리즈
제임스 S. A. 코리 지음, 최용준 옮김 / 아작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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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xpanse의 공동 작업자인 대니얼 에이브러햄과 타이 프랭크가 사용하는 필명입니다. 우선 대니얼 제임스 에이브러햄은 미국의 소설가와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했고, 동시에 텔레비전 프로듀서이기도 합니다. 그는 뉴멕시코주 앨버커키에서 태어났고 뉴멕시코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특히 그는 2006년에 단편 소설 'Flat Diane 플랫 다이앤'으로 미국 최고의 공상 과학 및 판타지 작품상인 '네뷸러상'을 수상합니다. 또한 2008년에 'The Cambist and Lord Iron: A Fairy Tale of Economics 캠비스트와 로드 아이언'으로 휴고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다른 공저자인 타이 프랭크는 에이브러햄과 마찬가지로 소설가이자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했는데요. 그는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 출신으로 이미 에이브러햄과 다수의 공동 작업을 해 온 바가 있습니다. 이미 2014년에 에이브러햄과 함께 스타워즈 소설인 'Honor Among Thieves'를 공동 집필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최근인 2024년에는 마찬가지로 에이브러햄과 함께 'The Mercy of Gods 신들의 자비'를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에이브러햄과 프랭크 두 작가의 공동 작업인 이 '익스팬스'는 원제, "The Expanse : Leviathan Wakes"로 지난 2011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6년 7월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지난 2014년 4월, 미국 텔레비전 채널인 Syfy에서 이 작품이 드라마화하여 방영하기 시작했을 때, 이미 시즌 1을 영상으로 접한 바가 있는데요. 이 TV 시리즈를 기반으로 하여 익스팬스의 여러 굿즈 판매와 번외 출판이 이뤄지기도 했습니다. 당시에 이 작품은 사람들에게 소위 '스페이스 오페라'라는 장르로 홍보되었고, 여기에 투입된 컴퓨터 그래픽과 우주 설정은 그 당시로서는 꽤나 인상적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기억이 가물거려 작품에 등장하는 '나오미 나가타'의 극중 배역의 여배우가 한참이나 떠올리지 않았는데요. 특히 개인적으로는 TV 시리즈의 원전 소설인 이 작품을 읽을 때는 영상에서 봤던 배우들의 연기와 얼굴을 최대한 오버랩되지 않게 노력해야만 했습니다.

우선 이 작품은 두 공저자가 설정해 놓은 바로, 우리 태양계를 직접적인 소설의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요. 금성과 지구, 화성은 물론 포에베와 에로스, 세레스, 타이탄, 가니메데, 이오 등 태양계 안의 행성과 위성들을 인류의 개발된 정착지로 놓고, 이 지역들의 복잡한 정치적 셈법과 더불어 인종적 갈등까지 무대에 올리는 그야말로 단순하지 않은 '스페이스 정치 드라마'로 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특히 극중에서 묘사되는 타이탄의 다층적인 대기 현상은 상상력을 절로 자극할 정도였습니다. 물론 이러한 설정은 극을 이끌어 나가는 여러 평범한 요소들 중 하나로, 이중에 가장 극적인 사건은 바로 '포에베 과학 스테이션'의 비극적 실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토성의 위성인 포에베에 비밀 과학 실험소가 있다는 설정 자체가 우리 문명에 있어선 꽤나 있을법한 요소지만 다른 한편으론, 뭔가 생경한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 과학 스테이션의 예상치 않은 미스테리는 이 극 전체를 좌우하게 되는 일종의 파국이 되었습니다. 

인류가 태양계에 적극적으로 진출하게 된 원동력이었던 진보된 엔진 출력 장치인 '우주선 드라이브'의 발명은 획기적인 방식으로 이뤄지게 됩니다. 그런 연유로 소행성인 에로스가 심우주 진출의 중간 기착지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태양계의 위성과 소행성들의 개척이 시작됩니다. 특히 소설에서 세레스의 중력 발생을 위해 회전 가속을 강화시키는 기술 같은 획기적인 장치들이 나타나기도 했는데요. 뿐만 아니라, 지구의 중력인 1G가 아니라, 0.5G 이하에서 태어난 소행성대의 출신인 소위 '벨트인'들이 키는 크지만 반대로 가는 몸체에 전체적인 뼈의 밀도 역시 우리와 다른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결국 내행성과 외행성 간의 지독한 정치적 갈등과 이 양(兩) 지역 출신 인간들의 사뭇 다른 외형적 모습으로 인해. 서로가 서로를 혐오하고 비웃는 차별까지 드러나게 됩니다. 여기에 초기 화성 이주와 그 개척 단계에서 뛰어난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이 지구에서 파견되었던 나머지, 결국 이들의 후예가 현재 지구보다 더 가공할 군사 기술을 바탕으로 고도로 집적된 '전투선'을 보유하고 있는 설정도 꽤나 흥미로운 부분이었습니다. 이 화성 의회 정부는 지구로부터 독립했고, 과거에는 수차례 서로 전쟁까지 했다는 설정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소행성 지대의 순수한 벨트인이기도 한 밀러 형사는 지구의 총독이 행정 총괄을 하고 있는 세레스 기지의 '경찰'입니다. 토착 벨트인 답게 그가 키가 2미터가 된다는 설정까지 있습니다 (다음 2권에서). 그는 극중에서 "형사가 된다는 건 늘 관음증의 요소와 관련이 있었다"는 묘사와 연계될 정도로 사물과 인간에 대해 섬세하고 민감한 인물인데요. 그는 서장으로부터 받은 임무인 루나의 우주 기업 총수의 딸인 '줄리 마오'의 실종을 수사하다 그녀를 뼛속 깊이 인식하게 됩니다. 실패한 가정에 대한 가볍지 않은 죄책감을 항상 마음에 품고 다니던 밀러는 줄리에 대해 일종의 부성애가 포함된 감정을 느끼는 것으로 이해되는데요. 이러한 가운데 다른 주인공이기도 한 제임스 홀던도 토성 외곽에서 얼음 자원을 채취해 세레스로 이송하는 우주선에서 부선장으로 있던 중, 작품의 흑막이 되는 어떤 세력의 스텔스 함이 쏜 핵 미사일로 인해, 그가 근무하던 '켄터베리'함의 승무원들이 전부 우주의 먼지로 사라지게 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굴욕과 고통을 겪게 됩니다. 홀던은 자신을 따르는 살아남은 동료들을 데리고 그 진실을 파헤칠 것을 스스로 강하게 다짐하게 되는데요. 앞선 줄리 마오에 대해 더할 나위 없는 연민과 그때 그때의 감정적 동일시를 느끼는 홀던 역시, 줄리 마오의 비극적 최후에 연관이 있는 자들을 몸소 추적하여 단죄할 것을 마찬가지로 결심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류의 우주 개척 시기는 지금과 다를 바 없이, 만연한 인종 차별과 계층 간의 심각한 자원의 차이 역시 여전한 실정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거대한 우주선이 '엡스타인 드라이브'를 장착하고 토성 이후의 먼 우주까지 오가는 시대에서, 자본주의의 근원적 문제가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모습으로 설정에서 나타나고 있는데요. 더욱이 공권력의 한 중요한 요소라고 볼 수 있는 경찰권이 소설에서 민영화 작업이 이미 완료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 연유로 1권에서 드러나는 벨트인들에 한정해서는 이들의 인권은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또한 화성은 거대한 군국주의화가 되어 있어, 이를 역사적으로 비교해보면 구소련과 2차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을 절로 떠올리게 하는데요. 더욱이 벨트인들의 정치 집단이자 준 군사조직인 OPA는 요즘의 헤즈볼라나 하마스를 떠올리게 됩니다. 이를 좀 더 달리 표현해보면, 마찬가지로 과거의 IRA과도 오버랩되기도 합니다. 이들이 수많은 벨트인들의 안전과 삶을 위한다는 프로파간다는 너무나 익숙한 어법이고, 군사력의 보유와 그것으로 인한 외부에 대한 폭력은 쉽게 이데올로기화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들의 의도는 거의 명백합니다. 다만, 이번 분량에서 지구의 정치와 군사가 아직 상세히 나오지 않고 있어 정확히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이미 지구의 인구가 200억 명이 넘었고 그로 인해 자원의 배분 문제 역시, 대략적으로 마냥 좋다고만 볼 수 없는 상황이 머릿속에서 예측됩니다.


어찌됐든 1권 후반부에서 줄리 마오의 비참한 최후가 드러났고, 두 주인공인 홀던과 밀러가 극적으로 에로스에서 조우하게 되었습니다. 다음 2권은 흑막의 정체가 어느 정도 드러날 것으로 여겨지는데요. 저 개인적으로는 TV 시리즈에서 '나오미 나가타'가 원작과 다르게 인물 왜곡이 너무나 진행되었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원작 소설에서는 과연 어떠한 행보를 보이게 될지 사뭇 궁금하기도 합니다. 또한 홀던의 성장과 밀러의 인간적 평안이 최후에는 가능하게 될지 이 부분도 기대되는 부분인데요. 그런 연유로 2권 역시 빠르게 일독해 보려고 합니다.



태양계의 법은 무조건적이었다. 우주처럼 생명에 적대적인 환경에서 같은 인간들을 돕고 선의를 베푸는 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밀러의 손은 샤디드 서장의 손만큼이나 더러웠다. 가끔 사람들은 에어록 밖으로 떨어졌다. 어떤 때는 창고에서 증거가 사라졌다.

"그 물은 우리에게 미래의 공기였고, 추진제였으며 음료였어.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해서는 유머 감각이란 게 없다고."

그리고 자신이 겪은 일은 뭐든 자기 맘대로 해도 된다는 허가증 정도로 여기는 이들이 있었다. 그런 이들이 나머지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진동을 일으키니는 건 소규모 화기와 소형 폭탄이리라. 하지만 완벽하게 고요한 진공 속에 서 있으니, 모든 게 저 멀리서 벌어지는 일 같고 초현실적이란 느낌이 들었다.

해브록의 책상은 텅 비었으며, 마치 소행성대의 훌륭한 의자에 지구인의 냄새가 배지 않기를 원한다는 듯이 관리실에서는 두 번이나 청소를 했다.

가혹한 진공에 둘러싸인 바위 돔 속에서 소소한 삶을 사는 평범한 사람들, 만약 스테이션이 폭동 지역으로 바뀌는 걸 그냥 두고 본다면, 질서가 무너지게 그냥 둔다면, 이 모든 사람의 삶은 고기 분쇄기 안의 새끼 고양이처럼 으깨질 수밖에 없었다.

화성은 소행성대가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고, 소행성대는 자신들이 잃을 게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는 죽음을 향한 길이었으며, 이제껏 인류가 한 번도 겪은 적이 없는 규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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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과 규칙 - 국제질서에 대한 두 가지 관점 서울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사회과학연구총서 8
박종희 지음 / 사회평론아카데미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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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저를 쓴 박종희 교수는 서강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2007년 미국 워싱턴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이후 2007년부터 2012년까지 미국의 사회과학 명문 시카고 대학에서 정치학과 조교수로 근무했습니다. 2012년부터는 서울대 정치외교학부에서 국제정치경제와 방법론 및 데이터 사이언스 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는 2010년에 미국 정치학회로부터 최우수 방법론 논문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선거여론조사에 대한 메타 분석이 특히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또한 박교수는 국제뉴스를 이용한 안보환경 분석과 경제자료를 이용한 경제안보 분석에도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요. 현재는 대학 강단에서의 활동 뿐만 아니라, 언론과 여타 강연, 심지어 유튜브 강연에서도 그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대한 새로운 제언을 담은 야심찬 그의 이 논저는, 2024년 9월에 출판되었습니다.

그의 이 책은 러시아와 중국으로 대표되는 비자유주의 강대국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앞으로 미국이 주도했던 자유주의 국제 질서의 미래를 예측해 보고, 특히 최근 미국 국내 정치에서 자유 무역, 자유 시장으로 대표되는 그간 미국의 대외 개방과 무역이 2016년 트럼프의 등장으로 인해, 어떻게 노선이 틀어지게 되었는지를 우리 독자들을 위해 세밀히 분석해 내고 있습니다. 더욱이 2016년 미 대선에서 왜 힐러리 클린턴과 민주당이 트럼프에게 정권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설득력 높은 분석이 이 논저에 담겨 있었는데요. 그동안 로널드 레이건과 빌 클린턴으로 이어지는 신자유주의적 기조의 쇠퇴 원인이 거대한 도덕적 해이로 이해되는 2008년의 대위기에서 뿐만 아니라, 극단적 포퓰리스트로 치부되는 도널드 트럼프라는 기형적 정치인의 기존 정치 무대의 등장도 크게 한 몫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저자의 분석에 의하면 이전부터 미국 정치 무대에 존재했던 포퓰리즘 정치의 잔재와 앞선 신자유주의적 개방 경제에 삶이 나날이 악화되어 가던 백인 노동자들의 정치적 반란이 이 반체제적인 '트럼프 효과'와 맞물려, 자유주의 국제 질서의 큰 원동력이었던 개방 무역과 자유주의적 경제 기조가 트럼프식 보호 무역으로 귀결되었다고 판단되고 있습니다. 

저자는 글 초반부에서 현재 미국 정치권과 많은 국제정치학자들이 '세력권 질서'에 대한 실질적 의미에 대해 애써 무시하고 모른척 하고 있지만 사실상 첨예화 된 냉전 시기에 미국과 서유럽이 주도했던 소위 '자유 진영'이 트루먼 행정부 이후에 소련 공산권을 철저하게 봉쇄함으로써 냉전의 종식을 완성한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유 세계, 자유주의적 국제 룰이 미국의 국익에 합치되었던 것은 거의 부정할 수 없을 텐데요. 여기서 언급되는 존 아이켄베리의 분석에 따르면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헌정주의에 해당된다"는 점은 앞선 맥락을 잘 설명하기에 이릅니다. 즉, 세력 질서의 메커니즘과는 달리, 그동안 이어진 자유주의적 국제 질서는 일종의 규칙과 그에 따른 중요 합의로 이어지고, 미국은 역시나 초강대국이었지만 사실상 이러한 체제를 선호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물론 자유 진영 대 공산 진영의 냉전적 대결 구도에서는 미국이 중앙 아메리카와 남 아메리카 여러 국가들에 CIA를 동원해 벌인 비극적 정치 공작이 얼마간 있었으나, 전반적인 미국의 힘의 원천은 '자유주의적 함의와 자유 무역'에 기인한 바가 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이 자유주의적 국제 질서가 어떻게 역사적으로 잉태되었는지 저자는 우드로 윌슨으로 비롯되어, 이어지는 제2차 세계대전 전후, 윈스턴 처칠의 사실상 구체제로의 복귀에 대한 야망, 이오시프 스탈린의 영토 자체에 대한 야욕을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어떻게 이를 조정해 왔는지를 잘 드러내고 있는데요. 또한, 4장에서 이렇게 자유주의적 국제 질서가 틀을 잡혀갈 무렵, 이 체제를 유지하고 있던 소위 자유 진영의 국가들이 비자유주의 국가들의 세력권 질서로의 회귀 추구를 사실상 통제했다는 것도 주목할 만한 부분인데요. 이는 정권을 거치면서 국제정치적 함의가 일정하지 않았음에도 미국의 영향력이 지속적으로 발휘된 결과이기도 합니다. 이에 러시아의 푸틴이 열망하는 과거 구소련의 공산권으로 대표되는 세력 질서로 회귀하고자 하는 일련의 정치적 행위 추구 자체가 현재의 국제 정치 체제로는 어려운 부분인 것은 분명합니다. 이에 현재 특수 군사 작전으로 명명된 푸틴의 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의 실패가 이를 여실히 증명하는 부분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을 설명하는 1부 3장의 후반부 진술에서, 바이든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해, "우크라이나 인에게 빚을 졌다."는 언급은 어떻게 보면 자유주의 국제 질서의 온존을 위해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맞서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는 식으로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아마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고자 하는 모든 국가와 개인들이 우크라이나에 대해 비슷한 감정을 느낄 것이다."라는 평가는 이처럼 깊은 동질감을 갖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 역시도 저자인 박교수가 인정했던, 자유주의 국제 질서가 사실상 공공재에 가깝다는 평가에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미국은 이 자유주의 국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시장을 동맹국과 우호국에게 개방해 왔고, 이 책의 2부에서 본격적으로 서술되는 바와 같이, 자유 무역과 자유 시장에 대한 굳건한 원칙을 갖고 있었습니다. 앞서 설명한 바대로 이러한 원칙이 크게 흔들린 계기가 바로 '도널드 트럼프 효과'와 그의 집권이었습니다. 저자는 2016년 '미국의 무역 정치의 새로운 균열'이라는 소제목으로 이를 분석하고 있는데요. 로널드 레이건이 시작해 빌 클린턴이 완성한 이 신자유주의적 체제가 자유 무역에 대한 민주당 지지자들의 변화와 민주당 정치인들의 사실상 노선 변화로 말미암아 '자유 무역의 개방성'이 확보되고 확장되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 무역 체제가 한때 '세계의 공장'을 자임했던 미국 산업의 경쟁성을 서서히 악화시켰고, 국내의 제조업 기반이 해외로 점차 유출됨에 따라 종래의 미국 백인 노동자들이 일자리와 기회를 잃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 개인적인 분석이기도 하지만 월 스트리트와 세련된 금융인으로 대표되는 민주당 기반 엘리트 들에 대한 심각한 적대감이 공화당을 지지하는 백인 노동자들의 반란으로 이어졌다고 여겨지는데요. 물론 공화당 역시도 자유 시장과 개방된 국제 무역을 지지하고 있었지만 자신을 지지하는 지지층의 분화와 더불어 극단적인 당파성으로 말미암아 미 공화당 내부에 극단주의자들이 틈을 노려 세를 확장한 것은 분명 심각한 문제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끝으로, 저자의 강조대로 21세기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두 가지 중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첫째는 중국과 러시아라는 비자유주의 강대국의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대대적으로 수정하여 세력권 질서를 구축하고자 하는 시도이고, 둘째는 미국 국내 정치에서 개방에 대한 사회적 합의의 급속한 약화와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교란시키는 미국 행정부의 구조적 일탈행위의 등장입니다. 대략 살상 무기인 핵무기를 보유한 비자유주의 국가의 존재는 그만큼 심각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여기에 국제 문제와 체제 전반의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미국 정치 내부의 극단주의화는 앞으로 자유주의 국제 질서의 암울한 미래로 예견되기까지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어지는 미국 대선은 무엇보다 중요한 모멘텀이 되리라 여겨지는데요. 여기에 우크라이나 전쟁의 지리멸렬한 지속에 대한 문제도 그렇고, 중국이 2027년 이후, 대만을 본격적으로 침공해 '하나의 중국'을 완성하려는 시도 자체도 자유주의 국제 질서에 크나큰 위협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물론 저자는 앞으로의 해결 방안을 위해, 협력적인 자유주의 상호 의존을 들면서, 해외 직접 투자의 문호를 각 국가가 완전히 개방하는 것을 필두로, 자유 무역에 대한 지속적인 함의를 요구하고 있기도 합니다. 물론 이는 충분히 공감할 만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베트남 사례와 마찬가지로 이 중국과 러시아로 대변되는 핵무기를 가진 비자유주의 국가가 과연 다른 자유주의 국가들과 평화로운 공존에 이를 수 있을지는 헨리 키신저보다 더 강한 유인이 필요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특히, 게리 거스틀도 인정한 바와 같이, 미국이 전쟁과 개입을 통해, 과거 일부 비자유주의 국가에 자유 민주주의를 이식하려고 했던 실패한 역사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하지만 무엇보다 백악관의 주인을 뽑게 되는 다음 대선에서 미국 유권자들의 세계인들이 인정할 만한 지혜로운 결정이 먼저 수반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국제사회는 기본적으로 무규범의 상태이며 국가보다 상위의 권위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국가들은 마치 자연 상태의 개인처럼 심각한 불안과 갈등에 직면할 수 있다.

국제질서는 단순한 규칙의 집합이 아닌, 권력과 이익의 배분을 반영하는 사회적 제도로 이해할 수 있다.

모든 국제질서는 해당 질서의 구축과 유지로부터 발생하는 편익과 비용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에 대한 원칙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레이건 행정부의 강력한 압력으로 서독과 일본은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고 1985년 플라자 합의가 이루어졌다.

미국을 제외한 G5, 특히 플라자 합의 이후 장기 불황을 경험한 일본은 미국이 긴축정책을 통해 쌍둥이 적자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기보다는 동맹국들에게 그 부담을 전가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의회민주주의의 본질적 특징인 권력분립과 헌정주의는 부르주아의 이익을 도모함과 동시에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개인의 기본적 인권을 지켜줄 수있는 제도적 장치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공산주의의 침투를 막기 위해 일본, 한국 등 동맹국들의 외교정책 결정에 대해 명시적인 통제 메커니즘을 행사했는데, 이는 문자 그대로 이들 국가의 주권을 제한하는 것이었다.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처음 출현한 20세기 초부터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괴롭혀온 핵심적인 질문이 있다. 그것은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비자유주의 국가들 (전체주의, 공산주의, 왕정, 권위주의 등)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반면 비례주의 선거제도에서는 소수정당의 진입 장벽이 낮고 소수의 응집된 이해가 잘 반영되기 때문에 10~20%의 지지를 가진 반자유무역주의자들이 극우정당이 극좌정당을 결성하거나 주요 정당들과 선거연합을 결정할 수 있는 여지가 훨씬 크다.

2016년 선거에서 과반수 이상의 유권자들이 트럼프를 선택한 지역은 대부분 중국 충격의 직격탄을 가장 크게 맞은 곳이었으며 공교롭게도 이들 지역은 2016년 대통령 선거의 주요 경합주였다.

그러나 클린턴 행정부 시절을 거치며 민주당이 세계화를 주도하는 정당이 되면서 지지자들 역시 2000년 49%의 높은 비율로 자유 무역을 선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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