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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다음 세상을 위한 텐 레슨 - 개인의 운명과 세상의 방향을 결정지을 10가지 제언
파리드 자카리아 지음, 권기대 옮김 / 민음사 / 2021년 4월
평점 :
인도 뭄바이의 샤이크 무슬림 가정에서 태어난 파리드 자카리아는 미국의 소위 주류 언론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기자이자 정치평론가로 일단 그의 정치적 성향은 중도 좌파나 혹은 정치적 중간 계층에 가까운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는 예일대학에서 학사를, 하버드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 받게 됩니다. 이후 그가 28세이던 1992년에 '포린 어페어스' 편집장으로 임명되고 동시에 컬럼비아 대학에서 겸임 교수로 활동합니다. 그리고 2000년 10월에는 뉴스 위크의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하게 되는데요. 현재는 CNN에서 자신의 이름을 건 시사 프로그램을 진행중인데, 파리드 자카리아 GPS가 그것입니다. 또한, 워싱턴 포스트에 매주 유료 칼럼을 기고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처럼 그의 대부분의 경력이 언론과 싱크탱크에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데요. 스스로 이런 평론가로서의 삶이 민주주의에 기여하는 바가 분명 있다고 진술했던 것으로 보아 단순히 돈이나 명예 때문에 움직이는 인물은 아닌 것으로 생각됩니다. 따라서, 자카리아는 과거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시절에 당시 백악관을 강도 높게 비판한 바가 있고 그럼으로 스스로를 '중도주의자'라고 지칭하는 만큼 거의 자유주의적 좌파에 가까운 인물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이 책은 원제, "Ten Lesson For A Post-Pandemic World"로 지난 2020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4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자카리아의 이 책은 전세계의 펜데믹 사태 이후, 과연 세계가 어떠한 모습을 하게 될 것인가에 대한 스스로의 통찰을 담은 일종의 광범위한 예측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개인적으로는 이런 그의 분석에 따른 현재의 정치경제학적인 비평과 앞으로의 예측을 담은 논증이 아주 마음에 든다고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진술되는 자카리아의 글 자체는 일정 부분 예측의 한계와 근거의 결핍이 적지 않다고 여겨지는데요. 이것이 리버럴적인 중도 좌파의 애매한 정치적 태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논점 마다 비판의 강도가 다소 약한 점은 꽤 아쉬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일단 현재의 미국과 그 주변부에 대한 사회정치적인 분석으로 시작되는 1장부터 4장은 펜데믹 사태로 여실히 드러난 미국 사회의 전반적인 문제와 더불어 그것의 비판적인 원인이라 할 수 있는 극우 포퓰리즘, 도널드 트럼프의 대두 그리고 노골적인 반지성주의 흐름을 꽤 일목요연하게 다루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트럼프와 같은 극단적 포퓰리스트는 기존의 체제 즉, 전문가 정치와 기존의 엘리트 지배체제를 뒤엎기 위해 나섰지만 그는 어떠한 실질적 대안 없이 그저 자신의 인기와 정치적 경력을 위해 정치 무대에 등장하게 됩니다. 본문에서도 일종의 왜곡된 수사로 점철된 그를 가리키고 있지만, "기존의 엘리트 지배 체제는 부패하고 무능력하기 때문에 깨끗한 시민들이 나서야 한다"는 발언으로 큰 표를 얻어냈고, 결국은 이러한 미국 시민들의 표가 제대로 쓰이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자카리아도 거듭 인정하고 있듯이, 펜데믹 초기에서 전문가들의 조언을 제대로 듣지 않고 (물론 초기라 데이터가 전무하기는 했지만) 마스크 착용 문제부터 엇박자를 놓기 시작했던 당시 워싱턴의 행태는 익히 잘 알려져 있는데요. 기존 체제를 불신하고 이를 개혁하겠다는 미명하에 정권을 잡았던, 트럼프 집권기의 정치가 그런 실질적인 개혁에 나섰는지는 매우 불명확합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더 큰 문제는 자카리아가 얼마 안되는 좌파 포퓰리즘과 우파 포퓰리즘을 동일한 비교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인데요. 하지만 우익 포퓰리즘의 해악성은 제가 보기에는 한 줌도 안되는 좌파 포퓰리즘과는 거의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특히, 극우 포퓰리즘이 이민자 배척, 인종주의, 성소수자들에 대한 끊임없는 혐오는 미국 사회에 그나마 있었던 정치적 건전성을 전부 일소하는데 이르게 되었는데요. 이에 대해 제대로 된 평론가라면 이러한 파국을 단순히 정치적 의견의 차이로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자카리아 역시 스티브 배넌의 예를 들어, 우익 포퓰리즘 정치가 기존의 정치 체제를 아무런 대안 없이 구축의 대상으로 삼았고, 펜데믹 사태의 원인에 대해 숱하게 가짜 뉴스와 음모론으로 도배 되었던 당시 미국의 상황을 거의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기도 한데요. 사실 이러한 전개 과정은 엄밀히 말하자면 우익 포퓰리즘과 뒤에서 다루게 될 반지성주의와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 4장은 조너선 하이트를 위시한 '동기를 지닌 추론 motivated reasoning'의 문제와 더 나아가 진실과 사실에 눈을 감고 오로지 '당파적 사고'에 물든 많은 유권자들의 행태를 마찬가지로 비판하고 있는데요. 앞선 장에서 인용된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비토크라시'가 이와 같은 맥락일겁니다. 이는 상대방의 정치적 발언이나 주장들을 백안시하면서 반대로 오로지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과 정치 세력이 무조건적으로 옳다는 강고한 외눈박이 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상황에서 하버머스가 강조한 '공론장의 정치'가 미국에서 가히 유명무실해졌다고 생각하는데요. 일무 평론가들이 레딧 redit의 사례를 들며 아직은 희망이 있다고 여기는 듯 하지만 현실은 안타까울 정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언론에 몸담고 있는 인물이 자신의 경력을 고려한다면 이런 유권자들의 한계를 다루는 것이 아마도 쉽지는 않았을 겁니다. 특히나 극우 포퓰리즘에 가까운 정치적 성향을 갖고 있는 유권자들은 거의 대부분이 사회 전반에 반지성주의적인 태도를 보이며, 전문가들의 조언이나 분석을 귀담아 듣지 않는 성향을 갖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자신들의 '개인적 자유'를 우월적 가치로 놓으면서 말이죠. 저 역시 이러한 계층의 지성과 다소 저학력의 상황을 끄집어 내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자카리아의 인용대로 지난 브렉시트와 관련된 영국의 첨예한 정치 갈등에 있어서도 많은 저학력자들이 브렉시트를 찬성했다는 증거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물론 미국과 영국에서 대학을 비롯한 제도권 교육의 마지막을 개인이 완벽히 수료하기 위해서는 꽤 많은 노력과 돈이 투입되어야만 합니다. 결국 미국 사회의 이러한 학력의 구분선에 따른 다소 노골적인 계급정치를 물론 완벽하게 동의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는 전문가들의 정치와 그들의 사회적 기여에 대한 인정을 어느 정도 인정해 줄 필요는 있습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시민들의 정치적 분별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물론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치권의 주장들을 귀담아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느 정도는 비판적 태도가 뒷받침되어 진실이 아닌 주장과 정치적 이익을 위해 왜곡하는 주장들을 마땅히 걸러낼 수 있어야만 하지만 이것은 미국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민주주의 국가들의 당면한 문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전반적으로 자카리아의 논증은 "네 말도 옳고, 네 말도 옳다"는 조선 초기 황희의 일화를 생각나게 하는데요. 비판적 논증으로 현실의 문제를 규명하기 위해 든 그의 펜 끝이 현재의 자본주의적 문제와 극단주의적 정치를 제대로 비판하지 못하고 있는 점이 그러한 인상을 받게 했습니다. 물론 제가 그에게 라구람 라잔과 비교하여 그에게 어느 정도의 미래에 대한 통찰을 기대한 부분이 조금 과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다만 글 3장에서, 시장이 정치를 인수한 것과 마찬가지인 작금의 시장 실패와 관련해 펜데믹 상황에서 시장이 전지전능하지 않다고 인정한 점은 그래도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이 기존의 시장 자유와 맞물려, 펜데믹 초기 대응에 있어 미국은 '개인의 선택과 자유'라는 측면에서 민주주의 국가가 국민의 안전을 위해 마땅히 해야만 하는 '조치'를 이데올로기 싸움으로 몰아가 결국은 막대한 희생을 초래하기도 했는데요. 이와 관련해서 자카리아는 한국과 대만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의 초기 대응에 대해 긍정적인 의견을 표하는 동시에 자신의 나라에서 벌어진 일들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한국이나 싱가포르의 국민들이 자신들의 위치 정보와 같은 사생활을 얼토당토하지 않게 자발적으로 국가에 헌납한 것이 아니라 실상은 대면 체계와 같은 전통적인 동선 추적과 적극적인 관리로 초기 위기를 벗어났다고 보는 그의 관점이 실로 옳은 것이죠. 사실 개인 자유에 대한 강고한 믿음 만큼이나 미국 사회의 보수주의자들이 과신하고 있는 시장 자유에 따른 자본주의적 믿음은 다수의 인명피해가 발생하는 위기 상황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꽤 요지부동이었습니다. 2008년의 위기 때나 최근의 보건 위기에서도 보수주의자들의 맹신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요. 이에 대해 자카리아가 지적하는 것은 거의 명확합니다. 시장 자유라는 만능주의는 분명 개선할 필요가 있고, 신자유주의자들이 주장했던 작은 정부 역시 생각을 이 시점에서는 달리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음 6장과 7장 가운데, 앞의 6장의 논증 역시 대체로 평이한 논조로 어느 정도 수긍이 될 만하지만, 민감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7장, '불평등은 갈수록 심해질 터'는 글의 한계가 느껴졌습니다. 최근의 펜데믹 사태가 전적으로 부의 불평등을 악화시킨 원인이라고 규명하기 보다는 이미 1980년대의 신자유주의화 이후, 방만한 금융 자본주의에 고삐를 채울 수 없게 되면서 사회경제적 상황은 날로 심각해져 온 점이 좀 더 명확한 사실일겁니다. 단순히 현 사태에 대한 '봉쇄와 개방이라는 대립의 관점'으로는 최근의 우려와 현실의 한계를 전부 해명해 낼 수는 없습니다. 이는 미국 의료계가 직면하게 된 원격 의료의 논의는 본질적으로 원격 의료의 수가가 대면에서 이뤄지는 의료 수가보다 한계가 있기 때문이라는 현실적 문제와 더불어 이미 미국 의료계가 완벽한 민영화 상태에 있기에 이를 완전히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하기는 어렵기에, 현재 미국 사회에서 이 '시민들에 대한 실질적 보건 의료 혜택'은 앞으로 갈길이 멀다고 볼 수 있는 상황입니다. 자카리아는 이에 단순히 미국의 의료 복지 체계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펜데믹은 그저 물 밑에 있던 현실을 물 밖으로 끄집어 낸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독자들에게 인식하려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즉, 현란한 자본주의가 이룩한 미국 내의 계급 고착화는 흑인과 유색인종들이 보다 제한된 의료 접근에 따라 스스로의 생존에 이르는 길이 더욱 어렵게 하는 미국 사회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미국 사회가 갈길이 아직도 멀었다는 뼈아픈 증거일 것입니다. 더불어 자카리아는 미국 사회의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려는 행태와 그로인한 도덕의 쇠퇴에 대해 그러한 관점에서 비판해 내고 있습니다. 대규모의 펜데믹 상황에서 극심한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차이가 모든 시민들에게 마땅히 치료받을 권리를 박탈하고 이러한 문제가 언론이나 혹은 세계에 더욱 드러나게 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장에서 논증되는 바와 같이, 세계화에 따른 미국의 경제적 번영이 지속되어야 하고 이러한 자유 질서 체제가 흔들려서는 안된다는 사실상의 그의 제언이 뭔가 힘이 없어 보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미국 사회에 내실을 튼튼하게 만들자는 실질적인 방안을 강구하거나 여러 제안들을 해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앵무새처럼 법전을 읊는 것처럼 아직도 세계화에 대한 의지를 표명하는 것은 실로 누구나 할 수 있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의 발언들이 기존의 주장들과 큰 차이가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파는 자유 시장주의를 고집스럽게 주장해 왔다"는 2장의 한 문장과 더불어 "현재의 미국의 문제는 미국의 병이지, 그것이 민주주의의 병이 아니다"라고 강조하는 자카리아의 문법이 크게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결국 여기에서 논의되고 있는 현재의 미국의 문제와 세계의 불협화음은 결국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극심한 불평등 문제도 여러가지 민주적인 개입으로 충분히 감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미국에 있어서는 자신들이 그토록 축복으로 강조한 '기축통화국'의 지위를 고려한다면 정치권의 의지만 있다면 어느 정도는 달성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데요. 문제는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미국과 같은 경우는 거의 국체(國體)와도 같은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아마도 기존의 기득권 체제 뿐만 아니라 시민들 일각의 저항도 만만치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물론 현재의 우리나라의 경제적 번영에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일조한 측면이 분명 있기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이러한 세계 체제를 백안시 할 수는 없는 사정이 있습니다. 자카리아 역시 분명 이 점을 인지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자유주의 좌파가 더욱 한계를 지닐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대다수 리버럴 정치에 대한 비판이 이렇듯 명료하지 않은 정치적 의견에 있는 점을 전혀 배제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저는 2008년에 오바마 행정부가 월스트리트에 막대한 공적 자금을 투입한 이래로 그 이전의 신자유주의는 변질되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럼에도 펜데믹 상황에서 이처럼 기존의 자본주의 체제와 민주주의의 갈등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보면 자카리아가 강조했던 '민주주의의 실패는 아니지만' 우리의 민주주의가 현재로선 옴짝달싹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은 분명해 보입니다.
-8장 이후의 자라키라의 논증이 다소 산만한 부분이 있는데요. 일단 세계화에 따른 자유주의의 질서가 무조건적으로 민주주의의 건전성을 내포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펜데믹 상황에서 국가간의 민주주의에 대한 격차가 여실히 잘 드러났다고 생각하는데요. 현재 미국 내부에서 자유주의적 시장 경제에 대한 강고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민주주의가 여전히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치부하는 것은 미국의 우월성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꽤나 고민이 됩니다. 다만 이 지점에서 한가지 단초로 생각해 볼 만한 부분은 과거 많은 백인들이 오바마 대통령이 백악관의 주인이 됨으로써, 현재 미국에는 흑백갈등이 실제로는 심각하지 않다는 식의 이상한 관점이었습니다. 아마도 이 지점에서 많은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정치가 극단주의의 표적이 되고 있다는 사실에 별다른 자각이 없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들은 오히려 문화적인 측면에서 우파 쪽으로 움직였다. 경제적 불안은 문화적 불안을 낳았고, 이민자들을 향한 적대감과 익숙한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우익의 포퓰리즘이 서구 전역에서 힘을 얻게 되었다
이미 수십 년 전에 경제학자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는 미국을 정의하는 것이 "민간 부문의 풍요로움과 공공 부문의 누추함"이라고 썼는데, 이는 미국의 균열에 대한 가장 훌륭한 묘사였다
이 같은 정부의 문제는 미국의 병이지, 민주주의의 병이 아니다. 다른 많은 민주주의 국가들은 아주 효율적으로 이번 펜데믹에 대처했다
그 실패가 세계 최강국의 좀 더 폭넓은 약점을 드러내는 것일까? 그렇다, 확실히 그것은 미국이 지닌 특정한 취약성을 드러내 보인다
그리고 영국은 효율이라는 이름 아래 국내 기관들을 수척하게 만들었고, 이제 보리스 존슨 총리에 이르러서는 전문가를 깔보고 관료들을 극심한 회의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포퓰리스트 리더의 지배를 받고 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상대 정파의 정책이나 주장을 무조건 거부하는 정치 행태를 "비토크라시 vetocracy"라고 불렀는데, 미국이 바로 이런 비토크라시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미국은 태생적으로 국가주의 반대를 신봉하는 나라다. 우파는 정부가 필요로 하는 자금을 줄임으로써 국가주의에 덤벼든다
"특히 공중 보건 서비스와 인프라스트럭처 그리고/혹은 집단 기간 시설이 형편없이 뒤떨어진 나라, 예를 들자면 미국 같은 나라에서 유학중이라면"
어쩌면 시장이 정치 자체를 아예 인수해 버렸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점일지 모른다. 정치학자인 로버트 달은 1993년에 쓴 에세이에서 거의 모든 국가가 왜 순수히 시장 주도로 국가 조직을 만들지 않고 국가에 큼직한 역할을 맡기기로 했는지 설명했다. 사회에는 가령 정치인들과 시민들의 투표처럼 사람들이 시장의 힘에 좌우되지 않도록 떼어 놓고 싶어 하는 것들이 상당히 많다고 그는 지적했다
번영하는 나라, 민주주의적이고 안전하며 훌륭하게 통치되는 나라, 부패의 정도가 아주 낮은 상상 속의 사회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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