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문제의 시대 - 젠더와 교육의 정치학
다가 후토시 지음, 책/사/소 옮김 / 들녘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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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 후토시는 일본 시코쿠 지역의 에히미 현 우와지마 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1991년 규슈 대학의 교육학부를 졸업하고, 동대학의 교육학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박사 논문의 제출 및 심사를 받지 않고 과정만 졸업하는 만기퇴학을 하게 되는데요. 소위 이 제도는 일본에서 취업 연한 이상으로 퇴학하여, 기존의 논문박사와는 다른 개념입니다. 이후 그는 후쿠오카현의 쿠루메시에 소재한 사립대학인 쿠루메 대학 문학부 조교수와 간사이대학의 문학부 준교수 등을 거쳐, 현재 간사이 대학의 문학부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교육 사회학 전공자답게 남성학, 가족 사회학, 노동 사회학, 젠더론 등을 가르쳤고, 특히 현대 일본인의 라이프 코스, 즉 교육과 사회화 전반의 양태를 다각적으로 고찰해 온 학자이기도 합니다. 더불어, 그는 일련의 사회적 활동으로 남성의 폭력성을 일종의 '비폭력 계발 운동'으로 재사회화 하는 연구를 지속해 오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男子問題の時代? 錯綜するジェンダーと教育のポリティクス"로 지난 2016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7년 1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의 내용에 조금 기대를 하면서 일독을 하게 되었는데요. 표면적인 가부장제도의 여러 모순과 문제점을 떠올리면서, 이 '남자문제'가 과연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 어떠한 해결책을 통해, 다수 시민들의 공감대를 얻을 수 있겠는가가 저의 관심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젠더 이론하에 이러한 남자문제를 남녀 갈등이나 이를 통한 근본적인 인식 부정론에 근거해, 아주 소모적인 논쟁으로 귀결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 책의 내용 전반은 합리적인 개론에 가깝다고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본 교육계의 현실과 초등학교 이후, 남녀 교육과 이들이 성인이 되기 전까지, 젠더에 기반해 어떻게 하면 통합적이고 균형적인 사회화가 가능할지에 대해, 논증되는 것으로 글 전체는 꽤 명료하게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도입부에서 저자는 현재 일본 사회를 비롯한 자본주의 체제 내지는 신자유주의적 능력주의에 기반한 사회들이 일종의 변형된 남성 지배 사회라고 규정하고 있었는데요. 물론 2장에서 논의되는 내용들은 원론적인 남성 지배적 체제에 대해서도 논하고 있습니다. 기존의 많은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이러한 전통적 남성 지배 체제가 대부분의 여자를 평등한 인간이 아니라, 소위 체제 유지의 필수 구성 요소로 억압해 왔다고 보고 있기도 한데요. 물론 2차 대전 이전의 일본 사회가 여성 대부분을 현모양처나 가정을 건사하는데 있어 여성의 의무를 강조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도 역시, 1980년대 이전까지는 이러한 맥락의 성역할이 여성들에게 지속적으로 강요되어 왔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여기서 일본 헌법에서 '남녀의 동등한 권리'를 저자가 몇번이고 언급하고 있습니다만 이러한 헌법적 가치가 현실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중요한 원칙으로 자리하게 된 건, 일본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 역시, 채 몇 세대가 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남성 지배적 상황에서도 일부 남성들은 전혀 인간적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더 괴로운 상황이라는 점을 저자는 주목하고 있었는데요. 기존의 남성들이 교육과 사회 진출이라는 측면에서 우월한 지위를 유지하고 개인의 능력이 뒤쳐지는 적지 않은 수의 남성들이 사실상 체제의 바운더리 바깥으로 밀려나, 스스로의 삶을 건사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저자의 분석대로, 신자유주의적 능력주의의 어두운 측면이거나 혹은 더 노골적으로 '직면한 폐해'라고 일컬을 수 있을 텐데요. 이런 신자유주의적 능력주의 하에, 지속적으로 강요된 신자유주의의 사고방식은 "개인의 실패는 오로지 그 개인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전통적인 자본주의가 오로지 남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권력의 집중과 자본의 축적을 위해, 사회 구조적인 측면에서 단호하고 가차없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출중한 능력의 '인면수심' 남성들이 선호된 것은 분명합니다. 여기에 신자유주의는 이를 더 가혹하게 실현시킨 것이기도 합니다. 결국 이런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도태된 많은 남성들이 자신의 삶 뿐만 아니라, 시시각각 결혼 자체를 포기하게 된 과정을 저자는 논증하기에 이릅니다. 여전히 남성의 부양을 수용하려는 다수 여성들의 존재와 그러한 사회 체제는 여전했고, 이것은 신자유주의가 만든 철저한 남성 지배의 또다른 양상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인식하에, 저는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표면적이고 꺼내기 쉬운 남성 지배 체제 혹은 선연한 가부장 헤게모니를 비판하는 것보다, 신자유주의가 변질시킨 민주주의를 먼저 회복하여 이를 통해 남녀간의 동등한 권리와 평등한 관계를 실질적으로 다루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바로 이런 부분에서 로버트 달의 체계적인 다원주의가 충분한 해결책이 될 수 있다 믿고 있습니다.

앞선 문단의 내용을 좀 더 설명해 보자면 종래의 신자유주의적 능력주의가 어찌됐든 사회 내부의 고용 불안의 한 원인이 되었고 남자의 수입과 여자의 기여라는 측면에서, 전통적인 가정의 결합 형태가 경제적인 측면과 사회학적인 측면에서 붕괴되어 왔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물론 이러한 과정 속에서 남성성의 해체라든지, 남성 내부의 폭력적 요인,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는 근본적인 남녀 갈등 등, 기존의 사회가 시민들을 위한 최소한의 버팀목이 되지 못하게 일련의 신자유주의화가 가속화 되었다는 점을 저자는 근본적인 분석을 통해 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또한 이런 능력주의화가 가속화 되었다 하더라도 남성 지배의 균열이 이런 체제의 종말과 무조건 이어지지는 않는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저자는 이런 헤게모니적 멸망이 무조건 남성 지배의 종식으로 귀결된다고 보지는 않았는데요. 더군다나 체제 내부의 더 많은 이익과 권력을 획득하려는 일종의 경쟁 차원에서 남성들이 서로 상호 감시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다는 저자의 분석은 이처럼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결국 2장 후반부에서 논증되는 바와 같이, 이러한 모습에서 남자의 괴로움과 여자의 괴로움은 그 원인의 조각이 다를지언정, 그 고통은 서로 유사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남성 고용의 불안정성'이 여성 고용의 확대나 남성 지배의 후퇴로 이어지기는 커녕, 더 확고해지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라 여겨집니다.


뒤이어 4장에서는 젠더와 교육현장이라는 주제로 남자와 여자의 각 개별적인 인식 체계와 그런 사회화 과정에서의 여러 상이한 측면을 저자는 다루고 있습니다. 기존의 젠더 인식하에, 젠더 보수주의와 젠더 평등주의 및 젠더 자유주의를 살펴보고, 이들의 입장차를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있는데요. 저 개인적으로는 뒤에 나오는 '이성애중심주의 heterosexism'가 지배하는 상황하에 어린 친구들의 '성적 지향'을 어른들이 과연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가 진정한 당면한 숙제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저는 분명 젠더 이론에 기반한 이런 성적 지향들을 사회에 납득시키는 데 있어, 페미니스트들의 건전한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앞서 언급한대로, 많은 여성주의 운동가들이 남녀의 극심한 대결과 그런 헤게모니 싸움에 집중하는 것보다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일종의 폭력적 문답에 이 여성주의가 적극적으로 화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금의 강고한 신자유주의 체제가 왜 남성 권력적 지배 체제를 더 강화시켰는지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모든 대안 운동들은 다소 그릇된 인식 하에, 어느 정도 잘못된 방향성을 그 머리 위에 두고 있다 볼 수 있을 겁니다.

끝으로, 기존의 남성다움 혹은 여성다움은 그저 이론 논쟁으로 쉽게 치부할 것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 기저에 깔려 있는 복잡한 사회성을 차치하고 그저 사회진화론 정도로 국한 시켜버린다면 근본적인 교육의 진보에 있어 상당한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저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또한 기존의 젠더학이 남녀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게 만드려는 선명한 목적을 망각하지 않았다면 이제 소모적인 논쟁을 좀 더 뒤로 물리고 우리 어른들이 앞으로 자라날 세대와 이들이 서로 융합하고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충분한 장을 만들수 있어야 한다고 여겨지는데요, 여기 저자인 다가 후토시가 자신의 제자들인 3,4학년들 학생들을 기반으로 벌이고 있는 여러 세미나와 친교 활동은 교육의 기본 철학 뿐만 아니라 젠더 기반의 건전한 남녀 간 이해를 촉진한다고 생각됩니다. 이러한 교육자가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그것의 긍정적인 영향은 지대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또한 단순한 종속된 지배체제를 넘어, 사회 변혁과 교육의 긍정적 기여 등을 기대할 수 있는 도서의 출간들이 앞으로도 지속될 수 있기를 개인적으로 바라마지 않습니다.



여기서 어른 남자란 가족을 부양하는 남성, 즉 충분한 경제력을 갖고 여성과 결혼하여 가장으로서 책임을 지는 남성이다.

따라서 영국을 비롯한 서양 국가들에서는 학령기 남자의 존재양태를 문제 삼기 시작한 1990년대 중반까지, 청년기 남성의 자립 곤란이라는 문제는 이미 상식화되어 특별히 새삼스러울 게 없었다.

또한 남성은 여성과 달리 소득 수준이나 정규고용 여부에 따라 연애관계를 맺거나 결혼할 수 있는 확률이 크게 좌우된다.

그리고 결혼할 수 없는 남성이 는다는 것은 역으로 결혼할 수 없는 여성도 늘어난다는 것이다.

여성에 비해 남성이 압도적으로 이익과 권위에 접근하기 쉬운 사회체제하에서도 일부 여성들이 대단히 많이 이익을 얻거나 높은 권위의 지위에 오르는 경우가 있을 수 있으며, 역으로 남성이 평균적인 여성에 비해 이익과 권위를 얻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그렇게까지 많은 이익과 권위를 바라지 않는 남성들에 대해서도 그것들을 둘러싼 경쟁에서 ‘내려오지 않도록‘하기 위한 남성끼리의 상호감시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다.

사실, 남성들이 경험하는 이러한 박탈감 자체는 남성의 특권의식과 표리일체의 관계를 이루는 것이며, 모종의 여성경멸에 기초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남성들이 지금까지의 작동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여성에 대한 직업적 기회는 열리지 않고, 노동시장에서 남성지배는 그대로 유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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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엄 그린 지음, 이영아 옮김 / 빛소굴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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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그레이엄 그린은 1904년 영국 허트퍼드셔주 버캄스테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인 찰스 헨리 그레이엄과 메리언 레이몬드 그린은 사촌 사이로 둘다 '그린 킹 브루어리'로 대표되는 그린 가(家)의 일원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그린은 캠브리지셔의 하스턴에서 삼촌인 윌리엄 그레이엄 그린 경과 함께 여름을 보내게 됩니다. 이곳에서 그린은 독서에 눈을 뜨게 됩니다. 이런 다독의 경험은 그의 작가 경력에 지대한 자양분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후 그린은 역사를 공부하기 위해 옥스포드 대학의 발리올 칼리지에 입학하는데요. 그는 아주 잠시였지만 영국 공산당의 일원이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에 그린은 주기적으로 우울증을 겪기도 했는데요. 더욱이 유년 시절에는 기숙 생활에서 자주 괴롭힘을 당해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옥스포드를 떠난 이후엔 개인 교사로 일하다가 언론계의 경력을 쌓게 되는데요. 먼저 노팅엄 저널에서 일했고, 그 다음에는 타임즈의 부편집장이 되었습니다. 1929년이 되자 비로소 그의 첫번째 소설인, '내적 인간 The man within'을 출간하고, 이듬해인 1930년부터 본격적인 작가 경력을 이어가게 됩니다. 그는 또한 홀로 세계 오지를 여행하는 것을 좋아했는데요. 여행중 단기간 거주했던 장소를 자주 소설의 배경으로 등장시킨 점은 그의 고유한 작법 가운데 한 형태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특히 이 작품의 배경인 아이티와 관련해서도 그는 1954년에 직접 아이티를 여행하고 당시 독재자였던 프랑수아 뒤발리에의 실체를 몸소 직면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1957년에는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와 직접 인연을 맺었지만 그럼에도 후에 쿠바를 장악한 카스트로 정권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내리기도 했습니다. 그는 생애 마지막 몇 년을 스위스 제네바 호수에 있는 베베에서 보내는데요. 마침 이곳에 와 있던 찰리 채플린과도 인연을 맺게 되는데 이 두 사람은 곧 절친한 관계로 발전합니다. 1986년에 그린은 영국의 공로 훈장인 '메리트 훈장'을 수여 받고 이후 5년 뒤인, 1991년에 급성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의 유해는 스위스 보주의 코르소 묘지에 묻혔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작품은 지난 1966년에 원제, "The Comedians"으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3년 1월에 초역 되었습니다.

이 작품을 일독하고 나서 처음 들었던 느낌은 바로 먹먹함이었습니다. 우선 이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아이티로 그 시대적 배경은 1957년 이후의 시점입니다. 아이티의 독재자 프랑수와 뒤발리에가 비로소 통치를 시작하게 된 시점이 바로 1957년 이후입니다. 이 작품을 쓰기 위해 작가인 그린이 아이티를 '답사'한 것인지는 다소 불명확합니다만 그가 당시 묵었던 호텔과 여기에 등장하는 주인공인 브라운과 다른 주요 인물인 존스는 그의 지나온 행적과 일부 본인의 성격이 복합적으로 관련되어 있다고 여겨지는데요. 물론 그린은 이에 대해 어느 정도는 부정하기는 했습니다. 이미 아이티는 1915년에 미합중국 해병대의 불법적 침공을 받았고 이 과정에서 이들 해병대에 의한 기총 사격으로 수많은 아이티인들이 학살을 당하게 되는데요. 사실 쿠바를 제외한다면 카리브해와 남아메리카는 미국의 사활적 이익이 달려 있는 지역으로 여러 경제적 요인과 정치적 배경이 뒤섞인 개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히스파니올라 섬을 양분하고 있는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의 운명이 미국에 의해, 확연히 달라졌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미국의 이익'이라는 것이 어떤 식으로 표출되는지 우리는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명백한 사생아라고 볼 수 있는 주인공인 브라운은 그 신분과 정체가 불명확한 어머니로부터 어린 시절 버림받은 이후로, 자신을 결코 드러내지 않은 채,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심지어 타인들에게까지 의심하고 냉소하는 인물입니다. 그가 지나온 40세 이전의 삶이 이런 불명확한 외피로 겹겹이 둘러쌓여 있다는 것은 분명한데요. 그런 와중에 생사를 전혀 알지 못했던 모친이 아이티의 포르토프랭스의 호텔을 자신에게 유산으로 남기게 됨으로써, 유럽을 전전했던 지난 삶에서 비로소 정착지를 갖게 됩니다. 매기 브라운과 라스코 빌리에 백작 부인이라는 신분을 갖고 있던 모친은 알 수 없는 연유로 이 아이티에 도착했고, 마찬가지로 그녀의 행적은 여러 이유로 베일에 가려져 있습니다. 그린은 후에 결말을 염두해 두고, 이 백작 부인의 정체를 모호하게 만든 것으로 추측되는데요. 그녀가 비밀로 가득한 레지스탕스이거나 아니면 혁명가라는 사실상의 추측은 전적으로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고 있습니다.

브라운은 특정되지 않은 남아메리카의 한 국가의 대사 부인과 불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마르타로 독일 여성입니다. 그녀의 남편인 루이스와는 앙헬이라는 아들 하나를 키우고 있고, 우연히 만난 브라운과 자신의 삶을 맹렬히 소모시키는 듯 보이는 끝이 예견된 관계를 지속해 오고 있습니다. 여기에 이들을 둘러싼 미국인 부부인 스미스씨와 스미스 부인, 앞서 언급한 정체불명의 존스가 극을 이끄는 주요 인물들입니다. 이에 모종의 이유로 아이티에 들어온 존스와 마찬가지로 소위 '채식주의 운동'의 홍보를 위해, 포르트프랭스에 도착한 스미스 부부 등은 세계 바깥의 외부인이 이 독재 국가를 어떻게 경험하게 되는지 여실히 드러냅니다. 과거 아이티의 슈바이처라고 불렸던 프랑수아 뒤발리에는 사람들이 부르던 파파 독 (papa doc)이라는 별명에 무색하게 서슬퍼런 독재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정권을 비호하는 비밀 경찰인 '통통 마쿠트'와 포르트프랭스의 야간 통행 금지와 당국의 허가를 요하는 통행권 등은 과거 우리가 경험한 군부 독재 정권과 묘하게 닮아 있습니다.

스스로 존스 소령이라고 밝히는 영국인 존스는 분명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인물입니다. 특이하게도 주변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기도 하고 무조건 다변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그는 능수능란한 화술을 갖고 있는데요. 어느 정도 그가 자신과는 동질의 인간이라고 느꼈던 주인공 브라운만이 그의 실체를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후반부에서 드러나는 존스의 진면목은 꽤나 예상 밖이기도 했는데요. 그린의 이 작품이 아이티 독재 정부에 신임하는 아이티인들에 대한 지원으로써 어떤 치명적인 군사작전을 위해 파견된 스파이나 특수 군인으로 여겨졌던 존스가 '이 시대의 극명한 허위성'만큼이나, 가히 볼품 없는 인물이었다는 점이 후에 밝혀졌음에도 그 이전부터 일관되게 브라운의 관심을 끕니다. 버마 전선에서 일본군과 치열하게 싸웠다는 존스의 그런 이력은 브라운 뿐만 아니라 주변인들의 주목을 받게 되는데요. 실제로 치열한 전장에서의 전투 경험을 갖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평범한 사람과의 현실 인식에 대한 차이는 어쩌면 이런 독재 국가에서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실로 다른 차원에서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부분이었습니다. 만약 그것이 허위가 아니었다면 말이죠.

"평생에 히틀러와 같은 경험은 딱 한 번이면 족하다"는 브라운의 정부, 마르타의 언급은 프랑스아 뒤발리에를 몸소 겪고 있는 죄없는 아이티인들에 대한 연민이기도 합니다. 특히, "암흑의 공화국", "공포와 좌절의 나라"라는 수식어로 표현되는 아이티의 현실은 그만큼 참혹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독재 권력에 밉보여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사회복지부 장관과 비밀 경찰에 의해 알 수 없는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존재와 비밀경찰이 지닌 리볼버와 기관총으로 곳곳에서 살해되는 아이티인들의 묘사, 그리고 이런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많은 대사관들의 대사들이 본국으로 소환된 상황은 아이티의 엄혹한 현실을 짐작할 만합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모친과 인간적으로 가까웠던 이상주의자인 닥터 마지오와 브라운의 대화를 통해, "만약 수일 내에 미국 대사관이 수도에 복귀하게 된다"면, 이러한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어려움이 개선될 수 있다고 판단하는 부분은 이 지역에서의 미국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 능히 예측해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작품에 등장하는 여러 냉소와 현실에 대한 비꼼, 그리고 풍자는 그레이엄 그린 문학의 진면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보기엔 좋은 타입의 영국인 같소", "그리고 우리는 지금 이성의 세계에 살고 있지 않아요." 와 같은 대사들은 냉소와 풍자를 포함하고 있기도 합니다. 물론 "농담은 비겁하고 무력한 자들의 탈출구"라고 극에서 언급되기도 합니다만 이 작품의 제목처럼, 모두가 '코미디언'이라고 자임하는 자조와 비틀림은 아마도 이 독재 정권을 비호하는 강대국과 "아이티의 일은 아이티 국민들이 알아서 할 일"이라는 일종의 인식적 편의주의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는 "흑인들의 독재국가와 백인들의 독재국가 구분할 필요가 있다"는 문법의 극단적 요체를 담고 있는데요. 냄새나는 흑인들의 독재 국가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당시 주요국 백인들의 그런 철저한 인식과 자유세계와 공산세계의 자신들의 운명을 놓고 벌이는 치열한 대립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에세도 아이티의 현실은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렇게 철저히 고립된 브라운과 존스, 그리고 많은 아이티인들이 부서져 나가는 삶의 파편에서, 그 의미를 잃고 끝내 자포자기로 체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이 코미디언이라는 제목의 단어는 인간의 양심과 입이 가로막히고 이에 현실을 냉소하며, 진실을 눈에 담지 못하는 비틀린 인간들의 삶 그 자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끝으로 작품 후반부에 드러나는 닥터 마지오의 비참한 최후는 이 소설에서 그가 독재자인 프랑수아 뒤발리에의 대척점이라는 것을 인지한다면 단순히 이데올로기 놀음이 아니라, 비정상에 의한 정상의 몰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린에 의한 지독한 블랙 코미디와 같은 결말이 이어지는 것이죠. 다른 한편으로 닥터 마지오는 아버지의 정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자란 브라운에게 부정이 무엇인지에 깨닫게 해준 인물인데요. 더불어 마르타에 대한 인물 조성 역시, 앞선 닥터 마지오와 마찬가지로 숨겨진 맥락이 존재합니다. 그녀는 브라운에게 단순한 정부가 아니라, 그가 살아가게 하는 목적이었는데요. 소설 초반부에 모든 걸 잊고 뉴욕으로 향했음에도 브라운이 다시 아이티로 돌아온 연유에는 바로 그녀가 있습니다. 또한, 브라운이 그녀에게 반쯤 장난으로 애정의 도피를 요구하더라도 하나 뿐인 아들을 위해 이를 무시하고 있기도 한데요. 이 점은 분명 어릴 때, 자신을 버린 모친과 매우 구별되는 설정이기도 합니다. 저는 극에서 닥터 마지오와 브라운이 나누는 대화 가운데, 자신은 가톨릭를 믿는 신자이고 지금의 아이티가 처한 현실에서 가톨릭 교도로서의 의무를 다할 것이라는 취지의 결심을 엿볼 수 있었는데요. 아이러니컬하게도 프랑수아 뒤발리에가 오로지 잘하는 것이라고는 공산주의를 막고 있다는 이 극명한 서사는 이 조그만 카리브해의 섬나라에도 냉전의 그림자가 왜곡된 모습으로 드리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해 해주었습니다. 아무리 독재로 자국인들을 탄압하더라도 공산주의만 막을 수 있다면 된다는 식의 논법은 아마도 과거 미 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가 당시 우리의 군사 독재 정부에 가졌던 개인적 혐오에도 불구하고 냉전의 첨예한 대립과 그에 따른 미국의 국익에 따라 이를 용인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더구나 지금까지도 아이티는 서구 사회와 자유 진영에 철저히 고립되어, 오늘날까지도 이 카리브 해의 흑인 국가가 처한 환경이 그다지 녹록하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중후반부에 한국 전쟁에 대한 대화와 설명이 잠깐 등장합니다. 여기서 트루먼 대통령의 전쟁 개입에 대한 문제를 언급하고 있었는데요. 이 뿐만 아니라 대만의 장개석아 벌인 일들까지, 이를 통해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 분명한 냉전 시기임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모호성을 화려한 정장처럼 입고 있었으며, 이를 자랑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나를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거야‘라고 말하는 사람처럼.

여자에게도 동업자에게도 심지어는 자기 자신에게도 가식적으로 살아온 시간이 많은 두 사람이라 서로를 알아보기 시작한 것이다.

정부가 아무리 진하게 포옹해 준다 한들 사랑은 영원하지 않다는 증거밖에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자기 조국의 미래는 명확히 내다봤지만, 조국을 이루는 개개인들의 운명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했다.

그때 운전대 위로 몸을 구부린 채 울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던진 후에야 나는 그녀 없이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았던 것 같다.

아주 약간의 빉정거림이 섞인 내 말투에 그는 "난는 하나이자 나뉠 수 없는 아이티의 깃발이다. 프랑수아 뒤빌리에"라고 응수했다.

우리는 껴안은 채 한참이나 그렇게 누워 있었다. 우리가 함께한 가장 행복한 순간은 그때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가끔 든다. 처음으로 우리는 애무 이상의 무언가를 함께 나누었다.

"미국 국무부는 카리브해에 조금이라도 소란이 일어나는 걸 용납할 수 없었던 겁니다."

두려움은 기묘한 효력을 지니고 있다. 혈액 속으로 아드레날린을 분출하고, 남자가 오줌을 지리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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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4-08-24 06: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냉소와 풍자의 대가^^ 그레이엄 그린 너무나 애정합니다. 이 책 진작에 사두었는데 저는 언제 읽을 수 있을지...
며칠전에 바라보긴 했습니다.ㅎㅎㅎ

베터라이프 2024-08-24 07:03   좋아요 1 | URL
읽어보니까 의외로 서사가 물흐르듯 매끄러워 꽤나 탐독할 수 있었습니다 ^^ 저도 권력과 영광을 사둔지 오래인데 겉장만 주구장창 보고 있는 중입니다 ^^; 청아님도 모쪼록 코미디언스를 시작해보시길요 ^^
 
정치란 무엇이어야 하는가
제이슨 브레넌 지음, 배니나.정연교 옮김 / 궁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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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슨 F. 브레넌은 미국의 철학자이자 동시에 철학과는 좀 거리가 있는 경영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메사추세츠 턱스베리와 뉴햄프셔의 허드슨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뒤, 학부 과정으로 오하이오 주의 사립 연구 대학인 케이스 웨스턴 리저브 대학과 뉴햄프셔 대학에서 수학하고, 데이비드 슈미츠의 지도 하에 애리조나 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이후, 브라운 대학의 철학 조교수를 거쳐, 현재는 조지타운 대학의 맥도노우 경영대학원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철학 뿐만 아니라 정치철학적인 측면에서 유권자들의 고질적인 비이성적 측면과 선거 승리에 기반한 나쁜 제도와 정치인들의 개인적 이익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들로 인한 전반적인 '민주주의의 취약성'에 큰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이 점들 때문에 그가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부정적 의견을 견지하고 있는 것보다는 민주주의가 좀 더 효율적이고 이성적인 측면에서 유권자들을 위한 실질적 실체화에 다가가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즉 이런 그의 취지는 일종의 정치적 진보를 위한 조언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Political Philosophy : An Introduction"으로 지난 2016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4년 1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의 저자인 제이슨 브레넌은 그의 다른 논저인 "민주주의에 반대한다"로 미국을 포함한 많은 국가들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바가 있는데요. 우선 현 시점에서 민주주의 체제 말고 실질적인 다른 대안이 가능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저 역시 회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자유를 중요하게 여기는 전통적 자유주의자들이나 '시장의 자유', '경제적 자유'를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이런 실질적 기반이 가능한 체제는 거의 민주주의가 유일하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모두의 동의를 기반으로 구축된 헌법 체제와 그것을 통해 민주주의 정체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국가 체계 자체는 이미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에게서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왜 우리에게 정치가 중요할 수밖에 없는지를 논하고 있는데요. 단순히 루소 식의 '모두가 모두를 통치하게 된다'는 탈계급적 논법 뿐만 아니라, 이전의 자유주의가 왜 인간의 권리와 자유에 대해 강조하게 되었는지를 조금 얄팍한 분량의 책이긴 하지만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적절한 설명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특히 정치를 좀 더 보편적이고 건설적인 이론에 기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정치철학' 역시, 지식인들 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로 이에 대한 사고의 폭을 확장시키는 것은 먹고 사는 것 만큼이나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종래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각기 다른 이론에서 출발했으며, 여전히 이 두 가치는 경우에 따라 상반된 관점을 갖고 있기도 하다고 강조한 것은 새겨들을 만하다고 여겨집니다.

이에 저자는 우선 정의(사회적 정의를 포함해)와 시민들의 권리 문제를 분석하고 이 다음 등장하는 자유(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를 일종의 양자 관계로 이론적 해제에 나서고 있습니다. 저는 일전에 일독했던 그의 "민주주의에 반대한다"에서도 받은 인상이지만 그가 꼭 '자유지상주의자들'을 이론적으로 두둔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자유와 시장 자유에 대한 그 나름의 주장을 펼치는 것을 목도한 바가 있는데요. 물론 민주주의 체제 하에 시장 지위에 대한 그의 언급에 대해 전부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떻게 보면 대의적인 측면에서 개인들의 권리와 그것의 확대된 형태인 사회 보장에 대해, 자유지상주의자들이나 신자유주의자들이 그토록 믿어 의심치 않았던 '완벽한 시장 자유에서의 공공재 제공'이 거의 실패로 끝났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 브레넌은 각각의 개인에 대한 권리는 보장해야 하는 것은 확실하고, 설사 전통적 공리 개념에 대한 기존의 신자유주의자들의 공격에도 "우리는 대다수 국민의 권리 침해를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행동하고 그러한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다만 이런 그의 주장에 동의하면서도 많은 시민들에게 있어 도덕적 원칙에 대한 스스로의 자질이 부족한 케이스가 적지 않다는 현실은 '공리의 가치, 공리의 원칙'의 인식 결여, 뿐만 아니라 만약 법과 제도가 전무하다면 자신의 권리 주장과 다툼이 타인과 빈번하게 발생할 가능성을 예측해 볼 수 있을 겁니다. 결국 허버트 스펜서류의 '인간의 야만적 상황'과 같은 차별적 인식 또한 인간의 비합리성을 에둘러 표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 말에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간에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브레넌이 언급한 사회적 정의와 권리 문제라는 직면한 인식은 충분히 숙고해 볼 만한 과제라고 여겨지는데요. 다만, 기존의 공리주의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완벽히 알 수 없다는 부분과 5장의 '평등과 분배정의'에서, 존 롤스를 언급하며, 그의 '차등의 원칙'을 열거하는 부분은 실질적인 공정한 분배를 위한 제도 구축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시장의 규제가 필요하다는 진보주의자들의 역설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물론 앞선 롤스에게도 '사람들이 공정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의사 결정을 해야한다"는 전제는 풀지못한 숙제였을 겁니다. 이는 조지프 슘페터 역시 고민한 부분이며, 우리의 민주주의 정치가 좀 더 건전성을 답보할 수 있는 (사활적) 전제 조건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는 정치 역사에서 우리가 가장 풀기 힘든 문제임은 분명한데요. 브레넌이 과거 자신의 논저에서 소위 '일반적 유권자들'에 대해 회의적 시각을 갖고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점에 기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일전에 존 듀이가 강조했던 '시민들이 스스로를 위한 교육'에 대한 당위와도 어느 정도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 책의 다른 주제들 가운데, 6장, '사회정의론의 문제'를 보다 집중해서 보게 되었습니다. 브레넌은 이와 관련해, 자유지상주의자인 로버트 노직과 애매한 자유주의자인 존 롤스의 주장들을 비교하며, 이 사회 정의론에 대해 서술하고 있습니다. 즉, 평등주의 사회, 국부 지향 사회, 공정 가치 사회라는 독립적 열거를 통해, 우리가 현실에서 어떤 문제에 직면하고 있는지 이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많은 분배정의 이론들이 그저 몇몇의 주장들로 현실에서도 쉽게 이룰 수 있는 것"으로 여긴다는 비판과 더불어, 불평등 문제 자체를 용인할 것인가 아니면 만약 개선할 수 있다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지를 마찬가지로 살펴보고 있는데요. 저자인 브레넌 역시, 사회 정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터무니 없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밝히고 과거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로부터 시작된 이 논점을 통해서 오늘날 '시장 자유'에 대한 의미를 다시 한 번 숙고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시민들이 강고한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시장 자유라는 관념이 단순히 세뇌되었다고 볼 수는 없을 겁니다. 일전에 헨리 키신저가 언급했듯, 그저 신자유주의의 철저한 이행이 수반되었기 때문일 겁니다.

끝으로 여전히 우리에게 공리의 문제는 사회를 변혁시키는 것 이상의 공감대를 필요로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를 '합리적 공리'라고 치환해서 생각할 것까지는 없겠지만 시민이자 유권자인 우리가 노골적인 신자유주의화와 함께, 사회가 파편화 단계에 이르러 우리 스스로 정부를 공격하는 데 앞장 서지 않았나 생각해 보기도 하는데요. 또한, 정부의 권위와 적경성을 논한 9장에서, 정부의 여러 목적들 가운데 하나인 '공공재의 공급'과 관련한 저자의 하이에크에 대한 언급은 그것의 논증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본문 밑에 역자의 주(註)로 여겨지는 "무정부 상태에서는 공공재가 제대로 공급되기 어렵다는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라는 문장은 저로서는 쉽게 동의하기가 어려웠는데요. 조심스럽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글, 9장의 논증은 거의 저자 본인의 주장에 불과하다고 판단됩니다. 정부의 권위와 이와 관련된 현격한 문제는 '대의 민주주의의 명확한 한계'를 전제하고 나서 접근해야지 그저 시민들의 정부에 대한 자발적 복종 정도나 그것을 강제하는 정부의 권위적 강제성 만을 나열하는것은 본질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서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자인 그가 유구한 철학의 역사를 인지하고 있다면 철학에서 기반한 자유주의적 가치와 공공연하게 자유주의를 외피로 두르고 있는 신자유주의자들에 대한 명확한 구분 정도는 이 글에서 필요했다고 보여지는데요. 자유지상주의에 대한 비판적 언급을 통해, 신자유주의에 대한 해석을 대신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인용과 그에 기반한 주제들의 논증 자체가 아쉬운 점은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저자인 브레넌이 왜 롤스를 인용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롤스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는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만 아주 단편적으로 분배 정의와 불평등의 문제를 더 확고한 자유주의 내지는 왜곡된 신자유주의로 해결할 수 있을지는 기존의 처방이 어떠했는지 살펴보면 충분히 예측해 볼 수 있을 겁니다. 최종적으로 그가 말한, 정치철학이 근본적으로 탐구하는 주제가 공리에 기반한 권리와 자유의 문제라면 말입니다.



 


사람들은 정의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을 갖고 있다.

우리가 정치적인 문제에 합의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각자가 무엇에 얼마나 가치를 부여하는지가 다르기 때문일 수도 있고, 사실을 보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일 수도 있다.

물론 가능한 한 우리는 대다수 국민의 권리 침해를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행동하고 그러한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평등에 병적으로 집착하지 않는다면 국부 지향 사회나 공정 가치 사회를 더 선호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코헨은 질서 정연한 사회에서도 사람들은 이기적이고 정의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다는 것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롤스가 말하는 정당화 가능한 불평등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노직은 한편으로는 역사적 과오를 바로잡아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현존하는 제도적 결함을 보정하기 위해서라도 일정 정도 부를 재분배하고 사회안전망을 보강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포용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사회는 사회적 통념이나 종교적 규준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을 배척하는 경량이 농후하다.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자유를 제한하지 않는 다른 여러 방식에 비해 전반적으로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고 판단될 때, 즉 행복을 전반적으로 증진한다고 판단될 때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으며 그렇지 않다면 제한해서는 안 된다.

롤스가 시장경제 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부합하는 자유를 허용하는 이유는 단지 그것이 차등의 원칙을 구현하는 데 유용하기 때문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현존하는 수많은 국가에서 롤스가 말하는 기본적인 자유권을 누리며 사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자본주의로 인해 사람들이 비참해진다면, 자유지상주의가 옹호하는 정의는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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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체 이렌 네미롭스키 선집 3
이렌 네미롭스키 지음, 이상해 옮김 / 레모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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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렌 네미롭스키는 1903년 당시 러시아 제국이었던 키에프의 부르주아 유대인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납니다. 그녀의 가족은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러시아를 떠나 핀란드로 떠납니다. 이들은 얼마간 핀란드에서 지낸 후, 프랑스로 이주하여 마침내 파리에 안착하게 됩니다. 1921년 이렌은 파리 소르본 대학에 진학하고 이때부터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하는데요. 그리고 1926년에는 은행가인 미셸 엡스타인과 결혼하여 두딸을 두게 됩니다. 얼마 안 있어 이 부부는 자신들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둘다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하게 되는데요. 이를 그저 전쟁의 광기라고 치부하기에는 이들의 운명이 너무나 가혹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렌 역시, 반 이상을 프랑스에서 살았고 심지어 프랑스어로 작품 활동을 했지만 당국으로부터 프랑스 국적을 거부당하기에 이르는데요. 더욱이 그녀는 1939년에 로마 카톨릭으로 개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1941년 독일군의 프랑스 파리 점령 이후, 이듬해인 1942년 나치 독일에 부역한 비시 프랑스 정부에 의해 체포되어 1942년 7월 17일에 폴란드의 유대인 절멸 수용소인 아우슈비츠로 강제 이송됩니다. 결국 그녀는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한달 후에, 발진티푸스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책은 원제, "Suite française, Dolce"로 지난 2006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5년 초도 번역을 거쳐, 2023년 6월, 개정판이 출간되었습니다.

이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돌체'는 프랑스어로 부드럽고 감미로운 어떤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는데요. 여기에 더한 네미롭스키의 작명은 독일군의 프랑스 점령 초기 이후, 프랑스인들과 독일군의 당혹스럽고 불편했지만 의외로 이들의 동거가 가능했던 분위기를 에둘러 표현한 해석으로 이해됩니다. 이렇게 소설의 주된 배경이기도 한 프랑스 한 마을에서의 예기치 않은 독일군과의 동거는 이렇듯 여러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탱크를 동원해 전격전을 벌이며, 무능에 빠진 프랑스군을 궤멸시킨 독일군을 '전쟁 기계'로 묘사하면서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프랑스군의 패착을 마을 사람들의 여러 입을 통해 비판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사는 땅에 독일군이 진입한 사실 조차 매우 얼떨떨하게 여기기도 하는데요. 스스로의 삶의 터전에서 비교적 안온한 삶을 영위하고 있던 프랑스인들에게 있어 쉽게 말해 자신들의 목숨줄까지 쥔 점령군이이라 볼 수 있는 독일군이 의외로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모습과 그런 상황은 아무리 프랑스 전역에서의 전투가 마무리 되어가는 시점이라 해도 상당히 예상 밖의 서사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작가인 네미롭스키가 당시 프랑스 내부에 팽배해 있던 '프로이센'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경멸과 함께 마찬가지로 터무니 없는 두려움에 대한 이미지를 이 작품에도 투영하고 있었는데요. 이는 역사적으로 '프로이센에 의한 독일 통일'과 그런 체제의 본질이 당시 주변국에 어떠한 우려를 발생 시켰는지 아마 그녀와 같은 지식인이라면 쉬이 짐작이 되었을 겁니다. 특히, ''6월의 폭풍'과 이 작품에서도 언급되는 1870년 보불 전쟁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새로운 전쟁과 함께 두려움의 순차적인 매개가 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이곳에 등장하는 부르주아 계급인 '앙젤리에' 가(家)는 귀족이 저무는 세기에 한 마을의 지주 계급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여기에 전통적 귀족 가문으로 등장하는 몽모르 자작 가와는 별도의 위상이라고 생각되는데요. 물론 적잖은 마을 사람들이 몽모르 자작의 땅에서 농사를 짓고 있긴 합니다만 일전에 누렸던 귀족 계급의 영향력은 역사적 뒤안길로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이 소설에서도 위와 동일한 세태를 가감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앞선 앙젤리에 가문의 며느리인 '뤼실'은 전쟁으로 실종된 남편과는 아무런 애정도 없이 결혼했고, 그런 이유 때문에 스스로가 상당히 불행하다 느끼고 있습니다. 이 결혼의 내막은 남편이 처가의 재산 만을 보고 뤼실을 받아들인 것인데요. 이는 아들을 너무나 사랑하는 앙젤리에 노부인조차 인정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시어머니인 앙젤리에 노부인이 그런 처지의 뤼실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도 아닙니다. 극 중에 설명으로 드러나는 고부간의 벽과 보이지 않는 갈등이 그녀의 말마따나 자신이 이 저택에서 '외로운 섬'과 같은 존재로 만들고 있다 봐도 무방해 보였습니다. 그런 와중에 낯선 한 무리의 독일군이 마을에 진군하여 머물게 됨으로써 그녀를 둘러싼 일상이 크게 변하게 될 조짐을 맞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소규모 독일군을 이끄는 장교가 앙젤리에 가에 '기한 없는 숙박'을 통보했기 때문인데요. 모두의 예상과도 다르게 이러한 요청은 정중하고 부드럽게 진행되었습니다. 

앞선 뤼실과 더불어 극의 주요한 화자인 브루노는 독일군 엘리트 장교로서 많은 교육을 받은 인물입니다. 그도 고향에 결혼한 처가 있으며, 만약 전쟁이 아니었다면 스스로도 평범한 삶을 영위했을 겁니다. 아마도 이런 부분에서 앙젤리에 가문에 짐을 푼 브루노가 사실상 젊은 미망인이라고 볼 수 있는 뤼실을 한눈에 보자마자 큰 연민과 애정을 느끼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더욱이 그는 자신에게 매번 이죽거리는 앙젤리에 노부인에게 예의를 다하고 이 저택에 머무는 만큼은 이곳에 살고 있는 여인들에게 스스로가 폐가 되지 않도록 노력합니다. 하지만 그가 뤼실에 대해 느끼는 동질감과 연모는 날이 가면 갈수록 깊어져 가는데요. 두 사람은 서로 대화가 잘 통했을 뿐만 아니라, 특히 뤼실은 전형적인 여성 캐릭터와는 다르게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행동거지가 진중한 여성이기도 했습니다. 그녀가 내뱉는 대화나 주변인들이 그녀를 대하는 태도 등을 종합해 봤을 때, 뤼실은 신중하고 사려 깊은 인물로 여겨집니다. 생전 보지도 못한 낯선 이방인들이 자신의 삶을 침범하고 이들이 마을에 미치는 영향이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님에도 스스로 내적 불안을 내비치지 않는 모습은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점령군 장교인 브루노의 신사다움과 여성을 배려하는 태도, 말에서 느껴지는 박학다식한 모습은 반대로 아는 게 없어서 무식하고 즉흥적인 프랑스 인들과는 사뭇 대비되는 모습이기도 했는데요. 물론 이러한 차이는 당시 시대상에 기인한 유산계급과 그렇지 못한 신분에서 오는 근본적인 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묘사되는 마을 사람들이 이 독일인들에 대해, 근원적인 프로이센에 대한 경멸과 맞물려, 이들을 '보슈'라고 멸칭하는 것까지 문명적인 정복자와 즉흥적이고 본능적인 피지배자들의 이런 대비된 관계와 묘사는 처음에는 상당히 이질적이기도 했습니다.  

프랑스가 독일에 대해 패배한 근본적 이유를 네미롭스키가 작품에서 일목요연하게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여기에 등장하는 앙젤리에 노부인의 페탱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고려해 본다면, 다소나마 이를 짐작해 볼 수 있겠는데요. 특히 몽모르 자작이 프랑스가 패배한 이유가 병사들이 군기 문란과 애국심 결핍, 그들의 '나쁜 정신'에 있다고 본 점은 당시 프랑스의 문제가 어디에 있었는지 충분히 짐작해 볼 만합니다. 그럼에도 쿠엔틴 타란티노의 같은 배경의 영화,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의 나딘의 술집 장면에서 독일군들과 여실히 잘 지내고 있는 프랑스인들의 모습은 흡사 힘을 가진 이방인들에 대한 두려움이라 할지라도 네미롭스키가 만들어 놓은 서사와 일견 유사해 보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단호하게 앙젤리에 노부인은 '프랑스인들은 서로 밀고하지 않는다'는 확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많은 프랑스인들이 나치 독일에 협력했으며, 파리에 세워진 괴뢰 정부에도 프랑스인들이 자발적으로 나섰다는 점은 뭔가 우리의 역사와도 닮아 있는데요. 전후 드골이 부역자로 일했던 많은 프랑스인들을 처단한 것에 이르러, 인간이 생각하는 자신에 대한 사적인 안위와 평온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금 곱씹게 됩니다. 네미롭스키 역시, 인간의 이러한 진면목을 자신의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근본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뤼실과 브루노를 한 축으로 이뤄지는 이 작품의 서사는 전쟁 상황에서 평범한 사람들에게 가져다 주는 평온이 얼마나 가변적이고 이러한 상황이 어떻게 급변할 수 있는지를 극의 전개를 통해 잘 보여주고 있는데요. 특히 약간 지엽적이지만 전작인 '6월의 폭풍'에서도 등장한 마들렌의 바뀐 운명과 그녀가 아직도 섬세하고 도시적인 남성을 선망하고 있다는 묘사와 그것과는 아주 상반된 인물과 가정을 꾸리며 살고 있는 모습은 한편으론 삶의 아이러니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양태들 가운데 하나라고 느껴졌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뤼실이 브루노를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관습과 도덕적 이유를 포함해, 욕망과 현실의 한계라는 아이러니가 인간의 욕망에 반하여 일으키는 일종의 거부 반응이라고 이해되었는데요. 그래서 뤼실 자신이 진정한 자유를 누릴 준비가 되었는지를 끊임없이 자문했던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보는데요. 또한 이와는 별개로, 마을 여성들이 금발의 젊은 독일군들을 향해 던지는 추파와 이들과 맺는 육체적 관계에 대한 열망은 전쟁으로 남자들을 잃은 한 공동체의 여성들이 자신들의 삶과 욕망을 지키기 위한 치열한 몸부림으로 읽히기도 했습니다. 또한 노동자들이 돈 맛을 알게 되어 전통적인 프랑스의 계급 간 위계를 망각하게 되었다는 설명과 여기에 묘사되는 농부들까지도 사회주의에 물든 것으로 이해하는 전통적 지배 계층의 뿌리 깊은 인식은 당시 이 시대가 과연 어떠한 체제였는지 능히 짐작하게 할 만합니다. 그런 와중에 독일이 주도하는 대전에 국운이 휩쓸리게 되었으니 몰염치한 인식과 계급 간의 갈등은 전반적으로 앞으로 드러나게 될 전체주의적 망령에 비하면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브루노가 속한 프랑스 주둔군이 새롭게 구축되는 러시아 전선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극은 마무리 되기에 이릅니다.  


-작품 중후반부에서 브루노와 뤼실의 대화를 통해, 소위 '벌집 정신'이 언급됩니다. 이는 꿀벌들이 여왕벌의 명령을 거부하기 어려운 것처럼, 당시 독일인들의 수동적인 입장을 설명하는 데 쓰이고 있는데요. 저는 이러한 언급과 맥락이 꽤나 의미심장하다고 여겨졌습니다. 특히 작가는 물론, 수많은 유럽의 유대인들을 절멸하게 만든 독일인들의 이 참혹한 아이디어가 탄생하게 된 수많은 연유들과 함께, 그 자체는 인간이 다른 인간을 사냥하는 야만의 시대의 단초가 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프랑스인의 손으로 만들어졌고, 프랑스인의 눈이 바라보았고, 프랑스인의 먼지떨이가 닿았던 물건들을 독일인이 더럽히도록 놔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다른 것들은 익살맞은 그림이나 도표를 이용해 전 세계에 뻗어 있는 영국의 지배력과 혐오스러운 유대인의 횡포를 보여주었다.

마을 여자들은 증오와 욕망이 동시에 묻어나는 눈길로 적군을 바라보며 ‘우리의 주인들‘이라고 불렀다.

뤼실은 사랑으로든, 질투에 찬 혐오로든 마움이 충만했던 적이 없었다.

마들렌은 두려움에 휩싸여 생각했다. ‘저 사람이 나한테 집적대면 브누아가 뭐라고 할까?‘

보네는 잔인했다. 하지만 그것은 청소년기의 잔인함, 온전히 자신과 자신의 영혼을 향해 있는, 아주 왕성하고 섬세한 상상력에서 비롯된 잔인함이었다.

"남자는 전사가 되기 위해 태어나죠. 여자가 전사의 여흥을 위해 태어나듯이." 보네가 이렇게 대답하고는 웃었다. 순박한 프랑스 시골 여자에게 니체를 인용하는 것이 재미있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너무 오랫동안 남자들의 자리가 비어 있어서 침략자들이 그들 자리를 차지하는 것처럼 보였다.

몽모르 자작은 프랑스가 패배한 이유가 병사들의 군기 문란과 애국심 결핍, 그들의 ‘나쁜 정신‘에 있다고 생각했다.

부르주아들은 자작 부인이 이런 수수한 차림과 스스럼 없는 태도를 통해 그들에 대해 품고 있는 깊은 멸시감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부인 죄송하지만 그건 여자의 단어입니다. 남자는 열의 없이도 자신의 의무를 다하죠. 그리고 그것을 통해 남자라는 것을, 진정한 남자라는 것을 인정받죠."

브루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전투를 하다 보면 숲속에 배복한 채로 며칠 밤을 보내야 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 기다림은 아주 에로틱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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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폭풍 이렌 네미롭스키 선집 2
이렌 네미롭스키 지음, 이상해 옮김 / 레모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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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렌 네미롭스키는 1903년, 당시 러시아 제국의 키에프에서 부유한 은행가이자 유대인이었던 레온 보리소비피 네미롭스키의 딸로 태어납니다. 그녀의 가족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시작되자 러시아 제국을 떠나 핀란드를 거쳐, 프랑스 파리에 정착을 하게 되는데요. 이후 네미롭스키는 소르본 대학에 진학하고 바로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926년에 은행가인 미셸 엡스타인과 결혼하게 되는데요. 이로부터 3년 뒤인, 1929년에 그녀에게 문학적 명성을 안겨준 '데이비드 골더'의 출판이 이뤄집니다. 이런 그녀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1938년에 최종적으로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는데 실패합니다. 결국 프랑스에서 유대인이자 무국적자라는 굴레는 1942년에 비시 프랑스 정부에 고용된 경찰에 의해, "유대인 무국적자"라는 미명하에 체포되었고, 그 와중에 그녀는 자신의 딸들에게, "여행을 떠나는 것"이라는 말과 함께, 마지막 작별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네미롭스키는 오를레앙에서 북동쪽으로 37km 떨어진, 비시 프랑스 정부의 강제 수용소였던 '피티비에 집합 수용소'로 끌려갔고, 1942년 7월 17일, 다른 유대인들과 함께 당시 폴란드의 절멸 수용소인 '아우슈비츠'로 이송되기에 이릅니다. 결국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지 한 달 후에, 그녀는 발진티푸스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녀의 남편인 미셸 엡스타인 역시, 1942년 11월 6일에 아우슈비츠에 보내졌고, 즉시 가스실에서 살해당했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책은, 'Suite Française' 시리즈의 작품으로 원제, "Tempete en juin"으로 지난 2004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5에 초도 번역되었습니다. 제가 읽은 이 책은 전면 개정판으로 2023년 6월, 번역되었습니다. 참고로 그녀의 이 작품은 시리즈 미완성 논고로 작가 사후 최초로 프랑스 '르노도상'을 수상하게 니다.

앞서 언급했듯, 이 작품을 쓴 이렌 네미롭스키는 후에 '절멸 수용소'인 아우슈비츠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합니다. 만약 제가 당시 아우슈비츠에 있던 유대인들 중 한 사람이었다면 과연 스스로 미치지 않고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을지 고민해 보지만 막상 떠오르는 생각은 한결 같습니다. 그것은 아마 살아있어도 죽은 것이나 다름 없는 상태였을 겁니다. 이런 그녀가 '프랑스 조곡'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는 이 장편에 대해 얼마나 많은 고심을 했을지 충분히 짐작이 되는데요. 작가 역시 당대를 살아가던 지식인이었던 만큼 나치 독일에 점령된 파리와 그 시대에 대한 나름의 고찰과 분석이 있었을 겁니다. 즉, 자신의 딸들에 의해 발견되기 전까지 오랫동안 묻혀있던 이 원고에도 작가인 그녀의 통찰과 더불어, 여실히 그 시대의 자화상을 담고 있었는데요. 다만 이 작품의 형식적인 측면에서 볼 때, 개인적으로 제가 읽었던 다른 작품들 가운데, 니콜 크라우스의 '그레이트 하우스'와 묘하게 닮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바로 여러 인물들이 특별한 상황과 맞물려, 그 와중에 겪게 되는 사회적 분절과 그들을 둘러싼 다른 인물들과의 갈등과 대립은 여기에 등장하는 전쟁을 그저, '정치적 행위'라고 믿는 자들에게 큰 경종이 될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이 작품이 히틀러가 집권 하기 전, 바이마르 공화국에서의 정치적 혼돈과 1940년 당시, 파리를 독일군에게 내준 '공화국 정부'의 무능이 뭔가 절묘히 매치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작가인 그녀도 당시 공화국 정부의 무능과 그로인한 여러 한심한 작태를 이 작품 여러 곳에서 독자들에게 알리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파리지앵'과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파리지앵'은 어떠한 의미 차이가 있는지 다소 불명확합니다만 폴란드가 히틀러에 의해 불법적으로 점령 당하는 것을 보고도 이 때의 프랑스 엘리트와 파리 시민들은 아마도 별다른 경각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 소설과 비슷한 맥락이라 볼 수 있는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슈필만 가족이 폴란드의 동맹국이었던 프랑스가 나치 독일군의 수도 바르샤바 진군에 영국과 함께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는 소식이 라디오에서 들리자마자 피난을 접게 되는 장면은 지금도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 프랑스조차 수도 파리가 독일군에 의해 점령 당했으니 앞선 영화에서 주요 배경으로 등장하는 바르샤바와는 어떤 면에서는 꽤 유사한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네미롭스키의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몇몇 가족들은 영화 피아니스트의 슈필만 가족과는 달리, 1940년 6월 13일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하자, 즉시 피난 길에 오르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보이는 인간 군상의 민낯이 이 작품의 주제 의식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물론 작가인 네미롭스키도 일전에 읽었던 이디스 워튼 만큼이나 부르주아 계층에 대해 거의 직접적인 냉소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반 민중에 대해서도 '군중'이라는 표현을 써가면서 야만적인 자연 상태에 빠진 사람들을 간접적으로 비판하고 있었는데요. 오로지 생존 본능으로만 움직이는 일반 시민들의 모습을 그저 비이성적인 모습이라 에둘러 비난해 볼 수 있지만 무엇보다 이런 상황을 초래한 무능한 프랑스 정부에 대해 먼저 비판의 화살을 돌려야 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해 보입니다. 이처럼 개략적인 극 서사는 파리 점령 며칠 전을 시작점으로 이 유구한 도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전쟁을 피해 무작정 피난 길에 오르고 난 며칠 뒤, 독일과 프랑스 간의 빠른 휴전이 성립되자 다시 파리로 돌아오는 여정과 이 과정에서 이들이 '점령된 파리'에서 겪게 되는 일부 충격적 사건들이 다른 여러 인물들과 겹치면서 최종적으로 서사는 그렇게 마무리 됩니다. 

우선 여기에 등장하는 부르주아 계급의 여러 인물들은 여러 사용인들을 거느리며 파리에서 상당히 윤택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이 도시의 유서 깊은 가문이기도 한 '페리캉' 가(家)를 꼽을 수 있겠는데요. 또한, 노골적인 배금주의자인 가브리엘 코르타와 샤를 랑줄레는 재산과 교양이 전무한 일반 계층을 극명하게 경멸하고 이런 지독한 선입견으로 말미암아 피난 도중 스스로의 민낯을 여지없이 드러내는데요. 앞선 이들과는 대비되는 인물들로, 이 전쟁에 참전했던 장마리가 예기치 않은 부상을 입고 경험하게 되는 평화적 일상과 후반부에 그를 둘러싼 다소 난감한 결말, 이와는 달리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인물인 사제 필리프 페리캉은 작가가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몇몇 전형적인 인물들과 절묘하게 대비되어 나타나는 서사의 한 틀이기도 합니다. 특히 종교와 그것을 일체의 삶으로 여기고 신의 목소리를 갈구했던 필리프의 전혀 예상하지 못한 비참한 최후는 어쩌면 타인을 실질적으로 이해해 보려 하지 않았던 그의 운명을 나락으로 이끌게 된 것인데요. 이는 사람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먼저인가 아니면 신의 부름이 우선 인지에 대한 근본적 질문으로 읽힙니다. 이외에도 전쟁이라는 전무후무한 사태에 이르러 힘없고 평범한 사람들이 그저 휩쓸려 나갈 수밖에 없는 그런 비참한 처지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쉽게 지나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더욱이 조국의 붕괴와 피할 수 없는 가족이라는 운명 사이에서 갈등하는 위베르의 목소리를 통해, "우리가 다 똑같은 개돼지라면 한결 이해하기 편할 것"이라는 독백은 이 전쟁이 인간을 어떤 식으로 추락시키는지 독자들로 하여금 충분히 가늠하게 만듭니다. 이런 가운데 작중의 도시인 크레상주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지지 않은 이름 모를 마을에 등장한 독일군을 대하는 마을 사람들과 피난민들의 순진한 태도 역시, 전쟁의 진면목과 앞으로 프랑스에 드리울 운명을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불행한 미래를 한편으론 예측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특히 여기에 여러 화자들의 이야기 소재로 언급되는 1870년 보불전쟁과 1914년 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 대전은 그 성격과 양상이 완벽히 다른 전쟁이라 볼 수 있습니다. 작가가 사실상 복선을 두고 다룬 두 전쟁과 소설 속 인물들이 몸소 겪게 되는 이 인간성 상실의 2차 대전이 그 궤가 확연히 다른 점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는 작가가 지난 날 프랑스가 겪었던 과거 전쟁들이 여기에 등장하는 화자들을 통해, 이에 비하면 마치 그저 순진한 전쟁이었다 해석하는 것으로도 여겨졌습니다. 이러한 느낌은 전적으로 개인적인 감상일 수도 있지만 결말에서 일부 인물들에게 보이는 '충격적인 귀결'과 평화의 시대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이 사람들의 인식 자체의 흡사 비틀림과 냉소는 충분히 극의 중요한 맥락이기도 했습니다. 이와는 별개로 맨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작가인 네미롭스키가 자신의 사랑하는 딸들과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누고 끝내 절멸 수용소인 아우슈비츠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을 접하고 나니, 제 마음 한구석이 저릴 수밖에 없었는데요. 그럼에도 현재 일부 극우주의자들이 히틀러와 그의 추종자들이 저지른 '600만에 이르는 유대인 절멸'을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그저 유대인들의 거대한 음모로 치부하는 이자들의 민낯은 인간이 과연 이성적인 존재인가에 대해 스스로 끊임없이 자문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작금의 세계에서 단순히 역사 수정주의적 입장 정도로 국한시킬 수 없는 소위 '이성의 마비'와 다름없는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가 아닌가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의미를 드러내는 간접적인 나레이션을 통해, 드러나는 '개인의 자유', '내일의 정신'과 같은 본질적인 화두들은 작가의 진지한 고찰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그녀가 사실상 프랑스 시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로부터 국적을 취득하지 못했고, 끝내 유대인에 덧씌운 중상모략과 같은 역사적 폭력에 '개인의 삶'이 그야말로 짓밟히고 말았습니다. 과연 이 부분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내일의 정신'이 더 나아가 다음 세대에도 의미가 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이에 대한 의구심을 저버릴 수가 없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는 우리의 정치가 과연 이때보다 진정으로 진보했는가에 대한 진지한 고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 때문에 부부는 공화국 정부를 불신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난 그게 좋아. 여자란 자고로 크림처럼 하얀 몸이 부드럽고 풍만하고 순진한 암송아지 같아야 해. 자주 마사지를 받아서 유연하고, 연지와 분 냄새가 밴 나이든 여배우의 피부, 자네들도 알지?"

돈 많고 유명한 사람들이 판단력은 짐승들만도 못하다니까! 짐승들도 위험은 바로 알아차리는데!

떠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결단력 없는 사람들과 정신 나간 사람들이 아직 파리에 남아 있었다.

엄밀히 말해, 그것은 불안이 아니라 인간적인 면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투지도 희망도 찾아볼 수 없는 이상한 슬픔이었다. 죽음을 기다리는 짐승, 그물에 갖혀 어부의 그림자가 지나가는 걸 바라보는 물고기의 눈에 깃든 것과 같은.

교회 안에서는 이중적인 삶이, 하루하루 반복되는 평온한 일상과 묘하게 열에 들뜬 또 다른 삶이 이어지고 있었다.

화장을 짙게 하고는 장교들로 가득한 트럭을 얻어 타고 시시덕거리던 여자들, 너무나 만연한 이기주의, 비겁함, 야만적이고 아무 의미도 없는 잔인함이 위베르를 구역질 나게 했다.

겨우 닷새 만에 프랑스의 절반을 삼켜버린 독일군 기계화 부대는 내일이면 틀림없이 이탈리아, 스위스, 스페인의 국경에 도달할 것이다.

샤를 랑줄레는 자신을 끌어들여서 공감을 얻으며 즐거워하려 했던 피란민의 의도를 꺾어놓은 것에서 변태적인 쾌감을 느꼈다. 더럽고 상스러운 종자들은 자신들이 인간적인 연민을 느낀다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그것은 멜로드라마에 대한 천박한 호기심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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