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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란 무엇인가 - 마스크 시대의 정치학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10월
평점 :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는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 솔링겐 출신으로 대학 강단의 학자일 뿐만 아니라, ZDF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방송을 하고 있는 대중 철학자이기도 합니다. 일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퀼른 대학에서 수학하고, 1997년에 도미해 전세계에서 가장 저명한 언론 관련 펠로우쉽인 시카고 트리뷴의 아서 에프 번스 펠로우쉽을 수료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문학 관련 글을 비롯, 인간의 본성과 관련해 생물학적인 관점 및 심리학적인 측면의 논픽션 글을 작업하기도 하였는데요. 본래 그는 철학 주제의 글을 쓰고 있지만, 2009년 봄에 독일 정론지 슈피겔의 베스트셀러 목록에 그의 논픽션 글이 올라왔던 것으로 보아 대중 철학자 혹은 대중 지식인으서의 면모도 가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책은 원제, "Von Der Pflicht : Eine Betrachtung"으로 2021년 3월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10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이 글 서두에서 저자인 프레히트는 자신을 "정치에 관심이 많은 철학자"로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정치를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철학자가 과연 진정한 철학자로 불릴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대부분 비슷한 대답을 하게 될 것으로 보이는데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현실 정치와 관련해, 대표적으로 지난 2019년 11월 이후, 선진적이고 존경받을 만한 서구 유럽의 자유 민주주의의 실상이 이 펜데믹 사태로 인해 전세계에 드러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아마도 저자 자신과 같은 많은 유럽인들이 이 코로나 사태를, "빌 게이츠와 중국 당국 그리고 거대 제약회사가 담합한 비열한 동맹의 결과"라고 터무니 없이 이를 맹신한 증거가 각종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드러난 바가 있습니다. 민주주의 국가를 물밑에서 좌지우지 하는 '딥 스테이트'와 같은 그림자 정부의 음모라고 확신하는 이들 유럽인들은 그런 인식화의 과정에서 "보건 사태에 따른 국가의 개입을, 국가 스스로가 시민의 기본권을 영구히 침탈히기 위한 계획"이라 받아들이고 다시 유럽에 파시즘이 도래할 것이라고 확신한 그 일련의 과신(?)의 과정을 저자가 먼저 언급하는 것으로 이 글은 시작되고 있습니다.
저자인 프레히트가 이 글 2장에서 인정하고 있듯이, 국가는 "시민들에게 있어 자연 상태와 같은 계약 이전의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고 시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고 단언합니다. 이것은 꽤 단호하게 "시민은 국가에 의해 보호되어야 한다"는 당위로서 인정되고 있는데요. 이 부분과 맞물려, 조안 C. 트론토의 "돌봄 민주주의"와 같은 개념에 착안해, 자신의 독일이 이러한 "돌봄 국가"라는 의무에 충실했고, 또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의무론을 먼저 언급합니다. 여기에 시민들의 의무론 또한 마찬가지로 도출되어야 하는 것일텐데요. 이 부분과 관련해 저자 현재의 전 유럽인들이 정치적으로 "시민이 누려야 할 기본권리"에 대해서만 빠삭하고 반대로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 시민이라면 마땅히 지켜야 될 의무"에 있어서는 이들이 21세기가 한참 지난 즈음에야 비로소 인식하게 된 것이라고 일침을 날리고 있었습니다. 즉, 소위 자유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자신들의 삶을 영위하고 있던 시민들이 "국가가 헌법을 무력화해서 시민권을 억압하고 이어 독재 국가로 나아갈 것"이라는 제2의 파시즘 도래를 근거없이 두려워하기 전에 먼저 자신들이 사회와 다른 시민들을 위해 지켜야 할 이 "의무"를 망각했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기도 한데요. 이처럼 3장에서 다수의 시민들이 '국가에 의한 기본권 제한에 대한 공포'를 먼저 주장하기 이전에, "국가가 시민을 서로로부터 보호하는 데 의무를 다했는가? 그리고 코로나와 비교했을 때 여전히 무시되거나 진지하게 취급받지 않고 있는 다른 위험이나 위기에 대해 국가가 의무를 망각하지 않고 있는가"를 먼저 따져봐야 한다고 저자는 마찬가지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시민들이 트론토의 "돌봄 민주주의"와 동일한 맥락의 '국가 주도의 시민 보호'를 파시즘의 도래라는 식으로 오판하게 된 연유에는 저자 역시, 자본주의의 재산권 보호나 이익 추구와 같은 매우 기능적인 측면의 강화와 그동안 만연된 시민들의 '자유로운 이기심 추구라'는 일련의 신자유주의적 이행이 큰 영향을 끼친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는데요. 프레히트 역시 글에서 토크빌을 인용하고 있습니다만, "자신들의 이기심으로 점철된 사회가" 민주주의에 과연 어떠한 파급을 끼칠 것인가는 누구나 쉽게 짐작할 만하다고 여겨집니다. 이것은 본문에서 일련의 '토크빌의 딜레마'로 이해되고 있었는데요. 과거 칸트주의적 입장에서 본연의 인간이 어떤 권력이나 정치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혁명적인 가치론과 더불어 개인의 자유 역시, "제일 먼저 다른 사람의 권리를 고려하는 것이 먼저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은 더이상 강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자본주의 혹은 좀 더 노골적으로 개념화된 신자유주의가 "무엇보다 자신의 이익 먼저 챙길 것"을 올바른 경제적 인간의 전형으로 규정했기 때문일 겁니다. 또한, 이는 과거 오래된 사회적 가치라는 전통주의적 입장에서 선회해, 포드식 후기 자본주의 그 즈음에, "강자를 의도적으로 선택하고 약자를 의도적으로 배제함으로써 민족을 최적화한다는 이념이 19세기에 전유럽을 휩쓴 것"은 어쩌면 높은 확률로 허버트 스펜서의 공로일수도 있습니다. 사회진화론과 자본주의의 성공적인 결탁 자체를 사실 누구도 언급하길 꺼려하고 있으나, 결국 신자유주의에 이식된 것은 매우 분명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거의 결론에 이르게 되는 5장에서, 저자는 앞선 논증을 간략히, 다음 문장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민주적 시민 의식과 자본주의적으로 배양된 이기심이 단순히 보완 관계가 아니라 서로 충돌하는 힘이라는 사실은 새로운 생각이 아니다"라고 말입니다. 현재의 많은 유럽인들이 '시민의 기본 권리'를 마땅히 쟁취해야만 하는 이기심 정도로 여길수도 있습니다. 시민의 권리는 이기심 따위로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어찌됐든 공화주의에 입각한 자유 민주주의의 오래된 뼈대이기도 하니까 말입니다. 다만, 이 지점에서 의문이 드는 것은 왜 다른것도 아닌 그들이 주장하는 기본권 즉, "마스크를 안 쓸 권리,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할 권리, 국가가 시민들의 이성을 존중할 권리" 등이 왜 이슬람 혐오와 성소수자에 대한 증오를 일삼던 자들에게서 더 많이 나오냐는 것입니다. 물론 이 부분과 관련해서 저자인 프레히트는 건전한 자유 민주주의 국가라면 시민들의 합리적 이성과 도덕적 분별력을 신뢰해야 한다고 기본적 인식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만 저 개인적으로는 신자유주의가 정치를 시녀로 만들고 나서, 시민의 도덕적 분별력은 18세기보다 더 멀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정치가 시장 근본주의의 보조적 역할로 전락하면서 아마 그즈음부터 정치에 대한 불신과 함께, 개인 이기심의 극대화에 있어 거추장스러운 도덕적 가치를 우리 스스로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이성을 갖고 있는 인간이라면 현재의 보건 의료에 따른 국가의 개입 선언이 흡사 카를 슈미트식의 헌법의 무력화나 제2의 히틀러를 유럽에 재탄생 시킬것이라는 가정은 거의 무의미하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이미 국가의 역할과 기본적인 기능론들이 신자유주의와 같은 시장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무력화 된지 오래이며, 데이비트 코츠의 의견대로 더 많은 부를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국방비 지출을 제외한다면 실질적으로 국가의 역할론 자체가 제한된지 이미 오래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1990년대 공산권의 붕괴로 인해 후쿠야마는 그것을 역사의 종언이라고 다소 감격해 했지만, 그의 보수주의적 입장을 고려하더라도, 이후 자유 민주주의의 더 많은 확대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근본주의가 초래된 것 자체가 어떻게 보면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근 몇년간의 고도화된 네트워크화로 인해, 사실상 국가는 시민들의 적절한 감시에 놓여있다고 여길수도 있을텐데요. 물론 이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미국 CIA와 같은 안보 당국이 자신들의 임의대로 패러다임을 바꾸고 싶어하지만 펜데믹의 출현은 그것조차도 쉽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국가들의 실질적 자원이 현재 보건 관리에 투입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과 같은 시기에 단순히 마스크를 쓰지 않을 권리를 아주 공개적인 정치적 토론에 부쳐야 할지는 그 결론이 명백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찬가지로 저자는 앞선 왜곡된 믿음에 대해 로크의 "신념 독재"로 표현하고 있습니다만 지금과 같은 시기는 무엇보다 시민들의 도덕적 변별력을 부활시켜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이 즈음에서 편협한 글을 마무리하기에 앞서, 평소에 자주 인용하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마지막 호소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모두가 손잡고 무덤으로 가기 전에, 서로가 서로를 책임져야만 한다"
-프레히트의 이 글은 특히, 4장 "시민의 의무와 탈도덕화"가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이번 펜데믹 사태로 인한 국가의 전방위적인 보건 개입에 대해 과거 '복지국가로의 함의'로 이어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는데요.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대처조차도 본래대로 저들은 모두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고 싶어합니다.
자유주의 국가는 한편으론 자신이 시민에게 보장한 자유가 내적으로, 그러니까 개인의 도덕적 실체와 사회적 동질성을 통해 적절히 조절될 때에만 존속할 수 있다
정치적인 면에서 그런 서사적 모티브의 단골손님은 독재에 대한 꿈이다. 정치인들은 늘 독재를 꿈꾼다는 것이다
하필 네오 나치와 제국 시민 같은 파시스트들과 나란히 행진하면서 파시즘을 경고하는 것도 어리석은 자기 모순이 아니라 비상한 시대적 명령이다
도덕적 행동은 항상 타인의 권리는 지키는 일과 맥락이 닿아있다. 그에 대한 핵심적 인식은 19세기의 빌헬름 폰 훔볼트나 존 스튜어트 밀과 같은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명확히 표현되었다
강자를 의도적으로 선택하고 약자를 의도적으로 배제함으로써 민족을 최적화한다는 이념은 19세기 후반에 강력히 대두되었다
따라서 이 지점에서 제기되어야 할 물음은 국가가 약자 보호의 조치를 통해 시민의 일상적인 삶에 개입하고 기본권을 일시적, 부분적으로 제한할 권리가 있느냐, 혹은 그럴 의무가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암울한 시대에 누구도 특정 목적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칸트의 원칙은 한마디로 혁명적이었다
따라서 코로나19에 대한 국가 대응이 적절했느냐의 물음은 두 가지 측면에서 던져질 수 있다. 첫째, 시민을 바이러스로부터 보호하고, 그와 동시에 시민을 서로로부터 보호하는 데 국가는 의무를 다했는가? 둘째, 코로나와 비교할 때 여전히 무시되거나 진지하게 취급받지 않고 있는 다른 위험이나 위기에 대해서는 국가가 의무를 망각하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그런 진실에 매몰된 분노는 5G 통신탑을 불태우는 행동으로까지 나아간다. 코로나19가 5G 전파에서 생성되거나 전파를 통해 확산된다는 음모론에 사로잡힌 영국인들이 벌인 행동이다
약자 보호를 위한 국가의 보건 조치에 노골적으로 불평을 늘어놓고 과도하게 저항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뵈켄푀르테가 국가 운영에 필수적이라고 했던 <개인의 도덕적 실체>는 오늘날 상황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다
민주적 시민 의식과 자본주의적으로 배양된 이기심이 단순히 보완 관계가 아니라 서로 충돌하는 힘이라는 사실은 새로운 생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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