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경제학 - 지금 왜 애덤 스미스인가?
고구레 다이치 지음, 유가영 옮김 / 말글빛냄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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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쓴 고구레 다이치는 일본 게이오대학의 경제학과를 졸업한 이후 후지필름을 비롯한 사기업에서 경력을 쌓은 다음, 독립해 현재는 일본 교육커뮤니케이션협회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그는 경제저널리스트이자 일종의 경제학 분야의 작가로서, 일반인들에게는 아직까지 친숙하지 않은 경제학 분야의 글을 번역 및 평역해 논저를 쉽게 알리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일본 내의 기사를 찾아보니 그의 경제학 관련 서적들이 생각보다 큰 인기를 얻고 있는 것으로 나오고 있는데요. 올해 1977년생으로 보기보다 나이도 상당히 적어 글에서도 꽤 진취적인 성격이 드러나 있기도 했습니다. 현재 그는 일년에 약 십 여권의 책을 집필하고 있고 더불어 왕성한 강의 활동을 하고 있는 대중 지식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책은 원제, "いまこそアダム·スミスの話をしよう~目指すべき幸福と道德と經濟學~"로 지난 2011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2년 7월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저자인 고구레 다아치의 이 책은 요즘 한창 나오고 있는 '애덤 스미스 다시 읽기'에 부합되는 글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사실 그동안 애덤 스미스에 대한 사상 자체가 너무나 왜곡되어 있었기 때문에 근래 카를 슈미트에 대한 재해석과 연구에 마찬가지로 스미스에 대한 올바른 재해석이 이뤄지지 못한 점은 큰 아쉬움이기도 합니다. 스미스의 정확한 이해를 돕는 연구가 다소간 어려운 부분이 개인적으로 알기에는 많은 경제학자들이 스미스의 '도덕 감정론'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글을 통해서도 경제학 전반의 스미스에 대한 오류와 편의주의적인 해석이 경제학 전반의 변하지 않는 흐름임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는데요. 저는 그동안 애덤 스미스에 대한 꽤 조직적인 오역에 대해 신자유주의자들의 역할이 가장 컸다고 일관되게 밝혀 왔습니다. 약간의 일례로 밀턴 프리드먼은 자신의 입으로 "사회에 정의 따위는 필요없다"고 말했으면서도 애덤 스미스가 얼마나 '정의'를 강조했는지에 대해 이를 제대로 언급하지도 않은 프리드먼의 저 뻔뻔함에 입을 다물 수 없던 때가 있었습니다. 다만, 저자의 해석대로라면 이러한 스미스에 대한 오역은 당시 신흥 자본가들이 '이기심'에 대한 이해를 작위적으로 받아들였고 그러한 가운데 사회적인 측면에서 이러한 인식이 점차 구축이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급격한 신자유주의화의 흐름속에서 애덤 스미스가 이들의 산파로 오용된 것은 분명 학문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물론 자유주의 경제학의 틀을 처음 제공한 사람이라는 측면에서 스미스의 평가가 이뤄지고 있는것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전반적인 그의 사상이 여전히 제대로 이해되지 않고 있는 현재 학계의 문제는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이 글은 크게 7장으로 구분되어 있고 1장과 2장이 도덕 감정론을 다뤘다면 3장부터는 국부론의 주요 핵심과 오해되고 있는 부분을 정정하고 재해석하는 순으로 글은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우선, '보이지 않는 손' 과 '이기심'을 먼저 언급하고 싶은데요. 저자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이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해 명확하게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에서 딱 한 차례씩 나오는 점을 먼저 밝히고, 특히 이 보이지 않는 손은 일종의 '신의 영역'으로서 '신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 정정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신을 믿음으로써 인간 사회가 저절로 기능해간다"는 의미이기도 한데요. 당시 애덤 스미스가 무신론에 가까운 데이비드 흄과 친분을 갖고 있었던 것 만으로도 당시 사회에서 이런저런 기피를 당했다는 일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손의 진정한 규정이 신과 관련된 문제였다는 점은 꽤 놀랄만한 이유이기도 한데요. 마찬가지로 '진정한 선악의 판단'은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없다는 스미스의 인식 또한 앞선 신의 존재와 연관이 깊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엄밀히 따지면 선악의 문제를 신성의 책임으로 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사회의 판단에 여지를 남기기는 했습니다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스미스의 이런 생각 자체가 그의 신중한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그 다음, 이기심에 대해선 "사회가 잘 통합되고 발전해가기 위해서는 '이기심'이 필요하다고 스미스는 말했으며, 그 이기심이 정의와 윤리에 의해 통제되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기도 했는데요. 그동안 우리에게 주입된 이기심의 주요 골자는 다소간의 도덕과 윤리를 훼손한다 하더라도 개인의 이기심 추구는 최대한으로 보장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신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자유'의 본질과 일맥상통하며 스미스의 이기심에 대한 해석은 날로 왜곡되어 왔던 것은 분명합니다. 특히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도덕을 위반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과 다름없다"는 그의 주장 역시 신자유주의자들과는 명확히 그 궤가 다른 생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좀 이른 결론이긴 합니다만 국부론에서 보여지는 스미스의 '경제 발전에 대한 인식'은 당시 빈곤층의 생활 개선에 중점을 두고 있었고 이러한 도덕적 목표로 인해 이기심을 어느 정도 허용할 수밖에 없다는 그의 고심이 담겨져 있습니다. '자본의 축적' 또한 마찬가지의 논법인데요. 사회가 경제활동을 통해 자본을 축적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생활에 필요한 필수품들을 좀 더 원할하게 생산하고 공급하기 위한 필수 조건으로서 단순히 자본과 생산품이 축적되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적재적소에 구축될 수 있을 만큼의 일종의 효용을 뜻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미스는 줄곧 부유층이 아니라 빈곤층에 대한 연민을 드러내고 있는데요. 물론 그가 획기적인 대량 생산의 초기 단계를 제대로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당시의 점차 긍정적으로 확산되고 있던 사회 기류에 당시 국민들이 소비 주체로서의 스스로의 삶의 개선에 대해 희망을 가졌던 것도 분명해 보입니다. 그래서 한편으론 이런 스미스의 사상이 계몽주의적인 관점에서 비롯되었고 엄밀히 따져보면 공리주의적인 접근 방식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또한, 오늘날 신자유주의자들에게 동일하게 오용되고 있는 '격차' 혹은 '격차 사회'에 대해 스미스는 줄곧 일관되게 제한적인 이해를 보이고 있는데요. 즉, 사회의 최하층인 빈곤층을 구제하기 위해 스스로 분업을 용인한 것이며, 더불어 "빈곤이 구제되기 때문에 자유 경쟁을 인정하고 격차를 용인했다"고 그는 동일하게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격차 자체를 사회의 필요악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지만 자유 경쟁과 격차라는 논법은 스미스에게 구제와 빈곤 퇴치를 위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물론 이 지점에서 현재는 그 당시와 사회 상황이 현저하게 다르기 때문에 이 부분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문제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왜곡이 심하게 하여서 격차에 대한 관념과 이에 따른 능력주의를 시민들에게 줄기차게 강요했던 것에 있습니다. 한 술 더 떠 신자유주의자들은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여 이러한 격차에 대한 비판이 가해지는 것을 이론적으로 방어하기도 하였습니다. 자기들끼리야 제멋대로 저런 주의를 서로 품앗이 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신자유주의 이행 자체가 이미 시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시작되었고 그러한 과정에서 정당성이 다소 상실된 상황에 그 거창한 인식론까지 들먹이며 본질을 왜곡할 필요는 없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학문의 입장에서도 이 일관성이라는 부분은 설사 흔한 이데올로기로 국한될지라도 그저 이익과 쓸모에 맞게 재규정되고 재구축되는 실정은 잘못된 것이죠. 이것이 도덕의 상실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러한 신자유주의자들의 저런 움직임이 다소 이해하기는 힘들었습니다. 여기에는 아마도 신자유주의가 경제적 기조 뿐만 아니라 사회체제 전반까지 자신들의 입맛대로 바뀌어야 했기에 저들은 그것에 대한 어떠한 당위성을 찾으려고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세계의 손꼽히는 두 개의 정부가 나서 자신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었으니 멀뚱거리고 서 있는 시민들의 관념을 개조시키기 위해 저런 무리수를 두게 된 것이 아닌가 지금까지 억측을 해 보았습니다. 

따라서, 애덤 스미스는 이러한 가치를 바탕으로 현재든 미래이든 간에 자본가가 '공공 정신을 결여'하게 될 것을 크게 우려하였습니다. 스미스가 주창한 그 자유주의야 말로 사회 전체를 위한 함의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스미스가 도덕 감정론과 국부론을 통해 제창한 사회 시스템적 가치는 "정의를 기반으로 한 자유로운 경쟁과 이기심, 이를 바탕으로 구축된 경제 발전의 이익이 부유층 뿐만 아니라 빈곤층과 사회적 약자에게도 돌아가야 하며 이런 것들이 전제가 되어야만 한다. 그래야 비로소 분업화 또한 인정받게 되고 자본의 축적과 재화의 사용 역시 무엇보다 자본가들의 공공 정신이 확립되어 있다"는 전제가 있어야만 한다는 점입니다. 오늘날은 이러한 애덤 스미스의 본질적인 사상의 핵심이 크게 왜곡되어 흡사 자유 경제학과 신자유주의의 화신으로 알려져 버린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경제학계에서 왜 애덤 스미스에 대한 항간의 왜곡을 그냥 눈뜨고 바라만 보고 있는지 지금도 깊은 의문을 갖고 있는데요. 예전에 강준만 교수가 우리의 언론은 "진실을 조금 말하되 그 전부를 말하지 않는다"고 비판한 것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아닌가 추측해 보기도 합니다. 이처럼 어떤 세력의 셈법이나 주의 주창에 의해 위대한 사상가의 주장들이 왜곡되고 있다는 것은 실로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근래에 레오 스트라우스에 대한 긍정적인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듯이 스미스 역시 제대로 된 해석과 올바른 재평가가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물론 스트라우스와 스미스를 무조건적으로 동일하게 비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학계 통념상 이렇게까지 왜곡되어 주장되었던 일례는 아마 스미스가 거의 유일하지 않나 글의 끝머리에서 생각해 봅니다.


- 다시금 애덤 스미스에 관한 글을 읽고 나니, 일전에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고백한 신자유주의적 개혁에 대한 문구 하나가 떠오르네요. "신자유주의자들에게 사회적 부조를 없애는 일은 그만큼 손쉬운 일이었다"는 취지였었죠. 데이비드 코츠의 글도 그렇고 확실히 1979년 이후의 그 과정에서 대다수 시민들의 이익은 거의 무시되었던 것 같습니다. 


분명 스미스는 사회가 잘 통합되고 발전해 가기 위해서는 ‘이기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이기심이 정치와 윤리에 의해 통제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미스는 먼저 사람들끼리 문제없이 사회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인간 본연의 모습과 인간으로서 지녀아 할 도덕관에 대해 이야기했다

(도덕 감정론)의 서론에는 "아무리 이기적인 사람이라도 인간은 다른 사람을 의식하면서 살아간다"라고 쓰여있다

올바른 사람이 되고 올바른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내면에 만들어낸 재판관의 판단에 따라야 한다

사회전체를 위험에 처하게 하는 듯한 개인의 행동은 정부에 의해 금지 또는 억제되어야 한다

스미스는 분업과 자본축적의 결과, 부가 증산되고 그것이 사회의 최하층까지 확대된다고 생각했다. 즉, 사회의 최하층인 빈곤층을 구제하기 위한 분업이고 자본축적인 것이다

스미스가 생각하는 국민의 풍요로움이란 ‘국민1인당 상품량(필수품과 편익품의 양)‘이다. 필수품과 편익품이 부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증산에 기여하는 것이 유용한 자본축적이다

스미스의 이념이 오해받고 있다는 것은 여러 번 말했지만 이 점은 거듭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스미스가 주장한 자유주의는 사회 전체를 위해서였던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현대적 경제학자들 중에는 애덤 스미스를 자유방임주의자 혹은 사리사욕의 추구를 장려한 이익주의자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자본주의 경제의 여명기로 비즈니스를 확장시켜 나가던 신흥자본가들이 스미스의 이론을 "자유주의자가 선이다"라는 부분만 확대해석 해서 마음대로 인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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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의 부상과 미래
데이빗 코츠 지음, 곽세호 옮김 / 나름북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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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저자 데이비드 M. 코츠는 예일대와 버클리를 거쳐 매사추세츠주 애머스트에 소재한 명문인 매사추세츠 주립대학에서 명예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회적 축적 구조 이론과 자본주의 제도하에서의 정책 변화 및 경제 위기론를 주요 관심사로 두고 연구를 지속해 오고 있는 학자이기도 합니다. 이 글을 통해 드러나고 있듯이 그는 민주당 정부나 공화당 정권 할 것 없이 실패로 끝난 주요 경제 정책에 대해 비판을 가하고 있기도 한데요. 좀 더 그에 대해 달리 말하자면 케인스주의적 자본주의의 (규제 자본주의) 지지자로 볼 수 있겠습니다. 약간 우스개 소리로 코츠는 자본주의가 인간적인 면모를 더욱 갖추길 바라고 있고 과거 1920년대 대공황 시기 전후로 미국 사회가 은연중에 인정하고 있던 정부와 민간자본 및 시민 간의 대화와 합의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으며, 다수의 진보 경제학자들이 틀에박힌 사회주의 경제 이론에 대한 함의를 주장하는 것보다 이 부분이 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실현 가능성 높은 대안이라고 여겨지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양자가 아주 어긋나는 인식차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화와 합의라는 부분은 민주주의적 가치와도 일맥상통할 수 있기에 코츠의 이런 진술이 더욱 마음에 들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글은 원제. "The Rise And Fall Of Neoliberal Capitalism"으로 지난 2015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8년 10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일단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이 책에 관한 두 가지 부분을 먼저 밝히고 싶은데요. 우선 원제를 충실하게 따르지 않은 번역 제목이 아쉽다는 것과 함께 이와 상반되게 번역의 질이 너무나 뛰어나다는 점을 언급하고 싶은데요. 전자와 관련해서는 원제와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함께 부상과 쇠퇴라는 인과에 맞는 제목으로 쓰지 않은 것이 조금 실망스럽다고 해야할텐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의 번역은 나무랄데가 없어 저같은 일개 독서인이 읽어도 충분히 이해가 될 만큼 번역의 질이 뛰어나서 이 부분은 꼭 칭찬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데이비드 코츠 교수의 이 글은 출판사의 강력한 소개대로 일종의 '현대 미국 경제사'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엄밀히 따지면 1979년을 기점으로 시작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전개와 발전 그리고 2008년에 이르는 자기모순적 쇠퇴를 다루고 있다고 보는 것이 좀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선 문단에서 잠깐 언급했습니다만, 코츠 교수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미국의 주된 경제 체제였던 "케인스주의적 경제체제 (다른 말로 규제 자본주의)"에 대한 일련의 오해와 오명을 씻기 위해 노력하고 반대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실체를 밝혀내는데 많은 도표와 자료를 뒷받침해서 설득력을 높이고 있었습니다. 또한, 이 글의 많은 지면에서 신자유주의자들의 왜곡된 논법이 하나하나 논파되고 있었으며 실질적으로 글의 전개가 무리한 방식이 아니라 최대한 사실에 기반해 한층 더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있었는데요. 이 책은 거시 경제학적인 측면에서 분명 의미가 있는 글이며, 2008년의 세계 금융 위기에 대한 꽤 적절한 보론으로서도 충분히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즉, 글의 1장부터 4장까지가 신자유주의가 처음 시도되어 확장되는 시기를 담고 있고, 5장부터는 사실상의 쇠퇴 내지는 모순이 밝혀지는 시기의 여러 논증을 담으며 글은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우선적으로 저도 역시 코츠 교수가 연신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라는 규정된 용어에 긍정한다고 밝혀두고 싶습니다.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를 따로 분리해 논증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은 전개라고 생각되는데요. 이미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화가 된지 오래이며, 이것은 종래의 후기 자본주의의 정의와는 완전히 별개의 '하이브리드'형태라고 부를 수 있을겁니다. 이 부분은 차차 뒤에서 논의하도록 하고요. 먼저 코츠는 우리가 케인스주의에 오해하고 있는 여러 인식들 가운데, 실제적으로 이 규제 자본주의가 잘 정착된 1940년대 이후까지 미국의 경제 발전에 상당히 기여를 했으며, 당시에 날로 기세를 더하고 있던 대기업들 조차도 노동단체와 엄선되 사회 규약처럼 서로 협렵하고 대화하는데 거부감이 없었다고 글에서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 당시에는 자본주의가 상당히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던 때로 당시 정치사회적인 관점에서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과 중국의 공산화로 말미암아 대부분의 자본주의 세력이 더이상 노동자와 사회를 압박해서 일종의 '사회주의화'로 몰고 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속에 대기업 사주를 비롯한 자본가 계급이 적극적으로 정부와 사회에 협력을 하게 됩니다. 이처럼 당시에 케인스주의적 체제에 따른 전반적인 상황이 경제적 시너지 효과와 함께 낙관적이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앞선 부분과는 달리 이 글에서 논의되고 있지만 1979년 이후 신자유주의적 이행에 따라 노동계의 단체 교섭권이 날로 유명무실해지고 노동자들의 자본에 대한 접근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지고 고착화되는 상황을 우리는 이미 인지하고 있는데요. 사실 이러한 논법이 과거의 케인스주의적 체제의 역사가 없었다면 신자유주의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판단이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자본주의가 초기 극심한 비인간성을 제외한다면 이후 번영의 시기에 모두가 협력한 '사회부조적 자본주의체제'가 수립되었던 점은 거의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초기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이행 단계에서 대기업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더 이상 노동계와 사회적 협력에 있지 않고 더 나아가 '유연한 노동시장'을 구축해 각종 비용을 없애는 것이 자신들의 이익추구에 더 맞다는 것을 끝내 용인하게 되는데요. 이에 코츠는 "대기업 사주를 비롯한 기업 경영자들이 이러한 기업들의 영리 활동이 일정 부분 사회에 이득이 될 수 있다"는 것은 확실히 믿었던 것에 기반한다고 평가하고 자본가들이 처음부터 잘못된 관념으로 자신들의 이익추구에 골몰했던 것은 아니라고 그는 거듭 강조하고 있었습니다만 저는 쉽게 수긍할 수는 없었습니다.

1970년대 후반 이후 정부에 대한 긴축 요구와 더불어 각종 세금을 줄여나가고 더 나아가 사회적 비용을 대대적으로 감축시켜 나가는 이 신자유주의적 기조가 처음에는 시카고 학파를 제외하면 코웃음치는 소리로 치부되었다는 점은 뭔가 아이러니 하기도 합니다. 레이건과 대처가 출현한 이후, "사회보장 프로그램에 대한 대중의 지지가 강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 시대의 사회보장 프로그램은 은퇴 연금 지급 연령을 높이는 방식처럼 보조 수령의 기준선을 조금씩 갉아먹는 식으로 악화되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 지점에서 확실한 것은 모든 시민이 이 신자유주의적 기조를 반겼던 것은 아닙니다. 체제에 부역하는 지식인들이 이를 오도하고 있습니다만 실상은 많은 시민들이 이를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죠. 이것은 신자유주의자들의 강고한 정부의 긴축요법에 따른 일부의 결과물이기도 했는데요. 코츠는 이들 신자유주의자들의 이런 모순적인 논법을 파헤치면서 사실상 이들이 정부가 "재산권을 보호하는 강력한 테제"임을 내심 인정하면서 커다란 정부의 대표적 행태인 "대규모의 국방비 지출"에 대해서는 아무말도 꺼내지 않는 이중적인 행태에 비판을 가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2008년 시기에 수많은 엘리트 금융인들이 보여왔던 도덕적 해이와 정부의 돈을 그토록 혐오하면서도 대마불사라는 저들의 신성화된 글자아래 7000억 달러에 이르는 구제 금융 프로그램을 순순히 수용한 것과 같은 점은 이들이 거의 후안무치한 인사들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들을 단순히 인신공격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요구와 내면화된 주장들이 어떻게 저리 뒤바뀔 수 있는지 그리고 이익 앞에서는 표리부동이라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태세 변화에 대해 저로서도 심각하게 느끼는 바가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저자의 주장대로 "신자유주의적 형태의 자본주의 그 자체의 구조적 위기"라는 현재의 인식은 거의 부정할 수 없는 주장이기도 합니다. 이익을 위해서 국가와 사회와 다른 셈법을 마땅히 보일 수 있다는 저들의 논법을 애교로 치부한다 하더라도 5장에서 논의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정체, 즉 "불평등의 확대, 대규모 자산 거품 및 투기 지향적 금융 자본주의"의 삼위일체로 만들어진 파행을 더 속속들이 분석해본다면 국내의 건전한 저축과 투자가 기반된 자본주의가 아니라 국민들의 신용 지출을 방관하면서 그로 인한 막대한 소비 지출적 경제 행태가 본질이며,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이를 숨기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이는 저자인 코츠가 명백히 분석하고 있는 것으로서, 반대로 이 신자유주의자들이 "자본주의 경제란 본질적으로 안정적이며, 심각한 문제 상황을 오로지 국가의 잘못된 간섭 때문에 발생할 뿐"이라는 것으로 치부해 이 대불황 (2008년 뉴욕발 금융위기)의 책임이 자신들에게 없다는 식으로 교묘히 빠져나갔다는 것입니다. 실로 교활한 어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더욱이 이 신자유주의자들이 현재의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과 오만하게 강요시키는 개인적 책임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저들이 아무런 생각 조차 없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경제적 개인의 최대한의 자유 보장과 이익의 추구 및 극심한 개인주의화는 더욱더 인류의 도덕적 전통과 결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더 폭력적으로 진행되면 저 신자유주의자들은 시장에서 민주주의를 제거한 것처럼 뒤이어 헌법도 퇴장시키고 싶어할 것입니다. 아니면 자신들의 입맛대로 사회를 재구축하고 재구조화하는 것처럼 법의 지배도 역시 그런식으로 몰고 가겠죠. 저들은 (진지한) 정부가 필요없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정부의 보호 없이는 자신들의 재산과 이익을 마땅히 보호받을 수 없는 냉엄한 상황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사실 이것 말고도 저들의 이중적인 행태는 너무나 많아서 코츠의 의견대로 "신자유주의적인 사고가 꽤 선명한 편이었다. 혹은 (순진한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초기 신자유주의자들은 자유 시장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으리라고 봤다"는 의견 등에는 쉽게 동의할 수 없는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위 리버럴이라고 불리우는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가 선거 운동 당시 노동권에 대한 새로운 이념과 정책을 철회하고 스스로 신자유의적인 기조에 적극적으로 몸을 담근 것은 보수 우파 뿐만 아니라 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 사실상 거세 당하는 수준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정치적으로 좌파의 몰락은 이러한 결과물을 우리가 손에 들게 되는 요인이기도 했는데요. 그래서 이 글 4장에서는 "왜 우리가 신자유주의에 저항하기 힘들었는가?"에 대해 얼마간 단초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결국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강력한 동맹으로 인한 이들의 수익 창출은 사회의 문제에 침묵하게 만들었고 신자유주의가 그 본성이 맹렬하고 타협을 보장하지 않기에 대다수의 시민들이 이러한 상황에 휩쓸린 것으로 저자는 보고 있습니다. 애초에 수십년간 진행된 민주주의의에 대한 거세 작업이 별다른 반발 없이 이뤄졌고, 소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졌던 낙수 효과가 시민들의 저변에 깔려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점을 증명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신자유주의적인 어두운 종말은 모두가 익히 알고 있듯이 2008년에 벌어지게 됩니다. 지금도 많은 학자들에 의해 이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인 세계화와 금융화는 곧잘 경제학에서의 진보와 비견되기도 하는데요. 이미 칼 폴라니는 이 금융 자본주의의 시작이 기존의 자본주의 역사와는 그 궤를 달리한다고 밝힌 바가 있습니다. 지오바니 아리기 역시 이에 동의하는 의견을 보탠 바가 있었죠.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우선적으로 집중해야 하는 것은 금융 기반 자체에 대한 좀 더 면밀한 규제가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2008년의 대불황 역시 방만한 금융 엘리트들의 무분별한 사익추구에 비롯됐으며, 하이먼 민스키를 제외하면 누구도 제대로 된 경고를 보낸 바가 없기도 합니다. 더욱이 현재의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금융 자본주의는 역시나 돈을 따고 있는 상황에 그들의 이익이 다 어디로 가는지는 이미 명확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경제적 이익과 사회적 이익이 이미 그 편차와 괴리가 심각한 상황에서 지금도 저들이 앵무새처럼 내뱉고 있는 사회적 비용과 기업의 편익 사이에는 어떠한 상관관계도 없다는 것이 코츠의 주장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더욱 규제를 포기할 수 없으며 금융 자본주의를 뒤에 업은 신자유주의의 버전 2.0을 우리가 어떤식으로 대해야 할지는 이미 명확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금융에 더욱 고삐를 쥐고 적절한 규제에 따른 사회적 합의를 대기업과 기득권 부유층에게 그 필요성을 설득시키고 이 일원화된 신자유주의와 지식인 및 기득권 엘리트들의 야합을 해소하는 데서 우리의 민주주의와 사회 경제의 운명이 달려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제가 이 훌륭한 글을 너무 축약해 올린 것 같아 약간 죄스러운 부분이 있는데요. 데이비드 코츠 교수의 이 책은 실로 대단한 논저라 할 만합니다. 그동안 오해하고 있던 아이젠하워 대통령 임기 시절의 사회정책에 대한 그의 정확한 사실과 미국의 경제사를 통달한 노교수의 철두철미한 논증은 실로 대단하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역자의 훌륭한 번역도 다시금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모쪼록 더할나위 없이 행복하길 바랄 뿐입니다. 그저 멀리서 지켜 볼게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자체가 미국과 영국에서 태동했고 전 세계에 신자유주의적 제도와 정책이 퍼져 나간 것 자체가 미국의 영향력 때문이었으며, 지금의 경제 위기도 미국에서부터 발생한 것이다

레이건 행정부는 사회적 규제가 경제성장을 저해하는 반기업적인 것이라며 전면적인 규제 철폐 작업에 나섰다

유럽에서의 민영화란 대체로 국영기업의 매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사회보장 프로그램에 대한 대중의 지지가 강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 시대의 사회보장 프로그램은 은퇴 연금 지급 연령을 높이는 방식처럼 보조 수령의 기준선을 조금씩 갉아먹는 식으로 악화되었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정부의 규모가 정체된 것은 분명하지만, 어떠한 지표를 봐도 신자유주의 시대에 국가 규모의 성장 추세가 눈에 띄게 반전되었다는 증거는 없다. 이를 신자유주의 의제가 제한적이나마 성공을 거뒀다는 식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분명 이는 신자유주의 신봉자들이 보기에 턱없이 부족한 결과다

어차피 재산권 자체가 이미 국가의 보호 없이는 존속할 수 없는 것이었다

신자유주의의 옹호자들이 1973년 이후의 심각한 경제적 문제들에 대해 지적할 수는 있어도, 규제 자본주의(케인스주의)가 아무런 경제적 진보를 가져올 수 없다고 한다면, 이는 결코 역사적 근거를 지닌 주장이라고 볼 수 없다.

하지만 많은 증거에 기반하여 판단할 때, 1970년대에 걸쳐 대기업들은 이미 규제 자본주의에 대한 지지에서 이탈해 신자유주의적 구조 개혁으로 입장을 선회했음이 명백했다

우리는 1940년대에 대기업들이 규제 자본주의를 지지하기로 결심한 이유가, 당시에는 그것이 그들의 이해에 가장 잘 부합한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음을 이미 보았다

따라서 소득의 점점 더 많은 부분이 부유층에 쏠렸음에도, 애초에 신자유주의가 공언한 낙수 효과는 사실상 일어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한쪽에는 제자리걸음인 임금과 늘어나는 소득 불평등이, 다른 한쪽에는 확장 일로의 소비지출이 병존하는 이 분명한 역설은 결국 소비지출의 성장이 소득과 무관함을 의미하고, 가계 부채 확장을 통해 견인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아래에서 대다수 사람의 상황이 더 나빠졌음을 지적하는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라고는, 약자로 TINA, 즉 "다른 대안 같은 것은 없다 There is No Alternative"라는 말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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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17 16: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7-17 17: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초딩 2021-07-19 01: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매우 (어렵지만) 잘 쓰신 이 글을 읽으니,
여러가지를 좀 더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
신자본주의로 국가의 경계가 무너진다 생각했는데 어찌보면 또 표면적인 형태만 바뀐것 같기도하고요.
한 번 읽어보고 싶네요. :-)
그리고 엄지척입다.!

베터라이프 2021-07-19 06:39   좋아요 3 | URL
이 글도 몇번에 걸쳐 수정을 했어요 ㅜㅜ 문장도 제멋대로 된 것도 많아서 며칠 고생했습니다 ㅠㅠ 코츠 교수의 관점은 케인스주의가 종래의 선입견처럼 자본주의를 단순히 규제하기 위한 체제는 아니었다는 것이에요. 글에 제공된 도표하고 자료가 많아서 충분히 근거가 있었습니다. 사실 현재의 변화된 자본주의가 익히 알려진 바대로 신자유주의자들은 거품 경제를 선호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금융 자본주의가 또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 할 것 같아요. 지금은 고도화된 금융 자본주의 단계라 금융시장에 대한 규제가 어느때보다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물론 그런 사태가 벌어지면 또 그 수습은 공적 자금으로 처리되겠죠. 이래서 신자유주의자들이 양심이 없는 인간들이라는게 자명해집니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너무나 뿌리깊어서 이걸 정상화시킬수 있을지도 사실 불명확한 부분이 있어요. 이쯤에서 거시경제학의 영향은 사회에 거의 없다고 보는 시각이 설득력이 높지요.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이 사회구조가 제대로 가고 있는건지 의문이 들때가 많네요.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 - 팬데믹을 철학적으로 사유해야 하는 이유 팬데믹 시리즈 2
슬라보예 지젝 지음, 강우성 옮김 / 북하우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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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철학계의 '팝 아티스트'와 같은 이명을 갖고 있는 슬라보예 지젝은 대중 철학가의 이상의 진면목을 갖고 있는 지식인이자 학자이기도 합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살아 있을 적에는 이 두 사람이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도 했는데요. 물론 두 사람을 직접적으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이들이 혼란에 빠진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폭넓게 규명하고 비판할 수 있는 지식인들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지젝이 자신의 이상대로 더 많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이론가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현실적인 대안에 대한 명확한 생각이 엿보이지 않아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의 이러한 신중한 태도는 세계 좌파의 몰락이라는 뭔가 충격적인 상황에 기인하지 않나 생각해 보는데요. 그럼에도 현실에 대한 가감없는 분석과 비판은 많은 시민들에게 '현재의 문제성'을 인식시키는데 중요한 인물로 규정되고 있습니다. 그를 많은 보수 우파들이 경멸하는 이유에는 입바른 사람에 대한 혐오와 진실을 밝히는 자에 대한 두려움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Pandemic 2 : Chronicles of a Time Last" 로 2020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7월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약간의 논외로 지금 출간된 이 책은 얼마전에 번역 출판된 "팬데믹 패닉"의 일종의 보론으로 보이기도 했는데요. 근래 이 팬데믹 사태와 관련된 지젝의 철학적 비평을 담은 글들이 꾸준하게 국내에 번역되고 있다는 점은 참고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지젝은 이 글에서도 조르조 아감벤의 자유주의에 대한 위기를 피력한 최근의 글을 비판하고, "자유가 없으면 그저 죽음을 기다릴 뿐이다"라는 명제에 일종의 연민을 보내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저의 과도한 해석일 수도 있지만 지젝은 "자유지상주의자와 포퓰리즘적 뉴라이트 및 백신 거부자들"과 함께 아감벤을 동일선상에 놓고 있습니다. 대규모의 봉쇄와 시민 격리를 많은 자유 우파주의자들이 "공산주의적 음모"라고 몰고 갔던 것을 돌이켜 보면 지젝의 이러한 해석이 어떠한 진심을 담고 있는지 짐작할 만합니다. 2장에서 보이는 "모든 목숨은 소중하다"라는 결코 교환 될 수 없는 이 가치에, "모든 목숨은 쓸모 없다"가 어떻게 역설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지에 대해 이미 팬데믹 이행 과정에서 신물나게 드러난 바가 있습니다. 인간이 한낱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더 중요한 가치를 잃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저 극우주의자들의 논법에 지젝은 일관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생명에 대한 경시"가 이 펜데믹 사태의 본질이며, 개인의 본질적인 자유와 그에 따른 자유 지상주의를 부르짖는 극우 포퓰리즘 시위에 나선 유럽과 미국의 시위자들이 과연 자신들의 자유가 어떠한 지경에 이르렀는지 그 진실을 위한 성찰이 필요한 것은 분명합니다. 이것은 다음 8장에서 트럼프는 익히 이 팬데믹의 본질을 알고 있었지만, "시민들에게 그저 경제적 온존성을 위해 너무나 빠르게 '일상'으로 복귀하라고 명령을 내렸고, 이를 충실히 따른 많은 시민들이 불확실한 경제적 이익과 자신의 목숨을 교환하게 되는 사태"에 이르게 됩니다. 여기에 지젝은 이러한 과정속에 트럼프에 대한 과오는 교묘히 숨겨져 버렸으며 그가 다가오는 2024년에 백악관의 주인이 되고 싶어 하지만 시민들 모두가 위와 같은 일을 명백하게 알고 있어야만 한다고 그는 첨언합니다.

전세계적 팬데믹 사태의 초기에 미국의 억만장자들이 봉쇄가 진행된 23일 만에 총 2820억 달러에 달하는 돈을 벌어들인 것으로 보인다는 조슈아 사이먼의 글을 지젝은 인용하고 있는데요. 이 부분은 11장에서 그가 인정하고 있는 "전지구적 자본주의로는 코로나바이러스를 통제 할 수 없다"는 주장과 맞물려 있습니다. 저는 이 자유 지상주의자들이 코로나 시대에 자신들의 소중한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목적을 표면적으로 보이고 있지만 결국 이들에게는 강력한 일반 의지가 있는지는 불명확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지젝이 비평하는 바와 같이 현재의 극우 포퓰리즘 정치가 극좌의 폭력성을 자신의 것으로 체화시켰으며 이를 통해 모두의 시민을 적으로 돌리는 행태야 말로 저들에게 '자유라는 욕망'밖에는 그리고 그외 다른 것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헝가리의 오르반과 미국의 트럼프가 아주 적절하게 이용해 왔으며 이들 정치인들의 행태가 과연 다수 시민의 안전과 이익을 염두해 두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단순히 프로파간다의 문제가 아니라 이러한 폭력적인 시위들이 결국에는 민주주의를 더욱 좌초시킨다는 점에서 이들의 행위를 과연 건전한 정치적 행동이라고 봐야할지는 큰 의문입니다. 지젝은 여기에 한나 아렌트의 '폭력론'을 인용하고 있습니다만 이들 극우 포퓰리즘 운동이 좌파식의 사회 개혁과 같은 대의와는 전혀 하등의 관계가 없으며 오로지 시장 자유와 연계된 자유 지상주의의 욕망 뿐이라고 해석합니다..

마찬가지로 일종의 "엄중한 지젝식 비꼬기"라 할 수 있는 12장에서는 민주주의와는 하등 관계가 없는 민병대의 주지사 납치 기도를 이 팬데믹 사태에 대한 국가 봉쇄와 같은 현실을 '공산주의'로 몰고 가고 있는 자들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데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아감벤 식으로 "집에 불이 났을 때, 평상시처럼 용기를 내 위엄있게 죽어야 한다"는 당위에 대해 반역설적인 헤겔의 인간성을 차치하더라도 자유를 위해 죽어야만 한다는 인간의 선택이 스스로 과연 자유로운 선택이었느냐에 대해 깊은 회의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의 상황을 전혀 알고도 믿으려하지 않는 자들이 다수의 시민들을 위태로운 상황에 몰고가게 만드는 것을 무덤에 있는 존 스튜어트 밀 조차 이를 동의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여기에 지젝은 한 술 더 떠서, "시장 자유주의자들이 이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시장에 대한 정치적 통제를 거부하는 것"은 개인들의 경제적 이익을 사전적으로 옹호하는 수준을 넘어 경제적 인간의 진정한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 명백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결론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기도 한데요. 지젝은 피히테를 인용하면서 "상업적 무정부사태와 더불어 카를 슈미트가 밝힌 '탈정치화'에 따른 정치가 단순히 경제의 보조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이는 신자유주의적 파행에 눈을 감은 리처드 포스너의 논법과도 거의 일치한다고 봐야할텐데요. 한낱 티끌만도 못한 이익을 손에 쥐는 것이 장땡이라는 저들 신자유주의자들의 논법은 그럼에도 많은 시민을 세뇌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이 팬데믹의 또다른 자화상이라 해도 무방합니다. 지젝과 마찬가지로 저 역시도 근래의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해 동의하면서 지젝이 주장하는 자유주의 (본질적으로 신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분리에 시민들이 이제는 더이상 속지 말고 나서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와 같은 시민들이 연대에 나설 것은 팬데믹 사태에 따른 보건의 위기 뿐만 아니라 이 사태를 기화로 우리의 민주주의를 자신들의 입맛대로 바꾸려고 하는 모든 자들에 대한 대항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요약하자면 토머스 홉스의 이성적인 버젼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끝으로, 다시 강조하지만 도널드 트럼프는 "노동자들의 사망에 직접적으로 죄가 있지는 않지만, 노동자들에게 그릇된 선택을 제공한 죄가 있다"는 지젝의 비판에 거듭 동의하게 됩니다. 제가 예전부터 자신의 이익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정치인의 존재가 어떤 식으로 시민 사회를 좀먹을 수 있겠는가에 대해 관심을 가져온 바가 있습니다. 이 일관되지 않은 모순 덩어리의 정치인을 민주주의적 정치의 예외적인 사례로 치부하지 말고 현재 전유럽과 미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포퓰리즘적 뉴라이트 프로그램'에 대해 각별한 주의를 갖는 것이 필요해 보입니다. 현재와 같은 우리의 보건 위기가 정치적으로 악용될 가능성에 대해 지젝 역시 여기 이 글을 통해 살펴보고 있습니다만 이데올로기가 죽지 않고 이러한 상황에 머리를 들고 있는 것은 참으로 허탈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후반부의 결론을 포함한 상당한 분량의 보론이 작금의 포퓰리즘에 대하 지젝의 우려로 가득차 있듯이 페미니즘과 인종 차별. 그리고 반민주주의를 낱낱이 암흑의 영역으로 빨아들인 이 코로나 사태에 있어서 '시민들의 진정한 앎'에 대해 지젝이 강조하는 점은 이토록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명백하게 좌파적 음모라는 현재의 다수의 생명을 위한 극단의 조치가 공화주의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계몽적인 역사라는 측면에서 인간이 결코 저버리지 말아야하는 가치임은 분명합니다. 인명 경시를 뒤에 업고 훗날의 사회 안정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헤겔의 인간성에 대한 가치를 저버리는 것임은 우리 모두가 알아야만 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지젝은 '자유주의적인 상업의 무정부 상태'를 비슷한 논법으로 여러 군데서 언급하고 있는데요. 이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아주 일관된 논법이기도 합니다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프레임 자체가 폐기되어야 하는 것인데, 이는 정확히 자유주의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다

이와 동시에 정반대되는 과정들이 폭력적으로 부상하여 기업은 부를 쓸어 담고 국가로부터 긴급구제를 지원받는다. 코로나 자본주의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고, 동시에 새로운 계급투쟁이 등장하고 있다

현대의 페미니즘과 반인종차별주의는 이 유규한 해방적 전통으로부터 생겨났기에 이 고귀한 전통은 외설적 포퓰리스트와 보수주의자 들의 손에 내버려두는 일은 순전한 광기가 될 터이다

팬데믹에 대처하는 우리에게 주어진 기본 선택지는 트럼프식 길과 언론에서 중국식 길이라고 외쳐대는 방식 중 하나인 듯하다. 전자가 수천 명이 죽더라도 시장의 자유와 이윤 가능성이라는 조건을 충족하는 경제활동으로 복귀하는 길이라면, 후자는 디지털화된 국가의 총체적 통제를 개인에게 가하는 것이다

만일 중국이 홍콩에서 성공을 거둔다면, 대만을 폭력적으로 탈화하는 것이 다음 단계가 될 수 있으며, 이는 전면적인 태평양전쟁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가난, 극단적 불평등, 인간의 생명에 대한 경시가 판을 치는 세상 그리고 법적이고 경제적인 정책들이 가난을 종결시키기보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부가 창출되고 유지될 수 있게 설계된 세계에 코로나바이러스가 우리를 도달하게 한 것이다

진행중인 팬데믹은 표면 아래에서 항상 끓고 있던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갈등을 불러내고, 엄청난 정치적 문제를 맞닥뜨리게 했지만 단기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펜데믹은 시간이 갈수록 ‘어떤 사회를 지향하는가‘를 둘러싼 전 지구적 전망들이 실제로 충돌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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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os 2021-07-16 16: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감벤에 대한 지젝의 비판은 결론인 ˝알지 않으려는 의지˝에서 명확하게 언명됩니다. ˝나는 우리는 물리적으로 계속 거리를 둠으로써 사회적 관계가 실제로 한때(팬더믹이 있기 전 어느 먼 역사적 시기에) 존재했었다고 스스로 믿게된다는 러셀의 주장을 정확히 조르조 아감벤을 포함하여 방역과 거리두기 조치에 복종하는 우리를 윤리적 재앙, 즉 이전에 존재했던 사회적 관계를 자발적으로 포기한 것으로 보는 사람들에 대한 함축적 비판으로 읽는다˝ 이는 아감벤의 글에서 불편하던 지점들 몇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생각나는대로 적어보면 1)레비나스를 연상시키는 인간의 얼굴 운운하는 곳에서 매개되지 않은 직접성을 강조하는점들 - 그게 아니라면 인간들의 관계가 항상 언어든 사회적 작용이든을 통해서 매개되어 있는 것이라면, 왜 디지털을 통해 매개된 관계보다 직접적인 얼굴을 대면하는 관계가 반드시 회복해야만 하는 가치있고 의미있는 것일까? 2)삼권분립 운운하면서 행정조치들에 대한 아감벤의 반대는 어떻게 읽더라도 ˝사라지는 매개자˝로서 이행의 시기에 필요한 독재따위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자유주의의 틀을 벗어나지 않으려는 것으로 밖에 안보이고 이점에서 여타 극우 절대자유주의자들과 동일한 것아닌가? 이점에서 그의 예외상태론도 다분히 회복해야 하는 평화로운 보다 나은 자본주의를 꿈꾸는거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함 3)이러한 점은 팬더믹 다음세상에 대한 고민에서도 자본주의 바깥을 누가 어떻게 만들어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각기 다른 계급적 관점이 전혀 부재하다고 느껴지는데(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 곧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아니지 않나요?) 그냥 아감벤 책에 대한 서평에서도 뵌 적이 있고, 저는 공부하는 사람도 아니고 직장인이고 해서 시간을 가지고 꼼꼼하게 글을 적기가 어렵네요. 하지만 아감벤에 대한 댓글에도 적었듯이 아감벤의 글을 정말 읽다가 중간에 덮어버리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역자가 브뤼노 라튀르를 기후위기(정의)라는 문제와 연관하여 함께 놓으려는 것은 이해도 동의도 안되네요.

베터라이프 2021-07-16 18:49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chaos님. 쓰신 장문의 댓글은 꼼꼼히 읽어봤습니다. 사실 이 책은 지젝의 비꼼의 수사가 가득한 글이라 조금 순화해서 쓰기도 하였는데요. 개인적으로는 팬데믹 조치에 따른 아감벤의 비판과 현 사태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방관을 중점으로 잡고 글을 썼습니다. 사실 아감벤은 카를 슈미트를 분석하면서 아마도 스스로 자유에 대한 확고한 생각을 가진듯 한데요. 그럼에도 아감벤은 동일하게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있기도 합니다. 다만, 이탈리아인으로서 과거 파시즘의 역사와 그가 조르조 바사니를 읽었다면 분명 거기에서 드러나는 유대인들에 대한 이탈리아인들의 참혹한 배신에 자유에 절대적 가치를 어떤식으로든 거래하고 싶어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물론 저도 공화주의적 가치에 반할 수 있는 자유 지상주의에 반대하고. 반공동체주의적인 주장에도 거부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좀 더 논의를 확대해보면 신자유주의도 역시 개인의 자유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측면에서 심지어 자연 상태에 준하는 그 자유를 물론 노골적으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아감벤도 그러한 동의를 하지 않겠느냐는 의심을 해볼 수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예외상태를 분석하다보면 정치인들의 도덕적 제한을 풀어주는 느낌까지 주니 말입니다. 그리고 팬데믹 이후의 자본주의의 미래에 대해서도 언급하셨는데 2008년에 신자유주의는 죽었어야만 했다는 피터 플레밍의 말이 허무맹랑하게 느껴지는 것은 지금도 신자유주의적 기조에 의한 전세계 금융화는 더욱 노골적으로 이뤄지고있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자본주의가 직접적인 계급화의 압력에 놓였던 것은 아닙니다. 1940년대 까지는 정부와 민간 그리고 사회가 대체로 사이좋게 지냈죠 (데이비드 코츠) 그렇게 자본주의를 더이상 자본주의로 돌아가지 못하게 한 신자유주의에 대해 우리가 비판해야 하는 것은 명확합니다. 더욱이 현재의 자본주의는 껍데기만 그렇지 신자유주의가 태반을 변화시킨 것이죠. 초기 자본주의는 그 비인간성을 감출 수 없었지만 1900년대 들어 사회적 합의가 만들어지면서 잠시 인간의 탈을 쓰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자본주의에 인간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는 상황이죠. 하여튼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비판이 지젝이 바우만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양심으로 삼고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더욱 지젝이 아감벤을 못마땅해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현재의 아감벤이 흡사 테오도르 아도르노와 비슷하다고 여겨지는데 동의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 저번 댓글에서도 chaos님께 밝혔지만 저는 신자유주의에 아주 관심이 많습니다. 시민의 권리와 의무를 저버리게 하는 것이 신자유주의적 기조의 영향이라 생각하고 여기에 신물나는 개인의 책임, 능력주의, 개인의 배타적 자유는 민주주의 뿐만 아니라 그동안 인간이 힘들게 구축해왔건 계몽주의적 전통을 무력화 시킨다고 생각합니다. 데이비드 코츠의 말대로 자본주의 사회적 기구들과 원만히 타협하고 상생하는 사회가 우리가 그려봄직한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뭐 그 전에 테크노크라트들이 만들고자 하는 거의 과두제와 다름없는 지배체제를 불식시켜 나가는 것이 중요하겠죠. 어떻게 보면 신자유주의와 테크노크라트의 과두제는 예상과는 달리 한몸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비대한 정부를 그토록 혐오하는 신자유주의자들이 국가의 막대한 국방비 지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까요.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

chaos 2021-07-19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야 보게되었네요. 긴 답변 감사합니다. 주신 답에 대한 이야기나 안주신 답에 대한 이야기는 지나가기로 하고요, ㅎㅎ 아도르노와 비교에 대해서는 만일 이 비교가 68혁명기에 아도르노의 처신과 그로 인한 난처한 입장을 말씀하시는거라면 그럴수도 있겠다 싶긴한데요, 이론적인 입장을 염두에 두시는 거라면 생각이 좀 다릅니다. 프레드릭 제임슨의 책 [후기 마르크스주의]의 벤야민과 아도르노 편지의 인용을 재인용 하고 싶네요. 아도르노가 보낸 편지에서 ˝상부구조 영역에서의 눈에 들어오는 개별적인 경향들을 ‘유물론적‘으로 전환시켜 하부구조의 인접한 경향들과 무매개적으로 병치시키거나 인과관계 속에 넣는 것은 방법론적으로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문화적 성격에 대한 유물론적 결정은 전체과정에 매개될 때에만 가능하지 않을까요? 이런 유의 직접적인 유물론, 즉 인류학적 유물론에는 낭만적 요소가 깊숙히 들어 있습니다. 내가 아쉬워하는 매개란 당신의 작업이 삼가고 있는 ‘이론‘이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물들의 이름을 명명한다는 신학적 모티브는 이제 단순한 사실성을 공포에 질려 묘사하려는 경향을 드러냅니다. 좀 심하게 말한다면 당신의 작업은 마술과 실증주의가 만나는 교차로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자리는 귀신에 홀려 있습니다. 다만 이론만이, 당신 자신의 냉정하고도 사변적인 이론만이 당신이 사로잡혀 있는 마법을 풀 수 있을 것입니다. ˝ 물론 이를 벤야민도 인정하는 답신을 보냅니다. 저는 이 논의에서 아도르노 편입니다. 이 주제로 본다면 아감벤은 벤야민(물론 전공자니 당연히 그렇겠지만요)에 비유되는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베터라이프 2021-07-19 18:53   좋아요 0 | URL
우선 앞에서 답을 못한 몇가지 질문에 대해 먼저 답을 드리고 싶습니다. 디지털 매개로 인한 협력 내지는 그런 관계가 직접적인 대면 관계에 비해 소극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지에 대해 말씀을 주셨는데요. 사실 저도 현재의 인터넷 수단을 통한 시민들의 활발한 공론장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다만, 마누엘 카스텔이 우려한 바와 같이 아마도 온라인 상에서의 지식을 통한 의견 교환과 정치적인 대화들이 다소 사실에 근거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특히 인터넷에서 이뤄지는 의견 교환이 특정 세력이나 이익 집단에 의해 왜곡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아마도 그런 우려가 있는 것 같아요. 더군다나 최근의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자스민 혁명의 전개를 보더라도 물론 초기에 이 넷망이 큰 역할을 하였지만 나중에는 허위 사실과 거짓 그리고 증오로 점철된 터무니없는 낭설이 시시각각 퍼졌던 사례가 있었습니다. 약간 논외지만 러시아의 조직적인 서방 세계의 봇 투입과 허위 사실 유포는 이러한 우려를 갖게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물론 철학적인 측면에서는 양자간의 차별이 없어야 하겠지만 현실은 조금 어려운 부분이 있겠죠. 그리고 테오도르 아도르노와 조르조 아감벤을 비교한 것은 과거 아도르노가 강의실에서 많은 학생들에게 우파에 부역하는 지식인이라는 공격을 받았다는 일화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감벤이 전적으로 억울한 입장에 처해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슈미트를 비판하며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를 보였던 것을 기억하는 저로서는 지젝과 일부 지식인들의 그에 대한 비판이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조금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일전에 오스트리아의 좌파 언론인인 로버트 미지크가 슬라보예 지젝에 대해 그는 자신이 전개한 주장이 불충분하거나 논리적으로 부족할 경우에는 자신의 오류를 쉬이 인정했다고 밝히기도 했는데요. 아감벤에게도 그러한 기회를 주는 것이 어떨까 개인적으로 생각해봅니다. 물론 아감벤의 최근 우려는 다소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이 있는 건 분명해 보입니다. 더욱이 과거의 아도르노가 보수 우파 지식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감벤도 다소 그런 소리를 듣고 있는 듯 한데요. 단순 비교를 해봤을 때 두 사람의 곤란한 지경이 문득 떠오르게 되더군요. 최근에 제가 서평을 쓴 아감벤의 시론집은 저로서도 조금 이해하기 힘든 부분들이 있기도 했는데요. 저는 분명 그가 민주주의의 확고한 지지자로 알고 있었는데 chaos님 말씀대로 자유지상주의자와 같은 문법을 보여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데이비드 코츠의 말대로 이제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분리되어야 하는 시점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지금의 신자유주의를 고려해 본다면 이는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미국의 굴욕
크리스 헤지스 지음, 김한영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11년 9월
평점 :
절판


미국의 저명한 언론인이자 작가인 크리스 헤지스는 현실비판적인 논픽션을 다루면서 미국에서 큰 명성을 얻은 인물입니다. 그는 미국 해밀턴에 소재한 콜게이트 대학과 하버드 대학을 거쳐 언론계에 투신하게 되는데요. 이후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하면서 종군 기자로 명성을 얻고 뉴욕 타임즈의 해외 특파원으로 재직합니다. 2002년의 퓰리처 상 수상을 기점으로 프리스턴 대학 등에서 강의를 하였고 미국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함께 기득권과 지배 계급에 대한 도덕적 타락과 소위 이들 엘리트들이 체제 모순을 심화시키는 요인으로서의 여타 학문적 연구를 지속해 오고 있기도 합니다. 또한 그는 영어 뿐만 아니라 아랍어, 스페인어, 프랑스어를 구사하기도 합니다. 이 책은 원제, "Empire of Illlusion"으로 지난 2009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1년 9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현재는 절판된 상황입니다. 그리고 약간의 논외지만 번역된 책 제목과 관련해 원제를 그대로 차용해도 의미상에 큰 문제가 없을 것 같은데, 번역한 출판사의 자극적인 책 제목은 마찬가지로 아쉬운 부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이 글에 대한 전체적인 주요 논지를 밝혀두고 싶습니다. 저자인 크리스 헤지스는 현재 미국 내의 시민들이 건전한 민주주의를 답보하는 자신들의 건전성이 사실상 상실되었으며, 또한 현재의 미국 정치는 인문주의의 쇠퇴, 기득권의 권력 남용 그리고 시장중심주의 내지는 시장자유주의에 따른 민주주의의 후퇴에 대해 현실의 논거에 기반하여 이를 일관되게 비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기본적으로 미국의 만연된 코포라티즘 coporatism 정치를 이러한 사태의 주요 원인으로 꼽고 있는데요. 이것은 주로 이 책 5장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더불어 1장부터 2장은 시민의 건강한 정치의식이 거세된 현재 미국 내의 '싸구려 문화'에 대해 언급하면서 많은 "대중들이 상류층의 생활과 소비 문화를 흉내내는 데 급급한" 지금의 문화를 그는 냉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헐리우드 스타들과 셀러브리티 들에 대한 맹목적인 숭배와 저급한 포르노그라피 문화에 대해 저자는 미국 대중의 실체적 위기라고 진단하고 있는데요. 3장에서 인문학과 고전에 대한 다수 지배 계급의 소위 "죽은 글"이라고 매도하는 것을 차치하더라도 시민 대부분의 보잘것 없는 문해력과 형편없는 독서 수준은 자유 시장주의의 질서를 꿈처럼 달콤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지배 계급 대부분의 인문학 폄하 분위기와 맞물려 그대로 이중적인 악순환의 구조로 여겨지기까지 합니다. 마찬가지로 3장에서 헤지스는 "고전적인 연극, 신문, 책은 읽고 쓸 줄 아는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 문화생활의 변방으로 밀려났다"고 진단하고 "우리의 정치 경제 체제가 파산한 직접적인 원인은 인문학에 대한 폭력에서 찾을 수 있다"고 동일한 장에서 비판하기에 이릅니다.

헤지스의 인문학에 대한 관심은 일종의 도덕성과 권력이 상존하고 균형있게 존재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중요한 가치로 인식되고 있는데요. 이는 반대로 "인문학의 도피는 양심으로부터의 도피가 되었다"고 평가하는 데서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즉, 시장 자유와 시장 중심의 현재의 체제 전반이 탈도덕화에 직면하고, 수많은 기득권이 이 도덕주의에 대한 끊임없는 경멸을 토해내면서 1980년대의 레이거노믹스에 의해 서서히 무력화 되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저자는 이를 도대로 2장에서 대학 본연의 "지성의 탐구"라는 순수 목적이 사라지고 현재는 직업적 엘리트들을 양산하기 위한 아주 도식적인 훈련에 그치고 있다면서 이러한 전반적인 사회 풍조가 저급한 대중문화와 이를 방조하는 지배 계급의 의도와 아주 잘 맞물려 있다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것은 소위 지성의 요람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학의 전반적인 모습이 엘리트 지배 계급에 의해 코포라티즘 정치로 강화되고 이러한 체제에 거의 쓸모가 없는 도덕과 인문학 등을 제거한 것으로 봐도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헤지스는 이 글에서 대부분의 지배 계급이 현재의 체제가 어떠한 문제를 안고 있는지 별로 관심이 없으며, 오로지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안전하게 세습하고 이것을 공고화 하는 데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 비판하고 있습니다. 즉, 이들이 전부 사회의 적이라 규정 될 수는 없지만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라는 양 팔을 마음껏 휘둘러 이것을 사회 전반의 이데올로기로 만든 것은 그 이유야 어떻든 간에 이러한 결과를 초래한 원인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의사, 변호사. 기술자들이 마음껏 돈을 벌 수 있는 사회"가 실질적인 측면에서 아름답지 못한 것은 이들이 시민 전체의 정의와 보건, 사회 안정성을 쥐고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 최소한의 의무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의 건전성을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함에도 오로지 마음껏 돈을 벌 수 있는 이 신자유주의적 기조에 스스로 전혀 비판할 의지 또는 심한말로 필요성 조차도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로 헤지스는 이러한 메커니즘을 명확히 건드리고 있었습니다. 아주 간단히 더 설명해 보자면, 높은 교육과 다른 시민들에 비해 더 많은 사회적 자원을 지원 받은 이들 지배 계급 혹은 엘리트들이 다수의 이익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것은 여기에서 드러나는 대학에서의 교육도 한 몫을 했을 테지만, 자신들과는 다른 시민들을 경멸스러운 시선으로 평가하는 알량한 계급주의적 편견이 스스로가 다른 사회에 있다고 믿는 것으로 동일시 되어 나타나기 때문일겁니다. 저들에게는 다수의 시민 사회가 자신들이 위치하고 있는 사회와는 명백히 다른 곳임을 스스로 현명하게 구분해 내는 감각과 훈련을 체득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선 인식적 매개들과는 달리 우리의 민주주의는 "개인의 이익이 아니라 자기 희생에 기초한다"고 헤지스는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보수 우파들에 의해 자유주의 (엄밀히 따지면 신자유주의)가 마땅히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있다고 스스로의 정치 인식을 내세우고 있지만 이러한 범주에 들어가는 정치인은 1920년대 대공황 이후 전부 소멸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사실 많은 시민들이 체제 전반의 건전한 변화와 개혁을 요청하고 있지만, "신자유주의와 세계화가 부르짖은 모두를 위한 이익이라는 관념이 그저 사기임에 드러났음에도" 아직도 지배 계급은 이러한 앵무새 같은 말을 거듭 반복하고 있습니다. 저는 헤지스의 이 글을 통해 얼마나 시민과 대중이 무력화되어 있는지 깨닫게 되었는데요. 시장 자유에 따른 개인주의의 폭발적인 영속화가 얼마나 제대로 된 견제를 받지 못했는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올더스 헉슬리 류의 허무맹랑한 음모론 따위로 치부하는 자들이 더많은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도 냉엄한 현실음은 분명합니다. 전반적인 사회정치적 상황이 저들을 제대로 견제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이러한 문제가 하루 이틀의 상황이 아닌것도 명백합니다. 그래서 헤지스가 지면을 할애해 이처럼 거듭 인문학의 복귀를 강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의 말대로 "끊임없이 독서를 하는 시민들을 경멸해 마지 않는 자들"이 너무나 많은 시점에서 이와같은 현실의 '시민 건전성의 복귀'라는 문제가 어떻게 해결될 수 있을지 참으로 어려운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 측면에서 기득권의 권력 남용이라는 부분이 참으로 마음에 와 닿았는데요. 민주주의적 여론 자체가 이미 시민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저들이 마음만 먹으면 주도할 수 있기에, 사회 전방위적인 측면에서 우리가 더 많은 민주주의를 진정으로 그려볼 수 없는 것이 테크노크라트의 과두제가 이미 너무나 가까운 상황임을 거의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끝으로, 이 글의 5장은 매우 중요하게 읽어야 될 부분으로 여겨졌는데요. 현재의 사회경제적인 모순 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우리가 어떤 현실을 바라봐야 할 지 명확하게 구분해주는 헤지스의 노력이 담겨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인간이 '선악이 혼합된 존재'라는 것에 일차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더욱이 3장에서 언급되고 있는 "반지성주의 윤리"에 대해 다시금 집중하게 되었는데요. 이 반지성주의 윤리는 오늘날 우리의 양면적인 정치를 설명하는 아주 정확한 잣대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이 책도 역시 꽤 오랫동안 제 머리에 기억될 것 같습니다.



-이 글에는 현재의 상황을 비판하면서 코포라티즘과 함께 '기업 군주'라는 표현이 들어가 있는데요. 과두제와 더불어 생각해보니 실로 적절하다고 여겨졌습니다.


-책을 구입한지는 꽤 오래되었는데 그동안 이 책을 피하고 있었습니다. 틀에 박힌 내용일거라 짐작하고 전혀 건드리지를 않았는데 일단 제 어리석음을 탓해야겠습니다.

조지 오웰이 두려워한 것은 책을 금지하는 자들이었다

외모, 효용성, ‘성공‘하는 능력 외에는 모든 것이 무가치하다

고전적인 연극, 신문, 책은 읽고 쓸 줄 아는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 문화생활의 변방으로 밀려났다

우리 사회는 미합중국과 그 동맹국들이 가자 지구에서 수백 명의 민간인을 죽이거나,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수만 명의 무고한 사람을 대량 학살해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는 냉혹한 사회다

우리의 정치 경제 체제가 파산한 직접 원인은 인문학에 대한 폭력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지배 계급은 폭넒고 보편적인 문제들, 인문학 교육의 주제들, 즉 문화의 기본 전제들에 도전하고, 정치 경제 권력의 가혹한 실체를 조사하는 주제들을 제기할 능력이 없다

의사, 변호사, 기술자는 부자가 될 수 있지만, 그 직업의 진정한 의미는 그들이 건강, 정의, 좋은 정부, 안전을 떠받친다는 것이다

이 나라의 도덕적 쇠퇴는 물리적 쇠퇴에서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 도로, 다리, 하수 시설, 공항, 열차, 대중교통 등 우리의 기간 시설이 과부하 상태이고, 낙후되고 보수가 힘들 정도로 암울한 상태인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제국주의와 민주주의는 양립할 수 없다. 제국주의에 투입되는 막대한 자원과 예산은 민주주의가 불가피하게 시들고 말라 죽는다는 걸 의미한다

1911년에 실업가 리처드 텔러 크레인은 인문주의자들이 "정신 활동"이라 부르는 것을 훨씬 더 신랄하게 비난했다. "쓸모 있는 사람만이 행복할 자격이 있으므로 문학 취미를 가진 사람은 누구도 행복할 권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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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이코노미쿠스의 죽음
피터 플레밍 지음, 박영준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8년 5월
평점 :
절판


이 글의 저자인 피터 플레밍은 케임브리지 대학과 런던 대학교 퀸 메리 칼리지를 거쳐 현재 런던 대학의 경영대학원인 카스 비즈니스 스쿨의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강고한 비판자이기도 한데요. 마찬가지로 동일한 주제를 놓고 영국 가디언지에 정기 기고를 하고 있기도 합니다. 또한 그는 민간 및 공공 부분의 조직적인 부패 연구를 지속해 오고 있고 후기 자본주의에 따른 경영 전반에 대한 재인식과 현재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집요하게 파고들고 있는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한 학자이기도 합니다. 지금 소개할 이 책은 얼마전에 서평을 썼던 "슈거 대디 자본주의"와 함께 국내에 번역되어 있는 두 편의 논저 가운데 하나인데요. 엄밀히 따져본다면 이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죽음"은 최근에 나온 "슈거 대디 자본주의"의 약간의 보론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이 글은 원제, "The Death of Homo Economicus : Work, Debt and the Myth of Endless Accumulation"으로 지난 2017년 출간되었으며, 국내에는 2018년 5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저자인 플레밍은 오늘날의 신자유주의가 2008년에 마땅히 죽었어야 했으며, 명확히 지금의 자본주의를 분석해 보자면 "불로소득 자본주의적 권력 시스템"이 오늘날 자본주의의 본질이라고 이 글을 통해 규정하고 있습니다. 서문에서 그는 신자유주의가 "평범한 사람들의 희생을 통해 번영을 구가한다"고 맹렬히 비판하면서, 글의 2장에서 꽤 심도있게 논의되는 바와 같이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매우 극심하게 "자기 파괴적 속성"을 갖고 있어 그 자체로 파괴적 경제의 본모습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지난날 미국 시카고 대학의 소위 '시카고 학파'가 이러한 토대를 강화시켜 온 것으로서, 만약 밀턴 프리드먼이 지금 살아있다면 과연 지금의 자본주의를 어떻게 받아들이게 될 것인가에 대해 플레밍은 깊은 의문을 전달하고 있기도 합니다. 전반적으로 글의 논조가 신랄하고 비판적이며, 투쟁적이기 때문에 여느 신자유주의적 비판자와는 다른 어조를 보입니다. 또한, 전체적인 글의 구조는 주장에 대한 충분한 사례와 함께 약간의 르포 형태가 가미된 것으로 볼 수 있겠는데요. 실제적으로 이론에 그치지 않고 영국을 비롯한 미국과 유럽 등지의 사례와 권력 및 기업들의 파괴적 경제 행위 및 도덕적 해이 등을 깊이 다루고 있어서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의 보다 명확한 실체가 궁금한 분들께는 이보다 더 좋은 책을 권유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여느 신자유주의적 비판적 이론들에게서 볼 수 없는 이 책만의 고유한 점은, 앞서 언급했듯이 저자는 쉽게 금융 자본주의로의 이행에 따른 세계화의 문제로 국한시키지 않고 "불로소득 이데올로기에 따른 권력화"가 자본주의의 건전성을 해치고 있다는 점을 기본 토대로 분석해 나가고 있습니다. 즉, 이것은 순수한 자본주의의 본질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이 자본주의가 후기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넘어서 1980년대 이후, 대부분의 자본 축적이 금융 자본에 의한 서류에 잡히지 않는 이득으로 계산되면서 발생하는 퇴행적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신자유주의의 냉엄한 실체 즉, "작은 이득이라도 긁어서 호주머니에 넣는 것이 중요하며, 무한한 금전적 이득이야 말로 인간 진보"라는 그 왜곡된 신념을 까발리는게 이 책의 주요한 골자가 되겠습니다. 뒤이어 3장에서는 푸코가 착안한 이 "호모 이코노미쿠스"가 왜 죽어야만 하는가에 대해 논하면서 우리가 그동안 신봉하고 뒤따르고 있던 이 자본주의가 사실 순수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은지 너무나 오래되었다고 저자는 비판하고 있는데요. 그것은 "서구 유럽과 미국이 이미 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적 기조에 벗어나, 알게 모르게 기업들에게 보조금을 투하하고 있으므로 해서 여기에 순수 자본주의를 논하는 것"은 실로 의미가 없는 일이라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논증을 토대로 우리는 한가지 사실을 알 수가 있었는데요. 대다수의 시민들과 사회적 토대에서 이 자본주의가 우리를 얼마나 풍요롭게 해왔으며 이러한 이행이 인간의 진보에서 과학 기술의 발전과 함께 이룩한 눈부신 성과가 사실은 오래전에 끝나버린 사실이라는 것을 거듭 인식시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자본주의는 테크노크라트가 신자유주의와 야합하고 이를 보수주의 정치가 지원하는 형태의 변종으로서, 차라리 사회 체제의 인식으로서 그 변화가 어떤식으로 작용되었는지에 대해 분석하는 것이 오히려 더 건설적이 일이 될 수 있을것입니다. 이것을 단순히 요약해 보자면 현재의 자본주의는 그저 권력의 속성과 추이를 나타내는 수준의 협소한 이데올로기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3장에서 소개되고 있는 호주 출신의 재계 거물 지나 라인하트는 앞선 2장의 '파괴의 경제학'에서 자본주의가 아닌 계급적 이데올로기의 측면에서 딱 부합되는 인물로 볼 수 있을텐데요. 그녀는 철광업계의 거두인 아버지 랑 핸콕으로부터 수십억 달러를 상속받은 인물로 종전에 우리가 기대고 있는 자수성가형 자본주의적 신화와는 아주 거리가 먼 인물이면서 현재의 3세 상속자들의 본질적 측면을 드러내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플레밍이 인용하고 있는 피케티의 언급과 마찬가지로 "현대 계급 구조의 바탕이 되는 것은 불로소득"이며 오히려 세상은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이러한 현실은 신자유주의가 이미 어떠한 식으로든 이익과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 사회적 선(善)과 다름없다"고 밝힌 부분과 일맥상통합니다. 무슨 수를 쓰던 간에 돈만 벌면 된다는 그 이데올로기 말입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이행에서 각각의 시민들은 민주주의적 토대의 동반자이자 동료인 이웃들을 가진 재산과 소유한 돈에 따라 서슴없이 분류하고 '구별짓기'에 나섰고 이것이 자신의 사소한 이익에 도움이 되는 한 결코 멈추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민주주의적 위기'를 후안무치하게 내뱉고 있는 신자유주의자들이 실상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가 더 강화되어 왔던 그 결과로 극단적인 포퓰리즘 정치가 정치적 토양을 제공받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시민들의 파편화를 비롯해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 많은 시민들의 고용 불안 등은 마땅히 신자유주의적 강고화에 책임을 물어야 했으나, 오히려 민주 정치와 정치의 무능으로 그 화살을 돌려 끝내 '시민들의 변별력'을 무력화시키고 지식인-언론-정치인의 삼자 연합을 무차별적으로 지원해 오늘날의 사태를 만든 것이었습니다.

다음 4장에서 플레밍은 파시즘을 먼저 언급하면서, "오랫동안 계몽으로 이룩한 현실을 돈이 끼어들게 됨으로써 퇴행적인 정치적 관점"을 불러일으켰다 주장하고 있는데요. 이는 미국의 극심한 금권 정치와 기필코 과두 정치를 실현시키려고 하는 테크노크라트의 내심이 기반이 되고 있는데요. 플레밍은 기득권 세력과 테크노크라트의 "시민 다수의 민주적 권리"에 대한 '악에바친 혐오'를 언급하면서 소위 선진 사회라고 일컬어지는 각각의 국가들이 구축한 민주제도와 민주 정치가 이들 기득권 세력에게는 먼저 자본주의가 계급 정치를 용인하지 않고 있음에도 이미 권력화되어 오랫동안 헌법을 고립시켜 사회 내의 주도 세력으로 자리한 연유에는 바로 이와 같은 의도가 숨겨져 있습니다. 사실 오늘날 더 강화되고 있는 '능력주의'와 기승을 부리고 있는 개인주의는 이를 신봉하고 있는 정치인들조차 입으로는 민주주의를 언제나 외치고 있지만 속으로는 소위 전문가가 주도하는 다수의 시민 배제 정치를 원하고 있으며, 사실 이러한 기반의 인식이 정치인들에게는 충분한 이익이 되기 때문에 경제적 관념의 우월성은 이토록 2세기 이상을 지배해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를 저자인 플레밍 식으로 분석해 본다면 대중에게 가해지는 소위 선동 정치에서 돈 자체는 자유롭고 중립적이기 때문에, 밀턴 프리드먼과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말대로 자유 시장이 건전한 사회를 위해 어느 정도 기여하게 될 것이라 기대했다는 불확실한 그의 의견이 있지만 과연 하이에크의 그 판타지적 이론이 얼마나 사회를 위해 경제와 정치의 조화를 원했는지는 아마 어린아이도 짐작할 만한 일일 것입니다.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은 거의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이미 노동자이자 시민인 우리에게는 자본주의가 너무나 내면화 되어 있기 때문에 그동안 신자유주의가 강요한 불로소득 자본주의 체제에서 시민의 실패는 오로지 개인의 문제로 국한되었고 그 파급을 조금이라도 보상 받을 수 있는 사회적 부조는 이미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제거되었기에 사실 극단적으로 뭔가 변화가 있어야만하는 것은 지나친 말은 아닙니다. 이와 비슷한 예로 런던의 상수도가 1990년대에 민영화 되고 나서 호주의 '흡혈 캥거루' 맥쿼리가 한 것은 요금을 올리고 주주들에게 배당을 돌린 것에 불과하다는 점은 신자유주의적 민영화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신자유주의가 공익과 공공선 그리고 도덕주의를 붕괴시켰고 그러한 가운데 시민들이 오로지 자본의 논리 한 가운데에 놓여 스스로 인간적인 삶을 영위할 권리 마저 보장받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저자인 플레밍의 말대로 서구 유럽과 미국의 자유주의라는 것이 이러한 맥락으로 진행되어 겉보기에는 모두가 풍요롭고 자유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을것처럼 그려지고 있지만 그것의 본질은 약육강식의 비인간화였던 것이죠. 앞서 제가 잠깐 소개했던 바와 같이 기득권과 테크노크라트는 시민의 민주적 권리에 대해 치를 떨고 있기에 1980년대 이후 진행된 레이거노믹스와 대처리즘이 건전한 민주주의의 이념 마저도 시민과 멀어지게 함으로써 작금에 이르러서는 시민 정치가 근본적인 힘을 잃게 된 연유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회학은 이러한 매커니즘을 먼저 가르치고 알려야 했지만 이 글에서 드러나고 있는 대학의 냉혹한 자본주의화는 자본에 대한 자정 기능을 한참이나 후퇴시키는 것으로 마찬가지로 우려될 만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지금까지 이러한 경고의 글은 너무나 많이 출판되어 왔기에 단순히 확대해석이나 음모론으로 치부될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측면에서 기득권과 테크노크라트가 시민들의 스스로에 대한 교육이나 학문 자체에 대한 접근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은행에 대한 긴급 구제 상태가 발생한 이후, 국민들 대부분은 자신이 그동안 품위있는 삶을 포기한 채 허리띠를 졸라매고 세금을 바쳐왔던 국가가 비정상적인 형태의 공공 영역이라는 인식을 갖게 됐다

대기업들은 자신들의 비생산적인 기업 활동을 방조하고 주주들에게 막대한 배상금을 지급하는 일을 지원하는 부도덕한 정부를 필요로 한다

현대 국가의 민주주의가 후퇴했다는 사실을 의심할 나위가 없다

아마 기술이 진정으로 첨단의 능력을 발휘하는 유일한 영역은 사람들을 억누르고 통제하는 도구를 만드는 일일 것이다

리차드 탈러는 토마 피케티의 경제적 불평등 이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을 받고, 진정한 문제의 원인은 시카고학파 계열의 신고전주의 경제학자들에 있다고 대답했다

신자유주의적 독단론은 명백히 오류로 판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좀비 같은 모습으로 우리 사회 한가운데를 활보한다

소위 ‘달러를 사냥하는 동물‘의 위상은 개인주의와 기업에 초점을 맞추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부상을 통해 본격적으로 굳어졌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란 한정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분배하는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범대서양 무역투자동반자협정에서 유출된 문서를 보면 시민들의 기본적인 민주적 권리에 대한 지배 엘리트들의 증오가 어느 정도인지 확인할 수 있다

그동안 사회가 보수파의 세상으로 변하면서, 이제 임시적인 조치나 부분적인 개선으로서는 현재의 상황을 고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오늘날 세계를 좌지우지 하는 지배자들은 ‘검은 돈‘을 상징하는 금권 정치가들이며, 피도 눈물도 없는 부의 축적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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