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빅 브라더 - 지그문트 바우만, 감시사회를 말하다 질문의 책 1
지그문트 바우만 & 데이비드 라이언 지음, 한길석 옮김 / 오월의봄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더이상 다른 수식어가 필요없는 위대한 사회학자인 지그문트 바우만과 스코틀랜드 출신의 사회학자이자 감시학의 대가이며, 근대성과 관련된 연구에 평생을 바친 학자이기도 한 캐나다 온타리오 킹스턴의 퀸즈 대학의 교수인 데이비드 라이언의 대담집인 이 책은 지난 2011년 9월과 11월 사이에 오고간 이메일을 통해 탄생한 논저이기도 합니다. 두 사람은 직접 대면하지 않고서도 쉬이 대서양을 오가는 전자 이메일을 통해 서로간의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네트워크적 시대의 도래를 증명해내는 것으로도 증명하고 있는데요. 이러한 관점의 시각은 이 글이 관통하고 있는 주제와도 일정부분 연관되어 있어 여러모로 모두에게 꽤 시의적절한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어쩌면 촘스키와 바사미언의 대담집과 유사한 측면의 논저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만, 어찌됐든 바우만과 라이언의 현재의 ‘감시 체제 및 통제 사회‘에 대한 꽤 논리적인 근거들은 제게 있어서도 시사하는 바가 가볍지 않다고 느껴졌습니다. 또한, 데이비드 라이언의 훌륭한 논저인 ˝감시사회로의 유혹˝도 국내에서 구할 수도 있으니 따로 참고하는 것도 이 책을 이해하는 도움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따라서, 이 글은 지난 2012년, ˝Liquid Surveillance˝라는 원제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4년 2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다만 아쉽게도 현재 이 번역본은 절판된 상황인데요. 얼마전에 서평을 쓴 지그문트 바우만의 ‘부수적 피해‘의 판권 문제를 고려해 봤을 때, 동일 출판사가 다시 재간행을 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먼저, 책의 6장에서 데이비드 라이언이 인정하고 있듯이, 2001년 이후의 변화된 세계에 따른 전세계적인 초고밀도의 감시 체계와 통제 사회로의 이행은 사실상 ˝사회학에서도 보기 힘든 사례˝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책의 원제인 ˝유동하는 감시˝가 밝히는 주제와 마찬가지로 꽤 오랫동안 이 감시라는 주제에 관심을 가져온 지그문트 바우만은 자신이 고안한 사회학적 개념인 ˝유동성과 액체 근대, 소비주의 및 쓰레기가 되는 삶과 쓰레기가 된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글을 추동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데이비드 라이언은 지그문트 바우만의 의견을 이끌어내면서 자신과 바우만의 동일한 이해를 바탕으로 일종의 열린 결말을 이끌어내고 있는데요. 단순히 전방위적인 세계 감시 체계와 그에 따른 안보 보장을 위한 이런 시스템의 구축이 그저 조지 오웰과 올더스 헉슬리가 예견한 디스토피아적인 산물이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두 사람 다 단순한 문제로 보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에 1장에서, 오늘날 페이스 북으로 시작된 수많은 개인들의 연결된 인간관계와 온라인 삶의 확대는 단순히 좋다 나쁘다를 판단하기 이전에 ˝극명한 양가적인 문제˝가 존재하고 있다는 점은 꽤 설득적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우만은 현재의 시민들이 ˝확실하게 분리된 온-오프라인에서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이것이 현재의 사회와 사회학에 증명하고 있는 것은 긍정과 부정을 모두 포함한 것이라고 그는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각각의 개개인들의 실존적 딜레마를 포함하고 있고 과연 이러한 보여주기식의 삶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스스로 규명해내고 과거와의 단절을 용인하면서까지 거대 네트워크 기업들의 살만 찌워주고 있는 현 시대의 단상을 꽤 비판적인 인식을 통해 두 사람 모두 이를 파헤치는데 할애합니다.

뒤이어, 2장은 불확실성을 더욱 부추기는 현대의 유동성을 근간으로 벌어지고 있는 시대적 단상에서 더욱 강화되고 있는 제레미 벤담의 파놉티콘의 ˝차별적인 강화 버젼˝에 대해 논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단순히 단조로운 구속 상태에 대한 시스템의 안정을 추구했던 벤담식의 파놉티콘으로는 현재의 모습을 전부 해석해 낼 수는 없으며, 그러한 감시 체제 가운데에서 철저히 배제되고 있는 외부자들, 잉여자들, 쓰레기 인간들의 발생에 대해 바우만은 일관된 논조로 이 현상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바우만의 이 확장된 인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논저 ˝쓰레기가 되는 삶들˝의 일독이 필요해 보입니다. 이에 데이비드 라이언도 일정 부분 동의하고 있듯이, 민주주의가 쉽게 전체주의로 나아갈 수 있다는 점과 마찬가지로 자유주의 사회에서 예외로 존재하는 권력에 대한 경계와 더불어 극한의 자유가 필시 극한의 이기주의를 낳는다는 토크빌 식 개념의 차용은 현재의 ˝감시 통제 사회의 구축˝이 무얼 뜻하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이것은 바로 3장에서 바우만이 지나간 역사속에서 찾고 있는 ˝나치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신념에 가득한 채 벌인 일들˝에 대해 논하는 것으로 독자들에게 진실의 그림을 그려보게끔 하고 있는데요. 국가와 사회에 해가 된다는 이유만으로, 마땅히 축출할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이 있다는 이유 만으로, 자신들의 절대적 순수함을 위해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절멸에 이르게 한 전체주의와 자신의 사상에 반한다는 이유로, 혹은 반동주의 사상에 물들어 있다는 이유 만으로 극한의 수용소로 수많은 인명을 말살에 이르게 한 공산주의의 결말이 현재 빠른 속도로 구축화 되고 있는 또는 권력에서 빛보다 빠른 속도로 정치를 분리시키고 있는 암울한 미래에 대한 ‘증명 사진‘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물론 이 지점에서 터무니없는 인식 과정이라고 반대할 분들이 계시겠지만, 쿠바 관타나모에 있었던 사건이나, 대표적인 인명 경시의 부수적 피해로 확인된 2011년 2월의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무고한 22명의 결혼 하객에 대한 드론의 공격은 어느 정도 이를 증명한다고 생각됩니다. 또한, 미국의 연방수사국 (FBI)이 600만명의 안면 인식 데이터를 넘어서 전국민의 안면 인식 데이터를 구축하고자 하는 이 불필요하고 위험한 욕망을 과연 정치가 제어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얼마간 불명확하다고 할 수 있을겁니다. 마찬가지로 3장 또한, 바우만의 ˝부수적 피해˝의 일독이 필요한 장이기도 합니다.

다음, 4장과 5장에서는 ˝완전 강박적인 반자유주의적인 민주주의가 컴퓨터 기술에 기초한 감시를 증가시키고˝ 있는데, 바우만과 라이언이 동의하고 있듯이, 이런 체제 이면과 더불어 날로 발전되는 과학 기술의 비윤리성 및 도덕성의 배제는 우리 미래의 전반을 암울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합니다. 제임스 데어 데리언에 따르면, 이런 군-산-미디어-연예 복합체 military-industry-media-entertainment 는 더욱 가속화 되고 있고, 분명 이러한 감시 체제의 확장과 발전은 이들 주요 이익 수여자들에게 새로운 산업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애초에 안전과 안보라는 미명하에 구축되고 있는 이 시스템이 과연 ˝도저히 채워지지 않는 안전이라는 욕망˝을 완벽하게 채워줄 수 있겠는가에 대해서는 극히 회의적입니다. 바우만의 언급대로라면, 아무리 현관에 많은 자물쇠를 채운다 하더라도 그러한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의 안전에 대한 욕망을 완벽히 채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더불어 더 큰 문제는 이 패러다임의 강고함이 이를 수용하지 않고 반대하는 사람들의 처우를 사실상 관심을 끊거나, 바깥으로 밀어내는 식으로 ‘사회의 균질함‘을 추구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사뭇 큰 문제로 도출될 수 있을텐데요. 그래서 무엇보다 ˝권력에 정치가 더욱 더 가까워지고 밀접해져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이 확실한 불안요소 일테죠. 결국 이 모든 메커니즘은 불활실성을 가중시킨 ‘유동적인 근대˝에 기인한 것이며, 그런 연유로 ˝우리의 현대는 이에 마땅한 대답을 제시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데이비드 라이언의 주장은 그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끝으로, 7장의 결말은 자크 데리다가 단초를 제공한 ˝최후 희망의 보루˝가 과연 우리에게 주어지게 될지에 대해서 법을 지키는 개인들로서 마땅한 침해할 수 없는 권리를 갖고 살아가는 수많은 시민들의 종착점이 반민주주의적인 무언가로 나아가게 될지도 모르는 이 불확실성을 안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매우 당연하게도 이를 거부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될겁니다. 그런 의미로 저는 이 글에서 앞선 논의에 대한 약간의 단초를 얻기도 했는데요. 그것은 ˝자유주의 사회에서 예외된 권력˝을 휘두르는 조르조 아감벤의 경고 아닌 경고인 ˝이 축소된 예외 상태˝와 같은 시민들에게 어물쩡 수용되기만을 바라는 인정되지 않는 권력에 대한 제거와 이를 통한 모두의 공감대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단순히 제러미 벤담식의 ˝다수에 의한 소수의 감시˝가 아니라 ˝소수에 의한 정밀한 다수에 대한 감시˝의 모두가 원하지 않는 결말을 우리가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는 것 만으로도 이를 미연에 막을 수 있는 최소한의 시작점이 될겁니다. 따라서, 그런 의미에서도 오늘날의 네트워크 시대의 도래는 다른 한편으로는 시민들의 연대와 각성을 불러 일으키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는 측면에서 양가성을 드러내고 있는 부분은 마냥 디스토피아적인 문답을 강요하기도 어려운 실정임은 다소 분명해 보입니다.


-본문 46페이지의 피루스 왕의 승리는 피로스 왕으로, 52 페이지의 뒤르켕은 뒤르켐으로 수정해야 된다고 생각됩니다.

-1장에서 지그문트 바우만은 한국의 디지털 사회 사례를 소개하며, 한국의 사회 생활이 이미 전자적으로 매개된 지 오래이며, 이러한 가운데 피와 살을 가진 존재들과의 사회 생활은 부차적일 뿐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지점은 단순히 온-오프라인의 철저히 분리된 삶을 뛰어넘어 오늘날 한국 사회의 일면을 명확히 분석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물론 약간 현 상황에 대한 부정적인 뉘앙스는 존재하지만, 그것도 2012년에 한국에 대한 실정을 바우만이 이렇게 정확히 짚어낸 점은 대단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이러한 한국 사회의 ‘디지털 매개적 삶‘은 분명 장단점이 확연한 것으로 일정 부분 정치에서의 긍정적인 기여도 있다고 언급하고 싶습니다.

-바우만의 현실 인식이 들어간 직설적인 화법이기도 합니다만, 역시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시대 착오적인 논법을 마지막 장에서 비판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공포를 동반하는 삶을 살아볼 만한 것으로 만들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다

파놉티콘이라는 주제를 다룰 때 장치라는 푸코적 개념의 중요성은 여전히 인정받을 수 있지만 오늘날 세계적 맥락에서 나타나고 있는 정치경제학 기술을 다루기 위해서는 이 개념을 넘어서야만 한다

만일 사회 분석이 소외되고 떨쳐진 사람들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믿는다면, 이러한 현상을 강화시키는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시민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로서 역할을 하면서 끊임없이 점검과 감시, 시험을 받고, 평가되며, 값이 매겨지고, 판정을 받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이 사회는 예전에는 공개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분리시키던 경계를 지우고, 사적인 것을 공개적으로 노출시키는 것을 공적 미덕이자 책무로 만들어버리는 것으로 악명을 떨치고 있다

나치와 공산주의자들은 어수선하고 불분명하고 무작위적이며 통제를 거부하는 모든 요소 혹은 인간 조건의 측면을 대규모로 그리고 일거에 제거하려고 착수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불/안전에 관련된 기술들은 단지 정보와 소통 기술공학의 소산으로만 이해할 수도 없고, 혹은 우리가 용인하고 있는 예외 상태에 갇혀 버려서 생긴 결과물만으로 이해할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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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시민주의 전통 - 고귀하지만 결함 있는 이상
마사 C. 누스바움 지음, 강동혁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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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근래 인도 출신의 저명한 경제학자이자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르티아 센과 함께 보편적 평등주의에 입각한 전세계의 빈곤 문제와 사회경제적 불평등에 집중해 온 마사 누스바움은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법철학자입니다. 그녀는 미국 뉴욕대에서 학사 학위를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 받은 뒤, 하버드 대학과 브라운 대학을 거쳐 미국 사회과학의 명문 시카고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중에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누스바움은 ‘보편적 인류애‘에 입각한 인간 존엄과 인권에 관심을 갖고 있는 학자라고 볼 수 있을텐데요. 이 책에서도 인용되고 있지만, 키케로가 철학자들이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큰 잘못이라고 말한 부분을 우리가 인지한다면 최근의 누스바움은 이러한 ‘할말을 하는‘ 지식인의 책무에 관한 표본이 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그녀의 이 글은 원제, ˝The Cosmopolitan Tradition : A Nobel but Flawed Ideal˝로 2019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거의 최근인 2020년 6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간단한 소개글을 마무리하기에 앞서, 역자의 번역이 매우 훌륭하다는 점을 밝혀두고 싶습니다. 이렇게 번역하기 쉽지 않은 논저를 매끄럽게 번역한 역자의 노고에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저자인 누스바움에 의해 이뤄진 강연에 기반해서 쓰여진 이 논저는 크게 현재의 ˝물질주의적 자유주의 세계정치˝에서 과거 키케로부터 시작된 세계시민주의에 대한 단초를 기반으로 주류 철학의 기반이 되어있는 스토아주의를 일정부분 비판하고 이를 통해 보편적인 인류애적인 세계 시민 사상의 좀 더 가능성 있는 틀을 마련해보고자 하는 꽤 대단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많은 철학자들이 강조하고 있듯이 이성을 품고 있는 인간이 현실의 작동 원리와 칸트가 규명하고 강조했던 인간 본연의 자유, 인권과 같은 보편적 권리가 오늘날에 와서는 왜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은지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지점에는 우리의 자본주의가 꽤 원치 않는 결과를 양산해 낸 것은 분명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시민의 권리로서 또한 정당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이를 제대로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또한 이런 알권리들에 대해 반대의 입장을 가진 어용 지식인들의 입질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는지 그 원인을 다소나마 찾는데 누스바움의 이 글은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시민주의에 대한 주요한 선구자들로 등장하는 키케로와 그로티우스, 애덤 스미스를 연결시켜보는 것은 그녀의 탁월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다만, 국내에는 그로티우스의 논저들이 번역되어 있지 않은 점이 큰 아쉬움으로 다가오기도 하는데요. 그나마 핵심 의제들을 누스바움이 잘 정리해 놓고 있어서 간접적으로 그로티우스의 지적 궤적들을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점도 마찬가지로 이 책의 훌륭한 점이라고 하겠습니다.

먼저, 키케로는 당시 스토아주의에 맞서 약간 소크라테스와도 일맥상통하며 ‘스스로 원했던 최후를 맞이한‘ 당시의 정치가이자 철학자, 웅변가였습니다. 소위 ‘틸리의 책‘이라고 불리우는 그의 의무론은 누스바움이 꽤 심도있게 스토아주의와 비교 분석하는 학문적 매개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키케로는 일반적인 ‘정의론‘을 지지하고 적극적 불의와 소극적 불의로 대변되는 ‘불의론‘으로도 누스바움은 이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예를들면, 누스바움이 해석한 ˝그들이 겪는 굶주림과 가난이 한 명 이상의 다른 사람들이 저지른 부당행위로부터 야기된 게 아니라고 가정할 수 없다는 것˝과 같이 키케로에게도 정의의 의무와 물질적 원조의 의무는 일반적인 ‘정치적 정의‘에서 중요한 사유였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반대의 스토아주의적 교설(doctrine)의 허위로서, 개인의 삶의 비참함이 그 사람의 도덕적 나약함의 결과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종래의 언설들이 상반된 입장을 갖고 있는 키케로주의자들과의 간극이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바로 여기에서는 누스바움이 지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스토아주의적인 곡해로 애덤 스미스의 사상을 왜곡하는 결과는 매우 심각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사실 기존의 애덤 스미스의 사상을 곡해한 밀턴 프리드먼과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자유주의의 화신으로 스미스를 세운 것과 하이에크 본인이 ˝사회에 정의 따위가 필요한 이유가 있는가˝를 내뱉은 것과 상반되는, 과거 칸트가 ˝이성으로 이뤄진 모든 인간이 불필요한 중세적 굴레를 벗어나기 위한 시작점에서 계몽주의가 있었던 것˝처럼 보편적 인간이라면 바로 그 ‘정의감‘에 눈을 감고 있을 수는 없을겁니다. 바로 여기에는 그동안 수많은 왜곡된 지식인들이 ˝정의 따위를 찾는 것은 나약한 이상주의에 불과하다˝거나, ˝경제적 인간이라는 관점에서 개인의 합리적 이기심을 위해 약간의 도덕주의는 무시할 필요가 있다˝는 식의 합리화가 어떤 부류들에게 이익이 되었는지는 얼마간의 분석으로도 다소 명백해 보이지 않습니까.

뒤를 이어, 이러한 키케로의 사상에 접목한 인물이 바로 휴고 그로티우스입니다. 그도 역시 쉽게 저버릴 수 있는 개인적 신념을 지녔던 것으로 추측되는데요. 특히 자신의 종교의 자유와 관련하여 자신의 모국을 떠나 프랑스로 사실상 망명한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도 앞선 키케로와 마찬가지로 보편적인 인류애와 무엇보다 개인이 주체가 되는 도덕주의에 집중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부분은 그가 국가의 주권과 관련된 문제와 관련해서 일반적인 측면의 국가 주권과 개인의 도덕률 내지는 도덕주의의 충돌에 대해 후자의 입장을 강조했던 것을 비추어 보면 명확합니다. 이에 누스바움은 ˝그로티우스가 보기에는 도덕적 자율성이나 그를 통한 정치적 주권의 궁극적 원천은 모두 개인의 양심이었다˝고 분석합니다. 이런 누스바움이 설명한 그로티우스와 관련된 4장을 읽으면서, 그가 오늘날의 인식대로 꽤 상식적인 다원주의자이자, 세계 정부와 같은 이론을 그려본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아쉽게도 민족국가에 이르는 베스트팔렌 체제를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것이 그의 학문적 사상이 완성되지 못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만, 저자인 누스바움의 말대로 그로티우스가 오늘날 세계의 국제정치학자들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화점론‘이라고 일컬어지는 그의 전쟁과 평화론은 여러모로 의미가 있는 논저라고 불릴만합니다. 또한, 국제 사회 및 세계 국가들에게서 각자가 갖고 있는 외적 자원과 자원을 할당할 권리는 국가 주권이라는 개념의 핵심에 놓여져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키케로의 정의로운 전쟁론과 사뭇 대비되는 그로티우스적인 정의 전쟁의 인식적 결과물 또한 흥미롭기도 합니다. 빈곤과 가난이 심각하게 퍼져 있는 도식적인 한 국가를 토대로 삼자간의 전쟁에 대한 명분이 어떤식으로 행위에 대한 결정론이 되는지 누스바움은 이를 잘 설명해내고 있습니다. 과연 이들 가운데 누가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흥미롭기도 합니다.

다음 5장은 누스바움의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기존의 스토아주의적인 전통에서 외적 자원과 관련된 인간 사회의 구조적인 맹목성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이 애덤 스미스를 곡해하고 왜곡해 왔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절은 앞선 키케로와 그로티우스에 이은 세계시민주의적 도덕적 세계 정부론에 중요한 원리가 되는 스미스의 ‘도덕 감정론‘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물론 ‘국부론‘ 역시 적절하게 인용이 되기도 하는데요. 물질적 재화와 그에 따른 분배를 ‘외적 자원‘의 기본 코드로 놓고 이번 장을 분석한다면 꽤 명쾌한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과 관련해 칸트는 ˝스미스의 저작을 존경했고, 칸트적 형태의 자유주의는 이에 영향을 받은 것이 틀림없다˝고 저자는 분석하고, ˝개인의 사익 추구에 대한 스미스의 변호는 자제력에 관한 도덕적 주장에 짜여 들어가 있으며, 이런 토대 위에 지어진 사회에 대한 그의 설명은 홉스나, 심지어 로크의 설명과도 엄청나게 떨어져 있다˝는 점도 그동안 얼마나 스미스의 사상이 곡해받아 왔는지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는 당시의 노동자들의 삶에 관심이 많았고, 특히 날로 증대하고 있던 대규모 제조업자들이 정부에 끼치는 부당한 영향력에 그가 관심이 많았다는 것은 실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날에는 밀턴 프리드먼과 궤를 같이 하는 인사들이 애덤 스미스를 무슨 자유주의 경제의 화신으로 여기고 있으나, 진실은 그가 정치적 도덕성에 관심이 많았으며, 개인의 권리와 사회적 관계의 중요성, 그리고 ˝어떤 사회도 구성원의 대다수가 가난하고 궁핍한 가운데 번영하며 행복을 누릴 수 없다˝고 주장한 바가 있습니다. 더불어, 앞서 키케로가 중요시 여긴 ˝인간 존엄성의 맥락˝이 실상은 다치고 부서지기 쉬운 것으로 현실주의적 입장을 내비친 스미스의 지혜 역시 뭔가 그 이질감이 대단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아마도 이런 연유에는 다수 경제학자들에 의한 도덕 감정론의 무시와 이것을 꽤 관념주의적 논저로 몰아간 몇 백년간의 지속된 작업도 한 몫을 했을 겁니다. 따라서, 스미스 역시 개정된 도덕 감정론에서 이런 스토아주의에 대해 비판을 가하고 있는데요. (인간과 사회에 대한) 절대적 무관심이 ‘섭리‘라는 스토아주의의 교설과 만났을 때, 도덕주의의 사실상의 퇴락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어떻게 보면 기존의 자본주의의 이행(인간과 사회가 배제된)과 그런식으로 매우 교묘하게 닮아 있기도 합니다.

끝으로, 꽤 (실제로) 합리적인 경제학자인 대니 로드릭은 오늘날의 세계 정부와 세계 시민주의와 관련된 움직임에 다소간 부정적인 시선을 던진바가 있습니다. 다른 관점으로 돌려보면, 이 세계 정부에 대한 선결적인 조건들 가운데, 다원주의적인 관념이 포함되어 있어야 할 텐데요. 이는 명백하게 민주주의적 토대의 기본 가치이기도 합니다. 이를 다시 고려해본다면, 오늘날의 경제적 파행의 결과들을 개선하기 위해 나타난 세계 시민주의와 관련된 이론들은 결국 다시 ˝민주주의로 돌아가자˝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아예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한다면, ˝시장에 다시 정치를 귀환시키자˝와 같은 말이 되겠죠. 이에 누스바움은 마지막 결론에서 모두가 인정할 만한 정의로운 가치와 인간 존엄성의 존중, 더이상 혐오를 하지 않는 발걸음 등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몇가지 구조적인 움직임에 대한 선결 또한 제시하고 있는데요. 다만, 아직까지도 민족에 의한 국민국가주의에 손을 들고 있는 시민들도 많고 현재 유럽의 이슬람 이주민들과 다른 민족의 유입에 따른 여러 문제들을 놓고 봤을 때, 이 지점은 특히나 ˝시민들의 사회경제적 불평등 문제˝에 관련이 깊어 아예 기존의 사회경제적인 패러다임의 변화와 소수의 배만 채우고 있는 ˝금융화˝에 대한 조절이 먼저 필요해 보입니다. 이 점은 과거 국제 사회가 각 은행들의 ˝자기 자본 비율˝을 강제했던 것과 같은 아이디어가 있어야만 한다고 여겨지는데요. 따라서, 올바른 정치는 이런 부분에서 꽤 훌륭한 효과를 거둘 여지가 있어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다수의 시민이 중심이 되는 이러한 시민 정치에 대해 소수의 기득권과 엘리트 계층이 소위 말하는 ‘군중 정치‘로 몰아갈 가능성이 다분하기에, 양자 사이의 긴장은 최근들어 높아졌다고 봐도 무방해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여기에는 주권에 대한 개념과 이 주권의 시도 행위가 어디까지 용인될 수 있는가에 대한 시민들의 공감대와 누스바움이 이 책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주권과 시민의 기본권이 어떻게 하면 평화롭게 맞물려 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올바른 지식인들과 학자들의 연구도 동시에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자가 염연히 철학자인 만큼 이러한 꽤 관념적이고 도덕적인 저술이 마음에 들지 않을 독자들이 있을텐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의 애덤 스미스의 사상에 대한 본질을 파헤친 5장의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토아주의에 대한 계보가 철학 뿐만 아니라 사회학 및 경제학 전반에 뿌리 깊다는 걸 이 책을 통해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키케로는 타인에게 헌신하는 삶에서 이런 사랑의 연대가 어마어마하게 중요하다는 점을 드러낸다

수많은 현대 미국인이 가난이 사실상 의지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의지가 꺾인 사람을 보고 그것을 개인적 나약함이나 실패의 결과라고 생각하니 말이다

존엄성은 지위나 신분과 아무 관련이 없으며, 사실 지위와 신분에 대한 대단히 격렬한 거부를 핵심적인 도덕적, 정치적 가치로서 동반한다

세상을 똑바로 보는 사람에게는 두려워 할 만한 일이 아무것도 없다. 도덕적 힘은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의 괴로움에 대해 부모가 품을 법한 관심이 그가 세계시민주의자의 선행에 대해 품고 있는 상이다

애덤 스미스는 정의를 세우기 위해 제도를 개선하는 데에 돈을 지출해야 할 필요성을 지적했다

여기에는 동시에 "훼손된" 사람에게서 인간 존엄성을 찾는 것, 공교육이나 삶의 다른 적절한 조건들의 부재가 말려 죽이고 있거나 심지어 이미 회복할 수 없이 고사시킨 기본적 역량을 보는 것 또한 요구된다

스미스는 이런 양심과 자제의 미덕을 인간 존엄성이라는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짓는다

개인의 사익추구에 대한 스미스의 변호는 자제력에 관한 도덕적 주장에 짜여 들어가 있으며, 이런 토대위에 지어진 사회에 대한 그의 설명은 홉스나, 심지어 로크의 설명과도 엄청나게 떨어져 있다

키케로는 "공화제를 정말이지 온 세상에 좋은 것이다"라고 말년에 그와 같이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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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0-07-30 13: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미스-칸트의 연결고리가 있다니 리뷰만 읽어도 흥미진진합니다^^

베터라이프 2020-07-30 14:08   좋아요 1 | URL
칸트가 스미스의 저작에 깊은 공감을 보인 것은 인간에 대한 도덕주의적인 겸허한 스미스의 사상에 긍정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 물론 어떤 극우 유튜버처럼 종래의 신자유주의를 옹호하는데 칸트을 끌어다 쓰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본질적으로 임마누엘 칸트는 인간의 보다 보편적인 이성의 함양과 인간성에 주목했던 위대한 철학자임은 더 분명하겠죠. 더불어 그동안 지오바니 오리기와 같이 곡해했던 애덤 스미스를 다시 이해해보고자 하는 학자들의 움직임이 있어왔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누스바움의 의한 새로운 애덤 스미스 독해는 세계시민주의적인 연결성과는 별개로도 매우 의미있는 학문 작업이 아닌가 일개 독서인으로서 짐작해보네요 ^^ 모쪼록 추풍오장원님도 이 책을 일독해보시길 바래봅니다. 감사합니다!

페크pek0501 2020-07-31 12: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누스바움의 책을 두 권 가지고 있어요. 둘 다 흥미로운 책이죠.
<지혜롭게 나이 든다는 것>과 <시적 정의>라는 책이에요.
이런 책도 있는 줄 몰랐어요. 신간인가 봅니다. 정보에 감사드립니다.

베터라이프 2020-07-31 18:49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페크님. 저에게 누스바움은 아마르티아 센과 더불어 역량 접근이라는 의미에서 다수 시민들의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개선하고자 하는 철학자이자 사회학자로만 인식되고 있는데요. 실은 국내에 번역된 그녀의 글을 살펴보면 삶의 태도라든지, 공공인으로서의 마음가짐 같은 철학적 기본서도 얼마간 집필하기도 했더라구요. ^^ 다만, 이 책은 앞서 설명해드린 세계시민주의에서의 역량 접근이라는 학문적 기반의 확장판이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수에 대한 두려움 - 분노의 지리학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로컬리티 번역총서 4
아르준 아파두라이 지음, 장희권 옮김 / 에코리브르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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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인도 뭄바이 출신의 저명한 문화인류학자인 아르준 아파두라이는 전 지구화 (혹은 세계화) 연구에 자신의 인생을 바친 학자이기도 한데요. 그는 미국 메사추세츠 주의 사립 명문인 브랜다이스 대학을 거쳐 우리에게도 전세계를 통틀어 경제학과 사회학 요람으로 잘 알려져 있는 시카고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 받고, 그 이후에도 미국에 남아 후학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특히, 그는 예일대를 비롯 뉴욕대 등에서 출강을 하기도 했고, 뉴욕시의 연구 전문 대학인 뉴스쿨대학에서 영예로운 ‘존 듀이‘ 석좌 교수직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이 책을 읽게 된 구체적인 계기는 최근에 논란이 된 김봉건 작가 사건이 중요한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국내에는 그의 논저들 가운데 먼저 번역된 ‘고삐 풀린 현대성‘이 좀 더 많이 읽히기도 했는데요. 이 글은 그런 전작 가운데서 ‘전 지구화에 따른 인종적 및 종교적 소수자들에 대한 비관용과 다수의 폭력‘을 따로 책으로 엮은 것으로 여겨도 무방해 보입니다. 따라서, 이 책은 ˝Fear of Small Numbers˝라는 원제로 지난 2006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1년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더불어,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의 로컬리티 번역총서들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오랫동안 전 지구화 (혹은 세계화)와 근대성을 다룬 학자 답게 저자가 바라본 오늘날의 전세계적 소수 그룹에 대한 인식 문제에 대해 꽤 높은 설득력을 이 글은 답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글 6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포스트베스트팔렌 세계 post-Westgahlen world‘가 가속화되고 있는 가운데 기존의 종족적 국민주의가 이질적인 이민 유입에 의해 벌어지고 있는 기존의 사회 체계에 대한 도전과 혼란 등을 문화인류학적인 관점과 또한 사회학적인 인식론을 기반으로 한 훌륭한 논리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저는 이러한 저자의 인식을 바라보면서 한가지 들었던 생각은 급격하고 광범위한 세계화에 따른 소위 전세계의 경제 구조의 변화가 사실상 단일한 인종의 국민국가주의에 파급적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사실상 우리의 민주주의가 베스트팔렌식의 국민국가주의에 거의 대부분 기대고 있는데, 현재 유럽의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그동안 30여년간 각 지역에서의 이슬람인들 유입은 이러한 국민국가주의에 토대를 흔드는 영향을 끼쳤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노골적으로 과거 베스트팔렌주의적 국가주의 토대에 오늘날의 국민국가화를 판단하고 있는 헨리 키신저를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로버트 달과 찰스 틸리 역시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기본적으로 국가 정치의 초기 흐름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베스트팔렌주의적 기조가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이 책을 정독하고 나서 드는 의문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저자는 스스로가 인도 출신이어서 인도 내부에서 독립 과정에서 벌어졌던 힌두교도들과 이슬람인들의 유혈 충돌을 익히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인도의 독립과정에서 이행되었던 동파키스탄과 서파키스탄의 분리와 그 이전에 거대한 인도 반도에서 힌두교와 이슬람의 분리가 현 시점에서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지 그는 잘 풀어내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파키스탄인들에게 있어서 인도 내의 이슬람인들은 일종의 ‘트리거 장치‘로 내부 모순에 기여하고 있다든지, 인도 쪽에서 바라본 이들 13퍼센트의 이슬람인들은 ‘다수결의 인종주의‘라고 대변되는 다수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1992년에 어느 이슬람 사원의 폭파를 진술하고 있기도 한데요. 이러한 인도와 파키스탄 혹은 인도 안에서 힌두교와 이슬람인들의 비대칭적 대결 구도에 대해 언급하면서 전세계적 측면에서 명백히 소수에 위치해 있는 인종들과 그 종교들에 대한 첨예한 대결 구도에 어떻게 이 ‘전 지구화‘가 기여했는지를 저자는 일목요연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있었던 미국에 의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대해 저자는 원칙적으로 ˝진정한 민주주의는 근본적으로 이슬람주의와 맞지 않거나 적어도 단지 피상적으로만 이슬람주의를 표방할 것이라는 느낌을 갖고 있다˝는 진술을 통해 전후 이라크에 대한 부시 행정부의 ‘민주주의 수출 long distance democracy‘가 얼마나 졸속으로 이해되었는지 파악할 수 있게 합니다. 여기에는 근본적으로 인도의 경우와는 달리 세속화 된 과정이 전무한 이슬람 체계와 폐쇄된 제정일치의 국가주의로 봤을 때, 이를 포괄적으로 고려하지 않은 당시 미국 행정부와 정부 관료들에게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물론, 반대로 코란을 포함한 이슬람 교조주의에 대한 세속의 무분별하고 강요된 일치주의는 이슬람 세계 전반에 사고적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이러한 종교적 교조주의자들이 이를 달리 생각해 볼 여지란 거의 희박하다고 봐야 하겠죠. 이러한 교조주의와 이슬람 일반을 분리해 고려하는 것도 의미가 될 수 있겠으나, 테러와 연결되어 있지 않은 많은 무슬림들을 어떻게 정상적인 자유 민주주의 체계와 시장 경제에 마땅히 편입시켜야 했지만 아시다시피 이 점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과거 프랑스와 독일의 사례를 비추어 봤을 때, 사양 산업에 이른 2차 산업의 유지를 위해 경제적 논리로 이들 이슬람인들을 대거 자신들의 사회에 받아들였을 당시와는 다른 이중적 행태를 보이고 있는 유럽 국가들의 표명된 인식 오류는 ‘관용의 기준‘으로 좀 더 개방적인 자세를 보일 필요가 있으나, 이것은 그저 이상주의에 불과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슬람 특유의 세속과 종교의 강요된 일치는 이것 자체가 무슬림인들의 전부일테니, 애초에 자유주의에 근거한 미국인들을 비롯한 서유럽인들과 반대의 이슬람인들인들의 출발점이 어긋날 수 밖에 없는 현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저자는 마지막 결론에서 ‘보편적인 인류애‘와 유럽 사회에서 배타적인 시선을 받으며, 사회 밑바닥층에 있는 이슬람인들에 대한 세계기구 차원의 NGO의 지원을 주장하고 있는데요. 기존에 테러리즘과 매우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는 이슬람인들에 대한 이미지는 전세계의 많은 자유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현실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글 중간에서 저자의 언급대로 자유주의가 극심하게 민주주의와 대립하게 될 수 밖에 없는 문제를 어느 한쪽의 관용 부족으로 몰아갈 수 없듯이, 전 지구화에 따른 탈국민국가주의적 상황에서 사회 내부의 불안 요소를 가중시키는 절대 다수에 의한 소수에 대한 두려움과 혐오는 그 맥락을 이해하면서도 쉽게 개선시킬 수 없는 이중 구조 한가운데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여기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그 사회의 다수 계층이 자신들의 불확실성과 불완전성을 극복하지 못하는 원인을 성찰하지 않고 오로지 반대에 위치한 소수자들에게 그 혐의 내지는 반목을 돌리는 형태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일종의 ‘계몽‘이 필요한 것도 분명해 보입니다. 저자는 글 가운데서 이들 다수가 몰이해하고 있는 불확실성에 대해 면밀히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만 자신과 다른 인종과 계층에 대한 무분별한 공격성과 혐오를 이해하는데 이 불확실성과 불완전성은 조금 설명이 부족하지 않은가 생각해 봅니다. 다만, 앞서 설명했듯이 전 지구화 과정에서 자본 경제와 금융 기법에 의한 배타적인 자유주의에 의한 획일적인 세계적 구조가 이것과는 이질감을 갖고 있는 다소 전통적이고 비합리적인 사회와 인종 계층에게 터무니없는 화살이 가해지고 있다는 점은 분명 이 글의 통찰이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마찬가지로 ‘포스트베스트팔렌적 세계‘와 이 전 지구화가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추론 가능하지만 과연 어떤 것이 먼저였기에 이러한 파괴적이고 폐쇄적인 다수와 소수의 대립을 낳게 되었는지는 실상 면밀히 확인하기는 어렵다고 봐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현재의 비이성적인 타 인종으로 귀결된 전방위적인 혐오는 역시 새뮤얼 헌팅턴의 부정적인 영향이 크다는 것을 다시 한번 이 책을 통해 깨닫게 되었습니다

-종래의 자유주의가 개인의 선택과 합리적 이기심이라는 가치를 기반으로 전반적인 시장 경제주의와 강하게 결탁함으로써, 아마도 이 자유주의에 대한 이슬람인들의 분노는 전 지구화의 수많은 문제들과 더불어, 바로 서방의 것 혹은 서방의 산물이라는 이해와 자신들의 이슬람 전통과 개방성이 결여된 이슬람 전통에 대한 우려로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현재 인도 정치에 대한 한가지 놀라울 만한 사실을 저자는 보고하고 있는데요. 일부 지도자들이 표를 묶어서 판매하고 있는 현실을 직접적으로 책에 기술하고 있었습니다.

여러 나라가 전 지구화 시대에 직면해 국가 경제의 주권을 보장받지 못함으로써 불확실성은 계속 커지고, 이것이 일체의 이방인 집단에 대한 관용의 결핍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근대에 행해진 대규모 센서스 및 국민의 범주화, 민족성에 대한 염려, 국가성에 대한 요구, 지리적 이동성 등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종족상 가까운 이웃이었던 자들의 ‘진짜‘ 정체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과도한 의심을 품게 만들었다

나는 다수가 차지하는 지위에 비해 국가의 종족적 순수성이 완전치 못하거나 총체적이지 못할 때 종족이라는 측면에서 특정한 타자를 향한 극단적인 분노가 생겨난다고 추정한다

자유주의 사상은 처음부터 민주주의와 문제를 일으키는데, 이는 민주주의가 큰 수의 정치적 정당성을 두둔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금융 자본은 이전보다 더 빠르게 이동하며, 더욱 큰 증식력을 갖고 있으며, 더욱 추상적이고, 더욱 공격적으로 국민 경제를 파고든다

부유한 소수자들은 스스로 전 지구화가 낳은 엘리트라는 환상에 부풀어 전 지구화의 중재자로 나선다

서구의 자유주의 사상에서 소수자들에게 부여했던 본래의 긍정적 가치는 근본적으로 절차상의 의미다. 이는 합리적인 토론에 대핟 존중이자 의사 표현 및 발언의 자유라는 좀더 포괄적인 가치의 표시로써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며, 공적으로 중요한 사안에 대해 처벌의 두려움 없이 자유롭게 다른 견해를 말할 수 있는 권리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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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은 과학적일 것이라는 환상
질베르 리스트 지음, 최세진 옮김 / 봄날의책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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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저자, 질베르 리스트는 스위스 제네바에 소재한 저명한 국제대학원인 국제발전학대학원의 명예 교수입니다. 이 국제발전학대학원(혹은 국제 연구 대학원)은 세계 최초의 국제학 단독 전문대학원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그는 전통적 서구 자본주의에 대한 연구로 스위스 내에 명성을 얻고 있고 몇편의 논저들이 이러한 연구 가운데에서 출발한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이 책은 국내에 2013년 번역 출간된 그의 또 다른 논저, ˝발전은 영원할 것이라는 환상˝의 보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또한, 무분별한 성장주의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는 세르주 라투슈의 여러 저작들과 그 인식적 궤를 같이 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원제, ˝L‘economie ordinaire entre songes et mensonges˝로 지난 2010년 처음 출간된 이 책은, 국내에는 2013년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엄밀하게 이 글의 목적은 경제학이 스스로를 ‘경제과학‘이라고 인정하고 다른 어떤 류의 비판을 인정하지 않는 ‘종교적 신성‘에 비견되는 과도한 평가와 오늘날 전반적으로 심각해지고 있는 지구 환경 오염과 사회적 불평등 및 극심한 빈부 격차에 있어서 현재의 경제학이 얼마나 무능한지를 드러내는 일련의 논증을 담은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에, 저자는 현재의 경제학이 단순한 수학 기법과 도표 인용으로 대표되는 환원주의적 설계로 여기에는 현실 자체가 빠져있다는 점은 큰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경제학 자체가 스스로가 규정한 전문학적인 입장으로 인해 ‘그들만의 리그‘가 되고 다른 학문들과 철저히 괴리되어 있다는 점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크게 우려할 만한 부분이라 여겨졌습니다. 특히, 저자는 일상과 세계 체제 전반에 제일주의로 녹아든 이 경제학이 보다 현실을 이해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는 심리학과 인류학 내지는 역사학 차원의 비판적 논증을 거부하고 있는 실정은 과거 에밀 뒤르켐이 ‘사회과학을 비롯한 학문이 그 자체로 인정받기 받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철저한 논증이 필요하다˝는 취지의 주장이 어떻게 이 경제과학자들에게 거부되고 있는지 우리는 이 글을 통해 보다 명확히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최근에 대니 로드릭을 비롯해 현재의 전반적인 경제학 기조에 비판적인 글들을 읽으면서 문득 드는 사유는, 과연 이들 경제학과 경제학자들이 현재의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과 빈부 격차의 문제에 대해 과연 일말의 관심이라도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감이라고 해야 할까요. 사실, 현재의 지구 자원이 무한한 것이 아니라 매우 한정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이처럼 무분별한 상품 생산을 바탕으로 하는 양적 자본주의가 어떠한 결말에 이르게 될지는 상식선에 예측 가능합니다. 물론 경제학 자체가 ‘현재만을 위해 사는‘ 클라이막스적 예찬의 학문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부적절 할 수 있으나,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자면 지구 환경의 변화를 우려하는 사람들과 그 운동을 ‘생태 파시즘‘으로 몰고 가는 것과 현재의 미국 교육계에 대한 ‘지구 환경의 오염 문제와 그 우려스런 미래‘에 반대하는 로비 자체에 막대한 자금을 뿌리고 있는 형태는 많은 생각을 갖게 합니다. 이처럼 위와 같은 현실을 참고해본다면 확실히 현재의 주류 경제학이 기득권 경제에 더 규합되고 나아가서는 자본주의의 무결성을 주장하는데 여전히 몰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추측하게 됩니다. 과거 애덤 스미스가 경제 전반의 현상을 일종의 자연주의적 논리로 귀결해 받아들였다면 이후 멜서스를 비롯한 학자들이 경제적 비관주의로 후대 인류에게 무분별한 생산의 한계를 경고했으나 지금의 후세 학자들은 이것에 대해 별로 큰 관심이 없는 듯합니다. 만약, 이런 인식적 기반을 전제하고 있다면 저자가 강조하는 ˝자본주의를 좀 더 윤리적으로 만들어 보자˝는 주장은 현재의 문제를 상기시키고 그에 대한 점진적인 해결책을 만드는 데 이바지 할 수 있을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 가운데에 한 발 들어서기 위해서는 꽤 심각하고 어려운 결정이 필요하다는 점은 따로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의 4장 교환과 5장 희소성, 6장 효용과 무용, 7장 균형, 8장의 성장 강박은 종래의 경제학이 위와 같은 견고한 이론들을 통해 현실 세계와 자본주의 전반에 이해되고 있는 상황을 경제학 논리 뿐만 아니라 여러 학문적 수단을 통해 비판해 내고 있습니다. 사실, 여기에는 자본주의 경제학이 우리의 전반적인 생활과 인식 수단으로서 강고하게 자리 잡게 됨으로써 발생한 ‘합리적 인간‘이라는 대체 불가능한 원리와 그에 따른 ‘보이지 않는 손‘, ‘합리적 이기심‘ 등이 어떻게 뿌리깊게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져 왔는지에 대한 확실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를테면, 효용 가치 이론이 일반적인 경우보다 과도하게 이해되어 철저한 경제학 논리에 이바지한 점은 문제였다고 보는 관점과 같은 것들입니다. 결국 이 점은, ˝신고전주의 경제학자들이 자신들의 ‘과학‘을 희소성이라는 가정에 바탕을 두고 세움으로써 사회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관점을 도입했을 뿐 아니라, 그러한 관점에 맞춰 사회를 형성했던 것이다˝라고 이해될 정도로 현실 세계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패러다임의 철저한 변화가 과연 ‘공익의 기여‘나 ‘다수의 이익‘에 부합했는지에 대해선 역시 회의적인 시각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애초에 루소가 강조했듯이, 인간자체가 불확실성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본성 가운데서 과연 ‘합리적 이기심‘을 기대할 수 있는지에 대해 우리 모두가 예견하는 바와 같이 부정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경제학은 이러한 우려를 인지조차 하지 않았거나 혹은 일부러 무시했을 정도로 그들 학문 자체에 대해 스스로가 무결성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추측해 봅니다. 바로 이 점이 저자가 주장하고 있는 경제학에 대한 종교적 위상과 같은 범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저자는 현재의 자본주의 경제학이 초래한 전지구적 상황에서 북반구와 남반구의 차별적인 현실을 짚고 있습니다. 최근까지 남반구 국가들에게서 최신의 자본주의적 이행이 이뤄지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북반구 인구들를 위한 농업 생산과 어업물 수출, 1차 광물 생산 등의 종속 상태를 언급하고 이 부분은 현재의 지구 환경 오염과 더불어 자본주의가 초래한 심각한 결과라고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점은 종래의 학자들이 주장했던 부분과 거의 일맥상통하고 소위 대기업과 중소기업간의 하청 관계와 유사한 현재의 북반구-남반구의 경제적 관계가 일정 부분 전지구적 부의 불평등 문제에 관여하고 있다는 점은 여전히 주목할 만합니다. 어느 정도의 경제적 불균형과 차별이 초래될 수 없다는 원만한 가능주의에 경제학이 적극적으로 편입되면서 원칙적으로 이러한 심각한 문제들을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 없게하는 면죄부가 되어 왔습니다. 다시 말하면, 어느 정도의 차별과 부의 불평등은 경제의 자연스러운 일면이라는 점을 들어 오늘날의 매우 차별적이고 극심한 사회적 및 경제적 불평등을 더 심각하게 만든 주범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마치 과거에 복지 제도와 같은 지출 문제에 있어서 매우 손쉬운 ‘신자유주의적 기법‘을 받아들인 정부가 얼마나 신경제 이념에 매몰되어 있는지 파악할 수 있게 합니다. 서방 자본주의 국가라고 불리우는 미국과 서유럽의 경제계와 경제학의 이중적인 로비를 보노라면 일반적인 정부가 시장주의와 경제학의 이익에 균형적인 역할을 기대할 수 없는지에 대해 또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어떠한 대안을 찾을 수 있는지에 대해 저로서도 쉽게 판단내리기 어렵습니다만 저자의 주장대로 경제학이 자신들의 밥그릇을 위해 소위 전문가 집단이라는 허울아래 시민을 비롯한 어떠한 비판도 용인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와 경제학의 관계를 고려했을 때, 어떠한 파급을 끼쳤는지는 따로 말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끝으로, 이 글 4장에서는 인간과 인간의 모든 활동이 경제 논리에 잠식되기 전에, 또한 단순한 인간적 거래가 경제적 수단으로 견고화 되기 전에, 우리의 전통주의적 사회에서는 개인간에 혹은 집단간에 인간적이고 배려하는 미풍 양속과 같은 주고 받음이 있었습니다. 지그문트 바우만과 같은 많은 사회학자들이 자본주의의 전통주의적 환원을 주장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개념일지도 모릅니다. 오로지 경제 거래와 경제 논리로 무장한 시장 자본주의가 현재의 시민을 파편화에 이르게 하고 다수의 가난한 자들이 종래에는 소수의 부유층의 이익에 결합되는 결과를 초래하는 이러한 사회 불균형적 상황에 이를 최대한 방지하기 위한 대안이 필요한 시점이 오고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겠습니다. 결론에서 보이는 저자의 함의대로 우리가 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이외에 다른 경제학을 가질 수 있을지는 무엇보다 이 현실의 본질을 파악하게 되는 시민들이 얼마나 많이 자각할 수 있겠느냐에 달려 있을겁니다. 모든 사회학의 본질적인 기법들이 단순히 시민들이 얼마나 현실 세계에 적응하고 순응하고 만족하며 지내게 할 것이냐에 집중한 것은 분명 아닐겁니다. 슬라보예 지젝과 마찬가지로 현재는 사회학의 새로운 노력이 필요한 시기이며, 얼마나 시민들이 조직적으로 움직일 수 있겠느냐에 우리의 몇 십년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봐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다스베이더와 그 암흑 황제를 지지하는 자들을 얼마나 더 개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도 좀 더 상상력을 발휘할 때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저자가 몇번이고 글에서 강조하고 있듯이 그의 이 책은 명확한 현실적 대안을 제시하기 위한 기법을 설명한 것은 아닙니다. 이 점은 독자들이 이해하고 있어야 하겠죠

-일종의 전작이라고 볼 수 있는 ˝발전은 영원할 것이라는 환상˝이 현재 절판되어 시중에서 구할 수 없는 점은 다소 아쉬운 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어떤 사회가 불평등과 사회적 차별이 급증하는 상황을 계속 용인한다면 그 사회가 진실로 민주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자동차나 휴대폰, 이메일이 보급되기 전에 사람들은 어떻게 살 수 있었을까? 이는 ‘진보‘의 혜택을 부정하려는 게 아니다. 요점은 우리에게 ‘현대성‘의 관행에 순응하도록 강요한다는 사실이다.

실제 현실은 대체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부유한 사람들의 최대 행복을 보장하기 위해 희생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과학적인 지위를 요구하는 경제학자들이 생각해낸 그 모든 모형보다 오히려 경제학처럼 과학적인 지위를 요구하지 않는 ‘비경제학적인‘ 사회과학자들이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는 데 (떄로는 예측하는 데) 훨씬 더 도움이 된다. 사회학과 심리학 (정신분석학은 말할 것도 없고), 인류학이 인간 주체의 합리성에 대해 오랫동안 의문을 제기해 왔다는 사실은 경제학자들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듯하다.

이런 상황은 끔찍한 윤리적, 정치적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다. 도대체 어떻게 끊임없이 불균형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고 한쪽만 이득을 보는 상태로 함께 사는 게 익숙해질 수 있는가?

표준 경제학이 과학적이라는 자만은 불가역적인 생태상의 현상을 설명하지 못하는, 시대에 뒤떨어진 뉴턴 역학을 기초로 한 것이다.

경제학 대체로 과학과 수학에 대한 ‘현대적‘ 신앙으로 설득력을 갖춘 현대적 주술로서 세상의 바깥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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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수적 피해 - 지구화 시대의 사회 불평등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정일준 옮김 / 민음사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다소 혼란스러웠던 20세기가 낳은 위대한 사회학자인 지그문트 바우만은 폴란드 태생의 유대인으로 바르샤바 대학에 교편을 잡고 있던 중에, 폴란드 정부의 박해를 받고 영국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이후, 유동하는 현대와 그에 따른 신자유주의적 이행이 초래한 여러 사회 문제와 경제적 불평등 문제에 천착했던 그는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사회전반에 도덕적 원칙의 필요성의 의무를 남긴 채, 지난 2017년 1월 영국 리즈에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지금에 와서 드는 생각이지만 그의 살아 생전에 노엄 촘스키와 만나 서로간의 의견을 교환하는 작은 대담의 자리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고민해봅니다. 촘스키와 더불어 바우만도 여러 대담집을 책으로 펴내기도 했는데요. 이 세기의 두 지성이 세계와 사회에 대한 서로간의 의견을 나누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굉장하고 의미있는 일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또한, 이 코로나 창궐 시기에 바우만이 살아 있었다면 우리에게 뭔가 올바른 방향을 제시했을 것 같기도 한데요. 아마 많은 분들이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참고로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바우만의 이 글은 2010년부터 2011년까지 있었던 강의를 책으로 엮은 것이기도 합니다. 각설하고, 이 책은 ˝Collateral Damage : Social Inequalities in a Global Age˝라는 원제로 2011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년뒤인 2013년 번역 출판되었으나 현재는 절판된 상황입니다.

제목대로 이 부수적 피해라는 점은 현재 신자유주의적 이행에 따른 세계화의 파행으로 나타나고 있는 심각한 사회경제적 불평등 상황에서 이 도덕적 범주의 사회 바깥에 있는 수많은 좌절된 하위 계층이 직면한 상황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불평등 문제를 꺼내는 자들은 하나같이 그 이유와 변명이 똑같다고 비아냥대기도 합니다만, 여기에서 고찰해 볼 수 있는것은 사회 현상의 문제에서 어떤 불합리하고 모순적인 면이 나타난다면 마땅히 그것을 개선하는데 힘써야 하지만 사실상 시장이 정부의 역할을 대신하면서 시장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준 이후, 우리는 그저 견뎌내는 데에만 온 힘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이에 바우만은 1장에서 ˝경제적 부유층이든 그 반대 있는 계층이든 공통적으로 우려하는 것은 자신의 존엄성이 훼손당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할 수 밖에 없는 세태˝를 강조하고 있는데요. ‘손쉬운 이익‘을 선호하고 이것을 쟁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자본가와 부유층의 배타적인 경제 활동을 통한 전반적인 지위 획득이 그 내면에는 자신의 권리 보장(기본권을 포함한)을 공고히 하고 수많은 선택의 문제에서 자원의 우위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바우만은 이 점에 대해서도 ˝현대의 일개 개인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삶을 선택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일반적인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이 우리가 스스로 선택에 대한 수월하고 만족스런 자원을 쟁취하는 건 현재로선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며, 이러한 ‘정치적 자유가 전무한 경제적 자유‘는 모두에게 가능하지 않다는 것은 경제학이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거나 반대로 이를 은폐했다고 봐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 책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바우만은 그 뿐만 아니라 모두가 바랬던 현대의 근본적인 의미란, ˝임마누엘 칸트의 정언 명령이 함축하는 바와 같이, 우리가 우리의 양도할 수 없는 재능인 이성을 발휘할 때, 우리는 도덕적 판단을 제기할 수 있고 자연법으로서 보편적으로 따르고 싶은 종류의 행위를 유발할 수 있다˝는 취지의 가능성을 8장에서 언급하고, 이러한 인간 진보의 희망이 현대의 출발 시점에서 그리고 상당한 부분에 걸쳐 전개되기를 바랐던 인간사의 모습처럼 되지 않았다는 것이 우리의 불행일 것입니다. 칸트가 말하는 이성은 자신 뿐만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에게 모두가 함께 나아갈 수 있는 방편이자 의무였지만 ‘현재의 시장은 거의 불의에 가깝습니다.‘ 과거의 포드주의적 자본주의의 이행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미 우리는 총체성과 사회와 공동체라는 개념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에 밀턴 프리드먼은 시장이 다 알아서 해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으나, 개인의 합리적인 이기심의 정도와 범위라는 것이 인간의 복지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자율 조절될 것이라는 믿음이 거의 40여년간 사회를 지배해 왔지만 그것의 결과는 어떤식으로 나타났는지는 거의 명백해 보입니다. 이와 같이, 바우만은 4장에서 ˝우리의 (공중의) 태도는 사실상 매우 쉽게 조작 가능하다˝고 단언하고 사회의 진실이라든지 이 세계가 돌아가는 작동원리의 진정한 이면을 감추는 데 몰두하는 세력은 마땅히 그들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현재의 경제학이 이러한 흐름에 사실상 동조한 것은 부정하기 힘들다고 볼 수 있을겁니다.

이러한 시장 우위 시대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부분은 시장에서 정치가 제거된 이후, 국가의 책임은 그만큼 자유롭다는 점입니다. 바우만은 이에 대해 시장이 시민의 안전망과 같은 이념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게 되었지만 이 이면에는 분명 국가가 이러한 일들에서 손을 떼기로 결정되었지만, 마냥 결정 자체로 끝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국가가 이를 다시 회복해야만 우리가 국가의 의무를 요구할 수 있으며, 바우만의 인식대로라면 ˝인간이 불활실성과 취약성˝을 갖고 있는 본성의 존재라면 이를 등한시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천적인 문제들의 틈바구니에서 - 이를테면 유럽의 이슬람 이주민 문제, 첨예한 경제적 불평등 상황에서 부수적 피해로 국한지어질 하위 계급들, 아무리 안전을 부르짖어도 마땅히 충족되지 않는 사람들- 오로지 국가만이 이를 (그러니까 안전과 평안) 보장할 수 있을 겁니다. 사실 바우만이 ‘유동하는 현대‘를 개념화했던 것은 19세기를 넘어 정착되었던 국민국가 개념의 강제적 탈출과 자본주의의 꽤 강압적인 이행이 국가의 기능과 의무를 점차 제거했고, 이에 권력이 정치를 배제하면서 동조하기도 했습니다. 이 부분도 역시 현재의 ‘정치없는 권력‘에 대한 비판을 바우만은 강도높게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습니다.

끝으로, 바우만의 유작인 ‘레트로토피아‘에서 ˝상대방에 대한 무조건적인 책임˝을 우리와 같은 남은자들에게 그는 의무의 유산으로 남기기도 했습니다. 18세기 계몽주의 시기가 꽃을 피웠지만 이내 애덤 스미스를 오역한 이들이 도덕적 전통까지 퇴출시켜왔던 그 결과가 현재의 모습입니다. 자본주의에 의해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가 제약되어 왔다는 것을 새삼 언급하지 않더라도 단순히 평등의 문제 뿐만 아니라 지금의 고삐풀린 시장 자유의 이행이 과연 금융 위기 하나만으로 끝날지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테러의 방지라는 일념 하나로 미국에서 이행된 시민의 무차별적인 기본권 침해와 정당한 시민권을 보유한 시민들조차 정보당국에 의해 신변이 위협받는 상황은 개인이 보유한 자원의 문제라는 측면에서 주변부로 갈수록 권력은 멀어지는 것과 같은 폭력적인 배제의 정치를 낳게 되었습니다. 부수적 피해 취급을 당하는 사람이 있는 사회를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는 공감대를 확산시키고 그것에 대한 어떠한 죄책감도 갖지 않게 하는 것을 포함한 이 반사회적인 움직임이 결코 근절되지 않는 이유에는 아마도 그 합리적이라는 이성이 실종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아마도 바우만은 이러한 자본주의적 경제의 양적 확대만으로는 이러한 현상을 시민이 올바르게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이 책을 내놓은 것 같습니다. 앞선 괴이한 흐름의 여러 원인들을 고찰해보면서 바우만은 8장에서 카를 슈미트를 지목하고 있기도 한데요. 이 예외 상태를 향한 고결한 결단주의는 아마도 현재의 일부 권력층에게 양심의 회피를 위한 근거가 되지 않았나 추정해 봅니다. 이와 관련해선 따로 글을 빼서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거의 7시간에 걸쳐 이 책을 정독했는데, 레트로토피아도 그랬지만 역자의 번역은 뭐랄까 쉬이 눈에 잘 들어오지는 않았습니다.

-장 자크 루소가 인간의 불확실성을 강조했던 봐와 같이 이 글 전반의 해석 수단은 바로 ˝인간의 불확실성과 취약성˝이기도 합니다.

-바우만은 종전의 ‘복지 국가‘라는 개념 보다는 ‘사회 국가‘라는 개념을 새로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정치권력의 이러한 처방은 오늘날 과거로 후퇴하고 있다. ‘복지 국가‘ 제도는 점진적으로 붕괴되거나 폐지되고 있고, 기업 활동과 자유로운 시장 경쟁과 그것의 비참한 결과에 부과되어썬 제약은 하나씩 제거되고 있다.

인간의 취약성과 불확실성은 모든 정치 권력의 기호다

현재는 전례없는 탐욕과 광신적인 자본주의의 시기이다

존경받는 도덕철학자인 레비나스는 "사회는 도덕적 충동이라는 무기이자 부담을 가지고 있으며, 상대방에 대한 무조건적인 책임을 떨쳐버릴 수 없다"고 강조했다

소비 시장은 양심의 가책을 완화하거나 심지어 눌러 버릴 수 있으며 그렇게 하고자 한다

윤리적 책임은 인간 유대를 구축하는데 주요한 재료이자 수단이다

자본주의는 인간 욕망의 잠재적 무한성에 판돈을 걸었으며, 그 무한한 성장을 만족시키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이러한 시장 자유주의적 이행에서, 국가는 자유시장의 논리 (보다 정확히는 논리의 결여)에서 파생되는 취약성과 불확실성에 대해 책임이 없다는 태도를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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