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적 순간 - 역사로 미래를 전망하다 북저널리즘 (Book Journalism) 95
강원국 외 지음 / 스리체어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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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저의 공저자 중 한 사람인, 강원국 작가는 2000년 청와대 공보수석실 행정관, 2003년 대변인실 행정관을 거쳐, 2004년부터 참여정부 임기 말까지 노무현 대통령 연설담당 비서관으로 일했습니다. 현재는 소통할 수 있는 말과 글을 위해 고민하고 있으며, 또한 전북대학교 기초교양교육원 초빙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진보적 사회학자이기도 한 김동춘 교수는, 특히 과거 한국 현대사에서의 독재 폭력과 냉전 이데올로기적 사고, 그로인한 무고한 희생들을 다루면서, 한국 정치가 나아갈 길에 천칙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의 논저 중, "자유라는 화두", "근대의 그늘". "전쟁과 사회" 등은 그의 사상을 대표적으로 드러내는 글이기도 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최근에 출간한, 한국 사회의 "시험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이 눈에 들어오기도 했는데요. 그런 연유로 어떤 언론에서는 이런 그를 단순한 교수로 취급할 수 없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숙명여대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홍성수 교수는 한국여성민우회 법 부문 자문위원이면서 페미니스트를 지향하고 있는 학자이기도 한데요. 특히 그는 성소수자들의 인권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고 시민들의 인권 문제에 있어서도 지속적인 발언을 해오고 있습니다. SNS를 통한 사회적 발언의 활발한 활동은 그를 다른 강단 지식인과는 또 다른 의미의 대중 지식인으로 자리매김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박재필 나라스페이스 대표는 과거 고등학교 시절의 열망을 담아 대학에서 '세티'라는 인공위성 동아리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런 연유로 그는 대학 졸업 후에 '큐브 위성'의 상업화라는 목표로 세계 시장으로 진출하려는 스타트 업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소형 인공 위성의 기술적 집약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이런 노력들은 국위 선양에도 얼마간 기여하는 활동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대두될 우주 개발과 우주 산업 전반이 우리 나라에게 중요해질 것이라는 점은 모두가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을 겁니다.

여기의 5가지 주제의 짧은 글들은 우리 나라가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일종의 제언들을 담았습니다. 우선 대통령의 현란한 연설만으로는 정치가 합리적으로 이행되지 않는다는 것으로 시작하는 강원국 작가의 글은 "민주주의는 말의 정치"라는 서두의 첨언과 상당히 대치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런 정치의 여러 문제들 가운데 서로를 명확한 적으로 인식하는 '극단화'는 정치 전반을 충분히 병들게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에 누군가는 '회색주의자'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더라도 대립되는 양자가 그 와중에 대화나 합의를 도출할 수 있도록 설득의 언어가 시급한 시점인데요. 이것은 달리 말하면 정치에 있어 최소한의 금도가 사라진 시대를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급격한 미디어의 변화, 말이 서로를 공격하는 무기가 되는 시대에서 과연 정치란 무엇인가를 우리는 끊임없이 되묻기도 합니다. 또한 정치적 언어의 변질과 정치 체제 전반의 왜곡은 우리 민주주의를 어디로 이끌지도 이 점도 매우 궁금합니다. 


그리고 헌법학자는 시민의 권리, 혹은 호혜적 평등과 같은 침해 받지 않는 기본권을 사회가 마땅히 이를 수용해야 된다고 운을 뗍니다. 여기에 법은 말 그대로 '법학'으로서의 학문적 접근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시민의 정치적 의사를 포함한 보편적 권리 요구와도 관계가 깊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 자유에 대한 논법도 이러한 맥락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여기 한 명의 법학자는 동등한 시민의 권리로서, 사회적 약자이기도 한 성소수자들의 차별금지법을 우리 사회가 마련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다만 가부장적 맥락의 성역할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시민들이 여전히 많은 실정이지만 그럼에도 이들 소수자의 권리 역시 우리가 어떠한 편견 없이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는 것은 분명한데요. 이 차별금지법의 제안은 과거 노무현 정부때 개념화 되기는 했지만 20여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시민들의 성숙도도 깊어졌고, 또한 전세계적으로도 이 차별금지법에 대한 공감대가 나날이 확산되기도 했습니다. 결국 법을 깊게 연구한 학자 뿐만 아니라, 이 법이 모두를 평등하고 자유롭게 하는 원초적 기반임을 우리가 인식하고, 어떠한 이유에서든 간에 시민이 같은 시민을 차별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홍교수의 언급대로 이런 문제에 보수적인 일본도 이 차별금지법에 대해 한 첫걸음을 내디뎠다고 볼 수 있기에 이제 우리도 정치권, 시민들 그리고 지식인들이 이 평등한 조치와 관련해 심도 있는 논의를 시작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우리 사회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정치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민주화를 구축했습니다. 그야말로 헌법이 실질적으로 민주주의를 소위 보필하는 체제가 도래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럼에도 과거의 비극적인 제주 4.3 사건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부 인사들이 잘못된 판단과 또한 정치적 이익을 노리고 이를 왜곡하고 있습니다. 저는 다수의 시민들이 이런 자들을 걸러낼 수 있는 명확한 도덕적 분별력과 모두를 위한 정치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명확히 인식하고, 애써 이룩한 민주주의가 거짓 선동에 병들지 않기 위한 노력이 분명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분별 있는 다원주의는 그만큼 민주주의에서 중요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로버트 달이 왜 이러한 주제에 평생의 노력을 기울였는지 어느 정도 짐작이 됩니다. 우리 사회는 이미 과거 냉전 이데올로기의 유산인'좌파 빨갱이'라는 유사 매카시즘을 여전히 일소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좌파 빨갱이는 표현의 자유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저 저열한 자기 본성을 드러내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민주주의는 시민들 간의 자유로운 정치적 토론과 다른 정치적 지향을 가진 세력들이 서로를 균형적인 파트너로 인식하고, 이런 기반이 된 체제를 마땅히 지향할 수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냉전 이데올로기 따위가 민주주의에 우선하는 사회는 (자본주의식으로) 모두에게 이익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은데요. 그런 의미에서 여기에 등장하는 '디지털 매카시즘'에 대한 우리의 면밀한 감시가 무엇보다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매일 아침 신문 1면을 장식하는 정치인의 말과 신념은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설득할 때 상대가 어느 정도의 수용성을 가졌는지를 면밀히 살피면 좋을 것 같다. 누군가에게 타인의 생각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건 타인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그와는 다른 역사와 마음이 켜켜이 쌓여서다.

오히려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 같은 편끼리 뭉치는 것, 무리가 아니면 배척하는 것을 꾸준히 학습했다.

민주주의는 시민의 동의를 기반으로 굴러가는 체제다. 다시 말해, 정치인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말을 통해 시민을 설득하는 것이다.

차별금지법은 "당신이 어떤 속성을 가졌던, 지위가 무엇이건 간에 사회에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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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스퀘어 을유세계문학전집 21
헨리 제임스 지음, 유명숙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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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제임스는 미국 뉴욕 주의 올버니 출신의 은행가이자 투자자였던 부친과 오래전 뉴욕시에 정착했던 부유한 가문 출신인 모친 사이에서 자라납니다. 그의 양친은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출신이었습니다. 그가 한 살이 되기 전에 그의 부친은 뉴욕의 워싱턴 스퀘어를 마주보는 워싱턴 플레이스에 있던 집을 처분하고, 가족 전부를 한동안 영국 윈저 그레이트 파크에 있는 별장으로 이주시킵니다. 가족은 1845년에 뉴욕으로 돌아왔고, 헨리는 올버니에 있는 친할머니 집과 뉴욕 맨해튼에 있던 본가 사이에서 어린 시절 대부분을 보내게 됩니다. 이후 1855년과 1860년 사이에 제임스 가문은 아버지의 즉흥적인 관심과 출판 사업에 따라 런던, 파리, 제네바, 불로뉴 쉬르메르, 본 등을 여행하다 자금이 부족해지면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1862년에 비로소 헨리는 정규 교육 과정으로 하버드 법학대학원에 다녔으나, 곧 스스로 자신이 법 공부에 소질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그런 연유로 보스턴에서 그는 작가이자 비평가였던 윌리엄 딘 하월스와 마찬가지로 작가이자 평론가였던 찰스 엘리엇 노턴과 교류를 지속하게 됩니다. 그리고 1871년에 이르러 비로소 그의 첫 단편 소설인 '부단한 경계 Watch and Ward'가 출간됩니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문학적 명성은 당시 미국 독자들뿐만 아니라, 유럽의 유구한 독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요. 특히나 '리얼리즘 소설'의 개척자로 불리며 당시 소설의 구성을 획기적으로 개선했다는 평가를 받게 됩니다. 그럼에도 그의 개인적인 생활에서 주위에 지속적인 압박에도 불구하고 끝내 평범한 결혼에는 이르지 못하게 됩니다. 언뜻 쉽게 믿지 못할 내용이기도 하지만 그가 섹스에 대한 신경질적인 두려움이 있었다는 평가는 실로 충격이었는데요. 그럼에도 주변에 많은 여성 지인들과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언어로 서신을 비롯한 간접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부분은 그에 대해 뭔가 아이러니한 감정을 갖게 합니다. 그런 연유로 그의 작품에서 대체로 비극적인 요소를 포함하는 사랑의 본질은 어쩌면 이런 배경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따라서 그의 작품들 중,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 장편은 원제, "Washington Square"로 지난 1880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09년 6월 번역되었고, 제가 구입한 판본은 2019년의 초판 2쇄였습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캐서린'은 의사이기도 한 부유한 아버지 밑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자라납니다. (캐서린이라는 여주인공의 작명은 작가인 헨리 제임스의 실제 여동생의 이름과 동일한 것이기도 합니다) 특히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을 제외한다면 그녀 삶이 크게 굴곡 없는 원만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녀는 아버지에게 있어 대체로 순종적인 딸이었고, 한 집에서 살고 있는 '미망인'인 둘째 고모와도 별반 갈등 없이 잘 지내고 있는 편이었습니다. 그러다 캐서린은 사촌의 결혼 상대였던 남자의 종형제인 모리스 타운젠드라는 청년을 우연히 파티에서 만나게 되는데요. 작가인 헨리 제임스의 특별한 언급대로 이 타운젠드라는 청년은 남의 '환심을 사는데' 탁월한 재주를 갖고 있는 일종의 나르시시즘이 가미된 캐릭터이기도 합니다. 작품의 스토리 전개에 있어 모리스의 외모에 대한 일관된 찬사는 여러 곳에서 보이기도 하는데요. 그만큼 그는 외모와 화술에 대해 남다른 자신감을 갖고 있는 캐릭터이기도 합니다. 이런 그와는 상반되게 여자로서 적절한 매력이 보이지 않아, 작중에서 거의 '못생겼다'고 언급되기까지 하는 캐서린에게 직접적인 애정을 내비치는 모리스는 어느 정도 숨겨진 의도가 있었는데요. 그는 얼마간의 돈을 유럽 여행과 자신을 위해 거의 소모했고, 혼자 자식들을 키우는 친누나의 집에서 얹혀 살고 있는 실정이었는데요. 그런 가운데 우연히 관심을 가진 캐서린이라는 여자가 작고한 모친로부터 거의 1만 달러에 이르는 유산을 상속 받았고 더불어 여전히 왕성한 진료를 통해 수입을 올리고 있는 부친의 존재, 그리고 미망인인 여동생마저도 스스럼 없이, 건사할 수 있을 정도로 유복한 집안이라는 설정은 어느 정도 극의 전개를 예측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평범한 외모의 또래 청년들과 대비되는 화려한 외모와 물 흐르듯 막히지 않는 언변을 갖고 있던 모리스는 그야말로 '본능적인 감각'으로 캐서린에게 돈 냄새를 맡게 됩니다. "처음부터 호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내는 것처럼 쉽게 사랑을 언급하는 남자를 경계해야 한다."는 오래된 금언은 보통 여지가 없이 들어맞기 마련인데요. 캐서린에 대한 모리스의 일방적인 관심과 애정 표현은 이러한 것에 달리 면역이 없었던 순수한 처녀의 눈이 멀게 되는데요. 연애 경험이 전무한 평범한 여성이 오지랖 넓은 고모라는 캐릭터와 만나 사건의 전개는 급격한 양상을 보이게 됩니다. 이 대목과 관련해, 작중 '페니먼 부인'에 대한 헨리 제임스의 인물 조성이 정말 탁월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왜냐하면 남편을 잃고 그저 소일 하는 미망인이 조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이 커플 사이에서 적극적인 '연애 거간꾼'의 역할을 자임하면서도 그 결과가 분명 조카에게 이롭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을 해볼 수 있음에도 그것에 전혀 아랑곳 하지 않는 '천연의 인물'을 창조해 낸 것은 한편으론 작가의 역량이라고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모리스 타운젠드가 이 페니먼 부인과의 대화에서 언급한 '도덕적 편안함'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금 고찰해 보게 되는데요. 사실상 자신의 안락이라는 목적을 위해, 당시 나날이 경제적으로 팽창하고 있던 신생 국가 미국의 사회적 단초를 어떻게 보면 앞선 욕망과 연계한 것이기도 한 데요. 이는 사익에 기반한 행위 자체에 있어 기본적인 양심의 견제를 유명무실하게 만드는 일종의 자기 합리화로도 읽혔습니다. 그래서 이 '도덕적 편안함'이라는 작품을 관통하는 비판적 주제 의식이 이처럼 의미심장한 것인데요. 이처럼 그가 관심을 갖고 있는 여인의 부유한 부친이라는 그다지 매혹적이 않은 문제와 더불어, 마치 먹잇감처럼 노리고 있는 오로지 재산에 대한 관심 뿐인 그 지독한 이기심이 모리스라는 인간 자체와 비판적 이성을 결여한 속물 근성의 페니먼 부인과 그리고 그를 처음부터 경계했지만 결국 자신의 어리석음 만을 폭로한 부유한 의사는 결국 나중에 있을 복선을 위한, 점층된 갈등의 근본적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즉 이 세 인물을 여주인공인 캐서린에게 절묘하게 배치하여 일정 부분 어두운 시대상과 그로 인한 인간 관계의 본질을 작가 자신의 회의적인 시선으로 명확히 드러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고래로 사랑을 일종의 조건으로 삼아 순진한 사람을 소위 '자신이 원하는 감정의 노예'로 만드는 의도 자체는 그 당사자에게는 마치 지옥과도 같은 경험을 초래할 겁니다. 다만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는 주변인들에게 자신과는 일절 상관없는 그저 인생의 귀중한 경험 정도로 관심을 끊을지도 모르겠는데요. 진정한 사랑도 아닌, 노골적인 이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위장된 사랑이, 한 사람의 삶을 파괴할 수 있는 것은 물론, 그 사람을 둘러싼 환경과 그 주변의 관계에서 스스로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완연히 다른 사람으로 변질될 수 있음을 이 작품은 이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욱이 이 작품에서 저 사랑 놀음을 입에 달고 있는 모리스뿐만 아니라, 그녀의 잘난 아버지 역시 이러한 파탄에 한 발을 걸치고 있기도 한 데요. 특히 이 시대에서 누구보다 고도로 교육 받은 지성인이자 의사인 이 사람은, 많은 시간을 자신의 서재에서 보내면서 스스로의 삶과 인간 본성 자체에 내밀한 천착, 그리고 그런 사유를 통해 세계를 직관한 그가, 딸을 거의 '놀이 상대'로 밖에 여기지 않았다는 사실은 실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는데요. 이후 모리스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굳건히 하고 그런 책임을 다하고자 하는 자신의 딸을, 경멸하고 과소 평가하고 비웃는 과정이 점차 심화되면서 앞선 언급한 그의 장점들이 거의 쓸모가 없는 것으로 밝혀지기도 합니다. 자신의 예측대로 순진한 딸을 돈으로 여기고 접근한 모리스의 의도를 간파했으면서도 일생에 처음 경험한 그 '사랑'에 인질이 된 딸을 아버지로서, 자애하고 사려 깊은 방법을 거의 도외시한 채, 그저 강압적인 언설과 비하와 모멸감을 가하는 방식으로 일관된 것은 헨리 제임스 특유의 인간에 대한 회의적 분석으로도 읽히게 됩니다. 특히 딸과 함께한 계산적인 유럽 외유에서, 캐서린을 향한 성마른 태도와 일방적인 언사, 그리고 비꼼과 비난은 그녀로 하여금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는 상황에서 그의 보호를 즐길 권리가 없다"는 식으로 자포자기하게 만듭니다. 이 대목에서 실로 비정한 부정이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소위 자신의 의사와 그 의지 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실로 배려와 성찰이 결여된, 근본적으로 영악한 인간의 말로는 이처럼 극중에서 어느 정도는 예견되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결국 딸의 진정한 행복이 아닌 자신의 주장과 의지를 관철시키고 그것을 통해 자신이 승리했다는 얄팍한 감정에만 취해 행동한 결과가 과연 어떠했는지는 후반부에 명확히 드러나게 됩니다. 

이렇게 자신의 요구만 강압적이었던 아버지와 그녀의 재산에만 관심이 있었던 위선자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캐서린의 삶은 완전히 뒤바뀌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녀가 자신의 삶을 '관조했다'고 봐야 하는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원초적인 삶의 열정과 충만한 애정에서 완전히 배제된 채, 주변 사람들로부터 스스로를 존재감이 옅어진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슬픈 일일 겁니다. 캐서린이 항유하고자 했던 아주 평범한 삶의 열망과 누군가를 사랑하고 때론 사랑 받고 싶어하는 평범한 기대가 앞선 두 사람에 의해 완전히 부서졌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작가인 헨리 제임스는 결국 이 작품을 통해, 독자들에게 어떠한 교훈을 남기고 싶었는지는 다소 불분명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극이 전개될수록 제가 기대했던 여주인공의 행로가 완전히 예상을 벗어나 개인적으로는 꽤나 복잡한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요. 어떤 수사를 들이밀던 간에, 순수한 사람의 미래를 파괴하기에 이른 초기 자본주의적 근대로 대표 되는 이기심과 바로 이런 인물들과의 폭력적 교차는 단지 소설의 얄팍한 주제로 치부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진심이 결여된 행동이 타인의 인생에 부지불식간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섬뜩한 교훈을 우리에게 안겨줍니다. 저는 이 작품을 일독하고 나서, 일부 독자들이 다소 답답하게 여긴 여주인공의 체념과 가까운 선택에 쉽게 감정이입을 할 수 없었다는 후기들을 접하기도 했는데요. 아마도 이것은 우리가 스스로의 삶 속에서 사랑을 매개로 한 관계 자체에 그만큼 더 영악해졌거나, 아니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충분히 고민해야만 하는 '진정성'에 대해 역시 대수롭지 않게 판단했을 수도 있습니다. 결국 이는 흔한 남녀 사이에서 온전치 않은 애정이 그릇된 의도대로 한 사람의 일생에서 지울 수 없는 상흔으로 남게 되었는데요. 이 작품을 그저 에밀 졸라 류의 인간 세계의 극단적인 희극 정도로 치부해야 될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인간의 회의적이고 음울한 본성 자체에 대한 경고는 결코 허위나 거짓 따위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캐서린을 두고 이어지는 각기 두 캐릭터의 이기적인 본성과 그로 인한 비뚤어진 욕망, 그리고 그것이 배경이 된 작위적인 결과물 자체는 작가의 일관된 주제 의식이기도 한, 내재적인 회의주의와 극사실주의와 맞물려, 인간의 불확실성과 사람을 도구적 이익의 수단으로 추락시킨 왜곡된 사회 풍조를 이 작품에서 여실히 드러낸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스포일러가 될까봐, 가급적 언급하지 않으려 했지만, 캐서린과 그의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서로를 향해 건네는 후반부의 그 의미심장한 대화는 아마도 제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습니다.      






모리스 타운젠드는 강렬한 에너지가 느껴지는 인물로, 놀라운 풍자의 힘을 가졌고, 날카롭고, 단호하고, 똑똑한 성격의 젊은이라 요령 있게 대처해야 할 것 같았다.

그녀가 물려받은 재산은 두 명의 분별있는 사람을 먹여 살리기에 충분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고, 빈털터리라 하더라도 괜찮은 남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구혼자가 있다면 그의 개인적 자질로 평가할 용의가 있었다.

모리스는 사양을 모르는 젊은이였고, 보르도산 적포도주가 고급이라는 사실에 충분히 고무되었다.

"쉽게 단정한 것이 아니란다. 30년간 관찰로 세월을 보낸 결과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거야. 그런 판단을 하루 저녁에 할 수 있기 위해 나는 서재에서 평생을 보냈다."

그녀는 허세를 부릴 재주가 없었고, 타운젠드가 그녀에게 보이는 관심에 아버지가 반대하는 눈길을 보낸다고 느끼자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처럼 보이는 우연이 불편할 따름이었다.

"모리스 타운젠드가 향락을 위해 자기 재산을 써버렸다면, 네 재산도 써버릴 것이라고 믿을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본다."

고모가 1년 내내 그녀의 연인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이 그녀의 마음을 짓눌렀고, 그 젊은이를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양 그를 설명하고 해석하는 것을 듣는 일도 유쾌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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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본 미국 정치 - 선거와 양극화 그리고 민주주의
박홍민.국승민 지음 / 오름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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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저의 공저자 중 한 사람인 박홍민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석사를 마칩니다. 이후 미국 워싱턴 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앨라배마 주립 대학을 거쳐, 현재는 위스콘신 주립 대학에서 정치학과 부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미국의 정치제도와 미의회 구조, 극단화 된 당파 정치 등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데요. 이에 그는 미국 하원과 상원에 대한 여러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공저자 중 한 사람인 국승민 교수는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그리고 도미하여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디에이고 (UCSD)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존 국으로도 알려져 있는데요. 현재 그는 미시간 주립 대학의 정치학과 조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국 교수는 미국 주택 임대 시장에서의 주거 분리에 대한 영속화와 공공 정책이 어떻게 인종 및 성 불평등을 강화하는지, 그리고 경제적 불평등이 어떻게 인종에서의 양극화를 심화시키는지 연구를 지속해 오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선거와 양극화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부제와 함께, 지난 2023년 9월 국내에 출간되었습니다.

모두가 익히 알다시피, 미국은 우리에게 있어 뗄레야 뗄 수 없는 동맹 관계이자, 외교 전반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는 패권 국가이기도 합니다. 이에 두 공저자들은 우리가 미국의 국내 정치를 면밀히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 미국이라는 나라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주장을 서두에서 밝히고 있는데요. 이와 동시에 "미국은 완벽에 가까운 선진 민주주의가 아니다."라는 거의 진실과 다름없는 분석을 내리면서, 현재 미국 정치가 얼마나 심각한 병폐를 떠안고 있는지 이어지는 논증을 통해, 증명되고 있었습니다.

연방 정부의 수장인 대통령을 선출하는 미국의 선거제도는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상이한 측면이 존재합니다. 일종의 간접 선출이라는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의회에서의 상하원 양원과 특히 연방대법원의 지위는 미국 정치의 특수성을 여실히 드러내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더욱이 미국은 선거에 있어서 만큼은 선거 운동과 정치 자금에 대해선 거의 예외적으로 제한이 없는 국가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현재 미국 정치를 인식하는 소위 '금권 정치'에 대한 폭넓은 인식은 의회에 로비하는 로비스트들의 존재와 선거를 통해 막대한 돈이 오고가는 그런 시스템으로 이해해 볼 수 있는데요. 특히 이 글의 전반적인 논증 가운데에서 제가 놀란 부분은 상당수의 미국인들이 "'돈'은 부정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의견을 표시하는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라는 선거에서의 막대한 자금 투입에 대해 별반 거부감이 없이 언급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세계 민주주의의 동향과 그것을 나타내는 현격한 지표에 있어, 지난 2016년 미국 대선은 특별히 중요한 선거이기도 했습니다. 극단적인 인종주의자이자 전형적인 포퓰리스트가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듯, 미국의 기존 정치 무대에 등장한 것도 충격이거니와, 그동안 소소한 문제는 분명 있었지만 그럼에도 최소한의 정치적 건전성을 답보하고 있었던 미국 양당 정치가 단순히 공화당이라는 일개 정당이 극단주의적 경향을 띠는 것을 넘어, 로버트 B. 탈리스의 분석대로 이 당(공화당)이 "트럼프에 의해 철저히 장악되었다"는 점으로 대변되는 양상은 현 미국 정치의 암울한 모습을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저는 무엇보다 공당(共黨)이라는 공화당이 스스로 내부에서의 자정능력을 여실히 잃었다는 점을 무엇보다 비판하고 싶습니다. 이를 간단히 말하자면 이 시대의 미국 민주주의는 소수의 극단적 포퓰리즘에 명확히 포획되었다는 점이 바로 본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반대로 이 글 3장에서 분석대는 바와 같이, 민주당은 1980년대 이후, 고학력 전문직 종사자와 소수 인종의 연합체로 변질되었는데요. 제가 폭스 뉴스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 레거시 미디어가 주구장창 미국 민주당을 저렇게 공격하는 연유에는 소위 소수 특권 정당이라는 정치적 서사가 그 배경에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과거 민주당의 전통대로 이 당은 더 많이 평범한 노동자들을 대변해야 했지만 오늘날 정치적 지지 기반의 변화는 그만큼 녹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분석대로 도널드 트럼프가 재선에 실패하고, 조 바이든이 연방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던 건, 평범한 미국 중산층이 다시 민주당 대선 후보에 표를 던진 결과로써, 그 의미하는 바가 가볍지 않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런 양당 정치의 궤멸적 분화라는 현실 투영보다는 주 의회를 장악한 정당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선거 제도를 주도하는 '게리멘더링'과 다수의 미국 유권자들이 자신이 정당한 유권자임을 증명하는 '유권자 등록 제도 voter registration'가 사실상 투표를 제약하는 행정 처분으로 기능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지금도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았는데요. 특히 후자의 선거인명부 등록을 위한 신분 등록 제도가 흑인과 저소득층에게 분명히 번거롭고 불리한 측면이 있어, 각 주에서 공화당이 이를 정치적으로 조장해 왔다는 증거들이 드러나는 부분은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세계 민주주의의 맏형'이라고 불리우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이러한 기본적인 문제조차 제대로 처리 못하는 지에 대해 느끼는 깊은 실망감과 그런 환멸이라고 해야 할까요. 단순히 복잡한 다인종 체계와 지역에 따라 행정 기반이 미약하다는 변명 따위로는 쉽게 넘어갈 수 없는 지점이었습니다. 저는 이 언급에서 현재 미국 내부에 유색 인종을 향한 뿌리 깊은 인종주의를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는데요. 정치적 이익 만을 위해 미국 공화당이 주도하는 백인 유권자들이 아닌 같은 미국 시민권을 가진 유색 인종들의 투표를 사실상 방해하는 역겨운 행태는 국가 내부의 병폐가 어느 지경에 이르렀는지 마찬가지로 충분히 이해하게 됩니다.  

더욱이 양당을 견고하게 지지하는 미국 시민들의 극단적 정치 성향은 이미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2020년 대선에서 40퍼센트에 이르는 공화당 지지자들이 당시의 선거가 '부정 선거'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는 점도 예상치 못한 충격으로 다가왔는데요. 아마도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극단적 포퓰리스트인 도널드 트럼프는 자신의 지지자들을 향해, 의회 불법 점거를 대놓고 획책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자가 어떠한 기소도 없이 공화당의 다음 대선 후보로 나서고 있는 현실은 미국 민주주의가 얼마나 자정 능력을 잃어버린 상황인지 이를 반증한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또한 12장에서 저자들은 앞선 정치적 양극화에 대한 증거로써, 많은 미국인들이, "감정적 양극화가 더 심해져서 객관적인 사실에 대한 해석조차도 자기 정당이 선호하는 방향에 부합하게 왜곡시키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비판하고 있었는데요. 이것은 작금의 우리 정치에 있어서도 별반 다를 게 없는 모습이라고 여겨집니다. 특히 사실을 더욱 비틀어서 정치 논리화 하는 일련의 궤변적 논법들은 평론가들 뿐만 아니라 일반 지식인들에게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부끄러운 행태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연방대법원의 문제도 꼬집지 않을 수 없는데요. 익히 알려진 바대로 과거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자신의 주도적인 정책을 위해 연방대법원에 개입하고자 했으나, 같은 당 의원들의 반대로 무산된 바가 있습니다. 현재 9인의 대법관으로 구성된 연방대법원은 본디 미국 사법 제도가 판사의 정치적 결정이 중요한 맥락으로 작용하는 판례 중심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는 대륙법 체계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조직에서 대법관들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사회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판결이 다수 시민들의 요구와는 상관없이 '소위 법관의 양심'으로 판결되고 있는 점은 백번 양보하여 넘어가더라도, 이러한 판결들이 사회적 파급의 고려 없이 이뤄지고 있는 상황은 상당히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약간 다른 맥락이지만 국민의 투표로 구성된 의회에서 제출된 법안을 '자격 시험'이나 그에 준하는 교육 과정으로 선발된 사법 관료들이 '헌법이라는 이름'으로 법적 구속력을 행사하는 일이 과연 정당한 일인지에 대해 여전히 의구심을 갖고 있는데요. 현재의 민주주의가 시민들의 직접 투표에 의한 권력 위임이 기본적 메카니즘으로써 그 정당성을 표면에 내세운다 하더라도, 실상은 이미 모두가 알다시피 현실 정치 자체가 위임된 엘리트 지배 체제 그 자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체제의 색채를 좀 더 옅게 만드는 것이 앞으로 민주주의를 위해 필요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소위 억압 받는 소수의 권리 보호라는 미명 하에 갖춰진 헌법적 체계와 그 이해의 한복판에 놓여 있는 상 하원 양원 제도와 연방대법원의 특수한 체계는 많은 미국 시민들이 요구하는 바대로 개헌의 필요성이 시급해 보이는 것은 거의 자명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상당한 시민들이 이에 동의하고 있는 점도 분명한 사실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왜곡된 미국 정치가 극명하게 시사하는 바는 극단주의적 인종주의와 정치적 자정 능력의 실종으로 말미암아 결국 사회가 반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기반이 될 수 있다는 후반부의 경고였습니다. 이는 과거 로버트 달이 주장했던 민주적 다원주의에 대한 공격이자, 동시에 소수 지지층의 이해 관계와 그 기반이 된 금권 정치가 더욱 민주주의를 벼랑으로 이끌고 있다고 봐도 무방해 보이는데요. 저는 당파적 이해관계에 아주 매몰되어 이것이 정치 전반을 아우르는 극명한 체제가 되었을 때, 과연 민주주의가 온전할 것인가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런 정치에서 앞으로 있을 과두제의 위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동일한 우려가 있습니다. 이를 약간 달리 언급해 본다면 기존의 영국 양당제도와 오랜 의회주의의 기반이 되었던 서로에 대한 존중, 대립된 정치적 의견이 합의에 이를 수 있도록 노력하는 계몽주의적 기반이 그저 당리당략에 매몰되어가고 있는 부분은 나날이 중첩되어가는 이익 정치의 본질이라 설명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탈이데올로기의 새로운 정치 형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익에 우선한 정치적 본질의 매몰은 미국 정치 뿐만 아니라, 우리 정치까지도 파국에 이르게 할 수 있다고 예측해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일전에 도널드 트럼프로 시작된 '대안적 사실 alternative facts'의 발명이 이러한 왜곡의 시발점이라고 언급한 바가 있는데요. 이는 마찬가지로 과거에는 인종주의를 대놓고 주장하는 정치인을 유권자들이 심판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저자들의 현실 판단은 단순히 반민주주의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엄혹한 시대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이 모든 것이 소위 대안적인 정치와 그런 진실 회피의 진면목이 서로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많은 지식인들이 폭로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다음 미국 대선은 미국인들 뿐만 아니라, 우리 정치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되리라 예측해 봅니다.



그리고 2020년 재선에 실패한 트럼프 대통령은 선거부정을 주장했다. 그의 지지자들은 두 달 뒤 워싱턴 D.C.의 연방의회 의사당에 침입하는 ‘폭동‘도 일으켰다.

그런데 특정 집단에 소속감을 가지고 이와 같이 일방적인 투표 성향을 보이는 유권자는 미국 전체 유권자의 80~85퍼센트 정도를 차지한다.

그러다가 70년대 민권운동과 반전운동을 거치면서 민주당이 진보적인 하나의 색채를 띠기 시작했고, 80년대 공화당 레이건 대통령의 경제, 안보정책을 통해 공화당도 뚜렷한 보수의 정체성을 확립했다.

특히 흑인 유권자들은 기업에 대한 규제와 부유층 세금 인상과 같은 정책보다 자신들에게 직접적인 혜택이 즉각적으로 주어지는 사회보장책과 도시정책에 더 관심이 많다.

민주당, 공화당 할 것 없이 각 정당을 지지하는 국민들은 더 이상 상대 정당을 국정의 파트너로 생각하지 않는다.

대통령의 재선이 매우 유리했던 구조적인 환경에도불구하고, 2020년은 코로나 위기와 더불어 민주당의 투표율 높이기 전략으로 인해 트럼프가 재선에 실패했던 것이다.

과도한 게리맨더링이 위헌이라는 주장이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며 끊임없이 나왔는데, 이때마다 연방대법원은 ‘선거구 확정은 법의 해석과 무관하다‘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두 정당의 지지자들이 관심을 가지는 이슈도 판이하게 다르다. 민주당 지지자들은 건강보험과 총기규제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는 반면, 공화당 지지자들은 이미정책과 경제정책을 더 강조한다.

트럼프 등장 이전에는 유권자들도 노골적으로 인종주의 캠페인을 벌이는 정치인을 심판했다. 하지만 트럼프 당선 이후에는 노골적인 인종주의 캠페인이 마치 면죄부를 받은 것처럼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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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잉 민주주의 - 양극화 사회에서 정치의 자리
로버트 B. 탈리스 지음, 조계원 옮김 / 버니온더문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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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B. 탈리스는 미국 뉴저지 출신으로 뉴욕 대학 (NYU) 에서 석사를, 그리고 뉴욕시에 있는 공공 연구 기관이자 대학원인 뉴욕시립대학교 대학원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현재 그는 테네시 주 내슈빌에 위치한 사립 연구 대학인 벤더빌트 대학의 W. 알튼 존스 철학과 교수이자 정치학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대중에게도 가까운 철학자이자 정치 이론가로 민주주의 이론과 정치 인식론에 기반한 다원주의 정치와 정치적 양극화 등에 큰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더욱이 그의 이름을 건 12권의 논저와 100편 이상의 논문으로 왕성한 집필 활동도 해오고 있는데요. 이런 현대 철학자가 바라 본 민주주의의 본질이 무엇인지 문득 궁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의 만연된 정치적 양극화에 대해 어떤 적절한 조언을 해줄지 큰 기대를 안고 그의 이 논저를 읽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글은 원제, "Overdoing Democracy"로 지난 2019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4년 3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책 제목으로 인한 여러분의 오해를 좀 풀기 위해, 저자가 말하는 "과잉 민주주의"에 대해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는데요. 이에 탈리스 교수는 좀 더 건전하고 개선된 민주주의를 위해, 역설적으로 시민들이 정치적 민주주의에 과도한 집중과 몰입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일종의 당위로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4장에서 좀 더 면밀히 논증 되겠지만 이러한 시민들의 '과잉된 정치 참여'가 결국 정치적 양극화를 심화시킨 원인이라고 저자는 보는 듯 했습니다. 물론 기본적인 시민 의식 없이 상대를 적대화하는 '반정의적 시민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정치적 양극화의 근본 원인은 정치 무대 자체가 아니라, 이 무대에서 시민들에게 표를 표집하는 일부 '자기 이익적 선동 정치인'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소위 엘리트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지지세를 결집시키기 위해, 반대편에 있는 다른 정치인을 악마화 하는 한편, 이런 양극화 구조를 더욱 조장하고 부채질을 해왔는데요. 이 부분에 대한 비판적 인식 없이 시민의 의무라고 볼 수 있는 '정치 참여'를 어느 정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무래도 근거가 조금 불충분하지 않나 생각해 보게 됩니다.

물론 이 논저는 종래의 제임스 브레넌이나 가렛 존스의 '과잉된 민주주의' 담론과는 그 결이 다른 것이기도 합니다. 저는 무엇보다 에즈라 클라인이 문제 제기를 했던 현 정치의 극단적인 분위기인 "우리 편이 맞고 너희는 틀리다"식의 무분별한 정치적 양극화 시대에 대한 일종의 경고라고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전반적으로 탈리스 교수가 제기한 서두의 현 민주주의 정치에 대한 여러 고질적인 문제들에 대한 언급은 대체로 동의할만 했는데요. 단순히 민주주의의 이상과 그 가치에만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민주주의 체제를 구성하고 있는 사회의 본질적 문제들을 다루면서 과연 우리 시민이 어떠한 인식을 갖고 좀 더 나은 정치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가를 우리에게 이 책은 명백히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2부 4장에서 면밀히 다루고 있는 만연된 '양극화 문제'는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앞선 현 정치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한 서두에서, 우리 사회의 정치적 분열과 갈등은 이미 심각한 수준이고, 현 정치 전반을 구성하고 있는 정치인들과 이들 각각을 지지하고 의견 공유에 나선 시민들이 심각한 양극화 상황에 처해 있다고 저자는 판단하고 있었는데요. "이들 모두가 타협과 조정, 생산적인 의사소통 기반이 전혀 없는 상태인 양극화"에 놓여 있고 이러한 상황은 더욱 심각해지고 있는 상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이와 관련해, 탈리스 교수는 "미국 시민들은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속한 사람의 생각이 잘못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안녕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고 여기는 경향이 어느 때보다 높다."고 언급하고 이러한 분위기 하에 반대당과 연계된 시민을 비이성적이고 , 부정직하며, 부도덕하다고 여기는 경향이 높다고 첨언합니다. 이는 우리의 상황과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저자가 '숙의 민주주의' 담론을 다루고 있는 것은 다소 의미심장해 보이기도 합니다. 이는 좀 더 확장된 민주주의라는 기본 테제를 달고 있는 2장의 논증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지만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숙의 민주주의에 대한 주제로도 읽히는데요. 그동안 이 숙의 민주주의를 다룬 논저들이 많이 출간된 것은 그만큼 민주주의가 위기라는 것을 반증한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민주주의가 수많은 사람의 갈등을 먹고 산다는 다소 체념적인 진술을 넘어, 기본 인식으로서 그만큼 시민들 사이의 협의와 토론이 중요하다는 의미라고 생각됩니다. 특히 이렇게 가짜 뉴스와 대안적 진실과 같은 원하지 않는 정보들의 홍수 속에 숙의된 민주주의가 더 필요한 시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숙의가 제대로 현실에서 이어지기 위해서는 시민들 모두가 정치적 변별력은 물론 자신들이 스스로 비합리적인 의견이나 상황에 노출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그저 평등한 투표 정도로 왜곡되는 민주주의 정치에서 정확한 정보와 그것에 근거한 투표 행위, 그리고 이렇게 구축된 정치 체제의 전반은 기계적 합리주의자들이 주장하는 합리주의 보다 더 상위의 실천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는 것이 모두 정치가 된다."는 선언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 그리고 이것이 기반이 된 행동과 더 나아가 그런 정치는 건전한 숙의 민주주의의 전제 조건이라고 생각됩니다. 저자는 이런 숙의 민주주의를 단순히 소급해서 받아들이고 있지만 아마 건전한 토론과 서로 간의 다양한 의견 개진이 기반이 된 숙의 민주주의는 우리가 생각하는 민주주의 정치의 이상향과 좀 더 가까워진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요. 물론 민주주의 자체도 권력을 구성하는 여타 배분 문제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현실을 도외시 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숙의 민주주의는 어떻게 보면 문제의 해결에서 뿐만 아니라 정치 전반의 올바른 구축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사실 민주주의 체제 하의 기본적인 정치 담론 뿐만 아니라 정치 자체는 저자의 반복된 분석처럼 소위 권력을 다루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런 연유로 정치에 참여하거나 정치 자체를 매번 인식하고 공유하고 있는 시민들이 단적으로 극단적인 신념화 문제에 놓일 수 있다고 저자는 판단하고 있었는데요. 이에 동종애 Homophily 와 관련된 논증은 단순히 자극적인 논증 이상의 질문을 우리에게 하고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사람은 '비슷한 부류를 선호한다'는 이런 인간 사회학의 기본적인 인식은 몇 백 세대를 거친 지금도 유효한 인식이며, 무엇보다 정치 전반에 이러한 통용은 보기보다 심각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시민들 사이에 구별되는 정치 인식과 지독한 편향성, 그리고 현실 문제에 대한 근본적 차이는 어쩌면 정치적 변별력을 상실한 채, 인터넷과 가짜 뉴스 등으로 강화될 가능성이 있으며, 이렇게 비합리주의적 신념에 매몰된 시민들이 기본 성찰을 도외시하고 갈등을 심화시켜 체제 전반을 오염시킬 수 있다는 것이 상당히 타당한 진술로 보입니다. 즉, 이런 극단적인 신념화는 같은 의견을 공유하고, 비슷한 신념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더욱 '타협과 검증을 무시할 수 있는 단일 체계로 몰아 갈 수 있으며, 하버마스나 다른 정치 이론가들이 강조했던 시민들 사이의 생산적인 토론과 서로 간, 최소한의 의견 교환이 가능해지지 않는 실로 편협한 정치적 분위기를 조장하게 되는데요. 물론 이 모든 것이, 정치에 과몰입한 시민들의 문제로만 국한 하기에는 앞서 언급했던 바대로 단순하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특히 시민들 간의 이해 부족이라든지, 정치적 신념과 지향하는 이데올로기의 극명한 차이로 인해 서로 간의 오해와 불신은 민주주의가 강화 될수록 만연해 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저자가 제시한 여러 자료로 증명된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에 저자는 일관되게 시민들로부터 '과몰입 정치'를 배제하고 '정치가 없는' 활동을 서로 공유할 수 있어야 '민주주의'가 건전해 질 수 있다고 강조하기에 이르는데요. 물론 이러한 맥락의 주장이 아주 허무맹랑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신념의 양극화 놓인 시민들이 어떻게 하면 정치적 변별력을 다시 찾을 수 있는지 그것을 위한 실효적인 제안이 먼저 있어야 하지 않나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것이 이론이든 실질적 실천 방안이든 말입니다.

앞서 에즈라 클라인이 자신의 논저에서 분석했던 바대로, 현실 정치에 대한 참여 욕구가 높은 일반적인 시민들 보다 그런 기존 현실정치에서 소외된 시민들이 이런 극단적인 주장과 반정치와 다름 없는 체제 선동적 외침에 더 쉽게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경고는 우리가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우리는 이러한 극단적 주장에 과몰입하고 더 나아가 신념화 단계에서 더욱 강고해진 일부 시민들이 처한 환경과 이들의 목소리에 좀 더 귀 기울일 필요가 있어 보이는데요. 우리에게 정치적 참여와 그에 기반한 정치적 자유 및 평등은 우리의 권리이자 의무임을 이미 명백하게 잘 알고 있습니다. 저자의 말마따나 민주주의 하에서, 평등한 투표권 이상의 정치적 평등이 모든 시민에게 요구되는 것은 특히나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과 양극화 정치 상황에서 더 중요합니다. 저자는 이를 전혀 다루고 있지 않지만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초래한 이 경제적 불평등이 삶의 통제와 건전성을 해치고 정치 참여에 대한 '시민의 의무'를 허황되고 신선 놀음과 같은 것으로 이들 시민들이 정치에서 더욱 멀어지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경제적 조건도 개선하지 못하는 자들이 무슨 정치 운운이냐" 이런 폭력적 주장들이 바로 신자유주의가 조장한 것들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현실 정치의 문제와 우리의 삶은 어떻게 보면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이건 거의 명확한 진리에 가깝지 않나 매번 제 자신에게 거듭 되물어 보기도 합니다.

끝으로 이 논저의 결론이라고 볼 수 있는 3부에서 극단적 신념화 그에 따른 양극화 문제, 정치의 분절과 같은 현실의 모양새는 민주주의적 가치가 더욱 요원해 질 수 있는 문제일 뿐만 아니라, 이러한 체제의 불안정성이 시민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될지는 거의 명약관화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저자는 이에 "민주적 관점에서 평등한 시민들 사이의 정치적 불일치는 정치가 지닌 냉혹한 사실 중 하나"라고 강조하고 있는데요. 저 진술은 단순히 불편한 논증 이상의 진실을 저자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각기 다른 신념과 정치적 식견을 지닌 각각의 시민들이 서로간의 '우애'를 쌓을 수 있는 기회가 있어야만 하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일이고, 이는 그만큼 시민들에게서 탐욕의 정치와 멀어지게 만든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인간 사회에서 그만큼 서로 간에 증오와 몰이해가 앞선 극단적인 요인 뿐만 아니라 인간 사회의 복합적인 요소 때문에 더 심각해지고 있는 상황이니 만큼 우리는 서로를 좀 더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것은 고명한 정치적 담론이 아니라 사회를 구성하는 대다수 시민들 각자의 안온한 삶을 위해서도 중요한 과제로도 읽히는데요. 저는 민주주의의 기본 이념이 진정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 글에서 찾는다면 우리가 동의하거나 지지하지 않은 사람이 시민들의 투표로 정치 권력을 획득했다 하더라도 민주주의를 위해, 이것에 대한 의견과 문제 제기를 끊임없이 하는 것이 '시민의 의무'로 여긴 저자의 탁월한 분석이었습니다. 이것이 설사 민주주의 정치의 근본적인 '불협화음'이라고 할지라도 서로 존중하고 이해하는 시민들 사이의 '불협화음'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저자의 이상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시험해 볼 수 있는 '시험의 장'이 열린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앞선 시민들 사이의 기본적 '우애'를 만들기 위한 여러 외부 활동과 비정치적 모임과 유사한 체계들 말이죠. 이렇게 우리의 민주주의는 도덕적 정의 뿐만 아니라 정치적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고, 비지배적 자유를 가능케 하는 장(場)입니다. 물론 민주주의 이상의 가장 중요한 점은 모두가 동의하는 선(善)에 가까워질 수 있게 한다는 점입니다. 정치적이든 도덕적이든 무엇이든 간에 말이죠. 이것이 바로 철학자가 인식하는 민주주의가 아닐까 셍각해 보게 됩니다.


경험적으로 민주주의는 다른 종류의 주요한 사회적 선의 생산과 높은 상관관계를 가진다.

민주주의 사회는 시민의 자유와 기본권을 보다 잘 보호하며, 인권 관련한 기록도 상대적으로 훌륭한 편이다.

현상 유지를 묵인하는 것은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 만연한 불의를 체념하는 것이므로 공모와 같다고 본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정치적 견해가 이성에 근거하고 있다고 믿는 한편, 우리가 동의하지 않는 사람드르이 견해는 정보가 부족하고 잘못 판단한 것이며 수정 가능하다고 여긴다.

민주주의의 범위 내에 있는 것으로 명시된 일부 활동들은 민주 시민에게 요구된다고 여겨지기에 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거나 전혀 수행하지 않는 사람은 시민으로서 비판의 대상이 된다.

노동자와 학생도 시민으로서 참여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럴 수 없는 상황에서 이들을 대상으로 정치적 발언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들어야 하는 정치 메시지에 반대하거나 단순히 의문을 제기하고 싶은 노동자와 학생은 실제로 그러한 목소리를 낼 수 업삳.

모든 형태의 사회적 상호작용을 민주적 시민성을 실천하는 것으로 이해하게 될 때 민주주의의 과잉이 일어난다.

결론은 분명하다. 많은 곳에서 정렬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빨간색과 파란색, 보수와 진보, 좌파와 우파 사이의 익숙한 정치적 분열과 적대감이 사회 환경의 기본 구조의 일부가 되어, 항상 쉽게 인식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실제로 효과적인 방식으로 평상시 우리의 일상적인 상호작용을 분리시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 진보주의자는 더 철저한 진보주의자가 되고, 보수주의자는 더 강경한 보수즈의자가 되며, 페미니스트는 더 열렬한 페미니스트 입장을 갖게되고, 인종주의자는 인종적 편견이 강화되며, 정치적 시위를 옹호하는 사람은 더 극단적인 형태의 정치 행위러 기울게 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민주주의를 정치적 포화 상태로 이끄는 원동력 중 하나는 공적으로 참여하는 시민들이 평등한 존재로서 스스로를 통치하는 사회라는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이다.

즉, 시민들은 각자가 지닌 이성적 근거를 알 수 있어야 하며, 공직자의 견해와 정부의 행위뿐만 아니라 서로의 견해에 대해 비판하고, 논쟁하며, 질문하고, 이의를 제기하는 등의 교류 과정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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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malist 2024-06-12 1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의 역자입니다. 베터라이프님의 서평은 즐겨찾는 서재에 넣어두고 종종 찾아 읽고 있는데, 반가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좋은 서평을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베터라이프 2024-06-12 15:38   좋아요 0 | URL
부족한 서평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치를 다룬 논저들은 정확한 늬앙스를 위해 번역에 품이 많이 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번역 부탁드립니다 ^^
 
아베에서 스가까지 조작되는 혐한 여론 - 한국 혐오를 조장하는 일본 언론의 민낯
무라야마 도시오 지음, 서승철 옮김 / 생각비행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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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야마 도시오 (村山俊夫)는 1953년생으로 도쿄 출신입니다. 그는 일본 지바 대학을 중퇴하고, 일본 방송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그는 대학 시절부터 한국문화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1983년 지바현에 한국도서자료실 '녹두문고'를 열었고, 1986년 이후, 서울에서 일본어 강사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현재 교토에서 한국어 교실인 '녹두학원'을 운영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한일 양국 간의 국민들이 서로 간, 이해를 돕는데 힘을 쏟고 있습니다. 이외 그와 관련해, 특이한 사항은 1994년 제7회 도쿄영화제에서 통역을 한 계기로, 영화배우 안성기씨에게 인간적인 감화를 받아 안 배우 뿐만 아니라, 한국 영화 전반에 관심을 갖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嫌韓' 與論"으로 지난 2020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도 같은 해인 2020년 12월,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일본 내에서 혐한과 관련된 노골적인 출판은 단적으로 말해, '거대한 산업'이기도 합니다. 이는 거의 부정할 수가 없죠. 한일 양국 간 서로를 향해 벌이는 '혐한과 반일'이라는 소위 공격적 모멘텀은 마치 피차일반이라는 식으로 치부되긴 합니다만 여기에서 본질은 한국에서 만큼은 반일로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거두는 산업과 그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역설입니다. 또한 역사 문제와 관련해, 일본 내에서 극우 민족주의에 기반한 '역사 수정주의'가 일전에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의 언급대로 큰 목소리를 얻으면서 일본 내에 어떠한 반론도 용납하지 않는 실정이 되었습니다. 저는 마루야마 도시오의 이 글을 일독하며, 다시 한 번 느끼게 된 것이지만, 일본 사회가 상충되는 주장에 대한 의견이나 입장에 반하는 건전한 반론이 자라날 수 없는 토양임을 불행하게도 확인하게 되었는데요. 어떤 학자들은 과거 일본 전국 시대에 만연했던 "강자에 마땅히 굴복해야만 하는 약자의 순종'을 들어, 일본 사회의 '순종주의 혹은 순응주의'를 꼬집기도 했습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일본 내의 대다수 시민들이 과거 역사 문제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으며, 그로 인해 일본이 과거 역사에 대한 부정과 모르쇠, 합리화 등이 어떤 식으로 한국과 한국인들에게 작용하는지 일체의 이해가 없다는 것도 명백한 사실이기도 합니다.

마루야마 도시오의 이 책은, 지난 2018년 초반부터, 2019년까지 저자 본인의 비판적 정치 시론을 출판한 것입니다. 특히 여기에 비판적으로 논의되어 있는 주된 내용은 일본 정부와 이를 맹종하는 일본 언론들의 각종 혐한을 조장 발언과 과거 역사 뿐만 아니라, 이웃 국가의 정치를 전혀 존중하지 않는 행태 등을 포함하고 있는데요. 여기에 인용되어 나오는 '요미우리 신문','아사히 신문','산케이 신문'.'석간 후지' 뿐만 아니라, 불행하게도 우리 나라의 '조선일보'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특히 지난 평창 올림픽 즈음에, "한국 정부가 북한의 올림픽 참가에 특별한 노력을 기울인 것"에 대해 일본 측 보도가 "북한의 책략에 빠지고 공산주의 국가에 예속된 한심한 한국 정부"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내려고 노력했다는 식으로 저자는 이를 꼬집어 논평합니다. 이에 조선일보의 2019년 7월 11일 자 일본어판 사설을 언급하며, "애초에 지금의 문제(한일 마찰)을 일으킨 것은 한국의 법원과 정부다"라는 "마치 일본 정부의 입장을 대변이라도 하듯 한국 정부와 사법부를 공격했다"는 저자의 비판적 논평이 논조에 담겨 있습니다. 더욱이 저자는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이처럼 이 글의 비판적 주장들의 근거는 막대한 기사 자료를 수집한 저자의 노고에 있으며, 이는 글 서두부터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저자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비판적 주제에 대한 다양한 기사들과 일본 정치의 단면까지 우리에게 보여주기까지 합니다. 안타깝게도 한국 정부에 대한 도를 넘어선 비난과 소위 프로파간다와 같은 일본 정부의 의도에 일본 언론 대다수가 거의 같은 논조와 보폭을 유지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되었는데요. 즉 정부 내각의 지침과 어떤 정치적 논점을 평범한 언론사 답게 쉬이 비평할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지금은 사망하고 없는 아베 전 일본 총리는 전후 70주년을 맞이한 담화에서, "그 전쟁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우리의 아들과 손자, 그리고 그 후 세대의 아이들에게 사죄를 계속해야 하는 숙명을 지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특히, 과거 역사 문제와 관련된 일본의 거듭된 사죄와 사과는 국격의 실추를 측면에서 받아들이고 있었는데요. 여기서 연급된 독일이 현재 유럽 지도국의 위치에 있는 것과 일본이 소위 세계 지도국에 있으면서도 강제 징용공과 위안부 문제를 비롯, 과거사 문제에 대한 명확하지 않은 태도로 말미암아 주변국들에게 근본적인 신뢰를 얻고 있지 못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특히 지난 박근혜 시절, 한일 간의 위안부 졸속 합의와 관련해서도, 2016년 3월 10일,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가 밝힌 과제, 2018년 11월 19일 유엔 강제실종위원회가 위안부의 존재를 강제 실종 피해로 인식하고 일본 정부에 유감의 뜻을 나타낸 것은 참으로 기막힌 감정을 들게 합니다. 이 위안부 합의와 관련해서 저자인 무라야마 도시오는 이 당시 합의가 분명 공개할 수 없는 '이면 합의'가 있었으며, "이는 소녀상 철거와 국제 무대에서 더이상 위안부 문제가 언급되는 것을 한국 정부가 관리"하는 점을 요구했던 것이 아닌가 의심을 하고 있었는데요. 이 이면 합의와 관련된 의심과 정황도 이미 국내에서 기사로 나온 바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들끓는 여론을 불러 일으키는 '욱일기 문제'도 심각합니다. 지난 2018년 10월 10일부터 제주에서 있었던 '국제 관함식'에 일본 자위대 해군의 욱일기 게양 문제는 한국 내에 심각한 반일 감정을 초래했는데요. 우리는 이 욱일기가 왜 문제인지 이미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하켄크로이츠와 마찬가지로 욱일기는 대동아 공영과 태평양 전쟁의 원죄를 가친 일본 제국군의 상징이었습니다. 이것을 한국과 한국 정부의 예민한 대응이라는 일본 정부 및 이를 받아쓰는 일본 언론의 행태는 이들이 얼마나 과거를 돌아보지 않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또한 글 후반부에 언급되는 다큐멘터리 영화 "주전장"과 관련해, 이 영화의 출연자 중 '위안부'의 존재를 부정하는 다섯 명이 2019년 6월, 상영 중지 소송을 제기했다는 내용도 일본 내부의 '진실된 역사 문제'가 어떠한 상황에 놓여 있는지 다시금 깨닫게 만듭니다.

끝으로, 저자인 무라야마 도시오는 일본 내의 조직적인 혐한과 과거 한국 정부에 대한 적대감과 여론 몰이는 아베 총리가 자신과 자신의 정권을 향한 낮은 지지를 외부로 돌리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일관되게 비판합니다. 따라서 일본 자민당의 강력한 지지 기반인 극우 민족주의자들과 역사 수정주의자들은 여전히 역사 문제에 있어서 과거의 과오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의지가 전혀 없으며, 자신들이 중요시 하는 미일 동맹과 미국과의 정치적 밀착만을 인정하면서 아마도 주변국들을 이런 정치외교적 매커니즘으로 배제하려는 것이 아닌가 추측해 봅니다. 그리고 저자의 이 책은 무엇보다 일본 내의 혐한 논리를 여실히 파헤친 것으로 단순히 일본의 책임이다, 일본의 문제이다 아니라, 혐한이 근본적으로 일본 정치의 병리적 현상임을 명백히 드러낸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현재에도 과거 조선의 일본 식민지 지배를 옹호하는 인사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이 부분과 관련해, 저자가 이를 비판한 대목을 따로 언급하고 싶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식민 지배 시절의 갈취, 약탈, 인권 유린, 고문, 살인, 문화 말살 등에는 눈 감은 채 중국 침략기지로서의 인프라 정비에 불과했던 개발 정책을 두고서 '일본의 원조'가 있었기에 한국이 근대화를 이루고 오늘날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강변한다.



따르지 않으면 배착될 거라는 주문을 퍼붓는다. 일본은 성년이 되기 전 학교 생활에서 이런 분위기를 체득하는 사회다.

천황을 이용해 국민 통합을 꾀하려는 사람들의 숨길 수 없는 본성은 11월 9일 국민제전 때 여실히 드러났다. 젋은 세대에게 어필하려고 아라시에게 봉축곡을 부르게 한 연출도 억지스러웠다. 게다가 프로그램이 끝나고 천황과 황후가 퇴장할 때 누군가 "천황 폐하 만세!"라고 외치자 많은 이가 호응하며 "천황 폐하 만세!"를 열여섯 번이나 연호했다.

일본 정부는 북한과 중국에 한국에 대한 적대감을 선동함으로써 일본 국민이 동아시아 정세와 관련해 위기의식을 갖게 하려고 한다.

2019년 <조선일보> 일본어판 기사가 대통령 직속 기관과 한국 내 여론의 반발을 산 일을 상기해야 한다. <조선일보>는 2019년 7월 11일 자 일본어판 사설에서 "애초에 지금의 문제(한일마찰)을 일으킨 것은 한국의 법원과 정부다"라며 마치 일본 정부의 입장을 대변이라도 하듯 한국 정부와 사법부를 공격했다. 이후로도 <조선일보>는 일본어판 지면을 빌려 문재인 대통령 관련 비판을 더욱 자극적인 헤드라인으로 장식하며 일본 내 혐한 감정을 부추긴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런 논조에 편승해 일본에서는 한국과 문재인 정권의 약점을 캐거나 북한 종속을 비난하는 주장이 두드러졌다.

‘한국은 법치국가임을 부정하고 법을 초월한 국민 정서라는 감정에 따라 사회 규범이 변하는 후진적인 나라‘라고 우기고 싶은 바람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위안부‘의 존재 자체를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일본의 자칭 애국주의자들은 과거나 지금이나 일본 정부의 행위가 비판받아서는 안 된다는 강한 신념으로 무장하고 ‘위안부‘를 ‘자발적 매춘부‘라고 부른다.

마키노 요시히로는 한국 대통령을 황제나 국왕에 빗대어 그 존재감이 전근대적이라는 이미지를 만들고, ‘여론의 지지를 얻기 위한 정치 게임‘을 한다며 조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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