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세계의 극단주의 - 광신, 인종차별, 분노
애덤 클라인 지음, 한정라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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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인 애덤 클라인은 미국 메릴랜드 주의 공립 대학인 솔즈베리 대학을 거쳐, 마이애미 대학에서 석사를 마치고, 워싱턴 D.C에 소재한 사립 대학인 하워드 대학에서 매스커뮤니케이션과 미디어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특히 그는 혐오 표현과 온라인 극단주의, 비주류 인종주의 운동 등에 연구를 지속하고 있는데요. 이와 관련해, 그는 미국 정치계에서의 인종 혐오적이고 극단적인 발언과 여론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현재는 미국 뉴요의 연구 중심 종합대학인 페이스 대학의 커뮤니케이션 연구 부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Fanaticism, Racism, and Rage Online ; Corrupting the Digital Sphere"로 지난 2017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3년 6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전체적인 맥락에서 현재 미국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보이는 유대인과 흑인을 향한 극심한 인종 혐오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내수 부진과 그에 따른 경기 하락,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미국 이민 정책의 사실상 실패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미국 시민들의 대다수가 정치적 변별력을 포함한, 건전한 민주주의적 여론 형성을 위한 역량 구축에 실패한 점도 미국 내부의 극단주의를 더욱 부채질 하였습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헐리우드 발 영화에서 희화화 된 인종 혐오 단체로 자주 언급되는'KKK단'은 현실 세계에서 직접 그 유산을 계승했다는 돈 블랙에 의해 오늘날 새롭게 변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가히 제2의 부활을 알립니다. 블랙은 일반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에 의해 자행된 600만 이상의 유대인들을 가스실에서 절멸시킨 사건 즉, 홀로코스트를 "유대인들의 음모"로 몰아갔습니다. 지금도 구글에서 홀로코스트 음모라고 치면 여러 자료들이 검색됩니다. 그래서 그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많은 시민들이 이런 유대인들의 음모에 속고 있다고 강하게 질타하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터무니 없는 맥락의 발언들을 과연 한 막의 코미디 정도로 취급해야 하는지는 작금의 인터넷 여론이 매우 심상치 않은 점을 먼저 고려해야 될 것 같습니다.


소위 페이스 북과 같은 근래의 'SNS 혁명'은 우리의 민주주의가 좀 더 여론 친화적이고, 시민들을 위한 공개된 발언의 기회가 크게 확장될 것이라고 모두가 기대했던 점은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면밀한 인터넷 커뮤니티와 시민들 간의 온라인 연결성을 배후로 오히려 과거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민주주의 내부의 '병리적 현상'이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여러 소설과 영화 등으로 잘 알고 있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세계 지배 전략'과 같은 입에 담기에도 저열한 음모론들이 이제 온라인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사실상 '유대인들의 세계 금융 지배 전략과 그로 인한 세계 경제 통제"라는 삼류 소설과 같은 것으로 현재 10대 후반에서 20대 초중반의 평범한 미국 청년들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적인 수법들은 이 글에서 애덤 클라인 교수의 논증을 통해, 여러 방향성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특히 '흑인들은 백인보다 덜 진화되었다'라든지, '유대인들은 종교의식에 기독교 어린이들의 피를 사용한다'는 식의 모략을 이용하는 등 전근대적인 행태들이 여전히 미국의 보통 가정에 침잠하고 현실은 참으로 두렵기도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은 정치적으로 자유 민주주의의 큰 형이면서, 헌법이 보장하는 '총기 소유의 자유'는 조장된 혐오 발언의 부추김이 시민들에게 어떤 식으로 악영향을 끼치게 될지 예견이 되는데요. 이것은 결국 저자의 언급대로 극단주의와 인종혐오에 포획된 일반 시민들이 미국 사회에 가하는 참혹한 폭력이 결국 무고한 사람들을 향하기에 이릅니다.

개인적으로 저자가 2장의 '시온 장로 의정서'에 대한 역사적 근원을 논증하는 과정에서, 이 완벽한 '가짜'가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해악을 유대인의 그것과 연결시켜, 마치 민주주의와 자유주의가 유대인이 전세계에 퍼트리고자 한 '거대한 음모'로도 읽히는 부분은 이러한 반유대주의가 얼마나 뿌리 깊은 연원에 기인하고 있는지 다시금 깨달을 수 있는데요. 사실 제가 이러한 내용을 키보드 자판으로 기록하고 있는 지금도 이 거짓된 논답들을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미국이 가진 대학의 훌륭한 저변을 통해, 질 높은 교육을 받은 미국 청년들이 저런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이성을 잃고 동조하는 몇몇의 사례들은 더욱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에는 인터넷에 접속한 많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노출과 미러링을 시도하는 세련된 웹 페이지 구축은 물론 유사 과학이나 다름 없는 거짓된 논변을 좀 더 고급스럽게 포장하여, 소위 '대안적 사실'과 같은 기법 등으로 극단주의자들이 끝내 고안했다는 실정은 여기서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이런 거짓 선동과 극히 차별적인 인종주의, 미국 내부의 만연된 반이민 정서로 나날이 세력을 얻은 '대안 우파'와는 서로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도 한 데요. 특히 이 글의 5장에 수록된, "평균 웹 트래픽에 따른 혐오 웹사이트 검토"라는 하나의 증명된 도표는 미국 온라인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혐오 커뮤니티들의 월간 방문자와 링크하는 웹 사이트 수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구글과 같은 거대 인터넷 검색 기업의 사실상 '의무와 윤리의 실종'이라는 측면과 오로지 기업의 이익 만을 추구하는 비윤리적 기업의 행태를 반증하는 사례로도 읽히는데요. 즉, 단순히 인터넷 검색으로만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 블로그와 SNS으로 상호 연결되는 상황까지 이르러 그것의 폐해가 가히 심각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2009년 6월 10일 제임스 본 브런 James von Brunn은 "홀로코스트는 거짓말이다. 오바마는 유대인들이 만들었다. 오바마는 그의 유대인 주인들이 시키는 대로 한다. 유대인들은 미국의 돈을 빼앗았다. 유대인들이 대중 미디어를 통제한다."는 그런 자신의 생각을 메모로 남기고, 박물관 경비원으로 6년 동안 일해온 39세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존스의 가슴에 곧바로 총을 발사했습니다. 이 아프리카 계 경비원은 바로 그 자리에서 숨졌고, 그 외 신원을 알 수 없는 1명은 중상을 입었으며, 총기 난사범 브런은 경비원들과 총격전 끝에,얼굴에 총을 맞고 중상을 입었습니다. 저자는 이 브런의 백그라운드를 면밀히 체크하고 그가 얼마나 혐오에 찬 수사법의 노예가 되었는지 이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는데요. 일전에 네이딘 스트로슨은 이 혐오 발언이 미국 헌법에서 보장하는 '시민들의 생각과 발언의 자유'의 일종으로 현재 유럽 여러 국가에서 제정된 '혐오표현금지법'이 과연 이슬람 이민에 대한 증오와 인종주의 철폐에 있어 어떠한 효과적 대응이 되었는지 자신의 논저를 통해 의문을 표시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소위 시민들이 '대항 표현'을 통해, 저 왜곡된 극단주의 세력과 맞서 싸워야만 한다고 주장하기 이르렀는데요. 더욱이 시민들 사이에 '정치적 이성'과 나날이 소원해져 가는 현실은 광범위한 혐오 발언의 대상이 되는 무고한 LGBT, 유대인, 아프리카 계 미국인들에게는 더 이상 '도덕적 건전성'에 기반한 시민들의 정치적 변별력을 마냥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애덤 클라인의 이 글은 현재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종 차별 집단과 극우주의자들, 이민 반대와 일부 공화당 정치인들과 관계를 맺는 등의 일견 온건해 보이기까지 하는 광범위한 혐오 운동까지 포함해 이를 다루고 있습니다. 사실상 인터넷 공간에서 벌어지고 있는 터무니 없는 혐오 발언과 그것을 교묘히 구축하고 있는 수사적 기법들은 나날이 많은 시민들을 포섭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인간의 저열한 속성에 끊임없이 호소'하거나, 자신의 마땅한 권리를 다른 이민자들에게 갈취당했다는 식으로 사회적 권리에 대한 왜곡된 수사까지 미국에 유입된 이민자들에 대한 증오를 키우는 데 한 몫을 하고 있습니다. 결국 저자의 묵시록적인 어감으로까지 읽히게 되는 지난날 히틀러 치하의 독일 시민들이 유대인들에 대해 벌였던 일상적인 증오 등을 논하면서, 이러한 파시즘적 기법들이 시민들의 내면에 파고들 때, 민주주의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를 우리에게 되묻고 있는데요. 여기서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는 점은 이런 극단주의 세력들과 이를 지지하는 현상 자체는 이미 주류 정치 무대로 올라왔으며, 단순히 일부의 지나지 않거나 혹은 현상에 대한 과대 평가 같은 것은 분명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저자는 결론에서 이 21세기의 편협한 현상들이 과거 우리 인류에게 남은 어두운 잔재들 가운데 하나이며, 이것들의 후예들이 그 이전보다 세련되고, 평범하고, 교활하다는 점 역시, 이것을 우리가 제대로 관리하지 않는다면 절망적인 파국은 보다 가까이에서 현실화 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유사 과학에 빠진 인종 혐오주의자들과 정치적 극단주의자들을 단순히 정신병에 걸린 '병리적 인간 무리'로 취급할 수 없는 명확한 근거는 문명의 운명과 계몽의 유산을 뒤집는 결과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저자의 비판적 분석은 바로 이들이 "정치와 소위 커뮤니티로 가장하여 이런 복잡한 분열들과 맞물리려고 하는데, 오직 진보의 궤도를 벗어나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다."는 폭로로 논증은 사실상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이 악은 여태까지 구축한 인류 문명의 붕괴를 필연적으로 초래한다는 셰익스피어 식의 논법이 절대 과장이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명심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



인터넷은 시민들이 비록 디지털 방식이지만 참여 민주주의에 직접 관여하여 변화를 가져오는, 위르겐 하버마스의 ‘공공 영역 public sphere‘의 현대적 구현으로 종종 생각되었다.

혐오 발언의 새로운 목소리는 이제 아래 깔린 실제의 인종차별적 신념 체계의 언어가 아니라, 우리 대중문화와 정치의 언어로 말해지고 있음이 명백해진다.

유대인들은 종교의식에 기독교 어린이들의 피를 사용한다고 수세기 동안 주장된 악명 높은 "피의 비방 blood libel"이 있다.

그것은 깔때기처럼 오늘날의 급진적이고 인종차별적인 웹사이트로 검색자들을 집합적으로 이동시키는 검색엔진, 뉴스 아울렛, 정치 블로그, 소셜 네트워크의 상호 연결 시스템이 지닌 합법화 요인이다.

이 맥락에서 이러한 콘텐츠들은 주의 깊게 선택되고 강도되며, 어떤 경우에는 오직 뚜렷한 인종차별주의적 관점만을 전달하기 위해 작성자가 이를 추리기도 한다.

페이스북을 비롯한 소셜 네트워크를 혐오집단과 개인들에게 매우 매력적이게 만든 것은 아마도 청년 공동체가 모든 문화를 손쉽게 환영하기 때문일 것으로, 새로운 친구와 생각들 모두 마우스 클릭 한 번으로 거의 유보없이 "받아들여지고""좋아요"가 된다.

페이스북 경영진은 서비스 이용 약관에 대한 명백한 위반이 없었다는 이유를 들며 궁극적으로 홀로코스트 부인 단체들을 제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혐오발언을 둘러싼 풀뿌리 논쟁은 전국적으로 상당히 분열되어 있으며, 대체로 이것은 법적으로 정의되어 있든 아니든 실제의 혐오발언을 구성하는 것에 대한 다양한 이해 탓으로 여기는 게 타당하다.

나치 운동이나 현대의 어느 (혐오) 이데올로기에도 쉽게 영향받는 자들의 경우, 사회학습 이론은 그들이 문화적으로 편협의 메시지와 동일시함으로써 사실상 그들이 자기 자신의 유혹 과정에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현실 세계의 폭력으로 분출되는 인터넷 편협의 어떤 단일 사례보다 훨씬 더 공통적인 것은 온라인 혐오발언의 확산이 오늘날 공공 담론에 미치는 장기적인 영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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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 가장 한국적인 계급 지도 / 유령들의 패자부활전
장석준.김민섭 지음 / 갈라파고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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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인 장석준은 1971년생으로 연세대 사회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습니다. 그는 과거에 민주노동당 중앙연수원과 민주노동당 진보정치연구소에서 활동했고, 진보신당 부대표 노동당 부대표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2014년에는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노동당 소속으로 서울시의원 종로구 제1선거구에 출마했으나 낙선했습니다. 현재는 진보정치연구소의 대표를 거쳐, 정의당 부설 정의정책연구소 부소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김민섭 작가의 논픽션 단편 소설과 합본으로 2022년 10월 국내에 출간되었습니다.

저는 신자유주의와 밀접하게 관련된 능력주의에 관한 글을 찾아보다, 장석준 부소장의 이 글을 발견하게 되었는데요. 처음엔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지만 특수한 한국적 상황에서 능력주의가 어떻게 우리 사회에 내면화 되었는지 논증하고 있어 저에게는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자는 우선 능력주의를 설명하기 위해 과거 자본주의 이행 과정에서, 현재 우리가 관리자본주의 managerial capitalism 적 시대를 살고 있다고 우선 전제하고 있었습니다. 이 관리자본주의는 프랑스 경제학자 제라르 뒤메닐과 도미니크 레비의 논증으로 도출된 용어이기도 합니다. 제2차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가 사회에 구축되면서 이를 둘러싼 자본가계급과 관리자계급의 경쟁과 충돌 그리고 때론 협력을 통해, 당시 중요한 영향력을 보이고 있던 노동계급에 맞서는 등의 분명 다른 형태의 자본주의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미국 아이젠하워 행정부 이후, 노동계급이 점차 지리멸렬해진 점과 이 과정을 통해, 금융과 정보화를 모토로 전세계 자본주의 시스템을 변질 시킨 신자유주의가 능력주의라는 소위 지배 이데올로기적 체제를 정착시켜 왔다고 여겨지는데요. 지금 우리 사회에도 노동자들의 결사권을 국민들이 그저 사전적인 의미로만 이해하고 있지만 노동 조합과 노동 단체에 대한 가히 극렬한 적대감은 앞선 이력과 점차 강화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프로파간다에 기인하고 있는 것은 거의 부정할 수 없을 텐데요. 여기에 저자 고유의 현실 인식이기도 한, 노동 조합과 노동자들의 실질적 힘과 영향력이 사회에서 약화됨에 따라, 이 능력주의적 사고 방식은 그만큼 시민들에게 강하게 내면화 되었다고 보여집니다.

다시 한번 언급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능력주의란 저자의 말마따나 "한국 사회 전체의 지배 이데올로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정말 공정한 시스템이 기반이 된 능력주의라면 부모의 직업과 사회적 지위를 되물림하려는 시도 자체가 자본주의 체제에서 가능해선 안되는 일이지만 소위 이 능력주의를 기반으로 강화된 세습주의적 논리와 계급적 세습을 충족시키기 위해 현실에서 많은 자원이 투입되고 있는 상황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이에 저자는 우리의 능력주의적 이데올로기가 사회적 비판의 칼날을 용인하지 않고 있으며, '지식 중간계급 intellectual middle class'과 같이 상위 계급과 이들 밑의 하위 계급까지, 빙산의 일각과 같은 능력주의를 거의 무분별하게 신봉하게 되었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특히, 1945년 해방 이후, 민간에 의한 사립 대학의 확대는 단순히 부의 획득 과정을 떠나, 이 대학 교육을 비롯한 시스템의 확충이 지식 중간 계급의 출현을 이끌었고, 이들이 결국 상위 계층보다 더 견고한 능력주의의 지지자이자, 체제를 지탱하는 지분을 갖게 되었다고 글 전반에 걸쳐, 논증되고 있습니다.

저는 저자의 이 책을 일독하면서 놀랐던 부분은, 무엇보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명민한 분석이기도 했는데요. 신자유주의가 지구화와 금융, 그리고 정보화를 기반으로 자본주의를 거의 변질시켰고, 이에 가장 많은 수혜를 입은 집단이 누구보다 엘리트 계층임을 스스로 단언하고 있었는데요. 이것을 그저 확대 해석으로 볼 게 아니라, 능력주의와 이 변질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체제 내의 승리자에게 모든 과실을 몰아주고, 특히나 앞선 관리 자본주의적 속성에서 마땅히 관리 계급이라 볼 수 있는 엘리트 전문가 계층이 마찬가지로 부와 지위를 독점하게 된 것은 우리 사회 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이행이 완료된 거의 모든 국가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일 겁니다. 이런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 능력주의가 자본주의가 쉽사리 용인하지 않는 사회 내의 계급화를 촉진시켰고 신자유주의를 수용하고 나서, 거의 모든 시민 계층이 지지할 수밖에 없는 과도한 엘리트주의를 도출해 낸 것은 분명 아이러니이기도 합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마틴 울프는 엘리트 지배 계층이 자신들의 사실상의 이런 수혜가 그저 당연하고 마땅한 것이라 여기지 말아야 할 이유를 몇 가지 논증을 통해 밝히기도 했는데요. 이것은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엘리트들의 헌신'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존중과 사회적 지위를 우선하는 데 있어 사실상 동의를 표한 것이지만, 많은 정치인들이 부르짖는 공정과 또한 적대시 되는 평등에 있어, 이러한 보상 체계가 단순히 합당한 근거 여부를 떠나, 많은 시민들에게는 "살아남기 위해 마땅히 노력해야 하는 사회"로 몰아간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저자는 우리가 능력주의에 대해 진지한 고찰 없이 쉽게 내면화가 가능했던 것은 무엇보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통해 이뤄진 소위 '관리 선발'이라는 '과거 제도'에 기인하고 있다고 주장하는데요. 과거 제도가 단순히 글을 잘 쓰고, 경전을 잘 외워, 이 부분에 대한 자신의 역량을 검증 받은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 과거 시험에서 '그 자격이 있는 선비들'이 국가 관료로 일할 수 있게 된 것인데요. 저자는 이러한 맥락에서 해방 이후, 확대되었던 여러 고시들을 매개로 언급하고 있었습니다. '개천에서 용난다'는 미담으로 한층 꾸며진 이 고시 선발 시스템과 한국형 능력주의는 1987년 민주화 과정을 거쳐, 당시 노동자 계급의 민주화에 대한 기여를 지우게 만들었고, 단순히 가진 돈의 총량으로 측정하는 중산층과 같은 일면적인 수단이 아니라, 앞선 지식 중간 계급이라는 지위와 지식 그리고 돈이 결합된 새로운 계급 시스템을 우리가 고안해 낸 것과 거의 동일한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이렇게 시험주의에 전도된 우리의 능력주의는 모두가 아시다시피, 여기에서 낙오된 많은 시민들에게 사회적 차원에서 다시금 줄 수 있는 '세컨 찬스'를 가능하게 할 어떠한 기회와 소위 패자부활전이 필요하지 않는 사회로 왜곡되었습니다. 특히나 기회의 균등과 보편적 평등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기반이 무엇보다 장애물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평등 자체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무지 내지는 극우에 가까운 인사들이 이를 '철지난 색깔론'으로 매도하기에 이르렀는데요. 평등이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 중 하나 임을 분명 알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폐쇄적인 능력주의를 그나마 인간적으로 만들 수 있는 기회와 시도들을 애초에 꿈도 꾸지 못하게 배제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민주주의는 무엇보다 시민들의 존엄하고 인간 다운 삶을 위해, 이를 보장하고 다각도로 노력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미 기울어진 경쟁이 되어 버린 이 각축장에서, 더 많은 자원을 누가 더 투입할 수 있는가로 결정되는 능력주의적 현실에 눈을 감고, 이런 시스템에서 퇴출될 수밖에 없는 많은 시민들을 구제하는 여건을 자체를 제한하고 오로지 지능과 능력에 몰빵한 더 획일화 되고 폐쇄적인 사회로 치닫게 되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능력만 있으면 성공하고, 많은 돈을 벌고, 사회적 지위를 누리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비꼬고 욕할 수 있는 사회, 과연 이것이 진정 우리가 바라는 사회일까요?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서, 뒤이어 실린 김민섭 작가의 단편은 따로 서평을 남기지는 않겠습니다.


현대 미국 사회의 심각한 불평등은 능력주의의 산물이거나 적어도 능력주의 탓에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문제라고 진단한다.

그러면서 한국적 능력주의는 신자유주의 시기에 성장기를 보낸 한국의 20~30대만이 아니라 그 시기를 함께 겪은 한국 사회 전체의 지배 이데올로기라고 진단한다.

하지만 능력주의와 최악의 자본주의가 결합된 사회를 ‘실제로‘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영의 능력주의가 디스토피아가 아니라 유토피아 소설로 보일 지경이다.

하지만 능력주의 속 세계의 20세기 말쯤이 되면, 능력주의 교육 시스템이 어느새 엘리트 신분을 세습하는 통로로 반전되었음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동아시아 3국에서 과거제를 통해 국가 관료 기구의 상층에 진출하는 것이 출세의 표준이 됐다.

우리에게는 영락없이 조선 시대 양반을 연상시키는 이 생시몽식 엘리트는 한참 뒤 뉴딜 시기 미국의 테크노크라트나 소련 공산당의 고위 간부로 육화돼 지상에 강림한다.

이미 독일 등 몇몇 나라에서 꾸준히 성장하던 새로운 중간계급이 이제 대학 졸업장으로 무장한 채 어엿한 지식 중간계급으로 꼴을 갖춘 것이다.

그 대안들이란 지구화, 금융화, 정보화의 세 가지 커다란 전환이었으며, 이 전환들이 서로 맞물리며 등장해 지금껏 이어지는 역사적 국면을 우리는 흔히 ‘신자유주의‘라 칭하곤 한다.

노동자들은 그저 유식한 척하거나 가방끈이 길어야 더 잘난 사람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따름이다.

하위 중간계급은 확실히 상위 중간계급만큼은 능력주의를 통해 실질적인 이득을 얻지 못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다수는 상위 중간계급과 마찬가지로 능력주의에 적극 동의한다.

이후 법조인뿐만 아니라, 행정 부처와 외무부 고위 관료도 고시를 통해 선발하면서, ‘고시‘는 과거에 ‘과거‘가 그랬듯이 곧바로 엘리트층에 편입되는 시험의 대명사가 되었다.

한국 사회는 지식 중간계급의 세계관이 과도하게 지배하는 사회다.

성별과 빈부를 가리지 않고 모든 시민이 동등한 교육 기회를 누리게 함은 모든 선량한 자유주의자와 담대한 사회주의자의 위대한 이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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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4-04-17 10: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대표적인 엘리트 선발제도인 고시제도가 대한민국 정부수립때부터 있었고,
신자유주의가 득세할수록 고시제도에 대한 공격이 심해진 걸 보면
한국에선 오히려 고시제도가 정부영역의 과도한 시장화에 대한 방어벽으로
어느정도 기능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시 폐지를 주장하는 행정학자나 경제학자들이 민간부문 경력자들을 관리자 계급으로 채용하자는 주장을 시종일관 하며 정부부문에 시장 메커니즘을 도입하려 하는 상황에서,
아직까지 고시제도는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사명감을 가진 엘리트는 필요합니다.

베터라이프 2024-04-17 10:28   좋아요 3 | URL
저 역시 저자의 논점과 동의하게 된 부분은 특별한 선발 시험인 고시와 같은
시험주의가 한국 사회에서 능력주의의 제한된 기회로 자리매김했고
시험 지능과 능력으로 평생까지 돈과 지위를 보장 받는 시스템이 과연
합당한 것인가에 대해 일반적인 의문을 나타내는 인식입니다.
물론 고위 관료 선발을 위한 기회는 모든 시민에게 열려 있어야만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죠 ^^

쓰신 바대로 민주주의 체제에서 엘리트의 헌신은 매우 중요합니다
리처드 벨러미, 한스 포어랜드 등 많은 정치학자들은 이러한 내용에
공감했는데요
그런데 엘리트들이 신자유주의 이행 이후 아주 많이 변질된 것은 분명합니다
능력주의가 사회 기반의 맥락을 부정할 수 없음에도
비타협적 개인주의와 능력 맹신에 이르러
이러한 상황이 더욱 고착화 되었습니다
저는 이런 엘리트들이 다수가 된다면 민주주의에 아주 큰 위협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수의 시민들이 이렇게 가짜 뉴스와 잘못된 프로파간다에 노출된 상황에서는
더욱 말이죠


추풍오장원 2024-04-21 12:17   좋아요 1 | URL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며 엘리트들의 타락이 가속화된것은 분명한듯 싶습니다.
엘리트정신에 대한 재구축이 필요한 시점이 왔다고 생각됩니다.
그래도 한국의 사회경제 특성상 고시제도는 계속 존속되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저처럼 가난한집 아들도 세상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비교적 공정하게 얻을 수 있거든요....

베터라이프 2024-04-21 19:42   좋아요 1 | URL
아무래도 관료 선발 취지의 공개 시험이나 그와 비슷한 제도들은 필요한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저는 기존 체제에서 소외되거나 정규 시스템의 영향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재차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믿는데요. 그건 정치권에서 생각해볼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제도적 차원에서 제안이 있어야하겠죠 ^^ 이렇게 다시 귀한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민주주의적 자본주의의 위기
마틴 울프 지음, 고한석 옮김 / 페이지2(page2)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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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유대계 극작가인 아버지와 친인척 대부분이 홀로코스트 희생자였던 유대계 어머니 밑에서 태어난 마틴 울프는 영국의 저명한 언론인이면서, 파이낸셜 타임즈의 수석 평론가이기도 합니다. 그는 영국 런던 헴스테드 프로그널에 소재한 남학생들을 위한 학교인 유니버시티 컬리지 스쿨 (UCS)에서 교육을 받았고, 1967년 학부 과정을 위해 옥스포드 대학의 코퍼스 칼리지 스쿨에 입학을 했습니다. 이 당시에 그는 그리스 고전을 공부하고, 대학원생으로 같은 대학의 너필드 컬리지로 옮겨, 1971년에 경제학 석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그는 같은 해인 1971년에 세계 은행의 젊은 전문가 양성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3년 뒤에는 국제기구가 인정하는 수석 경제학자로 자리매김합니다. 이후 1981년에 세계은행을 떠나 런던에 소재한 무역정책연구센터의 연구 책임자로 일했고, 1987년부터는 파이낸셜 타임즈에 합류하여 부편집장, 수석 평론가로 활동하게 됩니다. 그는 거의 평생동안 세계화와 자유 시장의 영향력 있는 지지자였지만, 2008년 뉴욕 발 세계 금융 위기를 겪고 나서, 부분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철회하게 됩니다. 현재는 얼마간 케인즈주의를 받아들여, 기존과는 다른 경제학자로 변신하게 됩니다. 그런 연유로 그는 기존의 조지프 스티글리츠와 더불어, 현재 전세계 경제 시스템에 있어, 특히 금융 안정성을 강조하는 학자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영국의 공익 잡지이기도 한 프로스펙트는 그를 일컬어, "영국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금융 저널리스트"라고 평가했습니다. 그의 이 책은 원제, "The Crisis of Democratic Capitalism"으로 2023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4년 4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저자인 마틴 울프는 자신의 책 제목을 통해, 영국과 미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 정치 시스템과 시장 자본주의가 겪고 있는 심각한 문제를 드러내고 있는 것 같은데요. 그는 이후 논증을 이어가며 글의 후반부인 9장과 10장에서, 작금의 민주주의의 위기가 마치, "1930년대의 독일이 민주주의의 후퇴를 경험하고 나서 벌어진 일"이 결코 다른 결과로 나타난다는 보장이 없으며, 일찍이 플라톤이 예견했던 과두제나 혹은 상업주의적 이해관계를 가진 엘리트들이 주축이 되어 조직한 권위주의의 체제를 우리가 쉽게 생각한다면 전면적인 시장의 확대나 경제적 이익과는 하등 상관 없이 시민들 다수는 상당히 억압된 처지로 몰리게 될 것임을 저자는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사실상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엘리트들의 헌신이 공짜가 아님을 드러내는 해석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특히나 1930년대 이전의 엘리트들과 지금의 엘리트들은 그 본질과 성격이 상이하기에 이런 저자의 위기 의식은 현재 돌아가는 상황으로 봤을 때, 결코 과장이 아님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상 이런 파국에 대한 저자의 해법은 아마르티아 센의 처방과 마찬가지로 시민 개개인의 정치적 역량을 증진시키는 일련의 방법인 재교육과 동시에 민주주의적 가치를 시민들에게 이해시키고 이를 통한 시민 의식을 일찍부터 개념화 시키는 것인데요. 다만 현실과 이론의 괴리를 강조했던 가렛 존스는 논란이 된 자신의 논저를 통해, 경제학적인 관점으로 일종의 민주주의 가치에 따른 비용과 갈등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을 줄이기 위해 체질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민주주의가 "아무리 그리스 시대의 오랜 정체로서 기억한다 하더라도, 모든 시민들의 보편적 참정권이 결합된 대의 민주주의는 채 100년이 되지 않았다"는 점은 우리가 상기할 필요는 있어 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에선 흔하게 접하게 되는 '자유 민주주의'라는 현재의 정체를 드러내는 단어가 아니라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로 그 의미상의 방법이 약간 다르게 사용되고 있었는데요. 이는 일전에 데이빗 코츠가 오늘날의 자본주의를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로 이해한 것과 비슷한 예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더욱이 많은 경제학자들과 다수의 정치학자들이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시장 자유'를 좀 더 선명히 강조하고자, 냉전이 종식된 이후에도 자유 민주주의 혹은 자유주의 단독으로 여러 사회학 논저 등에서 쓰이기도 했습니다. 한편으론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냉전의 종언을 뜻하는 (위대한) 자유주의의 승리를 벤치마킹하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아예 밀턴 프리드먼과 같은 이들은 민주주의의 중요한 가치인 시민의 권리라든지 인권의 개념이 시장의 자유라는 요구에 밀려,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확신과 신념을 거의 거리낌 없이 내세우기도 했는데요. 물론 저자인 마틴 울프는 자유 시장의 필요성과 건전한 자본주의적 발전을 인류가 지속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원칙적으로 동의하지만, 학계의 다른 연구자들처럼 민주주의가 자유주의(아마도 신자유주의겠지만)를 위한 조력의 위치로서 먼저 기능해야만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약간의 논외지만 저자는 많은 경제학자들이 민주주의를 그저 시장을 위해 존재하는 체제 정도로 취급해 왔다고 보는 듯 싶었습니다. 이는 비슷한 논점의 질베르 리스트가 해당 분야의 배타적인 전문가들이 경제학을 전문가들이 주도하는 소위 특수한 학문으로 취급해 왔고. 비전공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숫자 모음과 복잡한 도표는 더욱 학문적 폐쇄성이 심화되었다고 분석한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하지만 이보다 기존의 경제학이 작금의 자본주의가 어째서 금융 자본주의로 변질되었는지 답변을 해내는 게 먼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관련해서도 울프는 기업이 종래의 자본주의에서의 본질적 역할이 아니라 금융 자본주의에서는 주주 이익을 증진시키는 하나의 요소로 그 지위가 떨어졌다고 내내 분석하고 있었습니다.     


1930년대 이후, 미국을 비롯한 세계 자본주의가 어떤 흐름에 놓여 있었는지 저자는 충분한 근거를 제시하며, 소위 일부 상위 계층이 주도하는 부의 집중과 그로 인한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 그리고 이론과는 달리 모든 시민에게 적법한 기회의 균등이 제대로 보장되고 있지 않은 현실도 언급하기에 이릅니다. 결국 시장과 민주주의는 서로 불가분의 관계로, 시장은 스스로 법 위에 결코 올라선 안 되며, 시장에 참여하는 주요 경제 행위자는 무엇보다 규칙을 따르는 존재가 되어야지, 그 규칙을 만드는데 관여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는 입장을 저자 역시 내내 주장하고 있습니다. 밀턴 프리드먼이 옹호하고 바랐던 자유 시장과 울프를 비롯한 일부 경제학자들의 입장은 상당히 다르기도 합니다. 저자가 보이는 시장과 거래의 자유, 그리고 대척점에 있는 시민의 권리, 이러한 권리가 더욱 악화되어 갔던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는 어쩌면 시장과 민주주의 양자에 있어 좋지 않은 결론으로 이어질 것임은 거의 자명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 민주주의 하에 기업의 정체성이 과연 무엇이겠는가로 저자는 반문하며, 이 시점에서 환경 문제를 비롯한 지구 상의 산적한 문제에 기업들이 이제 공익적인 차원에서 관심을 보여야 한다는 점도 여느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다시금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글의 2장에서, "경쟁 시장이 실제로 민주주의 정치를 보호한다고 해서 경제적 자유와 정치적 자유가 동일하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점을 저자는 명백히 밝히고 있었는데요. 이는 거래의 자유와 정치적 행동의 자유는 엄연히 다르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어쩌면 최근에 정치 무대에 등장했던 도널드 트럼프와 같은 극우 포퓰리즘의 대두와 이 정치적 자유 담론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볼 수도 있겠는데요. 마틴 울프는 근래 미국 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등에 일었던 우파 포퓰리즘이 장기간의 경제적 불황과 기존 정치가 시민들의 신뢰를 잃은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다고 그 배경을 언급하고, 이들 포퓰리스들은 자신이 발언하는 바를 결코 지키는 법이 없다고 이들의 본질을 파헤치고 있었는데요. 앞선 트럼프와 같은 왜곡된 극단주의자들도 명목상 시장의 자유, 더 나아가 시장에서 거두는 이익에 대해선 인정하지만, 반대로 그와 같은 극우 포퓰리스트들이 어떤 정치적 선명성이나 고결한 도덕성과는 전혀 상관없이, 그저 개인의 알량한 정치적 이익을 위해 시민 다수를 선동하는 상황은 그만큼 시민들의 정치적 참여에 대한한 인식과 그 '자유'에 대한 면밀한 비판적 분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현재 세계 곳곳에서 보이는 극우 정치의 대두는 전반적으로 경제적 실패와 그로 인한 심각한 불평등으로 인해, 현실 정치를 사실상 파국으로 이끈 점은 이를 대변한다고 여겨집니다.

이미 공화당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은 트럼프가 미국 헌법과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워싱턴을 손에 넣었던 것은 분명 아닐 겁니다. 더욱이 그의 폭력적 지지자들이 자신의 선동으로 벌인 의회 점령과 같은 반헌법적 쿠데타와 끊임없이 "대통령 선거를 도둑질 당했다는" 그런 엄청난 거짓말을 공화당이 완벽하게 믿게 만들고, 더 나아가 국내외에 터무니 없이 이를 강조하는 망언은 저자의 냉엄한 평가대로, 극단적 포퓰리즘이 얼마나 미국을 안에서부터 병들게 하고 있는지 충분히 짐작케 합니다. 여기에는 현재 미국의 금권 정치의 심각한 폐단과도 아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는데요. 의회에 집중되는 현금 살포와도 같은 의회 로비는 미국 정치의 건전성을 훼손시켰고, 그만큼 많은 돈과 거리가 있는 다수의 시민들에게서 정치는 괴리되어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기존 미국 정치의 예상 못한 변질은 대외적인 측면에서도 드러나는데요. 과거 신자유주의를 태동시킨 시카고 경제학파와 엘리트들이 그저 미국 정부의 말을 잘 따르고, 패권국 미국의 국익이라는 명목 하에 자신들이 요구하는 경제 체제의 이익을 수용할 수 있다면, 남아메리카에 민주 정부가 아닌 독재 정부라도 용인할 수 있다는 식의 기회주의적인 접근법을 촘스키가 이미 폭로한 바가 있습니다. 저는 신자유주의자들과 소수의 경제 엘리트들이 시장의 자유와 그들에게 유무형의 이익을 가져다주는 미국식의 금융 질서가 무조건 보장될 수 있다면, 과두제나 혹은 심지어 독재라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발언하는 지식인들을 여러 글들을 통해 접해본 기억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제임스 브레넌의 민주주의를 대체하는 그 과장된 아이디어도 마치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의 사실상 편의주의적 발상으로 읽히기도 했는데요. 결국 작금의 능력주의에 심히 전도된 '특권적 엘리트주의'는 우리의 민주주의를 병들게 하는 분명한 요소 중 하나일 겁니다. 이미 저자는 비판적 논증 가운데 일관된 용법으로 '소수의 특권'이라는 인식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또한, 저자는 현재의 자본주의가 소위 지대 추구 자본주의라는 측면에서, 소위 금융 자본주의로 급격히 변질되며, 과세의 의무를 저버리는 부유층의 세금 포탈과 이것을 가능케 하는 법의 조력과 같은 사회적 자원의 독점과 같은 현실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민주주의가 엘리트들의 헌신에 일정 부분 기대고 있지만, 이들 대부분은 이제 능력주의에 기반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서 가히 놀랄만한 이득을 얻고 있는데요. 이런 현실에서 다수 시민들의 인정과 암묵적 동의가 필요치 않게 되거나, 다른 한편으로 특수한 지위로 인한 시장 독점과 정실 자본주의라는 상황 하에 단순히 민주주의 방식으로 위임된 권력 등으로 해명할 수 없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이들은 거의 지배적 계급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자본주의의 병폐라고 일컬어지는 '정실 자본주의'가 실제로 완전히 타파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이해 관계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은데요. 글 후반부인 10장에서 저자는 엘리트 계층이 다수 시민들의 암묵적 지지가 철회되었을 때, 전문가의 영역이라는 측면의 사회적 존중이 더이상 인정되지 않는다면 이들은 실제로 어떤 행동에 나설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었는데요. 이것은 생각만 해도 매우 두려운 부분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결국 다수 시민의 자유와 권리는 민주주의에 기반이 된 '자유주의적 민주주의'하에 이를 성실히 보장해 왔고, 지금처럼 다수의 개인들이 이익 관념에 매몰되어, 과거 히틀러의 독일처럼 흡사 선동 정치에 의해, 민주주의가 아닌 권위주의와 같은 체제로의 이행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면 아마도 그 체제는 시민에게서 자유와 권리를 박탈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이미 '고삐 풀린 민주주의'라는 왜곡된 논법으로 말미암아 시민의 정치 참여 내지는 다수 시민들의 권리가 자본주의를 병들게 한다는 주장들을 숱하게 들어 왔는데요. 반대로 저자는 미국의 능력주의적 논리가 현재 엘리트들이 자신의 능력과 보상 받을 자격을 동일시하며, 과거와는 확연히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고, 이러한 기반에 기댄 '자유주의'가 사실상 민주주의를 배제하려는 상황까지 경고하고 있습니다. 충분한 사회적 자원과 권력까지 획득한 소수의 부유층 내지는 기득권은 어떻게 보면 자유주의적 담론에 기대지 않더라도 자신들의 이익을 확충하는데 크게 제약이 없다고 봐야 할 텐데요. 그럼에도 힘 있는 계급의 자유주의 자체에 대한 배타적 오남용은 법의 원칙과 법의 지배라는 측면에서 어느 정도 이것을 구별할 수 있는 시민들의 능력이 필요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바로 이런 설득 과정에서 저자가 논증하는 10장의 실질적인 '민주주의의 재건'의 필요성이 요구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의 자유 민주주의를 구하기 위해서는 "경제 개혁과 정치 개혁이 필요하다"는 해법에 동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 지표를 통해 현재 미국을 비롯한 다수의 민주주의 국가들이 위기에 놓여 있다는 점도 거의 분명하고, 이에 체제적으로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가 전세계에서 18개국에 불과하다는 현실은 '과잉된 민주주의'라는 담론이 얼마나 허무맹랑한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끝으로 모든 시민들은 자신의 삶을 스르로 통제하고 동시에 삶의 존엄을 바랍니다. 이것은 일관된 자유 뿐만 아니라 합의된 권력 하에, 체제가 이를 먼저 보장할 수 있어야만 할 텐데요. 시민들이 현실 정치에 주목을 해야 하는 근본적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저자의 결론대로 자본주의가 최소한의 건전성을 답보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민주주의가 체제를 지탱했던 것에 기인하고, 이를 통해 인간의 삶을 변화시켰기에 충분히 정당성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맥락에서 정치와 경제는 현실의 문제에서 어떠한 해법을 도출시켜야만 하는지는 거의 자명하다고 판단됩니다.       



-저자는 극단주의적 포퓰리즘, 포퓰리스트들을 분석하며, 이들이 자신이 내뱉는 말을 결코 지키는 법이 없다고 강조하고 있었는데요. 그저 시민들의 분노를 자양분 삼아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챙기려는 셈법이 고작인 자들이 민주주의와 정치를 희화화 했던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내뱉는 말을 결코 지키는 법이 없는 정치인"이 정치 주무대에 등장하게 된 현실은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브라만 좌파(피케티에게서 차용한 것이지만)'라는 수식으로 정체성 정치에 몰빵한 진보 정치를 저자가 비판하는 맥락도 충분히 공감이 되었습니다. 최근까지의 독서를 통해 정체성 정치가 초래하는 폐단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는데요. '제구실을 전혀 못하는 좌파'는 그저 쓸모없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도 주지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경제적 실패는 글로벌 자본주의에 대한 믿음을 흔들어 놓았고, 정치적 실패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를 약화시켰다.

무엇보다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생존 여부는 경제적 자원에 대한 통제권을 정치권력으로부터 분리할 수 있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

플라톤은 특정한 종류의 과두 부유층(금권정치)에 대한 반작용이 민주주의를 폭정으로 바뀌게 할 위험이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기업의 목표에 대한 밀턴 프리드먼의 견해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오랫동안 기업의 주된 목적은 주주 가치를 극대화하는 것이라고 여겨져 왔다.

사람들이 극우파 정치인에게 투표한 이유는 무엇인가? 답은 전통적 좌파는 내부자이자 정치적으로 대변되는 내부자였다는 점이다.

또한 미국은 다른 고소득 국가보다 훨씬 더 많은 의료비(GDP의 거의 5분의 1)를 지출하지만 건강상의 결과는 훨씬 더 나쁘다.

포퓰리스트들은 서로 다른 무늬의 엘리트를 공격하면서 ‘국민‘을 위해 엘리트에 반대한다고 선언한다.

그럼에도 트럼프가 대통령 선거를 도둑질당했다는 엄청난 거짓말을 공화당이 믿도록 완벽하게 설득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성을 거부하고 의견의 차이를 용인하지 않는 것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

경제 정책의 긍정적인 목표 리스트를 찾는 사람들에게 나는 안전, 기회, 번영, 존엄성 등을 네 가지를 제안하고 싶다.

자유주의 우파는 사회보험을 완전히 없애려는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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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와 자유
밀턴 프리드먼 지음, 심준보 외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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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턴 프리드먼은 1912년 7월 31일, 뉴욕 브루클린의 헝가리 왕국 출신의 유대인인 부모 밑에서 태어납니다. 그가 태어난 직후 가족은 뉴저지 주의 유니온 카운티 남부에 위치한 라웨이로 이주를 하게 됩니다. 프리드먼은 처음에 보험계리사나 수학자가 되려고 했으나, 당시 불황에 빠져 있던 경제 상황으로 인해 경제학자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는데요. 그는 뉴저지 주에 소재한 공공 연구 대학인 러트거스 대학의 장학금을 받고 공부한 뒤, 1932년에 졸업을 하게 됩니다. 이후 대학원은 그가 누리는 명성을 실질적으로 가능하게 한, 시카고 대학의 경제학과 진학을 하게 됩니다. 이곳에서 그는 '자신의 평생에 걸친 우정'이라 평가 받는 조지 스티글러와 W. 앨런 월리스를 만나게 되는데요. 결국 그는 동시대의 저명한 경제학자인 존 메이너드 케인스와 비견되는 학자로서의 큰 명성을 얻게 됩니다. 더욱이 그의 또 다른 업적이라 볼 수 있는 소위 '시카고 보이스'로 통칭되는 '시카고 경제학파'의 초석을 쌓은 일인데요. 후에 이들 시카고 경제학파들이 양가적인 측면에서 전세계 경제학계에 끼친 영향력을 짐작해 본다면, 프리드먼의 기여는 의외로 상당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현재에 이르러서 그는 학계를 넘어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 더불어 '신자유주의의 사조'로 거듭 추앙을 받고 있습니다. 그의 이 책은, 원제 "Capitalism and Freedon"으로 지난 1962년에 초도 출판되었으며, 국내 번역본은 시카고 대학 출판부가 2002년 11월 15일 출간한 40주년 기념판을 기반으로, 2007년 4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제가 구입한 판본은 1판 17쇄로, 지난 2020년 12월에 출간되었습니다. 참고 밀턴 프리드먼의 이 논저는 그가 인디애나주 크로퍼즈빌에 소재한 와바쉬 대학에서 행한 일련의 강의에서 얻은 영감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이 글의 서문을 통해, 밀턴 프리드먼은 자신을 '자유주의자'라고 명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 논저의 전체적인 이해를 위해, 저자 스스로가 밝힌 '자유주의'를 먼저 언급할 필요가 있겠는데요. 과거 18세기 이후, 계몽주의에 기반한 전통적 자유주의는 밀턴 프리드먼이 인정한 바대로, "자유와 복지, 그리고 평등'을 포함한 시민권 개념과 인간의 기본 권리에 대한 총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프리드먼 스스로가 강조하는 자유주의는 앞선 의미가 아니고, 확연하게 다른 "경제적 자유주의와 시장 자유에 기반한 맥락으로 여기에 정부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어떠한 것에도 반대를 표명하는 인식입니다. 물론 그는 이외에도 "자유를 촉진하는 국가 개입이라면 당연히 유지하고자 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는데요. 다만, 이 글이 나오게 된 시기가 냉전이 첨예한 때였기 때문에 그에게 미국과 대결하는 소련의 체제와 그에 따른 집산주의에 결연히 반대하는 목적도 분명 있었을 겁니다. 그런 측면에서 하이에크과 그는 인식의 궤가 동일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밀턴 프리드먼은 우리에게 적극적인 통화주의자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오늘날 신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와 그에 따른 관세 철폐와 같은 자유 시장 개념을 도출한 경제학자로도 읽히는데요. 다만 저 개인적으로 그의 이 논저를 일독하고 나서 들었던 생각은 그가 '시장 자유주의자'에 가까운 게 아닌가 싶었는데요. 더욱이 스스로가 무정부주의자가 아님을 강조했기에 시장 자유에 대한 본질적 기대를 민주주의가 지원하고 그에 따라 다수의 이익이라는 측면의 공통된 가치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요. 결국 이러한 메커니즘에서 '시장 자유'가 자본주의의 근간인 동시에, 이런 자유가 인간의 이익과 복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확신을 드러내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공익에 대한 언급은 이 글에서 미처 몇 번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더욱이 민주주의에 대한 경제학자의 불명확한 이해도 역시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적 자유'에 대한 그의 회의적인 분석은 앞선 저의 느낌을 부정적인 측면에서 뒷받침하고 있다고 여겨지는데요. 따라서 이 글의 2장은 민주주의에 기반한 정부의 역할이 시장에서 보장된 개인들의 '거래의 자유'를 지원하는 것이 일차적 목적이고, 이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거래가 결과론적으로 정치적 자유를 포함한, 경제적 자유 담론의 중요한 지점이라고 해석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도 익히 알다시피 우리가 살고 있는 작금의 세계는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에 의해, 시민들의 정치적 자유의 실질적인 축소가 몸으로 느껴질 정도로 악화일로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결국 우리의 정치적 자유를 비롯한 전반적인 민주주의의 쇠퇴는 이렇게 복잡한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민간의 권력이 정부의 권력을 견제하고 감시한다는 그의 일관된 생각은 시장이 정치에 제한을 받지 않는 운신의 자유를 일컫는 소위 자유주의적 보장이 정부의 오판을 방지함은 물론, 그런 정부가 시민의 자유를 제한하는 일련의 움직임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8장의 독점과 관련된 프리드먼의 논증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정부의 독점을 용인할 바에는 차라리 울며 겨자 먹기로 민간 부문의 독점을 차라리 선택하겠다는 일종의 차악의 선택을 가리키는 것인데요. 사실상 독점에 대한 프리드먼의 인식은 불가피한 '기술적 독점'상황을 먼저 예시로 들고, 이것을 어떻게 다룰 수 있을 것인지 그에 대한 분석을 사실상 회피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민간의 독점을 명쾌한 경제적 기법으로 해결하기 보다는 그것 자체로 발전된 경제 사정이라고 보는 측면도 '시장의 합리성'을 너무나 과신하는 것으로도 읽히는데요. 그저 애매한 설명으로 '법에 의한 규제'로 제시하면서 시장에 미칠 독점의 폐해를 어설프게 비켜가고 있습니다. 물론 그가 예시를 드는 것들이 가히 미국적인 것인 것이라 볼 수 있는 연방 정부와 그 사이의 민간 독점 문제이고, 그는 이것의 타개책으로 세법 상황에서의 '법인세 폐지'문제를 제시하고 있는데요. 이 부분은 상당히 논쟁적이지만 독점 상황과 상당히 관련 있는 면허 제도와 관련해서 예를 들어, 의사들의 면허와 같은 '면허제'의 사실상 폐지를 주장하고 있기도 합니다. 특히 의사 면허 제도와 같은 시스템에 있어 프리드먼은 의사와 관련된 면허제 전반을 살펴보고, 끝내 '의료업의 요건으로서의 면허 폐지'라는 결론에 이른 것인데요. 의사와 의사 협회,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의사 협회와 같은 특수 이익 단체의 문제점들을 열거하며 이러한 '전문가들의 독점'을 언급하는 부분은 꽤나 충격적인 부분이었습니다. 이는 신자유주의자들이 어느 정도 기득권과 특히나 전문가 그룹의 특수 이익을 사실상 자본주의적 속성이라고 볼 수 있는 능력주의와 맞닿은 것으로 이를 사실상 용인하고 긍정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연유로 프리드먼의 이와 같은 주장은 막상 눈으로 보면서도 쉽게 믿을 수 없는 부분이었습니다.

더욱이 해당 장에서 논의되는 의료 협회 내지는 의사들이 기반이 된 이익 단체에 의한 사회의 부정적인 파급을 그는 언급하면서, 다수의 사람들에게 적절한 의료 서비스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이러한 의료 단체 혹은 협회가 병원과 사회에 통제력을 유지하고 있는 부분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바로 이러한 맥락이 기반이 된 서술은 프리드먼이 앞서 강조한 "독점적 지위의 형성"이라는 가시적 문제와도 결부되어 있습니다. 사실 의사들은 어느 사회에서나 특수 지위를 갖는 직군이라 이들의 이익을 어디까지 보장하고 용인할 것인가에 대해 단순히 의료 서비스 제공 문제를 떠나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프리드먼은 경제학자로서 자신이 일관되게 강조하는 '시장 접근에서의 자유'를 기반으로, 이들 의사 단체들의 독특한 폐쇄성과 통제력은 앞선 '자유'에 있어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의료 시장에서의 접근 자유'가 우리들의 공익에 중점이 될 부분이기도 하지만, 면허 등록과 관련된 프리드먼의 "자유주의 원칙에 비추어 이익과 불이익의 대차대조표를 만들어 볼 필요가 있다."는 꽤 면밀한 제안은 의외로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더욱이 무능한 의료 행위로부터 일반 시민들을 보호할 필요가 있고, 의료 과실에 있어 보다 보상이 어렵게 된다면 이는 의료 행위의 수준을 저하시키는 것에 이를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결국 이 같은 면허제도는 정당화하기 어렵다고 논증되면서 이에 면허 제도를 옹호하는 사람들과 자유주의자들 사이에는 확실히 인식의 간극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데요. 더욱이 의료협회를 노동조합과 비교하여 인식하고 있는 프리드먼의 진술은 이 부분대로 충격적이라고 느껴질 만합니다. 앞서 노동조합에 대한 프리드먼의 부정적 인식을 감안해 본다면 그가 '시장 접근으로서의 자유'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앞선 부분과 별개로 그가 얻은 통화주의자라는 명성은 화폐 교환의 문제, 더 나아가 대략 자유로운 화폐 교환 시장의 필요성을 짐작하게 하는데요. 과거 미국의 금본위제와 관련해, 내국인들의 금소유 및 금거래 문제에 대한 정부의 견제를 비판합니다. 즉 이는 내국인에 대한 차별로 확장되는데요. 뿐만 아니라, FRB 조직 이후, 이 조직이 미국의 시장과 경제 정책에 있어, 부정적인 영향을 끼쳐 왔다는 프리드먼의 주장은 통화와 화폐에 대한 그의 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거듭 강하게 이러한 '소수의 조직'에게 그런 권력을 부여하는 정당성이 어디에 있는지 계속 의문을 표하고 있는데요. 완고한 시장 자유주의자가 시장에 어떤 통제를 가할 문제를 따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게 여겨지는데요. 더욱이 그는 1931년의 경제 지표를 들고 와서 당시의 연준이 국내의 통화량 감소를 그저 수수방관하고 있었다고 비판하는 부분은 거의 노골적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상업은행의 건전성을 FRB가 사실상 해치고 있다는 측면의 인식과 더불어, 통화 당국과 다름없는 FRB의 시장 개입과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 연방 정부의 시스템적 묵인 등을 꼬집으며, 이러한 법제화가 과연 올바른 통화 정책의 수렴으로 이어질 것인가에 대해 프리드먼은 극히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즉, 결과적으로 "통화량 증가율, 부채관리, 은행감독 등을 처리하는 문제에 대해서 부적절하게 많은 재량권이 연준과 재무부 당국의 수중에 남아있게 될 것이다."라고 이를 강도 높게 비판하기에 이릅니다. 다만, 저 개인적으로는 앞선 의회가 주도하는 통화 전반을 비롯한 시장 위기에 대한 법제화가 정치적 당리당략으로 좌우되는 수단이 될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물론 프리드먼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1933년에 제정된 '글래스-스티걸 법안'의 무력화가 시장에 어떠한 참혹한 결과를 초래했는지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데이빗 코츠와 같은 경제학자들은 프리드먼과 하이에크의 초석으로 제안된 신자유주의 경제, 그리고 이 체제를 강력히 옹호한 일련의 신자유주의자들이 특히 국방 분야에서 만큼은 정부의 자금 지원을 용인했던 진상과 그리고 2008년의 뉴욕발 세계 금융 위기에서 보인 극심한 도덕적 해이라는 민낯을 비판했습니다. 이에 10장에서 프리드먼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발전이 급속히 이루어짐에 따라 불평등이 점차 감소하고 있다는 식의 장미빛 미래를 강조하는 부분은,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자들이 영혼이 없는 인간의 말처럼 '시장이 알아서 공익에 기여할 것'이라는 확신 아닌 확신과 흡사합니다. 프리드먼은 이토록 자신의 논저에서 복지 담론과 케인스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했지만 불행하게도 그 어떤 대안도 명확히 제시한 바가 없는데요. 물론 그는 말년에서야 "사회 정의'에 대한 회의적 인식을 상당히 철회하긴 했지만 그가 말하는 공익과 공공선이 과연 무엇인지, 여기에선 명확히 제시되지는 않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접근에서 밀턴 프리드먼의 많은 주장들은 우리가 비판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어 보이는데요. 특히나 존 스튜어트 밀과 애덤 스미스를 제한적으로 인용하고, 특히 애덤 스미스의 '도덕 감정론'은 마치 지구상에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도덕 철학자이기도 한 스미스를 그저 '시장의 화신' 정도로 소급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학자의 양심과도 맞지 않는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프리드먼이 이 글을 쓰게 된 역사적 맥락이 당시 세계의 불안전성에 기인했다는 점은 이해할 필요가 있겠는데요. 그가 평생 견지하고 있었던 '자본주의적 기반의 자유 세계'라는 일종의 신념이라고 봐도 무방해 보입니다. 그럼에도 그가 2006년이 아니라 최소한 2010년까지 생존해 있었다면, 2008년의 기록적인 전세계 금융 위기 사태의 원인이 된, 중국발 자금으로 막대한 신용 생활을 하고 있던 미국 시민들과 그것을 부채질한 은행들의 도덕적 해이를 그가 과연 어떻게 인식했을지 지금으로선 너무나 궁금해지는데요. 또한 신자유주의자들이 그저 맹목적으로 내뱉는 '대마불사' 같은 말장난이 아니라, 시장의 붕괴라는 측면에서 그저 막대한 공적 자금으로 구제할 수밖에 없었던 정부와 그 상황을 프리드먼은 과연 이를 어떻게 판단했을지도 마찬가지로 알고 싶습니다. 
 




더구나 실제로 보수주의자라는 용어는 너무나 차이가 큰 입장들과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입장들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불가불 자유주의적 보수주의나 귀족적 보수주의와 같은 복합형 신조어들이 늘어나는 현상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적인 경제체제와 자유롭지 못한 정치체제의 조합도 분명 가능하다.

자발적인 협력을 통한 조정의 가능성은, 종종 부정되곤 하는 기본적인 명제, 즉 경제적 거래가 ‘쌍방 당사자 모두에 의해 자발적으로 이루어지고 동시에 쌍방에게 똑같이 충분한 정보가 주어져 있다면‘ 쌍방 당사자 모두가 일득을 본다는 명제에 기반하고 있다.

만약 공동의 행동을 위한 합의의 범위를 사람들이 항상 일치된 견해를 가질 만한 한정된 범위의 문제들로 제한할 수 있다면, 이러한 부담은 크게 완화될 수 있을 것이다.

시장을 통해 이루어지는 활동의 범위가 커지면 커질수록 명확한 정치적 결정이 필요한, 따라서 합의를 이루어야 하는 쟁점들은 더욱 적어진다.

정부가 수행하기에 적합한 활동이 무엇인지 결정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문제는 서로 다른 개인들의 자유가 저촉되는 것을 어떻게 해소하느냐 하는 것이다.

정부는 인종의 분리나 통합 중 어느 하나를 시행해야만 한다. 내게는 어느 쪽이나 다 나쁜 해결책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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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4-04-14 17: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탄이 나오는 멋진 서평입니다.

베터라이프 2024-04-14 17:46   좋아요 1 | URL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프리드먼의 이 책은 제가 프리드먼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쪼록 많은 분들이 일독하셨으면 좋겠습니다 ^^;
 
순수의 시대 (양장) 앤의서재 여성작가 클래식 4
이디스 워튼 지음, 신승미 옮김 / 앤의서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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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전의 이름이 이디스 뉴볼드 존스였던 워튼은 1862년, 미국 뉴욕시의 브라운스톤에서 태어납니다. 그녀의 부계 쪽은 부동산으로 돈을 많이 번 부유층으로 사회적으로도 꽤 저명한 가문이었습니다. 남북 전쟁 기간 중에 태어난 워튼은 그녀의 가족들을 따라 1866년부터 1872년까지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을 장기 여행 목적으로 방문하면서 전쟁과 자연스레 멀어졌습니다. 이미 어렸을 적부터 글쓰기에 소질이 있던 워튼은 15세가 되던 해에, 중편 소설을 썼고, 1878년에는 24편의 시를 포함해, 몇 가지 글을 비공개 출판하기에 이르는데요. 이처럼 초기 성공에도 불구하고 가족이나 사교계의 격려를 받지 못했고 그녀 나름대로 글쓰기는 지속했지만 1889년에 그녀의 새로운 시가 출판될 때까지는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10대 시절을 보낸 뒤, 그녀가 23세가 되던 1885년에 12살 연상의 에드워드 로빈스 와튼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녀의 남편인 테디 워튼은 보스턴의 유력한 가문 출신으로 만능 스포츠맨이자 그 시대의 존경 받는 신사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만성 우울증에 시달리며 정신적 문제를 끊임없이 드러내자 이 부부는 결혼 28년만인 1913년에 비로소 갈라서게 됩니다. 이후 그녀는 전세계를 돌며 여행을 하다 곧이어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바로 프랑스 파리로 돌아와 정력적으로 전쟁 구호 활동에 나서게 됩니다. 이에 왕성한 집필 활동을 병행하며, 평생에 걸쳐 수십 편의 소설을 발표했고, 또한, 이 시기에 워튼은 헨리 제임스, 조셉 콘랜드 등의 당시 문호들의 작품들을 영어로 번역 출간하는데 관여하고, 이러한 활동은 당시 미국 대통령인 시오도어 루즈벨트의 관심을 받기도 합니다. 바로 그녀에게 1921년, 미국 여성 최초로 퓰리처 상을 안겨 준 작품이 바로 이 '순수의 시대'였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책은, 1920년, 미국에서 초도 출간되었고, 이 새로운 국내 번역본은 2023년 5월 출판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워튼의 소설을 일전에 1부를 일독하고 나서, 오늘에서야 2부를 마저 소화하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인 일 때문에 여태 까맣게 잊고 있다, 이제야 겨우 완독을 할 수 있었는데요. 그렇게 쉼 없이 2부를 완료하고 나서, 워튼이 절묘하게 배치한 스토리 상의 예측 못한 사건들로 인해 정말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2부 후반부의 서사는 당시 복잡한 시대상 만큼이나 구조적으로도 거의 탁월하다고 볼 수 있었는데요. 이 작품의 주인공인 아처 뉴랜드와 엘런 올렌스카 백작 부인(극중 내내 신분상 유부녀이기에)과의 안타까운 -관점에 따라- 엇갈림이 그러한 복선 이후, 생각지도 않은 흐름으로 이어질 줄은 거의 상상을 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에 작품 후반부에서 더욱 드러나는 워튼의 탁월한 필력과 연달아 터지는 사건의 흐름 상, 예측 불가능하면서도 그 특유의 시대상을 보여주는 묘사와 특히 유럽의 흔적이 묻어 나오는 뉴욕 시에 대한 설명도 대체로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워튼의 이 작품 역시도 오래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미국 뉴욕의 명문가 중 한 곳인 '뉴랜드'가의 촉망받는 청년인 아처 뉴랜드는 이 신대륙에서 보이는 과거 유럽의 귀족적 유산과 다른 말로 관습이라는 본질을 때론 비판적으로 잘 이해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겉으로는 나무랄 데 없는 행동거지와 '뉴욕의 신사'를 잘 연기하고 있지만 여느 젊은이들처럼 이 시기에 홍역처럼 겪게 되는 '남녀 간의 열정'에 대해서도 무지하지 않은 캐릭터이기도 합니다. 그는 곧, '가문 대 가문'으로 맺어지게 될 메이 웰랜드와의 약혼과 이 둘을 진정으로 이어지게 할 결혼에 대해서도 본질적인 열망을 갖고 있습니다. 작가인 워튼이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는 않지만 앞으로 결혼하게 될 메이와의 육체적 관계를 기대하고, 이를 통한 서로 간의 뜨거운 사랑을 어느 정도 원한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다만 이러한 스스로의 본심을 가문의 적장자로서의 위신을 지키기 위해, 더불어 뉴욕을 대표하는 가문의 일원으로 그가 다소 경멸하는 '뉴욕의 일반 시민들'이 행동할 법한 그런 무모성과 충동을 비판적으로 언급하는데요. 하지만 그런 그도 엘런을 극적으로 대면하고 나서 일전의 사고와 행동이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극 서사를 이끄는 인물이라 볼 수 있는 엘런은 아처와 약혼을 한 메이 웰랜드의 사촌 언니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메이의 모친과 올케 사이인 밍고트 부인의 손녀로 그녀 역시, 뉴욕의 상류 계층 가문의 일원입니다. 일찍이 그녀는 폴란드의 백작가에 시집을 가, 현재는 위태로운 결혼 생활에서 염증을 느끼고 도피하여 뉴욕으로 온 상황인데요. 뉴욕의 명문가를 구성하는 각각의 이름들은 자신들의 삶에서 '이혼'자체를 모욕으로 여기기에 웰랜드 가를 비롯한 저명한 인물들이 엘런의 '조기 복귀'를 매우 애타게 바라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처는 미래의 아내 될 사람의 사촌이 상류층이 한 몸으로 원하는 그녀의 이혼 방지를 위해, 설득을 위한 대리인으로 나서면서 엘런과 특별한 연을 맺게 되는데요. 결국 엘런은 아처의 바람대로 이혼 자체를 무기한 연기하게 됩니다. 물론 이는 두 사람 사이에 점차 깃들게 되는 흠모와 애정에 기댄 결과물이기도 했는데요. 극 초반에 아처와 메이 이 커플의 약혼에 대한 일련의 과정과 근본적으로 아처가 간절히 원했던 메이와의 즉각적인 결혼으로 1부는 그렇게 마무리 되고 되고 있었습니다.

유럽에서 기인한 구 시대의 유산이라고 볼 수 있는 귀족 특유의 소산들과, 거의 구태에 가까운 경직된 규범과 이를 바탕으로 이뤄지는 사교 모임과 각종 파티는 이 소설에 있어 주요한 사건의 근본 원인이 됩니다. 이미 여기서 그려지는 뉴욕은 점차 이러한 시대착오적인 귀족적 유산이 사라지고 있었고, 신문 지상을 오르내리는 몇몇 가문들의 밀접한 교류를 제외한다면 빠르게 퇴색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소위 뉴욕의 상류 계급들은 자신들만의 법칙과 사교적 틀을 유지하고 있었는데요. 바로 이런 범주 바깥에 있는 인물로 그려지는 것이 엘런입니다. 그녀는 진정 예술을 사랑하고 이해하는 특별한 감각을 가진 인물인데요. 더불어 결혼 제도와 여성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결혼 생활을 잠정적으로 거부하고, 경제적 독립을 비롯, 스스로의 진정한 '자유'를 원하는 여성이기도 합니다. 아처에게 있어 엘런이라는 캐릭터는 자신의 어머니나 여동생처럼 흔히 주변에서 볼 수 있던 여성으로서 해서는 안될 사회적 금기와 대척점에 있는, 소위 다른 세상에 서있는 여성이기도 한 데요. "여기서는 아무도 진실을 알려고 하지 않아요."라고 꼬집어 말하는 엘런은 뉴욕 사교계의 염증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이런 사교계와 전혀 어울리지 못하는데요. 그녀가 삶을 대하는 태도, 사람을 보는 시선, 사소한 집안의 인테리어 마저 엘런은 여느 여자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런 엘런과 여러모로 얽히고 비교되는 캐릭터가 바로 메이 웰랜드입니다. 그녀는 이 상위 계층의 여성들이 마땅히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등을 여실히 인식하고, 여기에 자신의 감정을 배제하여 상대방에게 원하는 바를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전형적인 인물입니다. 메이의 이 모든 지침은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비롯 되었고, 그녀의 부모가 그리 원만한 부부가 아니었음에도 어머니가 노력했던 것처럼 메이 역시 아처와의 결혼 생활에서, 미소 속에 자신의 감정을 곧잘 숨깁니다. 메이는 아처가 본질을 깨닫는 여러 대사들을 통해, 그를 향한 그녀의 배려와 이해심, 다른 한편으로 그녀 자신을 스스로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합니다. 또한 남편인 아처에게 때론 무감한 태도와 아내의 절제를 보이기도 하지만 엘런과 남편 간의 감정에 대한 실체를 누구보다 재빨리 깨닫기도 하는데요. 하지만 이를 아처에게 직접적으로 내색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결혼 드레스를 통한 소심한 복수를 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치기 어린 반항에 지나지 않았는데요. 후에 뉴욕 사교계의 갈등 원인들 중 하나로 언급 되지만 뉴욕을 떠나 워싱턴에 임시 거처를 두고 있던 엘런과 이런 그녀와 만나려는 아처의 행동을 아내의 입장에서 극렬하게 저지하지 않고, 오히려 겉으로 나마 자신이 두 사람의 재회가 집안의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것으로 받아들여, 그녀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위선을 잘 감추지도 못합니다. 그럼에도 지난 시대의 귀족 계층이 중요시 여겼던 부부간의 덕을 인정하고, 특히 부부간에 눈빛과 표정의 변화 만으로 이를 짐작하고, 크게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서, 어떻게 보면 메이는 가정의 평온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것인데요. 무엇보다 스스로 느끼는 감정을 오롯이 남편에게 이해 받으려고 도를 넘게 되거나, 자신이 익히 인지하고 있는 아내의 의무를 망각하게 되는 것을 경계한 메이는 작가가 살았던 현실 세계의 결혼관과 맞물려, 어떻게 보면 워튼 본인의 경험을 글에 녹여낸 것으로도 읽히는데요. 다만, 극의 후반부로 다다를수록 저 저 개인적으로 중요하게 봤던 장면은 이런 뉴욕 상류층의 극도의 위선과 허울을 작품 전반에 덧대고, 이를 여러 인물들의 행적과 굴절된 대화로 드러내는 서사 전반이 갓 결혼한 상류층 계급의 남성과 주변으로부터 홀대 받는 유부녀와의 거의 통념을 벗어나는 애정 행각과 대비되는 서사 자체는 뭔가 특별하게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일정 부분 금기에 대한 인간 본연의 욕망과 더불어, 이와 상반되는 사회가 현격히 통제하는 이런 관습적 틀을 평소에 경멸해 마지 않던 인간도 이를 쉬이 벗어나기란 어려운 것이 그 실체라는 측면에서 말입니다.   


이처럼 '성가신 가족의 의무'라는 명목으로 남편인 아처가 엘런의 문제를 직접 해결하기를 바랬던 메이는 자신 또한, 그의 아내로서의 의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엘런의 이혼 문제와 관련해, 많은 유럽인들이 자신들과 같은 미국인들을 일컫는 '신대륙의 상류 계급'을 경멸할 수도 있는 문제였기에 아마도 자신 역시 그런 남편과 사촌 언니의 벌어질지도 모르는 불미스러운 일로 인한 이혼은 전혀 해당 사항에 없었을 겁니다. 물론 워튼이 아처와 엘런의 이뤄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가졌는지는 여러모로 불확실하게 보인 점은 사실인데요. 작가인 그녀 역시, 자신의 삶에서 불륜을 경험해 봤지만 이미 거듭된 몇 번의 대화와 나레이션을 통해, 엘런이 어느 곳에 가더라도 '사랑의 도피'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을 스스로 몸서리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에 엘런이 아처를 향해, 자신의 입으로 '정부 情婦'라는 단어를 입에 담아 아처를 몹시도 당황하게 만들지만, 당시 뉴욕 상류층이 누구보다 정직과 도덕률을 지켜야만 했던 것을 고려해 본다면 아처에게 그와 같은 선택지는 거의 가능하지 않았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결국 누구보다 남편으로부터의 자유를 원했던 엘런의 운명은 사실상 거부되는데요. 다만 이 지점에서 아처 이전에, 웰랜드가를 비롯, 뉴욕 사교계가 그녀를 체제를 흔드는 터무니 없는 여자로 취급하고, 그녀를 향한 굴레 자체는 거의 지독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녀가 뉴욕과는 어울릴 수 없는 외부인과 다름없는 내부인으로서, 이 엘런이라는 캐릭터는 아마 작가가 자신을 투영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보게 되었는데요. 바로 이런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아처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도피를 꿈꾸게 되지만 아처 부부의 갑작스런 변화로 말미암아 극은 예기치 않은 흐름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훗날 아들의 입을 통해, 지난날 엘런과의 이뤄질 수 없었던 사랑을 다시금 듣게 된 아처는 세상을 먼저 떠난 메이의 짤막한 소회를 접하게 됩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큰 감동을 받았는데요. 결국 메이는 누구보다 자신의 남편을 신뢰했고 또한 경애했음을 간접적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여러 작품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뜻하지 않게 쉽게 부서짐을 극명하게 드러냈던 워튼을 잘 알고 있던 저로서는 이 소설에서의 결말 만큼은 정말 의외이기도 했는데요. 한 남자를 둘러싼 두 여성의 극명한 인물상, 여기에 뉴욕 상류층을 배경으로 제 예상을 한참이나 벗어난 시대와 관계의 진정성을 고찰하여 극에서 도출된 여운은 참으로 한편으로 이디스 워튼 답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사랑에 대한 개인의 원초적인 열망은 누구에게나 다르게 작용되고 때론 예기치 않게 불행한 결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사랑에 대해 신중해질 필요가 있다는 지난 시대의 금언은 어떻게 보면 철지난 문답 정도로 취급되는 시대를 워튼은 마지막으로 그려냅니다. 어쩌면 이는 누구보다 결혼 자체에 대한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았던 시대를 살았던 한 여성으로서, 후반부에 언급되는 아처의 소회와 그런 의미에서 결말 부분의 '시대가 바뀌었다'는 독백은 한때 나마 그런 자유로운 열망을 몸소 경험했던 작가와 가정을 지켜낸 주인공과 묘하게 오버랩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는 성장한 아들의 보다 유쾌하고 자유분방한 삶과 맞물려 주인공 아처의 개인적인 이야기와 극적인 엘런과의 재회는 그만큼 보다 큰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 '책 읽는 남자'에 대한 워튼의 일관된 묘사는 이 작품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미 환락의 집과 버너 자매에서도 책 읽는 남자에 대한 작가의 특별한 애정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지성을 이해하는 남자에 대한 묘사와 그런 설정은 이미 여러 여류 작가들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는데요. 지식이 한때 남자들의 전유물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이해해 본다면 이는 여러모로 상당히 복잡한 의미가 아닌가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그들이 속한 세상의 사람들은 은근한 암시와 섬세한 배려가 가득한 분위기 속에서 살았고, 젊은이에게 그와 그녀가 한 마디 말도 없이 서로를 이해한다는 사실은 어떤 설명보다도 두 사람을 가깝게 해주는 듯했다.

약혼녀에게서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점은 두 사람 다 자라면서 배운 대로 ‘불쾌한‘것을 무시하는 관례를 최대한 따르려는 단호한 의지였다.

‘품위 있는‘ 남자로서 자기 과거를 숨기는 것이 그의 의무이고 혼기가 찬 아가씨로서 숨길 과거가 없는 것이 그녀의 의무인 마당에, 그와 그녀가 서로에 대해 무엇을 제대로 알 수 있을까?

예절에 따르면 숙녀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신사들이 차례대로 옆에 앉을 때까지 우상처럼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기다려야 했다.

인간의 비열함에 대한 본능적인 혐오감과 인간의 약함에 대한 본능적인 동정심을 조화시키려다 보니 골치가 아팠다.

언제나 아처는 사람의 운명을 결정짓는 데는 자신에게 일어나게 하는 타고난 기질이 우연과 환경보다 큰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그는 아마도 그녀가 일이 벌어질 때마다 최선을 다해 그 일을 해결하면서 삶을 헤쳐나가겠지만 슬쩍이라도 미리 내다보고 생각해 두는 일은 결코 없으리라 판단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난 당신에게 완전히 솔직해지고 싶어요. 나 자신에게도 오랫동안 이런 기회가 오기를 바랐어요. 당신이 날 얼마나 도와줬고 어떻게 바꾸어놨는지 말할 기회요."

그녀의 선택은 그가 더 가까이 오라고 부탁하지 않는 한 그의 근처에 머무는 것이 될 터였다.

하지만 아마 메이는 마담 올렌스카가 별거한 아내보다는 불행한 아내로 사는 것이 더 낫고, 돌연 제일 기본적인 일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게 되어 골치가 아파진 뉴랜드와 이 일을 상의해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가족의 의견에 공감했을 것이다.

"꼭 엘런을 만나러 가요."메이가 그늘 하나 없는 미소를 짓고 아처를 똑바로 쳐다보며, 성가신 가족의 의무를 소홀히 하지 말라고 권하는 것 같은 말투로 덧붙였다.

그가 자신의 운명과 싸우는 동안 그녀도 자신의 운명과 싸웠고,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배신하면 안 된다는 결심에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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