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중심리
귀스타브 르 봉 지음, 이재형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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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소위 군중심리에 대한 초기 이론적 분석과 서술로 뮤명한 귀스타브 르 봉의 책을 이제서야 접하게 되었습니다. 2014년 1판 4쇄로 찍힌 책을 구했는데요. 예상외로 이 책에 대한 관심이 적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아마도 관련 전공자들이나 교수들이 많이 구입들을 했겠죠.

저는 얼마전에 읽은 폴 태가트의 ‘포퓰리즘‘을 통해 군중과 포퓰리즘 정치가와의 상관관계에 대해 추론해보다 르 봉의 이 책을 이론삼아 찾아 읽어봐야겠단 생각을 했습니다. 최근의 자료를 바탕으로 서술해 나간 글은 아니어서 뭔가 경험주의를 위해 데이비드 흄을 읽게 되는 것처럼 약간의 부담감이 있었습니다만 보기와는 다르게 꽤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 아주 최근은 아니지만 프링스 혁명 시기를 배경으로 당시 군중과 다소 폭력적이었던 프랑스 공화주의에 대해 연관지어 설명을 하고 있기에 좀 더 호기심이 발동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르 봉은 프랑스 혁명과 그 이후 나폴레옹 제정 시기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접했을 만한 시기를 살다 갔기 때문에 아마도 그런 부분에서 이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군중은 고립된 개인과는 달리 다수가 모여 일종의 집단적 정신 상태를 갖게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더욱이 전자는 자극이나 충동에 자제력을 발휘할 수 있지만 후자는 그런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고 르 봉은 말합니다. 이렇게 군중이 변덕스럽기 때문에 그들을 다스리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되는데, 그들이 공권력 일부를 장악했을 때 특히 그렇다는 점과 이는 프랑스 혁명의 순간에 광기에 휩쌓여 벌인 잔혹한 반대파들의 처단, 폭력, 살인 등이 생생한 증거라고 봐야겠죠. 인류의 역사에서 이성이 감정을 제대로 제한하고 관리한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에 감정 스스로 이성의 지배를 받지 않은 경우가 수두룩하게 많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또한 군중은 특정한 단어와 그를 바탕으로 해석되고 재생산되는 계산된 행위에 따라 무력화될 수도 있고, 이것은 정부를 구성하는 어떤 요인에 따라 특성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의 민족성에 따라 구별되는 것으로 보이며, 르 봉은 영국의 영국인들의 정부, 북미의 미국 정부와 이베리아 반도의 스페인들 혹은 남아메리카의 스페인 계열의 정부 등이 오늘날 어떻게 다른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쉴새없이 인종적인 차이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요. 그가 특출난 인종주의적 세계관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학문적 사고를 통해 이런 인종적 특성이 갖는 군중 심리에 대해 나름 판단을 하고 있는 듯 했습니다. 거의 인종적인 유전적 차이에 이러한 군중의 성격과 행동방식이 다르다고 해석하는 것은 오늘날 현대인들이 보기에 꽤 인종차별적인 해석이긴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군중들 뒤에 자리하고 있는 특정 지도자의 역할이 중요하고 군중에게 암시를 준다거나 환상을 갖게 하는 등 그 의도에 따라 군중의 전체 행동의 양상이 달라지는 경우도 있다고 이 책에서는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는 자신의 개인적 역량을 통해 기존 정치 체체와 엘리트 정치를 분쇄하려는 포퓰리즘적 정치 지도자와 매우 흡사했는데요. 글 전체를 아우르는 르 봉의 주제는 이 군중들을 과연 민주주의 정치에 도움이 될 만한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지에 숨은 의도가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장 자크 루소를 통해 자유주의적 정치관에 대해 일견 긍정하고 있는 르 봉의 정치적 태도를 봤을 때 이 점은 그에게도 중요한 관심거리였을 겁니다. 즉 프랑스 혁명을 통해 이 세상에 알려진 군중의 매우 부정적인 묘사와 선입견을 이겨내고 꽤 객관적이고 이론적인 분석을 시도한 것은 르 봉의 높은 학문적 시도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잠시 싹트기 시작한 당시의 공화주의와 제도, 교육과 관련하여 이러한 군중과의 일종의 연대적 관계 설정을 시도한 것도 지금의 현대인들이 보기에도 꽤 신선해 보이는 부분일겁니다.

아마 기회가 된다면 중우정치에 대한 괜찮은 이론서 내지는 분석적 이해를 겸한 책을 접하고 싶은데요. 르 봉이 책에서 언급한 고립된 개인의 수준으로서가 아니라 민주적 정치 감각과 개인의 반성적 성찰을 삶을 통해 지속하고 있는 시민 하나하나가 앞서 군중의 우려될 만한 요소를 차단하는데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대의제 민주주의가 갖는 여러 약점들을 이러한 시민들이 보완할 수 있다는 약간의 이상주의적 시각을 저는 아직 갖고 있습니다. 존 F. 케네디의 말대로 정치 권력을 시민이 견제해야 정부는 비로소 제 역할을 하는 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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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의 진보
심보선.장석준.박상훈 외 지음 / 이음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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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실천적 생활 좌파 지식인으로 알려져 있는 김규항 씨의 글에서 얼핏 읽은 문장 하나를 기억하고 있는데요. 그것은 ˝우파는 자신의 양심을 건사하는 것으로도 충분하지만 좌파는 자신의 양심 뿐만 아니라 다르 사람의 양심까지 건사해야만 한다.˝ 오랜 시간이 지나 나이를 먹어갈수록 김규항씨의 저 문장은 오랫동안 제 마음속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통합진보당 사태 이후로 한국 사회에 진보는 더이상 영향력을 지속하기는 어렵다는 어느 정치 논평가의 말마따나 이 책의 제목인 ‘지금 여기의 진보‘는 현재 우리의 진보정치가 어느 정도인지 조금 가늠할 수 있는 의미심장한 표현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미리 결론을 짓는다면 저는 우리 한국 사회에 진보와 진보 정치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소개된 글들은 19대 총선 이후, 당시 이명박 정부의 배경에서 진보주의의 위기‘라고 받아들이고 그런 위기 의식에서 이 책이 나온게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물론 이후에 박근혜 정부에서 통진당 해체 사태가 이어지긴 합니다만, 당시 이명박 정부의 무분별한 만능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와 한국 사회에 신자유주의의 내면화에 따른 단순한 이론적 비판에 머무르지 않고 일정 부분 진보가 사회에 대해 기여할 수 있는 여러 수단들을 여기에 글을 통해 실현시키고자 하는 의미가 있다고 나름 해석해 보고 있습니다. 일종의 이 책의 존재 의의겠죠.

여기에 참여한 분들로는 홍세화 선생을 비롯해 요즘 자주 접했던 이택광 교수, 장석준, 엄기호 씨 등의 집필진이 참여했습니다. 이 분들 모두를 진보적 지식인이라고 범주화 시킬 수는 없지만 각 주제 마다 한국 사회에 나름 현실적 개연성에 의미 부여가 될 수 있겠더군요. 즉, 진보가 우리 사회에 선한 결과를 이루낼 수 있도록 기여할 부분이 분명 존재한다는 측면입니다. 인간 본성으로서의 그 안정화 추구에 따른 보수와 우파를 지지하는 현실적 상황이 진보가 우리 시민들에게 어떤 의미있는 지지를 받기는 매우 어려운 부분이며, 과거 분단으로 인한 반동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에서 진보 세력에게 폭력적 색깔론을 무차별적으로 사용한 이력 때문에도 유럽이나 다른 국가들에 비해 진보주의가 이 사회에 뿌리를 내리는 기반이 취약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에도 신자유주의가 영향력을 상실하지 않고 전세계의 자본주의화에 이론적 토대가 되어 각국의 민주주의적 토양을 병들게 하고 있는 것은 어느 시민들이나 우려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지난 레이건과 대처 이후로 자본주의가 평화롭게 시민의 행복과 일반적인 평등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 밝혀진 이후에도 인간 사회를 병들게 하는 자본주의의 어두운 측면을 개선시키기 위한 노력이 부진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특히 보수주의의 입장을 견지하는 많은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전혀 개선할 부분이 없는 완벽한 이념이라고 믿는 것에서 우리는 모순을 발견할 수 있지요.

그래서 큰 틀에서 시민의 행복을 위해 진보주의가 많은 기여를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단순히 이론적인 가치로서의 옳음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시민들의 복지를 위해 그 결과의 선함을 추구하는 것이 진보가 유념해야 될 부분이라는 취지의 글이 있기도 합니다. 오늘날 보수가 보다 단순한 이론으로 현실 정치에 녹아 있듯이 진보도 그러한 방법을 택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정치 이론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예슬과 교육과 노동에서 이러한 논리가 보여지고 있습니다.

더욱이 정치에서 옳은 것은 오직 하나라는 편협함을 벗어내고 진보주의를 믿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담대한 성취를 낼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하겠죠. 이처럼 진보도 사회와 상생하는 결과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좀 더 시끄러운 민주주의를 바라는 이택광 선생의 말대로 자본주의가 더는 오판하지 않고, 더 건강한 민주주의적 발전과 더 많은 사람들의 행복, 더 나아가 보수처럼 이 사회에 밀착하는 그런 시대를 그려보는 것으로 이만 마무리를 해야겠습니다. 물론 아직은 이 사회에서 진보가 걸어가야 갈 길이 아직 먼 것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인데, 이렇게 의미있는 글이 출판된 것은 고무적인 일이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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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 - 기원과 사례, 그리고 대의민주주의와의 관계
폴 태가트 지음, 백영민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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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이 곳을 통해 리뷰한 조남규의 ‘포퓰리스트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와 존 주디스의 ‘포퓰리즘의 세계화‘ 그리고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를 포퓰리즘적 정치인으로 설명한 조기숙 선생의 ‘포퓰리즘 정치학‘ 등에서 이 책의 저자인 폴 태가트가 많이 인용되고 언급되었는데요. 태가트의 책을 읽어보려고 수소문을 해봤지만 당시에는 국내에 그의 저서가 번역된 것이 없었습니다. 짧은 영어 실력으로 원서를 구입해서 읽어볼까 고민하다가 최근에 태가트의 유명한 책이 번역 출판이 되었더군요. 더욱이 서문에서 역자가 이 책이 2000년에 출간되어 신간이라고 볼 수 없다는 점과 사회과학 고전이 아니라는 점 등의 한계가 있어 다소 출판이 어려웠다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다행히 한울에서 출판을 결정해 저같은 독자에게는 참으로 기쁜일이 아닐 수 없는데요. 들어가기에 앞서 이 점을 밝히고 싶었습니다.

국내에는 최근에 어떤 정치인의 출현을 계기로 이 포퓰리즘이라는 단어에 대한 해석과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어떤 세력에 있는 정치인들은 상대의 성급한 정책과 다소 판단하기 어려운 그 인기에 뭔가 독설의 의미로 이러한 포퓰리즘을 사용했는데요. 저 개인적으로는 보수들이 진보쪽에 있는 정치인들에게 자주 들먹이는 색깔 논쟁과 비슷한 어감의 차용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물론 색깔논쟁과 포퓰리즘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긴 하지요.

포퓰리즘은 간단히 설명하면 엘리트 정치에 대한 반감과 대의 민주주의에 대한 불만, 그리고 비범한 정치인에 대한 동경 등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현대 정치 역사에서 포퓰리즘이 지니고 있는 치명적인 한계 즉, 금방 시들어버리는 휘발성으로 인해 크게 주목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요 근래에는 표퓰리즘과 네오파시즘이 결합해 그 파급력이 점차 우려될 만한 수준으로 유럽에 나타나고 있는데요. 그래서 이제 세계 정치학계에서 연구와 관심을 받기 시작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태가트의 ‘포퓰리즘‘을 일독하고 난 후의 느낌은 대중 인기 영합주의의 포퓰리즘에 대한 아주 이론적이고 개념적인 해석이 바탕이 된 크게 이해를 돕는 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국과 남아메리카, 유럽, 캐나다, 호주 등의 정치적 포퓰리즘의 범주에 들어가는 인물과 정치현상에 대해 가감없이 서술하고 있고요. 이런 포퓰리즘적 정치가 지닌 한계와 해석에 대해서도 충분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만 앞서 언급한대로 태가트의 이 책은 2000년에 출판된 것으로 인해 가장 최근의 유럽과 일본 등지의 포퓰리즘과 포퓰리스트의 소개가 되어있지는 않습니다. 이런 부분은 독자들의 좀 더 이해를 위한 스스로의 자료 조사가 필요하겠지요.

글의 거의 결론에서 다수의 침묵하는 국민들이 마땅히 지지할 정치 세력이 없다는 나름의 해석을 통해 ‘침묵하는 다수의 주장은 침묵이다‘ 라는 것은 다시 말해 현재 이들이 묵묵히 일을 하고, 세금을 내며, 말없이 삶을 누리고 있는 이 다수는 사회적 의무를 다하고 생산적인 활동을 하지만 정치적으로 과묵하다는 서술이 뭔가 포퓰리즘이 정치 혐오주의에 다소 편승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저의 이러한 해석은 포퓰리즘이 기존의 엘리트 정치와 정치제도를 악마화하는 것으로 봤을 때, 불만을 돌리는 정치로 그들이 좋아하지 않는 대의제 하에서 표를 흡수하고 이들을 대표한다고 하지만 결국에는 이러한 정치행위들이 사실상 현실 정치에 대한 아무런 대책없는 반감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저자인 폴 태가트도 바로 이러한 현실 정치 체제를 부정하는 포퓰리스트들의 행태적 모순으로 인해 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이 결국에는 불만과 반대만을 위한 정치로 일관되어 그 생명이 짧은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듯 했습니다. 다만 민족주의와 카리스마적 리더십 등과 비교 분석하며 독자들에게 면밀한 이해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끝으로 현재 세계 정치에는 이런 신포퓰리즘과 인종주의적 차별주의인 극단주의가 결합되어 정치 세력화하고 있습니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과 미국의 트럼프가 이에 속할지도 모릅니다. 기존의 정치에 대한 다수의 혐오로 비롯된 것이라고 확대 해석할 필요는 없지만, 이러한 체제 거부와 반발에 이르는 포퓰리즘적 정치에 대한 좀 더 세밀한 분석과 향후 예측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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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갈등의 역사와 미래 전망
이동수 외 지음 / 인간사랑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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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동아시아 역내 국가들의 전통적인 역사에서 오늘날 현재까지의 관계에서 갈등과 영향을 주제로 한중일 학자는 물론 미국의 연구자들의 논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머리말에서 언급한대로 세계NGO역사포럼과 동북아역사재단, 경희대학교 공공대학원이 공동주최한 포럼에서 발표된 논문들과 이와 관련된 논문들을 묶어 발행한 것이라고 상세히 밝히고 있습니다.

1부는 전통시대, 즉 과거의 역사에서 중국을 포함한 한국, 일본의 동아시아 지역에 관한 사실 행위 고찰에 대한 분석인데요. 중점적으로 해석하는 부분은 중화주의와 그 질서에 속해있던 고려와 조선의 우리 역대 왕조에 대한 이해입니다. 원나라 시대의 고려 정책에 대한 분석과 명나라 시대 왜에 의한 조선 침략으로 조선에 출병한 상황, 그런 바탕에 명에 대한 조선의 조공과 책봉의 색다른 분석이 있었습니다. 뒤이어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 일본에서 불거져 나온 대동아공영론에 대한 일본 학자의 비판이 있구요. 끝으로 1949년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쫓겨들어가고, 중국 공산당의 잠정적인 본토 수복에 대한 소위 ‘중국 혁명‘에 대한 주변국에 대한 영향과 의의에 대해 중국 학자가 논하는 것으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과거의 중국 왕조들의 중화주의 내지는 중화사상은 몇 번이나 중국 외부의 정복 왕조들이 들어서고 그 왕조들 조차도 중국의 사고방식을 내면화시켜 고려와 조선을 정치, 외교적으로 다루어 왔는데요. 일종의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정치의 지배 질서라고 정의 내릴수 있을겁니다. 여기에 일본이 속하느냐 아니냐의 논쟁이 있겠지만 일본도 메이지 유신 전까지는 이러한 질서에 속해 있던 정치체제라고 봐야할 것입니다. 우리 같은 경우는 조선의 사대부들이 중종 시대를 거쳐 이러한 성리학적인 이념과 스스로를 명의 황제의 배신이라 생각하는 아주 견고한 내면화를 고착화 시켜왔습니다. 이러한 사대의 명분은 인조 시대의 병자호란을 불러 일으켰고 효종의 북벌 논의와 이후 영정조 시대의 안정적인 청나라와의 관계에 대한 조선 조정의 관리에도 불구하고 많은 조선의 사대부들은 명이 역사속에 사라졌음에도 그에 대한 의리를 몸소 실천했습니다. 특히 계승범 교수는 책봉외교와 조공에 대한 의미를 애써 축소시켜 명나라의 간섭이 제한적이었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현재 우리의 사학계와는 달리 임진왜란으로 촉발된 명나라군의 출병에 조선의 선조와 광해군을 둘러싼 여러 정치적 결과에 명의 입김과 간섭이 지대했고, 결국 이를 바탕으로 조선이 명나라의 정치, 외교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고 재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조선 국왕의 내치에 대한 부분은 독립적이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이러한 중화 질서에 일본이 다른 지역내 국가들과 달리 성공적으로 서구식의 근대화를 이루고 제국주의적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중화질서를 대신한 국가로 출현했습니다. 대동아공영권은 바로 이러한 대체 확장된 논리로 등장했으며, 본디 취지는 서구 국가들의 아시아 침탈에 의한 일종의 해방론으로 일견 겉으로는 시대정신에 부합되는 측면도 있었으나, 사실상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논리는 침략행위에 대한 이론적 틀이라고 봐야할 것입니다. 이 부분을 게재한 일본 학자는 스스로 전쟁과 점령 기간중 총 1,900만의 아시아인들이 희생되었다고 언급했으면서도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는 이러한 대동아공영권의 이념이 지닌 허구성을 간파하기 어려웠다는 결론을 보이고 있습니다. 소위 천황과 군부의 지속적인 군사 정치 상황하에서 일본내의 지식인들과 학자들이 거의 수동적으로 협력해 온 것으로 봤을 때, 허구성을 간파하기 어려웠다는 주장은 조금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봐야겠죠.

이어 2부는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이 지역내의 배상과 화해 문제, 그리고 중국의 부흥과 가까운 미래의 미중 관계에 대한 분석을 대부분으로 할애하고 있습니다. 일본 학자의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주변국의 피해 실태에 대해 분석한 글은 꽤 의미심장한데요. 위안부 관련 서술에서 아시아 전체에서 총 20만명이 넘는 여성이 위안부로 끌려갔으며, 특히 성병을 피하기 위해서 유교적 정절과 신뢰가 있는 한국 여성이 선호되었다는 언급은 참 많은 생각을 떠오르게 했습니다. 과거 아베 신조는 위안부 여성 모집의 강제성을 부인하고 그들이 자발적으로 매춘에 참여했다고 주장했는데요. 중국과 한국을 비롯한 일본 제국주의에 고통을 받은 당사국들이 일본에 대해 아직도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는 것은 이 일본의 정치 지도자들이 거듭 사과와 사죄를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뒤집는 발언을 수시로 하기 때문입니다. 과거 고이즈미나 지금의 아베 총리는 무라야마 담화를 무력화 시키려고 노력을 했으나 미국의 압력에 의해 시도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배상의 문제 뿐만 아니라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사항은 진심어린 사과로 여겨질 만큼 그런 태도를 계속 견지하는 것이 중요한데 일본의 정치권은 국내적 상황과 외부적 요인을 지렛대 삼아 계속 이렇게 피해국들의 피해자들을 농락하는 것 같은 언행을 일삼아 왔다는 것을 먼저 언급하고 비판해야된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이어지는 4편의 논문은 크게 받아들이면 앞으로 중국과 미국과의 현실적 관계 예측에 대한 글들입니다. 즉, 중국의 부상으로 인한 미국과의 관계가 대결로 치달을것인가 아니면 평화 공존의 협력 관계로 이어질 것인가 하는 일종의 분석이라 볼 수 있습니다. 얼마전 ‘21세기 패자는 중국인가‘ 라는 책에서 세계적인 학자인 니얼 퍼거슨은 중국이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성공적인 부상을 할 것으로 예측했는데요. 그의 이런 의견과는 달리 많은 국제정치학자들이 과연 중국이 평화롭게 부상할 것인가 하는 우려를 갖고 있습니다. 특히 현재의 세계 정치 경제 시스템에 자신들이 참여해 만든 것이 아니므로 앞으로 가까운 미래에 이것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 중국내의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을 많이 봐왔습니다. 중국인들은 자신들이 비판해 마지 않는 현재의 세계 경제 시스템하에서 지금의 번영을 누려 왔음에도 단순히 자본주의적 모순에서 비롯된 예기치 않은 결과로 한정시켜 버리는 학자들까지 보일 정도로 이러한 왜곡된 주장은 근래에도 계속 보이고 있습니다. 냉전 시기 부터 미국의 영향력은 지역내에 적지 않은 균형적 안보와 경제적 번영을 보장했습니다. 현재에도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비롯한 한국과 일본은 미국의 안보에 의지하고 있는데요. 중국의 부상이 평화적이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가정은 현재 중국이 벌이고 있는 남중국해에 배타적 진출로 인한 것으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미국과 유럽은 중국이 성공적으로 민주화가 된다면 오히려 국제적인 세계 시스템에 안정적으로 편입되고 중국 내부의 배타적인 민족주의적 요구가 점차 축소될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지금의 상황에서 중국은 내부 모순과 갈등을 안정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경제발전이 더 필요합니다. 민족주의적 요구에 응답하며 내부 문제를 이런 식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자신들이 이제 좀 제대로 된 대접을 미국과 전세계에 받아야만 한다고 여기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제가 알기로는 과거의 한중일 역사를 살펴보고 현재의 시대 상황까지 아우르는 꽤 참신한 전개의 글은 없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여기에 모인 글들이 국제 학술 연구의 취지로 논의된 것이어서 논쟁적이거나 첨예한 주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는 않지만 오늘날 한중일 삼국의 개괄적인 역사 분석과 미래의 관계 예측에 대한 꽤 상식적인 분석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받을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저역시 좀 더 수월하고 편안하게 주제들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얼마전에 탐독한 주디스와 개디스, 미어샤이머 등의 책이 언급되어 한편으론 꽤 즐겁기까지 했습니다. 앞으로도 한중일 지식인들이 함께 모여 펴내는 이러한 책이 많아졌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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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관계의 재구성 : 과거를 넘어 미래로 - 2015 한반도 연도보고
이희옥.한바오장 엮음 /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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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한국의 성균관대학교의 성균중국연구소와 중국 중공중앙당교 국제전략연구소가 함께 학술교류의 형태로 기획해 출판되었고, 여기에는 한국과 중국, 양국의 연구자들이 한중관계의 각 분야에 대한 글을 실고 있습니다. 근래 서울대학교의 일본연구소가 한일 관계에 대한 여러 분야의 책을 펴내고 있는것처럼 성균관대학교의 이런 기획도 한중간 서로간의 이해를 위해 무척 의미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중관계의 재구성이라는 제목으로 2015년에 출판된 이 단행본은 한중 양국 학자들의 공동연구와 국제회의 그리고 진지한 토론을 거쳐 2015년 한반도 연도보고를 한국과 중국에서 동시에 출판했다고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각각의 글을 게재한 학자들이 여기에 자신의 글을 올리기 전에 아마도 서로 토론을 거쳐 의도되지 않은 논란들이 불거지는 것을 막기 위해 충분히 논의해서 동시에 출판된 것으로 추측 되어집니다. 물론 상세하게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는 없겠지만요.

1992년 이후 한중관계에 대한 여러 분야별로 한중 연구자의 글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정치외교관계와 안보, 사회 분야에 대한 글에 관심을 기울여 읽었습니다. 그 외에는 경제와 문화 분야가 있습니다.

지난 1970년대 미국과 일본이 중국과의 관계 정상화에 나서면서 한국 또한 중국과의 외교 관계 수립에 나서야 한다는 요구가 한국 내부에서도 있었는데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북방 정책과 냉전이 끝나가는 1990년대 한반도 긴장 완화를 위해 구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국가들과 그리고 중국의 외교 관계 수립에 나서게 됩니다. 물론 이러한 우리의 외교 정책이 북한이 자신들의 고립으로 해석하며 반발하긴 했지만 이러한 결과로 한반도에 긴장 완화가 적잖이 이뤄진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한중 수교 이후, 중국은 개방적인 경제 정책을 통해 급격한 경제 개발과 발전을 이루게 되고 요 근래에는 미국을 포함한 서구 유럽의 많은 국가들이 가까운 미래의 중국이 미국이 주도하는 패권에 도전하는 국가로 부상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소위 ‘중국위협론‘에 대한 부분인데요. 여기에 이름을 올린 중국 연구자들도 이런 중국위협론에 대해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즉, 한국도 역시 이런 중국위협론에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보고 있고, 오히려 이상하게 한국 내에서 자신들에 대한 위협론이 과대하게 나오고 있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중국위협론에 대한 중국인들의 현실 인식 오류에 대한 증거는 현재 많이 나와 있습니다. 남중국해에 벌이고 있는 것들이나 파키스탄의 과다르 항이나 미얀마의 차우퓨크 항에 투자해 인접국 인도와 아세안 및 미국의 우려를 불러 일으킨다거나 말라카 해협에서 미군에 의한 자국 민간 상선 봉쇄 가능성에 대해 연구한다든지 하는 일련의 남아시아 및 동남아시아 여러 인접국가들의 안보 불안을 일으키는 것으로도 이 중국위협론이 중국 바깥에서 어떻게 해석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안보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로 중국 측 연구자들이 북한의 핵개발 문제와 앞으로 한반도 통일에 있어서 중국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한국민들과 지식인들이 인식하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전략적 차원과 미국과 직접 연결되지 않는 완충지대로서의 역할로 북한을 관리하고 있다는 것을 많은 한국인들이 익히 알고 있는 상화에 당연히 우리가 중국의 일정 부분 역할을 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겁니다. 그렇지만 이곳의 중국 연구자들은 미국이 한국과 일본과의 동맹 관계를 재정립하면서까지 자신들의 위상을 동북아시아에서 견고히 하려고 한다며 미국의 정책을 돌려 비판하는 듯 하는데요. 그래서 이 한미 동맹이 자신들을 겨냥하는 것이 아니냐는 중국 내부의 우려가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자신들도 한미 동맹이 지역내의 안정화에 오랫동안 기여한 것을 인정하지만 근래 미국이 자신들을 봉쇄하려고 한다고 의구심을 보이는 등 미중 양자 사이의 전략적 불신을 해소하지 못하고 한미 동맹의 지향적 의구심으로 해석하는 것은 현재 중국이 갖고 있는 불안을 잘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북한의 지속되고 있는 여러 도발은 우리의 안보와 직결되는 문제이며, 단순히 북한과 관련된 이런 안보 불안이 단순한 심리 차원의 문제는 아닌 것이죠.

이처럼 우리의 한미동맹은 중국이 느끼기에도 한중 관계가 함축하는 의미에서 어쩌면 한계 요인이 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저는 진정한 한중관계를 위해 한미 동맹을 해체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작금의 북한의 핵 개발과 미사일 사태에서는 미국과의 동맹이 더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1992년에 있어서 ˝대만에서 한국을 떼어내기 위해 한국과의 수교가 필요하다.˝는 것처럼 한중간의 관계 또한 중국의 이익에 따라 필요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한국은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균형을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고 점잖게 권고 하는 것도 중국인들의 기저에 한국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게 해주는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물론 오늘날 한중 관계에서 양자간의 교류와 협력은 필요하겠지요. 더욱이 우리는 북한 문제로 중국과의 우호적인 관계가 지속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중국은 우리의 최대 교역국이고 미국과 일본의 교역량을 합친 것 보다 더 큰 상황에서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중국 측에서는 미국과의 막대한 무역 흑자를 거두고 있어서 우리가 해마다 올리고 있는 대중 무역 흑자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지는 않지만 앞으로 이 경제적인 문제도 가까운 미래에는 갈등으로 표출될 수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중국과의 모든 관계에서 우리가 너무 심정적으로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것은 좋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은 북한과 우리를 두고 전략적으로 행동하고 있고 대외적으로 중국인들과 중국 정부는 이제 자신들의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지난 몇년간 성장한 국력에 기대어 대접을 받고 싶어합니다. 또한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죠. 전세계가 중국의 평화적 부상을 못내 바라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의구심을 전부 떨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선린우호의 형태로 양국이 협력하는 것은 좋으나 우리 정부와 우리 국민들 역시 전략적인 측면에서 중국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끝으로 우리 국민들은 한반도의 통일을 바라고 있으나 혹여 북한의 비상 사태에 중국군이 국경을 넘을까 우려하고 있는데 중국의 정치인들은 이런 우리의 의문에 명확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미래의 한반도 통일에 있어서 이처럼 중국의 의도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고 이렇게 중국에 대한 불안한 마음을 갖고 대하며 양자관계를 바라보는 것이 어쩌면 진실된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 외에도 중국에 관한 우리의 많은 우려섞인 의구심들이 한중 관계의 근본적인 한계점이 아닐까도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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