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맞고 너희는 틀렸다 - 똑똑한 사람들은 왜 민주주의에 해로운가
마이클 린치 지음, 황성원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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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코네티컷 대학의 철학과 교수인 마이클 린치는 미국 상원에 출석할 정도로 학자적 명성을 얻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는 시라큐스 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곧 강단에 서기 시작했습니다. 2019년에는 대중 담론의 비판적 분석에 뛰어난 공헌을 한 작가에게 수여하는 조지 오웰 상을 수상하기도 했는데요. 그는 오늘날의 민주주의적 담론에 큰 관심을 갖고 있고, 거의 처음으로 다원론적 진리 이론을 도출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에 그는 민주주의 정치에서 차츰 쓰이고 있는 '빅 데이터 이론'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요. 린치가 다원론적 진리 이론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로 보건대, 기본적인 진리에 대한 입장이 여느 학자들에 비해 차원이 다르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과연 진리인가에 대해 무엇보다 성찰적 실천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그의 글을 충분히 일독할 이유가 된다고 여겨집니다. 그의 이 책은 원제, "Know It All Society : Truth and Arrogance in Political Culture"로 지난 2019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이듬해인 2020년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이 글의 원제와도 관련되어 있는, "now-it-all"은 실제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마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분명 이와 같은 현상은 반쯤 농담에 가까울 테지만 여기서 분명한 점은 현재 미국 사회가 진실을 오도하면서 가히 오만하고 독단적인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일전에 리처드 J. 번스타인은 이런 현상에 대해 명백히 반대의 입장을 표명하기도 했습니다. 이미 저자도 번스타인과 비슷한 목소리를 내기에 이르는데요, 무엇보다 미국 사회철학에서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존 듀이의 선구자적 업적을 무색해 하는 이런 행위들은 크게는 미국 정치를 쇠락으로 이끄는 중입니다. 특히, 오만한 백인 우월주의가 어떻게 사회 내에서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해 이를 추종하는 다수의 백인들이 전혀 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이 글 6장을 통해 입증되고 있습니다. 린치는 자신의 이 글에서 언급하는 내용들이 대체적으로 애즈라 클라인의 논저와도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는데요. 이는 정체성 정치에 대한 어느 정도 설득력이 부족한 공격과 더불어, 극단주의자들의 명백한 공격성이 사회 내부에서 제어되지 않고 있다는 부분은 쉽게 생각해서는 안될 부분이라 여겨집니다. 또한 이를 통한 정치적 양극화가 전혀 통제가 되지 않고 있는 현실도 심각한 문제인데요. 다만, 린치는 오늘날 정치적으로 다른 입장에 서 있는 시민들의 모습을 철학적인 접근에서 상대방을 표용하지 못하는 보다 다층적인 문제에 접근해 보려는 모양새입니다. 이와는 별개로 저는 여성 혐오와 다른 인종에 대한 명백한 배격과 혐오에 빠져 있는 일부 시민들과 이 책에서 논하는 바대로 대화가 이뤄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지극히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습니다.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맞붙었던 2016년 말에, 민주당과 관련한 한 가지 괴담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그것은 워싱턴 DC의 어느 피자 가게에서 민주당 정치인들이 아동 성매매 조직을 운영한다는 상당히 기괴한 음모론이었습니다. 보통 기본적인 상식으로 이러한 음모론이 가당치 않다는 점은 많은 분들이 인정하고 있으실 텐데요. 그런데 트럼프를 지지하는 극단주의자들과 일반적인 공화당 지지자들까지 이 음모론을 거의 기정 사실인 양 믿었습니다. 이러한 괴담은 순식간에 여러 SNS를 통해 퍼져나가게 되었는데요. 이미 저자인 린치를 비롯, 많은 사회학자들이 오늘날 SNS가 거짓 뉴스와 선동의 장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런 개인 소셜미디어가 건전한 민주주의를 위해 기여하는 것보다 자본주의적 논리에 맞게 오로지 개인의 사익을 위해 편파적이고 황당한 소문들을 확대 재생산하는 매개체가 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요. 물론 현실이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존 듀이가 설파한대로 우리가 정치적 분별력을 갖고 있었다면 거대 인터넷 기업의 이런 SNS에서의 괴담이 크게 문제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다만 문제는 저자가 6장에서 논의하는 바대로 우리에게는 이러한 거짓들을 규명하기 위한 시간이 거의 주어지지 않고 있으며, 저자가 강조하는 성찰적 실천이 필요한 각각의 개인들이 오로지 작은 핸드폰 화면에만 몰두해 있는 상황은 시민들 간의 '격의 없는 대화'가 더욱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것을 자본주의에 의한 개인의 소외로 읽힐 수도 있습니다만 이런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일종의 대안을 내놓기가 상당히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대체적인 정치 권력자를 포함한 다수의 시민들까지 앞서 희화화한 'know it all' 현상은 그저 멀리 있는 현상은 아닐 겁니다. 이에 저자는 4장에서 이 오만함이라는 문제가 크게 민주주의를 어떻게 붕괴 시킬 수 있는지 논증을 더하고 있는데요.. 과거 나치 독일에서 권력자가 시민의 이익에 대해 무지했고 마찬가지로 시민들 역시 자신들의 이익에 관심이 없었던 점은 일차적으로 선동가의 의지에 따라 체제가 왜곡되어 가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당시 순수한 게르만인에 의한 독일이라는 인종적 구호에 따라 수많은 유대인들이 가스실로 내몬 것은 자신들의 입장과 태도가 지극히 선(善)과 다름없다는 오만함에 기인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를 토대로 지금 유럽에 불고 있는 네오 나치와 미국의 백인 우월주의가 얼마나 위험한 발상인지 대략 추정해 볼 수 있게 됩니다. 이는 일전에 트럼프가 "미국에 입국하는 멕시코인들이 항상 선량한 것 만은 아니다"라는 주장과 맞물려 지극히 오만한 인종주의와 다름 없는 헛소리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특히 다수의 미국 백인들이 지금의 미국에서 흑백 갈등과 흑인과 백인 간의 불평등이 과연 존재하느냐고 반문하는 행태와 더불어 소수 인종이나 여성이 도덕적으로나 지적으로 열등하다는 노골적인 믿음을 갖고 있는 백인 남성을 포함한 일부 계층의 잘못된 신념은 작금의 미국을 극단적인 분열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글 초반에 이러한 잘못된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과연 건실한 대화가 가능할 것인가에 회의적인 입장을 표명한 것은 이런 이유 떄문인데요. 물론 저자는 진실에 대한 개방성과 개인의 성찰을 바탕으로 이를 어느 정도 개선해 나갈 수 있다고 믿는 듯 했습니다. 이와 유사하게 연상되는 리처드 호프스태터의 미국 교회의 끝모를 오만함 또한 이와 비슷한 맥락이라고 여겨집니다. 특히나 기존의 자유주의자 혹은 진보주의자들도 마찬가지로 상당히 오만했고, 이 글 5장 말미에서 논증되는 바와 같이 이러한 자유주의자들의 태도로 말미암아 보수 우파는 한술 더 떠 자유주의와 진보주의를 경멸하게 되었다고 저자는 일침하기에 이릅니다. 결국 진보와 보수 혹은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양쪽이 그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식의 책임론으로 규정되기도 하는데요. 근데 다만 1980년대 이후 미국 사회를 비롯 냉전시기에서 진보주의가 거의 유명무실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저자인 린치의 해석이 현실적으로 합당한지는 생각해 볼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자유주의 자체를 나약한 것으로 이해했던 카를 슈미트는 과거 자신이 벌인 짓거리를 전혀 반성하지 않은 것은 물론 오늘날 피아 식별의 극단적인 정치의 명백한 시조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미국의 경우에 과거 유럽에서 잉태되어 끝내 인간을 해방시킨 자유주의 사상에 대한 회의와는 별개로 자유 자체에 대해서는 무엇보다 중요하게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 자유가 더욱 변질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저자의 언급대로 민주주의가 이성의 논리로 기반해야 하지만 3장에서 보다 비판적으로 논증한 거의 종교적 믿음과 다름없는 비합리적인 확신에 사로잡힌 개개인들이 이성적인 측면의 정상적인 타협과 대화의 기본 인식을 뿌리 채 뽑고 있다는 점에서 이것이 자유와 자유주의에 있어 어떤 식으로 나타날지는 거의 명약관화한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그릇된 믿음이 기반이 된 자기 확신 또한 민주주의에 있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분명한데요. 사회진화론에 부정적인 기여를 한 토머스 멜서스와 마찬가지로 "남부의 백인 남성이 유전적, 도덕적으로 우월한 존재라는 이미지를 강화"한 일부 학자들의 논법은 시민들에게 부정적인 여파를 끼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과학의 개방성과 사회과학의 여러 진리들을 언급하며 일반적인 개인이 학문과 진실에 대한 열린 마음을 가져야만 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과 이론에 상대방이나 다른 사람이 반론을 제시하는 것에 대해 보다 진지한 태도를 견지할 의무가 있다고 배웠습니다. 여기서 언급되는 '무오류성'이라는 이론은 전혀 가능하지 않다는 점에서 단순히 지지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자기 확신을 더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있어 도움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집니다. 과연 이러한 자기 확신적 태도를 전혀 바꿀 가능성이 없는 계층과 사람들을 어떻게 개방적인 공론장의 무대로 이끌어 낼 수 있을지는 대략 요원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것은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는 것 차원을 넘어 극단주의에 대한 다수 시민들의 일관되고 공통된 의견이 먼저 수립되어야만 한다는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됩니다. 이는 오늘날 정치 현실을 명확히 설명한 이안 브레머의 기존 주장과 함께 기존의 정치 무대에 들어선 극우 포퓰리즘 혹은 우파의 극단주의에 대해 시민들이 얼마나 정치적 분별력을 발휘할 수 있겠느냐에 따라 앞으로 다음 몇 세대의 민주주의 건전성이 달려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끝으로, 이 글은 전반적으로 오늘날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극단적 행태와 이를 더욱 조장하는 인터넷을 비롯한 정치적 발언의 획기적인 변화가 철학적으로 어떠한 의미가 있으며, 이런 상황에 주도적으로 발언을 드러내는 다수 시민들의 행태가 우리의 정치에게 있어 어떤 영향이 될 것인지에 대해 전망과 대안 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진실과 겸손함을 바탕으로 서로를 인정하고 이에 따라 정치가 시민들의 정치적 태도 변화로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믿는 것으로 마무리 되고 있는데요. 과거 불행한 나치 시대를 잉태한 전간기의 민주주의를 경멸한 괴벨스의 이런 비아냥은 많은 자유주의자들에게 뼈아픈 고통으로 남았습니다. 물론 우리가 민주주의를 부정적으로 비화할 필요는 없지만 어느 정도는 이런 글들에서 교훈을 찾는 것이 시민들에게 있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다수의 시민들은 제2의 전체주의를 몸소 겪어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으리라 여겨집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존 듀이의 선명한 주장대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더욱 교육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글의 3장과 4장은 오늘날 현실 정치의 근본적인 원인을 독자들에게 새롭게 제시하고 있는 점에서 따로 단행본으로 추려도 될 만큼 논증이 훌륭했는데요. 이에 많은 분들이 읽어 보셨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게 됩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사실‘로 여길지 합의가 없을 때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사실을 가르쳐준다고 해서 진실과 확신에 대한 태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좌파에서든 우파에서든 오만함의 이데올로기는 ‘우리와 그들‘을 넘어 ‘그들 위에 있는 우리‘라는 문화적 서사를 선전함으로써 우리의 공포와 욕구를 이용한다.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더 큰 사회적 맥락에 스며 있는 여타 차별적인 연상들이 서로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왜곡할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너무 심하게 증오한 나머지 급기야 스스로에게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가 실제보다 더 많이 안다는 확신을 심어주려는 노력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진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존재한다. 단지 정보 문화가 너무 부패해서 진실과 증거에 대한 자기기만적인 태도를 용인하고 부추기는 것뿐이다.

무엇보다 백인 남성에게 안정된 일자리를 제공해주는 경제국이라는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미국의 능력을 잠식하고 있다는 두려움이 이에 해당한다.

그리고 자신들은 많은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듯 그렇게 까지 노골적인 인종주의자나 성차별주의자는 아니라고 정당하게 지적한다.

정치가 오로지 권력과 파벌 싸움의 문제일 뿐이라는 생각은 서글플 정도로 흔하다. 그리고 이는 정치는 본질적으로 다른 수단을 이용한 전쟁이라는 마키아벨리의 관점을 공유하는, 어두운 시각이기도 하다. 20세기에 이 사고를 철학적 관점에서 지지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은 악명 높은 나치 정치 이론가 카를 슈미트였다.

특히 2016년 봄에 진보주의자들의 저녁 만찬 파티에서는 미국이 도널드 트럼프를 선출할 정도로 ‘멍청하지/인종주의적이지/성차별적이지‘않다는 일반적인 통념이 지배적이었다. 미국인들이 트럼프를 진지하게 여길 리 없었다.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서 나치의 선동을 책임졌던 괴벨스는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훌륭한 농담은 민주주의가 자신의 적들에게 자신을 파괴할 수 있는 수단을 주었다는 점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우리는 모든 것 알지 못한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이 편견과 추정에 입각한 것일 수 있음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듀이와 아렌트 모두 민주주의는 일종의 공동 공간, 폭력이나 억업에 대한 두려움 없이 의견차를 탐험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민주주의는 이성의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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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에 관한 편지 고전의세계 리커버
존 로크 지음, 공진성 옮김 / 책세상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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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서머셋 주 링턴에서 태어난 존 로크는 오늘날 가장 영향력 있는 계몽주의 사상가이자, 자유주의의 아버지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인식론을 비롯해, 정치 철학, 고전적 공화주의, 자유주의 이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훗날 전반적인 대의제 정부에 대한 영감을 후세 사상가들에게 전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16세기부터 시작된 유럽의 종교 전쟁으로 인한 여파로 구교와 신교 사이의 직접적인 대결로 인한 극심한 사회 분열에 대해 로크는 크게 우려하기도 했는데요. 그가 원칙적으로는 칼뱅주의의 삼위일체론을 인정했지만, 성전에 대한 일부 다른 해석으로 말미암아 종교적으로 공격을 당하기에 이릅니다. 그럼에도 종교가 속세의 삶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을 인정하고, 이를 통해 뿌리 내리기 시작한 공화주의에 맞서지 않는 (건전한) 종교가 되기를 내심 바라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관용에 관한 편지 Epistola de Toleranta"를 라틴어에서 한국어로 온전히 옮긴 판이며, 이에 1968년 판을 저본으로 삼았다고 책 서두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초판 번역은 2008년 4월에 이뤄졌고, 제가 읽은 판은 개정판으로 2021년 2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로크가 살았던 17세기 유럽의 종교 전쟁은 그들이 믿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무색할 정도로 사회 전반을 피폐한 지경으로 몰아갑니다. 누구를 위한 종교 개혁, 누구를 위한 전쟁인지 모르겠으나,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지식인 계층은 물론 일반인들까지 엄혹한 세월에 놓여 있었던 것은 거의 분명해 보입니다. 이에 로크는 세속법과 종교의 매우 명확한 구분을 인정하고 또한 종교와 공화주의가 서로를 인정하여 양자의 권역을 서로 침범하지 않을 것을 강조한 글을 쓰기에 이릅니다. 바로 이 글의 도입에서 로크는 "참된 교회란 삶을 올바르게 하고 경건하게 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라고 강조하는데요. 이것은 세속적 삶에 있어 인간을 영적으로 인도하고, 이들이 좀 더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교회가 뒷받침하는 것으로도 읽힐 수 있겠는데요. 특히 이러한 의무를 망각한 교회가 어떤 교리를 맹렬히 추종하는 열성분자들에 의해, 사회에 대체 어떠한 일이 자행되고 있는지 저자인 로크는 강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저들이 "타인의 재산의 빼앗고, 신체를 절단하고, 더러운 감옥에 가두어 괴롭히고 마침내 목숨마저 앗아가는 행위"는 그야말로 로마서 1장에서 언급하는 이교도들이나 하는 짓이므로 이러한 행위가 소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로크라는 일개 개인이 가졌던 절망감이 어떠했을지 충분히 짐작이 되기도 합니다.

영혼의 구원을 찾는 일이 어떠한 방식이든 간에 세속의 통치자들에게는 속할 수 없다는 단언은 마찬가지로 반대의 입장에서, "시민의 권리, 인간으로서의 모든 권리가 종교에 속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좀 더 명확히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에야 서로 얼굴 붉히지 않는 '정교 분리'가 헌법에 의해 규정되어 있고, 종교인들이 자신의 성전에 대한 의무와 마찬가지로 공화주의가 뿌리 내린 사회에 있어 이를 지키는 것이 중요한 약속이기도 합니다. 이에 우리가 인정하고 있는 종교에 대한 문제, 종교가 인간과 사회에 대해 가져야 할 관용의 원칙을 먼저 주장하기에 이른 사람이 바로 로크였습니다. 그는 종교적 구원이 종교에 있어 중요한 가치라면, 동일하게 재산권과 인간의 기본권은 통치가 해낼 수 있는 권리이자 의무라고 논증하는데요. 즉, 그리스도인이든 간에, 아니면 비그리스도인이든지 간에 양자는 모두 사회로부터 기본적 권리를 보장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이단과 이교도라는 명분으로 종교가 불신자들을 탄압하기에 이른다면, 이것은 결코 종교가 손을 대서는 안되는 영역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이에 로크는 통치차의 통치 행위, 혹은 사회가 마땅히 보장해야 될 인간의 권리에 있어 종교의 개입을 거의 엄금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대전제로 단순히 사회와 종교가 어정쩡한 화해를 지속해야 된다는 소위 원칙을 넘어, 마땅히 서로의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된다는 중요한 당위라고 여겨집니다.

이 세계에 종교적 권위가 갖는 영향력이 어떠한지는 누구나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아무리 종교적 권위가 사회적 맥락에서 까지 인정을 받으려고 노력을 기울인다 할지라도 부정적인 측면에서 이러한 권위에 몰입한 광신자들을 처벌할 권리는 분명 '세속법'에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즉, 종교인인든 비종교인이든 사회적 틀에서 마땅히 인정하고 있는 법의 지배는 결코 종교가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정통 교리를 신봉하는 교회든, 소위 우상 숭배를 목적으로 있는 사이비든 간에, 공화주의적 통치자가 이를 구분해서 어느 한쪽만 처벌할 권리 또한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은 명확히 하고, 이것을 통치자의 '정치적 권리'라고 우리가 이해했을 때, 무엇보다 종교가 정치에 우선해, 관용을 교리만큼 중요하게 견지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데요. 물론 자신들의 종교적 입장에서 우상 숭배라든지 이단이라는 설정은 그들의 영역에서 충분히 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다만, 우리가 명확히 해야 하는 부분은 최소한의 인간적 권리로서 개인의 정치적 권리와 함께 이는 누구나 법 앞에서 보장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인데요. 종교가 이런 사회적 원칙에 무분별하게 대립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적절하게 정도를 지킬 수 있는 내부의 건전성이 어느 정도 요구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종교든 간에 자신들의 교리에 따라 이를 사회적인 수준에 까지 강요하는 것은 사실상 금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로크가 강조하는 관용의 원칙은 어느 정도는 우리가 믿고 있는 자유의 원칙과도 상당히 결부되어 있습니다. 사실 모두가 평등한 자유라는 관념은 로크 역시 지지하고 있었는데요. 종교의 자유라는 관념적 이해 또한 결국은 필요한 것이어서, 서로 다른 신을 믿는 경우나, 교리나 숭배의 방법이 다른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종교적 관용은 나의 종교적 자유 뿐만 아니라 사회의 다른 종교적 자유와도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후반부에서 간략하게 등장하는 그리스도교 진영에 있어, 이슬람인들에 대한 표면적인 이단이라는 입장은 좀 더 신중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이는 다수의 종파가 소수의 종파를 억압하지 않는 것을 넘어 공화국의 평화를 위해 모두가 노력할 필요가 있다는 대전제에 의해서 존중 받는 것과 유사한 체계라고 여겨집니다. 로크가 앞으로의 종교 문제를 어떻게 예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공화국 내에서 사실상 다양한 종교가 존립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한 통치자와 사회 구성원의 노력이 무엇보다 더 중요한 시기가 도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신앙으로서의 원칙에 대한 관용과 이해를 통해, 각 종교 간의 대립의 불식을 추구하는 것으로도 볼 수도 있겠는데요. 물론 종교와 종교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지점은 저자인 로크가 말하는 가장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세속적 삶에 기여하고, 또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구원을 위해 종교가 선량한 사람들을 인도하고, 속세의 법을 존중하고 따르는 것이 지금의 정교 분리의 대원칙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공공의 편익'이라는 부분에 있어 각자가 충분한 이해를 갖춰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참된 교회는 삶을 올바르게 하고 경건하게 하기 위해 세워진 것입니다.

만약 자비와 온순과 호의를 세강 모든 사람에게는커녕 같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에게조차 결여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결코 그들에 대한 박해와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잔혹함을 공화국에 대한 걱정과 법의 준수로 미화해서는 안됩니다.

실제로 어느 누구도, 자유나 목숨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의 이익의 일부분조차 자발적으로 박탈당하지 않으므로, 통치자는 남의 권리를 침해하는 자들에게 처벌을 가하기 위해 무력, 곧 자신의 모든 신민의 신체적 힘으로 무장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에게 자기의 종교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할 권한을 하나님께서 그 어떤 사람에게 부여하신 것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의 시민으로서의 권리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모든 권리도 엄숙하게 보존되어야 합니다. 이 권리들은 종교에 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에서 그들의 권위가 기원했든지 간에, 그 권위는 교회적인 것이므로 (어디까지나) 교회라는 틀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도대체 바티칸에서 준비한 것 외에는 혹은 제네바 (칼뱅주의) 공장에서 나온 것 외에는 어떠한 약이나 음식도 섭취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까?

왜냐하면 종교의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인데, 어떤 사람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고서 그에게 바로 그 예배에서 하나님을 기쁘지 않게 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모순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도덕적 행위들은 정치적 지도자와 개인적 지도자, 곧 통치자의 지배와 양심의 지배 모두에 예속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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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남자
아니 에르노 지음, 윤석헌 옮김 / 레모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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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르노는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의 릴본에서 노동자 계급의 부모 밑에서 태어나, 5년 뒤에 부모를 따라 이브토로 돌아갑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캉 인근과 루앙 지역의 지도 교사를 역임하고, 1959년에 루앙의 여성 사범대학의 입학시험에 합격합니다. 이후 그녀는 짧게 영국을 오고 가며 지내다 루앙 문과 대학의 교양 과정을 등록합니다. 대략 1967년부터 1971년까지 중등 교원으로 활동하다 남편인 필리프 에르노가 행정직으로 임명되어, 파리 근교 신도시인 세르지퐁투아즈로 이주하게 됩니다. 이 가운데 그녀는통신대학 고등교육 교수로 임명되어 은퇴까지 직함을 유지하게 됩니다. 그녀는 자신의 활발한 작품 활동으로 2022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되는데요. 수상 이후 세계 각지에서 자신의 문학적 업적을 인정받게 됩니다. 이미 국내에도 그녀의 많은 작품이 번역되었고 재번역과 재판 발행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에르노의 이 책은 원제, "Le jeune homme'로 2022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3년 2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꽤 교육을 받은 중년 여성과 이십 대 초반 남성의 사랑은 지금까지 상당한 사회적 금기였습니다. 반대로 어느 정도 경제력을 갖고 있는 육십 대 이상의 남성과 갓 이십 대 여성의 관계는 사람들의 표면적인 지탄을 차치하더라도 이미 수많은 영화와 소설의 단골 소재로 등장합니다. 후자를 보는 많은 여성들과 페미니스트들은 일면적인 이해에서, 돈으로 젊은 여자를 만나는 중년 이상의 남성을 심하게 말하자면 역겹다는 표현도 서슴치 않는데요. 마찬가지로 전자의 경우도 역시 일반 남성들의 비난을 받기도 하는데 나이 많은 여자를 만나는 젊은 남자에 대한 대체적인 연민과 불편함이 섞인 감정일 텐데요. 비슷한 나이의 사람끼리 사회적 금기를 넘어서지 않은 평범한 연애를 하는 것이 일견 맞다는 식의 통념은 지금도 사회 구성원들의 주된 관점이기도 합니다. 물론 많은 이들이 연애에는 나이와 국경이 없다고들 하지만 '자신에게 없는 젊음을 사는 것'과 같은 주변의 불쾌함은 그걸 보는 사람들의 단순한 질투라는 감정으로 이해하기에는 다소 난감한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을 느끼는 데 있어 평범한 사람이라면 아마도 어느 정도는 진지함을 갖고 있을 겁니다. 상대방을 만날 때 이 사람을 진지하게 여겨야만 그것대로 스스로를 가볍게 취급하지 않는 태도일 것인데요. 하지만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을 만나는 데 있어서 그 사람에 대한 나의 진지함을 없는 것처럼 취급하고, 어떤 이익을 위해 그 혹은 그녀를 만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장황한 사설과 맞닿아 있는 에르노의 이 소설 역시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작가 스스로의 경험을 투영되어 있습니다. 이는 작가 본인이 과거에 불법 낙태 시술을 받은 것마저도 작품에 등장시키는 것과 유사해 보이는 솔직함입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20대 대학생과 관계를 지속하면서 그의 궁핍한 경제적 조건마저도 어느 정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연인인 남자가 언제든 젊은 여자에게 갈 수 있다는 결론을 애써 인정하고 있기까지 합니다. 물론 두 사람의 관계가 어느 정도 육체적 쾌락에 의지하고 있으니 이러한 인정은 어쩌면 당연해 보이기도 합니다. 서로가 자신들의 미래까지 기약한 관계가 아니라 결말을 예견하고 있는 이런 처지에서 자신이 되돌아 보는 '관계의 속성'이 거의 가감 없이 드러나고 있는 점이 이 작품의 매력이라 생각됩니다.

애인의 솔직한 바람을 들어줄 수 없는 자신의 육체적 조건에 깊은 회한을 보이는 여 주인공의 독백은 임신 가능성을 기대할 수 없는 '나이든 여성'의 고백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뜨거운 연애를 하면서 흔히 '나의 아이를 낳아줘'라는 말을 자주 읊게 됩니다. 서로 불타는 알몸으로 껴안고 있는 상황에서도 저런 농밀한 대화는 흔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아이를 갖고 싶은 젊은 남성의 기대가 그저 이 여자를 버리기 위함인지 아니면 정말 진솔한 고백인지는 모르겠으나, 두 사람이 같이 있는 모습을 보고 질책하는 시선을 보내는 타인들을 겪게 되니, 비로소 주인공은 자신의 나이를 깨닫게 됩니다. "나의 젊음은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었고 그만큼 이 남자와의 관계에서 그만큼 영속성은 멀어지게 된다"는 진실을 명확히 드러냅니다. 이것은 결말의 예측과 맞닿아 있고, 두 사람이 함께하던 나날의 진실과 끝내 결말을 맞이한 그 후의 일상이 보기보다 다르지 않았다는 점을 이미 숱한 연애를 경험한 우리들에게도 보란 듯이 전하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육체적 쾌락을 통해 상대방에 대한 모든 것을 내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오만함은 관계의 본질을 여실히 드러내는 부분이라 생각되었습니다. 

끝으로 아니 에르노의 이 작품도 자신의 실제 경험과 문학적 장치가 혼합되어 있는 그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녀의 소설을 통해, 노년의 여자가 젊은 남자와의 관계를 통해 느끼게 되는 다양한 감정들을 거의 처음 접할 수 있었는데요. 단순히 이러한 만남이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권력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향해 일정 부분 원하고 지향하는 바가 있는 일반적인 모습의 연애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인상적이었습니다. 더욱이 아직 노년에 들어서지 않은 저 같은 사람이 이들이 보이는 여러 회한과 일생을 살아온 스스로에 대한 중요한 성찰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충분히 의미있는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장소, 바로 그 병원이 내가 학생 시절, 불법 임신중절 후에 출혈을 일으킨 1월의 어느 밤에 이송된 곳이다.

그의 집에서 나는 학생 시절, 신혼 초 남편과 살며 겪었던 불편함과 초라한 가구들을 떠올렸다.

그는 내게 쾌락을 주었고, 다시 살아나리라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을 다시 살아나게 해주었다.

그러나 그가 질투에 휩싸일 때마다 비난했던 이 같은 이중성은 그의 상상과는 달리 그가 아닌 다른 이들에게 내가 품었을지 모를 욕망에 자리 잡지 않았다.

쉰 살 먹은 남자가 분명 자기 딸이 아닌 여자와 아무런 지탄을 받지 않으면서 공공연하게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마당에.

그가 태어나기 전의 시간에 대한 이 긴 기억은, 결국에는 내가 죽은 후 나는 결코 알 수 없을 사건들과 정치적인 인물들이 새겨진 그의 기억이 될 것과 짝을 이룰 것이며, 뒤집힌 이미지가 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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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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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노동자 계급의 부모 밑에서 태어나 프랑스 노르망디 인근 이브토에서 자랐던 아니 에르노는 루앙 대학과 보르도 대학을 거쳐, 현대 문학 전공으로 교사 자격을 취득하게 됩니다. 그녀는 1974년에 '빈 옷장'으로 등단해 주로 자전적 소설과 사회 문제적 주제를 포함해, 특히 여성들에 대한 사회적 금기를 소재로 삼아 글을 발표할 때마다 평단과 독자들의 많은 관심을 이끌어 냈습니다. 그녀의 작품 대부분에서 '여성의 심리 묘사'와 더불어 '노골적인 성애'를 담고 있어 문학적 경건주의에 빠진 평론가들의 비판을 받은 바가 있습니다. 이런 문학적 활동에 힘입어 아니 에르노는 2022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이와는 별개로 그녀는 정치적 활동에 있어, 2012년 프랑스 대선에서 멜랑숑을 지지한 바가 있고, 팔레스타인 문제에 있어 반이스라엘적 입장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더욱이 이란의 강제 히잡 착용 문제와 관련해서도 그녀는 이란 당국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을 가한 바가 있는데요. 이에 이란에서 일어났던 민중 봉기에 대해서 자신도 연대한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책은 원제, "L'Occupation'으로 지난 2002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05년 3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에르노의 이 책은 지금 읽고 있는 마농 가르시아의 논저, '여성은 순종적으로 태어나지 않는다'에서 인용이 되었기에 최근에 구매를 하게 되었는데요. 일전에 제가 에르노 작품에 대해 서평을 쓴 일도 있거니와, 소설 작품을 잘 접하지 않는 저에게도 에르노는 꽤 개성 있는 글을 쓰는 작가로 기억되고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은 여성의 다층적인 심리 묘사를 바탕으로 잘 짜여진 한 편의 '모노 드라마'를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더욱이 남녀 간의 성애적인 측면에서 여성이 남자의 남근에 대한 성적이면서 동시에 감정적 집착에 대한 '감정선'이 꽤 흥미롭게 다가왔는데요. 흔히 사랑하는 남성의 남근에 대한 좀 더 집요한 감정과 이 남근을 통해 애인을 육체적이면서 정신적으로 소유하고자 하는 평범한 여성의 심리를 어느 정도는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 작품을 통해 무슨 남근주의적 사고를 피력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남성이 자신이 사랑하는 여성의 가슴과 성기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 마찬가지로 여성에게 있어서도 비슷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은 충분히 공감을 살 만한 내용인데요. 일찍이 공화주의적 혁명을 경험한 프랑스 사회에 있어 여성의 이런 남근에 대한 소유 열망이 어떻게 보면 인간의 욕망에서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평등의 관점에서, 이러한 감정 자체가 사회적으로 백안시 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하지만 글 전반에서 보여지는 주인공의 많은 독백과 생각이 어쩌면 남성 주도의 연애관을 넘어, 여성이 받아들이는 연애와 사랑이라는 근본적인 접근에서 충분히 읽힐만한 소설이라고 여겨졌습니다.

그의 페니스가 자신이 질투하고 있는 여성의 성기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 마치 자신이 알고 있는 그를 영영 잃어버리는 것 같은 절망을 그려낸 소설 중간의 독백은 여성도 마땅히 사랑하는 남자를 소유할 수 있고, 자신이 알고 있는 페니스가 스스로 애정의 척도의 근간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저자는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물론 육체적 관계가 쾌락을 추동한다는 점에서 섹스 본연의 감정을 저자는 잊지 않고 있는데요. 다만, 소설의 제목과 관련해, 꽤 중의적인 해석을 해볼 수 있는 상대적으로 어린 연애 상대와 40대 중반의 주인공 여성의 관계가 일반적인 남녀 간의 관계에 대한 해석을 포함해, 사회적으로도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지에 있어서도 '이해와 갈등'이라는 두 가지 감정의 혼선 속에서 이를 잘 드러내고 있기도 합니다. 자신보다 나이도 어리고 매력적인 남성의 발기된 페니스를 그저 손으로 쥐는 행위마저도 슬픔과 만족이라는 양가적 입장이라 할지라도 그것의 의미는 꽤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단순히 외설적인 접근이 아니라 사랑하는 남성의 페니스를 마땅히 자신의 소유로 만들고 싶고 더 나아가 페니스에 대한 다른 여자의 접근마저도 방지하고 싶은 소위 '사랑에 빠진' 여성의 전형적인 감정의 레퍼토리라고 여겨집니다. 물론 에르노의 이런 집적적인 성기에 대한 묘사를 통해 이 글을 읽는 남성 독자들도 그럴 수도 있겠다는 인간으로서의 공감을 이끌어 내기도 합니다.

찬찬히 에르노의 이 소설을 읽고 난 후에, 저는 그동안 알고 있던 사랑에 대한 의미가 너무나 틀에 박히고 가부장적이지 않았나 되돌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우리 모두는 인간이기 때문에 설사 그것이 육체적 쾌락만을 요구하는 '섹스 파트너'일지라도 서로의 관계성을 모두 베제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여성의 사랑에 대한 편견을 재고하는 것이기도 한 데요. 그러면서 전형적인 남성들의 틀에 박힌 여성에 대한 육체적 관계를 포함한 '여성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의 발현이 불행하게도 상대방을 완벽히 이해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거의 분명해 보입니다. 내가 아는 그 사람이 다른 여자, 혹은 다른 남자에게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점은 그만큼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글 말미에 자신만이 알고 있던 사랑이 어떤 식으로든 끝을 맺게 될 때, 그러한 과정이 스스로에게 어떠한 의미가 될지는 최소한 스스로에게 내면의 탈각(脫却)을 통해, 최소한 자신을 인정하고 성장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설사 그것이 경솔하고 즉흥적인 감정으로 점철된 혼자만의 괴로움 그 자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 에르노 작품에서 관계가 마무리 될 때, 등장하는 '에이즈 검사'는 뭔가 그녀의 클리셰인 것일까요. 왠지 모르게 이 대목에서 실소가 나오더군요. 


잠에서 깨어나면서 내가 제일 먼저 하는 동작은, 잠결에 일어서 있는 그의 페니스를 쥐고 마치 나뭇가지에라도 매달린 듯 그렇게 가만히 있는 것이었다. ‘이걸 쥐고 있는 한 이 세상에서 방황할 일은 없겠지‘라고 생각하면서.

결국 내가 내 자리에 세워놓는 사람은 다른 여자가 아니라, 다시는 그렇게 될 수 없을 나, 사랑에 빠져서 그의 사랑을 확신하고 있으며 아직 우리 사이의 그 모든 일이 일어나기 직전의 나였다.

오장육부 깊숙이 뿌리내린 또다른 법, 그러니까, 당신의 육체와 정신에 침입한 자를 제거하고자 하는 의지에는 반했다.

잡다하기 짝이 없는 사실들을 끼워맞춰 인과관계를 부여하는 나의 능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삼십대 남자에게 제공되는 모든 가능성 속에서 그가 마흔일곱 살의 여자를 기꺼이 택했다는 사실은 나로서는 용납하기 힘든 것이었다.

상대방과 다른 점은 모두 열등한 것으로 바꾸어놓으며 자아를 지어버리는 질투라는 감정을 겪으면서, 나의 육체, 나의 얼굴뿐만 아니라 나의 활동, 내 존재 전체가 평가절하되고 있었다.

그의 페니스가 생각날 때면, 첫날밤에 본 모습 그대로 떠오른다. 침대에 누워 있는 내 눈앞에, 거대하고 강력하며 끝이 버섯 갓 모양으로 부푼 채 불끈 솟아 있던 그의 페니스. 마치 영화 속에 나오는 낯선 사람의 페니스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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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16 00: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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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16 12: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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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이란 무엇인가? - 갖가지 불평등의 원인을 이해하는 열쇠
린지 저먼 지음, 최병현 옮김 / 책갈피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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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지 저먼은 영국의 좌파 정치 운동가입니다. 그녀는 영국 반전 조직인 전쟁저지연합 Stop the War Coalition 의 창립 멤버였고, 영국 사회주의 노동자당의 월간지인 소셜리스트 리뷰의 편집자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저먼은 영국 유수의 사회과학 전문 대학인 런던 정경대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스스로 여성 운동에 대한 의지를 갖고 1975년 4월 영국 최초의 전국 낙태 캠페인에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정치 이력 대부분은 영국 노동당과 밀접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에 대한 반대로 SWC에 참여한 것만 봐도 그녀의 정치 성향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후 2007년 4월에는 런던 시장 선거에 참여하기도 하고 스스로 노동당을 개혁하기 위해 움직이기도 했습니다. 현재 그녀는 70이 넘은 나이에도 왕성한 정치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 책은 원제, "A Question of Class"로 지난 1996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2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서평을 쓰기에 앞서 우선 개념적인 접근에서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이행 과정에서 저자가 분석하는 '노동자 계급'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사회 전체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정도로 부정적이었다는 점을 먼저 언급하고 싶습니다. 특히나 여러분은 1980년대 신자유주의가 사회경제적 주도권을 쥐게 되면서, 노동 조합에 의한 사회적 영향력을 최소화하기 위해 정부가 이를 구조적으로 강화하여 왔다는 점을 인식하시는 것이 좋읗 듯 합니다. 즉, 사회 전반에 노동 조합에 대한 터무니 없는 부정적 영향은 바로 신자유주의가 시작되면서 강고화 된 것인데요. 이것의 전반적인 체제적 움직임은 결과적으로 자본가들의 요구와 그에 대한 정부의 응답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신자유주의자들의 작은 정부에 대한 사실상의 강력한 동의는 체제 안에서 소수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해 필요한 '정부'가 우선적으로 포함된, 작은 정부임을 우라는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과거 마르크스가 해석한 자본주의에 대한 함의는 일부 오류를 제외한다면 기본적으로 현세에 까지 일관된 설득력을 답보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일부 분들은 '노동자들의 착취'라는 개념에 눈살을 찌푸릴 수도 있겠는데요. 이 책의 1장과 2장에서 논증되고 있는 노동자 계급에 대한 분석과 사회적 기원에 대한 저자의 전반적인 진술은 대체로 정확한 근거를 갖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글에서 영국 사회의 여러 사례들이 근거로 제시되고 있고, 흔히 자본주의가 계급주의를 용인하지 않는다는 여러 일설에 대해 1장의 논의들은 충분한 반론으로 읽히는데요. 더욱이 저자가 강조하는 "계급은 객관적 관계다"라는 주장은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의 계급에 대한 주관적인 평가보다도 자신이 생존하려면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지에 대한 여부를 두고 고심해야 된다는 부분에서 실로 이론과 사례 양쪽 모두, 적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여전히 많은 자본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신봉하는 체제가 결국은 인간의 계급적 해방을 추동했고, 현재의 건전한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균등한 기회를 제공한다고 맹신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계급을 논하는 것 자체가 자본주의에서 무의미하다고 여기는 듯 한데요. 하지만 노동자 계급이라는 어감의 마르크스주의적 반감을 조금 차치하고 이 글을 본다면, 현재의 노동자 계급이 처한 실체 자체가 우리와 뗄래야 뗄 수 없는 상황임을 자각할 수 있을 겁니다.

"자본주의는 생산수단을 끊임없이 혁신하는 특성이 있다"는 2장의 서두는, 그만큼 자본주의를 잘 설명하는 문구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의 인식하에 과거와는 달리 비숙련 노동자들의 채용이 오늘날 자본가들에게 선호되는 것은 현장에서 비숙련 노동자들을 고용해 그만큼 생산 단가를 줄이려는 일련의 노력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1950년대 이후 변화된 영국 사회에서의 노동자 계층의 전반적인 상황이 저자의 분석대로 "결코 균일하지 않다"는 주장은 이 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세계 2차 대전 이후. 전통적인 제조업과 서비스직으로 분화되기 시작하면서 사무직 노동자들이 일선에 등장하고, 자본주의가 성장함에 따라 동시에 규모가 커진 서비스업은 자본가들의 새로운 요구였던, "읽고 쓸 줄 얼고 잘 교육받고 건강하고 상대적으로 장수하는 노동력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됩니다. 이처럼 노동 형태가 변화되고, 노동 계급 자체를 포드주의 시대보다 고분고분하게 만들었던 사회적 체제는 제조업과 서비스직의 분화라는 중요한 포인트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2장 중후반에 논증되는 노동 계급의 본질적인 사회적 삶의 변화는 정부가 이들의 삶에서 양육을 책임지지 않는 것으로 시작해, 전반적인 사회적 부조를 신자유주의가 성공적으로 제거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화이트 컬러 노동자들이 일반 제조업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과 자신들은 엄연히 다르다는 입장으로 급격한 분화가 이뤄졌습니다. 또한 사회가 보다 평등한 삶을 위해, 서로 간의 처한 입장과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여러 모순들에 있어 근본적인 방해가 되는 노동 계급의 분열이 초래된 것인데요. 다소 불편한 이해일 수 있겠지만, 이들 화이트 컬러들이 자본주의에 사실상 매수 되었고, 비숙련 노동자들에 대한 자본주의 자체의 선호로 말미암아 대다수의 제조업 노동자들이 저자의 분석대로, '언더클래스'로 취급되기에 이릅니다. 사실상 이들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이 사회 개혁이라는 미명하에 신자유주의자들로 하여금 철회된 시점에서, 많은 시민들이 이런 분열된 의식 가운데, "무엇보다 가난한 사람은 게으르고 멍청하거나 어딘가 문제가 있기 때문에 가난한 것"이라는 터무니 없는 편견이 뿌리 내리게 됩니다. 더욱이 극우에 있는 자들은 "물질적 빈곤 자체는 개인이 자초한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하는데요. 2장 말미에서 언더클래스 이론은 결국, "취업자와 실업자, 훌륭한 사람과 쓸모없는 사람, 검소한 사람과 무절제한 사람으로 노동자들을 분열시켰다고 판단됩니다.

이어지는 3장은 소위 '선택 받은 자들'이라는 자본가들을 설명합니다. 다수의 자본가들은 다른 시민들과는 엄연히 구분되는 '보다 많은 선택의 기회, 더 자유로운 선택'으로 표현되는 사실상 사회 지배 계급입니다. 이들에 대한 저자의 분석 들은 대부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인식들입니다. 이번 장의 가장 중요한 분석은, "정부 자체, 경찰 군대 같은 국가 기구, 사법부, 공무원 조직은 모두 자본가 계급을 대신해,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위해 운영되는 조직이다"는 저자의 주장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사회가 구축되어 왔고, 이들의 이익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전무하다는 것이 이 장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만약 자본주의가 계급의 자유로운 이동성을 보장하는 건전한 체제 그 자체라면 자본가들의 특권 만을 위한 사회의 재편은 확실히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일부의 경제적 활황에서 일부의 '떡고물'을 노동자 계급과 공유하겠다는 일종의 경제적 배려 같은 것도 어쩌면 계급적 인식의 한 증거일 수도 있겠습니다.

생산 수단에 대한 자본주의적 조치에서 비롯된 사회의 계급적 분열은 이처럼 결과적으로는 자본주의적 모순 이전에 우리의 정치를 포함한, 고질적인 문제로 귀결되었습니다. 시민 사회가 분열되어 있다는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는 노동자 계급을 포함한 중위 계층과 그 이하 계층의 분열, 그리고 이것을 거의 조장하는 듯한 자본가들을 위한 이익 증대의 토대는 우리가 어떠한 현실에 놓여 있는지 깨닫게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저자인 린지 저먼의 새로울 것 없는 체제 전반의 비판은 역시나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만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지점에서 너무나 당연한 소리인지도 모르겠지만, 저먼의 이 글을 찬찬히 읽다 보니, 지금은 없는 지그문트 바우만이 다시금 떠올랐습니다. 모두가 아주 쉽게 '시민의 각성'을 밥 먹듯 언급하지만 자본주의가 가져다 준 본질적인 체제 구속은 쉽게 개선될 수 없는 지극한 현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저와 오래된 북플 이웃님이 이 책에 대한 짧은 평가를 남기셨는데, 보자마자 반가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


노동자는 마르크스가 말한 ‘노동의 소외‘때문에 ‘노동과정‘뿐 아니라 삶의 모든 측면에 대한 통제력이 없어 무력감을 느낀다.

개인의 실제 계급 위치는 자신이 어느 계급에 속한다고 생각하는지가 아니라 생존하려면 노동력을 팔아야만 하는지 여부에 달린 것이다.

자본주의는 생산수단을 끊임없이 혁신하는 특성이 있다. 자본주의 초기부터 구조조정은 자본주의의 중요한 특성이었다.

자본주의는 읽고 쓸 줄 알고 잘 교육받고 건강하고 상대적으로 장수하는 노동력이 필요하다. 그래야 노동생산성을 높여 잉여가치를 최대한 쥐어짜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가 양육의 짐을 부담하길 원치 않았기 때문에 시간제 일자리가 적합했던 것이다. 이런 일자리는 여성이 기초적 양육을 책임지면서 병행할 수 있어 국가 지출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화이트 칼라 노동자들 스스로 자신을 노동자라고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객관적 지위가 무엇이든 간에 소득과 라이프스타일을 기준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가난한 사람은 게으르고 멍청하거나 어딘가 문제가 있기 때문에 가난한 것이라 생각했다.

정부 자체, 경찰 군대 같은 국가 기구, 사법부, 공무원 조직은 모두 자본가 계급을 대신해,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위해 운영되는 조직이다.

경제 성장기와 호황기에 자본가는 상당히 만족해하고 약간의 떡고물을 자신이 착취하는 노동자들에게 주기도 한다.

특권층을 위한 이런 제도와 단체 등은 자본가 계급의 구성원을 교육하고, 계급의식과 응집력을 높이고, 지배계급 출신이 아니지만 부나 지위를 통해 지배계급이 된 이들을 포섭하는 구실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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