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을 성찰하다 - 중산층 붕괴, 포퓰리즘, 내셔널리즘…… 유럽중심주의 몰락 이후의 세계
다니엘 코엔 지음, 김진식 옮김 / 글항아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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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코헨은 프랑스에서 존경 받는 경제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는 특이하게도 북아프리카 튀니지 출신으로 프랑스 경제 엘리트들의 요람인 파리 경제 학교에서 교수로 재직중이며, 선도적인 정책 연구 기관인 CEPREMAP의 이사를 역임하고 있기도 합니다. 또한, 프랑스 굴지의 언론인 르몽드의 정기적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하고 있는데요. 그는 주류 경제학과는 거리가 먼 인물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특히 신자유주의에 대한 강고한 비판자로 프랑스는 물론 유럽에서도 상당한 인지도를 갖고 있는 지식인인데요. 그가 쓴 수많은 논저들은 현재의 비정상적인 자본주의적 이행과 그에 정치의 실패를 주요 논점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의 이 책은 원제, "Il Faut Que Les Temps Ont Change"로 지난 2018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0년 8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제가 다니엘 코헨의 이 책을 일독하고 나서 들었던 생각은 콜린 크라우치의 최근 논저의 인상 깊은 첫 문장이었습니다. 그것은 "두 개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와 외국인 혐오 민족주의다."와 같은 간결한 고백입니다. 이미 이 글에서도 코헨은 다른 민족에 대한 유럽인들의 뿌리 깊은 인종차별적인 인식을 언급하고 있었는데요. 이러한 외국인 혐오는 단순히 극우 포퓰리즘의 위세 속에서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랫동안 깊이 이들 몸과 마음속에 체화되었다는 저자의 통찰이기도 했습니다. 몇 세기에 걸쳐 유럽에 내려온 유대인들에 대한 터무니 없는 혐오와 멸시를 고려한다면 저자의 평가는 아주 허위인 것은 아닌데요. 또한, 후자의 신자유주의와 관련해서도, 기업과 노동 조합 간의 대화와 협력을 지속하고 있는 독일을 제외한다면 자유 진영의 대부분 국가들에게서 신자유주의가 지금까지 위력을 떨치고 있는 실정입니다. 저자는 이 신자유주의의 기원을 1980년대 레이건과 대처로 시작된 '보수주의 혁명'으로 언급하고 있는데요. 이 지점의 인식과 관련해, 지금까지도 프랑스에서 중대한 의미를 보이고 있는 1968년 5월, 당시 대학생들에 의한 '68혁명'을 끌어내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과거 68혁명의 상황이 단순히 프랑스 만으로 국한된 것은 아니었을 겁니다. 저자의 말대로 라면 "거의 완벽한 복지 국가 시스템을 자랑했다"던 유럽 시민의 상황도 그렇고 마찬가지로 미국 역시, "복지 수준이 다시는 경험하지 못할 정점에 도달에 있었다"는 평가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봐야겠는데요. 우리의 복지 국가 관념이 최종적으로 무덤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신자유주의의 혁명은 사회적 진보라는 의미에서 봤을 때, 68혁명의 실패와 맞물려 이어진 보수주의 혁명은 그 반대의 결과를 낳았다고 봐도 무방해 보입니다. 저와 같은 일개 시민에게는 사회적 안전망의 박탈은 흡사 앞으로의 삶을 보장하기 어려운 상황을 실제로 맞닥뜨리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는 "좌파가 공허한 외침으로 시민을 거듭 들먹이지만 결국 아무도 구하지 못한 무능"을 드러낸 점이 한 몫을 하게 되는데요. 물론 우파 역시 도덕의 붕괴와 더불어 시민들을 탐욕과 이기심의 벌판으로 몰아내게 됩니다. "탐욕은 좋은 것이다"라는 외침과 더불어, 개인의 이기심을 선선히 종용하는 신자유주의적 담론이 실질적으로는 데이빗 코츠의 말대로 힘 있고 돈 있는 자들만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는 점은 이제는 거의 모르는 분들이 없을 겁니다.


시민 개개인의 삶은 자율과 안정성에 기반해야만 비로소 온전하게 정치에 눈을 돌려, 최소한의 기여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인데요. 그런 연유로 저자가 글 중간에 사회학자 토마스 프랭크를 인용하여 미국 캔자스에서 벌어진 빈자들이 부자들을 위해 투표하게 되는 일련의 과정과 지난 브렉시트 과정에서 무더기 찬성표를 던진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의 퇴색한 도시 영국 보스턴의 분위기는 단편적으로 우리의 숨길 수 없는 현실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사례로 여겨집니다. 이는 레이건 시대 이래로 미국의 노동 조합이 사회적으로 분쇄되어 그 자체로 시민들이 어떠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어버린 신자유주의적 상황이 초래한 것이기도 합니다. 다시금 강조하지만 신자유주의가 모두의 이익이 되지 못한 것은 자명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럼에도 모종의 자본주의적 여러 술책들 가운데, 대니얼 벨의 언급대로 "마켓팅과 광고로 되어 있는 쾌락주의적 소비 영역"의 범람은 여전히 시민들에게 평생을 바쳐 일을 해야만 하는 힘겨운 노동자로서의 삶을 강요하면서 그것이 우리의 운명인 양 체념하게 만드는 '비인간화적인 인식의 주입'은 사회전반에 어두운 분위기를 불러일으킨 것은 확실합니다. 물론 일부 계층을 제외한다면 말이죠. 

신자유주의와 결탁한 보수주의 혁명의 본질은, 미국에서 만큼은 공화당이 "도덕적 보수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의 결합"이었다고 저자는 이처럼 분석하고 있는데요. 이 때의 공화당이 경제적 자유주의와 경쟁에 대한 담론에 몰입함으로써 기득권을 추종하는 정당이 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뒤이어 네오콘 세력 역시, "종교, 민족주의, 경제성장"이라는 슬로건을 갖고 있었습니다. 코헨은 이 지점에서 사실상의 보수주의 혁명의 실패가 트럼프와 같은 포퓰리스트들의 출현을 초래했다고 인식하고 있는데요. 트럼프를 지지한 3분의 2 가량의 교육 받지 못한 백인들과 기존의 엘리트들과 고학력자들에 대해 더할 나위 없이 증오를 키운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이 그토록 원하던 소위 "자신 알리기"는 그들이 엘리트들과 기득권층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와 맞물려 있기도 합니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정치에 전혀 맞는 자를 홧김에 지지하는 것이 정치 발전에 어떠한 영향이 있는지는 불확실합니다. 그럼에도 기존의 민주당이나 공화당을 선택한 것이 아닌 정치의 이단아인 트럼프에게 한 표를 던진 것은 미국 정치 뿐만 아니라 세계 정치에 있어서도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미국인들의 칠천만 이나 되는 유권자가 트럼프에게 표를 던졌으니까요. 여기에는 이들이 그저 어리석은 상태에서 트럼프를 지지한 것이 아니라 트럼프의 심각한 인종차별주의적인 인식과 여성차별적인 문제를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러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은 것일 텐 데요. 이런 와중에 마이클 샌델이 좌파 엘리트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좌파들이 이들 '소외된 사람들'과 상당히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사실은 미국 정치를 파탄에 이르게 했으니까 말입니다.

지난 잃어버린 50년의 상황에서 많은 소시민들은 사회가 보장한 안전망 자체를 거의 믿지 않게 되었고 더군다나 이들이 실질적인 수혜자임에도 정부의 소득 재분배에 대해 거의 관심도 없다는 저자의 진술은 실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일부 기득권들과 부유층들이 사회를 자신들의 입맛대로 개조하고 있을 무렵, 신자유주의적 능력주의가 모든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몰면서 이는 단순히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 만은 아니게 되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디지털 자본주의의 시작은 제프 베조스와 같은 자를 양산하며, 시민들은 디지털 세상에서의 '인간 정체성 확보'라는 또 다른 힘든 과제를 얻게 되었는데요. 과연 코헨의 의지대로 우리 시민들이 인간의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고 이를 버팀목으로 삼아 다시금 공공선으로 보일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 있을지는 아직은 불확실해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또한, 유발 하라리의 강조대로 인간이 너무나 자본주의적 도구로서 소비 사회를 이끄는 목적에 충실한 나머지 시스템의 부속품과 다름없는 실정이기도 한 데요. 요즘 정치 무대에서 각광을 받고 있는 '정체성 정치'나 계몽주의로 돌아가자는 여러 움직임들 역시 현실의 자본주의적 폐해를 조금이나마 상쇄 시키고자 하는 작은 노력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니엘 코헨의 이 글은 마치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가차 없는 현실 인식에 따른 비판적 주장들과 쉽게 연결되기도 하는데요. 그래서 저에게 있어 코헨의 이번 논저는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좌파는 시민을 받아들인다는 인식을 주었지만 위기에서 서민을 보호하는 데는 실패했으며, 도덕 회복 정책으로 선출된 우파는 시민들을 탐욕의 재단에 갖다 바쳤다

베버는 자본주의가 신뢰와 계약관계를 구축하고 규칙, 법 책임 ‘윤리‘ 전체를 재조정하면서 탐욕을 합리화하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했다

저성장 시대에는 우선권의 본말이 전도된다, 위기를 접하면 사람들은 이기적으로 변하면서 자신의 이해로 물러서게 된다

자본주의에 대해 분석하기를, 질서와 포기라는 이상이 지배하는 생산 영역과 매력적인 글래머라는 섹스 이미지를 제공하는 마켓팅과 광고로 되어 있는 쾌락주의적인 소비 영역 사이의 영구적인 긴장이라고 한다

연합국은 독일 국민중에서 진짜 나치를 찾아내려고 혈안이 되었지만 찾지 못했다. 독일인의 90퍼센트는 가끔씩 마음에서 우러나 나치에 동조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전체 인구의 10퍼센트에게만 혜택을 주는 경제성장은 허약한 성장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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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 공상 혹은 환상 - 기본소득을 넘어 국가를 다시 생각해보기
김공회 지음 / 오월의봄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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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서울대 경제학과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 영국으로 건너가 속칭 런던 대학교의 동양 아프리카학 분야로 특화된 SOAS : 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 에서 경제학 박사를 취득합니다. 그가 학위를 마친 SOAS는 전문 대학으로 특화된 곳으로 전세계에서 학문적 명성이 높은데요. 특이하게도 나무 위키에서 한국인 중에 이 학교에서 경제학 박사를 취득한 사람으로 저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기도 합니다. 현재는 그는 국립 경상대의 경제학과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는데 그 전에는 국회의원 보좌관을 거치기도 했고, 홍대 앞 LP 바에서 DJ를 한 이력도 갖고 있습니다. 일단 그의 이 책을 일독하고 나서 든 생각은 일반적인 경제학자와는 사뭇 다른 입장을 엿볼 수가 있었는데요. 안정적인 자본주의적 이행을 위해 무엇보다 복지국가 담론이 필요하다는 취지의 논증은 꽤 신선한 것으로 다가왔습니다. 지금 소개해 드릴 이 책은 가장 최근이라 볼 수 있는 2022년 7월 국내에 출간되었습니다.

언뜻 이 글의 제목만 놓고 본다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신명을 다 바친 어느 노회한 경제학자의 글로 여길 수 같은데요. 그런데 그동안의 출판사의 행보를 고려해 본다면 거의 터무니없는 추측일 수도 있겠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이 책은 그동안 국내에 무분별하게 퍼진 '기본 소득 담론'에 대한 이론적 정리이자, 더 나아가 지금 이 순간에도 '복지 국가의 필요성'이 철지난 소리가 아님을 증명하며, 이 복지 국가 담론으로 인해 자본주의적 항상성을 답보할 수 있다는 취지의 주장을 담고 있는 글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자의 의견에 쉽게 수긍하지 못하는 주장들도 여럿 있었는데요. 그것은 뒤에서 차차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결말을 포함한 총 9장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으며, 1부에서는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진 기본 소득에 대한 오해와 진실을, 2부는 다소 터무니 없이 주장되는 기본 소득과 기본 자산에 대한 저자의 비판적 분석과 3부에서는 사회적 안전을 답보하는 체제 전반의 경제적 안전에 대한 요구 및 복지 국가로의 다시금 의미 분석을 시도하고 결론에 이르러 '민주적 통제'와 더 강화된 민주주의에 의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근래 기본 소득과 관련해 이름을 알리고 있는 런던 대학의 SOAS 교수이자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BIEN의 가이 스탠딩이 주장한 '공화주의적 자유'를 개인적으로는 먼저 언급하고 싶습니다. 이 공화주의적 자유는 "힘 있는 자들의 선택이 다른 이들의 선택을 가로막지 못하도록 정부가 나설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여기에는 민주주의의 아주 기본적인 가치인 평등의 개념을 원칙으로 자본주의가 알아서 스스로의 폐해를 시정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진 이 상황에서 일정 부분 정부가 필요한 일을 해야만 한다는 논리와 맞닿아 있습니다. 이는 과거였던 1980년대 이후, 프랜시스 후쿠야마에 의해 소위 '손쉬운 해결책'으로 묘사되었던 복지 국가의 전면적인 철회가 레이건 행정부에 의해 단행되었는데요. 여기에는 대다수의 신자유주의자들이 '시장 자유'를 기본으로 증명되지 않은 시장의 합리성을 국가와 사회에 광범위하게 주입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에 저자는 7장에서 오늘날 무분별하게 쓰이고 있는 '불평등'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통해, 불평등이라는 단어의 무분별한 사용으로 인해 사회적 문제의 실질적인 해결을 저해하는 요소로도 일견 작용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었는데요. 근데 사실 이런 이면에는 민주주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신자유주의자들이 그토록 혐오하는 민주주의의 평등을 자연계와 인간 세계에서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치부해 버리고 불평등과 적자 생존이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라 여기는 배타적 인식을 시민들이 제대로 비판하지 못한 이유에도 그 책임이 있다고 보는데요. 이미 로버트 달은 이런 불평등에 대한 여러 계층의 재인식과 관련된 움직임에 우려를 표한 바가 있습니다. 이 점은 분명하게도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시장 자유를 위해 제약한 것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자는 불평등에 대한 과잉된 인식을 비판하기에 앞서 앞선 자유 시장 담론에 대한 면밀하고도 비판적인 논증이 우선해야만 했습니다. 이 점은 저에게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2장에서 기본 소득 담론과 관련해, 실질적인 임노동과 자본가의 건전한 순환체계를 강조하면서 저자가 논하고 있는 "자본가가 노동자를 부려 이익을 취하고, 이들 자본가가 제공한 임금은 노동자의 삶을 꾸려나가는데 중요한 원천이면서 마찬가지로 이들이 생산한 상품이 판매하는 보편적인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점은 충분히 공감할 만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생태계를 통해 자본주의 체제는 이런 순환과 상호 의존을 통해 유지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는데요. 오늘날의 자본주의 역시 자본가와 노동자의 상호 관계를 통해 유지 혹은 발전되기도 하지만 현재의 자본주의가 금융 자본주의와 지대에 따른 시세 차익을 노린 부동산 경기로 왜곡되면서 자본가와 노동자에 있어 자산에 대한 근본적인 차이가 더욱더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는 심각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 부분에 대한 진정한 해결책은 신자유주의자들이 가히 경기를 일으킬 수도 있는 체계적인 민주적 통제와 시장에 대한 민주주의의 주도권 쟁취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해결책은 민주주의의 국가일 수록 더욱 저항이 거셀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인데요. 그런 측면에서 7장과 8장에서 저자는 다소 조심스럽게 부자들에 대한 확고한 누진세를 언급하고 있습니다만 오히려 부자들을 걱정하는 다수 소시민들의 이해되지 않는 의견들과 어느 국가나 정치권과 의회 세력이 한 목소리로 부자들에 대한 좀 더 점진적인 과세에 대해 저항을 하고 있는 실정은 우리의 민주주의가 어느 지점에 와 있는지 생각하게 합니다. 이것을 다수에 의한 소수의 탄압의 가능성을 우려했던 사람 중에 하나인 제임스 메디슨의 정치적 유산인지는 모르겠으나 전반적으로 가용할 수 있는 자원이 압도적인 부유층이 저항이 거센 것은 다소 아이러니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런 상황에서 과연 저자가 요구하는 국가의 점진적인 복지 국가화가 과연 제 기능을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어쩌면 반대편에 있는 신자유주의자들과 토론해서 그들을 설득시키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부유층에 대한 과세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평범한 소시민들에 대한 설득 또한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여겨지는데요. 이를테면 민주주의에서 본격적인 여론의 함의 혹은 시민들의 공감대를 확대시키는 중요한 과정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일찍이 허버트 스펜서는 빈곤층의 존재 유무가 일반 시민들이 자신들의 삶을 위해 경제적 노력을 기울이는데 아주 현실적인 반면 교사가 될 수 있으니, 한편으론 저들을 무분별하게 사회에서 제거하는 것이 마냥 실용적이지 않다고 여겼던 모양입니다. 최소한의 생활 유지를 위해 '사회 안전망'이 절실한 계층에게 실제로 그들이 빈곤자임을 증명해야 하는 서류 과정이 '인간 이하의 굴욕감'을 맛보게 하는 등 이것이 현 시대 복지 정책의 단면인지도 모르겠으나 수급 문제를 비롯한 복지 전반이 아직도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역사에서 그런 과정이 있었느냐고 되물어 볼 정도로 신자유주의에 의한 복지 담론의 궤멸은 이처럼 현실에서 쉽게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데요. 아직도 서유럽에서 경제상의 큰 문제로 인식되고 있는 '프레카리아트'에 대한 존재와 시장 자유에 따른 시민들의 경제적 차별과 빈곤의 상황은 여전히 '개인의 문제'로만 인식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기본 소득'에 대한 담론 자체가 사회적 인식 차원에서 아주 소모적인 것은 아니라고 가정한다면 민주주의에서 어떤 시급한 문제나 과제에 대해 시민 모두의 의견들을 통해 여론을 형성시켜, 이를 사회적 압력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우리 정치의 건전성을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시장과 경제에 있어서 일절 누구도 간섭하지 말라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해 더욱 비판을 가해야 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기도 하고 자본주의를 오로지 유일한 수단으로 삼아 스스로가 초래한 문제를 자본주의가 해결할 수 있게 끔 하는 '합리주의'가 역사적 효력을 다했다는 것을 모두가 깨달아야 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3장에서 "자본주의는 문제이자 해결책이었고, 스스로가 제기한 문제를 (불완전하게) 해결하면서 자본주의는 변모해왔다"고 언급하면서 하지만 자본주의가 '기본'에 대해 충분히 음미하지 못했다고 분석하고 있는데요. 초기 자본주의가 탄생시킨 임노동제의 정착과 더불어, 혹여 자본주의 체제가 어긋나 사회 전반을 뒤흔들지도 모르는 일련의 우려에 대해 논의를 하고자 했던 전반적인 노동자 계층의 단결권이 레이건 행정부에 의해 공중분해되면서 그 '기본'이 이미 유명무실해진 원인이라고 봐야 할 것 같은데요. 막강한 재력과 사회적 자원으로 무장한 자본가들과 소수의 부유층에 비해서, 일부의 열성적인 법조인들의 지원을 제외한다면 그저 무력할 수밖에 없는 일반 노동자들의 상황은 지금에도 별로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계급주의적 상황을 용인하지 않는 자본주의가 어떻게 이러한 상황으로 변질되었는지는 사회적 분석 만으로는 너무나 부족하겠지요. 일전에 데이빗 코츠의 주장대로 오늘의 자본주의가 그저 단순한 자본주의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이자 금융 자본주의로의 이행했고 저들이 사조로 일컫는 애덤 스미스조차 경멸해 마지 않았던 소위 '지대 경제'에 따른 시세 차익의 추구가 사적 이익화의 한계는 없다는 점을 여실히 증명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앞 전에 저자가 모든 시민들과 시민 사회가 현재의 자본주의적 체제에 순응하고 동조하고 있다는 것을 먼저 언급하고 있었는데요. 과연 이런 차별이 극명하게 일어나는 자본주의적 체제를 우리가 스스로 원했을까요. 이미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니 비판은 그저 무기력하고 '기계에 인간의 노동력이 부속품처럼 따르는'상황을 아무런 불평 없이 따라야만 합리적인 시민이 될 수 있다는 불편한 서사가 지금 이 순간 떠오릅니다.

아마도 사회적 분배에 대한 일차적인 의미에 모두 공감하실 것 같습니다. 불평등의 근본적인 해결은 이런 분배에 달려 있다고 봐도 무방한데요. 로버트 달은 물론 최근의 여러 지식인들이 이에 동조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효과적인 사회적 분배를 위해 세율에 대한 보다 실효적인 누진세 채택은 중요하고 이를 위해 보다 많은 민주주의가 요구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민주적 통제 자체에 과도한 고통을 느끼는 경제인들이 많은 것도 현실이고 어느 정도까지 선출 권력이 이들 시장 지배 세력을 제어할 수 있을지도 거의 미지의 영역이라 볼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여러 인용들을 통해, 신자유주의자들이 민주주의를 사실상 시녀로 취급했다는 해석을 서슴없이 내뱉기도 했는데요. 여전히 우리의 정치가 모두의 이익을 위해 다시 뛸 수 있을지도 불명확한 시점에서 자본주의가 어디까지 우리를 끌고 갈지 문득 두려운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의 '기본 소득'으로 인한 현실 비판과 더불어 불평등을 조금 더 감쇄 시킬 수 있는 제안 등을 담은 내용 전반에 저로서는 동의하는 편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저자의 일부 비판을 수용하여 기본 소득에 대한 '정액론'과 모든 시민의 소득을 고려하지 않는 일괄 지급과 같은 내용에 있어서는 다시금 수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어떤 이들은 기본 소득 운동 자체를 포퓰리즘과 연계시키는 실정이기도 해서 요즘과 같은 SNS 시대에서는 시민들의 정확한 이해를 돕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원론적인 정치적 입장도 쉽게 왜곡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시민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과연 어떤 것이 최선인지 많은 고심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은 매우 오래된 것이지만, 대체로 그것은 개인의 미덕의 발로로 여겨졌을 뿐이다

빠르게 위력을 더해가는 자본주의의 모순에 정면으로 맞서기보단 과거의 자급자족적인 삶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바람을 그로부터 읽어내기란 어렵지 않다

페인, 스펜스 등 초기 논자들은 선량하기만 한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삶의 기반을 상실하고 떠돌다 죽어가는 것을 속절없이 지켜봐야만 했을 것이다

한편으로 국가는 ‘자본가들의 공동위원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대다수 인민의 이해관계를 구현해야 하는 근대적인 ‘공화국‘이기도 하다

이렇게 소득세제가 자본주의의 심화 발전의 한 결실이라면, 대중의 삶의 안정성을 보장해주는 데 그것을 이용하지 않을 까닯은 없다

그러나 소득을 이렇게 결과 측면에서 정의한 뒤 거기에 적용할 적정 세율을 사회적 토론을 통해 결정하는 것은, 그 자체로 민주주의 성장의 표지라고 해야 할 것이다

비민 수당 수급자가 되려면 소득자산조사 means test 를 거쳐 국가로부터 ‘빈민 인증‘을 받아야 하고, EITC를 받으려면 억지로라도 어디든 고용되어 저임금 노동이라도 해야 하며, 실업수당을 받으려면 구직활동에 성실히 임했음을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 이렇게 가난하다는 것을, 무능하지만 비참한 노동을 하며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음을 스스로 증명하지 않으면 정부나 지자체로부터 수당을 받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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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괴물이 되어가는가 - 신자유주의적 인격의 탄생
파울 페르하에허 지음, 장혜경 옮김 / 반비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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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페르하에허는 벨기에에서 임상 심리학과 정신 분석학을 연구하고 있는 학자입니다. 그는 1978년에 벨기에 공립 연구 대학인 겐트 대학에서 심리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고, 1985년에는 임상 심리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습니다. 다만, 벨기에만의 특별한 자격 요건 때문인지 심리학 박사 학위를 받고 또 심리학 교수이기도 하지만 현재 심리학자 자격증은 없다고 위키에서 소개되고 있는데요. 스스로도 심리학자라는 직함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내용도 첨언하고 있었습니다. 여느 심리학 분야를 전공하는 다른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페르하에허도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자크 라캉을 오랫동안 연구해왔는데요. 이 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여 왔던 점도 특이할 만한 이력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특히, 강고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비판적 인식을 보이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그의 이 책도 마찬가지로 앞선 부분과 같이 동일한 맥락으로 논증되고 있었습니다. 이 책은 원제, "Identiteit"로 지난 2012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5년 11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저자의 이 책을 간단히 요약해 본다면, '신자유주의적 능력주의'에 대한 일관된 비판을 담은 글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는 1부에서 논증되고 있듯이 인간의 사회가 오랜 계몽주의적 전통과 그러한 토대가 자본주의적 인간관의 주입으로 사실상 파괴되어 왔고 이러한 인식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일목요연하게 다루고 있기도 합니다. 이것은 '공동체적 인간'과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는 인간'이라는 사실상의 대립법을 통해 논지를 전개하고 있는데요. 오늘날 신자유주의가 강력하게 주장하는 '시장 자유' 혹은 '사실상 제한된 자유'가 사회에 어떠한 식으로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지에 대한 '사회적 서사'와 더불어 꽤 진지한 비판적 분석을 함께 담은 글이라 볼 수 있습니다. 아직도 일각에선 지난 40 여 년 간의 신자유주의에 의해 자행된 광범위한 정치 경제적 사회개조에 대해 그저 음모론을 펼치는 자들이 많은 것이 실정입니다. 이들이 단순히 지난 역사에 대해 무지한 점을 떠나 신자유주의가 초기에 큰 기대와 각광을 받았던 점을 고려해 본다면, 2008년의 그 무자비한 금융 위기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맹목적 지지를 철회하지 않은 것은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이 글의 2부에서도 논증으로 명백히 드러나지만 신자유주의가 국가와 정치 전반을 시장에 귀속시키려 했고, 제러미 벤담이 역설한 '자연 상태의 인간'이라는 의미가 신자유주의 시대를 여실히 요약하는 짧은 문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자가 1부 중간에, 신자유주의적 기법 전반이 '제2의 사회진화론'이라고 규명했던 점은 모두에게 전혀 지나치지 않은 해석이라 여겨집니다.

찰스 다윈의 개념과는 달리 완전히 다른 개념인 '적자생존'을 창안한 허버트 스펜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번식을 하지 못하도록 사회 복지 제도를 없애라고 한 토머스 멜서스와 함께 사회진화론의 악명을 이끈 인물입니다. 저자의 우려대로 이 사회진화론을 고스란히 끌어다 재정립시킨 신자유주의가 원인이 되어 오늘날 사회진화론에 대한 토론이 다소 잠잠한 것에는 이러한 맥락이 기반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좀 전에도 언급했듯이, 신자유주의 시장경제 혹은 신자유주의 능력주의가 허버트 스펜서의 적자생존의 개념을 사회에 성공적으로 적용시키기에 이릅니다. 마찬가지로 경제학이 이런 개념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을 고려해 본다면 신자유주의자들의 진정한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는 충분히 짐작이 됩니다. 그래서 5장에서 저자는 "사회진화론과 신자유주의는 제일 잘 태어난 인간에게 살짝 더 이익을 얹어주는 듯한 분위기를 조장한다"고 이를 비판적으로 잘 분석하고 있기까지 한데요. 저로서는 저자의 진술이 다소 순화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위 공정한 경쟁을 통해 각자의 자리를 찾게 되는 능력주의가 부모가 가진 돈에 따라 엘리트 게층의 고착화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는 점과 제러미 벤담 또한 인지한 "신자유주의 '자유'시장은 공장과 글로벌 정치 결정의 타협이 있어야만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전제도 우리가 알고 있는 신자유주의 자체가 그저 반쪽 짜리의 산물임을 다시금 깨닫게 합니다.

많은 자본주의자들이 강조하고 있듯이, 인간의 자아 실현이라는 관념은 멋진 아이디어라는 점과 동시에 자본주의의 강력한 순기능이라고 주장 되어왔습니다. 아마도 이 지점에서 과거 사회의 진보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계몽주의의 몰락을 초래하게 되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요. 과도한 합리주의의 주입으로 사회적 관념이 전반적으로 변화를 맞게 되고 산업혁명과 더불어 '경제적 인간'이라는 새로운 가치가 큰 주목을 받게 됩니다. 반대로 과거의 역사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필두로 "개인의 이익만 생각하는 윤리나 정체성 발달은 말 그대로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는 진술은 작금에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깨닫게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아이디어는 정치를 주도하는 권력층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로 동일한 것이기도 했는데요. 단순히 돈이 많거나 주변의 권력을 아우른 자가 아니라 도덕적으로 모범이 될 수 있는 사람이 사회와 정치를 이끌 수 있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오늘날은 "돈이 많은 자와 권력을 쥔 자에게 윤리와 도덕적인 문제에 대해서까지 조언을 받으려고 한다"는 점은 과거와는 여실히 변화된 사회상을 보여줍니다. 이는 "돈이 많은 사람은 다 노력과 성격 덕분이므로 인성도 훌륭하다"는 부유층에 대한 평범한 사람들의 인식을 함께 보여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4장에서 밝혀지는 계몽주의 시대는 "적응력은 물론 다양성의 원천 역시 전형적인 인간의 능력, 즉 의식적 결정과 의도적 변화를 이끄는 이성에 있다"고 본 것인데요. 자본주의적 인간의 합리성과 계몽주의에서의 이성이 얼핏 보면 유사해 보이기도 하지만 이처럼 명백하게 다른 측면을 갖고 있는 것이죠. 저자가 뒤에서 '자유 민주주의'를 황당한 변종으로 여겼던 것에는 바로 이러한 선례가 바탕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한 몸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겠지만 좀 더 구분해 본다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명백히 상반된 다른 개체입니다. 기본적으로 저자 역시 앞선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는 완벽하게 다른 물건임을 인지하고 있습니다만 "전자는 국가와 사회의 엄격한 분리를 추구하지만 후자는 국가를 소위 자유시장에 복종시키려 한다"는 점입니다. 만약 에드먼드 버크가 지금 살아있다면 실로 그가 통탄할 내용들이 바로 후자에 있는 것이죠. 결국 신자유주의자들이 국가에 대한 시장의 우위를 좀 더 하이브리드적인 관념을 탈바꿈시킨 것이 아마도 '대마불사'일겁니다. 시장이 초래하여 막대한 피해를 사회와 국가에 끼쳤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시장을 위기에서 무조건적으로 구해내야만 한다는 철면피와 같은 당위가 저들의 사고에 더해진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사회와 시민을 인질로 삼고서라도 말이죠.

1980년대에 영국에서 복지 국가라는 관념이 모조리 몰락한 이후로, 우리에게 복지 국가라는 개념은 책에서나 등장하는 것이었습니다. 경제에 있어서 만큼은 강력한 자유를 주장하는 미국에서나 다른 자유주의 진영의 국가들에게서 복지는 신자유주의에 의해 배격되는 관점이었습니다. 앞선 '신자유주의 능력주의'를 필두로 개인의 삶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개인에게 있다는 주장이 배타적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어쩌면 우리가 직면한 출생률의 심각한 문제는 토마스 멜서스가 강조한 가난한 자들이 번식을 못하도록 하는 과거의 사회진화론의 담론이 아주 명확하게 맞물린 결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결혼할 권리와 아이를 낳을 권리는 오로지 보유한 재산과 지속적인 수입에 달려있다는 그런 현실적인 요건들 말입니다. 어쩌면 그런 연유로 오늘날의 사회진화론의 비인간적인 관념이 앞선 부분과 유사하게 변형되어 시민들에게 주입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는데요. 또한 과거 서유럽에서 강력하게 추동된 '백인우월주의'와 '남성우월사상'이 초래한 사회의 분단과 파편화가 우리의 반면교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계몽주의적 관점에서 공동체와 도덕적 윤리관을 강조하는 데에는 엄청난 고통이 따를 수 있다는 점은 모두가 인식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저자는 이런 공통된 인식하에 데이비드 흄이 오로지 이익만을 강조한 사회가 맞을 최후를 예를 들며 우리의 변화를 촉구하고 있기도 합니다. 전세기를 통틀어 가장 교육 받은 세대를 보유한 우리가 스스로의 인간다운 삶과 자기 결정을 위해, 한낱 가벼운 노력조차 할 수 없다는 점은 거의 어불성설 일 겁니다. 그래서 토크빌과 존 듀이의 경고는 보통 시민들에게 일종의 사회적 전환을 불러 일으킬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두가 헛된 희망이라고 여길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희망이라도 있어야 지금의 신자유주의가 주도하는 사회의 비인간화를 저지할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런 의미로 이 책의 마지막 장인 8장은 우리에게 중요한 책무를 일깨워 주기도 하는데요. 이 장은 전반적으로 우리 민주주의에 대한 건실한 요구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앞의 5장과 더불어 중요하게 읽혀져야 하는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저자를 단순히 심리학자로 받아들이기에는 그의 사회학과 철학을 아우르는 심도있는 지식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는데요. 그의 이 글은 리차드 세넷을 거의 능가한다고 봐도 될 정도로 신자유주의와 그에 따른 사회적 맥락에 따른 깊은 이해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이 책을 일독해 보셨으면 합니다. 

-글 2장에서 토마스 홉스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엿볼 수가 있었는데요. 이 글의 여러 훌륭한 논증과 더불어 꽤 중요한 부분으로 읽혀졌습니다.


이데올로기와 정체성을 둘러싼 모든 논란의 당사자들은 각자의 전형적 공격성과 공포를 포함하는 동일성과 차이의 필수적 균형을 고려해야 한다

정확히 말해 규범과 가치는 자신의 신체 및 타인의 신체를 대하는 방식이다

자아실현을 중시하는 사회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선하며 따라서 자아실현이 멋진 아이디어라고 여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동시대 사람들에게는 개인의 이익만 생각하는 윤리나 정체성 발달은 말 그대로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가난과 실패는 불운과 우연 탓이 아니라 종교적, 도덕적 결함의 증거이다. 반대로 성공과 부는 개인의 노력에 대한 신의 은총이다. 종교와 경제의 결합은 근면과 성실을 채근했다. 이것이야말로 황금시대의 비법이었던 것이다

기독교의 영향으로 인간이 나쁘다는 확신이 널리 퍼져나갔다. 남자는 나쁘고 여자는 아 더 나쁠 것이다. 여자 때문에 악이 이 세상에 나왔기 때문이다

세속화된 종교들 역시 빠른 속도로 교체되었다. 사회주의, 공산주의, 파시즘, 그리고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말"이라 선언했던 최후의 변종 자유민주주의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지금보다 더 나은 새로운 세상을 약속했다

사회진화론의 최신 버전인 신자유주의는 자연 대신 ‘시장‘을 보존하려 한다

계몽주의 시대에는 적응력은 물론 다양성의 원천 역시 전형적인 인간의 능력, 즉 의식적 결정과 의도적 변화를 이끄는 이성에 있다고 보았다

사회진화론은 생존 투쟁을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생명의 본성이라 보며, 따라서 일체의 협력에 눈을 감는다

조건은 계약(사회계약)의 형태를 띠며, 계약에 동의한 사회질서가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사실을 개인이 명확히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여기에 이 논리의 약점이 있다. 사회진화론과 신자유주의는 제일 잘 태어난 인간에게 살짝 더 이익을 얹어주는 듯한 분위기를 조장한다

인문학은 쓸데없고, 사회학자들은 다윈을 읽어야 하며, 신자유주의는 비난할 것이 전혀 없다고 말이다

제러미 벤담도 이미 알고 있었든 신자유주의 ‘자유‘시장은 공장과 글로벌 정치 결정의 타협이 있어야만 제 기능을 발휘한다

굳이 사회학의 연구 결과까지 동원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사는 지금의 사회경제 조직이 개인주의와 분리의 해석 모델만을 채근한다는 사실은 쉽게 확인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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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지노와 소셜 스낵 - 소셜미디어, 연결되지 않으면 불안한 중독자들
최영 지음 / 이담북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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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한국외국어대학의 미디어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로 일하고 있는 저자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에서 저널리즘으로 석사를 뉴욕 주립대학에서 커뮤니케이션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는 인터넷 기반의 소셜미디어와 관련하여 한국 내에서 상당한 인정을 받고 있는 학자로 2020년에는 자신의 다른 논저인 '허브와 커넥터'로 세종도서 교양 부문에 선정을 받은 바가 있습니다. 더불어 그는 현재 신자유주의적 기반의 넷 미디어 시스템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기도 합니다. 국내에도 대형 포털의 영향력이 크다고 볼 수 있는 시점에서 이러한 식견을 보이고 있는 학자의 존재는 우리 사회에서는 꽤 귀중하다고 여겨집니다, 따라서, 이 책은 지난 2021년 8월 출간되었습니다.

전반적으로 저자의 이 글은 기존의 로버트 맥체스니와 더글라스 러시코프의 여러 글들과 함께 그 인식을 함께하고 있다 볼 수 있겠는데요, 일전의 마누엘 카스텔이 희망적으로 그린 바가 있는 소위 인터넷 시대가 우리의 민주주의에 있어 극명한 명암을 안긴 바와 같이, 정치적인 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에 있어서도 구글과 같은 인터넷 거대 기업이 주도하는 '주목 산업'으로 인해 시민 사회가 파편화에 이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 부분의 인식적 맥락은 마치 점차 고도화 된 자본주의가 시민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계급적 모순으로 치닫게 하고 이를 신자유주의가 민영화와 복지 삭감이라는 시도를 통해 더욱 강화시켜 나간 행보와 거의 유사한 체계라 보이는데요. 사실상 인터넷 거대 기업들의 성장이 신자유주의적 이행과 맞물려, 시민들의 민감한 데이터 수집을 이윤 추구에 이용하는 등 과거 구글 창업자들이 우려했던 미래와 오늘날의 현실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는 모습은 분명 '감시 사회의 함의'와 맞물려 회의적인 시선을 거둘 수가 없어 보입니다. 

이전에도 러시코프가 언급한 바와 같이, 구글이 사용자들의 데이터를 수집하여 기업의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 자체가 이 글에서 저자가 언급하는 '주목 산업'과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와 같은 소위 주목 경제 attention economy는 허버트 사이먼이 처음 언급한 개념이지만 지금의 페이스 북과 인스타그램과 같은 소셜미디어 기업들에게는 그만큼 친숙하고 용이한 개념이 되었습니다. 이들 소셜 미디어 기업의 성장 이면에는 자본주의적 인간의 강화로서 소비와 과시를 위해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한 수많은 개인들의 숨겨진 기여가 있었습니다. 주목 받는 인간과 그렇지 않은 인간 사이에 사회적인 주목도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인간을 그저 단순히 관심의 동물로 치부하는 것은 상당히 어폐가 있기도 합니다. 이 주목 경제가 광고와 콘텐츠 그리고 미디어로 강화된다는 점과 동시에 오늘날 넷 미디어의 발전은 앞선 소셜미디어 그룹들의 양적 발전을 가져다 주었는데요. 이 지점에서 한 가지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은 구글과 같은 인터넷 포털과 소셜미디어가 축적한 빅데이터의 핵심이 데이터가 단순히 크고 많은 것이 아니라, 수집된 데이터를 통해 조작과 통제가 가능하다는 우려일 겁니다. 빅데이터에 대한 모든 사람의 인식이 앞선 본질을 먼저 염두해 놓고 이해해야 한다는 점에 저자의 통찰을 얼마간 엿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저자는 이 책의 1장을 통해 수많은 시민들을 향하여 "당신들의 인터넷과 소셜미디어 중독은 설계된 것이다"라고 거의 단언하기에 이르는데요. 여기에 덧붙여, 그는 닐 포스트만을 인용하여 '테크노폴리'를 언급하는 점도 마찬가지의 맥락으로 보이는데요. "현재의 기술 기업이 그 통제 범위를 소비자 개인의 심리까지 넓혀 본격적으로 소비자의 뇌를 공략한다"는 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인지학자들도 내심 인정하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뇌는 의외로 나약한 측면이 존재하는데요. 특히나 "인간의 취약한 본능과 연결되어 있는 가변적 보상 장치는 수많은 벤처의 비즈니스 모델의 중요한 요소로도 활용"되는 부분도 이런 우리의 뇌의 보기보다 허술한 측면에 기인합니다. 따라서 소셜미디어 중독은 오늘날 대표적인 '행위 중독'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소위 첨단 기술의 중독적 특성은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라 서비스 설계와 구축 단계에서부터 세심하게 고안되어 만든 것이기 때문에 그 심각성이 크다는 저자의 경고는 가볍게 넘길 만한 사항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이런 기술적 중독이 초래하는 폐해에 대해 일전에 티모시 스나이더는 시민들을 정치에서 더욱 멀어지게 하고 심지어 타국의 정치에 거짓과 날조를 주입하는 공작까지 빈번하게 발생하게 되었다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역사학자인 스나이더 역시 작금의 인터넷 기반의 기술 중독 현상을 우회적으로 경고한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기술 중독의 핵심적인 장치들을 비롯 현재의 사회 문제화 되고 있는 이들 주목 산업들의 문제점은 과연 그것의 원인이 개인의 책임인가 아니면 사회 문제에 준하는 심각한 모순인지에 대해 앞으로 지속적인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단순히 사회적 인정 욕구를 넘어서 모두가 자신의 성공만을 갈망하고 그로인해 주변의 삶들을 전혀 신경쓰지 않는 개인주의화 된 능력주의 사회가 교육과 산업 연계 시스템에서 어떠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저자는 2장에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 능력주의는 1980년대 들어서 대처와 레이건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의 영향력 하에 강화된 가치체계로 저자는 분명하게 이 능력주의 안에 '사람이 있는지' 강한 의문을 표하기까지 합니다. 전통주의적인 엘리트주의가 사회 전반을 우리의 이익과 안전을 위해 엘리트 계층이 기여하는 것으로 개념화가 이뤄졌지만 지금은 모두가 사적 이익에 골몰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시민들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배타적 이익을 얻는 것을 긍정하는 시대에서 과연 건강한 엘리트 계층을 배출할 수 있는 능력주의가 신자유주의하에서 과연 가능한 일인지 저로서도 의문을 갖고 있는데요. 따라서, "신자유주의 문화에 둘러쌓인 황폐한 세계를 살아가는 데 유용한 심리적 대응 기제로서 소셜미디어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기술과 서비스는 쉽게 선택되고, 중독으로 이어진다"는 2장의 평가는 그런 의미에서 모두가 새겨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의 전반에서 도출되는 개념인 중독 사회와 기술 중독과 관련해 조금 과장을 섞어 본다면 오늘날의 시민의 파편화와 더불어 극단주의 계층의 뜻모를 혐오주의는 바로 앞선 중독 현상과도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자신을 위한 자기 계발과 성찰의 시간은 '고독'이라는 이유로 기피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데요. 독서와 사색 그리고 건강한 산책 등은 인간은 수많은 관계들과 연결되는 것만큼 비례하여 혼자만의 시간이 가히 필수적인 요소라 여겨집니다. 장 자크 루소는 이에 대해 진실로 자유로운 인간은 고독을 즐기는 인간이라고 언급했고, 많은 사상가들 역시 시민들의 성찰의 시간이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저자도 이제는 모두가 기본으로 돌아가야 할 때라고 동의하고 있었는데요. 소셜 미디어 자체가 인간과 인간의 자유로운 관계를 위한 매개체라는 명목으로 모두에게 쉽게 용인되었지만 개인의 일탈이 날로 심화되고 있는 시점에서 이들 인터넷 기업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분석이 무엇보다 필요한 때라고 여겨집니다.



- 저자는 글 서두에서 오늘날의 소셜미디어에 따른 심각한 기술 중독을 인문, 사회과학의 태만으로 인해 심화되었다는 식으로 논지를 펼치고 있었는데요. 저는 여기에 쉽사리 동의를 할 수 없었습니다. 요즘처럼 인문사회과학이 힘을 잃게 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요. 아주 극명하게 말해서 그것은 돈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문사회과학의 태만이라기보다는 자본주의의 만연한 이익주의적 관점에 먼저 비판을 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공지능은 거창한 목표가 아니라 하나의 이데올로기라고 단언한다

소셜미디어의 다양한 자극은 ‘소프트 테러‘로서 개인의 사유를 정지시키고, 특정 행위를 유도하고, 특정 콘텐츠를 주목하게 함으로써 개인을 고립시킨다

사실 기술에 의한 변화는 단순히 더하거나 뺴는 문제가 아니라 생태학적 문제이다

현재의 기술 기업은 그 통제 범위를 소비자 개인의 심리까지 넓혀 본격적으로 소비자의 뇌를 공략한다

또한 ‘좋아요‘와 같은 장치는 데이터를 모으는 최적의 장소로서 이른바 빅데이터 비즈니스의 샘물과도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의 취약한 본능과 연결되어 있는 가변적 보상 장치는 수많은 벤처의 비즈니스 모델의 중요한 요소로도 활용되고 있다

기술의 중독적 특성은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라 서비스 설계와 구축 단계에서부터 세심하게 고안되어 만든 것이기에 문제의 심각성이 더욱 커진다

능력주의의 핵심은 교육을 통해 엘리트를 형성하고, 이들 엘리트가 졸업 후 다양한 분야에서 선도적 지위를 누리면서 사회를 이끌어가는 시스템의 형성이다

과거에는 대학을 안 가도 적당한 일자리와 가족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미국의 저학력 백인들이 세계화의 물결에 따라 이른바 유색 인종들에 의해 일자리를 빼앗기고 중산층에서 빈곤층으로 추락하면서 느끼는 수치심으로 인해, 국회 의사당 난입 무법자로 내몰리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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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이후 중국의 길을 묻다 - 대안적 문명과 거버넌스
백영서 엮음 / 책과함께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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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사학과 명예교수인 백영서 교수가 엮은 이 책은 국내외에 여러 중국 관련 전문 지식인들의 짧은 글을 모아 출판한 것입니다. 이 글의 목적은 제목과 마찬가지로 2019년에 시작된 중국 우한 발 코로나 바이러스 펜데믹 사태 이후, 중국의 변화된 모습을 추정해 보는 것이라 짐작됩니다. 소위 코로나 19 사태에서의 '중국의 통제된 방역 정책'의 본질을 일정 부분 여기에 모인 소 논문들을 통해 살펴볼 수 있었는데요. 물론 개인적인 의견입니다만 중국 쪽 전문가들의 의견은 다시금 생각해 볼 여지를 주고 있습니다. 다들 짐작하고 있다시피 회의적인 측면에서 말이죠. 따라서, 이 책은 지난 2021년 4월에 출간되었습니다. 약간의 첨언입니다만 성균관대의 성균중국연구소가 책의 출간에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여기에 소개되어 있는 논문들을 다 읽고 나서 그나마 생각해 볼 여지가 있던 글은 미국 펜실베니아 래드너에 소재한 빌라노바 대학에서 사학과 조교수로 일하고 있는 앤드루 류 교수의 것이었습니다. 더불어 서울대 조영남 교수의 "중국이 '최종 통제 성공'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인적 및 물적 대가를 지불했는지 정확히 모르고 있다"는 통찰 역시 꽤 귀중하게 다가왔는데요. 대부분의 중국 지식인들이 정부의 관변 지식 노동자임을 감안해 본다면, 중국이 외부적으로 밝히고 드러내는 자신들의 입장과 정책 대부분이 의문투성 임은 거의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또한, 이곳에 이름을 올린 중국 필자들 뿐만 아니라 많은 중국인들이 펜데믹 사태 이후, 과연 전세계가 '중국 쇼크 China shock'에 따른 탈중국화가 가능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도 한데요. 이것의 가능 여부를 떠나 전세계적 펜데믹 사태에 대해 중국 당국의 양심적인 고백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들이 선진 민주 국가들에게 '나약한 자유 민주주의'라는 폄하를 일삼고 있지만 반대로 자신들의 인민들에 대한 대대적인 통제는 결코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러한 부자연스럽고 비민주적인 기법이 가미된 '권위주의적 통제'에 따른 저들의 강력한 효과가 마치 중국 문화와 오랫동안 내재된 중국 역사의 승리라는 식의 해석은 결코 달가울 수가 없는데요. 새뮤얼 헌팅턴 식의 동양에 대한 서구주의의 우월성을 일견 비판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대 중국 문명의 대척으로까지 확대 해석하는 중국 지식인들의 논점은 쉬이 동의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중국 베이징 대학의 야오양은 자신의 글 중간에서 "국가 거버넌스에서 당대 중국의 정치 체제가 지닌 장점은 서구에서 과소평가되고 있다"고 볼멘 소리를 하고 있는데요. 화둥사범 대학의 쉬지린은 "중국 의 경우는 다른 나라가 모방할 수 없는 모델이다"라고 강조하면서, 스스로를 대단한 사회주의국가라고 여기는 그들이 그러한 강력한 통제속에서 추동한 '중국의 펜데믹 안정'이 과연 다른 국가가 모범으로 삼을 만한 것인지는 의문이 듭니다. 쉬지린의 앞선 해석을 따로 놓는다면 다른 중국인 석학들은 이런 '통제 모델'에 대한 약간의 부끄러움을 미처 지우지 못하고 있기도 합니다. 홍콩 중문 대학의 친후이가 펜데믹 상황에서의 소위 민주 진영의 약점을 다루고 있습니다만 이러한 혼란 상황을 민주주의의 약점이라고 치부할 수 있는 근거가 사실상 빈약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자유 민주주의에서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의 매우 확실한 구분은 이론이나 현실 모두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미국과 유럽의 많은 시민들은 정부의 보건 통제에 대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하는 것으로 오인해, 반정부 시위를 벌이고 반대로 공적인 영역 자체를 깡그리 지워버린 듯한 모습은 실로 변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민주 진영의 복지 담론이라든지, 진보주의에 입각한 상호 돌봄과 공익에 대한 관념을 시민들이 아주 잊은 것은 아닙니다. 더욱이 민주적 사회가 시민들의 자발적 통제 없이 물리적으로 통제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그 자체의 실현 가능성 여부를 떠나, 사회 내부에 자리매김하고 있는 민주주의에 대한 관념이 미국과 유럽에 강고한 편이어서 민주적 정부가 이를 중국처럼 시행하기란 매우 어려운 법이기도 하고요. 이에 많은 중국인들은 서구와 미국의 정부가 '시민의 투표' 때문에 정책적으로 다소 나약하다는 인상을 주입하려는 모양입니다만 그러한 관점은 어불성설이며, 시민의 자유와 진정한 민주주의를 경험해 보지 못한 중국인들이 그런 평가를 내릴 자격은 없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이 글의 앤드루 류가 제게 아이디어를 제공한 셈이지만, 그가 쓴 4장의 내용들은 과거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를 비롯한 그의 각료들이 펜데믹 상황에서 얼마나 친자본주의적이고, 신자유주의적 관점에 오도 되었는지 여실히 드러냈다고 생각하는데요. 앤드루 류의 입을 빌어 언급된 CNBC 릭 샌텔리는 기묘한 진술로 "바이러스를 모두에게 나눠주면 상황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하는 데에는 "병에 걸리면 사람들이 돈을 쓰거나 일하러 가지 못하게 된다"는 가히 병적인 수준에서 친자본주의적이며, 신자유주의적 논리를 복습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샌텔리 역시 엘리트에 준하는 지식인으로서 그가 엘리트 지배 계층의 모든 의견을 취합한 것은 아니지만 미국인들이 찬양해 마지 않는 미국의 자본주의가 어떠한 수준인지 이를 명백히 드러낸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만인이 더할 나위 없이 고통 받는 펜데믹 상황에서 오로지 소수의 이익을 강조하는 미국의 정치 엘리트들이나 민주적으로 증명되지 않고, 인민의 기본권조차 우습게 보는 중국 당국의 자화자찬은 이들 양자가 신자유주의의 이해에 서로 결부되어 있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점이 공통된 지점이라 볼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서구 자유 민주주의가 펜데믹 상황에서 극우 포퓰리즘의 대두와 시민들 스스로 안전과 인권을 자유라는 근시안적인 맹목성에 매몰되어 공적인 영역이 삭제된 것은 중국인들의 우려라는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충분히 부정적인 결과이기도 합니다. 사실 자유라는 가치가 서구의 문명을 규정 짓는 중요한 가치임은 거부할 수 없을 겁니다. 그리고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인간의 진보에 크게 이바지 한 점도 결코 등한시 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친후이가 민주주의에 빗대어 만든 '낮은 인권의 우위 개념' 같은 것도 권위주의자들이 아무런 문제 없이 고안해 낼 수 있게 된 것은 한편으론 불행한 일이기도 한데요. 이것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서 민족과 문명의 번영을 위한 특단의 조치라고 할 지라도 그 자체만으로도 자랑할 수 없는 점은 거의 확실합니다. 지금도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번영이 중국 공산당의 주도적인 정책 때문이라고 여기고 있을 테지만, 본질적으로 신자유주의 하에서 다국적 기업의 이익이 결부되어 있지 않았다면 중국의 '세계 공장화'는 결코 일어날 수 없었을 겁니다. 중국 경제의 세계 시장의 편입이라는 화두는 바로 이런 부분에서 기인한 것이고, 많은 중국 지식인들이 중국을 제외한 '탈중국화'가 실현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도 신자유주의적 경제 기조 하에서 벌어진 일이기 때문일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자유주의는 중국의 시장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베이징 컨센서스라는 개념을 처음 도출한 조슈아 쿠퍼 레이모는 '민주주의가 없는 중국의 경제 발전'을 아마 예측하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많은 서방의 전문가들이 민주주의가 결여된 중국의 경제 성장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는 이미 충분히 몇 번이나 겪어봤으리라 생각되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신자유주의자들에게 중국의 성장과 번영이 거대한 시장으로서의 역할을 위해 무엇보다 필요하고 중국 정부를 비롯한 많은 중국인들도 아마 쉽게 동조할 수 있을 겁니다. 다만, 시장의 논리가 비차별적인 논점으로 주도권을 잃지 않고 반대로 강화된다면 중국의 인민들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시민들이 더욱 고통에 빠질 것은 명약관화합니다. 그래서 과거의 복지 담론이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해 거세되었을 때, 실제로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그러한 복지였음이 드러났다는 점은 의미심장합니다. 더 많은 부와 권력을 손에 쥔 최상위 기득권들은 사적인 비밀 의료와 결합해 자신들의 안전은 더 강화되었지만 복지가 자유의 해악이라는 사기에 휘둘린 대다수 시민들은 그와는 완전히 반대가 되었다는 점에서 한편으론 사회의 공익적인 측면이 붕괴되었고 시민의 안전은 위협에 빠진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3년 간의 펜데믹 사태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초래한 허울만 가득한 '번영'을 더욱 드러낸 셈이 되었습니다. 오로지 자본주의적 소비만이 강조되어 인간을 정치에서 더욱 멀어지게 한 그 자본주의 말입니다.


상술한 바와 같이 당국이 리원량 의사를 체제 내의 영웅으로 추대하기는 했으나 그에 대한 추모와 체제 비판의 글들은 중국 온라인상에서 계속해서 검열당하고 삭제되고 있다

정치적 선언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사회 균열과 외교 난제의 근본 원인이 코로나19 방역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감염자가 줄어들 줄 모르는 서구를 향해 자신이 방역에 ‘성공‘했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우리는 중국이 ‘최종 통제 성공‘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인적 및 물적 대가를 지불했는지를 정확히 모르고 있다

그 이튿날, 도널드 트럼프는 ‘중국 바이러스‘라는 용어 사용을 옹호하며, "중국에서 왔기 때문이죠. 인종차별주의 전혀 아닙니다. 아니죠. 전혀 아니에요. 중국에서 왔어요. 그 때문이죠. 정확히 하고 싶을 뿐 이에요"라고 설명했다. 한층 분명하게, 아칸소의 상원의원 톰 코튼은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에 관한 지난주의 트윗에 중국은 미국에 한 짓에 대해 "대가를 치러야"할 것이라는 암시를 덧붙였다

샌텔리는 마땅히 공화당과 민주당 모두의 논자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었지만, 그의 논평은 현재 정부와 기업이 얼마나 유례없이 극단적으로 기업의 이윤과 인간의 목숨을 저울질하지 않을 수 없는가에 대한 솔직한 표현이기도 했다

거의 반세기 동안 복지국가를 체계적으로 해체시켜온 사회, 소위 ‘좌파‘로 여겨지는 정당이 보건의료 비용에 대해 정기적으로 짜증을 내는 사회, 그리고 말 그대로 부동산 개발업자를 대통령으로 임명한 사회에서, 우리는 현재 해당 지역의 개인 활동가들이 펜데믹에 대한 대응책임을 거의 전적으로 짊어지고 있고, 믿을 만한 바이러스 검사가 질병통제예방센터에 의해 공적으로 이용되는 것이 아니라, 게이츠 파운데이션과 유타 재즈에 의해 확보되어온 기막힌 상황에 직면해 있다

미국의 박식한 논객들이 사회복지에 대항하여 ‘시장 선택‘이라는 무기를 휘두를 때 잘못 생각하는 점은 사회 안전망이 인간의 자유를 종식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로 그 자유를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철학자들은 이것을 필요의 영역과 자유의 영역 사이의 구분이라고 불러왔다)으로 적용한다는 사실이다

부당이득 행위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적 법률 및 유인의 전지구적 시스템이 심판대에 올라있다

그런데 ‘복지국가는 더욱 더 큰 권력을 필요로 하며, 적극적인 권리는 이전지출을 필요로 한다‘는 명제의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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