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모닝 미드나이트
릴리 브룩스돌턴 지음, 이수영 옮김 / 시공사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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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쓴 릴리 브룩스돌턴은 미국 버몬트 주 출신으로 메사추세츠 애머스트 대학을 거쳐 포틀랜드 주립대에서 예술 석사라고 할 수 있는 MFA를 수여 받았습니다. 몇몇의 습작을 제외한다면 2016년, 랜덤하우스에서 출판한 '굿모닝 미드나이트'가 첫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평단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이후 조지 클루니가 감독해 동명의 영화화가 진행된 바가 있습니다. 현재 넷플릭스에서 이 영화를 감상할 수가 있습니다. 이 책은 원제, "Good Morning, Midnight"로 지난 2016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9년 10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저는 얼마전에 넷플릭스를 통해 조지 클루니가 연출을 맡은 동명의 영화를 접하게 되었는데요.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와서 아무것도 못한 채, 꼼짝없이 이 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시청을 마치고 나서 불현듯 뭔가 아쉬운 마음이 들었는데요. 웹을 열어 영화를 검색해 보니 원작이 존재했다는 것을 발견했고, 다급한 나머지 알라딘에 책 주문을 넣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소설의 서평을 쓰는 것도 제법 오랜만인 듯 싶습니다.

영화에서는 지구가 어떠한 전쟁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으로 언급되지만 책을 일독하고 보니, 뭔가 '시간의 패러독스'와 같은 현상이 잠정적으로 동시간대의 인물이라 볼 수 없는 어거스틴과 아이리스의 만남을 가능하게 한 것으로 추측되었습니다. 지구 위에 떠있는 인공위성들이 먹통이 된다든지, 에테르에서 전혀 지구에서 방출되는 전파가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것으로 보아 단순히 여느 아포칼립스 소설들에서 보여지는 핵전쟁의 문제는 아닌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소설의 축이 되는 이 시간 왜곡 현상에 대한 배경은 이 정도로 하겠습니다.

주인공인 어거스틴은 스스로의 천재성에도 불구하고 인간 관계에 있어서 오만하고 자기 멋대로인 인물이었습니다. 스토리가 진행됨에 따라 자신이 살아온 그동안의 삶에 대해 회한을 느끼면서 점차 진정한 사랑을 깨닫게 되는데요. "그는 사랑에 대해 북극곰 만큼 아는 게 없었다"는 다소 황당한 문장에 그의 사람에 대한 태도를 짐작할 만합니다. 교제를 하고 있던 여자친구에게 낙태를 권유하다 그녀가 들어주지 않자 어딘지도 모를 남반구로 도피한 것은 작가가 여성이어서 저런 극단적인 남성성을 마련했던 것이 아닌가 잠깐 의문이 들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가 아이리스라는 소녀와의 짧은 동거를 통해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보고 느끼지 못했던 사랑을 스스로 깨닫게 되는 점은 앞선 인물 설정이 나중에는 얼마간 이해가 되기도 했습니다. '사람을 지식의 수준으로 평가하는' 어거스틴과 같은 사람에게 있어 아무래도 타인과의 관계 특히, 가까운 이성과 지근의 사람과 불협화음이 날 수밖에 없는 여지를 배제할 수 없을 텐데요. 자신의 딸을 낳은 진이 후에 '아빠는 큰일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라고 회고하는 것은 이렇게 복잡한 의미가 담겨 있다 생각됩니다. 여자들을 오로지 섹스의 대상으로 여기고 자신의 기분과 의도대로 관계를 제멋대로 끌고 간 그가 진정한 사랑을 제대로 알기는 어려웠을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가 평생 열망해 마지 않았던 대상이 바로 우주였다는 점이 얼마간 이해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작가의 의도된 이름(나중에 중요한 이름이 밝혀지므로 이것은 성입니다)인, '설리'는 이 소설의 또 다른 중요한 인물이기도 한데요. 그녀는 일찍이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했지만 훌륭히 성장했고, 끝내는 목성과 갈리레오 위성들의 탐사를 맡은 '에테르'호의 대원이기도 합니다. 전 남편인 잭에게서 어린 딸 '루시'를 키우고 있는 그녀는 이번 임무를 결정하는 데 있어 어린 딸의 존재가 큰 난관이기도 했습니다. 원래 주변을 세심히 살피는 설리는 임무를 마치고 지구로 귀환하던 중에 에테르에 수신되던 통신이 끊기고 나서, 심리적 혼란을 느끼는 대원들의 심리 변화에 민감해 하고, 데비와 같은 가까운 이의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피는 등의 다감한 인물입니다. 그녀는 어렸을 적 얼굴도 보지 못한 아버지가 전해준 천문학 책을 보면서 꿈을 키우기도 했는데요. 아버지에 대한 어떤 원망이나 분노라기 보다는 부성애를 느껴보지 못한 자신의 유년 시절에 대한 연민이 담겨있는 문장이 보이기도 했는데요. 물론 재혼한 어머니가 아이를 낳다가 산후통으로 세상을 떠난 것은 그녀의 삶 자체가 대체로 무난했다고 볼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전 남편 잭과의 이혼이 그런 와중에 있던 불행한 결과물이라고 선뜻 판단할 여지는 없지만 그로인해 자신보다 주변을 더 챙기게 되는 인물로 읽혀지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어거스틴과 아이리스, 설리와 하퍼와 같이 스토리상 주요한 축인, 이들의 뭔가 운명적인 관계로 인해, 발생되는 감정과 이들의 내면의 변화를 포함한 묘사들이 꽤 훌륭하다고 느껴졌는데요. 책 뒤에 나오는 역자의 후기로 이 글을 단순히 지구 종말에 대한 어떤 기록 정도로 여기는 것은 이 소설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었습니다. 물론 아서 클라크와 아이작 아시모프의 소설을 등장시켜 뭔가 SF의 외투를 입고 있지만, 사실 이 글이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의 인생에 대한 진정한 성찰과 갑자기 다가온 사랑으로 깨닫는 내면의 변화, 그리고 여자 작가에 의해 그려지는 부성애에 대한 본질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마크 트웨인이 인간은 때론 고독을 벗어날 수 없다고 말했을지라도 우리가 관계를 맺는 사람이 없어서는 그 스스로가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것은 꽤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가족간의 사랑, 연인간의 사랑 혹은 주변 사람들간의 사랑이 없는 사람이 아무리 엄청난 사회적 명성과 직업적 성취를 쌓는다 할지라도 그가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온전히 해내는 고독한 성찰 만큼이나 타인과의 관계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작가가 마치 제게 말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저의 이런 느낌을 더 상세하게 쓰기 위해 글의 구조와 스토리 라인에 있어서 좀 더 언급하고 싶습니다만 상당히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에 저의 알량한 글은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일단 저는 영화를 먼저 접하고 이 소설을 일독하게 되었는데요. 책과 영화를 전부 소화하고 나서, 속으로는 꽤 애석하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원작 소설을 먼저 읽고 나서 영화를 보시는 것 추천드려 봅니다. 이렇게 순서를 정해 접하시고 나면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렸는지 이해하실 수 있을겁니다.


-143 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 트럼프 카드의 ♠를 스페이드라 부르는 것은 검색만 해봐도 아는 것을 '스페이스'로 표기한 것은 뭔가 실망스러운 부분이었습니다. 그 어원을 따져봐도 스페이스라는 단어는 맞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소녀 아이리스에 대한 인물 묘사와 행동거지, 말투, 분위기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작가의 묘사력에 감탄을 금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사랑에 대해 저 북극곰만큼도 아는 게 없었다

어거스틴은 그 무엇보다 지능에 가치를 두는 사람이었다

천문대 밖의 세상은 조용하고 텅 비어 있었다. 그 여자들도 죽었을 것이다. 논문들은 잿더미가 되고 강연장과 천문대들도 폐허가 되었을 것이다

추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거나 불안한 미래에 사로잡혀, 설리가 말을 걸어도 온전한 현재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는 동반자를 원한 적이 없었다. 다른 생명을 돌보겠다고 요청한 적이 없었다. 특히나 지금, 그의 생명이 끝나가는 이때에 말이다. 하지만 아이리스는 여기에 있었고 어거스틴도 그랬다. 그들은 함께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거스틴은 고등학교와 대학교 시절 대부분을 투명 망토를 뒤집어 쓴 사람처럼 보냈다. 조용하고 똑똑하고 조심스러운 소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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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9-05 23: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베터라이프님의 서평에 감사드립니다
SF를 예전에 읽고 싶다 생각해서 화재 감시원 읽고 좀 좌절하고 다시 읽지 않았는데,
이 책으로 다시 열어 볼까합니다.
산소 발견 이전에 연소를 설명했던 에테르가 등장하니 또 관심이 갑니다.
좋은 밤 되세요~

베터라이프 2021-09-07 20:37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초딩님 ^^ 이 소설에서 우주는 두 인물을 연결시켜주는 매개라고 여겨지네요. sf소설이 가미되긴 했지만 본질은 내면과 관계의 화해를 담은 글이 아닌가 싶어요. 아 너무 스포한 것 같네요 ^^; 하여튼 초딩님의 서평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저는 소설 전문(?)이 아니라서 많이 읽은 분들의 서평 기다리고 있습니다. 좋은 하루 되시구요!
 
불안의 사회학 - 무엇이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가
하인츠 부데 지음, 이미옥 옮김 / 동녘 / 2015년 12월
평점 :
절판


독일 보윈켈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하인츠 부데는 튀빙겐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베를린 자유 대학에서 사회학, 철학 그리고 심리학을 전공했으며, 1986년에 동 대학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수여 받습니다. 이후 독일 함부르크 사회연구소의 연구 조교로 일하고,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유로파 대학 비아드리나에서 석좌 교수 등을 역임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1996년에는 코넬 대학의 방문 학자를 거쳐 현재는 카셀 대학에서 거시 사회학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독일의 대표적인 사회학자로 세대 연구와 기업가 논리 등을 연구하면서 독일 사회가 미래에 나아갈 길을 학자로서 제시하고 있는 중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원제. "Gesellschaft de Angst"로 2014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5년 12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부데의 이 책은 자본주의화가 진행된 오늘날의 사회에서 인간은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으며, 정신적인 문제에서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부분에까지 과거 안정적으로 우리의 삶을 책임졌던 '복지 국가 담론'이 신자유주의에 철회되면서 그 와중에 분화된 엘리트 계급과 중산층 그리고 사회적 지위가 약한 사람들의 각각의 불안을 많은 인용과 그를 뒷받침 하는 주장 등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독일 특유의 직설적인 분위기 답게 부데가 쓴 이 글의 어조는 합리적이라는 말을 넘어 곳곳에 냉정한 판단이 들어가 있었는데요. 특히, 포괄적으로 3장부터 6장까지 등장하는 '능력주의'와 불안과의 관계를 으레 짐작되는 단순한 인과의 문제로 서술하지 않고, 불가피한 능력주의가 주도하는 사회 자체의 현실을 진술하는 데 좀 더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저자 특유의 냉소적인 표현도 발견할 수 있었는데요. 예를들어 우리의 민주주의와 관련해서 8장에서는 소위 제어되지 않는 금융 시장 이데올로기를 빗대면서, "의심스러우면서 많은 돈으로 구제해줘야만 하는 체제를 위해 중요한 은행들과 정부가 시민들에게 따르길 강요하는 시장과 동일한 형태의 민주주의가 존재"하게 되었다고 우리의 폐부를 사정없이 찌르고 있었습니다.

본격적으로 개인의 원초적인 불안을 다루고 있는 1장과 2장에서는 남녀간에 존재하는 '애정'에 대해 부데는 극히 회의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 마치 "연인과 섹스를 막 끝낸 남자가 담배를 입에 물고 방금 전의 격정적인 몸의 대화'를 쉽게 잊기 마련이라고 강조합니다. 남녀가 사랑으로 연결된 연인 사이의 관계 조차도 근원적인 불안을 야기시키며, 반대로 오로지 부모와 자식 형제와 자매간에 관계에서만 이런 불안을 회피할 수 있다고 저자는 보는 듯 했습니다. 아무리 다양한 인간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심리적인 불안은 제거할 수 없는 것이 일반적인 현실 상황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여자가 연인으로서 만나려 하는 남성들 가운데, "자신보다 교육을 덜 받은 남성을 만나려고 하지 않는 현실"은 그런 명확한 개인의 선택은 일견 불안에 빠질 가능성을 회피하는 목적이 있다고 여기는 듯 했는데요. 물론 부데는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이 일반적인 물건을 고르는 것과는 다르다고 강조하고 있지만 설사 합리적이고 마땅한 선택으로 누군가를 만난다 하더라도 본인 스스로가 통제력을 잃게 되어 나타나는 불안을 잠정적으로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합니다. 이토록 고도화 된 개인주의적 사회에서 원칙적으로 개인들은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지만, 여기에 나날이 강요되는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체화시킨 능력주의의 사회에서 계급 전반이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요약되는 것이 이 글의 주된 관점이기도 합니다. 이에 저자는 이 글 5장에서 "엄연히 30년간의 신자유주의 시기에 부가가치의 우선 순위의 변화로 각국들이 상당한 이익을 얻었다"고 언급하면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해 현실적인 가치를 나름 부여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글 전반에 논의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하에서의 '능력주의'는 성공이 있으면 반드시 실패가 있고, 양지가 있으면 무조건 그늘이 있는 것과 같은 상반된 인식으로 여겨지고 있는데요. 20세기의 전체주의가 미연에 발생할 수 있는 첨예한 계급 갈등을 방지하고자 노력했다는 저자의 요상한 해석을 조금 틀어보자면, 복지 국가의 담론도 역시 마찬가지로 계급 갈등의 문제를 (의도했던 안했던 간에) 방지하는 것에 기여했던 것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저자도 토마스 프랭크를 인용하면서 사회 최상급 그룹에 부여하는 상여금과 관련해 이러한 시스템을 마냥 긍정하고 있지는 않지만 오늘날의 '승자독식' 세계에 살면서 느끼는 감정에 대해 사람들이 잘 언급하지 않는다고 회의적으로 표명하고 있는데요. 이는 경제적으로 중간 계급 이하의 대다수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계 문제로 인해 시스템 자체를 성찰하기 위한 시간이 부족한 것이며, 어느 정도는 이러한 강요된 사회에서 체념하며 지내는 것이 현상황을 해석하는 설득력있는 주장 일겁니다. 따라서, 저자가 단언하는대로 "사람들은 승자독식사회를 무자비하게 최고 엘리트들만 선별하는 자본주의 일면이 그대로 적용되어 나타난 것이라 받아들 수 있다"고 보면서 "이렇게 사회 전체가 경쟁을 하도록 부추기면 사회적으로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예상외로 우려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가 아이를 돌보듯 국가가 국민을 보호해주었던 옛 시절을 그리워하게 된다"는 일종의 노스탤지어와 연결되기도 하는데요. 반대로 5장에서, "국가가 세금으로 중산층의 돈을 탈탈털고 있다"는 국가에 대한 다소 냉소적인 평가는 부데가 과연 어떠한 입장을 지지하고 비판하는지에 대해 약간의 혼란스러움을 느끼게 하였습니다. 동시에 이와 같은 인용들이 계급과 사회 내부의 불안에 대한 관점을 좀 더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양가적인 측면을 언급하며 진술하고 있는 것이, 단순히 글의 기법에서 일관된 논지에 포함될 수 있느냐가 쟁점이 될 수 있다고 판단됩니다.

또한, 자수성가한 소위 엘리트 계층에 대한 3장의 논증은 '승자독식'과 '능력주의'에 기반한 개인들의 노력과 성취라는 부분에 있어 어떤 가치 판단을 하기 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 내의 눈들을 신경쓸 수밖에 없는 소수 엘리트들의 불안감을 언급하고 있는데요. 이러한 입장에 처해 있는 이 엘리트들이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좀 더 냉혹하고 교활해져 더 많은 이익을 거두려 하는 욕망"에 빠질 수도 있다고 전제하고, 이 부분에 대한 도덕적 관념의 실종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 저자의 태도에 일정 부분 실망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이 승자독식과 능력주의를 역으로 해석해보면 이러한 견고한 기조 때문에 사회적 지위와 부의 우위에 있는 자들이 "자본주의가 원래 이런 것이고 개인의 이익 추구는 하등 문제가 될 것이 없다. 사회에 대한 철지난 책임감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는 오로지 저들의 문제일 뿐이다"라고 하는 기형적이고 반사회적인 인식을 아무렇지 않게 주장하기에 이릅니다.. 저자가 앞선 능력주의를 불가피한 자본주의적 사회화 과정에 비롯된 현실 인식으로 보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진 바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마땅히 도태되어야만 한다는 인식"은 인간이 그동안 쌓아온 인문주의와 역사적 진보를 깡그리 휴지통에 처박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이런 인식에 대해 많은 신자유주의자들이 개인의 이익과 능력주의를 강조하며 마땅한 사회적 부조를 제거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해 왔는데요. 후쿠야마의 언급대로 이들은 어떠한 도덕적 양심이나 갈등으로 자신들의 내면이 힘들었던 것이 아니라는 점은 내심 소름끼치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자본주의가 인간성의 부분에서 구조적인 모순을 갖고 있다고 봐도 지나치지 않은데요. 그런면에서 우리의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에 포획되었다고 판단하는 것은 이처럼 복잡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익히 우리가 알고 있는 엘리트들의 최소한의 도덕적 책무와 사회에 대한 책임을 언급하지도 않으면서 오히려 저들이 스스로의 불안감 때문에 차라리 간교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선택지를 손에 쥔 것도 앞선 진술들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물론 이들 엘리트들의 성공에 사회적 자원이 어느 정도 기여를 했다는 저자의 인식대로라면 엘리트들의 불안 문제를 일방적으로 곡해할 필요는 없지만 일대 다수의 대결 논법으로 이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부분은 약간 우려가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에 반해 5장에서 중산층의 불안과 다음 6장의 사회적 약자들의 불안과 관련한 논증에 대해서는 충분히 공감할 수가 있었는데요. 사회 안전망이 없기 때문에 개인들이 언제나 불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현실적인 평가와 시장 자유주의적 이행으로 인해, "개인의 능력과 공동체적 연대감이라는 정신을 중산층이 공유했던 시대는 사라진 게 분명하다"는 서술 또한 인상적이었습니다. 독일은 아마도 이런 중산층 정신을 꽤 중요하게 여겼던 국가로 볼 수 있을텐데요. 어느 정도 사회적인 재분배의 해법이 필요하지만 이것을 반대하는 것을 넘어 뭔가 철지난 문제로 치부해 공격하는 사회적 행위들이 그동안 너무나 많이 나타났습니다. 이런 것들을 전부 신자유주의자들의 음모론으로 몰아갈 수는 없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그동안 사회에서 공익과 공공의 의미가 배척당해 온 것은 거의 확실하다 생각됩니다. 다만, 저자가 갖고 있는 국가와 정부가 초래하고 있는 문제에 대한 인식이 다소 일관되지 않은 부분은 독자들이 감안해서 읽어야 하는 부분이라 여겨지는데요. 그리고 8장에서는 금융 자본주의로 인한 불안과 관련해, 아마 다수가 이를 증오하기도 하였으나, 그 부분과는 별개로 2008년의 경제 붕괴가 어느 정도 필요했을 수도 있다는 저자의 판단은 다음 논증을 통해 일정 부분 공감을 할 수 있었는데요. 그런 결과로 막대한 공적 자금이 시장에 투입되었지만 어떻게 보면 최악의 결과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기에 사회 전반에서 나름 의미가 있는 결정이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사실 이러한 카지노 자본주의에 의한 시장 참여자들의 불안과 사회 구성원들의 불만이 이익 극대화를 위한 구조적 문제로 진정으로 해소될 수 있을지는 지금으로서도 불확실하다고 판단됩니다. 다른 어떠한 불안들 보다도 이 금융 자본주의의 불안이야 말로 다시금 체제 전반의 위험성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을텐데요. 물론 명백히 현재의 자본주의가 이를 해결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고, 이런 문제를 제기할라치면 왜곡된 자들에 의해 반자본주의자라는 낙인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공교롭게도 극우주의자들이 반대의 세력을 풀조차 남지 않도록 제거하기 위한 실현될 수 없는 욕망과 다름없는 것으로 불안의 문재를 떠나서 건전한 비판도 꺼내들 수 없는 문제를 야기해 종내에는 사회를 병들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개인들의 다원화 된 사회에서 어쩌면 각 개인들이 느끼는 불안은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런 현상일 수도 있습니다. 엘리트들과 중간 계급 및 사회적 약자가 처한 입장이 다 다르고 어떤 문제에 대해 동원할 수 있는 자원 또한 각자가 다 상이합니다. 또한, 이러한 분화를 만들게 한 자본주의적인 불안 또한 시민 각각이 느끼는 부분이 분명 다를 것입니다. 다만, 일부 계층에게 주도되어 진행된 세계화와 이를 통한 신자유주의적 담론들이 일정 부분 불안의 원인이 되었다는 것을 분명 인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저자인 부데의 언급대로 신자유주의가 일정 부분 번영을 가져다 준 것은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만큼 사회를 시장이 주도하게 만들고 이기심이 만연된 비인간성의 왜곡된 구조를 더욱 고착화 시켰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선언적으로는 많은 이들이 자본주의적인 동반자로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하지만 이런 고차원의 자본주의적 매커니즘이 역설적이게도 민주주의를 옴짝달싹 하지 못하게 만든 원인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토록 현 시점에서 이해될 수 있는 많은 불안들이 개인의 다원화의 양상으로서 뿐만 아니라 1920년대 이후 변화된 자본주의적 담론이 사회 전반을 보다 변화시켜 왔기 때문이라고 여겨집니다. 여기에는 자본주의가 현재의 번영을 이끌었다고 보는 관점도 적지 않겠지만 반대로 심각한 부의 불평등 문제를 최소한의 논의조차 막아버리고 있는 자본주의의 무결성 논리도 큰 문제인 것은 마찬가지로 분명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20세기 중후반에 발전했던 복지국가는, 현대 사회를 전례 없이 통합시켰다

결국 알고 보면 우리가 헌신하고 모든 것을 맡기는 타인이 바로 우리의 삶을 지옥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 전반에서 중산층이 줄고 있다는 경고가 나오고 있다. 그러니까 게걸스러운 국가가 세금을 통해서 중산층의 주머니를 탈탈 털고 있으며, 그래서 중산층은 자신들의 처지가 위태롭다고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버지가 아이를 돌보듯 국가가 국민을 보호해주었던 옛 시절을 그리워하게 된다

사람들은 ‘승자독식사회‘를 무자비하게 최고 엘리트들만 선별하는 자본주의의 일면이 그대로 적용되어 나타난 것이라 받아들일 수 있다

그때는 부르주아와 노동자,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 중산층과 하층이 매우 날선 대치를 했고, 그야말로 모두에게 불확실한 시기였다. 그 때문에 20세기의 전체주의는 폭동이나 전쟁과 같은 거시적 폭력과 일상의 폭력으로 미래에 계급 갈등이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내쫓고자 했다

노동조합과 정당을 욕하고 국가가 약탈을 일삼는 정치인들의 손에 들어가 있다고 보는, 성과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개인주의자들은 항상 있었다

무엇보다 사회적 지위를 많이 고려하는데, 사회적 지위는 지식이라는 무형의 가치와 의미라는 상징 자본으로 그 가치를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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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진, 세상을 어떻게 통찰할 것인가
데이비드 바사미언.하워드 진 지음, 강주헌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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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미국 민중사와 시민 불복종 운동으로 잘 알려진 미국의 '깨어있는 양심'이었던 하워드 진은 전세계에서 정말 보기 드문 행동주의적 지식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애틀란타에 있는 흑인 여자 대학 스팰먼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학교 당국에 의해 해고를 당하기 전까지 미국 진보주의 운동과 반전운동에 있어 중심에 있는 인물이었는데요. 이후 보스턴 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우리가 알지 못하는 미국 사회의 본질과 '병영 국가'로서의 미국을 파헤치는데 온 힘을 다해 노력하기도 하였습니다. 2010년에 심장마비로 사망할 때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시민 운동과 시민의 권리에 영감을 안겨줬던 그를 후에 노엄 촘스키는 실로 애석하게 여겼는데요. 사실 그동안 촘스키의 저작을 통해 하워드 진의 존재를 익히 인지하고 있었지만 저의 게으름으로 인해 이제서야 그의 저작 하나를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이미 위키백과나 수많은 기사 자료들을 통해 하워드 진의 정력적인 활동과 살아온 자취가 여전히 많이 남아 있기도 합니다. 정말로 현장에서 많은 경험을 몸소 체험한 진정한 지식인인 하워드 진에 대해 실로 겸허한 마음이 드는 건 아마도 그의 이력을 접하게 되는 많은 분들도 똑같은 마음이리라 생각됩니다. 더불어 하워드 진의 진실된 이야기를 끄집어 낸 언론인인 데이비드 바사미언은 이미 노엄 촘스키와 에드워드 사이드를 통해 대가들과의 대담을 훌륭하게 이끌어낸 바가 있습니다. 특히, 그는 국내에 번역된 촘스키와의 여러 대담집으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한데요. 그리고 강주헌 선생의 번역 또한 크게 나무랄데가 없어서 읽는 내내 편한 마음으로 글을 소화할 수 있었습니다. 번역가의 큰 노고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 책은, 원제 "Conversations on History and Politics"로 지난 2006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08년 6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현재 이 책은 절판된 상황입니다.

이 책은 고유한 주제를 담은 총 8장의 구성으로 하워드 진이 알생에 걸쳐 천착한 학문적 양심과도 깊이 관련되어 있기도 합니다. 제가 국내에 번역된 하워드 진의 글을 많이 읽어본 건 아니지만, 이 책은 그의 사상을 전체적인 관점에서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글이리 여겨졌습니다. 특히, 이 책을 관통하고 있는 주제 의식은 현재 미국은 거대한 군국주의적인 체제에 제국주의적 이해 관계를 몸소 달성하고 있는 국가로서, 이 외형적인 민주주의적 국가가 어떻게 지난 세기 동안 병영 국가화가 되었는지에 대해 하워드 진과 데이비드 바시미언의 대담을 통해 밝혀 나가고, 그 와중에 미국에서 일어났던 흑인에 대한 권리 운동과 시민들의 불복종 운동 및 반전 운동에 대한 하워드 진의 과거 행적들을 돌아보는 것으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제 임의로 정해본 1장과 2장에서 논의되는 주제들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도 한데요.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에 대해 분석하고 그에 따른 첨예하게 불평등한 사회속에서 지배 계급의 논리가 어떻게 일반 시민들의 관념에 침투하고 이를 통해 어떻게 그들의 논리가 재생산 되는지를 논하고 있는데요. 전반적으로 미국이 누구나 부정할 수 없는 민주주의 국가임에도 정부가 매우 성공적으로 기업과 결탁하고 그러한 자본주의 하에서 어떻게 '자유 시장 free market' 이데올로기로 진화되어 왔는지를 독자들에게 낱낱이 밝히고 있습니다.

이러한 미국은 스스로가 '민주주의의 화신'이라 자임하면서도 소위 국익을 위해 다른 권위주의 국가와 독재 체제의 버팀목이 되기도 하였는데요. 이것은 CIA와 군이 일원화 된 체계로 각지의 전쟁에서 노력한 결과로 이 글에 등장하는 해병대 출신의 인물을 통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진은 미국을 소위 '군국주의 국가' 내지는 '병영 국가'라고 지칭하고 있었는데요. 좀 더 엄밀히 분석한다면, 막강한 산업정치적 권력을 지닌 '방산 업체'들의 이익을 보장하는 자본주의적 체제가 국가 권력을 장악한 상황이라고 봐야할 것입니다. 이렇게 본질적으로 오랜 세월에 걸쳐 변형된 이 '방산 자본주의'가 엘리트 정치 전반을 관장하고 이런 결합이 저들의 노골적인 이해관계에 포섭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바로 여기에 시민의 정치는 실종되었다는 것이 하워드 진의 일관된 논점이었습니다. 즉, 루소를 발언을 통해 지금의 미국 사회를 인용하고 있는 하워드 진은, "가까운 미래에 공고히 할 전문가 계층의 정치에 따라 시민들은 사라질 것이다"라고 규정될 만큼 이 해석상의 관계가 크게 어긋난 부분이 없어 보였습니다. 따라서 이렇듯 체제의 변화를 일종의 '국가주의화'로 그는 바라보고 있었는데요. 사실 사회학에서의 사회진화론자들이 그토록 혐오스럽게 여겼던 '국가주의'와 하워드 진이 인식하고 있는 '국가주의'는 사뭇 다른 내용이기도 합니다. 특히, 전쟁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는 '병영 국가로서의 국가주의'는 앞선 부분과 맥락이 완전히 다르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1장과 2장, 뒤이어 논의되는 3장과 4장에서도 이런 미국의 국가주의가 시민들이 주도하는 민주주의를 사실상 제한시키고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과 함께 엘리트 지배 계층의 또다른 이해관계(자신들이 속한 기업의 이익 뿐만 아니라 국방비와 방산 업체의 이해 관계에 따른 다른 이익)에 봉사해 전쟁을 거부할 시민의 권리조차도 국가의 명령에 시민들이 승복하게 되는 악순환을 진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지배 엘리트들은 명예롭지 못한 중동에서의 전쟁으로 발생된 무고한 민간인 희생자들과 작전중 목숨을 잃은 군인들을 시민들이 더이상 기억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언급하고, 마찬가지로 헬리버튼과 같은 용역 회사들의 전쟁을 통한 이익, 중동 내 있는 유전에 대한 권리를 추구하는 등의 제국주의적 행태에 대해 많은 시민들은 자신들의 국가가 그래도 '온건한 제국주의'를 통해 세계 안보에 이바지 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은 미국의 '안보주의'가 마찬가지로 국가주의에 투신한 일례를 증명하는 것이라 저자는 밝혀내고 있습니다.

다음 5장은 '시민들이 왜 비판적 인식을 키워야만 하는지'에 대한 명료한 제언이 담겨 있는데요. "정부가 잘못된 정책을 펼 때, 마땅히 시민들이 비판을 해야한다"는 맥락의 주장은 충분히 공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민들이 더 많은 독서를 통해 매스컴이 주입하는 정보들을 취사 선택할 수 있는 분별력을 키워야 한다는 부분도 동의할 수 있었는데요. "종일 TV만 보는 사람이 오히려 진실과 멀어질 수 있다"는 것은 이를 반증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2차 이라크 전쟁에 대한 미국의 개입이 실제로는 명분이 없었고, '후세인이 가졌을지도 모르는 핵무기 1개 때문에" 미국이 지역 안보를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는 당시 당국의 주장들은 만개가 넘는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미국의 소위 '우위의 도덕적 관념'을 이중적이라고 비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시민의 의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 사람의 내면에 견고화된 이데올로기가 충분한 교육과 지식 활동으로 축적된 것이라 인정하는 저자는 단순히 이념적 차이 때문에 반대편에 있는 시민들을 '세뇌당했다'고 터무니 없이 비난하는 것보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오히려 합리적인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다만, 그러한 지식활동과 교육이 맹목적이거나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의 총아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리라 여겨지는데요. 그래서 듀이가 말하는 시민 스스로의 교육이 자발적이든 어쩔 수 없는 것이든 간에 '시민의 의무'를 위해 필요한 것은 분명한 대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끝으로, 리처드 호프스태터의 '반지성주의'가 인용되는 마지막 장에서 현재의 미국 정치가 처한 일면을 저자의 인식을 통해 정확히 목도할 수 있었는데요. 텔레비전이 대다수가 되어 시민의 정신을 지배하는 상황에서 더욱 시민들이 책과 멀어지는 것이 아마도 작금의 '반지성주의'가 판을 치는 토양이 되었을 겁니다. 애초에 투철한 도덕적 관념을 지니고 있는 엘리트들이라 할지라도, 2세기가 넘는 동안 대중 정치에 대한 터무니 없는 두려움을 안고 있는 저들이 일반 시민들이 사색과 이론을 통해 정치적으로 무장하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것이 많은 사회학자들의 인식이기도 했습니다. 시민들이 만연된 오락거리에 노예가 되는 것을 안타까워 하기보다는 그런식으로 실제 정치에서 멀어지는 것을 오히려 반기는 것이 하워드 진이 말하는 지배 계급의 어쩌면 원하는 바일지도 모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행동주의로 갈 수 있는 교두보가 선험된 지식들을 통해 마련되는 것이고, 매스미디어에 대한 비판적 변별력이 없는 시민들에게는 이러한 것들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러한 맥락이겠죠. 이는 촘스키도 그랬고, 바우만 역시 숱하게 강조했던 바이기도 합니다. 하워드 진 역시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많이 사색하라고 시민들에게 권유하고 있었는데요. 작금의 네트워크의 출현과 그에 따른 온라인 상에서의 국경을 초월한 문자의 접근성을 오히려 극우들과 왜곡된 보수 우파가 더 유연하게 이용하는 것은 가짜 뉴스와 거짓말을 구분할 수 있는 변별력이 우리들에게 너무나 부족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세계 전역에 파견하는 미군이 좋은 일을 하고 있고, 그 의도가 순수한 거라고 그들은 전제한다. 하지만 세계를 약탈한 미국의 역사를 읽어보면 그런 전제는 여지없이 무너진다

자본주의와 군국주의의 교묘한 결탁이 있었다

오웰의 ‘1984‘는 요즘의 세계를 불안할 정도로 정확하게 보여주는 안내서라 할 수 있다. 여론조작, 언어조작, 사용되는 선전 문구, 악랄한 외교정책에 붙여지는 명칭, 폭격과 전쟁에 붙여지는 이름 등이 섬뜩할 정도로 비슷하다

‘안보‘라는 단어는 국가주의의 산물이다. 다른 나라의 안전은 고려하지 않는다. 따라서 다른 나라를 폭격하는 짓은 그 나라 국민의 안전 따윈 신경 쓰지 않는다는 뜻이다

미국은 유럽의 구 제국들, 예컨대 영국과 프랑스에게서 중동 석유의 지배권을 실질적으로 양도받았다

결국 미국은 민주국가가 아니다. 우리는 경찰국가에서 살고 있다

그후 나는 사회에서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강한 힘을 가졌고, 대부분의 사람은 무력하게 의사 결정자들의 희생자가 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18세기 말 루소는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우리 세계에는 공학자, 과학자, 성직자 등 온갖 전문직 종사자가 생길 것이다. 하지만 시민은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 정부는 그 어느 때보다 무자비하고, 그 어느 때보다 기업과 결탁되어 있으며, 그 어느 때보다 군국주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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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로 본 한중관계의 오늘과 내일 (양장) 원광대학교 한중관계 브리핑 5
원광대학교 한중관계연구원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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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관계 특히, 중국 연구와 관련되어 국내에 명성을 갖고 있는 곳이 성균관대의 성균중국연구소와 경남대학교 그리고 한동대 정도가 개인적으로 생각이 납니다만 한울에서 나온 이 책의 집필진 또한 앞선 대학들과 마찬가지로 최근에 중국관계학에 대한 연구를 매진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원광대학교 한중관계연구원인데요. 사실 1992년 한중수교 이래로 한중간의 교역 규모가 나날이 증대되면서 양국 간의 활발한 민간 교류에 힘입어 국내 대학에서도 중국 연구에 대한 붐을 일으켰던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최근의 뉴욕 타임즈의 설문조사로 밝혀진 바대로 한국에서 더이상 중국에 대한 희망적인 의견은 더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한국인들의 '혐중 인식'은 이미 여러 국내외 언론사들을 통해 소개되기도 했었죠. 현재 미국의 대 중국 압박 나날이 강도를 더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 정부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경제와 안보라는 이원화된 외교로 언제까지 버텨낼 수 있을지는 다소 불명확합니다. 바로 그런 내용들을 이 책이 담고 있기도 한데요. 여기에 실린 글들은 일종의 시론이나 적은 분량의 칼럼으로 얼마전에 중국측의 보복으로 이어진 사드 사태와 근래 한중간의 여러 현안들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광대학교 한중관계연구원에서 기획하여 지난 2017년 2월 국내에 출판되었습니다.

여기 글에서도 간략하게 소개되고 있습니다만 현재 미국의 대 중국 압박은 과거 고대 로마 시절의 '분할 통치 Divided and Rule'를 벤치마킹한 것으로 볼 수 있읕텐데요. 동맹과 우호국들을 늘려 중국을 외교적으로 압박하는 전형적인 형태로 과연 중국이 이러한 고립에 빠지게 될지는 좀 더 두고 볼일입니다. 다만, 제가 좀 주의 깊게 본 대목은 2015년 8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중국 전승절 기념식에 참석하여 한중간의 관계가 더할 나위 없는 밀월관계에 이르렀고 국내 보수 신문인 모 신문사 조차도 박 대통령의 참석을 인정한 바가 있다는 구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드 배치로 인해 이러한 한중간의 밀월이 무너지게 되지요. 저는 중국의 노골적인 사드 보복을 언급하기보다는 이 글을 통해 한가지 깨닫게 된 사실이 있었는데요. 그것은 결과론적이겠지만 미국이 한국에 대한 사드 배치를 통해 노리는 바가 확실히 있었다는 점입니다. 뭐 표면적으로는 한국의 미사일 방어를 위해 들어왔다는 소리가 있었고, 마찬가지로 미국이 주도하는 MD 체제와 중국과 러시아의 미사일망을 훑어낼 수 있다는 것이 미국 국익의 유리한 점이라고 여러 지면을 통해 밝혀졌습니다. 아마도 이 글을 통해 추측해 보건대, 당시 워싱턴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하고 있던 한국의 대중 외교를 작살내면서 일본처럼 미 동맹 체제에 편입시켜 미국이 원하는 외교를 하고자 한 노림수였다고 여겨졌습니다. 익히 잘 알려진 바대로 사드 사태로 인한 중국의 노골적인 보복에 한국을 위해 미국이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외교가에서 유명했습니다. 물론 사드 배치가 전격적으로 이뤄지기 전에 중국은 여러 외교 통로를 통해 아마도 박근혜 정부의 사드 배치 가능성을 높게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외교에 단언하는 확답은 있을 수 없지만 아마도 당시 한중간에 어느 정도 교감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기도 하는데요. 결국 사드는 성주에 배치 되었고 러시아의 경고 그리고 중국의 엄청난 보복이 이어졌습니다. 여기 집필진들도 당시 박근혜 정부의 외교 무능을 꼬집고 있었습니다만 한국의 국익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냥 초등학생처럼 이리 끌려다니고 저리 끌려다녔었죠. 역대 미국 대통령들의 독트린처럼 우리나라도 미중간의 관계 설정에 있어서 명확한 기준을 놓고 양국을 이용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무조건적인 친중과 친미는 사실상 우리나라 국익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됩니다.

또한, 여기에는 꽤 귀중하게 사드 배치와 관련된 중국측의 의견을 엿볼 수 있는 글이 하나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중국 산둥대학교 중한관계연구중심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비잉다의 글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한국 수역에 할당된 중국 어선들의 어획량을 기존의 6만톤에서 더 늘리자는 것이 그의 다른 주장이기도 하였는데요. 중국 내의 지식인들이 대부분 당과 정권을 추종하는 경향이 있어서 이러한 주장이 크게 새롭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냥 원론적인 내용에 자기들의 주장만 담은 (한국측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전형적인 중국인의 글이었습니다. 사실 이런 글을 볼때마다 한숨만 나옵니다만 근래 중국측의 전방위적인 강요와 방만한 태도는 실로 눈살을 찌뿌리게 합니다. 이미 동북공정과 같은 역사 왜곡 때문에 중국인들의 관념 체계 자체가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임을 우리는 익히 알게되었는데요. 이러한 자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또 어떤 식으로 우리의 이익에 수렴하게 만들 수 있을지는 제가 외교 관계자는 아니지만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 생각됩니다.

끝으로, 이 책은 크게 한중관계 및 중국 인식에 있어 크게 새로운 내용이 담겨져 있는 글은 아닙니다. 그저 평이하고 근래 언론이나 여러 글들을 통해 나온 내용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다만, 이 글이 논하고 있는 두 가지 지점이 크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요. 황당무계한 홍콩의 독립 가능성과 "남북 교류의 마지막 보루인 개성공단마저 폐쇄되어버린 우리의 상황에서는 만나서 다툴 수라도 있는 중국과 홍콩이 참으로 부러워 보인다"는 글에 실로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홍콩의 많은 시민들이 자신들의 민주주의를 위해 희망도 보이지 않는 미래와 투쟁하고 있는 상황을 '만나서 다툴 수라도 있는' 배부른 다툼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것이 저는 실로 믿겨지지가 않았습니다. 또한, 다음 글에서 "중국 동포 (조선족)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일원"이라고 언급하는 것도 절로 짜증을 불러 일으키게 만들었는데요. 엄연히 법적으로 중국 국적인 자들을 우리가 대한민국 사람이라고 항변하는 것은 중국 측의 불쾌를 초래할 수 있고, 중국 동포 대부분의 정치 인식과 역사주의를 고려해 봤을 때, 그저 다른 나라 사람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들이 우리 나라의 국익에 도움이 되는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저자들의 사해 동포주의는 충분히감안하더라도 이렇게 말도 안되는 수사는 지식인의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세계화 시대에 편협한 인종주의는 불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너무나 앞서 나간 이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부산에 급하게 출장을 내려와서 저녁에 읽을거리를 찾다가 중고서점에서 구매한 책이기도 한데요. 근데 앞장에 출판사의 증정품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었습니다. 서점들은 암묵적으로 증정품은 판매될 수 없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물론 확인을 해보지 않고 산 일차적인 책임이 저에게 있습니다만 검수를 제대로 하지 않고 중고 서가에 올린 알라딘 측의 무성의에 실망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출판사의 의도된 편집인지 아니면 집필진의 원래 원고가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글로 된 용어와 단어 뒤에 한자를 '간체자'로 표기하고 있었습니다. 이게 중국어 글도 아니고 중국 원본이 한글로 번역된 것도 아닌데 왜 우리 한글로 표시되는 한문 조차 간체자를 봐야하는 걸까요. 이것도 전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었습니다. 

영국을 EU 시장의 교두보로 삼으려고 공을 들였던 중국은 영국의 EU 탈퇴 소식에 쓰린 마음을 부여잡아야 했을 것이다

북한의 핵 포기 가능성이 갈수록 희박한 상황에서 최근 한국 국내 여론에서 볼 수 있듯 한국은 핵 보유를 시도할 가능성이 크다

2015년 베이징에서 개최된 전승절 군사 퍼레이드에서 본 바와 같이, 중국은 역사 문제를 중심으로 한국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기 위한 우군으로 삼고자 한다

한국과 중국이 2015년 6월 정식 서명한 한중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체결 찬성을 주장하는 언론이 82%로 압도적으로 많은 반면 반대는 4%에 불과했으며 불분명한 입장을 나타낸 언론은 14% 정도였다. 경제와 관련한 두 가지 사안에 대해 국내 언론은 중국과의 관계 강화에 적극적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미국의 우려는 설득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경향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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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1-08-30 18: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끼인각은 각도라도 명확해서 포지션 잡기라도 쉬운데, 우리나라는 참 슬픈 운명을 타고 난 것 같아 답답하네요! 하노이회담 이후로 절절히 느끼고 있습니다. 우린 언제까지 줄타기를 해야 할지!ㅠ

베터라이프 2021-08-30 19:28   좋아요 0 | URL
아세안 국가들도 보통 경제는 중국 안보는 미국 이렇게 이원화가 되어있는데 일본의 마뜩잖은 요구 때문에 그동안 한국의 이중외교를 미국이 여러차례 외교 경로을 통해 아쉬움 반 그리고 압력을 가했다고 여겨집니다. 미국 국무부는 그동안 한국과 일본이 자신들에게 있어서 고분고분 했기에 양자간의 관계가 오랫동안 견고하게 학습된 상태로 이어지게 되었죠. 그런 측면에서 중국측이 한국은 외교가 없다고 하는게 그런 연유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리버럴한 문재인 정부가 적당히 줄타기를 해왔지만 이제 그 한계가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대만 사태가 시발점이 되겠지요. 오랜만에 막시무스님 글을 보니 너무 반갑네요 ^^ 찾아주셔서 감사해요
 
남성 특권 - 여성혐오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케이트 만 지음, 하인혜 옮김 / 오월의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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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출신의 여성 철학자이자 저술가인 케이트 만은 호주 멜버른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도미해 메사추세츠 공과 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습니다. 현재 그녀는 코넬 대학의 철학과 부교수로 일하고 있는데요. 익히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그녀는 여성 권리에 대한 보편적 지지와 더불어 현재까지도 각 사회들이 관습과 가부장제에 따른 여성들의 사회적 권리의 침해에 대해 폭넓은 비판을 지속하고 있는 지식인이기도 합니다. 그와 같은 그녀의 다른 주장들 가운데, "성차별이 전통적인 가부장적 체제를 지지하는 일종의 이데올로기"라고 강조한 것이 그녀가 크게 유명세를 타는 데 이바지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전반적으로 그녀의 주장들은 기존의 여러 형태로 알려져 있는 남성 특권들을 분석하고 진보적인 측면에서 여성의 권리가 사회 구성원들에게 이해시키는 것이 그녀 스스로의 저술 활동의 주요한 목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앞선 부분은 여성의 지위 뿐만 아니라 성 소수자들이나 동성애자들 및 인종 혐오가 없는 평등한 사회를 위한 일종의 필수 불가결한 인식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물론 지금 글을 쓰고자 하는 이 "남성 특권"이라는 책을 통해 좀 더 면밀하게 알게 된 사실이기도 합니다만, 오늘날의 미국이라는 '자유 아메리카'가 얼마나 그와 같은 진보와 극심하게 멀어져 있는지 충분히 인지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미국 사회의 실제적인 단면을 독자들이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케이트 만의 이 책은 충분히 그 몫을 다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이 책은 원제, "Entitled : Hpw Male Privilege Hurts Women"으로 2020년 8월 출간되었으며, 국내에는 2021년 8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케이트 만의 이 책은 '여성 혐오'라는 것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작동하는 지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이를 통해 여성들이 알고 있어야만 하는 여러 불편한 사회적 관습과 남성 전반이 항유하고 있는 '특권적 인식'에 대해서도 논증하고 있습니다.이 '여성 혐오' 소수의 여성차별주의자들이나 여성 혐오주의자들에게만 국한된 '혐오론'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불건전한 사회적 인식속에서 비롯된 사회 문제로서 저자인 만은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글의 2장에서 '인셀, 즉 비자발적 독신상태'에 있는 욕구 불만의 평범한 남성들의 여성 혐오가 단순히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젊은 여자들을 폭력의 타겟으로 삼고 심지어 증오하는 수준에 이미 도달해 있다고 서술합니다. 이들은 내심 여자를 너무나 만나고 싶어하고 또한 매력적인 여성과 섹스를 하고 싶어하는 욕망을 갖고 있으나 이들이 평범한 젊은 남성임에도 스스로 실패할 것을 두려워 해 데이트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문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저 스스로의 소극적 태도의 문제 삼지 않고 극단적인 여성 혐오로 발화시킨 이들은 진취적이고 매력적인 남자들을 만나고 있는 주변 불특정 여성들의 생명을 빼앗는 폭력으로 이르게 되는데요. 물론 이들이 "만화에나 나올 법한 우스꽝스럽고, 우스운 존재들"이지만 여기서 문제는 이들이 '인종차별주의자'와 마찬가지로 터무니 없게 자신을 옭아매는 절망에 기대 극단적인 폭력성을 동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불특정 다수들에게 실탄을 쏘아 치명적인 상해를 입힌 엘리엇 로저와 스콧 비얼리와 같은 자들이 단순히 반사회적인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하기보다는 저자가 글에서 강조하는대로 "여성 혐오가 순전히 사회구조 내에서 벌어지는 현상이며, 사회적 관습, 정책, 넓은 의미의 문화적 통념에 작동되는 것"으로 단순히 저 인셀들의 문제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뒤이어 진술되는 가부장적 인식과 남성 특권에 대한 과도한 믿음에 비롯되어 있다 봐도 크게 이상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와 더불어 불특정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남성에 의한 강간 시도와 데이트 강간, 여성을 향한 성폭력 등이 삐뚤어진 남성들의 특권 의식에 있다고 저자는 다시 한 번 꼬집고 있는데요. 다만, 그러면서도 이런 상황에 대한 저자의 인식 전반이 남성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기 보다는 여성의 권리에 대한 사회 전반의 잘못된 인식과 그 반대로 내재되어 있는 남자와 여자간의 권력 관계 및 전자에 의한 특권적 관념이 '여성 혐오'를 통해 물리적인 폭력과 사회적인 억압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진술되고 있습니다. 소위 남녀가 정상적인 교제 관계에 있다 할지라도 남성의 섹스 시도에 대해 통념적인 여자들의 '좋은 여자'가 되고 싶은 내면의 강요 때문에 이를 자신의 호불호와 상관없이 남자친구의 요구를 대체로 수용하기 마련이고 심지어 나중에 교제가 끝나게 되는 상황에서 '리벤지 포르노'나 이별을 통보받은 남자 친구가 휘두르게 되는 심각한 폭력 상황에 여자들은 처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남성들이 평소에 쉽게 겪어보지 못하는 경험으로 여성들이 겪을 수 있는 끔찍한 사례에 대해 심정적으로 공감을 하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여기에 저자는 3장에서 '가해자 감싸기' 즉, 힘패시 himpathy 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요. 이를 아주 간단히 설명해보자면 강간 피해자들에 대한 일종의 '피해자 지우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 미국에서 강간과 관련해 기소되는 비율이 매우 저조한 것은 단순히 '무고죄'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수사 과정에서 그리고 기소와 법정 다툼에서 남자 가해자들에 대한 만연된 동정심을 부여받는 것에 있다고 저자는 법정 사례를 통해 논증하고 있었는데요. 또한, 낙태와 관련된 6장에서 저자는 '적법한 강간'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만 강간에 대한 남성들의 무지는 대체로 심각한 수준이며, 남들보다 더 많은 '권력'을 가진 강간 가해자 남성을 미국 법정에서 기소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이 글의 전반적인 진술을 통해 입증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앞선 3장에서. "권력을 쥔 남성 중에서도 가장 막강한 권력을 쥔 남성은 별다른 대가를 치르지 않고 세상 모든 사람을 성적으로 '소유할' 권리를 인정받는다"고 서술되고 있었습니다. 즉, 이는 미국 사법 시스템 하에, "처벌에 대한 염려를 없이 여자들을 강간할 남성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라고 첨언되고 있기까지 한데요. 이러한 왜곡된 성인식을 가진 남성들을 기본적인 도덕적 관념만으로는 제어할 수 없다는 것이 오늘날 가장 큰 현실적인 문제로 여겨지기까지 합니다.

앞에서 3장을 통해 잠깐 소개하기도 하였습니다만, 데이트 관계에서 여성들이 자신들의 마땅한 성적 권리가 교제하는 남성을 위한 일종의 '섹스 봉사'로 인해 스스로 자결을 거부하고 있는 상황은 익히 잘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여성들이 관계 전반이 무너질까봐 스스로 원치 않는 시기임에도 섹스를 거부할 수 없었고 그것을 그냥 감내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여성들이 많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것은 가부장적 관념이 뿌리 깊은 사회일수록 심각한 편이고, 국제 사회로부터 남녀 평등이 잘 유지되고 있다는 미국에서 조차 이것은 여성들에게 내면화되어 있었습니다. 원치 않는 섹스로 인한 임신의 중단을 위해 필요한 낙태권은 오랫동안 미국 사회의 갈등과 사법 체계의 모순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실 수많은 사형수들을 '독약 주사'로 처리하고 있는 미국 사법제도가 어떻게 낙태에 관한 부분에 있어서 생명 윤리를주장할 수 있는지는 이성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인데요. 저자는 이를 교묘한 정치적 논리라고 평가하고 있었습니다만 여성의 몸에 대해 무지한 비전문가들의 터무니없는 주장들과 임신의 문제가 오로지 여성의 문제라고 보는 보수적인 종교관에 의해 강요되어 왔다는 것은 거의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단순히 미국 공화당과 민주당의 허울좋은 정치적 다툼이라기 보다는 여성의 성을 매개로 일종의 사회적 헤게모니가 걸려있는 것으로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여기에 강간을 제외한 일반적인 섹스 자체에 있어서 피임 기구를 사용하는 데 있어 남성들의 동의가 정말 중요할 수밖에 없는지는 이젠 거의 언급할 필요가 조차 없습니다. 물론 낙태 자체를 여성의 성적 결정권으로 소급 적용하는 것은 설득력을 얻기가 다소 어려울 수 있다고 보는데요. 단순히 생명에 대한 존중을 떠나서 임신에 이르게 된 여성에 대한 좀 더 전반적인 이해와 더불어 정치적 논리로 비화시키지 않는 것이 중요하리라 생각됩니다.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아니라 이것은 여성의 건강권과 최소한의 신체적 안전 보장으로 봐야될 것 같습니다. 그동안 미국 내의 정치에서는 낙태와 관련된 소모적인 논쟁을 통해 특정 단체와 진영 논리로 비화되어 왔고 이것은 시민들의 권리 내지는 여성들의 자결권과는 전혀 하등 상관이 없는 쪽으로 진행되어 왔습니다.

끝으로, 교육 받은 여성에 대한 대다수 남성들의 내재된 반감은 미국 사회 뿐만 아니라 가부장적 관념이 남아 있는 다른 사회에서도 여전한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진보에 있어서 그리고 민주주의의 발전에 있어서 남녀의 동등한 권리와 평등은 중요한 가치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단순히 여성 혐오가 반여성주의라든지 여자 전반에 대한 터무니 없는 반감을 드러내는 것으로 국한시켜 이해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개선되지 않는 불편한 사회적 관념에 기대고 있기 때문일겁니다. 우리와 같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남성의 특권이 대체 어딨냐고 반문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일반적인 가정에서 아직도 극심한 차별을 보이고 있는 가사 분담이라든지 여성이 거의 의무라고 여기고 있는 남성 배우자 혹은 남자친구, 파트너에 대한 사회학적인 성적 관계라는 '재화'가 소위 마땅히 거래되는 것이라고 은연중에 여기는 남성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물론 앞선 논증과는 약간 상반될지라도 케이트 만의 이 책을 마냥 '여성 혐오'라는 키워드에 집중해서 읽어서는 안되는 부분이 여럿 있기도 한데요. 특히, 현재 미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유색 인종의 여성들에 대한 뿌리깊은 차별과 인종주의적 인식은 결코 허투르게 이해되서는 안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백인 여성이 강간 피해자일 경우와 그렇지 않은 흑인 여성과 유색 인종 여성일 경우 미국 경찰과 사법제도가 대응하는 수준이 다르다고 언급하는 부분은 이를 여실히 입증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처음 도입부에서 저자인 만이 여성 혐오주의자가 어떻게 인종주의자로 연계될 수 있는지에 대한 언급에 대해 저는 약간의 의구심을 갖고 있었습니다만 이 글의 마지막 장까지 일독 하고 나서 그러한 인식의 가능성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여성 차별과 여성 혐오에 대한 문제는 성적 소수자와 인종 차별의 문제와 다름없다는 것에 거의 동의하고 이것은 민주주의적 가치에 반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진정한 사회적 진보와 인간의 진정한 평등은 아직 거쳐가야 할 장애물이 많이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글과는 전혀 상관없이 막시무스님이 다시 와주셔서 뭔가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북플러들 중에 저 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이 막시무스님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성혐오란 순전히 사회구조 내에서 벌어지는 현상이며, 사회적 관습, 정책, 넓은 의미의 문화적 통념에 의해 작동한다

도널드 트럼프는 수십 명의 여성들을 강간하거나 성적 괴롭힘을 일삼았다는 타당한 혐의를 받았지만, 현재 미국 대통령으로서 임기를 채우고 있다

반성적 사고를 통해 여성이 온전한 인간이라는 자명한 사실을 깨닫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권력을 쥔 남성 중에서도 가장 막강한 권력을 쥔 남성은 별다른 대가를 치르지 않고 세상 모든 사람을 성적으로 ‘소유할‘ 권리를 인정받는다

여성들은 자신을 가해하거나 학대한 남성들을 감싸지 않는 것에 대해 수치심과 죄책감을 느낀다. 여성들은 남성들에게 해를 입히거나 남성들을 실망시키길 원치 않는다

가스라이팅에는 인식의 측면 뿐 아니라 특유의 도덕적 측면이 존재한다. 가스라이팅의 피해자는 가해자의 시각으로 재구성 된 사건과 서사 혹은 그 자신만의 이야기에 반박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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