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로크 시민정부 효형 클래식
존 로크 지음, 남경태 옮김 / 효형출판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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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근대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아버지로 잘 알려져 있는 존 로크는 이 뿐만 아니라 경험론과 계몽주의 철학의 효시라고도 읽히고 있는데요. 특히 그는 사회계약과 관련된 루소의 혁명적인 이론보다 거의 몇세기를 앞서 나간 인물이기도 한데요. 혹자들은 로크의 이론을 홉스에서 차용된 일종의 동어반복으로 격하시키기도 합니다. 이 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자들은 로크가 주장한 '재산권'에 한정된 부분만을 차용해 그를 자신들의 부류로 만드는 데 막대한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였습니다. 그것은 마치 칸트를 자기들 입맛대로 해석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경우라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엄밀하게 그에 대해 분석을 해본다면 통치론의 후반부를 편역해 내놓은 이 책에서도 인간의 자유와 정치적 권력, 시민 정치 및 자연법에 의한 입법주의 등 근대 민주주의의 이론적 양식들을 거침없이 내놓은 중요한 선각자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그의 인식에서 공리와 기본적 자유에 대한 개념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기본적인 민주주의 이론의 밑바탕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자유주의의 아버지보다는 오히려 민주주의의 아버지라는 수식어가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통치론 Two treatises of Government 의 후반부를 편역한 것으로, 국내에는 지난 2012년 4월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우선 로크가 강조하는 '재산권'에 대해 먼저 언급하고 싶은데요. 이미 '통치론'에 대한 수많은 강의와 해설서 및 서평들이 적잖게 나와있는 상황에서 국가의 기본적인 의무라고 할 수 있는 시민들의 재산권 보호에 대한 로크의 주장을 설레발로 자본주의적 맥락이라 해석하는 일부의 사람들이 있는데요. 로크는 단순히 재산권 뿐만 아니라 후에 나오는 애덤 스미스와 마찬가지로 노동 자체에 대한 의미있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이는 각 개인들의 노동들이 사회를 지탱하는 요소라고 이해하고 있었는데요. 마찬가지로 스미스도 노동자들에 대한 기본적인 연민을 갖고 있었고 이를 중상주의를 비판하는데 할애하기도 했습니다. 즉, 노동은 그 자체로 신성한 것이며, '탐욕을 위해서가 아니었다'는 반증은 자본주의와는 하등 관련이 없다고 봐야하며, 또한 이 시기에는 엄밀히 자본주의적 개념이 미처 나올 수가 없는 시점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그가 말하는 '자유'에 대한 의미도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차원의 개념은 아니었습니다. 로크는 방종과 자유를 구분하고 있었고 자유는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의 제한적인 자유로서 마찬가지로 언급되고 있었습니다.

다시 로크가 재산권에 보이는 기본 인식은 사회와 위임된 권력에 대한 일종의 도덕적 의무 내지는 자연법적 인식을 내포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자유를 인지한 인간들이 복합적인 의미의 '자연상태'를 사회계약의 의무로서 공익을 위해 편성되어야 하는 기본적인 정부의 함의들을 위해 필요한 개념이라고 봐야할 것입니다. 로크의 주장대로 각 개인들이 각자 의지에 따라 재산권을 갖게 되는 것은 지극히 온당한 것이며, 이것의 전제 조건은 방만하고 제약없는 자유로서의 재산권 추구가 아니라 스스로 이성을 발휘해 자유의 (이성적인) 제한을 토대로 주장할 수 있는 합리적인 재산권에 대한 인식을 뜻합니다. 이것은 관습법 체계에서의 기반이 아니라 인간이 이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법전으로 쓰여있지 않은 자연법의 인식하에 타인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 듯 했습니다. 이에 로크는 '이성을 제대로 사용할 줄 모르는 인간들도 있다'고 언급하면서 대체로 모두가 이성을 수용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다수가 모인 의견과 의지는 마땅히 모두가 따라야만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르테가 이 가세트나 가브리엘 타르드, 세르주 모스코비치 등에 의해 이를 다수에 의한 선동으로 몰아가면서 민주주의 자체에서도 '다수결의 폭력'이라는 괴물을 만들어 냈습니다. 사실 여기서 따져봐야 할 점은 당시의 저런 군중이라는 인식을 만들어 낸 지식인들의 대부분이 자신은 실로 '군중' 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얼마나 오만한 발언인지 여러분도 충분히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다수의 인민들이 사회의 의견을 결정하는 절대 다수의 의견을 시민들의 비이성적인 측면을 연계시켜 반대의 '소수의 권리'라는 대립물의 자체가 본질적으로 변질되면서 사회적 기득권이나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절대 부유층의 권리로 교묘하게 인식시켜 왔는데요. 이는 노엄 촘스키의 말처럼 '절대 부유층의 권리', '기득권층의 이익'이라는 아예 노골적인 언행이 지식인들의 입에서 감히 나오고 있지는 않지만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이 '소수의 권리'가 오용되어 왔던 것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동성애자들이나 성소수자 혹은 하층 계급의 시민들의 마땅한 권리를 보수 우파들과 극우들이 '정치적 올바름'을 직접적으로 공격하면서 소수에 대한 정의를 아예 자신들의 입맛대로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사회적 부조를 강하게 불식시키면서 실질적 배려층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권리를 짓밟았던 것이 바로 이 신자유주의자들이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로크는 "각 개인은 다수의 결정에 복종하고 그에 따라 행동해야 할 의무가 있다"면서 물론 앞서 언급했던 대로 이성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건 분명하지만 사회 계약과 관련된 시민의 속성 자체를 '믿을 수 없고 즉흥적이다'라는 공격으로 일관한단면 애초에 사회 계약 따위는 존재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로크가 말하는 '자연상태' 자체가 남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배타적 자유의 다름 아님을 이미 피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모두가 인정하는 계약의 틀 안에서 법의 준수와 복종이라는 의무를 명확히 이해하고 나서야 로크가 말하는 '부여된 정치 권력'의 단계를 비로소 설명할 수 있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부분을 로크는 '시민사회'와 '정치사회'로 구분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양자에 대한 로크의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하나의 사회로 결집해 모두 자신의 자연법 집행권을 공공에 위임하고 양도하면 그것으로써, 또 그럴 경우에만 정치사회 혹은 시민사회가 성립한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또한, "시민사회에서는 누구도 사회의 법으로부터 면제되지 않는다"고 그는 명확히 밝히고 있는데요. "누가 자기 마음대로 행동한 것으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발생했을 경우 배상이나 안전을 호소할 수 있는 곳이 없다면 자연 상태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라는 평가는 이처럼 의미심장하다 볼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시민사회를 규정하는 사회의 입법권과 관련해, 로크는 "자연법은 성문화되어 있는 게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속에만 있기 때문에" , "자연법은 사람들의 권리를 정하고 재산을 보호하는 본연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고 선을 그으며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각 사회는 입법 체계가 필요한 것이며, 이것에 더할나위 없이 좋은 것은 제도와 재판관에 대한 시민들의 태도가 단순한 복종을 넘어 시스템에 대한 덕성의 존재와 깊은 이해를 갖게 되는 것이 중요한데, 이것은 이 법 기관이 어느 정도 노력을 기울여 시민들에게 신뢰를 받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논증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민주주의 체제에서 사법 기관에 대한 다수 시민들의 존중과 수용은 무조건적인 어떤 사법 체계와 헌법 이론에 의해 강조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올바른 판결과 시민들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재판관들이 사회 전체에 신뢰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로크의 연계된 인식과 그 궤를 같이 합니다. 로크는 전제 왕권을 약간 논하면서 '덕성을 갖춘 지도자가 존재한다면 그것 자체로 사회에 이득이 될 수 있다"는 논점이 그에게는 이미 선험된 사례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기도 하는데요. 도덕성 자체가 제도와 틀 안에서 필수불가결한 논제는 아니지만 그것이 바탕이 된다면 양쪽 즉 입법과 시민 사이에 어느 정도 신뢰감과 유대감을 갖게 된다는 점을 밝히고 싶었던 것으로 파악됩니다. 물론 오늘날은 민주주의 제도 하에서 헌법의 고유한 의미에 따라 시민 모두가 사법 체계 전반을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만 "법은 모두가 지켜야 하고 그것을 시민 모두가 맹세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전제로 그저 의무로 받아들에게 하는 것보다 다소 부족할 수도 있지만 사회 계약의 논리로 자연상태를 벗어나 인간이 누구나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보호받기 위한 사회 구성의 요건으로 다수의 시민들을 이해시키는 것이 좀 더 필요한 작업이라고 여겨졌습니다.

끝으로, 로크의 이 글은 자연상태와 자유, 시민, 시민사회 그리고 위임된 권력을 통한 입법 체계 등 각각의 가치가 서로 연계되어 근대 민주주의 사상의 기본적 토대를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지금에서야 이를 읽어나가면 어쩌면 당연한 말들의 향연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사실 무엇보다 이 글의 중요한 논점은 인간이 폭력적인 자연 상태를 벗어나 모두의 이익을 지켜낼 수 있는 '사회계약'의 단계에서 무엇보다 이성을 보유한 다수의 결정을 존중하고 이를 바탕으로 모두의 동의를 거쳐 입법의 준수를 피력하고 이를 더욱 발전시키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건전한 목표라는 점입니다. 다만, 순진한 민주주의의 시대가 저물어 이제는 자본주의 심화단계에서 민주적 정치가 날로 침해당하면서 계약의 의미가 자본주의에 의해 다소 변질된 측면이 있습니다. 물론 제가 이 지점에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대결구도로 몰아가 선악의 문제로 만들려는 것은 아닙니다. 주입된 자본의 논리를 차치하더라도 우리의 삶에서 자본주의는 무척 중요한 문제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이미 시민들에게 이 자본주의는 자아실현과 만족하는 삶에 대한 중요한 수단으로서 깊이 내면화가 된 상황입니다. 바로 이런 자본주의를 건전하게 만드는 데 있어 아직도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익히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는 독재와 폭력적인 권위주의와 화해할 수는 없지만 반대로 자본주의는 여건만 맞는다면 독재와 반민주주의와도 이론적으로 양립이 가능하다는 것은 과장이 아닙니다. 자본주의를 자신들의 입맛대로 변화시킨 신자유주의 역시 시장우월을 기반으로 여러 정치적 논법들을 사회에서 제거시키고 이익이 보장된다면 흡사 지옥과도 화해할 수 있을정도로 배타적이 되었는데요. 그래서 로크의 이 글은 지금의 엄혹한 현실에서도 시민들이 다시 민주주의의 기본을 유념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중요한 매개체가 될 수 있다 여겨집니다.   



- 위탁된 취지와 반대로 국민에게 국가의 힘을 사용한다면 국민을 상대로 전쟁 상태에 돌입하는 것이다 라는 문장은 사뭇 눈길을 끌었는데요. 이는 루소가 말한 인민은 정부를 갈아치울 권리가 있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여겨졌습니다.


-로크는 이 글을 통해서 인간과 사회에 대한 기독교적 사고관을 드러내고 있는데요. 신성을 통해 그는 인간은 다수의 이익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에게 부여받은 세계라는 의미가 바로 이러한 맥락이 아닌가 생각해 봤습니다. 





모든 사람이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고, 서로 위해를 가하지 않고, 자연법을 준수하면 전 인류의 평화와 보호를 보장할 수 있다

사람들 간의 자연 상태가 종식되려면 계약이 아니라 서로 하나의 공동체에 포함되어 단일한 정치체를 이룬다는 합의가 필요하다

즉 모두가 활용할 수 있을 만큼 가진다는 규칙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도 여전히 세계에 통용되어야 한다

그 법은 오로지 이성만이 포고하고 알려주는 것이었으므로 자신의 이성을 쓸 줄 모르는 사람은 그 법에 따른다고 말할 수 없다

진정한 자유는 자신이 따라야 할 법의 테두리 내에서, 타인의 전횡적인 의지에 종속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의지에 의해 자신의 신체, 행동, 소유물, 전 재산을 마음대로 처분하는 자유를 가리킨다

나는 인간이 성숙한 상태에 이르면 자연법을 체득하게 되고 그 테두리 내에서 행동하게 된다고 본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하나의 사회로 결집해 모두 자신의 자연법 집행권을 공동에 위임하고 양도하면 그것으로써, 또 그럴 경우에만 정치사회 혹은 시민사회가 성립한다

위탁된 취지와 반대로 국민에게 국가의 힘을 사용한다면 국민을 상대로 전쟁상태에 돌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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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없는 인간 - 팬데믹에 대한 인문적 사유
조르조 아감벤 지음, 박문정 옮김 / 효형출판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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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조르지오 아감벤은 카를 슈미트의 '예외 상태' 연구로서 그리고 민주주의적 삼권 분립에 대한 명료한 인식으로 유명합니다. 특히, 그는 어느 지식인보다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갖고 있는 사람이기도 한데요. 과거 역사에서 무솔리니를 몸소 체험한 이탈리아 인으로서 이러한 그의 믿음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물론 아감벤의 이런 정치적 신념을 차치하더라도 현재 세계 학계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상은 대단하다고 봐야 할 텐데요. 작고한 움베르토 에코와 더불어 전세계인이 그의 이름을 한번쯤은 들어봤을 정도이니 말입니다. 그는 평생에 걸쳐, 미셸 푸코와 발터 벤야민 그리고 마르틴 하이데거에게 학문적 영향을 받았고 이러한 기반으로 현재에는 현대 민주주의에 대한 해박한 분석을 통해 대중들에게 자신의 고유한 정치적 의견을 피력하는 등의 활발한 활동을 해오고 있습니다. 최근에 아감벤은 여러 외신들을 통해 전세계 코로나 펜데믹 상황에 대한 일종의 비판적 분석으로 더 유명해지기도 했는데요. 이탈리아 내에서도 그에 대한 여러 비판이 있었고 여기에는 슬라보예 지젝까지 일정 부분 동참하기까지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자유와 인권의 측면에서 각국의 봉쇄 정책이 씁쓸한 뒷맛을 남길 수도 있다는 가정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지 못하고 있는데요. 바로 이런 맥락에서 아감벤이 인문학적이고 정치사회적인 비판을 가감없이 드러내 보인 것이 지금 소개할 이 책의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글과 관련해 구글 검색으로 원전을 찾아보려 했지만 정보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시는 분은 댓글로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선, 아감벤의 이 책은 2020년 5월 경부터 2021년 1월 경까지의 짤막한 시론을 모은 글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서두에 경희대 이택광 교수의 추천사가 있어서 내심 반갑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아감벤의 일관된 논지와는 별개로 그가 2020년 10월 이후에 같은 맥락으로 글을 썼다면 어조가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추측해보기도 합니다. 최근에 그에 대한 논란으로 인해 저 역시도 이 책을 다른 글보다 좀 더 꼼꼼하게 읽게 되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아감벤이 이 글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점은 "생존 외에 다른 인류의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이를 명확히 대변한다 생각합니다. 그는 초지일관 작금의 과학 기술주의에 대한 맹신으로 주도되고 있는 각국의 사회 격리와 이를 바탕으로 권력이 시민의 자유와 인권을 헌법의 명령 없이 제한하게 될지도 모르는 가까운 미래에 대해 극도의 경계심을 갖고 글을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파시즘의 나치의 학살자 아이히만을 언급하면서까지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데요. 어떤 측면에서는 너무 과하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많은 정권이 소위 '공중 보건'이라는 핑계로 권위적인 테크노크라트 정치를 시도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경계를 가질만 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면에서 이 책의 제목은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을 연상시키면서도 한편으론 마스크를 써야만 하는 오늘날의 상황을 적절히 잘 묘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의 이와 같은 우려를 클로드 르포르 식으로 해석해 본다면 '인간의 자유를 어떤 식으로도 희생해 본 적이 없는 미국과 프랑스'와 달리 독일과 이탈리아는 이미 전체주의의 경험을 갖고 있기에 아감벤이 이탈리아 인으로서 우려하는 바는 지극히 온당하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더욱이 에밀 뒤르켐이 오래전부터 분석해 왔던 이런 경험주의적 인식론은 전체주의적 종말을 그려보지 않더라도 일말의 정치사회적 가능성 하나만으로도 시민들을 위해 먼저 선행적인 고찰을 해야만 하는 지식인의 의무일 수도 있습니다. "이 전방위적인 펜데믹 끝에는 과연 무엇이 있겠는가"에 대한 냉엄한 질문 말입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 땀을 흘리고 있는 보건 관료들과 의료진들에 대해 의학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일종의 정치사회적인 헤게모니로 너무 확대해석하는 것은 분명 거부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많은 지식인들이 인문학의 쇠퇴와 종교가 과학 기술의 맹종을 견제하는데 실패한 부분을 우려스럽게 보기도 했습니다만 인류가 무분별한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끝내 종말을 맞이하게 될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여러 의견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다만, 그의 기본적인 우려대로 기술 과학이 민주주의나 보편적인 인권 및 자유를 침범해서는 안되는 것은 명확하며, 의학 전반이 인간성과 도덕적인 의무를 저버리고 단순한 수단화에 이르게 된다면 마땅히 이를 견제해야만 할 것입니다. 전문가들이 주도하는 정치가 매번 사회에 옳은 결과만을 가져다는 것은 아니며 이들이 사회 전반의 비판적 의견을 수용하지 않을 때 파시즘의 준하는 정치가 도래할 것이라는 것은 거의 분명합니다. 이것을 음모론이나 과도한 회의주의라 공격할 수도 있지만 일말의 가능성을 두고 성찰하는 것 또한 미래 세대를 위한 우리의 의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비판들 가운데 아감벤은 특히 법학자들에 대해 더욱 날을 세우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삼권 분립의 가치를 사실상 훼손하는 행정부에 의한 입법부를 대체하는 긴급한 수단들이 처방되는 지금의 상황을 법을 전공한 많은 학자들이 입을 닫고 있는 것에 대해 일정 지면을 할애하고 있기도 하는데요. 여기서 그가 히틀러 시대의 카를 슈미트를 오버랩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일정 부분 학자의 양심을 저버리고 있다 보는 듯 했습니다. 이와 같은 예외 상태를 무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는 법률학자들의 침묵이 아감벤의 의견대로 도덕적 인식의 종말을 뜻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사회와 시민이 필요할 때 이상하게 입을 닫는 지식인들이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겁니다. 이 '바이오 보안'의 정치가 시민을 관리하는 정부들의 손쉬운 정치적 획득물로 여겨질 수도 있기에 지금과 같은 '중요한 보건 위기'의 시대에서 인문학 분야 뿐만 아니라 다방면에 있는 지식인들의 관심이 필요할 때라고 생각됩니다.

끝으로, 최근의 아감벤에 대한 논란은 기자의 양심을 망각한 일부 언론인들에 의해 과도화 된 측면이 있습니다. 공중 보건에 대한 그의 관심이 충분한 함의를 갖고 있음에도 이를 언론이 반사회적 논법으로 과장해 온 것은 일개 시민 대 언론의 비균형적인 힘의 논리를 일견 떠올리게 하는데요. 아감벤과는 약간 다른 맥락이긴 하지만 장 지글러 역시 유사한 고초를 겪은 바가 있습니다. 다행히 프랑스나 영국의 많은 언론들이 최근에는 공중 보건에 대해 균형잡힌 보도를 하고 있습니다만 저 역시도 부분적으로는 봉쇄에 대한 자유와 개인의 기본권의 제한이라는 주제에 대해 관심을 가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큰 틀에서는 시민의 자유와 권리가 마땅히 헌법의 제한을 제외하고 이를 보장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많은 시민들에게 자유라는 가치는 충분히 중요한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현대의 정치사회적인 메커니즘이 민주주의의 확대와 더불어 시민들의 자유와 권리 증진에 있어왔던 것은 분명 부정할 수 없으며 그런 측면에서 민주주의가 권위주의나 독재와 공존할 수 없음은 확실합니다. 이에 펜테믹 사태에 따른 각국의 정부가 보여온 보건 정책에 대해 자신들이 파국으로 나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시민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마땅히 필요해 보입니다.


모든 종교와 마찬가지로 신성화 된 의료 과학은 이단과의 불협화음이 있다

그렇게 개인의 두려움, 집단적 패닉의 악순환의 고리를 통해 정부는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안전에 대한 욕구를 받아들여지도록 만들었다

역사는 모든 사회 현상에 정치적 의미가 있을 수 있다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아울러 자신의 책임을 제대로 하지 못한 또 다른 부류는 법학자들이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정의하는 삼권 분립의 원칙이 훼손되고 행정권이 실질적으로 입법권을 대체하는 긴급 명령이 무분별하게 사용되는 경우를 오래전부터 익숙히 봐 왔다

나는 분명 도덕적 명분을 위해 뒤따르는 거대한 희생이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짐작한다. 그들에게 나는 나치의 장교 아이히만을 말해 주고 싶다

거짓으로 밝혀진다 해도 반드시 참이어야 하는 거짓은 사실처럼 여겨질 것이다

여전히 다수의 이탈리아인이 은연중에 사용하는, 문화 곳곳에 퍼져 있는 반유대주의에 동조하는 유대인 박멸이라는 소재를 전염병 사태와 같은 선상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최근까지 음모와 작당 모의, 비밀 조직이 만연했던 이탈리아와 같은 나라에서 보건 긴급 사태를 향한 비판적 시각을 음모라고 완고하게 치부하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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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06-25 10: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생존 외에 인류가 추구하는 다른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란 어떤 것인가?

오늘도 베터라이프님의 서재와 왔다 얻어 갑니다.

베터라이프 2021-06-25 10:46   좋아요 0 | URL
부족항 글 항상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아감벤도 역시 바우만과 비슷한 어조였는데 분명 희망은 있겠지요 ^^;;

chaos 2021-07-09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는 내내 불편했는데 아마도 아감벤의 논의가 인간 혹은 인류라는 이야기로 돌아가기에 그 어디서도 자본주의비판 또는 이 문제에 대한 계급적 관점은 보여지지 않았습니다

베터라이프 2021-07-09 01:59   좋아요 0 | URL
현재의 펜데믹 사태로 인한 사회 부조의 불확실성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파행을 주요한 관점으로 아감벤이 다루고 있는데 쓰신 글이 어떤 관점으로 비판을 하시고 있는지 저로서도 이해가 안되네요. 혹여 쓰신글을 제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유럽과 미국의 의료 붕괴와 그러한 시민들의 고통은 신자유주의적 이행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바로 이부분을 아감벤은 일관되게 비판하고 있었습니다.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chaos 2021-07-09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막연한 신자유주의 비판은 아감벤 아니라도 널려있죠. 한데 현재 팬더믹과 관련하여 정말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 인류 일반인가요? 정치경제학 비판이 빠진 자본주의 문화비판이란게.. 신자유주의 비판이라셨는데 신자유주의 극복 대안이 인류의 자유인가요? 삼권분립이 민주주의인가요? 그렇다면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끔직히 싫어하겠네요? 아감벤은.. 현학적인 말투로 유럽의 현자인듯 글을 써서 도대체 글을 읽고 무얼 생각해 볼 수 있는건지 전혀 모르겠던데요.

베터라이프 2021-07-09 13:24   좋아요 0 | URL
종래의 신자유주의 비판이 그저 막연한 비판들로 채워져 있다 생각하시는지요? 아감벤은 이 글에서 펜더믹 사태로 인한 정부의 대응과 결과물에 대해서 파시즘의 그것과 비슷한 관점을 보이고 있는데요. 그것의 동의 여부를 떠나 현재의 펜데믹으로 인해 얼마간의 공공 의료가 준비가 안된 것은 신자유주의적 기조에 의한 것은 확실합니다. 반대로 님께 되묻고 싶은것이 자본의 축적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이론적 차원의 문제를 떠나서 인류가 진정으로 자신의 삶을 인간답게 영위하는데 신자유주의가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회적 안전망과 부조, 공공성 및 도덕적 근거의 사회적 책임 모두를 앗아간게 신자유주의인데 이것 조차도 긍정을 하시지 않는다면 달리 드릴말씀이 없네요. 그리고 저 뿐만 아니라 아감벤 역시 민주주의의 확대와 좀 거 건전한 정치 인식을 주장하고 있고 이에 선결 조건이 신자유주의적 기조의 개선 즉, 공공성을 회복시키고 더 나아가서는 바우만이 말한대로 모두가 모두를 책임지는 일종의 미래지향적 목표라도 가져야하는것이죠. 이렇게 후기 자본주의 상황에서 극심한 불평등을 초래한 것은 신자유주의이고 저뿐만 아니라 모두가 인식하고 있는것입니다. 그리고 거의 사회가 테크노크라트의 과두제에 가까워지고 있는데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권력의 균형추가 이미 너무 기울어진 상태라 기득권과 부유층의 기존 세력화에 일반 시민들이 비벼볼 틈이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일단 아감벤의 이 글은 정부의 공중 보건 개입에 대한 권력의 남용을 우려한 글로서 이 부분은 가능성의 여부를 떠나 이해하고 있는것이 좋겠죠. 일반 민주주의 체제에서 이런 비상 대책은 그 후이든
어떻든 간에 분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전적으로 아감벤의 말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슈미트의 과거를 떠울리며 우리 민주주의의
미래를 걱정하는 것은 철학자의 양심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기본적인 민주주의적 가치를
지지합니다. 신자유주의의 대안은 오로지 시민이 더 많은 사회적 변별력을 갖추고 어느 정도 실질적인 정치조직화 선행되어야 하겠죠. 지금처럼 엘리트 위임 방식이 아니고요. 이 모든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님은 분명합니다. 저의 글 논조가 딱딱하실수 있는데 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 핸폰으로 쓰다보니 너무 두서없이 쓴 것 같아 송구하네요.
 
미중 갈등의 구조 - 금융 위기 이후의 헤게모니 경쟁 북저널리즘 (Book Journalism) 41
공민석 지음 / 스리체어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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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의 선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저자는 금융 위기 이후의 미국 정치와 오늘날의 미중 관계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를 지속하고 있는 학자입니다. 그는 특이하게도 학부 시절에는 국사학을 전공해 이 분야에는 특별히 접점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다만, 이후 모교에서 정치학 박사를 수료하고 자신의 연구 방향을 바꾸게 되는데요. 정치학과 경제학을 일반적인 제도권에서 수학하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이런 쪽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개인적으로도 궁금하지만 한편으론 이 한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국제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 책은 스리체어스가 '북저널리즘'이라는 사회과학 시리즈물로 지난 2019년 8월 출간되었습니다.

우선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이 책의 주된 관점을 간략히 소개해 드리자면 오늘날까지의 미중 관계에 있어서 특히 금융과 통화 및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인식과 갈등 등을 중점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혹여 군사나 대외적인 측면에서의 해석을 기대하신 분들이라면 이 점을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최근에 칭화대의 옌쉐퉁이 자신의 글인 '2023'을 통해 중국이 미국의 경제 규모를 추월하는 2023년 이후부터가 본격적인 미중 관계의 시발점이 될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분명 대학 강단에 있는 많은 중국 지식인들이 1997년 이후 가파르게 상승한 자신들의 경제 발전을 기반으로 아주 큰 자신감을 가졌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조슈아 쿠퍼 레이모의 '베이징 컨센서스'를 떠올려 보기도 합니다만 한가지 확실한 점은 중국 경제의 발전이 미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적 질서와 세계화에 기반해 얻은 이익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미국의 역할론을 절대 무시할 수가 없을텐데요. 저자가 1부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미국은 막대한 쌍둥이 적자를 자의반 타의반 감내하면서 과거 일본과 대만 그리고 한국에 제공했던 것처럼 자국의 시장을 중국에 개방한 결과물로서 중국의 번영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질서가 중국 뿐만 아니라 미국에게도 이익이 되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다만, 미국과 중국의 경제 갈등의 주요한 원인으로 분석되고 있는 "수출 달러의 환류 메커니즘"이 여실히 양면성을 띠고 있었으며, 중국과 일본 등의 동아시아 국가들이 미국에서 막대한 무역 흑자를 거두면서도 바로 이 수출 달러를 미국에 재투자 하는 등의 순환구조가 무조건적으로 미국에게 해가 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는데요. 미국은 다른 여타 국가들과는 달리 외환 보유고를 유지하고 관리할 필요가 없는 유일한 국가입니다. 즉, 이러한 경제적 현실은 2006년부터 일정 부분 미국과 미국인들의 과도하고 방만한 신용 생활을 초래한 원인이었으며, 이것을 아직도 "중국의 막대한 저축과 그로 인한 미국의 자본 수출"로 세계 금융 위기의 원인을 찾는 미국 내의 경제학자들이 여전히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저자는 이 막대한 저축과 자본 수출에 대해 일반적으로 개관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만 글의 구조를 보았을 때, 2008년의 세계 금융 위기가 순전히 중국의 자본 수출에 있었다고 다소간 오해할 소지는 충분히 있어 보였습니다. 엄밀히 따지자면 당시 미국의 거대한 거품은 신용 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신용 기관에 일차적 책임이 있고 더불어 주택 시장의 거품을 이용해 호주머니를 채우려 했던 각 투자 은행들의 면밀한 주도적 행위에 있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자신들이 스스로 반성을 하지 않고 그 반성을 중국에게 미루는 행위는 외환 보유고 따위는 신경쓰지 않을 정도의 강력한 메리트를 보유한 국가기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다만, 동아시아 국가들의 이 수출 달러 환류가 지속되지 않았다면 미국 시장 내부에서 건전성을 찾기 위해 일말의 노력을 기울였을 수도 있겠으나, 이미 폴 보커 시기 이후부터 막대한 통화 발행을 거침없이 해왔던 미국으로서는 그저 가정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1984년의 일본과 2009년의 중국에게 그들의 통화를 절상 시키라고 강력하게 요구했던 것은 헤외에 존재하는 막대한 달러들에 대한 통제력을 손에 넣기 위한 방편이었음은 이미 익히 드러난 바가 있습니다.

저자는 양국간의 이러한 경제적 혹은 금융 흐름의 과정에서 중국이 자신들의 통화에 대한 관리권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노력과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보는 미국 당국의 대결이 트럼프를 통해 확산되었다고 보는 듯 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는 미국 우선주의와 배타적인 외교 관계를 기반으로 일본과 한국 그리고 독일과 같은 동맹 관계에도 균열을 만든 인물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도널드 트럼프의 패착 가운데 가장 큰 사건을 "미국의 TPP 탈퇴"를 꼽고 싶은데요. 중국이 미국의 이러한 아시아 지역에서의 대외정책 수정으로 이득을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가지 분명한 점은 동남아시아와 동아시아 내의 '경제는 중국 안보는 미국'이라는 이원화 된 대외 정책의 기조가 더욱 강화된 측면이 있으며, 이미 중국 경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아세안 국가들이 중국의 남중국해 농단에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못한 연유에 이 TPP 탈퇴가 어느 정도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트럼프의 전임 정부였던 오바마 행정부의 이 아시아로부터의 회귀 Pivot to Asia 는 일정 부분 대만 문제와 해당 지역의 균형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으나, 이를 트럼프가 상당 부분 철회함으로써 오늘날의 대만 해협의 불안정성과 같은 문제가 초래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미국은 중국의 고삐를 어느 정도 조일 수 있었지만 중국의 일대일로에 따른 AIIB와 관련된 무력한 외교를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앞으로의 미중 관계에 있어서 많은 전문가들이 그동안 중국의 대두에 따른 미국의 패권 약화를 점찍었지만 아직도 미국이 끼치는 영향력은 지대한 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역외 균형 전략 Offshore Balancing 에 따라 스스로를 아시아 태평양 국가로 여기는 미국이 중국의 지역 패권국에 오르는 것을 넋놓고 수수방관하게 될 것이라는 일부의 예측은 그저 상상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저자는 동아시아 지역에 한해 중국이 미국을 대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해석을 내리고 있습니다만 우리와 일본은 말할것도 없고 대만과 필리핀 또한 중국의 대두를 원천적으로 바라지 않는 상황입니다. 안보와 경제를 중국이 미국을 대신한다? 이는 있어서는 안되고 일어나서도 안되는 일이죠. 사실 저는 그동안 미국의 외교와 정치를 비판하는 입장에 섰습니다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중국 공산당이 통치하는 중국이 민주주의 국가들의 국가 이익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저 독재국가가 감히 민주주의 국가들을 제 영향권에 두려한다는 것 자체가 아무리 국가 체제론에 입각해 고려해 본다 하더라도 가능성이 희박한 예측이라고 생각됩니다. 더군다나 미국이 한국과 일본을 포기하고 얻을 수 있는 국익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혀두고 싶습니다. 더불어 중국의 대만에 대한 무력 점령 조차도 미국이 용인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마당에 중국에 대한 주변국들의 원초적이 거부감을 쉽게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국익은 자신이 먼저 안정적으로 국체를 보존할 수 있어야 그 이후 달성될 수 있는 문제인 것입니다. 물론 직접적인 미중 대결을 저로서도 원치는 않습니다만 현재의 질서를 타파해야만 자신들의 이익을 확보할 수 있는 중국의 입장에서는 앞으로의 10년이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시기임인 거의 분명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동아시아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을 고려했을 때, 동아시아 지역에서 동맹 관계의 청산이나 미군 철수 같은 극단적인 시나리오가 현실화 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

기축통화 발행국인 미국은 외환 보유의 부담에서 자유로웠고, 상당한 규모의 국제 수지 적자가 발생해도 긴축 정책을 시행하지 않을 수 있었다

적자로 인한 달러 가치 하락이나 인플레이션 등의 비용을 다른 국가와 분담하거나, 다른 국가에 전가하면서 국제 정치경제 질서를 불안정하게 하고 자국의 이익을 추구한 것이다

달러가 기축통화 지위를 유자하는 한 미국은 인플레이션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필요에 따라 통화 발행량을 증가시키고 외환 보유의 제약 없이 국제 수지 적자를 누적할 수 있었다.

미국이 동아시아로부터 상품을 수입하고 그 대가로 달러를 지불하면, 동아시아 국가들이 그 달러를 다시 미국의 금융 시장에 투자하는 수출 달러 환류가 미국의 통화 금융 권력이 유지되는 핵심 메커니즘이 됐다

그런 점에서 중국은 미국 중심의 국제 정치경제 질서하에서 발전을 도모한 서독이나 일본, 동아시아 신흥 공업국들과 달리 국제 관계에서 근본적인 힘의 이동을 일으킬 수 있는 중요한 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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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6-24 14: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중간의 역학관계를 잘 알면, 미중일한 유럽을 넘어 전세계적인 흐름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좋은 책 소개 감사드립니다~

베터라이프 2021-06-24 16:31   좋아요 1 | URL
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전세계 코로나 때문에 여러 대결 구도와 맞물려 미중간의 관계 재설정이 초미의 관심사죠. 부디 이들이 평화롭게 정리되길 바라지만 걱정이네요. 좋은 하루 되세요!
 
국가 의무의 한계
허버트 스펜서 지음, 이상률 옮김 / 이른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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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프랑스 백과전서의 디드로와 약간 다른 성격이지만 19세기의 허버트 스펜서 역시 다방면의 학문을 섭렵하여 당시 다양한 주제의 접근을 통한 학문 기여에 이바지 한 사람입니다. 이에 위키 백과에서는 20세기에 그와 견줄 수 있는 사람을 버틀란드 러셀이라 규정하고 있기도 한데요. 후자인 버틀란드 러셀의 명성을 고려했을 때, 이와 견주게 되는 스펜서의 학문적 성과를 과소 평가하기에는 어려운 측면이 있는 것도 분명 사실입니다. 다만, 스펜서는 생물학적인 다윈주의에 심취해 이를 바탕으로 사회학에서의 ‘약육강식‘을 옹호했고 사회적으로 약자에 위치해 있는 다수의 사람들을 사실상 도태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한 인물로 악명이 높기도 한데요. 특히 애덤 스미스와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자들에게 대거 인용됨으로써 스펜서 본인에게는 다소 억울한 측면이 있다는 점도 언급하려 합니다. 따라서, 지금 소개할 이 책은 허버트 스펜서가 집필한 ‘윤리학 원리‘의 국가론 부분을 발췌 편집해 후에 놓은 그의 논문인 자발적 개혁을 함께 실어 국내에서 편역한 논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즉, 영국이나 미국에 따로 원전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고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임의로 만들어진 복잡한 편역본이 국내에 출시된는 것처럼 비슷한 맥락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아마도 역자 역시 국내에서 스펜서가 상당한 악명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를 특별히 옹호하기 위해서 스펜서가 자유방임주의자 보다는 ‘자유주의자‘에 가깝다고 평가를 하고 있기도 한데요. 사실 18세기의 계몽적인 자유주의의 전통을 고려한다면 일반적인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마땅히 보장받게 하기 위한 일련의 지식인들의 활동은 충분히 존경을 받을 만한 일이기도 합니다. 18세기를 거쳐 19세기에 이르러 당시 유럽이 큰 변화의 길목에 있었던 것은 분명하며, 스펜서가 이 글에서 자주 언급하고 있듯이 ‘산업개발‘에 따른 국가사회적 패러다임의 변화가 소위 ˝수요와 공급에 따른 자연스런 이익 활동을 인위적으로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기까지 합니다. 스펜서는 아마도 시장의 이러한 활동 구조 자체가 흡사 자연 상태의 규칙과도 일맥상통한다고 여겼던 듯 싶은데요. 전반적으로 자유주의자들이 이러한 관념을 바탕으로 20세기에 넘어와 시장 자유에 대한 강력한 옹호를 내비쳤으며, 이것은 후에 신자유주의자들의 사상적 기반이 되기도 합니다. 물론 이 지점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사상적 토대 혹은 사상적 기반‘이라는 맥락으로 어떤 검증을 하고 싶지는 않은데요. 사실 스펜서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 ‘공정한 사회 질서‘를 기반으로 ‘동등 자유의 법칙‘을 이 글에서 광범위하게 논증하고 있지만 신자유주의가 과연 저런 맥락에 맞는 사조인지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터무니 없는 비교라고 이해하실 수 있을겁니다. 즉, 이러한 스펜서에 대한 맹목적인 신자유주의자들의 인용은 마찬가지로 애덤 스미스의 사례와 유사하게 본인에게는 다소 억울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우선, 글의 초입부터 스펜서는 ˝동등 자유의 법칙˝을 논하면서 모든 개인들의 공정한 자유, 권리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진짜 이 얼마나 아름다운 주장입니까. 다만, 경제학의 기조 자체가 신자유주의적 논법으로 강화된 현재의 우리 상황은 스펜서의 저 주장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더 많은 자원을 가진 부유층과 기득권들의 자유가 어찌 일반 시민들의 자유와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더욱이 저들은 능력주의의 강화라는 일환으로 자신들이 더 많은 자원을 갖게 된 연유에 이론적인 방호막까지 갖추지 않았습니까. 능력주의의 인식적 기반에 따르면 개인의 성공 여부는 오로지 각 개인들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며, 그것은 정말로 성스럽고 진정한 사회의 진보라고 믿고 있는 자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시 원전으로 돌아가서 이 동등 자유의 법칙을 생각해보면 당시의 스펜서는 이 동등한 자유를 해치는 원인을 아마도 국가라는 개념에 두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즉, 공화주의 정부라 할지라도 국가가 전쟁에 돌입하게 될 경우 이런 개인들의 자유가 심각하게 훼손될 가능성이 있으며, 이 전쟁의 상태를 최종적으로 결정하게 되는 것이 국가이기 때문에 국가가 본연의 사회와 시민을 보호하는 기본의 의무를 떠나서 전쟁 상황을 지속하는 것 자체가 개인의 자유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여겼던 듯 싶습니다.

따라서, 스펜서는 국가의 기본적인 목적은 ˝그 구성단위들의 복리˝로서 강조하기에 이르는데요. 이것은 ˝모든 사람이 정치 권력을 소유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정의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연계되면서 그와같이 인식되는 것에 저로서는 크게 반대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스펜서 역시 이미 사회구조상 권력의 차이를 깊이 인식하고 있었고 그가 앞으로의 산업 개발 시대를 다소 예측하면서도 시장 지배의 관념과 부의 편중을 미리 감안하지 못한 것은 그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국가의 문제를 너무 과대평가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더욱이 19세기 이후에 그가 말하는 완전한 산업 개발 시대로 유럽이 진행되지 않고 오히려 전쟁의 명분만을 찾는 제국주의 시대를 맞이하게 됨으로써, 그가 그토록 경고했던 국가의 전쟁 행위가 반대로 제국주의 시대에 무차별적으로 발생한 것은 너무 극심한 국가 체제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물론 스펜서는 이러한 국가론에 대한 홉스의 소극적 인용을 통해 국가 자체의 비효율성과 군대를 유지하기 위한 비용에 따른 낭비를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있기도 한데요. 물론 기본적인 비용의 활용 측면에서 전쟁의 수행 보다는 자신이 피력하고 있는 동등 자유의 법칙을 위해 쓰이는 것이 논증으로 보아 설득력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앞서 제가 언급한바대로 이 산업 개발의 잉여 생산품의 문제가 결국 제국주의의 총구를 앞당긴 결과로 나타난 점은 그도 미처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라 봐야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일반적인 스펜서의 정치 인식 역시, ˝정치인의 목적은 일반적으로 시민이 그의 소득에서의 공제를 부분적으로든 전체적으로든 의식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세금을 거두는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후에 이러한 주장의 기반은 ˝각각의 시민은 살고 싶어하며, 그 것의 환경이 허용하는 한 충분하게 살고 싶어한다˝는 3장의 인식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그는 정치 자체가 세금 징수가 얼마나 저항 없이 혹은 전혀 생각지도 않을 정도로 시민들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행해질 수 있느냐에 정치의 정당성이 달려 있다 여기고 있으며 이것을 국가로 확대해서 분석해 보면 국가가 시민의 권리와 자유를 보호하는 이외의 비용 청구를 시민들에게 할 수 없다는 식으로 해설될 만한 여지가 있었습니다. 국가가 너무나 낭비하는 비용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스펜서는 일관되게 하고 있었는데요. 국가를 온존시키는 사회계약적 측면에서 아무리 그 존재의 필요성이 최소한의 목적이라고 할지라도 국가 자체가 효율적인 측면으로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 오늘날의 광범위한 인식이기도 합니다. 이를 무슨 복지 국가의 논법이라고 비판하는 자들조차도 현대의 국가 개념은 너무나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시민 각자가 환경이 허용하는 한 충분히 살고 싶어한다는 앞선 주장의 핵심은 ˝모두가 각자를 위해 지켜야 한다˝는 주요 맥락과 더불어 국가의 존재 필요성은 큰 틀에서 옹호될 수 있도록 반증되는 것으로 해석되었습니다. 스펜서가 국가의 비효율적인 측면과 무리한 전쟁 행위 자체에만 요점을 두고 이를 비판하면 비판할 수록 국가의 필요성은 다른 측면에서 강조되는 것과 유사한 논리 체계가 진행된다고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스펜서는 사회 진화의 측면에서 국가 스스로가 호전성이 쇠퇴하고 산업주의가 상승하게 되면 수많은 계약 체제가 성립됨으로써 긍정적이 변화를 초래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기도 한데요. 많은 시민의 결사체와 같은 인식을 통해 시민들이 스스로의 자결권을 얻게 된다는 점은 충분히 공감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국가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오히려 시민들이 각자의 의회에 호소하고 단체를 결성해 일종의 압력 단체 수준으로 진보하게 된다면 이것 자체가 스펜서가 옹호하는 시민사회적 기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한가지 제가 동의하기 힘들었던 부분은 노동자들의 이익 단체화에 대해선 사실상 그는 반대하고 있었으며, 당시의 노동자들의 궤멸적인 주장이라고 수식되는 일련의 행동들이 사회주의에 물들은 파괴적인 사상으로 이해하고 있는 점은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이를 조금 소급해 이해해 본다면 스펜서는 노동의 문제 자체가 시장의 문제이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이를 의회에 호소해서는 안된다고 보는 듯 했습니다. 즉, 스펜서의 일관된 정치 영영의 한계 짓기는 이처럼 위험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가 신자유주의자들에게 이용을 당하는 것은 분명 억울한 측면이 있다는 점은 확실하지만 18세기의 자유주의적인 분위기가 그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과학 진보와 인간 삶의 전반적인 향상 등) 주장과 논증이 이상하게 상반되는 부분도 많아서 오해와 원용의 괴리가 크다는 점을 여기에서 밝혀두고 싶습니다.

최종적으로 스펜서가 인식하고 있는 국가론은 실제로 다음과 같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국가가 수행하는 그 밖의 활동 중에서 한 가지 종류는 몇몇 개인들의 자유를 다른 개인들의 동일한 자유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제약하는 활동 항목에 들어간˝다는 주장에 함축적으로 담겨 있습니다. 이 동등 자유의 법칙에 따른 맥락은 다음에 ˝공공 지출로 얻게 되는 이익이 세금을 내는 모든 이들 사이에 골고루 분배된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이익이 공정한 사회 질서라는 근본적인 원칙과 모순된다는 것˝의 인식도 그가 주장하는 공정한 질서가 무엇인지 깨닫게 합니다. 그래서 아마도 6장 후반부에서 ˝동정심으로 인해 만일 우리 자신이 겉보기 만의 ‘사건의 시비곡직‘이라는 틀의 위험성˝을 강조하게 된 것은 그가 말하는 공정의 의미가 어떤건지 다시금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사회진화론의 논법은 실로 비인간적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이것은 능력주의의 해악보다도 더 심대한 것이며 사실상 사회 전부를 파편화 시키는데 이바지하는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더 논의해 볼 문제겠지만 ‘복지 국가 혹은 사회 부조‘에 대한 전반적인 이 사회진화론의 공격은 시민들을 오도하고 체제 전반을 간편하고 손쉬운 쪽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의도를 갖고 있습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공익에 대한 반대와 공격 그리고 부조에 대한 몰이해를 양산시켜 시민들 스스로가 이를 공격하게 하는 데 이바지해 왔습니다.

끝으로, 역자의 스펜서에 대한 약간의 다시 읽기와 다소 주장과 근거가 상충되는 스펜서의 논법들이 그를 일정부분 오해할 가능성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다만, 그는 사회진화론에 심취한 인물이었으며, 그런 토대로 진행된 결과물이 ‘엄연한 사회 진보‘라고 인식했으며 그것이 설사 개인들의 자유와 권리의 맥락이라는 절묘한 길에 놓여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국가와 개인의 논법으로 인식된 연계였으며 따라서 그런 한계는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의 많은 시민들은 분명하게 사회 부조에 대해 긍정하고 있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함의 역시 분명한 형태의 주장으로 일관되어 왔습니다. 즉, 사회가 모두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지 않으면 그 사회의 파편화는 실로 위험할 수준으로 진행되는 것이며, 이를 시민들이 망각하게 된다면 사실상 사회 전반이 ‘엘리트 과두제‘에 진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고도화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데 왜냐하면 시장 경제에 대한 우월적인 예외를 주장하는 신자유주의가 이미 국가 전반을 거리낌없이 주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삼 대니 로드릭이 말하는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동침의 한계가 결국 파국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개인의 생명과 활동이 지속될 수 있는 조건을 유지하는 것이 최고의 목적이다

모든 사람이 정치 권력을 소유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정의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정부를 원시적인 유형의 군사독재로 변형시키는 게 필요한 것은 계속되는 전쟁뿐이다

실제로 공정한 제도의 성공적인 확립고 그 타당성을 증명하기 전에는 조롱 받는 것처럼 말이다

각각의 시민은 살고 싶어하며, 그것도 그의 환경이 허용하는 한 충분하게 살고 싶어 한다

국가의 통제력이 제한된 영역안에서만 올바르게 행사될 수 있다는 학설은 완전히 발전된 평화로운 산업 사회 유형에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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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 커뮤니케이션 이해총서
정병기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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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정치학과 사회학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영남대학교 정병기 교수는 한국에서는 드물게 포퓰리즘 연구를 해오고 있는 학자이기도 합니다. 더불어 그는 문학에 있어서도 시집을 발표하는 등 꽤 다방면의 활동을 지속해오고 있습니다.

우선 이 책은 전반적인 포퓰리즘 정치에 대한 꽤 원론적인 개론서라 할 수 있겠는데요. 1980년대 이래로 포퓰리즘을 연구한 해외 학자에 대한 연구 결과도 요약해서 친절히 소개하는 등의 일반 독자들에도 꽤 유익한 글이라 생각됩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동안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던 ‘포퓰리즘‘과 ‘포퓰러리즘‘에 대해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크게 도움을 받았습니다. 제가 그동안 포퓰리즘에 대한 서평을 많이 썼기에, 다른 서평에서 별다른 비판없이 포퓰리즘을 ‘대중 인기 영합주의‘로 써왔던 점은 저의 큰 오류라고 생각됩니다.

카스 무데는 ‘혐오와 차별은 어떻게 정치가 되는가‘에서 현재 유럽의 극우 포퓰리즘이 어떻게 좌절한 수많은 시민들에게 파고 들었는지 설명하고 있었는데요. 마찬가지로 이 글에서도 포퓰리즘이 이데올로기적으로 견고하지 않은 약한 측면을 갖고 있어서 민족주의와 인종 혐오, 배외주의 등에 숱하게 결합하는 등의 일종의 그 폐해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자는 따로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만 포퓰리즘 자체를 사회학 내에서의 고정되고 인식되는 학문의 범주로 넣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 그동안 많은 논의가 있어 왔는데요. 포퓰리즘 현상 자체가 학자들 사이에서 잘 규명이 되지 않았고 ‘시민 대 엘리트 기득권 정치‘를 구도로 거의 기존의 정치 체제를 불신하는 등의 파행적 언행들이 흡사 반정치의 논법과도 유사해 보였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최근의 이 포퓰리즘 정치는 이 글 3부에서 논의되고 있는 바와 같이 소위 이들 정치 세력이 집권에 성공하게 되면 기존의 정치적 입장은 사라지고 체제에 대한 대부분의 강경 발언이 사라진다는 점은 포퓰리즘 정치를 현격한 정치 현상으로 인정해야 될지 다소 명확하지 않은 부분도 있다 생각됩니다. 예를들어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는 백악관에 입성하기 전까지는 그토록 현 체제와 엘리트 기득권에 대한 맹렬한 공격을 해댔으나 그가 기존 시스템에 들어와서는 특별히 엘리트들과 각을 세운일이 없었다는 것은 이를 잘 반증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뿐만 아니라 트럼프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자신의 확실한 의견을 피력한 바가 없었고 임기 중에는 오히려 월스트리트와 별 문제없이 잘 지내왔다는 점에서 이 포퓰리즘적 정치인들은 오로지 권력 획득을 위한 수단으로서 ‘민주주의‘와 시민들을 이용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 포퓰리즘 정치를 극복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범은 시민들이 이들에 대한 엄격한 분별력을 갖추는 것 일 텐데요. 그러므로 토크빌과 듀이의 경고는 이처럼 중요한 맥락으로 다가온다 여겨집니다.

또한, 4부에서도 유럽의 극우 포퓰리즘이 인종적 선동과 혐오를 방관하고 오히려 부추기고 있는데 비슷한 역사와 보편성을 띠는 동일 민족의 민주주의적 함의가 중요하다고 인식한 유발 하라리의 입장을 차치하더라도 비슷한 시기에 유럽에 유입된 이슬람인들의 노동력을 시의적절하게 이용해 왔으면서도 이제는 다른 말을 하는 정치인들의 논법은 유럽의 합리주의와는 거리가 먼 발언일 텐데요. 이슬람 이주민들 자체가 유럽 산업에서 단물만 빤 것이 아니라 이들이 유럽인들 대부분이 기피하는 산업 노동에 기여한 것은 분명하며,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등의 이중적 행태를 스스로 돌아보지도 않고 종교 갈등, 민족적 차이 등만을 내세워 사회의 불안심리를 더욱 자극하는 것은 이 극우 포퓰리즘을 과연 정치의 카테고리로 편입시켜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회의를 느끼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파시즘을 인정하고 배려해야할 대상으로 여길 수 없는 것과 동일한 기준이라 첨언드리고 싶습니다.

보수주의가 관련된 시장 자유의 논법과 관련해 저자는 객관적인 논법으로 신자유주의적 포퓰리즘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요. 보수주의가 일찍이 자본주의와 화합한 것은 일전에도 언급했습니다만 ‘보수주의-신자유주의-기득권 정치‘가 견고하게 결합되어 직간접적으로 그동안 대의 민주주의의 훼손을 초래한 것은 분명하며, 이에 부역하는 수많은 지식인들이 시민은 전문 관료와 지식 엘리트들의 전문성을 굳게 신뢰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목에 핏대를 세워 강조해왔습니다. 이러한 전반적인 흐름 자체가 기존의 시민들의 정치 불신과 맞물려 자본주의 하에서 엘리트 지배체제가 의심을 받아왔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똑똑하고 대단한 경력의 엘리트주의가 유능하지 않고 무능할 수 있다는 불신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따라서 대의 민주주의 건전성은 시민들의 건전한 참여가 뒷받침 되어야 하며, 엘리트 지배 체제가 민주 정치의 일부분을 떠안으면서 ˝너희들은 스스로의 생업에만 중시해라. 그리고 다소 생활 여건이 힘들더라도 참아보도록 해라˝라는 대책없는 요구를 시민들에게 무차별적으로 강요해 왔던 것은 분명합니다. 바로 이 부분의 역할을 신자유주의가 주도적으로 맡았던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글 초입에 저자는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의 그림자˝라는 캐노밴의 주장을 인용하는데요. 저는 미처 글을 다 읽지 않고 저자에 대해 분통을 터트릴 뻔 했습니다. 이후에 포퓰리즘은 사실상 민주주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저의 성질 급함을 반성하였는데요. 이처럼 포퓰리즘이 아무리 민주주의를 신물나게 강조한다 하더라도 이들은 이 민주주의와 전혀 닮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4부에서 ˝포퓰리스트의 성격이 주요 고객인 시민의 상태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언급되는 것은 이를 잘 반증한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보수에 있는 정치인이든 진보에 있는 정치인이든 일정 부분 시민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이를 완벽하게 부인하기란 어려울 것입니다. 스스로 각자의 대의를 주장하지만 현실 정치에서는 정치인들 스스로 여러 갈래로 얽혀 있는 사익을 절대 거스를 수 없다는 점에서 이는 현대 민주주의의 명확한 한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신자유주의가 이렇게 정치인들의 가려운 곳을 적극적으로 긁어 주었으나, 그 반대급부로 저들이 가져간 것은 시장에서의 민주 정치였습니다. 우리의 대의 민주주의가 쇠퇴한 것은 이들 직업 정치인들에 의해 왜곡된 것이 거의 절반 이상의 책임을 갖고 있으며, 이를 반대로 시민들의 마땅한 정치 관심의 결여라고 반론을 펼치는 자들은 거의 회색분자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대의 민주주의 하에서 시민들의 정치 참여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나 그 기반을 이렇게나 왜곡 시킨 것은 생산성이 없는 이데올로기 싸움 자체가 아니라 전문적인 직업 정치인들이 자신의 권력을 위해 시민들을 이용만 했던 것에 크게 기인합니다. 영민하고 머리가 잘돌아가는 정치인들이 대의 민주주의의 맹점을 파고들어 이러한 정치적 불신을 조장한 것은 부정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포퓰리즘은 바로 이러한 맥락 가운데 등장한 반정치의 냉엄한 현실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현재의 포퓰리즘이 우려스러운 것은 끝내 파시즘을 다시 정치 무대에 등장시킬 가능성이 있기 때문일겁니다.

엘리트들에 대한 포퓰리스트들의 공격은 정치 엘리트에 국한되지 않는다. 경제 체제를 장악하고 있는 경제 엘리트와 학계 및 언론 엘리트를 포함한 지식 엘리트도 중요한 공격 대상이 되며, 이들의 무능, 탐욕, 부패의 피해자인 나머지 인민을 이들과 구별한다

하지만 이들의 논리에는 국적이나 인종의 문제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따른 사회적 열패자라는 점이 핵심적 근거로 제시된다

포퓰리스트들은 기득권 질서에 반발해 침묵하는 대중을 동원하지만, 자신들이 현실 정치에 직접 참여하는 것은 회피하는 언술을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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