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와 맞서 싸우기 위해 - 파시즘과 인문주의에 관하여
롭 리멘 지음, 조은혜 옮김 / 오월의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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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의 유명한 공공지식인이자 참여지식인인 롭 리멘 (혹은 리먼, 리에멘)은 네덜란드 노르트브라반트주에 있는 사회과학 명문 틸뷔르흐 대학을 거쳐 현시대의 ‘인문주의의 위기‘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는 인물인데요. 그는 네덜란드 내에서도 손꼽히는 토마스 만 연구자이며, 소위 ‘유럽 정신의 회복‘이라는 주제에 대해 많은 강연을 펼치고 있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미국을 비롯한 여러 대륙에서 그의 강의를 요청하고 있기도 한데요. 확실히 그는 강단 지식인이 아니라 사회 참여적인 지식인이라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또한, 인문주의 잡지 ‘넥서스‘를 창간했고, 뒤이어 동명의 ‘넥서스 연구소‘를 창립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그가 평생을 거쳐 집중한 주제는 ‘인간의 삶은 무엇인가‘에 집약되어 있다고 봐야할 텐데요. 이 책의 2부에서도 그러한 그의 노력이 잘 정리되어 있기도 합니다. 이렇게 두 편의 인문학적 에세이를 합쳐 출간한 이 글은, 원제 ˝To Fight This Age : On Fascism and Humanism˝으로 2018년에 나왔으며, 국내에는 2020년 10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간략하게 이 책의 제목이 뜻하는 바를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그것은 ‘극우 포퓰리즘이 도래한 현재의 유럽이 직면한 시대˝를 인간의 힘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취지인데요. 앞선 극우 포퓰리즘은 파시즘과 매우 가깝다는 측면에서 이 글의 맥락은 전후 유럽인들이 과거 파시즘에서 과연 어떠한 교훈을 얻었는가?로 귀결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또한, 1장에서 보여지는 수많은 정치적 수사와 인문학적인 방법론 그리고 파시즘에 대한 고찰은 여타 어느 글보다 강한 흡인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장 하나하나가 너무나 생생해서 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책이라 여겨지기도 합니다. 반대로 어쩌면 많은 분들이 현재의 유럽이 그 정도로 심각한 위기의 시점이냐 반문하실 수 있겠는데요. 1장에서 논증되는 가운데 특히, 저자는 1940년대 초반의 유럽의 ‘반유대주의‘와 현재의 ‘반이슬람주의‘를 같이 비교하며, ‘증오의 정치‘,‘대적의 정치‘가 히틀러의 그것과 지금의 극우 포퓰리즘과 매우 유사하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사실 많은 지식인들에 의해 이 극우 포퓰리즘과 파시즘이 어떠한 유사적 관계가 있을 것인가에 대해 수많은 토론과 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20세기 후반의 공산주의권의 몰락으로 극우 이념이 대척점을 잃어버렸다는 식의 허무맹랑한 관점부터 자유와 민주주의를 입아프게 강조하는 선동 정치인들이 사실상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단으로만 삼는 정치적 행위에 대해 꼬집는 주장들도 있었는데요. 저자인 리멘 역시, 토마스 만의 연설을 인용하며 이렇게 답합니다. ˝제게 여러분에게 완전한 진리를 말해드리죠. 만일 파시즘이 미국으로 온다면 그것은 자유의 이름으로 올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얼마전에 서평을 쓴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재인식을 리멘의 이 글을 통해 발견할 수 있었던 점이 성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이 가세트에 대해 꽤나 엘리트주의적이고 반대중적인 지식인이라는 틀을 갖고 있었는데요. 아도르노를 이 가세트에게 갖다 붙일 수는 없겠지만, 한 가지 유의미하게 받아들일만한 점은 가세트가 민주주주의 쇠락을 바라지는 않았다는 점입니다. 지금도 약간의 거부감을 갖고 있는 단어 ‘대중 민주주의‘가 거의 같은 맥락으로 ‘군중 민주주의‘와 그 함의가 공통적인 것은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2장에서 토마스 만의 입을 빌어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교육‘이라는 점이 유독 제 시선을 끄는 것은 앞선 연유 때문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자인 리멘 역시 현재의 고도로 교육받은 많은 시민들이 이 포퓰리즘에 노출되어 있는 상황이 아마도 토크빌이 강조한 스스로에 대한 교육이 부족한 이유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회학자들에 의해 강조되는 ‘특별한 변별력‘이 우리 시민들에게 부족한 것은 확실합니다. 바로 그러한 관점에서 ˝무지 ignorance 야 말로 대중민주주의에서 파시즘이 이렇게 쉽게 회귀하는 주된 이유다˝라고 말하는 부분과 마찬가지로 ˝우리 시대에 거짓말은 예술의 경지에 도달할 정도로 발달했고 단어의 의미는 늘 왜곡되기 때문이다˝는 주장은 정말 제 뇌리에 박힐 정도였습니다. 여기에 좀 더 첨언한다면, 이 대중들을 선동하는 정치인들, 언론인들 및 지식인들은 ˝모든 진실을 밝히지 않고 그 중에 한 두가지만 전하는 것으로 그 목적을 다하는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다만, 리멘은 현재의 엘리트 계층이 사회적 책임감을 상실하고 오로지 돈을 많이 버는 것에만 집중해, 과거 유럽의 계몽주의적 전통이 상실되는 상황을 스스로 획책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기도 한데요. 엘리트들에 대한 수사가 과격하다고 느끼실지 모르겠지만 신자유주의 하에서 상위 계층에 대한 인식은 거의 이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이것은 현재의 사회경제적 토대가 자신들에게 얼마나 이득이 될 것인가에 집중하는 분위기를 반영한다 볼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이 전반적인 ‘경제적 효용감‘에 대해 뒤에 2장에서 다루고 있기도 한데요. ˝오로지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 그것은 바로 경제적 효용감˝이라는 진술은 현 시대가 어떠한 상황인지 명백하게 보여주는 문장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자유 시장이 사회 붕괴로 이어질 것˝이라는 칼 폴라니의 해석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엘리트들의 스스로의 궤멸적 변용‘과 더불어 사회 전반의 문제에 대해 자신들의 문제가 아니라는 식의 인식은 1943년의 독일 엘리트들의 정신 구조와 매우 유사합니다. 더군다나 2장에서 줄곧 비판되고 있는 정치 엘리트들의 그 만연한 아둔함은 자신들 뿐만 아니라 국가와 사회 전체를 망국으로 이끌었다는 점에서도 의미 심장한데요. 우리는 그동안 소위 대중민주주의를 통한 선동 정치인들의 사적 이익에 따라 아무런 대안도 없이 사회가 깃발 하나로 모이게 되는 것을 2010년 이후 유럽에서도 목격한 바가 있습니다. 여기에 리멘은 자신의 모국인 네덜란드의 상황도 마찬가지라고 일침하는데요.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이 사회적 모순과 경제적 불평등의 분노를 엉뚱한 대상들에게 표출하게 만드는 극우 포퓰리즘이 과연 민주주의를 어떻게 절망에 빠트리게 될지에 대해 무슨 묵시록과 같은 허무맹랑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코로나 사태로 말미암아 아예 ‘새로운 시대‘가 펼쳐질 것으로 경고하고 있는 많은 사회학자들의 외침을 우리 또한 경청해야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이는 한나 아렌트 역시 가까운 미국 사회에 벌어질 일들이라는 정치적 분석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이 포퓰리즘에 매우 취약해 훗날 제 2차 파시즘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은 중요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진행되는 저의 진술과는 약간 논외지만, ‘포퓰리즘이 민주주의의 사생아‘라는 거친 표현에 대해 지극히 반대합니다. 이에 2장에서 저자는 현재의 유럽은 ‘영혼 돌봄‘이라는 계몽주의를 즉시 회복할 필요가 있으며, ˝우리의 민주주의는 자유와 참정권, 표현의 자유, 법치, 인권˝으로 측정되기 때문에 극렬한 민족주의와 함께 포퓰리즘과 파시즘은 명백하게 민주주의와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들을 민주주의의 사생아라고 말하는 것과 민주주의가 스스로 자살을 꿈꾸기 때문에 대적자로 탄생한 것이라는 이 비웃음들은 시민들이 더욱 더 민주주의를 포기하고 체념하게 만드는 꽤 면밀한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대에 민주주의자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많지만, 껍데기만 그런 자들이 대다수인 시대˝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입니다. 지금도 저는 로버트 달에게 의문을 갖는 부분이라면 과연 그가 다원주의를 신봉하면서도 저런 자들까지 포용해야만 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요청일 것인가에 대한 한가닥의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고 고백하겠습니다. 물론 슈미트 식의 정치적 이분법에 대해서는 반대하지만, 시민들이 이상적인 분별력을 발휘해 스스로의 힘으로 저런 반정치를 몰아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얼마간의 불안감을 갖게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시민들의 역할과 가능성을 제가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식인들과 언론인들이 스스로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정치적 바람막이가 전무하다는 현실은 그저 회의적인 분위기를 양산할 따름입니다. 따라서 대중민주주의가 아니라 시민민주주의가 되기 위해서 이제는 정말 역할을 다해야 될 시점임은 매우 분명해 보입니다.

또한, 저자는 이 선동 정치인들에 대한 귀중한 인식을 제공하는데요. 이들 선동가들이 실상 다수의 시민들의 삶에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약자에 위치한 사람들의 삶에도 하등 관심이 없다는 진술인데요. 여기에는 자신들의 권력에만 맹목적으로 반응하는 엘리트들의 배신 또한 한 몫을 하고 있다고 판단합니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에 있어서 우리가 비즈니스 엘리트들에게 버림 받았다˝고 강조하는 것은 경제적 효용성을 제일 가치로 삼은 저들의 폐쇄성과 그외에는 하등 관심이 없다는 저들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것으로 볼 수 있을텐데요. 저는 진지하게 이 ˝보이지 않는 손˝이 모든 이들의 삶에 도움이 될 것인가에 대해 일찍부터 깊은 회의를 갖고 있었습니다. 애초에 다른 식으로 해석되고 왜곡된 이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해 차라리 가진자들과 권력을 항유한 자들의 이익을 위해 경제 제도와 사회를 재편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으면 받아들일 수는 없을 지언정 차라리 솔직하다고 말했을 겁니다. 이러한 과정은 다들 아시다시피 대처와 레이건이 주도해 만든 것이며, 그러한 이행 가운데 현 시대의 불행한 일면들을 이용한 포퓰리즘의 도래는 무엇보다 시민들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엄중하게 정치 엘리트들과 경제 엘리트들 및 기득권층에 사회적 책임의 결여로 언급하겠습니다. 저는 지금도 라이트 밀즈가 중요하게 주장했던 엘리트들의 책임 의식을 지지하는 편이며, 엘리트들과 일반 시민이 격리되고 구분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무조건적이고 안일한 시민들의 엘리트들에 대한 배척이 있어서도 안됩니다. 또한, 지금도 이 엘리트들이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있는 것을 굳게 믿고 있기도 합니다.

앞서, 언급했지만 리멘의 이 글은 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으로 보입니다. 가끔 파시즘이 기억 저편에 망각될 무렵에 이 책을 수시로 꺼내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요. 일개 개인의 삶으로서 이 사회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식의 만연된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각성할 수 있는 시기가 각자에게 왔으면 생각을 간절히 해봅니다. 제가 이런 사회학적인 책에 굳이 서평을 쓰는 이유가 바로 이런 연유이기도 한데요. 스스로 재교육을 한 시민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우리의 민주주의와 정치의 건전성이 강화되리라 또한 의심치 않습니다.

무솔리니는 모든 대학교수에게 충성 선언서에 서명하기를 강요했으며, 그렇지 않으면 직업을 잃게 되었다. 1100여명의 교수 중에 서명을 거부한 교수는 단 10명이었다

파시스트들은 이렇게 권력을 잡았다. 자유를 향한 두려움과 최악의 소인배스러움에 뿌리를 둔, 증오와 원한이 가득한 정치학을 들고 나온 사상 없는 대중 선동가들이 권력을 잡은 것이다

파시즘은 구성원 각자가 스스로 책임을 지는 민주주의적 정당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대중-인간은 지적이거나 정신적인 가치와 관련해 책임감을 느끼기는 커녕, 그것과 직면하기조차 원하지 않는다

스피노자에게 자유는 어리석음과 공포 그리고 욕망으로부터 벗어날 능력이며, 이성의 힘을 사용하고 진리를 추구하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이다

그것은 자기 권력을 강화하고 확장하는 것 외에는 안중에 없는 선동가들이 이용하는 형태의 정치학으로, 결국 그들은 원한을 악용하고, 희생양을 지목하고, 증오를 조장하고, 지적 무능을 시끌벅적한 슬로건과 모욕 아래 감추며, 포퓰리즘을 활용하여 예술의 경지에 달한 정치적 기회주의를 실행한다

우리 사회은 왜 이렇게 기술, 속도, 명성, 겉치장 그리고 외모에 많은 가치를 두는가? 그 대답을 소크라테스가 2500년 전에 친구들과 나눈 대화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쾌락에만 초점을 맞추고 최고선을 경시하는" 삶의 방식을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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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와 일본의 미래
강상중 지음, 노수경 옮김 / 사계절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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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규슈 구마모토 현에서 재일 한국인 2세로 태어난 강상중 교수는 일전에 서경식 교수가 언급한 ‘일본 사회 내의 재일 한국인들이 갖는 디아스포라‘에 해당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던 중에 ‘나가노 데쓰오‘라는 일본식 이름을 버리고 ‘강상중‘이라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노력한 평범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일 한국인이라는 한계를 넘어 노력한 끝에 보수적이라는 일본 도쿄대의 정교수가 되었고 또한, 학문적으로도 푸코와 베버에 관한 한 일본 내에서 큰 명성을 얻기도 하였습니다. 사실 저는 그저 글로써 일본 사회에서의 강 교수의 노력을 기술하는 데 그치고 있지만 그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지는 뭔가 상상이 안되기도 합니다. 그만큼 개인적으로도 많은 난관이 있었겠지요. 저는 주변 지인으로부터 일본 사회의 폐쇄성에 대해 익히 접해본 경험이 있습니다. ‘자이니치‘라 불리우는 재일 한국인들에 대한 차별은 꽤 노골적인 부분이 있어서 일본인들이 다양성의 측면에서 충분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였습니다. 이 정도로 강상중 교수에 대한 개인적 소감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책은 ˝朝鮮半島と日本の未來˝ 라는 원제로, 2020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2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번역한 출판사가 편집으로 삽입했을 가능성이 높은 ‘혐한과 반일‘에 대한 기본적 인식에 대해 논하고 싶습니다. 물론 강상중 교수 역시 본문에서 많이 언급하고 있는 단어이기도 한데요. 먼저 한국의 반일은 민족주의적이거나 얼마전에 서평을 쓴 사와다 가쓰미의 국내의 ‘반일 현상‘과 관련된 한국의 좌파 정치 세력의 조직적 움직임과 같은 정치적 인식은 아니라는 점을 먼저 밝혀두고 싶은데요. 강상중 교수는 이 글에서 이명박, 박근혜 정권 때보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 한일 관계가 더 좋았다고 언급하는 내용은 지극히 동의할 만하나, 오히려 반일과 혐한을 동일선상에 놓고 서술하고자 하는 부분은 전혀 수긍을 할 수 없었습니다. 한국 정부가 노골적으로 혐일 데모를 주동하고 각 대형 서점에 ‘혐일 섹션‘에 동조하거나 일본 정부가 극우 세력인 ‘일본회의‘를 암암리에 지원하는 등과 비슷한 한국 정부의 움직임은 거의 없습니다. 반일은 한일 관계 전반을 부정하거나 일본과의 외교 단절을 주장하는 터무니 없는 정치 논법이 아니라 역사 수정주의에 따른 역사 부정을 일삼는 일본 정부에 대한 비판 의식이라고 봐야할 겁니다. ‘일본의 의견이나 주장에 반대‘하는 것이지 일본인들을 한국에서 쫓아내자거나 당장 한일 관계를 단절하시키자는 것은 아닙니다. 이처럼 반일과 혐한의 인식 대결 구도는 실망스런 부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뒤이어, 한일 기본조약에서 명시된 바와 같이 한반도의 안보는 즉각적으로 일본의 안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글에서 북한이 서울과 도쿄에 핵무기를 날릴 경우에 그 시뮬레이션에 대한 결과가 인용되고 있듯이, 전반적으로 한반도와 일본의 문제는 꽤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봐야 할 텐데요. 그래서 저자의 이 글은 1945년 이후의 남북한 관계 뿐만 아니라 한일 관계 및 고이즈미 정권 당시 북한과 일본과의 외교 정상화 노력 등도 함께 다루고 있습니다. 다만, 저자는 서두에 문재인 정부의 어설픈 외교 운운으로 남북 관계 뿐만 아니라 주변국과의 외교 문제의 험난함을 설명하려고 하는데요. 여기에도 사실 저는 동의하기 힘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남북 관계 자체의 문제 뿐만 아니라, 도저히 예측이 되지 않는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와 백악관에 찰싹 붙어 어떤 의지도 보이지 않았던 아베 정권의 주변에서 한국의 문 대통령과 그의 내각이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있으리란 전망은 매우 회의적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한국 내부에선 반공주의와 북한에 대해 그저 경기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꽤 다수였고 이들을 배경으로 정치 세력화 되어 있는 국내 정치 자체가 정권에 도움이 되지 않고 있었는데 그나마 판문점을 중심으로 북한과 미국을 중재한 것은 성과라고 극찬할 필요는 없지만 그 정치적 과정이 지난했으리라는 점은 명백합니다. 아예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정도의 무능이라면 저런 수사가 가능하겠지만 문재인 정부를 둘러싸고 있는 정치적 배경과 외부 요인의 불확실성을 고려한다면 좀 더 면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저자가 논증하고 있는 두 가지 정치적 해석에 대한 부분도 좀 더 검토가 필요하다고 여겨지는데요. 우선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배외적 애국주의가 들끓는 이유는 두 사회 모두 격차와 대립이 심화되어 일체감이 옅어지고 단절이 확대되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한 부분에 대해서 다소 동의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국내 정치의 문제를 한국으로 돌려 지지율 문제를 해결한 정권이 일본 아베 정권이라 생각하는데요. 그가 극우 세력을 정치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독도와 관련된 터무니 없는 영토 문제, 특히 센카쿠/댜오위다오 문제와 비교해 봤을 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인식적 오류 또한 몇 번 양보해 제외하더라도 상대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도 없이 몇 차례나 한국에 대해 도발을 감행한 사실은 배외적 애국주의가 어느 나라에 가까운지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신자유주의의 맹목적인 세계화와 금융 자본주의의 문제로 말미암아 일본의 불황과 한국의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된 것은 분명합니다. 다만, 한국은 정말 그렇다 하더라도 시민들이 밖에 나가서 ‘일본인들을 모두 추방하자. 일본인들 때문에 한국의 국격이 낮아진다. 일본은 언제까지 사과를 번복할 것인가‘라고 하면서 혐일에 손발 벗고 나서고 있습니까? 여기서 제가 한국인들의 시민의식을 자랑하고자 하는 것이 아님은 잘 아실겁니다. 혐한의 뒤에 일본 정부가 있다는 것은 거의 분명한 사실인데, 그래서 강 교수의 저런 논법은 그런 연유로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또한, 위안부를 비롯 강제 동원 역사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싶은데요. 저자인 강교수는 4장 후반부에서 ˝전시에 국내 노동력이 고갈된 일본은 중국과 한반도에서 많은 노동자를 동원했고 이들은 태평양전쟁 후반부에 일본의 인프라를 지탱하는 중요한 노동력이 되었다˝라고 서술하고 있는데요. 사실 많은 역사적 사료들이 일본 정부에 의한 조선인들의 강제 동원을 뒷받침하고 있다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문제는 위안부 문제와 더불어 조속히 해결되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아시다시피 일본과 관련된 역사 문제는 거의 모두가 정치 쟁점화가 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특히, 일본은 역사 문제에 대해 노이로제와 비슷한 관념을 갖고 있고 더군다나 과거 역사 문제에 대한 끊임없는 언급은 국격의 손상이라고 여기기까지 합니다. 그렇다면 독일은 국격이 손상되어 남아나지 않아야 되는 수준인데, 지금 독일은 어떻습니까? 사실 강교수가 이 문제에 대해 간과하고 있는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아베 정권이 2014년도에 과거 고노 담화를 대외적으로 철회하고 싶어했는데, 당시 백악관의 압력으로 무산 됐던 바가 있습니다. 바로 아베는 고노 담화의 의의를 다시 새기기도 했죠. 이러한 일본 정부의 조석개변이 존재하는데 이를 한국 정부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는 명백합니다. 우리가 저들의 국격을 심대하게 손상시켰으니 정식으로 사과라도 하라는 말씀입니까. 또 한 가지, 일본은 행정부의 권한이 한국과는 다르다고 알고 있습니다. 법원 관료들도 행정부의 결정을 존중하고 일종의 내각의 권위를 무엇보다 인정해주는 분위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은 전혀 그렇지가 않지요. 설사 행정부의 수장인 대통령이 법원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다고 하더라도 조금이라도 그 내심을 드러낸다치면 탄행당하기 쉽상입니다. 언론의 집중포화는 말할 것도 없고요. 즉, 한국의 국내 정치 문제를 무슨 내정 간섭 운운하기 전에 한국의 삼권 분립은 이처럼 명확한 부분이 있습니다.

물론 국제적 기본 조약으로서 한일 기본 조약을 양국이 준수할 필요는 있겠죠. 이 부분에 대한 강 교수의 언급은 실로 동의할 만합니다. 과거사에 대한 국가간의 합의는 이미 종료되었다고 볼 수 있기에, 그것이 우리 쪽에는 불합리할지라도 혹은 냉전시기에 졸속으로 체결된 조약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자유세계에 속해 있는 만큼 이를 노골적으로 거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국익에도 맞지 않겠고요. 다만, 우리의 국내 정치는 시민 사회를 비롯, 시민들의 의견 개진이 일본 보다 자유롭고 여론의 생성 또한 큰 차이가 있습니다. 또한, 국제법 상으로도 민간 차원의 민사 문제를 정부가 강제할 수 없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법의 지배를 받는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이는 당연한 부분입니다. 행정부가 사법부에 관리를 보내거나 시민단체에 수석을 보내거나, 장관을 파견하여 입을 다물게 하는 등의 해당 조치가 우리 사회에서는 벌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이에 강상중 교수는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의 근대화가 완성되었고, 무리한 만주 지배와 그에 따른 중국 팽창 정책이 일본 근대의 암(暗)이라고 서술하면서 이러한 측면의 이해가 일본의 공화와 민주주의가 얼마나 우리와 다른지 알 수 있습니다. 근대의 중요한 사상이 인간의 마땅한 권리와 계몽이라고 볼 수 있을텐데, 일본은 일왕을 중심으로 제국주의 체제로 변용됨으로써 일본 근대 자체가 과거 나폴레옹이 공화를 부르짖다가 제정으로 몰락한 반정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로지 국익과 정치적 견제가 없는 봉건 왕조로의 귀환과 비슷한 관점으로 볼 수 있을텐데요. 사실 일본인들은 이에 대한 개념이 전무하고 자신들의 근대가 아시아인들에게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성찰이 없습니다. 이것은 지배와 피지배 국민들간의 역사적 인식 차원을 넘어서 해결되지 않은 역사 문제로 인해 관계 전반이 괴물이 되어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 괴물을 먹여 살리는 것은 일본의 국격과 극우 정치입니다.

저는 가끔 일본에 대해 우리가 왜 모든 분야에 있어서 저들과 협력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저 적당히 사회문화적 교류와 인적 교류만 하고 미국을 매개로 적당히 지내는 것이 양국에 이롭다고 생각하는데요. 마찬가지로 북한의 정치적 불안정성만 서로 잘 관리하면서 지내는 것이 양쪽의 최선이라고 생각하는데, 물론 국제 관계를 이런 식으로 쉽게 처리할 수는 없을겁니다. 과거 한일 관계 개선에 노력한 김대중-오부치 두 지도자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시점에서 한일 관계가 어떻게 재정립할지는 미지수입니다. 다만, 일본이 후쿠시마의 오염수를 태평양에 무단으로 방류할 시 그대로 한일 관계는 끝장난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전반적으로 글에 대한 반론으로 많은 부분을 할애하긴 했습니다만 강상중 교수의 한일 관계의 일반론에 대해서는 대체로 동의하는 편입니다. 이 글은 남북한과 일본의 집약적인 외교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고 배경 지식이 없는 일반 독자들도 평이하게 일독할 수 있는 수준의 유익한 글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국 국내의 반일 여론과 관련해서 일부 부적절한 언론들에 의해 조장되는 측면이 있으니 특히 일본내에 거주하고 있는 지식인들과 학자들은 면밀히 이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북한 핵문제의 정치적 전개 과정에 대해 따로 언급하지는 않았는데요. 저자의 이에 대한 관점은 일반적이고 평이한 편이니 따로 사족을 달고 싶지는 않습니다. 평화적인 해결을 포함해 당사자들이 대화의 장에 나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겠죠. 북한 핵 문제를 종결시키기 위해 무단으로 미국이 무력 개입에 나서는 일은 한국의 협조를 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고 일본 내의 미군 기지의 공격 가능성 및 중국과 국지전으로 비화될 확률 또한 상당하니 저자의 평화 해결에 대한 조언은 그만큼 설득력이 있습니다. 이것은 일본의 국익에도 부합되는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예전이라면 한반도에서의 전쟁이 일본으로서는 전쟁 특수를 위해 내심 반겨했을지도 모르겠으나 도쿄에 북한 미사일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으니 과거처럼 잇속을 셈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해졌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저자는 이 글이 고 김대중 대통령의 오마주로서 시작되었디고 밝히고 있는데요. 과거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총리의 한일 관계에 대한 정치적 노력은 꽤 대단했다고 여겨집니다

-일본 내의 리버럴 지식인들이 한국 정치 상황과 맞물려 일본에 대한 인식 및 반일의 기본적 의미 등의 인식이 이 글을 통해서도 매우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대체로 한국에 대한 나쁜 인식을 일본에 주입하고 있는 우리의 일부 언론들의 기여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이처럼 지식인들이 최소한의 분별력을 갖춰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2019년 11월 23일 겨우 지소미아의 파기는 면했으나, 그 까닭은 양국이 신뢰를 회복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한미일의 안보 채제를 유지하려는 미국의 압박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국은 이 조약(한일 기본 조약)으로 국가의 청구권은 포기하지만 개인의 청구권까지 포기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며 한국 내에서는 이를 침략을 명기한 배상 조약으로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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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은 어떻게 우리를 단절시키고 민주주의를 훼손하는가 - 민주적·지성적 문화의 타락을 부추긴 세계 최강, 세계 최대 소셜미디어에 대한 미디어 생태학자의 신랄한 고발장
시바 바이디야나단 지음, 홍권희 옮김 / 아라크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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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저자 시바 바이디아나단은 현재 미국 버지니아 대학의 미디어학과 교수이자 미국 내에 저명한 미디어 학자로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과거 닐 포스트먼과 헬렌 니센바움 등과 현대 미디어의 새로운 도래와 관련해 함께 연구를 해 온 바가 있는데요. 특히, 그는 매우 견고한 민주주의자로 트위터와 페이스북과 같은 뉴미디어가 어떻게 우리의 민주주의를 훼손하는지에 대해 많은 관심과 연구를 지속해오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영국 가디언지의 칼럼니스트로서도 활동하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뉴욕 타임즈와 워싱턴 포스트 등의 미국의 언론사에서도 정기적인 칼럼을 기고하고 있습니다. 또한 팟캐스트와 같은 인터넷 미디어에도 간혹 출연하고 있고 다큐멘터리 영화에도 출연하는 등의 꽤 다방면의 활동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외에도 공공성을 목적으로 설립된 미국 디지털 공공 도서관의 이사회에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Antisocial Media˝라는 원제로 지난 2018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0년 5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서론과 마지막 결론을 포함해 총 9장의 다소 구분된 내용으로 쓰여진 이 글은 일목요연하게 페이스북과 이 회사의 CEO 마크 저커버그의 발언과 활동 등을 분석하고 소셜미디어라는 뉴미디어 시대에 우리의 정치와 민주주의에 대해 좀 더 비관적인 전망을 담고 있습니다. 즉, 이 글 6장 마지막에서 보이는 꽤 단정적인 주장인, ˝페이스 북은 승리할 것이다. 민주주의가 패배할 수 있다.˝가 글의 핵심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재런 러니어와 로버트 맥체스니와 비교해 봤을 때도 다소 비관적인 글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최근에 일독했던 크리스 샤퍼의 글과 제법 유사한 관점의 글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저자인 바이디야나단은 이런 저의 평가를 넘어, 4장에서 약간 단정적으로 ˝당초에는 페이스북이 2011년 북아프리카의 봉기를 키워준 것으로 인식됐다. 이것은 사실 부정확했다˝고 평가하고, 이러한 판단에는 다음 5장에서 보이는 ˝권위주의 국가에서 거대한 저항운동은 충분한 사람들이 참여할 것이라고, 충분한 사람들이 설득된 경우에만 가능하다˝라는 서술을 그는 제시합니다. 이와 같은 그의 생각은 아마도 마누엘 카스텔이 인정한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적극적인 행동에는 공권력에 대한 공포를 이겨낼 필요가 있다˝는 언급에 기반한 것으로 보이며, 그나마도 많은 사람들이 충분하게 이 상황에 대해 움직여야 한다는 점을 진정 공감해야 하며, 이 부분에 대해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미디어가 이해와 공감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은 극히 이상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페이스북이 시민들의 봉기에 어떤 매개는 될 수 있겠으나, 페이스북이 민주주의나 올바른 정치, 도덕적 필요성 등을 시민들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거라는 믿음은 거의 망상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우선, 페이스 북의 기본적인 이상은 오로지 경영적인 측면에서 기업의 이익을 쟁취하는 데 놓여져 있으며, 창업자인 저커버그가 아무리 이상과 선을 강조한다 하더라도 실질적으로 페이스북이 시민들에게 제공하는 서비스는 이와는 매우 다릅니다. 6장에서 이미 논의되고 있는 바와 같이 도널드 트럼프와 같은 유력 정치인들이 자신의 홍보와 더 나아가서는 정치적 상대에 관한 허위 의견이나 조작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것으로 봤을 때, 페이스 북 자체가 어떤 정치 중립성의 맥락에서 이를 견실히 지키고 있다고 볼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저커버그의 의견대로 가짜 뉴스와 허위 정보가 난무하는 페이스북의 현 상황이 어떤 이상과 합치하는지 저는 이해하기 힘들다고 밝히고 싶은데요. 차라리 정치적으로 양쪽 진영의 지지자들과 해당 정치인들에게 밉보이지 않고 적당히 모두에게 이익을 얻는 것이 그의 이상이자 이익이라면 차라리 솔직하다고 인정을 받을 만할 것입니다. 일찍이 밀턴 프리드먼은 기업에게 사회적 책임을 강요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말했듯이, 이 거대한 사기업의 운영자인 저커버그가 프리드먼의 요구와 반대대로 행동하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인지는 모두가 인지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현 시점에서 저커버그에게 바라는 것은 그의 기업이 더이상 우리의 민주주의를 위협하게 되지 않는 일종의 ‘정치적 자정능력‘을 발휘해 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물론 저의 이런 기대는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겠죠.

미디어 연구의 대가인 닐 포스트먼의 영향을 받은 저자는 글에서 미디어 리터러시 media literacy가 사실상 필요하다고 주장하는데요. 이 미디어 리터러시는 현재의 인터넷 미디어 시대에 시민들이 적절한 분별력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과거 르네상스 시기에 활자인쇄술의 발달은 우리의 문명이 몇 단계나 발전하는 데 이바지 했는데요. 그에 반해 닐 포스트먼과 저자는 지금의 이 뉴미디어가 과연 문명의 발전에 이바지 할지는 매우 회의적인 시각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것은 글 후반부에 각국의 권위주의 정부들이 페이스 북의 가짜 친구를 등록하여 소위 민주적 인사들이나 중요 시민들을 감시하는 데 쓰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일전에 티모시 스나이더가 폭로를 하기도 했습니다만, 러시아의 해킹 당국이 관여한 영국 브렉시트와 관련된 가짜 뉴스, 허위 조작들의 봇과 마찬가지로 힐러리 클린턴과 도널드 트럼프의 예전 대선에서의 사실상 개입은 문명 차원을 넘어 미국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위태로워질 수 있는지 매우 격렬하게 보여준 증거라 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대다수의 시민들이 이 가짜 뉴스의 홍수에 얼마나 취약해질 수 있는지에 대한 명백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요. 이 부분에 대한 해결책은 현재로선 누구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고, 더불어 꽤 몇년간 구글과 페이스북과 같은 거대 인터넷 기업들의 기득권이 날로 강화되어 왔고 정부가 운영하는 정보 조직 또한 시민들에 비해선 과도하게 비대칭 권력성을 내포하고 있어 우리의 권리를 위해 해결해야 될 부분이 이처럼 한 두 가지가 아닌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러한 페이스북의 꽤 이율배반적인 상황에 있어 저자는 ˝강압적인 국가적 폭력은 존재하며, 때로는 확산되는 게 확실하다˝고 단언합니다. 즉, 민주주의에 반하는 각국의 권위 정부들이 현 상황에 대한 애매한 태도로 인해 이를 적극적으로 악용하고 있으며, 기업의 이익에 수렴하는 각종 알고리즘이 정치적 문제에 대한 페이스북의 전반적인 대응을 어렵게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를 통해 제가 페이스북에 면죄부를 주고 싶은 마음은 없는데요. 그동안 이어온 구글의 사용자에 대한 적절한 검색 결과의 제공은 이것에 광고 수익을 비롯한 각종 수익이 연계되어 있어 전반적으로 이런 경제적 토대를 바꾸는 등의 결정은 사실상 어렵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이들 소셜미디어의 사용자들에 대한 축적된 데이터 문제가 사적인 기업들의 사용 문제를 포함해 국가 정보국의 안보를 위한 함의 또한 분명하기에 저자의 예견대로 조지 오웰의 디스토피아가 아니라 올더스 헉슬리의 다소 우스꽝스러운 사회의 도래는 예상이 빗나가는 전망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이미 많은 전문가들을 통해 국가 안보는 절대로 완벽하게 충족될 수 없는 부분임에도 미국은 건드려서는 안되는 거대하고 비대한 정보 조직을 완성했습니다. 이 통괄 정보국이 누구의 손에 쥐어지냐에 따라 민주주의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시민권이 무너질 수도 있는 상황일텐데요. 안보를 지렛대로 엘리트 기득권이 요구했던 이 정보 권리가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 현 미국의 모습입니다. 사실 저커버그가 그동안 누누히 강조했던 이 연결성이 우리의 목줄을 옥죄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죠. 어떠한 정치적 견제 없이 연결성만을 운운해 무슨 이상주의 사회를 피력하는 그의 논법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 깨달아야 할 것 같습니다.

끝으로, 페이스북과 같은 인터넷 소셜미디어 그룹의 규제는 일반 기업의 관점과는 다르게 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국가 효능감에 대한 냉소주의˝를 갖고 있는 레이건주의자들과 대처주의자들이 아직도 많은 시점에서 시민들의 프라이버시와 권리를 침해할지도 모르는 이 소셜미디어를 오로지 자본주의 논리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그동안 반민주주의 국가들에게서 민주적 열망을 고취하고 그것을 실행시켰다는 과분한 평가로 이 페이스북을 거론하면서 반대로 권위주의 국가들이 자신들의 국민들을 억압하는 마찬가지로 페이스북이 이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동안 쉬쉬하고만 있었습니다. 2016년에 276억달러의 매출을 올린 페이스북의 경제 지표는 저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다른 국가의 민주주의를 악화시켜 얻은 수익으로 미국의 사회 발전을 위해 재투자 하겠다는 저커버그의 발언은 뭔가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은 괴리감을 느끼게 해주는데요. 이것은 그만큼 밀턴 프리드먼의 앞선 주장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보여주는 증거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러시아 당국이 해커 그룹을 운용하며 타국의 민주주의를 혼란에 빠지게 하는 것을 그저 내정 간섭에 따른 불법 행위로만 여기고 정부가 전반적인 산업 전부를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분명 큰 문제로 다가올 것입니다. 이런 비판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재런 러니어는 이 정도까지는 직접적으로 예측하지 못했다고 봐야할 텐데요. 그에 비해 바이디야나단의 ‘페이스북 국가‘에 대한 경고는 우리 모두가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이런 넷 기업들에서 일하고 있는 수많은 전문 기술자들의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 인식 또한 개선 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그저 새로운 생태계가 출현해서 먹거리가 풍부해졌다고 좋아하기만 하고 그 이면에 있는 시민들의 권리와 프라이버시의 문제 그리고 안보라는 명목으로 행해지는 수많은 권력 비대화를 외면하는 행위는 그야말로 현실을 도외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시민들이 관심을 갖기 전에, 이들 전문가들의 각성 또한 매우 필요한 시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본문에서 토니 주트의 ‘현장 정치 교육 instant political education‘ 이 인용되고 있는데요. 문맥에 적절하다는 것을 넘어 뭔가 반가운 기분이 들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조나선 지트레인도 인용되고 있어서 조만간 그의 저서를 구해 읽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심지어 우리는 명백한 거짓 이야기와 거짓 주장을 올리고 공유하기도 한다. 진실 여부보다 우리의 사회적 유대관계가 우리에게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기 위한 것이다

만일 폴리스의 많은 사람이 대중 토론 참여를 시도할 때마다 괴롭힘을 당하고 말도 못하게 되고 위협당한다면, 우리 공화국에서 책임감 있고, 정보를 가진, 참여적인 시민으로서 행동할 수 없다

노벨상 수상자인 밀턴 프리드먼은 1960년대 내내 걱정이 커져 갔다. 그는 ‘정치‘가 시장 체제를 오염시키고 혼란시킨다고 파악했고, 정치적 이해관계에 기업들이 봉사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을 시장의 기본법 위반으로 보았다. 소비자들, 투자자들, 그리고 경영자들은 모두 가격을 통해 소통해야 한다고 프리드먼은 믿었다

2016년 선거 이전에는 미국에서 정치공학의 시행이 값비싼 상업적 데이터베이스보다 공개된 인구통계와 유권자 습성에 훨씬 더 의존했다는 사실 또한 중요하다

이러한 허위정보는 여러 형태를 띠고 있고 여러 가지 다른 동기를 갖고 있다. 어떤 것은 광고 수익을 내기 위해 클릭을 유도하도록 설계되었다. 어떤 것은 정치적 압력을 행사하고, 민주주의를 작동하게 하는 제도들에 대한 신뢰를 약화시키거나, 민주적 숙의를 방해하도록, 정당, 정부 또는 비정부 활동가에 의해 설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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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와 차별은 어떻게 정치가 되는가 - 열 가지 키워드로 읽는 21세기 극우의 현장
카스 무데 지음, 권은하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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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 무데 (혹은 카스 머드)는 네덜란드 출신의 저명한 정치학자입니다. 그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나 모국의 레이던 대학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고 도미하여 조지아 대학의 국제관계학 교수를 역임하고 있습니다. 특히 무데는 주로 포퓰리즘과 극우 정치와 같은 극단주의 정치를 연구하는 학자인데요. 포퓰리즘과 관련한 연구에서는 전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기도 합니다. 바로 이 부분에 있어 극단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정치 연구를 위한 유럽 컨소시엄 (ECPR)의 공동 설립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카스 무데라는 학자의 존재는 이처럼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그에 관한 기사를 검색해 보니, 극우주의자들에게 어떤 린치를 당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자신의 안전을 먼저 챙겨야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The Far Right Today˝라는 원제로 지난 2019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2월 번역 출판되었다. 우선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무데의 논저를 이처럼 문제없이 번역한 역자의 노고에 먼저 감사를 먼저 드리고 싶습니다.

이 책은 총 10장의 소주제로 구분되어 있으며, 각각의 장에는 독자들을 위한 약간의 보론도 실려 있기도 합니다. 전체적인 맥락은 꽤 일관된 논지를 갖고 있어 배경 지식이 다소 없는 분들이라도 쉽게 읽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데가 여기서 다루고 있는 주된 내용은 ‘극우 정치와 우익 포퓰리즘‘에 대한 역사와 해석 및 앞으로 이들의 대한 대응이 되겠습니다. 그는 2001년 9.11 테러와 2008년 뉴욕발 금융위기 및 2015년 유럽의 이슬람 이주민 사태를 들면서 거의 모든 유럽의 자유 민주주의 국가들이 좋지 못한 영향을 받았다고 진단합니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조직적으로 그다지 변변하지 못한 극우 세력과 도널드 트럼프로 대표되는 우익 포퓰리즘이 일어서는 사회적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먼저 극우 정치 (Far Right)와 우익 포퓰리즘을 구분하기에 앞서, 무데는 6장에서 우익 포퓰리즘의 극단화로 인해 이 양자간의 정치적 스탠스가 많이 좁혀졌다고 인정하는 부분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유럽의 극우로 대표되는 ˝반유대주의 antisemitiism, 역사수정주의 historical revisionism, 인종차별주의 racism˝ 와 여기에 반지성주의를 더하면 극우를 설명하는 완벽한 해석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극우적 폭력을 불법적으로 행사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외국인 (소수민족, 이민자, 난민) 또는 타락한 도덕성 (페미니시트라고 여기는 사람, 동성애자, 좌익, 노숙자)를 그 범주˝로 두고 있기도 합니다. 또한, 무데는 독일을 포함한 상당수의 공권력이 이들 극우에 심정적으로 동조하고 있으며, 실제로 해당 경찰들이 다수가 이 극우와 연관이 깊다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집단 린치를 당한 사람들이 심지어 경찰에게 자신들의 신변 보호를 맡기는 것을 사실상 꺼려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봐야합니다. 이와 같은 극우주의의 폭력적 행동에 있어 과거 도널드 트럼프의 백악관 선임 고문이었던 스티브 배넌 Steve Bannon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선동 정치인들이 어떻게 저들을 이용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당신을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부르게 하십시오. 그들이 당신을 외국인 혐오자로 부르게 하십시오. 그들이 당신을 이민 배척주의자라고 부르게 내버려 두십시오. 그리고 이러한 모욕을 명예로운 훈장으로 착용하십시오˝라고 말입니다.

카스 무데와 더불어 포퓰리즘 연구를 지속했던 폴 태가트는 ˝이 포퓰리즘의 현상을 정치학적으로 규명하는 것이 사실상 어려운 부분이 있다˝고 언급하면서, 포퓰리즘을 기반으로 하는 상당수의 정치 지도자들은 반엘리트주의적이고 반지성주의적이면서 기존 체제에 대한 극심한 혐오와 비난을 해대면서도 어떠한 대안도 제시하지 못하는 등 거의 파시즘만도 못한 배경 때문에 이것을 정상적인 정치적 현상이라 여기고 학문에 포함해야 할지 난감했던 부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의 사례를 통해 이제는 극명한 정치(실질적으로는 반정치)현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수준되었기에 그가 6장에서 트럼프를 그저 평범한 극우 정치인 수준으로 인정한 것은 다소 이런 인식적 배경이 있는 것으로 추측됩니다. 물론 저는 이에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5장에서 파악되는 이들 정치 세력의 평가에서 ˝오늘날 가장 성공한 극우 정당들은 주류 우익에서 우익포퓰리즘 정당으로 탈바꿈한 정당들이 대부분˝이라고 그는 명확히 인정합니다. 사실 이 부분을 달리 말하면 그만큼 극우 정치와 우익 포퓰리즘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융합되었다는 말로도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그동안 포퓰리즘적 우익 정치인들이 (도널드 트럼프를 포함하여) 줄곧 앵무새처럼 민주주의의 회복을 외치고 있지만 이 이면에는 이들이 민주주의를 그저 수단으로 삼고 있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동안 많은 학자들이 이 포퓰리즘 현상을 대중들이 실질적인 민주 정치의 회복이라든지 자신들의 선거권과 정치 참여가 좀 더 실효적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는 열망을 그저 이용하는데 급급한 이 포퓰리스트들에게 ‘민주주의의 기대‘를 갖다 붙이는 것은 그야말로 오판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여기에 무데는 민주 정치 대부분이 어떤 걸출한 정치 지도자에게 의존하기 보다는 갖춰진 조직과 연대가 그러한 정치의 실질적인 모습이라고 해석하는데요. 저자의 이런 의견은 충분히 동의하는 편입니다. 그러므로 거의 정치적 선동가에 가까운 포퓰리스트 정치인에게 어떤 민주적 의식이나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신념이 있다고 하는 것은 거의 희박하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금권 정치하에 자본과 밀접하게 연관된 보수든 극우든 이런 정치인들이 말로는 쉴새 없이, 민주주의를 외치지만 실제로는 민주주의를 떨떠름하게 생각한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바가 있습니다. 다만, 이들은 유권자들의 표를 위해 그런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이지 엘리트주의가 몸에 박힌 이런 직업 정치인들이 다수의 정치를 긍정한다라, 매우 믿기 어려운 것이죠.

그리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로 인한 노동 계층의 붕괴, 프레카리아트의 양산, 하루 벌이를 고민하는 취약 계층의 확대로 말미암아 이미 미국과 유럽은 전방위적인 이들 시민들의 현실에 대한 분노와 좌절로 급격하게 반정치 정서가 확산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바로 이러한 지점을 미국의 티파티 운동과 도널드 트럼프와 같은 자들이 매우 유용하게 이용했으며, 현재의 경제적 시스템을 긍정하고 있는 관료들과 경제엘리트들 역시 이러한 분위기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 부분에서 저들 경제엘리트들에게 어떠한 면죄부를 주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그동안 강조했던 견고한 민주주의의 회복을 운운하기 전에 민주적 권리를 갖고 있는 다수의 시민들 삶을 안정화 시켜야 저들 역시 안정적인 경제 활동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저 편협한 시선으로 큰 맥락을 보지 못하는 엘리트들의 단순명료한 사고관이 신자유주의적 파행을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승자 독식과 약탈 경제와 같은 불균형적인 경제 시스템을 노골적으로 지지를 표명하더라도 그 기반이 더욱 취약한 부분을 노출시키고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만 하는데, 자본의 승리에만 몰두한 나머지 사회가 구조적으로 이미 정치 경제할 것 없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망각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경제학자들이 평범한 시민들의 가난의 굴레를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애써 외면한 채, 시장이 모든 것을 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순수함이든지 맹목적이든지 하여튼 그런 독특한 신념이 자리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저는 일방적으로 민주주의가 약화 되었기 때문에 극우 정치가 출현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신자유주의가 우리의 민주주의를 약화시키긴 했지만 그보다 약탈 경제에 의거한 소모적인 경제학과 이를 추종하고 비판하지 않는 지식인들 무리 그리고 각지에 거미줄처럼 퍼져 있어 이것에 이득을 얻는 관료들과 수많은 정치인들이 이러한 상황을 동시다발적으로 악화시켜 왔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물론 이런 근본적인 파행의 근거에는 과거의 공화주의적 전통과 민주적 정치의 충분한 믿음 없이 그저 정치 자체를 수단으로 삼은 자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일겁니다. 그래서 누스바움의 의견대로 ‘진정성의 결여‘는 이처럼 터무니 없는 과오를 만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극우 정치의 도래는 현실 문제의 부조리들과 이익을 얻기 위해서는 뭐든지 할 수 있고 다수의 정치와 공정한 시스템을 무너뜨리는 행태들을 거의 필연적으로 수반되었기에 이 ‘분노의 정치‘를 먹고 사는 거머리 같은 극우 정치를 발생시킨 것이겠죠. 여기에는 무데가 약간 과소평가하고 있는 반지성주의도 큰 몫을 했다고 생각하는데요. 트럼프는 대표적인 반지성주의의 선구자로 그는 엘리트 지배체제 뿐만 아니라 사회를 구성하는 지식 시스템과 전문 지식을 거부하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반지성주의 자체는 다양성을 거부하는 것으로 이미 표출되고 있기 때문에 포퓰리즘이 반지성주의와 결합한 것은 반정치 그 자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우 정치를 기존의 정치 세력에 포함하는 민주주의의 포용성의 가치를 주장하는 분들이 있을 것로 여겨지는데요. 사실 극좌가 혁명의 문제로 기피되었다면 오늘날의 극우는 슈미트 식의 우리편 아니면 전부 대적이라는 의미로 쉽게 표출되는 폭력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기에 제도적으로 공언받지 않는 집단 리치와 같은 폭력 문제는 단순히 인간의 본성으로서도 용납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설사 저들에게 폭력성을 제거한다 하더라도 극우 정치는 이미 ‘교육 받은 백인 남성‘을 제외한 어떠한 인종들도 대등한 정치적 상대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남녀 차별은 저들에게는 사소한 문제이고, 전반적으로 극우 정치가 민주주의 정치에 위반되고 포용할 수 없는 것임은 명백합니다. 여기서 연급되는 리처드 스펜서의 대안 우파 (alt-right) 역시, 그저 온라인상에서만 암약하고 있지만 저들도 교육 받은 백인 남성의 국가라든지, 헝가리의 극우 정치가 똑같이 강조하는 백인들만의 국가는 확실히 민주주의와는 양립할 수 없는 정치입니다. 물론 이를 정치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저로서는 회의적입니다.

극단적 중도파라는 논저를 쓴 티크 알리와 마찬가지로 독자들이자 평범한 시민들에게 극우 정치를 명백히 밝혀내는 무대의 이 논저는 실로 귀중하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그동안 각지의 극우 정치는 정치적 세력이 보잘것 없는 관계로 기성 정치에 나타나지는 못했으나, 현재는 프랑스의 르펜 사례로 말미암아 의미있는 대두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수많은 보수주의자들이 비판하는 민주주의 정치의 실패라고 보는 것은 어불성설이지만 보수주의자들이 저들을 수월하게 도태시키지 못한 책임도 분명 있을 겁니다. 물론 현실 정치에 약삭빠른 언론인들은 이들 극우 현상을 적절하게 이용하고 있는 실정입니다만 대다수 민주 정치의 기반인 시민들에게는 분명 안좋은 현상임은 분명합니다. 단순히 벤자민 바버와 같이 현실 정치에서 다양성의 가치를 더 확대시키고 이를 긍정하는 시민이 늘어나면 늘어 날수록 저 극단의 정치가 설자리를 잃게 될지는 아직은 불명확해 보입니다. 뭔가 극우 정치를 도태시키자고 말하면 뭔가 파시스트가 되는 것 같은 기묘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만, 매번 강조하는대로 이 극우 정치 역시 우리의 민주 정치에 위협이 되는 것은 확실하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좌절에 빠진 취약 계층의 사람들을 우리가 어떻게 구해낼 수 있을지 그 부분이 가장 어려운 부분인 것 같습니다. 이미 극단의 정치가 자생할 토양은 충분하니 말입니다.

-본문에서 카스 무데는 손수 극우 단체 모임에 수차례 참석해 저들을 관찰했다고 하는데요. 그의 용기가 참 대단하다고 느껴졌습니다.

-또한 무데는 서문에서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이 극우가 어떻게 21세기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목적을 갖고 있었습니다.

파시즘의 대표적인 지도자인 히틀러는 "공산주의와는 달리 민주주의는 반칙이자 더러운 수단"이라고 주장했다

극우에서 가장 중요한 이념은 파시즘으로, 이는 좌익과 우익에게서 반민주주의 anti-democratic의 전통을 바탕으로 하는 혼합주의적 syncretic 이념이다

인종차별주의나 민족다원주의로 알려지든 간에, 극우의 핵심적인 이념의 특징 중 하나이자 현대 우익포퓰리즘의 지배적인 특징은 바로 이민 배척주의다

극단 우익은 민주주의의 본질은 정치적 평등과 다수결에 의한 정부라는 개념을 거부하는 한편, 우익 포퓰리즘은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민주주의를 지지하지만, 소수의 인권과 법치, 삼권분립이라는 자유민주주의의 핵심 제도와 가치에 근본적으로 도전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최근의 한 연구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유형으로 트럼프 유권자를 구별했는데, 미국 보존론자들 American Preservations(20퍼센트), 견고한 보수주의자들(31퍼센트), 자유시장주의자들(25퍼센트), 반지성주의자들(19퍼센트), 예측불가(5퍼센트)로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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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에 맞선 이성 - 지식인은 왜 이성이라는 무기로 싸우지 않는가
노엄 촘스키 & 장 브릭몽 지음, 강주헌 옮김 / 청림출판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노엄 촘스키는 변형생성문법 이론으로 큰 명성을 얻은 학자로 사회비평가이자 정치운동가 및 철학자로 92세의 고령임에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학계의 거두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가 권위주의적이라거나 상아탑안에서 자신만의 울타리에 갇혀 사는 인물은 아닙니다. 과거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에 내각에 암약했던 네오콘들은 그가 빨리 죽었으면 한다고 빌었다는 일화도 너무나 유명합니다. 더욱이 촘스키는 CIA에 감시를 받기까지 했었는데요. 당시 기성 권력이 얼마나 그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는지 짐작할 만한 부분입니다. 예전에 제가 지나가는 투로 한번 이뤄질 수 없는 소망을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요. 그것은 지그문트 바우만이 타계하기 전에 이 두 노대가가 현시대의 여러 문제들을 놓고 토론을 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지 간혹 상상해 보곤 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촘스키의 이 절판된 책을 뒤적거리다가 여지없이 앞선 아쉬움이 깊게 들기도 했습니다. 이 책은 원제, ˝Raison Contre Pouvoir˝로 지난 2009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2년 10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현재 이 책은 절판된 상태입니다. 원서와 관련해 참고할 부분은 아마도 벨기에에서 불어판으로 출판된 원전을 국내에서 번역한 것으로 추측되는데요. 역자인 강주헌씨가 불어를 하실지는 모르겠지만 영문판으로 나온 것을 번역한 것으로 봐야할 것 같은데요. 구글에서도 정확한 서지 정보가 잡히지 않아 추가적인 내용을 적어 봤습니다.

이 글을 간단히 소개한자면, 노엄 촘스키와 벨기에 루벵 대학의 물리학 교수 장 브릭몽의 대담집을 엮어 편찬한 것입니다. 이 대담의 형식상의 구성은 장 브릭몽이 촘스키에게 질문을 던지거나 주제에 대해 약간의 반문을 보이면 이에 보충 설명과 비슷한 촘스키의 해석이 나오는 식입니다. 일단 도입에서 대담을 진행한 브릭몽 교수가 이 책의 제목 ˝권력에 맞선 이성˝을 소개하면서 이것은 거의 촘스키의 저작과 일생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언급합니다. 만약 쥘리앙 방다가 지금 살아 있었다면 그가 주장한 지식인의 겸허한 의무를 촘스키의 일생이 이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을겁니다. 지금도 우리가 존경하는 테오도르 아도르노 조차도 기존의 기득권 정치를 옹호하면서 촘스키와는 다른 결을 산 지식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산업화 시대 이후 어떤 사람의 가진 부가 명백한 권력이 되고 이러한 사회적 연계 방향의 최소한의 비판적 분석을 지식인들이 하지 않음으로써 식자 층의 의미 변질은 이 시대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들은 때론 부에 때론 권력에 영합함으로써, 건전한 사회와 대안이 될 수 있는 책무를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맥락에 부합하는 촘스키의 논증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 글의 2장 인간 본성과 정치에 대해 논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본성이 어떤 한 편으로는 불확실성을 띠고 있는데, 인류의 역사에서 이를 입증할 만한 단서는 아주 많습니다. 특히 유럽의 왕정 시기에 쓸데없이 피를 흘려야 했던 수많은 전쟁들 그속에서 여성과 아이들의 인권은 말할 것도 없고, 어떨 때는 인명을 파리만도 못하게 여기는 풍조가 팽배해 있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인간의 본성이 피와 살육을 즐기는 성향을 갖고 있다고 해석해 버리면 너무나 터무니 없는 인식일 겁니다. 하지만 지금의 현 시대를 인간이 욕망하는 것을 충분히 충족시켜주고 이기적인 본성에 부합되는 실로 적절한 사회 체제를 갖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인식을 우리는 그들이 터무니 없다고 말해야 하는 것일까요. 어느 누군가에겐 이 시대가 지옥이고 반대로 어느 누군가에는 더할 나위없는 천국일 수가 있는데, 촘스키는 아무리 인간이 경험적인 동물이라 할지라도 생득의 조건에서 누구나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는 것이지만 문제는 오늘날의 이 신자유주의가 인간이 마땅히 가져야 할 연민과 동정, 보살핌과 같은 본연의 인간성을 사실상 거부하는 데 있다고 그는 주장합니다. 사실 제가 봤을 때는 보수주의자들이나 신자유주의자들이나 거의 한 몸이라 봐도 무방해 보이는데요. 자신이 보수주의자지만 신자유주의를 경멸하거나, 신자유주의자가 보수주의를 철지난 헤게모니로 보는 경우는 거의 목격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사회의 전통성과 가치, 공화주의적인 담론을 보호하고 지켜나가야 될 이 보수주의자들이 어떻게 시장 자유와 극한의 개인의 이기심을 추종하게 되었는지는 불확실합니다. 어찌됐든 개인의 신념체계에 있어 리처드 번스타인의 가류주의, 즉 내가 알고 있거나 믿고 있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증명이 되었을 때 이를 철회하고 수용할 수 있게 되는 사람은 아주 드물 것입니다. 누구나 말하는 성인의 단계가 저런 단계인지는 모르겠지만, 약간의 논외로 촘스키가 정명한 수학의 법칙이나 논리를 이해하는 사람은 아주 극소수라는 말에 이런식으로 인간의 발달 정도가 차별화 되는 것인지 잠시 생각에 잠기기도 하였습니다.

사실 이기주의를 낱낱이 논하고 싶은 심정이야 굴뚝 같습니다만, 저는 촘스키의 문장을 여기에 소개하고 싶습니다. ˝이기주의가 인간 본성의 중심이라고 근거 없는 이론들이 그들에게는 편할 것이다. 그래야 다른 동네의 병약한 과부를 먹이고 돌봐야 하는지, 또 건넛집 아이에게 교육받을 기회를 보장해야 하는지 등을 따지는 일은 잘못됐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는 몇개의 문장들입니다. 원래는 유럽의 계몽주의가 제국주의 시기의 식민지 건설들로 부침을 겪에 되기도 하지만 역사의 공교로운 흐름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두 차례의 대전을 거쳐 비로소 진정한 계몽주의의 의미를 찾게 됩니다. 이 계몽을 바탕으로 다시 인간성을 회복하고 좀더 발전된 민주주의와 (본래는 공화주의적 담론이었지만) 생활 양식의 발전을 가져다 준 경제적 번영이 서로 절묘하게 인간 사회를 더 진보의 영역으로 이끈 것은 분명합니다. 데이비드 흄의 영향을 받았던 애덤 스미스는 ˝타인을 더 많이 생각하고 자신을 거의 도외시하는 모습이 인간 본성의 완성˝이라고 밝히며, 조화로운 삶을 위한 주춧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자유 시장 주의의 화신으로 읽히고 있는 교조 애덤 스미스가 저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니요. 촘스키가 논하는 이 애덤 스미스의 사례는 이 책에서 여러번 등장합니다만 본래 진정 전통적인 경제학은 바로 인간의 진보와 함께할 수 있는 그런 경제학이었습니다. 물론 여기서 인간의 진보는 지갑이 두둑해지는 진보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뭐 지금에서야 촘스키가 인정하는 데로 이 신자유주의가 너무나 민주주의를 공격해대서 만신창이가 된 상황입니다. 물론 그는 이를 너무 비관적으로만 여기지 말아야 한다고 조언합니다만 저는 쉽게 동의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일찍이 대니 로드릭을 통해 경제적 번영 뿐만 아니라 좀 더 나은 정치, 다시 말하면 민주주의의 회복 등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인간의 욕구에 대해 경제학자들이 이를 얼마나 숨기는 데 급급해 왔는지 깨달을 수 있었는데요. 미국 시민들에게 크나큰 기대감을 갖게 했던 버락 오바마가 당선 이후 월스트리트를 개혁하지 못하고 오히려 월가의 경제인들의 눈치만 봤다는 사실은 꽤 유명한 일화입니다. 공적 자금으로 은퇴 자금 놀이를 했던 경제 인사들의 후일담은 꽤 유명하기도 한데요. 과연 저들이 법적인 처벌을 받았는지 의문입니다. 과거 플라톤은 민주주의를 사실상 완벽하게 구현할 수 없는 상황을 혐오하면서도 사회의 권력을 좌지우지하게 되는 특정 계층에 대한 합리적인 대처 방법에 대해 전해지는 바가 없습니다. 그가 모른 척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단순히 오래전 시대의 협소한 인식 상황을 한계로 여기며 실제로 인지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이해하는 식의 변명도 나쁘지는 않습니다만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화주의와 이를 통한 ‘손에 안잡히는 돈들‘의 이익 체계는 무엇보다 평범한 시민들이 건드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자본은 당연히 축적되기 마련이니 이를 그냥 겸허히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모두가 뛰어나가 깃발이라도 들어야 될지 인식과 행동의 차이는 오늘날 재빠른 네트워크 시대에도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이에 촘스키는 바우만과는 약간 다른 관점을 피력하고 있는데요. 그는 그래도 희망을 놓아서는 안된다고 강조합니다. 희망을 끝까지 붙잡고 있어야 많은 이들이 좌절하지 않고 좀더 나은 세상을 위해 일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바우만도 많은 시민들의 각성과 행동에 대한 의지를 불어넣기 위해 노력했지만 말년이 되었을 때는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파행을 돌이킬 수 없다고 여긴듯 합니다. 뭐 이 점은 아까도 언급했지만 누구에게는 이러한 체제가 천국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촘스키는 그러면서도 인간이 정의와 자유의지, 평화를 갈구하는 것은 그것에 어떤 대단한 이념이 있어서가 아니라 순수한 인간이기 때문에 의심할 필요조차 없다고 단어하는데요. 물론 이에 적극적으로 동의합니다. 따라서 글 말미에 드는 생각은 이 신자유주의와 결탁한 보수 정치가 과연 인간에 대한 연민을 갖고 있을지에 대한 매우 궁금한 호기심이 드는데요. 타인에 대한 연민과 동정, 애처롭게 여기는 마음이 결여된 상태의 인간을 인간 본성의 불확실한 측면으로 봐야할지, 아니면 이기심을 마음에 푸는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어야 되는지 어떤 사회학자가 이 지독한 연구를 해줬으면 좋겠군요. 끝으로 촘스키는 일종의 프로파간다를 논하면서, ˝비열한 프로파간다라고 할지라도 진실 하나쯤은 섞는다˝는 주장이 유독 마음에 남았습니다. 대범한 신자유주의자들이 모든 시민들을 자신들과 비슷한 부류로 타락시킨 그 자유 시장 논리와 모든 인간은 이기적이다라는 지독한 편견은 뭔가 촘스키가 말하는 프로파간다와 묘하게 닮아 있다고 느껴집니다.

-아마 큰 의미는 없겠지만 본문 47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

애덤 스미스는 그들에게 자기 이익뿐만 아니라 영국민을 포함해 다른 사람들, 특히 ‘유럽인들의 야만적이고 불공정한 결정‘에 피해를 입은 다른 곳의 사람들이 받을 고통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했다

스미스는 "타인을 더 많이 생각하고 자신을 거의 도외시하는 모습이 인간 본성의 완성"이며, 조화로운 삶을 위한 주춧돌이라 생각했다

이기주의를 찬양하면서도, 타인을 향한 연민과 타인의 행복에 대한 염려가 인간 본성의 근본적인 특징이라고 가정한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흄이 틀렸다는 증거는 역사와 경험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정치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국민건강보험 요구처럼 덜 급진적인 운동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핵무기로 진압할 수 있을까? 군대와 경찰을 동원하면 억압할 수 있을까?

신자유주의자들이 민주주의를 주된 목표로 공격함으로써 민주주의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의 의도대로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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