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사회 - 평등이라는 거짓말
대니얼 리그니 지음, 박슬라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8월
평점 :
품절


미국 텍사스 주에 소재한 세인트메리 대학의 사회학과 교수인 대니얼 리그니는 로버트 머튼과 군나르 뮈르달을 연구하는 학자이자, 사회 정의와 관련된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민주주의에서 평등의 회복이라는 문제에도 관심을 갖고 있는데요. 보편적으로 사회 정의에 집중하는 학자들은 마찬가지로 시민들의 평등과 관련된 보장에도 관심을 갖게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저자가 연구 분야를 포함해 문화사회학쪽에도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아 왠지 피터 싱어와 학문적 유사성을 보인다고 여겨지는데요. 다윈주의적 사회학에도 비판적인 입장에 서 있는 것으로도 이해됩니다. 이 책은 원제, ˝The Matthew Effect : How Advantage Begets Further Advantage˝로 지난 2010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1년 8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일단 국역으로 된 책 제목과 관련해 한가지 아쉬운 점은 원제를 그대로 적용했으면 좀 더 의미전달이 잘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는데요. ‘평등이라는 거짓말‘도 그렇고 제목까지 독자들이 책을 펼치기 전에 뭔가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뉘앙스이지 않나 개인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입에 유명한 마태복음의 한 구절로 시작되고 있는 이 글은, 전반적으로 로버트 머튼의 ‘마태 효과‘에 대한 일종의 해설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마태 효과를 아주 간단히 설명해 본다면 ˝우위와 열위의 양자 비교에서 그 격차가 터무니없이 벌어질 수가 있는데, 이를테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격차가 계속해서 벌어질 수 없는 상황과 그 이유를 사회학적으로 규명하기 위한 학문적 연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더 간단히 말씀드리면, 빈익빈 부익부와 양극화 정도로 설명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동안 많은 경제학자들은 다윈의 도태론을 접목시켜 불평등의 문제속에서 그 메커니즘이 사실상 일어날 수밖에 없는 문제임을 강조해 왔습니다. 이러한 불평등 문제가 사회를 좀 더 발전시키는 추동 요인이 되고, 각자 개인들이 스스로의 삶을 위해 더 노력하게 된다는 이론일텐데요. 제가 경제학자들의 저런 주장에 동의하지는 않습니다만 사회학적으로 이런 현상을 연구하는 것은 꽤 의미있는 일이라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그저 인간 사회의 불평등 문제를 ‘극히 자연스러운 부분‘이라고 인정하고 크게 문제를 삼지 않으면 일부 세력이 현상을 오도하게 되는 일이 벌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에밀 뒤르켐이 모든 사회학에서의 주장들이 마땅한 근거를 갖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은 절로 수긍이 될 정도이니 말입니다.

따라서 저자의 이 글은 이 마태 효과를 기반으로 과학과 기술분야, 경제분야, 정치와 공공 정책의 분야, 교육과 문화 분야에서의 우위와 열위를 기본으로 어떻게 경제 분야에서 뿐만 아니라 이 양자의 격차가 극심하게 벌어질 수밖에 없는지 해당되는 적절한 여러 사례들을 취합해내고 있습니다. 이미 1장 후반부에서 ˝사회적 삶의 다양한 면에서 빠짐없이 마태 효과가 발견되고 있고, 대항력이 부재할 때는 사회적 결과에 대해 잠재적으로 강력한 결정 인자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의 근거들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장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3장의 경제학 분야의 마태 효과를 조금 살펴보자면, 저자는 경제학자들이 이 마태 효과에 대해 다소 인지를 하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경제학자들이 무지하다기 보다는 마태 효과를 규정하기 전에 매우 불확실한 요소들이 산재해 있기 때문에 일종의 규정의 어려움으로 판단하는 듯 보입니다. 특히 마태 효과는 ‘자원 분배의 불균형‘으로 설명하려는 요인이 있기에 특히 부자들과 빈자들의 사회경제적 격차를 앞선 수단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것에 수긍하게 됩니다. 어차피 이미 나와 있는 수많은 사회학적 이론에 의해 격차가 크면 클수록 그 반대 급부는 꽤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성향이 있습니다. 사실 구태의연하다는 종속 이론을 살펴봐도 북반구가 남반구를 종속에 불과한 상태로 몰아넣으면 그만큼 북반구에게는 엄청난 이익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됩니다. 미국이 칠레를 사실상 엘리트 들에 의한 과두제에 처하게 만드는 등의 일종의 정치 모략을 통해 미국의 이익을 극대화시키는 일련의 개입들이 이러한 맥락으로도 읽힐 수 있습니다. 사실 소설을 쓰자는 것이 아니라 미국은 표면적으로는 건전한 민주주의를 전세계에 확산시키겠다는 대의를 표방했지만, 속으로는 CIA를 통해 더러운 전쟁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해당 국가의 엘리트들을 지원하여 친미 정부를 세우는 등의 국가 헤게모니를 적극적으로 획득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이 마태 효과가 ‘착취의 효과‘로도 읽혀지는데요. 이 글 3장과 뒤이어 4장에서도 ˝가난하 자들의 처지를 더욱 구렁텅이로 빠트리는 결과를 초래하는 이 극심한 빈익빈 부익부는 상대적으로 부유층에게 커다한 이득이 되어 왔다˝고 전반적으로 논증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역효과의 원인은 신자유주의적인 세계화와 그동안 자유 시장주의의 함의로 인해 분배의 문제, 특히 사회적 자원 분배의 불균형이 상황을 악화시켜 왔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다만, 저자는 약간 완곡한 어조로 ‘현대 자유주의의 영향‘이라고 일단 해석하고 있는데요. 아니 그냥 신자유주의의 여파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현대 자유주의로 갖다 쓰는 점이 다소 이해는 되지 않았습니다. 전반적으로 글의 논조가 꽤 신중한 면이 있기도 한데요. 그런 연유 때문인지 아니면 좀 더 면밀히 이론적으로 구분하기 위해 자유주의의 세련된 버전과 같은 수사적 표현을 갖다 붙인 것은 불확실해 보입니다. 또한, 6장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이 마태 효과에 대한 여러 분파들의 판단에 대해 불평등을 그저 불가피한 자연법칙이자 사회적 편익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아직도 상당하고 그러면서 이 불평등에 대해 어떠한 인식도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저는 앞장에서 절묘한 비유로 넣은 다음과 같은 구절을 좋아하는데요. ˝야구로 치면 3루에 있는 자가 원칙적으로 3루에서 태어난 것에 불과한데 자신은 스스로 이 3루를 쟁취했다고 여긴다˝는 표현은 이처럼 극적입니다. 즉, 이미 부자인 사람들은 부모를 잘 만났거나 상당한 유산을 받은 케이스들이 많을 텐데 그보다 반대의 경우, 가난한 사람이 정말 엄청난 노력과 기회를 잡아 부자가 될 확률은 현 사회와 경제적 상황에서 거의 소수 점대에 수렴한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이것은 사회의 계층적 강고화가 보유한 부에 따라 강화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할텐데요. 자본주의가 계급주의적 상황을 긍정한다고 볼 수 없는 이데올로기인데, 이미 교조의 법칙을 부정하는 상황이 현 사회에 나타나고 있다고 봐도 됩니다. 결국 많은 이들이 자유로운 경제활동과 그에 따른 번영으로 자신과 자신 가족의 운명을 바꾸게 할 수 있다는 유토피아적 발상이 거의 허구로 돌아가고 있는 것은 전혀 과장이 아닙니다. 금융 자본주의로 자본주의가 한번 더 변화하게 됨에 따라 아메리칸 드림과 같은 꽤 선명한 인간 발전의 자화상은 더이상 목격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마태 효과로 설명되는 현 시대의 자화상은 어떻게 보면 민주주의에서의 평등의 실종과 관련이 깊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민주주의의 평등을 약화시키는 것은 일종의 ‘거세된 민주주의‘라고 여깁니다. 저자는 이 글의 6장에서 ˝누진세와 사회보장제도, 메디케어, 인권운동과 여성평등운동이 없었다면 과연 미국은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라고 반문합니다. 많은 이들이 경제적인 측면만 바라보고 이러한 번영이 인간 사회의 선결 조건이라 여기는 듯 하지만 실상 사회의 구성원인 시민들이 인간답게 그 권리를 항유하게 된 연유에는 기본적인 평등의 정신과 인권의 개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경제학이 이런 중차대한 가치를 뒷받침해 왔다고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이젠 시장의 공정성을 믿는 자유주의 철학이 철회되어야 함은 마땅합니다. 아주 단적으로 돈이 더 많은 자들이 훨씬 자유로울 수밖에 없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자유의 빈곤을 받아들 수밖에 없는 작금의 현실입니다. 아예 ‘승자 독식‘의 기조를 강화시켜 더욱 불균형 사회로 만드는 데 이바지 한 것이 바로 저 자유시장 이론이 아니었습니까. 저자는 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일침을 하고 있는데요. 경제학자들은 이미 사람들을 가난이라는 덫에 가두는 다양한 인과적 순환을 알고 있다고 명백하게 글에서 서술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유 시장의 공정이라든지, 선순환 내지는 모두의 경제적 번영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고 이를 이미 경제학자들은 인지하고 있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끝으로, 이곳에서 다루고 있는 이 마태 효과는 사회경제적으로 중요한 이론이라고 생각됩니다. 제가 자주 바우만을 인용했습니다만, 그는 ‘경제학이 인류의 태동과 함께 등장한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다‘고 자주 강조해왔습니다. 더욱이 가난한 자들을 배를 곯게 해야 스스로 일을 하게 될 것이라는 허버트 스펜서와 비슷한 생각을 공유하는 회의론자들을 비롯 이러한 체제에 달콤한 과실만 먹은 이들은 전혀 현 상황의 부조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겁니다. 온건주의자라고 잘 알려져 있는 조지 소로스조차도 이 자유 시장체제에 대해 문제점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시민들에게 인내를 발휘해 줄 요구만을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모두가 잘 살수 있을것이라고 믿었던 애덤 스미스를 교조적으로 만든 신자유주의자들을 비판하기에도 이미 많은 시간이 흘렀고 시민들 중 대다수는 ‘계몽적 이기심‘과 같은 말도 안되는 수사가 판을 치는 마당에 권력의 불균형 상태 마저도 이를 악화시키고 있는 실정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이 그저 쳇바퀴 같은 현실에서 실낱같은 개선의 가능성을 보려 노력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진보는 지리멸렬했고 보수주의자들은 신자유주의와 결탁하고 보낸 햇수만 40년이 넘습니다. 사실 평등이 뒤집어 쓴 허위와 다름없는 오욕을 걷어내는 것만 해도 이미 숨이 벅찰 지경인데 해결해야 될 문제는 이미 산적해 있습니다. 저는 정치가 경제와 대결해서 어떠한 결과물을 만들어야 한다기 보다 후퇴한 정치의 영역을 다시 회복 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금권 정치의 문제, 이익화 된 정치인, 더욱 가중되는 경제적 불평등은 자꾸만 현실을 도외시하는 시민들을 잉태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이 글의 결론에서도 ˝부자들의 이익은 가난한 자들이 얻는 이득을 크게 능가한다˝고 입증하면서 경제 성장 자체의 명암을 확실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하고 있습니다. 고삐풀린 자본주의가 과연 우리의 삶을 어디로 인도할지 불안한 마음만 가득합니다.

마태 효과에 대한 연구는 대다수의 사람들보다 특히 선행적인 우위를 만끽하고 있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할 수도 있다

모든 사회적 제도는 어느 정도는 의도하지 않았던 부가물들이 자연스럽게 축적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그로 인해 발생된 불평등은 억압된 계층들 사이에 불평불만과 적대감을 불러일으키고 이는 사회적 불안과 갈등으로 이어진다

우리의 주장은 마태 효과가 엄연히 실재하며, 사회적 삶의 다양한 면에서 빠짐없이 발견되고 있고, 대항력이 부재할 때는 사회적 결과에 대해 잠재적으로 강력한 결정 인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보다 발전된 사회에서는 비교적 민주적이고 공평한 정치체제를 유지하고 경제지배층이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정치적 절차를 좌우하지 못하도록 제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 - 신자유주의 헤게모니의 위기 그리고 새로운 전망
낸시 프레이저 지음, 김성준 옮김 / 책세상 / 202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국 뉴욕의 소재한 뉴 스쿨의 철학과 교수로 재직중인 낸시 프레이저는 정치철학자이자 비평가로 큰 존경을 받고 있는 학자입니다. 특히 그녀는 사회 구조적인 측면에서 더욱 소홀히 될 수밖에 없는 사회 정의에 대한 완고한 지지자로 자신의 정치철학이 성숙해짐에 따라 마찬가지로 여러 저술 활동을 통해 이를 강화해 나가고 있습니다. 제가 낸시 프레이저를 특별하게 여기는 이유는 그녀가 페미니스트 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정의와 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마찬가지로 중요하게 여기고 있고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이를 주지시키는 데 온 힘을 다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실천적 지식인이라는 용어는 아마 프레이저를 전형적으로 뜻하는 것이 아닌가 자주 생각해 보게 됩니다. 또한, 안토니오 그람시의 사상을 언뜻 떠올리게 하는 이 책의 제목은 지금의 시대상을 설명하는 데 꽤 적절한 표현이라 여겨집니다. 이 책은 지난 2019년, ˝The Old Is Dying And The New Cannot Be Born˝이라는 원제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2월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죽는날까지 전세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세계에 회의적 전망을 철회하지 않았던 지그문트 바우만의 문장이 절로 생각날 정도로 글의 초반이 시작됩니다. 저자인 낸시 프레이저는 이러한 위기감을 느끼게 하는 기저에 정치의 문제라기 보다는 특히 경제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첨예한 냉전의 시기를 거치고 난 후, 흔히 민주주의와 자유 진영의 승리라는 폭죽을 터뜨린 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사회주의 진영의 몰락이 있었기 때문에 금융 자본주의의 노골적인 전방위적인 헤게모니 획득이 여러 사회 문제 내지는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된 것이라고 판단하지는 않습니다. 대적의 이데올로기, 대응의 신념 등과 같은 서로 직접적인 균형에 따른 시스템의 긴장을 야기하면서도 그 속에 사회적 안정을 보장한다는 특별한 논리에 마찬가지로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획기적인 경제 정책의 입안과 좀 더 노동력을 탈피한 자본주의의 발전을 포함한 첨단 금융화는 ‘더욱 가깝고 밀접한 세계화‘를 주장한 신자유주의의 도래에 급물살을 타게 되었는데요. 이 신자유주의가 일부 자유 진영과 선진국에게 크나큰 이득이 되었던 것은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부 개도국들도 이런 혜택을 받기도 했었죠. 사실 굳이 사회학적인 관점이 아니더라도 어떤 현상의 이면에는 또 심각한 문제들이 감춰져 있기 마련입니다. 북반구가 남반구를 경제적으로 착취한다든지, 지금도 해결되지 않는 아프리카의 심각한 빈곤 문제, 굴뚝 산업을 비용 합리화는 미명하에 개도국에 이전시키는 행위 등을 차치하더라도 말입니다. 따라서 외형적인 경제 규모의 획기적인 증대를 추동한 신자유주의는 승자독식이라는 미명하에 초효율과 초집중으로 수식되는 고도의 경제적 불평등을 야기시켰습니다.

이에 낸시 프레이저는 이런 신자유주의의 파급 효과에 따른 사회진보적 측면을 논하면서 이른바 ‘진보적 신자유주의‘를 통해 신자유주의의 분화를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이런 진보적 신자유주의를 형용 모순이라는 말로 인정하고 있지만 이는 아마도 1980년 ‘정치적 진보세력의 사실상의 신자유주의적 헤게모니 인정‘과 투항을 설명하는 것 같습니다. 이 진보적 신자유주의의 그룹은 과거 빌 클린턴으로 대표되는 성공적인 민주당 세력을 뜻합니다. 그래서 대처의 ‘대안은 없다‘는 이런 측면의 이해를 보여주는 것으로도 읽힙니다. 이것은 요즘 말로 하면 뭔가 ‘강남 좌파‘가 비판을 허락하지 않는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프레이저 식으로 ‘알맹이 없는 훈계 운운‘하는 것으로도 느껴지는데요. 저로서는 저 진보적 신자유주의에 대해 쉽사리 동의하기가 어려웠습니다. 80년대 이후 서구 사회가 신자유주의에 종속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봐도 무방한 판국에 경제 전반의 발전과 이를 통한 사회 진보 및 시민의 의식 변화와 같은 신자유주의가 전혀 기대하지 않은 결과물만을 가지고 진보세력의 신자유주의적인 수용으로 이해하는 것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것은 마치 막대한 부를 부유층들이 간혹 기부활동과 자선 사업을 하는 것을 보고 신자유주의가 경제적 분배에 직접적으로 기여를 하고 있다고 홍보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읽힙니다. 어쩌면 프레이저는 무페와는 다른 식으로 진보 좌파의 몰락을 얘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으나, 다소 엉뚱하게 건전한 이미지를 부여하는 진보적 신자유주의와 미 공화당 출처의 반동적 신자유주의를 구분하여 후에 후술될 트럼프 주도의 ‘우파 포퓰리즘‘이 등장하는 일종의 정치 변화를 중점으로 논증하기에 이릅니다.

우리가 이미 익히 알고 있듯이 도널드 트럼프는 평생에 걸쳐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산 인물입니다. 그는 기존의 엘리트 지배체제를 여러 차례에 걸쳐 비판했지만, 집권기에 월스트리트에 어떠한 개혁안도 제시하지 않은 인물이고 또한 이미 희망을 잃고 좌절한 백인 노동계층의 분노를 부추겨 자신의 정치적 이익으로 삼는 그야말로 반지성주의와 반체제에 화신이기도 하죠. 그런 가운데 프레이저가 정확히 짚고 있는 이 파편화의 원인, 즉 ˝전지구적이고 금융화된 현행의 자본주의˝라는 점은 매우 명확합니다. 그렇다면 그런 관점에서 트럼프의 정치가 아무런 해결책이 되지 못한 건 사실이죠. 그래서 ˝진보적 신자유주의의 무능˝은 차치하더라도 이를 진보적 포퓰리즘과 같은 새로운 정치 현상으로 사실상 개선시키고자 의견을 피력하는 것은 쉽게 동의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그냥 정치의 많은 기능을 대신하고 있는 경제 전반의 문제를 민주적 통제로 회복시키면 될 일입니다. 그러한 어젠다을 만들고 시민들에게 그런 취지의 공감대를 설득시키고 정부가 두번 다시는 사회를 배신하지 않도록 민주 정치의 균형과 견제의 가치를 다시 확립하면 될 일이지요. 물론 트럼프의 탄생은 기존의 엘리트 지배 체제의 사실상 실패라고 볼 수 있으며, 인종 혐오와 성차별 옹호 및 소수자 인권을 쓰레기통에 처박은 우파 포퓰리즘과 같은 괴물과 더불어 대안 우파와 같은 비정상적인 정치 세력을 낳은 것은 전체적인 그림에서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것은 분명합니다. 이 거대한 자본의 권력이 정치를 전혀 개선시키지 못한 것이죠.

다만, 프레이저가 이 글을 통해 트럼프의 출몰과 그에 따른 미국 정치의 파행을 지식인의 양심으로 분석해 내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부분입니다. 하지만 트럼프가 자포자기한 백인 노동자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게 된 것은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결과물이며, 시민이 제대로 된 비판과 그에 따른 숙고를 하지 못하게 된 연유에도 바로 신자유주의가 있는 것입니다. 과연 이같은 결과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요. 시장의 자유를 강조하는 프리드먼주의자들과 이에 동조한 금권 정치, 일반 노동자들의 경제적 건전성이 시민 사회의 토대가 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노동 조합 자체를 악마화 시켜 이에 동조한 우리들의 책임도 분명 있는 것이겠죠. 바우만은 바로 이 점을 우리에게 누누히 강조한 것이고, 더 많이 확대되고 강화된 민주주의 만이 이를 타개할 유일한 해결책일 겁니다. 이것은 샹탈 무페 또한 동의한 부분입니다. 민주주의가 그동안 1세기에 걸쳐 너무 과용되었다고 주장하는 자들부터 비판의 재갈을 물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신자유주의의 승리가 민주주의의 승리와는 아무런 하등의 관계가 없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프레이저의 실로 놀라울 만한 양심은 충분히 인정하지만, 진보적 신자유주의를 인용하기에 앞서 민주주의에 헌신하지 않은 수많은 정치인들의 명단을 만들어 이를 먼저 비판하는 것이 더 중요하리라 생각됩니다. 또한 뼈아픈 시민들의 반성과 다시 정부에게 정당한 정치를 되돌리기 위해 신자유주의와 맞서 싸우는 것이 거대한 금융 자본주의의 독선을 막는 실효적인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론으로 수록된 대담집이 생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점을 마지막으로 밝혀두고 싶습니다.

-17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 이같은 거대한 출판사가 오타 하나도 처리하지 못한 것은 매우 실망스러운 부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서문에 역자가 쓴 좌파와 우파의 선동가라는 문장에 대해 약간 이견을 내고 싶은데요. 전후 맥락은 아마도 저자인 프레이저가 진단하고 비판한 현 상황의 정치경제적 모순과 파행의 현실 진단 정도로 쓰신 것 같은데, 엄밀히 따지면 좌파 선동과 우파 선동은 명확히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좌파 포퓰리즘을 두둔할 생각은 없지만, 극심한 인종 혐오와 성소수자에 대한 격리, 다른 종교에 대한 배격 및 시민의 분노를 조장하는 우파 및 극우 포퓰리즘을 차베스의 그것과 동일 선상으로 보는 관점은 실망스러운 부분입니다. 과거 티파티 운동의 초기에는 미국 내의 진보세력을 격멸의 대상으로 삼은 점은 좌파 세력에게 혁명 운운의 철지난 스탠스를 강요하는 것과는 다른 부분입니다. 제 요점은 저 우파 포퓰리즘은 이미 전체주의와 다름 없다고 보는 시각에 동의합니다. 따라서 사회학의 카테고리 내에서 우파 포퓰리즘과 좌파 포퓰리즘(용어 조차도 동의하기 힘들지만)의 인식적 대응은 한쌍으로 동등하게 볼 문제가 아닙니다. 현 지배체제인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맞대응하려는 좌파적 정치 운동을 죄다 좌파 포퓰리즘으로 이념 덧씌우기를 하고 있는데요. 이것은 애초에 포퓰리즘 연구가 잘못되었다는 반증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헤게모니란 지배계급이 자신의 세계관을 사회 전체의 상식으로 상정함로써 자신의 지배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이게끔 만드는 과정을 가리키는 그람시의 개념이다

샌더스와 트럼프 모두 신자유주의적 분배 정치를 맹비난했다. 그러나 둘의 인정 정치는 선명하게 달랐다

진보적 신자유주의의 훈계 두기가 이 문제(인종주의)를 다루는 데 얼마나 무능한지를 보여준다

여전히 모든 곳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는 신자유주의 정책들과, 크게 흔들리고 있는 신자유주의 헤게모니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또한 그들을(노동계급)을 그 어느 때보다 증폭된 병적 증상(분노에서 비롯되어 희생양 만들기로 표출되는 혐오와, 연대 의식이 사라진 골육상쟁의 세계에서 폭력 분출에 뒤따르는 엄청난 억압)속에 침수시킨다는 것을 뜻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본주의 리얼리즘 - 대안은 없는가
마크 피셔 지음, 박진철 옮김 / 리시올 / 201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마크 피셔는 영국 출신의 진보적인 사회철학자이자, 비평가, 문화이론가 및 저명한 언론인이기도 한데요. 더욱이 사적인 측면에서는 개인 블로그를 통해 영국의 여러 현안에 대해 글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스마트한 글쓰기‘를 몸소 실천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를 뜻하는 ‘k-punk‘는 꽤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저자가 오스트리아 출신의 진보적 언론인 로버트 미지크와 비슷하게 공통된 관심사, 유사한 방향성을 가진 인물로 해석되기도 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그는 여러 언론사에 직접 칼럼 형식으로 글을 기고하기도 하였으며, 여러 편저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피셔는 스스로 우울증 증세로 인해 48세라는 매우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는데요. 이에 역자 역시 이에 대한 안타까운 소회를 남기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자본주의의 사회병리적 현상을 논하면서, 영국의 우울증 관련 치료비 청구가 이미 건강보험공단에 들어가 있다면서 몇번이나 이 사례를 소개하고 있는데요. 피셔 역시 자신의 우울증을 극복하지 못하고(물론 극복할 수 없는 케이스도 있습니다) 생을 마감한 것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슬라보예 지젝 역시 이 글에 대한 특별한 헌사를 남기고 있었는데요. 촉망받는 학자이자 사회학 이론가가 이리 빨리 세상을 등진 것은 적잖이 불행한 일로 여겨집니다. 아마도 영국에서 그의 유고집이 출판된 것으로 보이는데요. 국내에도 빨리 번역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이 책은 원제 ˝Capitalist Realism : Is There No Alternative?˝로 지난 2008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8년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비교적 의미심장한 부제인 ˝대안은 없는가˝는 약간의 중의적인 의미로 마가렛 대처를 비판하기 위한 의미도 갖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지젝과 바우만의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자본주의의 본질에 대한 탐구심과 대체로 일맥상통하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자본주의는 유명무실한 포스트 포드주의를 거쳐 성공적으로 신자유주의와 결합되어 지금의 시기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이에 저자는 ‘보모 국가‘, ‘거대한 정부‘에 대한 일련의 신자유주의자들의 공격을 논하면서, 이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안무치하게 2008년 적극적으로 정부의 도움을 받았다면서 맹렬히 비판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들 신자유주의자들이 견고하고 내면화 된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다면, 일찍이 거대한 거품을 안고 있던 금융시장을 경고한 누리엘 루비니와 라구람 라잔을 일언지하에 일축한 저들이 천연덕스럽게 정부의 ‘특별한 구제 금융‘을 받은 것은 그 자체로 아이러니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과거 구소련의 공산주의를 무너트린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승리라는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저 ‘역사의 종말‘과 매우 비슷한 어감이 느껴집니다. 더욱이 어느 정도 자본주의가 모순을 안고 있지만 이를 대체할 대안이 명확하지 않다는 수많은 ‘안정주의자들‘과 신자유주의를 정부와 시민들에게 사실상 강요한 파시즘적 신자유주의자들을 우리는 양껏 비판하면서도 언제든지 ˝우리가 자본주의적 거래에 쉽게 응할 수 있는 환경에 놓여있다˝는 저자의 일침은 많은 사람들의 부실한 양심을 칼로 난도질 하는 것과 유사한 의미겠죠. 사실 이러한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결합에 따른 파행과 사회의 파편화에 대해 오로지 ‘건전한 비판을 상실한 좌파의 몰락‘이라는 핑계로 그동안 죄의식을 애써 떨쳐 왔는데요. 여기서 분명한 것은 우리는 피해자이자 동시에 가해자라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조지 소로스를 비롯한 수많은 체제 안정주의자들은 우선 자본주의가 일으키는 수많은 사회병리적 현상을 애써 무시하면서, 자신의 양심과는 아랑곳 없이 이러한 현상을 오로지 개인의 문제로 국한시키는 신자유주의자들과는 사뭇 다르기는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들 역시 적당히 인정하고 타협하며 ‘적잖은 자본을 소유‘ 하기에 이릅니다. 이처럼 안정주의와 반대의 격렬한 신자유주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이익에 따라 구분되기도 합니다. 마크 피셔는 이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창안하면서 어쩌면 신자유주의 자체의 문제는 오로지 이익을 맹종하는 그 이데올로기 자체로서 다른 정치적 이데올로기들 및 신념을 쓸모없는 고리타분한 영역으로 몰아세우는 데 있을겁니다. 이것은 그동안 수많은 사회학자들이 밝힌, ˝신자유주의 자체가 시장에서 정치를 몰아내는데, 온갖 파렴치한 노력을 기울인 과정˝에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것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인 ˝레이건주의적 인간 homo reaganus˝이 시사하는 바는 그래서 극적입니다. 사실 저에게는 이러한 논증보다 더 관심을 끈 부분은 왜 보수주의자들이 신자유주의와 쉽게 결탁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서였습니다. 앞선 물음에 대해 마크 피셔 만큼 정확히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 같기도 한데요. 물론 자신의 생각이 담겨 있기도 하지만 알랭 바디우와 데이비드 하비의 입을 빌어 말합니다. 그것은 ˝신자유주의 정치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계급 권력 및 특권으로의 복귀와 관련되어 있다˝ 는 해석입니다. 즉, 오늘날의 각지의 보수주의는 바로 민주주의 내에서 소유한 자본으로 인정받는 일종의 특권 정치를 하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그동안 첨예화 된 능력주의 meriotocracy 와 연계되어 있으며, 자본 이익의 극대화와 이기적인 소양에 대한 전반적인 긍정적 효과를 강조하는 일련의 사회적 작업이 모두 포함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애덤 스미스를 ‘시장 자유 경제학의 화신으로 만드는 작업‘도 이 지점에 포함되었다고 할 수 있겠죠.

따라서, 과거 자유주의의 이행과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의 강요는 이처럼 완전히 다른 체제일텐데요. 전자의 이행은 계몽주의적 시각에 입각해 인간을 진정한 해방에 이르게 하는데 힘쓴 것이며, 후자는 다수 시민의 자유나 권리에는 별 관심이 없으면서 오로지 돈을 가진자들의 자유, 시장을 완전히 법으로부터 탈피시켜 진정한 자유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 제가 이런 글을 쓰면서도 오싹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수가 없었는데요. 무슨 묵시록과 같은 음모론을 피력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포스트 포드주의를 거쳐 이행된 자본주의의 유일성은 그렇게 간절히 믿고 있는 것만큼이나 병리현상 내지는 심각한 모순을 초래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많은 경제학자들은 반대하고 있습니다만, 현재에 극도의 빈부격차와 경제적 불평등 및 사회적 격차는 건전한 자본주의를 위한 도덕주의적 관점과 민주적 통제를 손쉽게 제거함으로써 발생한 결과입니다. 이 민주적 통제에 경기를 보이는 경제학자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고, 이에 많은 정치인들이 동조하고 있는 것도 현실입니다. 자본주의가 민주주의에 반해 우월한 위치를 획득함으로써 먼저 자본주의를 고려할 것을 모든 정부들이 강요 받았습니다. 물론 저는 이를 완벽히 타파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본주의 체제를 공들여 좀 더 인간적으로 만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수많은 이론적 잣대와 정치적 가능성들을 배제시켜 왔던 것에 큰 문제가 있는 것이죠. 마크 피셔가 몇번이나 영국 내에서 우울증을 건강보험공단의 헤택을 받을 수 있는 질병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은 인간성을 상실한 자본주의 자체가 시민들의 건강을 해치고 있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수년간 누적되어 온 이러한 결과들이 사회와 나아가서는 국가 자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본래의 사회 계약과 시민의 삶을 위해 정부가 필요한 당위성 등을 고삐풀린 자본주의가 위태롭게 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으며, 신자유주의를 비롯한 시장자유주의적 경제이론에 마땅한 비판을 거부하는 행태로 이어져 왔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저자인 마크 피셔가 경제학적인 인간의 태동 같은 것을 마땅하고 자연적인 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자크 라캉의 정신 분석을 통해 비판하고자 하는 점은 꽤 특별한 부분이라 할 수 있을겁니다. 이를 통해 슬라보예 지젝의 또다른 독창적인 연구의 진면모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인데요. 지젝이 그만큼 라캉에 대해 연구하고 알린 것만큼 ˝많은 시민들이 그게 당연한 것이다˝라고 여기지 않게 되는 매개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지젝의 작업은 마땅히 찬탄을 받을만 하며, 이러한 지식인의 존재는 전세계인의 입장에서는 실로 귀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즉, 논의를 더 이어가자면 신자유주의의 이행에서 비롯된 관료주의적 이식은 ˝자본이 필요한 데로 정부가 협력할 필요가 있다˝는 식의 혁명이 되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이러한 경제사회적 매커니즘은 모든 자유주의 경제를 채택한 나라들에서 보여지고 있고, ‘복지의 다운사이징‘을 차치하더라도 자본의 축적 가능성과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한 거대한 소수 자본가들에 의해 세계 체제가 좌지우지 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저자가 단순히 오늘날의 세계를 ‘포스트 모더니즘적‘ 세계로 수용한 것이 아니라, 거의 다른 용어로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고 밝힌 것입니다. 정말 훌륭한 해석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처럼 앞선 1장에서 간략하게 의미를 밝힌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대안은 없다‘라는 마거릿 대처의 독트린이 야만스러운 자기-충족의 예언이 되었다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도덕주의적 관점을 자본주의에 새롭게 강요하는 것을 골자로 한 일부의 사상적 움직임이 있기는 합니다만 신자유주의자들의 조직적인 거부는 이미 정평이 나 있습니다. 결국 지젝의 예언대로 ˝자본주의가 망하는 것보다 전세계가 멸망하는 것이 빠를 것이다˝라는 뭔가 앞뒤가 바뀌어 버린 것 같은 건전하지 않은 의구심을 정립시키는 것 같은데요. 전세계가 망하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자본주의가 바뀌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문장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것은 ˝전 지구적 자본주의가 초래한 정부의 주변화라는 결과는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면서도 보모 국가는 지속적으로 적대시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고 저자는 일침하고 애초에 이 신자유주의자들이 이데올로기 자체를 배격하는 것에는 사실상 이들에게는 이데올로기 자체가 없기 때문일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의미는 양가성이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만 문제는 이들의 힘이 이미 너무나 거대해 일반 시민들이 최소한의 견제에 나설 수 있는 토양을 이미 상실했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피셔의 논의대로 오늘날의 현실이 과연 어떠냐로 시작해 이를 어떤 식으로 이해해야 할 것인가로 종결될 만큼 녹록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자본주의 자체를 더 강화시키는 이유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자본주의의 개선의 필요성은 있으나 참고 기다려라 라거나, 시장 자유 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배격한다 는 양자간의 택일을 강요받는 상황이 역사적 진보와 어떤 연관이 있을지는 매우 불명확합니다.

일찍이 애덤 스미스는 생산 능력의 확대가 인류의 비약적인 발전을 비롯한 여러가지 청사진을 기대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나날이 발전하고 있던 영국의 사회상은 역시 그를 고양시켰을 수도 있겠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미스는 당시 설익은 시장이라는 개념 자체에도 ‘도덕‘을 제외시키는 것은 필사적으로 반대했을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지식인들이 어용이 되지 말아야 하지만 이미 로버트 미지크가 비판한대로 자본에 종속된 지식인들이 대부분인 것은 오늘날 우리를 위협하는 대량 살상 무기 만큼이나 일방적인 상황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 측면에서 피셔의 이 책은 귀중한 글이며, 그의 짧은 생애가 더욱 아쉽게 느껴지는 이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약간의 논외로 네트워크 시대가 도래한 지금의 정치적 변화가 우리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개선 가능성이 될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피셔는 이에 대해서도 소위 종래의 자본주의 문화를 비판한 ‘힙한 문화‘ 조차도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와 밀착할 수밖에 없었다며 진단하고 그저 이 세계가 매트릭스 따름이 아니라는 자포자기로 끝나기 전에 뭔가 희망이 보여야 하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본문의 보모 국가와 관련해 당시 신자유주의적 정부가 유포한 복지의 여왕이 얼마나 터무니 없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 조차도 자신의 저서에서 당시 대처와 레이건은 복지 예산을 삭감하는 것은 아주 손쉬운 조치였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베를린장벽이 붕괴된 후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큰소리로 외쳤던 악명 높은 ‘역사의 종언‘에 우리 자신이 처해 있음을 깨닫고 있다

자본주의가 나쁜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는 동안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자유롭게 자본주의적 교환에 가담할 수 있다

진정한 정치적 행위 능력을 되찾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욕망의 층위에서 자본의 무자비한 분쇄기 안에 들어가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은 사회주의에 반대하면서 종종 하향식 관료주의가 계획경제에서나 볼 수 있는 제도적 경화증과 비효율성을 야기한다며 맹비난했다

시장의 명령과 관료주의적으로 정의된 ‘목표‘의 이같은 결합은 현재 공공서비스를 규제하고 있는 ‘시장 스탈린주의적‘ 실천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알랭 바디우와 데이비드 하비) 두 사람이 보기에 신자유주의 정치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계급 및 특권으로의 복귀와 관련되어 있다

자본주의적 기업들이 사회를 책임지고 보살핀다는 공식 문화와 다른 한편으로 기업들은 사실 부패하고 무자비하다는 등의 널리 퍼진 앎 사리의 분할이 그 특징이다

전 지구적 자본주의가 초래한 정부의 주변화라는 결과는 받아들이기 거부하면서도 보모 국가는 지속적으로 적대시하는 태도는 불신을 유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쉽게 믿는 자들의 민주주의
제랄드 브로네르 지음, 김수진 옮김 / 책세상 / 2020년 12월
평점 :
품절


프랑스 출신의 사회학자이자 작가인 제랄드 브로네르는 파리 디드로 대학의 교수이자 프랑스 인지 사회학 분야의 저명한 이론가이기도 합니다. 특히 그는 인종 혐오와 종교적 맹신과 같은 사회 현상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으며, 특히 프랑스 정부가 주도한 ‘지하디스트 급진화 예방 프로그램‘에 참여한 바가 있습니다. 물론 저 지하디스트 급진화 예방 프로그램‘이 과거 미군에 의해 이라크 아부그라이브 수용소에서의 전쟁 포로 학대와 같은 음험한 인상을 주기도 합니다만 이 프로그램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으리라 됩니다. 프랑스는 이웃 국가인 영국과 유사하게 중동에 있어서 이해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종교가 어떻게 인간을 폭력적이고 급진적으로 만드는 것에 대한 관심일 뿐만 아니라 근래 몇년 동안 유럽 사회학 학계에서도 이와 같은 맹종과 맹신에 대해 관심이 많기도 했습니다. 특히, 프랑스는 알제리와 튀니지 출신의 이슬람 이주민들이 이미 상당수가 유입된 상황이기에 자국내에 현존하는 이슬람 사회와 정치문화적으로 분리될 수 없는 상황임은 다들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이런 면에서 저자는 ‘혐오감에 대한 사회학적 의미‘와 같은 논문을 쓰기도 했고, 지금 소개해 드리려는 이 책에서도 개략적으로 포용된 민주주의 및 민주정치가 어떻게 ‘쉽게 믿는 자들에 의해 위태로울 수 있는가‘에 대한 앞선 함의가 일정 부분 연관되어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저자가 언급하는 민주주의의 3요소인 ‘알 권리와 말할 권리 그리고 결정할 권리‘의 기본적인 토대가 악용될 수 있다는 점을 꽤 신중하게 의견 피력을 하는 것으로 일단 짧게 나마 이 책의 주요 주장을 갈음해 보려고 합니다. 이 책은 지난 2013년 원제, La démocratie des crédules 로 프랑스에서 출간 되었으며, 국내에는 2020년 12월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오늘날 광범위한 인터넷 검색 시스템을 비롯한 손쉬운 정보화 시대에 있어서 구글과 같은 거대 인터넷 기업이 편의적인 검색 체계를 도입해 일종의 ‘인지 시장‘을 주도하는 상황을 저자는 꽤 회의적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검색을 통해 제공되는 정보 자체의 신뢰성을 차치하더라도 페이지에 나타나는 글 전체를 제대로 보지 않고 대략 특정해서 받아들이는 시민들의 행태에 대해서도 저자는 우려를 금치 못하고 있었는데요. 이 글의 1장과 2장은 이러한 매커니즘에 대한 신랄한 평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책의 제목이 말하고자 하는 ‘쉽게 믿는 자들‘이라는 관점은 ˝과거 오바마 대통령이 미국의 과학자들이 이미 완성한 화성 식민지에 임기내에 몇 번이나 방문했다˝와 같은 음모론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바로 이 귀가 얇은 자들이 인지 편향과 확증 편향을 통해 ‘신념화‘하는 과정을 2장에서 소개하는 ‘찰스 포트‘를 통해 약간의 이론화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소개하는 찰스 포트는 자신이 이 세계의 모든 지식을 흡수해 두각을 나타내 보이겠다는 황당한 야망을 가진 사람이었는데요. 이러한 그의 집착은 후에 ‘포티언‘이라는 일종의 괴현상을 발생시키기도 합니다. 이 찰스 포트는 지구가 평평하다는 주장을 철썩같이 믿기도 했습니다. 그에 대한 저자의 첨언에 의하면 그는 ˝미치광이도 그렇다고 바보도 아니었다˝고 합니다. 결국 이런 음모론자들이 정신병이 있거나 편집증적인 증상이 있을것이라는 추측은 상당 부분 잘못된 것이죠.

이와같이 근래 대표적인 음모론의 역사는 ‘9.11 테러를 미국의 CIA가 일으켰다‘는 주장과 유사한 것들입니다. 많은 증거를 갖고 있는 지극히 당연한 사건에 대해서도 의심을 갖고 파헤치는 수많은 인터넷 탐정들과 이것을 조장하는 많은 시민들, 그리고 심지어는 ˝그 어떤 부류의 직업보다 정보의 신뢰성과 경쟁 간의 모호한 관계에 직면한 당사자들‘인 기자들에 의해서도 이러한 분위기는 더욱 조장됩니다. 이를 아주 간단히 얘기하면 이러한 가짜 정보들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돈이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이를 획책하는 이들에게는 과도한 관심과 지명도 혹은 업계의 선구자와 같은 허위로 과대 포장된 일종의 정신적 고양감을 가져다 주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단순히 세상에 너무나 할일 없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라는 모든 걸 일축해 버리는 소리로 비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불행하게도 이러한 광범위한 현상의 결론에는 ‘전체주의‘가 좀 더 가까워지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기에 이는 우리의 민주주의 정치에서 뿐만아니라 인류의 역사에서도 꽤 불안한 현상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즉, 히틀러에 의해 시작된 나치는 처음부터 단순한 궤변을 넘어서는 황당한 논리들로 다수의 독일인들을 세뇌시켰기 때문입니다.

저자인 브로네르는 이같은 병적인 현상들에 있어 과연 대중이 특유의 비범함을 보이며 일축시킬 수 있겠는가에 대한 질문에 다소 확답을 피하고 있었습니다. 다수의 목소리를 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고 이것은 그 사람들의 교육 수준과는 상관이 없는 어느 정도 순수한 증오가 기반되어 있죠. 왜냐하면 우리가 이미 역사에서 전체주의를 통해 생생히 목격을 한 바가 있고 오늘날 비일비재한 인종혐오라든지 성차별 및 소수자에 대한 증오는 맹렬힌 포퓰리즘과 결합해 현재 유럽 사회에서는 분명 심각한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조심스레 저자는 ‘신념화에 대한 맹신과 맹종에는 부족한 교육 수준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습니다만 민주주의의 상대주의적 관점도 이를 ‘다양한 의견의 개진‘이라는 압묵적인 수용도 분명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독일과 프랑스에서 보이는 ‘과거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인정하는 않는 수많은 의견들˝에 대해 법적인 처벌을 하고 있는 연유에는 건전한 사회를 터무니 없는 파편화에 이르게 할 수 있기 때문일겁니다. 사회의 안전성을 거부하고 불안과 폭력을 조장하는 수많은 음모론들의 이면에는 민주주의 자체에 거부감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민주 사회가 이만큼 취약하니 ‘말할 권리‘로 포장하여 일종의 인간의 불확실성을 더욱 조장하는 것이겠죠. 그러다가 소수 전문가의 권력이라든지, 더 나아가서는 엘리트들의 소위 과두제의 필요성의 불이 붙을 것입니다. 여기에 버틀런드 러셀은 그다지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인간이 불확실한 존재‘임을 특유의 휴머니즘적 관점으로 설명한 바가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사회 계약이라는 것도 인간들의 불확실성을 의한 불안 요소를 방지하고자 고안한 장치일 수도 있을테죠. 물론 오로지 자신들의 주장만 존재하는 (과학적 증거와 논리적 근거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음모들과 거짓 정보들에 대해 시민들이 어떠한 분별력을 가질 수 있겠느냐에 대한 물음은 이러한 인터넷 시대의 우울한 측면임은 분명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회의적인 측면을 넘어서 민주주의 자체를 위협하는 것으로 분화되고 확장되고 있는데요. 일례로 ‘고삐풀린 정보 자유주의‘에 기반한 폭력적인 정치 현상인 ‘포퓰리즘‘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습니다. 과거 도널드 트럼프가 오바마 전 대통령에 대한 출생지 불분명과 같은 주장에 대해 이면에 담긴 인종혐오와 더불어 이같은 거짓 정보를 심지어 우리나라 정치인들까지 인용하는 것을 보면 단순히 교육 수준과 지능의 문제에 국한된 것은 아님은 확실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하자고 하는 것은 분명 안될 일일 것입니다. 다만, 이 글 5장에서 밝히는대로 ˝전문가들의 평가가 대체로 안전한 정치적 결정을 기반해주는 현실˝과 관련된 사항 전부를 토론의 장으로 초대됨으로서 이 세계에는 전문가의 권위와 과학의 실효성이 점차 거부되고 있는 것도 분명해 보입니다. 사실 전문가들의 권력 자체가 남용되는 것은 민주주의 자체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반대로 특정한 전문 영역에 대한 일반인들의 논증 없는 거부감 또한 전반적인 사회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죠. 저는 이 부분에 대해 저자와 약간 생각이 다른 점이 민주주의가 일찍이 모든 문제들에 대한 다양한 토론에 대해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을 결코 부정해서는 안되며, 특히 정치와 관련된 문제는 그 매커니즘이 전문가의 영역에 걸쳐 있다 하더라도 시민들이 다양한 의견을 개진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전문가 역시 증거에 기반한 논법과 제안을 피력하고 마찬가지로 이러한 증거에 기반한 결정 사항에 판단을 내린 정치 권력 자체에 반감을 가져서는 안되지만 전문가들이 자신들의 돈과 권력에 굴하지 않고 자신들의 양심에 의거해 발언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중요합니다. 바로 막스 배버가 비슷한 취지로 소위 전문직종의 양심을 강조한 이유일 것입니다. 따라서 테크노크라시‘와 같은 문제를 시민들이 합리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환경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여겨집니다. 전문가의 권위가 다소 퇴색되더라도 민주주의의 공개적 발언의 장이 마련되어 오용되는 전문 지식을 구별하고 견제하는 기능이 한편으론 마련되어야 합니다.

인류에게 있어서 민주주의가 완벽한 정치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수에 의한 소수의 억압과 같은 문제와 민주주의 성격상 혼란한 정치 상황 자체는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주장되어 왔습니다. 오늘날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진 베트남이 자신들의 정치 문제에 대한 어떠한 논의도 공개적인 자리에서 할 수 없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수많은 의견을 포용하거나 혹은 인정할 수 없는 그룹이나 특정 계층을 민주주의가 어디까지 수용할 수 있겠느냐의 물음도 있겠지만 보편적 상대주의라는 것은 소수를 억압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 장치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이처럼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자들 조차도 민주주의의 이러한 보편적인 상대성에 말할 권리를 보장받은 것입니다. 자본주의가 수많은 경제학자들에 의해 보호받고 있지만, 민주주의는 적나라한 비판까지도 수용할 수 있어야만 하는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민주주의 자체가 많은 결함을 가진 불완전한 사상이라고 힐난하기 이전에 이러한 건전한 기반을 거리낌없이 이용하는 자들을 일차적으로 먼저 비핀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4장에서는 ˝귀가 얇아 쉽게 믿는 자들의 민주주의는 새로운 형태의 포퓰리즘이 꽃필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저자는 전제하며, 포퓰리즘이라는 용어 자체가 가장 명예롭지도 못하면서도 가장 많이 공유되는 성향에 주어지는 정치적 표현이라는 다소 온건한 설명을 곁들이고 있습니다만 이 포퓰리즘이 우리의 판단 착오로부터 기생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와는 별개로 저자의 통찰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증오와 분노를 자양분으로 삼고 있는 이 포퓰리즘이 과연 어떤식으로 귀결되지에 대해 그리고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적지 않은 사람들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해서는 아마도 더 많은 연구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앞선 독일과 프랑스의 나치 부정에 대한 볍률과 마찬가지로 포퓰리즘이 돌이킬 수 없는 어떤 폭력과 죄없는 자들의 막대한 희생을 치루고서 겨우 ‘포퓰리즘 방지법‘과 같은 터무니없는 사후 약방문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뭔가 수사에 불과해 보일지도 모르는 우리의 지식 정보 사회가 일정 부분 제도권의 교육이 하지 못하는 일들도 하고 있기에 이른바 선한 행동을 추동하는 집단 지성의 존재 등과 같은 긍정적인 신호 또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저 모두가 자신들의 이성이 현명한 정치로서 발휘될 수 있도록 간절히 바랍니다.

같은 사회적 공간에 소속된 주체들 사이에 엄격한 협정을 맺어야만, 자유화가 진행 중인 다른 인지 시장에서 나타나는 주된 경향을 저지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인민을 배신할 가능성이 있는 정치권력의 통제를 위해 다소 형식적인 공간을 늘 마련했다

여성학자이자 정치학자인 캐럴 패이트먼이나 사회학자인 벤저민 바버 같은 이론가들은 시민 모두가 공적 사안에 뛰어드는 것이 진정한 정치적 자유의 조건이라고 보았다

다시 병에 대한 비유를 빌려 말하자면, 필자는 민주주의가 특벙한 기술적 여건 아래에서만 드러나는 유전병을 앓고 있다고 표현하고 싶다

한 집단이 사화적 가변성의 관점에서 아무리 다양하더라도, 인간의 사고를 이루는 불변요소들 때문에 오류를 향해 수렴할 수 있다는 가능성 말이다

어떤 포퓰리즘은 인미의 외국인 혐오증을 먹고 살고, 또 어떤 포퓰리즘은 부자와 권력자에 대한 인민의 혐오를 먹고 살며, 또 다른 포퓰리즘은 평등에 대한 인민의 지나치게 단순화한 인식을 먹고 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편견 - 인류의 재앙
프레데릭 마이어 지음, 임호일 옮김 / 소명출판 / 201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독일 프랑크푸르트 출신의 교육학자이자 철학자였던 프레데릭 마이어 (혹은 메이어)는 미국 캘리포니아의 레드렌즈 대학 등 여러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는데요. 특히 평생에 걸쳐 영향력있는 인본주의자로 명성을 얻기도 했고 창의력 및 교육 문제에 관심을 갖고 많은 저술활동을 한 이력이 있기도 합니다. 이런 왕성한 그의 집필활동은 교육을 통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목적에 거침없이 일생을 헌신한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2007년 7월에 세상을 떠난 그를 그리며 전방위적인 사회 교육과 관련된 ‘프레드릭 메이어 소사이어티‘가 설립되기도 하였습니다. 이 책은 지난 2010년 원제, ˝Vorurteil - Geißel der Menschheit˝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6년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먼저 저자는 ‘편견‘과 관련된 해석과 관련해 ˝인간 상호간의 영역에서 발생하는 적개심의 행동표본˝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사실 일반적으로 불특정 다수의 인간들이 모여 있는 사회 곳곳에 어떤 특정인들에게는 이성과 양심을 가진 인간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사고와 행동을 하는 케이스를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는데요. 애초에 각 개개인은 성별과 인종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만큼 자연적인 법칙을 인간이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한 편입니다. 평범한 자들조차도 가난한 사람들을 터무니없이 증오하는 경우와 중세시대부터 이어져 온 유럽의 반유대주의, 가깝게는 미국의 흑인들에 대한 혐오와 반발심, 심지어 여성에 대한 모멸적이고 증오에 가까운 도발은 무지몽매한 편견이라는 이름으로 서술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저 그런 터무니없는 편견에 가득찬 인사들을 단순히 ‘무지의 베일‘에 가려져 있다고 배려를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저들의 지능을 낮춰 보는 일이 될 텐데요. 이 글에서 소개하고 있는 일련의 폭력을 수반하는 편견에 대해 책의 원제대로 ‘인류의 재앙‘이 될 수도 있는 일이겠지요.

저자인 마이어는 이런 편견의 증오와 관련해 우선 시민들이 ‘프로파간다‘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는데요. 마찬가지로 현재 유럽에서 발생하고 있는 인종 혐오의 극우 포퓰리즘이 저런 말도 안되는 프로파간다의 전형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계층들의 사회에 대한 불만, 다른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표면적인 증오, 분노의 감정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을만한 수단 등은 오늘날 포퓰리즘이 품고 있는 반사회적인 다의입니다. 이런 것들은 거듭 제가 밝혀 왔습니다만 최소한 인간이 인간임을 드러내는 이성과 양심이 있다면 충분히 분별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프로파간다가 아무리 귓가에 달콤하게 들린다 하더라도 그동안 읽어왔던 독서와 사고의 깊이와는 상관없이 최소한의 이성을 갖고 있는 인간이라면 충분히 제어할 수가 있겠지요.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하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얼마전에 구글이 공개한 자료들을 보면, 특히 2차대전 당시 나치가 자행한 유대인 학살과 관련해 이것이 날조되었다고 믿는 계층이 상당수라는 것은 그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단순히 믿고 싶은 것만을 믿는 행위 정도가 아니라 역사를 부정하고 진실에 눈을 가리는 행위일텐데요. 이러한 결과물들은 거의 프로파간다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을겁니다. KKK라든지 백인우월집단 등과 같은 무리들 말입니다. 지금은 미국의 티파티 운동이 꽤 그럴싸한 외형을 갖고 있지만 처음에는 저들도 진보주의에 대한 뜻모를 혐오와 자유시장에 대한 극한의 맹종을 거리낌없이 드러냈던 인사들입니다. 그래서 극단의 정치, 극단의 사상이라는 것은 저렇게 위험하다고 여기는 거겠죠.

물론 저자인 마이어 교수가 주장하는대로 저런 편견에 가득찬 인종주의와 정치 노선에 대해 그 반대편에 있는 건전한 시민들이 비폭력과 평화주의를 강조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자는 말컴 엑스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일례를 들며 증오와 혐오로 점철된 자들과 대항하는 입장에 서더라도 건전한 시민들은 결코 폭력에 물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익히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나치 치하의 수많은 시민들이 이 파시즘에 대해 봉기하지 못한 것은 사실상 ‘권위주의 상태‘에 승복하는 기류에 있었고 권위적인 인간들 반대에 있던 일반 시민들이 행동에 나서지 못한 것은 단순히 폭력 문제를 넘어서 단순한 행동조차도 꺼리게 되는 파시즘의 조직적인 분위기가 그만큼 어려운 문제였을 겁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에 대한 터무니없는 증오와 그들이 독일과 독일인들의 해악이 될 것이라는 선전 문구에 몸을 맡긴 자들을 차치하더라도 당시 일반 시민들조차 대응하지 못할 정도로 전체주의의 분위기라는 것은 애초에 그런 단계에 진입하지 않아야 하는 당위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약간 다른말이지만 마누엘 카스텔이 행동에 나서는 시민들에게 가장 큰 걸림돌이 공권력에 대한 공포라고 했었는데요. 새삼 정확한 말이라고 여겨집니다.

더 첨언하자면, 당시 나치 독일의 정치적 분위기와 히틀러에 의한 유럽 대전의 문제에서 외부 세계에서 (이를테면 미국과 같은) 이득을 얻는 자들이 있었고 오로지 경제 생산적인 측면에서는 돈이 되었기 때문에 히틀러의 나치가 어떤 식으로 규정할 지 혼란이 있었던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이에 저자는 파시즘 지도자들이 강조하는 자신들의 ‘무오류성‘을 그 반대의 의견을 애초에 제거하는 양상을 띠었기에 ‘자신만이 오로지 옳다‘는 주장을 펼치는 정치인들을 견제해야하는 것은 충분한 이유가 될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극우가 아닌 평범한 우파나 보수주의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극우 포퓰리즘 인사들이 내뱉는 이 선동과 정치질에 대해 최소한의 자정 작용을 할 수 있는 역할을 해야 할 텐데요. 현재 미국과 유럽에서 볼 수 있는대로 보수 정치인들 자체가 돈이 될 수 있는 것들과 자본이 따르는 데로 입을 맞추는 것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에 이 시기에는 사실상 건전한 보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끝으로, 나날이 가중되고 편중되어 가는 이 극도의 편견의 시대에 저자가 그나마 해법으로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진정한 민주주의의 발전이었습니다. 서로 대립되는 사람들이 혹은 서로 상대를 갖고 있는 정치적 단체들이 원할하고 진지한 대화를 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은 민주주의를 대체할 수 있을 만한 어떤 다른 정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하고 민주주의 자체가 어떤 정치나 그 결과물의 상위에 있다는 것을 그는 강조하는 것인데요. 사실상 건전한 민주주의자들이 많은 사회는 반대로 앞선 극렬한 병리현상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이유가 되기도 하겠죠. 물론 이는 조지 오웰보다 더 이상적인 관점입니다. 하지만 그나마도 건전한 대화라도 될 수 있는 사람들이 매우 적다는 것과 자본주의의 완전 무결성과 완전한 시장 자유와 같은 터무니 없는 것들을 비판없이 맹종하고 있거나 저들이 카를 슈미트를 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로지 우리 아니면 적이라는 논법은 우리의 민주주의를 외길로 모는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글을 이런 식으로 끝맺음 하는 것은 무슨 묵시록의 아류작과 같아 보이는데요. 이상하게 요즘은 유독 지그문트 바우만이 그의 유작 레트로토피아에서 예견했던 일들이 간혹 떠오릅니다. 우리의 정치에도 아직 희망은 있는 것일까요?


-본문 172페이지에 띄어쓰기가 잘못된 곳이 있었습니다

-미국의 보통 교육에서 ‘흑인들은 검은 영혼을 갖고 있다‘는 식의 윤색된 인종주의에 대해 저자가 비판하고 있었는데요. 한숨이 절로 나오는 구절이었습니다

민주주의는 하나의 통치양식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이다. 민주주의는 정당 및 정치적 논쟁보다 상위개념이다. 심지어 민주주의는 자유를 위한 노력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닌다. 민주주의는 삶의 양식을 위해 있는 것이고, 경제적 관점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관점에서도 인간적인 제반 관계 형성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파시즘에서는 유일무이한 통치자의 무오류성에 대한 신념이 매우 중요하다

소수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무조건 더 모범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개인의 광기는 전 문명사회의 광기와 비교해 보면 조족지혈에 불과하다고 니체가 설파한 바가 있다

보다 건설적인 미래를 맞이하려면 우리는 슬로건이나 선동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