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민주주의를 읽다 - 우리의 민주주의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유유 서양고전강의 5
양자오 지음, 조필 옮김 / 유유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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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 타이완 대학의 역사학과를 졸업한 대만 출신의 대표적 인문학자인 양자오는 대만 내에서 시민들을 위한 열린 강연 및 활발한 저술활동을 펼치고 있는 등의 진보적 학자입니다. 그는 특히 대만의 여러 정치 외교적 문제를 다루는 데 탁월했으며, 시민들이 정치 바깥에 머물며 그저 수동적인 삶을 보내는 것에 대한 문제 의식이 큰 인물이기도 한데요. 일반적으로 제도권 바깥에 있는 지식인들을 반대로 제도권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와 같은 활동을 경시하는 분위기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규정된 상아탑 내에서의 확실한 지위만을 갖고 학문을 쌓는 것만이 능사이고 합법이던 시절은 오래전에 역사의 뒤안길로 저물었지만 아직도 제도권의 분위기는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어느 나라나 비슷한 모양입니다. 하여튼 저자인 양자오는 시민들 스스로의 교육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인물이며, 이 책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연결될 수 있는 논저라 생각됩니다. 이 책은 지난 2013년 원제, ˝以平等之名: 托克維爾與民主在美國˝으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8년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양자오의 이 글은 전문적인 학술서라기 보다는 대체로 평이한 정치학 입문서 정도로 여겨지는데요. 무엇보다 미국의 민주주의를 독해하는 목적을 갖고 있지만 대체로 알렉시스 토크빌이 바라본 미국의 민주주의를 쉽게 풀어내는 데 지면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토크빌의 역작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의 민주주의‘를 읽기 전의 독자라면 양자오의 이 글을 한 번 접해보는 것도 크게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평등과 민주주의의 사회적 요인을 분석해 본 7장이 다소 집중해서 읽어봐야 하는 지점으로 생각되었는데요. 이미 많은 학자들이 민주주의와 평등의 관계에 대한 여러가지 관점으로 논의를 한 이력이 있습니다. 그만큼 민주주의가 평등의 문제를 등한시 해서는 안된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반대로 민주주의에 대한 터무니 없는 의구심을 갖고 있는 엘리트주의자들이나 기득권에 대한 반대되는 이론적 근거를 쌓기 위해 노력한 결과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이 부분은 지극히 정치적인 시선으로 고찰해 본 것이고, 아주 기본적인 접근에서는 민주주의와 평등을 따로 분리해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여기서 밝혀두고 싶습니다.

미국의 민주주의를 몇 마디 단어로 국한시킬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무리를 해서 적어본다면 아마도 ‘분권주의‘일 것입니다. 미국의 독립혁명 이후 건국 당시 ‘건국의 아버지들‘이 다수에 의한 소수의 핍박이나 권력이 특정 세력에 독점되는 상황을 막기 위해 여러 측면에서 제도 수립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부분은 특히, 미국이 유지하고 있는 의회의 상하원제와 대통령을 선거인단의 합계로 선출하는 전통적인 선출 제도가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 글 1장에서도 잠깐 언급되고 있지만 연방 대통령이 각 주정부에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는 이유도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분권의 역사‘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최근에 행정 명령이라는 미명하에 주정부에 관여를 하려던 트럼프 전 대통령의 비화 또한 그러한 맥락입니다. 이것은 인구가 상대적으로 거대한 주가 그렇지 못한 주를 ‘인구의 수‘로 밀어부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상원을 각자 균등한 인원으로 분배했던 것도 이와 비슷합니다.

바로 이런 특수한 상황에서 미 연방을 이룬 주들이 외교권과 대표권을 갖지 못하고 이를 연방 대통령이 대신 한 것도 주 정부의 자치를 보장하지만 그 이상의 권력은 부여하지 않은 꽤 면밀한 균형적인 제도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고유한 정치권력을 보장하는 각 주정부의 권리는 인정하면서도 그 위에는 ‘연방의 특별한 가치‘를 훼손할 수 없으며 (에이브러함 링컨 대통령의 경우일테죠) 이를 위반할 경우에는 응분의 대가가 따른다는 역사의 결과도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토머스 제퍼슨 시기까지 연방 대통령 조차 이러한 균형을 해치는 일들에 대해 경계하고 두려워하기도 했는데요. 특히 토머스 제퍼슨이 대통령령을 들어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를 사들인 것에 대한 일종의 자책감이 든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아마도 그는 앞선 일이 헌법이 보장하는 대통령의 권한을 넘어서는 일이라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유럽과 다른 미국만의 고유한 정치제도가 마련되는 시기에 이처럼 견고한 양심을 가진 지도자가 미국 건국 초기에 있었다는 것은 저자인 양자오가 유럽 종교에서 분리된 청교도들이 세운 나라라는 특성을 주요한 이유로 들고 있습니다만 일개 개인으로 국한해서 보더라도 꽤 대단한 일면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자신의 모국에서 사실상 실패했던 민주주의에 대한 실험으로 뭔가 좌절감을 맛보았을 수도 있는 알렉시스 토크빌은 당시 미국의 곳곳을 돌아보며 느꼈던 점을 가슴에 안고 귀국길에 오릅니다. 그는 ˝구체적으로 민주주의의 효과와 이익을 분석하고 가능한 한 솔직하고 담백하게 민주주의를 선택했을 때 도대체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게 되는지 설명했다˝고 저자는 밝히며 이러한 토크빌의 냉정한 태도를 사뭇 진지하게 분석합니다. 우리 프랑스인들에게 민주주의가 어떤 점에서 좋고 또 어떤 점에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지 일개 몰락 귀족에 불과했던 토크빌의 분석은 민주주의의 흐름 자체가 역사의 진보 가운데에 있는 큰 과정이라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저 소수의 인원에게 집중된 권력 정치 자체가 1720년대 이후 프랑스 역사에 부르봉 왕가의 복귀 혹은 나폴레옹에 의한 제정 수립 등 여러가지 정치적 부침 속에 있었던 민중들의 생활이 어떠했는지 그도 역시 잘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의 속내를 여기서 다 밝힐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민주주의가 평균의 행복과 더이상의 악순환을 끊어낸다는 점에서 모두에게 이익이 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만큼은 분명해 보입니다.

오늘날 민주주의 제도 하의 ‘삼권분립‘과 같은 견고한 정치 견제는 바로 미국의 건국 혁명의 정신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런 측면에서 미국이 ‘전세계 민주주의의 맏형‘이라는 수식어를 받게 된 것도 무리가 아니겠지요. 다만, 토크빌을 비롯한 한참 정착해 나가고 있던 당시의 미국 정치와 민주주의가 건국 초기에 심각한 정치적 갈등을 분권에 이양하고 각자의 삶과 정치적 자유를 연방이라는 이름하에 보장했던 것은 기득권이나 거대한 부유층이 없었던 그 시기에서나 가능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더욱이 미국 역사에서 흑인들을 노예 제도라는 틀에 몇 십년간을 얽매이게 한 채, 백인들만의 정치적 국가를 유지시킨 것은 산업 혁명 이후에 불어온 경제적 훈풍에도 불구하고 매우 불행한 일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온전히 경제권을 보유한 다수 백인들만의 민주주의라는 게 지금의 식견으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문제가 아닐겁니다. 이 흑인들의 인권과 정치적 권리는 지금에도 큰 논란이 되는 것은 안타깝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끝마치며, 우리의 민주주의는 일부에게는 큰 이득이 되면서 다수에게는 인내와 인고를 강요한 파행된 자본주의로 인해 큰 위기에 봉착한 것은 분명합니다. 소위 보수주의자라고 자임하는 자들이 과거 역사의 진보를 이루었던 계몽의 결과인 공화와 민주주의를 목숨을 걸고 수호하지 않고 오로지 ‘보이지 않는 손‘만을 신봉하는 것은 일견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단순히 정치적 반대에 있는 사람들을 궁지에 몰아 세워 정치적 이익을 얻는 등의 건전하지 못한 정치 무대가 유사 민주주의의 그것으로 귀결한 건 실로 유감이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지금도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민주주의 자체를 공격하는 것에 어떠한 신념이나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다는 그 맹목적인 관점을 과연 우리가 어떻게 봐야할지 의문입니다. 모두가 장미빛 전망으로 그려왔던 네트워크 시대의 민주주의가 온갖 가짜뉴스와 극한의 혐오, 인종 차별, 무지 몽매로 일그러져 가는 것은 자본주의 자체의 모순을 해결하여 권력을 잃었던 민주주의를 되돌리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문제임은 자명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수가 없습니다.


-글 2장에서 몽테스키외를 인용하며 민주 공화제를 서술하고 있는데요. 백성은 언제라도 단결해 군주를 내쫓을 수 있다는 첨언은 장 자크 루소와 같은 입장이었습니다. 케네도 그러했지만 참으로 에둘러 말하지 않는 프랑스인들입니다.

국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하고, 국민은 국가를 이루는 형식을 결정한다

이러한 전 세계적 변화를 이끌어 내도록 자극하고 고무한 것이 하나의 주요한 힘, 곧 미국의 경험, 미국의 민주주의이며, 미국이라는 나라가 이토록 강대국이 됐다는 사실이다

토크빌은 자유를 두 가지로 나누어 이 문제에 답한다. 하나는 자연적 자유 natural liberty, 다른 하나는 시민적 자유 civil liberty 또는 공민적 자유이다

사회가 평등할수록 그 구성원의 자아가 갖는 가능성도 커진다. 다시 말해 자기 상상의 공간이 확대된다. 이러한 사회에서 그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면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 분명하고 엄격한 틀에 속박되지 않기 때문이다

토크빌은 평등하고 민주적인 사회는 차이를 별로 따지지 않고, 따라서 세부를 따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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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스미스 - 도덕을 추구했던 경제학자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다카시마 젠야 지음, 김동환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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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저명한 경제학자이자 사회학자였던 다카시마 젠야는 기푸현 출신으로 도쿄 상과 대학을 거쳐, 전쟁이 끝난 직후 도쿄 상공회의소의 교수를 역임한 바가 있습니다. 또한 히토쓰바시 대학 및 간토 가쿠인 대학의 명예 교수를 지냈습니다. 그리고 왕성한 저술 활동과 더불과 강단에서의 경력을 마쳤던 그는 지난 1990년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이력에서 조금 흥미롭던 부분은 경제학자로서 일본 제국주의 시기를 온전히 경험했다는 점과 사회주의 운동으로 당국에 투옥된 이력도 있었는데요. 이런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본 학자 치고는 미국과 유럽에 이름이 알려져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 책과 관련해 개인적으로 평가하고 싶은 부분은 저자인 그가 오랫동안 마르크스 연구를 해왔던 학자이고 마찬가지로 마르크스 연구를 위해 애덤 스미스의 연구까지 오랫동안 해왔던 부분은 꽤 적절한 객관성을 답보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해 보였습니다. 앞선 일본 제국주의를 살다간 지식인으로서 일본의 근대화를 짤막하게 논하고 있는 부분도 꽤 의미가 있지 않나 생각해 봤습니다. 이 책은 1968년에 초판, 이후 1990년에 개정판이 나왔으며, 일본의 유명한 지식 관련 출판 시리즈인 ‘이와나미 시리즈‘의 구성 도서로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국내에는 2020년 2월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우선,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저자인 다카시마 젠야가 많은 지식인들의 틀에박힌 애덤 스미스에 대한 연구를 약간 비튼 것으로 보이는, ˝이들 모두는 자신이야말로 스미스를 가장 잘 파악, 발전시키고 있다고 자신만만해 하고 있다˝는 문장으로 시작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흔히 신자유주의의 이론가인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 밀턴 프리드먼이 자유시장 경제학의 사조로 이 애덤 스미스를 무분별하게 인용하고 있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데요. 여기서 무분별이라는 단어는 애덤 스미스의 사상이 어떤 계층에 의해 너무 획일적으로만 이해되고 있다는 점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는 약간 다른 부분이지만 저는 한때 레오 스트라우스에 대한 매우 편파적인 입장을 갖고 있기도 하였습니다. 후에 여러 다른 독서를 통해 스트라우스가 그래도 사회과학 발전에 일정 부분 기여한 점을 인정하게 되었는데요. 물론 저들의 애덤 스미스에 관한 오독과 잘못된 이해를 앞선 스트라우스의 경우에 빗댈 수는 없겠지만 한가지 확실한 점은 이 신자유주의자들이 애덤 스미스의 사상을 의도적으로 곡해하고 있으며, 원래 스미스의 입장과는 달리 ‘무차별적으로 축적되는 자본가 계급의 이해‘를 마찬가지로 스미스가 동조했다는 식의 여러 불합리한 서술이 비슷하게 중요한 주장으로 발전되어 왔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여기 다카시마 젠야의 이 책이 이러한 애덤 스미스에 대한 일부 인식의 편의주의와 오해를 불식시키는 데 일정 부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애덤 스미스는 영국 도덕철학의 사조인 데이비드 흄과 개인적으로 가까웠던 것으로 이 책에서 서술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점을 들어 애덤 스미스의 ‘도덕주의적 인식론‘을 연결시키는 것은 그 범위가 조금 과도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원래 그는 사상가이자 도덕철학자로 이름을 알린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스미스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오랜 정치적 갈등 그리고 1707년에 이르러 두 국가가 합병이 이루어지면서 이러한 정치적 혼란기에 가톨릭 사회와 그 반대의 사회의 결합, 그리고 그러한 사회상의 도덕주의 문제를 꽤 중요하게 관찰했던 것으로 짐작되는데요. 18세기 계몽주의 시대가 꽃을 피우기 전에 인간 관계 및 사회 구조 전반의 고찰을 요구했던 이 ‘도덕주의 철학‘의 필요성은 스미스에게도 중요했던 모양입니다. 물론 많은 신자유주의자들은 스미스의 이 도덕철학의 함의를 일정 부분 알리지 않는데 주력하고 있기도 합니다. 저들이 보기에는 자유 방임주의자가 도덕 철학을 운운하는 것이 뭔가 맞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이겠죠. 마찬가지로 저자는 6장에서 당시 독일 경제학자인 프리드리히 리스트의 스미스 비판을 재반박하면서 여러가지 입장을 재정립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스미스가 ‘자유방임‘의 신봉자라고 판단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고 있습니다. 국부론에서 인용되고 있는 바와 같이 스미스는 꽤 노동자에 대한 애정을 피력하고 있었으며, 경제학과 관련한 스미스의 근본 사상은 ˝모든 시민은 본래 자유롭고 평등해야 하기 때문에 같은 양의 노동 (생산물)은 같은 양의 노동 (생산물) 과 교환되어야 하며, 이는 자유경쟁이 완전하게 이루어진다면 반드시 실현될 결과인 동시에 정의의 법과도 통한다˝고 언급합니다. 이는 스미스가 말하는 가치법칙의 본질적 내용이며 때때로 등가교환의 법칙의 주된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진술과 구체적으로 반대되는 것은 많은 신자유주의자들이 ˝적잖은 노동력의 소모가 있다 하더라도 무조건 자본가에 이득이 되면 그만˝이라는 입장입니다. 그동안 왜곡된 자유주의자들과 신자유주의자들이 꽤 공을 들여 애덤 스미스를 ‘자본가의 이론적 화신‘으로 홍보해 왔는데요. 이 부분에서의 본질적인 문제는 애덤 스미스의 이론을 곡해하는 것을 넘어 그의 저서를 반쯤 혹은 절반에 미치지도 않는 몇가지 짜맞추기식으로 자신들의 사조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인용해 왔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지점에서 신자유주의 자체를 어떤 ‘악(惡)‘으로 규정할 수는 없지만 자신들이 말하고자 하는 주장을 강화시키는 것에 너무 제한적이고 부분적으로 사상가의 저서를 인용하는 것은 문제라는 것이죠. 즉, 열 가지의 진실은 그 열가지 진실이 모두 밝혀졌을 때 진정성이 있는 것이며, 그 중 다섯 가지나 여섯 가지를 말하면서 진정성을 논하는 것은 크게 양심을 벗어나는 일이라 밝혀두고 싶습니다.

물론 저 역시도 애덤 스미스가 중요시했던 사유 재산의 문제라든지 스미스가 살았던 당시의 꽤 진취적인 경제 활동에 대해 거의 동의하는 편입니다. 지금처럼 왜곡된 소비 자본주의에 바우만과 같은 사회학의 거장들은 이를 비판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충분한 소비 또한 필요하다고 여기는 사람중에 하나인데요. 문제는 5장에서 언급되고 있듯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더이상 장미빛 낙원을 약속하지 않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자유주의 경제에 경도된 지식인들과 학자들이 이 보이지 않는 손을 자신들의 입맛대로 인용한다 하더라도 현실은 결코 그렇지 못하다는 점이겠죠. 역시나 이 부분에서도 파악되는 것은 신자유주의자들 대부분은 거대 자본 계급의 이익과 노골적인 자본 축적을 옹호하는 이론으로서의 애덤 스미스를 오용했던 것으로 이해됩니다. 일반적으로 토마스 멜서스가 가난한 계층에 대한 혐오와 소위 생태사회적 격리에 집중했던 것은 신자유주의자들이 권력 상황에서 주도권을 상실한 저소득의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에 별반 관심이 없다는 것과 일맥 상통합니다. 이 책에서도 짧게 논의되고 있습니다만 찰스 다윈을 오독한 사회진화론자들이 인간을 분류해 ‘낙오시키고 격리시키고자 하는‘ 잣대로 계층을 이해한 것도 마찬가지로 아주 명백한 관점입니다. 체제 자체를 ‘인간성‘을 제외하고 ‘도덕‘을 제거해 오로지 자본 축적의 용이함만을 찾는 것은 그야말로 전체주의보다 더 위험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끝으로, 이 책을 일독하게 됨으로 제가 얻은 한가지 귀중한 인식은 애덤 스미스가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인간에 대한 애정과 연민을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프랑스 혁명에 대한 그의 의견이 오늘날에 전해지지는 않지만 반대로 혁명 자체를 그가 좋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젠야 교수가 언급하는 스미스의 사상 곳곳에는 노동자들과 인간에 대한 애정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약간 상이한 예이기도 하지만 스미스가 일반 인민에게 맡겨서는 안 될 주권자의 의무에 대해 ˝첫째는 국방의 의무이고, 둘째는 사법의 의무이며, 셋째는 공공 토목사업 및 청소년 교육에 관한 의무˝를 들고 있습니다. 이는 종래의 스미스가 오로지 ‘야경 국가‘로서의 국가론만을 견지하고 있었다는 것에 대한 반론이 되기도 하겠습니다. 물론 앞선 두번째의 의무는 민주주의 정치에서 법의 지배에 따른 다른 형식으로 구현되고 있기도 합니다만 이러한 점들을 고려해 봤을 때, 스미스가 진보적인 근대화 내지는 일정 부분 미래의 시민사회의 단편을 그려본 것이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마지막으로 스미스가 말하는 인간의 이기심이 어떤 식으로 작동해야 하는지에 대해 좀 더 건설적인 연구가 필요하며, 노골적인 자유 방임을 부르짖는 일반적인 다수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는 자들의 터무니 없는 주장들에 대해 변별력을 가질 수 있는 시민들의 건강한 판단력이 무엇보다 필요한 시기로 생각됩니다.

시민사회란 전 시대의 사회에 비하여 합리적이고 민주적이며 문명화 된 사회을 의미한다

스미스가 자유경쟁이 공정하게 이루어지기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사유재산의 절대불가침을 강력히 요청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실에서 자유경쟁이란 것은 먹느냐 먹히느냐 하는 약육강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사회상태가 아니라 홉스가 말한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상태, 즉 자연상태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 아닌가

스미스는 지주나 자본가에 대해 이렇듯 엄격한 태도를 취했던 반면 노동자에 대해서는 지극히 따뜻한 심정을 드러냈다

사실 방임이라는 말은 별로 어감이 좋지 않은 데다 자유주의나 개인주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는 근원이 될 수도 있다

지금도 정부는 값싸고 작을수록 좋다는 것이 자유주의자가 갑는 일반적 견해인 것으로 통념화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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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 Meritocracy 와 관련된 단상이랄까요

과거 자본주의와는 약간 성격이 다른 꽤 성공적인 현대 자본주의화의 노선에서 하이에크와 프리드먼 류의 학자들과 엘리트 계층 및 기득권 세력에 의해 이 능력주의는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어 왔습니다

어떻게 보면 인간의 능력에 따라 다른 처우와 댓가를 받게 된다는 이러한 교조가 민주주의 가치와는 상반된 개념이기도 합니다. 스미스를 곡해한 경제학자들이 과거 전통주의적인 자본주의 체계에서 도덕주의적 공공성을 제거하기에 이르는데요. 사실 지식을 비롯해 사회적 자본의 수용과 활용은 사람에 따라 매우 다릅니다. 특히 자원 자체에 접근이 용이한 사람의 능력은 그렇지 않은 계층의 사람들과는 확연하게 차이가 있는 것이죠.

우리의 민주주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조화로운 사회화와 각 개인들의 기본적 평등을 위해 노력하기로 결정합니다. 이것은 자본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길이고 견고한 사회학자들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서로 완벽한 균형을 이루면서 발전하는 것이 매우 필수불가결한 요소임을 깨닫게 되죠. 다만, 경제학자들은 이에 찬성하지 않습니다.

결국 1980년대 이후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언급대로 케인스식 자본주의의 토대에 각종 시민들을 위한 자원을 국가가 초래하는 비용이라는 명목으로 손쉽게 제거에 나선 ‘신자유주의의 승리‘로 능력주의 자체에 대한 맹신이 시작됩니다. 아주 간단히 말하면 거세된 사회 부조 상황에서 모든 것은 개인의 능력으로 치부되기 시작한 것이죠. 저는 과거 유럽의 계몽주의적 역사에서 이러한 경제사회적 급변은 매우 불행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어차피 사회계약 자체가 모두가 잘 살고 모두가 안전하게 살기 위해 마련된 것인데 거의 300년 가까운 공화주의적 가치가 신자유주의에 의해 부정된 것입니다.

자본주의 하에서 개인이 자신의 자아실현과 성취감을 위해 자본의 축적과 상위 계층으로의 진입 노력이 무조건 부정당할 수는 없을 겁니다. 다만, 토크빌의 경고대로 타인과 다른 시민들의 마땅한 권리까지 짓밟으며 개인의 이익과 영달을 찬양하고 정당화하는 것은 문제라는 것이죠. 이 부분은 퇴임한 도널드 트럼프가 평생을 오로지 개인의 이익만을 위해 살아온 인물이라는 점을 대변하기도 하는데요. 이러한 사회 구조 자체가 이미 막대한 부를 쌓아 올린 거대한 부유층에게 큰 이익이 되는 상황이고 도덕과 평등이 없는 능력주의화에 대한 선호가 자신들의 탈세 노력과 더불어 이익을 대를 이어 구축하는 작업에 있어 또한 이득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작업들은 하위 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 까지 주입되기도 했습니다.

더욱이 이 맹종의 능력주의가 무엇보다 해악인 것은 우리의 민주주의를 더욱 위축시켜 나간다는 점에 있습니다. 앞으로 민주주의의 위협은 파시즘이 아니라 ‘과두제‘인 것은 아주 명백합니다. 모두가 그저 자신의 능력대로 돈을 벌어 먹고 사는 관성의 이념은 너무나 뿌리 깊어서 많은 시민들이 이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놓치고 있는 실정이죠. 매번 제가 신자유주의를 비판할 때마다 강조했던 것은 시장 자체가 민주적 통제 바깥에 있었고 그것을 몇 십 년 동안 강요한 하이에크 류의 담론이 민주주의 자체 뿐만 아니라 아주 개인적인 삶들의 안정성까지 위태롭게 했다는 점입니다. 모든 것은 개인들의 책임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이 능력주의가 한몫 챙겼으며 궁극적으로는 사회를 파편화 시키는 데 큰 원인이 되었던 것이죠.

따라서, 이 능력주의는 많이 볼 수 있는 극우적 포퓰리즘과 같은 극단주의와 그 인식적 궤가 유사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적당하지 않은 막대한 능력과 기반을 가진 소수 부유층의 탄압이라는 민주주의의 해악을 부르짖는 극우 보수적 시장주의자들에게는 민주주의 자체가 달갑지 않을 것입니다. 무지하고 기반이 빈약한 다수의 시민들이 주도하는 민주주의가 사회를 후퇴시킨다고 생각하고 있죠. 이것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이 글은 거의 즉흥적으로 쓴 것인데요. 아까 개인 톡으로 대학 강단에 있는 제 지인 가운데 한 사람과의 설전(?)에 영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일차적으로는 전도되어 있는 능력주의는 위험한 것이며, 자본주의 만큼이나 민주적 가치 또한 현실화시켜 지켜나가야 할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누구보다 민주주의의 강고한 신봉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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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글로벌 자본주의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가 (양장)
로버트 커트너 지음, 박형신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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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리버럴 내지는 진보주의적 저널리스트인 로버트 커트너 (혹은 로버트 쿠트너)는 일종의 리버럴적인 가치로 공신력이 있는 전문지, ‘아메리칸 프로스펙트‘의 공동 창업자이자 공동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미국 오하이오 주의 오벌린 대학을 나와 버클리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 받기도 했는데요. 특히, 전세계적인 민주주의 연구의 요람인 영국 데모스 (Demos)에서 시니어 펠로우로 연구에 참여한 바도 있습니다. 더불어 현재는 메사추세츠 주의 브랜다이스 대학에서 사회 정책학과 관련된 강의를 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 책의 원제는 ˝Can Democracy Survive Global Capitalism?˝ 으로 지난 2018년 미국에서 출간되었으며, 국내에는 2020년 2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특별하게도 커트너의 이 글의 대한 헌사로 조지프 스티글리츠와 대니 로드릭이 글을 남기기도 했는데요. 그만큼 개인적으로도 훌륭한 논저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언급하고 싶은 점은, 역자의 번역도 원저에 못지않게 훌륭하다는 것을 밝혀두겠습니다.

우선, 이 책을 간단히 요약해 본다면 ˝전후부터 자본주의가 얼마나 민주주의를 잠식하고 파편에 이르게 했느냐에 대한 거의 모든 일례를 포함한 역사적 증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이에 대해 저자 역시 책의 제목대로 ˝우리의 민주주의가 전지구적 자본주의화에 있어 과연 살아남을 수 있겠느냐˝에 대해 간략한 해답을 글에 남기고 있는데요. 그는 우리가 정신만 차리면 다시 민주주의를 회복할 수 있을것이라고 단언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약간 무분별하게 민주주의 대 자본주의라는 논법으로 현재의 모든 문제를 치환시켜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 8장에서 커트너는 ˝자유무역 이론의 주장과 달리, 자유시장에 완전히 의존하여 산업화된 국가는 없다˝고 단언하며, 그동안 금융 자유화를 비롯한 자본주의의 강제된 시장 자유화만이 열악한 저개발 국가의 산업화를 이끈 원동력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즉, 이것은 달리 풀어보면 온전히 자유 시장을 옹호하는 자유방임주의 내지는 신자유주의의적 기조가 산업화에 이른 국가들의 번영을 이끌었던 것은 아님을 지적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결국 자본주의의 파트너로서 민주주의가 있었기 때문에 번영의 길이 열렸던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전후 케인스주의에 따른 사회적 경제의 기조와 더 이전에는 사회계약에 따른 공공 정부의 의무 내지는 엘리트들의 사회적 책임감을 오래된 민주주의적 가치가 이를 알게모르게 강제해 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민주주의와 관련해 저자는 ˝민주주의가 파시즘의 방패막이가 되기에˝ 민주주의 자체를 시장의 걸림돌으로만 여기는 신자유쥬의자들과 나아가서는 유일신의 교조주의와 엇비슷한 자유방임주의에 경종을 올리는 점 또한 오늘날의 인류 역사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지점일 것입니다. 이 부분은 여러 곳에서 드러나는 저자의 수많은 의견과도 동일한데요. 그런 의미에서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수 있다˝는 밀턴 프리드먼의 맹종 또한 사실상 허구에 지나지 않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특히, 1970년 이후 급속하게 불어닥친 신자유주의는 허무맹랑하지만 ˝노동 권력이 시장의 권력을 침해할 수 있다˝는 미명하에 벌어진 양태를 글 5장에서 이를 다루고 있고, 나아가 7장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사회 민주주의의 몰락‘ 가운데, 신자유주의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중도 좌파들의 터무니없는 맹종이 자유 시장이라는 경제적 이행을 다수의 시민들이 속절없이 수용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러 이를 비판하지 못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 전에도 종종 밝혔던 대로 샹탈 무페가 강조한 것처럼 ‘이 좌파들의 몰락‘이 신자유주의적 주입과정에서 발생한 모든 사회 문제들의 사실상 원인이 되었다는 점을 다시금 강조하겠습니다. 결국 이러한 논의 가운데 이 전지구적 자유화의 파고에 대응하기 위해 ‘우파가 아닌 좌파 포퓰리즘 혹은 진보적 포퓰리즘의 행동주의적 관점을 강조하는 것‘에 저역시 동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듯이, 레이건과 대처에 의한 ‘대안이 없다‘는 식의 전환이 가깝게는 노동계층의 무력화와 멀게는 정부가 마땅히 해야만 하는 의무에 대해 쓸모없다는 식으로 치부된 일련의 신자유주의적 과정을 역사적 증거와 불균형적인 정치적 이행들로 가감없이 마찬가지로 글을 통해 인식시키고 있습니다. 사실상 노동 계층의 구매력을 축소시키는 결과를 도출했던 노동 전반의 사회적 퇴출이 고학력자의 이익을 신자유주의가 철저히 보장했던 것과는 달리 노동계층과 중간 계급의 이익은 스스로의 자구책으로만 전가되었습니다. 커트너 역시 앞에서 강조하고 있듯이, ˝사회계약에 따른 사회 보장과 정부의 공공성˝은 계몽주의 시대로부터 꽤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가치였습니다. 철저한 자유 방임이 이와는 전혀 반대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인지한다면 이 시장 자유가 누구의 이익이 될 것인가는 아주 명백합니다. 바로 이 글의 4장과 5장은 이를 논증하고 있으며, ˝신자유주의가 유일하게 성공한 것은 상위 계층의 이익을 아주 절실하게 대변했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대처 집권기의 영국 정치가 루퍼트 머독과 같은 자들의 요구에 부합하는 정책과 개혁이 일반 시민들의 권리와는 매우 상충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은 이를 반증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가 단순히 공공의 이익과 사익을 비교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겠습니다만 그동안 사익이 이 신자유주의 밑에서 공공의 이익을 휴지조각으로 만든 것은 분명합니다. 이것은 현재의 사회적 파행 가운데 벌어지고 있는 ‘극단적인 프레카리아트 현상‘을 말하는 것이며, 전반적인 케인스주의의 후퇴 내지는 철회로 그 이익을 숱하게 얻은 글로벌 부유층들의 존재 유무일 것입니다. 이 막대한 부유층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벌이고 있는 수많은 행적들이 탈세와 허위 신고 및 자산 유출 등과 같은 반사회적인 행위 자체가 공공성과는 완전 다른 대척점에 있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단순히 반자본주의적 입장이나 신자유주의적 능력주의를 밑도 끝도 없이 부정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사실 수많은 학자들이 강조하는 것과 같이 모두가 누려야 할 사회적 자본을 자신들의 부와 이익을 위해 가감없이 사용한 일부 계층의 행태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실 가운데, 민주주의의 쇠퇴가 초래한 것은 미국과 유럽의 극우 정치와 우파 포퓰리즘입니다. 소위 대안 우파라 불리우는 자들의 행태와 트럼프를 꼬집어 저자가 ‘가짜 포퓰리스트‘라고 언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막대한 이득을 취한 자들이 이런 정치의 쇠퇴와 사회적 붕괴를 진정 바랬는지는 모르겠으나, 자신들의 사회적 이익을 위해서도 이러한 포퓰리즘의 대두는 바람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특히, 이와 관련해 1장에서 기업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등장한 대중 정치 자체가 지금도 파편화에 이르고 있으며, 이를 악의적으로 이용하는 정치 집단의 등장은 민주주의 자체의 위기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이를 한 무더기로 뭉뚱그려 자유 시장에 의한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로 모조리 국한 시킬수는 없겠으나 극단주의자들과 정치적 선명성과는 거리가 먼 포퓰리즘을 잉태하는 토양을 만든 점은 결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시장과 정치가 무슨 연관이 있어 이렇게 과도한 해석을 하느냐 할 수 있겠으나 정치의 실패는 무분별한 시장의 권한 확대와 관련 있으며, 달리 말하면 민주주의의 부패 내지는 시장에 있어서 민주적 통제의 실패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끝으로, 2008년에 있었던 금융 자본의 사기 행각은 일종의 신자유주의의 몰락을 초래했지만 이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전통적인 자본주의자들에 의한 금융 자유화에 대한 경고를 한 귀로 흘려들은 것입니다. 특히 저자는 이 부분과 관련해서도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데요. 금융 자유화를 원했던 그룹과 지지자들은 은행들의 방만한 경영을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실물 경제에 있어서 은행의 이 아슬아슬한 칼춤을 뭔가 혁신이라고 보기보다는 불안정 그 자체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바로 그 이후, 은행에 대한 규제가 미국 행정부에 의해 마련되었지만 금융 자유화 자체가 아마게돈이 될 가능성은 아직도 현존합니다. 많은 사회학자들에 의해 이 금융 자유화에 대한 경고가 숱하게 있어 왔는데요, 금융 자체가 자본주의의 아름다운 꽃이라는 통화주의자들과 자유 방임주의자들의 논법이 경제 자체를 나락으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존 IMF의 설립 의미를 다시금 환기시키고 은행에 대한 규제나 금융 자본주의에 대한 견제를 반자본주의나 자본주의를 배격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것은 몇번이나 강조해도 부족한 부분임에도 많은 이들은 이를 가볍게 생각합니다. 시장 경제의 뿌리 자체가 몇몇의 손안에 들어가 있는 상황을 우리가 여실히 비판해야 하며, 이제는 민주주의가 제 목소리를 내는 일련의 개혁의 길을 모두가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약간 궤를 벗어나는 얘기지만 현재의 중국 경제를 ‘중상주의‘로 이해하고 있는 저자의 평가는 실로 시의적절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없는 중국 경제를 그저 중상주의로 표현한 것은 너무나 그에 부합된다고 여겨졌습니다.


-104 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

-이 책으로 인해 꼼짝없이 9시간을 붙잡혀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요. 오랜만에 책에 대한 흡인력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게을러진 나머지 너무 오랜만에 책을 읽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꽤 오랫동안 커트너의 이 글이 기억에 남아있을 것 같습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우파의 광범위한 공격에 저항한 대기업은 단 한 곳도 없었다

시장이 더 진보한 기술과 교육 수준을 지닌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럽게 보상을 한 반면 기계나 역외의 더 싼 노동력에 이해 수행될 수 있는 일자리를 가진 평범한 노동자들은 밀려났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소득을 상층으로 이전시켰다는 한 가지 점을 제외하고는 경제적으로 실패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과거의 유럽 좌파는 신자유주의를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지구화 된 금융은 이러한 사기적인 금융 공학의 시녀였다

자유 무역 이론의 주장과 달리, 자유 시장에 완전히 의존하여 상업화 된 국가는 없다

대처 시대의 규제 완화, 민영화, 반노동조합 정책은 계속되었다

중국의 중상주의를 용인한 것이 더 이상 국내에서는 별로 생산하지 않으면서 중국과 광범위한 역외 제조 동반자 관계를 누리는 미국 국적 기업들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것을 알아채기 전까지, 이 모든 것은 하나의 미스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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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andante 2021-01-21 11: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어야 할 책인듯 합니다.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베터라이프 2021-01-21 11:45   좋아요 1 | URL
오랜만이시네요 ㅠㅠ 이 책은 내용은 차치하더라도 가격이 사악해서 아주 추천드리기 어렵습니다만 오랜만에 시간 가는줄도 모르고 읽었던 것 같아요. 하여튼 건강하게 잘 지내시죠?

Comandante 2021-01-21 18:27   좋아요 1 | URL
하루하루 무료한 일상입니다 ㅎㅎ 사악한 가격이지만 구입할 만한 책인듯 하여 장바구니에 담았습니다. 감사해요^^
 
포스트 코로나 뉴노멀 - 이택광 묻고 지젝 답하다
슬라보예 지젝.이택광 지음 / 비전C&F / 2020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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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출신의 저명한 언론인인 로버트 미지크는 지젝을 일컬어, ‘철학계의 팝스타‘라는 이명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미지크는 지젝의 그 솔직한 태도를 높이 사기도 했는데요. 최근에 SBSCNBC가 이택광 경희대 교수와 함께 지젝과의 화상 대담집을 펴내게 되었습니다. 뭐 그 이유야 차고 넘치는 게 최근의 현실일텐데요. 만연한 전세계 COVID-19의 시대에 각자의 사유로 무장한 두 철학자의 대담은 어찌됐든 돌아보는 의미가 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 책은 SBSCNBC가 기획한 ˝포스트 코로나, 뉴노멀을 말하다˝는 프로의 대담을 요약해 펴낸 글로서, 슬라보예 지젝과 이택광 교수가 함께 참여했으며, 최근인 2020년 12월 10일에 출판사를 통해 출간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출판사 관계자 분께 한 말씀을 드리고 싶은데요. 그 취지를 고려한다면 양장으로 책을 펴낸 것은 이해하겠습니다만, 얼마 되지도 않는 분량을 활자체를 키워 200여페이지로 내놓은 것은 전혀 이해가 되지를 않습니다. 독자들의 안구 걱정을 위해 그러셨는지 모르겠지만 실로 자원 낭비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아 보입니다. 차라리 얇은 분량으로 가격을 낮춰 내놨다면 지젝의 이름값 만으로도 국내에 꽤 상당한 판매고를 기대할 수 있었을텐데 전체적으로는 크게 아쉬운 부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2008년 이후, 전세계에 지금의 코로나 만큼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상황은 현 세대가 결코 겪어보지 못했던 일일것입니다. 뭐, 기후 변화 문제와 관련해서는 이미 여러 매체를 통해 오르내려 많은 시민들이 경각심을 갖기도 했습니다만 뜬금없이 불거진 일개 바이러스 문제가 이토록 전세계를 고통에 빠트릴지는 누구도 예견하지 못했을 겁니다. 이에 지젝은 앞으로의 세계는 ‘뉴노멀의 시대‘이며, 기존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이를 결코 해결해 줄 수 없으며, 대두되는 전세계의 민족국가화를 경계하며 빠르게 모두 협력에 이르러야 이 시기를 슬기롭게 벗어날 수 있다고 조언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글에는 지젝이 한국의 방역 대응에 큰 찬사를 보이고 있는데요. 현재의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의 무방비적인 상황에 지젝 자신이 자택에 칩거하며 그동안 겪었던 일들로 인한 사색의 결과물로서 한국의 대응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거듭 밝히고 있습니다. 이 점은 현재의 유럽의 자유주의가 거의 실패를 했다고 봐도 무방하며, 조르조 아감벤이 우려한 ‘정부와 권력의 시민들에 대한 통제‘가 허무맹랑한 논법이며, 민주주의 자체는 현실적으로 자율과 통제를 균형있게 조직하는 것이 중요한 조건이라고 그는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거짓된 자유주의자˝들은 거의 포퓰리스트에 가까우며, 그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과 셈법으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정부의 방역 대책을 시민의 자유를 침해하는 정부의 무분별한 개입으로 몰아가고 있는데요. 정작 해당 유럽의 다수 시민들은 한국 정부의 대응이 지나치지 않다고 여기고 있으며, 그러한 정확한 대처야 말로 가장 효과적인 대응이라고 판단하는 사람들도 의견을 더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장과 4장에서는 ‘코로나 시대‘에서 정보의 통제와 독점에 따른 여파로 부익부 빈익빈이 날로 심화되고, 자원을 좀 더 많이 보유한 자들은 자신의 개인 건강을 건사할 가능성이 높지만 그렇지 않은 다수의 시민들은 더욱 무차별적인 상황에 노출될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오늘날의 신자유주의가 ‘그 시장의 자율성‘으로 이 중차대한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입니다. 설사 아직도 이런 상황에서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을 운운하는 자들은 소시오패스 이거나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자들이겠죠. 더군다나 엄밀한 학문적인 접근에서 이를 오용한 허버트 스펜서와 같은 사회적 도태에 인간의 생명을 투입하는 것은 유럽이 그토록 자부심을 갖고 주장하는 자신들의 계몽주의적 역사와도 길이 완전 다른것입니다. 결국 현 시대의 이 심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각자가 이기심을 뒤로하고 해결을 위해 서로 충분한 협력을 하는 길이 유일한 방편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젝이 우려하고 있는 민족주의의 대두는 큰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로의 이익을 따지지 않고 대의를 위해 협력하자는 주장은 과거 로버트 달의 사상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을텐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같은 상황에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위해 다투고 있는 미국과 중국의 대결은 ‘핵무기 확산‘ 만큼이나 위협이라고 생각됩니다. 여기에 이택광 교수는 뒤에 있는 일종의 보론에서 미국 트럼프 대통령에 의한 대중국 봉쇄와 같은 국제정치적 행위가 어떤식으로 결론이 날지에 대해서는 불확실한 관점을 표방하고 있습니다만 한가지 확실한 점은 지젝의 평가대로 우리가 미국과 중국 한쪽의 편에만 서게 될 날은 아마도 그 다음날은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코로나가 초래한 이 전방위적인 패러다임의 변화는 단순히 보건 의료계의 문제로 국한되지 않고, 이런 상황을 노려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사회의 간을 보려는 중국 시진핑의 행위와 마찬가지로 보다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시점에서도 국가 이익을 찾으려는 권력의 속성이 자연스러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혼란한 시기를 놓치지 않고 암약하려는 반정치가 도래하지 않을까 우려스러운 마음이 절로 듭니다. 특히, 유럽의 상황이 불안하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글 초입에서 지젝이 ‘민족국가의 대두‘를 우려했던 것은 각국의 전체주의적 씨앗이 자생하게 될 것을 경계했다고 봐야 할 텐데요. 이러한 그의 근심은 전혀 터무니 없는 일이 아님을 모두가 잘 알고 계실겁니다. 또한, 이 코로나 사태로 말미암아 우리의 자본주의가 어떠한 식으로 변용될지에 대해 능동적으로 대처할 의무가 시민들 자신에게 있으며, 과거 토니 주트가 짧게 언급했듯이, 전반적인 이 자본주의적 기조를 해체할 수는 없지만 조금이라도 개선에 나설 수 있는 희망을 찾기 위해서라도 이런 특수한 상황에 이른 자본주의가 과연 ‘고삐풀린 이기심이라는 악마‘를 잉태할지는 좀 더 면밀히 지켜봐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신자유주의가 그토록 강조한 시장의 자율성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을 밝혀두고 싶습니다.

바이러스의 위험이 대두되면서 세계의 흐름이 민족국가로의 회귀 조짐을 보이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는 수많은 사람이 죽더라도 경제가 돌아가아만 한다고 주장했다

전세계가 감영병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기는 신자유주의적 발상은 위험하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는 국민이 신뢰하는 국가, 국민을 신뢰하는 국가가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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