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열정 (양장)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평점 :
절판


프랑스 노르망디 출신의 소설가인 아니 에르노는 루앙 대학에서 학업을 이어가는 도중에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그녀는 실존해 있는 작가임에도 문학상이 만들어진 매우 드문 케이스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단순히 첨예한 냉전 시기의 여성들의 삶을 그리는 데 작품 활동을 했다기 보다는 자신의 자전적 경험을 배경으로 어머니의 죽음, 낙태, 결혼 등과 같은 주변의 이야기로 글을 써온 특별한 신변 이야기의 화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처럼 ‘보편적인 개인‘에 집중한 그녀의 집필 작업이 프랑스 내에서 나름 인정을 받은 것으로 봐야하겠죠. 거대한 담론을 주제로 글을 쓰는 것 또한 중요하지만 작가로서 에르노의 역사도 분명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이 책은 원제, ˝Passion Simple˝로 지난 1991년에 초도 출간이 되었고, 국내에는 2012년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지금으로서 한가지 이해가 안되는 점은 당시 출판사인 문학동네가 야심차게 민음사를 벤치마킹을 했음에도 비용상의 문제 때문인지 세계 문학 시리즈물의 양장본을 일찍 절판시킨 것은 조금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기도 한데요. 이런 연유로 저 역시도 중고서점에서 구입을 해야만 했습니다.

저명한 어느 문학평론가의 말에 따르면, ˝작품의 문학성과 선정성은 가히 종이 한장 차이다˝라고 했습니다. 물론 아니 에르노의 이 짧은 분량의 소설이 선정성에 속하고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동의하기가 어려운 측면이 있는데요. 남자의 성기라는 단어와 애무와 섹스라는 단어 만으로 지금의 시기에 선정을 논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여겨집니다. 이 책이 나왔던 1990년대 초반 서유럽의 상황이 어떠한지는 짐작이 되지 않습니다만 과거 D.H 로렌스가 받았던 무책임한 악명을 아니 에르노에게도 투사하는 것은 실로 맞지 않는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부르주아 인텔리와 동유럽 출신의 유부남과의 관계는 이 시대의 기준으로서도 아름답지 못한 사랑임은 분명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짧은 소설이 주는 여운은 꽤 지대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차피 이 책을 읽은 많은 독자들이 짐작을 하고 계시겠지만 소설의 주인공과 작가 본인의 모습이 많은 부분에서 일치하며, 주인공의 편집증적이고 다소 우울한 나레이션은 작가 본연의 내면과도 관련이 있어 보이기까지 합니다.

이 글 자체를 문학적인 측면이나 독자들에 대한 파급력까지를 두고 해석하기 보다는 개인적으로는 일반 여성들이 연인과의 헤어짐 이후, 보일 수 있는 꽤 설득력있는 감정선의 모습에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동유럽 출신의 유부남과의 관계는 서유럽의 인텔리 여성의 현실적인 위치를 차치하더라도 어느 정도 그 종지부가 예견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작품 전체에 어떤 윤리적인 잣대를 먼저 들이대기 이전에 여성인 주인공이 어떻게 보면 내면의 감정 기복이라고 여겨질 수 있을 만큼의 혼란스러움과 불확실성을 꽤 생활체적인 접근으로 시도하고 있는 점 또한 매력으로 여겨졌는데요. 이 곳 서평에서 꽤 노골적인 표현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헤어진 연인의 ‘성기‘를 매번 상상하는 주인공 여성의 심리 묘사는 외설을 떠나서 제가 남자임에도 심정적으로 동감이 될 정도였습니다. ˝스무살 때는 피임도 하지 않은 채 겁없이 섹스를 즐겼던 것처럼˝과 ˝낙태 수술을 했던 곳에 또 가보는 사람˝이라든지, ˝어느 날 에이즈 검사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사람이 내게 남겨줬을지도 모르잖아˝라고 나레이션을 하는 부분은 작품의 격을 낮춘다기보다는 어쩔 때는 철없는 일반적인 여성의 모습을 심상에 끄집어 내기도 하는 등 흔한 애증의 감정을 배설로 토해내는 여느 작품들과는 꽤 다른 면모이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의 여주인공처럼 한참 해빙의 무드가 시작되고 있던 유럽 전체의 상황에서 동유럽 출신의 남자와 연애 감정을 갖는다는 것이 당시 시대상으로는 꽤 신선한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말‘을 내뱉기 전의 시기이기도 하지만 이미 유럽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행동을 해야하는지 본능으로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마음을 작가인 에르노 역시 고르바초프를 인용하며 당시의 시대 모습을 설명해 내고 있습니다. 전체적인 구도의 측면에서 유부남과의 관계 자체를 굳이 미화할 필요는 없겠습니다만 앞서 다소 장황하게 설명한 바와 같이 끝을 이미 알고 있는 연애를 경험한 여성의 심리적 변화와 그 관계의 주변부에 놓였던 자신의 삶을 애써 다시 찾아가는 과정을 덤덤하게 보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말하고 싶은데요. 특히, 여성들의 꽤 내밀한 감정 기복에 대한 묘사는 대체로 일품이었다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책을 읽을 때 나의 마음을 휘어잡는 문장은 남녀관계를 묘사한 대목이었다

그 사람과 함께일 때를 제외하고 내게 행복한 순간이 있다면 그건 새옷이나 귀고리, 스타킹 등을 사들고 집에 돌아와 거울 앞에서 하나하나 몸에 맞춰보는 때였다

그는 이브 생 로랑 정장과 세루타 넥타이, 그리고 대형 승용차를 유난히 좋아했다

그들은 모두 사회적 성공을 꿈꾸고, 이삼 년마다 한 번씩 정부를 바꿔가며 성욕을 해소하고 사랑을 즐기는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었다

나는 ‘내가 그에게로 가면 돼‘라고 생각했다. 내가 왜 그에게 가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빅데이터 소사이어티 - 디지털 혁명 시대, 우리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을 것인가
마르크 뒤갱.크리스토프 라베 지음 / 부키 / 201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의 공저자 중 한 사람인 마르크 뒤갱은 세네갈 출신의 프랑스 소설가이자 영화감독 및 정치비평가입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소설 ˝La Chambre des Ofiiciers˝로 큰 명성을 얻은 바 있습니다. 그리고 크리스토퍼 라베는 프랑스 주간지 르 푸앵의 탐사보도 전문 기자로서 국방과 국가 정보 활동 등을 집요하게 추적하는 인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크리스토퍼 라베는 동명이인의 투자 전문가인 장-크리스토프 라베의 정보만 구글에서 찾아볼 수 있었는데요. 제가 프랑스어는 전혀 알지를 못해 그에 관한 좀 더 상세한 정보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 점은 죄송스럽게 생각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이 책은 원제, ˝L‘homme nu˝로 지난 2016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9년 7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이 책이 독자들에게 밝히고자 하는 점은, 인간에게 매우 중요한 개인들의 ‘프라이버시‘ 문제를 자신들의 이익 때문에 사실상 안보에 결부시키는 ‘빅데이터 수집 거대 기업‘들이 사실상 정부와 민주주의를 불신하고 오로지 근원적 이데올로기로서 자유지상주의와 세계화를 대체불가능한 가치로 여기고 있는 등의 이들의 권력화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또한, 글 서두에서 저자들은 ˝빅데이터 사회는 훨씬 교묘하면서 고통이 없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통제한다˝고 전제하고 수많은 개인들이 쌓아온 데이터들을 그저 거저 거둬들여 자신들의 이익 창출해 무비판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산업 전반의 행태에 대해 날을 세워 비판합니다. 물론 이런 빅데이터 수집 기업들의 영리 활동과는 다소 별개로 2001년 9월 11일의 미국 뉴욕 테러로 말미암아 당시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정보 우위 information dominace‘의 논리에 따른 총체적인 데이터 수집에 나섬으로써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미국의 행정부와 빅데이터 수집 기업들이 거의 무분별한 결탁에 이르렀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사실 건전한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각 시민들의 프라이버시 보호는 매우 엄중하고 중요한 주제임은 모두가 잘 아실겁니다. 그런 연유로 검색 알고리즘을 통해 소비 제안을 시도하고 있는 페이스 북과 구글의 움직임은 이렇게 각 개인들의 누적된 ‘프로파일 데이터‘를 통해 우리의 프라이버시를 제한하는 데 이르는 결과로 이르렀다 봐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과거 NSA의 전세계 감청 프로그램인 ‘에셜론‘ 등을 폭로한 스노든의 사례에서 정보당국과 국가 주요 인사들의 사실상의 연합체인 과두제 상황에서 탐사 전문 보도 기자들의 집요한 취재활동은 입안에 가시와도 같았을 겁니다. 특히, 이 글에서 설명되고 있는 바와 같이 행정, 사법, 입법 체제에 +1인 언론계에 대한 이들 빅데이터 기업들의 교묘한 획책은 이미 유명한 바가 있습니다. 이러한 정보 독점 체제를 용인하는 언론은 적극적으로 지원에 나서는 이들의 행태는 과거 프랑스에서의 구글의 언론 프로그램과 유사합니다. 다만, 앞서 제가 언급한대로 이들의 거대한 기득권에 저항하는 탐사 보도 전문기자들의 재갈을 효과적으로 물릴 수 없기에 앞으로 대다수 시민들의 정치적 권리와 프라이버시 권리는 소수의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언론들의 손에 달려있지 않는가 이 글을 읽고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쪽 업계에 대한 다양한 배경 지식이 없는 분들은 이게 무슨 터무니없는 음모론이냐 하실테지만 미국 오바마 행정부 시절에 대통령이 왜 구글의 회장인 에릭 슈미트를 영입하고자 했는지가 빅데이터 기업들이 단순한 영리 활동을 벌이는 전통적인 기업이 아니라 이미 정부 각료와 정보 당국과 매우 밀접한 관계임을 드러내는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외에도 NSA와 CIA의 여러 행적들과 미국의 정보 우위를 위해 이들의 일련의 지속된 작업들을 거의 여과 없이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데요. 이 부분도 이러한 관련 업계를 인지하지 못하는 분들은 거의 대부분 음모론으로 치부할 수도 있을겁니다.

사실 저는 과거에 마누엘 카스텔과 소극적인 재런 러니어를 통해 우리에게 놓여진 이 구축된 넷 망이 어느 정도는 우리의 민주주의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었던 적이 있습니다. 반대로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한 조지 W. 부시 행정부와 미 사법부를 사실상 꼭두각시로 만든 정보 관련 영장 집행이 불신의 원인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근에 개봉된 스노든의 전기 영화와 티모시 스나이더와 하워드 라인골드와 같은 현 웹 기반 업계의 비판자들의 목소리를 너무 노골적으로 체화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적으로는 이러한 무분별한 정보 당국의 비대화와 거기에 결탁한 넷 기업들의 미래가 사실상 ‘전체주의화‘를 부를 수 있다는 저자들의 지적에 실로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원칙적으로 민주주의 체제에서 비대한 권력을 마땅히 견제해야만 한다는 정치적 원리주의에 긍정하고 시민들이 주체가 되어 만들어가는 건전한 민주주의가 바우만이 경고했던 디스토피아의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에 그치지 않고 ˝사람들의 안보와 안전에 대한 욕구는 결코 전부를 채울 수 없는 문제˝로 변화된 시대에 대한 일방적인 굴복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주체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먼저 요구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넷 기반 산업과 이를 바탕으로 막대한 이윤을 얻고 있는 다수의 스마트 기업들이 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국가에 대한 불신과 정치의 불필요성을 인지하고 밀턴 프리드먼의 손자인 패트리 프리드먼의 ˝기업은 권력을 초월한다˝는 말이 시사하는 바가 어떠한 것인지 충분히 짐작할 만 하다고 하겠습니다.

끝으로, 각 국 뿐만 아니라 거의 전세계의 현상이라고 봐도 무방한 현재의 웹 기반의 산업 전반에 대해 적절한 규제가 없이는 실질적으로 우리의 민주주의가 휴지조각이 될 수 있다는 암시에 저는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법부가 이러한 소수의 개인들을 더욱 살찌우는 다수의 데이터화에 대해 확실한 기준을 갖고 이를 견제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소위 전문가들에 의한 독재를 은연중에 지지하는 이들의 사고 전환을 위해 빅데이터의 이면에 놓여 있는 진실을 우리가 얼마간 찾아볼 필요가 있을 겁니다. 소수의 탐사 보도 전문 기자들의 손에 이것을 맡기기 보다는 ‘세계의 작동 원리‘를 비롯한 수많은 알고리즘을 스스로 획득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할 텐데요. 조지 오웰이 희화적으로 경고했던 미래의 감시 사회를 우리가 애써 무시하는 것으로 그것을 더 빨리 재촉하게 되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모두가 경각심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해 보인다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생성한 디지털 데이터는 우리에 관한 것이지만 우리 소유가 아니며, 기술 산업을 지배할 자들이 우리의 데이터를 거의 털어간다.

정보기관과 빅데이터 기업들의 융합은 비선출 권력이 지배하는 세계 정부를 예고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 된다.

자동화 된 감시는 완벽하게 전체주의적인 성격을 띤다.

그렇게 쌓인 데이터는 소수 개인의 부와 감시 기관의 힘을 끝없이 키우는 데 사용된다.

2014년 페이스북은 프랑스에서 2억 6600만 유로를 벌어들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기술적인 재정 운용 덕분에 프랑스 국세청에 낸 세금은 정상적인 금액의 109분의 1도 안 되는 31만 9167유로에 불과하다.

빅데이터 기업의 꼭두각시들은 언어를 빈약하게 만드는 데 일조하면서 의미의 다양성을 감소시키고, 세상에 대한 이해 방식을 단순화, 획일화한다.

세상을 수량화하고 측량하고 눈금을 매겨서 규격화하는 것, 이것이 빅 데이터 기업들의 논리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데이터, 민주주의를 조작하다 - 빅데이터 알고리즘은 어떻게 여론을 만들고 역사의 경로를 바꾸는가
크리스 샤퍼 지음, 김선 옮김 / 힐데와소피 / 2020년 10월
평점 :
절판


이 책의 저자인 크리스 샤퍼는 미국 예일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메리 워싱턴 대학에서 컴퓨터 과학과 디지털 과학을 연구하고 오픈 소스로 비롯되는 전방위적인 인터넷 시스템 하에서의 보안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러시아 대통령인 푸틴의 최측근인 예브게니 프리고친 (Yevgeny Prigozhin)이 소유한 IRA (Internet Research Agengy)의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에 대한 공격적인 해킹에 대한 연구와 분석으로 명성을 얻은 바가 있습니다. 러시아의 해킹에 대한 문제는 뒤에 다루겠습니다만, 일찍이 미국의 CIA는 해킹을 당한 쪽이 어리석은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러시아와 이란 등의 광범위한 해킹 능력은 단순히 정보 유출이나 기밀 문제를 연계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실망감과 불신을 해당 국민들에게 가중시키는 것으로서 이러한 권위주의 국가들의 소위 해킹 작전에 대해서 경각심을 가질 필요는 분명 있어 보입니다. 따라서 이 글은 원제 ˝Data versus Democracy : How Big Data Algorithms Shape Opinions and Alter the Course of History˝로 2019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다소 최근인 2020년 10월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우선, 저자인 크리스 샤퍼는 이 책을 설명하는 중요한 주제인 ˝주의력 경제 (attention economy)를 먼저 언급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층층이 구축된 웹 세계에서의 총 망라된 이윤 활동이 ˝프로파간다˝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즉, 그는 수많은 정보들이 범람하고 있는 정보의 바다에서 개개인의 주의를 끌만한 요소들을 데이터화해 무작위로 살포하는 등의 일련의 행위들이 사실상 매우 교묘하게 제안된 일종의 프로파간다 활동이라고 보는 듯 했습니다. 이와 같은 내용이 이 글의 1장부터 3장까지의 분량이었는데요. 특히, 오늘날과 같은 무분별한 정보 과잉의 시대에서 개개인이 비판적 인식을 갖고 해당 정보들에 대한 분별력을 가질 수 있는가가 관건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이것은 단순히 책을 많이 읽거나 다양한 인터넷 정보에 접근해서는 가질 수 없는 능력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보 처리에 대한 분별력이 없는 상황에서 거대 인터넷 기업이 이윤 목적으로 제공하는 여타 정보들이 어떤 식으로 개인들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최종 단계에서 어떻게 우리의 민주주의를 위태롭게 하는 지에 대한 꽤 솔직하고 현실적인 비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개인들의 축적된 데이터들에 대한 거의 무제한적인 접근을 원하는 인터넷 기업들의 의도는 이미 재런 러니어와 스티븐 베이커 등이 경고한 바가 있습니다. 구글은 물론 페이스 북과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 업체는 자신들이 자선사업의 목적으로 회사를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더 많은 이익을 거두기 위함입니다. 물론 이러한 가운데 마누엘 카스텔 등과 같은 학자들이 이렇게 개인들이 긴밀하게 연결되는 세계에 대한 얼마간의 희망을 피력하기도 했는데요. 소비 패턴을 파악해 상품과 쇼핑몰을 연결해주는 등의 알고리즘과 같은 수많은 연결고리들이 반사회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인종차별집단과 반페미니즘 및 나치주의자들의 양지화에도 기여하고 있는 점은 참으로 아이러니라 할 수 있겠습니다. 지금도 많은 나치주의자들이 히틀러에 의한 유대인의 학살이 날조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더 정치적으로는 오바마 전 대통령이 미국 태생이 아니라는 트럼프의 거짓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행태까지 이들 반정치 세력의 토대가 되고 있기도 합니다. 물론 이 지점에서 많은 분들이 저런 극단의 정치 세력까지 포용할 수 있어야 진정한 정치라고 믿고 있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이러한 활동의 근간이 아주 극소수라거나 일부에 불과하다라는 논점에 긍정할 수 없는 것은 점차적으로 민주주의에 해악이 되는 자들이 과잉 정보의 시대에 판단력과 분별력이 어려워진 시기를 틈타 횡행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글의 다음 4장부터 6장은 다른 한편으로 티모시 스나이더의 주장에 대한 근거가 되는 분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스나이더는 그의 논저인 ‘가짜 민주주의가 온다‘에서 지난 미국 대선에서의 전방위적인 러시아 측의 개입에 대해 주장을 한 바가 있습니다. 샤퍼 역시, 이에 대해 ˝2016년 영국의 브렉시트 국민 투표에 러시아가 개입한 것으로 의심되는 정황이 있다˝고 언급하며, 특히 지난 대선에서 러시아 군사정보국 내의 팬시 베어 Fancy Bear 라는 해커 팀이 ˝트럼프를 지지하고 클린턴을 폄하하는 식으로˝ 미국 선거 운동에 개입해 영향을 끼친 일련의 공작 활동에 대해 서술하고 있습니다. 특히, 러시아의 공작은 힐러리 클린턴의 이메일을 해킹해 그녀의 지도력과 정치적 능력의 큰 타격을 안김과 동시에 버니 샌더스를 지지하는 지지자들과 공화당에 환멸을 느끼는 중도층이 클린턴에 투표하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샤퍼가 강조하듯이, ˝개표 결과를 바꾸거나 선거일에 기계를 고장내는 것은 미국의 민주주의 체계에 대해 대단히 파괴적인 공격일 수 있고, 무엇보다도 효과적으로 선거결과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는 일 일 수 있다˝고 언급합니다. 결국 이것은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의 민주 정치에 대한 신뢰도를 크게 낮추는 파급력을 갖게 하고, 러시아와 같은 권위주의 국가들이 자신들의 국가 정당성을 갖고 위상이 떨어진 미국의 민주주의와 베팅에 내설 수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우려가 될 만하다고 여겨집니다.

앞선 부분과 관련해, 샤퍼는 ˝이미 일곱개의 대표적인 권위주의 국가들은 여론 공작과 프로파간다를 위한 예산을 별도로 배정하고 있다˝고 강조하고 여기에는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이란 등이 소위 서구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전세계의 많은 국가들이 대외적으로 민주주의 체제를 표방하고 있습니다만 정석적으로 민주주의 체제를 구축한 국가는 불과 20여개국에 불과합니다. 그외 나머지는 겉 껍데기만 민주주의를 표방한 채, 그 속은 철저한 권위주의 체제의 국가들이 바로 본질입니다. 즉, 러시아와 같은 경우는 EU의 무능과 NATO의 공격성을 조작해 자신의 입맛대로 유럽의 시민들에게 공격적인 프로파간다로서 작용하고 그 결과로서 우크라이나와 스웨덴에 벌인 공작이 이러한 정치적 의도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확실히 이 점은 수많은 권위주의 국가들이 민주주의의 취약성을 주장할 수 있는 부분으로 이를 통해 자신들의 국민들에게 민주주의가 실상 국가를 나약하게 만드는 정치체제라는 등의 터무니없는 주장을 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국제적 위기 상황에서 수많은 시민들에 대한 제언으로서,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가짜뉴스와 그리고 사회적 편견과 양극화를 유발하는 메시지 증폭과 싸우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자질은 자신이 소비하고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고 공유하고 생산하는 것에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들 가짜뉴스와 양극화를 첨예화 시키는 과도한 자유 시장주의와 극단의 정치 지지자들이 주를 이룬 ‘대안 우파‘ 뿐만 아니라 만연한 인종차별주의자들과 무분별한 반페미니즘주의자들과 같은 반정치의 문제에 대해 시민들의 끊임없는 주의가 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


- 이 글 1부 중간에 저자의 ˝우리는 모두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라는 주장에 대해서 다시금 수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지식과 정보의 범람에도 우리 스스로 지독한 편견을 벗어나지 못한 점은 매우 불행한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날 가짜뉴스는 극심한 양극화와 편향 및 사회적 불신을 일으키는 주범이라 할 수 있다

(러시아의 해킹 공작팀에 의한 미국 선거) 개표 결과를 바꾸거나 선거일에 기계를 고장내는 것은 미국의 민주주의 체계에 대해 대단히 파괴적인 공격일 수 있고, 무엇보다도 효과적으로 선거결과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는 일 일 수 있다.

광고 업계가 원하는 만큼 우리를 조종하기 위해 필요한 데이터를 가지고 있다면 완전히 개인화된 광고는 우리의 행동과 심리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심지고 광고 업계가 의도하지 않았고 생각해보지도 않은 방향으로도 작용할 수 있다.

인종차별주의, 성차별주의, 동성애 혐오, 트랜스젠더 혐오, 외국인 혐오 이 모든 것은 낯선 것에 부정적으로 반응하고 낯선 것을 위험과 위협에 연관 짓는 우리의 오래된 습관에서 유래한다.

대안 우파의 본질을 간단히 요약해 본다면 자유 지상주의자들과 극단의 정치 지지자들의 조합이라고 할 수 있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an22598 2020-11-11 0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 사실 빅 데이타의 큰 유용성 중의 하나는 Decision making을 가능케 한다는 점이라 생각합니다. 그동안은 애매모호하거나 결정하기 어려운 상황이나 문제들을 객관적인 증거라 일컫어지는 데이타를 이용해서 가능한 최대의 이익을 창출할 수 있고 효율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답을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패러다임인 것 같아요. 과거에도 물론 데이타에 대한 신봉은 존재했지만, 현상들을 데이타와 하는 실제적인 기술이 뒷받쳐지지 않았고, 또 원하는 만큼의 다량 데이타를 추출 할 수 없는 한계가 존재했기 때문에 그 한계를 인정하고 매우 신중했던 것 같습니다. 이제는 그러한 한계들이 극복되어가는 상황에서 데이타 자체에 대한 신뢰가 무한정 커져가는 느낌입니다.

베터라이프 2020-11-11 13:34   좋아요 0 | URL
우선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쓰신 요지는 누적된 데이터가 현재로선 신뢰할만한 수준이라고 긍정하시는 듯 한데요. 인간의 행위 자체에 대한 어떤 알고리즘 및 웹 기반의 상품 판매와 같은 데이터는 기업들이 관련 자료를 이용해 사용할 만한 수준은 되겠지요. 다만, 일반적인 지식 데이터와 관련해 아직도 검증되지 않은 지식들이 사실인양 오도되고 있는 상황이 근절되지 않고 있으며 이와 관련해서도 일부 비도덕적인 무리들이 가짜뉴스를 양산하는데 쓰고 있는 관계로 현재로선 무엇보다 데이터(광의적인 측면에서)에 대한 일말의 변별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리라 여겨집니다. 아주 원칙적으로는 개인의 누적된 데이터에 대한 접근권이 과연 올바른 것이냐에 대해서도 사법당국과 행정 전반에서 논의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과연 객관적인 함의를 갖춘 데이터를 어떻게 검증할 것인가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 또한 마찬가지겠죠. 물론 그 분야에 있는 전문가분들은 뭔가 새로운 먹거리로 여기는 것에는 십분 이해합니다. 다만 일개 시민의 입장에선 매우 우려스러운 점을 감출 수가 없군요.

han22598 2020-11-13 02:32   좋아요 1 | URL
저도 그 분야 있는 사람인지라 요즘 돌아가는 추세를 가능하면 중립적으로 써보려했는데, 제가 다시 읽어보니 긍정적인 방향으로 쓴 것 같네요. 베터라이프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특히 개인 데이터에 대한 접근성에 대한 부분은 매우 염려스러운 부분이 많습니다. 미국에서는 이미 상품화된 개인 유전자 분석( gene analysis) 같은 경우는, 동의하에 개인/또는 가족 유전자를 분석해 특정 질병에 대한 발생률을 예측하는 유용한 기술 혁신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러한 정보들을 만약 보험회사와 공유되었을때 개인의 유전정보자체가 하나의 계급을 양산할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몇년 전부터 구글, 아마존, 애플등의 회사들이 이러한 개인 건강과 관련된 데이타를 무작위로 모으고 있고, 이를 활용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 줄 알고 있습니다. 애플 와치가 가장 대표적인 예입니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 데이타가 곧 힘이라는 말이 현실화된 시대인 것 같습니다. 많은 논쟁거리가 있는 부분인데, 베터라이프님 덕분에 함께 나눌 수 있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기업권력의 시대
마이클 페렐먼 지음, 오종석 옮김 / 난장이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미국의 손꼽히는 진보적 경제학자이자 경제사학자인 마이클 페렐먼은 미시간 대학을 거쳐 버클리에서 농업경제학에 관한 박사 학위를 수여 받게 됩니다. 당시 경제학계의 큰 족적을 남긴 조지 쿠즈네츠의 사사를 받은 펠렐먼은 이후 사회경제 분야와 관련해 다양한 관심을 갖고 진보적 경제학의 틀을 자신의 학문적 토대로 삼는 등의 여러 연구활동을 지속해 왔습니다. 이를테면 진보적 매체인 먼슬리 리뷰에 글을 기고한다던지 미디어 매터스와 퍼시피카 라디오 등의 여러 방송에서도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는 등의 학자 이외의 활발한 활동을 지속해왔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런 왕성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올해인 2020년 9월 21일 캘리포니아 주 치코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면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병명에 대해서는 구글링을 통해서도 나오지 않고 있는데요. 어찌됐든 이런 저명한 경제학자가 세상을 등진 것은 매우 아쉬울 따름입니다. 일단 그의 여러 저서들 가운데 특히 ‘자본주의의 발명‘은 전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바가 있는데요. 하지만 국내에는 그의 논저들이 많이 번역되지를 않아 아쉬움이 크기도 합니다. 이 책은 원제, ˝Manufacturing Discontent : The Trap of Individualism in Corporate Society˝로 지난 2005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09년 7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다만, 현재 이 글은 현재 절판된 상태입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원제를 국역한 책의 제목이 내용 전반을 설명하는 데에는 다소 부족하지 않나 생각해 보는데요. 원제를 그대로 번역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 연유로 이 책을 통해 저자인 페렐먼이 밝히고자 하는 점은 ˝오도된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한 기업들의 거대 권력화가 국가와 사회에 미치는 영향˝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특히, 이 부분과 관련해 미국의 소름끼치는 상황은 낙농축산계의 우유 생산에 있어 배설물과 여타 오염물을 방사선으로 처리해 출하하고 있는 현재 미국의 상황과 이러한 시스템을 더 견고하게 만드는 ‘광범위한 로비 시스템‘이 사실상 소비자 주권을 무력화하는데 힘쓰고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2장에서는 이 소비자주권과 관련해 오히려 기업들이 많은 소비자들에게 ‘과시적 소비‘를 확대하는 것으로 본래의 의미를 무력화시키고 있는데요. 전통적인 경제학 측면에서도 애덤 스미스 조차 노동자들의 소비활동에 대한 꽤 윤리적인 문제 등을 다뤘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오늘날 나날이 기업들의 권력이 비대해짐에 따라 현재의 많은 사회들에서 보여지는 양보와 지원책을 좀 더 배타적으로 유지하고 기득권을 강화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는 현실은 깊은 우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도 캘리니코스가 오로지 이익만을 취하려는 기업과 그 반대의 세금 부여, 사회적 책임 등은 사회와 시민들에게 전가하는 이러한 행태들을 마찬가지로 강하게 질타한 바가 있습니다.

앞선 개인주의에 돌아가서 우리가 역사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개인주의와 대규모 기업들이 받아들이고 사용하고 있는 그것은 매우 결이 다르다 할 수 있을겁니다. ˝소위 노동자를 굴복시키는 기업 개인주의 즉, 기업형 개인주의˝는 사회의 많은 시민들에게 ˝개인의 역할이란 것은 오직 부지런히 일하고 동시에 적절히 소비하는 것˝이라고 주입합니다. 많은 자본주의의 문제점들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은 이렇게 개인들을 파편화시켜서 오로지 시스템의 구성 요소로 전락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을텐데요. 자본주의가 태동한 시기가 그리 짧으면서도 어떻게 민주주의를 비롯한 유구한 정치철학의 과거를 무너뜨리고 어떻게 이토록 빠른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선 참으로 의구심이 들 정도입니다. 백번 양보해서 기업의 사회적 역할 특히, 기업이 효과적으로 운영됨에 따라 그것의 실리를 노동자이자 시민인 우리들이 얻게 되고 이러한 선순환이 지속된다는 수많은 경제학자들의 주장들이 현재에 어떤 식으로 파행적 결과를 낳았는지는 ‘프레카리아트‘ 및 개인의 파편화, 복지 제도의 유명 무실화 등으로 충분히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 4장 기업의 책임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환경오염과 같은 일련의 도덕적인 불감부터 자행되고 있는 여러 기업들의 범죄행위에 있어 법률이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고 있는 점은 큰 우려할 만한 사항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더욱이 미국과 같은 나라는 일반 개인들이 거대 기업들을 상대로 제기할 수 있어야만 하는 소송과 관련해 여러 막대한 비용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게 만들면서 소송 자체에 대한 접근을 멀어지게 한다는 점에서 사법 시스템 자체가 비효율적인 측면을 떠나서 다소 기업 친화적인 편견을 스스로 자초하고 있다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미 사회 계약에 따른 법치주의와 법 제도의 근간이 자본주의화에 따른 매우 불합리한 기업들의 권력화가 이러한 사태를 조장하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다음, 6장에서 많은 분량을 할애해 저자가 설명하고 있듯이 경제 정의에 입각해 법 테두리 안에서 이어나가야 하는 기업의 운영 법칙들이 어떻게 불식되고 있는지 잘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이번 장에서는 금융 자본주의와 전통적인 자본주의 간의 인식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현재까지 자본주의 자체가 고도화 된 금융 자본주의의 시녀가 되어가고 있다 받아들여도 거의 무방합니다. 전세계 금융의 역사에서 지난 2008년에 있었던 뉴욕발 경제 위기의 책임을 어느 누구도 지지않는 사태는 모든 기업들의 윤리적 함의가 어디에 있는지 명백하게 드러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앞선 개인주의를 기업이 변형시켜 배포한 기업형 개인주의가 사실상 윤리와 도덕 문제, 더 나아가서는 법의 문제를 ‘탈각‘시키는 쪽으로 시스템 전반의 변화를 기업들이 획책했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2008년 당시 거대한 도덕적 해이와 대마불사와 같은 ‘이득은 오로지 자신들만이 손해와 책임은 사회에‘라는 이념으로 무장한 자들이 국가와 사회를 어떻게 무력화 시켰는지는 충분히 목도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라구람 라잔과 누리엘 루비니 더 나아가서는 하이먼 민스키 정도로 대변되는 정상론자들을 무력화시킨 작금의 금융 자본주의가 과연 모든 시민과 사회의 이득이 될 수 있겠느냐는 그 결과의 도출이 매우 명백하지 않겠습니까.

글 중간에 저자인 페렐먼은 ˝현재에 지속되고 있는 테러의 위협에 투입되는 돈 만큼 기업의 위협과 불안에 대비해 투입되어야만 하는 돈의 총량˝이 너무나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데요. 테러에 대해서는 모든 국가가 즉각적으로 대응에 나서고 있지만 이 방만한 기업들의 권력 독점에 대해서는 왜 국가가 제대로 나서고 있지 않는지에 대해 시민들의 무력감은 차치하더라도 소위 보수주의자들과 지식인들이 입을 다물고 있는 점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런 의미로 이 글 마지막 8장에서 저자는 약간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데요. ˝자유방임주의라는 관점에서 볼 때, 개인들이 가지는 민주적 권리는 시장 경제의 소중한 미덕 중 하나˝라는 주장에 거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장이 멋대로 돌아가도록 내버려두는 것과 전자의 가치는 매우 다르다고 할 수 있을겁니다. 뒤이어 진술된 내용들이 마땅히 따라오는 시장 내부에서의 정치의 퇴장과 선거의 모순 등이 나오는데요. 전반적인 시장의 문제들은 사실상 우리가 자초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기업들이 시민들의 ‘민주적 권리‘를 제거하는 데 몇십년에 걸쳐 노력해 왔지만 소위 ‘먹고사니즘‘에 따른 일방적인 강요된 개인주의화에 대해 제대로 저항하지 않은 우리들의 책임도 분명 있는 것이죠. 전반적으로 시장과 정치에서 시민들을 괴리시키는 일련의 정치경제적 작업에 우리 시민들이 어느 정도의 파급을 갖고 있겠느냐의 문제를 잠시 제쳐놓고 이런 문제들에 대해 최소한의 의구심을 우리가 견지하고 있었더라면 아마도 이 지경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겁니다. 특히, 샹탈 무페가 강조했던 바대로 전 사회적으로 좌파들의 철지난 이념 논쟁으로 인해 몰락한 것은 보수주의가 신자유주의와 결합하는 것을 방조하고 기업들의 문제들을 수수방관하는 데 도움을 준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역시나 지금으로선 기업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시민들의 힘이 무엇보다 필요하며, 대체적으로 그동안 자본주의가 기업 경영에 대한 어떤 성역을 강요하고 기업 전반의 자율권을 배타적인 권리 등으로 포장한 일련의 사회경제학 과정을 철폐하는 데 힘써야만 앞으로 50년의 우리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우리는 리스크를 감내하는 모든 사람들이 동등하게 취급받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일자리가 부족한 시대에 기업이 특권을 요구하는 것이 더 공익적이라는 게 되어버렸다.

소비자 주권이라는 수사가 맞다면 기업들의 존재 이유는 소비자들의 욕구를 충족해 주기 위함에 있다.

개인들이 자유롭게 경제적 선택을 하면서 시장이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게 돌아가도록 내버려두게 만드는 여러 전제 조건들 중 가장 필요한 것은 대중이 완전한 정보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무시무시한 것은 갈수록 정부가 학계로부터 오는 정보의 흐름을 통제하는 데 막대한 힘을 쏟아붓는다는 것이다. 즉, 자신들이 좋아하는 학자들에게는 연구비를 대주는 반면 자신들에게 불리한 연구결과를 제시하는 학자들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들인댄다.

회사의 이윤은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비용을 전가함으로써 얻는 것이다. 기업이 환경 오염을 발생시키면 사회전체가 그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국가의 숨겨진 부 - 국가에 내 행복의 책임을 묻다
데이비드 핼펀 지음, 제현주 옮김 / 북돋움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2000년대 초반 영국 노동당 정부인 토니 블레어 정권에서 관료를 역임한 데이비드 헬펀은 주로 실험심리학에 근거한 사회 분석 및 인간 심리학을 오랫동안 연구한 학자이기도 합니다. 또한, 그는 영국 국내에서 국민들의 사회적 인간 행동 심리 등에도 관심을 기울여 왔으며 옥스포드에서의 전임 교수와 킹스 칼리지에서 방문 교수를 역임하는 등 관료계와 학계를 넘나들며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코로나-19 사태에 따른 손씻기 운동과 같은 사회적 장려 운동 등에 관심을 갖고 대중 매체 등에서 얼굴을 알리고 있기도 합니다. 이런 연유 때문인지 영국내에서는 과거 내각에서 일했던 경력 때문인지 앞서 언급한 대로 BBC를 비롯한 여러 방송에서 전문가로서도 조언을 하고 있는 듯 합니다. 그의 이 책은 원제 ˝The Hidden Wealth Of Nations˝로서 지난 2010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년 뒤인 2012년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일단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국내 번역본은 완역 여부를 떠나서 역자가 아마도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인지 역자 주를 넘어 다른 자료들를 임의로 첨부해 놓기도 하였습니다. 이 점은 독자들에 따라 평가의 차이가 있을 수 있는 지점이라 생각됩니다. 이것은 편역본이라기 보다는 역자 보본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저의 평가는 애매하다는 정도로 갈음하고 싶습니다.

먼저, 헬펀의 이 책을 좀 더 면밀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선 문단에서 설명한 것처럼 독자들이 읽을 때 역자가 표명한 인식과 저자의 주장하는 바를 대체로 구별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특히, ‘끼어들기‘라는 미명하에 한국 상황을 보론이랍시고 삽입하고 있는데 이 점은 명확하게도 본래의 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미리 밝혀두고 싶습니다. 따라서, 너무나 광범위해서 의미가 없는 ‘웰빙‘ 다룬 1장을 제외한다면 (사실 1장도 저자가 쓴 원글인지 의심이 될 정도입니다만) 2장부터가 본격적인 논의의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일단 제가 보기에는 저자인 데이비드 헬펀이 근래 세기의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 문제와 빈부 격차에 대해 어느 정도 균형 감각을 유지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능력주의(Meritocracy)에 대한 옹호와 ˝불평등에도 공정한 것과 불공정한 것이 있다는 논리˝등과 같은 수사를 봤을 때 주장하고 선호하는 바의 근거가 다소 부족하지 않나 생각해 봤습니다. 사실 현시대의 자본주의가 단순히 형식상의 능력주의 체계라든지 아니면 그 일면의 모든 것을 옹호하든지 간에 현재로서는 찰스 틸리가 설명한 것처럼 평등의 문제가 자본주의가 침식한 민주주의하에서는 더욱 불명확해졌기 때문에 사회 정치 이론에서 많은 오해가 발생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즉, 능력주의 자체가 극복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민주주의적 본질에서 평등에 대한 반감이 상당하기 때문에 능력주의 자체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 현시점에서는 매우 어렵지 않나 개인적으로는 그리 판단하고 있습니다. ˝공정한 차별˝이라는 정치학적 수사에도 그 본질의 완벽한 이해가 대체로 평등의 인식 부재로 한계가 명확하기에 전체적으로는 민주주의에서 자유의 문제 보다 평등의 문제가 보다 이념적이고 보다 기피하게 되는 가치가 되었던 것은 어느 국가의 사회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4장 도덕의 정치학과 5장 국가의 역할 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는 글임은 일독하고 나서 분명해졌습니다. 사실 그동안 많은 서평에서 오늘날 정치의 문제점은 극명하게 법에 판단에만 의지할 정도로 도덕주의의 실종이 큰 역사적 손실임은 자명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원래 사회 구조가 루소의 말대로라면 모든 인간들이 자신들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 국가와 같은 조직체를 만들 침해할 수 없는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그 권리들을 뒷받침하고 강화시킬 수 있는 도덕주의적 원리가 항상 살아있어야 하는데 이 책의 2장에서도 다루고 있지만 ‘능력주의‘ 사회의 최대한의 공정성은 과연 누구한테 혹은 어떤 제도한테 기댈 수 있는 불명확한 것은 도덕주의의 실종과도 연관이 깊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전통주의적인 도덕적 사회는 타인과 타인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겼으며 이러한 관계들이 건전해질 때야말로 그 사회가 온전히 돌아간다고 전세대들은 그리 판단했습니다. 그런 사회학 역사의 중간에 오도된 허버트 스펜서류의 사회진화학 등이 개인과 개인의 관계를 규정하는 거의 모든 도덕주의를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고 급기야는 신자유주의자들 역시 오로지 개인의 이익이 중요하다고 주장하기에 이릅니다. 그런면에서 이 글, 2장의 논의들은 꽤 중요하다고 생각되었는데요. 약간 틀에박힌 논의일 수도 있으나 사회적 자원의 집중과 그에 따른 부의 쏠림이 과연 건전한 방식이냐에도 시민들의 이성적 판단에 기대하는 것 또한 충분히 중요하다 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글에서 인용된 ˝우편향의 정치인 좌편향의 정치인˝ 정도의 사회적 문제 해석은 다소 미흡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단순 설명을 위해 앞선 용어를 크게 고려하지 않고 삽입했겠습니다만 불평등 문제와 빈부 격차를 오로지 이념에 기대게 만드는 것이 지금까지의 사회 문제를 더욱 극단화 시켰던 원인이기도 하기에 현재로선 각계 각층의 열린 토론과 합의에 이르는 어떤 획기적인 방법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취지의 결론을 이 책을 통해서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4장은 꽤 중요하다고 판단이 되었는데요. 단순한 ‘존중‘ 이상을 넘어 그리고 쉽게 투입되는 돈의 여부를 넘어서서 사회 구성원 모두의 변화와 이를 통한 사회 전체적인 폐해를 개선하는 데 저자는 집중을 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복지의 사각지대를 매우는 네트워크˝와 같은 문단은 생각해 볼 거리들을 제공하고 있는데요. 이것은 명백하게 정부의 투입되는 돈이 아니면 무기력하다는 시민들의 인식을 뛰어넘는 꽤 중요한 ˝행동주의˝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시도를 통해 결론적으로는 사회와 국가가 진화할 수 있다는 저자의 인식에도 ‘아주 터무니없다‘ 라고는 말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동안 국제무대에서의 공익을 위한 여러 NGO단체들의 활동이 있어 왔는데요. 앞선 사회적 갈등과 대화 단절 등을 비롯한 신자유주의적 책동에 분명히 시민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은 있을겁니다. 다만 그동안 복지 문제와 관련해 마찬가지로 그에 대한 반감은 꽤 노골적이었으며 소위 슈미트의 영향이라고 봐도 일견 무방해 보이는 ˝경제적인 개인의 결단주의˝는 스스로의 존엄과 자유에 연결된 가치라고 맹목적으로 주장한 인사들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애초에 조화로운 사회가 어떤 이들에게 있어서는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음모론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불협화음 정도의 부정적 정체성을 갖고 있어야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목소리의 힘이 불식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는 자들이 아직도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이후, 5장에서는 그런 변화된 사회를 통해 나아갈 국가에 대해 꽤 많은 분량을 할애해 저자는 설명하고 있는데요. 전통적 자유주의에 기반한, 달리 말하자면 휴머니즘에 입각한 자유주의를 적절하게 안배하는 국가의 여러 모습들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파트너 관계라든지 공동 책임이라는 부분이 바로 이러한 예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와 관련해 5장 도입에서는 ˝과연 훌륭한 통치는 무엇인가˝대해 적절히 가늠하고 있는데요. 단순히 북유럽 국가들의 면면을 내세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보이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경제가 더 어려우면 어려울 수록 국가의 적절한 판단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부분은 설득력이 있었으며 전체적으로는 민주주의적 이념에 따라 국민들의 요구에 부합하는 정부가 꽤 적절하고 훌륭한 정치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마지막 결론에서는 국가에 해야만 하는 혹은 시민들이 행동해야만 하는 여러 당위들에 대해 논하는 것으로 글이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만 전체적으로 헬펀의 여러 제안들은 어느 정도 실현 가능성이 있는 원칙들이 보이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부유층들이나 권력층이 자신들의 입맛에 맛는 정책이나 권력 구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연유에는 아마도 본질적으로는 다중 정치에 대한 불신이 자신들의 권력이 집중되어도 해소가 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근래의 태국에서의 국왕 퇴진 운동을 비롯한 민주주의 운동을 보노라면 확실히 교육을 받았던 안 받았던 시민 정치 전체에 대한 불신이 이들의 사회맥락적 메커니즘의 전반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관계들 간의 정상화 내지는 내밀화가 각계 각층의 불신을 씻어내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될지 불확실한 점은 우리의 당면한 숙제로 남겨져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책 제목의 국가의 숨겨진 부는 다른 의미로는 매우 중의적인 표현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역자의 과도한 편집이 전체를 독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점을 다시금 밝혀두고 싶습니다.

불평등에도 공정한 것과 불공정한 것이 있다는 논리는 ‘실력중심주의‘, 바로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빨리 승진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에 힘을 실어준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실력‘을 어떻게 규정할 지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은행 계좌에 몇백 파운드 (몇십만 원)의 돈을 가진 것만으로도 청년 시절, 인생에서 내리는 중요한 결정이 달라지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식의 자본 지원은 다른 정책상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도 도움을 줄 수 있다. 이를테면 부유한 학생들이 일류 대학을 다니는 데 드는 돈을 정부가 일부 부담하면서 대학 진학이 아닌 다른 진로를 선택한 젊은이, 전통적인 대학 교육에서 요구하는 만큼의 지적 능력을 갖추지 못한 젊은이의 능력 계발에는 재원을 제공하지 못하는 한계를 해결할 수 있다

대중으로서 우리는, 그리고 정치인들 역시 개인의 책임에 대해 상당히 모순된 자가당착적 입장을 보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