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은 왜? - 반일과 혐한의 평행선에서, 일본인 서울 특파원의 한일관계 리포트
사와다 가쓰미 지음, 정태섭 옮김 / 책과함께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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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출신의 기자인 사와다 가쓰미는 게이오기주쿠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해 이 업계에 뛰어든지 30년이 넘은 소위 민완 기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한국과는 인연이 깊어 보였는데요. 이 글에서 소개되는 1988년경부터 이어진 한국과의 만남은 기자의 청년기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도 보입니다. ˝그 나라의 언어와 역사도 모른채 상대방을 온전히 알기란 어렵다˝는 나레이션은 꽤 공감이 되기도 했습니다. 제가 만약 일본어에 능통했더라면 야후 저팬 등지에서 글쓴이에 대한 다른 정보를 얻을 수도 있었겠는데요. 이 부분은 글을 읽는 분들의 양해를 부탁드려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이 책의 저자인 사와다 가쓰미의 다른 글들 중에 제 눈길을 잡았던 것은 문재인 대통령과 관련한 글이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 글은 원제, ˝反日韓國という幻想˝로 2020년 일본에서 출간되었고, 국내에도 발빠르게 올해 12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약간 특이 사항은 원서는 마이니치 신문사에서 출판된 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미 서문에서 저자는 이 글을 한국을 아는 어느 외부인의 시선으로 담은 글이라 밝히고 있듯이, 앞서 언급한 ˝그 나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언어와 역사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과 그 취지가 유사해 보였는데요. 이를테면 일종의 진정성이 느껴진다고 해야할까요. 물론 제가 이 지점에서 진정성을 운운했다고 저의 평가가 일관된 관점이라고 오해하지 않으셨음 좋겠습니다. 여기에서 속았다는 표현을 쓰기 보다는 명확한 한계가 존재한다고 밝혀두고 싶습니다. 저자는 다른 일본인들과는 달리 현재의 한국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일주의가 지금 유지되고 있는 한국 정치 상황에서 진보와 보수의 격렬한 갈등 상황에서 나타나고 있는 일종의 양가적인 산물이라고 보는 듯 했습니다. 한국 정치 내부의 보수가 저자의 입으로라면 ˝현실적인 반면에˝ 진보는 올바름이라든지 정의라는 가치에 주목하면서 국내 정치 뿐만 아니라 대일, 대미 관계에서 문제를 일으켰는데 이를 작금의 문재인 정부와 비교하여 나름대로 분석하고 있는 부분은 꽤 신선하다 할 만했습니다. 물론 제가 저자의 관점에 동의하고 있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사실 글 내내 저자의 생각 보다는 인용된 내용이 많아서 사와다 가쓰미 본인의 주장이나 생각인지는 약간 불명확한 부분이 있기도 합니다만 이를 간단히 한국 정치 상황에서 진보와 보수의 갈등의 산물이라고 ‘반일주의‘를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매우 실망스러운 부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기본적으로 일본의 국익을 최대한으로 이어갈 수 있는 요건은 강력한 미일 동맹 체제하에서 한국을 옵저버 수준으로 끌어들여 대 북한 대중국 공세 내지는 연합전선에 나서는 것일겁니다. 물론 여기에는 중국과의 경제적 문제 부분이 돌출되겠습니다만 일반적인 국제정치적 관점에서는 이렇습니다. 사실 저자는 1장부터 4장까지 구구절절하게 한일관계에 대한 과거와 현재를 (어느 독자들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인식의 궤를 이끌고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의 국력이 어떻든, 어떻게 선진국이 되었든‘과 같은 현재의 한일 관계의 패러다임의 변화를 물론 짚고 넘어가는 것이 중요하겠지만 애초에 일본에게 있어서 한국의 존재가 미국과의 동맹 관계에서 보다 더 중요하다고 볼 수 없는 관계였습니다. 물론 교린의 입장에서 중요한 이웃 국가일수도 있지만 애초에 일본 국내에서 과거 역사 문제와 패전에 따른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은 일본이 독일과 같은 과거사에 대한 입장을 보이기는 매우 어려운 이치였습니다. 왜냐하면 전후 국가 자체가 완전히 해소되었다기 보다는 세계 유일의 강대국에 의해 과거의 모든 문제가 봉합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 부분을 저자는 국제 정치의 현실이라 보고 반대편에 한국이 너무 이상주의적으로 앞서 가려고만 하는 것으로 판단하는 듯 한데요. 그런 일본의 봉홥된 과거사가 올바른 현실은 아니겠지요. 더욱이 현재 이 과거사와 관련해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과연 정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의도적인지 아니면 몰라서 그랬는지 2013년 당시에 아베 정권은 과거 고노 담화를 철회하거나 그게 안된다면 수정하고 싶어했습니다. 뒷 얘기로 나오는 바에 의하면 당시 미국 백악관이 압력을 넣어서 아베가 이를 철회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한데요. 아미티지와 같은 저팬 핸들러에게도 이런 문제는 민감했을 겁니다. 사실 이러한 일본 정부가 과거사를 대하는 태도 하나를 보더라도 양국간의 인식차이가 얼마나 좁힐 수 없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이것을 그동안 한일 양국이 민간 차원에서의 교류만은 어떻게든 붙잡고 정치와 외교 그리고 역사 문제에 관해서는 일정 부분 거리를 두는 식으로(일본이 한국 정부가 더이상 꺼내지 않고 물밑에 뒀으면 하는 가릴 수 없는 욕망으로) 치부해 왔는데요. 바로 그것이 국제 사회에 불거진 위안부 문제 등으로 인한 ‘본질에 대한 입막음‘으로 졸속으로 한일 위안부 협의를 추진함으로써 자신들의 국익에 이바지 하게 된 것이죠. 마찬가지로 저자가 언급하는 1965년 체제도 그러하고 더 나아가서는 한국내 정치 분열에 따른 소산으로 보는 반일주의 자체도 그와 비슷한 맥락입니다. 사실 이런것을 서로 이해하자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소리죠. 저들이 한국과 중국 나아가서는 동남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본의 역사 인식 운운을 피곤하고 짜증나고 구태의연한 문제로 바라보는 것 자체를 ‘현실주의적인 국제정치 환경‘정도로 넘어가자는 것은 어차구니가 없는 게 아닐까요. 더욱이 얼마전 있었던 대법원의 강제 징용과 관련된 판결에서도 우리 정부가 명확히 삼권 분립에 의한 민주주의적 가치로서 행정부가 사법부의 판결에 가타부타 할 수 없다는 것을 수차례 표명했음에도 한국 정부에 압력을 넣으려한 일본의 행태는 정말로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습니까. 미국이 자신들의 정부에 하는 것과 매우 유사하죠. 미국 국무부가 여러 선을 투입해 일본 내각에 압력을 넣는 것과 같은 문제입니다. 이것은 내정 간섭의 수법이 미국의 행태와 매우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국제적 환경에서의 현실은 중견국이라 할 수 있는 한국이 국익을 추구할 수 있을 정도의 수월한 문제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현실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다는 식의 자포자기식 태도나 일본의 이익을 나서서 추종하는 행태는 한국인들로서는 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죠. 그래서 저도 ˝친일파에 대한 책임 추궁이 현재의 일본에 적의를 표출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저자의 인식에 동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서로 이해해보자 받아들여보자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이런 ‘예식장 수사‘ 터무니가 없는 것이죠. 이런 측면에서 아베 정권이 한국에 대한 수출 관리에 들어간 것을 현재의 한국의 국력이 과거와는 다르다는 해석으로 끼워 맞추려고 하는 저자의 태도 또한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죠. 따지고보면 국가 대 국가에 있어서 전근대적인 사고 방식을 갖고 있는 것은 일본입니다. 강대국의 아량이라든지 포용을 떠나서 재발 방지에 따른 사과와 참다운 역사 교육을 시행하는 것 조차 ‘국격의 하락‘이라는 것으로 만드는 일본을 우리가 그들의 입장을 이해해 줘야 하는 것일까요. 흔히 일본 내부의 리버럴 지식인들에 대해서 우리가 어느 정도 기대를 갖고 있었지만 저들 조차도 한국의 사과 요구에 피로감을 느낀다고 하지 않습니까.

끝으로 저는 일본과의 관계에서 민간 교류야 그렇다 치더라도 국제 관계 내지는 외교에서 제반의 일본 태도와 인식을 굳이 애써 이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을 다룰 수 있는 지렛대는 현시점에서 너무나도 많은데 대일 관계에 그토록 진을 빼야 할까요. 서로간의 국내 정치와 관련된 부분에서 모른척하고 무슨 동반자 관계라든지 협력 관계라든지 이 걸 굳이 추진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한국에 대해 그동안 어떠한 태도를 보였는지 명확함에도 우리가 먼저 나서서 손을 내밀거나 기존의 입장에서 몇 걸음이나 후퇴하는 태도를 보여야할까요. 이렇게 말하면 저를 무슨 국수주의적인 민족주의자로 여길 수도 있겠습니다만 현재의 일본 정치나 일본 국민들 조차도 한국을 제대로 이해해 보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도쿄 신주쿠에 있는 대형 서점에 ‘혐한 섹션‘에 들어가 있는 수많은 서적과 매번 베스트셀러를 오르는 저 문화적인 저급한 행태가 이미 정상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또한, 이 글을 쓴 배테랑 일본인 특파원 조차 한일 관계에 대한 제대로 된 글을 쓰고 있다고 볼 수 없음에도 이런 책을 찾아 읽는 저에게 자조의 심정이 들 정도이니 말입니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자가 법치주의와 법의 지배 및 헌법을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앵무새처럼 한국 사법부의 판단에 대해 종래의 의견만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점은 대체로 실망스러운 부분이었습니다.

친일파에 대한 책임 추궁이 현재의 일본에 적의를 표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반일은 한국 정치 상황에서 진보와 보수의 격렬한 대립의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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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길 수 있는 권리 - 국가권력과 공공의 이익만큼 개인의 사생활도 중요하다
대니얼 J. 솔로브 지음, 김승진 옮김 / 동아시아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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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조지 위싱턴 대학을 거쳐 예일 대의 법학전문대학원을 마친 대니얼 J. 솔로브는 사생활과 기술 발전과의 관계에 대한 전문 학자로 미국 내에서도 큰 인지도를 갖고 있습니다. 지금은 모교인 조지 워싱턴 대학의 법학전문대학원 (로스쿨) 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는데요. 그는 근래 미국에서 큰 관심을 받고 있는 시민들에 대한 헌법에서의 사생활 보호와 관련된 이슈에 뉴욕 타임즈, 워싱턴 포스트, 월 스트리트 저널 등지에서 자주 인용되는 학자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 책은 ˝Nothing To Hide˝라는 원제로 지난 2011년 출간되었으며, 국내에는 2016년 11월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제목을 원제와 가깝게 배치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이 의미심장한 원제는 현재 미국에서 무비판적으로 지지되고 있는 ˝숨길 것이 없으면 떳떳하다˝는 괴상한 논리를 비튼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우선 솔로브의 이 글은 총 4부의 구성으로 오늘날 미국의 사생활 문제와 2001년 9월 11일 이후 급격하게 변한 안보 구조 속에서의 비대해진 첩보 조직과 시민들의 자유와 사생활에 대한 침해 문제, 헌법상에서 이 사생활 문제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와 시시시각각 변하고 있는 기술 발전으로 인한 가까운 미래의 시민들의 사생활 보호를 예측해 보는 것으로 글은 짜임새 있게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미국의 건국 이념은 대통령이라는 행정 수반이 과거 전제 왕권의 국왕과 같은 무소불휘의 권력을 휘두르지 않게 하기 위해 균형적인 삼권 분립을 기초한 건국의 아버지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지금까지도 미국 시민들이 대단히 중요시하게 여기는 자신들의 ‘자유‘에 대해서도 함축되어 있는 의미가 가볍지 않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아주 큰 틀에서 조망해 본다면 시민들의 ‘자유‘와 ‘사생활‘은 매우 불가분의 관계임을 알 수 있을텐데요. 양자 간에 어떤 하나가 희생하여 다른 하나가 더 강화되고 보장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으며, 오로지 양자가 서로 건전하게 보장될 수 있어야 시민의 권리가 유지되는 일종의 체계적 당위성일 것입니다.

사실 2001년 9월 이후, 조지 W. 부시 행정부에 의해 FISA, Foreign Intelligence Surveillance Act 가 강화되었는데요. 이미 1978년에 기초한 이 해외 수집 정보와 관련된 법원의 비밀 영장을 보장하는 법은 그 이전에도 많은 논란이 있어 왔습니다. 더욱이 얼마전 영화화 된 ‘스노든‘에서도 이 FISA에 대한 실체가 잘 드러나 있기도 합니다.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한 국가의 안보 문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임이 밝혀지기도 했는데요. 개인적으로는 현재의 미국 정치 안에서의 비대해진 안보 권력이 과연 어떤 식으로 귀결 될지에 대해 관심이 큽니다. 물론 미국이 구 소련 시절의 국가 시민 전체를 옥죄는 식의 독재 국가로 발화되지는 않겠지만 이 글 7장에서 논의되고 있는 의회가 안보로 함의된 행정부의 독단을 견제하지 않고 있는 현재의 실정에서 다가오는 미래에 어느 누구도 전방위적인 시민 감시 체제에 책임을 지지 않는 형태로 공고화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일찍이 존경받는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인간이 굳이 신이 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었는데요. NSA와 외부로는 파이브 아이즈로 통용되는 미국의 전세계 감시 체제가 에셜런 프로그램 등으로 에드워드 스노든에 의해 폭로된 바도 있습니다. 전세계를 감청 및 감시 하겠다는 발상은 마치 미국이 신이 되겠다는 말과 다름 없는 주장이기도 합니다.

미국은 세계의 어느 민주주의 국가들보다도 진지하고 심각하게 시민의 사생활을 중요시하게 여겼던 나라입니다. 이것은 초기 헌법 체계로부터 시작되어 상위 권력층에게 조차도 지켜야만 될 가치였기도 합니다. 많은 헌법학자들과 강단의 지식인들이 현재까지도 이 문제에 대해 많은 논의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과거 독일 시민을 불법적으로 납치한 CIA나 정당한 미국 시민을 불법 감청을 했던 FBI의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존의 헌법 체계에서 개개인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사법 체제 전체가 나서는 것은 어찌보면 피곤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안보라는 명목으로 행정부의 결단이 시급한 시점에서 사생활 운운하다가 적절한 해결책의 시점을 놓칠 수 있다는 행정부 관료들의 주장도 일견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만, 저자인 솔로브는 이에 대해 ˝법치는 민주국가와 독재국가를 구별해주는 핵심 요소이다˝라고 일갈합니다. 사실상 적절한 안보 정책이라는 것은 거의 허구에 가깝다는 것을 모든 행정부 관료들이 이를 인정하고 최대한 법을 수호하고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쪽으로 반대의 ‘행정 편의주의‘를 강화하지 않게 하는 것이 앞으로 수많은 민주주의 국가들이 유념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또한, 사생활 자체를 개인들의 폭넓은 비밀주의 정도로 왜곡하는 일부 지식인들과 미국 내에서 암약중인 안보강화론자들의 요구를 어떻게 물리칠 수 있겠는가도 중요하다고 여겨집니다. 전반적으로는 이러한 안보 강화 체제에서 이득을 얻고 있는 자들의 로비가 대폭 강화되고 노골화 됨에 따라 미국 행정부 자체가 어떤 자정 능력을 상실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일말의 불안감도 갖게 되는데요. 특히, 저자인 솔로브는 FBI와 CIA가 무고한 미국 시민을 어떻게 도청하고 감시하는지 더 나아가서는 불법 납치에 나서게 되었는지 몇몇 사례들을 이 글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소위 이 콜래트럴 데미지에 대한 어떠한 반성과 성찰 없이는 앞으로의 안보 국가화는 어떻게든 막을 수 없는 것임을 많은 미국 시민들은 인지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끝으로 이 글 2부에서, 다수의 영장에 대한 무분별한 협조를 보이고 있는 구글과 같은 인터넷 기업들에게 보편적인 법을 무시하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막대한 비용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주지시키는 것이 패러다임의 변화를 이끌 수 있다고 저자는 확신하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보다도 FISA 체계 자체를 공개해서 의회의 면밀한 감시를 받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리라고 여겨지는데요. 이 점은 공화당 정부보다는 민주당 행정부가 이를 구축하는 것이 표면적으로는 이치에 맞다고 여깁니다만, 현재의 미국 안보 강화 체제가 과거 아이젠하워가 염려한 ‘군산복합체‘의 존재와 사뭇 유사해보여 개혁에 상당한 저항이 있을 것으로 예견됩니다. 또한 이것에 대한 시민들의 감시와 견제가 과연 제대로 이뤄질 수 있을지 사뭇 불확실한 감정이 드는 것은 저만의 불안감으로 그칠 문제가 아닌 것으로 여겨집니다.


-본문에서 FBI가 파쇄해서 버린 서류나 영수증 같은 것을 붙여서 증거로 제출한 어떤 사건에 대해 법원이 이것은 사생활을 기대할 수 있는 어떤 권리에 들지 않는 것으로 판단한 바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행정부 뿐만 아니라 사법 체제 조차도 일종의 편의주의에 잠식되어 있는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저는 안보가 시민의 권리 위에 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근래 30년 이상의 미국 헌법 체계에서의 개인의 권리에 대한 인식 변화는 이토록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해 보입니다.

법치는 민주국가와 독재국가를 구별해주는 핵심 요소이다

사생활은 비밀이 드러났을 때에도 침해될 수 있고, (비밀이 드러나지 않더라도) 누군가 당신을 엿본다는 사실만으로도 침해될 수 있다

국가기밀특권은 CIA가 그런 짓들을 저질러도, 그것도 불법적으로 저질러도, 사실상 면죄부를 받을 수 있게 만든다

정부의 활동이 아무런 제약없이 비공개로 유지되면, 국민이 정부활동을 파악하거나 평가할 수 없게 된다

국가안보 사안과 일반범죄를 구별하기는 매우 어렵다

현실을 보면 자유와 권리가 희생되어야만 안보가 달성될 수 있다는 가정은 잘 들어맞지 않는다

행정부의 판단을 존중하는 관행은 사생활과 안보의 이익형량 분석에 커다란 문제를 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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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0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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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의 프랑스인들에 의해 빅토르 위고와 버금가는 소설가로 일컬어지는 파트릭 모디아노는 프랑스의 저명한 문학상인 콩쿠르 상의 수상을 거쳐 2014년에는 끝내 노벨 문학상까지 거머쥐기에 이릅니다. 그동안 문학계에서는 그의 작품들과 관련해 탁월한 스토리 라인과 더불어 훌륭한 인물 묘사라는 평가를 하고 있었는데요. 이미 이 작품 이전에도 몇몇 작품이 평단의 반향을 일으켰던 것으로 보아 앞선 설명은 크게 지나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해 보입니다. 특히 이 작품의 번역은 알베르 카뮈의 번역으로 유명한 김화영 교수가 맡은 것으로도 유명한데요. 판본 역시 바뀔 때마다 적지 않은 관심을 받아온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책의 원제는 ˝Rue Des Boutiques Obscures˝로 1978년 출판되었고, 국내에는 1990년 이전에 판권 없이 여러 출판사에서 번역되어 오다 1990년대에 정식으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이번에 제가 구매한 판본은 양장본 개정판으로 지난 2010년 번역 출판이 되었습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기 롤랑은 자신의 뇌리에서 사라진 1943년부터 1955년까지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고자 자신을 구해준 은인인 콘스탄틴 폰 위트와 함께 일한 지난 십 년간의 흥신소 생활을 청산하게 되는데요. 진정한 자신을 찾고자 과거의 단초를 추적하는 것으로 그 의미심장한 행로가 비로소 시작됩니다. 점차 스토리가 진행됨에 따라 주인공이 스파이 내지는 살인면허를 가진 정부쪽의 암살자로 추측되었습니다만 과거의 정확한 직업과 하던 일이 다소 베일에 가려져 있음에도 히트맨이라는 가정은 거의 터무니없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중간에 파리에서의 행적을 뒤쫓아가는 장면에서 이런 저의 억측이 꽤 신빙성있게 느껴졌습니다만 비시 정부 당시의 프랑스 정보를 수집하는 남미의 외교관이라는 설정이 더 설득력이 있지 않나 싶었습니다. 이와같은 맥락과 동시에 주인공을 포함한 5인방의 행적이 마지막 스위스 국경지대와 가까운 휴양도시 므제브에서의 불확실한 결말과 이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스토리상의 큰 흐름에서 자신의 진정한 이름과 신분을 찾고 왜 그가 12년간의 기억상실증에 걸렸는지 대략적인 원인을 다소나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유럽 각지에서 모인 이 5인방이 불안한 파리 생활을 정리하고 스위스 국경으로까지 나아가게 되었는지 그러한 시대적 배경이 앞선 부분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겠죠. 자포자기하며 보내고 있던 당시 프랑스 유력 가문의 출신들의 패배감이랄지, 그저 매일매일 단조로운 유흥이나 사소한 즐길거리에 정력을 소진할 수밖에 없는 패배한 프랑스와 나치 독일의 괴뢰 정부라는 배경은 실로 감정이입이 될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당시 파리에서의 삶이 여성들에게 있어서 불확실성의 연속이라는 것을 단편적으로나마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은 일종의 소득이라고 할 만합니다. 불안정한 시국에서 버팀목이 될만한 남자를 찾거나 아니면 아예 정신줄을 놓아버리는 그 시대 여성들의 삶이 제법 안타깝게 여겨졌는데요. 물론 파티 놀음에 치중하게 되는 남녀 불문한 사람들이 일정 부분 묘사되기도 합니다만 전반적으로 그 시대의 많은 프랑스인들에게는 거창하게 말할 필요도 없이 허무주의의 덫에 빠진 무력한 생쥐와도 같은 하루하루였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의 구조적인 측면은 훌륭한 소설의 르포르타주 기법으로서 일견 한 편의 추리 소설을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을 주기도 했습니다. 사실 중반 이후부터는 어떤 결말이 놓여져 있을지 견디지 못할 정도로 다급해지기도 했는데요. 특히, 주인공과 구도상 연인이라고 봐도 무방한 드니즈와의 예견된 이별이 어떤 연유로 벌어질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궁금증을 갖고 있었습니다만 결말에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을 때는 다소 어이가 없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 상황에서 보이는 주인공의 독백이 전혀 이해가 안되는 것은 아니지만 순간 스스로 미심쩍음을 인지했음에도 행동에 나서지 않은 것은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끝으로, 원문의 충실한 번역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중간에 인종적으로 유색인종에 대한 비하가 인물 묘사의 틀로서 등장하고 있는데요. 과거 제국주의 시기의 탈각되지 않은 인종주의의 영향을 작가가 담아내려고 했을수도 있지만 의도와 상관없이 전체적으로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그외에도 감상적인 측면에서 개인적으로 주인공과 드니즈와의 엇갈린 삶에 대해 마음이 아팠는데요. 마지막 부분에서 프레디와의 만남을 목전에 두고 있는 주인공의 하릴없는 마음과 드니즈를 잃고 나서 받은 충격이 몸에 깊은 각인을 남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진정한 사랑은 그 묘사가 충분하지 않더라도 본질을 감추지 못하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주인공의 기억상실 원인은 작가가 교묘하게 열린 결론으로 설정해 놓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로서는 드니즈와의 그 황당한 이별이 큰 원인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 여자가 나에게 이 질문을 어쩌나 강요하는 듯한 어조로 물어왔는지 나는 처음으로 절망감에, 아니 절망감보다도 더한 감정, 모든 노력, 모든 유리한 점, 모든 선의에도 불구하고 넘을 수 없는 장애물과 부딪치고 있음을 알아차렸을 때 느껴지는 그런 충격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그 파동들이 때로는 먼 곳에서 때로는 더 세게 나를 뚫고 지나갔었다. 그러다 차츰 차츰 허공을 떠돌고 있던 그 모든 메아리들이 결정체를 이룬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였다.

반 알렌은 여름 컬렉션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나는 과연 또 여름 같이 돌아올 것인가에 대하여 의심스러워하고 있었던 터라 그토록 대단한 낙관주의가 매우 놀랍게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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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적은 민주주의
가렛 존스 지음, 임상훈 옮김, 김정호 추천 / 21세기북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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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저자 가렛 존스는 마크로노믹스로 불리우는 노동 개혁과 기업 활성화를 주장하는 미국의 대표적인 자유주의적 경제학자 입니다. 그는 미국 유타주 프로보에 있는 브리검 영 대학을 거쳐 코넬대학에서 공공행정학을 이후 버클리와 샌디에이고의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 받은 뒤, 미국 상원에서 일한 바가 있습니다. 그 이후에는 뷰캐넌의 잔재가 남아있는 조지메이슨 대학의 공공선택연구센터의 경제학 부교수를 역임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의 이런 경력을 뒤로하고 어떻게 평범한 역사학자가 최신 경제학 분야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는지는 다소 의문이 드는데요. 하여튼 이 책의 추천사를 서강대 김정호 교수의 언급을 보더라도 저자가 반민주주의자 일리는 없지만 한가지 확실한 건 여느 신자유주의자들의 논법을 그대로 차용해 쓰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였습니다. 이 부분은 다음 문단에서 자세히 쓰기로 하겠습니다. 이 책은 원제, ˝10% Less Democracy˝로 2020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도 동일한 해인 2020년 11월 번역출판 되었습니다.

우선, 저자의 의도를 곡해하지 않기 위해서 책의 제목대로 10% 적은 민주주의의 정확한 의미를 먼저 짚고 넘어가고 싶은데요. 글의 1장 후반부에서 ˝내가 기아와 독재라는 실질적 위험에 직면하고 있는 나라가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민주주의 국가들에게만 10퍼센트 적은 민주주의를 추천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주길 바란다˝고 저자는 이처럼 쓰고 있습니다. 1장 전반을 통해 민주주의가 뿌리 내린 국가에서는 좀처럼 기아는 찾아볼 수 없다는 것으로 보아 추측하기로는 일반적인 독재 내지는 권위주의 국가에서 되도록이면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여기는 듯했습니다. 또한, 이렇게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민주주의가 시장경제에 이로운 측면이 분명 존재하며, ˝부유한 민주주의 국가˝라고 지칭되는 세계 상위 20여개국에 대한 이해는 ˝민주주의하에서의 시장경제˝로 해석되는 것과 비슷한 해석이라고 생각됩니다. 이것과 약간 별개로 많은 신자유주의자들이 내심으로는 민주주의를 떨떠름하게 내지는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면서도 밖으로는 결코 이를 드러낼 수 없을텐데요. 일찍이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나르시시즘의 기반한 인종차별적인 발언과 여성차별주의에 의한 평소 언어 표현에 대해 한 나라의 대통령이 설사 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하더라도 결코 겉으로는 그것을 드러내서는 안된다고 했던 이면에는 아마도 민주주의와 그것을 신봉하는 유권자들이 있었기 때문일겁니다.

사실 저자와 같은 많은 경제학자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자신들의 학문을 고유한 학문 체계의 특별한 연구물로 여기며 이에 대한 건전한 비판을 소위 전문성이라는 미명으로 거부하고 있는 것일텐데요. 현지 미국 내에서 정치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을 포함해 경제학 분야에서의 공동 연구가 얼마나 이뤄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순수 경제학 자체의 폐쇄성은 이미 악명이 자자하기도 합니다. 제가 굳이 이 자리에서 다자간 학문의 연결성과 수용성 등을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만 의학과 법학과 같은 전문 학문 계열과 비슷한 폐쇄성을 경제학 또한 갖고 있으며, ˝경제학도 마찬가지로 경제학을 오래 연구한 전문가들에게 맡겨야한다˝는 논리 또한 매우 강합니다. 이 글에서도 마찬가지로 그와 같은 시각을 적잖이 읽을 수 있었는데요. 여기에서 상당한 문제는 전문 인력이 아닌 일반 시민을 포함한 일반인들의 해당 학문에의 접근을 가로막는 보호막으로 그 전문성을 몇 십년간 강조해왔으며, 소위 엘리트 지배체제와 다름없는 ˝전문가들에 의한 통치˝를 좀 더 원할하게 하기 위해 다소 민주주의를 희생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사고 체계가 앞선 부분과 매우 유사합니다. 따라서 저자가 2장부터 4장까지의 분량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들이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유권자들의 해당 분야에 대한 이해와 마땅한 견제를 불필요하고 소모적이며, 비생산적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이 경제학자가 얼마나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지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또한, 제가 결정적으로 실망한 부분은 ˝좀 더 많은 민주주의를 단순히 더 많은 복지로 읽어내는 듯 보이는 단순무지이자 터무니 없는 이데올로그˝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일부국가겠지만 민주주의가 과도화되어 있다는 부분도 실제의 상황과는 매우 동떨어진 것일텐데요. 단순히 캐치프레이즈 정도로 자신들의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수많은 국가들이 난립해 있는 상황을 자세하게 인지하지 못하고 그냥 저들이 민주주의를 표방한다고 일반적인 민주주의 체제의 국가들로 이해하는 것은 논지에서도 아쉬운 부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복지에 대한 이념적 잣대를 가진 신자유주의자들이 복지로 인한 과도한 비용을 줄이는 것만이 개인의 자유에 이바지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과도한 논법이 있을텐데요. 이들이 조금이라도 역사 공부를 해봤다면 존 스튜어트 밀이 주창한 자유주의가 당시 영국인들에게 어떠한 의미였고, 그러한 자유로 어떻게 진보된 사회에서의 공익을 실현하려고 했는지 조금이라도 이해했다면 신자유주의자들의 ‘자유에 대한 헌신‘ 이 우리가 아는 그런 식으로 왜곡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뒤이어 글의 4장에서는 미국의 사법제도에 대한 임명직 판사들에 대한 소위 전문성에 대한 논의와 이러한 체제 하의 비민주성을 저자는 대체로 옹호하고 있는데요. 현재의 미국 사법시스템은 일부 OECD국가들을 제외하면 꽤 개선된 행태의 조치가 들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사법제도 산하의 소위 인사위원회를 두어 ‘선출직 판사‘들을 요직에 보내고 있는 것은 민주주의 체제내의 사법제도에 대한 일종의 건전한 정책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반대로 우리나라의 경우에 있어선 사법 판사들을 오로지 선발 시험으로 뽑으면서 임용후에 국회의 과반수 비준이 없으면 거의 정년을 보장하는 등의 직무 보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에 저는 우리의 사법제도가 과연 선거권을 갖고 있는 대다수 시민의 이익에 어느 정도나 기여할 수 있는지에 대해 아직도 부족한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짧게 언급하자면 사법부와 판사들을 실질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어떠한 제도 장치가 전무하다고 판단되고 판사의 해임 역시 국회 인준을 거쳐햐 하는 등의 제한적인 해고가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다수의 엘리트 기득권은 소위 ˝다수에 의한 지배˝에 대한 맹목적인 공포를 입맛대로 적재적소에 이용하면서도 ˝다수의 이익˝과 같은 대단위적인 공리주의와 관련해 그것을 실현할 어떠한 의지조차 보이지 않는 것을 자주 봐왔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일들을 그저 민주주의적인 한계로 몰아부치는 것은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다분히 광장에 모여 있는 시민들을 통제할 수 없는 폭탄과 같은 것으로 치부하는 등의 곡해와 같이 글 5장에서 강조하는 일반 시민들에 대한 무분별한 선거권이 과연 합리적인가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는 것 또한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1장과 2장의 논의를 거쳐, 민주주의 체제 내에 녹아든 경제적 논법으로 윤리적 기준을 일일이 따지는 것을 비용적인 측면에서 비효율적이라고 여기는 모양입니다만 단순히 어느 학력 이상의 시민들에게 선거권을 부여하자는 주장이나 전과자에게 투표권을 주지 말자는 제안 같은 것들은 그것의 합리성을 차치하더라도 사실상 전체주의로 가는 다리를 만드는 것과 유사한 생각이라고 여겨집니다. 저자 역시 1장에서 경제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소위 ‘과두적 체제‘를 사실상 인정하는 것과 같은 문제는 정치 문제에 있어서 반민주주의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단순한 독재가 아니라 전체주의로 가는 길 자체임을 인지하지 못하는 듯 합니다. 이처럼 수많은 경제학자들과 시장주의자들이 끊임없이 요구하는 효율성의 문제, 합리성의 원칙, 자유로운 영리 활동 등을 무분별하게 강조하면서 차라리 시장과 경제에 관련해 국가와 정치는 더 이상 관여해서는 안된다는 논법 또한 어떠한 결과를 낳았는지 저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시장 경제 내의 특별한 금융 시스템의 위치와 관련해서도 독립된 중앙 은행과 각종 증권 시장과 채권 시장에 관여하는 수많은 경제 전문가들에 대한 자유권 보장이 어떠한 견제도 없는 상황에서 무슨 결과를 초래했는지는 우리는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2008년의 세계 금융 위기와 관련해서 어느 경제인들 중에 사법적 책임을 진 이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이익은 우리가 손해는 국가로˝라는 모토가 터무니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대마불사에 기초한 금융 시스템 복구 자체는 국가와 시민의 돈으로만 가능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시장에 더 많은 자유와 탈규제를 외치는 것은 자신들은 지금도 ‘마땅한 민주적 통제‘를 받지 않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미 시장 자체가 헌법과 민주주의 체제 안에서 존재하는 것인데 유달리 통제 안에서 독립하고 싶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얼마전에 서평을 쓴 ‘빅데이터 소사이어티‘의 마르크 뒤갱과 크리스토프 라베가 언급했던 수많은 거대 기업의 수장들이 자신들만의 국가를 만들고 싶어하는 욕망과 일맥상통 된 것이라 여겨집니다. 더불어 이런 논의에서 현재의 첨예한 양극화가 민주주의가 너무나 과도화 되었기 때문이라는 일부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인용하기 보다는 시장의 무분별한 자유가 어떠한 일을 초래했는지 밝혀내는 것이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10년 정도에 걸쳐 투표를 하는 국가를 감히 민주주의 국가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뒤에 싱가포르 사례를 대체로 옹호하며 논의를 펼치는 것은 그 근거가 희박하다고 볼 수 있을텐데요. 이처럼 전반적으로 저자는 민주주의에 대해 특유의 주변부적인 인식만을 강조하고 있으며, 곳곳에서 로버트 달과 같은 정치학자들을 인용하고 있습니다만 그런 인식의 한계를 단순한 인용으로는 덮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단순히 유권자들을 충동적이고 근시안적이라고 치부하기에 앞서 10%를 뺀 민주주의로 만들 전문가들에 의한 효율적 체제가 무엇을 초래할 수 있는지 고려해야만 부분이 있을텐데요. 최소한의 경제학자들의 입맛대로 정치를 배제하는 자신들의 기능주의적 소견은 이미 많은 책들을 통해서 인지하고 있었으나 8장에서 보이는 유럽 연합에 대한 인식 또한 실망스러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유럽의 이민문제와 그에 따른 전사회적인 양극화 문제는 손쉬운 비용 절감을 강조했던 신자유주의에 의한 정책의 일환으로 민주주의 내에서 개인의 자유를 더욱 공익과 더 멀어지게 한 것에 있음에도 이에 대한 부분을 언급조차 하지 않은 점은 그 의도가 실로 명백하다고 여겨집니다.

끝으로, 한 국가의 민주주의와 경제적 수준의 상관관계가 이토록 드러나게 된 것은 그동안 시장 경제의 발전을 위한 사회 전반의 희생과 그에 따른 정치의 퇴장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이것을 그저 좌파들의 케케묵은 인식이라 여긴다면 협소한 현실 인식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지금도 많은 경제학자들이 시장에 대한 정치의 규제가 너무 과도하다고 여기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미 1980년대를 지나 시민에 대한 사회적 비용을 대폭으로 삭감하고 근 몇 십년을 시민들이 자조하는 그 하잘것 없는 벌이에 대해 오로지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는 것으로 강요하는 시대를 우리는 건너 왔습니다. 그와같은 오직 개인의 문제라는 이데올로기의 시대 말입니다. 이러한 오늘날의 외눈박이 인식을 제레미 벤담이 보고 있다면 어떤 말을 꺼낼지 실로 궁금할 지경인데요. 가렛 존스의 이 글을 꼼꼼히 읽고 나서 든 생각은 저자 자신이 뷰캐넌의 학문적 영향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전반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자기 본위적인 것은 대체로 실망스럽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저자가 밝히는 대로 ˝기업의 수장이나 부유층이 오늘날 웹 기반의 기민한 연결성˝에 대해 우려를 갖고 있다는 점은 꽤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여겨졌는데요. 사실 이 부분은 시민들 개개인이 쌓아온 학습의 성과가 천차만별인 상황에서 자신들의 개선된 정치를 위한 최근의 연결성이 근래 위르겐 하버마스의 공론장의 담론과 연계되어 많은 학자들에게서 회자되고 있는 점은 기득권층이 다소 두려워할 만한 상황이라고 생각됩니다. 어차피 광범위한 사회적 양극화는 체제 자체에 대한 불안 요소이기도 합니다만 많은 부유층과 기득권 엘리트들은 이에 대한 어떠한 평가도 자제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현실이 자신들에게 초래하는 양가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일겁니다. 결국 다수의 정치에 대한 저들이 갖는 두려움의 본질은 사회 자체를 최소한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쪽으로 끌고 가기 위한 본심이 기반되어 있고 이러한 의도 자체를 저항받지 않는 쪽으로 유도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본문 65페이지에 1990년대에 대선에 실패한 조지 W. 부시 대통령에 대한 언급이 있었는데요. 엄밀히 따지자면 그의 아버지인 조지 H. W. 부시일겁니다. 여기서 궁금했던 점은 저자도 조지 W. 부시로 썼는지 아니면 정확히 조지 H. W. 부시로 썼는데 역자가 마음대로 조지 W. 부시로 표기했는지 무척 궁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전에 다른 서평으로 한번 언급한 바가 있습니다만, 과거 태국과 같은 경우 민중 시위가 있었을 때, 태국의 의사와 변호사를 비롯한 기득권 엘리트들이 농민층과 하위 계층에 대한 투표권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베트남의 경우는 아직도 사람 많은 곳에서 정치와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면 당국에 연행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그 유명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퇴임사인 ˝대두하는 군산복합체에 대한 경고가 ˝‘민주적 방식‘이라는 이름의 악마˝라는 소제목에 실려 있었는데요. 이 부분에 대한 인용에도 실로 실소를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유권자들이 광범위하고 실질적으로 거버넌스에 관여하고. 시민들이 인지적으로 충분히 평등한 상태에서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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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열정 (양장)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평점 :
절판


프랑스 노르망디 출신의 소설가인 아니 에르노는 루앙 대학에서 학업을 이어가는 도중에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그녀는 실존해 있는 작가임에도 문학상이 만들어진 매우 드문 케이스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단순히 첨예한 냉전 시기의 여성들의 삶을 그리는 데 작품 활동을 했다기 보다는 자신의 자전적 경험을 배경으로 어머니의 죽음, 낙태, 결혼 등과 같은 주변의 이야기로 글을 써온 특별한 신변 이야기의 화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처럼 ‘보편적인 개인‘에 집중한 그녀의 집필 작업이 프랑스 내에서 나름 인정을 받은 것으로 봐야하겠죠. 거대한 담론을 주제로 글을 쓰는 것 또한 중요하지만 작가로서 에르노의 역사도 분명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이 책은 원제, ˝Passion Simple˝로 지난 1991년에 초도 출간이 되었고, 국내에는 2012년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지금으로서 한가지 이해가 안되는 점은 당시 출판사인 문학동네가 야심차게 민음사를 벤치마킹을 했음에도 비용상의 문제 때문인지 세계 문학 시리즈물의 양장본을 일찍 절판시킨 것은 조금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기도 한데요. 이런 연유로 저 역시도 중고서점에서 구입을 해야만 했습니다.

저명한 어느 문학평론가의 말에 따르면, ˝작품의 문학성과 선정성은 가히 종이 한장 차이다˝라고 했습니다. 물론 아니 에르노의 이 짧은 분량의 소설이 선정성에 속하고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동의하기가 어려운 측면이 있는데요. 남자의 성기라는 단어와 애무와 섹스라는 단어 만으로 지금의 시기에 선정을 논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여겨집니다. 이 책이 나왔던 1990년대 초반 서유럽의 상황이 어떠한지는 짐작이 되지 않습니다만 과거 D.H 로렌스가 받았던 무책임한 악명을 아니 에르노에게도 투사하는 것은 실로 맞지 않는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부르주아 인텔리와 동유럽 출신의 유부남과의 관계는 이 시대의 기준으로서도 아름답지 못한 사랑임은 분명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짧은 소설이 주는 여운은 꽤 지대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차피 이 책을 읽은 많은 독자들이 짐작을 하고 계시겠지만 소설의 주인공과 작가 본인의 모습이 많은 부분에서 일치하며, 주인공의 편집증적이고 다소 우울한 나레이션은 작가 본연의 내면과도 관련이 있어 보이기까지 합니다.

이 글 자체를 문학적인 측면이나 독자들에 대한 파급력까지를 두고 해석하기 보다는 개인적으로는 일반 여성들이 연인과의 헤어짐 이후, 보일 수 있는 꽤 설득력있는 감정선의 모습에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동유럽 출신의 유부남과의 관계는 서유럽의 인텔리 여성의 현실적인 위치를 차치하더라도 어느 정도 그 종지부가 예견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작품 전체에 어떤 윤리적인 잣대를 먼저 들이대기 이전에 여성인 주인공이 어떻게 보면 내면의 감정 기복이라고 여겨질 수 있을 만큼의 혼란스러움과 불확실성을 꽤 생활체적인 접근으로 시도하고 있는 점 또한 매력으로 여겨졌는데요. 이 곳 서평에서 꽤 노골적인 표현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헤어진 연인의 ‘성기‘를 매번 상상하는 주인공 여성의 심리 묘사는 외설을 떠나서 제가 남자임에도 심정적으로 동감이 될 정도였습니다. ˝스무살 때는 피임도 하지 않은 채 겁없이 섹스를 즐겼던 것처럼˝과 ˝낙태 수술을 했던 곳에 또 가보는 사람˝이라든지, ˝어느 날 에이즈 검사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사람이 내게 남겨줬을지도 모르잖아˝라고 나레이션을 하는 부분은 작품의 격을 낮춘다기보다는 어쩔 때는 철없는 일반적인 여성의 모습을 심상에 끄집어 내기도 하는 등 흔한 애증의 감정을 배설로 토해내는 여느 작품들과는 꽤 다른 면모이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의 여주인공처럼 한참 해빙의 무드가 시작되고 있던 유럽 전체의 상황에서 동유럽 출신의 남자와 연애 감정을 갖는다는 것이 당시 시대상으로는 꽤 신선한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말‘을 내뱉기 전의 시기이기도 하지만 이미 유럽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행동을 해야하는지 본능으로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마음을 작가인 에르노 역시 고르바초프를 인용하며 당시의 시대 모습을 설명해 내고 있습니다. 전체적인 구도의 측면에서 유부남과의 관계 자체를 굳이 미화할 필요는 없겠습니다만 앞서 다소 장황하게 설명한 바와 같이 끝을 이미 알고 있는 연애를 경험한 여성의 심리적 변화와 그 관계의 주변부에 놓였던 자신의 삶을 애써 다시 찾아가는 과정을 덤덤하게 보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말하고 싶은데요. 특히, 여성들의 꽤 내밀한 감정 기복에 대한 묘사는 대체로 일품이었다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책을 읽을 때 나의 마음을 휘어잡는 문장은 남녀관계를 묘사한 대목이었다

그 사람과 함께일 때를 제외하고 내게 행복한 순간이 있다면 그건 새옷이나 귀고리, 스타킹 등을 사들고 집에 돌아와 거울 앞에서 하나하나 몸에 맞춰보는 때였다

그는 이브 생 로랑 정장과 세루타 넥타이, 그리고 대형 승용차를 유난히 좋아했다

그들은 모두 사회적 성공을 꿈꾸고, 이삼 년마다 한 번씩 정부를 바꿔가며 성욕을 해소하고 사랑을 즐기는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었다

나는 ‘내가 그에게로 가면 돼‘라고 생각했다. 내가 왜 그에게 가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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