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렉시트와 유럽연합 -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세계경제의 블록화를 전망한다
알렉스 캘리니코스 지음, 김준효 옮김 / 책갈피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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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경제학계에 있어서 좌파 경제학의 선두 학자로 불리우는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짐바브웨 태생의 영국 국제사회주의자입니다. 20세기가 나은 유명한 영국 역사학자인 액턴 경의 딸이 그의 모친이자, 세계 제2차대전 당시 나치에 대항해 그리스 레지스탕스에서 활동한 부친을 둔 그는 마르크스와 알튀세르를 비롯한 사회주의에 심취해 현재는 영국 런던대학교 킹스칼리지의 유럽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그의 사상적 측면은 국제주의적인 보다 개선된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일련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비판, 마이클 하트와 안토니오 네그리와 같은 자유주의적 좌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또한, 여기 글에서는 우파 사상가인 토마스 프리드먼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하고 있는데요. 신자유주의에 따른 세계화에 대한 맹목적 믿음을 갖고 앞으로 몇 년의 미래를 예측한 프리드먼을 어처구니가 없다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출판과 관련하여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점은, 지난 2019년 8월, 국내에 번역 출판된 ˝브렉시트, 무엇이고 왜 세계적 쟁점인가?˝의 일종의 보론을 포함한 증보판이라는 점입니다. 기존의 브렉시트와 관련된 여러 연구자의 글을 실고, 마지막 부분에는 현재의 유럽 연합에 대한 성격을 논한 글 또한 실려 있는데요. 전반적으로 브렉시트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한 독자들의 좀 더 면밀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기획된 출판이라 봐도 크게 지나치지 않는다 볼 수 있겠습니다.

이미 2016년에 있었던 브렉시트와 관련된 영국 투표를 다룬 많은 기사와 논문이 국내외적으로 나온 것을 이미 인지하고 있습니다. 다만, 유럽연합 탈퇴라는 영국 시민들의 결정에 티모시 스나이더가 러시아의 개입을 언급한 바와 같이, 외부적 요인에도 기인한 바도 분명 있습니다. 캘리니코스는 기본적으로 브렉시트와 관련해 영국의 유권자들이 정치 및 경제 엘리트들에게 신물이 난 상황에서 ˝영국의 일은 영국인들이 스스로 결정하게 하자˝는 슬로건으로 당시 영국 정부와는 다른 결과가 도출된 것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투표 결과 이후에는 브렉시트와 관련된 많은 이견들 가운데 인종주의적 시각을 가진 극우 정치인들과 이들을 지지하는 지지층들이 유럽연합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를 거부하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알려지기도 했는데요. 이에 캘리니코스는 ˝현대 자본주의에 이주 노동자가 필요하다˝는 것은 명백한데, 영국을 포함한 이주민 계열의 시민권자들에 대한 무분별한 증오와 인종차별에 대해 ˝좌파는 인종차별적이고 최근 힘을 얻고 있는 영국 애국주의와 선을 긋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의 이러한 측면의 이해에는 영국 노동당 정부가 신자유주의에 대한 애매한 태도와 더불어 대기업들과 부자들의 이익에 영합함으로써 이러한 다수의 유권자들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는 정치적 결정에 기본적인 토론이나 대화로서 풀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인종주의적 증오와 행동이 끼어들었다는 점에서 일련의 포퓰리즘적 정치를 비판해내고 있습니다. 물론 저자는 이 포퓰리즘 정치에 대해 일련의 분석과정이나 이들이 원하는 결론에 대한 비현실성으로 말미암아 포퓰리즘에 대한 판단을 약간 보류하고 있기도 한데요. 개인적으로 캘리니코스가 이 우파 포퓰리즘을 좌파 사회학자의 입장에서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영국은 전후, 미국의 인도에 따라 대서양 관계를 확립하고 꽤 적극적으로 당시 미국 경제와 손을 맞잡기도 합니다. 이에 처칠은 영국은 유럽과 행동을 같이 할 수는 있겠으나, 유럽의 일부분이 될 수 없다는 식의 국제정치적 인식론과 더불어 영국이 이집트 정권에 불법적으로 개입하는 1956년전까지 기존의 제국주의를 철회할 여지는 없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자국과 자국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이들 영국인들은 이후 20여년간 이뤄지는 독일의 경제적 부상과 유럽 내의 정치적 패권이 영국과 점차 멀어지는 상황을 목도하게 됩니다. 그와중에 유럽이 통합의 움직임을 지속하는 동안 영국에 대한 소위 최혜국 대우는 ‘특별적 지위‘로서 영국을 취급하기도 했습니다만, 솅겐 조약과 같은 일련의 움직임에 영국이 참여를 하지 않음으로서 사실상 미국-캐나다-영국에 이르는 ˝앵글로 색슨 자유지대˝를 기대한 것이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이미 영국은 미국과 캐나다와 더불어 ˝Five Eyes˝의 일원으로서 미국의 뉴욕 월스트리트와 영국 런던의 시티 오브 런던이 국제 금융의 혜택을 누리는 와중에 이들 영국인들이 유럽 연합의 필요성을 크게 인식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다만, 유럽 자유주의가 표방하는 개인의 기본권과 인권, 자유롭게 살 권리와 같은 근본적인 가치에 대해 부정할 수 없는 입장이므로, 이주민 시민권자들에 대한 정확한 입장 정리는 정부나 시민 차원에서 매우 필요한 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영국 정부는 그저 앞으로 유입될 가능성이 있는 이주민 노동자들에 대한 복지 지출을 사실상 거부함으로서 유럽과 영국의 분리를 이룩하게 되었는데요. 문제는 유럽을 그 자체로 신자유주의 세력의 요람으로만 봐야하는 지에 대한 국제정치학적인 복잡성과 당시 브렉시트와 관련된 오바마 정부의 비판은 캘리니코스가 서술하는 대로 이 세계화가 전반적으로 종식될 가능성이 없다는 것과 그 궤가 일치한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캘리니코스의 글 가운데서 그가 적나라하게 써 나가는 ‘신자유주의적 긴축‘에 대해 목도할 수 있었는데요. 지배 계급의 입장에서 긴축이 진짜로 뜻하는 바는 ˝우리가 구축한 신자유주의는 우리를 진짜 부유하게, 어쩌면 우리가 탐욕스럽게 꿈꿔 온 것보다도 더 부유하게 했어. 신자유주의는 이번 위기를 촉발했지만 그 비용은 우리가 아니라 너희 서민이 치러야지. 일자리, 공공서비스, 교육 따위를 삭감할거야. 평범한 사람들이 대가를 치를 테지.˝라고 언급하고, 이러한 지배 계급은 자신들이 이번에도 무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꼬집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의 세계화는 앞으로의 전망 또한 암울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노동자들의 삶 뿐만 아니라 모든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파편화에 이르게 하고 생존의 문제를 개인의 몫으로만 환원시키는 이들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을 제대로 파훼해 내지 못해, 일련의 유럽 정치 상황이 극우 포퓰리즘으로 더 악화되는 데 일조를 하고 말았습니다. 또한, 글의 결말에서 저자가 언급하고 있듯이, ˝사실 극우에게는 신자쥬주의의 대안이라 할 만한 경제 정책이 없다˝고 단정하는 진술은 일정 부분 이들의 한계를 짐작하게 합니다. 물론 평범한 시민들의 입장에서 다소 어이가 없는 부분이겠지만, 반대로 현재의 시스템적으로는 정치 및 경제엘리트들에게 상당한 이익을 보장하는 것은 분명하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에서 캘리니코스는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실패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요. 이 부분은 충분히 공감이 갈 만하며, 굳이 프레카리아트나 시민들의 삶의 존엄과 관련된 문제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많은 이들이 이에 동의할 것입니다.


-현재 ECB 총재인 프랑스 정치인 출신의 크리스틴 라가르드에 관한 캘리니코스의 비판은 현재의 유럽 연합이 어떻게 지위를 이용해 자리 나눠먹기를 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제국주의란 근본적으로 선진 자본주의 국가 간의 경제적 경쟁과 지정학적 경쟁이 서로 얽히는 것으로, 현재는 사실상 제국주의가 완전히 종식된 시기가 아니라는 것을 캘리니코스는 본문에서 밝혀두고 있습니다.

지배계급의 입장에서 긴축이 진짜로 뜻하는 바로 이렇다. ‘우리가 구축한 신자유주의는 우리를 진짜 부유하게, 어쩌면 우리가 탐욕스럽게 꿈꿔 온 것보다도 더 부유하게 했어. 신자유주의는 이번 위기를 촉발했지만 그 비용은 우리가 아니라 너희 서민이 치러야지. 일자리, 공공서비스, 교육 따위를 삭감할 거야. 평범한 사람들이 대가를 치를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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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들의 폭력 - 거대한 사회적 분열의 연대기
미셸 팽송.모니크 팽송-샤를로 지음, 이상해 옮김 / 미메시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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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저자들의 공저라고 할 수 있는 이 일종의 르포 사회학은 프랑스에서 저명한 사회학자 부부로 잘 알려진 미셸 팽송, 모니크 팽송-샤를로의 유명한 논저입니다. 저에게는 이들이 정치철학자인 샹탈 무페와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부부로도 오버랩 되기도 하는데요. 물론 두 부부의 각자의 분야는 명백히 다르지만 한가지 공통점은 이들이 사회의 어두운 면과 불합리한 면 그리고 신자유주의에 대한 맹공을 자신들의 양심에 따라 철회하지 않는 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가끔 쥘리앙 방다의 문장을 떠올리다 보면 모든 사회에 대한 지식인의 책무, 지식인의 역할, 지식인의 존재 이유에 대해 곱씹어 보기도 합니다. 이미 자본에 굴복하여 개인적 영달만을 추구하는 지식인들이 많은 이 시점에 이들과 같은 존재의 의의는 그 가치를 결코 전부 가늠할 수 없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셸, 모니크 부부는 프랑스 사회학에서 기피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과 부자들의 터무니 없는 범법 행위 내지는 사익 추구에 있어서의 맹렬한 시도 그리고 시스템 전체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만드는 각종 로비 활동과 입법 활동에 대한 지원, 마지막으로 이들이 종국적으로 추구하는 과두지배체제를 자신들의 학문적 소신으로 삼고, 이를 포함한 모든 것을 이 책이 담고 있다고 봐도 거의 무방해보인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글의 원제는 ˝La Vionlence des riches : Chronique d‘une immense casse sociale˝로서, 지난 2013년 출간되었으며, 국내에는 2015년 11월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앞선 문단에서 간략히 소개해 드린 바와 같이, 미셸 부부의 이 책은 일종의 ‘르포 사회학‘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이와 유사한 책을 떠올려 본다면 아마도 최근에 번역된 아난드 기리다라다스의 ˝엘리트 독식 사회‘와 그 형식이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다만, 이 책은 총 6장에 걸쳐, 프랑스 사회와 정치 그리고 경제적 파행 등을 거의 가감없이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구별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부자들의 사익 추구가 다수의 이익보다 더 우선시 된다는 점˝을 비판하며, 이에 따라 신자유주의가 주입하고 있는 인간의 이익 추구가 최고의 가치이자, 사실상 이를 수행하는 가운데 어떠한 정치적 제한과 법적 의무를 이들에게는 더이상 필요치 않다는 것을 매우 일목요연하게 논술하고 있습니다. 책의 논증 가운데 유독 눈에 들어오는 구절이 있었는데요. ˝이익은 사유화 되고 손실은 사회화 된다˝라는 것과 공공연한 탈세와 검은 자금의 구축 등 자신의 이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부자들이 겉으로는 매스컴과 공공장소에서 ˝윤리적인 자본주의˝를 부르짖는 것과 같은 이중성에 대해 실로 충격을 받았는데요. 이것은 수많은 보수 우파들이 속으로는 민주주의에 대해 불신과 불만을 갖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자신들이 더할 나위 없는 민주주의자라고 외치는 것과 아주 유사한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유주의자들과 보수 우파 정치인들이 그렇게 궁합이 잘 맞는 이유가 아닌가 곰곰히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먼저, 이 책을 읽기 전에 ˝원칙적으로는 산업 자본주의가 이미 종말을 고했다는 점˝을 독자들은 먼저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의 급격한 사조에 따라 세계화가 이뤄지고 이 손쉬운 자본의 이동 상황에서 부자들의 이익을 더 폭발적으로 증대시킨 금융자본주의화의 현실이 이 글을 해석하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연유로 1장에서는 ˝왜 세계는 불평등한가˝라는 척 콜린스와 동일한 목소리가 이어집니다. 노동자들에 대한 더 손쉽고 양심에 가책을 받지 않는 무분별한 해고는 수많은 삶들을 파편화에 이르게 하고서는 현재의 이 시스템이 아주 우월하다는 식의 태도를 여러 부유층의 행태를 통해 목도할 수 있습니다. 일전에 저의 어떤 지인은 하나같이 못사는 사람들은 그 핑계가 다 똑같냐고 일갈을 한 바가 있습니다. 오로지 사회에 대한 불만, 국가에 대한 불만, 부자에 대한 불만을 갖고 있다면서요. 저는 사실 이런 사람들의 언행에 대해 가타부타 말하기에 앞서, 신자유주의가 정치와 공공성을 희생시키고 오로지 모든 책임을 개인들에게 전가시킴으로써 발생한 전형적인 논리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이들이 무지의 변으로 이러한 말들을 입에 담는 것이 아니라 매우 견고하고 강력한 왜곡된 반사회학적인 주입으로 인해 벌어진 불행한 인식으로 저는 그리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이처럼 프랑스의 상황도 매우 유사한 것을 이 글을 통해 깨닫게 되었는데요. 이러한 맥락은 크게 벗어날 수 없는게, 이 부분 또한 세계화의 영향이며 지오바니 오리기가 밝혔던 것과 같이 ˝자본주의의 왜곡된 파행 상황에 대해 신자유주의가 그 혐의를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인식과 그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2장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조세피난처에 열심히 자신의 돈을 탈출시키고 있는 부유층의 행태를 여실히 서술하고 있습니다. 특히 LVMH 그룹의 수장 베르나르 아르노의 사례는 의미 심장한데요. 세금이 적은 인근 벨기에로의 국적 세탁을 시도하고, 대서양을 비롯한 세계에 산재한 조세피난처에 유령 회사나 유령 법인을 만들어 부자들의 자금을 세탁해주는 이러한 일들이 얼마나 이들이 비윤리적인가를 이해할 수 있게합니다. 제가 이 책을 통해,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이 초부유층들은 매스컴과 공공 발언을 통해 ˝자본주의는 보다 윤리적이어야 한다˝고 외쳐대는 그 일면에는 바로 이런 초법적인 사익 추구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많은 경제학자들은 법을 위반하고 사법적 토대를 벗어나는 경제인들의 이익 추구에 거의 100%가 반대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현실과 이론의 괴리라면 이것은 스피노자가 말한 인간의 인식적 본질과 외형적 태도가 완벽하게 불일치하는 장면이라 할 수 있을겁니다. 이러한 이중적 태도를 이른바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이들의 인식의 변을 비난할 게 아니라 매번 말씀드리지만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이행의 매우 불행하고 불쾌한 비윤리적 주입이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뒤이어, 3장과 4장은 이러한 부유층의 시스템적 영위와 견고한 이행이 어떻게 ‘사회와 국가의 과두 지배에 이르고 있는가˝에 대한 매우 상세한 대답이라고 할만 합니다. 스스로 좌파적인 정치인이라고 여겼던 프랑스 공화국의 제 24대 대통령인 프랑수와 올랑드는 어떻게 ‘부자들의 대통령‘이 되었는지에 대해 명확히 알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 고위층들의 촘촘한 인맥 관계와 심지어 사법제도 안에서도 부자들의 특혜를 주는 행태 또한 세금 포탈과 관련된 프랑스 검찰의 기소가 전체의 3%도 되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특히, 저자들은 단순한 생계형 범죄로 법정에 서는 프랑스의 가난한 사람들은 낙인 효과 더불어 다시 사회로 복귀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반면에 이 부유층들의 경제 범죄는 프랑스 법원이 그 소명할 기회를 사실상 부여하고 있으며 수많은 권고 사항과 협의 강조 등은 단순히 거대한 경제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여러 인맥과 시스템적 조롱을 통해 프랑스의 현실에서 지금도 목도할 수 있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럼에도 2012년 프랑스의 법관 82명이 부패를 없애는 행동에 나서자고 공개 선언을 한 것은 꽤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과연 한국의 법원 판사들이 이런 행동에 나설 수 있었을까요.

이러한 과두제 지배체제의 인상에서 바로 5장은 이 글의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담고 있는 장이라 할 만합니다. 특히, 독자들은 이 5장을 유심히 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부자들은 스스로 사회 다수의 시민들과 사실상 단절이 된 상태로 이미 지배 메커니즘에 의해 수많은 엘리트들에 의한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고 저자들은 꼬집고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민주주의 실패라고 보고 있지는 않은데요. 왜냐하면, 이미 언론과 지식인들에 의해 이러한 시스템적 규모가 다수에게 이득이 될 수 있다는 터무니 없는 설득에 많은 시민이 넘어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는 사회 구조적인 측면에서 경제적 메커니즘이 애초에 정치를 배제하는 등의 신자유주의적 사조에 지배를 당하고 있으며, 이 점은 앞선 언론과 변절한 지식인들이 이러한 구조적 규모를 강화시키는 데 힘써 왔다는 점에서 이를 민주주의 자체의 실패라고 규정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런 부분에서 헨리 키신저와 같은 ‘민주주의의 과잉‘에 동의할 수 없는 것이며, 단순히 시민의 재교육이나 스스로의 이성적인 깨우침 등으로 해결할 수 있다 없다의 문제를 벗어난 게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이는 다분히 금융자본주의적 경제적 메커니즘에 의한 일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것이 전반적인 각 사회의 지배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에서 단순히 보다 실효적인 민주주의를 위해 시민들만이 노력하기 보다는 양심적이고 대의적인 정치인들의 필연적인 호응이 필요하지만 이것이 과연 가능하게 될지는 저로서도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을 밝혀두고 싶습니다. 다만, 여기 미셸 부부의 이 논저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진면목을 다수의 시민들에게 알리고 있다는 점에서 명백히 의미있는 작업이며,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이나 반대로 신자유주의를 호응하는 사람들이나 본질적인 측면에서 이 지배 메커니즘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객관적으로 이해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리처드 번스타인이 인간 이성의 본질적 임무를 우회적으로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개인적으로 추측해보기도 했습니다.


-객관적으로 번역은 뛰어나다고 할 수 없는 수준이라 여겨졌습니다. 아무래도 문법적으로 복잡한 불어의 번역이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해 봅니다.

시장의 법은 새로운 법, 인간의 의지보다 우월하다는 자유롭고 완벽한 경쟁의 힘에 의해 초월적 지위를 얻은 최대 이윤의 추구라는 법의 완곡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지배계급이 과두 지배를 하게 되면 사회적 관계에 있어서 점점 더 큰 폭력을 행사하고, 영악하고 탐욕스런 개인들이 법을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바꿔 개인적인 이득을 취한다

구속도, 국경도, 법도 알아서는 안되는 경제적 자유주의는 더 이상 죄책감 따위에 얽매이지 않는, 오히려 도덕적 가치와 돈에 대한 콤플렉스를 벗어던지고 파렴치를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정신적 자유주의와 좋은 짝을 이룬다

경제적 부유층들은 부와 권력을 계속 누리기 위해 그들은 개인적인 이득은 가능한 한 많이 챙기고 세금을 가능한 한 적게 내면서 윤리적인 자본주의를 권장한다

힘있는 자들이 일탈을 저지르고도 벌을 받지 않는 건 주로 그것을 허락하는 사회, 경제 시스템 탓이다

법이 사람들의 삶에 끼치는 영향을 고려할 때, 그 분야에 대한 대다수 시민의 무능력은 서민 계층이 배제되고 주변화되는 한 요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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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돌아보며 - 2000년에 1887년을 Rediscovery 아고라 재발견총서 3
에드워드 벨러미 지음, 김혜진 옮김 / 아고라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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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저자 에드워드 벨러미는 미국 메사추세츠 주의 피코피 출신의 변호사이자 작가였는데요. 여기서 벨러미 가문은 미국에서도 꽤 유명한 가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의회지도자이자 정치인으로 명성을 얻었던 ‘조셉 벨러미‘가 그의 선대이기도 합니다. 다시 저자의 약력으로 돌아가서, 그는 뉴욕의 유니언 칼리지에서의 학업 도중에 독일로 가게 되는데, 그때의 유럽에서의 경험이 작가로서의 에드워드 벨러미에게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변호사 시험을 치뤄 개업을 하게 되지만, 현실의 벽에 좌절하면서 그는 변호사 개업을 종료하고 언론계에 투신하게 되는데요. 그 과정에서 1888년, 그의 이름을 알린 이 책이 초도 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선, 저는 2018년 가을쯤에 조안 C. 트론토의 ˝돌봄 민주주의˝에서 인용된 것을 기억하고 주문을 해서 이 책을 받았으나, 그동안 틈이 나지 않아 읽지 못했는데요. 마침 짧은 휴가를 이용해 묵은 책들을 소화해보자는 마음으로 이제야 일독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글의 원제는 ˝Looking Backward, 2000~1887˝로서, 지난 1888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초도번역인지는 모르겠으나 2014년 8월에 번역되었습니다. 참고로 번역된 책은 해당 출판사의 ‘아고라 재발견총서‘로 묶여 있기도 합니다.

벨러미의 이 글은 모두가 아시다시피, 소설의 존재 의의 만큼이나 한계와 관념적인 문제가 동시에 있기도 합니다. 물론 모든 소설에는 보기에 따라 의미상이라든지 구조적인 측면에서 일장일단이 있기 마련이라 되도록이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히 인식해보는 것이 더 중요하리라 생각됩니다. 어떻게 보면 글의 원제와 동일하게 1887년에서 2000년으로 도약하는 단순한 ˝타임슬립˝의 구성으로 시작된 소설이라고 여길 수 있으나, 뒤에 예상치 못한 반전이 기다리고 있기도 합니다. 사실상 여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이디스와 관련된 흥미로운 구성 요소도 있고 글의 구조에 있어서도 내용 만큼이나 꽤 신선한 작품이기도 했습니다.

이미 많은 서평을 통해서도 벨러미의 이 작품이 단순한 사회주의적 소설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는 분들이 많을텐데요. 이 또한 책을 제대로 읽지 않은 기자들이나 서평가들의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작가가 이 책을 쓴 1888년에는 다가올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을 실질적으로 경험해보지 못했기에, 단순히 공산주의적 요소가 가미된 균질한 평등 사회라는 식의 독해는 큰 무리가 있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과거 플라톤이 ˝도덕적으로도 철학적으로도 이상에 가까운 지도자가 출현할 수 있는 정치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것인가˝에 대한 적절한 대답을 이 책이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벨러미의 이 소설 자체가 꽤 긍정적인 남녀평등의 사회를 그리고 있고 여기에 등장하는 ‘국가‘라는 체계 내지는 정치적 위치가 단순히 기계적인 평등 국가를 내포하는 것을 넘어서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여기에서의 국가는 개인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에 대한 매우 조화롭고 자애로운 조정자의 역할을 매우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으며, 애초에 이렇게 전진한 사회가 폭력적인 혁명이라든지 어떤 물리적인 갈등에 의해 발생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회 구성원들의 자연스런 인식과정에서 이러한 국가 제도의 수립이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앞선 ‘자연스런 인식과정‘이란 과거 자본주의적 소비주의와 그것으로 비롯되는 자아 실현의 문법이 정신적으로 고양된 자아의 의미와 그것의 실현 과정이라는 맥락에서 그런 사회로 나아가는 길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아마 많은 분들은 이 지점에서 지극히 이상주의 세계관 밖에 안되는 정도의 평가를 내리실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예전에 어떤 글에서 현재의 꽤 치열하고 일방향적인 소비주의 사회의 맹신이 나중에 어떤식으로 귀결될 것인가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을 엿본바가 있는데요. 특히, 지젝이나 바우만 더 나아가서는 샹탈 무페와 같이 이 심각한 소비주의의 광풍이 우리 인간의 정체성과 존엄성을 어떤 식으로 변형시킬 것인가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피력한 바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벨러미 역시 이 글에서 이러한 소비주의적인 수단의 시대가 과연 인간이 마땅히 누려야할 권리와 사실상 반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는데요. 이러한 사회 메커니즘은 이미 우리가 현실로서 목도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한 연유로 이 정도 지점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꽤 변화된 인식과 더불어 개선해 나갈 수 있는 의지가 필요하지만, 벨러미는 이 부분과 관련해 글의 거의 결말부분에서 ˝부자들 조차도 이런 측면에서 힘을 쓸 수 없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바보가 아닌 이상 주된 현상의 기득권화 되고 있는 일련의 자본주의적 과정들이 종래에 어떤식으로 사회를 파편화에 이르게 할지는 부유층들 역시 이미 예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현 시점에서 이러한 강고화가 자신들에게 큰 이득이 되고 있으니 애써 눈을 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나중에는 이들 부유층 조차도 손을 쓸 수 없을 정도의 세상이 도래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제가 무당은 아니지만 지극히 우려스러울 만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저자는 흥미롭게도 1888년 당시에는 고안하기 힘든 ‘신용카드‘ 개념을 글에 창조해 내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의 신용카드와는 약간 다른 개념이긴 합니다만, 이 부분에서 아마도 당시에 작가는 이미 많은 독서를 해온 것으로 예상되는데요. 그 외에도 사회 구성으로서의 노동조합들의 평화롭고 자연친화적인 결말을 기대했던 것으로 보아 전반적인 작가의 인식론이 꽤 범상치 않은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다만, 주인공인 줄리언 웨스트를 일종의 인식적 대적자로 만들어 놓고 그가 어떤식으로 사고 체계 내에서 변화될 수 있겠는가에 대해 독자들이 이를 기대하게 만들고 일개 개인의 변화가 실제 사회에서 어떻게 이어지게 될지를 상상해보게 하는 점도 이 글의 묘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이 정도 수준에서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끝으로, 저 역시 아주 맹목적이고 균질한 평등주의에 대해서는 일정 부분 반대하는 편입니다. 어떤 경쟁을 통해 자신의 발전을 엿볼 수 있는 수단 또한 자본주의가 갖고 있다고 생각하며, 삶의 양식 또한 각각의 사람들의 선택에 두는 것도 물론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현재의 상황은 사회적 불평등과 그것에 기반한 경제적 불평등이 사회 구조 전반에 악영향을 끼치고 더욱더 계급구조화로 나아가게 한다는 점에서 시급한 개선이 필요한 것은 분명합니다. 이는 모두가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에서 살고 싶어한다는 매우 기본적이고 인간적인 문제이므로, 이를 무조건 이상주의적이고 관념주의적인 비현실적인 요소로 치부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회학적 작업들에 지식인들이 대거 이익에 순응했던 나머지 다수의 시민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힘의 불균형적 모순이 더욱 심화되었던 것이죠. 벨러미는 이에 ˝모든 인간은 바로 인간이기에 마땅한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사회주의적인 주장으로 몰고가는 사람들이 아직도 너무나 많기 때문에, 지금도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111페이지의 한 문장에서 조사가 탈락한 곳이 있었습니다.

무슨 권리로 한 개인이 자기 몫을 주장합니까? 재화를 분배하는 근거는요?
"인간성이죠, 자기 몫을 주장할 권리는 그 사람이 인간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20세기의 마지막 해인 지금도 모든 사람이 다 고결한 성품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니, 완벽하지 않은 그런 사람들에게는 노력을 유도할 수 있는 보상을 주어야 합니다

지금 국가는 선생 시대에 민간 자본가와 기업들이 그랬던 것처럼 수천의 노동자를 불구로 만들거나 죽이지는 않아요

아무리 그래도, 널리 퍼진 산업과 사회 문제나 사회 불평등에 대해 모든 계급이 기본적으로 품은 불만, 그리고 모든 인류의 고통이 대변화의 전조라는 사실은 깨달으셨을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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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빅 브라더 - 지그문트 바우만, 감시사회를 말하다 질문의 책 1
지그문트 바우만 & 데이비드 라이언 지음, 한길석 옮김 / 오월의봄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더이상 다른 수식어가 필요없는 위대한 사회학자인 지그문트 바우만과 스코틀랜드 출신의 사회학자이자 감시학의 대가이며, 근대성과 관련된 연구에 평생을 바친 학자이기도 한 캐나다 온타리오 킹스턴의 퀸즈 대학의 교수인 데이비드 라이언의 대담집인 이 책은 지난 2011년 9월과 11월 사이에 오고간 이메일을 통해 탄생한 논저이기도 합니다. 두 사람은 직접 대면하지 않고서도 쉬이 대서양을 오가는 전자 이메일을 통해 서로간의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네트워크적 시대의 도래를 증명해내는 것으로도 증명하고 있는데요. 이러한 관점의 시각은 이 글이 관통하고 있는 주제와도 일정부분 연관되어 있어 여러모로 모두에게 꽤 시의적절한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어쩌면 촘스키와 바사미언의 대담집과 유사한 측면의 논저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만, 어찌됐든 바우만과 라이언의 현재의 ‘감시 체제 및 통제 사회‘에 대한 꽤 논리적인 근거들은 제게 있어서도 시사하는 바가 가볍지 않다고 느껴졌습니다. 또한, 데이비드 라이언의 훌륭한 논저인 ˝감시사회로의 유혹˝도 국내에서 구할 수도 있으니 따로 참고하는 것도 이 책을 이해하는 도움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따라서, 이 글은 지난 2012년, ˝Liquid Surveillance˝라는 원제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4년 2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다만 아쉽게도 현재 이 번역본은 절판된 상황인데요. 얼마전에 서평을 쓴 지그문트 바우만의 ‘부수적 피해‘의 판권 문제를 고려해 봤을 때, 동일 출판사가 다시 재간행을 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먼저, 책의 6장에서 데이비드 라이언이 인정하고 있듯이, 2001년 이후의 변화된 세계에 따른 전세계적인 초고밀도의 감시 체계와 통제 사회로의 이행은 사실상 ˝사회학에서도 보기 힘든 사례˝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책의 원제인 ˝유동하는 감시˝가 밝히는 주제와 마찬가지로 꽤 오랫동안 이 감시라는 주제에 관심을 가져온 지그문트 바우만은 자신이 고안한 사회학적 개념인 ˝유동성과 액체 근대, 소비주의 및 쓰레기가 되는 삶과 쓰레기가 된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글을 추동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데이비드 라이언은 지그문트 바우만의 의견을 이끌어내면서 자신과 바우만의 동일한 이해를 바탕으로 일종의 열린 결말을 이끌어내고 있는데요. 단순히 전방위적인 세계 감시 체계와 그에 따른 안보 보장을 위한 이런 시스템의 구축이 그저 조지 오웰과 올더스 헉슬리가 예견한 디스토피아적인 산물이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두 사람 다 단순한 문제로 보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에 1장에서, 오늘날 페이스 북으로 시작된 수많은 개인들의 연결된 인간관계와 온라인 삶의 확대는 단순히 좋다 나쁘다를 판단하기 이전에 ˝극명한 양가적인 문제˝가 존재하고 있다는 점은 꽤 설득적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우만은 현재의 시민들이 ˝확실하게 분리된 온-오프라인에서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이것이 현재의 사회와 사회학에 증명하고 있는 것은 긍정과 부정을 모두 포함한 것이라고 그는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각각의 개개인들의 실존적 딜레마를 포함하고 있고 과연 이러한 보여주기식의 삶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스스로 규명해내고 과거와의 단절을 용인하면서까지 거대 네트워크 기업들의 살만 찌워주고 있는 현 시대의 단상을 꽤 비판적인 인식을 통해 두 사람 모두 이를 파헤치는데 할애합니다.

뒤이어, 2장은 불확실성을 더욱 부추기는 현대의 유동성을 근간으로 벌어지고 있는 시대적 단상에서 더욱 강화되고 있는 제레미 벤담의 파놉티콘의 ˝차별적인 강화 버젼˝에 대해 논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단순히 단조로운 구속 상태에 대한 시스템의 안정을 추구했던 벤담식의 파놉티콘으로는 현재의 모습을 전부 해석해 낼 수는 없으며, 그러한 감시 체제 가운데에서 철저히 배제되고 있는 외부자들, 잉여자들, 쓰레기 인간들의 발생에 대해 바우만은 일관된 논조로 이 현상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바우만의 이 확장된 인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논저 ˝쓰레기가 되는 삶들˝의 일독이 필요해 보입니다. 이에 데이비드 라이언도 일정 부분 동의하고 있듯이, 민주주의가 쉽게 전체주의로 나아갈 수 있다는 점과 마찬가지로 자유주의 사회에서 예외로 존재하는 권력에 대한 경계와 더불어 극한의 자유가 필시 극한의 이기주의를 낳는다는 토크빌 식 개념의 차용은 현재의 ˝감시 통제 사회의 구축˝이 무얼 뜻하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이것은 바로 3장에서 바우만이 지나간 역사속에서 찾고 있는 ˝나치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신념에 가득한 채 벌인 일들˝에 대해 논하는 것으로 독자들에게 진실의 그림을 그려보게끔 하고 있는데요. 국가와 사회에 해가 된다는 이유만으로, 마땅히 축출할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이 있다는 이유 만으로, 자신들의 절대적 순수함을 위해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절멸에 이르게 한 전체주의와 자신의 사상에 반한다는 이유로, 혹은 반동주의 사상에 물들어 있다는 이유 만으로 극한의 수용소로 수많은 인명을 말살에 이르게 한 공산주의의 결말이 현재 빠른 속도로 구축화 되고 있는 또는 권력에서 빛보다 빠른 속도로 정치를 분리시키고 있는 암울한 미래에 대한 ‘증명 사진‘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물론 이 지점에서 터무니없는 인식 과정이라고 반대할 분들이 계시겠지만, 쿠바 관타나모에 있었던 사건이나, 대표적인 인명 경시의 부수적 피해로 확인된 2011년 2월의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무고한 22명의 결혼 하객에 대한 드론의 공격은 어느 정도 이를 증명한다고 생각됩니다. 또한, 미국의 연방수사국 (FBI)이 600만명의 안면 인식 데이터를 넘어서 전국민의 안면 인식 데이터를 구축하고자 하는 이 불필요하고 위험한 욕망을 과연 정치가 제어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얼마간 불명확하다고 할 수 있을겁니다. 마찬가지로 3장 또한, 바우만의 ˝부수적 피해˝의 일독이 필요한 장이기도 합니다.

다음, 4장과 5장에서는 ˝완전 강박적인 반자유주의적인 민주주의가 컴퓨터 기술에 기초한 감시를 증가시키고˝ 있는데, 바우만과 라이언이 동의하고 있듯이, 이런 체제 이면과 더불어 날로 발전되는 과학 기술의 비윤리성 및 도덕성의 배제는 우리 미래의 전반을 암울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합니다. 제임스 데어 데리언에 따르면, 이런 군-산-미디어-연예 복합체 military-industry-media-entertainment 는 더욱 가속화 되고 있고, 분명 이러한 감시 체제의 확장과 발전은 이들 주요 이익 수여자들에게 새로운 산업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애초에 안전과 안보라는 미명하에 구축되고 있는 이 시스템이 과연 ˝도저히 채워지지 않는 안전이라는 욕망˝을 완벽하게 채워줄 수 있겠는가에 대해서는 극히 회의적입니다. 바우만의 언급대로라면, 아무리 현관에 많은 자물쇠를 채운다 하더라도 그러한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의 안전에 대한 욕망을 완벽히 채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더불어 더 큰 문제는 이 패러다임의 강고함이 이를 수용하지 않고 반대하는 사람들의 처우를 사실상 관심을 끊거나, 바깥으로 밀어내는 식으로 ‘사회의 균질함‘을 추구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사뭇 큰 문제로 도출될 수 있을텐데요. 그래서 무엇보다 ˝권력에 정치가 더욱 더 가까워지고 밀접해져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이 확실한 불안요소 일테죠. 결국 이 모든 메커니즘은 불활실성을 가중시킨 ‘유동적인 근대˝에 기인한 것이며, 그런 연유로 ˝우리의 현대는 이에 마땅한 대답을 제시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데이비드 라이언의 주장은 그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끝으로, 7장의 결말은 자크 데리다가 단초를 제공한 ˝최후 희망의 보루˝가 과연 우리에게 주어지게 될지에 대해서 법을 지키는 개인들로서 마땅한 침해할 수 없는 권리를 갖고 살아가는 수많은 시민들의 종착점이 반민주주의적인 무언가로 나아가게 될지도 모르는 이 불확실성을 안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매우 당연하게도 이를 거부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될겁니다. 그런 의미로 저는 이 글에서 앞선 논의에 대한 약간의 단초를 얻기도 했는데요. 그것은 ˝자유주의 사회에서 예외된 권력˝을 휘두르는 조르조 아감벤의 경고 아닌 경고인 ˝이 축소된 예외 상태˝와 같은 시민들에게 어물쩡 수용되기만을 바라는 인정되지 않는 권력에 대한 제거와 이를 통한 모두의 공감대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단순히 제러미 벤담식의 ˝다수에 의한 소수의 감시˝가 아니라 ˝소수에 의한 정밀한 다수에 대한 감시˝의 모두가 원하지 않는 결말을 우리가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는 것 만으로도 이를 미연에 막을 수 있는 최소한의 시작점이 될겁니다. 따라서, 그런 의미에서도 오늘날의 네트워크 시대의 도래는 다른 한편으로는 시민들의 연대와 각성을 불러 일으키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는 측면에서 양가성을 드러내고 있는 부분은 마냥 디스토피아적인 문답을 강요하기도 어려운 실정임은 다소 분명해 보입니다.


-본문 46페이지의 피루스 왕의 승리는 피로스 왕으로, 52 페이지의 뒤르켕은 뒤르켐으로 수정해야 된다고 생각됩니다.

-1장에서 지그문트 바우만은 한국의 디지털 사회 사례를 소개하며, 한국의 사회 생활이 이미 전자적으로 매개된 지 오래이며, 이러한 가운데 피와 살을 가진 존재들과의 사회 생활은 부차적일 뿐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지점은 단순히 온-오프라인의 철저히 분리된 삶을 뛰어넘어 오늘날 한국 사회의 일면을 명확히 분석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물론 약간 현 상황에 대한 부정적인 뉘앙스는 존재하지만, 그것도 2012년에 한국에 대한 실정을 바우만이 이렇게 정확히 짚어낸 점은 대단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이러한 한국 사회의 ‘디지털 매개적 삶‘은 분명 장단점이 확연한 것으로 일정 부분 정치에서의 긍정적인 기여도 있다고 언급하고 싶습니다.

-바우만의 현실 인식이 들어간 직설적인 화법이기도 합니다만, 역시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시대 착오적인 논법을 마지막 장에서 비판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공포를 동반하는 삶을 살아볼 만한 것으로 만들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다

파놉티콘이라는 주제를 다룰 때 장치라는 푸코적 개념의 중요성은 여전히 인정받을 수 있지만 오늘날 세계적 맥락에서 나타나고 있는 정치경제학 기술을 다루기 위해서는 이 개념을 넘어서야만 한다

만일 사회 분석이 소외되고 떨쳐진 사람들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믿는다면, 이러한 현상을 강화시키는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시민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로서 역할을 하면서 끊임없이 점검과 감시, 시험을 받고, 평가되며, 값이 매겨지고, 판정을 받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이 사회는 예전에는 공개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분리시키던 경계를 지우고, 사적인 것을 공개적으로 노출시키는 것을 공적 미덕이자 책무로 만들어버리는 것으로 악명을 떨치고 있다

나치와 공산주의자들은 어수선하고 불분명하고 무작위적이며 통제를 거부하는 모든 요소 혹은 인간 조건의 측면을 대규모로 그리고 일거에 제거하려고 착수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불/안전에 관련된 기술들은 단지 정보와 소통 기술공학의 소산으로만 이해할 수도 없고, 혹은 우리가 용인하고 있는 예외 상태에 갇혀 버려서 생긴 결과물만으로 이해할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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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시민주의 전통 - 고귀하지만 결함 있는 이상
마사 C. 누스바움 지음, 강동혁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20년 6월
평점 :
품절


근래 인도 출신의 저명한 경제학자이자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르티아 센과 함께 보편적 평등주의에 입각한 전세계의 빈곤 문제와 사회경제적 불평등에 집중해 온 마사 누스바움은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법철학자입니다. 그녀는 미국 뉴욕대에서 학사 학위를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 받은 뒤, 하버드 대학과 브라운 대학을 거쳐 미국 사회과학의 명문 시카고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중에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누스바움은 ‘보편적 인류애‘에 입각한 인간 존엄과 인권에 관심을 갖고 있는 학자라고 볼 수 있을텐데요. 이 책에서도 인용되고 있지만, 키케로가 철학자들이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큰 잘못이라고 말한 부분을 우리가 인지한다면 최근의 누스바움은 이러한 ‘할말을 하는‘ 지식인의 책무에 관한 표본이 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그녀의 이 글은 원제, ˝The Cosmopolitan Tradition : A Nobel but Flawed Ideal˝로 2019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거의 최근인 2020년 6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간단한 소개글을 마무리하기에 앞서, 역자의 번역이 매우 훌륭하다는 점을 밝혀두고 싶습니다. 이렇게 번역하기 쉽지 않은 논저를 매끄럽게 번역한 역자의 노고에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저자인 누스바움에 의해 이뤄진 강연에 기반해서 쓰여진 이 논저는 크게 현재의 ˝물질주의적 자유주의 세계정치˝에서 과거 키케로부터 시작된 세계시민주의에 대한 단초를 기반으로 주류 철학의 기반이 되어있는 스토아주의를 일정부분 비판하고 이를 통해 보편적인 인류애적인 세계 시민 사상의 좀 더 가능성 있는 틀을 마련해보고자 하는 꽤 대단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많은 철학자들이 강조하고 있듯이 이성을 품고 있는 인간이 현실의 작동 원리와 칸트가 규명하고 강조했던 인간 본연의 자유, 인권과 같은 보편적 권리가 오늘날에 와서는 왜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은지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지점에는 우리의 자본주의가 꽤 원치 않는 결과를 양산해 낸 것은 분명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시민의 권리로서 또한 정당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이를 제대로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또한 이런 알권리들에 대해 반대의 입장을 가진 어용 지식인들의 입질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는지 그 원인을 다소나마 찾는데 누스바움의 이 글은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시민주의에 대한 주요한 선구자들로 등장하는 키케로와 그로티우스, 애덤 스미스를 연결시켜보는 것은 그녀의 탁월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다만, 국내에는 그로티우스의 논저들이 번역되어 있지 않은 점이 큰 아쉬움으로 다가오기도 하는데요. 그나마 핵심 의제들을 누스바움이 잘 정리해 놓고 있어서 간접적으로 그로티우스의 지적 궤적들을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점도 마찬가지로 이 책의 훌륭한 점이라고 하겠습니다.

먼저, 키케로는 당시 스토아주의에 맞서 약간 소크라테스와도 일맥상통하며 ‘스스로 원했던 최후를 맞이한‘ 당시의 정치가이자 철학자, 웅변가였습니다. 소위 ‘틸리의 책‘이라고 불리우는 그의 의무론은 누스바움이 꽤 심도있게 스토아주의와 비교 분석하는 학문적 매개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키케로는 일반적인 ‘정의론‘을 지지하고 적극적 불의와 소극적 불의로 대변되는 ‘불의론‘으로도 누스바움은 이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예를들면, 누스바움이 해석한 ˝그들이 겪는 굶주림과 가난이 한 명 이상의 다른 사람들이 저지른 부당행위로부터 야기된 게 아니라고 가정할 수 없다는 것˝과 같이 키케로에게도 정의의 의무와 물질적 원조의 의무는 일반적인 ‘정치적 정의‘에서 중요한 사유였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반대의 스토아주의적 교설(doctrine)의 허위로서, 개인의 삶의 비참함이 그 사람의 도덕적 나약함의 결과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종래의 언설들이 상반된 입장을 갖고 있는 키케로주의자들과의 간극이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바로 여기에서는 누스바움이 지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스토아주의적인 곡해로 애덤 스미스의 사상을 왜곡하는 결과는 매우 심각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사실 기존의 애덤 스미스의 사상을 곡해한 밀턴 프리드먼과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자유주의의 화신으로 스미스를 세운 것과 하이에크 본인이 ˝사회에 정의 따위가 필요한 이유가 있는가˝를 내뱉은 것과 상반되는, 과거 칸트가 ˝이성으로 이뤄진 모든 인간이 불필요한 중세적 굴레를 벗어나기 위한 시작점에서 계몽주의가 있었던 것˝처럼 보편적 인간이라면 바로 그 ‘정의감‘에 눈을 감고 있을 수는 없을겁니다. 바로 여기에는 그동안 수많은 왜곡된 지식인들이 ˝정의 따위를 찾는 것은 나약한 이상주의에 불과하다˝거나, ˝경제적 인간이라는 관점에서 개인의 합리적 이기심을 위해 약간의 도덕주의는 무시할 필요가 있다˝는 식의 합리화가 어떤 부류들에게 이익이 되었는지는 얼마간의 분석으로도 다소 명백해 보이지 않습니까.

뒤를 이어, 이러한 키케로의 사상에 접목한 인물이 바로 휴고 그로티우스입니다. 그도 역시 쉽게 저버릴 수 있는 개인적 신념을 지녔던 것으로 추측되는데요. 특히 자신의 종교의 자유와 관련하여 자신의 모국을 떠나 프랑스로 사실상 망명한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도 앞선 키케로와 마찬가지로 보편적인 인류애와 무엇보다 개인이 주체가 되는 도덕주의에 집중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부분은 그가 국가의 주권과 관련된 문제와 관련해서 일반적인 측면의 국가 주권과 개인의 도덕률 내지는 도덕주의의 충돌에 대해 후자의 입장을 강조했던 것을 비추어 보면 명확합니다. 이에 누스바움은 ˝그로티우스가 보기에는 도덕적 자율성이나 그를 통한 정치적 주권의 궁극적 원천은 모두 개인의 양심이었다˝고 분석합니다. 이런 누스바움이 설명한 그로티우스와 관련된 4장을 읽으면서, 그가 오늘날의 인식대로 꽤 상식적인 다원주의자이자, 세계 정부와 같은 이론을 그려본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아쉽게도 민족국가에 이르는 베스트팔렌 체제를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것이 그의 학문적 사상이 완성되지 못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만, 저자인 누스바움의 말대로 그로티우스가 오늘날 세계의 국제정치학자들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화점론‘이라고 일컬어지는 그의 전쟁과 평화론은 여러모로 의미가 있는 논저라고 불릴만합니다. 또한, 국제 사회 및 세계 국가들에게서 각자가 갖고 있는 외적 자원과 자원을 할당할 권리는 국가 주권이라는 개념의 핵심에 놓여져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키케로의 정의로운 전쟁론과 사뭇 대비되는 그로티우스적인 정의 전쟁의 인식적 결과물 또한 흥미롭기도 합니다. 빈곤과 가난이 심각하게 퍼져 있는 도식적인 한 국가를 토대로 삼자간의 전쟁에 대한 명분이 어떤식으로 행위에 대한 결정론이 되는지 누스바움은 이를 잘 설명해내고 있습니다. 과연 이들 가운데 누가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흥미롭기도 합니다.

다음 5장은 누스바움의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기존의 스토아주의적인 전통에서 외적 자원과 관련된 인간 사회의 구조적인 맹목성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이 애덤 스미스를 곡해하고 왜곡해 왔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절은 앞선 키케로와 그로티우스에 이은 세계시민주의적 도덕적 세계 정부론에 중요한 원리가 되는 스미스의 ‘도덕 감정론‘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물론 ‘국부론‘ 역시 적절하게 인용이 되기도 하는데요. 물질적 재화와 그에 따른 분배를 ‘외적 자원‘의 기본 코드로 놓고 이번 장을 분석한다면 꽤 명쾌한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과 관련해 칸트는 ˝스미스의 저작을 존경했고, 칸트적 형태의 자유주의는 이에 영향을 받은 것이 틀림없다˝고 저자는 분석하고, ˝개인의 사익 추구에 대한 스미스의 변호는 자제력에 관한 도덕적 주장에 짜여 들어가 있으며, 이런 토대 위에 지어진 사회에 대한 그의 설명은 홉스나, 심지어 로크의 설명과도 엄청나게 떨어져 있다˝는 점도 그동안 얼마나 스미스의 사상이 곡해받아 왔는지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는 당시의 노동자들의 삶에 관심이 많았고, 특히 날로 증대하고 있던 대규모 제조업자들이 정부에 끼치는 부당한 영향력에 그가 관심이 많았다는 것은 실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날에는 밀턴 프리드먼과 궤를 같이 하는 인사들이 애덤 스미스를 무슨 자유주의 경제의 화신으로 여기고 있으나, 진실은 그가 정치적 도덕성에 관심이 많았으며, 개인의 권리와 사회적 관계의 중요성, 그리고 ˝어떤 사회도 구성원의 대다수가 가난하고 궁핍한 가운데 번영하며 행복을 누릴 수 없다˝고 주장한 바가 있습니다. 더불어, 앞서 키케로가 중요시 여긴 ˝인간 존엄성의 맥락˝이 실상은 다치고 부서지기 쉬운 것으로 현실주의적 입장을 내비친 스미스의 지혜 역시 뭔가 그 이질감이 대단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아마도 이런 연유에는 다수 경제학자들에 의한 도덕 감정론의 무시와 이것을 꽤 관념주의적 논저로 몰아간 몇 백년간의 지속된 작업도 한 몫을 했을 겁니다. 따라서, 스미스 역시 개정된 도덕 감정론에서 이런 스토아주의에 대해 비판을 가하고 있는데요. (인간과 사회에 대한) 절대적 무관심이 ‘섭리‘라는 스토아주의의 교설과 만났을 때, 도덕주의의 사실상의 퇴락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어떻게 보면 기존의 자본주의의 이행(인간과 사회가 배제된)과 그런식으로 매우 교묘하게 닮아 있기도 합니다.

끝으로, 꽤 (실제로) 합리적인 경제학자인 대니 로드릭은 오늘날의 세계 정부와 세계 시민주의와 관련된 움직임에 다소간 부정적인 시선을 던진바가 있습니다. 다른 관점으로 돌려보면, 이 세계 정부에 대한 선결적인 조건들 가운데, 다원주의적인 관념이 포함되어 있어야 할 텐데요. 이는 명백하게 민주주의적 토대의 기본 가치이기도 합니다. 이를 다시 고려해본다면, 오늘날의 경제적 파행의 결과들을 개선하기 위해 나타난 세계 시민주의와 관련된 이론들은 결국 다시 ˝민주주의로 돌아가자˝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아예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한다면, ˝시장에 다시 정치를 귀환시키자˝와 같은 말이 되겠죠. 이에 누스바움은 마지막 결론에서 모두가 인정할 만한 정의로운 가치와 인간 존엄성의 존중, 더이상 혐오를 하지 않는 발걸음 등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몇가지 구조적인 움직임에 대한 선결 또한 제시하고 있는데요. 다만, 아직까지도 민족에 의한 국민국가주의에 손을 들고 있는 시민들도 많고 현재 유럽의 이슬람 이주민들과 다른 민족의 유입에 따른 여러 문제들을 놓고 봤을 때, 이 지점은 특히나 ˝시민들의 사회경제적 불평등 문제˝에 관련이 깊어 아예 기존의 사회경제적인 패러다임의 변화와 소수의 배만 채우고 있는 ˝금융화˝에 대한 조절이 먼저 필요해 보입니다. 이 점은 과거 국제 사회가 각 은행들의 ˝자기 자본 비율˝을 강제했던 것과 같은 아이디어가 있어야만 한다고 여겨지는데요. 따라서, 올바른 정치는 이런 부분에서 꽤 훌륭한 효과를 거둘 여지가 있어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다수의 시민이 중심이 되는 이러한 시민 정치에 대해 소수의 기득권과 엘리트 계층이 소위 말하는 ‘군중 정치‘로 몰아갈 가능성이 다분하기에, 양자 사이의 긴장은 최근들어 높아졌다고 봐도 무방해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여기에는 주권에 대한 개념과 이 주권의 시도 행위가 어디까지 용인될 수 있는가에 대한 시민들의 공감대와 누스바움이 이 책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주권과 시민의 기본권이 어떻게 하면 평화롭게 맞물려 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올바른 지식인들과 학자들의 연구도 동시에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자가 염연히 철학자인 만큼 이러한 꽤 관념적이고 도덕적인 저술이 마음에 들지 않을 독자들이 있을텐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의 애덤 스미스의 사상에 대한 본질을 파헤친 5장의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토아주의에 대한 계보가 철학 뿐만 아니라 사회학 및 경제학 전반에 뿌리 깊다는 걸 이 책을 통해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키케로는 타인에게 헌신하는 삶에서 이런 사랑의 연대가 어마어마하게 중요하다는 점을 드러낸다

수많은 현대 미국인이 가난이 사실상 의지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의지가 꺾인 사람을 보고 그것을 개인적 나약함이나 실패의 결과라고 생각하니 말이다

존엄성은 지위나 신분과 아무 관련이 없으며, 사실 지위와 신분에 대한 대단히 격렬한 거부를 핵심적인 도덕적, 정치적 가치로서 동반한다

세상을 똑바로 보는 사람에게는 두려워 할 만한 일이 아무것도 없다. 도덕적 힘은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의 괴로움에 대해 부모가 품을 법한 관심이 그가 세계시민주의자의 선행에 대해 품고 있는 상이다

애덤 스미스는 정의를 세우기 위해 제도를 개선하는 데에 돈을 지출해야 할 필요성을 지적했다

여기에는 동시에 "훼손된" 사람에게서 인간 존엄성을 찾는 것, 공교육이나 삶의 다른 적절한 조건들의 부재가 말려 죽이고 있거나 심지어 이미 회복할 수 없이 고사시킨 기본적 역량을 보는 것 또한 요구된다

스미스는 이런 양심과 자제의 미덕을 인간 존엄성이라는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짓는다

개인의 사익추구에 대한 스미스의 변호는 자제력에 관한 도덕적 주장에 짜여 들어가 있으며, 이런 토대위에 지어진 사회에 대한 그의 설명은 홉스나, 심지어 로크의 설명과도 엄청나게 떨어져 있다

키케로는 "공화제를 정말이지 온 세상에 좋은 것이다"라고 말년에 그와 같이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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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andante 2020-07-30 13: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미스-칸트의 연결고리가 있다니 리뷰만 읽어도 흥미진진합니다^^

베터라이프 2020-07-30 14:08   좋아요 1 | URL
칸트가 스미스의 저작에 깊은 공감을 보인 것은 인간에 대한 도덕주의적인 겸허한 스미스의 사상에 긍정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 물론 어떤 극우 유튜버처럼 종래의 신자유주의를 옹호하는데 칸트을 끌어다 쓰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본질적으로 임마누엘 칸트는 인간의 보다 보편적인 이성의 함양과 인간성에 주목했던 위대한 철학자임은 더 분명하겠죠. 더불어 그동안 지오바니 오리기와 같이 곡해했던 애덤 스미스를 다시 이해해보고자 하는 학자들의 움직임이 있어왔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누스바움의 의한 새로운 애덤 스미스 독해는 세계시민주의적인 연결성과는 별개로도 매우 의미있는 학문 작업이 아닌가 일개 독서인으로서 짐작해보네요 ^^ 모쪼록 추풍오장원님도 이 책을 일독해보시길 바래봅니다. 감사합니다!

페크pek0501 2020-07-31 12: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누스바움의 책을 두 권 가지고 있어요. 둘 다 흥미로운 책이죠.
<지혜롭게 나이 든다는 것>과 <시적 정의>라는 책이에요.
이런 책도 있는 줄 몰랐어요. 신간인가 봅니다. 정보에 감사드립니다.

베터라이프 2020-07-31 18:49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페크님. 저에게 누스바움은 아마르티아 센과 더불어 역량 접근이라는 의미에서 다수 시민들의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개선하고자 하는 철학자이자 사회학자로만 인식되고 있는데요. 실은 국내에 번역된 그녀의 글을 살펴보면 삶의 태도라든지, 공공인으로서의 마음가짐 같은 철학적 기본서도 얼마간 집필하기도 했더라구요. ^^ 다만, 이 책은 앞서 설명해드린 세계시민주의에서의 역량 접근이라는 학문적 기반의 확장판이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