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이 돌아온다 - 공공적인 것의 귀환을 위하여
댄 하인드 지음, 노시내 옮김 / 마티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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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출신의 언론인으로 특히, 언론 개혁과 관련한 문제에 관심이 많은 댄 하인드 (혹은 댄 힌드)는 전작인 논저 ‘이성에 대한 위협 The Threat to Reason‘으로 영국 보다는 미국에서 큰 관심을 받은 바 있습니다. 다만, 아쉽게도 하인드와 관련된 학력과 기타 정보를 찾기 위해서 구글에서 검색을 해봤지만 위키 백과에는 그의 정보란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개인 트위터 계정과 몇장의 사진은 구글에서 돌아다니고 있었지만, 그 외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 책의 저자인 하인드와 관련해서 개인적으로는 시민의 적극적 언론 참여라고 볼 수 있는 ‘공공주문취재 제도‘가 눈길을 끌었는데요. 이는 시민이 기존의 언론과 별개로 개방성과 공공성을 목표로 적극적인 취재 활동에 대한 취지 등을 담고 있었습니다. 또한, 하인드의 이 글에서 주요한 개념으로 등장하는 ‘공중‘과 관련해, 얼마전에 서평을 쓴 존 듀이의 ˝현대 민주주의와 정치 주체 문제˝의 현대적 버전의 보론이라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이 책은 원제, ‘Return of the Public‘으로 지난 2010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2년 3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근래, 대중 정치와 관련해 큰 이슈가 되고 있는 ‘공중 The Public‘과 관련해 저자는 라이트 밀스의 독착정 개념인 ‘대중 The Mass‘와 ‘공중 The Public‘을 통해 우리가 궁금해하는 공중에 대해 대략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밀스가 해석하는 전자의 대중은 기존의 엘리트체제에 적극적으로 동화되어 공공성을 잃어버린 일반 대중들을 뜻하고 후자의 공중은 자신의 이성을 바탕으로 사회와 체제에 관심을 두고 공공성을 추구하며, 최종적으로는 모두가 바라는 정의로운 사회에 목표를 두고 있는 계몽된 대중입니다. 저자인 댄 하인드는 이 책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 ‘공중‘을 바탕으로 기존의 신자유주의 시대를 거쳐온 현재 언론의 대체물이 될 수 있는 개혁의 실마리까지 잡는 것으로 논증 가운데 이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즉, 1부는 과거 인류의 정치사적인 측면에서 시민과 이들이 주체가 된 정치 관념에 이르는 고대 로마부터 현대에 이르는 정치적 과정을 살펴보고, 2부는 앞선 1부 5장에서 논의된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퇴락한 공공성과 그 가운데 발생한 개인들 간의 심각한 불평등 문제와 도를 넘어선 민영화의 이행을 바탕으로 어떻게 오늘날의 정치가 상업주의의 근간에서 어떻게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렸는지에 대해 논하고, 3장은 이러한 현실적인 조건 가운데 어떻게 하면 다시 공중을 되살리고, 언론이 과거 토크빌이 강조했던 바와 같이 어떻게 하면 ˝다시 건강한 민주주의의 조건˝으로 회귀할 수 있겠는가에 대해 현실적 방안을 살펴보는 것으로 하인드의 이 글은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장 자크 루소의 ‘인간의 이원적 본성론인 인간의 욕심과 정의감‘ 과 임마누엘 칸트의 ‘인간의 사적 이성과 공적 이성이라는 구분‘으로 대다수의 인간은 3부에서 저자가 확언하는 바와 같이 ˝누구나 정의로운 사회에서 삶을 영위하길 바란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굳이 전제 왕권을 교수대에 보냈던 지난날의 영국이나 베르사유 궁전의 주인을 단두대에 보낸 지난날의 프랑스인들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그것이 꼭 인간에 대한 계몽주의의 반사적 혜택에 불과할지라도 우리는 이성과 감정을 바탕으로 스스로의 굴레를 벗어왔습니다. 바로 1장은 이러한 인식 가운데 시민과 공화주의를 시작으로 ‘정치적 인간사‘의 일면을 살펴봅니다. ˝신경증에 가까운 경계심은 공화국 시민의 자연스러운 상태다˝라는 당시 자유에 대한 일념과 이를 성공적으로 쟁취하기 위해 광범위한 연대에 나섰던 시작점을 저자는 언급합니다. 뒤이어 이러한 공화주의를 시작으로 현대에 민주주의 국가를 이룩했음에도 자본의 영향력에 놓인 다수의 시민들에게 경제적 생존권이 정치적 자유와 정치적 신뢰와 마찬가지로 중요하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한 것은 차차 뒤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다수의 시민들이 이러한 배타적 경제적 이행과 관련해 저자인 댄 하인드는 한가지 색다른 의견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면 자신이 놓인 처지에 더욱 불만을 느끼게 마련이다˝라는 주장입니다. 사실 몇 번이나 뇌리에 되내이면서도 왜 시민들은 이렇듯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생기게 되는가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점은 이 글의 3부에서 ˝주요 언론매체에 의존하는 대다수 국민은 신자유주의 정책에 의해 빈부격차, 세계무역 불균형, 그리고 최근 금융위기의 주범은 금융규제 부재가 완전히 자리잡았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들어보지 못했다˝고 단언하는데요. 외형적으로는 언론에 화살을 돌리고 있지만, 같은 장에서 일반 시민이 세계의 진실을 강구하기 위해 스스로 진실을 찾아야만 한다는 일련의 논점에 저자는 일단 회의적인 시선을 던지면서 왜 시민들이 결국에는 자신의 삶을 희생해야 되는 종착점에 이르는 이러한 노정을 오로지 개인의 책임으로만 두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합니다. 마찬가지로 칸트는 ˝우리가 국가를 포함한 사적 기관들이 부과하는 제약을 극복하고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소통할 수 있을 때에만 계몽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처럼 이것에 이르는 과정은 오로지 일개 개인의 힘만으로는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즉, 앞선 1장에서 논증되는 바와 같이 ˝자유인은 공동으로 한 국가의 주체를 이루어 집합적 의지를 행사하기 때문에 자유로운 것이다˝는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체제에서 자신의 자유와 사회의 정의를 위해 ‘다수의 자유인들‘과의 연대는 중요하며, 각자는 정치와 정치인들에 대한 극도의 경계심을 갖는 동시에 쉴새 없이 자신의 입을 여론의 도구로 삼는 것이 중요한 문제일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3부에서는 노동자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뒤로하고 ‘사심없는 정의에 이르는 길‘을 논하고 있습니다. 앞선 루소의 말대로 인간은 개인의 이기심과 더불어 정의에 대한 관념을 갖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엘리트 계급은 피지배자의 동의에 기반을 두는 정부라는 존 로크의 사상을 수용하고 나면 새로운 감수성을 갖추고 등장한 공중의 판단을 무시할 수 없고, 그런 의미에서 공중의 의견은 압도적인 중요성을 띠게 된다˝고 이와같이 밝힙니다. 그동안 대다수의 엘리트 계급과 이들의 이익에 적극 수렴한 지식인들은 ˝대중은 ‘무의미한 존재‘이다˝라고 설법해 왔습니다. 더불어 소수 기득권층과 이 엘리트들은 대중이 주도한 정치가 종래에는 군중정치로 파급될 가능성이 있으며, 좀 더 면밀한 이성과 합리적인 주도력을 가진 엘리트들의 판단을 대중은 믿고 수용할 필요가 있다고 소위 다수의 ‘언론‘을 통해 이러한 인식을 퍼뜨린 바도 있습니다. 더욱이, 지난 1980년대 이후로 ˝국가는 시장의 작동에 감히 제한을 가할 수 없었다˝는 지난 신자유주의의 우울한 음영이 지금까지도 정치는 시장에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불문율을 재계와 금융 엘리트 들에 의해 주입되어 왔습니다. 사실 우리가 알아야 할 명백한 사실은 바로 무식하고 쓸모없는 대중으로부터 시작되는 이러한 왜곡된 인식을 무너뜨리고 각자 모두가 정치적 및 경제적 자유를 갖고 있는 자유인임을 명백히 인식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하인드의 글을 통한 저의 이러한 해석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공화주의 전반의 가치가 현재에 이르러서는 퇴색되어 버렸다는 인식을 갖고 있습니다. 애덤 스미스가 ˝정치인들에게 공공성을 맡기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로부터 시작된 경제 전반의 정치에 대한 불신과 쓸모없음은 그로부터 어떤 자들이 이익을 얻었는지에 대해 숙고해 볼때 그 결론은 아주 명확합니다. 지금의 신자유주의적 체제가 무슨 만고의 진리이자 불변의 진실인양 받아들이는 요즘의 세태에 대해 지그문트 바우만은 ˝대체 인류의 역사에서 경제가 인류의 태동과 더불어 발생했다고 철썩같이 믿는 사조˝에 대해 개탄을 금치 못한 바가 있습니다. ˝고도로 교육받은 엘리트들이 과연 공정하게 이성을 발휘할 것인가˝와 더 나아가서는 이들이 자신들의 사적 이익에 연연하지 않고 공공성과 공공의 이익을 보존하고 추구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우리는 그동안 너무나 관대한 시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정부-시장-언론에 이르는 이 견고한 삼위일체가 소위 ˝합리적 이성과 그에 따른 소수의 이익˝으로 귀결되었다면 이제 이 시점에서 시민인 우리가 다시 ‘공중‘이 되어 이러한 시스템에 대해 반기를 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우리가 정의로운 사회에서 살고 싶은 아주 기본적인 욕구에 대한 대답˝이며, 이 책의 저자가 스스로 언론계의 개혁을 통해 근본적으로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이기도 합니다. 끝으로, 과거에 스치듯 지나가며 봤던 어떤 이의 ‘신자유주의가 자유주의에 반하거나 배신을 한 것은 아니다‘라는 단언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 것인지 저는 하인드의 이 책을 통해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사적 이익을 좇다가 붕괴 직전에 놓인 금융 시스템을 국가가 구제하는 순간, 정책 수립에 있어서 일반 대중의 의미 있는 역할을 부인하던 주장은 설득력을 잃었다

부와 권력을 가진 자에게 맹목적으로 의지하는 자는 결국 자기에게 이익이 된다면 불의에도 눈 감는다

현 시대는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칸트가 말한 의미, 그리고 일반적인 의미에서 공적으로 이성으로 발휘할 수 있을지, 즉 어떻게 사심없는 개인으로서 타인과 성공적으로 소통하는 방식으로 이성을 발휘할 것인지에 대해 숙고하라고 촉구한다

공중에 봉사한다는 공공 서비스 정신은 점차 그 내막과 동기가 불분명한 ‘국가에 봉사하는 정신‘으로 변질되어 갔다

신자유주의에 적극적으로 영합한 영미의 군산복합체는 정부 고용, 로비 활동, 기업 경영, 개인에게 유리한 순환계로 이해된다

과거 조지 W. 부시 정권은 핵 테러 위협으로 사회적 히스테리를 조장하고, 불안감 해소용 선입관을 꾸준히 만들어내 국민이 진실을 못 보고 화려한 총천연색의 도덕적 감상에만 젖어 국가가 하는 일을 긍정하게 만들었다

신자유주의 교리는 온갖 진지한 외양을 갖추고 국민에게 반복적으로 주입되었다

미국에서는 공화 민주 양당에 대한 오랜 재정 지원을 통해 재계는 정치 논쟁이 일정한 선을 넘치 못하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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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천장의 비밀 - 남자 일과 여자 일은 따로 있는가? 다윈의 대답 시리즈 4
킹즐리 브라운 지음, 강호정 옮김 / 이음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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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즐리 브라운은 미국 덴버 대학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샌프란시스코에 소재한 로펌인 모리슨 & 포스터를 거쳐 현재 미국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시의 웨인 주립대학의 법과대학 교수로 재직중에 있습니다. 그는 남녀 고용 차별법에 대한 관심과 남녀간의 진화론적인 차이에 따른 사회적 및 법적 영향 들을 다루는 글을 주로 써왔는데요. 몇가지 그에 대한 기사를 살펴보니, 페미니스트들에게 상당한 공격을 받고 있기도 했습니다. 얼핏 이 정도 맥락이면 그가 엄청난 여성 차별주의자로 오해할 수도 있겠는데요. 전혀 그렇지 않고 특히, 인간의 본성 자체에서 남녀의 구분을 진화론적이고 사회학적인 측면에서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학자일 따름입니다. 이 책은 지난 1999년에 원제, ˝Divided Labour : An Evolutionary view of Women at work˝로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1년 12월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또한, 이 ‘유리천장의 비밀‘이라는 책은 동 출판사의 ‘다윈의 대답‘이라는 시리즈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일단 먼저 한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이 있는데요. 출간 당시에 인쇄소에서 문제가 있었던지 아니면 편집이 잘못되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페이지 맨 상단에는 글자 인쇄가 짤려 나온 흔적이 있습니다. 제가 구입한 판본만 이 지경인지는 모르겠지만, 책을 보는 내내 뭔가 어처구니가 없는 기분이 들기도 했는데요. 여기서는 이 정도까지만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킹즐리 브라운의 다소 얇은 분량의 이 책은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고 있는 기업들에서 고위 임원직으로 나아가는 여성들이 남성들에 비해 현저하게 낮은 비율을 보이고 있는 것에는 사실상 ‘유리천장‘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진화론적이고 지극히 현실적인 반론을 담은 글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저에게는 저자인 브라운이 진화론적인 차이, 유전학적인 대비 및 사회학적인 기준으로 이 페미니스트들의 왜곡적인 인식을 반론하는데 할애하고 있으며, 이러한 논증 가운데 중요한 부분은 바로 오랜시간 동안 인간의 남녀가 진화론적으로 분화되어 이룩한 인간 본성의 따름이라는 점이 매우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결국, 1장에서 그가 규정하고 있듯이, ˝가부장적인 사회구조는 성차의 결과물이지 원인이 아니며, 마찬가지로 이러한 논증 가운데 중요한 점은 인간의 성차가 사회화에 따라 발생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거의 문제 제기가 없으면서도 그 성차가 생물학적인 원인에 근거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다분히 회의적인 의견을 제시하거나 면밀한 증거를 요구˝하는 반대에 있는 다수의 이중적인 태도를 꼬집고 있습니다. 사실 이 지점에서는 인간의 사회화만큼이나 오랫동안 이어져 온 진화론적인 측면이 등한시되고 있다는 점을 저역시 인지할 수 있었는데요. 굳이 에밀 뒤르켐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어떤 현상이나 이론에 긍정하든 반대하든 그것을 통해 자신이 적절한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그에 수반하는 많은 정보와 이론이 필요합니다. 외눈박이 이론이 그 자신 뿐만 아니라 마찬가지로 사회를 병들게 했다는 점은 지난 역사에서 수도 없이 그 사례를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인식적 측면에서 브라운의 이 글은 단순히 반론에 이르는 결과물을 넘어 학문을 추구하는 모든 지식인이 갖춰야 하는 태도라고 여겨집니다.

2장에서는 이러한 논증이 전개됨에 따라 왜 인간의 남성과 여성이 기질적으로 다른가에 대해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본문 4장과 5장에서도 언급되는 바와 같이 남성이 그 특유의 본성, 즉 ˝공격성, 야망과 추친력, 강력한 경력 추구성 및 위험 부담에 대한 각오˝를 갖고 있으며, 여성은 반대로 안정지향적이고 무조건 댓가에 따른 반대급부를 원하는 등의 성향차이가 오늘날의 기업 경영자들이 보다 많은 남성 임원을 뽑는데 원인이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남성은 이러한 출세지향적이고 욕망의 일선에 한가운데 있는 반면, 여성은 아이와 가정의 안위에 몰두하고 이런 여성들이 결혼을 해 가정을 꾸렸을 경우 보다 더 안정 지향적이 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물론 2장에서 호르몬의 영향과 태아 시기에 발생하는 성세포의 확장과 성의 확정 등을 통해 의학적인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로 근거를 확대하고 있습니다만, 아주 여실히 현실적으로 봤을 때 다시 앞선 기업의 경영자들이 ˝높은 책임감을 보이는 사람에 대한 보상을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저자는 단언하고, 이러한 자본주의적 기조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체제 전반을 다 뜯어고쳐야 하는데 과연 기업 경영인들이 이들 페미니스트들의 요구에 귀를 기울일 것인가에 대해선 매우 회의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더불어, 5장에서도 ˝여성이 직업에 대한 외골수적인 헌신을 보이지 않는 주요한 이유는 아이들에 대한 헌신 때문이다˝라고 단정하고 반대로 그 고위 임원에 오르는 40대 후반에서 50대의 남성 임원들이 사실상 여성들 뿐만 아니라 더 많은 같은 처지에 있는 남성들을 딛고 올라선 결과물로서 이 점 또한 망각해서는 안된다고 그는 강조합니다. 즉, 이 위치에 있는 고위직 남성들 또한 그런 비슷한 유형의 수많은 남성들과의 경쟁에서 그 자리를 쟁취한 것으로 이러한 배경이 자본주의적 경쟁 체제의 본질적인 측면이라는 점을 사회학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면, 오히려 백안시하며 이 체제를 뒤집어 엎으라고 말을 하는 용기를 보이거나, 아니면 이러한 경쟁에서 밀려난 남성들과 여성들을 모두 구제할 수 있는 사회적 안전 장치를 만들어 내는데 목소리를 높이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더 현실적인지는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이해될 것입니다. 물론 제가 터무니없이 무조건 자본주의 자체를 옹호하고자 쓰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자의 인식과 논증대로 우리 인간의 본성 가운데서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아예 단 한가지 사회적인 측면의 사회화에 따른 남성 위주의 가부장제도가 악이 되었던 것이 아니라 고대 수렵시기의 부족사회부터 인간의 오래된 역사를 통해 각자의 DNA에 이어져 내려왔고 이러한 인식적 배경 없이는 이 남녀의 근본적인 차이를 이해하는 데 불가능하다는 점을 밝히고 싶습니다.

그런 부분에서 더 많은 자원을 가진 남성과 결혼을 하려는 많은 여성들의 기본적인 욕구가 이것을 속물 근성이라는 사회적 잣대로 몰아가기 이전에 이미 우리의 조상들은 이러한 최소한의 가정에 대한 안전책을 되물림해 왔으며, 이 지점에서도 마찬가지로 사회학적으로는 이를 쉽게 용인하기는 힘드나 그러한 배경이 있다는 점은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이런 이해 가운데 오랫동안 인류의 결혼제도가 유지되어 왔고, 심지어 지참금 제도와 같은 각 문화의 고유성들은 앞선 안정을 지향하는 여성들의 본성 문화적으로 내면화시켜 왔다는 아주 현실적인 증거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저자의 논증이 수용할 만큼 설득적이었다면 결론에 이르러 저자가 써내려간 ˝여성을 오늘날의 사회구성의 희생물로 규정하는 대신 남성을 불리한 성으로 모는 것도 쉬운일이다˝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따라서, ˝유리천장보다 더 적절한 비유는 ‘거미줄천장‘일지도 모르겠다. 여성이 ‘볼 수‘ 있는 벽이지만 지나가고자 하는 사람을 잡아두기에는 너무 약한 벽 말이다˝라는 5장의 결론과 글의 전체적인 결론이라 할 수 있는 ˝인간 본성 자체를 바꾸려는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기보다는 인간 본성과 합치되도록 환경을 변화시킴으로써 성공적인 해결책을 찾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라고 모두에게 제언하는 이 말 한마디는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는 매우 명백하다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더 한마디를 덧붙인다면, 지금의 부화뇌동하는 페미니스트들이 이러한 사회학적인 결과물에 집착해 무턱대고 어떠한 고려 없이 체제의 변화만을 요구하는 것은 과거 사회진화론자들이 인간의 급을 나눠 자본주의에 더 용이하도록 고안한 이론을 전파하는데 지식을 사용했던 것과 별반 다름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현대 페미니스트들이 여성 해방의 대해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은 성 역할을 제거하고 여성을 가사노동의 의무에서 해방시키는 일이라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인간의 본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시간 할애와 열정을 던질 것에 대한 각오가 있느냐의 여부는 직장에서 임원 지위로 진입하는 필요한 중요 조건이다

고용주들은 높은 책임감을 보이는 사람에 대한 보상을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게 여성의 낮은 비율 (고위 임원)이 조직내의 결함으로 인해 나타난다는 것은 더 불분명하다

남녀간에 가장 일관되게 나타나는 차이 중의 하나는 공격성 aggressiveness 에 관한 것이다

만일 여성이 자신의 경력을 위해서 가정을 희생시키려는 의지를 줄인다면 이 결정은 자유 선택의 결과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집에 머물러 있으며 아이들을 돌보길 원하고 오랜 기간에 걸쳐 부인에게 의존하기를 원하는 남성은 매우 드물다. 또한 그런 남편을 부양하면서 그가 성적으로 매력이 있다고 느끼는 여성은 더욱 드물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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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민주주의 가이드 - 대표제를 통해 알아보는 민주주의의 본질
하야카와 마코토 지음, 김찬현 옮김 / 이김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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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요코하마 출신의 정치학자인 하야카와 마코토는 도쿄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동 대학의 법학정치학 대학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고 현재는 일본 도쿄에 소재한 사립대학인 릿쇼 대학의 법학부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일본 특유의 정치 체제라고 할 수 있는 대표제 민주주의와 현대 정치 이론 및 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연구로도 유명한 학자입니다. 좀 더 그에 관해 검색을 해보니 특이하게도 선거 개표 방송에 패널로 출연하기도 하고, 일반 토론 프로에도 참여한 이력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국적을 막론하고 다수의 정치학자들은 현실정치에 관심이 많기도 하는데 어쩌면 그 점은 당연한 부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책은 원제 ˝代表制という思想˝로 지난 2014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최근인 2020년 6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책 제목이 지칭하는 이 ‘대표 민주주의‘에 대한 정확한 개념 정리가 필요해 보입니다. 불행하게도 저자는 이 대표 민주주의에 대해 ‘이렇다‘ 정도의 개념 규명을 해 놓지는 않았는데요. 어느 정도 독자들이 이해할 만한 수준의 정의는 ‘현재 일본의 정치 제도라 할 수 있는 의원내각제에 기반한 대의제 민주주의‘를 뜻하는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저자가 한국어판 서문에서 우리나라의 직접 선거의 대통령제 역시 일종의 대표 민주주의 범주 안에서 해석하는 것으로 보아 아주 크게는 일반적인 대의 민주주의 제도를 아우르는 말로도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본문은 총 6장의 주제별로 구성되어 있는데, 서장과 총 4장의 주제를 뒷받침하는 논증과 마지막 결론의 형식상 구조로 글 전체는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1장과 2장은 현재 일본의 의원내각제에 대한 비판적 분석과 최근에 논의되고 있는 일본 총리를 직접 일본 국민이 투표로 뽑는 ‘수상공전제‘에 대한 분석을 담고 있으며, 3장은 한나 피트킨의 대표제 이론이 집약된 ‘대표의 개념‘과 그녀의 대표 사상인 권위부여형 권력제에 대한 실재와 분석을, 4장은 이러한 대표제에 대한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고 보는 카를 슈미트와 조지프 슘페터의 몇가지 정치 이론을 살펴보고 마지막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저자는 일단 ˝일본에서 총리대신으로 선출될 수 있는 인물은 국회의원으로 한정되어 있다˝고 언급하면서 현재 이러한 당의 내부 계파를 아우르는 정치력을 겸비한 인물이 일본 총리가 되는 정치체제에 대해 해설을 하고 있는데요. 저자가 분석하기로는 이러한 내부 결집을 위한 (이를테면 자민당 내부가 되겠죠) 명민한 정치력을 발휘하는 인물이 근래까지 일본 수상의 자리를 차지했는데, 단순히 민주당 집권기를 제외하고 고이즈미 총리가 일본의 수좌가 되면서 이러한 흐름은 일단 전환기를 맞이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즉, 고이즈미 총리의 등장은 우리 나라가 그동안 직선제로 대통령을 뽑고 있는 것과 유사한 지도자형(혹은 카리스마) 권력의 등장으로 여기고 있는 듯 합니다. 이 글을 통해 저자가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는 이 대표 민주주의 체제에서 시민의 민의가 도대체 얼마만큼 이들 엘리트 정치인들에게 반영되고 반대로 이 정치인들이 얼마나 시민의 의지를 체현할 수 있는가에 대해 대표제 전반의 작동 원리와 법칙에 대해 살펴보고 명확히 그 의미와 한계에 대해서도 분석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민주 정치에서 리더는 평등한 국민을 통해서 탄생하지만 국민을 지도한다는 모순적인 입장에 처할 것을 요구 받는다˝는 1장의 분석에서 현재 일본의 의회민주주의가 다수의 시민들에 의해 불신을 받고 있는데, 이러한 인식속에서 최근의 ‘수상공선제‘와 같은 움직임에 대해 1장 내내 살펴보고 있는데요. 이 글을 읽으면서 문득 들었던 생각은 일본 정치는 변화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고, 고이즈미 준이치로 정권하에서 일종의 낙하산 선발과 유사한 정권의 나팔수들이 때로는 지역 사회에 일정 부분 기여하는 등의 간혹 민의의 수발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을 낙하산 제도의 긍정적인 부분으로 해석하는 것은 다소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더욱이 사실상의 직접 선거로 볼 수 있는 ‘수상공선제‘에 대해 포퓰리즘적 인식을 저자가 보이고 있는 것은 우려할 만한 수준이라고 여겨졌는데요. 이 글의 4장에서 아테네의 민회를 비롯한 직접 민주주의에 대해 분석을 하면서 이 아테네 시기의 직접민주주의가 민의와 가장 근접했던 부분인 ˝누구나 마땅히 대표가 될 수 있다˝는 당위는 그것이 현재 대의 민주주의하에서 굳이 조지프 슘페터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현실 정치가 그렇지 못한 상황은 일견 대의제의 한계라 할 수 있을겁니다. 바로 이러한 인식을 보이고 있는 저자가 ‘수상공선제‘를 단순하게 포퓰리즘 논법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은 아쉬울 따름인데요. 찰스 틸리도 모든 시민이 평등하게 공직 선거에 출마할 자격을 보장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을 고려해 본다면 민의와 관련된 이 피선거권과 이를 간접적으로 뒷받침하는 정치 권력을 위한 공개 선거는 대표제 민주주의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라 생각됩니다.

물론, 저자의 우려대로 ˝공선제에서 리더에게 공치를 전부 맡겨버리는 것˝은 위험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시민들의 단순한 정치적 효능감을 차치하더라도 시민의 위임을 받는 정치 권력을 직접 선출하는 등의 제도가 뒷받침되지 않고 말로만 떠드는 것은 그만큼 공허한 일이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저자가 앞서 분석한대로 일본의 의원내각제 하에서 총리가 선출되는 과정이 시민의 민의를 보다 더 반영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자가 아니라 당의 내부 정치와 계파간의 정치력이 뛰어난 자를 일본 총리로 낙점하는 등의 현재의 일본의 민주제가 과연 요시다 독트린을 시초로 그 전통을 떠나 과연 어떤 식으로 개선을 해야될지는 과거 정치 이론의 직접 민주주의 맥락 안에서 찾기보다는 좀 더 일본인들의 의지가 반영되는 쪽으로 가야되지 않나 생각해 봤습니다. 이를테면 일본 의회가 ‘주민소환제‘와 같은 제도 등을 2장의 담론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를 ‘숙의‘하는 것도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일본 역시 이 ‘숙의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저자는 분석하고 있고, ˝현재 일본 의회 비판과 관련해서는 특히 고도상정기 이후 각 사회 집단에 대한 이익 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게 된 것이 문제시 된다˝고 인정하는 부분 또한 시민들의 이익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것과 일맥 상통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저자는 이 숙의 민주주의와 관련해 기존의 하버마스의 입장을 긍정하면서도 오늘날 다양성의 시대에 종래의 대표 민주주의가 종종 이해집적형 민주주의라고 해석되는 수준에서 더욱 토론과 대화를 통한 이 숙의 민주주의가 필요한 것은 분명합니다. 다만, 직적 민주제 하에서 이러한 기능을 했던 ‘민회‘가 오늘날 실제적으로 현실화가 가능할 것인지에 대해 심도 높은 토론과 현실화 방안이 모색해야 된다고 여겨지는데요. 어차피 네트워크화가 상당히 진행된 오늘날의 네트워크 기술을 고려해 봤을 때, 전자의 고려가 아예 터무니없는 것은 아님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직접 민주주의와 대표제 민주주의를 면밀히 구분해 양자 사이의 장점 만을 도출해 내고자하는 것만으로는 오늘날의 민주적 정치 제도를 개선시켜 나가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끝으로, 저자 뿐만 아니라 최근의 정치학자들과 정치이론가들은 현대의 민주주의와 관련해 대표성을 떠나 실질적으로 엘리트 정치체제에 의한 ‘인민 주권‘의 파편화에 이르렀다고 보는 시각이 우위를 보이고 있습니다. 미국과 같은 경우는 더욱더 금권 정치로 매몰되고 있으며, 저자가 4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렇게 엘리트들과 기득권들이 교묘하게 외치는 주장과 인식이 마치 다수 시민들의 이익인양 왜곡˝되고 있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확실히 이 시점에서 조지프 슘페터가 역설적으로 돌려 말했던 바와 같이, ˝다수의 엘리트들이 과연 자신들의 계급 이익과 정치를 외면하고 과연 다수 시민의 이익을 위해 행돌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회의적인 의견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인식하에 더이상 현실 정치를 소수의 엘리트 정치인들과 기득권들에게 내맡기지 말고 마찬가지로 매우 지난하고 품이 많이 드는 일이지만 각자가 자신의 인생을 위해 스스로를 교육하고 건전한 시민들이 모여 확실한 연대를 구축하는 것이 앞으로 우리 정치를 위한 설득력 높은 해결책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본문 77페이지에 띄어쓰기가 잘못된 부분이 있었습니다. 제가 매번 쓰는 말이지만 정말 편집을 제대로 하지 않는 출판사는 대오각성을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글 서두에 저자는 민영화를 비롯한 신자유주의의 이행을 약간의 필연적인 시선으로 보고 있는데, 자유 보수 우파의 대변인이라고 여겨지는 프랜시스 후쿠야마 조차, 그의 저서에서 ˝다소 복지 지출에 힘들어 하고 있던 당시 서구 정부들에게 복지 지출을 대폭 감소시킬 수 있는 이 신자유주의 이론을 선택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다˝고 보는 해석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뭔가 신자유주의적 운명론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이는 다수의 이론가들은 이런 점에서 비판적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어보입니다.

-한국어판 서문을 마무리하면서 저자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교류가 정체된 상황에서 다시 양국의 교류가 활발해지기를 기원하며˝라고 쓰고 있는데요. 한일 양국이 단지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지금 정부 차원 뿐만 아니라 민간 차원의 교류조차 힘들어진 상황일까요. 에밀 뒤르켐의 말대로 어떤 문제에 대해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내는 것이 지식인의 책임감이라고 한다면, 이 부분의 인식 또한 그저 아쉬울 따름입니다.

-4장에서 카를 슈미트를 인용하면서 ˝나치에도 관여했다˝고 표현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루 빨리 한나 피트킨의 ˝대표의 개념˝이 번역되기를 일개 독자로서 간절한 바람을 가져봅니다.

공선형 리더는 현대 민주주의의 일반적인 상황에서 의회제보다 우위인 입장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사회의 분단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숙의가 필요하다

직업 정치가는 정치 세계의 특수한 논리에 물들어 일반 시민이 지닌 보통의 감각을 잃어버리게 된다

유권자로부터 독립이 허용되었다는 것은 대표의 판단이 유권자 개인의 판단보다 적절하다고 여기는 셈이다

의지가 아니라 판단을 중시할 경우에도 대표제가 직접제에 비해 유리하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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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윤리적인가? - 우리 시대의 몇 가지 우스꽝스러움과 독재에 대한 고찰
앙드레 콩트 스퐁빌 지음, 이현웅 옮김 / 생각의나무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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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책의 저자인 앙드레 콩트-스퐁빌은 프랑스 내에서 일찍이 매스컴의 주목을 받은 대중 철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나 파리 1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수여 받기도 했는데요. 이 파리 1대학에서는 부교수로 재직하며 강의에 집중하다, 2003년에는 대학을 나와 현재까지 대중들을 상대로 열린 철학 강의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영국의 줄리언 바지니와 비슷한 입장에 있는 학자가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하는데요. 철학자들이 지식인의 그룹에서 갖는 특별한 지위를 고려해 봤을 때, 그가 강단을 떠나 대중들의 품안에서 철학을 강의하는 의미는 일반 학자가 상아탑 안에서 집필하고 강의하는 것 이상의 가치가 있지 않나 평가해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책의 서지 정보와 관련해서 저의 부족한 분석으로 대체하고자 합니다. 일단 콩트-스퐁빌의 이 책은 일종의 강연을 바탕으로 편저된 글로 볼 수 있는데요. 2004년에 판권이 승인되었고, 국문으로 번역된 책 표지에는 영문으로 ˝Is Capitalism Ethical?˝로 표기되어 있으나 이 문구가 원제라고 볼 수 있는 근거가 희박합니다. 정확히 아시는 분이 계시면 댓글로 관련 정보를 부탁드려 봅니다. 국내에는 2010년에 번역 출판 되었고, 현재는 절판된 상태입니다.

우선, 아주 간단히 이 책의 주제를 뽑아 본다면, ˝자본주의는 윤리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능한 우리가 윤리적이 되어야 한다˝는 짦은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이 윤리는 시장에서 사고 팔수 없다는 측면에서 인간이 마땅히 윤리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뒷받침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책의 외형적인 구성면에서는 이 책의 주요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사실상 본문인 1부와 일종의 독자들과의 대담을 수록하고 있는 2부, 끝으로 몇몇 반론에 대한 대답을 요약해 기록한 결론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책 제목과 마찬가지로 본래 가장 중요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1부에서는 오늘날 자본주의에 대한 문제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측면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분석과 그 한계 그리고 윤리라는 가치의 쇠퇴 문제로 야기된 사회적 퇴행에 대해 정치와 경제 전반에서 이를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차원의 경계와 같은 자본주의의 윤리 문제를 빗대어 해석하는 제2장은 독자들이 집중해서 읽어야 하는 부분으로 여겨졌습니다.

18세기 이후, 경제가 인간이 이룩한 국가와 사회에 등장하게 됨으로써, 자유와 더불어 개인주의는 명백히 자본주의와 호응되었습니다. 이 양자는 서로를 떼고 해석할 수 없을정도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요. 후에 4장에서 다루고 있는 이타심과 연대와 관련해, 저자의 분석대로 이 ‘이타심‘이 ‘개인들의 이기심 시대‘ 다소 시대착오적인 단어로 취급되면서 개인주의의 범람에 따른 이타심의 쇠퇴는 사회학적인 측면에서는 그 인과를 부정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기본적으로 ˝어떤 행위가 윤리적일 수 있는 조건은 우리가 각자 아는 것처럼 그 행위가 이해관계를 떠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저자는 진단하고, 현대의 인간들의 사회적 관계가 이 이해관계에 맞물려 있으므로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 자본주의 시스템의 윤리적 이탈을 대신해 우리가 더 윤리적이 되어야 한다는 필요성은 충분히 그 근거를 갖추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또한, 3장에서 저자는 ˝우리 자신은 충분히 윤리적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현재의 자본주의를 거의 봉건제 국가와 다름없다고 여기는 저자의 논법에서는 이런 인간의 윤리 회복은 시민이 법에 대해 갖는 의미와 동일하게 저에게는 꽤 중요한 맥락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우리가 시장과 경제에 갖고 있는 여러 통념들이 자본주의의 모순과 만나서 사실상 이성으로 되돌리기에도 어렵게 견고화되고 있습니다. 어떤 상식 조차도 그것이 규명되기까지는 충분히 비판과 분석이 있어 왔다고 말할 수 있겠는데요. 마찬가지로 저자가 강조하는대로 이 자본주의 시스템 역시 결코 그 체계가 완벽하지 않다는 점과 많은 모순을 안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아야 되지만, 과거 공산주의와의 대결에서 1980년대의 서구 유럽이 자본주의 하에서 생생히 아름답게 보였다는 의미와 더불어 소련의 체제를 역사의 뒤안길로 보냈다는 결과론에 기대어 ‘사실상의 자본주의의 승리‘라는 인식이 현재의 시스템에 어떤 면죄부를 주지 않았을까 하는 인상도 받게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4장에서 구별해 내고자 하는 ‘자유주의자와 극단적 자유주의자‘에 대한 구별이 왜 이렇게 필요한지는 과거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또한, 저자는 파스칼을 곳곳에서 많이 인용하고 있는데요. ˝우리 시대의 몇 가지 우스꽝스러움과 독재에 대한 고찰˝이라는 부제에서도 이를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즉, 4장에서는 이에 대한 특별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파스칼은 ˝나는 강하다. 따라서 사람들은 나를 신뢰해야 한다˝고 말하는 왕, 혹은 ˝내 말이 옳다. 왜냐하면 나는 고용주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고용주도 우습다는 의견을 피력합니다. 흔히 무도한 독재자가 다른 사람의 의견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의지대로 권력을 휘두르면서도 한편으로는, 국민의 사랑과 신뢰를 바라기도 한다는 점은 이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광경이 아닌가 파스칼을 통해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현재의 자본주의에 빗대어 생각해볼 문제이고, 자본주의가 많은 사람들의 신뢰를 잃었던 이면에는 그만큼 자본주의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자 역시 탈자본주의화에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저역시 그 점은 마찬가지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저자의 분석대로 ‘연대‘가 이타심을 소기의 목적에 맞게 재조정하는 과정이라면 우리는 정치와 사회 등 여러 측면에서 연대에 나서야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타심을 철지난 계몽주의 정도로 퇴락시켜버린 어떤 음모론에 제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의 사회에서 자본주의화가 노골적으로 진행시켜 온 그 ‘합리적 이익‘이라는 맹신과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믿음은 이제 그만 역사의 뒤안길로 보낼 필요가 있다는 점은 새삼 강조하고 싶습니다.

끝으로, 저자가 4장에서 강조했던, ˝월스트리트가 주권을 갖는 일은 베제되어야 한다˝는 짧은 문장에 우리가 이를 사소한 것으로 치부해서는 안됩니다. 애초에 많은 정치학자들이 신자유주의자들의 폭거에 반해 시장에서 다시 정치적인 가치를 되돌려 놓아야 한다고 했던 것과 이는 그 궤가 일맥상통하며, 저자 역시 ˝시장이 본래의 자리를 벗어나 왜곡될 경우에는 법의 제어를 마땅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은 앞선 논의의 중요한 근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당위성의 문제이며, 자본주의가 윤리적이 될 수 없음을 인정하고 그 시스템 안에 있는 자본가와 노동자들을 비롯한 구성원들이 거창하게 공리주의적 기조를 손에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최소한의 윤리적인 (이해와 거리가 먼) 문제에 집중해야 된다고 여겨집니다. 이러한 시도가 이어진다면 크게는 전반적인 세계화의 문제와 작게는 인간의 파편화에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4장에서는 지난번에 서평을 썼던 낸시 매클린의 ˝벼랑끝에 선 민주주의˝에서 서술된 미국 엘리트들의 ˝칠레 피노체트 프로젝트˝에 대한 간략한 역사적 서술이 나오고 있습니다. 냉전이라는 특수한 시대를 감안하더라도 자신들의 이익과 관련해서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미국 정치권의 인식은 이처럼 세계 곳곳에 불행한 역사를 초래했습니다.

우리는 비록 민주적 방식으로 태어난 권력이라 할지라도 이 권력에 저항할 수 있고, 심지어 그렇게 할 필요가 있다

개인주의는 명백히 자본주의와 호응한다

주권을 가진 것이 어떤 형태를 띠든지 간에, 그 주권을 가진것으로 하여금 모든 권리를 갖는 것을 금지하는 것은 양심이다

과학주의는 과학이 모든 것을 충족 시킬 수 있기를 희망하는 특히 과학이 윤리를 대체하기를 희망하는 이데올로기이며, 그 자체는 과학적이지 않다

민주주의에서 결정권을 갖는 것은 충분한 지식을 갖든 갖지 않든 다수들이다

순수주의는 야만만큼 위험하고, 어떤 경우에는 야만보다 위험하다

스탈린은 인간의 행복을 위한다는 이유로 수백만의 사람들을 죽음의 수용소로 보냈다

경제, 사회, 정치적으로는 연대가 더 필요하고, 효과적이고, 시급하게 필요한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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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털 엔진 견인 도시 연대기 1
필립 리브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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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브라이튼에서 태어난 필립 리브는 오늘날 뛰어난 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 및 아동 소설 작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앵글리아 러스킨 대학에서 일러스트레이터를 공부하고 이후 브라이튼 대학의 학생 연합 잡지에 만화를 주제로 여러가지 작품들을 그리면서 만화와 일러스트 작업 등에 주목하게 됩니다. 몇몇 책에 만화를 제공하면서 명성을 얻기도 하는데요. 특히, 그런 자신의 진로에 큰 전환점을 가져다 준 작품이 있었으니 바로 지금 소개하는 견인 도시 연대기의 첫번째인 ‘모털 엔진 Mortal Engines 입니다. 따라서, 이 책은 지난 2001년 위의 동일한 제목으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8년 이전에 초도 번역이 이뤄진 것 같은데, 제 능력 부족으로 정확한 서지 정보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읽은 판본은 피터 잭슨의 영화가 개봉한 즈음에 나온 개정판으로 2018년 판본입니다.

앞서, 설명해 드린 바와 같이 이 모털 엔진이라는 작품은 저자인 필립 리브의 ‘견인 도시 연대기‘의 첫번째 장을 장식하는 글입니다. 일단,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도 주문을 하긴 했습니다만, 과연 모털 엔진 만큼의 이야깃거리를 줄 수 있을지 이 시점에서는 약간 걱정이 들기도 합니다. 그만큼 이 모털 엔진이라는 작품이 대단하다고 봐야 할 것 같은데요. 스토리의 구성상 마지막에 드러나는 반전과 꽤 치밀한 스토리 라인의 개연성은 단순한 SF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의미심장했습니다. 사실 이런 류의 디스토피아적인 소설은 작가들에 따라 다소 틀에 박힌 설정과 구성상의 진행이 많이 시도 되었는데요. 그와는 반대로 저자인 필립 리브가 글을 쓰기에 앞서 꽤 많은 시간을 공들여 정치와 사회학의 여러 모티브들을 소설에 녹여낸 점은 칭찬을 해주고 싶습니다.

대략 3000년 전에 있었던 60분 전쟁으로 고대인들이라 불리우는 과거 그 시기의 과학 문명이 절단나고 나서, (아마도 지독한 환경 훼손 때문인지) 이후의 인류가 땅과 대지가 아니라 도시 밖을 나가지 않음으로써, 이 소설의 큰 이데올로기인 ‘도시진화론‘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약육강식의 야만적인 이념으로 이들 주류에 맞서 ‘반견인 도시 연맹‘이라는 땅과 대지에 정착한 반대의 세력이 등장하게 됩니다. 단순히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으로 저자는 양자의 대결을 그리지 않고 맹목적이지는 않지만 거의 도시들의 야만화에 따른 생존의 문제로 이를 그리고 있습니다. 자원과 식량은 나날이 부족해지고, 특히 견인 도시 세력이라 불리우는 움직이는 도시들은 약한 마을이나 도시를 약탈해 이를 근근히 이겨내는 식으로 버텨내게 됩니다. 여기에 작중 (더 큰 악에게 이용되어 반항하지 못하는) 악으로 나오는 밸런타인의 딸인 캐서린이 왜 다른 도시들과 거래나 대화를 통해 이러한 위기를 벗어나려고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밸런타인은 ˝도시진화론은 그런식으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일변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이 소설에는 암울한 우리의 미래도 그려내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에서 말하는 삼권분립과 유사한 일종의 지배체제가 런던에서 보이는데요. 엔지니어 길드-역사학자 길드-상인 길드 간의 삼권의 체제가 첨예화된 계급사회로 이를 떠받들고, 약탈이든 뭐든 간에 쟁취하고 강탈한 달콤한 꿀은 ‘하이 런던‘의 계층만이 온전히 누릴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계급간의 이동은 출신 성분으로 인해 매우 어려우며 이런 구조속에 기술 관료 지배체와 같은 ‘테크노크라트‘의 상명하달의 독재로 도시 전체가 굴러가고 있습니다. 흡사 이것은 우리가 가장 우려하는 ‘과두체제‘와 너무나 닮아있지 않습니까. 더욱이 과거 많은 지식인들이 도덕주의가 일방적으로 결여된 과학 문명의 귀결점에 대해 예측한 바와 같이, 여기에서도 이 길드 지배 체제가 결국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 과거 60분 전쟁 이후, 전 인류가 절멸에 이르게 되었고, 이후 살아남은 생존자들과 그 후손들은 아무래도 권력의 소유물이 되어 도시 전체의 부속품에 지나지 않게 되는 ‘구조적인 합리화‘의 희생양이 됩니다. 사실 이런식의 견고한 디스토피아적인 소설은 찾아보기 힘들텐데요. 그런점에서 작가의 사전 작업이 어떠했는지 어느 정도 짐작할 만했습니다. 그리고 이 테크노크라트가 위력을 발휘하는 연유에는 종래의 기독교 소멸이 한 몫을 했다고 볼 수 있었는데요. 소설 속에는 이미 업적을 남긴 사람을 신으로 받들고 또한 이미 다신교의 분위기였습니다. 이들 각 신전은 이미 정치 권력에 예속되어 있는 상황이었고, 전체적으로는 종교가 이들 계급 정치에 자정 기능을 하지 못하는 실정이었습니다.

더욱이, 두 주인공인 톰과 헤스터의 성장에 이르는 과정은 특히 주목할 만했는데요. 여기에 캐서린까지 더하면 세계의 숨겨진 진실을 찾아가는 이 어린 아이들의 발걸음과 톰과 같이 사뭇 갈등하면서도 자신이 해야할 일을 명백히 인식하고 깨닫게 되는 길 또한 관심을 갖고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주인공 톰은 본디 내면의 나약함과 주저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평범한 소년이었으나, 행로중에 여러 인물들과 흔치 않은 경험을 하면서 자신의 길을 찾아 가는 훌륭한 인물로 성장하게 됩니다. 다만, 톰의 부모님에 대한 사건이 뭔가 복선으로 나타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시장에 의해 약간 언급만 되는 것으로 그치고 마는데요. 다음 권이나 다다음 권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끝으로, 추천의 글을 쓴 홍인기 교수는 ˝심지어 신자유주의의 격류에 휩쓸려 파편화되어 가는 삶을 힘없이 응시하고 있는 한국의 소설가들에게도 들이밀고 싶다˝고 추천사 마지막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일찍이 마르셀 프루스트가 ˝인간은 마땅히 대지위에 발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는 말을 스쳐지나갈 뿐이라고 생각해도 이것의 의미는 명확합니다. 어떤이들이 그렇게 부르짖는 자유 역시 오롯한 인간의 결정으로 남겨놓아야겠죠. 보이지 않는 손이라든지 합리적인 계산이라든지 정치 없는 시장이라든지 이런것들은 도리어 인간을 파편화에 던져버리고 말았으니, 적잖은 경제엘리트들이 자신들의 손으로 정치까지 좌지우지해 사실상의 민주주의를 파괴하려고 하는 시도에 소설이든 뭐든 나서야 하지 않을까요.


-글 본문인 121페이지에 주인공 톰을 통해 약간 인종차별적인 문장이 보였는데 번역상 오류인지 아니면 제가 문맥상 잘못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약간 아쉬운 부분이라 느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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